세상과 문화 읽기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 온 몸으로 예수를 보여주고 싶었던 그녀 한평생 ‘조선 어머니’로 살았던 독신 여선교사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신었던, ‘조선인처럼’ 아니 ‘조선인’으로 살았던 여선교사 서서평. 독일태생인 그녀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쉐핑(1880∼1934)이다. 작은 밀알이 되어 상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독신의 몸으로 낯선 땅 조선에 와서 죽는 날까지 평생을 헌신한 그녀는 미국 남장로교단이 선정한 전세계 ‘가장 위대한 여선교사 7인’ 중 한 명이다. 조선에서 간호사를 양성하고 여성 계몽을 이끈 교육자, 죽는 날까지 섬김의 삶을 보여 ‘작은 예수’라 불렸던 서서평 선교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1년여의 제작을 마치고 개봉을 앞두고 있다. 서서평 선교사는 1880년 독일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할머니 손에 자란 그녀는 12살이 되던 해 자신을 두고 떠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시립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서서평은 가톨릭에서 기독교로 개종하고 신학교 졸업 후 광주 제중원 우월순 선교사의 요청으로 1912년 조선에 도착했다.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 처한 조선을 보고 가슴 치며 울었던 서서평 선교사는 조선에서 의료 활동을 전개하며 간호사 양성에 나섰다. 또 사회에서 천대를 받던 여성을 위해 교육을 시작했다. 자신의 안방에서 시작된 교육은 한국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현 한일장신대)의 모태가 됐다. 의료 사역자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던 그녀는 교통수단이 없던 당시 조랑말을 타고 다니며 오롯이 복음전파에 힘썼다. 특히 제주도에 애정이 커 제주도를 오가며 사경회를 직접 인도했다. 광주 및 제주에 부인조력회를 창설하는가 하면 교회에 성미제도를 최초로 만들었다. 서서평 선교사의 사역에 있어 구제는 빼놓을 수 없이 중요했다. 그녀는 13명의 고아 여자 아이들과 한센인의 아들 한 명을 입양했고, 전남 곳곳을 돌며 한센병 치료에 헌신했다. 조선 땅에서 22년 간 헌신했던 그녀는 늘 질병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자신보다는 언제나 조선인을 돌보는 일이 먼저였다. 그러다 1934년 ‘스루프’라는 일종의 만성흡수불량증과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녀의 장례 행렬이 있던 날, 수천 명의 광주 시민들과 한센병 환자들은 “어머니”라고 외치며 오열했다. 한평생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며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눴던 그녀가 남긴 유품은 담요 반 장, 동전 7전, 강냉이 가루 2홉이 전부였다. 그리고 자신의 시신마저 의료 연구를 위해 써달라며 광주 제중원에 맡겼다. CGNTV가 한국과 독일, 미국을 오가며 촬영한 이 영화는 독일인 윤안나(한예종 석사 과정)가 서서평 선교사 역을, 배우 하정우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기독인이 아니어도 조선을 위해 살아간 한 여인을 통해 진정한 사랑과 나눔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영화가 끝나면 하정우의 내레이션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 것이다. “온몸으로 예수를 보여주고 싶었다. 천천히 평온하게 살고 싶었던 한 사람. 몹쓸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난 선교사, 서서평. 그렇게 우리는 예수를 만났다” ▶제작 : CGNTV/ 감독 : 홍주연, 홍현정/ 개봉일 : 4월 26일/ 배급 : 커넥트픽쳐스(010-8895-4696)
  • 2017.04.16 / 오정선 기자

    대기근에서 살아나게 하시는 섭리
  • ‘해(害)를 선(善)으로’ 바꾸시는 역사를 소망하라 얼마 전 나라를 심히 걱정하는 지인으로부터 칼럼을 휴대폰 문자로 받았다. 누구의 글인지는 모르겠지만, 1945년 8월 일본의 9대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조선을 떠나면서 남긴 ‘유명한 말’을 인용한다고 했다. 그 내용은 대충 이렇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그러면서 국제정세와 변화에 눈이 먼 채 이전투구를 벌이는 국내정세를 자책하는 내용이었다. 필자는 그 글을 읽으면서 성경적인 시각, 섭리의 시각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먼저 노부유기의 말이 사실이라고 할 때 그의 지적과 통찰력은 비슷하게 맞는 부분도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한 부분도 있다. 구한말 때의 조선은 미국 선교학자 포스터의 말대로 열강의 먹잇감으로 최적인 ‘나봇의 아름다운 포도원’이었다. 열강의 변화와 침략야욕에 대처하지 못하고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었던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그 유산이 현재까지 남아있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마지막 총독’이라는 사람이 모르는 ‘노예의 섭리’가 있다. 바로 노예였던 요셉의 위대한 승리의 기록을 현재 한국교회와 1000만 성도가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편 105편 17절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애굽에 팔려간 것은 ‘앞서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노예 출신으로 제국의 총리가 되어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기근의 위기를 맞았던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한 마디로 창세기의 저자 모세는 그의 삶을 이렇게 조명한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19∼20) 창세기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난다. 신의 창조로 시작해서 인간의 죽음으로 끝난다. 인간의 원죄에 대한 창조주의 심판과 저주로 시작해서 신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은혜와 용서로 끝난다. 현재 대한민국은 대기근의 절체절명의 기로에 놓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 경쟁력, 국가 브랜드, 국격 등 총체적 추락이다. 포기세대와 헬조선으로 표현되는 나라, 첨예한 이념 갈등, 평화와 통합의 상실 등으로 고통 받는 형국이, 대기근 앞에 놓여 있는 노예 같은 모습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러나 대기근 앞에 놓여 있는 대한민국이 사는 길, 창조주의 은혜에 있다. 하나님은 노예가 받은 해를 영광의 선으로 바꾸어 주신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 고난과 부활의 섭리를 묵상하며 기도하자. 김상길 목사<개척담당>
  • 2017.03.19 / 오정선 기자

    교회 목표·표어 보면 세상 이길 능력 보인다
  •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증거의 아쉬움을 체험했다. 헬라문화에 능통했고, 로마시민권을 보장받았으며, 유대종교 가문의 적통을 자부했던 그였기에 ‘아덴정벌’은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사도행전 17장 34절에 보면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 하여 믿었다”는 기록이 있다. 친분 때문에 몇 사람만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이다. 요즘 우리말로 하면 체면을 구긴 셈이다. 아덴의 우상이 가득한 것에 격분하여 열정을 토한 바울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대정벌에 실패한 바울은 아쉬움을 안고 고린도로 간다(행 18:1). 고린도문화의 세상 풍조는 아덴문화 이상이었다. 사도 바울의 이런 심경을 잘 나타낸 기록이 고린도전서 2장 3절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도다” 고린도 문화 위세에 크게 눌렸다는 말이다. 당시 고린도 문화의 특징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헬라문화가 그렇듯 정치 중심의 문화다. 정치가 발달했다는 것은 삶의 방식이 다양하고 복잡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상업도시로 향락문화가 번성했다. 거기에다 아프로디테 신전이 위용을 자랑할 만큼 종교적 타락이 있었다. 또한 스포츠 문화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아덴의 딜레마를 극복하고 고린도를 정벌한다.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도행전 18장과 고린도전서 2장 1절에서 5절에 잘 나타나 있다. 절망의 밤에 환상과 말씀을 체험한 영적인 변화였으며 십자가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 결과였다. 위기가 바울을 영적으로 단련시켰던 것이다. 바울은 알았다. 인간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 쓸데없고(고전 2:1),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도 허탄하다는(고전 2: 4) 것을 알았다. 그가 확신한 것은 오직 십자가의 능력과(고전 2:2), 성령의 능력(고전 2:4∼5)이었다. 이것은 하늘나라의 가치, 절대가치였다. 환상 가운데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행 18:10)는 주의 음성을 들은 그는 고린도에서 아덴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는 가운데 기념비적인 교회를 세운다. 절대가치는 없고 영토, 이념, 종족, 성, 세대를 아우르자는 물결이 포스트모던이즘이다. 그리고 물질과 향락을 추구하는 것이 요즘 세상 풍조다. 어쩜 고린도문화와 요즘 문화가 이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는지. 세상 문화를 어떻게 이길 것인가. 이런 세상 문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2017년 교회 목표와 표어가 그 해답이다. 교회 목표 첫 번째가 성령 충만이고, 두 번째가 기도와 말씀이며 세 번째가 십자가 사랑실천이다. 그런가하면 표어가 바로 바울의 고린도정벌의 배경이 된 고린도전서 2장이다. 인간의 능력이나 외적 조건, 아름다운 수식의 지혜로운 말이 아닌 오직 십자가의 능력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흔히 교회 목표는 연중, 일년 안에 해내면 된다고 착각한다. 아니다. 교회 목표는 매일 그날에 이루어야 한다. 표어도 그날에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지금은 매일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실제상황이다. 매일매일 전개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여기에 있다. 김상길 목사<개척담당 부목사>
  • 2017.02.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삼갈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해
  • 샛길인생 힘차게 믿음 안고 나서야 미국 베이스의 컬러 컨설팅 업체 펜톤(Pantone)은 2017년 ‘올해의 컬러’로 ‘초록’(Greenery)을 선정했다. 매년 그해의 색깔을 발표하는 펜톤은 올해 과거의 암울한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마음을 정화시켜주고 생명을 일깨워주는 색깔로 초록을 선정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희구의 컬러’를 정해도 남루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울한 상황과 심리를 제하고 푸르른 생명을 주실 분도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우리가 내일의 꿈을 갖고 한 해를 출발하는 이유도 여기 믿음의 근거에 있다. 사사기에 보면 사사의 정체성,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사사가 등장한다. 3장 31절 단 한 줄로 위대한 사역이 소개되고 있는 ‘삼갈’이다.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런데 그 다음 표현이 심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그도’라는 표현은 바로 전대의 사사 ‘에훗’을 상기하는 말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삼갈 같이 근본도 없는 사람도’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사는 왕정시대 직전 많은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은 공동체의 운명을 이끌고 가는 지도자였다. 나라의 안위가 그들의 리더십에 달렸다. 사사의 등장에는 지파의 배경이 따른다. 에훗은 베냐민 지파였고(초대 왕 사울도 베냐민 지파였다), 삼손은 단 지파,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였다. 삼갈은 지파의 배경이 없다. 그러나 신분이 불투명한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인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삼갈이 살던 때 블레셋 사람들의 포악한 군림이 얼마나 심했던지 큰 길에 행인들이 없었다. 사사 드보라의 노래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오솔길로 다녔도다”(삿 5:6). 사람들은 블레셋의 횡포를 피해 샛길로 다닌 것이다. 큰 길로 나서지 못하고 떨리는 마음을 겨우 달래며 발자국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삶. 그 아픔을 아는가. 어쩌면 대한민국은 작년 ‘샛길국가’였는지도 모른다. 그 뿐인가. 개인적인 삶에도 샛길인생이 있다. 샛길로 다녀야만 하는 고달픈 삶도 있다. 샛길로 다녀본 사람만이 샛길의 아픔을 안다. 그 캄캄한 삶의 고통을 안다. 그런데 삼갈은 첨단 무기, 예리한 병기가 아닌 소 몰던 막대기로 블레셋의 횡포를 저지할 뿐 아니라 600명이나 처치한다. 초월적인 승리, 성과였다. 삼갈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쓰시니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결과다. 그래서 사사기는 기록한다.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고. 새해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샛길인생을 들어 위대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암흑 가운데 있는 샛길인생에 빛이 되신다. 사사기 5장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야훼여 주의 원수들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해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 하나님은 샛길인생에 힘찬 해가 돋게 하신다. 영원한 컬러는 인간이 만든 초록이 아니라 믿음이다. 김상길 목사(개척담당 부목사)
  • 2017.01.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벽증후군의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
  • 최근 국민정서…‘수치’ ‘분노’ 하나님 공의 흐르는 대한민국 위해 중보 최순실 게이트로 대한민국 호는 격랑에 휩싸였다. 난파선이 될 것인가, 구조선과 함께 새출발을 할 것인가 기로에 놓여있다. 촛불집회에서 한영애가 부른 노래 ‘조율’은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계속 반복되는 메시지는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주세요”였다.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에 휩싸여 난파 직전에 있던 절체절명의 제자들의 호소가 오버랩 된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 8:24∼25). 최근 국민정서를 대변하는 말은 ‘수치’와 ‘분노’일 것이다. 한류로 상징되던 대한민국의 상승은 이제 국제적 조롱거리가 되었다. 외신들은 “이런 수준이하의 나라에서 어떻게 K-POP이 나올 수 있겠냐?”고 꼬집는다. 가장 심각한 것은 경제다. 지난 4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11월 소비자 심리지수는 95.8로 급락했다. 3년 연속 2% 침체기를 겪는다고 분석했다. 경제주체 심리가 얼어붙다 보니까 소비절벽, 투자절벽의 우려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때도 없었던 2% 저성장 빙하기다. 그런데다 기업인들의 국정농단 청문회 소환으로 경제는 더 큰 절벽을 맞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절벽증후군 현상은 공동체 앞에 총체적으로 전개된다. 지금 우리는 아득한 절벽 앞에 놓여 있다. 정말 죽게 되었다. 그러나 탈무드에는 이런 말이 있다. “무덤이 보이면 마을이 가깝다”고. 열매는 꽃이 진 자리에서 맺힌다. 강연호 시인은 “잘못된 길이 지도를 만든다”고 노래했다. 밀가루는 깨어진 곡물에서 나온다. 정금은 단련한 뒤에 탄생한다. 우리는 긍정적으로 보고 모든 잘못된 것을 청산하고 새로워져야 한다. 최근 고통스러운 나날은 대청소 특별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꿈을 갖자. 대청소 기간에는 조용할 수가 없다. 치울 것은 치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파열음이 나올 수밖에 없고 상흔도 입게 된다. 온갖 먼지를 다 뒤집어 써야 한다. 치우다 보면 구석에 있던 오물도 대량으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다 치워야 한다. 만신창이가 된 유다 공동체를 향해 선지자는 외친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 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사 1:6∼8) 기도는 역사를 바꾼다. 역사의 주관자요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새롭게 해주실 것이다. 12월은 한국교회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기간이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총체적으로 바꾸어주실 것이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의 의의 나무 곧 야훼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3) 국가혼란기인 호세아 선지자 시대, 고난으로 찢긴 역사 앞에서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는 은혜에 관해 선지자는 외친다. “오라 우리가 야훼께로 돌아가자 야훼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야훼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이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야훼를 알자 힘써 야훼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1∼3)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부르시고 세워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기도하고 불의한 모든 것을 청산하면서 나아간다면 분명 화가 복이 될 것이다. 우리는 꿈꾸면서 기도하자.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정결한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간절히 외치자. 고통은 의(義)를 찾는 계기가 된다. 사무엘은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쉰다면 그것도 죄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을 생각하라고 강조한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야훼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 12:23∼24)
  • 2016.12.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그들이 이 땅을 떠나지 않고 남은 이유는 바로 ‘순종’
  •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 12장 15절) CBS 1년 6개월 제작한 다큐 영화 연말 개봉 우간다 내전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딩기디 마을. 반군에게 부모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던 아이들은 트라우마로 심한 발작을 일으킨다. 이들을 사랑으로 보살피는 사람은 한국인 김은혜 선교사다. 딩기디 마을 사역은 김 선교사의 부친인 고 김종성 목사로부터 시작됐다. 내전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우간다 난민을 위해 딩기디 마을을 만든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딸 김은혜 선교사는 이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현재 남편 한성국 선교사와 함께 딩기디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민들과 교류하며 산다. 김은혜 선교사는 아버지가 특히 아꼈던 소녀 플로렌스에게 애착을 느낀다. 한쪽 눈에 종양을 앓던 플로렌스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치료를 받아 증상이 완화된 소녀다. 살아생전 가족들을 가난의 굴레에 던져놓은 채, 딩기디 마을 사람들을 보살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지우지 못했던 김은혜 선교사는 딩기디 마을을 통해 ‘순종’의 의미를 깨달아간다. 한편, 중동 테러단체 IS의 주민학살 등 온갖 만행에 견디다 못해 레바논으로 탈출한 알리는 세상과의 문을 닫고 헤어진 엄마를 그리워하며 힘겨운 하루하루를 지샌다. 상처받은 난민친구들과 함께 모여 살던 알리는 한국의 김영화 선교사를 만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점차 마음을 열고 변화되기 시작한다. 난민들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족인 김영화 선교사는 내전으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난민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고, 매일같이 그들의 마음을 두드린다. 그를 통해 우리는 ‘순종’의 진정한 의미를 서서히 배워간다. 영화 ‘순종’은 CBS가 1년 6개월간 취재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다. 선교사들의 삶과 신앙을 통해 ‘순종’의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만든 영화는 CCM 사역자 송정미 사모가 OST 작업에 참여했고, 탤런트 최수종과 최강희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영화 ‘순종’은 올 연말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어 기대된다. ◎ 다큐멘터리 2016.11.17 개봉 88분, 전체관람가, 서울·대한극장외 전국 상영. 오정선 기자
  • 2016.12.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혼자 됐을 때
  • “하나님과 대면하는 기회로 삼아야” 사람들은 외로움을 잊고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한다. 그리고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서도 쉴 새 없이 교류하며 세상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끊임없이 관계를 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중 속에서 외로워하고 불안해한다.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시공을 초월한 만남의 경로는 다양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허전하고 외롭기만하다. 하지만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혼자 있는 능력’이다. 창세기 32장 24절에서 야곱은 혼자가 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가 무리를 끌고 자신을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두려움에 자신의 가족을 먼저 보낸 후 혼자가 됐다. 야곱이 혼자가 된 그때, 그의 삶은 변화 됐고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났다. 모세도 호렙산에서 혼자되었을 때 하나님을 만났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고 야훼의 사자가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 메시지를 전해 준 것이다. 사도 바울은 혼자서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헤매었다. 그 시간동안 그는 엄청난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독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의 큰 능력을 받고 위대한 복음 증거자가 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외치던 제자들이 떠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셨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달라는 기도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혼자 있을 때야 말로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할 때인 것이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 재조명을 해야할 것이 있다. 첫째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체험했다. 혼자되었을 때 정체성을 갖지 못하면 나중에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혼자일 때 우리의 정체성을 깨달아 우리가 축복의 사람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임할 것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 둘째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하나님을 믿으면 사명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셋째 우리는 혼자되었을 때 꿈을 가져야 된다. 터널 안에서는 어둠에 집중하지 말고 출구에 집중하라는 말이 있다. 출구라는 건 꿈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위대한 꿈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우리 앞에 큰 능력을 베풀어 주신다. 우리가 의지 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예전에 한 목사님을 인터뷰하며 은혜 받은 일이 있다. 질병 가운데 교회 개척을 하는데 너무 힘들어 선배 목사님을 찾아가 도움을 구하니, 설교를 부탁하셨다. 기대하고 갔더니 선배 목사님이 설교를 다음 달로 미루셨다. 다음 달 갔더니 목사님이 다시 다음 달 오라고 했다. 두 달 후에 갔을 때 마침내 설교를 하게 됐다. 선배 목사님이 ‘골방 가서 기도하고 있으라’고 해서 골방에 갔는데, 갑자기 서러움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눈물로 기도하는 가운데 시편 56장 8절 말씀이 떠올랐다. 그래서 준비해온 설교를 치우고 골방에서 받은 말씀을 가지고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그날 성도들이 많은 은혜를 받고 눈물바다가 됐다. 선배 목사님의 도움과 헌금으로 지금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혼자되어 철저하게 고독하게 되고 그 안에서 받은 말씀이 교회의 기틀이 되었듯, 혼자되었을 때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능력을 체험할 때다. 김상길 목사<개척담당 부목사>
  • 2016.1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폐가입진(廢假立眞)
  • 가짜 같은 진짜, 진짜 같은 가짜 최근 들어 성경이나 기독교적인 내용을 배경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붐이 일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2004년 작 패션오브크라이스트(예수님의 수난)를 비롯하여 이집트 왕자(애니메이션), 선 오브 갓,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벤허까지 많은 기독교 영화들이 개봉했고 또 개봉하고 있다. 특별히 <벤허>는 루 월리스 장군이 쓴 베스트셀러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1959년에 개봉한 영화 벤허를 리메이크 한 작품이다. 이번 영화는 기독교 영화를 표방하여 일반 관객들뿐 아니라, 기독교인 관객들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교계언론 등에서도 새로 개봉하는 벤허에 대한 관심 끌기 기사들이 많이 실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막상 개봉한 2016 벤허는 원작 소설이나, 1959년 작 벤허에 비해 기독교적인 메시지도 많이 축소되었고, 예수님이 등장하는 장면들도 영화 속 내용 중 상당히 미미하게 그려지고 있다. 오히려 액션신이나 벤허의 백미인 마차 경주신과 같은 상업적인 영화적 요소만 많이 부각되어 영화를 보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기독교 영화인가?” 하는 의심을 갖게 만들 정도이다. 벤허 뿐만 아니라, 근래에 개봉했던 많은 기독교 영화를 표방한 작품들이 사실은 기독교 영화라기보다 기독교의 모티브를 차용한 영화로써 제작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었다. 성경에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들이 있고, 이를 그저 빌려 씀으로써 겉옷은 기독교의 옷을 입은 상업적인 영화가 만들어 지곤 하였다. 20세기 뛰어난 기독교 지성으로 불리었던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도 몇 년 전에 영화화되어 개봉했지만 역시 원작의 기독교적인 내용들은 거의 빠지고, 단지 뛰고 싸우는 가족 액션 영화로 전락하였다. 이것은 마치 ‘진짜 같은 가짜’라고 해야 할까, 흥미롭고 신비한 모습의 기독교 모티브를 입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기독교적이 아닌 상업 영화들을 볼 때,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경 속에는 이와는 반대로 ‘가짜 같은 진짜(?)’가 많이 존재한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믿음의 인물들이 그러하고, 예수님도 그러하시며, 또 위대한 복음 전도자 바울도 모두 가짜 같은 진짜들이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엔 별볼일 없어 보이기도 하고, 흠도 있으며 때로는 어리석게 보이기도 한다. 기도의 용사 다니엘은 어리석게도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고 목숨을 걸고 사자굴 행을 선택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는 미련하게도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여 있는 유목민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위대한 복음전도자 사도바울은 고생을 어찌나 많이 했던지, 심지어 성경에 자신이 얼마나 고생 했는지를 자랑하는 대목이 나올 정도이다. 그들은 모두 겉으로 보기엔 약하고 부족한, 가짜들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런 그들은 모두 진짜들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살아계신 하나님, 구세주 예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은 우리의 소유나 직함이나 겉모습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우리의 허물과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도 사람이기에 때로는 겉으로 드러난 외모, 겉으로 드러난 소유, 겉으로 드러난 외형에 눈이 갈 때가 있다. 얼마나 좋은 차를 타는지, 또 어떤 집에 살고, 연봉은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많은 높은 지위의 사람들과 친분이 있는지에 관심을 가질 때가 있다. 스스로를 평가할 때는 물론 다른 사람들을 볼 때도 그렇게 겉으로 드러난 것들에 현혹되어 진짜 참된 것은 못 보게 되는 것이다. 옛 고사 가운데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말이 있다, 고려의 수문하시중이었던 이성계가 창왕(昌王)을 폐하고 왕족 종실 출신의 공양왕(恭讓王)을 군주로 추대하여 고려왕실의 정통성을 확보한 사건으로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뜻이다. 폐가입진(廢假立眞), 옛 선조들의 삶과 얼이 담긴 격언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진짜 같은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요란한 포장과 현란한 겉치장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도 침투해 들어왔다.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구별하기 어려운 회색지대와도 같은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 우리는 겉모습에 속지 말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흔들리지 말고 더 깊고 더 은밀한 곳에 계신 우리 주님께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작은 소자 한 사람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손길로 내 주변에 힘들어 하는 사람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 예수님의 입술로 “잘 하고 있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하고 한마디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 이것이 바로 작고 하찮아 보이는, 하지만 진짜 중의 진짜인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나누는 것이다. 김형효 목사(목회비서실 홍보부장)
  • 2016.10.0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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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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