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Think! 인생 Thank!
 디지털에 온기를, 3월에 ‘하이터치’를!
  • 기술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밀도 차가운 알고리즘을 녹이는 예수님의 따스한 손길 평소 책 한 권 읽지 않던 아들이 웬일인지 고전(古典)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인공지능(AI)을 전공하는 아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 AI는 질문하면 답은 참 유려하게 해주거든요. 그런데 제 마음을 움직이거나 뜨겁게 하지는 못하더라고요. 그런데 이 오래된 책들을 읽어보니 수백 년 전 사람들도 저랑 똑같은 고민을 했더라고요. 그 대답들이 제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이제부터 책을 좀 읽어보려고요.” 아들은 차가운 알고리즘이 채워줄 수 없는 ‘공감의 온기’를 책에서 발견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AI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단순히 기도문을 작성하거나 이미지를 생성하는 기능적인 접근만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도, 영혼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기술이라는 차가운 그릇에 우리가 담아야 할 것은 결국 ‘사람을 향한 진심’이기 때문이다. 1. 척박한 땅에 내린 ‘디지털 눈송이’: 필리핀 사역 현장 지난 1월 섭씨 30℃를 웃도는 필리핀 클락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현지 신학생들과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목격한 AI는 단순한 편리함의 도구가 아니라, 복음의 지경(地境)을 넓히는 강력한 영적 무기였다. 전력 공급조차 불안정한 환경이었지만 기술(High-Tech)은 그들의 순수한 신앙을 더욱 입체적으로 꽃피우게 했다. 아이들의 사진을 AI로 편집해 산타클로스 복장을 입히고 하얀 눈이 내리는 배경으로 바꿔주었을 때 아이들의 눈동자에는 경이로움과 기쁨이 가득 찼다. 기술이 문화와 환경의 벽을 허물고 관계의 거리를 좁히는 ‘사랑의 도구’가 된 순간이었다. 기술에 사역자의 따뜻한 관심이 담길 때 차가운 디지털 인터페이스는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2. 베드로를 만나고 부활을 그리다 2월 한 교회에서 진행된 AI 사역 훈련은 ‘체험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준 현장이었다. 성도들은 부활절의 의미를 AI와 함께 묵상하며 각자의 마음속에 그려진 부활의 이미지를 형상화했다. 훈련의 하이라이트는 성경 인물인 ‘베드로’를 AI로 소환해 대화하며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배반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선 베드로의 고백을 자신의 언어로 정리하며 성도들은 깊은 눈물과 간증을 쏟아냈다. 기술을 통해 성경 인물과 인격적으로 마주한 성도들은 스스로가 먼저 영적으로 회복되었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콘텐츠들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훌륭한 전도 도구가 되었다. 하이테크가 소외된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가장 낮은 징검다리가 된 셈이다. 3.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교회학교: 여의도순복음교회 3월부터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교회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AI 교육이 시작된다. 다음 세대인 아이들에게 하이테크는 공기와 같다. 아이들이 직접 우리 반의 로고송을 만들고 그날 받은 말씀의 핵심을 AI 이미지로 생성하며 친구들과 공유하는 활동은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높여준다. 텍스트로만 존재하던 말씀이 아이들의 손끝에서 노래와 그림으로 탄생할 때 예배는 살아있는 축제가 된다. 교사들이 AI를 활용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하이터치’ 할 때 우리 아이들은 교회를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행복한 공동체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4. 예수님의 심장을 전하는 거룩한 통로 2000년 전 예수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능히 치유하실 수 있었지만 굳이 소외된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고 보지 못하는 자의 눈을 부드럽게 어루만지셨다. 그 ‘터치’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의 확증이 담겨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이라는 바다 위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기술의 종착지는 결국 ‘사람의 마음’이어야 한다. SNS에 올리는 말씀 한 구절, AI로 정성껏 만든 찬양 링크 한 줄은 단순한 데이터 전송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메마른 영혼을 적시는 신선한 생명수이며, 주님의 뜨거운 심장 소리를 세상에 전달하는 통로다. 온라인(On)에서도, 오프라인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흐르게 하는 것이 바로 ‘온(On)전한 사역’의 핵심이다. 우리의 기술이 단순한 도구를 넘어 예수님의 사랑을 실어 나르는 따뜻한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Think! ---------------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인간의 깊은 고민을 만져주는 인문학적 감성과 복음의 온기가 더욱 절실해진다. Thank! -------------- AI라는 도구를 통해 성도들의 마음을 더 깊이 어루만지고 예수님의 사랑을 창의적으로 전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6.03.06

    거룩한 상상력, ‘델룰루’가 일으키는 믿음의 기적
  • 세상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넘어 하늘에 뿌리내린 ‘거룩한 상상’으로 현실의 벽을 넘게 하는 믿음의 시선 우리는 종종 세상이 제시하는 수치와 조건 앞에서 스스로를 제한한다. “지금은 때가 아니어서”, “경험이 부족해서”,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서”라는 말로 가능성의 문을 미리 닫아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시도조차 하기 전에 한계를 학습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이 계산법을 벗어난다. 자식이 없던 노년의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장막 밖으로 이끄셨다. 그리고 밤하늘 가득한 별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약속하셨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말씀이었지만,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바라보고 신뢰했을 때 이미 기적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가 품는 ‘거룩한 상상’은 나의 능력이나 긍정적 사고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의 근거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는 고백처럼, 믿음은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를 현재의 현실로 바라보는 눈이다. 입술의 고백으로 앞당겨지는 미래 요즘 말하는 ‘델룰루’의 핵심은 마치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고 살아가는 태도다. 흥미롭게도 이 개념은 성경의 창조 원리와 맞닿아 있다. 하나님은 빛이 존재하기 전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은 하나님을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라 고백했다. 우리는 흔히 상황이 바뀌면 감사하겠다고 말한다. 문제가 해결되면 믿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아무 변화가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고 감사하라는 것이다. 응답을 확인한 후가 아니라, 응답을 믿으며 드리는 감사와 선포 속에서 우리의 삶은 새로운 질서를 입기 시작한다. 거룩한 상상은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입술의 고백을 통해 삶 깊숙이 스며든다. 흔들리지 않는 천국 소망 2026년의 삶 역시 여전히 불확실하다. 노력한다고 해서 결과가 보장되지 않고, 미래는 여전히 안개 속에 있다. 그럼에도 성도는 이 땅의 현실이 전부가 아님을 아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우리의 삶이 때로는 비현실적인 낙관, 혹은 ‘거룩한 망상’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상상이 있기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실패 위에서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성도의 ‘델룰루’는 자기 암시가 아니라, 반드시 도달하게 될 하나님 나라라는 확실한 결말에 뿌리를 둔 소망이다. 함께 꿈을 그려주는 공동체 그렇다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역의 현장과 일상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서로의 미래를 함께 그려주는 마음이다. 낙심한 이에게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라고 말해주는 것. 세상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가장 정확한 진실이다. 서로의 상처 너머에 숨겨진 가능성을 먼저 발견해주고, 믿음의 언어로 격려하는 일이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롬 8:24)라는 말씀처럼, 보이지 않기에 더욱 붙들어야 할 소망이 있다. 세상의 상상은 근거가 없을지 모르지만, 성도의 상상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반석 위에 서 있다. 아직 매서운 2월의 추위 속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품고 기분 좋은 ‘거룩한 상상’을 시작해보면 어떨까. 현실의 소음보다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에 조금 더 귀를 기울여보자. 믿음으로 그려낸 그 그림들은 머지않아 삶의 자리에서 응답의 열매로 피어날 것이다. ※ 델룰루 : 영단어 delusional(망상적인)에서 유래된 신조어로, 실제 사실이 아니지만 본인의 선택으로 믿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Think! ---------- 오늘, 하나님 앞에서 내가 새롭게 그려야 할 ‘거룩한 상상’은 무엇인가? Thank! ---------- 현실 너머의 실상을 보게 하시고, 믿음의 고백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6.02.06

    서울·자가·대기업보다, 베들레헴
  • 모두가 오르려 할 때 예수님의 내려오심 성공의 자리보다 사랑의 자리로 옆자리 직원이 “수지자가대기업배부장입니다”라고 말하기에 ‘그게 뭔 소리야?’ 하고 웃었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제목이 〈서울자가대기업김부장〉이라 했다. 제목만 봐도 이 시대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서울’은 기회의 상징, ‘자가’는 안정의 상징, ‘대기업’은 부와 권력의 상징, 그리고 ‘김부장’이라는 이름은 사회적 성공과 인정의 표식처럼 들린다. 많은 이들이 믿는다. “올라가야 성공이고, 오르지 못하면 실패다.” 하지만 12월, 우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는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가장 낮은 자리인 베들레헴 마굿간에 오셨고 사람의 옷을 입고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오셨다.’ 김부장의 자리, 예수님의 자리 세상은 말한다. “높이 올라야 산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낮아져야 크다.” 예수님의 첫 요람은 금빛 요람이 아니라 초라한 여물통이었다. 그분은 왕궁이 아닌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그분의 첫 손님은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목자들이었다. 드라마 속 ‘김부장’이 지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도 종종 신앙마저 성과와 위치로 평가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타이틀을 보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는가를 보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머리로 아는 복음, 삶으로 잃은 복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권력의 반전이었다. 왕이신 분이 제자의 발을 씻기신 것이다. 그분은 실제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무릎을 꿇으셨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머리의 지식으로만 남아 있을 때가 많다. 예배에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래도 나는 올라야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내려오셨고, 우리는 여전히 오르려 한다. 그래서 복음은 머리로는 아는데 삶에서는 사라진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낮아짐 속의 진짜 능력 예수님은 세상의 방식으로 성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고 제자에게 배신당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홀로 남으셨다. 그러나 바로 그 낮아짐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었다. 예수님은 권력으로 세상을 바꾸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랑으로 세상을 품으셨다. 그분의 낮아짐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고, 그분의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용서였다. 우리는 종종 “강해야 산다”고 믿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크리스마스, 내려놓음의 계절 크리스마스는 축하의 날이 아니라 내려놓음의 계절이다. 내가 쥐고 있던 자랑과 불안, 비교와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다시 서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부요함을 버리고 가난한 자로 오셨으며 강함을 버리고 약함으로 오셨다. 그분의 내려옴이 있었기에 우리의 구원이 가능했다. 이제 우리의 신앙도 그분을 따라 내려와야 한다. 사람 위에 서는 자리보다 사람 곁에 서는 자리로, 칭찬받는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로, 그곳에서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 누군가에게 먼저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일 - 외롭고 힘든 이웃에게 작은 선물을 나누는 일 - 가족에게 “고마워”라는 말을 먼저 하는 일 - 내 주장 대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 혹은 오랫동안 미루었던 용서의 한마디를 건네는 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베들레헴의 예수님을 닮아 이 땅에서 실천할 수 있는 ‘내려옴의 복음’이다. Think! 나는 예수님처럼 내려올 용기가 있는가? 복음이 내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이 되고 있는가? Thank! 주님, 높아지려는 마음을 비우고 베들레헴의 예수님처럼 낮아진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12.14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
  • 경직된 신앙에서 벗어나, 일상 속 놀이를 회복하는 길 자연·문화·공동체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웃으며 살기 11월이면 사람들은 단풍을 따라 나서고 모임 약속이 많아진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논다’는 말은 왠지 죄스러운 단어처럼 들릴 때가 있다. 예배와 교회 모임 외에는 다른 여유를 누리기 어렵고 신앙이란 ‘참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시지 않았다. 신앙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웃는 자유의 길이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유희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라고 불렀다. 그는 놀이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어 내는 창조적 힘이라 했다. 놀이는 마음을 가볍게 만들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며 관계를 풍성하게 한다. 성경 역시 유희를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온 힘을 다해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다”(삼하 6:14). 잠언은 말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잠 17:22) 하나님이 주신 놀이와 기쁨은 신앙의 부차적 요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또 하나의 길이다. 웃음과 노래, 축제와 놀이 속에도 하나님은 함께하신다. 2. 거룩하게 노는 법 기독교인이 ‘놀이하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세속적 쾌락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풍성히 누리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자연을 거닐며 창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문화와 예술을 하나님의 선물로 향유하며 공동체 안에서 웃음과 즐거움을 나누는 삶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다”(행 2:46). 놀이와 즐거움은 교회를 세우는 힘이 된다. 먹고 마시고 웃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기억할 때, 그 모든 것이 예배가 된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 말씀은 우리의 놀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거룩하게 논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웃는다는 뜻이다. 3. 레고 블록처럼 살아가는 신앙 아이들이 레고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작은 블록을 맞추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너뜨리고 웃으며 다시 시작한다. 그들은 실패와 성공의 과정 자체를 즐긴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며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라” 하셨다. 여기서 ‘경작하다(아바드)’는 단순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돌보고 창조적으로 가꾸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색깔의 블록 같은 삶의 재료들을 주셨다. 믿음의 사람은 그것을 움켜쥐고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적으로 조립하며 즐겁게 세상을 빚어가는 존재이다. 삶은 만들어 가는 예술이며 동시에 놀이이다. 4. 천국을 앞당겨 맛보는 놀이 놀이의 본질은 자유와 기쁨이다. 억지로 하는 노동이 아니라 몰입과 웃음이 있는 활동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아이의 웃음과 놀이는 천국의 작은 그림자이다. 신앙은 무겁게 짊어지는 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즐겁게 향유하고 서로 웃음을 나누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미리 경험하는 삶이다. 경직된 신앙의 옷을 벗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유희를 누리자. 그곳에서 우리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놀이와 기쁨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신앙은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축제다. 우리가 웃고 노는 그 순간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다. Think! 나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어떻게 누리고 있는가? Thank! 하나님, 놀이와 웃음을 통해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11.07

    인생 사계절, 감사 모먼트
  • 변화하는 삶 속, 변치 않는 은혜 작은 계절에도 숨은 하나님의 선물 10월은 굳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해놓은 것이 없어 후회가 밀려오기도 하고 두 달 남은 연말이 무겁게 다가오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쓸쓸한 달, 또 다른 이에게는 풍요로운 달로 다가오는 10월은 삶의 다양한 색채를 보여준다. 심리학자 다니엘 레빈슨(Daniel Levinson)은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했다. 봄은 시작, 여름은 성장, 가을은 결실, 겨울은 마무리와 소망의 시간이다. 성경 역시 인생을 계절에 따라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한다(시 1:3). 계절이 변하듯 우리의 삶과 신앙도 주기를 따라 흐른다. 봄, 은혜의 시작을 기억하다 봄은 새싹이 돋아나듯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계절이다. 복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침례의 감격, 교회 공동체에 뿌리내렸던 순간들이 모두 봄의 선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열정은 희미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을 붙들면 신앙은 다시 회복된다. 새벽예배를 향하던 발걸음, 말씀 앞에서 흘린 눈물, 하나님의 부르심을 처음 들었던 순간은 모두 신앙의 봄을 증언한다. 봄의 감사는 미완의 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실 것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된다. 작은 걸음이 큰 길을 열어간다는 믿음이 바로 봄의 은혜다. 여름, 열정으로 땀 흘린 계절 여름은 성장과 도전의 시간이다. 신앙인의 여름은 봉사와 섬김의 자리이며 땀 흘리며 감당한 사역의 순간들이다. 여름성경학교, 단기선교, 수련회, 직장과 가정에서의 묵묵한 책임 모두가 여름의 열정이다. 때로는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고전 15:58). 작은 섬김이라도 주님께 올려드릴 때 그것은 영원한 열매가 된다. 여름의 감사는 땀방울마다 스며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데 있다. 가을, 결실을 돌아보며 성찰하다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계절이다. 직장에서 쌓인 경험, 가정에서 지켜낸 사랑, 공동체 안에서 맺힌 신뢰 모두가 하나님의 결실이다. 그러나 신앙의 가을은 결실만이 아니라 성찰의 계절이다. 이루지 못한 것을 돌아보며 겸손히 자신을 점검한다. 풍성한 열매에서 오는 기쁨도 크지만 부족함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데서 더 깊은 감사가 솟는다. 추수는 또한 사명의 시간이다. 아직 남은 추수의 현장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일꾼으로 자신을 내어드릴 때 가을의 감사는 한층 풍성해진다. 겨울, 기다림 속의 소망 겨울은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이지만 사실은 봄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신앙의 겨울은 건강의 한계, 관계의 단절,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찾아오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다. 눈 속에 묻힌 씨앗이 봄을 기다리듯 하나님은 겨울 속에서 새로운 일을 예비하신다. 고요한 시간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기회가 된다. 기도와 말씀 속에서 훈련된 기다림은 소망으로 이어진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라는 말씀처럼 겨울의 감사는 인내와 소망에서 빛난다. 인생의 어느 계절에 있든, 신앙인은 감사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봄의 시작, 여름의 열정, 가을의 결실, 겨울의 기다림, 모든 순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의 시간이다. 우리의 계절은 제각각이지만, 그 모든 계절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Think! 지금 내 인생의 계절은 어디일까? Thank! 그 계절 속에서도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10.10

     AI, 친구인가 위협인가
  • 기술 시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AI 복음전파에 활용하기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 지능)가 당신의 인생을 바꿔드립니다.” 이 문장은 이제 더 이상 광고 문구에 그치지 않는다. 출근 준비를 하며 스마트 스피커에게 날씨를 묻고, 운전 중엔 내비게이션이 교통 상황을 예측해 길을 안내한다. 회사에 도착하면 AI가 요약한 보고서를 읽고 점심엔 챗봇이 추천한 식당에 간다. 하루를 마친 밤, 피곤한 몸을 소파에 기대고 추천 알고리즘이 띄워준 영상을 무심코 재생한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 하지만 돌아보면 하루의 대부분을 AI와 함께 보냈다. 기술은 편리하다. 하지만 항상 유익한가? AI는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준다. 의료, 농업, 복지, 장애인 지원, 성경 번역, 온라인 콘텐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설교 요약, 제자훈련, 신앙 교육 등에 AI 기술이 점차 도입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은 언제나 밝은 면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AI는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으며 편향된 알고리즘은 차별을 재생산하기도 한다. 또한 일자리를 위협하고, 인간 사이의 신뢰와 관계조차 기술이 대신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전 6:12) 그리스도인은 단지 “이 기술이 가능한가?”를 넘어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기술을 분별하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책임의 돌봄을 의미한다. AI 역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대의 자원이다. 그 사용법에 따라 기술은 복음의 통로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을 해치는 칼날이 될 수도 있다. AI는 환경 보호, 고령자 돌봄, 실종자 추적, 기후 대응 등 선한 목적에 활용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온라인 말씀 교육, 묵상 챗봇, 성경 퀴즈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은 본질적으로 중립적이다. 사용자의 목적과 태도에 따라 그 열매는 전혀 달라진다. 우리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이 기술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AI가 아무리 정교해지고 빠르게 발전해도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AI는 사랑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못한다. 고통 받는 이의 곁에 조용히 앉아 함께 울어주고, 믿음으로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다. AI는 문장을 생성하고 정보를 분석할 수 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흉내 낼 수 없다. 사람의 눈물을 닦는 따뜻한 손길, 그것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은혜의 사역이다. AI, 이렇게 시작해보세요 AI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컴퓨터나 스마트폰만 있다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으며 특히 ChatGPT(챗지피티) 같은 대화형 AI는 단순한 명령어 입력만으로도 신앙적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아래는 독자들이 바로 따라 해볼 수 있는 간단한 예시들이다. 상황 사용 방법 예시 기도문 만들기 “병원에 입원한 성도를 위한 기도문 써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을 쉽게 설명해줘” 전도지 만들기 “직장인을 위한 전도지 문구 만들어줘” 성경퀴즈 만들기 “요한복음 중심의 퀴즈 5문제 만들어줘” AI 사용 시 주의할 점 1. AI가 제시하는 정보는 항상 사실이 아닐 수 있다. 2. 신학적 내용은 반드시 목회자나 신학 전문가와 검토해야 한다. 3. AI는 조언자가 아닌 ‘확률적 계산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기술은 우리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더 큰 분별과 책임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조용히 물으신다. “너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하고 있느냐?” 이 질문 앞에 각자의 답이 있을 것이다. Think! Thank! Q1. 최근에 어떤 고민이나 문제를 사람보다 AI나 기계에 먼저 털어놓은 적이 있나요? Q2.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Q3. 당신에게 AI는 친구인가요 아니면 위협적인 존재인가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07.11

     시간을 건너온 인사 … “폭싹 속았수다”
  • 2025년 청년과 140년 전 선교사의 대화 그 정신 이어 우리도 수고해야 4월 바람에 춤추는 유채꽃밭에 A청년은 홀로 앉아 있었다. 봄은 왔지만 A청년의 마음은 아직 겨울이었다. 부활절이 다가오는데도 삶에는 부활의 기쁨보다 반복되는 고민과 현실의 무게가 짓눌러 있었다. 그는 기도하며 되뇌었다. “주님, 저에게도 부활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 눈을 감고 기도하던 A청년에게 어떤 바람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눈을 뜨니 청년 앞에 낯선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수염을 기른 얼굴, 낡은 가죽 성경책, 그리고 따스한 눈빛. 그는 다정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입니다. 140년 전 조선에 온 선교사예요. 당신의 기도를 듣고 왔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처럼 펼쳐졌다. “1885년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확신 하나로 이 땅에 발을 디뎠어요.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와 나는 인천 제물포에 내렸고, 이 낯선 땅 조선을 사랑하기로 결심했죠. 언어도 문화도 모르던 우리가 붙든 건 오직 한 가지였어요. ‘하나님은 이 조선도 사랑하신다’는 진리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파송되어 조선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에 대한 경계가 극심했고 기독교는 이단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조선어를 배우고 성경을 번역하며 고아원과 교회, 학교 설립에 매진했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경신학교’도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는 선교를 단지 복음 전파가 아닌 ‘전인적 인간 회복’으로 실천했다. 조선에 사랑을 피우다 그는 계속 말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이 영적으로 불모지였던 조선에 복음을 전했어요. 철저한 신분제 속에서 양반과 노비로 살던 백성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복음은 해방의 기쁨이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교육의 기회조차 없었는데 우리는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어요. 위험한 위생 상태와 각종 병에 노출된 백성들에게 서양의술을 전하고 병원을 세워 건강한 삶을 돕고자 했습니다.” “그때 제 눈앞에는 새로운 조선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사랑과 화목, 협동의 기독교 정신으로 가르치는 학교들, 자비량으로 운영되는 병원들, 고통당하는 이들을 섬기고 죽어가는 자들에게 빛과 기쁨을 주는 교회와 기관들이 세워질 것을 꿈꾸었습니다. 이제 보니 우리가 꿈꾸었던 것보다 더 크게 이루어졌더군요.” 나의 수고도 의미 있을까요? A청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교사님, 요즘 세상은 참 혼란스러워요. 뭘 위해 살아야 할지 어떻게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언더우드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복음은 시대를 가리지 않아요. 예수님은 그때도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가셨고, 지금도 상처 입은 청년들에게 다가가고 계시죠.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을 사랑하시고 당신도 사랑하십니다.” A청년은 힘겹게 이어 말했다. “저는 요즘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힘들어요. 그래도 믿음의 사람처럼 살려고 헌혈도 하고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말씀을 보내고 독거 어르신께 전화도 드려요. 그런데… 이런 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요?” 언더우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을 기억하나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당신이 뿌린 작고 보잘것없는 수고가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빛이 되며 위로가 되고 부활이 될 거예요. 우리도 처음엔 작은 교회 하나로 시작했답니다.” 다시 피어나는 부활의 계절 A청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즘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인기예요. 사람들은 ‘속았다’는 뜻으로 알기도 하지만 사실은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제주 방언이에요.” 언더우드는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운 말이군요. 내 인생이 ‘폭싹 속았수다’라고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 기꺼이 드린 삶이었다는 뜻이겠지요.” 햇살 아래에서 나눈 대화는 마치 기도 같았고 묵상 같았다. 언더우드는 시간의 틈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여전히 A청년의 마음에 맴돌고 있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청년이여 당신도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A청년은 유채꽃밭 한가운데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님… 저도 누군가에게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 Q1. 당신은 누구에게 “폭싹 속았수다”라고 말하고 싶은가요? Q2. 부활절을 맞아 당신이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수고’는 무엇인가요? Q3.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믿음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04.11

    신앙의 골든 아워 … 지금이 기회이다 
  • 자녀 스스로 고민하고 탐구하는 과정 지원해야 즐거운 예배 열어 주어야 A집사는 설날을 맞아 남편과 자녀들을 데리고 시댁에 방문했다. 시어머니는 가족 모두 모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한 가지 소원을 말했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니? 다 같이 가정예배를 드리면 좋겠구나.”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은 인상을 찌푸렸고 아이들은 귀찮다며 집에 가자고 투덜댔다. A집사는 며느리이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거절하기가 어려웠고 남편과 아이들을 설득했다. 마지못해 동의한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려는 순간 A집사는 걱정이 밀려왔다. ‘가뜩이나 기독교에 부정적인데, 가정예배를 드린 후 더 싫어하면 어떡하지?’ 신앙의 전수는 삶으로 왜 모태신앙으로 자란 자녀들이 예배를 싫어하고 교회를 떠날까? A집사의 남편은 어릴 적부터 강압적인 어머니 밑에서 교회를 다녔다.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옆집 아이와 비교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폭언과 체벌을 일삼았다. 교회에서는 누구보다 친절한 모습을 보이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는 차갑고 비난을 퍼붓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결국 성인이 되면서 교회를 떠났다. 2024년 12월 발표한 <목회데이터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어른이 된 후에도 교회를 다니겠느냐”라는 질문에 청소년 3명 중 1명이 “아니오”라고 답했다. 많은 청소년은 부모와 교회가 기독교에 대해 입으로 떠드는 것에 지쳐 있다. 부모의 신앙과 실제 삶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실망하고, 강압적인 신앙 전수가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신앙은 말이 아닌 삶으로 전해져야 한다(신 6:7). 신앙의 골든 아워 넷플릭스에 방영중인 <중증외상센터>는 이국종 교수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다. 한 남성이 대형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고 긴급 출동한 구급대원들은 그의 심각한 상태를 확인했다. 환자가 외상센터로 옮겨진 후 의료진은 생존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지만 팀장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아직 살아있다”라고 말하며 수술을 지시했다. 의료 현장에서 ‘골든 아워’(Golden Hour)란 환자의 생사가 결정되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이 시간을 놓치면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없다. 지금 우리의 신앙도 그렇다.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이어질지 아니면 단절될지 결정되는 신앙의 골든 아워 속에 있다. 지금이야말로 자녀들과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청교도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가정예배를 통해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정예배는 신앙을 이어가는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다. 예배는 즐거워야 오늘날의 자녀들은 유튜브 쇼츠와 틱톡 같은 짧은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세대다. 긴 시간을 집중하기 어려워 이들에게 기존의 긴 예배 형식은 효과적이지 않다. 예배 형식이 변화해야 한다. 1. 짧고 집중도 높은 예배 - 처음에는 무조건 예배 시간을 짧게 구성해야 한다. 2. 자녀 중심 예배 - 부모가 일방적으로 설교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녀가 직접 사회를 보고, 말씀을 전하는 형식도 괜찮다. 3. 다양한 예배 형식 - 전통적인 신앙고백→찬송→기도→말씀→기도의 형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MBC <질문들>처럼 자녀가 하나님께 던지고 싶은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부모와 함께 찾아가는 방식도 가능하다. 부모와 자녀의 역할을 바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도 신선하다. 청소년기는 신앙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떠나는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에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고 탐구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신앙을 ‘재미없는 의무’로 만들기보다 즐겁고 흥미로운 경험으로 만들어야 한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 지금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골든 아워이다. 가정예배를 통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실천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삶으로 신앙을 보여주기 -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신앙을 전해야 한다. 2. 질문을 허용하기 - 자녀가 신앙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3. 직접 경험하게 하기 - 신앙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해야 한다. 4. 기도로 지켜주기 - 무엇보다 성령께서 자녀를 만지시고 도우실 것을 믿어야 한다. “너는 마땅히 그들에게 가르칠 것이며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신 6:8). Think! Thank! Q1. 당신은 자녀들이 왜 가정예배를 드리기 싫어한다고 생각하나요? Q2. 자녀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예배 형식은 무엇일까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02.07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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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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