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신의규 목사(강서2대교구장) - “나 혼자 못 산다”
  • “나 혼자 산다”는 독신 남녀와 1인 가정이 늘어나는 세태를 반영해 혼자 사는 유명인들의 일상을 담은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13년 전 시작된 이 프로그램이 장수하며 인기를 끄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TV 속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곁의 보편적인 풍경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퇴근길에 사 오시던 ‘투게더(Together)’ 아이스크림을 기억하십니까? 그 이름처럼 온 가족이 둘러앉아 커다란 통에 숟가락을 맞대며 나누어 먹던 그 시절 가장 값비싼 간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스크림이 10년 전 1인용 프리미엄 제품인 ‘시그니처 싱글컵’을 출시했습니다.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름의 뜻은 “함께”인데, 정작 제품은 “혼자” 먹도록 나온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우리 시대를 그대로 투영합니다. 구호는 여전히 ‘함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함께함의 불편함을 견디지 못해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 통계청의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1인 가구 비율은 2026년 현재 36%를 넘어섰습니다. 세 가구 중 한 가구 이상이 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밥을 먹고(혼밥), 혼자 영화를 보는 문화는 이제 ‘당당한 취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고독사와 우울증 지수는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나 혼자 못 산다”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서 홀로 서야 하는 존재입니다. 구원은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실 때부터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 2: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독립된 개별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의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신앙은 홀로 골방에서 도를 닦는 수행이 아니라 때로는 나와 다른 지체들과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며 사랑의 넓이를 넓혀가는 과정입니다. “함께”라는 단어가 싱글컵에 담기는 시대 속에서 교회는 여전히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을 나누어 들고 서로의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를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세상이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속삭일 때 우리는 겸손히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못 삽니다. 그리고 형제 자매인 당신 없이는 나 혼자 못 삽니다.” 성령의 띠로 하나 되게 하신 공동체 안에서 혼자가 아닌 ‘함께함’의 행복과 은혜, 그리고 능력을 회복하는 4월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6.04.17

    변원중 목사(서대문대교구장) - 봄의 속도와 부활의 은혜
  • 몇 해 전 일간지에 실린 한 기사가 떠오릅니다. 봄이 북상해 오는 ‘속도’를 측정한다는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각 지역의 민간 관측자들이 개나리, 진달래, 벚꽃과 같은 봄꽃의 개화 시기를 기록해 제보하고, 기상청은 그 자료를 종합하여 봄이 얼마나 빠르게 찾아오는지를 수치로 분석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계절의 흐름조차도 이렇게 기록되고 예측될 수 있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교회의 봄은 사순절과 함께 시작됩니다. 부활절은 춘분 이후 첫 만월 다음 주일로 정해지기에, 사순절의 시작은 곧 봄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특히 ‘재의 수요일’로 시작되는 사순절의 40일은 주일을 제외하고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부활절을 보냈습니다. 이처럼 여의도의 봄은 특별한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주변에서는 매년 여의도 벚꽃축제가 열려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모여듭니다.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 아래에서 사람들은 봄의 정취를 만끽하고 거리에는 웃음과 활기가 넘칩니다. 동시에 교회 안에서는 영광과 승리의 부활절을 보내는 성도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합니다. 이렇듯 여의도의 봄에는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합니다. 한편에서는 짧게 피었다가 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봄은 얼어붙은 대지를 녹이고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하는 소생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의 봄은 단순한 계절의 변화를 넘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 생명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잠시 피었다 사라지는 꽃의 아름다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부활의 계절인 봄을 맞이하며 우리 역시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이번 봄, 눈에 보이는 꽃의 아름다움을 넘어 부활의 기쁨을 깊이 누리며 그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참된 부활의 계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6.04.10

    강신호 목사(일산순복음영산교회 담임) - 부활의 온도
  • 하나님께서 살아계실 확률은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니 50% 정도”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동전에는 앞면과 뒷면이라는 고정된 상수(常數)가 있고, 어느 면이 나올지는 50%의 확률로 결정된다. 하나님의 존재는 동전 던지기와 다르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지, 있는 것도 맞고 없는 것도 맞다는 전제는 결코 성립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존재할 확률은 100% 아니면 0%, 오직 둘 중 하나다. 일기예보에서 “오늘 기온은 영하 1℃이지만, 강풍으로 체감온도는 영하 5℃”라고 할 때, 체감온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체력이 약한 사람은 영하 10℃로 느낄 수 있고 건강한 사람은 영상 5℃로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날의 실제 기온은 정확하게 영하 1℃일뿐이다. 온도계는 사람의 감각과 무관하게 객관적 수치를 가리킨다. 신앙도 그러하다.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90% 계신 것 같다”고 말하고, 어려운 일이 겹치면 “50%도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존재를 재는 온도계가 있다면, 그 바늘은 형편이 좋든 나쁘든 흔들림 없이 100%를 가리킬 뿐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의 감정과 처지에 따라 오르내리는 체감온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100% 존재하신다면 그분 앞에서는 간음과 동성애와 낙태뿐 아니라, 음욕을 품는 것과 형제를 미워하는 것, 세상의 불의 앞에 침묵하는 것까지 모두 죄가 된다. 반대로 하나님이 0%라면, 무슨 짓을 해도 죄가 없다. 바로 이 경계선이 이 세대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구분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100%요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사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사실이 100%라면 우리의 삶도 달라야 한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두워도 부활의 온도계가 가리키는 천국의 온기를 이 땅에서 몸소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부활을 믿는 사람의 마땅한 삶이 아니겠는가?
  • 2026.04.03

    안현주 목사(동작대교구장) - 가장 화려한 입성, 가장 고독한 순종
  • 2026년의 봄, 우리는 인공지능이 일상이 되고 초개인화된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과 선택을 설계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손안의 스마트폰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여주며 대중의 ‘좋아요’와 실시간 트렌드는 곧 그 시대의 정의이자 가치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맞이하는 종려주일은 우리에게 예루살렘 입성의 화려한 ‘트렌드’ 이면에 숨겨진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묻게 합니다. 2000년 전 예루살렘의 거리도 오늘날의 사회관계망(SNS)만큼이나 뜨거웠습니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때, 군중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막 11:9). 그들의 환호는 당시 유대 사회의 가장 뜨거운 ‘실시간 검색어’였으며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강력한 메시야를 향한 집단적 열망의 투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열광적인 트렌드는 불과 며칠을 가지 못했습니다. 군중이 원했던 ‘정치적 해방자’가 아니라 고난받는 ‘인류의 구주’로서 십자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행보는 대중의 기대라는 알고리즘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니즈(Needs)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메시야를 향해 군중은 순식간에 등을 돌렸고, “호산나”라는 찬양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분노의 함성으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군중을 낯선 눈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때 실망하고, 내 기대를 벗어날 때 등을 돌리는 것, 그것은 2000년 전 예루살렘 군중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그렇기에 종려주일은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나의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종려주일은 단순히 예수님의 입성을 축하하는 날이 아닙니다. 군중의 변덕스러운 환호 속에 감춰진 고독한 순종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소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종려주일을 맞아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상의 소음을 잠시 끄고, 나귀를 타신 주님의 겸손한 뒷모습을 바라봅시다. 화려한 종려나무 가지 아래 가려진 거친 십자가의 길, 그 길 끝에 진정한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며 고난 주간의 문을 열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호산나’를 외치며 나에게 유익을 줄 메시야를 소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온전히 주님의 길을 따르고 있는가.
  • 2026.03.27

    권성민 목사(반석대교구장) - 왕과 사는 남자
  • 얼마 전 가족과 함께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빼앗긴 열두 살의 어린 왕 단종 이홍위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고, 그 유배지를 지키는 촌장 엄흥도와 함께 짧고도 애절한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이다. 엄흥도는 처음부터 왕과 살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가난한 자신의 마을에 유배지를 유치하면 먹고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인간적인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유배되어 온 사람은 왕위에서 쫓겨난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이홍위를 감시해야 할 죄인으로 대해야 했지만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채 유배되어 온 아이가 점점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엄흥도는 어느 순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을 위해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영화를 본 후 성도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성도의 삶은 어떠한가? 처음 신앙의 문에 들어설 때 우리는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삶의 고된 문제의 해결이 필요해서, 상한 마음에 위로가 필요해서 또는 알지 못하는 두려움을 해소하고 싶어서, 혹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서….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알게 된다. 만왕의 왕이신 야훼 하나님이 이미 내 삶에, 유배지와 같이 돼버린 가난한 심령에 오셔서 함께하신다는 사실 말이다.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왕이신 하나님은 형통하고 평안한 삶에 있을 때만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다. 유배지처럼 막막하고 외진 삶의 자리에도 함께 계신다. 영화에서 마을 사람들은 유배되어 온 단종 이홍위와 함께 지내면서 왕과 사는 삶을 경험한다. 함께 먹고, 배우고, 어울려 소소한 웃음을 나누며 가난과 상관없는 기쁨을 경험한다. 엄흥도는 본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왕과 함께 지내는 나날 속에서 그는 달라졌다. 손해를 감수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마침내 역적의 누명을 각오하면서까지 왕의 곁을 지켰다. 만왕의 왕 야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성도의 삶도 다르지 않다.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는 사람은 변한다. 세상의 두려움보다 왕의 말씀이 더 크게 들리고, 자신의 손익을 따지던 계산 대신 왕의 마음을 먼저 구하게 된다. 입술의 언어가 바뀌고 관계를 대하는 마음이 바뀌고, 고난을 해석하는 시선이 바뀐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왕과 동행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변화다. 우리 삶의 자리가 어디에 있든지 만왕의 왕이신 야훼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그리고 그분이 함께하시는 삶은 반드시 변화된다. 왕과 사는 성도,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요 우리의 영광이다.
  • 2026.03.20

    박현주 목사(상담소 겸 사회복지상담센터 선임) - “셰프의 능력”
  • 요즘 AI는 이미 우리의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길을 찾을 때나 글을 쓸 때도, 음악을 듣거나 상담을 받을 때도 AI가 함께합니다. 예전에는 상상 속의 이야기 같았던 일들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고 어떤 면에서 AI는 우리 코앞까지 다가와 있으며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녀에게 좋은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니 AI랑 결혼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AI는 다가오는 세대들에 자연스럽고 익숙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AI가 필요한 정보를 순식간에 찾아주고, 가족처럼 친구같이 대화 상대가 되어주니 사람들이 AI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상담학 교수가 학생을 상담해주었는데 그 학생이 저녁에 AI에게 다시 물어보았더니 거의 교수와 같은 조언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꽤 정확한 방향을 제시해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과 두려움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애니메이션 AI영화 “메간”을 보면 집에서 아이와 놀아주던 AI인형이 결국 아이를 해치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통제되지 않는 기술이 얼마나 인류를 위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가하면 도널드 트럼프가 연설한 것처럼 보이는 AI 영상은 목소리, 표정, 현장 분위기도 실제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AI의 딥페이크 기술은 진짜와 가짜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우리가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보수적인 분들은 AI가 사탄이라고 근처도 가지 않으려 하는데, 저는 AI 배척자는 아니지만 AI를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장봐다 주는 존재와도 같다고 비유해봅니다. AI가 음식을 만들라고 콩나물, 양파, 당근, 고기, 향신료 등을 구해다주었다면, 그 음식을 맛깔나게 만드는 사람은 바로 셰프입니다. 그 재료로 어떤 음식을 만들지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지, 달게 할지 짜게 할지 기막하게 요리해 식탁에 내놓는 사람은 결국 셰프인 우리 자신입니다. 앞으로는 더욱 AI가 활용 될 것인데 AI는 분명 우리에게 유용하고 도움이 되지만 전적으로 맹신하면 안됩니다. AI는 오류도 발생하고 윤리적인 문제도 고민을 안 할 수가 없으므로 계속 점검하고 비판적으로 살피고 최종 사용은 우리들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특히 믿는 사람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100퍼센트 신뢰의 대상이며 성경만이 가장 오류가 없는 완벽한 지침이라는 사실을 뇌리에서 지우면 안 될 것입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AI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 하겠나요?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 2026.03.06

    남형덕 목사(온가족행복지원연구소 선임) - 믿음의 다음 세대를 세우는 교회
  • 대한민국은 지금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저출산 위기를 겪고 있다. 출산율 0점대라는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가정의 붕괴와 공동체의 약화 그리고 다음 세대의 소멸을 예고하는 시대적 경고음이다. 학교는 비어가고 지역은 늙어가며 미래를 책임질 청년 세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교회는 과연 침묵해도 되는가. 아니면 시대의 질문 앞에 믿음으로 응답해야 하는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성도 출산율 2.0명이라는 목표를 제시하는 일은 단순히 국가 정책을 따라가는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을 바라보는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한 신앙 고백이며 다음 세대를 향한 교회의 책임을 분명히 하는 믿음의 결단이다. 교회는 세상의 흐름을 뒤쫓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시대를 비추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생명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선포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 질서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이며 “보라 자식들은 야훼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은 자녀가 부담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임을 밝힌다. 따라서 출산과 양육은 개인의 선택 이전에 하나님께서 공동체 전체에 위임하신 거룩한 사명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젊은 세대가 출산을 망설이는 이유는 단순한 이기심이 아니라 경제적 부담, 양육에 대한 두려움, 경력 단절과 돌봄 공백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교회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채 “믿음으로 낳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또 다른 짐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선언보다 동행이며 명령보다 책임의 분담이다. 초대교회는 생존조차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서로의 필요를 채우며 공동체를 이루었다. 가진 것을 나누고, 약한 자를 품으며 함께 살아내는 믿음을 실천했다. 오늘의 교회 역시 출산과 양육을 개별 가정의 고립된 부담으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함께 책임지는 사명으로 회복해야 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사랑의 실천으로 한국 교회를 이끌어온 교회다. 이제 그 사명은 다음 세대를 향해야 한다. 출산을 축복하는 문화, 아이 울음소리가 환영받는 예배 그리고 실제적인 돌봄과 지원을 제공하는 교회 시스템은 출산율 2.0명이라는 목표를 현실로 만드는 토대가 될 것이다. 출산율 회복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소망의 회복이며, 믿음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영적 전쟁이다. 출산율 2.0명을 향한 여정은 쉽지 않지만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가장 본질적인 투자이며 가장 복음적인 선택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믿음으로 이 길을 걸어갈 때 그 영향력은 교회를 넘어 사회를 밝히는 빛과 소금으로 확장될 것이다.
  • 2026.02.27

    이준희 목사(구로대교구장) - 삶의 자리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
  • 설 연휴가 지나고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며칠 동안 북적이던 집안은 조용해지고 명절 음식도 하나씩 정리됩니다. 기쁨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우리는 다시 현실을 마주합니다. 연휴 동안 동계올림픽 경기를 보신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스노보드 하프파이프에서 최가온 선수가 한국 설상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장면은 큰 감동이었습니다. 멋진 기술을 선보이는 모습과 점수가 발표되던 순간의 환호는 화면을 통해서도 생생하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순간을 화면으로 지켜보았지만 선수는 오랜 시간 현장에서 그것을 살아냈습니다. 몇 분의 경기를 위해 수년의 훈련과 넘어짐의 시간을 견뎌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을 통과했기에 비로소 금메달의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도 화면에 보이지 않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순간보다 조용히 견디는 시간이 훨씬 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은혜를 경험하지만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와 현실은 그대로입니다. 그럴 때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신앙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 하나님은 특별한 순간에만 함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평범한 하루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범사에’라는 말은 좋은 날뿐 아니라 평범한 날에도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감사는 상황이 달라진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할 때 시작됩니다. 예배의 감동이 교회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말씀 한 구절을 묵상하고 감사의 제목을 적어 보며 가정에서 짧게라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은 작아 보이지만 우리의 하루를 바꾸는 힘이 됩니다. 『감사QT 365』를 통한 말씀 묵상은 생각을 새롭게 하고 하루의 방향을 세워 줍니다. 교회에서 드린 예배가 가정으로 이어질 때 우리의 신앙은 주일을 넘어 삶 전체로 확장됩니다. 올림픽 경기가 끝나도 선수의 도전이 이어지듯 우리의 신앙도 일상 속에서 이어져야 합니다. 현실이 달라지기 전에 마음부터 하나님께로 돌려 보십시오. 문제보다 은혜를 먼저 떠올리고 걱정보다 감사 한 줄을 적어 보십시오.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은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함께하십니다. 이 믿음을 붙들고 다시 힘차게 전진하기를 소망합니다.
  • 2026.02.20

    오승현 목사(양천대교구장) - 신의 악단
  • 영화 ‘신의 악단’이 개봉 한 달여 만에 누적 관객 100만명을 넘어섰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개봉 당시만 해도 낮은 인지도와 제한된 상영관 수 그리고 여러 대작 영화들 사이에서 이처럼 큰 흥행을 이루리라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지난해 12월 31일 개봉일에 맞춰 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고 배우들이 부르는 찬양을 함께 따라 부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마음 깊이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영화 속에 담긴 북한의 현실은 참으로 가슴 아프고 비참했습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성경을 읽어야 했고, 찬양은 소리 내어 부를 수조차 없었습니다. 숨겨두었던 성경책이 발각되어 목숨을 잃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고문당하는 장면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장면들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생명을 걸고 예배하는 이들의 모습과 비교할 때 우리는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앞서지 않았는지, 자유가 있음에도 편함만을 선택하며 신앙생활을 해오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악단’은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영화이자 동시에 우리의 예배와 신앙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하는 귀한 작품이라 느껴졌습니다. 시편 100편 4절 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우리는 날마다 감사로 무장해야 할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자유를 주심에 감사하고,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며 365일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드려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북한의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평화로운 복음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지하 교회에서 숨죽여 예배하는 북한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도록 중보의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이 고백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때에 복음의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손 모아 기도하며 준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6.02.13

    홍성복 목사(장년대교구장) - 영적 가족력
  • 병원에서 진료를 받다 보면 ‘가족력’을 조사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력이란 부모, 조부모, 형제자매, 남편, 아내, 자녀 등 혈연들이 지닌 질환의 유무, 원인 등을 말합니다. 가족 구성원이 특정 질환이 있는 경우 그 질병의 발병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환자 본인과 의료진은 가족력을 주의하며 살핍니다. 일반적으로 삼대에 걸친 직계 가족 중 2명이 같은 질병에 걸렸으면 가족력이 있다고 판단합니다. 혈연 간 유전적 유사성에 의한 요인도 있으나 그보다 생활 습관, 식습관, 주거 환경 등 질병을 유발하는 환경을 공유하기 때문에 발병률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질병뿐만 아니라 믿음과 신앙에도 가족력이 있습니다. 이른바 ‘영적 가족력’입니다. 나의 신앙 형성이 조부모나 부모에게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이 있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신앙에 있어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은 누구인가?”란 질문에 1, 2위 순위 합계 57.4%가 아버지, 어머니라고 답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신앙 형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가 고령화되어 젊은 세대가 없고, 아이를 가진 젊은 세대가 교회에 없다 보니 교회학교 아이들은 더더욱 줄어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을 이겨나갈 방안 중의 하나가 영적 가족력의 회복입니다. 예전에는 자녀의 신앙 교육을 교회학교에 전담했지만, 이제는 교회와 가정에서 같이 신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육체의 가족력이 나쁜 것만 유전되지 않고 좋은 것도 함께 물려받듯이 영적 가족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올바른 믿음대로 살아가는 본을 아이에게 보일 때 그것이 아이들의 마음에 각인되어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가정 공동체에서 영적 가족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공동체의 변화도 중요합니다. 교회는 영적 대가족을 만들어 영적 가족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말처럼 한 영혼을 믿음의 자녀로 키우기 위해서는 영적 대가족이 필요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듯이 우리 성도님들은 자녀 세대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지지를 보내주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는 골든타임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더 이상 다음 세대를 놓치면 회복할 수 없습니다. 3450세대, 그리고 그 자녀들이 영적 가족력을 강화하도록 온 교회가 함께 노력합시다.
  • 2026.02.06

    서광석 목사(영등포대교구장) - FOMO(포모)의 시대, 변치 않는 가치
  • 현대사회는 예측 불가능한 변동성의 시대이다. 사회 모든 부분에서 예측이 어려운 급격한 변화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경제적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많은 지표들 뿐 아니라, 사회 문화적으로도 하룻밤 사이에 뜨고 지는 트렌드 따라잡기에 분주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투자에서, 누군가는 관계에서, 누군가는 정보와 트렌드에서 혹시 낙오할까 불안해한다. 이러한 감정을 FOMO(포모·Fear of Missing Out)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벼락거지’이다. 부동산이든 가상화폐든 트렌드를 따라가는 사람들에 비해 뒤처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되어 버린 상황을 묘사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벼락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 FOMO에 빠져 무리하게 부동산, 가상화폐, 주식에 투자한다.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무척이나 애써야만 하는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내가 잘 따라가고 있나?’,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나?’, ‘제대로 한 선택일까?’ 이렇게 매일 불안과 근심과 후회와 두려움 속에 ‘행복’이라는 감정조차도 SNS에 장식품처럼 진열하며 산다면 진짜 행복과 평안은 환상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은 그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버린 채 환난과 곤고, 박해와 위험을 마주하면서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분리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변치 않는 더 중요한 가치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얼마나 성취했는지’, ‘얼마나 앞서가는지’ 물어보지만 복음은 우리에게 ‘누구에게 속해있는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얼마나 이루었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인가’에 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의 속도 경쟁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허락된다. 우리가 안심하고 발 딛고 서서 살벌한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반석이 그 사랑 안에 있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우리를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사랑이 FOMO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우리의 경쟁력이다.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 안에 잠잠히 세상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 2026.01.30

    차진호 목사(교회개척국 담당) - 제주도 돌고래의 협력 호흡
  • 여의도순복음서귀포교회가 있는 제주도에서 12년 동안 목회하며 서귀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올레길을 종종 산책하곤 했다. 가끔 갯바위 근처에서 수십 마리의 돌고래 무리를 마주할 때면 수족관에서 보던 몇 마리의 돌고래 쇼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장엄하고 신비로운 생명력을 느끼곤 했다. 그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한 이후 제주 남방큰돌고래에 대해 찾아보며 발견한 두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곧 나의 신앙과 목회 철학이 되었다. 첫째, 돌고래는 바다에 살지만 반드시 ‘하늘의 공기’로 호흡해야 한다. 물고기와 달리 허파로 숨을 쉬는 포유류인 돌고래는 3분에서 10분마다 주기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한다. 등에 있는 분수공으로 신선한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바다 한가운데서 질식하여 죽고 만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세상은 깊고 거친 바다와 같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잠겨 지내는 동안 우리 영혼은 끊임없이 질식의 위협을 받는다. 잠시라도 기도의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으면 신앙의 맥박은 급격히 약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함몰되지 않고 영적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수시로 수면 위를 향하는 ‘영적 분수공 호흡’이 필요하다. 둘째, 돌고래는 병든 동료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어깨를 내어준다. 무리 생활을 하는 돌고래들은 병들거나 다쳐 스스로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는 동료가 생기면 그 아픈 동료를 아래에서 위로 받쳐 올려 숨을 쉴 수 있게 돕는다. 최근 여러 환경적 제약으로 현장 예배의 뜨거움이 식거나, 홀로 신앙을 지키며 ‘영적 호흡곤란’을 겪는 이들이 많다. 기도의 맥박이 약해지고 세상의 무게에 가라앉은 성도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그저 관망하기보다 돌고래처럼 사랑의 어깨로 받쳐 올려주어야 한다. 중풍병자를 예수 앞에 인도하기 위해 지붕을 뜯어냈던 친구들처럼(막 2:1~12), 다른 교우들과 힘을 합쳐 지친 영혼들을 돌봐야 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의 영적 생명이 살아야 가족과 교우의 신앙도 도울 수 있다. 2026년 1월의 마지막 주, 열두 광주리 새벽기도회의 열기가 식지 않도록 예배와 기도, 봉사의 삶을 더욱 열심히 실천하자. 아침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수시로 기도하며 영혼의 폐부에 하늘의 생기를 채우자. 그리하여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영혼의 구조대’,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2026.01.23

    백근배 목사(강서성전 담당) - 신앙안에서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기
  • 몇 년 전, ‘과잉근심사회’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이는 사건과 사고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불안이 SNS와 같은 연결망을 통해 확산되면서 실제보다 과도하게 반응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우리는 팬데믹 시대를 지나오면서, ‘과잉근심사회’를 경험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변이 바이러스 소식과 경제적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보다 더 큰 위협에 노출된 것처럼 느끼게 했다. 물론 적당한 근심은 미래를 대비하게 하는 지혜의 동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잉된 근심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과도한 분노를 표출하게 하여 작은 사건에도 과잉 반응하도록 만든다. 성경은 이 세상에 근심이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벧전 1:6). 그러나 문제는 근심 그 자체가 아니라 근심에 사로잡히는 태도이다. 과잉된 근심은 우리의 심령과 뼈를 상하게 하고(잠 17:22), 개인을 넘어 공동체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근심을 이기려는 신앙적 노력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필수적이다. 성경의 인물들 역시 근심 앞에서 무너지는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야베스는 “나로 환난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 4:10)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이 짧은 기도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이유는 근심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인간의 보편적 갈망과 하나님의 응답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과잉된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해봐야 한다. 첫째로는 가려서 들을수 있어야 한다. 불안을 조장하는 소식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복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박국 선지자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부흥을 소망했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소경 바디매오 역시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절망이 아닌 회복을 선택했다. 다음으로는 복음의 시선으로 현실을 해석해야 한다. 리츠 쉰은 『과잉근심』에서 사람들이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상황이 바뀌기만을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성경은 상황보다 관점의 변화를 요구한다. 성도는 어떤 현실 속에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 마지막으로 우리에겐 기도만이 해답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뿐 아니라 상황까지도 바꾸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신다. 과잉된 근심의 시대를 사는 오늘 그리스도인은 근심에 끌려 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믿음으로 근심을 다스리는 존재다. 불안을 키우는 소리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복음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평안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 2026.01.16

    김판호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새로운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
  • 역사 속에서 전쟁과 전염병 같은 거대한 위기는 언제나 당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뒤흔드는 변곡점이 되어왔습니다. 로마와 잉카, 아라비아와 중화 제국 등 수많은 문명의 흥망성쇠는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우리 삶을 뒤흔든 코로나19 역시 현대 문명의 지형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과 정보화 사회의 도래로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지구촌을 촘촘한 네트워크로 연결했습니다. 마치 인체의 신경조직처럼 서로 얽혀 있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이제 미디어의 그물망을 떠나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연결이 깊어질수록 ‘더불어 사는 관계적 사고’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효율과 개발을 앞세운 무분별한 생태계 파괴, 생명 윤리에 대한 혼란은 이제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중대한 갈림길에서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요? 아프리카 반투족의 언어에는 ‘우분투’(Ubuntu)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습니다.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입니다. 한 인류학자가 아이들에게 달리기 시합을 제안하며 “1등에게만 과일을 전부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손을 잡고 함께 달렸습니다. 놀란 학자가 이유를 묻자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이렇게 답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슬픈데 어떻게 나 혼자만 기쁠 수 있겠어요?” 이 짧은 한마디는 그 어떤 철학자의 이론보다 깊은 울림으로 마음에 남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의 연합 가운데 서로를 향해 자신을 내어 주시는 공동체적 존재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또한, 자기 안에 갇힐 때가 아니라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의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이 ‘우분투 정신’의 회복입니다. 경쟁의 논리를 넘어 연대의 길로, 고립의 습관을 넘어 돌봄의 공동체로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새해가 밝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단지 감정의 위로가 아니라 공동체적 책임에 대한 부르심입니다. 손을 잡고 함께 달려간 아이들처럼 우리도 이웃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어갑시다. 혼자만의 성공이 아니라 함께 살아나는 회복을 위해 더 나은 내일을 향해 함께 나아갑시다.
  • 2026.01.09

    엄태욱 부목사(목회 담당) -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결심을 하며 계획을 세우고 올해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기대합니다. 아마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도 저축이나 재테크, 운동, 건강관리 같은 목표를 세우고 이미 실천하고 계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성도님께서는 올 한 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신가요? 우리에게 많은 비전과 목표가 있지만 우리 순복음의 성도들은 새해를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갈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성경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건강과 치료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우리의 모든 저주를 청산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향한 확실한 소망을 갖게 되었고 지금 이곳에서 작은 천국을 누리고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놀라운 능력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영성으로 무장하게 되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마음 밭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가꿀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꿈을 나의 꿈으로 품고 믿음으로 도전할 때 주님이 도와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말도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은혜를 선포하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순복음의 성도들은 십자가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누리고 나누며 주님 안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믿음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새해에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능력을 선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은혜를 날마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무리 할 때에는 오늘을 보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던 제목들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영훈 목사님이 쓰신 『감사QT 365』나 스마트폰 앱을 활용하면 더욱 좋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십자가 복음의 능력으로 다시 한번 무장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을 향해 다시 한번 믿음으로 전진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고 말해도 부정적인 생각이나 말은 모두 떨쳐버리고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로 나아가십시오. 살아 계신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 2026.01.02

    조정규 목사(찬양특별교구대교구장) - 2025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며
  • 어느덧 2025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며 지나온 한 해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2025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웃음꽃 피던 즐거운 시간들이 있었고 때로는 평범하고도 잔잔한 일상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간을 되짚어 보면 거기에는 분명히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붙드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먹먹하고 답답했던 순간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은혜를 깨닫게 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의 변화와 환경의 불확실성을 바라보면 막막함과 답답함이 밀려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할 때마다 우리 안에 새로운 소망과 굳건한 믿음이 샘솟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가운데 담대함으로 설 수 있는 용기가 임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상황과 환경이 변할지라도 변함없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선한 길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너무나 빠르게 변하여 적응하기조차 힘든 시대에 하나님은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며 이미 영원한 생명과 승리도 약속하셨습니다. 말씀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고 용기와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혼란스러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고 연약함을 넘어 강건함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14). 시편 기자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항상 소망을 품겠다’고 고백하며, 그 소망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더욱 찬송하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소망을 바라는 것을 넘어 소망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에서 시작된 감사와 찬양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 지난 한 해 뿐 아니라 우리 일생 여기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다가오는 2026년 새해를 바라봅니다.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며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한 해 우리를 신실하게 이끄셨던 하나님께서 새해에도 변함없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가장 좋은 목자이자 인도자이십니다. 새해에도 신실하게 우리를 이끄실 하나님을 기대하며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과 함께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5.12.26

    박용식 목사(금천대교구장) - 회복탄력성
  • 회복탄력성이란 책을 보면 하와이 군도 북서쪽 끝에 인구 3만명에 불과한 카우아이라는 섬에서 있었던 연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섬주민들은 대대로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주민 대다수가 범죄자나 알코올 중독자 혹은 정신 질환자였습니다. 이 섬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과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이 섬에서 낳고 자란 아이들은 어떤 인생을 살게 되는지를 연구하기로 합니다. 1955년에 태어난 833명의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추적 조사를 하기로 하는데 에너워미라는 학자는 833명의 아이들 중 201명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하였습니다. 201명의 공통점은 몹시 가난하며, 부모가 이혼이나 별거 중에 있고 부모 중 한명이 알코올 중독이나 정신질환자인 세가지 큰 어려움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위험군에 속해있던 아이들은 당연히 더 심한 일탈과 나쁜짓을 하는 아이로 자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중에 72명은 밝고 건강한 청년으로 문제없이 성장했습니다. 그중에 한 학생은 최악의 환경속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밝고 매력적이었고, 미국 대학입학 시험(SAT)에서 상위 10% 안에 들었고, 성격도 긍정적이고 도덕적이었습니다. 에너워미는 72명의 아이들이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평범한 삶을 살고 심지어는 보통의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 보다 더 밝고 뛰어나게 성장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집중하여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삶의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힘의 원동력이었는데 에너워미는 이것을 ‘회복탄력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이런 회복탄력성을 가질 수 있을까 연구했더니 “그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이해해 주고 받아 주는 어른이 적어도 그 아이의 인생 중에 한 명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엄마였던, 아빠였던, 할아버지 할머니였던 간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푼, 아이가 언제든 기댈 언덕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죄와 유혹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변함없이 특별한 존재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높은 회복탄력성을 갖고 날마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 2025.12.19

    신효영 목사(장애인대교구장) - 서로 연결되어 함께 지어져 갑시다
  • 2025년 한해도 어느덧 12월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탄생한 성탄절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불우이웃, 독거노인, 장애인 등 마치 12월에만 소외된 이웃이 있는 듯 평소보다 더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과 돌봄이 필요한 소외된 이웃은 해마다 이맘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이웃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교회를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성전이 되어 간다”고 말합니다. 벽돌 하나는 약하지만 서로 연결될 때 견고한 성전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연결될 때 교회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집으로 세워집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고 했습니다(벧전 2:4~5). 우리는 죽어 있는 돌이 아니라 성령의 생명으로 충만한 산 돌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정체성을 단계적으로 선언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더 이상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며(19절), 말씀의 터 위에 세워진 자이며(20절),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자이며(21절), 결국에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는 자들입니다(22절).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이웃과 연결될 때 구역이 건강한 구역이 되고 함께 모여 예배함으로 모든 예배가 성령으로 충만한 역동적인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과 연결되어 예수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항상 다음의 세 가지를 점검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 말씀의 기초 위에 서 있는가? 둘째, 예수 그리스도와 밀착되어 성령으로 충만한가? 셋째, 이웃들과 연결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세우시고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가십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과 모든 이웃들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위에 서서 주님과 성령으로 연결되며 성도 간에 사랑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 축복의 통로로써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2025.12.12

    이승준 목사(관악대교구장) - Spiritual Sensitivity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 10:17).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합니다. 영어에서 ‘듣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히어링(hearing)과 리스닝(listening)입니다. 히어링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를 뜻합니다. 누워 있을 때 들리는 시계 초침 소리, 파도 소리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리는 모든 소리들입니다. 반면 리스닝은 의도적으로 집중해서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 누군가의 말을 경청할 때 바로 이 리스닝을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할 때 ‘들음’은 히어링일까요? 리스닝일까요? 영어 성경에서는 ‘hearing’으로 번역되어 있고 헬라어 원어는 ‘아코에’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은 특정 장소, 특정 시간에서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장소, 모든 상황, 모든 관계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와 기도원, 골방에서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나는 우연한 만남 속에서도, 삶의 사건 속에서도, 바람 소리 속에서도, 심지어 예상치 못한 질병과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켄 가이어의 『영혼의 창(Windows of the Soul)』은 이러한 삶의 태도를 ‘영적 감수성’(Spiritual Sensitivity)이라 부릅니다. 그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벽을 허물고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감지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성경 속뿐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현실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인 창을 닫아둔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 감수성은 근육과 같습니다. 훈련할수록 더 예민해지고 더 강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사건을 통해 저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순간, 모든 장소, 모든 관계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 알고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매 순간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서만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들어오는 통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숨어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손길이 스며든 은혜로운 영적 여정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 2025.12.05

     강종복 목사(여의도순복음벧엘교회 담임) - 속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다
  • 영국에 ‘줄리안 모리스(Julian Ellis Morris)’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렸을 때에 길에서 부모를 잃어버리고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청년이 되어서 부모를 다시 만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엄청난 부자였다. 줄리안은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그는 부자가 되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한 달에 한번은 멋진 옷을 입고 리무진을 타고 런던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이면 그는 여전히 걸인의 모습으로 거리에 나타난다. 줄리안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줄리안이라는 사람만의 문제일까? 오늘 우리 역시 이런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지 않는가? 하버드 의대의 존 레이티(John J. Ratey)교수와 에릭 헤이거만(Eric Hagerman) 교수가 『운동화 신은 뇌(Spark your brain)』라는 책을 펴냈다. 운동을 하면 몸이 건강해지는 것 뿐 아니라 두뇌가 건강해진다.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면 두뇌가 자극을 받아 기억력이 좋아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더 많이 떠오를 뿐만 아니라 우울증도 치료하고 치매도 예방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운동으로 육체가 건강해지는 것은 부수적인 효과이고 정말 중요한 효과는 두뇌가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와 두뇌가 건강하다고 해서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또 하나의 사람이 들어있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엡 3:16). 여기서 ‘속사람’이라는 헬라어 단어 ‘에소 안드로폰’은 영어로는 ‘inner man’, 즉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것은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만 강건해질 수 있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질 수 있는 방법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결코 영적 침체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되 감정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그리스도의 사랑을 감정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식으로 깨닫고 확신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에 기억하고, 언제나 감사와 찬송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한다.
  • 2025.11.28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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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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