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움직이는 크리스천 - 차진호 목사(여의도순복음서귀포교회 담임)
  • “TV를 오래 보면 수명이 줄어들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보았다. 이것은 호주의 ‘베이커 IDI 심장·당뇨협회’가 성인 8800명의 생활 습관을 추적한 연구 결과인데 TV를 하루 평균 1시간 더 시청하면 각종 질환으로 사망할 위험성이 11% 증가하는 것으로 발표됐다. 특히 심장관련 질환으로 사망할 위험성은 18% 증가했으며 암으로 사망할 가능성은 9% 높았다. 그리고 매일 4시간 이상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2시간 미만 시청하는 사람들에 비해 각종 질환으로 사망할 위험성이 46% 높았고, 심장 관련 질환으로 사망할 가능성은 80%나 높았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는 TV, 책상,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습관이 건강에 큰 위협이 되며 인간이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 있는 만큼 생명에 단축이 온다는 이야기였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를 읽으면서 창세기 2장 15절 말씀이 생각났다.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농사짓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경작’을 명령하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정확한 답은 모른다고 해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경작’ 즉, 농사짓는 행위가 아담과 하와에게 득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종합해 볼 때 아담과 하와의 ‘경작’ 이야기는 인간이 TV 앞에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과 같은 멈추어 있는 삶을 살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이며 땀을 흘리는 삶을 살았을 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주는 성경 이야기이다. 육의 몸을 웅크리고 멈추어 있으면 병들어 죽게 되듯이 영적인 몸도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 예배, 기도, 말씀, 봉사, 구제, 전도, 선교 등이 멈추면 우리의 영은 죽는다. 영적인 생활을 해야 우리의 영이 건강할 수 있게 된다. 모세는 80세부터 120세까지 40년 동안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살폈다. 노아는 120년 동안 열심히 움직이며 방주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인 복과 육적인 장수의 복을 함께 받았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맞게 열심히 움직이며 살아야 한다. 영적인 생활로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더불어 범사가 형통해지며 건강의 복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 2024.03.01

    행복을 선택하라 - 윤성호 목사(여의도직할성전 담당)
  • 한 성도가 젊었을 때 차량에 치여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혼수상태로 누워 있었는데, 몸을 움직이지 못할 뿐이지 생각은 멀쩡했고 귀로는 모든 소리가 다 들렸다. 그런데 매일 병실을 찾아오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부정적인 얘기를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고 절망했다. 그러나 한 간호사는 그렇지 않았다. 수시로 귀에 대고 “힘내세요. 좋아질 거예요”라는 말을 반복하여 들려주었다. 그 간호사로 인해 그 성도는 매일매일 희망을 품게 되었고,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정상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건강하게 퇴원한 후 간호사에게 고마움을 표하고자 다시 병원을 찾았는데 어떤 간호사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병원에 요청하여 병실에 근무하는 모든 간호사를 한 방으로 불러 모았다. 눈을 감고 서서 간호사들에게 한 명씩 돌아가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했다. 단번에 자신을 격려했던 간호사를 알아차렸다. 반갑게 그녀를 안아주며 “모든 사람이 부정적인 말을 할 때, 유일하게 당신만이 내게 격려의 말, 희망의 말을 했다. 그 말이 나를 살렸다”라며 감사했다. 어찌 보면 그 성도가 회복된 것은 절망 가운데 희망을 선택한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선택하고 감사해야 한다. 최선이 아니라면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차선을 선택하고 거기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바울과 실라는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서 귀신을 쫓아냈다. 그러나 여종의 주인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해 그들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며 “내가 아시아에서 선교했더라면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괜히 유럽에 와서 이 고생을 하네”라며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밤중에 감옥 안에 죄수들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기도하고 찬송했다(행 16:25). 바울과 실라는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기도와 찬양을 선택했다. 그 결과 옥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열렸으며 자결하려는 간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갇히게 하신 이유는 철저히 간수와 간수의 가족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만약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혀서 원망 불평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이루셨을 것이다. 분명히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지금도 감사와 찬양을 선택하는 성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신다는 것이다. 주님 안에서 최고의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감사를 선택해야 한다. 지금 힘들더라도 밝은 내일을 기대하며 희망을 선택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 2024.02.23

    아들아, 하나님만 믿고 살아라 - 성영목 목사(개척국 담당)
  • 유대인들의 자녀교육 방법은 우리와 다른 점이 많습니다. 이들의 교육 중에 한 가지는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어느 정도 성장해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가족에 대한 신뢰가 깊어지려 할 때 바로 이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의 자녀와 더불어 평소 때처럼 놀아줍니다. 집 밖에서 말 친구가 되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자전거를 태워주거나 같이 공놀이를 즐깁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에 아버지가 자녀를 모래밭에 버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횅하니 가버립니다. 한 번도 당해 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이러한 행동에 아이는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기를 모래밭에 버리고 가는 아버지의 행동을 그의 자녀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날 저녁에 또 다시 아버지는 그에게 다가오는 자녀를 호되게 밀쳐 버립니다. 그리고 당황하는 자녀에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들아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란 누구나 심지어는 그의 아버지까지도 너를 배신할 수 있단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니 하나님만 믿고 살아야 한단다”라고 밀쳐버린 이유를 설명해 준다고 합니다. 조금 가혹하고 냉혹한 자녀 교육인 것 같지만 사실 이 세상에 보이는 것 중에 믿을만한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부모도 자녀도 친구도 이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있다면 그 분은 바로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매일 매일 그분만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멀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사랑해야하는 사랑의 대상임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방백들이나, 인생을 믿지 말고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계시고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믿고 또 사람들과 이웃, 성도들을 늘 사랑으로 섬김으로 매일 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야훼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 2024.02.16

    기도가 삶이 되십니까? - 이연섭 목사(양서성전 담당)
  • 강원도 산골짜기에 위치한 예수원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군대 가기 전 친구들과 예수원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예수원 설립자인 대천덕 신부님은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신앙계에 ‘산꼴짜기에서 온 편지’ 그리고 국민일보에서 출간한 ‘나와 하나님, 우리와 하나님’이라는 책을 통해서이다. 놀라운 건 강원도 태백 산골짜기에 있던 예수원이 ‘기도의 집’이었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1시간씩 기도의 시간이 있었고, 특히 점심 1시간은 중보의 시간이었는데 아주 구체적으로 세계와 우리나라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예수원 기둥에 “노동하는 것은 기도요 기도하는 것은 노동이다”라는 문구가 있어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의문을 가졌는데 그 의문이 풀린 사건이 있었다. 낮 시간에는 방문자들이 예수원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주의 사항이 ‘일할 때 가능하면 말을 줄이고 하나님과 대화하라’는 거다. 기도는 예배시간이나 개인 기도시간에 하는 것이고 일할 때는 열심히 일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기도와 일이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일하면서도 기도하고 기도하면서도 일하라’는 말로 들렸다. 당시 청년이었던 나에게 가장 큰 고민은 신앙과 삶이 너무 다른 모습에 늘 좌절하고 절망했던 시기였기에 아주 멋진 문구로 다가왔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까지 6개월의 여유가 있어 예수원에서 공동체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훈련을 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결국 성령 충만한 삶이 해답이었다. 성령 받고 방언할 때 우리는 어땠나? 성령 충만하면 일 할 때도 방언으로 기도하고 차를 타도 기도하고 걸어가면서도 기도한다. 삶이 기도가 되었고 기도가 삶이 된 경험을 모두 한다. 히브리어로 ‘예배’가 ‘어브다’인데 ‘노동, 직장’도 같은 단어 ‘어브다’를 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우리 삶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기도가 삶이 되듯이 우리 신앙도 삶이 되는 성령 충만한 순복음의 성도들을 통해 세상은 예수님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설 연휴를 통해 우리 삶의 자리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가족들에게 보여 드리자.
  • 2024.02.08

    어중간한 신앙 끊어버려야 한다 - 서상현 목사(은평성전 담당)
  • 국어사전에 어중간하다는 “시간이나 시기가 이러기에도 덜 맞고 저러기에도 덜 맞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3장 16절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래서 어느 한 편을 분명하게 선택하라고 한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 24장 15절에 “만일 야훼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노라”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 편에 설 것이냐 아니면 다른 신과 우상의 편, 마귀와 사탄의 편에 설 것이냐를 분명히 선택하라고 말씀한다. 영적인 세계에는 이 두 가지 편만 있기 때문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 서지 않고 우상과 사탄의 편에 서는 것도 큰 죄지만, 이 쪽 편도 아니고 저 쪽 편도 아니고 머뭇머뭇 거리며 어중간한 신앙 또한 큰 잘못이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어중간한 신앙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어중간한 신앙이다.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세상의 즐거움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일평생 신앙생활을 했지만 간증도 하나 없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은 세상에서 맛을 잃은 소금처럼 살아간다. 종교란에 기록할 때만 기독교인이지 사실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생에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기회는 기다려 주지 않으니 기회가 왔을 때 확신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도록 어중간한 신앙을 끊어버려야 한다. 빌립보서 3장 13~14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말씀한다. 이제 과거의 어중간한 신앙은 끊어버리고 오직 믿음과 은혜로 미래를 향하여 진취적인 신앙으로 전진하시기를 간곡히 소망한다.
  • 2024.02.02

    힘차게 비상하라 - 김석수 목사(복지사업국 담당)
  • 알바트로스는 세상에서 가장 날개가 긴 새로 양 날개를 펴면 최대길이가 3~4m이고, 몸길이는 91㎝에 달한다. 날개를 접은 덩치만 해도 거의 고니(백조) 정도의 크기다. 알바트로스는 순하고 맑은 눈망울을 가졌지만 땅 위에 있을 때는 거추장스럽게 보이는 긴 날개를 늘어뜨리고 있고 물갈퀴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그리고 아무리 크고 긴 날개를 펄럭거려도 쉽게 날지 못해 멸종 위기를 당할 만큼 사람들에게 쉽게 잡힌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 새를 두고 바보 새라고 부르지만 이 새에게는 반전이 있다. 아무도 날 수 없을 만큼 사나운 폭풍이 몰려오는 날, 결코 바보 새가 아닌 새 중에 가장 위대한 새로 그 위용을 드러낸다. 모든 생명이 거친 비바람과 폭풍우를 피해 숨는 그때 숨지 않고 당당하게 절벽에 서서 바람이 거세질수록 바람에 몸을 맡기며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폭풍우 치는 그때가 알바트로스에게는 비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회다. 거대한 날개로 6일 동안 한 번의 날갯짓도 없이 날 수 있고, 두 달 안에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세상에서 가장 멀리, 가장 높이 나는 새이다. 한 번도 쉬지 않고 먼 거리를 날 수 있는 이유는 강한 바람의 힘에 몸을 맡기며 비행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날갯짓은 겨우 1% 정도일 뿐 자신을 바람에 전적으로 맡기다 보니 비바람과 폭풍우도 즐길 수 있게 된다. 바람이 불면 자신의 큰 날개가 글라이더가 되어 하늘에서 멋진 모습을 연출한다. 신앙인도 이 새처럼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중요하다. 알바트로스가 자신을 바람에 맡길 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하나님께 맡길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물밀듯 넘쳐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것일까? 하나님보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더 의지하기 때문이다. 시편 37편 5절을 보면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말한다. 어떤 어려운 문제든지 다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께 맡겨 새해에는 더 힘차게, 더 멀리, 더 높이, 더 신나게, 더 멋지게 날아오르는 삶을 사는 한 해가 되자.
  • 2024.01.26

    의심치 말고 믿고 맡기라 - 김민철B 목사(장년국 담당)
  •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3번 다녀왔다. 갈 때마다 꼭 들리는 곳이 사해이다. 사해는 소금 농도가 30%가 되는 곳이기 때문에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쉽게 뜰 수 있다. 그래서 튜브를 착용하지 않고도 사해에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런 신기한 체험을 하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사해를 방문한다. 이때 가이드들은 관광객들에게 사해에 뜨는 방법을 꼭 일러준다. “바다에 뜨려면 몸에 힘을 빼고 몸을 뒤로 눕히세요. 사해에 몸을 맡기세요. 그러면 먼저 발이 둥 뜨고, 엉덩이가 뜨고 온 몸이 뜹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뜨는 체험을 하지 못하고 사해의 짠 물만 듬뿍 먹고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는 사해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 바다에서는 몸을 뒤로 눕히면 그냥 가라앉는다. 그래서 물을 먹게 된다. 이러한 경험이 자신을 붙들고 있기에 사해에 온전히 몸을 맡기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험이 우리를 얼마나 강력하게 붙들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한다. 왜?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이성을 너무나 강력하게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경험이나 이성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방해할 때가 있는 것이다.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선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자의 만용이 결코 아니었다. 다윗은 주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고 있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 골리앗이 하나님을 크게 모욕하면서 이스라엘 군대를 위협하고 조롱할 때, 다윗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셔서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져내실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었다. 그래서 다윗은 두려움 없이 살아계신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에게 당당히 나아갔다. 그 결과 하나님은 믿음의 소년 다윗을 통해 거인 골리앗을 간단히 넘어뜨리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다윗을 통해 일하신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계셔서 주의 능력을 의심 없이 믿는 자들을 통해 위대한 일을 이루어 나가신다. 여러분 앞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가? 이제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지 말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자신의 작은 경험 안에 가두지 말자. 다윗처럼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는 자가 되자. 사해 위를 둥둥 뜨는 것과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 2024.01.19

    좋은 것을 기대하는 신앙 - 백근배 목사(교무국 담당)
  • 옛날 이탈리아의 한 영주가 자신이 고용한 젊은 정원사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그는 정원 구석구석을 열심히 아름답게 손질하며 꽃을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이것을 본 영주가 “왜 그토록 정성스럽게 정원을 가꾸냐?”고 물었을 때 정원사는 “저는 조각하는 것과 가꾸는 것을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영주가 정원사의 손재주를 보고 조각 공부를 시켰는데 그가 훗날 이탈리아 최고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켈란젤로입니다. 그에게 축복의 시간이 다가온 것입니다. “조각가는 완성된 조각상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하는 과정을 즐거워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새해에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떠한 일을 만나더라도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살면 반드시 최고의 좋은 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우리가 풀 수 없는 수많은 수수께끼의 문제가 항상 놓여 있습니다. 이 문제를 풀지 못해서 자살하고, 마약에 빠지고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러한 문제 역시 다 지나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좋은 것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쁜 기억은 끄집어내어 고민하고, 좋은 생각은 망각의 언덕으로 던져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걷는 동안 자신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시고, 홍해를 가르시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해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이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애굽의 종살이 시절을 추억하며 광야 40년을 원망과 불평으로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행은 좋은 것은 보지 않고, 나쁜 것만 바라보고 생각하는 자세에서 이미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언제나 좋은 것을 기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자신이 고생한 것을 글로 쓰면 몇 권의 자서전을 쓸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과거의 안 좋은 경험들이 아닌 앞으로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써내려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복되고 승리하는 새해를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우리가 가끔 “나에게 그 순간이 다시 온다면” “내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내가 살아온 인생을 바꾸고 싶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돌아보며 한탄하지 않고 주님이 앞으로 주실 좋은 것을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 2024.01.12

    중보 기도로 시작하는 새해 - 윤광현 부목사(교무)
  •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우리 교회는 매년 신년축복 열두 광주리 새벽기도회로 새해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을 내는 성도님들도 간구, 고백, 명령의 기도는 비교적 쉽게 할 수 있지만 중보 기도는 어느 정도의 기본 지식과 훈련 없이는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새해 첫 주일을 맞아 위대한 기도인 중보 기도의 베이직(Basic)을 살펴보고 승리하는 한 해를 시작하길 소망해 본다. 중보 기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나누어주신 사역이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완성하신 구속 사역을 기초로 한다. 이러한 구속자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기도의 중보자이시다(롬 8:34). 그리하여 우리는 중보 기도자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주님과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자리에 초청받을 수 있으며 이 귀한 사역을 친히 예수님으로부터 나누어 받게 된다. 또한 중보 기도는 상급이 약속된 성도의 특권이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의 특권은 하나님의 응답을 보상으로 받으며, 나라를 살리고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결과를 상급으로 받기도 했다(에 4:16). 티끌과 같은 우리가 나라와 민족 그리고 이웃을 위해 중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의 특권이다. 마지막으로 중보 기도는 성도의 최우선의 사역이며 의무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중보 기도를 어떤 사역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중보 기도는 그 자체가 최우선의 사역이다. 예수님도 사역을 감당하기 전에 늘 기도를 쉬지 않으셨고, 사무엘 선지자도 ‘기도하기를 쉬는 죄(삼상 12:23)’를 범하지 아니하겠다고 고백했다. 복음 전파의 사명을 받은 성도들에게 중보 기도는 가장 강력한 의무이다. 2024년 희망에 찬 새해를 맞아 우리가 드리는 귀한 기도의 시간에 가장 위대한 기도인 중보 기도의 베이직(Basic)을 완성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욱 의미 있고 풍성한 응답이 쏟아지기를 기도한다. 할렐루야!
  • 2024.01.05

    한해를 돌아보며 - 김태선 목사(마포1대교구장)
  •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저서 『나를 따르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 인정하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는 용서의 설교요 공동체의 징계가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찬이요 개인의 참회가 없는 죄 사함이다. 값싼 은혜는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 사람이 되신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다.” 그러면서 본회퍼 목사는 “값비싼 은혜는 밭에 숨겨진 보화다. 은혜가 값비싼 것은 죄를 비난하고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무엇보다 값비싼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소중하기 때문이고, 이를 위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목숨을 대가로 지급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한 해를 돌아보며 결산의 의미를 두고 각자의 삶을 정리하는 12월을 보내게 된다. 연초에 계획했던 것들이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아직 진행형인지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분주하게 새해를 맞이하게 되고 다시 바쁘게 한해를 출발하게 된다. 새롭게 한해를 시작한 것 같지만 새로운 것이 아닌 ‘어제’(오늘의 바로 전날)를 지나 ‘오늘’(지금 시간이 흐르고 있는 이 날)을 또 맞이하게 된 것뿐이다. 그 하루가 나에게 소중한지 소중하지 않은지는 그 하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은 한해를 돌아보는 마지막 날이다. 이 하루 짧은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하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우리는 오늘 하루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 하루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그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셨다. 예수님은 33년을 한결 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의 모습으로 살아오셨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면의 심한 고통을 감내하시고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애쓰고 힘써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 예수님의 기도가 지금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값비싼 은혜이다. 본회퍼 목사는 39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 진력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본회퍼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그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진짜’ 제자로 살기 위해서 힘썼던 사람이다.” 짧은 오늘이 지나면 대망의 2024년 한해가 시작된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음을 깨닫게 된다. 당신에게 은혜는 값싼 은혜인가? 값비싼 은혜인가?
  • 2023.12.29

    크리스마스 선물 - 이승훈 목사(강서2대교구장)
  • 오늘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다. 크리스마스 이브하면 어릴 적 일이 생각난다. 어둠이 깊게 내린 밤, 잠을 자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혹시 산타 할아버지가 아닌지 가슴이 뛰었다. 기대 반 설렘 반으로 눈을 반쯤 떴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머리맡에 뭔가를 놓고 나간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놓고 간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선물을 놓아두고 간 사람은 산타가 아니라 어머니셨다. 그때 알게 되었다. 왜 항상 크리스마스 선물이 과자 한 봉지였는지. 가난한 형편에 혼자 아이들 키우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과자 한 봉지밖에 없었던 어머니. 시장에서 장사하시며 바쁜 중에도 자녀들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못 받아 실망할까 걱정하셨던 어머니.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산타를 기다리지도, 좋은 선물 받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과자 한 봉지가 더 소중하고 감사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지나 결혼하고 두 딸을 낳고 부모가 되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 더 알 것만 같다. 힘들고 어려워도 자녀의 꿈을 지켜주고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자녀들에게 무슨 선물을 할까? 필요한 것, 좋아하는 것,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결정하는 것조차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아무리 좋은 선물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마음을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예전보다 물질이 풍부해지고 환경이 더 좋아졌다고 해도 우리가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려고 할 때, 부모 마음에는 항상 부족하고 모자란 느낌이다. 우리가 믿음의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 자녀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 2023.12.22

    여유가 넘치는 아름다움 - 신동석 목사(관악대교구장)
  •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는 때로는 쉬어가는 여유가 필요하다. 마음의 여유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세상을 밝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그로 인해 웃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관대히 대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여유는 나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삶에 대한 강력한 추진력, 생기와 활기를 불어넣어 주며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효과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지 창조를 하루아침에 행하시지 않으셨다. 6일 동안 만드시고 마지막 7일째는 안식을 하시며 창조하신 세계를 감상하시는 여유와 함께 기뻐하셨을 것이다. 생활 속의 여유로움을 다른 말로 한다면 작품 가운데 있는 여백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다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있어도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다면 그것은 공허함 즉 외로움으로 더욱 힘들다. 여백의 아름다움은 주변과 함께 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연말을 맞이한 우리는 주변을 돌아보고 함께할 때 아름다워질 수 있다. 그렇다면 삶의 여유는 어디서 올 수 있는가? 나의 노력, 주어진 달란트로 열심히 사는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내가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순간 나에게 주어진 것이 감사가 될 것이다. 시간, 물질, 건강 등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느끼게 될 것이다. 성경 인물 중 에녹은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않다고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하였는지에 관심이 없다. 성경의 관심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한 자라는 것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연말을 맞이하는 우리는 바쁘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행하실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하면서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연말이 되길 소망한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 2023.12.15

    베드로를 전도한 안드레 - 심형섭 목사(동작대교구장)
  •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로서 베드로와 같이 갈릴리 해변 벳새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였습니다. 그는 본래 침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36)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른 열 두 사도 중 제일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열 두 제자 중에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았기에 초대 교회의 문서에 보면 안드레에게 “먼저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자기의 형제인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안드레가 자기의 형제인 베드로를 즉시 예수님에게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은 형제간의 인격적 관계가 좋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형제가 서로 좋아하고 서로 신뢰하고 서로 존중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전 생계를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포기할 정도로 예수님은 소중한 분이었기에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안드레는 결단하였습니다. 안드레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습은 단순하게 기록되었지만 그 내면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삶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함을 뜻합니다. 실제로 안드레의 삶은 예수께 부름 받은 후부터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안드레는 육신의 양식을 위하여 물 속에 있는 고기를 잡는 자가 아니라 죄악의 물결 속에 떠내려가는 불쌍한 영혼들을 건져내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안드레의 전도를 통하여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훗날 3000명을 회개시킨 베드로를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안드레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베드로가 되는 것 보다는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행할 때 안드레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찾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사람들이 굶주려 고통 받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나머지 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안드레의 모습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천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안드레가 사람들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며 찾아가는 열정이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을 행하심에 한 도구로 사용 받았습니다. 안드레와 같이 주변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며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여 우리도 안드레와 같은 역할을 감당함의 결과로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 2023.12.08

    평균의 종말 - 조지훈 목사 (순복음선교연합회 담당)
  • 토드 로즈가 쓴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40년 말 미국 공군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비행기 성능이 좋아졌지만 많은 사고가 여러 기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을 찾던 조사 담당자들은 비행기 조종석 설계로 눈을 돌렸다. 조종석을 최초로 만들었던 것은 1926년이었다. 당시 엔지니어들은 조종사 수백 명의 신체 치수를 잰 뒤 평균을 냈고 이를 기준으로 조종석을 만들었다. 평균에 맞추어 조종석 내부와 헬멧의 크기 등을 정했던 것이다. 평균에 바탕한 기준은 3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았다. 이에 조사 담당자들은 조종사들의 체격이 이전보다 커졌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조종사 평균 치수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새로운 평균에 따라 비행기를 설계하면 많은 문제가 개선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구원 중 길버트 대니얼스 중위는 이런 해결책에 의문을 가졌다. 대학 시절 남학생 250명의 손 모양을 비교·분석했던 그는 어떤 학생도 평균치의 손 모양을 가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의 문제 제기에 따라 조사한 결과 조종사들의 신체 치수의 평균에 맞는 조종사들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개인 맞춤형 조종석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새로운 원칙이 마련됐다. 조절 가능한 조종석, 조절 가능한 헬멧 조임 끈, 조절 가능한 비행복 등이 제작됐고 이후 미 공군은 최강의 공군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평균을 추종한다. 그 평균 속에서 우리 각자의 얼굴은 사라져버리고 우리 각자가 가진 고유한 삶의 이야기도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균을 지향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각자의 얼굴을 가진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새로운 소명을 거부했던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15)이라고 소개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다른 방식으로 만나주셨고, 그들 각자의 삶을 다른 방법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 각자의 삶을 다른 모습, 다른 방식, 다른 색깔로 인도하신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한 얼굴을 갖는다. 우리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갖는다. 우리만의 고유한 색깔을 갖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평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원히 변치 않는 방법이시다.
  • 2023.11.24

    ‘만종’에 그려진 감사의 기도 -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장 프랑수아 밀레는 프랑스 화가로서 ‘씨 뿌리는 사람’,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하다. 특히 ‘만종’은 프랑스의 자랑이라고 여겨지며,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우리나라의 박수근 화백이 열두 살 때 만종의 원색 도판을 처음 보고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만종’(저녁 종)의 원제목은 ‘삼종기도(L'Angelus)’이다. 중세 시대 하루에 세 번(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 교회 종이 울릴 때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를 말한다. 이 그림은 늦가을 무렵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으며, 감자 수확 중인 남녀 한 쌍(아마도 부부)이 마주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해 질 무렵 어둑해진 분위기와 노란색 석양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따듯함과 평안함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저 멀리 지평선 위로 작고 흐릿하게 보이는 교회 종탑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판 전체로 울려 퍼지고 있는 듯하다. 밀레는 어릴 적부터 농사짓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그리고 힘들게 일하면서도 진심으로 땅을 아끼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가난한 프랑스 농민의 일상을 통해, 힘들고 고달픈 상황 가운데에서도 감사하며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밀레는 ‘만종’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종은 내가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린 그림이라네. 옛날에 우리가 밭에서 일할 때 저녁 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지. 어쩌면 그렇게 우리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우리 일손을 멈추게 하고는 삼종기도를 올리게 하셨는지 모르겠어. 그러면 우리는 모자를 손에 꼭 쥐고서 아주 경건하게 고인이 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했지!” 만약 밀레가 자기 경험을 그림에 투영해서 그린 것이라면 만종 속 부부의 기도는 단순히 자신들이 수확한 감자에 관한 감사 기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갓 캐낸 감자 앞에서도 고통과 죽음 가운데 있는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크고 작은 수확을 감사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이 순간도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가난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자. 그들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는 한 폭의 명화가 될 것이다.
  • 2023.11.17

    소유보다 귀한 것 - 김진수 목사(서대문성전 담당)
  • 가을에는 좋은 날씨 덕분에 종종 막내 아이를 뒤에 태우고 자전거를 탄다. “아빠는 언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어요?” 아이가 물었다. 어렸을 때 많이 아팠던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자전거를 처음 탔고, 이어 첫 자전거를 갖게 된 이야기도 해주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출퇴근 하실 때 자전거를 이용하셨는데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에 내 자전거가 갖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며칠 후 아버지께서는 새 자전거를 선물해주셨는데 아버지의 출퇴근용 자전거를 팔고 나를 위해 자전거를 사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울컥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이가 “그 때는 따릉이가 없어서 빌려 탈 수 없었나 봐요. 난 지금 아빠랑 같이 탈 수 있는데요”라고 하는데 문득 얼마 전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다. 2024년 메가트렌드 중 하나가 소유에서 임대로 개념이 이전된다는 것이었다. 기존세대처럼 무리하게 집 한 채를 소유하기보다 소비자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는 렌탈 수요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소유하지 않는 삶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계시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우리 삶이 “소유한 것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2장 말씀처럼 내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많이 쌓아놓은 소유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작게는 자전거부터 크게는 집까지 우리는 매일 소유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쌓아가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열심들이 내 것을 소유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한 사명과 나눔에 이어지지 않는다면 헛수고나 다름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무소유에 가까운 삶을 사시고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필요한 것을 이미 아셔서 채워주실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소유에 대한 마음이 내려놓아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인생의 최종목적지’를 떠올리면 된다. 시편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했다. 인생의 최종목적지가 주어진 생애뿐이라면 소유에 몰두해도 상관없겠지만, 우리 인생의 최종목적지는 생애를 넘어서는 곳에 있으니 본질에 집중하여 달려가는 편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 된다. 짧은 인생, 유행에 민감하고 소유에 몰두하기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 나라에 주의 백성들이 돌아오도록 이끄는 인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공급해주시고 덤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 2023.11.10

    영적 감수성 - 이인천 목사(기도원 교구 대교구장)
  • 성경 로마서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합니다. 영어로 ‘듣다’라는 단어는 ‘히어링’(hearing)과 ‘리스닝’(listening)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히어링’은 내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를 말합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들리는 소리의 총체를 의미합니다. 이 소리는 집중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반면 ‘리스닝’은 집중해서 듣는 소리,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리스닝’이란 어느 특정 공간, 특정 시간에 의지를 가지고 집중해서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설교를 들을 때, 교실에서 수업을 들을 때 ‘리스닝’을 합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할 때, 그 들음은 ‘리스닝’일까? ‘히어링’일까요? 영어 성경에서는 ‘히어링’으로 되어 있고, 원어에는 ‘아코아’로 되어 있습니다. ‘아코아’는 집중해서 듣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냥 소문, 풍문, 집중하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라는 뜻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할 때, 하나님은 특정 장소, 특정 시간, 특정 공간에서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장소, 모든 상황, 모든 관계, 모든 환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켄 가이어가 쓴 『영혼의 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켄 가이어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영적인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허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 들에 핀 꽃, 인간관계,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영역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 감수성은 몸의 근육을 키우는 것처럼 영적 감수성을 키우면 키울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예민해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순간, 모든 상황, 모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약속의 땅을 알고 간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다”고 말합니다(히 11:8). 아브라함은 매 순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향해 칼을 내리치는 순간까지도 모든 상황, 모든 환경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아브라함은 아들을 향해 칼을 내리치는 그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 이삭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 모든 순간, 모든 공간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11월 깊어져 가는 가을, 자연을 바라보며 화창한 하늘과 단풍들 그리고 울창한 숲에서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는 것은 어떨까요?
  • 2023.11.03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왜 만드셨을까? - 이성광 목사(동작성전 담당)
  •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을까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지 않았으면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을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신 이유는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가 되시고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아담은 자신이 먹지 못하는 선악과를 보면서 온 세상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깨닫습니다. 또한 선악과를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선악과만을 금지시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 외에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금지하는 선악과만 볼 것이 아니라 선악과 외에 모든 것을 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하게 맡겨주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악과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의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사랑의 관계는 인격적이며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강압적이거나 억지로 하면 그것은 사랑의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로봇이나 기계와는 인격적 관계나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는 버튼이 있어서 ‘찬송 버튼’을 누르면 찬송을 하고 ‘기도 버튼’을 누르면 기도하고 ‘순종 버튼’을 눌렀을 때 순종한다면 이것은 기계와 같습니다.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하나님을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자유의지가 있어야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맺어집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선택에서 나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에게는 아담의 사랑과 순종이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했을 때 하나님은 그 사랑이 기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신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할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알지만 하나님이 아담과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원하셨고 그만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상징하는 동시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 2023.10.27

    땅따먹기 - 김범석 목사 (광명성전 담당)
  • 소싯적 마땅한 놀 거리가 없던 시절, 자주 했던 놀이로 ‘땅따먹기’가 있었습니다. 고르고 넓은 땅에 커다랗게 네모진 사각형을 그리고, 한 모퉁이에 한 뼘만 한 크기로 둥그렇게 그려 각자의 집으로 정합니다. 그리고 납작하고 반듯한 작은 돌멩이를 골라 손가락으로 세 차례 튕겨 집으로 돌아오면, 그만큼은 내 땅이 되는 놀이였습니다. “내 땅을 차지한다”라는 기대감은 매력적으로 다가와 땅 차지 욕심으로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즐겼던 놀이였습니다. 이 놀이를 제 두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놀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두 아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아주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티격태격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내 땅이, 네 땅보다 더 크다, 아니야 내 땅이 더 커.” 두 아이는 자신이 가진 땅이 서로 크다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던 제가 말했습니다. “애들아, 그만 집에 가자.” 그러자 언제 그랬었냐는 듯 아이들은 손을 털고 일어나 제 뒤를 따랐습니다. 납작한 돌멩이도, 널따랗게 그려진 땅도 다 뒤로 하고 말입니다. 요즘 문득 그때 일이 떠오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너나 할 것 없이 “내 땅이 크다” “내 말이 옳다”는 목청 높인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옵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들리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며 옥신각신하는 세태를 바라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어릴 적 ‘땅따먹기’를 하는 마음으로 세상과 현실에 가지고 있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이 땅에 모든 걸 남겨놓고 하늘 천국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 창고를 채워야 할 때라는 확신이 드는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발 끈을 다시 고쳐 묶고 하늘 곡간을 채우는 복음의 ‘땅따먹기’를 더욱 줄기차게 해야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19~20).
  • 2023.10.20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하나님이시라 - 장재욱 목사(경인성전 담당)
  • 요셉의 일생은 파란만장했다. 어찌나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요셉은 형들보다 단명(短命)할 정도였다. 요셉의 일생을 담은 창세기를 읽다보면 우리네 인생의 애환이 고스란히 떠올라 나도 몰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요셉의 이야기를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도 그러하니 본인의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으랴. 형들을 만났을 때 나 같으면 “당장 저들을 옥에 가두고 한 놈씩 매우 쳐라” 하고도 남았을 텐데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가히 예수님의 예표라 할 만한 인성이다. 요셉이 형들에게 보여준 모습을 통해 요셉의 신앙을 본다. 그 모습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그릇에도 꼭 담아야 할 보물이다. 첫째, 요셉은 형들의 두려움을 오히려 위로하고 안심시켰다. 요셉은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형들을 먼저 안심시켰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라고 하면서 인생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재확인한다. 형들의 시기와 죄악으로 요셉이 무수한 고난을 당했음에도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밝히기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형들을 용서하였던 것이다. 형들은 형들의 수준에서 요셉을 바라보고 죽음의 두려움을 느꼈다면 요셉은 이미 예수님과 같은 인성을 가진 사람이 된 것이다. 둘째, 요셉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8).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가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는 이야기다. 형들은 악을 행하였으나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셨다는 것을 말한다. 요셉의 하나님은 우주 최고의 지혜자이셨고 주관자이셨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 인생이 요셉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고난을 만날 때가 있다. 이영훈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마음으로 생각을 바꿔야 한다. 마음을 고쳐먹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다. 내 마음속의 미운 형들을 바라보지 말고 요셉의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낼 사람을 찾고 계신다.
  • 2023.10.13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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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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