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열전
(13) 코리 텐 붐 여사
  • 전 세계에 용서의 복음 전한 위대한 전도자
    나치 독일로부터 800여 명의 유대인 구출하고 전쟁 후유증 겪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전해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전쟁을 일으킨 당시 나치 독일은 도시 곳곳에서 유대인들과 이들을 돕는 사람들까지도 학살했다. 이때 죽음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도운 사람이 바로 네덜란드의 전도자 코리 텐 붐 여사이다. 코리 텐 붐 여사는 1892년 네덜란드 하를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교육을 받아온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을 도와야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 난민들을 숨겨주고 탈출하는 일을 도왔다. 당시 나치 독일 정권이 유럽계 유대인들을 제도적으로 탄압하고 조직적으로 학살했는데 이때 텐 붐 여사가 탈출시킨 유대인은 800여 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1944년 2월 28일, 전쟁 종식을 앞두고 독일 나치의 정치경찰인 게슈타포에 의해 발각돼 그녀의 일가족이 체포됐다. 유대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유치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이후 나치 수용소에 수감 된 그녀는 열흘 만에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이 의지했던 아버지의 소천 소식에 깊은 절망에 빠졌던 그였지만 슬픔을 뒤로하고 몰래 들여온 성경을 보며 하나님을 예배했다. 하루하루 버티며 사는 것이 전부였던 수용소에서 언제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텐 붐 여사는 매일 밤 성경공부 모임을 갖고 수감자들과 군인들을 위해 기도했다. 절망이 드리운 수용소에 복음은 한 줄기 희망이 됐고 수감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후 기적적으로 석방된 그녀는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이들이 회복할 수 있는 재활센터를 설립했다. 텐 붐 여사는 가족과 친척을 잃은 고아, 수용소에서의 트라우마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사람 그리고 전쟁 중 독일과 협력했던 실직한 자국민들까지도 센터에 입소시켰다. 이는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음을 실천한 것이었다. 코리 텐 붐 여사하면 널리 회자 되는 이야기가 있다. 독일의 한 교회에서 용서에 대한 강연을 마치고 나왔는데 강제수용소에서 언니 베시를 고문했던 악랄한 간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텐 붐 여사는 그를 본 순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그를 용서 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언니를 죽게 한 장본인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그를 용서하게 하셨습니다.” 세계 각국을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전한 텐 붐 여사는 그녀의 삶의 여정이 담긴 『주는 나의 피난처』 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그녀는 1983년 4월 15일 91번째 생일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2022.10.21 / 금지환 기자

    (12)이기풍 선교사
  • 제주도 복음화에 헌신한 한국 최초의 선교사 13년간 제주 전 지역에 30개 교회 설립 이기풍 선교사는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 7인 중 1명이자 첫 공식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1865년 11월 2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이기풍 선교사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6세 때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삼경을 외웠고 12세에는 붓글씨로 백일장 장원에 뽑힐 정도로 특출났다. 이기풍 선교사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이기풍 선교사는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에게 돌을 던져 턱을 크게 다치게 했는데 그가 훗날 스승인 된 모펫 선교사였다. 이기풍 선교사는 소안론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모펫 선교사에게 용서를 구했고 그가 세운 조선 최초의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서경조, 길선주, 방기창, 한석진 등과 함께 신학을 공부했다. 1907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같은 날 동기인 길선주 목사의 집례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됐다. 이것이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 파송이었다. 1908년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 선교사는 조랑말을 타고 전도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그가 복음을 전할 때면 도민들은 그에게 굴욕을 주었고 집단 구타까지 행했다.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을 잊지 않았다. 그런 그의 선교 사역에 물꼬가 트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제주도에 큰 홍수가 나서 주민들이 떠내려갈 때 이기풍 선교사가 물속으로 뛰어 들어 주민 5명을 구조한 것이다. 또한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며 기독교인은 사람을 살리는 존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도민들에게 큰 신뢰를 얻게 됐고 그가 세운 제주 성안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 지역 복음화를 위해 순회 전도사역을 이어갔고 금성·조천·모슬포·한림·용수 등의 지역에 교회를 설립했다. 중간에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내륙으로 돌아왔지만 이내 다시 돌아가 13년 동안(1909~1915, 1927~1932) 제주도에서 사역하며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제주도 사역을 마무리하고 순천에서 사역하던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발하다 미제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1938년 체포됐다. 순천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그는 1942년 6월 20일 77세의 나이로 소천 받았다. 제주시 조천읍에는 제주도 복음화에 한 획을 그은 이기풍 선교사를 기리기 위한 '이기풍선교기념관'이 건립됐다. 현재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운영이 중단되어 모든 자료는 제주 모슬포교회 '이기풍 기념관'으로 이관됐다.
  • 2022.04.24 / 금지환 기자

    (11)에릭 리들
  • “주일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날입니다” 영화 ‘불의 전차’ 통해 그의 일생 알려져 올림픽 금메달 영광 버리고 선교사 결단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 1924년 8회 파리올림픽 육상 100m 금메달 후보였던 영국의 한 선수가 한 말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중국 선교사인 그의 이름은 에릭 리들이다. 에릭은 아버지 제임스 리들 선교사의 아들로 1902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가 됐을 때 처음으로 참가한 교내 육상대회에서 100m 1등, 200m 2등을 하며 육상선수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에든버러 대학으로 진학해 교내는 물론 영국이 자랑하는 최우수 육상선수가 됐고 마침내 올림픽 단거리 육상선수로 발탁됐다. 에릭은 올림픽 육상 100m 경기가 평일이 아닌 주일에 열려 경기를 포기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주일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날이라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에릭은 평일에 열린 200m와 400m 경기에 출전해 예상을 뒤엎고 동메달과 금메달을 획득했다. 특히 400m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처음 200m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해 뛰었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 힘차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겨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올림픽 이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명성이 높아갈 때쯤 에릭 리들은 사람들에게 중국 선교사가 될 것을 선포했다. 이전부터 아버지와 형을 이어 중국 선교사가 되고 싶었던 에릭은 이듬해 23세의 젊은 나이로 중국 선교사로 파송됐다. 에릭 선교사는 12년간 톈진 중영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후 7년 동안 자신이 태어난 샤오창 지역에서 농촌 사역을 펼쳤다. 그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사역지를 옮긴 이유는 선교사로 활동하던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과 일본군의 침략으로 수많은 농촌 주민들이 전쟁의 희생양이 됐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에릭 선교사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일하며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마을을 방문해 전도 집회를 열었다. 또한 외국인 선교 활동이 제한될 것을 예상하고 제자훈련과 교인양육 지침서 등을 직접 저술하며 현지인 사역자를 세우기 위한 방안도 모색했다. 1939년 현지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던 에릭 선교사는 뜻하지 않게 중국에 억류됐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중국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외국인들을 수용소에 억류했다. 이때 에릭 리들은 1만 8000여 명의 서양인들이 모인 수용소를 제2의 사역지로 삼고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분쟁을 해결하는 대표로 활동하며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매진했다. 에릭은 1945년 2월 뇌출혈로 수용소에서 43세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훗날 에릭 리들의 일생을 담은 영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가 제작돼, 이를 계기로 에릭 리들의 일생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 2022.03.27 / 금지환 기자

    (10)김윤식 선교사
  • 한국인 최초로 중국에 파송된 의료 선교사 현지인 및 선교사 가족 건강 돌보며 자비량 선교 관청에 의료 지원하며 수감자 전도에도 앞장서 김윤식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중국 복음화를 위해 활동했다. 그는 의료선교의 초시였던 알렌 선교사처럼 서양의술을 활용해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1891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숭실학교를 거쳐 세브란스전문의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학교 공부를 마친 후 유학을 계획했지만 당시 대구제일교회 홍승한 목사와 아버지의 권유로 중국 의료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됐다. 1918년 대한민국 개신교는 의사로 활동하던 그를 중국 라이양으로 파송했다. 김윤식 선교사의 파송은 알렌 선교사가 내한한지 34년 만에 개신교 의료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7세의 나이로 중국 라이양에 도착한 김윤식 선교사는 제일 먼저 선교사 가족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김 선교사는 질병에 대처할 마땅한 방도가 없었던 선교사와 가족들의 건강을 돌보며 그들의 선교활동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현지인도 함께 진료했고 그들에게 신앙서적을 나눠주며 전도 활동에도 매진했다. 병약했던 방효원 선교사의 아내 계은승 사모는 김 선교사로부터 아홉 번이나 수술을 받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의료선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에 그를 목사나 선교사처럼 지원하지 않았다. 김윤식 선교사는 오직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선교를 자비량으로 해결했다. 선교지에 도착한 그해 12월, 개인 비용으로 셋집을 얻어 ‘계림의원’을 개업했다. 계림의원은 당시 라이양에서 서양의학을 시술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서양선교사 가족들은 물론 현지 교회와 학교 구성원 모두 이 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의료선교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김윤식 선교사는 많은 헌신과 희생을 감내해야했다. 활동 초기에는 중국인들에게 아편장사로 오인 받았고 선교지에서 활동한지 4년 만에 자녀를 둘씩이나 천국으로 보내야했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라이양에서 청도로 이주한 김윤식 선교사는 ‘중앙의원’을 개원해 의료선교를 이어갔다. 그는 서양인과 현지인 구분 없이 모두에게 친절히 진료하며 지역에서 큰 존경을 받았고 관청에서도 촉탁을 받아 수감자들의 치료와 위생을 담당했다. 이로 인해 조선예수교장로회는 ‘감옥 전도 사업’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은 그가 중국 땅을 밟은 후 거둔 의료선교의 결실이었다. 김 선교사는 1940년대 들어서 광복군 군자금에 관계된 것이 드러나 체포됐다. 이후 영구 출국을 당하면서 그는 더 이상 의료선교를 할 수 없게 됐다. 선교지에서는 의료선교사로, 고국에서는 장로이자 의사로 활동한 그는 위암으로 투병하다 1958년 8월 향년 6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금지환 기자
  • 2021.11.28 / 금지환 기자

    (9)에이미 카마이클
  • 고아와 과부 위해 헌신한 인도의 영적 어머니 인도 복음화 위해 미션스쿨 및 병원 설립 힌두의 땅 인도에서 '영원한 영적 어머니'로 불리는 선교사가 있다. 바로 에이미 카마이클이다. 에이미는 56년 동안 안식년 없이 인도에서 고아와 과부를 섬기는 선교사로 활동했다. 1867년 북아일랜드 동쪽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에이미 카마이클은 18세가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의 가장이 됐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북아일랜드의 수도인 벨파스트로 이사를 간 에이미는 당시 천막교회 모임인 케직 사경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허드슨 테일러의 설교 말씀을 듣고 감명을 받아 선교사가 되기로 결단했다. 1892년 23세의 에이미 카마이클은 일본으로 첫 선교를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15개월 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신경쇠약에 시달려 더 이상 선교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이미는 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친구로부터 인도 선교를 권유 받았고 마침내 1895년 영국 성공회 제나나 선교회로부터 인도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남인도 도나버에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한 에이미 카마이클은 힌두교 사원으로 팔려가는 아동들을 구출하는 사역에 매진했다. 1902년 에이미는 보다 전문적으로 아이들을 구출하고 양육하기 위해 7명의 현지 여성들과 '도나버 공동체'를 결성했다. 인도 사람들은 에이미를 '어린애를 잡으러 다니는 여자', '나쁜 엄마'라고 불렀으며 심지어 그녀를 납치까지 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도 있었지만 에이미는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도나버 공동체에는 날이 갈수록 아이들이 증가했다. 이에 에이미는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하기 위해 수양관을 설립했다. 또한 도나버 공동체 모두가 예배 드릴 수 있는 기도의 집과 인도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에이미 카마이클은 어떠한 위기와 절망이 찾아와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에 매진했다. 병원을 건립할 때도 하나님께 간구해 1만 파운드가 모금되는 기적을 체험했다. 현재 도나버 공동체는 병원과 고아원, 노인복지시설, 어린이집, 기숙학교, 출판사 등의 사업을 전개하는 선교단체로 성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꺼려하고 반대했던 빈민가의 아동들을 위해 헌신한 그녀는 1951년 84세를 일기로 인도 땅에 묻혔다. 그녀의 묘비에는 인도 어린이들의 영원한 영적인 엄마라는 의미인 인도어 '암마'(Amma)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
  • 2021.10.24 / 금지환 기자

    (8)방효원 선교사
  • 중국 현지인 선교 위해 한평생 헌신 한국인이 세운 첫 해외 신학교 ‘라이양성경학교’설립 아들 방지일 목사, 2대에 걸쳐 산둥성 선교 중국 선교하면 허드슨 테일러가 떠오른다. 그런데 한국인 중에도 중국 선교를 위해 한평생 헌신한 사람이 있다. 바로 방효원 선교사이다. 1886년 평안북도 철산에서 태어난 방효원 선교사는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자랐다. 방효원 선교사는 12세 되던 해, 방씨 가문의 장손이었던 아버지 방만준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 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향에서 쫓겨나 모진 핍박을 받으며 타향살이를 하게 됐다. 방효원 선교사는 만 20세가 된 1906년 평북 선천으로 거주지를 옮겨 기독교 중등 사립학교인 선천 신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신성학교에서 양전백 목사와 위대모 선교사에게 신앙 훈련을 받았고 이후 평양 장로회신학교로 진학해 마포삼열,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신학교를 졸업한 방 선교사는 평북 철산군에 위치한 영동교회에서 목회를 하다 박태로 선교사와 시찰을 다녀온 후 선교사로 자원했다. 1917년 가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 방효원 선교사는 산둥성 내양에 부임해 남관교회를 설립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현지에 부임하자마자 중국어 습득에 열을 올렸다. 현지에서 전도와 심방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선행되어야했기 때문이다. 방 선교사는 “화인(華人)을 얻으려면 화인(華人)이 되어야만 한다”며 “중국어를 구사하고 현지 의상을 입고 현지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라이양에 거주하면서 남관교회와 지방교회를 관리하고 순회전도자로 활동했다. 또한 전도대를 결성해 감옥전도와 걸인구제에도 매진했다. 그는 홍승한·박상순·이대영·주현측 선교사와 동역하며 30여 개의 교회를 세워 내양노회를 조직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내양노회에 속한 회원교회 즉 현지 교회가 자립, 자치, 자전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교육영역에 주력했다. 방 선교사는 현지 그리스도인들을 양육하기 위해 성경공부 집회인 제직사경회를 시작했고 1923년 1월 1일에는 교회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 ‘라이양성경학교’를 설립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한국인 최초로 외국에 신학교를 설립한 영예를 얻게 됐다. 그의 삶을 본 중국 성도들은 방 선교사를 존경했고 영적 아버지로 삼았다. 심지어 반기독교운동자들조차 그를 칭찬하며 도움을 주었다. 1935년 산둥에서의 사역을 끝마치고 귀국한 방효원 선교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방지일 목사가 1937년 산둥성 선교사로 부임했다. 방효원·방지일 부자는 2대에 걸쳐 중국 산둥성 복음화를 위해 38년 동안 헌신했다. 방효원 선교사는 1936년 상하이 조선교회에 재파송되어 1944년까지 활동하다 1945년 국내에 복귀해 목회활동을 이어갔다. 6·25전쟁으로 1953년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방 선교사는 지병이 발병해 항년 6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중국 산둥 선교에 힘쓴 방효원·방지일 선교사는 한국과 중국의 크리스천, 선교사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금지환 기자
  • 2021.08.29 / 금지환 기자

    (7)윌리엄 캐머런 타운센드
  • "가장 훌륭한 선교사는 현지어로 쓰여진 성경입니다" 복음 전파 위해 미전도 종족언어 성경번역 힘써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 설립해 선교사 양성 "가장 훌륭한 선교사는 선교지 현지인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이다. 성경은 안식년도 필요 없고 외국인이라고 배척받는 일도 없다." 20세기 성경 번역 선교의 선구자 윌리엄 캐머런 타운센드가 남긴 말이다. 타운센드는 1896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호수에서 수영하다 익사 직전에 구출된 타운센드는 일찍이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였다. 환경이 어려워 일과 학업을 병행함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1914년 옥시덴탈 대학교에 입학한 타운센드는 해외 선교를 독려하는 단체 '학생자원운동'의 책임자인 존 모트의 설교를 듣고 해외 선교에 큰 도전을 받았다. 이듬해 그는 자신의 열정을 확인해보고자 방학기간 동안 남미 지역 성경 판매원으로 자원해 1917년 과테말라로 떠나게 된다. 타운센드는 친구 로비와 함께 과테말라의 여러 지역에서 전도지를 나누며 성경을 판매했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성경을 보급하는 일에 사명을 가졌던 그는 현지 사람들이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20만명의 카크치켈 인디언 중 스페인어를 이해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타운센드는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고자 결심하고 학교를 중퇴했다. 그는 선교 활동 중 한 인디언의 "당신네 하나님이 그렇게 똑똑하다면 왜 우리말을 모릅니까?"라는 질문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때부터 타운센드는 구어로만 있던 현지 인디언들의 언어인 카크치켈어를 배우고 문자를 직접 만들어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매진했다. 수많은 난관이 있었으나 포기하지 않았던 타운센드는 1926년 카크치켈 문법책을 완성하고 1929년에 카크치켈어 신약성경 번역을 완성했다. 성경 번역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이후 캐머런 타운센드는 문자가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인디언들에게 보급할 성경 번역을 위한 선교사 양성학교를 시작했다. 1934년 미국 아칸소 설퍼 스프링의 농가에서 '성경 번역가 지망자를 위한 여름 캠프'를 시작했다. 1942년에는 훈련받은 선교사들을 선교지에 파송해 성경 번역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를 설립했다. 타운센드는 이밖에도 정글 항공대 및 라디오 선교회를 통해 페루 아마존 정글에 거주하는 인디언들에게도 성서를 보급했고 1968년 남미 사역을 마무리 지었다. 타운센드는 72세에도 러시아 코카서스 지역으로 떠나 러시아어를 배우며 100여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코카서스인들에게 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캐머런 타운센드는 1982년 향년 86세로 하나님 품에 안길 때까지 세계성경번역선교회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가 일평생을 성경번역에 투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경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 2021.07.25 / 금지환 기자

    (6)손정도 목사
  • 이웃 위해 헌신하는 ‘걸레의 삶’ 선택한 성자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등 독립운동 헌신 큰 아들 손원일 제독, 초대 해군참모총장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존경받는 애국지사가 있다. 바로 손정도 목사이다. 1882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난 손정도 목사는 유교가문에서 성장했다. 그는 23세 무렵,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던 중 투숙한 곳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개종했다. 그는 개종 후 상투를 자르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문 대대로 모셨던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쉈다. 이 일로 손정도는 고향에서 쫓겨나 평양으로 떠나야했다. 그는 평양에서 미감리회 선교사인 문요한(John Z. Moore)의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활동하며 숭실중학에서 공부했다. 4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손정도 목사는 1909년 진남포교회 전도사로 첫 목회를 시작해 1911년 만주지방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손정도 목사는 하얼빈·선양·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다니며 선교 활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하지만 그는 1912년 ‘가츠라암살음모사건’ 가담 혐의로 체포 돼 모진 고문을 받고 1년 유배형을 선고 받았다. 손정도 목사는 전남 진도로 유배 돼 석방되기까지 순사, 형사를 비롯해 주민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하며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 이후 손정도 목사는 정동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임하며 ‘하나님 사랑이 곧 민족과 나라 사랑’임을 강조했다. 그의 설교에 영향을 받은 인물이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 열사이다. 1918년 손정도 목사는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 조선민국임시정부의 평정관,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했다. 손정도 목사는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양보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삶을 ‘걸레의 삶’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틈틈이 자녀들에게 “비단옷은 없어도 큰 지장은 없지만 걸레는 잠시라도 없어지면 집안이 흐트러지고 더러워진다. 나는 걸레의 삶을 선택했다. 걸레의 생명은 자기를 죽이고 이웃에 헌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형직과 숭실 학교 동문이었던 손정도 목사는 부친을 잃은 김일성을 자식처럼 돌봐줬다. 김일성은 ‘비밀독서회사건’으로 체포돼 7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는데 이때 손정도 목사가 옥바라지를 하면서 그를 석방시키는 일에 일조했다. 이 때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렀다. 손정도 목사는 과로와 고문 후유증으로 만성 위궤양에 시달리다 1931년 향년 49세에 소천 받았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손정도 목사에 대해 “신앙심이 깊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 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라고 적혀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유언에 따라 2003년 남한 신학자들과 ‘손정도 목사 남북학술토론회’를 열고 손정도 목사의 업적을 기념하기도 했다. 손 목사의 장남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이자 초대 해군참모총장 및 국방장관을 역임했다.
  • 2021.06.27 / 금지환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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