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순복음
(156)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9>
  •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무례히 행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 그 이유는 진정한 사랑은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기 때문이다. ‘무례히 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아스케모네오’는 ‘수치스런 행동을 하다’ ‘비열하게 행동하다’ ‘보기 흉하게 행동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무례’라는 것은 ‘예의가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기본적인 에티켓이 없는 태도이며 상대방에게 모멸감이나 혐오감을 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사람됨의 기본 즉 ‘예의’는 바로 상호 간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지닌다. 선후배 사이나 어른과 젊은이의 관계에 있어서 무례해서는 곤란하다. 윗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는 겸손이 훌륭한 인격이다. 윗사람을 대적해 무례히 행하는 하극상이나 격렬히 반항하는 모습은 사회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행위이다. 이와는 반대로 나이가 많다고 해서 젊은 후배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이처럼 성령 충만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성도들은 누구에게도 절대로 무례히 행해서는 안 된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무시하는 것도 무례이며 조그마한 사업을 하면서 몇 명 안 되는 고용인들에게 무례한 이들도 있다. 또한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탄압하는 것도 무례이며 능력이 있다고 해서 능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약한 자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도 그렇다. 사랑은 오히려 넉넉한 자가 부족한 자와 나누는 것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보고 지키고 일으켜 주는 것이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보호하고 이를 감당해 줘야 한다. 이렇듯 사랑은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다(롬 12:15).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사랑은 소외되고 탄압받고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셨으며 결코 그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으셨다. 주님은 가장 천대받고 약했던 사회적 약자들을 무례히 대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무례히 행치 않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진정 무례히 행치 않으시는 예의 바른 분이시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왕이시지만 우리의 동의 없이 함부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시고 문밖에 서서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음을 기억하고 우리도 그렇게 행하여야 한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1.17

    (155)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8>
  • 교만 버리고 겸손해야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때가 되면 높여주셔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사도 바울은 항상 교만에 대해서 경계하며 ‘교만한 마음’을 버리라고 권면했다(고전 4:6). 우리의 구원은 스스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았다. 고린도 교인들의 근본적인 잘못은 바로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높아진 교만이었다. 그래서 『신학대전』의 저자로 알려진 중세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 1224~1274)는 “교만은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죄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많은 성경은 제일 먼저 겸손을 최고의 덕(德)으로 여기며 그것을 가르친다. 사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삼덕(三德)인 지인용(智仁勇, 지혜, 인자함, 용기)을 말해왔다. 여기에 겸손은 없다. 서양 특히 헬라의 윤리 사상을 보면 이 세 가지에 절개(節槪) 즉 ‘굽히지 않는 신념’을 더해 사덕(四德)을 말한다. 동서양 모두 가장 주요한 덕(德)에는 교만을 멀리하는 겸손이 빠져있다. 오직 성경만이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겸손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눅 14:11), 친히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 잡히시기 전날 밤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친히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겸손한 종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고,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고 자기를 비우고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빌 2:5~8). 단테의 『신곡』 중 연옥편에 있는 이야기이다. 단테가 연옥을 지나다가 한구석에 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에 무거운 돌을 얹고 허리를 잔뜩 꾸부리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안내자에게 이유를 물으니 “저 사람들은 살면서 너무 교만해서 한 번도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만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그 연습을 하느라고 저리 애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비슷하게 성지순례에 가면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곳을 기념한 예배당이 있다. 특이한 것은 예배당은 매우 큰데 그 문은 아주 좁고 낮다는 점이다.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낮은 데 그것도 겸손히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가 있다. 이렇듯 예수님께로 나아가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성도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높여주신다. “…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6).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12.20

    (154)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7>
  • 하나님 잊어버리고 대적하며 불순종하는 것이 교만, 그것이 곧 사탄의 성품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성경에는 겸손의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교만으로 인해 안타깝게 최후를 맞이하는 이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도 처음에는 겸손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을 기뻐하사 왕위를 견고케 하시고 전쟁에서 계속 이기게 하셨다(삼상 14:47~48). 사울 왕이 계속 승리한 것은 사울의 지략과 용맹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 주셨기 때문이다. 그랬던 사울이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마음이 교만해져 말씀에 순종치 않았고 회개조차 하지 않음으로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았다(삼상 15:23, 28). 사울 왕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했다(삼상 15:9).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몰락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보다 백성을 두려워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야훼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 15:24).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삼상 15:11). 셋째, 스스로 자기를 과시하고 높이려 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삼상 15:12, 30). 넷째,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했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야훼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삼상 15:15). 이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대적하며 불순종하는 것이 교만이고 그것은 곧 사탄의 성품이다(엡 2:2). 이렇듯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지식(고전 8:1), 재물(겔 28:5), 권력과 권세(단 4:30)이며, 이와 더불어 무언가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형통할 때 교만은 소리 없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한다(대하 18:1). 이렇듯 인간이 소망하는 것들과 교만은 연결돼 있으므로 항상 교만을 경계하고 늘 조심해야 한다. 교만을 피하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며(출 1:15), 사도 바울처럼 스스로를 작게 여겨야 하고(고전 15:9),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고전 10:31).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은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고전 15:10), 겸손한 마음과 행동으로 헌신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의 참된 모습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11.15

    (153)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6>
  •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교만, 항상 넘어질까 조심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위기에 처한 교회들을 보면 안타깝게도 교회를 오랫동안 섬기며 헌신했던 분들이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고 교회를 훼방하는 경우가 많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도 결국 영적인 교만이 원인이었다. 고린도 교인들은 신령하고도 기이한 은사와 체험이 많았고 복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과 확신이 있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강하게 경고한다(고전 10:12). ‘스스로 자신이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때에 홍해를 건넌 것을 침례에 비유하고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려 먹은 것을 성찬에 비유한다(고전 10:1~12). 이에 덧붙여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음식과 음료를 먹고도 멸망했던 이유는 바로 스스로 섰다고 생각했던 영적인 교만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멸망의 가능성을 경고하며 영적인 교만으로 인해 빠질 수 있는 죄를 다음의 세 가지로 지적한다. 첫째, 우상 숭배이다(고전 10:7).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우상만이 우상이 아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이다(골 3:5). 신앙의 연륜이 길어지면 경험이나 전통이 우상이 될 수 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옳고 그름을 다투기보다 어떻게 더 사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둘째, 간음이다(고전 10:8). 바울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여인들과 동침하고 그들의 신에게 절하다가 멸망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다(민 25:1~9). 이처럼 영적인 교만이 간음을 가져올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잘못된 성적 유혹에 빠져 간음함으로 파멸했는지를 기억하며 늘 경계해야 한다. 셋째, 불평이다(고전 10:10).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후에 각종 기적과 은혜를 체험하고도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지면 ‘왜,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서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모세에게 불평했다. 모세를 향한 불평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다. 결국 출애굽 첫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했다. 성령 충만하고 사랑으로 연합된 성도들은 스스로 높아져 잘못된 자부심과 헛된 자만으로 얼룩진 영적인 교만을 벗어버려야 한다. 더불어 항상 낮은 자세로 엎드려 겸손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신앙이 연약한 성도들을 섬기고 배려하는 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거듭나야 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야훼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10.17

    (152)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5>
  • 교만의 죄는 우상숭배의 죄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 피할 수 없어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성경이 언급하는 교만은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스스로 잘난체하며 방자하게 뽐내는 것을 말한다. 교만의 시작은 하나님과 동등해지려 했던 타락한 천사 즉, 사탄으로부터이다(사 14:12~15). 이런 사탄에게 속아 인간 스스로 그 마음에 독버섯처럼 품게 된 치명적인 악이요 실제로 저지르게 된 대표적인 죄가 교만이다. 창세기를 보면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유혹했다(창 3:5). 인간이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 즉, 사탄을 닮은 마음이 바로 교만의 본질이다. 결국 인간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 마음에 치명적인 악(惡)인 교만이 자리 잡게 됐다. 교만의 죄는 우상숭배의 죄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한다(사 2:11, 17). 이처럼 교만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죄이므로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범죄나 실수, 오류와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동등해져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범죄를 인정할 수 없다면 이 사람이 치료될 가능성은 없다. 미국의 기독교 윤리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이버(K.P.R. Niebuhr, 1892~1971)는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교만의 형태를 네 가지로 나눴다. 첫째, 권력적 교만(Authority pride)이다. 이는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서는 겸손하다가 지위가 높아질수록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둘째, 지적 교만(Intelligent pride)이다. 잘 모를 때는 겸손히 침묵하다가 많이 알게 되면 잘 모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만 똑똑한 줄로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도덕적 교만(Moral pride)이다. 스스로 도덕적으로 부족하다고 여길 때는 조용히 지내지만 조금이라도 도덕적인 우월감이 채워지면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판단하고 정죄하며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넷째, 영적 교만(Spiritual pride)이다. 기도, 성경읽기, 헌신, 봉사와 같은 신앙적 행위를 스스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있으면 그걸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나고 더불어 자기보다 왠지 뒤처져 보이는 사람들을 깔보며 형편없이 무시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모든 형태의 교만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깊이 묵상하며 이를 닮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늘의 영광조차 모두 버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을 바라봐야 한다. 더불어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 십자가를 가슴 깊게 새겨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때 교만을 다스릴 수 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와 복음의 능력만이 교만을 다스린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깊이 낮추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힘쓰는 모습이 겸손한 성도의 참모습이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 외에는 교만을 다스려 나갈 어떤 힘도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겸손한 자만이 구원을 얻고 자신을 낮추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6).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9.13

    (151)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4>
  •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 고백하고 주님만 의지해 겸손히 따르는 삶 살아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교만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 18:9~14)의 비유이다.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대상은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의롭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다(눅 18:9). 이것이 교만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첫째로,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죄악이다. 인생들은 쉽게 착각 속에 빠져 스스로 대단한 존재처럼 여길 때가 있다. 이렇게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자기를 절대화시키고 자기주장을 절대화한다. 둘째로, 교만이란 ‘이웃’과 ‘나’ 사이에 담을 쌓는 죄악이다. 바리새인들은 따로 서서 기도했다고 했다(눅 18:11). 또한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두 번씩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같지 아니하다’는 말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로마에 아부하며 동포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죄인들,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리를 멸시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우월감, 즉 뿌리 깊게 점철된 교만을 꿰뚫어 보고 계셨다. 셋째로, 교만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을 속이라는 죄악이다. 바리새인의 이런 기도에서 강조된 단어가 하나 있다(눅 18:11). 그것은 바로 ‘나’라는 단어이다. 한글 성경에는 두 번 밖에 나오지 않는 것으로 번역돼 있지만 원문에는 구절마다 다음과 같이 ‘나’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위와 의로움을 자랑하는 아주 교만한 고백으로 보인다. 기도의 주어는 ‘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이어야 하는데, 놀랍게도 바리새인의 기도는 주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나’라는 자기 자신이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삶을 살기 원하는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은 바리새인의 자리가 아니라 세리의 자리에 서야 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을 향하여 불쌍히 여겨 달라”(눅 18:13)고 간절히 고백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들이며, 이웃의 도움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 이어진 말씀은 예수께서 어린 아기들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겸손한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다. 어린아이들은 단순하고 솔직하며 누구든 잘 믿고 의지하고 따른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주님 앞에서 바리새인과 같지 않고, 세리와 어린아이처럼 단순하며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하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따라가는 겸손한 사람이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6~17).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8.16

    (150)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3>
  • 가장 위대한 겸손의 본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사랑은 교만하지 않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교만은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된다. 사도 바울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고 기록한다. 진정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조차 속여 거짓으로 포장된 교만의 허세가 있을 수 없다. 사랑하면 겸손해지고 스스로 낮아져 더욱 진실케 된다. 사랑에는 교만이 머물 자리가 없다. 성령 충만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겸손이란 단지 ‘덕’(德)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이 있는 곳에 천국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 교만은 스스로 감옥에 갇히는 길이며, 멸망으로 치달아 결국 패망의 지옥으로 빠뜨리는 선봉이며(잠 18:12), 하나님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심판의 원인이요 이유가 된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은 자를 낮은 곳으로 떨어뜨리며, 스스로 겸손한 자를 높이 올린다”라고 교훈한다. 한 닭장에서 두 마리의 수탉들이 서로 피가 터지게 싸움이 일어났다. 그들은 여러 마리의 암탉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혈투에 혈투를 이어갔다. 말리는 사람도 없는 터라 그 수탉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카로운 부리로 상대방을 쪼아서 서로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마침내 깃털이 흰색인 수탉이 상처투성이가 돼 툇마루 밑으로 슬금슬금 도망쳤다. 상대적으로 싸움에서 이긴 깃털이 검정인 수탉은 우쭐해졌다. 결국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기 위해 당당하게 벼슬을 치켜세우고 요란스럽게 날개를 퍼덕이며 울타리 위로 올라가서 목청을 높여 과시하듯 크게 울어댔다. 바로 그때였다. 높은 나무에 앉아있던 한 마리의 매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앗’하는 순간 검정 수탉은 피할 틈도 없이 매에게 잡히고 말았다. 매는 검정 수탉을 발톱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결국 툇마루 밑에서 나온 흰 수탉이 닭장 안의 암탉들을 모두 차지하게 됐다. 이처럼 교만은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단지 좋은 덕을 쌓아 인격을 수양하기 위해 겸손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가장 위대한 겸손의 본보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겸손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루셨다. 흉악한 죄인들의 형틀인 십자가, 그 가장 낮고 천한 형벌을 스스로 감당하셨다. 겸손의 십자가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온 인류의 교만을 깨뜨리고 죄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이루셨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마다 고백해야 하는 진실한 첫사랑의 고백은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지닌 것은 다 죄뿐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오니 저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옵소서, 이제 저의 평생 자랑은 주님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결코 교만할 수 없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7.19

    (149)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2>
  •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적이고 하나님의 심판 피할 수 없으며 그 끝은 멸망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야고보서 4장 6절은 기록하기를 “…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교만한 자’는 헬라어로 ‘휘페르 파이네스다이’이다. ‘휘페르’라는 말은 ‘위로’(up)라는 뜻이고 ‘파이네스다이’는 ‘보이다’라는 뜻이다. 해석하면 ‘남들보다 두드러져 보이려 애쓰는 자’ 혹은 ‘남들보다 자신의 머리를 위로 치켜드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스스로 남들보다 높아 보이려고 애쓰며 더 나아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과 행동이 바로 교만의 참모습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물리치시고’라고 기록한다. 이는 헬라어로 ‘안티탓소’이다. 그 의미는 ‘맞서다’ 혹은 ‘대적하다’이다. 단순한 의견충돌이나 말싸움 기싸움 정도가 아니다. 이 단어는 본래 전투 용어로서 ‘~에 대해 전투를 벌이다’라는 뜻이 있다. 전쟁터나 격투기 경기장에서 아군과 적군이 서로 맞서 싸우는 형세를 의미한다. ‘네가 이기든 내가 이기든 더 심하면 네가 죽든 내가 죽든’ 서로 맞붙어 싸우는 형국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주된 대적자로 삼으시고 싸우신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적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그 끝은 멸망이다. 성령 충만한 성도가 교만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윗과 솔로몬 다음으로 명성을 떨친 남유다의 웃시야 왕은 오랜 치세를 통해 군사력과 아울러 나라의 경제력도 크게 신장시켰다. 블레셋과 아라비아를 정복하였고 암몬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전 국토를 요새화하였고 군대를 재편성하였다(대하 26:14~15). 그는 왕으로서, 행정가로서, 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 왕국 분열 이래로 유다의 국토를 가장 넓게 통치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이 곧 그의 약점이 됐다. 웃시야 왕은 교만하고 방자해져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인 성전 제단의 분향을 자기 손으로 하고자 했다. 대제사장 아사랴와 ‘용감한’ 제사장 팔십 명이 뒤따라 들어가 웃시야 왕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웃시야는 분노를 발하였다. 그 순간 나병이 웃시야 왕의 이마에 번져 나병 환자로 여생을 보내게 되었고, 야훼의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 되었으므로 별궁에서 홀로 나병을 앓으며 지내야 했다(대하 26:18~21). 웃시야 왕은 교만해져 방자히 행하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다. 사랑은 교만치 않다. 사랑이 있는 한 교만은 사라지고 녹아 없어지게 된다. 사랑에는 교만이 머물 데가 없다. 겸손이란 단순한 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할 때에 천국이 있고 거기에 참된 기쁨이 있으며 진정한 자유가 있다. 교만은 스스로 감옥으로, 지옥으로 빠지는 지름길이다(잠 16:18). 성령 충만한 성도는 모든 교만을 내어쫓고 겸손히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6.14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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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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