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순복음
(175)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8>
  • 욕심에 이끌려 자기의 유익만 좇는 자의 끝은 오직 패망뿐이다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은 자가기 원하는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쉬지 않고 추구하는 것이며, 본질은 이기심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유익에는 점점 무관심해지고, 마침내 남은 망하더라도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사악한 마음이 인생을 사로잡게 되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인물이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아합 왕이다(왕상 21장). 그는 나봇이라는 사람의 아름다운 포도원이 탐나서 더 좋은 포도원이나 돈을 주겠다며 팔라고 요구하였지만, 나봇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산이라 팔 수 없다고 거절했다. 아합이 속이 상해 식음을 전폐하고 눕자, 그의 아내인 악녀 이세벨이 나섰다. 그녀는 관원들과 내통해 불량자 두 사람을 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고 거짓으로 증언하게 하였고, 나봇은 성읍 밖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그 이후, 아합은 그 포도원을 차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웃을 해하며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는 자를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신다.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한 병사가 무심코 쏜 화살에 맞아 죽었고, 그 피를 개들이 핥았다. 이세벨 역시 예후의 명령으로 창밖으로 던져져 죽었고, 개들이 그 시체를 먹어 두 골과 발과 손밖에 남지 않았다. 둘다 참으로 무가치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이처럼, 욕심에 이끌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는 잠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끝은 패망이다(약 1:14~15).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에게는 심리학적으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자비와 덕이 없다. 권력에는 아첨하지만, 약자에게는 포악하다. 둘째, 자신의 유익과 관계없는 사람과 사건에는 심한 무관심을 보인다. 곁에 어려움을 당한 자가 있어도 결코 돌아 보지 않는다. 셋째, 쾌락을 추구하는 면이 심하다. 마치 결혼이라는 책임은 회피하면서 상대의 육체만 탐하는 세태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넷째, 끊임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려 한다. 사소한 의견에서도 양보하지 않으며,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모든 책임을 버리고 도망가는 고집불통이다. 디모데후서 3장은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것이 말세의 전형적인 타락상이라고 경고한다. 무서운 것은 이들에게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이웃을 사랑하는 경건의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 진정한 사랑은 이웃의 유익을 먼저 구하며 그것을 행함으로 나타내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사랑의 길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8.14

    (174)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7>
  • 나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곧 나의 이웃임을 기억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을 하려면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자신을 중심으로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필요를 바라보는 눈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태도와 같다(눅 10:25~37).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물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고 되물으시자,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대답하였다.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셨다. 사랑은 행동이다. 바로 행하면 된다. 그러나 율법사는 행하기 보다는 다시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만 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문제를 간파하시고 비유를 들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바빴을 수도, 두려웠을 수도, 도울 가치가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도 위급한 상황을 피할 이유를 만드는 데 참으로 교묘하다. 그러나 마침 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를 싸매고 주막으로 데려가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에게 이토록 헌신한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그 우연한 만남에 충실하여 사랑의 모범이 되었으나, 제사장과 레위인은 계산이 너무 빨라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버리고 말았다. 주님께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시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하였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율법사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는 처음부터 “내 이웃”이라 말하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했다. 자기로부터 출발하면 손익과 능력을 먼저 따지므로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로부터 시작한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곧 나의 이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죽어가는 인간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함이었다. 미국 밀워키에서 있었던 일이다. 암에 걸린 한 십대 소년이 치료로 머리가 다 빠지자, 대머리가 된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이는 것을 가장 걱정하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소년은 깜짝 놀랐다. 반 친구들이 모두 자기와 같이 머리를 박박 밀고 대머리가 된 채 반갑게 맞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 유익을 구하는 데 빠른 까닭은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확한 수치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면 자연히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게 된다. 예수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한 우리는 가정과 이웃에게 이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7.17

    (173)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6>
  • 자기 유익 내려놓고 이웃의 유익 먼저 살피는 것이 참된 사랑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성경에서 ‘구한다’는 단어는 현재형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자기의 세력과 소유를 쌓기 위해 쉬지 않고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흔히 이기심 또는 이기주의라고 부른다. ‘구한다’는 원어 ‘제이테오’는 ‘애쓴다’, ‘찾아 다닌다’로도 번역된다. 이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맹렬하게 추구하는 모습을 뜻한다. 보통 이러한 사람을 ‘이기주의자’ 혹은 ‘얌체’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자기의 것을 구하기 위해 온갖 잔머리와 잔재주를 부리는 사람치고 하나님께 크고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익만을 좇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마음을 귀하게 보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데 몰두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유익에는 점점 무관심해진다는 점이다. 이처럼 자기의 유익만 구하려는 마음은 너무도 쉽게 남에게 해를 입히는 마음으로 악하게 성장해 간다. 결국 그것이 심해지면 남은 망해도 자기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이고 사악한 마음이 그 인생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되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 되어 가며 도둑이나 깡패, 심지어 살인자까지 될 수 있는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인물이 바로 구약에 등장하는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이다. 아합은 나봇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탐냈으나 나봇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이라며 거절하였다. 아합은 속이 상해 식사도 거른 채 누워 버렸다. 이를 본 아합의 아내 악녀 이세벨은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에게 주었다. 아합과 그 아내 이세벨은 전형적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랑 없이 자기 유익만 구하는 자를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신다. 결국 아합은 전쟁터에서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맞아 비참하게 죽었고, 그의 피는 개들이 핥았다. 이세벨 또한 창에서 던져져 죽고 그 시체는 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잘될 것 같았으나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결말을 맞은 것이다.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거짓과 욕심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는 규모가 크든 작든 아합과 다를 바 없다. 참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내려놓고 이웃의 유익을 먼저 살피는 데 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다.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 모두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도리어 이웃의 유익을 구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6.19

    (172)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5>
  • 사랑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거룩한 초대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이런 내용을 전달한 배경을 살펴보면, 이것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처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은사가 더 우월하다고 제각기 주장하며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우상숭배의 제단에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는 문제에서는 자기에게 먹을 자유가 있다는 권리를 내세워 믿음이 연약한 형제의 신앙을 흔들었다. 성찬식에서는 형편이 넉넉한 이들이 먼저 와서 배불리 먹는 바람에,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굶주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오직 남을 위함이 아닌 오직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았다고 고백했으며(고전 10:33), 사도로서 사역에 대한 수고비를 받을 권리(고전 9:11~12, 18)와 결혼을 할 수 있는 권리(고전 9:5)도 충분히 있었지만 복음을 위해 스스로 그 권리들을 내려놓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 생각이 아예 없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건강하게 자신을 돌보는 일까지 포기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며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하라는 것도 아니고, 불의를 보고도 입을 다물라는 뜻도 아니다. 바울 자신도 꼭 필요한 순간에는 사도로서의 권위를 분명히 밝혔고, 베드로가 잘못했을 때는 면전에서 거침없이 지적하기도 했다(갈 2:11~14). 사랑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강함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양보하는 것이다. 권리가 있는 줄 몰라서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내 권리를 충분히 알면서도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한발 물러서는 것이다. 이 사랑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다(빌 2:6~7). 온전히 모든 권리를 가지신 분이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의 완전한 표본이며, 동시에 우리도 그 사랑을 본받아 몸소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을 송두리째 완전히 소멸시키라는 거룩한 초대이다. 그것은 ‘이것은 나의 권리인데’라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권리 행사가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먼저 헤아리는 것이며, ‘스스로가 옳다’는 생각이 일어날 때, 옳고 그름보다는 상호 관계와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떠 올리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무게와 위치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5.22

    (171)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4>
  • 참된 사랑은 마음 깊이 뿌리내린 자기의 유익을 위한 자기중심성 거부하는 것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여기서 말하는 ‘자기의 유익’을 의미하는 말은 원어를 번역하면 ‘자기 자신의 것들’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이익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자기의 권리, 방식, 편의, 명예, 의견 등 자기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현대의 영어 번역들이 이 구절을 “자기 방식을 주장하지 않는다”(ESV),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NIV)로 다양하게 옮기는 것도 이 구절이 품고 있는 넓은 의미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린 자기중심성을 거부하라는 사랑의 명령이다. 그렇다면 자기중심성이 왜 그토록 위험할까? 그것은 세 가지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첫째, 자기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둘째, 자기 생각을 어떻게든 관철시키려 한다. 셋째,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별로 관심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세 가지가 언제나 함께 움직인다는 점이다. 자기가 기준인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뜻을 밀어붙이게 되고, 그런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과 형편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이 삼중 구조가 인간관계를 통해 작동하면 그 결과는 참으로 안타깝다. 그것은 결국 외로움, 우울, 분노, 미움, 배신, 심지어 질병까지 줄줄이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전혀 문제없어, 저 사람이 문제지’라고 쉽게 단정 짓는 사람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두 남매를 키워 결혼시킨 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 어머니가 딸네 집을 방문했을 때, 마침 사위가 혼자 아침을 해 먹고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 눈에는 딸을 아껴 주는 사위가 참 대견하게 보였다. 그런데 아들네 집에 갔을 때, 아들이 똑같이 혼자 아침을 해 먹고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아들이 한없이 측은하고, 며느리가 몹시 괘씸하게 느껴졌다. 일어난 상황은 똑같은 데, 마음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적 주관성의 민낯이다. 우리의 삶 곳곳에서 이런 모습은 쉽게 발견된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남이 천천히 운전하면 소심한 것이고, 내가 천천히 운전하면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며느리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고, 딸은 남편을 잘 다스려야 한다. 우습지만,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이런 이중 잣대를 갖고 살아간다. 그 근본 원인은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대한 맹신과 자기중심성이 단단히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는 성도는 스스로 자기 안에 남아있는 자기중심성을 부인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참된 사랑은 이중 잣대를 내려놓고 자기중심적 주관성을 솔직히 인정하며,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동등한 무게와 위치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는 사랑의 핵심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4.17

    (170)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3>
  • 사랑의 실천은 나 자신의 필요 아닌 대방의 필요로부터 시작돼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참된 사랑은 절대로 이기적일 수 없다. 유대인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그만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은 옷을 벗겨 거의 죽을 만큼 그를 때렸고 그대로 길에 버려두고 도망갔다. 때마침 그곳에 유대인 제사장 한 사람이 지나갔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지만,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잠시 뒤,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 한 사람이 지나갔지만, 그도 멀찌감치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해 지나쳐 버렸다. 얼마 후, 사마리아인 한 명이 그곳을 지나게 됐다. 그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도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고, 유대인들은 그들을 무시하고 배척했다. 그럼에도 그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자에게 다가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고, 자신의 짐승에 태워 주막까지 와서 그를 보살폈다. 또한, 치료에 필요한 추가 비용까지도 부담할 것을 약속했다(눅 10:25~37).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은 같은 동족이었던 제사장도 레위 사람도 아닌, 자기의 유익을 생각지 않고 먼저 강도 만난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한 사라미아 사람이었다. 이처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고 아낌없이 자신의 것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그림동화집이 있다. 이 동화는 어떤 나무가 자신을 다 버리기까지 한 소년을 사랑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 나무는 어린 시절 소년의 그네가 돼 주었고, 놀이터가 돼 주었다. 소년이 성장한 후에는 돈이 필요하다고 하자 자기 열매를 주어 장사할 밑천으로 내어준다. 나이가 든 소년이 집이 필요하다고 할 때는 나뭇가지를 잘라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했고, 멀리 여행을 가기 위해 배가 필요하다고 하자 나무는 남아있는 자신의 몸통을 잘라 배를 만들도록 허락한다.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어 돌아온 그 소년이 쉴 곳이 없어 하자 “편히 쉬기에는 나무 밑동만 한 곳은 없지”라고 하며 겨우 남아있는 뭉툭하게 잘린 밑동을 휴식을 위한 의자로 제공한다. 이처럼 사랑의 실천은 나 자신의 필요가 아닌 상대방의 필요로부터 시작된다. 혈연, 지연, 학벌, 재산의 규모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이웃을 구분하는 것은 자기중심적 태도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강도 만난 자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우리의 이웃이다. 성경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한다(레 19:18, 마 22:39).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우리가 특별한 존재여서가 아니다. 바로 우리가 마치 강도 만난 사람처럼 죄와 사망으로 죽어가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오셨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3.20

    (169)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2>
  • 참된 사랑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풀고 대가 없이 희생하는 것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에는 무례히 행치 않는 것과 비슷한 의미가 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3절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권면했다.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자신의 말이나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를 항상 생각하고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참된 사랑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베풀고, 대가 없이 희생하는 것이다. 의사이자 신학자였던 슈바이처(A. Schweitzer 1875~1965)가 독일에서의 모든 명성과 지위를 버리고 아프리카에 의료선교를 가기로 결심했을 때, 헬레네(Helene B. Schweitzer, 1879 1957)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귀한 가정에서 고생 모르고 자란 헬레네가 아프리카 오지로 떠날 확률은 사실상 제로였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결국 슈바이처가 결국은 아프리카 선교를 포기하리라고 생각했다. 슈바이처가 헬레네를 정말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슈바이처는 헬레네에게 의료선교를 위해 자신은 아프리카로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상 이별 통보였지만, 이 말을 들은 헬레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는 간호사가 돼야겠군요. 그래야 당신 바로 옆에서 도우며 함께 지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그녀는 간호학을 공부해 간호사가 됐고, 슈바이처의 아내로서 아프리카 랑바레네 의료 봉사의 핵심 동반자가 됐다. 이후 사회복지학까지 공부해 헌신적으로 환자를 돌보며 병원 운영과 행정을 도맡았으며, 남편 슈바이처의 업적을 가능하게 한 실질적이며 정신적인 지주로서 그 곁에서 평생 헌신하며 살았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정말 따뜻하고 아름다운 헌신과 참된 사랑의 모습이다. 이처럼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서 먼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최고의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최고의 헌신입니다”라고 스코틀랜드의 출신 개혁 신학자 싱클레어 퍼거슨((S. B. Ferguson)은 말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장에서 ‘사랑’의 계명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2~14)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예수님과 친구가 되는 지름길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2.13

    (168)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1>
  • 참된 사랑은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는 문구의 의미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에만 몰두하지 않는대’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어떤 상황에도 자기를 먼저 내세우지 않는 예의의 바탕이 되는 마음과 생각의 근본적인 태도를 묘사하는데, ‘사랑은 이기적이지 않다’라는 번역이 의미상으로 좀 더 가깝다. 하지만, 현시대의 상황과 문화를 고려해 볼 때,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와 스스로 세상 모든 것의 중심이 되려고 하는 ‘자기중심주의’라는 두 개념을 모두 포함해야만 될 것으로 보인다. 진정한 사랑은 욕망이 중심이 되는 전형적 ‘에로스’의 사랑과는 달리 자기희생을 근본으로 하는 ‘아가페적’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결코 스스로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른 사람을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연인, 부부, 부모, 자식 혹은 그 어떤 친근한 관계라 할지라도, ‘나는 너를 원해’라는 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위험 신호일 수도 있다. 그러한 소유욕은 자기 유익의 충족 혹은 자기만족이라는 어긋한 바람에 위험할 정도로 바짝 붙어 항해하는 종류의 사랑이기 쉽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존중하고 지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그러한 노력의 대가로 상대방을 통제하거나 억압하려 들지 않는다. 또한 참된 사랑은 결혼과 가족 안에 존재하는 여러 종류와 수준의 관계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나 삶의 다른 영역에 존재하는 관계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은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다(롬 15:3).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문제들은 상당 부분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지 못함에서 기인한다고 여겼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대한 나름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고전 10:24, 33), 주의 만찬에 서둘러 달려들거나 혹은 세심하지 못한 방식으로 주의 만찬을 ‘주관하는 것’(고전 11:21~22), 이미 말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막아서고 갑자기 자기가 받은 계시를 들이대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기회가 없을 정도로 자기 말만 길게 늘어놓는 것(고전 14:29~33) 등이다. 자신의 유익에 집착하는 이러한 모든 태도의 표현은 ‘다른 사람’을 그 자체로 자신과 동등한 권리를 지닌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하며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는 그리스도가 행하셨던 것처럼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유익’에 더 큰 관심을 가진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15:2~3).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1.16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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