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순복음
(150)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3>
  • 가장 위대한 겸손의 본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사랑은 교만하지 않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교만은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된다. 사도 바울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 12:9)고 기록한다. 진정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조차 속여 거짓으로 포장된 교만의 허세가 있을 수 없다. 사랑하면 겸손해지고 스스로 낮아져 더욱 진실케 된다. 사랑에는 교만이 머물 자리가 없다. 성령 충만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겸손이란 단지 ‘덕’(德)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이 있는 곳에 천국이 있고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 교만은 스스로 감옥에 갇히는 길이며, 멸망으로 치달아 결국 패망의 지옥으로 빠뜨리는 선봉이며(잠 18:12), 하나님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심판의 원인이요 이유가 된다. 유대인의 탈무드에는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높은 자리에 앉은 자를 낮은 곳으로 떨어뜨리며, 스스로 겸손한 자를 높이 올린다”라고 교훈한다. 한 닭장에서 두 마리의 수탉들이 서로 피가 터지게 싸움이 일어났다. 그들은 여러 마리의 암탉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혈투에 혈투를 이어갔다. 말리는 사람도 없는 터라 그 수탉들은 날개를 퍼덕이며 날카로운 부리로 상대방을 쪼아서 서로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마침내 깃털이 흰색인 수탉이 상처투성이가 돼 툇마루 밑으로 슬금슬금 도망쳤다. 상대적으로 싸움에서 이긴 깃털이 검정인 수탉은 우쭐해졌다. 결국 자신의 승리를 자랑하기 위해 당당하게 벼슬을 치켜세우고 요란스럽게 날개를 퍼덕이며 울타리 위로 올라가서 목청을 높여 과시하듯 크게 울어댔다. 바로 그때였다. 높은 나무에 앉아있던 한 마리의 매가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앗’하는 순간 검정 수탉은 피할 틈도 없이 매에게 잡히고 말았다. 매는 검정 수탉을 발톱으로 단단히 움켜쥐고 쏜살같이 날아올랐다. 결국 툇마루 밑에서 나온 흰 수탉이 닭장 안의 암탉들을 모두 차지하게 됐다. 이처럼 교만은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단지 좋은 덕을 쌓아 인격을 수양하기 위해 겸손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가장 위대한 겸손의 본보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겸손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가장 위대한 승리를 이루셨다. 흉악한 죄인들의 형틀인 십자가, 그 가장 낮고 천한 형벌을 스스로 감당하셨다. 겸손의 십자가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온 인류의 교만을 깨뜨리고 죄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이루셨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마다 고백해야 하는 진실한 첫사랑의 고백은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제가 지닌 것은 다 죄뿐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오니 저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옵소서, 이제 저의 평생 자랑은 주님의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결코 교만할 수 없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7.19

    (149)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2>
  •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적이고 하나님의 심판 피할 수 없으며 그 끝은 멸망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절대로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야고보서 4장 6절은 기록하기를 “…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교만한 자’는 헬라어로 ‘휘페르 파이네스다이’이다. ‘휘페르’라는 말은 ‘위로’(up)라는 뜻이고 ‘파이네스다이’는 ‘보이다’라는 뜻이다. 해석하면 ‘남들보다 두드러져 보이려 애쓰는 자’ 혹은 ‘남들보다 자신의 머리를 위로 치켜드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다. 스스로 남들보다 높아 보이려고 애쓰며 더 나아가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과 행동이 바로 교만의 참모습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물리치시고’라고 기록한다. 이는 헬라어로 ‘안티탓소’이다. 그 의미는 ‘맞서다’ 혹은 ‘대적하다’이다. 단순한 의견충돌이나 말싸움 기싸움 정도가 아니다. 이 단어는 본래 전투 용어로서 ‘~에 대해 전투를 벌이다’라는 뜻이 있다. 전쟁터나 격투기 경기장에서 아군과 적군이 서로 맞서 싸우는 형세를 의미한다. ‘네가 이기든 내가 이기든 더 심하면 네가 죽든 내가 죽든’ 서로 맞붙어 싸우는 형국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주된 대적자로 삼으시고 싸우신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적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그 끝은 멸망이다. 성령 충만한 성도가 교만을 버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윗과 솔로몬 다음으로 명성을 떨친 남유다의 웃시야 왕은 오랜 치세를 통해 군사력과 아울러 나라의 경제력도 크게 신장시켰다. 블레셋과 아라비아를 정복하였고 암몬족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전 국토를 요새화하였고 군대를 재편성하였다(대하 26:14~15). 그는 왕으로서, 행정가로서, 군의 총사령관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해 왕국 분열 이래로 유다의 국토를 가장 넓게 통치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이 곧 그의 약점이 됐다. 웃시야 왕은 교만하고 방자해져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인 성전 제단의 분향을 자기 손으로 하고자 했다. 대제사장 아사랴와 ‘용감한’ 제사장 팔십 명이 뒤따라 들어가 웃시야 왕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웃시야는 분노를 발하였다. 그 순간 나병이 웃시야 왕의 이마에 번져 나병 환자로 여생을 보내게 되었고, 야훼의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 되었으므로 별궁에서 홀로 나병을 앓으며 지내야 했다(대하 26:18~21). 웃시야 왕은 교만해져 방자히 행하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다. 사랑은 교만치 않다. 사랑이 있는 한 교만은 사라지고 녹아 없어지게 된다. 사랑에는 교만이 머물 데가 없다. 겸손이란 단순한 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할 때에 천국이 있고 거기에 참된 기쁨이 있으며 진정한 자유가 있다. 교만은 스스로 감옥으로, 지옥으로 빠지는 지름길이다(잠 16:18). 성령 충만한 성도는 모든 교만을 내어쫓고 겸손히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6.14

    (148)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1>
  • 예수님 마음 품은 스스로 겸손하고 낮아진 삶 참된 영광과 은혜 넘쳐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교만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기 자신의 위대함과 훌륭함에 도취돼 우쭐해 있는 상태’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과대평가한 작은 위대함과 사실 별것도 아니지만 스스로 높아져 버린 자만과 우월감에 자아도취 돼버린 상태를 자랑하고 자신을 뽐내는 것이 바로 ‘교만’의 민낯이다. 사람은 무언가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자랑하고 드러내고 싶어 한다. 더불어 남들이 그것을 인정해 주고 알아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며, 오히려 혹시라도 그 자랑거리를 비난하거나 무시하면 죽기 살기로 싸우고 덤벼든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당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기도도 많이 하고 금식도 자주 했으며 십일조 생활도 철저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대단한 자부심과 신앙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에 대해 거짓과 위선이 넘치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셨으며(마 23:13~15; 23:27~28) 그들에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겪하게 꾸짖으셨다(마 23:33). 스스로 철저하게 훌륭한 신앙인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칭찬’이 아닌 ‘책망’으로 그들을 대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인 그 마음에는 스스로 높이 평가한 자신들의 위대함과 훌륭함에 취해 뽐내고 싶어 하는 교만이 가득 차 있었다. 빌립보서 2장 3절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기록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의 노예가 되면 모든 일에 다툼이 일어나고 허영으로 끝나고 만다. 성령으로 충만해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은 피차 서로를 섬기며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높여주고 돌봐주는 사람이다(빌 2:4). 스스로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 결코 교만의 덫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이유는 스스로 교만의 굴레에 얽매여 교만의 종노릇 하는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을 가지고, 마치 스스로 잘난 것처럼 뽐내거나 자랑하지 말고 교만이 스스로를 속이지 못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겸손한 삶, 낮아지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빌 2:5~8). 거기에 진정한 영광과 충만한 은혜가 있다. 낮은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스스로 낮아지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가장 존귀한 자로 인정받고 존귀한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눅 14:10~11).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5.17

    (147)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0>
  • 모든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과 십자가 앞에 겸손히 스스로 낮아져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교만은 ‘마음의 중심’에 깃들며, 자기중심적인 자만심으로 비정상적으로 툭 튀어나온 부풀어진 마음의 상태이다. 구약성경 오바댜 1장 3절은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라고 기록한다. 그것은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거짓된 안전의식’에 빠져 있던 자를 책망하는 말씀이다. 15세기의 유명한 설교자 중에 사보나롤라(G. Savonarola, 1452∼1498)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수도사로 부임한 성당에서 어느 날 아침 산책을 하다 보니 성당 앞 성모 마리아상 앞에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중년 부인 한 사람이 경건한 모습으로 성모상에 참배하면서 아주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이튿날에도 또 다음 날에도 똑같은 시간에 그 부인을 그 자리에서 만났다. 그렇게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하루도 빼놓지 않고 봄, 여름, 가을, 겨울 한결같이 같은 시각에 와서 마리아상 앞에 참배하는 신실한 부인의 모습에 사보나롤라는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보나롤라는 동료 사제와 산책을 하는 도중에 또 그 부인을 보게 됐다. 그가 그 부인을 가리키면서 “여보게 내가 저 부인을 가만히 살펴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이 없어.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폭풍우가 몰아치나 꼭 같은 시간에 빠짐없이 기도하고 있단 말이야. 참 신앙심이 대단해 보이지 않나?” 그랬더니 옆에 있던 동료 사제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아직 마리아상과 저 부인에게 얽힌 사연을 잘 모르는구먼. 오래전에 이 성당에 저 마리아상을 처음 조각하도록 위임받은 조각가가 그 대상이 되는 모델을 찾았을 때, 선정된 사람이 바로 저 부인이라네. 어리고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의 저 부인이 바로 그 모델이었던 거지. 그래서 저 부인은 저 마리아상이 완성돼 저곳에 놓인 그 이튿날부터 출근해서 지금까지 빠진 일이 없다네.” 사실 그 부인은 신앙심으로 그 자리에 매일 왔던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그녀는 매일 그 자리에서 젊은 시절 자기 얼굴을 보고 자기를 즐기고 자기를 숭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의 뿌리이다. 사탄은 에덴동산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와 첫 번째 유혹을 이렇게 던졌다.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이처럼 교만은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더불어 자신의 주장을 절대화시킬 때 바로 그것이 교만이다. 연약한 인간은 죄를 범할 수 있으며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이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이런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과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자기를 상대화시켜 스스로 낮아져야 한다. “야훼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4.19

    (146)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59>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가장 앞장서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는 가장 큰 죄를 7가지로 분류해 놓고 있다. 그것은 ① 교만 ② 시기 ③ 탐식 ④ 색욕 ⑤ 분노 ⑥ 탐욕 ⑦ 게으름이다. 소위 ‘7가지 대죄(大罪, Capital Sins)’라는 이 목록은 교황 그레고리 1세(Gregorius I, 540~604)가 분류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성경에는 ‘대죄’라는 말은 없다. 비슷하게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사함을 얻지 못하고(마 12:31),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는 죄’(히 6:4~6),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고전 6:9~10)가 있다. 7가지 대죄와 비슷한 성경 말씀은 잠언 6장 16절부터 19절에 “야훼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죄악에 대해 말씀하셨다.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막 7:21~22). 그 일곱 가지 ‘대죄’ 중에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오래되고 유명한 신앙 도서 『참회록』의 저자 성 어거스틴(S. A. Augustinus, 354~430)이 말하기를 “교만은 인간이 빠지기에 가장 쉬운 것인 동시에 인간이 극복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다. 이처럼 ‘교만’의 죄가 빠지기 쉬운 죄이고, 또 극복하기 어려운 것도 문제지만, 교만의 죄는 그 결과가 매우 치명적인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수많은 사람이 교만의 죄로 인해 실패하고 좌절하며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았다. 가장 아름다운 지위를 가졌던 천사 루시퍼도 교만으로 인해 사탄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을 성경이 기록하고 있다(사 14:13~14). 잠언 16장 18절은 엄중히 경고한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말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가장 앞장서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죄악이다. 그렇다면 교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고 그 충만한 성령과 함께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교만하지 말라’고 친히 말씀해 주실 것이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야훼께서 말씀하셨음이라”(렘 13:15).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3.15

    (145)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58>
  • 스스로 잘못했으면서도 더 큰소리치는 것이 교만한 자의 특징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바울이 두 번에 걸쳐 서신을 보냈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근심하며 경고할 만큼 교만했다(고전 4:6). 바울과 아볼로는 신실하고 겸손한 주님의 종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높이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을 높임도 원치 않았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파를 만들고 아볼로파를 만들었다. 거기에 게바파와 더 나가 그리스도파까지 만들어 편을 나눠 당을 짓고 서로 대적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라고 말했다(고전 4:18~19).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 대적하며 편을 나눠 다투게 된 이유는 분명했다. 그들은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사도 바울이 다시 고린도를 방문하는 것조차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이미 배울 것들을 모두 배웠다’는 교만으로 가득해 우월감과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사실 그들 가운데 음행을 저지른 자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계모를 성적으로 범한 자도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 당시 이방인의 법이었던 로마법에서조차 엄격하게 금지하는 악행이었다. 하지만 더 나쁜 것은 그런 추악한 음행을 저지르고도 회개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원인도 역시 ‘교만’ 때문이다. 이처럼 스스로 잘못했으면서도 더 큰소리치는 것이 교만한 자의 특징이다(고전 5:1~2).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서는 시장에서 파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 때문에 분쟁이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꺼림칙하니까 아예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지 않았다. 심지어는 친척의 잔칫집에 가서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고기는 어디까지나 고기에 불과하며 이방신은 존재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는 이들도 있었다. 이 두 가지 모습 모두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였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라고 말씀한다. 사랑 없는 지식은 교만해져서 형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이다. 상처를 주고 교만함을 뽐내는 ‘지식’을 내세우기 보다는 온전한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 것에 관심가져야 한다(고전 8:13).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 교만했기 때문에 서로를 대적했고 음행을 저질러도 회개할 줄 몰랐으며 더 나아가 신앙공동체인 형제자매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성령 충만한 주님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교만을 벗어 버리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 스스로 낮아지는 사람이며, 또한 겸손히 믿음의 형제자매를 섬기고 교회에 충성하며 봉사와 나눔에 힘쓰는 성령의 사람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2.16

    (144)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57>
  • 교만이 앞서가는 곳에는 항상 그 결론이 패망임을 기억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신약성경에서 ‘교만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동사 ‘퓌시오오’는 대장간 등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인 ‘풀무’를 의미하는 단어 ‘퓌사’에서 유래했다. 그 기본 뜻은 ‘부풀리다’ ‘부풀게 하다’ ‘부풀어 오르게 하다’이고 비유적으로는 ‘마음이 부풀어 득의 양양하게 하다’, ‘자만케 하다’라는 뜻이 있다. 수동태로는 ‘마음이 부풀어 오르다’, ‘거만하게 처신하다’, ‘교만하다’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7회 나온다. 그렇다면 ‘자랑’과 ‘교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차이는 분명하다. 자랑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표면적이고 외적인 행위이고, 교만은 심리적이고 내적인 마음가짐이다. 잠언 16장 18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한다. 그렇다. 교만이 선봉을 서서 앞서 나가게 내버려두면,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패망이다. 거만한 마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넘어짐이 뒤따라오기 마련이다. 즉, 결국 교만 때문에 망하는 것이며 교만은 그렇게 나쁜 것이다. 어느 날 아름다운 숲속에 아침이 찾아왔다. 각종 짐승이 연못가에 물을 마시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사슴 한 마리가 있었다. 사슴은 물을 마시다가 물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스스로 감격했다. 머리에 달린 뿔이 너무나도 황홀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감격에 취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짐승들 머리 위에는 뿔이 없었다. 순간 사슴의 마음에 교만이 들어왔다. 사슴은 자기 머리의 뿔을 좌우로 흔들면서 뽐내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으르렁’ 소리를 내며 배고픈 사자가 연못가에 나타났다. 모든 짐승이 놀라서 달아나기 시작했고 사슴도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금 도망가다가 사슴은 그 아름다운 뿔이 나뭇가지에 걸려 더 이상 달아날 수가 없었다. 결국 사슴은 자기가 교만하게 뽐내던 뿔 때문에 사자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교만의 결과가 이렇다. 교만이 앞서가는 곳에는 언제나 패망이 따라오기 마련임을 기억해야 한다. 자랑은 그냥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내가 잘 났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만은 그 상대가 하나님이다. 즉, 교만은 인간이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훨씬 더 심각한 위험 요소이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 하나님께서 받으실 감사를 자기가 다 챙기는 잘못을 범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을 질투했던 천사장이 스스로 교만해져 마귀가 됐다고 기록한다(사 14:12~20). 이처럼 교만은 성도들을 타락시키는 사탄의 주요 도구로써 정욕에 빠지게 하고(단 5:20~23), 악한 마음(시 10:2), 자기 자랑, 자기 연민, 자기 기만에 빠지게 해 결국 멸망에 이르게 한다(잠 18:12).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스스로 겸손의 본을 보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빌 2:6~11).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야훼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 16:5).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1.19

    (143)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56>
  • 성령 충만한 성도의 평생 자랑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단 1시간 후의 미래조차 즉,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잠 27:1). 미래는 하나님의 영역이며 하나님에 의해 좌우된다. 또한 잠언은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 20:6)고 말씀한다. 사람이 스스로 인자함을 자랑해도 진정으로 인자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시 52:1). 사도 야고보는 이런 인생들의 자랑을 허탄하고 악한 것이라고 했다(약 4:16).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며 정직한 마음으로 그의 행하신 모든 일들을 다 자랑하는 자들이다(시 64:10). 성도의 자랑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시 20:7)과 그의 행하신 일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은혜는 ‘마음의 즐거움’이다(시 105:3, 대상 16:10).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야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사 45:25).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야훼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야훼의 말씀이니라”(렘 9:24). 덧붙여 성도의 평생 자랑은 오직 ‘주의 십자가’ 뿐이다.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인 로마의 법 집행 과정에 있어 십자가는 대역 죄인을 매달아 사형시키는 끔찍한 형틀이요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십자가를 생각하거나 말하기조차 싫어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라고 기록하며 이런 사실을 뒷받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고백했다(갈 6:13~14). 어떻게 그 욕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 그는 십자가를 통해 형용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체험했고, 이를 통해 ‘약할 때 곧 강함’(고후 12:10;13:9)이라는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행하게 됐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아는 것이다. 십자가를 알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고, 십자가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고전 1:26~31).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한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도 못남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다. 로마서 5장 2절은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즐거워한다’는 말은 바로 ‘자랑으로 여기다’라는 뜻을 지닌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과 행하심으로의 은혜를 입었음을 자랑하며, 십자가의 은혜만을 종일토록 자랑하고 또 자랑하자.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시 44:8).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12.22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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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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