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Israel
어떻게 서쪽 벽은 성지가 되었나…통곡의 벽에 얽힌 이야기
  • 이스라엘을 방문하시는 분들이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언제 유대인들을 볼 수 있냐는 것이다. 보통 유대인이라고 하면 검은 모자에 검은 옷을 입고 서쪽 벽에서 기도하고 있는 이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들이 대표적인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대표적인 성지로서 서쪽 벽 혹은 통곡의 벽을 떠올린다. 우리가 흔히 보고 듣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항상 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서쪽 벽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인상 깊고 잘 알려진 장소이다. 유대인들만 아니라 전 세계 기독교인들도 이곳을 방문한다. 이스라엘 하면 떠오는 상징이 되어버린 서쪽 벽 혹은 통곡의 벽이 어떻게 유대인들의 상징이 되었고 우리들은 그것을 대표적인 예로 듣고 알게 되었을까? 오늘은 이 서쪽 벽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짧게 나눠 보고자 한다. 현재 우리가 방문하는 예루살렘은 사실 1세기 예루살렘 성읍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실제적으로 예루살렘 성읍은 1세기 때 큰 화재와 지진으로 무너졌고, 제대로 성읍이 세워진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오스만제국의 슐레이만 황제가 꿈을 꾸는 가운데 세워진 예루살렘 성읍이 지금의 우리가 방문하는 예루살렘 올드 시티인 것이다. 그 올드 시티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 잡고 감람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성전산이다. 이 성전산에는 지금은 이슬람의 사원인 황금 돔 사원과 알아크사 모스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성전산의 헤롯 성전이 세워졌던 자리의 남은 외벽 중 하나가 바로 서쪽 벽이다. 서쪽 벽의 하단은 1세기 헤롯 대왕이 세웠던 성전의 벽이 약 4~5 정도 남아있고 그 위로는 이후에 세워진 벽들이 서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서쪽 벽 지하에는 1세기 당시 헤롯 대왕이 만들었던 성전의 벽돌이 그대로 남아있으니 서쪽 벽을 방문하시는 분들은 꼭 서쪽 벽 지하에 자리한 유산박물관을 방문해 보길 추천한다. 서쪽 벽은 말 그대로 성전의 서쪽 벽만이 남은 곳이다. 성지가 되려면 오히려 성전산의 뜰이나 동쪽 문이 더 성지가 되어야 할 것만 같지만 그렇지 않고 서쪽 벽만을 찾게 된 것은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역사 속에서 알게 되는 슬픈 배경이 있다. 솔로몬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이후 다시 세워지게 된 제2성전과 그 성전을 확장시킨 헤롯 성전은 1세기 때까지 유대인들의 중심이었고 예배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A.D 70년 디도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 유대인들에게는 더 이상의 성전은 존재하지 않았고 제사도 멈추게 되었다. 그 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로 떠돌아다니는 민족이 되었고 그들의 예배 처소는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슬람 제국을 거쳐 오스만 제국에 이르러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고 15세기 슐레이만 대제가 지금의 올드 시티(구 예루살렘)를 지은 이후 유대인들은 한시적으로 성전이 있었던 자리를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 자리가 바로 서쪽 벽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거룩한 장소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였다. 그 장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을 통곡하게 만들었고 그들이 서쪽 벽에 모여서 그 분통함과 슬픔을 기억한다고 해서 통곡의 벽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하필 서쪽 벽일까? 도대체 역사 가운데 어떤 사건이 서쪽 벽을 거룩한 곳으로 만들게 되었을까? 우리는 성전을 잠깐 떠올릴 필요가 있다. 성전은 현재 성전산의 중앙이 되는 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성전의 정문은 동쪽을 향했고 그 성전의 정문으로 향하는 것이 지금의 황금 문-흔적만 남은 문-이다. 황금문이 바라보는 곳이 바로 감람 산-올리브동산이다. 원칙적으로 그들이 더 깊은 종교적 장소를 선택하자면 성전산이나 혹은 동쪽 황금문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성전산의 출입이나 황금문으로의 접근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곳이 무슬림들이 사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허락된 곳은 서쪽 벽뿐이다. 그런데 이 서쪽 벽은 재미있게도 유대인들이 성전에서도 가장 거룩하게 여기는 곳과 연관되어 있다. 바로 지성소이다. 성전의 정문이 동쪽을 향해 있다면 성전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지성소는 바로 서쪽 벽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이것이 바로 서쪽 벽이 거룩한 장소가 된 이유이다. 서쪽 벽은 그렇게 거룩한 곳이 되었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서쪽 벽에 모여 기도하면서 성전산 지하를 탐사하고 발굴하면서 더욱 성전에 관한 자료와 정보들을 모으고 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소망은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얻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유대인의 왕이요 메시야이며 온 땅의 주인으로 오신 이를 보지 못하고 오늘도 서쪽 벽에 서서 그 벽을 어루만지며 잃어버린 성전을 사모하고 있다. 이미 온전한 성전 되시며 온전한 하나님 되신 그리스도를 그들도 어서 발견하기를 바라며 필자도 서쪽 벽에 손을 얹고 잠시 기도해 본다. 김요셉 목사
  • 2023.08.25

    예루살렘은 어떻게 성지가 되었나?
  •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곳은 예루살렘이다. 벤구리온 공항에 도착하는 수많은 순례객들이 가장 기대하는 장소이다. 예루살렘은 누구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성지이다.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면서 기독교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곳이며 하나님의 도성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장소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예루살렘은 성지가 되었을까? 예루살렘은 기독교인들에게만 성지일까? 아니면 유대교와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들도 예루살렘을 성지로서 여길까? 여기에 대한 답은 모든 종교는 아니지만 세계 3대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의 성지가 예루살렘이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이해가 가지만 왜 이슬람은 이곳을 성지로 삼고 있을까? 세 개의 종교가 성지로 삼고 있는 예루살렘은 복잡하고 얽혀 있는 역사가 존재한다. 그 복잡한 이야기를 한번 간략하게 풀어보고자 한다.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이르(도시)와 살렘(평화)이 합쳐진 말이다. 즉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이 최초로 등장하는 성경 구절은 창세기 14장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높은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를 살렘왕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때 등장하는 살렘이라는 도시가 바로 예루살렘이다. 이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사사기에 등장하는 여부스 성읍이다. 기브아 땅의 성읍 중 가장 큰 성이었다. 이 성읍은 이후에 다윗에 의해서 점령당하게 된다. 사무엘하 5장에는 다윗이 시온산성, 여부스 사람들의 성을 탈취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윗은 이 성읍을 탈취한 후에 다윗의 도시라 칭하게 되며 예루살렘으로 불리게 된다. 성경의 역사 속에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면서 하나님의 도성으로 불린다. 다윗은 실로의 성막에 안치되어 있던 법궤를 이곳으로 옮겨 신앙의 중심으로 만들었고 솔로몬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다. 이로서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읍으로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이 도시가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예루살렘은 기원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점령당하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파괴되었고 성읍은 폐허가 되었다. 누구도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B.C.5세기경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일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귀환하여 작게나마 성읍을 보수하였고 성전도 작게 다시 지었다. 이후 수많은 제국들이 지나쳐 가며 예루살렘을 거쳐 갔지만 로마제국 시대에 이르러 헤롯대왕을 통해서 예루살렘은 다시금 그 영광을 보이는 듯 했다. 헤롯이 지은 커다란 성전이 예배의 중심이 되고 로마의 통치로 인해서 이곳은 평화의 도시로서 되돌아 간 듯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 예루살렘은 소란스러워 진다. A.D.70년 예루살렘 성은 불타게 되고 성전은 무너져 내리게 된다. 그 후 A.D.132년에 일어난 바르코크바 유대 항쟁으로 인해서 로마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 대한 철저한 진압에 나섰고 A.D.136년 모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서 추방하게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이름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로 바뀌게 되면서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대인들의 중심지가 되지 못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은 이후에 다시금 등장한다. 기독교가 로마의 중심 종교가 된 4세기 경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지만 유대인들은 접근하지 못하게 된다. 7세기경 이슬람 제국의 칼리프인 아브드 알마리크는 유대인들의 성전 자리에 지금의 바위의 돔(황금돔사원)을 세우게 된다. 이 자리는 무하마드 선지자가 승천한 자리라고 한다. 14세기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의 황제인 술레이만 대제는 꿈을 꾸게 되고 지금의 예루살렘 구시가지 성읍을 완성한다. 이후 이 성읍 안은 19세기 초반 유대교, 기독교, 무슬림, 아르메니안의 4개 구역으로 나뉘게 된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유대인들은 비로소 조금씩이나마 예루살렘으로 이주가 허락됐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 4번의 전쟁 가운데 제3차 중동전쟁인 6일 전쟁을 통해서 온전히 예루살렘 탈환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그리고 유대인과 기독교인 그리고 이슬람 종교의 중심으로서 굳건히 서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으로 알려진 시온산,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슬람의 선지자 무하마드가 승천한 곳이라고 여겨지는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세 종교의 성지로서 지금도 굳건히 서 있다. 평화의 성읍이라는 이 성읍이 그 평화로움을 가져본 적이 얼마 없다는 것을 누구도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미디어에서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지는 시위와 테러 이야기를 한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성읍이지만 평화로움은 코로나 때만 잠깐이었던 것 같다. 감람산 자락에 올라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이곳에서 그의 왕 되심이 선포될 때 진정한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김요셉 목사
  • 2023.07.21

    이스라엘의 외로운 투쟁 ① - 국제 정세
  • 누구도 편이 없다 성경은 어려움 당한 이웃을 도우라고 말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배운다. 우리가 보기에 누가 강도당하고 외면당한 자일까? 이스라엘은 과연 어떤 위치일까? 이 글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겪는 곤란함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하기 전에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다. 유럽과 북아메리카 그리고 남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일본,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열강의 국가들 사이에서 존재하며 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열강의 역사는 그들의 역사였고 각 국가에 흩어져 살던 이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국가의 역사가 곧 그들의 역사라고 여겼던 시대가 있었다. 시기마다 어려움이 찾아오고 박해의 시기가 있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이겨 내왔고 잘 버텨왔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심해진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 민족주의가 가져온 반유대주의 흐름은 그들을 더 이상 그 땅과 나라에서 살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20세기 최악의 사건인 홀로코스트로 인해서 멸절될 뻔한 유대인들은 다시금 살아남았고 그들만의 국가인 유대국가, 이스라엘이 탄생하게 된 것이 75년 전의 일이다.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나 많은 일들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그리고 유대인들이 가지는 국제적 위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가 이스라엘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선택한 과정은 근현대 이스라엘 역사와 시오니즘에 대한 연구였다. 대학원 자체가 이 분야에 대해서만 연구하는 과정이었고 다른 목회자들처럼 성서학이나 고고학을 공부하기 보다는 지금 내가 살아가게 될 이 나라의 역사가 너무나 궁금했다. 고작 70년 남짓한 이 나라의 역사가 얼마나 있겠느냐 싶겠지만 이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들은 너무나 방대하다. 이스라엘의 역사 이전에 유대인들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오랜 시간 유럽에 살았던 유대인들 대부분들이 제대로 된 사회적 신분을 얻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19세기에 이르러 기독교로 강제 개종을 당하면서 신분을 얻어 사회에 흡수되어 가던 유대인들이 대거 주류사회에서 업적을 쌓아가면서 그들의 지위도 나아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다시금 등장한 반유대주의로 인해서 그들은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홀로코스트로 인해서 유럽 유대인들의 3분의 1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들도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하고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지만 이 작은 나라는 70년 동안 네 번의 큰 전쟁을 치르게 된다. 매번 풍전등화 같은 위기 속에서 굳건히 버티어 낸 것은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우방 국가는 어디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미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많이 지지해주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중동의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당시만 해도 미국은 중동에 이렇다할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중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나라는 독일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승리하면서 차지하게 된 것이 아프리카와 중동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와 1930년에 탄생한 것이 지금의 중동 국가들이고 이전에는 아무런 나라가 없었다. 거대 제국들이 몰락하고 현대 유럽 강대국들이 중동을 분할하면서 탄생한 국가들은 이슬람이란 종교 세력과 유럽 국가들 이권 다툼 사이에서 힘을 저울질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에 대한 지배권은 약화되었고 중동의 많은 국가들은 오히려 독일을 지지했다. 당시 영국은 팔레스타인 점령지와 요르단과 연결되어 있었고, 프랑스는 레바논과 이집트 그리고 이라크 등과 연을 맺고 있었다. 독일은 시리아와 이란 등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어떤 국가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앞으로의 중동이 석유로 세계에 미칠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미국으로서는 반드시 거점이 필요했고 자신들을 대신해서 견제해줄 국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때마침 벤구리온과 시온주의 연합기구의 요청이 유엔에 올라와 있던 상황이었다. 전쟁의 승리국가로서 유엔 연합국의 최고 의결권을 지닌 미국은 이를 승인하였고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우방국가이기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보다 지정학적, 정치적 그리고 중동의 억제력으로서의 역할을 삼고자 하는 이유가 더 크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주위의 적대 국가들을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의 중책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도 미국과의 관계성을 따져야 하고 중동 국가들에 대한 견제를 미국을 대신해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등지고 외면해 버린다면 누구도 이스라엘을 지지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말에서 5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긴장 관계로 인해서 수백발의 미사일이 이스라엘로 날아들었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항하여 아이언돔과 가자지구 주요거점 타격으로 대응했다. 그로 인해 각 국에서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수백발의 미사일을 쏘는 하마스와 그걸 요격하면서 대응방어를 하는 이스라엘 사이에서 많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언론에서는 이스라엘보다 팔레스타인의 피해를 더 드러내고 있다. 누구도 이스라엘 편이 아니다. 미국도 유럽도 어느 국가나 미디어도 다 이스라엘 편이 아니다. 이것이 국제 사회에서의 현재 이스라엘의 위치이다. 김요셉 목사
  • 2023.05.26

    우리가 오해하는 이스라엘 이야기③-반유대주의…오해 속에 자라난 미움과 박해의 역사 Ⅱ
  •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가톨릭 배경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로마교회가 가진 영향력이 크고 기독교적 요소들이 삶의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과거 로마제국 시절에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교회의 역사 가운데 동과 서로 갈라지는 시간도 있었지만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는 유럽 전역에 걸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웠다. 기독교가 제국의 중심으로 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은 그리스도교의 시작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새롭게 중심으로 서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새로운 중심으로 서게 된다. 그리고 갈등을 겪던 유대인들의 자리들을 밀어내게 된다.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 중 하나가 니케아 공의회이다(325년). 최초의 공의회였던 예루살렘 공의회가 유대인 중심의 회의였다면 이 니케아 공의회는 유대인들을 배제한 이방인들로만 구성된 회의였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기독교적 교리가 재정됨과 동시에 유대교적인 요소들이 배제되기 시작한다. 절기와 안식일에 대한 규정들이 사라지고 일요일과 다른 절기들이 대체되었다. 교회의 교부들과 가르침들 속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대두된다. 유대인들에 대한 폄하와 오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민족 혹은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라는 명칭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방인 교회가 중심 된 유럽의 역사는 이제 철저히 기독교 교리의 전파와 확장을 통해서 세력이 커지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오해와 왜곡도 같이 퍼져가게 된다. 중세시대에 유대인들은 식인종이나 어린아이를 잡아서 그 피를 먹는 사람들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들이 가진 삶의 양식과 전통이 기독교적 요소와 다르다고 해서 마녀 사냥을 당하기도 했다. 유럽의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거주할 땅을 얻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땅을 얻지도 농사를 짓는 일도 허락되지 않는 어정쩡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농사를 짓지 않고 다른 이들과 살아갈 수 있는 사업이라는 것들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금융업, 중개업, 무역 등이 그런 일이었다. 그 당시 농업이 허락받는 직업이고 다른 직업들은 천하게 여겼던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가장 천한 직업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근간에는 가톨릭에서 가르친 유대인들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오해가 그들을 박해하는 정당성이 된 것이고 교회사 속에서 수많은 지도자들이 그렇게 확증해 주었다. 루터도, 칼뱅도 그리고 성 어거스틴도 유대인들에 대해서 “돼지같은 자들”이라고 폄하했다. 유럽의 기독교는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영향력을 넓혀가게 되었고 19세기와 20세기는 유럽의 패권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에 대한 편협함과 오해는 계속 되어 왔고 민족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유대인들은 더욱더 변경으로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지성의 시대에 영향력을 끼치게 된 많은 이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폴란드의 마리 퀴리, 아인슈타인, 헝가리 출신의 프로이드와 융, 마르크스주의 칼 마르크스 등과 같은 이들은 다들 유대인들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여전한 박해는 결국 20세기 최대의 범죄인 나치의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 민족에 대한 철저하고 오래된 오해와 폄하의 역사가 그런 슬픈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여전히 우리 안에는 반유대주의가 남아있어 우리도 모르게 유대인들에 대해 오해한다. 한편으로 유대인을 우러러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이 수전노로 돈만 밝히는 이들인 것처럼 보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 이런 편협함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재등장함이 결코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유대인들의 바람으로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서 이스라엘과 열방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와 반유대주의를 벗어나 그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길 기도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김요셉 목사
  • 2023.04.14

    우리가 오해하는 이스라엘 이야기②-반유대주의…오해 속에 자라난 미움과 박해의 역사Ⅰ
  •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시 109:1~3).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는 유대인 상인이 등장한다. 샤일록이라는 상인은 아주 잔인한 고리대금업자로 돈을 빌려주는 대신 못 갚은 안토니오의 심장 옆 살을 1파운드 베어내겠다는 계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샤일록은 지혜로운 재판관에게 혹독하게 당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는 대표적인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반유대주의적 배경에서 나오는 이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많이 언급하면서도 많은 분들이 불편해 하는 이야기가 바로 반유대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많은 분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자는 과소평가하는 것이 반유대주의에 대한 것이다. 반유대주의는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시온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 기독교 시온주의 안에서도 반유대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번쯤 곱씹어 봐야 하는 이야기이다. 반유대주의에 대한 이해가 조금 생기면 현대 이스라엘 사회와 국제 사회 안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조금 도움이 될 수 있다. 반유대주의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정의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홈페이지에 아주 잘 나와 있다.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에 대해 맹목적인 적대감을 보이는 특정 인식을 말합니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뿐 아니라 그들의 재산과 관련된 기관, 종교 시설, 심지어는 유대인과 관계를 맺은 비유대인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며, 이 증오심은 이스라엘 국가를 향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이 인류(HUMANITY)를 해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세계 언론과 경제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로 인해 반유대주의자들은 세계 정치, 사회적 문제의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각종 연설이나 글, 시각적 자료와 부정적 고정관념, 직접적인 행동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출처: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반유대주의를 영어로 안티세미티즘(Anti-Semitism)이라고 하며 이는 유대인을 셈족의 대표성으로서 인정하면서 유대인들을 반대하는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반유대주의적 사건은 20세기에 있었던 홀로코스트 사건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반유대주의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불편한 시각이 있다. 그런 학살이 유대인들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며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그와 유사한 학살과 박해 그리고 차별의 역사는 존재했다고 이야기한다. 아시아인들과 아프리카인들에게 행해졌던 노예무역과 차별정책 그리고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차별주의가 바로 그런 것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반유대주의가 비단 근·현대 사회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난 2000년의 역사 가운데 민족적 박해와 미움의 형태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듯이 역사 속에서 차별과 박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민족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과 박해는 유대민족에게만 있는 비극적인 것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은 예수님이 사시던 2000년 전만이 아니라 성경의 역사 속에도 계속적으로 등장했다. 반유대주의는 위의 정의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만들려고 하는 배경에서 시작됐다. 성경 속에서도 히브리인들을 두려워한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기 위해서 어린 아이들을 죽였던 예도 있다. 반유대주의적 흐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독교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언급됐다. 서신서들 속에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 안에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비하하고 비판하는 것을 바울은 경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부터는 더욱 더 노골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비하와 비판 그리고 박해가 두드러지게 드러나기도 했다. 성 어거스틴은 유대인들을 돼지에 비유하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라고 매도했다. 또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나 칼뱅도 유대인들을 미워하거나 비판하고 매도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교회사에서는 이를 가르치지 않거나 가르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민족에 대한 종교적 그리고 민족적 탄압은 유럽의 역사 가운데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폴란드 바르사뱌에 가면 폴란드 유대인 역사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폴란드 유대인들의 역사와 함께 왜 수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에서 살게 되었는가를 밝혀주고 있다. 그 배경에는 유럽 내에 만연한 빈유대주의와 유대인 박해가 그 저변에 깔려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들이 역사 속에서 당한 반유대주의에 따른 고통과 박해의 시간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다음편에 계속> 김요셉 목사
  • 2023.03.17

    우리가 오해하는 이스라엘 이야기①- 시온주의의 탄생 …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시 43:1~2). 20세기 역사 가운데 커다란 전쟁이 2번이나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의 열강의 구도가 탄생하였다. 그 가운데 탄생한 이스라엘 국가는 세계 역사 가운데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남겨두게 된다. 1948년 현대 이스라엘 건국 후 수많은 논쟁들이 계속되어 왔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이 땅과 관련된 분쟁과 또 유대인들에 대한 존재성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이 복잡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 할 것이다. 하나는 시온주의에 대한 이해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반유대주의이다. 시온주의는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면서 많이 거론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이 시온주의 바탕에서 시작되었다. 시온주의는 일반적으로 유대민족주의에 대한 정치적 이념이라고 정의된다. 이것은 19세기 말에 등장하여 유대국가론을 주장한 테오도르 헤르쩰에 의해서 정립된 정치적 사상이자 이념이다. 시온주의는 시온향 혹은 시온사상이라는 유대 민족이 가진 정서적 향수라고 볼 수 있다.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향 땅을 떠나 떠도는 신세가 된 유대민족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은 가고 싶지만 쉽게 갈 수 없는 땅이 되었다. 그 사이 역사 가운데 로마제국 시대에 유대 사마리아 땅에서 쫓겨나 온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의 소원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 다시금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매년마다 각자가 사는 곳에서 유대교의 절기를 지키면서 외쳤던 구호가 “내년은 예루살렘에서!”이다. 자신들의 절기를 고향인 이스라엘에서 지키는 것이 그들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접한 문화와 양식을 통해서 그런 갈망들을 표현하였다. 그것이 음악이 되고 문학이 되고 시가 되고 그림이 되었다. 이런 시온향(시온을 그리워하는 향수적 표현)들이 14세기에서 18세기 유럽의 문화 속에서 드러나게 되고 그런 흐름들이 시온주의적 문학 혹은 시온주의 정서로 표현되었다. 이 당시까지 드러난 시온주의는 정치적 성향보다는 정서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의 여파가 유대인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유럽 민족주의 운동은 각각의 민족들이 고유성과 문화적 특성들을 주장하면서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들 안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민족주의 운동은 그동안 유럽 국가들 안에서 융화되어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게 된다. 불과 어제까지 같이 공부하고 함께 사업을 하던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분류하고 차별하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19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드뢰퓌스 사건이다. 프랑스의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뢰퓌스가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된다. 이는 프랑스 군 전체가 외면한 사건으로 프랑스 전체가 들썩이는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드러난 것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누명을 써도 괜찮다는 프랑스 군부와 정치인들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프랑스인이 아니기에 당연하다는 식의 결론은 그 당시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을 취재하게 된 테오도르 헤르쩰은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난 후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그는 철저한 동화주의자로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과 상관없이 각자가 사는 나라에서 잘 융화되어 살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 헤르쩰은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유대민족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립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일명 유대국가론에 등장하는 유대민족주의가 바로 그것이며 이것이 현대 시온주의를 대표하는 것이 된 것이다. 헤르쩰은 자신의 저서인 유대국가론에서 유대민족은 어느 곳에 있든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외면하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하였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더욱 자신들의 유대적 정체성을 확고히해야 하며 유럽을 떠나 자신들만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국가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전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유대국가의 탄생을 꿈꾸게 된다. 이를 위해서 헤르쩰은 유럽 전역을 다니면서 그동안 흩어져 있던 다양한 시온주의 운동들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그 가운데 그가 가장 전념했던 것은 바로 언어와 문화 그리고 종교적 바탕을 시온주의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결국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첫 시온주의 대회가 열리게 되고 시온주의는 유대민족주의로서 그 의미를 선포하게 되었다. 이런 시온주의의 배경에는 우리가 또 알아야 하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요소가 있다. 바로 반유대주의이다. <다음편에 계속>
  • 2023.02.17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현대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다
  • 2023년도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의 공포 속에서 벗어나 조금씩 일상으로의 회복이 되어가는 시기였다. 이스라엘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코로나 팬데믹을 벗어난 나라가 되기도 했다. 멈추고 비어있던 성지는 그동안 푹 쉬었다고 할 수 있다. 붐비던 예루살렘과 갈릴리는 자연 그대로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잠시 멈추어 있는 듯 했다. 분주하고 복잡함을 벗어나 고요함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2022년 하반기부터 이스라엘은 성지순례가 다시 시작되었고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공항은 찾아든 여행객과 성지순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불식되는 듯한 순간들이었다.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것들을 잠시 비껴나간 듯 새롭게 다시금 피어나고 있다. 호텔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다시 돌아간 듯 하다고 한다. 호텔 가득 붐비는 순례객들과 여행객들 사이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가이드들과 호텔 직원들의 모습 속에는 바쁨에도 불구하고 미소들이 피어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문이 다시 열리고 손님들이 찾아오는 시점에서 문득 이 나라의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과연 이 나라는 어떻게 2000년 만에 다시금 등장할 수 있었을까? 현대 이스라엘은 과연 성경 속의 이스라엘의 연장선상의 나라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국가일까? 여전히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는 이 땅에 대한 논쟁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누가 다윗이고 골리앗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하는가? 성지 이스라엘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까? 성경과 이스라엘 그리고 유대인들은 어떤 이야기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가? 열방과 이스라엘은 성경과 역사 가운데 어떤 관계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바라볼 것인가? 많은 질문과 답들이 무수히 떠올랐다. 그 중에는 그 동안 지면을 통해서 이야기 했던 것들도 있고 아직 이야기 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성지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금은 나누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 나사렛과 브엘세바, 헐몬산과 광야 등의 이야기를 해 보았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지역들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들도 잠깐 했었다. 유대교적 관점과 풍습 그리고 절기에 대한 것들도 언급했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현재 이스라엘을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글들은 그런 것들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작은 틈새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돌아보게 되었다. 과연 얼마나 이스라엘을 알려드렸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많은 분들이 있지만 현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듣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 이야기들을 해주는 통로도 적거니와 들을 기회도 많이 없다. 순례객들은 본인들이 다녀간 장소를 기억하기도 바쁘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뒤에 있는 이야기들에 집중할 시간도 없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중보하는 이들도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제목 속에서 등장하는 지역과 사건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없이 그저 기도하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그것이야말로 은혜다. 하지만 만약 여행하는 이들과 기도하는 이들이 이 땅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더 자세하게 알고 기도 한다면 얼마나 더 놀라운 응답이 이루어질까 생각해 본다. 필자도 이스라엘에 살면서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다. 그런 은혜가 없어도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고 그 분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확장되고 깊어질 수 있다면 이스라엘을 알아가는 시간은 너무나도 귀한 것이 된다. 2023년도는 그런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너무 멀리까지는 아니지만 근대와 현대사를 오가면서 이스라엘의 탄생과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그 안에서 바라보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들을 돌아본다면 이후에 이 땅을 방문하게 될 때 남들은 놓쳤던 부분을 찾아보게 되고 더 깊이 있는 만남들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도 광야를 걷는다. 예루살렘의 성벽을 지나쳐 간다. 텔아비브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베드로가 묵었던 가죽장인 시몬의 대문 앞을 거닐어 본다. 서쪽벽,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이들을 보면서 예배의 처소를 갈망하는 영혼을 보게 된다.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면서 유대인들이 걸어왔던 암울한 역사를 되짚는다. 터널의 끝에서 시온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리운 순간을 떠올린다. 무너져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터 앞 성전의 문앞 돌계단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그 너머 성전산 위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을 보면 이 땅의 황폐함을 예언하시면서 눈물 흘리신 예수님이 보인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 이 시간 거리를 바쁘게 지나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삶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역사는 과거를 비추지만 현재를 이끌어가는 견인줄이 된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스라엘과 유대인들 속에서 여전히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 나아갔으면 한다. 김요셉 목사
  • 2023.01.13

    이스라엘에는 크리스마스가 있을까?
  • 2022년도 한해가 벌써 저물어 간다. 새로운 시작을 알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12월이 되면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성대한 절기가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이다. 우리가 믿는 신앙 안에서 경축하는 절기는 성경적이면서 유대교적인 절기들과는 사뭇 다르다고 여겨진다. 성경에서 기독교의 절기인 부활절,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을 기념했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우리가 들어온 유대교적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장막절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연관을 짓자면 유월절은 부활절과 연관이 있고 오순절은 성령강림절 그리고 장막절 혹은 초막절은 추수감사절과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정도다. 성탄절은 성경의 어떤 절기와도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천 유대인들 중에는 성탄절을 기념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대신 이 절기와 연관된 하누카(성경의 수전절이라고 등장한다. 요 10:22)를 지킨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는 크리스마스가 없을까? 그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진 이후 이 땅에 다시 정착하게 된 유대인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서방국가에서 돌아온 이들이기에 크리스마스는 너무나 익숙한 날이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 등에서 온 유대인들 중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이들이 더 많다. 물론 이들은 종교 유대인들이 아닌 일명 세속 유대인들이 대부분이기는 하다. 이스라엘은 유대교가 사회 지배적 종교이기에 기독교적 절기인 크리스마스를 더욱더 안 지킬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가장 기독교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기독교의 절기인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전반에서는 기독교의 절기인 크리스마스를 받아들이고 축하하는 분위기다. 예루살렘의 YMCA는 매년마다 자신들의 공간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을 열고 다양한 행사와 함께 기독교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심지어 무슬림들까지 모여서 즐겁게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한 불편함은 없다. 유대인들에게는 그저 그런 날로서 지나가고 무슬림들은 재밌게 보낸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불편함은 오히려 믿는 유대인들에게 있다. 그들에게 있어 크리스마스라는 날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각각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크리스마스는 유대교의 절기인 하누카와 그 시기가 겹치는 일이 종종 있다.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는 24일로 하누카의 여섯번째 날과 만나고 크리스마스 당일 인 25일은 일곱째 날과 만나게 된다. 서구식 개신교 신앙을 가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탄절은 큰 축하의 절기이다. 하지만 유대교적 배경으로 신앙을 가지는 이들에게는 크리스마스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절기로서 그들은 유대교 절기인 하누카 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과연 성탄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리스도의 탄생, 임마누엘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의미가 우리에게 온전하게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현재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도 혼돈의 시기이다. 정치적 종교적 혼돈의 시대에 살면서 필자는 성경 속에서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종교적 바리새인들과 정치적 사두개인들 모두 유대교인들이었다. 열심당과 세속인들 모두 정치적으로 반로마이거나 친로마의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고통 받고 소외당하는 민중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지금 현재의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 탄생하셨다. 그들이 자신들의 성전을 수복한 절기인 하누카를 지키며 감사할 때 하나님은 진정한 빛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베들레헴의 아랍 크리스천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장식을 세우며 그들의 성탄절을 기념할 때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 목동들의 환호를 받았다. 모두가 메시야를 바라며 기대하고 나름대로의 구원자를 꿈꾸며 세력을 꾸릴 때 예수님은 성전에서 선생들과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나누셨다. 누구의 절기이고 누구의 종교인가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스라엘에 크리스마스가 없다고 손가락질 할 때 우리에게 크리스마스가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랑으로 임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늘 이스라엘에 진정한 크리스마스이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하누카가 되길 소망한다. 김요셉 목사
  • 2022.12.16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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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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