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Israel
기억에서 기쁨까지… 4월의 이스라엘
  • 이스라엘의 4월은 다른 나라와는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을 가진다. 이 시기에는 한 달 사이에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의 날들이 연이어 이어진다. 유월절로 시작해 홀로코스트 추모일, 현충일 그리고 독립기념일까지 이스라엘 사회는 짧은 시간 안에 깊은 슬픔과 기쁨을 함께 지나간다. 올해는 특히나 전쟁으로 인해서 이런 시간이 더욱 의미깊게 지나가고 있다. 유월절은 이 흐름의 시작이다.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념하는 이 절기는 단순한 역사적 기억이 아니라 지금도 반복되는 구원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세데르’ 식사를 통해 출애굽 이야기를 다시 읽고 자녀들에게 질문하게 한다. “왜 이 밤은 다른 밤과 다른가?” 그 질문 속에서 과거의 사건은 현재가 되고 해방은 단지 기억이 아니라 살아 있는 정체성이 된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곧 이어지는 홀로코스트 추모일은 이스라엘 사회 전체를 멈추게 만든다. 사이렌이 울리는 순간 사람들은 길 위에서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다. 차량들도 도로 위에 멈춰 서고 모두가 침묵 속에 서 있는 장면은 이 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풍경이다. 유대인들에게 이날은 단순한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위협받았던 기억이다. 그 다음 날들 역시 같은 흐름 속에 있다. 현충일이 되면 전쟁에서 생명을 잃은 군인들과 희생자들을 기념하며 또 한 번 공동체적 애도가 이어진다. 가족들은 묘지를 찾고, 국가 전체가 함께 슬픔을 나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날 분위기는 극적으로 바뀐다. 독립기념일이 시작되면 거리에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국가의 탄생을 기념한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슬픔에서 기쁨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외부인의 눈에는 다소 낯설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들은 고통을 지우지 않는다. 오히려 기억하고, 애도하며 그 위에 현재의 기쁨을 세운다. 이러한 태도는 성경적 세계관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성경 속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기억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출애굽을 기억하고, 광야를 기억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정체성을 형성하는 행위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 명령을 삶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기억의 흐름은 더욱 깊은 의미를 가진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구원의 그림이며 죽음과 고난의 기억은 십자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기쁨은 부활의 소망과 닿아 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애도 없는 기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4월은 이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슬픔을 건너뛰지 않는다. 눈물을 외면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통과하여 기쁨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 속에서 공동체는 더 단단해지고 정체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질문이 던져진다.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기억 위에 어떤 삶을 세워가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절기와 기념일들은 말한다. 참된 기쁨은 고통을 지운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고 통과한 자리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이 땅의 4월은 단순한 기념의 시간이 아니다. 기억에서 시작해 애도를 지나 결국 기쁨으로 나아가는 믿음의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서 유대인들은 오늘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다시 확인하고 있다. 김요셉 목사
  • 2026.04.24

    고레스에서 하메네이까지
  • 이스라엘은 시끄럽다. 보통 이맘때면 절기와 축제들이 겹치면서 흥겨운 분위기가 올라오지만 지난 3년 동안 이스라엘은 다르게 시끄러웠다. 하마스와의 전쟁, 헤즈볼라, 후티 반군과의 전쟁, 그리고 이제는 이란과의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시끄럽게 보내고 있다. 하지만 올해는 유독 시끄럽다. 지난 3월 22일 저녁, 이란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이스라엘 핵 연구시설이 위치한 네게브 사막 인근 디모나와 아라드 주거지역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의 다층 방공망도 이번만큼은 막아내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학교와 직장 폐쇄를 결정했으며 필수 근무자를 제외한 모든 외출을 즉각 금지했다. 이스라엘에 사는 필자로서 이 땅의 긴장감은 뉴스 너머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 두 나라, 이스라엘과 이란은 과연 원래부터 적이었을까? 페르시아는 이스라엘을 살린 나라였다 성경을 펼치면 놀라운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은 이사야 45장에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내 목자’,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부르신다. 이방인 왕에게 이토록 파격적인 호칭을 붙이신 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사례다. 고레스는 기원전 539년 바벨론을 정복한 뒤 70년간 포로로 있던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허락했다. 에스라 1장은 그 역사적인 칙령을 기록한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너희 중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지어다.” 에스더서는 또 다른 페르시아 이야기다. 하만의 유대인 멸절 음모가 왕궁 한복판에서 펼쳐졌을 때, 하나님은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해 오히려 적의 계획을 뒤집으셨다.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페르시아 왕의 권위를 통해 이스라엘은 살아남았다. 어떻게 친구가 적이 되었나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스라엘과 이란은 비공개 우방이었다. 팔레비 왕조 시절 양국은 외교·경제·군사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했다. 그러나 1979년 이란 혁명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아야톨라 호메이니 정권은 이스라엘을 ‘작은 사탄’으로 규정하고 외교 관계를 단절했으며,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지원하며 대리전을 수십 년간 이어왔다. 2025년 이란의 핵 능력이 상당 부분 파괴되고 이란 내부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고, 경제 위기까지 겹친 상황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결국 2026년 2월 28일 선제 타격을 단행했다. 하메네이는 공습 직후 사망했고 중동은 전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히브리어 ‘에트’하나님이 정하신 때 전도서 3장 1절은 말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히브리어 원문의 ‘때’는 ‘에트’다. 단순히 흘러가는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개입하시는 결정적 순간을 가리키는 단어다. 고레스가 이스라엘의 귀환을 선포한 것도 ‘에트’였고, 에스더가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고 고백한 것도 ‘에트’였다. 그렇다면 지금 디모나 위로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이 순간도 하나님의 ‘에트’ 안에 있다. 전쟁 속에서도 피어나는 불꽃 이번 전쟁으로 수십 년간 억압 받아온 이란 국민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 이란의 지하교회는 오랜 박해 속에서도 오히려 성장해 왔다. 고레스라는 이방인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셨던 하나님은, 지금 이 혼돈 속에서도 이란 땅의 영혼들에게 조용히 손을 뻗고 계신다. 전쟁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에트’의 시작일 수 있다. 우리의 자리는 기도의 자리 우리는 이 전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예언적으로는 두려워하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를 끌고 가신다. 목회적으로는 위로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 121:4). 선교적으로는 시야를 넓혀야 한다. 이스라엘만을 위한 기도를 넘어, 지금 이 순간 거리로 나온 이란의 젊은이들과 지하에서 예배드리는 이란 성도들을 위해서도 함께 무릎 꿇어야 한다. 고레스 때도, 에스더 때도, 하나님은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역사를 바꾸셨다. 지금 이 땅에서도 그분의 ‘에트’는 멈추지 않는다. 김요셉 목사
  • 2026.03.27

    산지와 골짜기가 그려낸 성경의 문법
  • 이스라엘을 여행할 때 예루살렘에서 북쪽 사마리아 지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길을 따라 서서히 고도가 높아지면서 공기의 결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스라엘의 중·북부 지형은 단순한 자연환경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을 해석하는 살아있는 문법이자 하나님의 섭리가 기록된 거대한 지표이다. 성경에서 산을 뜻하는 단어는 히브리어 ‘하르’이다. 이는 단일한 봉우리를 일컫기보다 산지 전체나 ‘높음’을 상징하는 공간을 폭넓게 포괄하는 표현이다. 성경 속에서 산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예배와 계시의 장소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고 세력 간의 경계를 나누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이스라엘의 산지는 평지와 달리 시야가 높고 넓게 확보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지에 정착하며 형성한 생활 리듬은 고스란히 성경 텍스트 안에 스며들어 있다. 그들에게 산은 일상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하늘과 맞닿은 영적 통로였던 것이다. 산의 세밀한 질감을 묘사할 때 성경은 ‘기브아’라는 단어를 택한다. 이는 완만한 구릉이나 언덕의 연속을 의미한다. 중앙 산지에 촘촘하게 이어지는 이 구릉들은 길을 좁고 굽게 만들며 행인의 시야를 수시로 갈라놓는다. 이 굴곡진 지형 속에서 사람들은 매 순간 길을 선택하고 분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지형 자체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분별의 영성을 훈련시키는 구조가 된 셈이다. 산과 산 사이에는 반드시 낮은 곳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성경은 이를 두 가지 성격으로 구분하여 묘사한다. 먼저 ‘에멕’은 넓게 펼쳐진 골짜기나 평탄한 평지를 가리킨다. 이곳은 토양이 비옥하여 농경이 가능하고 대규모 이동이 용이한 땅이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거주지가 형성되고 때로는 국가의 운명을 건 대규모 전쟁이 이곳에서 벌어진 이유도 지형적 특성에 기인한다. ‘에멕’은 인간의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역동적인 무대이다. 반면, 좁고 깊은 협곡의 질감은 ‘가이’로 표현된다. 이는 좌우로 높은 절벽이 늘어서 있어 대낮에도 빛이 짧게 들어오는 음침한 공간이다. 시편 23편에 등장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결코 문학적인 비유에만 그치지 않는다. 광야를 지나며 마주하는 ‘가이’의 서늘한 현실감과 죽음의 공포가 그 단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러한 지형적 언어들이 가장 극적으로 만나는 지점은 바로 ‘땅의 회복’을 선포하는 대목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노래하며 관념적인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그는 직접 “이스라엘 산들”을 호명하며 그 산들이 다시 열매를 맺고 사람들이 거주하게 될 것을 선포한다(겔 36장).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는 길(사 40:4)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단순히 토목 공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한계로 막혀 있던 지형적 장벽들을 허무시고 친히 통치의 길을 내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오늘날 우리가 걷는 인생의 여정 또한 이스라엘의 지형과 닮아 있다. 때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하르’를 올라야 하고, 때로는 사방이 막힌 ‘가이’ 속에서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듯 하나님의 역사는 그 굴곡진 지형을 평탄케 하시는 데서 시작된다. 산이 높을수록 계시의 빛은 강렬하며, 골짜기가 깊을수록 회복의 은혜는 절실하다. 현재 이스라엘 땅은 전쟁과 갈등이라는 거대한 산지에 가로막혀 있다. 수많은 이들이 상실의 골짜기를 지나며 고통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처럼 험한 곳을 평지로 만드실 것을 믿는다. 우리의 기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산지와 골짜기마다 맺혀 있는 아픔이 씻겨 내려가고 메마른 땅에 주께서 약속하신 회복의 단비가 내리기를 구해야 한다. 전쟁의 포성이 그치고 다시금 ‘에멕’에서 평화의 농경이 시작되며 ‘하르’ 위에 세워진 마을마다 찬양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날을 기대한다. 산지와 골짜기가 만든 이 성경의 길은 결국 우리를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로 인도하는 축복의 통로이다. 이 회복의 여정에 우리 모두가 기도로 동참하며 주께서 내시는 새 길을 함께 걷게 되기를 소망한다. 김요셉 목사
  • 2026.02.20

    광야에서 들려오는 물의 이야기
  • 강, 시내, 샘이 들려주는 성경의 언어 겨울 우기가 되면 이스라엘은 비가 내린다. 한국처럼 비가 많이 내리는 곳에서 생각할 때는 뭐가 그리 특별할까 싶지만 국토의 3분의 1이 광야 지대이고 1년 중 비가 내리는 기간이 불과 2달도 채 안 되는 이스라엘에서 겨울비는 축복과도 같다. 특히나 광야에 사는 필자로서는 비가 무척이나 반갑고 행복한 순간이다. 지난 3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지독한 기근이 있었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 겨울에는 태풍과 함께 비가 많이 내렸고 또 그로 인해 기온도 예년보다 더 내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좋은 것은 비가 내리고 광야의 풍경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 비가 오고 나면 생기는 것이 강과 시내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깨끗한 강이나 시내가 아니라 흙탕물이 흐르는 것이지만 비가 오고 나면 볼 수 있는 장관들이 있다. 모래와 자갈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들이 큰 강을 만들고 폭포를 만들어 쏟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리고 비가 온 뒤 광야는 어느새 푸르름을 띄기 시작하고 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광야에서 비는 단순한 자원인 물을 공급하는 것만이 아닌 생명과 약속의 사건임을 깨닫게 한다. 성경은 물길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물, 강, 시내로 표현되는 것들이 히브리어로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먼저 강은 보통 나하르(Nahar)라고 한다. 계절에 따라 사라지기보다 ‘계속 흐르는 물줄기’의 뉘앙스가 강해서 창세기에서 에덴을 적시는 강 같은 장면과 잘 어울린다. 때로는 경계선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번영과 심판의 이미지로도 쓰인다. 반면 이스라엘 땅의 현실을 더 자주 닮은 단어는 나할(Nachal)이다. 우리나라말로 시내 혹은 개울로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비가 오면 급류가 되고 평소에는 메말라 있는 ‘와디’까지 품는 말이다. 성경이 이 단어를 자주 쓰는 것은 약속의 땅이 ‘항상 물이 넘치는 정원’만이 아니라 건기와 우기가 공존하는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이 말하는 물가는 더 섬세하다. 펠렉(Peleg)은 갈라진 물길, 수로, 물이 흘러가도록 나누어진 길과 같은 느낌이다. 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길이 여기에 속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다”(시 1:3)에 등장하는 시냇가는 자연 물길이 아닌 이런 인공적인 물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특별한 은혜의 통로에 심겨진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샘은 마얀(Ma’ayan)이다. 광야의 샘은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광야의 숨겨진 샘은 동물들에게 그리고 광야를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과 쉼을 주는 공간이다. 샘은 광야에 사는 모든 생물들에게 생명이다. 그렇기에 종종 성경에서는 샘의 이미지가 숨겨진 은혜, 예상치 못한 공급, 길 위의 위로로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근원’ 혹은 ‘원천’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것이 마코르(Maqor)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종종 근원적인 이야기를 할 때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시라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예레미야 서에서 사람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 저장고, 즉 썩어질 물을 가두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을 고발하는 장면이 나온다(렘 2:13). 이처럼 성경에서는 광야에 흐르는 물과 관련하여 다양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 특별히 다가오는 단어는 나할이다. 평소에는 메말라 있기에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 싶은 장소가 나할이다. 물길이라고 하지만 1년 중 물이 있는 기간이 얼마 안 되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거대한 강이 되어서 광야를 적시고 풀을 자라게 하며 생명이 움트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나할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명이 없는 메마른 삶에 주님의 생수가 흐르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에 생명의 물줄기를 나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메마른 땅이 적셔지며 풀이 자라나며 생명이 움트게 되는 것이다. 광야는 메마르고 거칠기만 하다. 그런 광야는 비가 오는 순간만을 기다린다. 물을 머금고 생명을 피어 내는 땅이 되기 위해서 광야는 끊임없이 비를 간구하면서 기다린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메마른 삶에 촉촉한 단비와 생수의 강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겨울에 이스라엘을 방문하길 권한다. 이스라엘의 겨울비를 맞아가면서 이 땅을 돌아보는 여정은 평생의 기억이 될 것이다. 김요셉 목사
  • 2026.01.23

    하누카 속애서 비춰지는 이스라엘의 크리스마스
  • 이스라엘에서 가장 느끼기 어려운 절기는 바로 기독교 최대의 명절인 크리스마스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크리스마스를 소홀하게 보내지는 않는다. 요즘처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크리스마스 인사가 “메리 크리스마스”에서 “해피 홀리데이(즐거운 명절)”로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는 전세계인들이 기다리는 명절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스라엘만큼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안 느껴지는 곳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빛의 절기인 하누카를 기념하는 주간이 겹쳐지기도 한다. 올해는 다행이도 하누카와 크리스마스가 겹쳐지지 않지만 작년처럼 겹쳐지게 되면 크리스마스는 더욱 더 무색하게만 느껴 질만큼 하누카 절기가 더 의미 있는 곳이 이스라엘이다. 다만 매년 이맘때쯤 팔레스타인 지역이면서 대부분이 무슬림이 사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은 어느 지역보다 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풍성한 곳이기도 하다. 과거 이슬람이 강성하게 다스리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에게도 베들레헴은 거룩하게 지켜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가톨릭 교회가 가장 견고하게 서 있는 곳인 베들레헴의 중앙인 예수 탄생교회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속에서도 지난 3년간 매년 크리스마스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찾아오는 순례객들이 많지 않기에 한가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베들레헴의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곳이고 베들레헴에 사는 아랍 크리스천들과 사람들은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한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에서도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재작년부터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쇼핑몰마다 하누카와 크리스마스를 겸해서 축하하는 장식이나 색등이 등장하기도 하고 특히 러시아인들이 몰려 사는 하이피와 브엘세바 지역에서는 쇼핑몰이나 마켓에 한껏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장식과 산타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누카는 성경에 단한번 언급된 절기이다. 요한복음에 딱 한번 수전절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한 하누카는 하누카는 기원전 2세기, 유대 땅을 지배하던 셀레우코스 왕조(특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유대인의 신앙과 율법을 억압하고 성전을 더럽힌 사건에서 시작된다. 이에 마타티아와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이 저항(마카비 혁명)을 일으켜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았고, 기원전 164년경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다시 봉헌(재헌당)한 일을 기념하는 절기가 하누카이다. 일반적으로 성전에서 켜는 촛대는 메노라(일곱가지 촛대)이다. 하지만 하누카 절기에 만은 아홉가지를 가진 촛대를 켜게 되어 있다. 이것은 유대인 랍비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하누키아라고 불리는 촛대는 하누카 절기가 가진 특수성과 의미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하누카 절기의 천설은 다음과 같다. 성전을 수복한 후 성전의 정화하고 다시금 촛대를 켜는 과정에서 성전 촛대의 기름이 하루분량 밖에 안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 기름이 준비될 때까지 8일이라는 시간이 걸리기에 그 촛대의 기름이 없어서는 안되는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초의 기름의 8일동안 타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아홉 가지를 가진 촛대로 기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누키아 촛대나 전설의 이야기는 사실 하누카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다. 이날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켜내고자 한 열정과 용기 그리고 승리에 대한 이야기이며 결국 그 빛을 지켜낸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비록 하누키아란 촛대가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긴 하지만 이 촛대에는 재미있는 것이 있다. 8일동안 켜져야 할 8개의 가지 외에 하누키아 가운데 높이 선 촛불은 샤마쉬이다. 샤마쉬는 ‘섬기는 자, 도우미’라는 뜻을 가진 불이다. 이 촛불은 자기 빛을 과시하지 않고 다른 촛불에 불을 옮겨 주어 모두를 밝히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빚진 자로서 “전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해 판단보다 눈물로 중보하고, 논쟁보다 사랑으로 축복하는 자세를 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안에 머문 만큼, 우리는 더 낮아져 그 빛이 다시 흘러가게 하는 샤마쉬가 되어야 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많은 어려움에 싸여 있다. 반유대주의와 전쟁 그리고 위협 속에서 마치 어두움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때에 진정한 빛으로 소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비쳐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으면 한다. 김요셉 목사
  • 2025.12.28

    상실을 다루는 자세 … 이스라엘의 장례문화
  • 가자지구에서의 전쟁이 2년만에 휴전을 맞이했다. 240명의 인질들이 집혀갔었고 휴전을 통해서 대부분 돌아왔다. 40여 명이 죽은 시신으로 돌아왔고 나머지 200명이 2년에 걸쳐서 생환됐다. 그 전장에서 생존한 인질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올 때, 이스라엘 전역은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시신으로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누구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고, 누구는 무거운 침묵으로 관을 맞이했다. 놀라운 것은 시신으로 돌아온 자녀를 향해 울부짖는 대신 그들의 부모와 형제들이 “당신은 마지막까지 싸운 우리의 영웅이었다”라고 고백하며 상실의 아픔을 귀환의 명예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지 감정의 통제가 아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애도하는 방식, 즉 장례문화 속에는 공동체적 신념과 깊은 종교적 통찰이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의 유대교 장례는 빠르고 단순하며 정결한 절차로 진행된다. 대부분의 유대인 장례는 사망 후 24시간 이내에 이루어지며 시신은 관 없이 흰 수의로 감싼 채 땅에 직접 매장된다. 이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을 따른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이스라엘 장례는 꽃 장식도, 음악도, 긴 절차도 없다. 오직 단순한 땅의 품으로의 귀환이다. 이는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수용하고 남겨진 자들이 그 사실을 피하지 않도록 돕는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장례식이 3일 이상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슬픔을 나누고 고인을 기리는 다양한 의례와 조문객 문화가 발전되어 있다. 제사 문화나 위령제, 유골함 보존 등도 가족 중심의 애도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와 달리 이스라엘은 공동체 중심의 집단 애도 문화가 강하다. 매장 후 7일 동안은 ‘시브아(Shivah)’라는 애도의 시간을 가진다. 가족은 집에 머물며 검은 옷을 입고 공동체가 찾아와 위로하며 함께 슬픔을 지고 간다. 죽음을 숨기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함께 감당하는 것이 특징이다. 유대교는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되 부활에 대한 확고한 교리는 비교적 약하다. 탈무드나 랍비문헌에는 최후의 날에 의인이 부활할 것이라는 개념이 있으나 현대 유대인들의 정서에는 “지금의 삶”이 훨씬 중요하게 여겨진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소망을 분명히 선포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그리스도인에게 장례는 끝이 아니다. 관 위에 얹은 십자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날 날을 기다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민족이다. 그들은 전사자의 이름을 외우고, 사진을 붙이고 기억하며 울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그 울음은 주저앉는 절망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 애도이다. 기독교인인 우리는 이러한 문화 속에서 죽음을 부정하거나 과도하게 미화하지 않되 부활의 소망으로 상실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별을 맞이한다. 누군가는 먼저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새 시작이다. 이스라엘의 장례문화는 그것을 말없이 알려준다.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는 한 사람의 마지막. 그러나 그 안에는 공동체가 함께 애도하고 함께 기억하며 삶을 이어가는 힘이 담겨 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상실 속에서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그 믿음이 오늘 우리의 아픔 속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김요셉 목사
  • 2025.10.24

    나팔절, 다시 울리는 하나님의 소리
  • 해마다 찾아오는 똑같은 절기이지만 그때마다 절기를 맞이하는 분위기는 다르다. 특히나 요즘같은 전쟁의 여파 속에 있는 이스라엘은 예년만큼의 북적거림이나 흥겨움은 조금 덜 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오는 절기를 기다리게 된다. 로쉬 하샤나로 시작하여 욤 키푸르(대속죄일) 그리고 초막절까지 기대가 된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오는 절기가 있다. 매년 가을 이스라엘 전역에서는 쇼파르(양각 나팔)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날을 ‘로쉬 하샤나’라 부르며 새해를 맞이하고, 회당마다 특유의 의식을 따라 나팔을 분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절기를 ‘욤 트루아’(Yom Teruah), 즉 ‘나팔을 불어 외치는 날’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나팔절로 명시하고 있다.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레 23:24). 성경이 말하는 이 절기의 중심은 ‘새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하심과 경고의 소리에 있다. ‘로쉬 하샤나’는 히브리어로 ‘머리의 날’이라는 뜻을 가진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이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간주하며, 창조의 기념일, 심판의 시작, 회개의 문이 열리는 날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한 해의 시작은 유월절이 포함된 니산월(봄)이며, 로쉬 하샤나가 있는 달인 티슈리월은 분명히 일곱째 달로 기록되어 있다(출 12:2). 로쉬 하샤나가 유대 전통에서 ‘새해’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역사적 상황이 있다. 바벨론은 시기적으로 가을을 새해로 삼았고 유대인들은 그 달력 체계를 일부 수용하면서 티슈리월 1일을 새해처럼 지키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서구 유럽의 학기 시작이 가을학기에 시작하는 경우도 이에 유사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바벨론 유수 이후 유대교 랍비 전통 안에서 이 날은 심판의 날로 확장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기회가 닫히기 전 돌이켜야 한다는 관념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로쉬 하샤나 이후 열흘은 ‘두려움의 날들’(Days of Awe)이라 불리며 속죄일(욤 키푸르)까지 회개와 화해,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이 절기에 나팔은 왜 불까?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단지 종교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 경고, 임재의 선언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하실 때 큰 나팔 소리가 땅을 진동 시켰으며(출 19장),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돌며 나팔을 불었고(수 6장),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도 나팔이 울려 퍼졌다(왕상 1장). 또한 선지자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큰 나팔로 흩어진 자들을 모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사 27:13).이처럼 나팔은 하나님의 뜻이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나팔절은 하나님이 백성을 부르시는 날이며 성경에서도 이 절기의 시작을 나팔소리로 시작하게 하였으며 이 때는 잠자고 있는 영혼에게 깨어나야 할 시간임을 알리는 절기이다. 우리는 이 절기를 기독교적 신앙의 시선으로 이 마지막 나팔을 향하여 어떤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까? 신약 성경은 이 나팔의 이미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살전 4:16).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 마지막 나팔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실제 사건의 선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의 나팔절이 경고와 회개의 날이었다면, 신약의 마지막 나팔은 심판과 구속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알리는 날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 절기를 단순한 유대 전통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의 나팔절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지금 깨어 있는가?”,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고 있는가?”,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는가?” 이스라엘에서 울려 퍼지는 쇼파르 소리는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다. 지금의 시기에 더욱 이 나팔절은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쟁의 소식과 온 세계가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국민들의 의견이 나뉘어져 있다. 이런 시기에 울리는 나팔소리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외침이라고 볼 수 있다. “너희는 나를 바라보라!” 그 나팔 소리는 지금도 세상의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들려오고 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우리는 그 소리를 인식하고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주여,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깨어 있습니다. 다시 오소서.” 김요셉 목사
  • 2025.09.26

    “웃지 않으면 … 울게 될 테니까”
  • 이스라엘 국민들의 회복탄력성 지난 두 달 동안 이스라엘은 이란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느라 바쁘게 보내고 있다. 그 사이에도 여전히 하마스, 시리아, 예멘의 후티 반군이 날려보낸 드론과 로켓을 막아내야 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휴대폰의 미사일 알람은 아직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그야말로 사방에서 전쟁의 공포가 몰아친 한 달이었다. 이런 복잡하고 심란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걸 이겨내고 있는 걸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3년이 넘어가면서 피난민들과 남아있는 사람들은 트라우마와 함께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혼란 그리고 정착에 대한 회의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지난 77년의 시간 동안 전쟁과 분쟁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겨내고 성장해 가고 있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 대답은 “웃음”이다. 이스라엘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웃지 않으면 울 수밖에 없는 현실을 웃음으로 견디는 법을 체화했다. 이를 ‘이스라엘의 집단적 회복탄력성의 상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웃음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긴장과 공포, 고통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자 문화다. 누군가는 ‘웃는 자가 승리자이고 강자이다’라는 말을 했다. 유대인들의 유머는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 그리고 그들을 둘러 싼 다소 비판적인 유머가 많다. 혹자는 현대 블랙코미디의 원조를 유대인들이라고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머는 지금의 전쟁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공습 사이렌이 울려도 지하 대피소에서 농담이 오간다. 병역을 마친 젊은 세대는 ‘자조적 밈’을 만들어 전투로 인한 피로를 위로한다. 소셜미디어에는 “오늘의 방공호 패션”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고, 미사일 경보 속에서도 커피 한 잔을 즐기는 모습이 퍼져 나간다. 다소 과격하긴 하지만 전쟁의 상황을 유머와 자조적인 웃음 속에서 이겨내는 모습들을 만들어 간다. 전쟁의 무게에 짓눌리는 대신, 웃음으로 삶의 중심을 다시 잡아가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방식이다. 이러한 문화는 단지 위트나 재치의 문제가 아니다. 트라우마를 공동체적 유머로 해석할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의 강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현대 이스라엘 국가 문화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오랜 역사 속에서 비난과 차별 그리고 박해를 이겨내고 살아난 유대인들의 정신력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저항의 정신 그리고 그것을 유머와 웃음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나치에 의해서 게토에 갇혀 사는 유대인들 중 하나였던 주인공은 아들을 위해서 우스꽝스런 모습과 웃음을 자아내는 표정과 말로서 가족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총살을 당하러 끌려가는 중에도 아들을 웃기기 위해서 보여주는 그의 우스운 모습은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자아내기도 한다. 외부의 공격에 맞서는 군사력이 ‘아이언돔’이라면, 내면의 균형을 지켜내는 정신력은 바로 이 웃음으로 인한 회복탄력성이다. 더 놀라운 것은 미사일이 떨어져 도시의 한 부분이 파괴되어 혼란이 있었던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미사일이 떨어졌던 다음 날 텔아비브 해변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학교는 문을 열며 카페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죽음과 공존하는 삶이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평범한 오늘’을 회복해낸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승리다.” 이런 암묵적인 합의가 이 땅의 사람들 사이에 흐른다. 성경에도 이런 회복탄력성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시편 기자는 울음이 밤을 지나고 기쁨이 아침에 온다고 노래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이스라엘은 지금도 울며 씨를 뿌리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웃음을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웃음은 회복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절망을 끝까지 밀어내고 나면 남는 건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뿐이다. 그래서일까. 전쟁이 끝났다고 평화가 오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매일 웃으며 말한다. “웃지 않으면… 울게 될 테니까.” 우리는 이런 이스라엘의 회복탄력성을 배울 필요가 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위기를 이겨내는 탄력성을 가진 신앙이 필요하다. 김요셉 목사
  • 2025.08.29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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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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