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Israel
슬픔도 웃음으로 … 해학의 유대민족
  • 이스라엘에는 3월과 4월 사이 니산월이 오기 2주 전에 아주 독특한 절기가 찾아온다.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절기로 부림절이다. 사실 부림절의 이야기는 매우 비장하며 잔혹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 유대민족의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의 서사도 그와 같다. 포로기 시절 제2시민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찾아온 민족 멸절의 위기, 하만이라는 한 사람의 악한 흉계로 인한 위기였다.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에스더라는 여인과 모르드개, 두 사람의 헌신과 목숨을 건 용기 있는 행동 덕분이었다. 성경은 이 절기를 부림, 제비를 뽑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어 부림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부림절 시기에 이스라엘을 방문하면 재미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다양한 부림절 퍼레이드이다. 이 절기엔 이스라엘의 많은 도시마다 각기 다양한 행사들이 벌어진다. 도시는 온갖 캐릭터와 화려함으로 치장한 사람들, 희한한 모습으로 꾸민 이들이 넘쳐난다. 상점마다 가장 행렬과 행사 때 입는 여러 가지 옷들과 소품들을 판매한다. 아이들은 디즈니 캐릭터나 만화 주인공들처럼 꾸미기도 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겁게 재미있는 모습으로 즐긴다. 심지어 종교 유대인들도 이 날만큼은 엄숙함을 내려놓고 다양한 모습으로 치장하며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부림절에는 모두가 원래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꾸미는 것이 풍습이라고 한다. 왜 이런 풍습이 있는 걸까? 여기에는 슬픈 유대인들의 역사가 전해진다. 유대인의 한 전통에 따르면 부림절의 계기가 되었던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감추기 위해서 다른 모습을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유래된 전통이라는 전승이 있다. 또 다른 전승은 유대인들이 중세 유럽 시대를 살던 중 유럽의 사육제와 같은 풍습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사육제는 유럽의 가장 행렬과 같은 축제로서 시민들이 자신들의 신분과 상관없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축제를 즐기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전승도 있다. 이런 전승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 경우 반유대주의적 상황에서 박해 받을 수 있기에 신분을 감추어야 했던 슬픈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자신들만의 해학으로 풀어내며 부림절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정말 해학이 넘치는 이들이다. 유대인의 탈무드는 더욱 해학적이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의 학습경전으로 지혜의 책이라고 불리는 만큼 오랜 유대인들의 정수를 담고 있다. 사실 탈무드의 목적은 토라(유대교 경전인 모세오경)를 가르치고 이해시키기 위한 책이다. 한권이 아닌 십여 권으로 구성된 해설집이자 지혜를 담은 책이다. 그렇다 보니 딱딱하고 경직되어진 성경의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쉽도록 예화를 담아서 쓰게 된 것이다. 탈무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화와 예시로 많은 이들에게 성경의 지혜를 가르쳐 왔다. 그 탈무드가 유대인의 해학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이런 예화가 있다. 한 신사가 마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가고 있었다. 동승한 마차에는 한 유대인이 점심으로 절인 생선을 빵에 끼워서 먹고 있었다. 신사는 가난한 유대인을 골려 주고자 물었다. “유대인들의 머리가 좋은 이유가 그 절인 생선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봅니다!” “네 맞습니다! 저희는 특히 이 머리를 먹어서 더 똑똑한 거지요!” 신사는 문득 정말 그런가 싶어서 물었다. “정말 그 머리를 먹어서 그렇다구요!? 그럼 나도 좀 먹어봅시다!” “5세켈만 주세요!” 신사는 그렇게 생선 머리를 사서 억지로 꾸역꾸역 먹었다. 먹고 나니 냄새도 나고 생각해 보니 머리 하나에 5세켈이나 주고 산 것이 비싼 거 같았다. 신사는 불편함을 드러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당신, 너무 하구만. 고작 생선 머리 하나를 5세켈씩이나 받다니! 그 돈이면 다음 역에서 생선을 두 마리나 살 수 있는 가격이잖소!” 그러자 유대인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거 보세요. 벌써 머리가 좋아지셨네요!” 유대인이 자신을 비꼰 신사를 정중하게 받아 친 이야기이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통해서도 자신들에 대한 비하와 차별을 지혜롭게 받아내는 방법을 유머로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해학이라고 부른다.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 역사 속에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 차별을 당하고 살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성경의 지혜와 여유 그리고 유머로 살아갔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유머와 웃음을 놓치지 않은 이들이라 그런지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 하마스와의 전쟁 시간 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비난과 야유 그리고 비판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부림절을 즐기고 삶의 고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웃는 자가 승리한 자라고 했던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왔을 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활짝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김요셉 목사
  • 2025.04.25

    우호관계에서 적으로 변화되기까지
  • 이스라엘과 이란의 과거와 현재 이스라엘 뉴스에서는 매주 인질들의 석방과 가족의 재회로 인한 감동의 이야기들이 계속 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500여 일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가자에 억류되었던 인질들이 매주 3~4명씩 풀려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구류자들을 계속적으로 교환하고 있다. 이 전쟁의 끝은 어디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금 이 전쟁의 뒷면에 있는 하마스의 배후인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되짚어 보았으면 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휴전 협상과 인질 교환 문제로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중동 정세가 크게 변화하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관계 개선을 이끌었다. 이란은 이러한 변화에 크게 반발했고 이스라엘과 미국 간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는 상황에서 중동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는 이러한 복잡한 배경 속에서 더욱 얽히고 있다. 이란은 핵 개발을 지속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군사적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은 단순한 국가 간의 대립을 넘어 지역 전체의 평화와 안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즉 이전 페르시아 제국 시절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Cyrus the Great)의 지원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 고레스는 유대인의 신앙과 문화를 존중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환을 허락한 인물로 그들의 민족적 및 종교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경의 에스더서에서도 에스더 왕비가 자신의 민족을 구하는 이야기를 통해 이란(페르시아)과 유대민족 간의 긍정적인 관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20세기 중반부터 적대적인 방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이러한 상황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으로의 전환 과정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을 ‘작은 사탄’으로 간주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후 이란 정부는 반이스라엘 무장단체인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지원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기에 이른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란의 핵 개발은 이스라엘의 주요 안보 위협으로 자리 잡았고, 이스라엘은 군사적 공세와 국제 사회의 협력을 통해 이란의 군사적 그리고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전개는 두 나라 간의 불신을 더욱 증대시키며, 중동 전역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는 상호 이해와 존중의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평화의 길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스라엘과 이란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도해야 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두 국가 간의 갈등 해결은 개인의 이해와 화해의 추진이 필요한 중요한 사안이다. 서로의 종교적 차이를 존중하고 각국 지도자에게는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지혜와 용기가 부여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중보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과 이란 두 나라가 서로의 고난을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가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돕기를 소망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관계 회복을 위한 기도는 단순히 두 국가 간의 문제를 넘어서 인류 모두와의 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행위이다. 중동 지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우리 스스로도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행동해야 할 시점이다. 하나님께서 이들 간의 분쟁을 치유하고, 서로를 향한 이해와 화해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을 간구한다. 김요셉 목사
  • 2025.02.21

    좁은 길로 가는 삶
  • 유대인으로서 예슈아를 믿는 이로 살아간다는 것 현대의 많은 국가들이 이민자들과 본토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다양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굉장히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에는 유대인과 아랍인 그리고 다양한 소수민족들, 베두인족과 드루즈족 등이 살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인과 무슬림 그리고 아랍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유대인도 종교인과 세속인으로 나뉘고 종교인도 정통 종교 유대인(하시딤)과 전통적 유대교인(닷띠) 등으로 나뉜다. 또한 유대인은 출신 지역과 배경에 따라서 아쉬케나짐-유럽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과 스파라딤-북아프리카 동유럽 등지에서 이주해온 이들로 나뉘고 중동에서 살던 미즈라힘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운데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로 메시아닉 유대인 혹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히브리어로 예슈아)를 메시야로 믿는 유대인이다. 이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자랐지만 복음 안에서 예슈아를 유대인의 구원자이자 온 열방의 구원자로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다. 이들을 향해 크리스천 혹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는 이들이 종종 있다. 혹자는 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들이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오해가 있는 가운데 던져지는 질문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신앙도 엄밀히 말하면 유대교 바탕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란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유대교 안에서 구약 안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된 메시야를 발견했다.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란 종교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후대가 만들어낸 종교적 명칭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개종한 유대인이라고 하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개종이 아닌 유대교 안에서 이야기된 메시야를 발견한 유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칭호가 맞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슈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결단을 해야만 가능하다. 과거 예배 장소를 테러하고 집으로 폭탄 등을 보내 위협하던 박해는 지금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믿는 유대인들이 받아야 할 저항과 방해는 더 치밀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다. 더욱이 1세대 믿는 유대인들과 2세대 믿는 유대인들이 가지는 사회적 어려움은 날로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세대 유대인들은 이미 장성한 가운데 신앙을 가지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2세대 믿는 유대인들은 부모의 영향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그들이 학교에서 혹은 친구들 사이에서 받는 차별적 시선과 몰이해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경우가 많다. 어릴 적부터 받아온 차별과 비판 속에서 자란 유대 신앙인들은 많은 고민과 번민의 시간을 가졌다. 그 누구도 그들의 신앙 고백을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들의 정체성이 유대인이 맞는가라는 도전을 받기도 했다. 유대인으로서 태어나 자란 이들에게 예슈아를 믿는다는 이유로 민족적 정체성이 공격을 받는 것을 어린 신앙인들은 감내해야 하고 이겨내야 했다. 참으로 좁은 길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절기를 지키고 율법적 계율에 대해서 유대인으로서 지켜내고 있는 이들을 향해 율법적이라거나 유대교에 얽매였다는 비판을 들을 때마다 이들은 어찌해야 할지 모를 고민에 빠져들어 간다. 마태복음 10장 2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젊고 어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판과 미움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어떤 어려움에도 예슈아를 믿고 따르는 일에 쉬지 않고 달려오고 있다. 우리는 이제 비판과 비난을 벗고 이 믿음의 여정, 좁은 길의 여정을 달리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고 격려해야 한다. 가자 전쟁이 휴전을 맞이한 이때 이스라엘과 가자의 회복과 복음의 전진을 감당할 이들이 바로 이 땅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예슈아의 복음을 들고 나갈 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자 한다. 김요셉 목사
  • 2025.01.24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소망을 나누는 통로
  • 지난 10월 한달은 유대력 신년을 지나서 대속죄일과 장막절 행사를 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필자가 속한 마을은 네게브 지역에서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행사가 있다. 교회 공동체도 이때를 맞이해 여러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막절이 끝나자마자 필자는 유대인 목사님 세 분과 한국에서 개최된 CGI(Church Growth International) 대회에 참석했다. 분주한 가운데 장막절 만찬까지 모두 마치고 바로 다음날 새벽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CGI 대회에 유대인 목사님들이 참석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스라엘에 적지 않은 목회자분들이 계시지만 한국에서 있는 국제적인 행사인 CGI를 모르시는 분들이 많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리는 성회에 참석해 전 세계의 많은 목회자들과 만나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 미리 한국에 도착하여 숙소와 여러가지 준비를 마치고 23일부터 27일까지 이스라엘 목회자 세 분과 행사에 참석했다. 다들 한국이 처음이고 또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모든 분들이 조용기 목사님과 여의도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고 했다. 성회 참석기간동안 교회와 기도원을 방문하고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 분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회가 끝나고 양화진 선교사 묘원을 방문했다.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한국 교회의 부흥과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을 놀라워 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이 땅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생명을 나눈 수많은 선교사들의 삶이 있었다. 그들의 기도가 한국의 부흥을 이루어 낸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방문하게 된 양화진 선교사 묘원은 이스라엘 목사님들께 적지 않는 충격을 주었다. 한국의 역사와 한국 교회의 역사를 모르던 이들에게 선교사 묘원에서 듣게 된 수많은 선교사들의 헌신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의 부흥이 결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줬다. 한 목사님은 이런 역사를 몰랐다면서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열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겠다고 했다. 이런 헌신 위에 세워진 교회가 열정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렇게 헌신하는 수많은 한국 교회 성도들과 목사들이 있기에 이스라엘에도 하나님의 부흥이 있을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함께 들렀던 시간 또한 감사했다. 조용기 목사님의 사역 가운데 가장 많은 시간이 기도의 시간이었다는 이야기는 목사님들을 감동시켰고 한 목사님은 이스라엘에 오산리 기도원과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비전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함께 GOODTV와 인터뷰를 했다. 현재의 이스라엘의 상황과 전쟁으로 인한 어려움과 고민들을 나누었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계속하려고 하는가란 질문에 모두가 공통적으로 답한 것은 이스라엘은 결코 분쟁을 일으키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언제든지 모두와 평화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이 무기를 놓는 순간 이스라엘은 멸망을 하게 되지만 테러리스트들이 무기를 놓는 순간 평화가 온다는 것이다. 세 분의 목사님들은 진솔하게 말씀해 주셨다. 입을 모아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만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주신다고 했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들이 적이지 팔레스타인 모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번에 이스라엘 목사님들과 함께 했던 한국행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소중했다. 이스라엘에는 지금 부흥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전쟁으로 마음이 황폐해진 이 땅에 소망이 비춰져야 하는 시기이다. 목사님들은 단순히 교회의 양적 부흥을 본 것이 아니라 부흥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했다. 이 나라가 수많은 선교사들의 기도와 헌신 그리고 생명을 바쳤기에 이루어진 것 그리고 이 나라에 기도하는 수많은 성도들이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한국에 부흥을 허락하셨다면 이스라엘에도 부흥을 허락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안과 밖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세 분의 목사님은 이번 한국방문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과 부흥에 대한 비전을 가지게 됐다고 고백했다. 이제 이 땅에 전쟁이 속히 끝나고 한국과 같은 성령의 부흥이 일어나길 기도해 본다. 김요셉 목사
  • 2024.11.22

    가자 전쟁 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
  • 로마서는 너무나도 귀한 책이다. 바울의 주옥같은 복음의 진수와 구원의 핵심을 담은 책이라고 한다. 이신칭의를 다루는 교리적인 책이며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온전하게 전달되고 이해되도록 썼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만일까? 로마서를 들여다보면 로마서 9장부터 11장에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있다. 우리는 12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보이는 이 이야기에 잘 집중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바울이 가진 유대인 구원에 대한 소망 쯤으로 보는 것이 대부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9장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바울은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고 토로하고 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민족의 구원을 바라고 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로마서 9장에 이르러 등장하는 것일까? 로마서는 교리를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었던가? 로마서는 구원에 대한 메시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 아닌가? 바울은 왜 갑자기 유대인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이것은 로마서가 가진 핵심이 교리가 아닌 구원에 대한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로마교회에 보내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로마교회의 로마인 성도들에게 유대인 성도들과의 관계와 더불어 그들과 함께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의 시대에 이런 바울과 같은 이들이 이스라엘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학살과 더불어 일어난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전쟁 그리고 레바논 헤즈볼라와의 전쟁은 이스라엘을 전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1년이 넘어가는 이 시간 동안 좌절과 낙망, 분노와 슬픔, 잃어버린 이를 향한 아픔과 통곡이 온 나라를 뒤덮었다. 그 가운데 소망을 나누는 이들보다는 정부를 향한 분노의 시위와 낙망 속에서 아픔을 위로하고자 노력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누구도 희망을 가지는 것이 힘든 이 시기에 이스라엘을 위로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이스라엘을 위해서 기도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스라엘의 그리스도인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불과1%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 적은 숫자의 메시아닉 유대인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이 전쟁의 어두움 속에서 빛이 되고 있다. 그들은 전쟁으로 인해서 피난민이 된 이들을 돕고 그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복음의 빛을 높이 드는 일들을 하고 있다. 비록 이런 일들을 하는 이들의 사진을 나눌 수는 없지만 가장 안 보이는 곳에서 묵묵히 복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나누고 있다. 필자가 알고 지내는 몇몇 유대인 목회자들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피난민들을 돕기 위해서 성도들의 집들을 열도록 했으며 몇몇 성도들은 자신들의 집과 방을 기꺼이 내주었고 자신들의 것들을 나누어 주고 있다고 한다. 필자도 작년에 잠시 이스라엘을 떠나 있어야 하는 시기에 우리집을 피난민 두 가정이 사용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과는 지금도 여전히 친하게 지내면서 오가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은 여행이 쉽지 않다. 많은 국가들이 항공편들을 취소했고 소수의 항공사만이 운항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 오는 손길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작년 참상이 시작된 이후 여행객은 줄었지만 오히려 돕기 위해서 찾아오는 이들은 더욱 많아졌다. 수많은 해외 교회에서 농장과 복구일들을 돕기 위해서 줄을 지어오고 있다. 한 지인은 2주 동안 토마토만 따고 돌아가게 되었다고 했다. 비록 몸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 노고 속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고마움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마음 열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이야기에 바울이 꿈꾸고 바랐던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아직 이들에게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하나님이 이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귀를 먹게까지 하며 복음이 이방을 향하여 퍼져가도록 한 것은 은혜이다. 이 은혜를 이제는 유대인들과 함께 나눌 시기가 왔다. 바울이 이야기 했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긍휼을 선포하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 11:31). 김요셉 목사
  • 2024.10.25

    이스라엘의 외로운 투쟁 (2)- 반유대주의, 생존의 싸움
  •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1년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해 10월 7일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인 하마스가 이스라엘 남부 가자인근 네게브에 위치한 키부츠 마을을 침공하여 1500여 명을 강간, 살해하고 240여 명을 납치해서 가자로 끌고 갔다. 이후 이스라엘은 즉각적인 반격과 함께 하마스 척결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가자지구로 진격했다. 이스라엘 군대인 IDF는 인질의 구출과 하마스를 궤멸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가자 지구에서 전투와 함께 민간인 보호를 진행하고 있다.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인질들이 130여 명이나 되며 그 중 몇명이 살아 있는지 아직까지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공격을 받고 민간인들이 살해당했을 때, 전 세계는 깜짝 놀라며 이스라엘을 향해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고 이와 관련된 보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이후 전 세계 언론들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반대하는 메시지와 하마스가 다스리던 가자지구에 대한 피해에 대해 집중보도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시민들의 참혹한 죽음에 대한 언급은 어느새 인가 사라지고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옹호, 하마스에 대한 지지의 목소리가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심지어 미국 캠퍼스 내에서는 반이스라엘 운동과 함께 반유대주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미국 지성의 선두에 있다는 아이비리그 대학만이 아니라 수많은 미국의 대학 내에서 반이스라엘 운동과 하마스,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전쟁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반전 운동을 한다던 지 이스라엘의 작전 수행 중 일어나는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 위한 시위는 얼마든지 이해되지만 학교 내 성조기를 태우고 팔레스타인 국기를 거는 일이나 유대인 학생들을 위협하는 폭력적인 행위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스라엘은 이 속에서 외로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반유대주의는 전 세계적으로 다시금 일어나고 있다. 비단 지금의 전쟁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도 모르게 반유대주의적 정서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유럽 사회에서 만이 아니라 지금 미국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반유대주의는 2차 세계대전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주도하기 이전과 비슷한 양상을 지니고 있다. 솔직히 지금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유대주의 반이스라엘 시위에서 “강에서 바다까지”라고 하는 시위대의 외침은 어떤 의미인지를 모른 채 왜곡된 역사와 잘못된 이해 가운데서 무조건적인 유대인을 향한 미움으로 외쳐지고 있다. 강은 요단강이며 바다는 지중해이다. 다시 말하면 요단강에서부터 지중해까지 팔레스타인들에게 돌려주라는 외침이다.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 지배를 부정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존재를 무시하는 이야기이다. 한 리포터가 시위대의 대학생에게 질문했다. “이런 주장 속에서 유대인들은 어디로 가라는 말인가?” 학생의 대답은 나를 실소하게 했다. 그것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디로 갈지 내가 알바인가”라는 대답을 들으면서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사이프러스의 난민캠프에 모였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을 향하여 던져진 질문이 그것이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란 말인가?’ 반유대주의 흐름 속에서 유대인들은 어디로든 갈 수가 없는 신세가 되었다. 역사 속에서 유린하는 백성이라는 타이틀이 이들에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어렵게 UN을 통해서 얻어낸 땅에서 살고자 했던 이들이 마주한 것은 4차례의 큰 전쟁이었다. 그 전쟁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에게 또다시 학살과 죽음을 마주하게 한 사건이 작년 10월 7일의 사건이었고 이 세계 어디에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게 한 것이 지금의 반유대주의 시위와 반이스라엘 시위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우방이라고 여겼던 미국과 서구 국가에서 말이다. 한 유대인 친구의 집에서 샤밧 금요일 저녁을 먹으면서 나누었던 대화가 문득 떠오른다. 그 친구는 내 종교가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개신교 복음주의자라고 이야기했다. 그는 함박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이스라엘에는 더 많은 복음주의자 친구들이 필요해. 그들은 우리가 여기 살아도 된다고 믿고 지지하고 있으니까!” 함께 크게 웃었지만 씁쓸한 이야기였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이 땅에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총칼을 들이밀며 나가라는 세력들은 진짜 이 땅을 사는 팔레스타인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유대인들이 미워서이다. 그들에게 목표는 이스라엘의 전멸이니까. 정말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이다. 오늘도 난 광야로 나가 하나님께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한다. 김요셉 목사
  • 2024.08.23

    이스라엘의 외로운 투쟁 …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바라봐야
  • 성경 여호수아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의 족속들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진멸하는 이야기는 많은 이들이 전쟁의 이야기로만 오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경 신명기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한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야훼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신 7:1~2). 여기에 등장하는 진멸이라는 단어는 헤렘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심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고 제명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민족의 진멸에는 그 민족에 대한 절대적 멸족이라는 의미보다는 심판과 하나님의 언약에서의 제외라는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다. 여호수아는 이 말을 받아서 가나안 족속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 어긋난 방식으로 되어진 점령과정에서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그 일을 이루질 못하고 옆구리에 가시가 되는 민족들과 화합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한 이스라엘의 타락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가나안 땅의 민족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심판에 대한 이야기였다. 누군가를 해치거나 그들을 멸망시키기 위함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떠나 사는 이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이다. 과거 기독교는 이 단어를 이용하여 이교도들에 대한 심판으로 이용했다. 또한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심판과 탄압 그리고 폭력과 학살의 정당성으로 사용해 왔다. 지금도 우리의 생각 저변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부분이 먼저이면서 그로 인해 타민족 특히나 이방종교 민족에 대해서 행해지는 전쟁과 폭력에 묵인해 오는 것이 많았다. 과거 이스라엘, 유대 민족이 당했던 학살과 박해는 이에 기인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난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이방민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 구세주를 외면한 이들이라고 낙인 찍혀서 온갖 박해와 핍박 그리고 심지어 학살을 당했다. 현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이후 유대인들은 또 다른 왜곡 프레임에 놓여 핍박과 미움을 당하게 된다.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이 유대인들의 돈과 권력으로 탄생했다고 하거나 미국이 밀어줘서 팔레스타인들을 내쫓고 그 땅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런 오해들 속에서 이스라엘은 독립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계속 전쟁의 위협과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향한 거짓과 왜곡 속에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 국가를 바라보고 있다. 하마스와의 전쟁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잘못만을 뉴스 미디어와 매체들이 보도하고 있다. 2023년도 10월 7일 이후 전 세계의 여론은 반이스라엘로 돌아섰다고 본다. 세계 곳곳에서는 반이스라엘(Anti-Israel)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가에서는 반이스라엘 시위와 함께 친하마스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마스가 일으킨 전쟁이 언젠가부터 이스라엘이 일으킨 전쟁으로 바뀌었고 하마스가 일으킨 유대인 민간인 학살과 납치는 사라지고 이스라엘의 공격만 보도된다. 이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일으킨 국가가 되고 왜곡된 이야기들은 일파만파 세계에 퍼지게 되어서 유대인들과 이스라엘은 점점 고립되고 있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던 유대인들은 전쟁국가의 자손으로 치부되어 학교에서 고립되거나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유엔은 이스라엘에게 부당한 책임을 부여하고 있고 누구도 진짜 사실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다. 폭력적으로 쏟아지는 비난과 비판 그리고 왜곡된 사실들만이 이스라엘을 옥죄고 있다. 이스라엘의 적은 누구일까? 오히려 이스라엘의 적이 아닌 이들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다. 이미 이스라엘은 홀로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이제는 남쪽의 하마스만이 아닌 북쪽의 헤즈볼라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까지 싸워야 하는 어려움에 놓여 있다. 이럴 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의 편을 들며 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실들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지혜를 얻도록 기도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기도하자. 김요셉 목사
  • 2024.07.26

    이스라엘 건국 76주년을 맞이하면서-삶의 여유가 아닌 생존의 싸움
  •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이 선포되었다. 당시 뉴욕타임즈의 1면에는 “시오니스트들이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하다”라고 대서특필 됐다. 당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텔아비브가 폭격을 당하고 이집트가 침공을 명했다고 쓰여있다. 이스라엘은 올해 2024년에 건국 76주년을 맞이했다.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이스라엘은 현재 너무나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 10월 7일 가자지구를 점령한 하마스의 무차별 공격과 침입으로 인해서 21개의 가자 인근 키부츠와 마을이 공격을 당했다. 7000명 이상이 죽었고 아직까지 인질 130명이 가자지구에 붙잡혀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하마스의 공격에 대응하여 보복공격을 감행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북부와 중부를 점령해 나갔고 200만명의 팔레스타인 피난민들은 전쟁을 피해서 가자 남쪽으로 피신했다. 이를 계기로 북쪽 레바논 접경 지역을 점령하고 있는 테러단체인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마스를 돕는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스라엘 북부는 헤즈볼라의 미사일 폭격으로 인해서 20만명의 피난민이 마을과 도시를 버리고 남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이스라엘 국가가 전란에 휩싸이고 새로운 중동전쟁이 시작될 것만 같았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250여 일이 지나는 시점에서 위협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스라엘 국가는 현재 여러 측면에서 위협과 비난을 마주하고 있다. 작년 이스라엘의 보복공격이 감행된 이후부터 서서히 일어난 반유대주의와 반이스라엘 운동은 본격적으로 미국과 유럽 등지의 대학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세계에서 제일가는 학문을 자랑하는 미국의 대학가에서 역사적 근거가 없는 외침과 일방적인 비난이 이스라엘을 향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번 사태의 원흉이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이라고 비난을 쏟아내면서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국가가 설립된 이후 지난 76년 동안 이스라엘은 한번도 평화롭게 지내온 적이 없었다. 잠시의 평안이 존재는 했지만 계속적으로 위협과 도발 속에서 살아온 것이 이 국가의 역사이다. 건국 이래 4번의 커다란 중동전쟁이 있었고, 2차례의 팔레스타인 인티파다(민중항쟁)가 있었다. 이스라엘 국가 설립 이후 유대인들은 안전하고 인정받는 삶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꿈꾸면서 이룩하고 살아왔다. 76년 동안의 노력으로 이스라엘은 전쟁의 여파 속에서도 다시금 일어나 지금의 놀라운 모습들을 만들어 왔다. 열심히 노력하고 이루어 낸 것들 속에는 자신들만의 삶이 아닌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노력들도 담겨 있었다. 누군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아랍인도, 베두인도, 소수민족들도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유대국가를 만들어 가는 것이 테오도르 헤르쩰과 다비드 벤구리온의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꿈이 위협을 받고 있다. 삶을 누리는 것보다 삶을 생존해 가는 것,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생존의 싸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대학가에서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부르짖는 그들의 외침 속에서는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전을 외치고 전쟁을 그만두라는 외침 속에서는 이 전쟁의 시작인 하마스라는 테러단체에 대한 고발과 비판은 없다. 학살을 멈추라는 외침은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무차별 학살을 당한 유대인 민간인들과 어린 아이들의 피는 무시하고 있다. 전쟁의 피해자는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포함되어 있으나 엄격한 이들의 잣대에는 유대인들은 학살자이고 전쟁과 피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표현되고 있다. 생존의 싸움을 살아가는 유대인들은 이런 비난과 매도 속에서 꾸준히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루하루 잡혀간 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도하면서 오늘의 삶에서 나의 가족들이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휴전을 요구하면서 여전히 민간인 지역을 향해서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하마스에 대응하면서 이스라엘은 묵묵히 생존해 가고 있다. 누군가는 이 싸움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영토싸움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싸움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생존의 싸움이다. 하마스와 이란은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의 존재를 말살하기를 원하고 있고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생존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이스라엘에게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폭력으로 누군가를 해쳐서 얻으려는 자들을 잠재우고 자비와 긍휼로 이 땅을 돌볼 수 있는 지혜와 마음을 이스라엘이 가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들이 중보해야 할 것이다. 김요셉 목사
  • 2024.05.24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