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o, Israel
광야에서 들려오는 물의 이야기
  • 강, 시내, 샘이 들려주는 성경의 언어 겨울 우기가 되면 이스라엘은 비가 내린다. 한국처럼 비가 많이 내리는 곳에서 생각할 때는 뭐가 그리 특별할까 싶지만 국토의 3분의 1이 광야 지대이고 1년 중 비가 내리는 기간이 불과 2달도 채 안 되는 이스라엘에서 겨울비는 축복과도 같다. 특히나 광야에 사는 필자로서는 비가 무척이나 반갑고 행복한 순간이다. 지난 3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지독한 기근이 있었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 겨울에는 태풍과 함께 비가 많이 내렸고 또 그로 인해 기온도 예년보다 더 내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좋은 것은 비가 내리고 광야의 풍경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 비가 오고 나면 생기는 것이 강과 시내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깨끗한 강이나 시내가 아니라 흙탕물이 흐르는 것이지만 비가 오고 나면 볼 수 있는 장관들이 있다. 모래와 자갈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들이 큰 강을 만들고 폭포를 만들어 쏟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리고 비가 온 뒤 광야는 어느새 푸르름을 띄기 시작하고 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광야에서 비는 단순한 자원인 물을 공급하는 것만이 아닌 생명과 약속의 사건임을 깨닫게 한다. 성경은 물길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물, 강, 시내로 표현되는 것들이 히브리어로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먼저 강은 보통 나하르(Nahar)라고 한다. 계절에 따라 사라지기보다 ‘계속 흐르는 물줄기’의 뉘앙스가 강해서 창세기에서 에덴을 적시는 강 같은 장면과 잘 어울린다. 때로는 경계선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번영과 심판의 이미지로도 쓰인다. 반면 이스라엘 땅의 현실을 더 자주 닮은 단어는 나할(Nachal)이다. 우리나라말로 시내 혹은 개울로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비가 오면 급류가 되고 평소에는 메말라 있는 ‘와디’까지 품는 말이다. 성경이 이 단어를 자주 쓰는 것은 약속의 땅이 ‘항상 물이 넘치는 정원’만이 아니라 건기와 우기가 공존하는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이 말하는 물가는 더 섬세하다. 펠렉(Peleg)은 갈라진 물길, 수로, 물이 흘러가도록 나누어진 길과 같은 느낌이다. 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길이 여기에 속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다”(시 1:3)에 등장하는 시냇가는 자연 물길이 아닌 이런 인공적인 물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특별한 은혜의 통로에 심겨진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샘은 마얀(Ma’ayan)이다. 광야의 샘은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광야의 숨겨진 샘은 동물들에게 그리고 광야를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과 쉼을 주는 공간이다. 샘은 광야에 사는 모든 생물들에게 생명이다. 그렇기에 종종 성경에서는 샘의 이미지가 숨겨진 은혜, 예상치 못한 공급, 길 위의 위로로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근원’ 혹은 ‘원천’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것이 마코르(Maqor)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종종 근원적인 이야기를 할 때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시라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예레미야 서에서 사람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 저장고, 즉 썩어질 물을 가두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을 고발하는 장면이 나온다(렘 2:13). 이처럼 성경에서는 광야에 흐르는 물과 관련하여 다양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 특별히 다가오는 단어는 나할이다. 평소에는 메말라 있기에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 싶은 장소가 나할이다. 물길이라고 하지만 1년 중 물이 있는 기간이 얼마 안 되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거대한 강이 되어서 광야를 적시고 풀을 자라게 하며 생명이 움트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나할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명이 없는 메마른 삶에 주님의 생수가 흐르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에 생명의 물줄기를 나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메마른 땅이 적셔지며 풀이 자라나며 생명이 움트게 되는 것이다. 광야는 메마르고 거칠기만 하다. 그런 광야는 비가 오는 순간만을 기다린다. 물을 머금고 생명을 피어 내는 땅이 되기 위해서 광야는 끊임없이 비를 간구하면서 기다린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메마른 삶에 촉촉한 단비와 생수의 강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겨울에 이스라엘을 방문하길 권한다. 이스라엘의 겨울비를 맞아가면서 이 땅을 돌아보는 여정은 평생의 기억이 될 것이다. 김요셉 목사
  • 2026.01.23

    하누카 속애서 비춰지는 이스라엘의 크리스마스
  • 이스라엘에서 가장 느끼기 어려운 절기는 바로 기독교 최대의 명절인 크리스마스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크리스마스를 소홀하게 보내지는 않는다. 요즘처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크리스마스 인사가 “메리 크리스마스”에서 “해피 홀리데이(즐거운 명절)”로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는 전세계인들이 기다리는 명절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스라엘만큼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안 느껴지는 곳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빛의 절기인 하누카를 기념하는 주간이 겹쳐지기도 한다. 올해는 다행이도 하누카와 크리스마스가 겹쳐지지 않지만 작년처럼 겹쳐지게 되면 크리스마스는 더욱 더 무색하게만 느껴 질만큼 하누카 절기가 더 의미 있는 곳이 이스라엘이다. 다만 매년 이맘때쯤 팔레스타인 지역이면서 대부분이 무슬림이 사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은 어느 지역보다 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풍성한 곳이기도 하다. 과거 이슬람이 강성하게 다스리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에게도 베들레헴은 거룩하게 지켜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가톨릭 교회가 가장 견고하게 서 있는 곳인 베들레헴의 중앙인 예수 탄생교회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속에서도 지난 3년간 매년 크리스마스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찾아오는 순례객들이 많지 않기에 한가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베들레헴의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곳이고 베들레헴에 사는 아랍 크리스천들과 사람들은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한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에서도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재작년부터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쇼핑몰마다 하누카와 크리스마스를 겸해서 축하하는 장식이나 색등이 등장하기도 하고 특히 러시아인들이 몰려 사는 하이피와 브엘세바 지역에서는 쇼핑몰이나 마켓에 한껏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장식과 산타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누카는 성경에 단한번 언급된 절기이다. 요한복음에 딱 한번 수전절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한 하누카는 하누카는 기원전 2세기, 유대 땅을 지배하던 셀레우코스 왕조(특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유대인의 신앙과 율법을 억압하고 성전을 더럽힌 사건에서 시작된다. 이에 마타티아와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이 저항(마카비 혁명)을 일으켜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았고, 기원전 164년경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다시 봉헌(재헌당)한 일을 기념하는 절기가 하누카이다. 일반적으로 성전에서 켜는 촛대는 메노라(일곱가지 촛대)이다. 하지만 하누카 절기에 만은 아홉가지를 가진 촛대를 켜게 되어 있다. 이것은 유대인 랍비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하누키아라고 불리는 촛대는 하누카 절기가 가진 특수성과 의미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하누카 절기의 천설은 다음과 같다. 성전을 수복한 후 성전의 정화하고 다시금 촛대를 켜는 과정에서 성전 촛대의 기름이 하루분량 밖에 안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 기름이 준비될 때까지 8일이라는 시간이 걸리기에 그 촛대의 기름이 없어서는 안되는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초의 기름의 8일동안 타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아홉 가지를 가진 촛대로 기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누키아 촛대나 전설의 이야기는 사실 하누카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다. 이날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켜내고자 한 열정과 용기 그리고 승리에 대한 이야기이며 결국 그 빛을 지켜낸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비록 하누키아란 촛대가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긴 하지만 이 촛대에는 재미있는 것이 있다. 8일동안 켜져야 할 8개의 가지 외에 하누키아 가운데 높이 선 촛불은 샤마쉬이다. 샤마쉬는 ‘섬기는 자, 도우미’라는 뜻을 가진 불이다. 이 촛불은 자기 빛을 과시하지 않고 다른 촛불에 불을 옮겨 주어 모두를 밝히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빚진 자로서 “전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해 판단보다 눈물로 중보하고, 논쟁보다 사랑으로 축복하는 자세를 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안에 머문 만큼, 우리는 더 낮아져 그 빛이 다시 흘러가게 하는 샤마쉬가 되어야 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많은 어려움에 싸여 있다. 반유대주의와 전쟁 그리고 위협 속에서 마치 어두움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때에 진정한 빛으로 소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비쳐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으면 한다. 김요셉 목사
  • 2025.12.28

    상실을 다루는 자세 … 이스라엘의 장례문화
  • 가자지구에서의 전쟁이 2년만에 휴전을 맞이했다. 240명의 인질들이 집혀갔었고 휴전을 통해서 대부분 돌아왔다. 40여 명이 죽은 시신으로 돌아왔고 나머지 200명이 2년에 걸쳐서 생환됐다. 그 전장에서 생존한 인질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올 때, 이스라엘 전역은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시신으로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누구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고, 누구는 무거운 침묵으로 관을 맞이했다. 놀라운 것은 시신으로 돌아온 자녀를 향해 울부짖는 대신 그들의 부모와 형제들이 “당신은 마지막까지 싸운 우리의 영웅이었다”라고 고백하며 상실의 아픔을 귀환의 명예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지 감정의 통제가 아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애도하는 방식, 즉 장례문화 속에는 공동체적 신념과 깊은 종교적 통찰이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의 유대교 장례는 빠르고 단순하며 정결한 절차로 진행된다. 대부분의 유대인 장례는 사망 후 24시간 이내에 이루어지며 시신은 관 없이 흰 수의로 감싼 채 땅에 직접 매장된다. 이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을 따른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이스라엘 장례는 꽃 장식도, 음악도, 긴 절차도 없다. 오직 단순한 땅의 품으로의 귀환이다. 이는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수용하고 남겨진 자들이 그 사실을 피하지 않도록 돕는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장례식이 3일 이상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슬픔을 나누고 고인을 기리는 다양한 의례와 조문객 문화가 발전되어 있다. 제사 문화나 위령제, 유골함 보존 등도 가족 중심의 애도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와 달리 이스라엘은 공동체 중심의 집단 애도 문화가 강하다. 매장 후 7일 동안은 ‘시브아(Shivah)’라는 애도의 시간을 가진다. 가족은 집에 머물며 검은 옷을 입고 공동체가 찾아와 위로하며 함께 슬픔을 지고 간다. 죽음을 숨기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함께 감당하는 것이 특징이다. 유대교는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되 부활에 대한 확고한 교리는 비교적 약하다. 탈무드나 랍비문헌에는 최후의 날에 의인이 부활할 것이라는 개념이 있으나 현대 유대인들의 정서에는 “지금의 삶”이 훨씬 중요하게 여겨진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소망을 분명히 선포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그리스도인에게 장례는 끝이 아니다. 관 위에 얹은 십자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날 날을 기다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민족이다. 그들은 전사자의 이름을 외우고, 사진을 붙이고 기억하며 울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그 울음은 주저앉는 절망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 애도이다. 기독교인인 우리는 이러한 문화 속에서 죽음을 부정하거나 과도하게 미화하지 않되 부활의 소망으로 상실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별을 맞이한다. 누군가는 먼저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새 시작이다. 이스라엘의 장례문화는 그것을 말없이 알려준다.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는 한 사람의 마지막. 그러나 그 안에는 공동체가 함께 애도하고 함께 기억하며 삶을 이어가는 힘이 담겨 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상실 속에서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그 믿음이 오늘 우리의 아픔 속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김요셉 목사
  • 2025.10.24

    나팔절, 다시 울리는 하나님의 소리
  • 해마다 찾아오는 똑같은 절기이지만 그때마다 절기를 맞이하는 분위기는 다르다. 특히나 요즘같은 전쟁의 여파 속에 있는 이스라엘은 예년만큼의 북적거림이나 흥겨움은 조금 덜 한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오는 절기를 기다리게 된다. 로쉬 하샤나로 시작하여 욤 키푸르(대속죄일) 그리고 초막절까지 기대가 된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오는 절기가 있다. 매년 가을 이스라엘 전역에서는 쇼파르(양각 나팔)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날을 ‘로쉬 하샤나’라 부르며 새해를 맞이하고, 회당마다 특유의 의식을 따라 나팔을 분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절기를 ‘욤 트루아’(Yom Teruah), 즉 ‘나팔을 불어 외치는 날’ 혹은 우리가 알고 있는 나팔절로 명시하고 있다.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레 23:24). 성경이 말하는 이 절기의 중심은 ‘새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하심과 경고의 소리에 있다. ‘로쉬 하샤나’는 히브리어로 ‘머리의 날’이라는 뜻을 가진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이 날을 새해의 시작으로 간주하며, 창조의 기념일, 심판의 시작, 회개의 문이 열리는 날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한 해의 시작은 유월절이 포함된 니산월(봄)이며, 로쉬 하샤나가 있는 달인 티슈리월은 분명히 일곱째 달로 기록되어 있다(출 12:2). 로쉬 하샤나가 유대 전통에서 ‘새해’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역사적 상황이 있다. 바벨론은 시기적으로 가을을 새해로 삼았고 유대인들은 그 달력 체계를 일부 수용하면서 티슈리월 1일을 새해처럼 지키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서구 유럽의 학기 시작이 가을학기에 시작하는 경우도 이에 유사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바벨론 유수 이후 유대교 랍비 전통 안에서 이 날은 심판의 날로 확장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기회가 닫히기 전 돌이켜야 한다는 관념이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로쉬 하샤나 이후 열흘은 ‘두려움의 날들’(Days of Awe)이라 불리며 속죄일(욤 키푸르)까지 회개와 화해,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이 절기에 나팔은 왜 불까?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단지 종교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 경고, 임재의 선언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하실 때 큰 나팔 소리가 땅을 진동 시켰으며(출 19장),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돌며 나팔을 불었고(수 6장),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도 나팔이 울려 퍼졌다(왕상 1장). 또한 선지자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큰 나팔로 흩어진 자들을 모으실 것이라고 예언했다(사 27:13).이처럼 나팔은 하나님의 뜻이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이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나팔절은 하나님이 백성을 부르시는 날이며 성경에서도 이 절기의 시작을 나팔소리로 시작하게 하였으며 이 때는 잠자고 있는 영혼에게 깨어나야 할 시간임을 알리는 절기이다. 우리는 이 절기를 기독교적 신앙의 시선으로 이 마지막 나팔을 향하여 어떤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까? 신약 성경은 이 나팔의 이미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살전 4:16).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 마지막 나팔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실제 사건의 선언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의 나팔절이 경고와 회개의 날이었다면, 신약의 마지막 나팔은 심판과 구속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알리는 날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 절기를 단순한 유대 전통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의 나팔절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지금 깨어 있는가?”,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고 있는가?”,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는가?” 이스라엘에서 울려 퍼지는 쇼파르 소리는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다. 지금의 시기에 더욱 이 나팔절은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쟁의 소식과 온 세계가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국민들의 의견이 나뉘어져 있다. 이런 시기에 울리는 나팔소리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외침이라고 볼 수 있다. “너희는 나를 바라보라!” 그 나팔 소리는 지금도 세상의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들려오고 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우리는 그 소리를 인식하고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주여,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깨어 있습니다. 다시 오소서.” 김요셉 목사
  • 2025.09.26

    “웃지 않으면 … 울게 될 테니까”
  • 이스라엘 국민들의 회복탄력성 지난 두 달 동안 이스라엘은 이란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느라 바쁘게 보내고 있다. 그 사이에도 여전히 하마스, 시리아, 예멘의 후티 반군이 날려보낸 드론과 로켓을 막아내야 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휴대폰의 미사일 알람은 아직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그야말로 사방에서 전쟁의 공포가 몰아친 한 달이었다. 이런 복잡하고 심란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걸 이겨내고 있는 걸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3년이 넘어가면서 피난민들과 남아있는 사람들은 트라우마와 함께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혼란 그리고 정착에 대한 회의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지난 77년의 시간 동안 전쟁과 분쟁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겨내고 성장해 가고 있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 대답은 “웃음”이다. 이스라엘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웃지 않으면 울 수밖에 없는 현실을 웃음으로 견디는 법을 체화했다. 이를 ‘이스라엘의 집단적 회복탄력성의 상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웃음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긴장과 공포, 고통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자 문화다. 누군가는 ‘웃는 자가 승리자이고 강자이다’라는 말을 했다. 유대인들의 유머는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 그리고 그들을 둘러 싼 다소 비판적인 유머가 많다. 혹자는 현대 블랙코미디의 원조를 유대인들이라고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머는 지금의 전쟁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공습 사이렌이 울려도 지하 대피소에서 농담이 오간다. 병역을 마친 젊은 세대는 ‘자조적 밈’을 만들어 전투로 인한 피로를 위로한다. 소셜미디어에는 “오늘의 방공호 패션”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고, 미사일 경보 속에서도 커피 한 잔을 즐기는 모습이 퍼져 나간다. 다소 과격하긴 하지만 전쟁의 상황을 유머와 자조적인 웃음 속에서 이겨내는 모습들을 만들어 간다. 전쟁의 무게에 짓눌리는 대신, 웃음으로 삶의 중심을 다시 잡아가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방식이다. 이러한 문화는 단지 위트나 재치의 문제가 아니다. 트라우마를 공동체적 유머로 해석할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의 강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현대 이스라엘 국가 문화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오랜 역사 속에서 비난과 차별 그리고 박해를 이겨내고 살아난 유대인들의 정신력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저항의 정신 그리고 그것을 유머와 웃음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나치에 의해서 게토에 갇혀 사는 유대인들 중 하나였던 주인공은 아들을 위해서 우스꽝스런 모습과 웃음을 자아내는 표정과 말로서 가족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총살을 당하러 끌려가는 중에도 아들을 웃기기 위해서 보여주는 그의 우스운 모습은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자아내기도 한다. 외부의 공격에 맞서는 군사력이 ‘아이언돔’이라면, 내면의 균형을 지켜내는 정신력은 바로 이 웃음으로 인한 회복탄력성이다. 더 놀라운 것은 미사일이 떨어져 도시의 한 부분이 파괴되어 혼란이 있었던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미사일이 떨어졌던 다음 날 텔아비브 해변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학교는 문을 열며 카페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죽음과 공존하는 삶이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평범한 오늘’을 회복해낸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승리다.” 이런 암묵적인 합의가 이 땅의 사람들 사이에 흐른다. 성경에도 이런 회복탄력성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시편 기자는 울음이 밤을 지나고 기쁨이 아침에 온다고 노래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이스라엘은 지금도 울며 씨를 뿌리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웃음을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웃음은 회복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절망을 끝까지 밀어내고 나면 남는 건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뿐이다. 그래서일까. 전쟁이 끝났다고 평화가 오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매일 웃으며 말한다. “웃지 않으면… 울게 될 테니까.” 우리는 이런 이스라엘의 회복탄력성을 배울 필요가 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위기를 이겨내는 탄력성을 가진 신앙이 필요하다. 김요셉 목사
  • 2025.08.29

    슬픔도 웃음으로 … 해학의 유대민족
  • 이스라엘에는 3월과 4월 사이 니산월이 오기 2주 전에 아주 독특한 절기가 찾아온다.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절기로 부림절이다. 사실 부림절의 이야기는 매우 비장하며 잔혹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 유대민족의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의 서사도 그와 같다. 포로기 시절 제2시민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찾아온 민족 멸절의 위기, 하만이라는 한 사람의 악한 흉계로 인한 위기였다.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에스더라는 여인과 모르드개, 두 사람의 헌신과 목숨을 건 용기 있는 행동 덕분이었다. 성경은 이 절기를 부림, 제비를 뽑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어 부림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부림절 시기에 이스라엘을 방문하면 재미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다양한 부림절 퍼레이드이다. 이 절기엔 이스라엘의 많은 도시마다 각기 다양한 행사들이 벌어진다. 도시는 온갖 캐릭터와 화려함으로 치장한 사람들, 희한한 모습으로 꾸민 이들이 넘쳐난다. 상점마다 가장 행렬과 행사 때 입는 여러 가지 옷들과 소품들을 판매한다. 아이들은 디즈니 캐릭터나 만화 주인공들처럼 꾸미기도 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겁게 재미있는 모습으로 즐긴다. 심지어 종교 유대인들도 이 날만큼은 엄숙함을 내려놓고 다양한 모습으로 치장하며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부림절에는 모두가 원래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꾸미는 것이 풍습이라고 한다. 왜 이런 풍습이 있는 걸까? 여기에는 슬픈 유대인들의 역사가 전해진다. 유대인의 한 전통에 따르면 부림절의 계기가 되었던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감추기 위해서 다른 모습을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유래된 전통이라는 전승이 있다. 또 다른 전승은 유대인들이 중세 유럽 시대를 살던 중 유럽의 사육제와 같은 풍습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사육제는 유럽의 가장 행렬과 같은 축제로서 시민들이 자신들의 신분과 상관없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축제를 즐기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전승도 있다. 이런 전승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 경우 반유대주의적 상황에서 박해 받을 수 있기에 신분을 감추어야 했던 슬픈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자신들만의 해학으로 풀어내며 부림절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정말 해학이 넘치는 이들이다. 유대인의 탈무드는 더욱 해학적이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의 학습경전으로 지혜의 책이라고 불리는 만큼 오랜 유대인들의 정수를 담고 있다. 사실 탈무드의 목적은 토라(유대교 경전인 모세오경)를 가르치고 이해시키기 위한 책이다. 한권이 아닌 십여 권으로 구성된 해설집이자 지혜를 담은 책이다. 그렇다 보니 딱딱하고 경직되어진 성경의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쉽도록 예화를 담아서 쓰게 된 것이다. 탈무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화와 예시로 많은 이들에게 성경의 지혜를 가르쳐 왔다. 그 탈무드가 유대인의 해학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이런 예화가 있다. 한 신사가 마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가고 있었다. 동승한 마차에는 한 유대인이 점심으로 절인 생선을 빵에 끼워서 먹고 있었다. 신사는 가난한 유대인을 골려 주고자 물었다. “유대인들의 머리가 좋은 이유가 그 절인 생선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봅니다!” “네 맞습니다! 저희는 특히 이 머리를 먹어서 더 똑똑한 거지요!” 신사는 문득 정말 그런가 싶어서 물었다. “정말 그 머리를 먹어서 그렇다구요!? 그럼 나도 좀 먹어봅시다!” “5세켈만 주세요!” 신사는 그렇게 생선 머리를 사서 억지로 꾸역꾸역 먹었다. 먹고 나니 냄새도 나고 생각해 보니 머리 하나에 5세켈이나 주고 산 것이 비싼 거 같았다. 신사는 불편함을 드러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당신, 너무 하구만. 고작 생선 머리 하나를 5세켈씩이나 받다니! 그 돈이면 다음 역에서 생선을 두 마리나 살 수 있는 가격이잖소!” 그러자 유대인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거 보세요. 벌써 머리가 좋아지셨네요!” 유대인이 자신을 비꼰 신사를 정중하게 받아 친 이야기이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통해서도 자신들에 대한 비하와 차별을 지혜롭게 받아내는 방법을 유머로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해학이라고 부른다.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 역사 속에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 차별을 당하고 살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성경의 지혜와 여유 그리고 유머로 살아갔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유머와 웃음을 놓치지 않은 이들이라 그런지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 하마스와의 전쟁 시간 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비난과 야유 그리고 비판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부림절을 즐기고 삶의 고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웃는 자가 승리한 자라고 했던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왔을 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활짝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김요셉 목사
  • 2025.04.25

    우호관계에서 적으로 변화되기까지
  • 이스라엘과 이란의 과거와 현재 이스라엘 뉴스에서는 매주 인질들의 석방과 가족의 재회로 인한 감동의 이야기들이 계속 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500여 일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가자에 억류되었던 인질들이 매주 3~4명씩 풀려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구류자들을 계속적으로 교환하고 있다. 이 전쟁의 끝은 어디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금 이 전쟁의 뒷면에 있는 하마스의 배후인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되짚어 보았으면 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휴전 협상과 인질 교환 문제로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중동 정세가 크게 변화하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관계 개선을 이끌었다. 이란은 이러한 변화에 크게 반발했고 이스라엘과 미국 간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는 상황에서 중동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는 이러한 복잡한 배경 속에서 더욱 얽히고 있다. 이란은 핵 개발을 지속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군사적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은 단순한 국가 간의 대립을 넘어 지역 전체의 평화와 안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즉 이전 페르시아 제국 시절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Cyrus the Great)의 지원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 고레스는 유대인의 신앙과 문화를 존중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환을 허락한 인물로 그들의 민족적 및 종교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경의 에스더서에서도 에스더 왕비가 자신의 민족을 구하는 이야기를 통해 이란(페르시아)과 유대민족 간의 긍정적인 관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20세기 중반부터 적대적인 방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이러한 상황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으로의 전환 과정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을 ‘작은 사탄’으로 간주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후 이란 정부는 반이스라엘 무장단체인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지원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기에 이른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란의 핵 개발은 이스라엘의 주요 안보 위협으로 자리 잡았고, 이스라엘은 군사적 공세와 국제 사회의 협력을 통해 이란의 군사적 그리고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전개는 두 나라 간의 불신을 더욱 증대시키며, 중동 전역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는 상호 이해와 존중의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평화의 길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스라엘과 이란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도해야 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두 국가 간의 갈등 해결은 개인의 이해와 화해의 추진이 필요한 중요한 사안이다. 서로의 종교적 차이를 존중하고 각국 지도자에게는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지혜와 용기가 부여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중보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과 이란 두 나라가 서로의 고난을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가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돕기를 소망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관계 회복을 위한 기도는 단순히 두 국가 간의 문제를 넘어서 인류 모두와의 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행위이다. 중동 지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우리 스스로도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행동해야 할 시점이다. 하나님께서 이들 간의 분쟁을 치유하고, 서로를 향한 이해와 화해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을 간구한다. 김요셉 목사
  • 2025.02.21

    좁은 길로 가는 삶
  • 유대인으로서 예슈아를 믿는 이로 살아간다는 것 현대의 많은 국가들이 이민자들과 본토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다양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굉장히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에는 유대인과 아랍인 그리고 다양한 소수민족들, 베두인족과 드루즈족 등이 살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인과 무슬림 그리고 아랍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유대인도 종교인과 세속인으로 나뉘고 종교인도 정통 종교 유대인(하시딤)과 전통적 유대교인(닷띠) 등으로 나뉜다. 또한 유대인은 출신 지역과 배경에 따라서 아쉬케나짐-유럽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과 스파라딤-북아프리카 동유럽 등지에서 이주해온 이들로 나뉘고 중동에서 살던 미즈라힘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운데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로 메시아닉 유대인 혹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히브리어로 예슈아)를 메시야로 믿는 유대인이다. 이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자랐지만 복음 안에서 예슈아를 유대인의 구원자이자 온 열방의 구원자로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다. 이들을 향해 크리스천 혹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는 이들이 종종 있다. 혹자는 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들이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오해가 있는 가운데 던져지는 질문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신앙도 엄밀히 말하면 유대교 바탕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란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유대교 안에서 구약 안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된 메시야를 발견했다.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란 종교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후대가 만들어낸 종교적 명칭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개종한 유대인이라고 하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개종이 아닌 유대교 안에서 이야기된 메시야를 발견한 유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칭호가 맞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슈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결단을 해야만 가능하다. 과거 예배 장소를 테러하고 집으로 폭탄 등을 보내 위협하던 박해는 지금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믿는 유대인들이 받아야 할 저항과 방해는 더 치밀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다. 더욱이 1세대 믿는 유대인들과 2세대 믿는 유대인들이 가지는 사회적 어려움은 날로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세대 유대인들은 이미 장성한 가운데 신앙을 가지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2세대 믿는 유대인들은 부모의 영향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그들이 학교에서 혹은 친구들 사이에서 받는 차별적 시선과 몰이해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경우가 많다. 어릴 적부터 받아온 차별과 비판 속에서 자란 유대 신앙인들은 많은 고민과 번민의 시간을 가졌다. 그 누구도 그들의 신앙 고백을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들의 정체성이 유대인이 맞는가라는 도전을 받기도 했다. 유대인으로서 태어나 자란 이들에게 예슈아를 믿는다는 이유로 민족적 정체성이 공격을 받는 것을 어린 신앙인들은 감내해야 하고 이겨내야 했다. 참으로 좁은 길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절기를 지키고 율법적 계율에 대해서 유대인으로서 지켜내고 있는 이들을 향해 율법적이라거나 유대교에 얽매였다는 비판을 들을 때마다 이들은 어찌해야 할지 모를 고민에 빠져들어 간다. 마태복음 10장 2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젊고 어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판과 미움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어떤 어려움에도 예슈아를 믿고 따르는 일에 쉬지 않고 달려오고 있다. 우리는 이제 비판과 비난을 벗고 이 믿음의 여정, 좁은 길의 여정을 달리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고 격려해야 한다. 가자 전쟁이 휴전을 맞이한 이때 이스라엘과 가자의 회복과 복음의 전진을 감당할 이들이 바로 이 땅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예슈아의 복음을 들고 나갈 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자 한다. 김요셉 목사
  • 2025.01.24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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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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