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98) 라합
  • 창녀에서 믿음의 선진 반열에 오른 여인
    우리가 성경 속 여호수아 이야기를 할 때 지나칠 수 없는 것이 기생 라합에 관한 이야기다. 라합은 성경에서 여호수아 2장과 6장 그리고 마태복음(1:5), 히브리서(11:31), 야고보서(2:25)에 언급돼 있다. 라합은 우상을 숭배했던 아모리 족속 여인으로 여리고의 정복 시기에 살았으며 거리에서 몸을 파는 직업을 가진 천한 신분이었다. 그런 그녀의 집에 여리고 성 점령을 앞두고 여호수아의 지시로 성에 잠입한 정탐꾼이 숨어들었다. 라합은 적군인 이스라엘 정탐꾼을 고발하기는커녕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고 성 밖으로의 탈출까지 도와준다. 그리고 정탐꾼의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날, 라합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요청하며 약속의 증거로 여호수아와 부하들이 볼 수 있도록 붉은 줄을 창문 밖에 내어 두겠다고 말한다. 라합이 제시한 증표인 붉은 줄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능력 곧 환난 날 구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라합과 가족을 살린 이 붉은 줄을 두고 강해설교자로 알려진 W.A. 크리스웰 박사는 ‘구속의 붉은 줄’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창녀였던 라합은 구원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시대에서 가나안 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새 시대의 관문을 열어준 여인으로 변모한다. 또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이 이끄시는 역사의 흐름을 생생하게 파악한 혜안 덕분에 메시야의 계보를 잇는 중요한 인물로 은혜를 입게 된다. 거침없이 무너져버린 여리고 성 사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라합은 유다 지파 살몬의 아내가 됐고 살몬과의 사이에서 보아스를 낳았다. 그의 아들 보아스는 훗날 룻과 결혼해 오벳을 낳았고 오벳이 낳은 아들 이새에게서 다윗 왕이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다윗 왕의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라합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믿음의 선진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라합에 대해 바울은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표현했고, 야고보는 그녀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약 2:25)고 이야기했다. 라합의 이야기는 곡절과 시련이 많고 변화가 심하던 삶이 긍정적인 쪽으로 형세가 바뀌는 인생역전을 말해준다. 누구도 차별치 않으시는 하나님 안에 거하면 우리의 삶은 이처럼 인생역전을 경험할 수 있다. 이영훈 목사는 지난 1월 주일예배에서 ‘라합의 믿음’을 제목으로 자신과 가족의 구원을 이끈 라합의 용기에 대해 이야기하며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여 여리고를 무너뜨리는데 공을 세우게 하시고 그 위대한 다윗 왕의 조상의 족보에 이름이 기록되게 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면 우리는 죄에서 용서받고 우리가 생각지 못한 계획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의 증표인 ‘구속의 붉은 줄’(보혈)의 능력을 믿는다는 믿음의 고백에 나서야 한다.
  • 2023.09.01 / 오정선 기자

    (97) 다비다 
  • 구제와 섬김으로 그리스도 향기 나타낸 믿음의 여인
    부활 기적 체험하고 많은 영혼 주님께 인도해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 여제자로 인정 받기도 생전에는 구제와 섬김으로, 죽어서는 다시 사는 기적을 체험하며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한 여인이 있다.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욥바에 거주하던 다비다이다. 다비다는 헬라어로 도르가(Dorcas)라고 불리며 이는 ‘노루 같은 여성’ 또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영양’(Gazell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이름처럼 심성도 아름다웠다. 성경은 다비다가 소외된 약자들을 섬기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고 말한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 9:36). 다비다는 많은 사람에게 선행을 베풀었는데 특별히 과부들을 돌보는 일로 유명했다. 그녀는 이들을 위한 속옷과 겉옷을 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당시 과부는 공동체 안에서 가장 가난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다비다 또한 과부였다는 의견이 있다. 욥바의 대부분의 남성들은 어업에 종사하는 선원이었다. 배를 타고 나가면 조난을 당하는 일이 빈번했기에 일찍이 이 지역에는 남편을 여읜 여성이 많았을 것이고 이에 다비다 또한 과부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견에 비추어 보면 다비다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으로서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다. 늘 선행과 구제에 힘쓰던 다비다가 갑작스레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때마침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방으로 두루 다니며 복음 전파에 매진했던 베드로가 욥바에서 20㎞정도 떨어진 룻다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이에 욥바 지역의 제자들은 베드로에게 오기를 간청했다. 다비다가 누인 다락방에 도착하자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다비다가 생전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보이며 그녀의 선행을 알렸다. 이때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다비다의 시체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라고 선포했다. 베드로의 강력한 선포에 죽은 다비다가 일어나 앉는 기적이 일어났다(행 9:40). 이는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요 14:12)이라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일전에 예수님께서 죽은 회당장의 아이에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이라고 말하자 다시 살아나는 기적과 동일한 일이 베드로에게서도 나타났기 때문이다(막 5:38~43). 이 사건으로 온 욥바 사람이 다비다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을 알게 됐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됐다(행 9:42). 욥바는 예수님의 여제자로 불린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행 9:36) 여제자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나타난다. 바느질로 먹고 사는 평범한 여인이 예수님의 여제자로 인정을 받은 것도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는 축복을 누린 것도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다. 평범한 자신의 재능을 통해 주변 사람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비다를 사용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다비다와 같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구제와 선행을 실천한다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될 줄 믿는다.
  • 2023.08.04 / 금지환 기자

    (96) 갈렙
  •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나님의 언약 믿고 성취한 자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찬양으로 불릴 정도로 너무나 유명한 이 말은 성경인물 갈렙의 믿음의 선포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 가운데 있었다. 그때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땅을 자신에게 달라고 한다. 당시 갈렙은 85세로 원로로서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 아닌 야훼께 충성하는 삶을 선택했다. 갈렙은 45년 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늘 기억했다. 당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바란 광야에 도착한 모세는 가나안 정복을 눈앞에 두고 열두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들 가운데 갈렙이 있었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풍요로운 땅이었지만 10명의 정탐꾼은 그곳에 거주하는 거대한 아낙 자손들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40일을 돌아보고 온 후에 모두가 부정적인 보고를 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긍정적인 고백을 했다.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 14:8).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인정해 모세를 통해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여호수아 14장 9절을 보면 갈렙은 하나님 약속을 기억하고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야훼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라며 헤브론 땅을 정복하겠다고 말한다. 갈렙의 충성심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했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선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그에게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며,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헤브론 산지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남서쪽으로 32㎞ 떨어져 있으며 높이는 해발 약 1000의 고지대이다. 그곳에는 장대하고 싸움에 능한 아낙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어 정복하기 힘든 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애물들은 갈렙에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수 14:11).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꿈을 갖고 도전했다. 그야말로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선포하는’ 4차원의 영성의 삶을 산 것이다. 그는 마침내 헤브론을 차지하는데 헤브론은 아브라함이 헷족속에게 샀던 막벨라 굴이 있는 곳이자 다윗이 7년 6개월 동안 왕으로 있었던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가 됐다. 나 자신을 보면 몸이 쇠약하고 능력이 없고 한없이 초라하지만, 내 뒤에 서 계신 태산 같은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의 능력은 무한대이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꿈이 있다면 갈렙처럼 도전해보자. 불가능이 가능케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할 것이다.
  • 2023.06.30 / 김주영 기자

    (95) 구레네 시몬
  •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 대신 십자가 져
    은연중에 인류 구속 사역에 동참 구레네 시몬은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지쳐 쓰러진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인물이다.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마 27:32).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 15:21).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눅 23:26).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옛 그리스 식민지였으며 지금의 리비아에 속했던 곳으로 상당히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거주했던 곳이다. 구레네에는 유대인의 회당도 있고, 유대인의 축제일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도 많았다(행 6:9). 시몬은 구레네에서 살던 유대인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순례단 중의 한 사람이었거나, 어쩌면 다시 고국으로 귀국하는 길이었을 수도 있다. 시몬은 다른 구경꾼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형수를 보고 있었을 뿐인데 하필 그 근처에서 예수님이 지쳐 쓰러진 것이다. 시몬은 로마 병사의 명령에 따라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봉변을 당한다. 많은 사람들이 졸지에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를 지게 된 그의 모습을 일제히 쳐다보자 그 눈빛들과 웅성거림에 시몬은 당황하고 수치를 느꼈을지 모른다. 동시에 자기가 대신 져야하는 십자가 밑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예수님과 눈길이 마주쳤을 것이다. 당시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 채 십자가를 지고 갔지만 은연중에 인류 구속 사건에 참여했다. 예수님과의 만남 후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막 15:21)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난 다음 시몬은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했기에 그의 아내와 자녀들도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시몬의 아들과 아내)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고 로마서에 기록했다. 십자가 사건 이후 한 세대가 흘러 시몬의 가정은 믿음의 가문으로서 바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아이러니하게도 자발적이진 않지만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른 첫 번째 사람이 됐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하며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신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장 어려움 당하는 그 순간 곁에 없었다. 십자가의 의미도 모르고 억지로 십자가를 진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지만 그 십자가를 지었기 때문에 그는 영생에 이르는 은혜의 길을 가게 됐다.
  • 2023.06.02 / 복순희 기자

    (94) 여호수아
  •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가나안 정복 모세 뒤이어 하나님과 동행한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의 본명은 ‘호세아’이다. 에브라임 지파 눈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세의 수종자였으며 40년 광야 생활동안 모세에게 많은 신뢰를 받았다. 모세는 그를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여호수아’라고 불렀다. 모세는 가나안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 에브라임 지파 대표로 여호수아를 선택했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여호수아는 유다 지파 대표인 갈렙과 함께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 14:9)라는 절대긍정의 주장을 펼쳤다. 그 믿음과 용기를 보신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야훼를 온전히 따랐느니라”(민32:12)라는 말씀이 기록될 만큼 여호수아는 믿음과 지혜가 탁월한 사람이었다.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광야 40년을 모세와 함께하셨던 것처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수 1:5).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명령하셨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하셨던 것과 같이 여호수아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여호수아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선포하셨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담대함을 얻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가나안땅으로 향했다.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무너뜨리며 믿음의 승리를 했다. 가나안의 중앙 산악지역에 들어가 남부와 북부지역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모든 과정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이뤄나갔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한 후 이스라엘 12지파에 땅을 나누어줬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음을 선포했고 땅 분배가 끝나자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정착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살인한 자를 위해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도피성을 건설하기도 했다. 여호수아는 임종이 가까이오자 백성을 세겜에 모으고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오직 야훼만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라고 명령했다. 성실과 진정으로 야훼를 경외하라고 권면한 후 110세에 에브라임 산지 딤낫세라에 장사됐다. 모세, 여호수아와 함께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도 함께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에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모든 일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게 하시고 모든 문제도 해결해 주실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다.
  • 2023.05.04 / 이미나 기자

    (93)마르다
  • 예배와 섬김의 조화를 일깨운 교훈
    베다니 출신의 마르다는 나사로의 누이이며, 값 비싼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던 마리아와는 자매 사이다. 이들 삼남매는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자들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 마르다는 예수께 뛰어와 울면서 주님이 계셨다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 말했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다. 하지만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며 믿음의 눈이 아닌 인간의 감각적 지식에 따라 답한다. 믿음과 감각적인 삶의 갈등에서 헤매고 있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선포하시며 무덤에 누웠던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보이셨다. 장벽처럼 우리의 눈앞을 가리고 있는 답답한 현실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인간의 감각, 지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굳건히 나아가야 함을 성경을 통해 배우게 된다. 마르다의 이름은 ‘숙녀’, ‘여주인’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방문하셨을 때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 듣기에 더 열심이었던 반면에 언니 마르다는 ‘여주인’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힘썼다(눅 10:39~40). 섬기는 일로 분주했던 마르다는 칭찬 받으려는 욕심 때문에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하려다 염려와 근심에 빠져 결국 자기를 돕지 않는 동생 마리아를 보고 예수께 불만을 털어 놓으며 돕기를 청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마르다에게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1~42)고 하시며 마리아처럼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을 택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르다처럼 섬기는 ‘일’ 때문에 막연히 분주해하고 쫓기길 원하시지 않는다. 혹자는 “영성이 빠진 섬김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섬김이 없는 영성은 열매가 없고 이기적이다”라고 말한다. 깊은 묵상과 예배, 헌신된 봉사와 섬김 이 두 가지 모두를 조화롭고 균형 있게 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 주어진 생활 속에서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분별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섬김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자신과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선택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우선순위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성도는 분주함으로 주님과의 교제를 놓치지 말고, 주님의 말씀과 기도를 최우선 순위로 삼고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교회로 자라게 될 것이다.
  • 2023.03.31 / 오정선 기자

    (92)발람
  • 야훼 하나님의 말씀 대언한 이방인 선지자
    하나님 말씀 순종해 이스라엘 축복했지만 욕심에 이끌려 불의 행하여 죽음 맞이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요청에도 꿋꿋하게 이스라엘을 축복한 선지자가 있다. 바로 발람이다. 발람은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브돌 지방 사람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였다. 그는 이방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 같이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 그는 모압의 왕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라는 사주를 받았다. 당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의 나라들을 휩쓸며 승승장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겁에 질린 발락왕은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선지자의 기도에 힘을 빌려 저주하고자 했다. 고대 국가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기도와 제사가 강력한 무기로 여겨졌는데 이는 저주든 축복이든 선지자의 입을 통해 내뱉어진 말은 그대로 된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발람은 발락 왕의 요구를 거절했다(민 22:5~13). 그러나 발락은 포기하지 않고 더 높은 고관들을 보내어 다시 찾아 설득했다. 이에 발람은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야훼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민 22:18)고 고백하며 자기를 돈으로 매수하지 못하리라는 점을 똑똑히 밝혔다. 그리고 그날 밤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민 22:20)는 응답을 받게 된다. 이에 이튿날 아침 나귀를 타고 모압 왕 발락에게로 향하던 중 타고 가던 나귀가 갑자기 길에서 벗어났다. 화가 난 발람은 나귀에게 채찍질을 했는데 그때 나귀가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민 22:28)라고 말을 한다. 이때 발람의 영안이 열리면서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야훼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민 22:32)라는 말과 함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게 된다(민 22:35).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모압 왕 발락의 앞에 선 발람은 이스라엘이 한눈에 보이는 산 위에서 보란 듯이 이스라엘을 세 번이나 축복한다(민 23:11~24:8). 또한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예언까지 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민 24:9~25). 하지만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과 미디안 족속과의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민 31:8). 당시 미디안 족속은 모압 족속과 동맹 관계였는데 이 자리에 발람이 있던 것에 대해 성경은 그가 미디안 족속에게 꾀를 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 숭배 하도록 유혹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하나님께서는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확실하게 축복하셨고 이는 공의롭고 완전하신 하나님임을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신 23:4~5; 수 24:9~10; 미 6:5). 이처럼 우리는 공의롭고 완전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발람과 같이 불의를 행하지 않도록 유의하며 자족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 2023.03.03 / 금지환 기자

    (91) 디도
  • 평생 바울 보필하며 선교 사역에 동행 이방인 선교에 앞장서며 복음 전해 디도는 헬라인(갈 2:3)으로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을 여행할 때에 동행한 사람이며(갈 2:1) 바울의 목회서신 중 하나인 디도서의 수신자이기도 하다. 디도는 사도 바울이 아끼며 사랑한 초대교회의 일꾼이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은 사역 초기에 디도를 전도했는데 ‘나의 참 아들’(딛 1:4)이라고 부를 정도로 총애했다. 그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고 할례도 받지 않았지만 바울의 제자로서 성실히 복음을 전하는데 힘썼다.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4),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딛 1:4)라고 성경에 기록될 만큼 바울이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디도는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신학적 문제가 대두될 때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도를 데리고 교회사 최초의 공의회인 예루살렘 종교회의에 참석했다. 이 문제는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총회 결의로 막을 내렸다. 디도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판결에 따라 할례 받지 않은 헬라인으로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고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요 조력자로 안디옥과 고린도에서 이방 선교에 참여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관련하여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바울이 세운 교회였지만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가르침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바울이 방문하는 것조차도 거절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바울의 이러한 일을 해결하는데 앞장 선 사람이 디도였다. 디도는 고린도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바울과 동일한 마음을 품고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원했다. 디도는 간절함으로 문제 해결에 나섰고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고후 7:13). 바울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내하며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한 믿음직한 제자였다. 디도는 열심히 선교했고 가는 곳마다 좋은 열매를 맺어 바울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로마로 압송됐다가 풀려난 바울은 디도를 그레데 섬에 남겨둔다. 그레데 섬은 현재는 그리스령으로 있는 크레타섬이다. 지중해에 있는 큰 섬으로 주로 뱃사람이 많이 살았는데 주민들은 예부터 무례하고 난폭하다는 평판을 들을 정도로 거칠었다. 심지어 성경에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딛 1:12)라고 기록돼 있을 정도였다. 디도는 그레데 섬에 남아 감독으로 헌신하며 이들을 성령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힘썼다. 묵묵히 사역에 매진한 디도는 좋은 장로들을 세웠으며 올바른 교훈과 선한 일을 가르쳤다. 그는 평생 바울을 보필하면서 선교 사역에 동행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 2023.02.02 / 이미나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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