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31. 후안무치(厚顔無恥)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솔로몬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된 시므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6~37) 3. 솔로몬의 숙청 작업과 시므이의 죽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숙청의 이유, 방법, 숙청당한 인물들만 보면 공포정치를 휘둘렀던 절대군주 못지않다. 숙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비아달, 다윗을 섬기며 충성을 다했던 군대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형이자 왕자였던 아도니야까지 잠재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둘째는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다니엘, 셋째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 넷째는 학깃이 낳은 아도니야였다.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열 번째쯤 된다(대상 3:1~5). 그런데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게 죽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 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 죽은 것이다. 둘째 아들 다니엘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성경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왕상 1:5~11). 이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요압과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왕하 1:7). 하지만 아도니야의 시도는 일일천하에 그쳤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도니야(왕상 1:51)를 살려주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상 1:52). 하지만 아도니야는 다윗의 침실에서 수종을 들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은 이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도니야를 처형해 버렸다(왕상 2:13~25). 2) 아비아달 아비아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10번째 대제사장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기약이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도시와 지역이 있었지만 다윗이 선택한 첫 장소는 대제사장이 있던 놉이었다(삼상 21:1).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고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삼상 21:4~10).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을 문제 삼아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을 한 날에 살육했다(삼상 22:18).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아달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아비아달은 지체 없이 한걸음에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향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에봇을 가지고 도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3:6). 아울러 우림과 둠밈을 대제사장의 에봇 흉패 안에 보관하라고 되어 있기에 우림과 둠밈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출 28:30). 다윗은 이렇게 사선을 넘어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직후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에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왕상 2:27). 3) 요압 요압이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이다’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볐던 군대 장관이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던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다윗이 사울의 남아있던 세력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장군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를 이끌던 요압이 맞붙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요압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요압은 이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자손들과 다윗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하고 통일왕국을 탄생시키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고 통일왕국의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뗐다(삼하 3:8~21).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 다시 헤브론으로 유인해 왔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브넬을 살해했다(삼하 3:27). 성경 여러 곳에서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요압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후 모든 공이 아브넬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에 대한 염려와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한 번에 갚고자 벌인 일이었다. 다윗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큰 용사였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압에게 묻지 않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로몬은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압이 죄 없는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이었던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었지만(왕상 2:31), 실상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시므이 솔로몬의 서슬이 퍼런 칼날은 그의 왕권을 위협할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대왕이었던 다윗이 살려 준 시므이를 향한 솔로몬의 마지막 경고이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절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왕상 2:36~37). 왜 솔로몬은 베냐민 자손이고 바후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시므이를 굳이 예루살렘 성에 붙잡아 두고 절대 떠나지 말라고 했을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 두 명이 도망을 가자 솔로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벗어났다(왕상 2:39~40). 솔로몬은 브나야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이를 단숨에 처형했다(왕상 2:45).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초라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가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였다. 하지만 압살롬에 의한 왕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엎드려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량과 은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8.01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30.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8~19) 사무엘하 15장과 19장은 후안무치한 시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골 어디에도 왕의 위엄과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다윗은 머리는 산발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윗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길을 역방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나 군사들에게 쫓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신세였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10명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다윗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친부로서의 자존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더 낮아질 수도 초라해질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이미 죽임을 당해 세상에 없었다. 다윗의 차남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나발의 아내였으나(삼하 2:2)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된(삼상 25:39~43)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이다(대상 3:1). 하지만 그의 이름 외에 추가적인 자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장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아(왕상 1:5~10) 다니엘은 일찍 죽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남과 차남이 죽은 상황에서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아버지 다윗을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압살롬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헤브론에서 시작한 반란은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거칠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바후림을 지나고 있을 때 사울의 친족이요 게라의 아들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다(삼하 16:5). 다윗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13). 자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이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사울의 남은 자손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참소하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울의 친족을 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친족들에게 많은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고 사울의 친족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했다. 그들의 토지나 소유권도 빼앗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은혜를 받았던 사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시므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부었다. 비록 피난길에 올랐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있었고 많은 백성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6:6).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말한다(삼하 16:9).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극심한 모멸감에 시달렸을 다윗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므이는 더없이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난이 은혜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므이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가 퍼붓는 저주를 묵묵히 참아냈다(삼하 16:11). 2. 급변한 시므이의 태도 다윗이 가장 힘들었을 때,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의 태도는 압살롬이 죽고 왕자의 난이 정리된 이후 급변한다. 압살롬이 죽자 제사장들과 신하들은 서둘러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진행한다(삼하 19:11~12). 다윗은 피난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올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던 바후림에 이르렀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귀환 행렬이 바후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엘하 19장 16~18절은 이때 시므이가 취한 행동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유다 사람들과 동행(삼하 19:16) 사울의 혈육으로 베냐민 지파였던 시므이는 급히 유다 사람들과 다윗을 맞으러 나간다. 다윗의 피난 행렬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에게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다시 바후림에 왔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2) 시므이의 세력(삼하 19:17) 사무엘하 19장 17절은 사울이 죽은 후 시므이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을 맞으러 나올 때 시므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기의 모든 세력을 데리고 나온다.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열다섯 명의 아들, 종으로 부리고 있던 하인 스무 명을 대동했다. 시므이는 호시탐탐 사울 왕조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이유도 없다. 3)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삼하 19:18~20) 시므이는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다윗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시므이가 특별히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던 날에 저질렀던 패역한 일'에 대한 용서였다(삼하 19:19). 그가 다윗을 쫓아가며 했던 저주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비새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삼하 19:2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므이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울의 남은 세력들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아량을 베푼다(삼하 19:22~23). 다윗은 자신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므이의 문제는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7.04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9.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Ⅱ)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뤄져야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2) 기브온족의 이스라엘 편입 가나안 족속의 종교 혼합주의, 쾌락주의, 윤리적 타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기이한 자연적 현상들은 다신론적 맹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손쉬운 다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종교적 편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과 방식대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아주 쉽게 유혹으로 이끌어 갔다. 그 결과 거룩한 삶은 죄 된 삶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나중에는 헤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나안 족속과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약 자체도 문제였지만 방법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전통에 따라 기브온 사람의 음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수 9:15). 서로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고 있었다. 성경은 기브온과 체결한 계약 방식이 '그들(기브온 사신)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9:14).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과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수 9:18)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6.06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8.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Ⅰ)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물리적 충돌과 영적 전쟁으로 가나안을 정복한 이스라엘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사무엘하 21장 1~2절은 여러 시대의 복잡한 사건들이 얽히고 설킨 성경 구절이다. 내용상으로 보면 간단하다. 사울 일가가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건이다. 그러나 시간과 역사적 배경을 보면 여러 세대가 뒤엉켜있고 신앙적으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도 있다. 사건의 발단은 가나안 정복기인 여호수아의 시대에 일어났고 몇 백 년이 지나 왕정 시대인 사울 왕 때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사울왕 때 이 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했고 풀지 못한 매듭은 다윗의 때까지 내려왔다. 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죽은 사건이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가고 있었다.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떠 오른 것은 다윗 시대에 3년 기근이 들면서부터이다. '기근'에 해당하는 단어를 '라아브'라는 히브리어로 쓰고 있는데 그 뜻은 '굶주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년 동안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다윗은 어떤 이유로 이런 재앙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게 됐는지 알지 못했다. 다윗이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을 듣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도 아니라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사울과 그의 집안 때문에 심한 기근이 3년이나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엘하 21장 2절에는 사울이 이방 족속인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이유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한 열심'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사로운 감정이나 원한 때문도 아니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한 마음으로 이방 족속을 죽인 사건이라는 말씀은 그동안 이방 족속과 치러왔던 전쟁들을 생각할 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1. 기브온 족속과 이스라엘 성경에 여러 족속이 등장한다. 많은 이방 족속의 명칭들이 헷갈릴 때가 종종 있다.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족속과 부족으로 나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원시 국가 형태를 갖춘 족속은 남서쪽 해안가에 있는 아말렉, 서쪽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던 블레셋, 동쪽의 암몬과 모압, 남쪽의 에돔, 북쪽의 아모리 족속이다. 성경은 이들의 우두머리를 '왕'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완전한 국가라기보다는 초기 원시 국가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족속보다 작은 규모의 부족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여러 부족이 연합체 형식으로 한 족속을 이루고 있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가나안 족속(Canaanite)이다. 가나안 족속은 7개의 부족이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가나안 족속 전체를 일컬을 때도 사용되는 가나안족을 비롯해 기르가스족, 브리스족, 가나안 지역에 살고 있던 아모리족, 여부스족, 헷족, 기브온족이라고도 하는 히위족을 말한다. 성경은 이들 각 부족을 '족속'이라고도 하기도 하는데 '부족' 쯤으로 이해하는 것이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가나안 정복기를 지나며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부족들과 약 25년 동안 물리적인 충돌과 영적인 전쟁을 치러야 했다. 오랜 세월의 정복 전쟁을 통해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거의 모든 부족을 점멸시켰지만, 히위족은 멸망시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보는 것이 너무 확실하다고 믿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 기브온족의 계략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무너져 내린 것을 보고 가나안 부족들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기로 동맹을 맺었다(수 9:1~2). 그런데 가나안 족속 중 하나인 기브온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싸움에서 승산이 없음을 알고 피를 흘리는 전쟁보다는 평화의 조약을 맺기 원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의 싸움에 평화 조약보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으로 편입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기브온족은 이스라엘과 평화 조약을 체결할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했다(수 9:4~6). 그들은 사신들을 변장시켜 가나안 족속이 아닌 멀리 사는 족속인 것처럼 속이고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해어진 전대와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실었다. 떡은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것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사신들에게 낡고 오래된 신발과 옷을 입혔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찾아와서는 곰팡이가 난 음식을 보여 주며 멀리서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 왔다고 속였다(수 9:4~13). 여호수아는 물론 이스라엘 백성 중 누구도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묻지도 않을 만큼 기브온 사신의 연기력은 아카데미상 주연급이었고 행색은 너무나 완벽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5.09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7.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적 침례가 완성되기까지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삼위일체적' 침례는 그리스도의 명령이자 교회의 사명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3~15) 종교적 의식은 오랜 시간을 통해 역사와 전통을 쌓으며 형성되고 변형되어 왔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삼위일체적'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서 교회가 존재하는 한 계속 이루어야 할 사명이다(마 28:19). 굳이 침례 앞에 '삼위일체적'이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최소한 3가지 종류의 침례가 공존하는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1세기 중반에 해당하며 초대 교회가 걸음마 단계였던 시대이다. 적어도 마태복음이 기록되기 이전이라 할 수 있다. 케리그마 요소가 강화된 '예수의 이름'으로 베푼 침례는 삼위일체적 침례가 공식화될 때까지 사도들에 의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사도들은 요한의 '죄 사함의 침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침례를 엄격히 구분했으며, 죄 사함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침례를 베풀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삼위일체적 침례(마 28:19)는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사복음서에도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있는데 서신서와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까지만 해도 삼위일체적 침례가 원시 기독교 교회에서 실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강림 이후 제자들은 성령 침례를 강조하게 되었고,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의 명령인 삼위일체적 침례를 실현하는 촉매의 역할을 했다. 1. 요한의 침례 VS 초대 교회의 침례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요한의 침례와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적 침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요한은 요단 강가에서 쿰란 공동체와는 다른 죄 사함의 침례를 베풀고 있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의 침례가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요한의 침례와 초대 교회의 침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초대 교회는 요한의 모호한 죄 사함의 침례를 '예수의 이름으로' 대체하면서 요한의 '죄 사함'의 의미를 소멸시키거나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죄를 씻기 위한 침례가 아니라 구원을 위한 침례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구원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예수의 이름이 구원의 능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1)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침례 초대 교회의 침례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침례의 수여자가 회중 앞에서 "예수는 주님이시다"(롬 10:9; 고전 12:3)라는 신앙의 고백과 함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6세기에 기록된 사본에 따르면, 빌립이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침례를 주기 전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했다. 침례 요한은 그의 뒤를 이어 오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성령 침례를 소개함으로써 자신이 메시야가 아닌 것(요 1:20; 3:28)과 자신의 침례의 한계성을 분명히 했다(마 3:11). 초대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줌으로써 요한의 침례와 차별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죄 사함'을 위한 요한의 침례가 구원의 문제까지 접근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원시 기독교 교회는 처음부터 요한의 물 침례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와 성령 침례까지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침례를 받았으며(행 2:41), 베드로, 빌립, 바울, 아볼로를 포함한 대부분의 제자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행 8:12, 38; 10:48; 16:15, 33; 19:5; 고전 1:14~16). 죄 사함만을 위한 요한의 침례와 다르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행 2:41). 2) 공동체와 연합을 이루는 침례 그리스도와 연합된 공동체의 정체성은 같은 신앙의 고백과 의식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초대 교회의 신앙적인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냈던 것이 침례이다. 유대 공동체가 율법이나 아브라함의 혈통에 의해 구성원이 정해졌다면 초대 교회는 침례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들의 구성원을 받아들였다. 예수의 이름으로 베푼 침례를 통해 예수에게 속하고(고전 1:10~17),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롬 10:9), 어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했다(골 1:13). 율법과 할례의 차별성과 달리 침례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준이었으며, 혈육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침례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혈통이나 지역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개념이라는 것과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바울의 침례에 대한 이해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바울은 누가 침례를 주었느냐가 아니라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롬 6:3)들은 교회 공동체와도 연합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2. 종말론적·예언적 선포로서 삼위일체적 침례 성령침례는 마지막 날에 남종과 여종, 노인과 아이들에게까지 부어질 종말론적 주제 중의 하나이며 예언적 선포이다(욜 2:28~29). 오순절 성령의 강림 후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들의 관심은 물 침례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요한의 침례와 초기 원시 기독교의 침례는 처음부터 죄 사함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으며 침례를 받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누가는 성령 침례를 통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영적인 변화를 기술하고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초대 교회의 관심은 점차 물 침례에서 성령 침례로 대체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행 1:5). 초대 교회의 성령까지 포함한 삼위일체적 침례 또한 사도행전 1장 5절의 성령 강림의 예언적 선포가 사도행전 2장 1절의 종말론적 성취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성령 침례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삼위일체적 침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물 침례가 더 이상 필요 없다거나 성령침례로 인해 물 침례의 기능이 상실됐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교회에 남긴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행 1:5)는 명령을 초대 교회가 지켜야 할 종말론적, 예언적 선포로 인식하고 있다. 마태 또한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가야 할 종말론적, 예언적 선포로서 삼위일체적 침례를 그의 복음서 가장 마지막 부분에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으로 배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침례의 신조로 받아들인 마태의 삼위일체적 침례를 원시 기독교 교회에서 이루어졌던 다른 침례들과 모순 관계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선교적, 예언적 선포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삼위일체적 침례를 그리스도의 명령과 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교회가 속한 모든 나라와 족속, 백성과 방언 가운데서 지켜 행해야 할 것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4.04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6.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적 침례가 완성되기까지①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는 침례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3~15) '오순절'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유대 절기로 보면 칠칠절, 맥추절, 초실절에 해당하지만 오순절이라는 단어는 복음서를 지나 사도행전 2장에 처음 등장한다(행 2:1).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기독교인이 된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중요한 예식인 침례도 구약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많은 기독교인이 "정말?"이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기독교 신앙과 전통에 없어서는 안 될 이 두 단어는 구약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성령의 강림이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이루어졌기에 오순절이라는 말이 복음서엔 등장하지 않고 사도행전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오순절과는 조금 다르게 침례는 예수님 이전에 이미 쿰란공동체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다. 이렇듯 구약성경에는 없고 신약성경에만 나오는 단어와 전통들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중간기에 형성된 것이다. 지금은 모든 교회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삼위일체적 침례를 행하고 있지만, 1세기에는 세 가지 유형의 침례가 공존하기도 했다. 첫째는 유대교 전통을 이어받은 쿰란공동체의 침례, 둘째는 원시 기독교 형태의 침례, 셋째는 지금과 같은 삼위일체적 침례이다. 1. 쿰란공동체와 요한의 침례 마태복음 3장 13~17절은 예수님과 침례 요한의 첫 대면을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요단강에서 침례를 베풀고 있던 요한은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 침례를 베풀어야 하는 그의 숙명이자 사명을 다할 날이 온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감히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 수 없었다(마 3:13~14). 예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받으신 침례는 어떤 침례였을까? 지금과 같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침례였을까? 당연히 아니었다. 1) 침례의 기원 종교적 행위에 대단히 보수적인 유대인이 구약성경에 없는 침례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됐고 그 기원은 어딘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요한의 침례를 포로기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은 번제를 드릴 수가 없었다.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가지를 만족해야만 했다. 첫째, 제물이다. 율법은 모든 제사에 쓰일 제물에 대해 엄격한 규정을 두고 있었다. 예를 들면, 번제를 드리려면 흠 없는 1년 된 송아지, 양, 염소가 필요했다. 하지만 포로의 신분으로 주인에게 번제로 쓸 제물을 요구할 수 없었다. 둘째, 제사장이 필요했다. 제물이 있다고 해도 그 제물을 사사로이 드릴 수는 없다. 반드시 제사장에 의해 번제가 드려져야 했다. 셋째, 제단이 필요하다. 제물과 제사장이 있다고 해도 번제를 아무 곳에서나 드릴 수 없었다. 꼭 하나님께서 지정한 곳에서 드려야 했다. 이런 이유로 포로기에 번제를 포함한 희생 제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번제의 목적인 죄 사함을 위해 대신 한 것이 율법서에 기록된 몸을 씻는 정결 예식이다(레 14:1~8). 이 정결 예식은 단순히 몸만 씻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와 옷까지 빨아야 하는 의식이었다(레 14:8). 죄를 씻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시대에 이 정결 의식이 희생 제사를 대신했고 이런 전통은 쿰란공동체를 중심으로 포로기 이후에도 계속 지켜지고 있었다. 2) 요한의 침례 성경은 요한의 침례를 '죄 사함의 침례'(막 1:4; 눅 3:3)로 규정하고 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전 뜰(이방인의 뜰)에서 돈을 바꾸는 사람들과 흥정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는 사건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돈을 바꿔 주거나 소, 양, 염소, 비둘기 등 번제에 쓰일 제물을 팔아 돈을 버는 장사치들이 있게 된 것은(마 21:12; 막 11:15; 눅 19:45; 요 2:13~16) 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교 전체에 물든 종교적 타락과 무관하지 않다.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은 1년에 최소한 세 번씩 제사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가야 했다. 이때 번제에 쓸 짐승들까지 데리고 가는 번거로움을 줄이고 간혹 번제로 합당하지 않은 제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로 인해 합리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것은 번제에 쓸 제물을 제사장들이 지정하는 가축업자가 납품을 하고 백성들은 돈만 가지고 와서 사게 하는 편리성과 합리성을 추구하게 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사장들과 가축 납품업자들 사이에 뇌물이 오가고 제사장들은 제물로 쓰기엔 하자가 있는 짐승도 성전 뜰에서 산 것은 눈 감아 주었다. 또한 20세 이상 성인 남자는 1년에 반 세겔씩 성전세를 낼 의무가 있었는데(출 30:13~16), 이것을 꼭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화폐로 내야했다. 그 당시 화폐 발행이 중앙집권적이지 못해서 네다섯 가지 지방 화폐가 존재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성전세를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환전을 해야 했고 여기서 생기는 환전수수료로 막대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생기게 됐다. 이 돈의 일부는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에게 상납 되는 구조가 생겨났다.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금전적인 이득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런 종교적 타락을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일반 백성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적인 갈급함으로 요단강에서 '죄 사함의 침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요한이 베풀던 침례는 초대교회에서 완성된 삼위일체적 침례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쉽게 말해서 요한이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 때 "성부와 성자인 예수 당신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푸노라" 이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침례 요한의 침례는 율법의 정결 예식에 따라 쿰란공동체가 행하던 누구의 이름도 거명되지 않았던, 번제의 기능을 대신하는 '죄 사함의 침례'였다. 2. 원시 기독교의 침례: "예수의 이름으로 베푼 침례" 침례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는 공식적인 의식이다. 지금은 교단마다 침례에 대한 다른 형식, 절차, 기준이 있다. 형식으로 보면 크게 침례와 약식세례로 나눌 수 있고 절차와 기준으로 보면 어떤 교단은 유아세례(유아는 물에 완전히 잠겼다 나오는 침례가 아닌 물을 머리에 뿌리는 형식을 취하기 때문에 유아침례보다 유아세례가 맞는 표현이다)를 인정하지만 다른 교단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일정한 나이가 돼야 침례의 자격을 준다. 유아세례가 없는 교단은 헌아식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신앙고백 없이 부모님의 결단과 믿음으로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성년이 됐을 때 입교식을 거쳐 정식 교회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막 생겨난 사도적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준다. 사도적 교회는 지금과 같은 교회의 체계나 조직을 갖추기 전이었기에 사도들이 교회의 행정, 재정, 말씀 선포 등 교회의 모든 일을 다 했다. 사도적 교회는 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 제도가 생기면서 제도화된 교회로 점차 바뀌었고(행 6:1~6)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됐다(행 6:4). 이 시기에 침례의 의미도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게 됐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침례 요한의 침례는 번제를 대신하는 '죄 사함의 침례'였기에 어떤 이름도 부여되지 않았고 번제가 반복적으로 행해졌던 것처럼 침례 또한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유대교적 정결 예식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새로운 침례를 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푸는 것이다. 사마리아 성도들은 유대 전승에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고(행 8:16), 베드로는 고넬료 가정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었다(행 10:48). 침례는 단순히 죄 사함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는 예식이었으며 또한 구원을 확증하는 평생에 한 번 일회성 침례로 바뀌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3.07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25.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와 하나님의 산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간 모세 '야훼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모세,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지도자요 선지자였다. 태어나 3개월 만에 이집트의 공주에게 입양되어 자랐던 모세는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했다(행 7:22). 그러나 광야 40년의 세월 동안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출 4:10)가 돼 있었다. 그렇게 모세는 돌고 돌아 80세가 되어서야 자신의 소명 앞에 섰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모세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야훼'로 부르게 되었다. 아무도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는 광야의 삶은 그의 정체성을 흔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이 끝나버릴 것 같았던 모세와 하나님의 만남은 한 떨기나무 앞에서 이루어졌다. 1. 시내산? 호렙산? 모세의 산? 하나님의 산?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잊지 못할 장소를 성경은 여러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거룩한 산은 성경 지명과 현지인들에 의해 불리는 이름을 합쳐 대략 4개 정도 된다(시내산, 호렙산, 모세의 산, 하나님의 산). 1) 시내산 이들 중 '호렙산'(출 3:1; 17:6; 33:6)과 '시내산'(출 16:1; 19:20, 23; 31:18; 34:2; 삿 5:5; 행 7:30, 38)은 여러 본문에서 서로 다르게 기록되고 있어서 성경의 난제로 다뤄지기도 한다. 시내산은 구약성경에 17차례 등장하는데 대부분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고 그 외에 출애굽기, 열왕기상, 역대하, 시편, 말라기 등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기록되었다. 그중에 15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 칼뱅은 출애굽기 3장 1절을 주석하면서 같은 산의 동쪽은 '시내산', 서쪽은 '호렙산'이라고 불렸다고 이해하고 있다. 중세시대의 저명한 성경 주석가였던 에스라(Abraham Ibn Ezra)도 시내산과 호렙산을 동일한 산의 두 개의 다른 봉우리로 이해했다. 2) 호렙산 호렙산과 시내산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신학적 고고학적인 논쟁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시나이 반도(Sinai Peninsula)가 아닌 아라비아 반도(Arabian Peninsular)에 있다는 일부 검증되지 않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아마추어 성서고고학 탐험가인 론 와이어트(Ron Eldon Wyatt, 1933~1999)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북부에 위치한 라오즈산(Jabal al-Lawz)이라는 일방적인 주장이다. 이를 바탕으로 『떨기나무』라는 책으로 출판되어 쟁점이 되기도 했었다. '호렙산'은 모세오경 외에 아합 왕과 엘리야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아합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이었지만 남유다 왕국까지 모두 합쳐 이스라엘 왕 중에 가장 악했던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합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악한 왕이 되는 데는 시돈 왕 엣바알(뜻, '바알과 함께한 자')의 딸인 이세벨(왕상 16:31)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세벨은 450명의 바알의 선지자들이 엘리야와의 갈멜산 대결에서 철저하게 패했음에도 불구하고(왕상 18:20~19:1), 엘리야를 찾아 죽이려고 했다(왕상 19:2). 엘리야는 서슬이 퍼런 이세벨의 피의 복수를 피해 호렙산으로 들어갔다(왕상 19:8). 호렙산은 아합의 군대가 엘리야를 찾기에 쉽지 않은 산세와 지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렙'의 원어적인 뜻은 '빛나는' 혹은 '열'로 태양을 상징한다. 그리고 '시내'는 수메르어로 '달'에 해당한다. 그래서 높은 산에 두 봉우리가 있는데 각기 그 이름이 '태양'(호렙)과 '달'(시내)로 불려서 이름이 서로 다르게 표기되었지만 같은 산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3) 모세의 산 '시내산'이나 '호렙산'과 같은 성경의 지명과는 상관없이 시나이 반도에 오랫동안 살아왔던 현지인들은 이 산을 '제벨무사'(Jabal Musa) 즉 '모세의 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현지인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아랍인이다. 구약 성경을 읽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이 이 산을 '모세의 산', '제벨무사'라고 부는 것은 약 3500여 년 전에 이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해 들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벨무사(시내산 혹은 호렙산)는 해발 2285m로 우리나라 한라산(1950m)보다는 높고 백두산(2744m)보다는 낮다. 모세는 이곳에서 불과 화염에 쌓여 있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발견했다. 이 기이한 현상을 보고 하나님의 임재를 직감한 모세는 감히 그 앞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고 있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신다(출 3:5). 유대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 의하면 신을 벗는 행위는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① 슬픈 일을 당했을 때 애곡의 표시이기도 하고(삼하 15:30), ② 포로나 노예들도 신발을 벗어야 했고(대하 28:15; 사 20:2), ③ 룻기에 기록되어 있듯이 자신의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때(룻 4:7), ④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행위(출 3:5)를 나타낸다. 모세는 이곳 '모세의 산'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갔다. 4) 하나님의 산 출애굽기 24장 13절은 다른 특별한 지명 없이 모세가 여호수아와 함께 '하나님의 산'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산'이라는 표현은 출애굽기 3장 1절에도 등장한다. 모세는 출애굽을 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그가 처음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던 산에 다시 오르게 되었다. 처음엔 홀로 섰던 그곳에 이제는 사명을 감당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고 리더로 다시 서게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과 파기될 수 없는 언약을 맺게 되었다(출 24:12).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떨기나무가 있는 곳에는 수도원이 세워져 있다. 2. 떨기나무와 성 캐더린 수도원 시내산 중턱에는 수도원이라기보다는 적을 물리치기 위해 잘 지어진 요새 아니면 중세의 성을 연상시키는 성 캐더린(St. Catherine) 수도원이 있다. 이 수도원이 시내산 중턱에 건설된 이유는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떨기나무 때문이다. 3세기 중반 로마 황제의 기독교 박해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을 때 많은 수도사들은 산세가 험한 시내산에 들어와 동굴 속이나 움막을 짓고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A.D. 330년 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캐더린의 순교를 기념해 불타는 떨기나무 자리에 예배당을 지어 헌당함으로써 현재의 성 캐더린 수도원의 모체가 되었다. 지금도 불붙는 떨기나무 기념 예배당에는 반드시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이후 7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슬람의 팽창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됐다. 광야로 찾아들었던 수많은 수도사들은 3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슬람의 박해가 심해 질 때 전승에 의하면 수도원장은 마호메트에게 시내산에서 수도하고 있는 수도사들과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마호메트가 이 요청을 받아들였고 손바닥으로 날인한 문서를 받게 되었다. 이 문서가 진짜 마호메트가 쓴 것인지 아니면 박해를 벗어나고자 수도원장이 자의적으로 기록한 것인지에 대한 진위가 여전히 논쟁 중이지만 어쨌든 이 문서로 인해 성 캐더린 수도원은 이슬람의 파괴와 약탈로부터 벗어나 오히려 보호를 받게 되었다. 성 캐더린 수도원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가치 중 하나는 시내사본(Codex Sinaiticus)이다. 1844년 독일인 티센도르프(Constantin Tishendorf)는 이곳에서 구약성경의 대부분과 신약성경의 일부가 수록되어 있는 시내사본을 발견했다. 모세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던 가시덤불은 지금도 꺼지지 않는 기독교 순교의 역사와 성경의 역사 한 가운데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2.07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24. 나답과 아비후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께서 지정하지 않은 불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야훼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야훼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야훼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훼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아론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의 이름은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이다(출 6:23; 민 3:2; 26:60). 아론의 아들들은 아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지도자로서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사람들이었다(민 3:3). 그러나 장남과 차남인 '나답'과 '아비후'가 지성소(Holy of Holies)에 들어가서 죽는 일이 발생했다(레 10:1~2; 민 3:4; 26:61).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은 레위기 10장과 민수기 6장, 26장에 반복해서 기록되고 있다. 이처럼 성경에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곳에 여러 번 반복되어 기록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 그 사건의 사안이 중대할 때이다. 나답과 아비후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왔다. 이 사건은 단순히 광야시대에 있었던 한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흐르고 있던 이스라엘의 제사와 영적 상태에 경각심을 일깨우고 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제사장들에게는 개인 경건을 위한 새로운 규정이 만들어졌다. 이 규정은 나실인들이 지켜야 할 규례로 확대됐다. 1. 시내산에 오른 나답과 아비후 나답과 아비후의 행적은 출애굽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에 기록된 나답과 아비후는 레위기와 민수기에 기록된 타락한 제사장의 모습이 아니다. 출애굽기 24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갈 때를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기 24장 1절에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야훼께로 올라와 멀리서 경배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내산을 오를 때 모세는 이스라엘의 70인 장로와 아론뿐만 아니라 나답과 아비후를 동행하게 했다. 70인의 장로는 이스라엘 전체 민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론은 모세의 영적인 동역자였고 출애굽의 일등공신이었다. 이들과 함께 나답과 아비후가 시내산에 올랐다는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성소에서 죽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답과 아비후는 아버지 아론과 함께 모세를 따라 시내 산에 올라 멀리서나마 하나님의 현현을 보았다(출 24:1). 2. 나답과 아비후의 위임식(Inauguration) 레위기 8~10장은 제사장의 위임식과 취임식(Consecration and Inauguration)에 대한 말씀이다. 이 위임식은 민족의 지도자이며 동시에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던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제사장 직분을 아론과 그 자손에게 위임하는 예식이었다(레 8장). 이 위임식은 7일 동안 희생 제사로 성대하게 진행됐다(레 8:33~35). 위임식의 절정은 아론의 머리에 거룩한 기름을 붓는 것이었다. 이 기름은 영적인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어질 복과 은혜의 상징이었다. 시편은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시 133:2)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은 아론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그의 수염과 옷깃을 적시는 거룩한 모습이었다. 흔히 아론이 먼저 대제사장의 직분을 받고 나중에 아론의 자녀들에게 기름을 부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위임식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동시에 이루어졌다(레 8:13~14). 그런데 4명의 자녀 중에 나답과 아비후만 데리고 시내산에 올랐다는 것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장자와 차남이라는 이유도 있을 수 있으나 시내산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미뤄 볼 때 영적인 권위가 인정되지 않고서는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지정하지 않은 불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직접적인 원인은 '각기 향로들을 가져다가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하나님 앞에 분향했기' 때문이다(레 10:1). 여기서 최소한 두 가지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1) 모든 성전기물은 오직 하나만 만들게 되어 있었다. 복제품을 만들어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시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더는 쓸 수 없게 되면 율법에 따라 다시 만들어야 했다. 성막 기물 중에 가장 헷갈리기 쉬운 것은 향로(Censer)와 향단(Altar of Incense)이다. 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었는데 크기는 정사각형 모양의 가로와 세로가 각각 1큐빗(약 45㎝), 높이는 2큐빗(약 90㎝)이었으며 순금을 입혀서 만들었다(출 25:38; 30:1~6). 그래서 금향단이라고 불렸고 지성소와 성소를 나누는 휘장 앞에 놓여 있었다. 금향단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고 이곳의 불을 옮기는데 사용되는 것이 향로이다. 히브리서 9장 3~4절을 보면 지성소 안에 언약궤와 금향로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성소 안에 언약궤만 두도록 하신 출애굽기 말씀과 배치돼 보인다(출 26:34). 그러나 향로는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지성소에 들어가 언약궤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향을 피우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지성소 안에 고정된 기물은 아니었다(레 16:12~13). 성소와 지성소를 오가는 중요한 기물이 향로였는데 나답과 아비후는 지정된 것이 아닌 자신의 향로를 가져다가 분향했다(레 10:1). 2)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은 불을 사용했다. 향로의 불은 아무 곳에서나 쓰던 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번제단의 불을 사용해야 했다. 제사장들은 번제단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아침마다 나무를 태우고 그 위에 화목제의 기름을 불살라야 했다(레 6:12~13). 그리고 번제단의 불을 향로에 옮겨 담아(레 16:12~13) 그 불로 성소 안의 향기로운 향을 피워야 했다. 이 향을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고 했고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기도(시 141:2)라고 했다. 신약시대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는 향기로운 성도의 기도(계 5:8; 8:3)라고 했다. 제사장의 중요한 직무 중 하나는 금향로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아침과 저녁에 향을 피워 성소를 향기로운 냄새로 가득하게 해야 했다. 이 일을 처음에는 아론이 했었다(출 30:7~8). 하지만 이후 그의 자손들이 제사장으로서 그의 일을 이어받았고 나답과 아비후가 아론의 뒤를 이어 성소에서 분향하게 됐다. 그러나 그들은 번제단의 불을 사용하지 않고 각자 출처를 모르는 불을 가져다가 분향했다. 성경에 기록된 85명의 대제사장 가운데 성소에서 죽은 사람은 나답과 아비후 둘 뿐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대제사장이 아니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으나 아론의 일을 직접 이어받은 것과 이스라엘 모든 민족 앞에서 아론과 똑같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을 고려한다면 이런 견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4. 나답과 아비후 사건 그 이후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 직후 하나님께서 이례적으로 모세가 아닌 아론에게 직접 말씀을 하신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내리신 금지명령은 아론과 그의 자손이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다(레 10:8~9). 이것은 나답과 아비후가 술에 취해 아무 향로나 들고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했다가 죽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제사장의 금주는 민수기에 등장하는 나실인의 규례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민 6:1~8). 머리를 깎지 말라는 것을 제외한 시체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것과 포도주와 독주를 금지한 규례는 제사장들에게 금기되었던 것이 나실인의 규례에 그대로 적용됐다고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답과 아비후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려야 했던 분향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한 거룩함과 두려움, 사명감마저 잃어버렸던 것 같다. 그 결과 분향의 시간이 다 되도록 술을 마시고 있었고 급히 아무 향로나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분향했다가 죽임을 당했던 것 같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봉사에 익숙해지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귀하심을 망각할 때가 있다. 예배는 형식화 습관화 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직분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갈 때가 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1.03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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