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명가
[신앙의 명가:이영훈 목사]<6> 신앙의 유산이 미래를 희망으로 만든다
  • 순복음가족신문은 '신앙의 명가' 코너를 통해 한국교회에서 신앙의 명문가를 이룬 목회자 가정을 찾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소개하는 신앙의 명가는 4대째 신앙을 이어오며 많은 목회자와 장로 권사를 배출한 이영훈 위임목사의 가족입니다. 세상 문화인 맘몬주의와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참된 신앙을 이어가기 힘든 세태 속에서도 믿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 주> 복음으로 하나 되게 하소서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사랑의 힘 이 땅의 우리가 이뤄야 할 사명 '복음통일' 화합과 일치의 선봉에 서다 이영훈 위임목사는 2007년 7월 8일 공동의회에서 99.7%의 찬성을 얻어 2008년 5월 21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제2대 위임목사로 취임했다. 이영훈 목사의 위임목사 취임은 세계 최대교회를 이룩한 조용기 원로목사의 뒤를 잇는 아름다운 세대교체라는 점에서 한국 교회와 사회에 큰 귀감이 됐다. 교회 안팎에서 인격적이고 합리적인 지성의 목회자요 지도자로 두터운 신망을 받으면서 교단과 교파를 초월한 폭넓은 강단교류로 순복음의 지평을 넓혔다. 이영훈 목사는 한국 교회의 화합과 일치를 위한 선봉자로서 2011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2014년부터 17년까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등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연합기관들을 앞장서 이끌어 한국 교회의 위상을 높였다. 또 2018년 나뉜 지 10년 만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 대통합을 이뤄 한국교회에 화합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한국 교회의 하나 됨의 중심축에 이영훈 목사가 설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배경 때문이다. 이영훈 목사의 가정은 원래 장로교 신앙의 가정이었다. 조부 이원근 장로가 순복음교회로 새벽예배에 출석하면서부터 이영훈 목사의 가족 모두가 순복음 교인이 되었다. 조부의 신앙의 대를 이어오며 가정에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자녀들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교단에서 목회자나 장로가 돼 신앙의 조화를 이룬 완벽한 에큐메니컬(연합과 일치)을 이뤘다. 3대째 신앙을 물려받은 큰아버지 이경화 장로와 두 분의 작은아버지 이경준 목사와 이경섭 장로, 고모부 윤명호 목사는 장로교 통합 측이다. 이영훈 목사의 외가 쪽은 모두 장로교 합동 측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으며 이영훈 목사의 동생 이영찬 선교사는 뉴저지연합감리교회의 파송을 받고 현재 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영훈 목사의 오촌 아저씨인 양영배 목사는 성결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군종감으로 사역했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한 성경 한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 안에서 사랑의 교제를 나눈다. 한국 교회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같기 때문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한국 교회의 하나 됨은 응당 이뤄져야 할 일이고 희망이 있는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사명 이영훈 목사는 어릴 때부터 이웃을 돌아보고 항상 섬김과 구제를 해야 한다는 것을 조부 이원근 장로에게서 배웠다. 1960년대에는 상도동 뒷산에 토굴을 파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조부 이원근 장로는 밤마다 여러 자루에 쌀을 담아 재봉틀로 봉한 뒤 그것을 메고 산에 올라가 토굴 앞에 조용히 내려놓고 왔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는 조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자손들에게는 최고의 교육이었다. 사역 초기부터 고난당한 이웃들과 함께 한 이영훈 목사는 지구촌 곳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눴다. 2014년 세월호 사건으로 침체에 빠진 안산시에 희망을 전하기 위해 '안산희망나눔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성도들과 함께 3년간 12번 보성재래시장을 방문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처음에는 굳은 표정으로 이영훈 목사와 성도들을 바라보던 상인들은 방문 횟수가 늘어나자 "또 오셨느냐"며 반가워했다. 프로젝트를 시행하며 이영훈 목사는 세월호가 인양될 때까지 방문을 하겠노라 공언했고 이를 실천에 옮겨 안산 상인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또 국제구호개발NGO 굿피플의 이사장으로서 해남 땅끝마을 지역아동센터 등을 지원해 아이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고 있고, 희망박스 나눔을 통해 매머드급 사랑의 릴레이를 이어왔다. 또 2017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쪽방촌 등 가장 어려운 성도들을 심방해 형편을 살피고 사랑을 전하며 섬김과 구제로 사도행전적 목회에 힘쓰고 있다. 북한의 복음화 그리고 통일을 위해 기도하다 2018년 성역 40주년을 맞은 이영훈 위임목사는 마틴 루터 킹 목사 서거 50주년 기념예배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향한 거룩한 꿈과 비전을 선포했다. 또한 이스라엘 건국 70주년 기념으로 열린 이스라엘 조찬기도회에 초청돼 말씀을 전하면서 함께 참석한 세계지도자들에게 한반도에도 참된 평화와 통일이 다가오도록 기도를 요청했다. 11월에는 미국의 아시아아메리칸연합회로부터 남북상호교류와 한미우호협력에 이바지한 공로로 세계종교지도자상을 수상했다. 평양 심장전문병원 건립 등으로 이미 수 차례 평양을 방문한 이영훈 목사는 구체적으로 북한 복음화를 꿈꾸고 있다. 북한 복음화에 대해 이영훈 목사의 의지가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북한은 이영훈 목사의 선조들의 고향으로 그곳에서 신앙을 받아들여 자손들을 신앙으로 훈련 시킨 땅이다.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평양은 1907년 대부흥운동이 처음 일어난 복음의 땅이다. 그렇기에 북한복음화는 이영훈 목사의 간절한 기도 제목일 수밖에 없다. 이영훈 목사는 늘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롬 8:28)는 말씀을 선포하며 신앙의 유산에서 나오는 믿음의 저력으로 하나 되는 한국 교회, 하나 되는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다.<끝> 특별취재팀 <자료제공=신앙계>
  • 2019.04.28

    [신앙의 명가:이영훈 목사]<5> 4대째 이어진 신앙의 유산
  • 순복음가족신문은 ‘신앙의 명가’ 코너를 통해 한국교회에서 신앙의 명문가를 이룬 목회자 가정을 찾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소개하는 신앙의 명가는 4대째 신앙을 이어오며 많은 목회자와 장로 권사를 배출한 이영훈 위임목사의 가족입니다. 세상 문화인 맘몬주의와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참된 신앙을 이어가기 힘든 세태 속에서도 믿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 주> 절대긍정 절대감사 절대순종 가정예배가 신앙생활의 기본 만들어 어릴 때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 이뤄져 신앙의 기본은 가정으로부터 선대로부터 4대째 신앙을 물려받은 이영훈 위임목사는 철저하게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 환경에서 신앙생활의 기본을 배웠다. 어린 시절 토요일이면 작은아버지 이경섭 장로는 상금을 걸고 이영훈 목사 형제들에게 성경 퀴즈를 냈다. 이영훈 목사는 퀴즈 참여를 위해 일주일 내내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그 결과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벌써 성경의 주요 이야기를 거의 이해하게 됐다. 조부는 신앙의 기본인 주일성수에 철저하라고 가르쳤다. 헌금으로 평소에는 만져볼 수도 없는 100환을 주시며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고, 주일에는 개인의 유익이나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와 심지어 먹을 거리를 사 먹는 것도 금하며 오직 예배를 드리는 일에만 모든 열정과 시간을 드리도록 했다. 조부의 낙타 무릎 기도에서 배우다 이영훈 목사의 신앙 인생에 최대 전환점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64년 4월이다. 신앙에 철두철미한 조부는 새벽예배를 3개월간 서대문순복음교회에 출석 후 가족회의를 소집해 “이제부터는 순복음교회로 전 가족이 출석한다”고 말씀하셨다. 성령침례와 성령 충만을 강조하는 조용기 목사의 속사포 같은 설교를 통해 어린 이영훈 목사는 성령을 사모하며 교회에서 열리는 모든 성회에 참석했다. 소년의 순수한 기도는 1966년 2월 응답됐다. 성령은 받은 그날부터 5년간 이영훈 목사는 기도만 하면 눈물이 났다고 회고한다. 학교에 제일 먼저 등교해서 반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던 그는 중학생 때 목회자가 되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미션스쿨인 대광중학교와 대광고등학교를 다니며 신앙은 더욱 굳건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업 도중 갑자기 할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집으로 달려갔다. 온 가족이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찬송을 부르고 있던 그때 이영훈 목사는 광채가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예수님을 잘 믿은 사람은 죽음마저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할아버지는 평생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해 무릎이 온통 딱딱하게 굳어져 낙타 무릎처럼 됐다. 할아버지는 그 무릎의 기도로 가족들이 모두 성령 충만하고 순복음 신앙에 충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절대긍정과 감사, 순종 이영훈 목사는 1977년 연세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순복음의 정통신학을 배우기 위해 순복음신학교(현 한세대) 신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1978년 12월 여의도순복음교회 전도사로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영산출판사의 편집부장, 순복음뉴스(현 순복음가족신문) 초대 편집장, 순복음교육연구소 소장으로 사역을 하다가 1982년 5월 목사안수를 받고 그해 7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85년 2월 웨스트민스터 신학대 유학시절 이영훈 목사는 학교가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기차로 2시간 거리의 워싱톤순복음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교회에는 70여 명의 성도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이영훈 목사는 1000석 성전 건축의 비전을 선포하고 매일 새벽기도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91년 모든 역경을 딛고 하나님의 은혜로 3000평 부지에 성전을 건축했다. 조용기 목사를 모시고 헌당예배를 드린 후 1992년 5월 여의도순복음교회 선교대회에 참석했을 때 조용기 목사는 이영훈 목사에게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명했다. 이영훈 목사는 1993년 국제신학연구원장을 맡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 Ⅰ·Ⅱ’를 집필하는 등 순복음 신앙과 성령운동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순복음 성령신학의 기반을 구축했다. 2000년 조용기 목사로부터 순복음동경교회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을 받고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부임 하자마자 열두광주리 특별새벽기도회를 열고 매일 눈물로 새벽 제단을 쌓은 결과, 부임 1년 반 만에 땅 한 평에 1억원이 넘는 동경 시내 한복판에 8층 규모의 성전을 헌당하고 일본 선교의 토대를 다졌다. 2003년 귀국한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다 2005년 LA나성순복음교회에 담임목사로 파송됐다. 그리고 새벽기도 영성으로 교회 내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는 결실을 얻었다. 부르심에 무조건 순종의 자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김선실 목사가 물려준 신앙유산의 힘이었다. 이영훈 목사에게는 “항상 겸손해라.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섬기려고 오셨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와 예수님뿐이다”라고 당부를 이어갔다. 배우자는 최고의 신앙 동반자 이영훈 목사의 절대 순종의 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백인자 사모의 조용한 내조와 헌신 덕분이었다. 이영훈 목사가 사역지를 옮겨 다니며 이삿짐을 일곱 번 쌌지만 단 한 번도 불편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다. 백인자 사모는 이영훈 목사의 유학 시절부터 빠듯한 경제 상황 속에서도 남편의 뜻에 순종하며 조용히 인내했다. 이영훈 목사가 워싱톤순복음제일교회 건축을 선포한 후 교회가 완공될 때까지 사례비를 받지 않겠다고 교인들에게 공표했는데 완공까지 무려 5년이 걸렸다. 당시 미국 메릴랜드대학에서 응용수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며 조교로 일하던 백인자 사모는 생활비 등 아무 걱정 말고 목회에 전념하라며 힘을 실어주었다. 후에 백인자 사모는 학위를 취득한 후 메릴랜드대학으로부터 연구원 보직을 받아 충분한 급여와 안정된 직장을 보장 받았음에도 남편의 사역을 위해 미련 없이 접기도 했다. 이영훈 목사와 백인자 사모는 부부가 함께 하는 헌신과 순종을 통해 최고의 신앙 동반자가 되어 굳건하게 신앙의 명가를 이어나가고 있다. 결혼 17년 만에 낳은 딸 성은 양은 장성하여 미국 남부의 명문 에모리대학에 재학 중이다. 특별취재팀<자료제공=신앙계>
  • 2019.04.21

    [신앙의 명가:이영훈 목사]<4>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다음 세대에게
  • 순복음가족신문은 ‘신앙의 명가’ 코너를 통해 한국교회에서 신앙의 명문가를 이룬 목회자 가정을 찾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소개하는 신앙의 명가는 4대째 신앙을 이어오며 많은 목회자와 장로 권사를 배출한 이영훈 위임목사의 가족입니다. 세상 문화인 맘몬주의와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참된 신앙을 이어가기 힘든 세태 속에서도 믿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 주> 후손들 기하성·장로교·감리교·성결교 등 목회자로 활동 하나님만 의지해 시련 이겨낸 가족들 사명 이뤄 북한과 평화통일 복음통일 위해 간절히 기도 신앙의 진원지 북녘 땅을 바라보며 이영훈 목사의 증조부인 이재식 옹은 한국의 초기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 평양 신양리에서 전주 이씨 가문의 8대 독자로 태어난 이재식 옹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교회의 충성스런 일꾼이었다. 아버지 이재식 옹으로부터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이원근 장로는 9대 독자였다. 하나님은 이 가정에 9남매를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다. 이원근 장로와 문창화 권사 슬하의 4남 5녀 역시 모두 신앙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 북쪽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공산당이 집권하자 1948년 6월 이원근 장로는 오직 신앙의 자유 하나만을 위해 가족들과 월남했다. 이 장로는 통통배 하나를 빌려 가족들을 배 밑바닥에 숨기고 입은 옷 한 벌에 가방에는 성경과 성경주석서를 넣고 남쪽으로 내려 왔다. 배 안에서 이원근 장로와 가족들은 북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딸 한명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뤘기에 함께 배를 탈 수 없었다. 그것이 이토록 오래된 이별이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분단의 아픔 속에 평양에 남겨진 이영훈 목사의 고모는 오랜 기간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미국에 살고 있는 이영훈 목사의 고모부가 10여 년 전 평양을 방문해 고모의 후손들을 만나 소식을 전해 줬다. 평양의 고모는 8남매를 낳고 하늘나라 가는 순간까지 신앙을 지켰고 그 후손들은 평양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비로소 완전한 복음화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북한과의 복음 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신앙으로 하나 되어 고난을 이기다 오직 신앙 하나만을 붙들고 남한 땅에 도착한 이원근 장로의 가족들은 영락교회로 가서 교회 측이 마련해준 천막에 기거하며 남한생활을 시작했다. 맨몸으로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남한에서의 생활은 가족들에게 큰 고통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가족들은 신앙으로 고난을 이겨냈고 사명을 감당해 나갔다. 자녀들은 후에 아들 넷 중 하나는 목사, 셋은 장로가 됐다. 딸 다섯 중 하나는 목사 사모, 셋은 권사가 됐다. 그들의 자녀들도 모두 크리스천이 됐다. 신앙의 대를 이어오는 가운데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다. 그야말로 기하성,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조화를 이룬 완벽한 에큐메니컬(연합과 일치)이 한 가정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3대째 신앙을 물려받은 큰아버지 이경화 장로와 두 분의 작은아버지 이경준 목사와 이경섭 장로, 고모부 윤명호 목사는 장로교 통합 측이다. 둘째 이경선 장로(이영훈 목사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이원근 장로의 인도로 모두 순복음교회에서 신앙의 터를 잡았다. 이영훈 목사의 외가 쪽은 모두 장로교 합동 측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다. 이영훈 목사의 동생 이영찬 선교사는 뉴저지연합감리교회의 파송을 받고 현재 아프리카 케냐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영훈 목사의 오촌 아저씨인 양영배 목사는 성결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군종감으로 사역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 다해 교회 섬긴 가족들 이원근 장로는 1950년 초 제주도로 건너가서 제주도에서 남원교회를 복원하고 위미, 표선에 기도처를 세웠고 고모들과 함께 2년 6개월 동안 사역을 했다. 같은 시기에 이영훈 목사의 작은 아버지 이경준 목사는 서귀포교회를 복원하고 목회했다. 제주 사역을 마친 조부 이원근 장로는 한경직 목사의 뜻을 받들어 북한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고현봉 목사를 모시고 부산 영락교회 설립을 도왔다. 교회가 완공됐을 때 이원근 장로는 장남인 이경화 장로와 며느리 방복심 권사를 조용히 불렀다. “이제 나는 내 일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간다. 그 대신 너희 부부는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영락교회와 고현봉 목사님을 잘 섬기도록 하거라.” “예, 아버님.” 원래 이경화 장로는 평양 서문밖교회 청년회장이었다. 서문밖교회와 장대현교회는 평양의 대표적인 교회로서 각각 교세가 1000명이 넘을 정도로 부흥하는 교회였고 교류도 활발했다. 서문밖교회 청년회장의 믿음 좋고 리더십도 뛰어난 모습을 눈여겨 본 장대현교회 방지일 목사(한국 최초의 선교사)는 자신의 막내 고모를 소개했고 둘은 부부가 됐다. 이원근 장로의 명령에 따라 이경화 장로는 50년 넘게 교회 수석 장로로서 목사님의 목회를 힘껏 도왔고 모든 물질을 교회에 장학금으로 내놓고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방복심 권사는 부산 영락교회가 성전을 증축 확장할 때 1년 반 동안 거의 매일 담요 하나만 들고 가서 교회 본당에서 밤을 보냈다. 방 권사는 “교회 증축이 완공될 때까지 기도로 교회를 지켜야 한다. 교회는 기도와 눈물로 짓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후손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였다. 이영훈 목사의 작은 아버지 이경준 목사는 유명한 부흥사였던 신현균 목사와 신학교 동기였다. 1사단에서 20년 동안 군목으로 사역하다가 중령으로 예편했다. 이후 부산 광안리에서 광안교회를 섬기면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지어 헌당했다. 예장통합측 부산동노회장과 해외선교부장, 외항선교회장 등을 지내고 목회와 교계 활동에 힘썼으며 특별히 해외선교부장을 지내며 마카오에 신학교를 세워 중국인 목회자를 양성했다. 특별취재팀 <자료제공=신앙계>
  • 2019.04.14

    [신앙의 명가:이영훈 목사] <3> 믿음의 가정을 세운 아버지와 어머니
  • 순복음가족신문은 ‘신앙의 명가’ 코너를 통해 한국교회에서 신앙의 명문가를 이룬 목회자 가정을 찾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소개하는 신앙의 명가는 4대째 신앙을 이어오며 많은 목회자와 장로 권사를 배출한 이영훈 위임목사의 가족입니다. 세상 문화인 맘몬주의와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참된 신앙을 이어가기 힘든 세태 속에서도 믿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 주> ‘한 마음 한 뜻’ 주의 일에 헌신한 부부 부모님 모시고 다섯 남매 양육하며 1년에 100명 이상 전도 형편 어려운 신학생 전액장학금 후원하며 주의 종 양성 전도를 생명처럼 여긴 김선실 목사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세요.” 이영훈 목사의 어머니 김선실 목사는 평신도 시절 주위 사람들로부터 ‘최자실 목사님의 분신’으로 불릴 정도로 대단한 전도자였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김종삼 목사의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장로교에서 신앙생활 하던 김선실 목사는 성경과 말씀으로 충만했다. 시아버지 이원근 장로의 인도로 온 가족이 순복음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뒤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성령 침례를 받았다. 그야말로 장작(말씀)에 불(성령)이 붙자 활활 타오르는 기세가 대단했다. 김선실 목사는 시부모를 봉양하고 다섯 남매(이영혜 권사 이영범 장로 이영훈 목사 이영찬 선교사 이영석 안수집사)를 기르는 상황 속에서도 순복음신학교 16기에 청강생으로 들어가 공부하다가, 故 변종호 목사의 권유로 제 18기에 정식 입학했고 졸업 후 1972년에는 우리 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며 주의 일에 밤낮으로 헌신했다. 주의 일을 하느라 바쁜 생활 가운데도 매일 새벽 성전에 나가 ‘하나님 이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니 주님이 키우시고 맡아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당시 최자실 목사가 ‘화요 잃은 양 찾기 기도회’를 인도하며 성도들의 구령의 열정을 독려했던 시절 여집사님들은 오전 10시 교회에 모여 최 목사의 인도 하에 두 시간 동안 뜨겁게 기도했다. 그리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노방 및 축호전도를 했고 김선실 목사는 냉천동 천연동 현저동 홍제동 홍은동 북아현동 지역을 중심으로 매년 100명 이상을 전도했다. 김선실 목사의 전도 열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어 이 땅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은 병원 침상에서도 변함없었다. 김선실 목사는 89세를 일기로 지난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중국과 일본 제3세계를 꾸준히 오가며 선교했다. 김선실 목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전도한 사람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교도소에서 전도한 사형수(김을윤)라고 했다. 김을윤은 위장 부부 고정간첩으로 사형언도를 받은 상태였다. 사형수로 확정된 탓에 누구도 접근을 꺼리던 그에게 김선실 목사가 끊임없이 면회를 하고 말씀을 전하자 돌밭 가시밭 같은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이 심어졌다. 전도한 지 6개월 만에 성령 받고 회개의 눈물을 흘린 그는 사형수에서 모범수로 변화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후 어느 날 김선실 목사는 교도소에서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평소에 관심도 없이 쳐다보던 교도소 교무과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하면서 “오늘 김을윤 자매가 갔습니다. 교도소에서 사형당하는 사람을 여러 명 봤지만 저는 오늘 천국 가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라며 김을윤 성도의 사형소식을 전했다. 김을윤 성도는 찬송을 부르며 천국에서 만나자고 말했다고 한다. 한없이 눈물 흘리던 김선실 목사는 아무 연고도 없는 시신을 인계받아 최자실 목사의 도움으로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공동묘지에 안치했다. 1978년 장로회장을 지낸 이경선 장로 김선실 목사가 아침부터 기도회에 참석하고 전도하느라 바쁜 상황에도 이영훈 목사의 아버지 이경선 장로는 한 번도 아내의 활동에 대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본인 역시 사업을 하느라 부인의 적극적인 내조가 필요했을 텐데 이경선 장로는 오히려 김선실 목사의 전도사역을 묵묵히 뒤에서 도왔다. 이경선 장로는 자녀들에게 “너희 엄마가 주의 일을 하느라 참 많이 바쁘다. 너희들이 할 일은 스스로 알아서 잘 챙기거라”고 당부했다. 1971년 우리 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은 이경선 장로 역시 교회와 주의 종을 물심양면으로 섬기며 성도들을 돌봤다. 1978년에는 2년간 장로회장으로 교회를 섬겼다. 이경선 장로의 사업장은 부부의 전도 황금 어장이었다. 김선실 목사는 이경선 장로의 사업장을 찾아오는 거래처 인사들을 대상으로 열심히 전도했고 그들 중 어떤 사장님은 우리 교회의 장로가 되어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부는 함께 힘을 모아 신학생 후원에 앞장섰다. 신학생 시절 경제적 어려움에 학업을 중단하는 학생들을 안타깝게 여긴 김선실 목사는 남편 이경선 장로에게 이들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고 이경선 장로의 후원을 통해 수많은 학생들이 학비와 생활비 전액 장학금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들 중 나중에 훌륭한 목회자가 된 이들이 많았다. 오직 사랑의 마음, 주님을 향한 헌신 속에 이루어진 이 일로 김선실 목사는 순복음신학교 제18회 졸업식 때 공로상을 받았다. 항상 겸손과 기도로 주의 종을 잘 섬겨라 기도하는 어머니였던 김선실 목사는 자신이 아버지께 받은 가르침대로 자녀들을 가르쳤다. 그 첫째가 겸손이었다. 특별히 워싱톤에서 목회하는 이영훈 목사에게 매주 토요일이면 전화하여 ‘항상 겸손히 교회를 섬기고, 기도를 많이 하라’고 당부를 했다. 김선실 목사가 강조한 또 한 가지는 주의 종을 섬기고 그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순종하라는 것이었다. 김선실 목사는 매년 햅쌀이 나오면 가장 좋은 품질의 쌀 한 가마니를 당시 당회장이셨던 조용기 목사님 댁으로 보내고 평소 시장에서 장을 보다가도 좋은 것을 보면 무조건 목사님 댁에 갖다 드렸다. 고기를 살 때도 한 근은 목사님 댁에 가져가고 똑같이 한 근으로 시부모님을 섬겼다. 김선실 목사와 이경선 장로의 가르침은 성경에 근거해 권위가 있었고 무엇보다 삶으로 실천하는 부모님의 모습은 자녀들에게 평생 유산이 되었다. 자녀들의 진로문제도 목사님께 기도받고 하나님께 뜻을 구하며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자녀들은 부모의 권위에 순종했고 어른이 되어서도 예수님께 순종하는 길을 따르고 있다. 이경선 장로와 김선실 목사의 5남매는 장성해 장녀 故 이영혜 권사(미국 뉴저지 베다니교회) 장남 이영범 장로(미국 뉴저지 성은장로교회) 4남 이영석 안수집사(분당 지구촌교회)는 제직으로서 각자의 교회를 섬기고 차남 이영훈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위임목사로, 3남 이영찬 선교사는 케냐에서 학교와 교회를 세워 복음 전도와 청소년 교육 사역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복순희 기자 <자료제공=신앙계>
  • 2019.04.07

    [신앙의 명가 : 이영훈 목사]<2>신앙명문가의 태동과 기초
  • 순복음가족신문은 ‘신앙의 명가’ 코너를 통해 한국교회에서 신앙의 명문가를 이룬 목회자 가정을 찾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소개하는 신앙의 명가는 4대째 신앙을 이어오며 많은 목회자와 장로 권사를 배출한 이영훈 위임목사의 가족입니다. 세상 문화인 맘몬주의와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참된 신앙을 이어가기 힘든 세태 속에서도 믿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 주> 외조부 김종삼 목사 눈물로 심고 뿌린 복음의 씨앗 평양신학교 8회 졸업 후 황해도 장연에서 7개 교회 순회목회 김선실 목사(딸), 이영훈 목사(외손자) 대를 이어 하나님 나라 충성 자전거 타고 장연 일곱 교회 순회목회 황해도 장연은 백령도에서 훤히 보일 만큼 가까운 곳이다. 이곳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자력으로 세운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가 있는 곳이다. 일찍 복음이 들어온 덕분에 장연에는 기독교인들이 유난히 많았다. 소망교회 설립자 곽선희 목사, 한국 교회사의 거목 민경배 교수,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사슴)’라는 시를 남긴 노천명 시인이 장연 출신이다. 바로 이곳 장연에서 이영훈 목사의 외할아버지 김종삼 목사가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눈물과 기도로 교회와 성도들을 성장 시켰다. 김종삼 목사는 평양신학교 8회 졸업생으로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장연 지역 일곱 교회를 돌보는 순회목회를 했다. 평양신학교는 장로교 교역자 목사 교육기관으로서 1901년 마포삼열 선교사가 세웠다. 평양신학교는 평양대부흥운동 현장인 평양에 기독교 지도자 양성과 한국 신학의 정립, 한국교회의 지속적 부흥 원동력이라는 목적을 갖고 설립됐다. 이기풍 목사 길선주 목사 등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곽선희 목사(소망교회 원로목사)는 생전 김종삼 목사를 회고하며 “내 고향이 바로 장연입니다. 이영훈 목사님의 외할아버지를 내가 잘 알지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셨지요.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영훈 목사의 친할아버지 이원근 장로는 광복과 함께 장연에 내려와 국가재건위원장을 지냈다. 그것 역시 김종삼 목사와의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광복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정국은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북한 지역에 공산 정권이 들어선 뒤 교회와 기독교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김종삼 목사는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느라 끝내 월남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김종삼 목사가 북에서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영훈 목사의 어머니인 김선실 목사는 김종삼 목사의 2남 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김선실 목사는 어린 시절 늘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심방을 따라 다니곤 했다고 한다. 대를 이어 목사를 배출하다 이영훈 목사의 친가가 장로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라면 외가는 대를 이어 목회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다. 김선실 목사를 비롯해 자녀들은 김종삼 목사와 강영신 사모로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았다. 김선실 목사와 함께 월남한 작은 오빠 김선경 목사가 김종삼 목사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됐다. 김선경 목사의 두 아들 김성규 목사 김일규 목사를 통해 3대째 목사 가문을 이뤘다. 또한 김성규 목사의 아들이 목사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4대에 걸친 목사 가문의 탄생이 예고 되고 있다. 135년 한국기독교회사에 4대에 걸친 목회자 배출은 드문 일이다. 이영훈 목사의 외삼촌인 김선경 목사는 서울 북아현교회를 설립했다. 나중에는 제천에 두개의 교회를 세워 섬기다가 별세했다. 장남 김성규 목사와 차남 김일규 목사 모두 예장 합동 측 목회자다. 김일규 목사의 처남이 KBS교향악단 지휘자였던 예일대 함신익 교수이다. 이영훈 목사의 어머니 김선실 목사 김종삼 목사의 막내딸인 김선실 목사는 1929년 3월 29일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1945년 광복 직전,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회장을 지낸 고 이경선 장로와 결혼하여 슬하에 5남매를 두었으며 둘째 아들이 이영훈 목사, 셋째 아들이 이영찬 선교사이다. 김선실 목사는 시부모를 봉양하고 다섯자녀를 양육하면서도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 지구역장으로 교회에 충성 봉사하며 전도에 앞장섰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최자실 목사님의 분신’으로 불려질 정도였다. 전국 여교역자회 모임인 상록회 초대회장을 지냈고 성숙한 신앙과 리더십을 겸비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누구보다 헌신했던 김선실 목사의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아픔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매우 심한 시대였기에 여성이 신학을 공부하거나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일이 흔치 않았다. “딸로 태어나서 공부를 많이 못한 것이 마음 아프구나. 나도 주의 종이 되고 싶었다. 목사가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김선실 목사는 늘 마음에 담고 있던 배움의 꿈을 늦은 나이에 기어이 성취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상황 속에서도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중국과 제3세계 선교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고 2014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서 명예 목사 안수를 받아 아버지 김종삼 목사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됐다. 김선실 목사는 아버지께 물려받은 대쪽 같은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수했다. 특히 이영훈 목사에게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과 주의 종의 말씀을 예수님의 말씀처럼 따르고 순종하라는 가르침을 신앙의 유산으로 물려줬다. 복순희 기자 <자료제공=신앙계>
  • 2019.03.31

    [신앙의 명가 : 이영훈 목사] <1> 신앙 명문가의 태동과 기초
  • 순복음가족신문은 이번 주부터 ‘신앙의 명가’코너를 신설하고 한국교회에서 신앙의 명문가를 이룬 목회자 가정을 찾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소개하는 신앙의 명가는 4대째 신앙을 이어오며 많은 목회자와 장로 권사를 배출한 이영훈 위임목사의 가족입니다. 세상 문화인 맘몬주의와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참된 신앙을 이어가기 힘든 세태 속에서도 믿음의 본질을 잃지 않고 신앙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러분의 신앙에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편집자 주> 4대째 이어 내려온 믿음의 가문 선조의 신앙을 최고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후손들 선교사에게서 전수된 복음으로 신앙 명문가 초석 세워 한국의 초기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는 평양 신양리에서 전주 이씨 가문의 8대 독자 이재식에게 복음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청년 이재식은 교회의 충성스런 일꾼이 됐다. 교회를 건축할 때는 직접 산에 올라가 도끼로 나무를 베어 교회 건축에 참여할 정도로 누구 보다 앞장서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이 청년이 바로 이영훈 위임목사의 증조부 이재식 옹이다. 증조부의 신앙은 고스란히 이영훈 목사의 조부 이원근 장로에게로 이어졌다. 하나님은 9대 독자인 이원근 장로에게 다산과 번성의 복으로 채워주셨다. 이원근 장로는 문창화 권사와의 사이에 9남매(4남 5녀)를 얻는 복을 누렸다. 슬하의 9남매는 모두 신앙을 물려받았고 그 후손의 수가 총 135명에 이르렀다. 이 중 목사가 13명이고 나머지 가족은 장로 권사 집사 목사사모로 각각 교회를 섬기고 있다. 이원근 장로는 신실한 신앙인으로서 독립운동과 교회를 재건하는데 앞장섰다. 평양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가 청년 김명선과 이원근에게 장학금과 미국 유학을 권했다. 제안에 따라 유학을 떠난 김명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생리학자이자 의사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세브란스 병원장으로 세브란스의대와 연희대의 통합에 기여했다. 이원근 장로가 유학의 뜻을 밝히자 9대 독자를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어머니는 걱정하며 슬피 우셨고 결국 효자인 이 장로는 유학을 포기한 대신 사업가가 되어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이원근 장로는 1919년 3월 황해도 장연에서 열린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 섰고 이로 인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면 일제의 신사참배와 경술국치를 도저히 묵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공을 인정해 정부는 2016년 이원근 장로를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고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한 이원근 장로 분단 전 평양에는 장대현교회와 서문밖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든든한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이원근 장로는 평양 서문밖교회의 장로였다. 유학을 포기하고 사업가가 된 이원근 장로는 일본에서 재봉틀을 수입해 평양을 비롯해 전국에 보급했다. 사업은 크게 번창해 이원근 장로는 평양시 미싱상 조합 이사장에 취임했다. 어느 날 서문밖교회의 후배 장로이자 이 장로의 회계 담당이었던 강양욱(후에 북한서기장, 부주석이 된 인물)이 찾아왔다. “형님!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제 여기 머무르시려면 공산당에 협조해야만 합니다. 형님은 대쪽같은 성품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공산당에 협조하실 리가 없습니다. 제가 그동안 형님께 많은 은택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보답을 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형님! 가족들을 데리고 속히 월남하십시오.” 1948년 6월 이원근 장로는 오직 신앙 하나만을 붙들고 가족들과 월남했다. 이 장로는 통통배 하나를 빌려 가족들을 배 밑바닥에 숨기고 그 위에 생선 궤짝을 실었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고스란히 북한에 남겨놓고 입은 옷 한 벌에 가방 하나만 들고 남쪽으로 내려 왔다. 그 가방에 든 것은 ‘성경’과 ‘성경 주석서’ 뿐이었다. 그 당시 월남한 기독교인들 중 남한에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락교회를 찾아갔다. 이원근 장로의 가족들은 영락교회 마당에 설치된 천막에 한달간 머무르며 혹독한 고생을 했다. 이원근 장로와 가족들은 눈물의 기도를 통해 암울한 현실을 축복으로 바꾸었다. 이 장로는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 원효로에 새로운 삶의 둥지를 틀었고 그곳에 남영동교회를 세워 월남한 교인들을 돌보았다. 목숨보다 귀중한 하나님의 명령 남한에서도 그의 교회를 향한 사랑과 결단은 계속됐다. 제주에서 1948년 발생한 4·3사건으로 인해 제주도의 많은 교회들이 소실되었을 때의 일이다. 광주에 있던 미 남장로교회 파송의 타요한 선교사가 이원근 장로에게 제주의 교회 재건을 부탁했다. 목숨조차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원근 장로는 제주도에 도착하여 표선과 남원교회를 재건했고 위미에 기도처를 세웠다. 또 제주 남원중학교를 인수해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 교육에도 앞장섰다. 제주도에서 2년 반 교회 사역을 마무리한 뒤에는 부산에서 한경직 목사를 도와 부산 영락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했다. 이원근 장로는 장남인 이경화 장로(이영훈 목사의 큰아버지)를 불러 “교회와 목사님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너는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부산 영락교회와 고현봉 목사님을 잘 섬기거라”고 하셨고 이경화 장로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평생 이 교회를 섬겼다. 성령의 음성 따라 신앙의 지경 확장 6·25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상도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이후 1964년 초 서대문에서 둘째 아들(이경선 장로) 가족과 함께 살게 됐다. 평생 무릎 꿇고 기도하여 다리가 낙타의 무릎처럼 변한 이원근 장로는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순복음중앙교회(여의도순복음교회 전신)로 새벽기도를 다녔고 3개월 후 가족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 우리 가족은 모두 순복음교회에 출석한다. 내가 3개월 동안 조용기 목사님 설교를 귀담아 들었다. 큰 은혜를 체험했다. 젊은 종인데 아주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말씀에 은혜가 넘친다”라고 말했다. 성령을 좇아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간 이원근 장로는 결국 가족을 성령의 시대 가장 크게 쓰임 받은 순복음교회로 인도한 것이다. 1964년 4월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이영훈 목사는 할아버지 이원근 장로를 비롯한 온 가족과 함께 순복음교회에 정착했다. 복순희 기자 <자료제공=신앙계>
  • 2019.03.17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