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사
[중독 극복 수기] 내 삶은 빛이 없는 어둔 세상이 전부였다
  • <정감사(가명) 집사> 복음 듣고 술·담배 중독, 폭력적 생활서 벗어나 ‘하루 평균 소주 40병, 담배 여덟 갑.’ 마약만 안했다 뿐이지 내 삶은 술과 담배에 절어 있는 폭력배의 삶이었다. 시비가 붙으면 싸움이 이어졌고, 하우스방(불법도박장)을 꾸려 사람들의 돈을 갈취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어둠의 영에 사로잡혀 살았던 지난날은 세상 온갖 것에 취했던 중독의 삶 그 자체였다. 10대였던 중학교 2학년 시절, 잘나가던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면서 가정 형편은 급격히 어려워졌고 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아무 것도 모르던 그때부터 소매치기의 삶이 시작됐다. 무리와 함께 살던 삶은 그대로 폭력배의 삶으로 이어졌고 이곳저곳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군복무 중에도 탈영 등 문제를 일으켜 제대까지 7년 8개월이 걸렸다. 순복음의 E권사를 만난 건 2009년 한강에서 후배와 술을 마시고 있을 때였다. 우리에게 다가와 따발총 같은 속도로 복음을 전하는 그가 상당히 귀찮았다. 그런데 그 만남이 나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E권사는 교회가기 싫어하는 나에게 “딱, 한번만 가자”고 간곡히 청했다. 2009년 12월 둘째 주일 권사님을 따라 교회에 가면서 이미 소주를 두 병을 마셨고, 한 병은 가슴 주머니에 감췄다. 술 냄새를 풍기며 대성전 강대상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 좌석에 앉아 졸았다. 잠결에 눈을 떴는데 머리가 벗겨진 분이 저 멀리서 말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조용기 목사님이었다. 옆이 앉은 사람이 자꾸 쳐다보는 게 싫어 ‘뭘 봐’ 소리치고는 주머니 속 소주를 꺼내 마셨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축도시간이 왔다. 그런데 그 순간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빵을 준다기에 교회를 다녔는데 어느 날부터 빵을 주지 않아 교회 종 줄을 끊어버렸다. 밤마다 교회 창도 깨뜨렸다. 모든 것이 기억나면서 그때 그 목사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눈물이 차오르고 차올라 잘못했다고 회개했다. 그날 이후 마치 하얀 구름 위에 올라탄 듯 기쁨이 생겨났다. 복음이 그렇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술과 담배 등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은 교회를 다닌 지 7년 만이었다. 끊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열심히 다녔다. 기도도 할 줄 모르면서 묘지 꼭대기 팔각정에 올라갔는데 “주여! 죽여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지옥과 천국을 보게 됐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성경학교, 성경대학, 성경대학원, 신학아카데미, 4차원 영성훈련까지 모든 교육을 다 받았다. 말씀이 계속해서 나를 새롭게 변화시켰다. 받은 은혜가 커 성도들과 그 은혜를 나누고 싶어 교회 봉사에 나섰고 전도를 시작했다. 가족이 모두 주님을 영접했다. 새신자로 위장해 교회에 잠입한 신천지 성도를 만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교리가 잘못됐음을 일깨워 줘 신천지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이제 나에게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성경은 세상에서 제일 맛난 영의 양식이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 뿐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기쁨은 참으로 영원했다. 핸드폰 화면에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길 원한다’는 문자를 새겨놓고 날마다 바라본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다. 전도의 열정을 품고 어떠한 해를 입어도 복음 전파를 쉬지 않던 E권사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도 술과 담배 중독, 절망적인 폭력의 삶 속에서 헤어 나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행복한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며 열심히 살 것이다. 정리=오정선 기자 ※ 이 기사는 국민희망실천연대와 함께합니다. <관련기사> [고민 Tick 상담 Talk] 1. 중독의 실태 [고민 Tick 상담 Talk] 2. 중독 극복 방법 [고민 Tick 상담 Talk] 3. 중독 극복 사례 중독, 희망을 삼킨다 중독, 우리 교회 다양한 프로그램 실시하며 해결책 제시
  • 2025.03.21 / 오정선 기자

    중독, 우리 교회 다양한 프로그램 실시하며 해결책 제시
  • 상담·예방 통해 내면과 영성 회복 세상에는 다양한 중독이 존재한다. 중독의 대표적인 원인은 스트레스, 공허함, 외로움이 있다. 이러한 감정은 본능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피하려 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즉각적인 만족감을 제공하는 행동을 반복하게 한다. 중독은 단순히 나쁜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고 하나님과의 관계 또한 멀어지게 한다. 중독의 굴레가 깊어질수록 자존감 저하, 사회적 고립, 불안감은 더욱 커진다. 그렇지만 이러한 중독은 예방하고 극복할 수 있다. 우리 교회는 일찍이 중독 예방과 회복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왔다. 복지사업국 상담소는 45년간 아가페 전화 상담소를 운영하며 우울과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해 연평균 6200여 통의 비대면 전화 상담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상담소 내에서 무료공개강좌를 정기적으로 열어 중독 예방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해에는 중독과 우울증 극복을 주제로 총신대 중독재활상담학과 조현섭 교수와 로뎀선교사상담소 한혜성 원장이 강사로 초청 돼 강의했다. 이들은 중독과 우울증을 극복하려면 현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회피하려는 개인의 심리와 문제를 파악해 근본 문제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건강한 습관을 기르기 위해 운동·예술·동아리 활동 등에 참여하고,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은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적 태도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교회학교에서는 지난해 10월 청소년 중독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사춘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멘토링 아카데미를 개최했다. 개별 성향 분석, 진로 계획, 성경적 성교육, 마약 및 중독 예방 교육 등을 진행해 미래 세대를 건강하게 세우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교사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미디어 중독 상담사 양성 과정을 개설해 청소년들을 신앙 안에서 올바른 길로 지도 편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와 함께 우리 교회는 전교인을 대상으로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와 협력해 예방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성시화운동본부는 김지연 약사를 초청해 마약과 중독의 위험성을 알리기도 했다. 교무국교육영성훈련원 영성훈련소는 성경적인 아버지상을 회복하고, 가정 안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찾도록 돕는 ‘파더스드림’, 성경적인 어머니상과 자녀를 신앙 안에서 양육하도록 이끄는 ‘마더스드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며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도록 독려하는 ‘오순절사랑훈련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교회는 다양한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 이 기사는 국민희망실천연대와 함께 합니다. <관련기사> [고민 Tick 상담 Talk] 1. 중독의 실태 [고민 Tick 상담 Talk] 2. 중독 극복 방법 중독, 희망을 삼킨다
  • 2025.02.14 / 금지환 기자

    2025년 설 가정 예배
  •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가정 2025년 새해가 시작되고 첫 명절을 맞이했습니다. 설 명절은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새롭게 시작되는 한 해에 대한 소망을 품는 날입니다. 또한, 가족 간에 서로를 축복하고 교제하는 소중한 날이기도 합니다. 설 명절에 드리는 가정 예배를 통해 우리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1. 하나님이 세우신 우리 가정 시편 127편은 솔로몬의 시로서,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주권자 되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1절에서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귀한 가정입니다. 사람이 세운 것에는 불완전함이 따를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것은 완전합니다(신 32:4). 우리 가정은 영원하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반석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설 명절을 예배로 시작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새 힘을 얻고, 소망 가운데 나아갈 수 있습니다. 1절 후반부는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머무는 성읍, 곧 우리 가족이 생활하는 모든 삶의 터전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가족의 일터, 자녀의 학교나 직장 등 우리가 속한 모든 자리에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이 함께하십니다. 올 한 해에도 우리 가족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이 복 주시는 우리 가정 시편 127편 2절은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야훼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계획했던 일이 평탄하게 진행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쌓이고 밤에도 평안히 잠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안한 잠자리를 허락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도록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평안한 잠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 가족이 낮 동안의 피로를 풀고 쉼을 얻게 해주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로 늦게까지 일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도록 돌봐주시고, 내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새 힘을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면,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넘치는 복을 부어주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 가정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은 말씀에 순종하며 서로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표현하지 않으면 그 마음이 잘 전달되지 않습니다. 특히 가족들도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설 명절에, 먼저 요리와 청소 같은 일들을 함께 도와가며 서로를 향한 사랑을 실천하고 표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위한 작은 사랑의 실천이 하루하루 쌓여서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복된 가정을 만들 것입니다. 또한, 명절은 화해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에 앞서 형제와 먼저 화목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23~24). 혹시 지난날의 일로 인해 마음에 남은 서운한 감정이 있거나 가족에게 미안한 기억이 있다면, 설 명절을 기회로 삼아 오해를 풀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용서하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자매와 화목하며, 자녀에게 믿음의 유산을 전하는 가정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의 가정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나아갈 길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드리고, 온 가족이 한마음이 되어 예배함으로써 하나님께 큰 복을 받고 평안을 누리는 2025년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5.01.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Hello, Israel
    슬픔도 웃음으로 … 해학의 유대민족
  • 이스라엘에는 3월과 4월 사이 니산월이 오기 2주 전에 아주 독특한 절기가 찾아온다.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절기로 부림절이다. 사실 부림절의 이야기는 매우 비장하며 잔혹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 유대민족의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의 서사도 그와 같다. 포로기 시절 제2시민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찾아온 민족 멸절의 위기, 하만이라는 한 사람의 악한 흉계로 인한 위기였다.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에스더라는 여인과 모르드개, 두 사람의 헌신과 목숨을 건 용기 있는 행동 덕분이었다. 성경은 이 절기를 부림, 제비를 뽑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어 부림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부림절 시기에 이스라엘을 방문하면 재미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다양한 부림절 퍼레이드이다. 이 절기엔 이스라엘의 많은 도시마다 각기 다양한 행사들이 벌어진다. 도시는 온갖 캐릭터와 화려함으로 치장한 사람들, 희한한 모습으로 꾸민 이들이 넘쳐난다. 상점마다 가장 행렬과 행사 때 입는 여러 가지 옷들과 소품들을 판매한다. 아이들은 디즈니 캐릭터나 만화 주인공들처럼 꾸미기도 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겁게 재미있는 모습으로 즐긴다. 심지어 종교 유대인들도 이 날만큼은 엄숙함을 내려놓고 다양한 모습으로 치장하며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부림절에는 모두가 원래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꾸미는 것이 풍습이라고 한다. 왜 이런 풍습이 있는 걸까? 여기에는 슬픈 유대인들의 역사가 전해진다. 유대인의 한 전통에 따르면 부림절의 계기가 되었던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감추기 위해서 다른 모습을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유래된 전통이라는 전승이 있다. 또 다른 전승은 유대인들이 중세 유럽 시대를 살던 중 유럽의 사육제와 같은 풍습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사육제는 유럽의 가장 행렬과 같은 축제로서 시민들이 자신들의 신분과 상관없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축제를 즐기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전승도 있다. 이런 전승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 경우 반유대주의적 상황에서 박해 받을 수 있기에 신분을 감추어야 했던 슬픈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자신들만의 해학으로 풀어내며 부림절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정말 해학이 넘치는 이들이다. 유대인의 탈무드는 더욱 해학적이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의 학습경전으로 지혜의 책이라고 불리는 만큼 오랜 유대인들의 정수를 담고 있다. 사실 탈무드의 목적은 토라(유대교 경전인 모세오경)를 가르치고 이해시키기 위한 책이다. 한권이 아닌 십여 권으로 구성된 해설집이자 지혜를 담은 책이다. 그렇다 보니 딱딱하고 경직되어진 성경의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쉽도록 예화를 담아서 쓰게 된 것이다. 탈무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화와 예시로 많은 이들에게 성경의 지혜를 가르쳐 왔다. 그 탈무드가 유대인의 해학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이런 예화가 있다. 한 신사가 마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가고 있었다. 동승한 마차에는 한 유대인이 점심으로 절인 생선을 빵에 끼워서 먹고 있었다. 신사는 가난한 유대인을 골려 주고자 물었다. “유대인들의 머리가 좋은 이유가 그 절인 생선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봅니다!” “네 맞습니다! 저희는 특히 이 머리를 먹어서 더 똑똑한 거지요!” 신사는 문득 정말 그런가 싶어서 물었다. “정말 그 머리를 먹어서 그렇다구요!? 그럼 나도 좀 먹어봅시다!” “5세켈만 주세요!” 신사는 그렇게 생선 머리를 사서 억지로 꾸역꾸역 먹었다. 먹고 나니 냄새도 나고 생각해 보니 머리 하나에 5세켈이나 주고 산 것이 비싼 거 같았다. 신사는 불편함을 드러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당신, 너무 하구만. 고작 생선 머리 하나를 5세켈씩이나 받다니! 그 돈이면 다음 역에서 생선을 두 마리나 살 수 있는 가격이잖소!” 그러자 유대인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거 보세요. 벌써 머리가 좋아지셨네요!” 유대인이 자신을 비꼰 신사를 정중하게 받아 친 이야기이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통해서도 자신들에 대한 비하와 차별을 지혜롭게 받아내는 방법을 유머로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해학이라고 부른다.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 역사 속에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 차별을 당하고 살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성경의 지혜와 여유 그리고 유머로 살아갔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유머와 웃음을 놓치지 않은 이들이라 그런지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 하마스와의 전쟁 시간 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비난과 야유 그리고 비판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부림절을 즐기고 삶의 고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웃는 자가 승리한 자라고 했던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왔을 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활짝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김요셉 목사
  • 2025.04.25 / 김용두 기자

    우호관계에서 적으로 변화되기까지
  • 이스라엘과 이란의 과거와 현재 이스라엘 뉴스에서는 매주 인질들의 석방과 가족의 재회로 인한 감동의 이야기들이 계속 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500여 일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가자에 억류되었던 인질들이 매주 3~4명씩 풀려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구류자들을 계속적으로 교환하고 있다. 이 전쟁의 끝은 어디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금 이 전쟁의 뒷면에 있는 하마스의 배후인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되짚어 보았으면 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휴전 협상과 인질 교환 문제로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중동 정세가 크게 변화하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관계 개선을 이끌었다. 이란은 이러한 변화에 크게 반발했고 이스라엘과 미국 간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는 상황에서 중동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는 이러한 복잡한 배경 속에서 더욱 얽히고 있다. 이란은 핵 개발을 지속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군사적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은 단순한 국가 간의 대립을 넘어 지역 전체의 평화와 안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즉 이전 페르시아 제국 시절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Cyrus the Great)의 지원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 고레스는 유대인의 신앙과 문화를 존중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환을 허락한 인물로 그들의 민족적 및 종교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경의 에스더서에서도 에스더 왕비가 자신의 민족을 구하는 이야기를 통해 이란(페르시아)과 유대민족 간의 긍정적인 관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20세기 중반부터 적대적인 방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이러한 상황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으로의 전환 과정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을 ‘작은 사탄’으로 간주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후 이란 정부는 반이스라엘 무장단체인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지원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기에 이른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란의 핵 개발은 이스라엘의 주요 안보 위협으로 자리 잡았고, 이스라엘은 군사적 공세와 국제 사회의 협력을 통해 이란의 군사적 그리고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전개는 두 나라 간의 불신을 더욱 증대시키며, 중동 전역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는 상호 이해와 존중의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평화의 길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스라엘과 이란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도해야 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두 국가 간의 갈등 해결은 개인의 이해와 화해의 추진이 필요한 중요한 사안이다. 서로의 종교적 차이를 존중하고 각국 지도자에게는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지혜와 용기가 부여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중보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과 이란 두 나라가 서로의 고난을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가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돕기를 소망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관계 회복을 위한 기도는 단순히 두 국가 간의 문제를 넘어서 인류 모두와의 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행위이다. 중동 지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우리 스스로도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행동해야 할 시점이다. 하나님께서 이들 간의 분쟁을 치유하고, 서로를 향한 이해와 화해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을 간구한다. 김요셉 목사
  • 2025.02.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좁은 길로 가는 삶
  • 유대인으로서 예슈아를 믿는 이로 살아간다는 것 현대의 많은 국가들이 이민자들과 본토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면서 다양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굉장히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에는 유대인과 아랍인 그리고 다양한 소수민족들, 베두인족과 드루즈족 등이 살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유대인과 무슬림 그리고 아랍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유대인도 종교인과 세속인으로 나뉘고 종교인도 정통 종교 유대인(하시딤)과 전통적 유대교인(닷띠) 등으로 나뉜다. 또한 유대인은 출신 지역과 배경에 따라서 아쉬케나짐-유럽에서 이주해온 유대인들과 스파라딤-북아프리카 동유럽 등지에서 이주해온 이들로 나뉘고 중동에서 살던 미즈라힘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운데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로 메시아닉 유대인 혹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히브리어로 예슈아)를 메시야로 믿는 유대인이다. 이들은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자랐지만 복음 안에서 예슈아를 유대인의 구원자이자 온 열방의 구원자로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다. 이들을 향해 크리스천 혹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보는 이들이 종종 있다. 혹자는 그들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들이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질문은 오해가 있는 가운데 던져지는 질문이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신앙도 엄밀히 말하면 유대교 바탕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란 새로운 종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 유대교 안에서 구약 안에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된 메시야를 발견했다.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란 종교를 새롭게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후대가 만들어낸 종교적 명칭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기에 개종한 유대인이라고 하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은 개종이 아닌 유대교 안에서 이야기된 메시야를 발견한 유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칭호가 맞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슈아를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결단을 해야만 가능하다. 과거 예배 장소를 테러하고 집으로 폭탄 등을 보내 위협하던 박해는 지금은 없다. 그러나 여전히 믿는 유대인들이 받아야 할 저항과 방해는 더 치밀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다. 더욱이 1세대 믿는 유대인들과 2세대 믿는 유대인들이 가지는 사회적 어려움은 날로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1세대 유대인들은 이미 장성한 가운데 신앙을 가지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2세대 믿는 유대인들은 부모의 영향으로 신앙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그들이 학교에서 혹은 친구들 사이에서 받는 차별적 시선과 몰이해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경우가 많다. 어릴 적부터 받아온 차별과 비판 속에서 자란 유대 신앙인들은 많은 고민과 번민의 시간을 가졌다. 그 누구도 그들의 신앙 고백을 이해하지 못했고 심지어 그들의 정체성이 유대인이 맞는가라는 도전을 받기도 했다. 유대인으로서 태어나 자란 이들에게 예슈아를 믿는다는 이유로 민족적 정체성이 공격을 받는 것을 어린 신앙인들은 감내해야 하고 이겨내야 했다. 참으로 좁은 길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절기를 지키고 율법적 계율에 대해서 유대인으로서 지켜내고 있는 이들을 향해 율법적이라거나 유대교에 얽매였다는 비판을 들을 때마다 이들은 어찌해야 할지 모를 고민에 빠져들어 간다. 마태복음 10장 2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젊고 어린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해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판과 미움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어떤 어려움에도 예슈아를 믿고 따르는 일에 쉬지 않고 달려오고 있다. 우리는 이제 비판과 비난을 벗고 이 믿음의 여정, 좁은 길의 여정을 달리고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고 격려해야 한다. 가자 전쟁이 휴전을 맞이한 이때 이스라엘과 가자의 회복과 복음의 전진을 감당할 이들이 바로 이 땅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예슈아의 복음을 들고 나갈 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자 한다. 김요셉 목사
  • 2025.01.24 / 김용두 기자

    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II. 죄론(Hamartiology) - 4
  •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위한 기준 제시
    죄와 율법 죄론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죄와 율법의 관계이다. 죄와 율법의 관계에 분명한 명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죄의 선재성(pre-existence)이다. 죄가 율법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율법은 광야시대에 성문화 되었다. 성문화 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예를 들면 십계명이 생기고 나서 사람들이 열 가지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유대 공동체 내에 우상숭배, 살인, 간음, 절도, 위증 등과 같은 죄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것에 대한 죄 의식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죄들과 그 죄에 대한 형벌이 모세의 율법을 통해 문자화 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십계명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출애굽기 20장 22절~23장 33절로 대표 되는 계약법전이 있고, 레위기 17~26장의 성결법전이 있다. 이것을 종합하고 보완한 신명기법전(신 12~26장)이 있다. 이 외에 율법의 행동지침과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장로의 유전과 규례가 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셨던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과 규례이다. 1. 율법의 본질 바울은 율법의 한계와 은혜의 법 사이의 긴장관계를 그의 서신 거의 모든 곳에서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바울은 회심 이전 그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서 목숨을 다해 신봉해 왔던 율법에 대한 무한 신뢰를 파기하고 율법을 ‘초등학문’(골 2:20)과 ‘초등교사’(갈 3:24)로 평가절하시킨다. 바울은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convenantal nomism)를 포기하고 은혜의 법에 기초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과 윤리, 도덕적 가치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인들이 버려도 되는 것 혹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본질 때문이다. 율법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된 것이다. 율법의 제사법은 인간의 범죄와 정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죄를 가지고 그 앞에 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성결법전의 내용과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율법의 옹호자는 아니다. 그러나 파괴주의자도 아니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a)라는 말로 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항변하고 있다.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죄성(sinful nature)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율법의 한계성 바울의 율법에 대한 의도는 율법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 그 자체만으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거나 의롭게 할 수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당위성(롬 1:17)과 율법의 한계성을 역설하고 있다. 율법은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는 기능은 있으나 죄를 사하는 권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율법)을 대조시키고 있다(롬 8:2). 히브리서 또한 율법의 불완전성과 대제사장의 유한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3. 율법의 목적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분별한 반율법주의(antinomism)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반율법주의를 넘어 극단적 율법파괴주의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목적과 효용가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인간들이 그것을 다 준수할 것이라고 기대하셨을까? 물론 아니다.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율법이 없다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2) 율법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한 목적이 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도덕적 잣대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유용한 가치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8.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I. 죄론(Hamartiology) - 3 
  • 성경은 죄와 인간의 필연적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아무도 죄를 피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더 나아가 죄의 삯(wage, 급여, 보수)은 사망이라고 단언하고 있다(롬 6:23). 인간의 수고와 이마의 땀으로 얻게 되는 급여는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선고이다. 한글성경에서는 복수와 단수를 구별하지 않고 ‘삯’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본에서는 복수형을 써서 ‘옵소니아’, 즉 ‘급여들’, ‘보수들’이라고 복수형을 쓰고 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죄의 종류와 가지 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부과될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4) 죄에 대한 형벌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죄에 대한 형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이해했다. 그는 인간의 창조를 세 단계로 이해했다. 첫째, 인간은 땅의 먼지(KJV, dust)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 먼지로 지음을 받은 육체에 네페쉬(혼, 생명)를 가지게 되었으며, 셋째,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이 분리되는 죽음 맞게 되었다. 이것은 곧 영적인 죽음,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을 낳게 된다. (1) 영적인 죽음 죄는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킨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죄를 허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성으로 인해 죄를 품은 인간은 그의 임재 가운데 공존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이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영혼은 생명력을 상실했으며 더 이상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적인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상태가 되었다(창 6:5). 이것이 죄의 형벌로서의 영적인 죽음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죄를 깨끗하게 할 수는 없다(롬 3:20; 7:7). 이런 영적인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2) 삶의 고통 타락 이후 고통은 인간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인간의 삶은 쉽게 무너지고 각종 질병의 포로가 되었으며 불안과 고통을 늘 겪게 되었다. 풍족했던 에덴동산의 삶은 사라졌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더해 졌으며 인간은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창 3:16, 19). 창조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복은(창 1:28) 인간의 타락 이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뜻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인간의 삶 곳곳에 돋아나는 것이었다(창 3:18). (3) 육체적인 죽음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최초 인간 아담이 죽음을 전제로 한 유한한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죽음을 전제로 창조하셨다는 근거는 창조역사 속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주후 418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첫 사람 아담이 죽을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므로, 아담이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상관없이 아담이 죽은 것은 죄의 삯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육체적인 죽음, 즉 흙으로 창조된 인간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벌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언급되었다(창 3:19). 육체적인 죽음은 영적인 죽음과 함께 불순종한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인 것이다. 이 육체적인 죽음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4) 영원한 죽음 유물론자들은 죽음을 존재의 소멸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유물론적 사관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죽음은 삶의 종결, 혹은 죽음의 완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한 죽음은 벗어 날 수 없는 고통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말한다.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 지옥편에 보면 지옥문에 쓰여 있는 글귀가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마치 이 표현처럼, 영원한 죽음은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즉 죽음의 소망조차 품을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1:26). 이 말씀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통로이며 육체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것에 대한 약속이다. 죄는 형벌을 동반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형벌은 영생의 기쁨과 환희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7.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I. 죄론(Hamartiology) - 2
  • 현대의 논쟁
    타락한 이후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동양에서는 순자(荀子)가 주장한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는 성악설(性惡說)과 맹자(孟子)가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性善說)이 팽배하게 대립하고 있다. 성경은 이 두 학설 중 성선설에 가깝다. 전도서 7장 29절은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힛솨본’인데 영어 성경(NKJV)은 ‘계략, 음모’(scheme)로 번역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이후 수많은 악한 꾀를 내는 존재가 됐다는 의미이다. 죄론에 대한 현대적 논쟁은 죄의 본질과 인식, 죄의 본편성과 전가성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원죄론에 대한 논쟁과 죄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죄의 본질 죄는 단지 인간이 행하는 그 무엇일 뿐만 아니라 죄가 인간 안에서 행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죄는 단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너머로 오기도 한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아담과 하와의 근원적 죄는 인간 내면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탄이라는 외부적 유혹에서부터 시작됐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함으로서 죄에 빠졌다. 죄에 대한 웨스트민스터의 대요리문답은 ‘죄란 하나님께서 이성적인 피조물에게 삶의 기준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치의 결여 또는 위반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2) 죄의 인식 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실존적 일치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떨어진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목표점으로 지향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 살며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자신도 철저하게 부패한 인간이 죄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죄를 인식 할 수 있을까? 선은 악이 있을 때 선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악은 선이 있을 때 악을 인식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칼 바르트(Karl Barth)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인이 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죄를 인간을 감금하는 ‘감옥’으로 생각했다. 이 감옥은 안에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밖에서만 열 수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만 그 열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없다면 죄를 인식할 수도 없고 죄에서 나올 수도 없다는 말이다. 3) 죄성(the nature of sin)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죄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내면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기회가 주어지면 죄를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죄의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것은 환경과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신약성경은 죄(Sin)와 죄들(sins)을 구별 짓고 있는데, 보통 전자는 죄의 본성을 말하고 후자는 죄성의 결과 및 표현들을 의미한다. 죄의 속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나 죄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죄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기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1) 죄의 보편성 성경은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선언한다(왕상 8:46; 시 143:2; 잠 20:9; 전 7:20; 롬 3:10~12; 롬 3:23; 요일 1:8).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욕구라고 할 수도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예외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피조 세계의 보편적이고 전 우주적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롬 5:19). (2) 죄의 전가성(the imputation of sin) 구약시대의 제사를 보면 죄인은 제사장에게 번제물을 가져가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번제물에게 전가하기 위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했다(레 1:4). 이 행위를 통해 죄인의 죄가 희생 제물에게 전가 되었다. 번제물은 죄인의 죄를 위해 희생되었고 죄인은 죄로부터 놓임을 받았다. 죄는 이런 전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죄의 전가성은 제물에게로 국한된다는 점이다. 나이든 부모가 자식의 죄를 대신해서 처벌을 받겠다고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듯이 성경에서 죄는 사람을 포함한 어떤 것에도 전가되지 않으며 오직 제물에게만 전가된다. 죄의 전가에 대한 제한적 적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게 볼 수 있는데 구약에서는 오직 희생제물에게만 적용되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5.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생명과학 이야기
    개구리는 어릴 때 올챙이로 살아간다 
  • 대부분의 개구리 종류와 도롱뇽은 서식하는 환경이 물과 물 밖의 육지라는 생태환경에서 동시에 살아가는 동물이라서 양서류(兩棲類)라고 한다. 개구리가 낳은 알에서 성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모습이 매우 다르다. 대부분 양서류는 곤충이 알에서 성장해서 성충으로 변태(metamorphosis)하는 과정처럼 외모의 변화가 크다. 알에서 갓 부화한 모습은 몸통과 꼬리만 있어 보인다. 물고기처럼 아가미가 있어서 물속에서만 살아야 한다. 큰 몸통과 꼬리를 좌우로 흔들어 움직이며 전진하는 모습을 보면 사뭇 우스꽝스럽다. 나중에 수영하는 유선형 성체를 보며 육지에서 점프하는 개구리나 의젓하게 앉아 있는 모습과 비교가 된다. 과거에 자신의 초라했던 처지를 모르고 거드름 피우는 이들에게 ‘개구리가 올챙이 때 생각하지 못 한다’라는 핀잔을 받는 일은 개구리 어린 시절 올챙이 때를 잊었다는 의미일거다. 한편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개구리는 올챙이 때와 같은 생활을 하면 안 되고 성체가 된 이후는 성숙한 삶이 되어야 한다.(고전13:11) 개구리는 봄이 되면 얇은 호수나 연못에 산란을 한다. 자연 상태에서 부화하여 작은 올챙이가 된다. 이때는 물속에 식물성 플랑크톤이나 조류(藻類, algae)를 먹으며 나중에는 동물성 플랑크톤을 주로 먹는다. 시간이 지나면 몸통에서 뒷다리가 먼저 나오고 나중에 앞다리가 나온다. 성장과정을 볼 때 서식환경이 올챙이 때는 살던 수중에서 육지로 옮겨가고 호흡기는 아가미에서 양서류 특유의 폐로 호흡한다. 필요한 부분은 축축한 피부점막을 통해서 산소를 흡수한다. 먹이는 수중 식물류에서 구하다가 육지의 동물성 곤충으로 바뀐다. 여기서 흥미로운 일은 올챙이 꼬리는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없어진다. 그 이유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영양분을 얻기 때문이다. 꼬리를 이루고 있는 세포가 스스로 죽어 몸으로 소화됨으로 개구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영양분을 공급하는 창고 역할을 한다. 일종의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세포로 이루어진 꼬리이다. 신앙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달라져야 한다. 세상을 향해 진정성 있는 경건한 믿음생활의 본을 보여야 한다. 과거에는 세속에서만 살 수 밖에 없었던 삶에서 새로 거듭난 인생으로 사는 일이다.(요3:3)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 교회, 이학박사)
  • 2025.04.29 / 이미나 기자

    바닷가에 미물인 따개비
  • 바 바닷가에서 바위나 방파제 혹은 오래된 해양구조물의 하부가 바닷물이 닿는 부위를 보면 작은 조개 같은데 가운데가 함몰된 듯 빈 분화구가 있거나 산(山)처럼 무리를 지어 보이는 따개비(Barnacle)를 볼 수 있다(사진). 이들은 소라나 조개, 굴 표면과 살아 있는 고래의 피부나 거북이 등껍질에도 군집(群集)을 이룬다. 높이 파도치는 물리적 충격에도 강력한 접착력으로 비록 껍질 일부가 깨질지라도 견고하게 붙어 있다. 언뜻 보면 따개비는 조개나 소라처럼 단단하게 석회화된 껍질이 있어 패각류(貝殼類)의 일종으로 보이지만 엄연히 새우나 게처럼 갑각류에 더 가까운 종에 속한다. 암수가 한 몸으로 자웅동체이며 패각을 가진 만각류(蔓脚類 Cirripedia)이다. 생활사를 보면 알에서 부화 된 유생(幼生)이 갑각류처럼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며 이동하는데 이때 모습은 따개비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다만 성체로 성장하면서 정착하기 위해 강력한 접착제를 분비하면서 지지대상을 찾아 붙어살면 그때 따개비일 줄 알게 된다. 비록 한곳에 평생 고착된 생활을 하지만 일렁이는 바닷물에서 플랑크톤과 유기물을 걸러 먹고 산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곳이라도 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 썰물일 때는 바닷물 밖으로 몸이 장시간 노출되면 하늘로 향해 있는 출입구를 꼭 닫아 뜨거운 햇볕과 건조한 환경에도 수분 이탈을 막을 수 있는 구조이다. 심지어 오랜 기간 바닷물 밖에 있어도 죽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이 있다. 한편 아무 곳이나 가리지 않고 부착하는 따개비는 선박에게 심각한 골칫거리이다. 항해하는 배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무게를 그만큼 증가시켜 연비를 떨어뜨리는 귀찮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바닷물에 잠기는 하부에 따개비 등 착생 생물을 떼어 내고 독성 페인트를 발라 부식을 막고 이들이 붙지 않도록 한다. 과거에는 배를 육지로 올려 표면에 붙은 따개비를 도구로 강제로 떼어 내거나 약한 불에 그슬려 제거하기도 했다. 고유한 생태학적 특징으로 따개비는 해양 생태계의 먹이사슬 일부로 지나치게 많은 유기물질을 걸러내어 수질 정화기능을 한다. 또한 작은 해양 생물이 살 수 있도록 서식 환경을 안전적으로 만들어주며 일부 조류(鳥類)의 먹이가 된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자세히 보면 비록 따개비처럼 하찮은 존재이며 때로는 성가신 대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나름대로 그 안에 작은 질서가 있고 주어진 선(good) 기능의 역할을 한다. 자연생태계를 사람의 기준으로 편익(便益)만을 생각하는 평가가 전부가 아닐 수 있다.(사 55:8~11) 사진: 홍가리비(조개)에 붙어 있는 따개비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5.03.28 / 이미나 기자

    썩은 과일의 전염성  
  • 요즘 화두는 과일이 썩은 경우 그 부위만 도려내고 먹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다. 물론 대부분이 썩었다면 미련 없이 버려야 하겠지만 일부만 썩었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전문가들은 일부만 썩었어도 아낌없이 버리라고 조언한다. 이는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이미 주변으로 침입해서 부패를 일으킨 세균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썩은 부위를 도려내고 먹었을 때 씁쓸한 맛이나 이상한 냄새가 나는 일을 경험했을 것이다. 비록 작은 부분이지만 상한 음식물처럼 부패균은 인체에 유해하다. 대부분의 과일은 성숙한 후에는 시들거나 물러지면서 약한 부위부터 썩기 시작한다. 이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대부분 생물이 그렇듯 후패(朽敗)해지는 과정이다.(고후 4:16) 동일한 조건인데 다른 과일 보다 일찍 썩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 진딧물이나 노린재 등 벌레에게 흡입을 당한 곳이 부패시키는 세균이나 곰팡이의 주요 공격 부위이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썩은 부위가 넓어지면서 악취가 나고 변색과 함께 주름지고 함몰된다(사진). 특별히 껍질이 얇고 물이 많은 과일 일수록 작은 흠집만 있어도 그 주변에 있어 부패를 유발하는 각종 미생물에게 기회를 준다. 처음 과일상자를 열면 외상(外傷) 흔적이 있거나 썩은 과일을 우선 찾아내야 한다. 장기간 보관하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과일에서 흔히 발견된다. 이들 과일은 좀 더 싸게 팔거나 덤으로 주기도 한다. 겉으로 표시나지 않았지만 절개해 보면 속부터 썩은 과일이 있는데 전문가도 찾기 내기 어렵다. 만일 썩은 과일을 방치하면 옆에 있는 과일까지도 썩게 하므로 빨리 골라내야 한다. 부패균은 다른 과일로 번지는 전염성이 있어 시간이 경과하면 같이 있는 다른 과일도 썩게 한다. 과일이 썩는 것은 생산자와 유통업체에게 심각한 손해를 끼치는 골칫거리이다. 과일을 즐겨 먹는 소비자도 예외는 아니다. 일반 곡류와 달라서 과일은 재배와 수확은 물론이고 오랜 기간 저장이 필요할 때 썩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요즘 각종 이단들이 거룩한 신앙공동체 안에 들어와 교묘한 교리를 이용하여 틈만 보이면 유혹한다. 교회는 바른 믿음으로 신자를 양육하며 마음에 어둠의 영이 드리우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엡 6:12) 그러므로 항상 깨어있어 거짓 교사인 미혹의 영으로부터 보호하고 돌봐야 한다.(딤전 4:1)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5.02.21 / 이미나 기자

    성경 Think! 인생 Thank!
     시간을 건너온 인사 … “폭싹 속았수다”
  • 2025년 청년과 140년 전 선교사의 대화 그 정신 이어 우리도 수고해야 4월 바람에 춤추는 유채꽃밭에 A청년은 홀로 앉아 있었다. 봄은 왔지만 A청년의 마음은 아직 겨울이었다. 부활절이 다가오는데도 삶에는 부활의 기쁨보다 반복되는 고민과 현실의 무게가 짓눌러 있었다. 그는 기도하며 되뇌었다. “주님, 저에게도 부활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 눈을 감고 기도하던 A청년에게 어떤 바람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눈을 뜨니 청년 앞에 낯선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수염을 기른 얼굴, 낡은 가죽 성경책, 그리고 따스한 눈빛. 그는 다정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입니다. 140년 전 조선에 온 선교사예요. 당신의 기도를 듣고 왔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처럼 펼쳐졌다. “1885년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확신 하나로 이 땅에 발을 디뎠어요.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와 나는 인천 제물포에 내렸고, 이 낯선 땅 조선을 사랑하기로 결심했죠. 언어도 문화도 모르던 우리가 붙든 건 오직 한 가지였어요. ‘하나님은 이 조선도 사랑하신다’는 진리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파송되어 조선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에 대한 경계가 극심했고 기독교는 이단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조선어를 배우고 성경을 번역하며 고아원과 교회, 학교 설립에 매진했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경신학교’도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는 선교를 단지 복음 전파가 아닌 ‘전인적 인간 회복’으로 실천했다. 조선에 사랑을 피우다 그는 계속 말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이 영적으로 불모지였던 조선에 복음을 전했어요. 철저한 신분제 속에서 양반과 노비로 살던 백성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복음은 해방의 기쁨이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교육의 기회조차 없었는데 우리는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어요. 위험한 위생 상태와 각종 병에 노출된 백성들에게 서양의술을 전하고 병원을 세워 건강한 삶을 돕고자 했습니다.” “그때 제 눈앞에는 새로운 조선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사랑과 화목, 협동의 기독교 정신으로 가르치는 학교들, 자비량으로 운영되는 병원들, 고통당하는 이들을 섬기고 죽어가는 자들에게 빛과 기쁨을 주는 교회와 기관들이 세워질 것을 꿈꾸었습니다. 이제 보니 우리가 꿈꾸었던 것보다 더 크게 이루어졌더군요.” 나의 수고도 의미 있을까요? A청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교사님, 요즘 세상은 참 혼란스러워요. 뭘 위해 살아야 할지 어떻게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언더우드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복음은 시대를 가리지 않아요. 예수님은 그때도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가셨고, 지금도 상처 입은 청년들에게 다가가고 계시죠.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을 사랑하시고 당신도 사랑하십니다.” A청년은 힘겹게 이어 말했다. “저는 요즘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힘들어요. 그래도 믿음의 사람처럼 살려고 헌혈도 하고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말씀을 보내고 독거 어르신께 전화도 드려요. 그런데… 이런 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요?” 언더우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을 기억하나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당신이 뿌린 작고 보잘것없는 수고가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빛이 되며 위로가 되고 부활이 될 거예요. 우리도 처음엔 작은 교회 하나로 시작했답니다.” 다시 피어나는 부활의 계절 A청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즘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인기예요. 사람들은 ‘속았다’는 뜻으로 알기도 하지만 사실은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제주 방언이에요.” 언더우드는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운 말이군요. 내 인생이 ‘폭싹 속았수다’라고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 기꺼이 드린 삶이었다는 뜻이겠지요.” 햇살 아래에서 나눈 대화는 마치 기도 같았고 묵상 같았다. 언더우드는 시간의 틈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여전히 A청년의 마음에 맴돌고 있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청년이여 당신도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A청년은 유채꽃밭 한가운데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님… 저도 누군가에게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 Q1. 당신은 누구에게 “폭싹 속았수다”라고 말하고 싶은가요? Q2. 부활절을 맞아 당신이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수고’는 무엇인가요? Q3.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믿음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04.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신앙의 골든 아워 … 지금이 기회이다 
  • 자녀 스스로 고민하고 탐구하는 과정 지원해야 즐거운 예배 열어 주어야 A집사는 설날을 맞아 남편과 자녀들을 데리고 시댁에 방문했다. 시어머니는 가족 모두 모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한 가지 소원을 말했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니? 다 같이 가정예배를 드리면 좋겠구나.”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은 인상을 찌푸렸고 아이들은 귀찮다며 집에 가자고 투덜댔다. A집사는 며느리이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거절하기가 어려웠고 남편과 아이들을 설득했다. 마지못해 동의한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려는 순간 A집사는 걱정이 밀려왔다. ‘가뜩이나 기독교에 부정적인데, 가정예배를 드린 후 더 싫어하면 어떡하지?’ 신앙의 전수는 삶으로 왜 모태신앙으로 자란 자녀들이 예배를 싫어하고 교회를 떠날까? A집사의 남편은 어릴 적부터 강압적인 어머니 밑에서 교회를 다녔다.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옆집 아이와 비교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폭언과 체벌을 일삼았다. 교회에서는 누구보다 친절한 모습을 보이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는 차갑고 비난을 퍼붓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결국 성인이 되면서 교회를 떠났다. 2024년 12월 발표한 <목회데이터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어른이 된 후에도 교회를 다니겠느냐”라는 질문에 청소년 3명 중 1명이 “아니오”라고 답했다. 많은 청소년은 부모와 교회가 기독교에 대해 입으로 떠드는 것에 지쳐 있다. 부모의 신앙과 실제 삶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실망하고, 강압적인 신앙 전수가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신앙은 말이 아닌 삶으로 전해져야 한다(신 6:7). 신앙의 골든 아워 넷플릭스에 방영중인 <중증외상센터>는 이국종 교수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다. 한 남성이 대형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고 긴급 출동한 구급대원들은 그의 심각한 상태를 확인했다. 환자가 외상센터로 옮겨진 후 의료진은 생존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지만 팀장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아직 살아있다”라고 말하며 수술을 지시했다. 의료 현장에서 ‘골든 아워’(Golden Hour)란 환자의 생사가 결정되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이 시간을 놓치면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없다. 지금 우리의 신앙도 그렇다.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이어질지 아니면 단절될지 결정되는 신앙의 골든 아워 속에 있다. 지금이야말로 자녀들과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청교도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가정예배를 통해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정예배는 신앙을 이어가는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다. 예배는 즐거워야 오늘날의 자녀들은 유튜브 쇼츠와 틱톡 같은 짧은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세대다. 긴 시간을 집중하기 어려워 이들에게 기존의 긴 예배 형식은 효과적이지 않다. 예배 형식이 변화해야 한다. 1. 짧고 집중도 높은 예배 - 처음에는 무조건 예배 시간을 짧게 구성해야 한다. 2. 자녀 중심 예배 - 부모가 일방적으로 설교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녀가 직접 사회를 보고, 말씀을 전하는 형식도 괜찮다. 3. 다양한 예배 형식 - 전통적인 신앙고백→찬송→기도→말씀→기도의 형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MBC <질문들>처럼 자녀가 하나님께 던지고 싶은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부모와 함께 찾아가는 방식도 가능하다. 부모와 자녀의 역할을 바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도 신선하다. 청소년기는 신앙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떠나는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에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고 탐구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신앙을 ‘재미없는 의무’로 만들기보다 즐겁고 흥미로운 경험으로 만들어야 한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 지금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골든 아워이다. 가정예배를 통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실천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삶으로 신앙을 보여주기 -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신앙을 전해야 한다. 2. 질문을 허용하기 - 자녀가 신앙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3. 직접 경험하게 하기 - 신앙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해야 한다. 4. 기도로 지켜주기 - 무엇보다 성령께서 자녀를 만지시고 도우실 것을 믿어야 한다. “너는 마땅히 그들에게 가르칠 것이며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신 6:8). Think! Thank! Q1. 당신은 자녀들이 왜 가정예배를 드리기 싫어한다고 생각하나요? Q2. 자녀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예배 형식은 무엇일까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02.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더닝 크루거 효과와 신앙의 겸손
  • 나를 모르는 착각, 과소·과대평가 나를 아시는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히 한국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9월 한국인이 좋아하는 프로그램> 1위(5.2%)는 넷플릭스에서 방영 중인 ‘흑백요리사’였다. 이 프로그램은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셰프 ‘백수저’들과 맛 하나는 최고라는 재야의 고수 ‘흑수저’들간의 요리 경쟁을 다루었다. 요리사들이 서로 상대방과 경쟁하며 심사위원의 평을 듣고 반응하는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더닝 크루거 효과(요리사편) “저는 마늘을 넣지 않았고, 맛○○님이 저보다 요리를 잘했다”(최현석), “떨어질 수도 있죠, 네 언제 가도 괜찮아요”(최강록), “음식은 무궁무진해요 조금 더 생각을 여세요”(백종원), “실패해도 괜찮아요, 다시 도전하면 되니까”(안성재), “10년 동안 되게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달려왔다 생각했는데, 덜어냄의 미학을 몰랐다는 걸 너무 크게 깨달았어요”(장사 천재), “제 경쟁자는 저 자신이죠”(에드워드 리). 경험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더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이 실제보다 뛰어나다고 느끼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보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 Kruger effect)라고 한다. 이 효과를 그래프로 설명하면 네 가지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기술이나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믿는 ‘우매함의 봉우리’다. 흑백요리사의 첫 경연에서 많은 참가자들은 자신이 요리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간 맞추기나 채소 익히기와 같은 기본적인 기술조차 부족해 탈락하게 된다. 둘째, 요리경연이 진행되면서 복잡성과 어려움을 깨닫고 자신감이 급격히 떨어지는 ‘절망의 계곡’이다. 이때 참가자들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며 좌절감을 느끼고 자신의 부족함을 실감하게 된다. 셋째, 어려움을 극복하며 점차 자신과 능력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깨달음의 비탈길’이다.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은 심사위원의 피드백과 다른 사람의 요리를 통해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넷째, 성장한 결과로 지식과 능력을 인정하고 겸손해지며 안정적인 자신감을 갖게 되는 단계인 ‘지속가능성의 고원’이다. 이제 참가자는 요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면서도 과거의 실수를 기억하고, 겸손하게 자신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 더닝 크루거 효과(신앙인편) 기독교에 막 입문한 신앙 초보자는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석하며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배우게 된다. 몇 가지 중요한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기초적인 신앙 원리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이제 기독교에 대해 거의 다 알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의 깊이나 성경 전체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신앙적 성숙도나 성경 지식에 대해 과대평가하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더 깊이 신앙을 배우게 되면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것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에서 초기 신앙 때의 무지를 깨닫고 겸손해지게 된다. 베드로를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신만만하게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라고 자신 있게 선언했다(마 26:33). 그는 자신의 신앙적 충성심을 과대평가하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체포되던 날 밤, 베드로는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된다. 이 사건은 그가 자신을 과대평가했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었다. 베드로는 이 실패 후 회개하고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졌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용서를 받고 사도로서의 사명을 다하게 되었으며, 성령이 임한 후에는 오순절 설교를 통해 3000명이 회심하는 역사를 이루었다(행 2장).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신앙생활에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더닝 크루거 효과를 경계하고, 날마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신앙의 성숙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우리가 더욱 겸손히 하나님 앞에 서는 길이기도 하다. Think! Thank! ---------------- Q1. 당신은 당신의 신앙과 지식을 얼마나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나요? Q2. 당신은 베드로처럼 실패를 통해 배우고 겸손해진 경험이 있나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4.11.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고전(古典)에서 길을 찾다
    E.M. 바운즈 '응답기도'
  • 강력하고 단순하고 끈질긴 기도가 응답받는다 어느 건축사의 정의에 따르면 건축은 ‘지극히 일상적인 즐겁고 보람된 생활의 그릇’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신앙의 집을 지을 때 즐겁지 않은 게 있다면 ‘기도하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극히 일상적이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게 ‘응답’의 문제다. 응답을 위한 그릇도 준비되어 있다고 믿지만 여전히 인내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오늘 소개하는 기도의 고전 ‘응답 기도’를 통해 그 고민을 선지자 엘리야처럼 시원하게 해결해 보자. ‘기도’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어지는 인물이 이엠 바운즈(Edward Mckendree Bounds)이다. 그는 ‘기도의 사람’, ‘기도의 선지자’로 불린다. 책 ‘응답 기도’는 펜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무릎으로 썼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는 항상 새벽 4시에 일어나 3시간 동안 무릎 꿇었던 기도의 용사였기 때문이다. 기도의 사람 바운즈는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심장에 기도의 뜨거운 불을 붙인다. 224페이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에는 의지, 생각, 감정, 양심 그리고 지성이 모두 조화를 이루어 백열처럼 뜨겁게 협력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기도를 오래, 강력하게 하려면 기도자의 몸이 최고의 컨디션에서 협력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하늘로부터 놀라운 초자연적인 응답이 임할 것이다.’ 보통 신앙인이라면 기도를 하면서도 문제의 여리고 앞에 숨이 턱하고 막힐 때가 있다. 바운즈는 쎈 언니들의 직설법으로 직진한다. “힘없는 기도로는 응답을 받거나 역경을 극복하거나 온전하고 놀라운 승리를 얻을 수 없다”. 그 예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언급한다. 에스라의 기도는 강력하고 단순하고 끈질겼기에 종교개혁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느헤미야는 한번 기도하고 잊어버린 게 아니라, 또한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기도를 쉬는 게 아니라 끈질기고 강한 기도를 이어갔다. 인구감소 시대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신앙적 가정이며 기도하는 부모다. 경건생활은 가정에서부터 무너지기 쉽기 때문이다. 기도의 용사 사무엘 같은 사람은, 기도의 용사 한나 같은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법이다. 한나의 기도응답이 사무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하고 단순하고 끈질긴 기도 때문이다. 바운즈는 이 책에서 우리를 성경 속 위대한 기도의 인물들에게로 인도한다. 우리는 이 책을 탐독함으로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 응답을 배울 수 있다. 지극히 일상적인 일임을 깨닫고 혼자 미소짓는 모습은 덤이다. 임 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 2025.04.11 / 이미나 기자

    새뮤얼 러더퍼드 『러더퍼드의 편지』
  • 유배지에서 보내는 믿음의 글들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역대급이다. 설교자 찰스 스펄전은 “신비롭고 경외심을 일으키며 초인적인 어떤 것이 러더퍼드의 편지에 있다”고 평했다. 청교도 목사인 리처드 백스터는 “성경을 제외하고 세상에 이러한 책을 본 적이 없다”고 찬탄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편지들을 발췌하여 자신의 ‘기독교 총서(Christian Library)’에 넣어 출판하기도 했다. 중국 선교사였던 허드슨 테일러도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새뮤얼 러더퍼드는 목사, 신학자, 세인트앤드루스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러더퍼더의 편지’는 1636년부터 2년 동안 애버딘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성도들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200편의 편지가 소개되고 있다. 편지체라서 옆에서 읽어주는 듯 쉽게 읽힌다. 쉬운 만큼 굉장히 솔직한 책이다. 편지에서 러더퍼드는 딸을 잃은 한 여성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그 아이의 때가 왔고 당신의 임대계약이 끝이 난 것을 볼 때에 제가 확신하기로는 가난한 농부가 임대기간이 끝나서 주인이 자기 땅을 도로 찾는 것을 불평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것을 정한 날짜에 가져간다고 당신의 크신 상전께 시비를 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 장례식장에 가서 딸을 먼저 보낸 부모에게 이런 말씀을 전한다면 육개장이 코로 들어갈 일이다. 러더퍼드의 편지는 굉장히 직설적이고 직관적이다. 한편으론 오해하고 시험에 들 수도 있다. 까딱 잘못하면 손가락 사이로 쭈꾸미 미끄러지듯 은혜를 놓칠수도 있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성경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했기에 러더퍼드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편지를 썼을 것이다. 병들고 영적침체상태에 있는 어느 성도에게는 이런 말도 썼다. “부인, 지금 당신은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러더퍼드의 편지는 지금 현재의 상황보다는 다가올 미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개인의 고통과 아픔을 위로하므로 진정한 평안 가운데 있을 수 있도록 인도한다. 편지 곳곳에 ‘확신’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영혼에 대한 러더퍼드의 열정과 사랑이다. 그의 편지가 다정하고 사랑스러우면서도 깊이가 있는 이유다. 책을 읽어가다보면 아름다운 언어들에서 운문(韻文)의 리듬이 느껴지고, 자유롭게 내용을 이어가는 산문(散文)의 전개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한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러더퍼드의 세심함이 마치 잔잔한 서해바다 노을을 바라보듯 행복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이에게 손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이 책이 주는 보너스를 놓치지 마시길. 임 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 2025.03.14 / 이미나 기자

    『기독교 고전 교육을 말하다』 더글라스 윌슨
  • 교육의 회복, 성경적 세계관으로부터 ‘기독교 고전’을 검색했을 때 눈에 띄는 책이 있다. ‘기독교 고전교육으로 모색하는 현대 교육의 회복’이라는 부제, 교사와 부모, 학생, 교육 관계자 모두가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고전 관련 글을 기고할 때면 습관적으로 참고했던 책이기도 하다. ‘기독교 고전 교육을 말하다’는 다양한 강의를 정리하고 요약한 종합선물세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고전교육 학교를 시작하거나, 자녀에게 적합한 고전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어보겠다는 도전을 받기 바란다. 본서는 세 개의 ‘부’(part)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적 세계관을 주제로 하는 1부는 복음을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 것에 관한 실제적 조언과, 그 적용 사례를 성경적 수학 교육으로 풀어준다. 고전 지성을 다룬 2부에서는 성경적 근거를 들어 언어와 문학 역사 수업에 필요한 사고의 본질을 살피며, 논리와 변증의 근거와 목적과 방법을 연결한다. 또한 우리교육을 혼돈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는 차별금지법(평등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단계별 고전교육 접근법을 설명하며, 정확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적용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3부는 학교에서의 실제 교육 과정과 정책, 학교 설립 과정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20강에 달하는 강의를 촘촘히 읽다보면 지금이 바로 우리 삶의 영역에서 ‘무너진 성벽을 수축할’ 때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이 그 모든 과업을 완수할 강력한 도구가 됨을 강력히 추천한다. 밈 제너레이션(Meme Generation)이라고도 불리는 Z세대가 교회 안에도 많다. 그들은 디지털 네이티브로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세대이다. 동시에 그들은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그들의 관심을 제대로 채워줄 영적인 콘텐츠는 반드시 기독교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이 한 권이면 교회뿐 아니라 자녀 가정교육에 있어서도 기독교적 커리큘럼을 만들 수 있다. 교사와 부모들에겐 값진 도전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탐 스펜서(Tom Spencer)는 7강에서 고전교육 구조에 관한 기본 원칙으로 ‘트리비움’(Trivium)을 제시한다. 트리비움은 ‘세 가지 길’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단어이다. ‘트리비움’이 뭘까 궁금해서라도 꼭 읽자 이 책. 임 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 2025.02.07 / 이미나 기자

    고민 Tick, 상담 Talk
    삶이라는 믿음의 경주 중 ‘외상 후 성장’을 위해 
  • 외상 후 신체적, 심리적 지원과 더불어 영적인 돌봄 필요 환난 속에서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바라봐야 우리나라 사상 최악의 경북 북동부 산불 피해로 임시시설에서 생활하는 이재민들에게 사랑의 손길이 이어지고 있다. 경북도는 이재민에게 의료, 심리 지원, 복약 지도 및 의약품 전달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대학병원 등 25개 기관과 협력해 267명(의사 134명, 간호사 84명, 기타 49명)을 투입했다고 6일 밝혔다. 안동시는 심리상담 서비스를 지원하여 이재민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정신적 어려움을 가까이에서 경청하고 있다. 이중 고위험군은 의료기관과 연계한다. 이번 화마로부터 삶의 모든 터전을 빼앗긴 이재민 중 심각한 정신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 PTSD)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참사나 자연재해에 노출된 희생자와 가족, 지인 혹은 목격자들 중 일부는 지속적으로 외상 사건을 떠올리며 일상생활에서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게 된다. 다행인 사실은 외상을 경험한 모든 사람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진단받거나 진단 후 고통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여러 연구를 통해서 밝혀졌다는 것이다. 외상 후 성장(Post Traumatic Growth : PTG)을 연구한 테드시와 칼혼(R. G. Tedeschi & L. G. Calhoun)의 연구에서는 외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극복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성장과 풍요로운 삶을 경험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외상 후 성장(PTG)이란 생명에 치명적 위협을 주는 충격적 사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외상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외상 경험 후 긍정적인 심리 변화와 성장에 도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산불 외상 사건을 경험한 이재민들이 외상 후 성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신체적, 심리 정서적, 영적 돌봄이 모두 제공되어야 한다. 이재민들의 신체적 돌봄을 위해서는 구호품 제공이 이어지고 있고, 심리 정서적으로는 전문상담사들이 찾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영적인 차원에서는 어떤 돌봄이 제공되어야 할까?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 가정에 이런 사고를 허락하셨을까?”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에 동반자가 되어 줄 신실한 교회공동체가 절실하다. 일리노이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행복 연구의 대가인 에드 디너(Ed Diener)는 세계 갤럽 여론조사에서 얻은 자료들을 통해 긍정심리학을 뒷받침하는 사례들을 보고했다. 조사는 145개국 36만명과의 면담을 토대로 진행됐다. 디너 박사는 “이 자료들을 통해 긍정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심리에 대하여 답할 수 없었던 많은 질문들에 대한 답들을 일반화할 수 있었다. 다만 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살면서 기쁨을 더 많이 누리는데 왜 그런지는 우리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디너의 이 대답은 매우 정직한 답변이다. 신앙이 없는 심리학자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왜 기쁨을 더 많이 누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진심일 것이다. 아무리 교회에 다니고 있는 신앙인일지라도 화마가 휩쓸고 간 집터를 볼 때면 이 땅에서의 삶이 헛되고 헛되며 밀려오는 건 슬픔뿐일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구주로 모시고 천국행 티켓을 거머쥔 신실한 크리스천들은 교회공동체 안에서 이 어려운 시절을 눈물로 함께 슬퍼하면서도 천국 본향을 기대하면서는 잠시나마 기뻐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슬프고 화가 나는 일들을 볼 때마다 전혀 기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을 마무리한 후 영원한 생명을 선물 받아 살게 될 본향을 생각하면 크리스천은 기뻐할 수 있다. 주님을 내 삶의 구주로 모신 우리는 진정한 크리스천이 살면서 왜 더 기쁜지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본향이다. 그곳에는 아픔도 슬픔도 갈등도 없다. 그곳에는 평화와 사랑, 기쁨만이 있다. 구약에서 요셉, 욥, 다윗 그리고 신약에서 핍박과 박해를 이겨낸 사도들과 신자들은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과 더 깊은 친밀감을 누렸다. 진정한 신자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성숙의 경지에 다가간다. 성경은 이들을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앞에 당한 경주를 이룬 영적 승리자들로 기록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본 이들로 언급한다. 우리도 인내로써 경주를 다한다면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다. 우리도 하나님 보좌 우편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알려주셨다. 그 방법은 하나다. 우리는 다만 평생토록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5.04.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3. 중독 극복 사례
  • 순복음가족신문에서는 ‘마약 없는 사회, 함께 돕는 우리 교회’를 슬로건으로 세우고 중독 예방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앞으로 기획을 통해 중독의 원인과 현실을 파악하고, 나아가 대처방법과 해결책을 제시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 중독의 사슬 끊는 효과적 열쇠 ‘교회공동체’ 존재의 외로움 위로 받을 수 있어 ‘중독’이란 단어 라틴어 ‘노예’에서 기원 노예 신분에서 해방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필자가 목회 상담 현장에서 만났던 마약중독 중년, 게임중독 청년, 관계중독 청소년이 중독의 사슬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에서 가장 효과적인 열쇠는 교회공동체였다. 개인상담에서는 중독의 원인인 부모자녀 안정애착 결핍이 채워지도록 모래놀이치료로 안정재애착을 제공했다. 사실 이들의 중독 탈출에 가장 효과적인 치유 환경은 각자가 속한 교회공동체였다. 게임중독 청년은 은둔형 외톨이였으나 교회 청년들의 도움으로 자전거 타기와 등산을 통해 혼자만의 어두운 공간에서 벗어나 청년부와 교육부서에서 봉사하는 생기 있는 청년으로 변화됐다. 마약중독 중년은 요양하는 동안 옆에서 눈물로 기도하는 배우자와 자녀, 부모님이 다니시는 교회공동체 동년배들이 자주 심방해주고 친구가 되어 준 것이 가장 고마웠다고 보고했다. 중독(addiction)이란 특정 대상에 대한 의존을 자기의 의지로 끊을 수 없을 상태를 의미하며, 알코올, 약물중독과 같은 물질중독과 도박, 인터넷, 쇼핑중독과 같은 행동 혹은 과정중독으로 분류된다. 중독의 특징은 강박적 사용(Compulsive use), 조절 능력의 상실(loss of Control), 나쁜 결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사용(Continuous use despise of bad Consequences)이라는 3C로 설명될 수 있다. 중독은 보편적으로 사용(use)→오용(misuse)→남용(abuse)→의존(dependence)→내성(tolerance)→금단증상(withdrawal symptoms)→생리적 중독(intoxication)→중독(addiction)의 단계로 진행된다. 중독은 뇌의 쾌감중추를 자극하고, 직간접적으로 뇌의 보상회로를 과잉 자극하여 도파민 호르몬을 급격히 증가시킨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뇌는 보상회로를 활성화시킨 약물 혹은 행동을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인지하여 계속 요구함으로써 중독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중독은 ‘노예’라는 뜻의 라틴어 ‘additus’에서 기원됐다. 중독은 중독된 대상의 ‘노예’가 되어 자기 통제력을 잃고 종속된 삶이다. 중독은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관계가 고립되고 일상의 만족도가 떨어질수록 증가하는 특징이 있다. 반면 중독의 노예였던 내담자들이 전문 중독 상담 치료와 교회공동체의 사랑을 경험하면 스트레스가 감소하고 소속감과 행복감이 증가되면서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중독을 치유하는 목회상담자의 중요한 역할은 공감적으로 ‘함께함’(presence)이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는 성령님을 상담 현장에 초대하고 그 치유의 역사를 실현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목회상담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맺은 건강한 관계를 중독자들과의 상담 현장에서 재연한다. 이를 통해 그들도 병리적인 의존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위해서도 기꺼이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상담자가 중독자를 포함한 약자들의 회복과 상담 중 마땅히 성취해야 할 목표는 회개와 중생, 성화의 점진적 영적 성장 단계의 성취이다. 죄인 된 인간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신앙은 시간이 지날수록 회칠한 무덤과 같이 되고 말 것이다. 성공적인 목회 상담은 존재적 불안 속에 놓인 중독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자녀로 용납되었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돕는 것이다. 즉 자신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에드 웰치(Ed Welch)는 중독문제 해결에 있어서 다음의 제안을 한다. 첫째, 직면을 준비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과 상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직면 전 유의해야 할 것은 나와 중독의 문제(상처, 자존심, 분노, 복수)가 아닌 중독자의 유익과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둘째, 자신의 죄를 먼저 인지하고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결코 우리의 이익이나 의로움, 감정에 동기를 둔 것이 아닌 사랑에서 우러나온 하나님 중심의 마음과 사랑 안의 진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셋째, 직면을 하면서 내담자의 중독 치유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전달될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하고 준비해야 한다. 친교를 목회 상담적 돌봄의 자원으로서 인식하는 새로운 안목이 중독 치료 현장에서는 절실히 필요하다. 이웃의 고통뿐 아니라 즐거움까지 자신의 감정으로 경험하는 진실된 공감은 하나님 형상의 한 특징이기 때문이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고전 12:26).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이 기사는 국민희망실천연대와 함께합니다. < 관련기사 > [고민 Tick 상담 Talk] 1. 중독의 실태 [고민 Tick 상담 Talk] 2. 중독 극복 방법 중독, 희망을 삼킨다 중독, 우리 교회 다양한 프로그램 실시하며 해결책 제시 [중독 극복 수기] 내 삶은 빛이 없는 어둔 세상이 전부였다
  • 2025.03.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2. 중독 극복 방법
  • 순복음가족신문에서는 ‘마약 없는 사회, 함께 돕는 우리 교회’를 슬로건으로 세우고 중독 예방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앞으로 기획을 통해 중독의 원인과 현실을 파악하고, 나아가 대처방법과 해결책을 제시할 예정이다.<편집자 주> 중독 극복의 최우선은 사전 예방 교회, 관련 공공기관과 협력해 선한 영향력 발휘 개인 문제 아냐, 이웃 사랑하는 마음으로 적극 도와야 얼마 전 안타깝게 사망한 한 배우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상 대마 향정 혐의로 입건돼 경찰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고인은 생전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예전에 교회의 성극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는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교회 가서 설교를 들을 때 목사님의 그 힘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자주 설교 테이프를 듣곤 했던 것이 도움이 됐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개인이 극한의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본인과 가족들은 현재 상황에 파도처럼 휩쓸리느라 고난 가운데 가장 가까이 임하시는 성령님의 임재를 바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우리가 깊은 고통 속에 있을 때 우리를 안아주시고 손잡아 일으켜 주시길 원하시는 성령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며 고통을 체휼하신 보혈의 공감 그리고 다시 사신 부활의 능력이 바로 고인이 궁금해하고 도움을 받고자 했던 목사님 설교의 힘이 아니었을까. 우리 누구에게라도 발생할 수 있는 중독적인 상황들과 유혹적인 환경들은 그 수렁에 빠지기 전에 미리 조심하고 예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준비는 사회와 교회가 함께 힘을 합할 때 예방과 치유, 복음 전파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마약류에 대한 무지함과 무분별한 전파 그리고 각종 중독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사회와 교회가 마음 모아 집중하며 대처해야 할 때이다. 식약처(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25년 마약 예방 교육 계획’을 수립하고 청소년 마약 예방 교육 대상을 지난해 176만명에서 215만명으로 크게 늘려 실시하기로 했다. 이는 우리나라 전국 초·중·고등학생의 40% 규모이다. 식약처는 유아동·청소년이 성인이 되기 전 마약류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경각심을 가질 수 있도록 마약 예방 교육을 확대한다. 특히 올해는 교육부 학생 안전 교육 프로그램과 연계해 전문 예방 교육 강사가 전국 초·중·고등학교에서 청소년 215만명을 교육한다. 올해 총 마약 교육은 지난해 3만 2000회(202만명)에서 13% 증가한 3만 7000회(225만명)를 실시한다. 또한 중독·심리·약학 등 전공 대학생과 군인들을 대상으로 마약 예방 관련 실무실습 과정을 운영하고 마약 식별, 특성, 검사 키트 활용 등에 대한 심화 교육과정을 추가 개설해 운영하기로 했다. 또한 식약처는 마약 예방 교육이 우리 사회에 제대로 자리 잡고 널리 확산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유관기관·단체 등과 협업도 확대한다. 지역 대표 축제·행사 등에 청년 서포터즈(대학생)와 함께 예방 교육 부스를 운영하고 국민 인식개선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실시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식약처가 마약류 중독 위험성에 대한 교육 기회를 모든 국민이 제공받을 수 있도록 지역아동센터, 대안학교, 학교 밖 청소년, 북한이탈주민, 다문화가정, 사회복지시설 등 취약계층을 위한 맞춤형 교육자료를 개발하고, 찾아가는 예방 교육도 실시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 중독 예방 교육의 장소로 교회가 협력한다면 어떨까? 특히 식약처는 마약 교육의 효과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올해는 체험형 교육을 확대하고, 다양한 교육콘텐츠들도 추가 개발하기로 했다. 지난해 성공적으로 운영된 마약 예방 뮤지컬, 연극, 미술 활동, 또래 리더 양성, 마약 예방 부스 프로그램 등 체험형 교육을 확대 한다. 구체적으로는 스토리텔링 프로그램, 활동형 교육자료, 유아·청소년의 직업체험관 활용 등 교육콘텐츠를 추가 개발해재미있고 흥미로운 다양한 교육을 제공할 계획이다. 교회는 공공기관과 연계하여 위와 같은 예방 교육들을 실시하는 무대와 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을 보유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지역사회 주민들이 성도들과 함께 중독 예방 교육을 받고 교회가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부흥의 계기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중독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이웃과 모든 국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다. 교회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펼쳐지는 중독예방 프로그램들에 함께한다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이 기사는 국민희망실천연대와 함께 합니다. < 관련기사> [고민 Tick 상담 Talk] 1. 중독의 실태 중독, 희망을 삼킨다 중독, 우리 교회 다양한 프로그램 실시하며 해결책 제시
  • 2025.02.1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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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출현은 새로운 문명 시대를 열어왔습니다. 학자들은 ‘말’의 발명으로 수렵, 채집 생활이 시작된 1단계, ‘글’의 발명으로 농경사회가 형성된 2단계, ‘인쇄’의 발명으로 산업사회가 본격화된 3단계, 컴퓨터와 결합한 ‘텔레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등장으로 정보사회가 펼쳐진 4단계로 역사 발전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챗GPT’ 등 인공지능, 블록체인, 가상현실과 같은 디지털 범용 기술들이 새로운 4차 산업시대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나가리라 예측됩니다. 되돌아보면 인터넷, 휴대폰 등 뉴 미디어의 확산은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획기적 변혁을 초래했습니다. 우선 인터넷은 탁월한 개방성으로 공간의 제한을 무력화시키고 명실상부한 ‘지구촌 공동체’를 실현해 냈습니다. 또한 개인 미디어와 매스 미디어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을 일시에 무너뜨렸습니다. 이 결과 많은 사람들은 IT기술과 접목된 뉴미디어의 등장이 ‘표현의 자유’에 있어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람은 상당 부분 실현됐습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작용 또한 생겨났습니다. ‘가짜뉴스’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미디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막강합니다. ‘교과서’며 ‘재판관’이고 ‘세상을 향한 창’입니다. 실제로 영유아들은 부모나 교사보다 TV나 유튜브를 통해 먼저 세상을 배워 나갑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언론의 잣대에 의해 규정됩니다. 또한 개인들은 미디어가 설정해 놓은 프리즘을 통해 외부 환경을 파악하고 사회 현안을 해석합니다. 한 마디로 ‘가짜뉴스’란 ‘뉴스의 형태를 띠지만 실체는 사실이 아닌 거짓된 뉴스’(fake news)를 의미합니다. 이는 언론 매체에 대한 사회 일반의 기본적 신뢰를 숙주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진실을 조작해 이익을 챙기려는 불순한 시도입니다. 이런 행태는 근래 SNS상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편집 통제권’(editorial control) 없이 ‘이용자 통제권’(user control)만 존재함을 악용해 가짜뉴스 제작 배포, 마녀사냥식 신상 털기, 테러 수준의 명예훼손 등이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를 정치적 선동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가공된 뉴스를 활용해 주식시장을 흔들려 한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의 경우는 ‘조회’와 ‘구독자’ 수가 수익과 직결되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적 내용으로 꾸며진 괴담 수준의 가짜뉴스가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강하고 자극적인 발언을 할수록 보상이 올라 간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됐고, “유명해진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노이즈 마케팅이 일반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정착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가짜뉴스가 지닌 신속한 전파력입니다. 미국 MIT 공대 연구진에 따르면 자극적인 가짜뉴스는 일반적 뉴스에 비해 전파 속도가 평균 6배 빠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의표를 찌르는 폭로성 뉴스, 험담과 막말이 섞인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에 더욱 솔깃해하는 인간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언론 자유를 신장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던 디지털 공간에서 이처럼 민주 질서를 위협하는 행태들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윤리와 규범을 바로 세우고 사용자들의 책임 의식을 거듭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밀려오는 정보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변별력’을 길러나가는 일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을 통해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도 효과적 방안이 될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에게는 이 같은 여과 능력의 함양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5:8~9). 온라인을 이용해 범람하는 온갖 반기독교적 정보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예리한 통찰력과 분별력을 갖춰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오늘 이 지면을 빌려 혼탁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의연히 기독 언론의 정도를 걷고 계신 <순복음가족신문>에 새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신문은 저희가 온 마음 바쳐 사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보루이며, 곳곳에 고귀한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생생한 ‘교회행전’입니다. 지난 2년 이 귀중한 신문에 부족한 제가 신앙 시사칼럼을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외람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올리며, 한결같이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신 신문사 여러분과 졸문을 읽어 주시고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광과 찬송을 주님께! 할렐루야!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2.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한글, 빛나는 우리의 보물
  • 한국어 학습자가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0일 코리아헤럴드가 교육부 자료를 입수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어를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곳은 세계 42개국 1806개 초 중학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3년 만에 40%가 급증한 수치입니다. 온라인상에서의 한국어 열기 또한 뜨겁습니다. 5억 명 회원을 둔 글로벌 외국어 학습 서비스 ‘듀오링고’는 최근 ‘2022년 듀오링고 언어 리포트’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어 학습자는 1070만 명으로 전년 대비 29%가 증가, 수강자 수가 많은 언어 순위 5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향학열이 높아진 데는 물론 ‘한류 열풍’이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한글’ 자체가 지닌 문자로서의 탁월성과 매력입니다. 실제로 한글은 여러 ‘소리글자’ 가운데서도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입니다. 열 자의 모음, 열 네 자의 자음, 27종의 받침을 활용해 수천 개의 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음소문자로서 세계 공용어화 되어 있는 영어와 견주어도 효율성이 월등합니다.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다르며,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분되고, 꼭 글자대로 읽혀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발음기관과 발음 작용을 본떠 만들어진 한글의 과학성은 정보화 시대의 진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보면 하늘을 뜻하는 ‘·’, 땅을 뜻하는 ‘ㅡ’, 사람을 뜻하는 ‘ㅣ’ 석자로 수십 가지의 모음을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자음은 동일한 자판을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예삿소리(ㄱ)→거센소리(ㅋ)→된소리(ㄲ) 순으로 변환돼 간단한 조작으로 모든 글자를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뛰어난 한글의 편이성이 우리의 높은 휴대전화 보급률과 선도적 기술축적을 가능케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울러 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특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정연하게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두에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동기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말이 공용되는 한자와 통하지 않아 백성들이 제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실정임을 긍휼히 여겨 쉽게 익혀 편하게 쓸 수 있는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점을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는 보다 실감 있게 설명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한글은 이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자주적 실용주의가 투영돼 구성원리가 간명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문맹 퇴치 신화’를 이룩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습득의 용이성’이라는 한글의 장점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전도의 사명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역, 신분, 성별의 구별 없이 두루 보급되고 읽혀졌습니다. 그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가며 전도했고,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배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은 “한글이 진정한 우리 언어로 빠르게 자리 잡는 데 성경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국민일보 우성규 기자의 언급대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의 보급으로 한반도는 문맹에서 벗어났고, 이를 통해 전해진 복음의 메시지는 한국교회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됐던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한글임에도 근래 우리 사회의 한글 홀대는 선을 한참 넘어섰습니다. 온갖 은어, 비어, 속어, 정체불명의 약어와 합성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공공 방송에서조차 한글 규범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단 78년의 세월이 초래한 남북한 간의 언어 이질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민족의 명절인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북이 함께 기념하는 절기가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서 ‘설날’은 지금까지 우리 겨레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명일(名日)입니다. 궁극적인 ‘남북통일’은 단순한 ‘제도적 통일’을 넘어 ‘사람 간의 통합’에까지 이르러야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시풍속의 존속과 공유는 통일 여정에서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글은 다름 아닌 생각과 정신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말과 글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민족공동체로서 기본적 공감대의 토대가 이미 마련돼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이 기반이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방지 대책이 시급히 강구돼야만 할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글은 빛나는 우리의 문화 자산입니다. 겨레의 보물인 우리말, 우리글을 바로 지키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 온 국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과의 귀중한 소통 매체인 한글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언어가 역사와 문화의 창고를 여는 관건이듯이 성도들에게 한글은 은혜의 보고인 성경을 여는 소중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카타르의 낭보
  •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짓는 의미 있는 분수령이 됐습니다. 사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954년 제5회 스위스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다섯 번이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음에도 단 1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6월 4일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2대 0으로 꺾은 후 강호 포르투갈, 이탈리아, 우승 후보 스페인까지 연달아 격파하며 4강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모두에게 축구는 ‘그냥 축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팀의 경기를 매개로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춤추고 함께 함성을 질렀습니다. 세계적 명물로 자리 잡은 자생적 ‘길거리 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4강 신화에 세계가 놀랐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 스스로였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신감, 동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적 유대감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이 열기는 IMF 경제위기 극복, 폭발적인 참여민주주의 확대, 창발적인 한류 문화 확산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22년, 제22회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통계전문가들의 ‘16강 진출 가능성 9%’의 예측을 여지없이 깨뜨린 이 반전 드라마는 투철한 ‘원팀 정신’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위시한 코치진과 27명의 선수들이 똘똘 뭉쳤습니다. 그 결과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국형 ‘빌드업 축구’가 가능했고, 어떤 팀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강인한 뚝심이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구성원들 간의 신뢰 역시 돋보였습니다. 특히 주장 손흥민 선수의 리더십은 발군이었습니다. 그는 월드컵을 3주 앞두고 소속팀 경기에서 당한 안와골절로 안면 보호대를 착용한 채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년간 마스크를 쓰고 계신 국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의연히 대답했습니다. 개막 전 “단 1%의 가능성이 있어도 앞만 보고 달려가겠다”며 부상 투혼을 예고했던 그는 약속대로 “몸이 부서지도록” 뛰었습니다. 실제로 H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벼랑 끝에 몰렸던 한국팀은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황희찬으로 연결된 극적인 역전 골로 포르투갈에 2대 1 승리를 거두며 16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16강전 진출이 확정된 직후 권경원, 조규성 선수는 관중에게서 건네받은 태극기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뚜렷한 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본래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가 7수 끝에 세계 대회를 제패하며 했던 이 말은 다시 새롭게 부각되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선 대회 내내 보여준 대표팀의 모습이 압축된 표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흔들리는 이 세대에게 던지는 속 깊은 응원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팀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위축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불퇴전의 투혼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기간 특별히 우리 팀의 경기가 열렸던 13일간 축구 덕택에 대한민국은 모처럼 하나가 됐습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모두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표팀의 선전은 코로나 블루, 경제 한파, 잦은 사회적 갈등으로 침체돼 있던 한국 사회에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또 한 번의 ‘송구영신’의 시간을 맞으며 영혼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 스타디움을 뛰고 달렸듯 성도들도 인생의 경기장을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경주자처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인생행로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감사한 것은 이 신앙 노정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스타플레이어로 여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는 말씀대로 열렬한 서포터가 돼 뜨겁게 응원해 주십니다. 독자 여러분!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스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팬이 되어주십니다. 다가오는 2023년 새해, 예수님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12.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새책소개
    2025년은 하나님의 말씀 가득한 『감사QT 365』 와 함께
  •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 위한 최고의 선물! 하나님과 동행하는 2025년을 기대하는 성도들의 필독서 『감사QT 365』가 출간됐다. 매년 업그레이 되는 『감사QT 365』는 절대 긍정, 절대 감사를 실천하는데 도움을 주는 QT(Quiet Time) 서적으로 각광 받아 왔다. 감사와 QT, 그리고 필사가 어우러진 2025년 판 『감사QT 365』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집필됐다.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예화를 선별하고 간략하게 요약하여 삽입했다. 특히 성경 말씀을 필사할 수 있는 지면과 말씀 묵상의 적용을 돕기 위한 질문을 추가해 일 년 동안 매일 하루하루를 말씀으로 채우고 영적 성장에 힘쓸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영훈 담임목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지켜준다면 고난 중에도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책에는 매일 QT를 생활화하여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삶을 살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예배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저자의 마음이 이 책 『감사QT 365』 곳곳에 녹아져 있다. 이영훈 목사의 감사 목회 철학이 체험적으로 녹아 있는 365편의 묵상의 글과 은혜로운 예화들을 읽고 ‘나의 감사’란에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적어보자. 매일 주어진 일독성경 범위 내에서 제시된 그날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필사하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QT를 하루하루 실천하다 보면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사람이 되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을 따라 매일 주어진 분량의 성경 말씀을 읽으면 2025년 한 해 동안 구약 1독, 신약 2독을 하게 된다.
  • 2024.11.15 / 복순희 기자

    2024년 『감사QT365』 하루 한 장으로 하나님과 동행
  • 매일 통독, 말씀 묵상, 말씀 필사, 감사 쓰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절대긍정, 절대감사하는 새해를 계획했다면 『감사QT365』 2024년 판을 추천한다. 이번에 발간된 『감사QT365』는 감사와 QT, 필사가 어우러져 일 년 동안 매일의 삶을 말씀으로 채우고 영적 성장에 힘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이 책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집필됐다. 본문을 예화 중심이 아닌 말씀 중심으로 편성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예화를 선별해 요약했다. 더불어 성경 말씀을 필사할 수 있는 지면과 말씀 묵상의 적용을 돕기 위한 질문을 추가했다. 또한 매달 시작점에 월별 계획표(monthly plan)를 수록해 매일 성경통독 진도를 표시할 수 있도록 했다. 이영훈 목사의 감사 목회 철학이 체험적으로 녹아 있는 365편의 묵상의 글과 은혜로운 예화들을 매일 읽고 ‘나의 감사’란에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적어 나가다 보면 저절로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영훈 목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대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2023.12.15 / 복순희 기자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
  •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로 탄생한 기독교가 우주 만사의 정답이 된다. 혼란한 시대를 사는 인생들에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이기창 공로장로(반석대교구)가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를 펴냈다. 저자는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기록은 합리적이며 과학과도 합치하며 오히려 과학을 초월하고 있음을 깊이 있게 분석해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성을 논증했다. 이 책은 신, 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 내용을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면서 심도 깊게 해설하고, 기독교 교리와 신앙, 신학적 논리와 이론 및 사상, 우주의 창조로부터 역사, 종말 및 미래 발생할 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과학자인 저자는 과학과 철학의 논리로 신의 존재로부터 우주 만물 전체를 물질우주와 정신우주로 균형있게 조망하면서 과학-철학-신학을 통섭해 교집합의 우주론을 밝혀낸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인류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질문인 우주, 물질, 영혼, 생명, 죽음, 사후생, 세상종말 등 빅퀘스천 규명을 추구해 나간다. 응용과학인 전자통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공과대학 정교수를 역임한 이기창 공로장로는 교수 은퇴 후 10년간 물리학, 철학, 신학, 역사 등 인문학 연구에 몰두해 이 책을 만들었다. 그는 현대물리학에서 발견한 빅뱅 우주론과 부합하는 종교를 엄밀히 분석, 조사해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만이 현대과학과 부합하는 유일한 종교로서 진실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기독교가 공학, 물리학 등의 과학과 철학에 합치하는 유일한 종교이며 따라서 성경과 기독교는 ‘우주적 진리’라는 결론을 깨닫게 된다. 어디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몰라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추천하는 필수 교양 인문서적이다.
  • 2023.04.07 / 이미나 기자

    문화계 소식
    [영화 소개] 천성가는 밝은 길이
  • 사형수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박효진 장로의 간증을 토대로 제작한 ‘천성가는 밝은 길이’ 영화가 지난 4월 유튜브에 올라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박 장로는 전직 교도관 출신으로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다. 그의 간증은 사형장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형수들의 처절한 영적 사투를 통해 복음의 진리와 영적전쟁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이번 영화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수많은 기독교 영화를 제작한 홍의봉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박효진 장로 역은 이경영 배우가 맡아 열연했고, 신인 김양균과 유라성도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임동진(목사), 한인수 장로, 정욱, 정선일 등의 중견 배우들도 특별 출연했다. 영화는 유튜브에서 제목 검색을 통해 볼 수 있다.
  • 2023.06.09 / 김주영 기자

    기독교 복음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 7월 5일 국내 개봉  
  • 전미 박스오피스 4주간 연속 TOP 10 하나님의 사랑과 진정한 믿음으로 감동 전해 하나님의 치유 능력과 사랑을 경험케 하며 대한민국에 진정한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릴 기독교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가 오는 7월 5일 국내에 개봉한다. 전미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들며 놀라운 흥행을 기록해 그 해 최고의 종교 영화로 떠올랐다. <기적을 믿는 소녀>는 기도로 믿음을 증명하는 어린 소녀를 통해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이 믿음의 불꽃을 키워가는 엔터테이닝 복음 영화다. 가족과 함께 호수에 놀러 간 평범한 어린 소녀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케 하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죽은 새와 강아지의 부활, 그리고 하반신 마비를 가진 친구가 다시 걷게 되는 등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목격한 믿음의 소녀를 통해 점차 변화해 가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강렬한 울림과 함께 감동을 전한다.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 사람들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보는 내내 미소를 짓게 하는 스토리와 힐링을 선사하는 완벽한 케미스트리 등을 통해 종교인을 넘어서 일반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관람 후에는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듣고 계세요”라는 대사와 깊은 감동이 가슴에 남게 된다. 특히 <위대한 쇼맨> 오스틴 존슨부터 제68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미라 소르비노, 피터 코요테, 케빈 소르보까지 믿고 보는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해 막강 캐스팅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여 이목을 집중시킨다. 한편, GOODTV 기독교복음방송(대표이사 김명전)에서는 개봉 전부터 <기적을 믿는 소녀> 교회 상영을 진행해 한국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는 많은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밝혔다.
  • 2023.05.25 / 이미나 기자

    스마트폰 생활백서-저절로 성경일독
  • “스마트폰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보여요!” 잠금화면 활용한 성경 묵상 앱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매순간 단비와 같은 성경 말씀을 전달해 주는 앱이 있다. 바로 ‘저절로 성경일독’이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스마트폰 화면을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에는 성경 구절이, 하단에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화살표 기호와 북마크, 공유하기, 잠금해제 버튼이 있다. 화면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켜지면 다음 절로 넘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담 없이 성경을 일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앱에서는 말씀 공유 기능이 가장 눈에 띈다. 묵상하고 있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말씀 카드를 만들어 SNS로 즉시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모바일 전도 도구로도 활용이 가능해 전도 대상자에게 유용하다. 성경은 개역개정, 개역한글, 현대어성경, 새번역과 영어 성경인 KJV, NIV, NLT 버전을 제공하고 있는데 한글과 영어 두가지 성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개역개정, 개역한글, KJV 성경은 오디오도 함께 제공된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안드로이드기반(삼성 및 LG)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구글 Play스토어에서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앱을 실행하면 광고가 나타나지만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말씀을 묵상하고 공유하는데 지장이 없다. 또한 결제해야 이용할 수 있는 ‘읽기모드’는 우리 교회 앱 성경과 동일한 기능이므로 오랜 시간 성경을 읽을 때는 교회 앱을 활용할 것을 추천한다.
  • 2022.07.29 / 금지환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31. 후안무치(厚顔無恥)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솔로몬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된 시므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6~37) 3. 솔로몬의 숙청 작업과 시므이의 죽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숙청의 이유, 방법, 숙청당한 인물들만 보면 공포정치를 휘둘렀던 절대군주 못지않다. 숙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비아달, 다윗을 섬기며 충성을 다했던 군대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형이자 왕자였던 아도니야까지 잠재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둘째는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다니엘, 셋째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 넷째는 학깃이 낳은 아도니야였다.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열 번째쯤 된다(대상 3:1~5). 그런데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게 죽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 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 죽은 것이다. 둘째 아들 다니엘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성경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왕상 1:5~11). 이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요압과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왕하 1:7). 하지만 아도니야의 시도는 일일천하에 그쳤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도니야(왕상 1:51)를 살려주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상 1:52). 하지만 아도니야는 다윗의 침실에서 수종을 들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은 이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도니야를 처형해 버렸다(왕상 2:13~25). 2) 아비아달 아비아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10번째 대제사장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기약이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도시와 지역이 있었지만 다윗이 선택한 첫 장소는 대제사장이 있던 놉이었다(삼상 21:1).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고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삼상 21:4~10).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을 문제 삼아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을 한 날에 살육했다(삼상 22:18).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아달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아비아달은 지체 없이 한걸음에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향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에봇을 가지고 도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3:6). 아울러 우림과 둠밈을 대제사장의 에봇 흉패 안에 보관하라고 되어 있기에 우림과 둠밈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출 28:30). 다윗은 이렇게 사선을 넘어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직후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에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왕상 2:27). 3) 요압 요압이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이다’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볐던 군대 장관이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던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다윗이 사울의 남아있던 세력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장군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를 이끌던 요압이 맞붙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요압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요압은 이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자손들과 다윗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하고 통일왕국을 탄생시키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고 통일왕국의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뗐다(삼하 3:8~21).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 다시 헤브론으로 유인해 왔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브넬을 살해했다(삼하 3:27). 성경 여러 곳에서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요압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후 모든 공이 아브넬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에 대한 염려와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한 번에 갚고자 벌인 일이었다. 다윗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큰 용사였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압에게 묻지 않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로몬은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압이 죄 없는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이었던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었지만(왕상 2:31), 실상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시므이 솔로몬의 서슬이 퍼런 칼날은 그의 왕권을 위협할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대왕이었던 다윗이 살려 준 시므이를 향한 솔로몬의 마지막 경고이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절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왕상 2:36~37). 왜 솔로몬은 베냐민 자손이고 바후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시므이를 굳이 예루살렘 성에 붙잡아 두고 절대 떠나지 말라고 했을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 두 명이 도망을 가자 솔로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벗어났다(왕상 2:39~40). 솔로몬은 브나야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이를 단숨에 처형했다(왕상 2:45).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초라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가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였다. 하지만 압살롬에 의한 왕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엎드려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량과 은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8.01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30.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시므이의 죽음①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8~19) 사무엘하 15장과 19장은 후안무치한 시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골 어디에도 왕의 위엄과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다윗은 머리는 산발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윗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길을 역방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나 군사들에게 쫓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신세였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10명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다윗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친부로서의 자존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더 낮아질 수도 초라해질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이미 죽임을 당해 세상에 없었다. 다윗의 차남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나발의 아내였으나(삼하 2:2)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된(삼상 25:39~43)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이다(대상 3:1). 하지만 그의 이름 외에 추가적인 자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장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아(왕상 1:5~10) 다니엘은 일찍 죽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남과 차남이 죽은 상황에서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아버지 다윗을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압살롬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헤브론에서 시작한 반란은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거칠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바후림을 지나고 있을 때 사울의 친족이요 게라의 아들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다(삼하 16:5). 다윗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13). 자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이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사울의 남은 자손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참소하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울의 친족을 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친족들에게 많은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고 사울의 친족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했다. 그들의 토지나 소유권도 빼앗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은혜를 받았던 사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시므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부었다. 비록 피난길에 올랐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있었고 많은 백성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6:6).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말한다(삼하 16:9).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극심한 모멸감에 시달렸을 다윗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므이는 더없이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난이 은혜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므이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가 퍼붓는 저주를 묵묵히 참아냈다(삼하 16:11). 2. 급변한 시므이의 태도 다윗이 가장 힘들었을 때,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의 태도는 압살롬이 죽고 왕자의 난이 정리된 이후 급변한다. 압살롬이 죽자 제사장들과 신하들은 서둘러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진행한다(삼하 19:11~12). 다윗은 피난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올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던 바후림에 이르렀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귀환 행렬이 바후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엘하 19장 16~18절은 이때 시므이가 취한 행동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유다 사람들과 동행(삼하 19:16) 사울의 혈육으로 베냐민 지파였던 시므이는 급히 유다 사람들과 다윗을 맞으러 나간다. 다윗의 피난 행렬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에게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다시 바후림에 왔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2) 시므이의 세력(삼하 19:17) 사무엘하 19장 17절은 사울이 죽은 후 시므이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을 맞으러 나올 때 시므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기의 모든 세력을 데리고 나온다.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열다섯 명의 아들, 종으로 부리고 있던 하인 스무 명을 대동했다. 시므이는 호시탐탐 사울 왕조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이유도 없다. 3)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삼하 19:18~20) 시므이는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다윗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시므이가 특별히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던 날에 저질렀던 패역한 일'에 대한 용서였다(삼하 19:19). 그가 다윗을 쫓아가며 했던 저주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비새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삼하 19:2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므이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울의 남은 세력들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아량을 베푼다(삼하 19:22~23). 다윗은 자신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므이의 문제는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7.04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9.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Ⅱ)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뤄져야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2) 기브온족의 이스라엘 편입 가나안 족속의 종교 혼합주의, 쾌락주의, 윤리적 타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기이한 자연적 현상들은 다신론적 맹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손쉬운 다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종교적 편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과 방식대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아주 쉽게 유혹으로 이끌어 갔다. 그 결과 거룩한 삶은 죄 된 삶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나중에는 헤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나안 족속과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약 자체도 문제였지만 방법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전통에 따라 기브온 사람의 음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수 9:15). 서로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고 있었다. 성경은 기브온과 체결한 계약 방식이 '그들(기브온 사신)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9:14).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과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수 9:18)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6.06 / 이상윤 목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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