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사
2023년 설 가정 예배
  • 부족함이 없는 새해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품습니다. 우리는 지난 3년간 코로나19와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한 경기침체와 물가상승 등 불안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023년 계묘년(검은 토끼의 해)의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우리는 주변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토끼의 해인 만큼 올 한 해가 풍성하고 복된 날들이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검은 토끼’가 무슨 힘이 있어서 우리에게 풍성한 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참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1. 목자 되신 하나님 시편 23편 1절에서 다윗은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목동으로서 양을 돌보았던 그는 목자와 양의 관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양은 사나운 들짐승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방향감각도 무뎌서 스스로 집을 찾아가지도 못합니다. 금세 자라고 더러워지기 쉬운 털은 목자의 돌봄이 없으면 이리저리 엉겨 붙어서 양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양은 스스로 살기에는 너무나 약한 동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우리 인간이 양과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우리도 양같이 한없이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탄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능력이 없고, 영적인 방향감각도 무디기가 짝이 없습니다. 우리의 영은 죄와 허물로 인해 쉽게 더러워지고 위태로워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력한 양이라 할지라도 목자를 만나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목자가 있는 양은 사나운 들짐승들로부터 보호받고 안전하게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목자 되신 하나님을 만나면 평안하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우리 모두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셔들이는 삶에 최고의 목표를 두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2. 인도하시는 하나님 시편 23편 2절에서 다윗은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목자가 하는 일은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배불리 꼴을 먹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우리가 양이라면, 푸른 풀밭의 꼴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우리의 심령을 배부르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며 세상을 이기게 하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목자는 양들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양은 그 쉴만한 물가에서 물을 마시며 생기를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 된 우리에게 ‘쉴만한 물가’는 어디입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십자가 밑이 바로 우리의 ‘쉴만한 물가’입니다. 그곳에 죄 사함과 의의 강물이 넘쳐납니다. 그곳에 성령 충만과 축복과 치료의 강물이 넘쳐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그늘 아래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아래에 있을 때 죄와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2023년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이 힘을 얻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시편 23편 3절에서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묵하게 파인 곳에 눕기를 좋아하는 양은 눕다가 잘 넘어지곤 합니다. 그런데 뒤집힌 양은 일단 혼자 일어서지 못해 버둥거립니다. 뒤집힌 양은 맹수들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는 등 위험에 처하기 쉽기 때문에 목자는 뒤집힌 양을 바로 가서 일으켜 세워줍니다. 이렇게 뒤집힌 양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소생시키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질병, 실패, 상처 등으로 절망하고 넘어질 때마다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우리는 목자 되신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사야 55장 6~7절은 “너희는 야훼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공급받고, 나아가야 할 의의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새해에도 우리가 참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 살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며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는 복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로 참된 평안과 풍요를 누리는 2023년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2023 신년인터뷰] 김천수 장로회장
  • 낮아지고 섬기는 장로회 될 것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청지기 사명 감당 1. 2023년은 우리 교회 창립 65주년입니다. 장로님과 제직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나요? 지금은 교회 창립 70주년을 앞두고 교회 부흥을 위해 힘찬 도약을 이뤄야 할 때입니다. 장로들과 전 제직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곳곳에 전파해 세상을 위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예배가 살아나고 기도가 회복될 수 있도록 장로들이 앞장서 성도들을 섬기고 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부흥의 파도를 타고 있는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할까요? 담임목사님께서 올해를 ‘부흥의 원년’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곧 코로나19가 종식되고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장로회는 더욱 낮아져서 먼저 다가가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7대 기관이 협력하고 하나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와 섬김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겠습니다. 3. 교회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어떤 것들을 하고 계시나요? 교회 공간 재조정에 솔선해 장로회 예배실을 벧엘성전으로 바꾸었으며 다른 공간들도 효율적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구역 활성화와 대교구 3040부흥을 위해, 다음세대인 청장년층 부흥을 위해 각 담당 장로들과 꾸준히 소통하며 정기적으로 회의하고 이영훈 담임목사님과 정기적으로 워크숍을 갖고 있습니다. 4. 장로회는 2023년 어떤 사역에 가장 중점을 두고 계시나요? 장로회를 비롯해 전 제직들은 섬김과 나눔에 앞장서시는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향한 사랑 실천에 온 힘을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각 교구에서 소외되고 도움이 필요한 성도는 없는지 늘 확인하고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성도들을 돌보는데 힘쓸 것입니다. 서로 연합하여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새로운 부흥을 이루어 가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5. 장로회장님은 새해 어떤 비전을 갖고 계신지요? 교회가 크게 부흥하고 성도들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장로들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함께 기도하며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길 소망합니다.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하는 장로회가 되겠습니다. 정리=이미나 기자
  • 2023.01.06 / 이미나 기자

    [2023 신년인터뷰] 고영용 부목사(개척·기획)
  • 제2의 부흥 위한 키워드는 ‘변화’ 개척, 이제는 협동 목회 방식으로 전환할 것 1. 2023년 우리 교회 제2의 부흥을 견인할 기획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변화’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는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설교에 맞춰 간결하고 강력한 찬양을 선보일 것입니다. 이와 함께 여의도지역 내 직장인을 위한 수요 3부 예배도 구상 중에 있습니다. 또한 전도에도 변화를 주었는데요, 그 일환으로 이번에 기획팀에서 주보를 활용한 전도지를 제작하였습니다. 2. 기하성 교단 2만 교회, 300만 성도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우리 교회는 어떤 개척 정책을 펼칠 것인가요? 이영훈 담임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개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개척국에서는 기존 1인 개척이 아닌 3~4명이 팀으로 개척을 이루는 ‘협동 목회 방식’(공유 목회)을 기획 중에 있습니다. 이는 기존 개척교회의 미자립·양여 문제, 은퇴 후 후임자 선정 등의 어려움을 최소화하고 정착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입니다. 이를 통해 지역 내 다른 교회에도 도움을 주는 선순환을 가져올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3. 코로나 이후 앞으로 세워질 개척교회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우리 교회는 어떻게 지원할 계획인가요? 개척국에서는 코로나 이후 개척을 준비하는 목회자들에게 새가족 관리, 헌법, 교단과의 협력 등 교회 운영에 필요한 내용을 담은 ‘개척 세미나’를 선보일 계획입니다. 이는 종전에 진행됐던 개척학교의 약점을 보완한 것으로 개척 교회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4. 기도처가 지역 내 작은 소성전으로 발전 되도록 추진하는 방안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대교구별로 하나의 기도처를 선정해 오전에는 기도처로서 기도 모임이나 지·구역 예배 모임을 갖게하는 것입니다. 이어 오후에는 지역 아동들을 위한 방과 후 학교로 이용하고 저녁에는 스터디 카페로 활용되도록 추진할 계획입니다. 교회가 지역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을 주면서 동시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5. 2023년 성도들이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에 대해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올해 경기 침체를 비롯한 여러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성도님들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는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며 예수님께 딱 붙어 있는 신앙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정리=금지환 기자
  • 2023.01.06 / 금지환 기자

    Hello, Israel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며…현대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다
  • 2023년도 새해가 밝았다. 지난해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의 공포 속에서 벗어나 조금씩 일상으로의 회복이 되어가는 시기였다. 이스라엘도 그렇다. 어떻게 보면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코로나 팬데믹을 벗어난 나라가 되기도 했다. 멈추고 비어있던 성지는 그동안 푹 쉬었다고 할 수 있다. 붐비던 예루살렘과 갈릴리는 자연 그대로 시간이라는 흐름 속에서 잠시 멈추어 있는 듯 했다. 분주하고 복잡함을 벗어나 고요함을 누리는 시간이었다. 2022년 하반기부터 이스라엘은 성지순례가 다시 시작되었고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공항은 찾아든 여행객과 성지순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코로나에 대한 공포가 불식되는 듯한 순간들이었다.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의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것들을 잠시 비껴나간 듯 새롭게 다시금 피어나고 있다. 호텔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코로나 이전 수준으로 다시 돌아간 듯 하다고 한다. 호텔 가득 붐비는 순례객들과 여행객들 사이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가이드들과 호텔 직원들의 모습 속에는 바쁨에도 불구하고 미소들이 피어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문이 다시 열리고 손님들이 찾아오는 시점에서 문득 이 나라의 역사를 돌아보게 된다. 과연 이 나라는 어떻게 2000년 만에 다시금 등장할 수 있었을까? 현대 이스라엘은 과연 성경 속의 이스라엘의 연장선상의 나라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국가일까? 여전히 갑론을박이 진행되고 있는 이 땅에 대한 논쟁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누가 다윗이고 골리앗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아야 하는가? 성지 이스라엘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까? 성경과 이스라엘 그리고 유대인들은 어떤 이야기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가? 열방과 이스라엘은 성경과 역사 가운데 어떤 관계에 놓여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바라볼 것인가? 많은 질문과 답들이 무수히 떠올랐다. 그 중에는 그 동안 지면을 통해서 이야기 했던 것들도 있고 아직 이야기 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성지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금은 나누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 나사렛과 브엘세바, 헐몬산과 광야 등의 이야기를 해 보았다.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지역들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들도 잠깐 했었다. 유대교적 관점과 풍습 그리고 절기에 대한 것들도 언급했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현재 이스라엘을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글들은 그런 것들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작은 틈새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돌아보게 되었다. 과연 얼마나 이스라엘을 알려드렸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많은 분들이 있지만 현대 이스라엘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은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듣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런 이야기들을 해주는 통로도 적거니와 들을 기회도 많이 없다. 순례객들은 본인들이 다녀간 장소를 기억하기도 바쁘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뒤에 있는 이야기들에 집중할 시간도 없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중보하는 이들도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제목 속에서 등장하는 지역과 사건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없이 그저 기도하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그것이야말로 은혜다. 하지만 만약 여행하는 이들과 기도하는 이들이 이 땅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현실적으로 더 자세하게 알고 기도 한다면 얼마나 더 놀라운 응답이 이루어질까 생각해 본다. 필자도 이스라엘에 살면서 배우고 알아가는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다. 그런 은혜가 없어도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고 그 분의 일하심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확장되고 깊어질 수 있다면 이스라엘을 알아가는 시간은 너무나도 귀한 것이 된다. 2023년도는 그런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너무 멀리까지는 아니지만 근대와 현대사를 오가면서 이스라엘의 탄생과 역사적 사건들 그리고 그 안에서 바라보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들을 돌아본다면 이후에 이 땅을 방문하게 될 때 남들은 놓쳤던 부분을 찾아보게 되고 더 깊이 있는 만남들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도 광야를 걷는다. 예루살렘의 성벽을 지나쳐 간다. 텔아비브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베드로가 묵었던 가죽장인 시몬의 대문 앞을 거닐어 본다. 서쪽벽,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이들을 보면서 예배의 처소를 갈망하는 영혼을 보게 된다.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면서 유대인들이 걸어왔던 암울한 역사를 되짚는다. 터널의 끝에서 시온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리운 순간을 떠올린다. 무너져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터 앞 성전의 문앞 돌계단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그 너머 성전산 위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을 보면 이 땅의 황폐함을 예언하시면서 눈물 흘리신 예수님이 보인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여전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오늘 이 시간 거리를 바쁘게 지나는 유대인들과 아랍인들의 삶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역사는 과거를 비추지만 현재를 이끌어가는 견인줄이 된다. 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스라엘과 유대인들 속에서 여전히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 나아갔으면 한다. 김요셉 목사
  • 2023.01.13 / 김용두 기자

    이스라엘에는 크리스마스가 있을까?
  • 2022년도 한해가 벌써 저물어 간다. 새로운 시작을 알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12월이 되면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성대한 절기가 있다. 바로 크리스마스이다. 우리가 믿는 신앙 안에서 경축하는 절기는 성경적이면서 유대교적인 절기들과는 사뭇 다르다고 여겨진다. 성경에서 기독교의 절기인 부활절,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을 기념했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우리가 들어온 유대교적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그리고 장막절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연관을 짓자면 유월절은 부활절과 연관이 있고 오순절은 성령강림절 그리고 장막절 혹은 초막절은 추수감사절과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정도다. 성탄절은 성경의 어떤 절기와도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천 유대인들 중에는 성탄절을 기념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대신 이 절기와 연관된 하누카(성경의 수전절이라고 등장한다. 요 10:22)를 지킨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는 크리스마스가 없을까? 그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진 이후 이 땅에 다시 정착하게 된 유대인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서방국가에서 돌아온 이들이기에 크리스마스는 너무나 익숙한 날이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 등에서 온 유대인들 중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이들이 더 많다. 물론 이들은 종교 유대인들이 아닌 일명 세속 유대인들이 대부분이기는 하다. 이스라엘은 유대교가 사회 지배적 종교이기에 기독교적 절기인 크리스마스를 더욱더 안 지킬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가장 기독교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기독교의 절기인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전반에서는 기독교의 절기인 크리스마스를 받아들이고 축하하는 분위기다. 예루살렘의 YMCA는 매년마다 자신들의 공간에서 크리스마스 마켓을 열고 다양한 행사와 함께 기독교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심지어 무슬림들까지 모여서 즐겁게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한 불편함은 없다. 유대인들에게는 그저 그런 날로서 지나가고 무슬림들은 재밌게 보낸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불편함은 오히려 믿는 유대인들에게 있다. 그들에게 있어 크리스마스라는 날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각각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크리스마스는 유대교의 절기인 하누카와 그 시기가 겹치는 일이 종종 있다.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는 24일로 하누카의 여섯번째 날과 만나고 크리스마스 당일 인 25일은 일곱째 날과 만나게 된다. 서구식 개신교 신앙을 가지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성탄절은 큰 축하의 절기이다. 하지만 유대교적 배경으로 신앙을 가지는 이들에게는 크리스마스는 굳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절기로서 그들은 유대교 절기인 하누카 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면서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과연 성탄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리스도의 탄생, 임마누엘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의미가 우리에게 온전하게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현재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도 혼돈의 시기이다. 정치적 종교적 혼돈의 시대에 살면서 필자는 성경 속에서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종교적 바리새인들과 정치적 사두개인들 모두 유대교인들이었다. 열심당과 세속인들 모두 정치적으로 반로마이거나 친로마의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고통 받고 소외당하는 민중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지금 현재의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 예수님은 그 가운데 탄생하셨다. 그들이 자신들의 성전을 수복한 절기인 하누카를 지키며 감사할 때 하나님은 진정한 빛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베들레헴의 아랍 크리스천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장식을 세우며 그들의 성탄절을 기념할 때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 목동들의 환호를 받았다. 모두가 메시야를 바라며 기대하고 나름대로의 구원자를 꿈꾸며 세력을 꾸릴 때 예수님은 성전에서 선생들과 하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나누셨다. 누구의 절기이고 누구의 종교인가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스라엘에 크리스마스가 없다고 손가락질 할 때 우리에게 크리스마스가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랑으로 임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오늘 이스라엘에 진정한 크리스마스이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하누카가 되길 소망한다. 김요셉 목사
  • 2022.12.16 / 김용두 기자

    절기를 바라보는 시야 … 광야에서 보내는 초막절
  • 이스라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필자가 추천하는 것은 절기 때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것이다.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전통에 따라서 그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준비한다. 태양력으로 10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되는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명절이자 가을 절기의 마지막이다. 일명 하이 홀리데이(대명절)라고 불리는 이 시기에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온다. 모두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 찾아오는 것이다. 초막절은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의미가 깊은 날로 이해된다. 물론 두 그룹 간의 이해는 다르기는 하다. 하지만 이 절기를 대하는 자세는 사뭇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상을 지닌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초막절은 많이 분주해진다. 가을 절기가 시작하기 전부터 시장과 상점에서는 초막절을 위한 상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특히 초막절에는 집집마다 작은 초막을 짓는 것이 전통이다. 그래서 상점들은 간이 초막부터 시작하여 초막을 짓기 위한 자재들을 쌓아 놓고 판다. 그리고 대속죄일이 끝나는 날부터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마당이나 베란다 혹은 집근처 공터에 초막을 짓는 것을 보게 된다. 초막의 형태가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이스라엘에서 본 초막들은 재미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사면의 벽을 이루는 형태로 직사각형 혹은 정사각형의 벽을 세우고 그 위에 조릿대 같은 발을 올리거나 종려나무 가지를 덮어서 지붕을 만든다. 그리고 그 초막에서 일주일을 살게 된다. 식탁을 차려놓고 음식을 집에서 해 나와 그 초막 안에서 먹고 마시면서 일주일을 보내는 것이 전통이다. 물론 현대의 유대인들 중에 그렇게 하는 이들은 정통 종교 유대인들 밖에는 없다. 대부분이 초막을 간이 식탁처럼 사용하거나 손님들과 분위기를 즐기는데 사용한다. 이곳 네게브에 사는 필자도 처음으로 초막을 만들었다. 물론 내 손으로 모든 것을 짓고 싶었지만 초보자가 만들기엔 아직 버거워서 상점에서 파는 초막세트를 사다가 만들었다. 그래도 기둥을 세우고 사면을 천으로 두른 뒤에 지붕에 발을 올리고 종려나무 가지로 꾸며서 그럴듯하게 초막을 만들었다. 이곳 주일학교 아이들과 함께 내부 장식도 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 절기를 지내면서 과연 초막절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깊이 묵상해 보게 된다. 유대인들에게조차도 지금의 초막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명절인 것으로 그치는 것을 보게 된다. 그저 먹고 마시면서 자신들의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명절로만 기억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초막절은 성경 레위기 23장에 다른 절기들과 함께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절기가 유대인들이 제정한 날이 아닌 야훼 하나님이 지정하신 절기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초막절을 “야훼를 위해서 칠일동안 지킬 것”을 명하셨다(레 23:27~32). 초막절뿐만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절기는 많다. 하나님은 유월절, 초실절, 칠칠절(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 안식일, 월삭 등 절기들을 지명하시고 지키라고 명하셨다. 초막절은 특별히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가지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종말에 대한 요소이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이자 그 나라를 갈망하는 기도를 한다. 유대인들에게 초막절은 지금의 모습만이 아니라 과거의 은혜와 현재의 감사 그리고 미래의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에게도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부활하셨다. 그리고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셨다. 이제 다시 오실 것은 그 어느 때도 아닌 가을의 마지막 추수가 끝나고 우리를 영원한 주의 처소에 이끄실 그 날이다. 그렇기에 초막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상징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종말의 신앙 가운데 있어서 절기를 바라보는 것은 미래만을 바라본 치우친 시야가 될 수도 있다. 위에 언급했지만 유대인들은 초막절 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바라보려고 한다. 하나님은 초막절을 언급하시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상기 시키셨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만이 아닌 이미 구약 속에서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초막절을 지키지 않는다. 하지만 절기를 지키다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그리고 말씀이 우리에게 비추는 것들이 보인다. 단순한 참조가 아닌 실질적인 우리의 삶에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는 렌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우리 교회 마당에 초막을 세우고 우리 성도들과 아이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역사하신 순간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이야기 해줄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의 믿음과 삶은 휘청거리지 않고 굳건한 반석 위에 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마치 광야의 초막을 꾸미며 즐거워하던 이곳의 주일학교 아이들이 하나님의 살아있는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임을 이해했던 것처럼 말이다. 김요셉 목사
  • 2022.11.18 / 김용두 기자

    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 신론 (The Doctrine of God) - 3
  •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 모습 왜곡될 수 있어
    4.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믿음의 대상이며 실체인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헤어 나오지 못할 블랙홀을 헤매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인간 속에 두신 하나님의 선재적 행위로 인해(롬 1:19)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무모한 신기루를 쫓는 행위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이다. 모든 사물은 의미와 이유를 갖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고유한 의미 없이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은 무질서하게 계획과 목적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 만약 어느 하나라도 궤도를 이탈하거나 다른 영역을 침범한다면 예기치 못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일정한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세심한 관찰 결과에 근거해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 목적론적 증명이다. 목적론적 논증은 고대 철학자들도 사용했던 방법론으로써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를 중심으로 한 스토아(Stoa) 학파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철학적인 용어인 ‘형상’(形相, form)과 ‘질료’(質料, matter)라는 단어를 썼다. 어떤 질료도 갖고 있지 않은 채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순수 형상(entelecheia)이라고 규정을 했는데, 이것을 신(God)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적인 복잡함을 제거하고 목적론적 증명을 신학적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면 이렇다. 세상 모든 만물은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는데, 그 목적을 부여하고 목적대로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순수 형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쟁과 당위성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에서 신 존재 증명은 신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분야는 아니다.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신학자들도 많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지난 호를 참조).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 혹은 학문적 방법론으로 증명하려는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있다. 1)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의미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각 사람의 개인 속에 거하시는, 혹은 인간의 삶과 공동체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신가?”아니면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초월적이신 분이신가?”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문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하는 주기도문 서두에도 잘 나타난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분명히 하나님의 초월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고 계신 내재적 하나님을 함축적으로 일컫는 단어이다. 2)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초월성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천지를 창조하시는 모습에서 극명하게 나타고 있다. 천지 창조 속에 인간은 한 피조물일 뿐 천지 창조의 역사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초월해 계시며 그의 창조물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넘을 수 없는 초월성을 갖고 계시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사건들은 자연적인 현상과 요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초월성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내재성마저 하나님의 초월성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칼 바르트(K. Barth)와 브라운(W.A. Brown)이 있다. (1) 칼 바르트(K. Barth)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보여 주신 것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의 ‘자기계시’조차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본성, 소유, 행위의 순수한 한계와 순수한 시초이며 인간과 모든 인간적인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무한한 질적인 차이 속에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 브라운(W.A. Brown)은 만약 하나님이 세계의 근거와 세계의 깊이로서 이 세상에 매어 있다면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되는 자신의 자유와 독자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언제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하나님의 주권은 쉽게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휴머니즘적인 사랑은 쉽게 동질화 될 수 있다. 즉, 다시 말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한 심판과 징벌도 하나님 사랑의 일부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는 없다. 그의 초월적 선택과 주권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내재성 하나님의 내재성은 역사적으로는 타락과 회개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전쟁에 개입하시며 개인의 삶을 주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의미한다.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로빈슨(John A. T. Robinson) 등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1) 본 회퍼는 하나님은 주변 세계나 배후 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의 중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는 ‘세상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9 (Aufl, 1959), 184f; 필만, 『교의학』, 189). (2) 틸리히는 관념주의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은 내재화된 초월자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초월성보다는 인간의 삶 속에 내재화된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3) 로빈슨은 하나님은 세계 위에, 또는 세계 밖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깊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인간의 자율성은 사라지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없으며 세상의 악과 부조리 또한 하나님의 의지로 치부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위험에 빠질 우려도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균형을 잡지 못하면 신앙은 변질되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의 모습은 심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깊은 신학적 고찰과 신앙적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11.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 신론 (The Doctrine of God) - 2
  • 신 존재 증명은 이성적 측면에서 하나님을 증명하고자 한 노력 조직신학은 신학의 여러 주제들을 조직적으로 세분화하고 체계화시켜 다루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성령론은 성령에 대해서만 구원론은 구원에 대해서만 기독론은 그리스도에 대한 것만을 다루게 된다. 같은 맥락으로 신론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인데 신론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신 존재 증명’이다. ‘신 존재 증명’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말일 수 있다. 어원적인 뜻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 존재 증명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이성적인 측면에서 증명하고자 하는 다소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신 존재 증명의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목적론적, 우주론적, 존재론적, 도덕적 신 존재 증명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이론과 신학적 접근에 대해 부정적인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1)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 신 존재 증명 이론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것이 우주론적 증명이다. 우주론적 증명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론적 논증은 복잡한 이론이나 수사학적 기교가 아닌 간결한 논증으로 시작한다. 그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발전하고 확장되고 있는 우주의 근원을 소급해 올라가면 우주의 시작이 된 제1원인(prima causa)을 발견하게 될 텐데 이 제1원인이 되는 존재가 신이라고 생각했다. 우주의 근본 원인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신 존재 증명에 관한 논쟁은 이후 활발히 진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중세를 지나면 인간의 이성에 대한 자각과 인식이 발달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의 차원이 아닌 이성의 차원에서 증명하고자 하는 논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중세시대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존재 증명을 받아들여 신 존재 증명을 더욱 세분화하고 확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인 모든 우주의 근원이 되는 ‘제1원인’이라는 말 대신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움직임(movement)에는 그것을 일으킨 힘과 움직임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시작된 움직임은 또 다른 운동을 만들어가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간다. 이렇게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모든 움직임의 원인을 찾아 올라가면 결국 최초의 움직임을 가능케 한 근원적인 힘의 요소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힘은 어떤 외부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즉 다른 것에는 영향을 줄 수 있으나 그 어떤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라고 했으며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논증했다. 2) 존재론적 논증(ontological argument) 존재론적 증명은 철학적 사고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인데 중세 시대 더욱 활발해졌다. 중세의 철학자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존재론적 논증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다. 안셀무스는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이다. 스콜라학파는 성경과 신학을 해석하는데 철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이성으로 기독교 신앙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많이 했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 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 인간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완전’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기에 한계가 있는 ‘유한’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참과 거짓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인간을 발견하는 순간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중세의 위대한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을 이어받았다. 데카르트는 안셀무스와 달리 존재론적 증명을 조금 더 구체화했다. 그는 하나님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논증함에 있어 인간의 이성과 사고 능력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신과 인간의 연관성’ 속에서 존재론적 증명을 논증해 나갔다.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자아’는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증명하려고 했던 신 존재 증명은 기독교의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라 ‘철학자의 신’이라는 비평을 듣기도 한다. 3) 도덕적 증명(moral argument)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서로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설명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는 신 존재 증명에 대해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그가 주장한 신 존재 증명은 ‘도덕적 증명’이다. 비록 인간의 한계와 죄를 짓고자 하는 본성으로 인해 좌절될지라도 인간은 선과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다. 여기에는 인종, 성별, 나라, 언어, 문화적인 차이가 없다. 종교가 다를지라도 모든 인간은 도덕적인 삶을 추구한다. 이것은 모든 인류가 추구하고 있는 최고의 도덕적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도덕적 개념을 인간에게 창조한 분이 존재하며 그분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 중 신 존재 증명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학자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 증명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모두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제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토 베버(Otto Weber, 1902~1966)는 신 존재 증명을 ‘하나님을 세계화 또는 이성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신 존재 증명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오류에 빠질 위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순절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의 세계와 인간의 이해와 한계의 밖에 스스로 계신 분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07.0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 신론 (The Doctrine of God)-1
  •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 조직신학의 신론은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 속성과 사역에 관한 신학적 접근과 이해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고 이에 반에 유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신존재 증명'이라고 한다. 키에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모욕"으로 치부하기도 했다(앤터니 티슬턴, 『조직신학』, 61).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하나님이 누구신지 규정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존재는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서 드러나며 인간과의 소통을 통해 어떤 분인지 그의 속성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이해 신약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구약의 하나님 이해는 차이점이 있다. 이 말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 다만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이해한 것과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신약시대 기독교인의 하나님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1) 구약의 하나님 이해 구약시대의 하나님을 대표하는 말은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함과 동시에 전적인 차별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다윗이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거룩의 집약체인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길 때 흔들리는 법궤를 잡았다가 죽은 웃사의 이야기(삼하 6:1~7)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에 근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임재 속으로 자의적으로 들어갈 수 없다. 민수기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민 23:19)라는 말로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주인(아도나이)이며 인간은 그의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구약의 하나님 이해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구원 사역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2) 신약의 하나님 이해 구약의 하나님 이해가 '거룩'이라면 신약의 하나님 이해는 '사랑'이다. 셀 수 없이 많은 구약의 구절에서 하나님의 거룩이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신약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곧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요일 4:8, 16). 또한 구약의 거룩하고 죄를 심판하시는 무서운 전능자 하나님은 신약에서 '아빠, 아버지'로 기록되고 있다(롬 8:15). 이런 '하나님 이해'의 전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졌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과 같이 되셨고, 인간을 심판이 아닌 사랑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빌 2:6~8).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하나님이 되었고,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되었으며, 주인이 자신의 아들 안에서 자신을 배반하고 타락한 인간의 '아빠, 아버지'가 되셨다. 신약과 구약의 성서적 '하나님 이해' 외에도 교부와 중세시대는 물론 현대 신학자들에게 하나님 이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3) 교부와 중세시대의 '하나님 이해' 교부들은 이성과 논리를 통한 철학적 신학적 '하나님 이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초기 기독교 변증가인 저스틴(Justin, 100~165)은 하나님을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분'이라고 규정했으며, 클레멘트(Clement, 150~215)는 하나님은 '증명될 수 없고, 파악될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중세 신학자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철학적 언어를 사용해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했다. 『신학대전』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하나님을 '최초의 원인'(causa prima), '순수한 현실'(actus purus)이라고 이해했다.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하나님은 진노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이고, 은총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이라고 이해했다. 이 말은 무서움과 파괴적인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없으며, 은총 가운데 하나님의 참모습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한, 불타는 화로'이며 선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루터 못지않게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멜란히톤(Melanchthon, 1497~1560)은 하나님을 율법과 복음의 이중적 인식론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율법은 하나님의 생소하고 익숙하지 않는 활동이고, 복음은 고유한 본래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이나 본질로 보지 않고 사랑인 하나님에게 따라오는 불가피한 그림자로 이해했다. 2.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론(Erroneous Theories about God) 하나님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잘못된 접근 방법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들이 무신론(atheism), 불가지론(agnosticism), 유물론(materialism), 범신론(pantheism), 이원론(dualism), 다신론(polytheism), 이신론(deism) 등이다. 1) 무신론(atheism) 무신론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다. 무신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철학적 무신론이다. 니체(F.W. Nietzsche)가 말한 '신은 죽었다'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실존론적 무신론이다. 하나님이 실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증명할 수도 없고 인간의 삶에 개입할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2) 불가지론(agnosticism)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인정한 기독교적 사고 같으나 반기독교적인 사상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인간 속에 두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롬1:19). 3) 유물론(materialism)과 이원론(dualism) 유물론은 영(spirit)과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 자체를 부인한다. 모든 영적인 현상은 뇌의 작용일 뿐이고, 유물론자들에게 죄는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이원론은 영과 물질의 영역을 구분하고, 모든 물질은 악하고 오직 영만이 선하다고 믿는다. 4) 다신론(polytheism), 범신론(pantheism), 이신론(deism) 다신론과 범신론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다신론은 '많음'을 의미하는 'poly'와 '신(神)'을 의미하는 'theos'가 합쳐진 헬라어 합성어로서 많은 신의 존재를 믿으며 하나님도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범신론은 힌두교와 같이 하나님과 우주만물을 동일시하는 사상으로 우주가 곧 하나님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신론은 하나님과 피조 세상을 분리하는 것이다. 전능자가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지만 피조물을 유기했으며 더 이상 인간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런 종교적 철학적 사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으며, 그의 본질과 속성에 가까이 갈 수도 없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04.03 / 이상윤 목사 기자

    신앙으로 세상보기
    한글, 빛나는 우리의 보물
  • 한국어 학습자가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0일 코리아헤럴드가 교육부 자료를 입수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어를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곳은 세계 42개국 1806개 초 중학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3년 만에 40%가 급증한 수치입니다. 온라인상에서의 한국어 열기 또한 뜨겁습니다. 5억 명 회원을 둔 글로벌 외국어 학습 서비스 ‘듀오링고’는 최근 ‘2022년 듀오링고 언어 리포트’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어 학습자는 1070만 명으로 전년 대비 29%가 증가, 수강자 수가 많은 언어 순위 5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향학열이 높아진 데는 물론 ‘한류 열풍’이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한글’ 자체가 지닌 문자로서의 탁월성과 매력입니다. 실제로 한글은 여러 ‘소리글자’ 가운데서도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입니다. 열 자의 모음, 열 네 자의 자음, 27종의 받침을 활용해 수천 개의 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음소문자로서 세계 공용어화 되어 있는 영어와 견주어도 효율성이 월등합니다.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다르며,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분되고, 꼭 글자대로 읽혀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발음기관과 발음 작용을 본떠 만들어진 한글의 과학성은 정보화 시대의 진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보면 하늘을 뜻하는 ‘·’, 땅을 뜻하는 ‘ㅡ’, 사람을 뜻하는 ‘ㅣ’ 석자로 수십 가지의 모음을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자음은 동일한 자판을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예삿소리(ㄱ)→거센소리(ㅋ)→된소리(ㄲ) 순으로 변환돼 간단한 조작으로 모든 글자를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뛰어난 한글의 편이성이 우리의 높은 휴대전화 보급률과 선도적 기술축적을 가능케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울러 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특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정연하게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두에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동기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말이 공용되는 한자와 통하지 않아 백성들이 제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실정임을 긍휼히 여겨 쉽게 익혀 편하게 쓸 수 있는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점을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는 보다 실감 있게 설명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한글은 이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자주적 실용주의가 투영돼 구성원리가 간명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문맹 퇴치 신화’를 이룩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습득의 용이성’이라는 한글의 장점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전도의 사명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역, 신분, 성별의 구별 없이 두루 보급되고 읽혀졌습니다. 그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가며 전도했고,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배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은 “한글이 진정한 우리 언어로 빠르게 자리 잡는 데 성경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국민일보 우성규 기자의 언급대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의 보급으로 한반도는 문맹에서 벗어났고, 이를 통해 전해진 복음의 메시지는 한국교회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됐던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한글임에도 근래 우리 사회의 한글 홀대는 선을 한참 넘어섰습니다. 온갖 은어, 비어, 속어, 정체불명의 약어와 합성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공공 방송에서조차 한글 규범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단 78년의 세월이 초래한 남북한 간의 언어 이질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민족의 명절인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북이 함께 기념하는 절기가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서 ‘설날’은 지금까지 우리 겨레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명일(名日)입니다. 궁극적인 ‘남북통일’은 단순한 ‘제도적 통일’을 넘어 ‘사람 간의 통합’에까지 이르러야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시풍속의 존속과 공유는 통일 여정에서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글은 다름 아닌 생각과 정신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말과 글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민족공동체로서 기본적 공감대의 토대가 이미 마련돼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이 기반이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방지 대책이 시급히 강구돼야만 할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글은 빛나는 우리의 문화 자산입니다. 겨레의 보물인 우리말, 우리글을 바로 지키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 온 국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과의 귀중한 소통 매체인 한글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언어가 역사와 문화의 창고를 여는 관건이듯이 성도들에게 한글은 은혜의 보고인 성경을 여는 소중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카타르의 낭보
  •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짓는 의미 있는 분수령이 됐습니다. 사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954년 제5회 스위스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다섯 번이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음에도 단 1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6월 4일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2대 0으로 꺾은 후 강호 포르투갈, 이탈리아, 우승 후보 스페인까지 연달아 격파하며 4강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모두에게 축구는 ‘그냥 축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팀의 경기를 매개로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춤추고 함께 함성을 질렀습니다. 세계적 명물로 자리 잡은 자생적 ‘길거리 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4강 신화에 세계가 놀랐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 스스로였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신감, 동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적 유대감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이 열기는 IMF 경제위기 극복, 폭발적인 참여민주주의 확대, 창발적인 한류 문화 확산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22년, 제22회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통계전문가들의 ‘16강 진출 가능성 9%’의 예측을 여지없이 깨뜨린 이 반전 드라마는 투철한 ‘원팀 정신’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위시한 코치진과 27명의 선수들이 똘똘 뭉쳤습니다. 그 결과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국형 ‘빌드업 축구’가 가능했고, 어떤 팀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강인한 뚝심이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구성원들 간의 신뢰 역시 돋보였습니다. 특히 주장 손흥민 선수의 리더십은 발군이었습니다. 그는 월드컵을 3주 앞두고 소속팀 경기에서 당한 안와골절로 안면 보호대를 착용한 채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년간 마스크를 쓰고 계신 국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의연히 대답했습니다. 개막 전 “단 1%의 가능성이 있어도 앞만 보고 달려가겠다”며 부상 투혼을 예고했던 그는 약속대로 “몸이 부서지도록” 뛰었습니다. 실제로 H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벼랑 끝에 몰렸던 한국팀은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황희찬으로 연결된 극적인 역전 골로 포르투갈에 2대 1 승리를 거두며 16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16강전 진출이 확정된 직후 권경원, 조규성 선수는 관중에게서 건네받은 태극기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뚜렷한 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본래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가 7수 끝에 세계 대회를 제패하며 했던 이 말은 다시 새롭게 부각되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선 대회 내내 보여준 대표팀의 모습이 압축된 표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흔들리는 이 세대에게 던지는 속 깊은 응원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팀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위축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불퇴전의 투혼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기간 특별히 우리 팀의 경기가 열렸던 13일간 축구 덕택에 대한민국은 모처럼 하나가 됐습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모두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표팀의 선전은 코로나 블루, 경제 한파, 잦은 사회적 갈등으로 침체돼 있던 한국 사회에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또 한 번의 ‘송구영신’의 시간을 맞으며 영혼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 스타디움을 뛰고 달렸듯 성도들도 인생의 경기장을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경주자처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인생행로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감사한 것은 이 신앙 노정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스타플레이어로 여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는 말씀대로 열렬한 서포터가 돼 뜨겁게 응원해 주십니다. 독자 여러분!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스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팬이 되어주십니다. 다가오는 2023년 새해, 예수님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12.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링컨의 추수감사절
  • 현직인 조 바이든 대통령을 포함해 46명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미국민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입니다. 이런 현상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가 이룬 위대한 업적과 그가 지닌 비범한 인격 때문입니다. 먼저 링컨은 ‘남북전쟁’(1861~1865년)을 승리로 이끌어 미합중국을 붕괴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또한 반윤리적인 노예제도의 종식을 주도해 민주주의 체제 확립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 최고의 공화정,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못지않게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링컨의 인품입니다. 우선 그는 정직했습니다. ‘정직한 에이브’(Honest Abe)라는 단어는 보통명사화 되어 에이브러햄 링컨의 애칭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또한 링컨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승전 소식을 듣고 “주님은 우리 북군 편”이라며 기뻐하는 참모들에게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인지 아닌지는 내 관심사가 아닙니다. 오직 내가 그분의 편에 서 있는지를 저는 늘 성찰합니다.” 아울러 링컨은 성실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교육이라곤 초등학교 8개월 수학이 전부였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끊임없는 독서와 독학으로 미국 역사상 손꼽히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행한 연설과 직접 쓴 글들은 국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역사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링컨은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기독교계의 스테디셀러인 전광 목사님의 책 제목 그대로 그는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이었으며,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인생을 개척해 간 실천하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실로 미국 역사에 있어 ‘남북전쟁’은 국가 존립이 달린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합중국을 구성하는 각 지역 간의 첨예한 이해 갈등이 ‘노예제도 존폐 논쟁’으로 표출돼 내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국난의 한복판에 에이브러햄 링컨이 있었습니다. 그는 ‘친노예주의’‘친분리주의’를 내세운 ‘남부국가연합’에 맞서 연방을 지켜내고 반인권적인 노예제도를 종식시켰습니다. ‘정의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인품, 경륜, 믿음,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역사학자이며 전기작가인 굿윈(Doris Kearns Goodwin)은 전시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기틀을 지켜낸 링컨을 ‘정치적 천재’(political genius)로 묘사했습니다. 과거의 정치적 경쟁자들과 우정을 만들어내고, 적대감으로 확대될 수 있는 그들의 상처받은 감정을 미연에 치유했습니다. 부하들의 실패의 책임은 자신이 떠맡는 대신 공훈은 그들과 공유했습니다. 또 실수로부터 겸허히 배울 줄 아는 비범한 역량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대회전(大會戰)을 분기점으로 전황은 달라졌습니다. 전쟁 초기 수세에 몰렸던 북군이 이 전투를 계기로 확연한 승기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링컨의 관심은 전후 남부와 북부 간의 화해와 통합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강연 등을 통해 용서와 관용, 단합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내전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이미 피해와 상처는 막대했습니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의 사상자만 4만3000명에 달했습니다. 9개월 후 전쟁이 종결됐을 때 집계된 전사자는 무려 61만명이었습니다. 특히 남부의 경우 경제 사회 전 분야가 재기불능의 상태로 몰려 전후 재건 방안이 신속히 강구되어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깊어진 적대감의 골을 메우는 범국가적 차원의 치유(healing)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 1863년 10월 3일 링컨 대통령은 ‘추수감사절’을 ‘국가 경축일’로 선포했습니다. 본래 1621년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 개척자들에 의해 처음 지켜졌던 이 절기는 1789년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의해 국경일로 제정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3대 제퍼슨 대통령 정부 이래 “영국 왕정 시대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국경일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링컨은 참혹한 내전의 와중에서 50년 만에 이 뜻 깊은 국가적 감사의 날을 부활시켰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현명한 왕들은 나라의 위기 때마다 우상을 철폐하고 절기를 바로 지킴으로서 국가 쇄신의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링컨 또한 경건했던 선조들의 순수한 신앙 유산을 되새기고 계승하는 것에서 전후의 평화, 화합, 통일의 계기를 찾으려 했습니다. 지난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로 나라 전체가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최악의 압사 사고로 158명의 고귀한 생명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모두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 엄청난 충격과 비탄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서로를 따뜻이 감싸는 관심과 배려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11월은 감사의 계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의 국경일 부활을 통해 찢겨진 나라와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 했던 링컨의 예지를 새삼 반추하게 됩니다. 감사는 신앙의 원점이며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어려운 시대이기에 더욱 절절한 감사의 마음으로 이번 추수감사절을 맞게 됩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11.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생명과학 이야기
    시금치와 뽀빠이
  • 비타민 A와 C, 미네랄 풍부한 건강식품 너무 많이 먹으면 결석 생길 수 있어 시금치는 고려 말에 중국을 통해 국내로 들어온 귀화식물이다. 한국 사람이 즐겨 먹는 국물이 있는 잎줄기채소 중에 된장을 풀어서 끓여 먹는 아욱, 근대, 배추, 쑥갓과 함께 시금치는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채소에서 느낄 수 없는 약간 달짝지근한 맛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겨울철 불규칙하지만 삼한사온의 반복되는 날씨변화에 잎이 얼었다 풀렸다 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존한다. 이때는 잘 성장하지도 못할 뿐더러 잎에 누렇게 마른 것과 가장 자리가 추위에 동상을 입어 상흔이 남아 있는 시금치가 연중 가장 달고 맛있을 때이다. 특히 남쪽 지방 섬이나 해안가에서 겨울에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땅바닥에 낮게 붙어 자란 노지의 섬초, 남해초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재배된 것과 비교되지 않게 맛과 향이 있다. 그 중에서도 경북 포항시 해안에서 10월 말부터 3월까지 노지에서 수확하는 포항초 시금치는 염분을 포함한 다양한 미네랄(minerals)이 많아서 으뜸상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대부분의 식물이 그렇듯이 시금치도 성장하는 기후나 환경에 따라서 다르고 출시되는 계절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다. 또한 재래종과 새로운 개량종들은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 다를 뿐더러 성장 속도가 다르며 그 맛과 향에서 차이가 있다. 비록 겨울 시금치가 여름 시금치보다 성장이 더디고 크기는 작지만 잎이 두텁고 짙은 초록색으로 풍미가 더 한다. 시금치 하면 미국에서 만들어진 만화영화 시리즈가 생각난다. 해군복을 입고 큰 근육의 팔뚝을 자랑하는 뽀빠이가 악당을 물리칠 때면 시금치통조림을 먹고 초인적인 힘을 냈다. 이것은 사실 시금치의 효능을 과대시킨 것이다. 영양학적으로 보면 시금치는 큰 근육과 힘을 낼 만큼의 단백질이나 열량을 갖추고 있지 않다. 다른 채소나 식품보다 철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시금치 외에 일부 식물은 수산이라고 하는 옥살산을 포함하고 있다. 옥살산 이온과 칼슘 이온이 체내에서 결합하면 옥살산칼슘이 형성되어 신장과 요로, 그 외의 부위에서 결석이 발견될 수 있다. 일부 연구보고서에서 옥살산이 있는 시금치를 지속적으로 많이 먹는다면 개인에 따라서 결석의 핵물질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옥살산칼슘은 소변으로 배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금치는 비타민 A와 C가 풍부하며 각종 미네랄이 많은 잎줄기채소로서 손색이 없는 건강식품이다. 다양한 나물무침이나 국거리가 되며 김밥과 샐러드에서 자주 사용되는 식재료임에는 틀림이 없다.
  • 2022.11.25 / 이미나 기자

    가을이 주는 숲의 선물 도토리
  • 가을의 숲은 초록색에서 형형색색 다양한 색으로 울긋불긋 저마다 새롭게 단장한다. 그 중에 일부열매 맺는 식물은 붉거나 갈색 열매를 맺고 시간차이가 있을 뿐 성숙과정을 거쳐 가을낙엽과 함께 땅에 떨어진다. 잘 익은 밤이나 도토리들은 작은 바람에도 우박이 떨어지는 소리를 내면서 낙엽사이를 뒹구는 열매들이다. 동물들이 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으려면 가을에 잘 먹어두어야 한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을에 피하지방과 복부지방을 최대한 두툼하게 쌓아두어야 겨우내 안심이다. 숲은 봄에 연한 싹을 내고 꽃을 피운다. 여름에는 무성한 잎의 먹거리를 동물에게 제공한다. 가을에는 앞으로 닥쳐올 겨울의 빈숲에서 살아남기 위한 준비기간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이 때 동물들이 가능한 잘 먹어두어야 비축한 영양분으로 추위와 굶주림의 기간인 겨울에 살아남을 수 있다. 자연의 숲은 이들에게 겨울 준비를 위해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하는데 도토리가 좋은 식량이 될 수 있다. 도토리는 국내에 자생하는 참나무에서 맺히는 열매인데 그 종류마다 모양과 크기가 제각각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모양과 색은 비슷하다. 모두가 탄닌산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쓰고 떫은 맛으로 인해 그냥 먹기 어렵다. 열매를 잘 말려서 껍질을 벗겨내고 가루로 만들어 물에 담가서 여러 번 떫은맛을 우려낸 후 도토리분말을 밀가루 풀을 쑤듯이 저어가면서 끓여 적당한 용기에 담아 식히면 된다. 이렇듯 도토리묵을 만드는 방법과 조리하는 방법은 비교적 단순하고 쉽다. 먹을 때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양념간장을 만들어 먹는다. 그 외에 도토리묵의 조리법은 오래전부터 민간에 소개되어 있다. 각종 묵 종류에서도 도토리묵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음식일 것이다. 여름철에 무더위로 지친 이들을 위한 시원한 묵사발은 얼음을 넣고 신선한 오이와 감칠 맛 나는 육수를 넣어 만들어 먹는다.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상큼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어디 여름뿐이겠는가. 4계절 언제 먹어도 그 독특한 맛을 즐길 수 있다. 도토리묵은 외국사람들은 먹지 않는 식품으로 우리나라 사람만 먹었다. 과거 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먹을 것이 없던 때에 구황식품으로 먹던 식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민건강식품으로 누구나 좋아하는 식품이 되었다. 도토리의 탄닌산과 함께 아콘성분은 인체에 유해한 중금속을 간과 신장에서 제거하는 해독효과가 있을 뿐더러 설사를 멈추게 하며 숙취와 피로회복 등 좋은 식품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도토리의 탄닌성분은 인체의 철분과 결합하여 혈색소 생성에 방해가 됨으로 빈혈을 유발한다. 또한 변비가 있는 사람은 증세를 더욱 심화시키는 부정적인 효과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 2022.10.20 / 이미나 기자

    가장 큰 육상동물 코끼리  
  • 바다에서 가장 큰 포유류는 고래지만 육상동물 중에 가장 큰 동물은 체중이 6톤이나 되는 코끼리이다. 코끼리 무리가 지나가면 숲 속에 길이 생길정도이다. 가끔은 힘을 자랑하듯 웬만한 크기의 나무를 흔들어 쓰러뜨리기도 하고 큰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잎이나 열매를 먹기도 한다. 힘으로는 당해 낼 수 없는 괴력의 소유자로서 금수(禽獸)의 왕인 사자 같은 맹수도 감히 주변을 어슬렁거리지 못할 만큼 거대한 초식동물이다. 다 큰 성체는 하루에 약 300~400㎏의 풀을 먹는 초원의 대식가이다. 한편 물가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코로 빨아드린 흙탕물을 온몸에 뿌려 각종 해충을 퇴치하는 목욕도 하고 한 번에 약 100ℓ의 물을 마신다. 임신기간이 약 21~22개월로 성체로 성장하는 기간은 10년이며 수명은 60~70년을 산다. 현재 아프리카코끼리와 아시아코끼리 두 종류가 있다. 아프리카대륙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는 야생 코끼리는 몸집이 크고 거칠며 사나운데 비하여 아시아코끼리는 몸집이 작고 온순하다. 가축으로 길들여 운송수단으로 사용하는 인도코끼리를 볼 수 있다. 신체 중에 코가 유난히 길어서 코끼리라고 부르는데 강한 근육과 함께 민첩해서 마치 손과 같이 세밀하게 움직이며 작은 땅콩이나 비스킷도 받아서 먹을 수 있다. 긴 코는 후각세포가 많아서 개보다 2배나 더 잘 맡을 수 있다. 그 외의 특징은 치아 중에 윗니로 2개의 송곳니가 길게 자란 엄니가 있다. 마치 뿔처럼 보이는 상아(Ivory)가 긴 코와 더불어 코끼리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아프리카의 중서부 해안에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코트디부아르(Cote d‘Ivoire)국가가 있다. ‘상아해안’이라는 뜻으로 당시 많은 상아가 남획되어 유럽으로 팔려나가던 시대의 이름이다. 그 배경에는 상아를 얻기 위해 대량 코끼리밀렵이 성황을 이루던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호하고 개체를 보존하는 청지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 2022.09.21 / 이미나 기자

    성경 Think! 인생 Thank!
    평생 어부바 ... 나는 ‘하나님 껌딱지’
  • 우리가 기대고 의존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연초부터 연말까지 야훼의 눈동자가 지키셔 지난해 12월 25일 성탄절 특집으로 <금쪽같은 오둥이>가 방영됐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요즘 세상에서 다섯 쌍둥이라니 놀랄 일이다. 약 6000만 분의 1의 확률을 뚫고 태어났으니 기적 같은 일이요 좌충우돌 육아일지는 감동 그 자체였다. 다섯 아이들은 각자 그들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치명적인 눈웃음의 소유자, 포동포동 튼튼이, 할머니 껌딱지, 호기심 대왕, 수다쟁이라고 불린다. 그중 제일 약하게 태어난 할머니 껌딱지는 울면서 할머니만 찾는다. 독수리 등에 업혀 출애굽 할머니는 이 아이만 볼 수 없으니 껌딱지를 포대기에 싸 어부바를 한다. 보채고 울던 아이는 할머니 등에서 편하게 안겨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든다. 인생이 힘들고 지칠 때면 할머니가 우는 아이를 어부바한 것처럼 누가 날 좀 업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압제에 눌려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았다. 애굽인들에게 어떠한 대항도 하지 못한 채 시키는 것을 이 악물고 해야 했다. 그들이 산파에게 태어나는 남자아이를 죽이라고 하면 죽여야 했고, 태어난 남자아이를 나일강에 던지라 하면 그렇게 해야 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누리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굴복시켰고 홍해의 물을 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너게 하셨다(출 14:15~31). 또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가능하게 하셨다(출 16~17장). 애굽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업으셨을 뿐이다. “야훼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야훼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신 32:10~12). 의존할 대상이 누구인지가 중요 우리는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에 저항감을 느낀다. 의존한다는 것이 ‘약하다, 비굴하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독립적인 아이로 키우려 하고, 나이가 들어선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으려 노후를 준비한다. 성경에서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야훼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16:20) 등으로 끊임없이 ‘의존적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세계적인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는 이론의 종교가 아니며 감정의 종교도 아니다. 기독교는 의지의 종교”라고 전한다. 이 의지는 무엇을 적극적으로 하려는 그런 의지, 영어의 ‘윌’(will)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대려는 그런 의지 ‘디펜던스’(dependence)라고 말한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의존하는 ‘대상’이 누구냐의 문제이다. 할머니 껌딱지에게 할머니는 자신이 무엇이 불편한지 배가 고픈지 바로 알아차리며, 불안하고 겁날 때 등에 업히면 편안하고 안정을 주는 신뢰의 존재였다. 2023년 우리에게 들리는 뉴스들은 금리가 오르고,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집값은 계속 내리고, 코로나는 전혀 종식되지 않는 불안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불안은 돈을 쌓아두게 되고 사람을 의지하며 미래를 알려주는 점집을 찾아가게 된다.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들이 아니라(시 135:15)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다른 것들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그것들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연초부터 연말까지 야훼의 눈동자가 불안하고 마음이 어려운 상황에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힘이 된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야훼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2). 하나님 야훼의 눈동자가 우리를 지키시는데 그것도 연초부터 연말까지 365일 지키신다.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야훼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으로 메마른 땅이 촉촉이 적셔졌으며, 적절한 때에 내려주심으로 가나안 땅의 3대 산물인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얻게 하셨고 가축을 위한 풀도 풍성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신 11:11~15). 땅이 좋아 풍성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좋은 땅이 된다는 것이다. 2023년 우리에게 펼쳐질 날들의 예상 시나리오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어부바 해주시니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유대인들이 아기를 목욕시킬 때 하는 기도문이 있다. 이걸 좀 변형해서 조석(朝夕)으로 기도하면 좋겠다. 이 기도문의 핵심은 내가 누구를 기대고 살아야 하는지 그 대상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제 얼굴이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의 소망을 품게 하소서 / 제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복된 말이 되게 하소서 / 제 머릿속에 지혜와 지식이 가득하게 하소서 / 제 손은 기도하는 손이요 사람을 칭찬하는 손이 되게 하소서 / 제 가슴에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품게 하소서 / 제 오장육부가 건강하여 튼튼하게 하소서 / 부지런한 다리가 되어 온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소서 / 교만한 자리에 앉게 마시고 하나님이 원하는 자리에 앉게 하소서 / 보이는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Think! Thank! Q1. 하나님이 언제 어부바를 해주셨으면 좋겠나요? Q2. 당신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대상이 있나요? Q3. 이 말씀을 가족과 함께 암송해 보세요. “네 하나님 야훼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야훼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2).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3.01.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적 자서전 … 하나님의 시각으로 삶 재구성
  • 2022년 되돌아보니 곳곳에서 하나님과 조우(遭遇) 새로운 시야로 인생의 목적과 방향 돌이킬 수 있어 “마지막 잎새 한 장 달려 있는 / 창 밖의 겨울 나무를 바라보듯 / 한 해의 마지막 달인 / 12월 달력을 바라보는 제 마음엔 / 초조하고 불안한 그림자가 덮쳐옵니다 / 연초에 세웠던 계획은 뿌리를 내렸나요? / 감사를 잊고 살진 않았나요? / 한해를 돌아보는 길 위에서 / 저녁놀을 바라보는 겸허함으로 / 오늘을 더 깊이 눈감게 해주십시오 / 더 밝게 눈 뜨기 위해” 이해인 시인의 <한 해를 돌아보는 길 위에서>이다. 며칠 남지 않은 2022년을 보내려 하니 여러모로 생각과 감정이 복잡하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정리하면서 후회를 하기도 하고, 새롭게 미래를 계획하기도 한다. 특히 신앙인이라면 때마다 하나님과의 조우(遭遇)를 기억하며 그분의 은혜로 살았음을 고백하게 된다. 영적 자서전 … 영성 훈련일지 보통 유명한 사람이 지나온 삶에 대해 쓰는 걸 자서전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의 매일을 기록한 일기나 성찰일지를 쓰고 모으면 이것도 자서전이 될 수 있다. 자서전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는 좋은 재료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어떻게 함께하셨는지를 발견하고 기록할 수 있는 영성 훈련일지이다. 자신의 삶을 자서전 형식으로 쓴 사람 중 어거스틴(St. Augustine)의 『고백록』(Confessiones)이 가장 유명하다. 어거스틴은 책에서 “내 영혼의 의사이시여, 내가 무슨 목적으로 이 고백을 하고 있는지 나로 하여금 확실히 알게 하소서. 당신은 내 과거의 죄를 용서하시고 덮어 주셔서 신앙과 성례로 내 생을 변화시키셨고 당신 안에서 행복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내 고백을 읽고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감명을 받고 일어나게 하소서”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영적 자서전(spiritual autobiography)은 첫째로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한다. 일반적인 자서전은 자신을 홀로 주인공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영적 자서전은 하나님을 공동 주연으로 하고 있다.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고 기록하다 보면 그 어떠한 것도 그냥 일어나거나 발생하는 일들은 없다. 영적 자서전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삶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삶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올 한 해 일어났던 고통, 아픔, 시련, 감격, 축복, 후회 등 이 모든 것들의 숨은 의미들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셋째, 영적 자서전에는 전체를 관통하는 특별한 태도가 있다. 바로 감사다. 되돌아보며 … 하나님과의 조우 자서전 쓰기에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연대기적으로 접근하기도 하고 삶의 어떤 중요한 주제들을 정리해 나가기도 한다. 맥아담스(Dan P. McAdams)는 이 두 가지를 통합시켜 시간과 주제의 양면성 속에서 개인의 영적 삶의 이야기를 이해하려 하였다. 실제로 써보려면 우선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첩을 열어 시간, 사건별로 사진을 선택해 그 밑에 제목을 적어보자. 결혼, 사별, 취직, 유학 등 외형적으로 큰 사건이 있을 수 있고, 지나가던 사람과의 우연한 대화,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작은 책, 지하철을 기다리다 무심코 읽게 된 하나의 시일 수도 있다. 1월 인생 첫 침례, 3월 병원 입원 등 자신에게 있었던 내용들을 적어보자. 자신이 어디에 있었고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었는지 등을 써 내려간다. 이때 자신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부모, 자녀, 배우자, 친구, 선생님 등을 들 수 있다.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책이나 학문을 통해 깊이 영향을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들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이해되지 않고 견디기 힘들었던 광야의 시간들, 스스로 놀랄 정도로 부어주신 축복, 때마다 결정하고 선택했던 순간들을 통해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시각으로 삶을 재구성하면서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의미들(the meaning of life)을 알게 된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미래에 대한 전반적인 계획과 자신이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비전을 써 내려 가게 된다. 모든 것이 … 다 은혜였다 신명기 8장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 자서전과 같은 책이다. “네 하나님 야훼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 8:2).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지나온 광야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어떻게 하셨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3).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야 함을 알려주신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신 8:4).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살려주셨다. 사도 바울도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고백하였다. 2022년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Think! Thank! Q1. 월별로 어떠한 일들이 있는지 나열해 보세요. Q2.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기억하게 된 시기, 사건이 있으신가요? Q3. 바울의 고백처럼 2022년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해 보세요(고전 15:10).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2.12.0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거룩한 독서 ‘렉시오 디비나’
  • 쉬운 성경들 통해 어려운 단어 쉽게 이해해
    단순한 읽기 뛰어 넘어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게 해 지난 8월 한 웹툰 작가의 사인회 예약 과정에서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다. 주최 측은 ‘심심한’ 사과의 뜻을 밝혔는데, “나는 하나도 안 심심한데 무슨 소리냐”라는 트윗이 쏟아졌다. ‘매우 깊고 간절하다’라는 의미의 ‘심심하다’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뿐이 아니다. 교사가 한 학생에게 ‘좀 고지식한 면이 있는 것 같다’라고 면박을 줬는데 오히려 학생은 기뻐했다. ‘융통성이 없고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을 지칭하는 고지식(固知識)을 ‘지식이 높다’(高知識)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짧은 채팅 위주의 대화가 습관화되면서 어휘력과 표현력 즉 문장을 이해하는 ‘문해력’의 저하가 심각해졌다. 여기에 무분별한 신조어 사용으로 기본 단어에 대한 무지를 가져왔다.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애써 찾아보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읽기는 어떨까? 옛날말로 쓰여진 고리타분한 책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암호의 세계와도 같다. 하나님의 러브레터인 성경을 어떻게 하면 단어 해석에서 넘어지지 않고 달콤하게 읽을 수 있을까? 거룩한 독서 ‘렉시오 디비나’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는 독서 또는 읽기를 뜻하는 ‘렉시오’(Lectio)와 거룩, 신성을 의미하는 ‘디비나’(divina)의 합성어이다. 거룩한 독서를 의미하는 말로, 성경 본문을 눈으로 읽고 마음에 곱씹으면서 좀 더 주님을 깊게 만날 수 있다. 성경을 읽을 때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성경 속 단어가 생경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단어를 일상적인 용어로 풀어낸 성경을 읽으면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이나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을 추천한다. 요즘은 핸드폰에서 다양한 종류의 성경 앱을 내려 받아 읽고 보고 들을 수 있다. 갓피플성경어플, 홀리넷 등에 들어가면 개역개정과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시편 8편 4절에 인자(人子)를 사람의 아들, 우리로 풀어쓴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개역개정)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새번역) “사람이 무엇인데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인데 주께서 그를 돌보십니까?”(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걱정하시고 우리 인생길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살뜰히 살피십니까?”(메시지 성경) 거룩한 독서의 순서 현재 읽고 있는 성경 본문이거나 『감사큐티 365』를 본문으로 시작하면 된다. 본문의 분량 제한은 없지만 최소 4절에서 최대 10절 사이로 읽기를 권장한다. 추천하는 거룩한 독서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정독 묵상과 깨달음을 위해 성령을 초대하는 짧은 기도를 여러 차례 드린다. “성령님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입니다” 그 뒤에 성경 본문에 관심을 집중하여 온 마음으로 꼼꼼하게 편견 없이 정확하게 읽어 나간다. 2) 묵상 본문에서 자신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단어나 구절이 무엇인지 주목하면서 자신의 삶의 어떠한 부분과 연결되는지를 생각하고 정리한다. 이 단계에서는 주님이 참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존재인가를 묻고 계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갈망하게 된다. 3) 기도 말씀을 통해 우리를 만지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시간을 갖는다. 자신과 이웃을 위해 기도하게 되며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이 시간을 통해 더더욱 하나님과 친밀한 내적 대화를 나누게 된다. 4) 관조 특별히 무슨 생각이나 궁리를 하기보다는 그냥 말씀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된다. 이 때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의 마음을 얻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람과 모든 사건을 보게 된다. 어디에서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나를 넘어서는 성경읽기 “기독교인이니 성경을 일독해야지 말씀 안에서 위로를 받아야지”라고 읽기 시작한 성경읽기가 어려운 단어로 성경책을 덮기도 하지만 나를 넘어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게 한다. 단순히 정보를 얻는 단계에 머물지 않고 변화로 나아가게 한다. 칼 바르트는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통해 성경 읽기를 “어둡고 통제된 창고에서 나와, 확 트이고 햇살이 비치는 바깥세상으로 들어서는 것”이라 설명한다. 유진 피터슨은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 우리는 전적으로 낯선 하나님의 세상, 창조와 구원의 세상이 끝도 없이 우리 위로 그리고 우리 너머로 펼쳐져 있는 그러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경읽기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의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 여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성경을 보다가 펴놓은 로마서 13장을 읽다가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 성자가 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읽다 은혜를 받고 중세의 죽은 교회를 살려내는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말씀을 읽고 자신을 넘어선 구름 같은 증인의 대열에(히 12:1) 이번엔 당신이 설 차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Think! Thank! Q1. 성경을 읽을 때 단어의 뜻이 어려워 무슨 말인지 몰라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나요? Q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단순히 문자를 아는 것에서 뛰어넘어 당신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Q3. 렉시오 디비나의 순서를 적어보세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2.10.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고전(古典)에서 길을 찾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 찰스 쉘던
  • 선한 영향력 행사할 수 있는 로드맵 제시
    찰스 쉘던은 많은 사람이 명목상의 크리스천으로 아무런 변화 없이 사는 데에 안타까움을 느껴 우리의 삶 속에서 크리스천들이 “나의 입장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묻고 그 대답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실직한 인쇄공으로 가장하여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와중에 크리스천들의 무관심에 충격을 받았고 저술의 소재를 모을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배경은 레이먼드시. 사회 지도자층과 유복해 보이는 교인들이 많이 출석하는 레이먼드 제일교회에 한 실직당한 노숙자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담임목회자 헨리 맥스웰은 노숙자가 쓰러져 죽은 후 큰 충격에 휩싸인다. 맥스웰 목사는 교회 안에 머무는 믿음이 아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변화를 위해 교인들과 함께 서약서를 작성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하는 행동강령이다. 찬양대에서 봉사하는 레이첼 윈슬로우는 대형 오페라단 입단 요청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전념하기로 결단한다. 레이먼드시의 가장 큰 신문사인 ‘레이먼드 데일리 뉴스’의 사장 에드원드 노먼은 적자를 감수하면서까지 편집자를 예수님을 모시고 경영의 변화를 꾀한다. 사역자들은 부패와 죄악의 오지인 렉텡글에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찐하게 실천한다. 개인의 결단은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1년 동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성도들의 결단은 캠페인이 되었다. 대도시 시카고에도 그 열기가 전달되었으며 전국 교회들로 퍼지는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소금과 빛의 영향력은 변화를 가져온다. 변화는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는 부패를 씻어내고 이타적인 영적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그 주변을 온통 쑥 세상으로 만드는 쑥의 번식력 같이 크리스천의 영향력 또한 강력해야 한다. 가마솥은 무쇠로 만들어 웬만한 화력으로는 잘 달구어지지 않지만, 한번 달구어지면 쉽게 식지 않는다. 이 책은 지금까지 5천만부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이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바라건대 본서를 통해 말씀을 실천하는 결단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대해본다. 미래를 전망하는 책들이 공통적으로 내놓는 키워드 중 하나가 ‘선제적 대응기술’이다. 살면서 마주치게 되는 모든 순간에 미리 알아서 배려해주는, 현재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기술이다. 사회적 약자를 적극적으로 돕고 사고 예방 차원에서도 유용하다. 낮아진 한국교회의 신뢰도 회복을 위한 퍼블릭 처치(Public Church)에 대한 요구도 선제적 대응기술의 적용으로 답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한 찰스 쉘던의 책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는 그 모티브를 적절하게 제공한다.
  • 2023.01.06 / 이미나 기자

    순전한 기독교 / C.S 루이스
  • 벽 앞에 서있는 청년들이 읽으면 좋은 책
    팔로잉하는 청년 중에 시도 때도 없이 달리는 형제가 있다. 운동선수도 아닌 그는 바쁜 직장 생활 중에도 곶감 빼먹듯이 시간을 내어 달린다. 급기야는 지난달 개최됐던 베를린마라톤에서 풀코스를 완주했다. 그런 그가 절대 빼먹지 않는 것이 온라인예배다. ‘플로팅 크리스천’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자유로운 신앙 패턴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신조어다. 온라인예배를 드리며 사회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움직이고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신앙생활을 추구한다. 그들에게는 신앙적 돌봄이 더욱 필요하다. 교회생활은 마라톤과 같은 경주다.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런 우리가 팬데믹이라는 벽 앞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C.S.루이스 교수가 방송을 통해 강연했던 당시도 그러했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은 많은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루이스는 그 혼란함을 통해 흔들리는 기존 기독교인들을 보았을 것이고, 더욱더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불신자들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일터에서 때로는 술집에서 영국 국민들은 루이스의 강연을 청취했다. “제 얘기가 별로 도움이 안된다면 그냥 무시해버리십시오”라고 말하는 저자의 당당함이 강연을 묶어 펴낸 책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 책은 ‘옳고 그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살아간다. 지구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자연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스스로는 지키지 않는다. 인간은 도덕율이라는 규정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그 규정의 잣대가 상대방에 대한 것과 스스로에 대한 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의 문제는 논쟁의 의미가 아닌, 하나님에 대해 매력적인 설명을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기독교의 핵심을 논리적인 변증법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짜장면은 맛없다. 짬뽕은 먹을 만하다. 그래서 짬뽕을 먹는 게 낫다. 쉬운 변증법의 예다. 옥스퍼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그 만의 화법으로 기독교를 맛깔나게 소개한다. 교회를 떠난 청년들은 믿음을 잃어서가 아니다. 청년들에게 신학적 논쟁이나 교회사적 토론은 큰 의미가 없다. 복음의 핵심이 들려져야 한다. 그들의 언어로 들려져야 하며 토론돼야 한다. 변증법으로 복음을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변증법이든 아니든 최상이 아니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자세다. ‘안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읽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로 이 책을 자신 있게 추천한다. 특별히 교회 안팎에서 영끌로 지쳐있는 청년들에게. 임 훈(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2.10.06 / 이미나 기자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 / 조나단 에드워즈
  • 영적 감정의 핵심은 ‘사랑’
    일론머스크의 하이퍼루프는 비행기보다 빠른 이동수단이다. 한국에서는 하이퍼튜브를 개발 중인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16분 걸린다. 더 빠른 것이 흔들리는 사람 마음이다. 어느 책에선가 ‘감정 강아지는 우리에 잠시 가둬라. 지금은 이성 고양이가 움직여야 할 때다’라는 구절을 보았다. 다산 정약용이 마주했던 마지막 삶의 주제도 ‘마음’이었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한결같이 마음 즉, ‘영적 감정’을 이야기한다. 오늘 소개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감정을 분별하라’는 책이 그렇다. 신학자이면서 사회학자, 목회자이면서 철학자, 부흥사이면서 심리학자였던 그의 책이기에 탁월하다.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들을 알프스 산에 비유하고, 루터와 칼빈을 히말라야 산에 비유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에 비유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극찬했다. 살아가면서 뚜렷한 이유 없이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감정을 C.S.루이스는 세상적 가치로는 채울 수 없는 ‘실존적 빈 공간’으로 지칭했고, 존 오웬은 그 자리를 성령의 사역이 시작되는 곳으로 인식했다. 에드워즈 또한 깊은 거룩을 향한 갈망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설명한다. 에드워즈는 우리에게 두 가지 영적 감정을 권면한다. ‘사랑’과 ‘기쁨’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봉사와 섬김, 금방 식어버리는 찬양의 감정, 겉모양만 그리스도인’ 등 12가지의 거짓된 영적 감정을 대신한다. 사랑은 많은 감정들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적 감정들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심지어 사랑과 반대되는 감정인 증오도 사랑으로부터 싹튼다고 한다. 죄에 대한 증오,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기쁨, 하나님의 곁을 떠났을 때의 애통, 하나님을 바라는 소망,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열심 등도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부터 우러나온다. 영적 사랑과 영적 기쁨은 한 몸이다. 9월부터 eSIM 시행으로 한 휴대폰에 두 개의 번호를 쓸 수 있듯이 말이다. 영적 기쁨이 가져다주는 만족감과 끊임없는 추구가 일치할 수 있을까? 영적 기쁨은 인간의 본성과 영혼의 요구에 완벽하게 반응한다. 또한 기대를 갖고 살게 한다. 영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족의 한도 내에서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이 영적 기쁨이다. 저자는 사랑과 기쁨의 영적 감정들이 믿음의 실천을 통해 열매 맺는다고 역설한다. 무엇보다도 나타나는 열매를 통해 분별하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생애 동안 두 번의 큰 부흥을 경험했던 에드워즈였기에 ‘영적 감정’에 대한 그의 관찰력은 프로파일러 이상 디테일하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고전이다. 임 훈(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2.09.07 / 이미나 기자

    하나님과의 동행
    [강신호 목사의 하나님과의 동행]믿음은 무조건 순종을 요구하나요?
  • 우리는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통해서 주님께서 부르시면 무조건 그물을 던져두고 생업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도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내가 말하는 것이니까 무조건 따라라”고 하셨을까요? 요한복음에서는 갈릴리호수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사건 이전의 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5~42절 말씀입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침례 요한이 요단강에 침례 받으러 온 자신을 따르던 제자들 중 두 명에게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말했습니다. 두 명 중에 한 명은 본문을 기록한 요한이며, 다른 한 명은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과 반나절 교제한 후에 안드레가 그의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나와서 주님을 소개했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이름을 ‘게바’로 고쳐 주십니다. 이후에 그들은 다시 생업을 하러 갈릴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현장인 그들의 생업의 자리로 찾아가셨고, 이미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베드로, 요한, 안드레, 야고보는 자신의 배와 그물을 던져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순종을 요구하지만, 맹목적인 순종이 아닌 인격적인 순종입니다. 이 인격적인 순종은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우리들이 주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인격적인 신뢰의 관계 속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강신호 목사(청장년국장)
  • 2022.03.13 / 강신호 목사 기자

    [강신호 목사의 하나님과의 동행] 스펙을 쌓기 위해 분주한 청년들을 위해
  • 하나님과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 보자 유럽의 3대 허무 관광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 두 번째가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동상], 세 번째가 독일 라인강의 [로렐라이 언덕]입니다. 유명하다고 해서 가 보면 휑~ 하고 돌덩이 하나 덩그러니 서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 곳이 유명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 돌덩어리에 이야기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벨기에 브뤼셀의 오줌싸개 동상은 14세기 프라방드 제후의 왕자가 오줌을 누어 적군을 모욕했다는 이야기 때문에 유명해졌고, 덴마크 코펜하겐 인어공주 동상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이야기가 있으며, 독일 라인강 로렐라이 언덕은 라인강을 항해하는 뱃사람들이 요정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도취되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 배가 물결에 휩쓸려서 암초에 부딪쳐 난파한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입니다. 만약 그저 동상만 세워져 있고 이런 이야기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굳이 그곳에 가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청년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기 보다는 스펙 쌓기에 전념하는 것 같습니다. 워렌 버핏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버드 대학 졸업장은 입사 후 3일까지만 효력이 있다.” 즉, 스펙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스펙은 너도나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스펙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결국 나는 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펙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토리입니다. 왜냐하면 스토리는 모두 똑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펙은 ‘최초 최대’라는 말을 좋아하고, 스토리는 ‘유일한 독특한 특별한’ 같은 말을 좋아합니다. 스펙은 숫자로 표현되고, 스토리는 가슴으로 표현됩니다. 스펙은 자랑하려 하고 스토리는 사랑하려 합니다. 스펙은 ‘올라온 높이’가 보이지만, 스토리에는 ‘헤쳐 나온 깊이’가 보입니다. 스펙에는 나의 성공만이 나열되지만 스토리에는 나의 약점이 오히려 경쟁력이 됩니다. 스펙은 사람을 상품처럼 순위를 매기고 스토리는 사람을 작품처럼 존중합니다. 그리하여 스펙은 자신만 1등이 되려 하고 스토리는 모두를 1등으로 만듭니다. 하나님과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던 아브라함, 요셉, 다윗, 다니엘 등 수많은 성경인물들은 자신의 고난과 시련과 역경을 하나님과 만난 이야기로 승화시킨 사람들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청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야기로 이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할렐루야!
  • 2021.12.12 / 강신호 목사 기자

    새책소개
    ‘2023 감사QT365’ 출간
  • 성경일독, QT묵상, 감동예화, 감사쓰기가 한 권에
    풍성한 신앙생활을 위한 최고의 선물 2023년 풍성한 신앙생활을 이끌 최고의 안내서 『감사QT365』 가 출간됐다. 이번 감사QT 에디션은 한 권의 책으로 1년 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난번에 이어 이영훈 목사의 새 감동 메시지가 365편 수록돼 있고 매일 ‘나의 감사’를 쓸 수 있는 란도 제공됐다. 책이 인도하는 대로 매일 감사 메시지를 읽고, 찬양과 말씀 묵상의 QT를 지속한다면 365일 감사가 넘치는 한 해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월력과 함께 매일 제시되는 ‘오늘의 일독성경’ 표에 따라 주어진 성경 말씀을 읽으면 신앙 훈련도 가능하다. 한 해 동안 구약 1독, 신약 2독을 하게 되니 이 책 한권이면 말씀과 감사가 충만한 1년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날의 말씀을 읽은 후에 함께 수록된 찬송가를 부르며 주님의 은혜를 구해보자. 찬송가 전 절의 가사가 제공돼 있어 책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이후 오늘의 일독성경 범위 내에서 주어진 그날의 감사 말씀을 읽고 ‘나의 감사’를 적으면 큰 감사부터 아주 작은 감사까지 생각나 은혜롭다. 또 이런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주님에 대한 사랑과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전한다면 기쁨과 성령 충만함이 배가될 것이다. 이 책에는 오늘 나의 사랑과 전도가 필요한 이들의 이름을 적고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적는 전도노트가 마련돼 있다. 저자인 이영훈 목사는 책 머리말에 “경건의 습관을 통해 신앙의 기초를 단단히 쌓아가면 어떤 풍랑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집을 지을 수 있다. 매일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 책을 통해 1년 365일 모든 순간 절대감사, 한평생 감사, 넘치는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소망했다. 감사QT365를 통해 범사에 감사하며 마음의 평강을 누리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전도의 사명을 놓지 않는다면 2023년은 영적 성숙에 이르는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2022.12.09 / 김주영 기자

    위대한 복음전도자 조용기 목사 평전 『희망의 목회자』발간
  • 편저자 이영훈 목사 “신앙 유산 계승 발전 되길”
    지난해 9월 14일 하나님 품에 안긴 영산 조용기 목사의 생애와 신학을 담은 평전 『희망의 목회자』(서울말씀사)가 발간됐다. 편저자는 이영훈 목사로 조용기 목사가 평생 몸담고 사역했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국제신학연구원과 정확한 사료와 증언들을 기반으로 조 목사의 삶과 신학을 반추하여 출간한 평전이기에 의미가 크다. 평전을 펴낸 이영훈 목사는 “영적인 아버지이자 스승이셨으며 사역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셨던 조용기 목사님의 빈자리는 남은 평생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이라며 “목사님을 따라 신앙의 길을 걷던 사람들은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삶의 희망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목사님의 일생과 남기신 신학의 유산이 잘 계승·발전되어 새로운 세대 가운데에서도 오순절 성령 충만의 영성이 거대한 불꽃처럼 일어나길 기도한다”고 소원했다. 평전은 1부 ‘조용기 목사의 생애와 목회’ 2부 ‘조용기 목사의 신학으로 구성돼 있으며 500여 페이지 분량이다. 폐병으로 만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주의 종이 되고 가난한 곳에서 시작된 천막교회 사역, 이후 서대문 그리고 여의도로 교회가 이전하면서 폭발적 교회 성장을 이루고 세계복음화와 사회구원을 향한 헌신이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 삼중축복과 오중복음, 4차원의 영성을 통해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피어난 희망의 복음, 십자가의 은혜 속에 탄생한 순복음 신앙이 성도들의 삶에 가져다준 변화를 그리고 있다. 평전이 발간되자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는 “조 목사님은 세계적인 부흥사, 탁월한 설교가, 기도와 성령의 사람이요 참 목회자, 목회자들의 스승, 해외 교계 지도자들이 가장 만나보고 싶어 하는 분이셨다”고 회상했다. 독일 튀빙겐대학교 위르겐 몰트만 명예교수는 “목사님은 위대한 복음 증거자이자 뛰어난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기도의 사람이셨다”라고 추모사를 전했다. 조용기 목사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책을 읽다보면 생생했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하다. “믿음은 희망에서, 희망은 심음에서, 심음은 입술의 고백에서 나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됩니다. 해 봅시다.”
  • 2022.10.21 / 오정선 기자

    [신간 안내]영산의 기슭에서
  • "나의 스승, 나의 영적 아버지 영산을 기억하다" 한국 교회의 큰 산 조용기 목사에 대한 추억 담겨 제자들, 영적 거장이 남긴 신앙 유산 공유하며 은혜 고백 "스승님 너무나도 그립습니다. 사랑합니다." 신간 『영산의 기슭에서』 는 조용기 목사의 신앙과 신학을 계승하는 제자들의 모임인 영산목회자선교회(영목회)의 회원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꽉찬 조용기 목사에 대한 추억담을 모은 책이다. 삶과 목회로 보여 주신 스승의 가르침을 체험한 제자들은 조용기 목사를 어떻게 만나, 무엇을 배웠으며, 어떻게 사역해 왔는지 각자의 추억과 마음속 이야기를 공개하며 스승을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눈물 맺힌 감사의 고백들을 전한다. 이영훈 목사는 책에서 조용기 목사에게 배운 신앙과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용기 목사님의 제자로서 좋으신 하나님 신앙을 통해 은혜를 체험하고 항상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메시지를 선포해 왔습니다. 절대긍정의 신앙은 좋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산물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신앙은 성경 전체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신앙을 깊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절대긍정의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으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라는 신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어 이 목사는 "로마서 8장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절대긍정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며 "절대긍정의 신앙은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절대긍정의 신앙으로 무장할 때 우리는 날마다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라고 조용기 목사의 영적 유산을 소개했다. 이 책을 읽으면 제자들의 시선을 통해 63년 동안 세계 곳곳을 누비며 복음을 전한 조용기 목사의 선교 여정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따뜻한 심장을 갖고 제자들과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한 조용기 목사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이야기가 우리의 눈시울을 적신다. 영목회장인 전호윤 목사는 책을 헌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을 읽는 이마다 마음이 향기로울 것이며 은혜의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누구보다 영산이신 스승 조용기 목사님께서 즐거워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사님도 알지 못하시는 목사님을 향한 제자들의 추억이 옥합처럼 깨어져 향유처럼 향기를 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2022.04.17 / 복순희 기자

    문화계 소식
    스마트폰 생활백서-저절로 성경일독
  • “스마트폰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보여요!” 잠금화면 활용한 성경 묵상 앱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매순간 단비와 같은 성경 말씀을 전달해 주는 앱이 있다. 바로 ‘저절로 성경일독’이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스마트폰 화면을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에는 성경 구절이, 하단에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화살표 기호와 북마크, 공유하기, 잠금해제 버튼이 있다. 화면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켜지면 다음 절로 넘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담 없이 성경을 일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앱에서는 말씀 공유 기능이 가장 눈에 띈다. 묵상하고 있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말씀 카드를 만들어 SNS로 즉시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모바일 전도 도구로도 활용이 가능해 전도 대상자에게 유용하다. 성경은 개역개정, 개역한글, 현대어성경, 새번역과 영어 성경인 KJV, NIV, NLT 버전을 제공하고 있는데 한글과 영어 두가지 성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개역개정, 개역한글, KJV 성경은 오디오도 함께 제공된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안드로이드기반(삼성 및 LG)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구글 Play스토어에서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앱을 실행하면 광고가 나타나지만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말씀을 묵상하고 공유하는데 지장이 없다. 또한 결제해야 이용할 수 있는 ‘읽기모드’는 우리 교회 앱 성경과 동일한 기능이므로 오랜 시간 성경을 읽을 때는 교회 앱을 활용할 것을 추천한다.
  • 2022.07.29 / 금지환 기자

    부활절 맞아 ‘기독 영화 특별전’열려
  • 유명 기독영화인『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 『바울』등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특별전이 열린다. CBS가 부활절을 맞이해 진행하는 기독영화 특별전은 4월 1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된다. 서울 지역은 서울극장, 인천 경기 지역은 CGV계양, 인천, 일산, 소풍, 롯데시네마 안산, 안산명화극장 등에서 볼 수 있다. 기독 영화 특별전에서는 영화 『바울』이 마지막으로 상영돼 아직 관람하지 못한 관객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누적 관객 수 약 30만 명을 기록한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와 개봉 이후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는 『예수는 역사다』, 『가나의 혼인잔치: 언약』등은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예정이다. 이어 코로나19로 IPTV에서 런칭한 영화들도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된다. IPTV 최초 개봉 영화 『내게 찾아온 사랑』,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의 기억』에 이어 낮에는 목사님, 밤에는 프로레슬러가 된 목사님의 숨겨진 비밀이 담긴 『복면목사』 등 다양한 장르와 선호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영화를 선보인다.
  • 2021.03.25 / 이미나 기자

    가슴 뻥 뚫리는 뮤지컬 ‘지저스’
  • 혼돈한 세상에서 행복 찾는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 영원한 지혜 담긴 성경 말씀으로 용기와 희망 선사 나를 짓누르는 모든 것을 한 번에 날려줄 뮤지컬, 성경 속 위로의 이야기를 락으로 전달한다.’뮤지컬 ‘지저스’가 서울 대학로 원패스아트홀에서 상영되고 있다. 지저스는 1971년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 초연 후 총 3000회 이상을 공연한 흥행작 뮤지컬 ‘가스펠’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다. 신약성경 마태복음의 총 43개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를 통해 교훈과 가치를 전한다. 목적과 방향을 잃고 문제를 겪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길 되신 예수님의 지혜를 알려주기 위한 메시지를 담아냈다. 예수님의 일대기보다 가르침에 초점을 맞춰 연극놀이식으로 스토리를 이어가니 지루함이 없다. 거기에 음악 장르 중 하나인 락을 뮤지컬에 접목하여 듣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한 보이스는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뮤지컬 1막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부자와 나사로’ ‘돌아온 탕자’ 등 초신자들도 알만한 이야기들을 재밌게 풀어내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전달하고 ‘날마다’ ‘이 백성 구원’ ‘내 영혼의 은총’ ‘세상의 빛’ 등 찬양으로 분위기가 고조된다. 2막에서는 바리새인의 시험과 간음한 여인 등 진지한 주제로 ‘돌아와요’ ‘내 곁에’ ‘버드나무 가지위에’ 등의 노래를 들려주며 관객의 감성을 자극한다. 연극 보잉보잉, 마술가게 등 탁월한 연출력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온 연출가 손남목과 뮤지컬 그림자를 판 사나이, 록키호러쇼, 신흥무관학교 등 화려한 안무로 뮤지컬계의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안무가 채현원이 함께해 뮤지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걸그룹 베이비복스 출신 간미연 타히티 제리 안소현을 비롯해 문장원 김현국 윤소미 신시온 등 실력파 배우들이 출연해 폭발적인 락 음악과 안무, 웃음과 가슴 뭉클함으로 하나 되는 무대와 객석을 만들어내고 있다. 소극장의 이점을 살려 관객과 함께 호흡하며 뜨거운 감동과 전율을 선사한다. 뮤지컬 지저스는 인터파크와 네이버 평점이 9.2에 달하며 ‘기독교인들이 본다면 은혜로운 공연이고 비기독교인이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공연이다. 예수님의 일생을 락음악과 함께하는 최고의 공연이었다(actor***)’ 등의 평을 얻고 있다. 상영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오픈런 공연으로 매주 월, 화요일에만 공연이 없다. 본 공연은 총 130분 공연(인터미션 10분)이며 만 10세 이상 관람가로 초등학교 저학년 관객의 경우 생년월일 확인이 가능한 증빙자료를 필요로 한다. 티켓구매는 인터파크에서 가능하다. <공연안내> - 기간 : 2020.01.15.~ 오픈런 - 시간 : 수·목요일 - 19:30 / 금요일 - 16:30, 19:30 / 토요일 - 15:00, 19:00 / 일요일 - 14:00, 18:00 ※ 매주 월·화요일 공연 없음 - 장소 : 원패스아트홀
  • 2020.02.23 / 김주영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31. 후안무치(厚顔無恥)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솔로몬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된 시므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6~37) 3. 솔로몬의 숙청 작업과 시므이의 죽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숙청의 이유, 방법, 숙청당한 인물들만 보면 공포정치를 휘둘렀던 절대군주 못지않다. 숙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비아달, 다윗을 섬기며 충성을 다했던 군대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형이자 왕자였던 아도니야까지 잠재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둘째는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다니엘, 셋째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 넷째는 학깃이 낳은 아도니야였다.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열 번째쯤 된다(대상 3:1~5). 그런데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게 죽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 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 죽은 것이다. 둘째 아들 다니엘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성경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왕상 1:5~11). 이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요압과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왕하 1:7). 하지만 아도니야의 시도는 일일천하에 그쳤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도니야(왕상 1:51)를 살려주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상 1:52). 하지만 아도니야는 다윗의 침실에서 수종을 들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은 이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도니야를 처형해 버렸다(왕상 2:13~25). 2) 아비아달 아비아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10번째 대제사장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기약이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도시와 지역이 있었지만 다윗이 선택한 첫 장소는 대제사장이 있던 놉이었다(삼상 21:1).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고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삼상 21:4~10).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을 문제 삼아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을 한 날에 살육했다(삼상 22:18).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아달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아비아달은 지체 없이 한걸음에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향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에봇을 가지고 도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3:6). 아울러 우림과 둠밈을 대제사장의 에봇 흉패 안에 보관하라고 되어 있기에 우림과 둠밈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출 28:30). 다윗은 이렇게 사선을 넘어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직후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에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왕상 2:27). 3) 요압 요압이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이다’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볐던 군대 장관이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던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다윗이 사울의 남아있던 세력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장군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를 이끌던 요압이 맞붙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요압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요압은 이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자손들과 다윗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하고 통일왕국을 탄생시키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고 통일왕국의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뗐다(삼하 3:8~21).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 다시 헤브론으로 유인해 왔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브넬을 살해했다(삼하 3:27). 성경 여러 곳에서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요압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후 모든 공이 아브넬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에 대한 염려와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한 번에 갚고자 벌인 일이었다. 다윗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큰 용사였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압에게 묻지 않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로몬은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압이 죄 없는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이었던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었지만(왕상 2:31), 실상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시므이 솔로몬의 서슬이 퍼런 칼날은 그의 왕권을 위협할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대왕이었던 다윗이 살려 준 시므이를 향한 솔로몬의 마지막 경고이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절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왕상 2:36~37). 왜 솔로몬은 베냐민 자손이고 바후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시므이를 굳이 예루살렘 성에 붙잡아 두고 절대 떠나지 말라고 했을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 두 명이 도망을 가자 솔로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벗어났다(왕상 2:39~40). 솔로몬은 브나야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이를 단숨에 처형했다(왕상 2:45).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초라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가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였다. 하지만 압살롬에 의한 왕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엎드려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량과 은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8.01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30.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시므이의 죽음①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8~19) 사무엘하 15장과 19장은 후안무치한 시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골 어디에도 왕의 위엄과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다윗은 머리는 산발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윗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길을 역방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나 군사들에게 쫓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신세였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10명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다윗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친부로서의 자존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더 낮아질 수도 초라해질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이미 죽임을 당해 세상에 없었다. 다윗의 차남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나발의 아내였으나(삼하 2:2)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된(삼상 25:39~43)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이다(대상 3:1). 하지만 그의 이름 외에 추가적인 자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장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아(왕상 1:5~10) 다니엘은 일찍 죽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남과 차남이 죽은 상황에서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아버지 다윗을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압살롬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헤브론에서 시작한 반란은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거칠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바후림을 지나고 있을 때 사울의 친족이요 게라의 아들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다(삼하 16:5). 다윗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13). 자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이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사울의 남은 자손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참소하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울의 친족을 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친족들에게 많은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고 사울의 친족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했다. 그들의 토지나 소유권도 빼앗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은혜를 받았던 사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시므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부었다. 비록 피난길에 올랐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있었고 많은 백성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6:6).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말한다(삼하 16:9).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극심한 모멸감에 시달렸을 다윗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므이는 더없이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난이 은혜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므이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가 퍼붓는 저주를 묵묵히 참아냈다(삼하 16:11). 2. 급변한 시므이의 태도 다윗이 가장 힘들었을 때,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의 태도는 압살롬이 죽고 왕자의 난이 정리된 이후 급변한다. 압살롬이 죽자 제사장들과 신하들은 서둘러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진행한다(삼하 19:11~12). 다윗은 피난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올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던 바후림에 이르렀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귀환 행렬이 바후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엘하 19장 16~18절은 이때 시므이가 취한 행동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유다 사람들과 동행(삼하 19:16) 사울의 혈육으로 베냐민 지파였던 시므이는 급히 유다 사람들과 다윗을 맞으러 나간다. 다윗의 피난 행렬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에게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다시 바후림에 왔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2) 시므이의 세력(삼하 19:17) 사무엘하 19장 17절은 사울이 죽은 후 시므이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을 맞으러 나올 때 시므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기의 모든 세력을 데리고 나온다.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열다섯 명의 아들, 종으로 부리고 있던 하인 스무 명을 대동했다. 시므이는 호시탐탐 사울 왕조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이유도 없다. 3)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삼하 19:18~20) 시므이는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다윗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시므이가 특별히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던 날에 저질렀던 패역한 일'에 대한 용서였다(삼하 19:19). 그가 다윗을 쫓아가며 했던 저주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비새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삼하 19:2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므이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울의 남은 세력들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아량을 베푼다(삼하 19:22~23). 다윗은 자신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므이의 문제는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7.04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9.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Ⅱ)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뤄져야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2) 기브온족의 이스라엘 편입 가나안 족속의 종교 혼합주의, 쾌락주의, 윤리적 타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기이한 자연적 현상들은 다신론적 맹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손쉬운 다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종교적 편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과 방식대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아주 쉽게 유혹으로 이끌어 갔다. 그 결과 거룩한 삶은 죄 된 삶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나중에는 헤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나안 족속과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약 자체도 문제였지만 방법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전통에 따라 기브온 사람의 음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수 9:15). 서로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고 있었다. 성경은 기브온과 체결한 계약 방식이 '그들(기브온 사신)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9:14).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과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수 9:18)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6.06 / 이상윤 목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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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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