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사
[조용기 목사 소천 4주기] “신앙의 영적 유산 잘 이어가겠습니다”
  • ‘오중복음·삼중축복·4차원 영성’ 재조명 올해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하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한 영산 조용기 목사(1936년 2월 14일~2021년 9월 14일)의 소천 4주기가 되는 해이다. 세계 최대 교회의 개척자로서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 사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심었고, 수많은 이들에게 ‘좋으신 하나님’을 소개한 조용기 목사의 사역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갈보리 십자가의 신앙에서 출발한 오중복음(중생, 성령 충만, 신유, 축복, 재림), 삼중축복(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해지는 축복) 그리고 4차원의 영성(생각 ‘긍정적 사고’, 꿈, 믿음, 말)을 통해 믿는 이들의 신앙생활을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삶의 변화로 이끄는 전인구원의 길로 확장시켰다. ‘좋으신 하나님’을 선포한 목회자 조용기 목사가 가난과 절망,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시대에 외친 ‘희망의 복음’은 단순한 메시지를 넘어 시대의 선포였다. 조용기 목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하며 성도들은 두려움과 절망이 아닌 믿음과 소망,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이러한 메시지는 단지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전국 방방곡곡으로 흘러 들어갔고, 나아가 전 세계로 확장되며 복음의 불길을 일으켰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미 등지에 세워진 수많은 교회들이 그 증거였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영혼과 삶을 세우다 조용기 목사가 강조한 오중복음은 단순한 교리 체계가 아니라 신앙생활의 방향성과 실천적 원리를 제시하는 틀이었다. 죄 사함의 기쁨(중생), 성령의 능력(성령 충만), 병든 자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권능(신유), 물질의 회복과 평안(축복)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재림)은 성도들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삼중축복은 한국 사회의 눈부신 발전기 속에서 신앙과 삶, 영혼과 육신, 개인과 공동체를 함께 세워가는 건강한 복음의 모델로 기능했다. 그 축복은 단지 개인의 성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와 가정, 나아가 민족과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삶을 의미했다. 4차원의 영성, 믿음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조용기 목사는 “믿는 대로 될지어다”라는 성경 말씀을 기반으로 4차원의 영성을 전파했다. 이는 우리의 생각과 말, 꿈과 믿음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원리를 담고 있으며 성령 안에서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한 것이었다. 4차원의 영성은 수동적인 신앙을 벗어나 하나님과의 동행 속에서 믿음의 미래를 선포하고 준비하는 삶의 방식으로, 많은 성도들에게 삶의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오늘날에도 4차원의 영성은 복음의 실천적 도구로써 유효하며, 다음 세대에 반드시 계승되어야 할 신앙 유산이다. 신앙의 유산, 다음 세대를 향하여 조용기 목사의 사역은 단지 한 시대의 목회자적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날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세계 순복음 교회들 안에서 믿음의 유산으로 계승되고 있으며, 성도들은 여전히 ‘좋으신 하나님’을 전파하며 전인적인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2025 CGI &ACLS 콘퍼런스’에서도 세계교회 성장을 꿈꾸는 수많은 목회자가 조용기 목사를 기억하며 조 목사가 남긴 신앙 유산을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성도 역시 남겨진 신앙의 유산을 가정과 사회, 민족과 열방을 향해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를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야말로 조용기 목사의 정신을 잇는 길이다. 끝나지 않은 사명, 계속되는 기도의 불길 조용기 목사의 소천 4주기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조용기 목사의 사명과 비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명을 따라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고, 가정을 살리고, 사회를 밝히며, 이 나라와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기도의 불길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믿음의 여정을 이어가는 성도들이 있는 한, 조용기 목사의 영적 유산은 계속해서 살아 역사할 것이다. 한편 사단법인 영산글로벌미션포럼(이사장 이영훈 목사)은 조용기 목사의 소천 4주기를 맞아 오는 23일 우리 교회 예루살렘성전에서 ‘목회자 콘퍼런스’를 개최한다. ‘영산 조용기 목사의 희망 목회와 부흥’을 주제로 열리는 콘퍼런스를 통해 조용기 목사의 신앙 유산의 가치를 재조명하려 한다.
  • 2025.09.12 / 오정선 기자

    “야호! 여름이다… 영산수련원 수영장으로 Go Go~”
  • 한여름 무더위를 이겨낼 수영장 개장 가족과 친구와 함께할 수 있는 물놀이 시설 영산수련원,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힐링 공간 마련 “야호! 여름이다” 매일 푹푹 찌는 여름 불볕더위가 기승인 이때, 영산수련원 내에 7월 18일 수영시설 ‘파주아리아수영장’이 개장했다. 사시사철 신선한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참된 쉼을 제공해 온 영산수련원은 어린이들에게는 신나는 물놀이 체험을, 어른들에게는 힐링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했다. 이번에 개장한 파주아리아수영장은 이러한 영산수련원 내부 1만 500㎡의 부지에 조성되어 안락하면서도 청정한 휴식을 제공한다. 수영풀과 슬라이드, 휴식존을 갖추고 한여름 무더위를 잠시 잊고 가족과 친구들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면서 추억을 만들 수 있도록 꾸몄다. 수영시설 안에는 12개월 이상부터 초등학생까지 전용인 4개의 키즈풀과 2개의 성인풀 및 성인용 대형 에어 슬라이드, 바운스슬라이드, 라인 키즈 전용슬라이드와 익사이팅 슬라이드가 있어 시원한 물놀이와 수영을 할 수 있다. 또한 그늘막과 115개 평상 등으로 꾸민 대규모 휴식존과 300개 규모의 물품 보관함과 락커룸, 탈의실, 샤워실, 각종 먹을거리를 판매하는 매점과 안전을 위한 의무실 등 편의시설도 갖췄다. 이와 더불어 기존 영산수련원 내에 있는 넓은 주차장과 편의점, 레스토랑과 베이커리 카페 등 식음료 시설이 있어 보다 편리하게 휴식을 더 할 수 있다. 영산수련원을 운영하는 재단법인순복음선교회 측은 “영산수련원을 찾아오는 많은 청소년들과 성도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어, 하나님의 사랑과 참된 쉼을 누릴 수 있도록 수영장 오픈과 더불어 다양한 힐링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제공하겠다”면서 “앞으로도 일상으로 돌아갈 힘과 위로를 얻는 최고의 힐링 수련원이 될 수 있도록 더욱 정성껏 준비해 나가겠다”고 전했다. 개장 시간은 주간은 오전 9시~오후 5시, 야간은 오후 5시~9시이며 특히 야간 개장은 한여름 밤의 낭만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입장비용은 1만3000~1만7000원이며 영산수련원 입소단체에 한해 특별할인 가능하다.(문의 031-934-5555)
  • 2025.08.01 / 복순희 기자

    대학가, 이단의 놀이터 되나? - 한찬영 인턴기자(대학청년국)
  • 요즘 대학가에서 “캠퍼스가 이단들의 놀이터가 되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실제로 여러 학교 주변에서 이단 단체들이 활발히 포교 활동을 벌이는 모습이 목격되고 있다. 재학 중인 대학교 인근 지하철 역 앞에서 “유월절에 대해 아시나요?”라고 자연스럽게 말을 거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설문조사나 친절한 대화처럼 보였지만 조금만 귀를 기울여 보면 교회나 동아리를 가장해 접근하고, 성경 공부나 문화 활동 및 교회와 관련된 일을 빌미로 친분을 쌓은 뒤 교묘하게 교리 교육으로 이끈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개인 신앙의 문제를 넘어선다. 이단 단체들은 학생들의 순수한 신앙심과 친교에 대한 갈망을 이용해 거짓된 가르침으로 혼란을 주고 결국에는 신앙과 인생 자체를 뒤흔드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대학가가 비교적 열린 분위기와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보니 이러한 포교 활동에 대한 경계심이 상대적으로 약해졌다는 점이다. 반면, 학교 내 기독 동아리들의 활동은 점점 위축되는 분위기다. 캠퍼스 복음화를 꿈꾸며 활발히 활동하던 여러 기독 동아리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회원 수가 줄어들었고, 새내기 전도 역시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현실은 더욱더 이단 단체들이 틈을 탈 수 있게 만드는 안타까운 배경이 되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 친절하게 다가올 때 ‘분별’이라는 영적 감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성경을 바르게 알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때에 미혹하는 자가 많을 것’(마 24:4~5)이라는 성경의 경고를 기억하며 대학 캠퍼스 위에 다시 복음의 빛이 밝게 비추기를 소망한다.
  • 2025.05.16 / 오정선 기자

    Hello, Israel
    “웃지 않으면 … 울게 될 테니까”
  • 이스라엘 국민들의 회복탄력성 지난 두 달 동안 이스라엘은 이란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느라 바쁘게 보내고 있다. 그 사이에도 여전히 하마스, 시리아, 예멘의 후티 반군이 날려보낸 드론과 로켓을 막아내야 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휴대폰의 미사일 알람은 아직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그야말로 사방에서 전쟁의 공포가 몰아친 한 달이었다. 이런 복잡하고 심란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걸 이겨내고 있는 걸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3년이 넘어가면서 피난민들과 남아있는 사람들은 트라우마와 함께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혼란 그리고 정착에 대한 회의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지난 77년의 시간 동안 전쟁과 분쟁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겨내고 성장해 가고 있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그 대답은 “웃음”이다. 이스라엘 사회는 언제부터인가 웃지 않으면 울 수밖에 없는 현실을 웃음으로 견디는 법을 체화했다. 이를 ‘이스라엘의 집단적 회복탄력성의 상징’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웃음은 단순한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 긴장과 공포, 고통이 일상이 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자 문화다. 누군가는 ‘웃는 자가 승리자이고 강자이다’라는 말을 했다. 유대인들의 유머는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처지와 상황 그리고 그들을 둘러 싼 다소 비판적인 유머가 많다. 혹자는 현대 블랙코미디의 원조를 유대인들이라고도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유머는 지금의 전쟁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공습 사이렌이 울려도 지하 대피소에서 농담이 오간다. 병역을 마친 젊은 세대는 ‘자조적 밈’을 만들어 전투로 인한 피로를 위로한다. 소셜미디어에는 “오늘의 방공호 패션”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고, 미사일 경보 속에서도 커피 한 잔을 즐기는 모습이 퍼져 나간다. 다소 과격하긴 하지만 전쟁의 상황을 유머와 자조적인 웃음 속에서 이겨내는 모습들을 만들어 간다. 전쟁의 무게에 짓눌리는 대신, 웃음으로 삶의 중심을 다시 잡아가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방식이다. 이러한 문화는 단지 위트나 재치의 문제가 아니다. 트라우마를 공동체적 유머로 해석할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의 강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현대 이스라엘 국가 문화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오랜 역사 속에서 비난과 차별 그리고 박해를 이겨내고 살아난 유대인들의 정신력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저항의 정신 그리고 그것을 유머와 웃음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나치에 의해서 게토에 갇혀 사는 유대인들 중 하나였던 주인공은 아들을 위해서 우스꽝스런 모습과 웃음을 자아내는 표정과 말로서 가족을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총살을 당하러 끌려가는 중에도 아들을 웃기기 위해서 보여주는 그의 우스운 모습은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자아내기도 한다. 외부의 공격에 맞서는 군사력이 ‘아이언돔’이라면, 내면의 균형을 지켜내는 정신력은 바로 이 웃음으로 인한 회복탄력성이다. 더 놀라운 것은 미사일이 떨어져 도시의 한 부분이 파괴되어 혼란이 있었던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미사일이 떨어졌던 다음 날 텔아비브 해변에는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학교는 문을 열며 카페에는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죽음과 공존하는 삶이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평범한 오늘’을 회복해낸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승리다.” 이런 암묵적인 합의가 이 땅의 사람들 사이에 흐른다. 성경에도 이런 회복탄력성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시편 기자는 울음이 밤을 지나고 기쁨이 아침에 온다고 노래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이스라엘은 지금도 울며 씨를 뿌리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웃음을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웃음은 회복의 전조이기 때문이다. 절망을 끝까지 밀어내고 나면 남는 건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뿐이다. 그래서일까. 전쟁이 끝났다고 평화가 오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매일 웃으며 말한다. “웃지 않으면… 울게 될 테니까.” 우리는 이런 이스라엘의 회복탄력성을 배울 필요가 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위기를 이겨내는 탄력성을 가진 신앙이 필요하다. 김요셉 목사
  • 2025.08.29 / 김용두 기자

    슬픔도 웃음으로 … 해학의 유대민족
  • 이스라엘에는 3월과 4월 사이 니산월이 오기 2주 전에 아주 독특한 절기가 찾아온다. 성경 에스더서에 나오는 절기로 부림절이다. 사실 부림절의 이야기는 매우 비장하며 잔혹할 수 있었던 이스라엘 유대민족의 역사이다. 그리고 성경의 서사도 그와 같다. 포로기 시절 제2시민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찾아온 민족 멸절의 위기, 하만이라는 한 사람의 악한 흉계로 인한 위기였다.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에스더라는 여인과 모르드개, 두 사람의 헌신과 목숨을 건 용기 있는 행동 덕분이었다. 성경은 이 절기를 부림, 제비를 뽑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어 부림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 부림절 시기에 이스라엘을 방문하면 재미있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바로 다양한 부림절 퍼레이드이다. 이 절기엔 이스라엘의 많은 도시마다 각기 다양한 행사들이 벌어진다. 도시는 온갖 캐릭터와 화려함으로 치장한 사람들, 희한한 모습으로 꾸민 이들이 넘쳐난다. 상점마다 가장 행렬과 행사 때 입는 여러 가지 옷들과 소품들을 판매한다. 아이들은 디즈니 캐릭터나 만화 주인공들처럼 꾸미기도 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겁게 재미있는 모습으로 즐긴다. 심지어 종교 유대인들도 이 날만큼은 엄숙함을 내려놓고 다양한 모습으로 치장하며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부림절에는 모두가 원래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꾸미는 것이 풍습이라고 한다. 왜 이런 풍습이 있는 걸까? 여기에는 슬픈 유대인들의 역사가 전해진다. 유대인의 한 전통에 따르면 부림절의 계기가 되었던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감추기 위해서 다른 모습을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유래된 전통이라는 전승이 있다. 또 다른 전승은 유대인들이 중세 유럽 시대를 살던 중 유럽의 사육제와 같은 풍습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한다. 사육제는 유럽의 가장 행렬과 같은 축제로서 시민들이 자신들의 신분과 상관없이 즐길 수 있도록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축제를 즐기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전승도 있다. 이런 전승 속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날 경우 반유대주의적 상황에서 박해 받을 수 있기에 신분을 감추어야 했던 슬픈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자신들만의 해학으로 풀어내며 부림절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정말 해학이 넘치는 이들이다. 유대인의 탈무드는 더욱 해학적이다. 탈무드는 유대인들의 학습경전으로 지혜의 책이라고 불리는 만큼 오랜 유대인들의 정수를 담고 있다. 사실 탈무드의 목적은 토라(유대교 경전인 모세오경)를 가르치고 이해시키기 위한 책이다. 한권이 아닌 십여 권으로 구성된 해설집이자 지혜를 담은 책이다. 그렇다 보니 딱딱하고 경직되어진 성경의 이야기들을 이해하기 쉽도록 예화를 담아서 쓰게 된 것이다. 탈무드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화와 예시로 많은 이들에게 성경의 지혜를 가르쳐 왔다. 그 탈무드가 유대인의 해학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이런 예화가 있다. 한 신사가 마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가고 있었다. 동승한 마차에는 한 유대인이 점심으로 절인 생선을 빵에 끼워서 먹고 있었다. 신사는 가난한 유대인을 골려 주고자 물었다. “유대인들의 머리가 좋은 이유가 그 절인 생선을 많이 먹어서 그런가 봅니다!” “네 맞습니다! 저희는 특히 이 머리를 먹어서 더 똑똑한 거지요!” 신사는 문득 정말 그런가 싶어서 물었다. “정말 그 머리를 먹어서 그렇다구요!? 그럼 나도 좀 먹어봅시다!” “5세켈만 주세요!” 신사는 그렇게 생선 머리를 사서 억지로 꾸역꾸역 먹었다. 먹고 나니 냄새도 나고 생각해 보니 머리 하나에 5세켈이나 주고 산 것이 비싼 거 같았다. 신사는 불편함을 드러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당신, 너무 하구만. 고작 생선 머리 하나를 5세켈씩이나 받다니! 그 돈이면 다음 역에서 생선을 두 마리나 살 수 있는 가격이잖소!” 그러자 유대인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거 보세요. 벌써 머리가 좋아지셨네요!” 유대인이 자신을 비꼰 신사를 정중하게 받아 친 이야기이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통해서도 자신들에 대한 비하와 차별을 지혜롭게 받아내는 방법을 유머로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해학이라고 부른다.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 역사 속에서 수많은 고난과 역경 차별을 당하고 살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성경의 지혜와 여유 그리고 유머로 살아갔다.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유머와 웃음을 놓치지 않은 이들이라 그런지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 하마스와의 전쟁 시간 속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비난과 야유 그리고 비판이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부림절을 즐기고 삶의 고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웃는 자가 승리한 자라고 했던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돌아왔을 때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활짝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김요셉 목사
  • 2025.04.25 / 김용두 기자

    우호관계에서 적으로 변화되기까지
  • 이스라엘과 이란의 과거와 현재 이스라엘 뉴스에서는 매주 인질들의 석방과 가족의 재회로 인한 감동의 이야기들이 계속 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발발한지 벌써 500여 일이 넘어가는 시점에서 가자에 억류되었던 인질들이 매주 3~4명씩 풀려나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구류자들을 계속적으로 교환하고 있다. 이 전쟁의 끝은 어디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금 이 전쟁의 뒷면에 있는 하마스의 배후인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되짚어 보았으면 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휴전 협상과 인질 교환 문제로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중동 정세가 크게 변화하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관계 개선을 이끌었다. 이란은 이러한 변화에 크게 반발했고 이스라엘과 미국 간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는 상황에서 중동의 불안정성이 증대되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는 이러한 복잡한 배경 속에서 더욱 얽히고 있다. 이란은 핵 개발을 지속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군사적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란과 이스라엘 간의 갈등은 단순한 국가 간의 대립을 넘어 지역 전체의 평화와 안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 즉 이전 페르시아 제국 시절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왕 고레스(Cyrus the Great)의 지원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할 수 있었다. 고레스는 유대인의 신앙과 문화를 존중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귀환을 허락한 인물로 그들의 민족적 및 종교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성경의 에스더서에서도 에스더 왕비가 자신의 민족을 구하는 이야기를 통해 이란(페르시아)과 유대민족 간의 긍정적인 관계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20세기 중반부터 적대적인 방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79년 이란 혁명은 이러한 상황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란은 이슬람 공화국으로의 전환 과정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을 ‘작은 사탄’으로 간주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이후 이란 정부는 반이스라엘 무장단체인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지원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기에 이른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시작되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란의 핵 개발은 이스라엘의 주요 안보 위협으로 자리 잡았고, 이스라엘은 군사적 공세와 국제 사회의 협력을 통해 이란의 군사적 그리고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전개는 두 나라 간의 불신을 더욱 증대시키며, 중동 전역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는 상호 이해와 존중의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평화의 길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이스라엘과 이란이 서로를 이해하고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도해야 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두 국가 간의 갈등 해결은 개인의 이해와 화해의 추진이 필요한 중요한 사안이다. 서로의 종교적 차이를 존중하고 각국 지도자에게는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지혜와 용기가 부여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중보 기도를 통해 이스라엘과 이란 두 나라가 서로의 고난을 이해하고 신뢰를 쌓아가며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돕기를 소망해야 한다.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관계 회복을 위한 기도는 단순히 두 국가 간의 문제를 넘어서 인류 모두와의 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행위이다. 중동 지역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우리 스스로도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행동해야 할 시점이다. 하나님께서 이들 간의 분쟁을 치유하고, 서로를 향한 이해와 화해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을 간구한다. 김요셉 목사
  • 2025.02.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II. 죄론(Hamartiology) - 4
  •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위한 기준 제시
    죄와 율법 죄론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죄와 율법의 관계이다. 죄와 율법의 관계에 분명한 명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죄의 선재성(pre-existence)이다. 죄가 율법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율법은 광야시대에 성문화 되었다. 성문화 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예를 들면 십계명이 생기고 나서 사람들이 열 가지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유대 공동체 내에 우상숭배, 살인, 간음, 절도, 위증 등과 같은 죄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것에 대한 죄 의식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죄들과 그 죄에 대한 형벌이 모세의 율법을 통해 문자화 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십계명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출애굽기 20장 22절~23장 33절로 대표 되는 계약법전이 있고, 레위기 17~26장의 성결법전이 있다. 이것을 종합하고 보완한 신명기법전(신 12~26장)이 있다. 이 외에 율법의 행동지침과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장로의 유전과 규례가 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셨던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과 규례이다. 1. 율법의 본질 바울은 율법의 한계와 은혜의 법 사이의 긴장관계를 그의 서신 거의 모든 곳에서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바울은 회심 이전 그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서 목숨을 다해 신봉해 왔던 율법에 대한 무한 신뢰를 파기하고 율법을 ‘초등학문’(골 2:20)과 ‘초등교사’(갈 3:24)로 평가절하시킨다. 바울은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convenantal nomism)를 포기하고 은혜의 법에 기초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과 윤리, 도덕적 가치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인들이 버려도 되는 것 혹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본질 때문이다. 율법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된 것이다. 율법의 제사법은 인간의 범죄와 정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죄를 가지고 그 앞에 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성결법전의 내용과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율법의 옹호자는 아니다. 그러나 파괴주의자도 아니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a)라는 말로 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항변하고 있다.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죄성(sinful nature)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율법의 한계성 바울의 율법에 대한 의도는 율법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 그 자체만으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거나 의롭게 할 수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당위성(롬 1:17)과 율법의 한계성을 역설하고 있다. 율법은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는 기능은 있으나 죄를 사하는 권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율법)을 대조시키고 있다(롬 8:2). 히브리서 또한 율법의 불완전성과 대제사장의 유한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3. 율법의 목적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분별한 반율법주의(antinomism)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반율법주의를 넘어 극단적 율법파괴주의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목적과 효용가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인간들이 그것을 다 준수할 것이라고 기대하셨을까? 물론 아니다.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율법이 없다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2) 율법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한 목적이 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도덕적 잣대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유용한 가치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8.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I. 죄론(Hamartiology) - 3 
  • 성경은 죄와 인간의 필연적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아무도 죄를 피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더 나아가 죄의 삯(wage, 급여, 보수)은 사망이라고 단언하고 있다(롬 6:23). 인간의 수고와 이마의 땀으로 얻게 되는 급여는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선고이다. 한글성경에서는 복수와 단수를 구별하지 않고 ‘삯’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본에서는 복수형을 써서 ‘옵소니아’, 즉 ‘급여들’, ‘보수들’이라고 복수형을 쓰고 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죄의 종류와 가지 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부과될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4) 죄에 대한 형벌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죄에 대한 형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이해했다. 그는 인간의 창조를 세 단계로 이해했다. 첫째, 인간은 땅의 먼지(KJV, dust)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 먼지로 지음을 받은 육체에 네페쉬(혼, 생명)를 가지게 되었으며, 셋째,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이 분리되는 죽음 맞게 되었다. 이것은 곧 영적인 죽음,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을 낳게 된다. (1) 영적인 죽음 죄는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킨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죄를 허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성으로 인해 죄를 품은 인간은 그의 임재 가운데 공존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이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영혼은 생명력을 상실했으며 더 이상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적인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상태가 되었다(창 6:5). 이것이 죄의 형벌로서의 영적인 죽음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죄를 깨끗하게 할 수는 없다(롬 3:20; 7:7). 이런 영적인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2) 삶의 고통 타락 이후 고통은 인간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인간의 삶은 쉽게 무너지고 각종 질병의 포로가 되었으며 불안과 고통을 늘 겪게 되었다. 풍족했던 에덴동산의 삶은 사라졌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더해 졌으며 인간은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창 3:16, 19). 창조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복은(창 1:28) 인간의 타락 이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뜻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인간의 삶 곳곳에 돋아나는 것이었다(창 3:18). (3) 육체적인 죽음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최초 인간 아담이 죽음을 전제로 한 유한한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죽음을 전제로 창조하셨다는 근거는 창조역사 속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주후 418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첫 사람 아담이 죽을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므로, 아담이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상관없이 아담이 죽은 것은 죄의 삯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육체적인 죽음, 즉 흙으로 창조된 인간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벌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언급되었다(창 3:19). 육체적인 죽음은 영적인 죽음과 함께 불순종한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인 것이다. 이 육체적인 죽음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4) 영원한 죽음 유물론자들은 죽음을 존재의 소멸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유물론적 사관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죽음은 삶의 종결, 혹은 죽음의 완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한 죽음은 벗어 날 수 없는 고통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말한다.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 지옥편에 보면 지옥문에 쓰여 있는 글귀가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마치 이 표현처럼, 영원한 죽음은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즉 죽음의 소망조차 품을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1:26). 이 말씀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통로이며 육체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것에 대한 약속이다. 죄는 형벌을 동반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형벌은 영생의 기쁨과 환희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7.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I. 죄론(Hamartiology) - 2
  • 현대의 논쟁
    타락한 이후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동양에서는 순자(荀子)가 주장한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는 성악설(性惡說)과 맹자(孟子)가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性善說)이 팽배하게 대립하고 있다. 성경은 이 두 학설 중 성선설에 가깝다. 전도서 7장 29절은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힛솨본’인데 영어 성경(NKJV)은 ‘계략, 음모’(scheme)로 번역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이후 수많은 악한 꾀를 내는 존재가 됐다는 의미이다. 죄론에 대한 현대적 논쟁은 죄의 본질과 인식, 죄의 본편성과 전가성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원죄론에 대한 논쟁과 죄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죄의 본질 죄는 단지 인간이 행하는 그 무엇일 뿐만 아니라 죄가 인간 안에서 행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죄는 단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너머로 오기도 한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아담과 하와의 근원적 죄는 인간 내면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탄이라는 외부적 유혹에서부터 시작됐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함으로서 죄에 빠졌다. 죄에 대한 웨스트민스터의 대요리문답은 ‘죄란 하나님께서 이성적인 피조물에게 삶의 기준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치의 결여 또는 위반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2) 죄의 인식 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실존적 일치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떨어진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목표점으로 지향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 살며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자신도 철저하게 부패한 인간이 죄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죄를 인식 할 수 있을까? 선은 악이 있을 때 선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악은 선이 있을 때 악을 인식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칼 바르트(Karl Barth)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인이 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죄를 인간을 감금하는 ‘감옥’으로 생각했다. 이 감옥은 안에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밖에서만 열 수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만 그 열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없다면 죄를 인식할 수도 없고 죄에서 나올 수도 없다는 말이다. 3) 죄성(the nature of sin)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죄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내면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기회가 주어지면 죄를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죄의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것은 환경과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신약성경은 죄(Sin)와 죄들(sins)을 구별 짓고 있는데, 보통 전자는 죄의 본성을 말하고 후자는 죄성의 결과 및 표현들을 의미한다. 죄의 속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나 죄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죄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기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1) 죄의 보편성 성경은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선언한다(왕상 8:46; 시 143:2; 잠 20:9; 전 7:20; 롬 3:10~12; 롬 3:23; 요일 1:8).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욕구라고 할 수도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예외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피조 세계의 보편적이고 전 우주적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롬 5:19). (2) 죄의 전가성(the imputation of sin) 구약시대의 제사를 보면 죄인은 제사장에게 번제물을 가져가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번제물에게 전가하기 위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했다(레 1:4). 이 행위를 통해 죄인의 죄가 희생 제물에게 전가 되었다. 번제물은 죄인의 죄를 위해 희생되었고 죄인은 죄로부터 놓임을 받았다. 죄는 이런 전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죄의 전가성은 제물에게로 국한된다는 점이다. 나이든 부모가 자식의 죄를 대신해서 처벌을 받겠다고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듯이 성경에서 죄는 사람을 포함한 어떤 것에도 전가되지 않으며 오직 제물에게만 전가된다. 죄의 전가에 대한 제한적 적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게 볼 수 있는데 구약에서는 오직 희생제물에게만 적용되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5.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생명과학 이야기
    한국 사람의 마늘 사랑
  • 마늘은 일상생활에서 매우 주요한 위치에 있는 식품으로서 오래 전의 기록까지 남아 있다. 기원전 약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건설할 때 더위에 지친 노동자의 기력을 위해 마늘과 파를 보급한 기록들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바로왕을 위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기 위해 동원되어 심한 고역(苦役)으로 탄식할 때 부추와 (양)파, 마늘이 공급됐다. 성경에서 처음 기록한 내용을 보면 마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먹는 문제로 원망하던 모습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민 11:4~6) 기록에서 보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 ‘만나’를 모아 조리해서 먹던 반복되는 일들이 싫증이 난 상태였다. 특별히 많은 사람이 이동하는 거칠고 뜨거운 광야에서 달달하고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하는 오이, 참외, 수박, 부추, 파, 마늘을 재배하거나 구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원기를 돕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양념이 있는 고기를 먹기를 원했을 것이다. 스스로 표현하기를 광야에서 기력이 다하였다고 원망하는 모습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무기력한 일상생활에 지쳐 있었음을 알 수 있다.(민 11:6) 고조선의 건국설화에도 호랑이와 곰에게 단순히 마늘과 쑥만 오랜 기간 꾸준히 먹도록 한 이야기가 있다. 이렇듯이 마늘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유익하게 하는 친근한 식품으로 소개된 향신료이며 건강식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마늘 사랑은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단하다. 전 세계에서 1인당 소비하는 양이 중국 다음으로 2위를 차지하는 것은 마늘 단독으로 먹기보다 김치를 담글 때와 같이 양념으로 먹는 양이 많기 때문이다. 재배면적 또한 세계 3위이다. 국내 최대산지는 경북 의성군 ‘의성마늘’ 6쪽마늘 한지마늘로 품질 좋기로 유명하다.(사진) 이제 마늘은 세계가 인정하는 10대 수퍼푸드(super food)로 지정된 우수한 건강식품이다. 아린 듯 매운맛을 내는 알리신(Allicin)과 셀레늄, 고농도의 황이 결합된 유황화합물, 비타민 등이 있다. 이러한 화합물은 면역세포인 백혈구를 자극해서 항균성을 높여 감기, 계절성 독감을 예방하고 항암효과를 올려주는 저렴하면서도 탁월한 면역강화식품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혈압을 낮추며 각종 심혈관질환을 줄이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혈액을 묽게 하여 혈전예방에 도움이 되지만 항응고제를 복용하는 사람은 전문의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한 위염, 역류성 식도염 등 위장 질환이 있는 사람에게 생마늘은 속이 쓰리거나 통증을 느낄 수 있어 익혀 먹거나 공복일 때 보다 식후에 먹는 것을 권장하기도 한다. 하루 필요한 마늘의 양은 약 3그램으로 3쪽 정도이다.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5.08.28 / 이미나 기자

    하나님께서 주신 새의 본능
  •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세상에는 사람의 모든 지혜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그 수가 많고 다양한 생물들이 있다.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등불 같은 미물이라도 멸절되지 않도록 돌보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놀랍다.(사 42:3) 세상은 하나님의 지혜로 창조되었고, 모든 생명은 살아갈 수 있도록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시 136:5) 누구에게 배우거나 경험하지 않고 살아가는 능력을 ‘본능’이라고 한다. 또한 경험하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살아가는 ‘학습’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에게 본능과 학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주셨다. 생애 주기가 짧은 생물에게는 멸절되지 않도록 많은 후손을 낳는 다산의 복을 주셨다. 이들의 대부분은 태어나서 학습하기보다는 타고난 본능대로 살다가 생애를 마친다. 수명이 짧은 곤충이 이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몸이 큰 동물들은 성체로 성장하는 기간이 길수록 그 수명도 길다. 이들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낼 때는 주로 본능에 의지해서 살지만 성장하면서 배우며 학습한 내용을 오래 기억하고 이를 응용하며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세상의 모든 창조물 중에 사람이 가장 탁월하다. 여기 산속 은밀한 곳에 둥지를 짓고 알을 낳은 새집이 있다(사진). 조류는 알을 낳을 때가 되면 보금자리인 둥지를 정성스레 짓는다. 이때 천적으로부터 자신과 알을 보호할뿐더러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장소를 선택할 줄 안다. 이들이 둥지에 대한 건축 기술을 배운 적이 없지만 많은 잔잔한 가지를 찾아서 입으로 물어다가 얽히고설켜서 완성시킨다.(사진) 본능적으로 둥지를 만들 줄 알고 알을 낳아 일정 기간을 품을 줄 안다. 비록 허술하게 보일지라도 나무 위나 수풀 속에 새 둥지를 틀면 거센 비바람이 불어도 흩어지거나 떨어지지 않을 만큼 튼튼하다. 하나님께서 저마다 살아갈 지혜를 주셨을뿐더러 갓 부화한 어린 새끼를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는 소홀하거나 한눈팔지 않고 새끼를 먹이고 보살필 줄도 안다. 이때는 천적이 새끼를 공격할 때나 경계할 때는 목숨을 걸 정도로 헌신적이다. 하나님의 영, 지혜의 성령으로 눈이 열린 성도라면 피조물의 세계를 볼 때 놀라우신 하나님을 능력을 찬양한다.(시 136편)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이학박사)
  • 2025.07.25 / 이미나 기자

    인류 삶의 반려자, 미생물
  • 우리는 함께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면서 친근하게 살아가는 대상을 ‘반려’라는 접두어를 붙인다. 한자에서 ‘짝 반(伴)자에 짝 여(侶)자’로 함께 살아가는 벗으로 동등한 관계를 뜻한다. 과거에는 인생의 여정을 함께하는 반쪽 짝을 지칭하는 배우자를 ‘반려자’라고 국한 했다면 요즘은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로봇 등으로 그 신종용어가 낯설지만 않다. 그중에 반려미생물에 대한 소개를 한다면 미생물은 우리의 생활에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 산다.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볼 수 있는 미생물은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미물(微物)이지만 생태환경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사진1,2). 특히 장내미생물 인체의 장내환경과 영양은 물론이고 혈관과 혈액성분의 조절과 더 나아가 정신영역까지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최근에는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 중에서 장내환경에 도움이 되는 미생물 중에 선별해서 대량으로 배양하는 상품화 열풍이 불고 있다. 이미 일부 사람들은 선호에 따라서 장내 건강을 위해 정기적으로 구입해서 먹고 있다. 이들은 주로 대장에서 머물면서 소화가 어려운 ‘셀룰로오스’라는 식물성 섬유소를 분해하며 아직 흡수되지 않은 일부 영양분을 먹이로 좋은 장내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기여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함께 살아가는 다양하고 수많은 생명체들을 창조하셨다(창세기 1장). 이들 중에는 우리 몸에 들어와 사는 장내미생물은 사람뿐만 아니라 일부 동물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의 종류나 수보다 더 많은 종류와 숫자가 존재하는 일이 알려졌다. 저자는 태초부터 인류의 내장에 들어와 살는 유익한 미생물은 공생하는 관계로서 반려자라고 생각한다. 몸에 질병을 일으키는 유해한 일부 병원성 균류를 제외하고 장내에서 반려미생물이 없다면 우리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 수 없다. ‘마음이 편하다’는 뜻은 또 다른 한편 ‘뱃속이 편하다’는 표현과 같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어떻게 편하게 살 수 있겠는가 질문해 본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반려미생물을 이용한 다양한 발효식품을 만들었다. 전통적으로 김치와 된장, 고추장, 청국장 등 대부분 식탁에 올라오는 반찬이 발효된 식품이다. 현재 K-food의 열풍과 함께 한국의 발효식품도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만난 천사들을 대접한 엉긴 젖은 요즘 표현으로 하면 요거트, 요구르트, 치즈 등으로 유산균(젖산균)을 이용한 발효식품이다(창18장). 미생물을 이용한 식품 발효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에서 식품의 장기간 저장과 보존을 위한 일이지만 건강한 식탁을 위한 방법이다. 이렇듯 우리는 미생물을 이용한 발효를 조상 때부터 실행 해 온 삶이었다. 그 외에도 항생제의 원조인 페니실린은 푸른곰팡이(사진3)를 배양해서 정제한 의약품으로 세균감염에 치료에 크게 기여하였다. 반려미생물을 키우고 활용하는 일은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일 될 수 있다. 윤철종 목사 (또오고싶은 교회 담임, 이학박사)
  • 2025.05.25 / 이미나 기자

    성경 Think! 인생 Thank!
     AI, 친구인가 위협인가
  • 기술 시대,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AI 복음전파에 활용하기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 지능)가 당신의 인생을 바꿔드립니다.” 이 문장은 이제 더 이상 광고 문구에 그치지 않는다. 출근 준비를 하며 스마트 스피커에게 날씨를 묻고, 운전 중엔 내비게이션이 교통 상황을 예측해 길을 안내한다. 회사에 도착하면 AI가 요약한 보고서를 읽고 점심엔 챗봇이 추천한 식당에 간다. 하루를 마친 밤, 피곤한 몸을 소파에 기대고 추천 알고리즘이 띄워준 영상을 무심코 재생한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 하지만 돌아보면 하루의 대부분을 AI와 함께 보냈다. 기술은 편리하다. 하지만 항상 유익한가? AI는 삶을 더욱 편리하게 만들어준다. 의료, 농업, 복지, 장애인 지원, 성경 번역, 온라인 콘텐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설교 요약, 제자훈련, 신앙 교육 등에 AI 기술이 점차 도입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은 언제나 밝은 면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AI는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으며 편향된 알고리즘은 차별을 재생산하기도 한다. 또한 일자리를 위협하고, 인간 사이의 신뢰와 관계조차 기술이 대신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전 6:12) 그리스도인은 단지 “이 기술이 가능한가?”를 넘어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기술을 분별하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책임의 돌봄을 의미한다. AI 역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대의 자원이다. 그 사용법에 따라 기술은 복음의 통로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을 해치는 칼날이 될 수도 있다. AI는 환경 보호, 고령자 돌봄, 실종자 추적, 기후 대응 등 선한 목적에 활용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도 온라인 말씀 교육, 묵상 챗봇, 성경 퀴즈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은 본질적으로 중립적이다. 사용자의 목적과 태도에 따라 그 열매는 전혀 달라진다. 우리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이 기술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사용하고 있는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AI가 아무리 정교해지고 빠르게 발전해도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AI는 사랑하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못한다. 고통 받는 이의 곁에 조용히 앉아 함께 울어주고, 믿음으로 중보기도를 드리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 1:27).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다. AI는 문장을 생성하고 정보를 분석할 수 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흉내 낼 수 없다. 사람의 눈물을 닦는 따뜻한 손길, 그것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은혜의 사역이다. AI, 이렇게 시작해보세요 AI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컴퓨터나 스마트폰만 있다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으며 특히 ChatGPT(챗지피티) 같은 대화형 AI는 단순한 명령어 입력만으로도 신앙적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아래는 독자들이 바로 따라 해볼 수 있는 간단한 예시들이다. 상황 사용 방법 예시 기도문 만들기 “병원에 입원한 성도를 위한 기도문 써줘” 말씀 묵상 “오늘의 말씀을 쉽게 설명해줘” 전도지 만들기 “직장인을 위한 전도지 문구 만들어줘” 성경퀴즈 만들기 “요한복음 중심의 퀴즈 5문제 만들어줘” AI 사용 시 주의할 점 1. AI가 제시하는 정보는 항상 사실이 아닐 수 있다. 2. 신학적 내용은 반드시 목회자나 신학 전문가와 검토해야 한다. 3. AI는 조언자가 아닌 ‘확률적 계산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기술은 우리에게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더 큰 분별과 책임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조용히 물으신다. “너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 기술을 사용하고 있느냐?” 이 질문 앞에 각자의 답이 있을 것이다. Think! Thank! Q1. 최근에 어떤 고민이나 문제를 사람보다 AI나 기계에 먼저 털어놓은 적이 있나요? Q2.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Q3. 당신에게 AI는 친구인가요 아니면 위협적인 존재인가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07.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시간을 건너온 인사 … “폭싹 속았수다”
  • 2025년 청년과 140년 전 선교사의 대화 그 정신 이어 우리도 수고해야 4월 바람에 춤추는 유채꽃밭에 A청년은 홀로 앉아 있었다. 봄은 왔지만 A청년의 마음은 아직 겨울이었다. 부활절이 다가오는데도 삶에는 부활의 기쁨보다 반복되는 고민과 현실의 무게가 짓눌러 있었다. 그는 기도하며 되뇌었다. “주님, 저에게도 부활이 필요합니다.” 그 순간 눈을 감고 기도하던 A청년에게 어떤 바람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눈을 뜨니 청년 앞에 낯선 복장을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수염을 기른 얼굴, 낡은 가죽 성경책, 그리고 따스한 눈빛. 그는 다정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입니다. 140년 전 조선에 온 선교사예요. 당신의 기도를 듣고 왔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의 이야기는 마치 영화처럼 펼쳐졌다. “1885년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확신 하나로 이 땅에 발을 디뎠어요.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와 나는 인천 제물포에 내렸고, 이 낯선 땅 조선을 사랑하기로 결심했죠. 언어도 문화도 모르던 우리가 붙든 건 오직 한 가지였어요. ‘하나님은 이 조선도 사랑하신다’는 진리였습니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 소속으로 파송되어 조선에 도착했다. 당시 조선은 외국인에 대한 경계가 극심했고 기독교는 이단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조선어를 배우고 성경을 번역하며 고아원과 교회, 학교 설립에 매진했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경신학교’도 그의 손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는 선교를 단지 복음 전파가 아닌 ‘전인적 인간 회복’으로 실천했다. 조선에 사랑을 피우다 그는 계속 말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이 영적으로 불모지였던 조선에 복음을 전했어요. 철저한 신분제 속에서 양반과 노비로 살던 백성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복음은 해방의 기쁨이었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교육의 기회조차 없었는데 우리는 여성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어요. 위험한 위생 상태와 각종 병에 노출된 백성들에게 서양의술을 전하고 병원을 세워 건강한 삶을 돕고자 했습니다.” “그때 제 눈앞에는 새로운 조선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어요. 사랑과 화목, 협동의 기독교 정신으로 가르치는 학교들, 자비량으로 운영되는 병원들, 고통당하는 이들을 섬기고 죽어가는 자들에게 빛과 기쁨을 주는 교회와 기관들이 세워질 것을 꿈꾸었습니다. 이제 보니 우리가 꿈꾸었던 것보다 더 크게 이루어졌더군요.” 나의 수고도 의미 있을까요? A청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교사님, 요즘 세상은 참 혼란스러워요. 뭘 위해 살아야 할지 어떻게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언더우드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복음은 시대를 가리지 않아요. 예수님은 그때도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가셨고, 지금도 상처 입은 청년들에게 다가가고 계시죠.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을 사랑하시고 당신도 사랑하십니다.” A청년은 힘겹게 이어 말했다. “저는 요즘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힘들어요. 그래도 믿음의 사람처럼 살려고 헌혈도 하고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말씀을 보내고 독거 어르신께 전화도 드려요. 그런데… 이런 게 정말 의미가 있을까요?” 언더우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을 기억하나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당신이 뿌린 작고 보잘것없는 수고가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빛이 되며 위로가 되고 부활이 될 거예요. 우리도 처음엔 작은 교회 하나로 시작했답니다.” 다시 피어나는 부활의 계절 A청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요즘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인기예요. 사람들은 ‘속았다’는 뜻으로 알기도 하지만 사실은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제주 방언이에요.” 언더우드는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운 말이군요. 내 인생이 ‘폭싹 속았수다’라고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 기꺼이 드린 삶이었다는 뜻이겠지요.” 햇살 아래에서 나눈 대화는 마치 기도 같았고 묵상 같았다. 언더우드는 시간의 틈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마지막 말은 여전히 A청년의 마음에 맴돌고 있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청년이여 당신도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A청년은 유채꽃밭 한가운데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님… 저도 누군가에게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주세요.” -------------- Q1. 당신은 누구에게 “폭싹 속았수다”라고 말하고 싶은가요? Q2. 부활절을 맞아 당신이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수고’는 무엇인가요? Q3.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믿음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04.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신앙의 골든 아워 … 지금이 기회이다 
  • 자녀 스스로 고민하고 탐구하는 과정 지원해야 즐거운 예배 열어 주어야 A집사는 설날을 맞아 남편과 자녀들을 데리고 시댁에 방문했다. 시어머니는 가족 모두 모였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한 가지 소원을 말했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니? 다 같이 가정예배를 드리면 좋겠구나.” 그러나 이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은 인상을 찌푸렸고 아이들은 귀찮다며 집에 가자고 투덜댔다. A집사는 며느리이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거절하기가 어려웠고 남편과 아이들을 설득했다. 마지못해 동의한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려는 순간 A집사는 걱정이 밀려왔다. ‘가뜩이나 기독교에 부정적인데, 가정예배를 드린 후 더 싫어하면 어떡하지?’ 신앙의 전수는 삶으로 왜 모태신앙으로 자란 자녀들이 예배를 싫어하고 교회를 떠날까? A집사의 남편은 어릴 적부터 강압적인 어머니 밑에서 교회를 다녔다.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옆집 아이와 비교하고 성적이 떨어지면 폭언과 체벌을 일삼았다. 교회에서는 누구보다 친절한 모습을 보이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는 차갑고 비난을 퍼붓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결국 성인이 되면서 교회를 떠났다. 2024년 12월 발표한 <목회데이터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어른이 된 후에도 교회를 다니겠느냐”라는 질문에 청소년 3명 중 1명이 “아니오”라고 답했다. 많은 청소년은 부모와 교회가 기독교에 대해 입으로 떠드는 것에 지쳐 있다. 부모의 신앙과 실제 삶이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실망하고, 강압적인 신앙 전수가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신앙은 말이 아닌 삶으로 전해져야 한다(신 6:7). 신앙의 골든 아워 넷플릭스에 방영중인 <중증외상센터>는 이국종 교수를 모티브로 한 드라마다. 한 남성이 대형 트럭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고 긴급 출동한 구급대원들은 그의 심각한 상태를 확인했다. 환자가 외상센터로 옮겨진 후 의료진은 생존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지만 팀장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아직 살아있다”라고 말하며 수술을 지시했다. 의료 현장에서 ‘골든 아워’(Golden Hour)란 환자의 생사가 결정되는 결정적인 시간이다. 이 시간을 놓치면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없다. 지금 우리의 신앙도 그렇다. 부모의 신앙이 자녀에게 이어질지 아니면 단절될지 결정되는 신앙의 골든 아워 속에 있다. 지금이야말로 자녀들과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청교도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가정예배를 통해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정예배는 신앙을 이어가는 중요한 수단이 될 것이다. 예배는 즐거워야 오늘날의 자녀들은 유튜브 쇼츠와 틱톡 같은 짧은 영상 콘텐츠에 익숙한 세대다. 긴 시간을 집중하기 어려워 이들에게 기존의 긴 예배 형식은 효과적이지 않다. 예배 형식이 변화해야 한다. 1. 짧고 집중도 높은 예배 - 처음에는 무조건 예배 시간을 짧게 구성해야 한다. 2. 자녀 중심 예배 - 부모가 일방적으로 설교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녀가 직접 사회를 보고, 말씀을 전하는 형식도 괜찮다. 3. 다양한 예배 형식 - 전통적인 신앙고백→찬송→기도→말씀→기도의 형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MBC <질문들>처럼 자녀가 하나님께 던지고 싶은 질문을 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부모와 함께 찾아가는 방식도 가능하다. 부모와 자녀의 역할을 바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도 신선하다. 청소년기는 신앙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떠나는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에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고 탐구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신앙을 ‘재미없는 의무’로 만들기보다 즐겁고 흥미로운 경험으로 만들어야 한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 지금은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는 골든 아워이다. 가정예배를 통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실천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삶으로 신앙을 보여주기 -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신앙을 전해야 한다. 2. 질문을 허용하기 - 자녀가 신앙에 대해 의문을 품고 질문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3. 직접 경험하게 하기 - 신앙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해야 한다. 4. 기도로 지켜주기 - 무엇보다 성령께서 자녀를 만지시고 도우실 것을 믿어야 한다. “너는 마땅히 그들에게 가르칠 것이며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신 6:8). Think! Thank! Q1. 당신은 자녀들이 왜 가정예배를 드리기 싫어한다고 생각하나요? Q2. 자녀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예배 형식은 무엇일까요?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02.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고전(古典)에서 길을 찾다
    『순종의 학교』앤드류 머레이
  • 순종의 시작은 새벽기도 책 『순종의 학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앤드류 머레이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존 모트(John R. Mott)의 말을 빌려 재차 강조한다. “새벽 기도 시간을 지키는 것은 적어도 매일의 첫 30분을 홀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하버드대 교수인 센딜 멀레이너선은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책에서 우리는 모두 결핍 상태에 있으며 그 결핍을 통해 더 나은 성공적인 일들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새벽기도가 제일 힘들다고 고백하는 성도는 분명 그 영적인 결핍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성령께 계속해서 순종하며 살 수 있는 길은 매일 하루가 시작되는 때 분명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순종의 생활에 필요한 은혜를 받는 것밖에 없다. 그 길에 대한 강한 확신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게 새벽기도이다. 쉽진 않지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해 살고 하루 종일 하나님의 임재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기꺼이 치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한다. 시간과 편안함을 희생하겠다는 결심이다. 최근 몇 년간 화제가 되었던 『저속 노화』의 저자 정희원 교수의 “편안함은 저속 노화가 아니라 가속 노화를 부른다”라는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책의 초점이 새벽기도 권면에 있지는 않다. 성경이 교과서이므로 『순종의 학교』에서는 성경대로의 행동을 강조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해 기록된 것을 성경에서 찾고 또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순전한 소원을 가지고 성경을 대해야 함을 일깨운다. 저자는 순종을 ‘천상적인 기술이고, 우리 본성에는 낯설기 짝이 없는 기술’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순종을 배워 가신 길은 아주 더디고 멀어서 우리가 그 기술을 즉시 습득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주님의 발 앞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일에, 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일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그 부분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순종의 학교』라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순종은 배워야 하는 덕목이다. 배워야 함은 또한 가르치는 스승이 존재하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던 그 순종을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한다. 먼저 스스로가 자아에 대한 철저한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을 깨닫는 것이 그리스도처럼 죽기까지 순종하는 방법임을 이 책은 담담하게 제시한다.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5.09.12 / 이미나 기자

    존 밀턴 『실낙원』  
  • 서늘함과 시원함 사이에서 놀라는 책 속편이 있는 고전이 있다. 1667년 출판된 존 밀턴의 『실낙원』(Paradise Lost)이다. 밀턴을 셰익스피어에 견줄 만한 대시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단테의 『신곡』과 함께 불후의 기독교 대서사시로 필독 고전 리스트에 올라있다. 신곡이 가톨릭적 세계관과 가치를 반영했다면 실낙원은 청교도적인 기독교 가치관을 담고 있다. 이 책은 구약 창세기 3장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삼고 있다. 천사였던 사탄이 하나님에게 반역하였다가 천국에서 추방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걸로 책 초반을 연다. 그리고 사탄이 자신의 졸개들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보복을 준비하고, 하와와 아담을 유혹함으로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게 만들고 그들이 낙원에서 쫓겨나는 사건으로 서사를 마무리한다. 실낙원의 절반 이상은 천사들이 아담과 하와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인데 특이하게도 ‘인간의 언어로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게 들려주는 것은 불가능한 것’임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거꾸로 이것은 존 밀턴이 당시 독자였던 17세기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서 최선을 다해 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낙원이 오늘날 철저하게 물질주의화 되어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세대에게 주는 설득력 있는 문장력이기도 하다. 이 책 곳곳에는 서구 문화 전통 전체를 재해석하고 되살리려는 시도가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순수성을 가지고 읽기에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다. 밀턴은 기독교 유일신 사상뿐만 아니라 유대교, 플라톤의 관념론, 호메로스의 신화, 이탈리아 인문학 등 여러 재료를 짬뽕 볶는 거대한 웍 팬에 넣어 뜨거운 불로 조리해낸다. 특히 천국에서 일어난 사탄의 ‘반란’과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인간의 ‘타락’이라는 다른 두 사건을 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우주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우주관을 성경과 결합하여 기본적인 틀을 잡고 있다. 이 책은 서사적인 원문을 운문으로 풀어놓아서 소설처럼 읽기 쉽다. C.S.루이스의 『스쿠르테이프의 편지』와 함께 읽으면 짬짜면의 기분도 가능하다. 에덴동산을 떠나며 눈물 훔치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끝으로 책장을 덮으며 서늘함과 시원함을 동시에 맛보자. 넷플릭스에서 영화화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적인 느낌. 짬뽕집 이름으로 읽힐 수도 있는데 1671년 출판된 『복낙원』(Paradise Regained)이 있다. 실낙원의 속편이다.
  • 2025.08.13 / 이미나 기자

    찰스 디킨스 『예수의 생애』
  • 바로 옆에서 들려주는 따뜻한 책 한 가문에 일종의 가보처럼 내려오던 원고가 있었다.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등의 고전으로 널리 알려진 찰스 디킨스의 작품. 사후 64년이 지나서야 출판된 『예수의 생애』는 아더왕에 빠져있던 아들에게 왕 중의 왕인 예수님을 알려주기 위해 쓴 책이다. 위대한 작가를 아빠로 둔 아들이 아빠찬스를 쓴 셈이다. 본서를 모티브로 만든 애니메이션 ‘킹오브킹스(The King of Kings)’는 미국 극장가에서 다 큰 어른들이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께 빠져들게 하는 쾌거를 이루고 있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가 영화 ‘다크나이트’의 세기말적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면, 본서는 사랑과 희망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이 책은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열두 제자에게 남긴 가르침, 기적, 십자가 죽음과 부활 등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들에게 침대 머리맡에서 차근차근 스토리텔링 하기에 좋다. 본서는 성경을 풀어 놓았다기보다는 저자의 풍성한 지식과 성경에 대한 이해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사랑스러운 문체와 배려 깊은 어투, 그리고 마치 옆에서 다정한 얼굴의 디킨스가 직접 읽어주는 듯한 흡인력이 디킨스의 품성을 대변하는 것 같다. 관심 갖고 읽어야 하는 부분이 제11장인데 저자는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한 말의 뜻을 디킨스는 자세히 설명한다. 십자가위에서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피터르 반 몰의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벤베누토 티시의 ‘예수의 승천’ 세 장의 명품 그림도 스토리를 돕고 있다. 다른 작품에 나타나는 디킨스의 정교하고 날카로운 묘사는 이 작품에서는 볼 수 없다. 대신 예수님의 따뜻한 시선이 돌봄받지 못했던 디킨스의 인생을 위로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따뜻한 플롯이다. 임 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 2025.07.08 / 이미나 기자

    고민 Tick, 상담 Talk
    양육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에 힘든 부모
  • 사랑과 기도는 그 어떤 치료제보다 강력해 가정은 따뜻한 은혜 경험하는 공간 돼야 ▶ 고민 Tick “저는 자녀 양육에 대한 고민이 깊습니다. 자녀의 학교 성적뿐만 아니라, 정서적, 영적 건강까지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때로는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 상담 Talk 자녀의 성적, 친구, 미래 진로에 관한 걱정 때문에 상담실을 찾아오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자녀들과 상담을 해 보면 자녀들은 부모가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지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이 공부를 잘하거나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해 드릴 때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피터 포나기(Peter Fonagy) 박사는 ‘정신화(Mentalization)’라는 개념을 통해 부모 자녀 관계의 핵심을 이야기합니다. 정신화란 우리 자신의 행동이나 타인의 행동 이면에 있는 생각, 감정, 의도 등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자녀의 행동을 보며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나기 박사는 이 부모의 ‘정신화’ 능력이 자녀의 정서적 안정과 건강한 자아 발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는 자녀의 ‘정신화’ 능력으로도 연결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기독교 상담의 관점에서는 ‘정신화’ 능력이 하나님과의 관계 능력으로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걱정되기 때문에 자녀의 문제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자녀가 공부를 안 하는 것 같으면 ‘게으르다’, 친구와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면 ‘성격이 예민하다’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포나기 박사는 자녀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원인에 주목하라고 조언합니다. 공부가 하기 싫은 자녀의 마음속에는 ‘부모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소망’이나 ‘부모의 바람대로 공부를 더 잘 하고 싶지만 성적이 부모의 기대만큼 나오지 않을 때마다 실망하는 부모의 모습이 보기 싫기 때문에’ 더 공부에 집중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애착 이론의 창시자인 존 볼비(John Bowlby, 1907~1990)는 안정애착 관계가 자녀의 정서 발달에 필수적이라고 주장 하였는데 포나기는 그 안정애착이 바로 부모의 ‘정신화’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뇌과학자인 다니엘 시겔(Daniel Siegel)이 말하는 ‘마음의 거울(mirroring)’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부모가 부정적인 행동을 보이는 자녀의 감정에 대해 ‘화가 났구나’, ‘속상했구나’라며 공감적으로 대해줄 때, 자녀의 뇌는 그렇게 대해주는 부모를 자신의 거울로 인식하여 자신이 어떤 감정인지 인식하고 조절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로 인해 늘 지적받던 아동을 상담했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 부모에게 ‘정신화’와 ‘마음의 거울’ 되어주기를 훈련했더니 자녀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부모가 자녀 행동의 근원을 이해하고 ‘너도 많이 두렵고 무서웠겠구나’라고 공감해 줄 때, 자녀의 마음은 열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히 이 가정은 크리스천 가정이었기에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부모는 이전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컸지만 상담을 받고 예배를 회복한 후부터 하나님께 이 자녀를 주심에 감사하고 잘 키울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는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9세 때 만나서 치료했던 아동이 지금은 고3이 되어 공부도 잘하고 신앙생활도 잘한다는 소식을 최근 접했습니다. 이처럼 자녀 행동의 동기를 읽어주고 자녀 마음의 거울이 되어주는 부모의 사랑과 기도는 그 어떤 치료제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정신화는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읽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부모 자신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포나기는 이를 ‘반성적 기능(Reflective Functioning)’이라고 부릅니다. 아이의 통제할 수 없는 행동에 부모가 버럭 화를 낼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부모는 아이의 마음에 집중하기보다 부모 역할의 피로감에 압도된 상태일 수 있습니다. ‘반성적 기능’은 이때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라고 스스로 질문하며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자기성찰인 회개와 깊이 연결됩니다. 물론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포나기 이론에 따르면, 부모가 100% 자녀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의 마음을 잘못 읽었을 때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능력’입니다. “아빠, 엄마가 네 마음을 오해하고 화내서 미안해”라고 말하며 부모가 자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은 아이에게 공부나 친구 관계에서 ‘좀 실수해도 괜찮아. 다시 회복하려는 용기가 중요해’라는 안정감을 줍니다. 이는 또한 부모 자녀 관계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자녀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신앙 관계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차가운 율법이 아닌 따뜻한 은혜를 경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먼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자녀에게 용서를 구할 때 자녀는 부모의 사랑이 조건적이지 않으며 실수는 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5.08.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신앙의 유산, 어떻게 물려줄 수 있을까?
  • 자녀는 부모를 보고 배운다 ▶ 고민 Tick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어떻게 물려줄 수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 상담 Talk 필자는 석사 후 박사에 진학하기 전 한 기독교 잡지의 기자로 근무했다. 잡지에는 당시 크리스천 유명인들의 인터뷰가 담겼다. 소외된 청소년들을 지속적으로 돕고 있는 PGA 골프 우승자 최경주 선수와 2002 월드컵 축구 대표 선수단에서 복음 전도자로 불리던 이영표 선수는 한 목소리로 모든 승리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고백했다. 인생의 고비를 지나 성공을 이룬 많은 유명인들도 결국 인터뷰 마지막에는 본인들이 받은 축복이 자손에게 대대로 이어지기를 소망했다. 돈과 명예보다도 신앙 안에서 성공한 본인들의 삶이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필자도 두 자녀의 부모로서 누구보다 가장 소원하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있다는 것이다. 자녀들의 꿈을 하나님께 맡기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지금은 이전 신앙 선배님들의 이야기가 큰 교훈으로 가슴에 오롯이 새겨진다. 정신분석학의 대상관계이론(Object Relations Theory)가들은 유아의 성장 과정을 생애 초기에 부모에게 절대 의존하였다가 서서히 부모로부터 분리해 가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대상관계이론의 대표적 학자 중 한 명인 도날드 위니캇(Donald Winnicott, 1896~1971)은 사람이 인격적으로 성장하는데 있어서는 주양육자(Primary Care Giver), 즉 양육 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대상과의 관계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개인의 정서적 발달이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탯줄을 통해 먹을 것을 제공받고 옷도 필요 없으며 화장실에도 갈 필요가 없었던 절대 의존과 공생의 관계였던 의존적 대인관계로부터 독립적인 대인관계로 성장해 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신생아기에는 부모가 아기의 필요한 모든 것을 가능한 즉각적으로 해결해 준다. 이러한 부모 또는 주양육자의 헌신적인 돌봄 속에서 아기는 세상이 살아갈 만하다는 신뢰감과 안전기지(Secure Base)를 경험한다. 이러한 안정적인 주양육자에게 전적인 의존을 경험하면서 자기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확인한 안정애착인 아기는 그때부터 주양육자로부터 분리하여 자신을 발견하는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다. 이때부터 안정애착인 아이와 불안정애착인 아이가 나뉘게 된다. 심지어 애착의 질은 세대 간 전수되기 때문에 부모가 불안정애착인 경우에 부모와 자녀 모두 전문적인 치료 혹은 상담을 받거나 안정적이고 친밀한 교회공동체 안에서 안정재애착을 구축해야만 한다. 따라서 자녀에게 신앙의 유산을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서는 가정 내에서 부모자녀 간 안정애착을 구축하는 것이 최우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부모가 제공하는 안전기지 안에서 부모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습득하기 때문이다. 위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며 인내하는 부모를 보고 자란 자녀는 자신의 삶에서 위기가 닥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모에게 기도 부탁을 하는 성숙한 신앙 유산을 물려받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작년부터 올해까지 교육 목사로 사역하는 청년부에서 바울서신 강해를 해왔다. 그중 로마서의 마지막 16장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도와준 동역자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특히 13절에서는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루포’는 바로 마가복음 15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던 때에 대신 십자가를 지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이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 15:21) 에서 두 아들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은 두 아들의 손을 잡고 시골로부터 와서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바로 그 시간 그 곳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때 거기 있던 사람들이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우게 된다. 우리도 종종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억지로’ 마지못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자녀들은 시몬의 자녀 ‘루포’가 주 안에서 택하심을 받아 바울 사도의 동역자가 된 것처럼 신실하게 쓰임 받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부모로서 부족하고 억지로 주님의 일을 감당할지라도 우리의 신앙은 분명히 유산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씀 속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증거한다.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롬 16:13). ‘루포’처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는 축복이 우리 모든 자녀들 가운데 임하시기를 소망한다.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5.07.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가족들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고 싶어요”
  • 우리는 사랑과 도움 먼저 베푸는 복음의 전령사 돼야 ▶ 고민 Tick “어떻게 하면 멀리 시골에 계신 부모님과 가족들이 예수님을 만날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 상담 Talk 7년 전 한 학회 세미나를 통해 만난 문 선생님은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문 선생님은 모래놀이치료를 배우고 싶은 소망 때문에 예순의 나이가 무색하게도 필자가 몸 담고 있는 신학교 놀이치료교육 전공에 입학했다. 문 선생님의 밝은 미소와 예의 바른 태도 때문에 학우들은 ‘문 권사님’이라고 호칭하며 함께 신앙 생활하실 수 있게 되길 중보기도 했다. 선생님은 놀이심리상담사 2급과 1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세종시에 상담센터를 개원한 후 학교와 기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동, 청소년, 부모 상담을 진행했다. 필자는 수업 시간마다 선생님께 내담자의 심리적인 안정뿐만이 아니라 영적인 평안을 원한다면 본인이 교회에 먼저 다니고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확신을 받고 참 평안을 누려야 한다고 말했다. 필자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던 선생님은 본인의 센터를 찾아온 개척교회 사모님의 교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문 선생님은 또한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도록 인도하기 위해 평생 기도해 준 죽마고우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 친구가 살아있을 때 함께 교회에 가주지 못하였던 점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필자에게 솔직히 고백했다. 그 후 선생님은 친구가 쌓은 기도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교회에 가보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기에 상담센터를 찾아오신 사모님을 따라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에게도 정말 놀라운 일은 이번에 문 선생님께서 지방에서 혼자 살고 계시는 90세 어머니께 어버이날을 기념해 인사 갔을 때 비기독교인이셨던 어머님께서 먼저 문 선생님께 교회에 함께 가자고 하신 것이다. 문 선생님은 너무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어머님께서 살고 계시는 시골교회 목사님께서 어머님을 자주 찾아오고 반찬과 집안일 등을 너무도 친절히 섬겨주셔서 어머님께서 스스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하셨다. 이번에 문 선생님은 어머님과 시골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필자와 학우들 생각이 많이 났고 어머니께도 말씀드리셨다고 했다. 문 선생님께서는 어머니를 뵙고 돌아온 후 지도교수인 필자에게 곧바로 연락해 본인이 어머니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본인도 믿겨지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필자는 상담심리학과에 입학하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분명히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상담심리학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일반계시의 한 전문 영역으로 허락하신 부분이며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도구로서 배우는 학문이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의 제자로 상담심리학과에 입학했던 비기독교인 제자들은 재학 중 또는 졸업 후에 모두 기독교인이 됐다. 이 부분이 필자가 신학교 교수이자 목사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영역이다. 필자의 아버님도 개척교회 목사님이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어머님과 지금은 과학자가 된 오빠와 필자는 방과 후에 맞벌이 부모님으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간식과 저녁식사를 제공하고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공부를 가르쳐주는 교회가 고마워서 예의상 주일 예배에 참석하다가 은혜를 받고 집사, 권사, 장로님이 되었다. 특히 자녀의 성품과 공부, 가족 갈등의 어려움에 대하여 목사님, 사모님께 상담을 받았던 부모들이 차츰 예수님을 알아가던 모습은 지금 필자가 부모님의 뒤를 이어 목사와 목회상담자의 삶을 따라가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바울 사도가 세상의 모든 명예와 권세, 지위를 버리고 주님이 은혜로 허락하신 복음만을 자랑으로 여기며 주님의 일꾼으로 살아가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처럼 우리도 복음의 전령사들이 되어야 한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1). 특히 믿지 않는 가족과 부모님들을 구원의 반열에 함께 하도록 하려면 그 가족들이 사는 지역의 신실하고 가까운 교회의 목회자 부부와 먼저 믿은 이들을 찾아서 연결해 드려야 한다. 우리는 어머니와 문 선생님을 찾아온 목사님과 사모님처럼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복음을 들고 찾아가며 소외된 이들에게 사랑과 도움을 먼저 베풀어야 한다. 우리로부터 복음을 전달받은 우리의 이웃이 바로 지인들의 가족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5.05.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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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출현은 새로운 문명 시대를 열어왔습니다. 학자들은 ‘말’의 발명으로 수렵, 채집 생활이 시작된 1단계, ‘글’의 발명으로 농경사회가 형성된 2단계, ‘인쇄’의 발명으로 산업사회가 본격화된 3단계, 컴퓨터와 결합한 ‘텔레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등장으로 정보사회가 펼쳐진 4단계로 역사 발전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챗GPT’ 등 인공지능, 블록체인, 가상현실과 같은 디지털 범용 기술들이 새로운 4차 산업시대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나가리라 예측됩니다. 되돌아보면 인터넷, 휴대폰 등 뉴 미디어의 확산은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획기적 변혁을 초래했습니다. 우선 인터넷은 탁월한 개방성으로 공간의 제한을 무력화시키고 명실상부한 ‘지구촌 공동체’를 실현해 냈습니다. 또한 개인 미디어와 매스 미디어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을 일시에 무너뜨렸습니다. 이 결과 많은 사람들은 IT기술과 접목된 뉴미디어의 등장이 ‘표현의 자유’에 있어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람은 상당 부분 실현됐습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작용 또한 생겨났습니다. ‘가짜뉴스’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미디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막강합니다. ‘교과서’며 ‘재판관’이고 ‘세상을 향한 창’입니다. 실제로 영유아들은 부모나 교사보다 TV나 유튜브를 통해 먼저 세상을 배워 나갑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언론의 잣대에 의해 규정됩니다. 또한 개인들은 미디어가 설정해 놓은 프리즘을 통해 외부 환경을 파악하고 사회 현안을 해석합니다. 한 마디로 ‘가짜뉴스’란 ‘뉴스의 형태를 띠지만 실체는 사실이 아닌 거짓된 뉴스’(fake news)를 의미합니다. 이는 언론 매체에 대한 사회 일반의 기본적 신뢰를 숙주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진실을 조작해 이익을 챙기려는 불순한 시도입니다. 이런 행태는 근래 SNS상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편집 통제권’(editorial control) 없이 ‘이용자 통제권’(user control)만 존재함을 악용해 가짜뉴스 제작 배포, 마녀사냥식 신상 털기, 테러 수준의 명예훼손 등이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를 정치적 선동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가공된 뉴스를 활용해 주식시장을 흔들려 한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의 경우는 ‘조회’와 ‘구독자’ 수가 수익과 직결되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적 내용으로 꾸며진 괴담 수준의 가짜뉴스가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강하고 자극적인 발언을 할수록 보상이 올라 간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됐고, “유명해진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노이즈 마케팅이 일반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정착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가짜뉴스가 지닌 신속한 전파력입니다. 미국 MIT 공대 연구진에 따르면 자극적인 가짜뉴스는 일반적 뉴스에 비해 전파 속도가 평균 6배 빠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의표를 찌르는 폭로성 뉴스, 험담과 막말이 섞인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에 더욱 솔깃해하는 인간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언론 자유를 신장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던 디지털 공간에서 이처럼 민주 질서를 위협하는 행태들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윤리와 규범을 바로 세우고 사용자들의 책임 의식을 거듭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밀려오는 정보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변별력’을 길러나가는 일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을 통해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도 효과적 방안이 될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에게는 이 같은 여과 능력의 함양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5:8~9). 온라인을 이용해 범람하는 온갖 반기독교적 정보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예리한 통찰력과 분별력을 갖춰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오늘 이 지면을 빌려 혼탁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의연히 기독 언론의 정도를 걷고 계신 <순복음가족신문>에 새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신문은 저희가 온 마음 바쳐 사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보루이며, 곳곳에 고귀한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생생한 ‘교회행전’입니다. 지난 2년 이 귀중한 신문에 부족한 제가 신앙 시사칼럼을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외람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올리며, 한결같이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신 신문사 여러분과 졸문을 읽어 주시고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광과 찬송을 주님께! 할렐루야!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2.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한글, 빛나는 우리의 보물
  • 한국어 학습자가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0일 코리아헤럴드가 교육부 자료를 입수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어를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곳은 세계 42개국 1806개 초 중학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3년 만에 40%가 급증한 수치입니다. 온라인상에서의 한국어 열기 또한 뜨겁습니다. 5억 명 회원을 둔 글로벌 외국어 학습 서비스 ‘듀오링고’는 최근 ‘2022년 듀오링고 언어 리포트’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어 학습자는 1070만 명으로 전년 대비 29%가 증가, 수강자 수가 많은 언어 순위 5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향학열이 높아진 데는 물론 ‘한류 열풍’이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한글’ 자체가 지닌 문자로서의 탁월성과 매력입니다. 실제로 한글은 여러 ‘소리글자’ 가운데서도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입니다. 열 자의 모음, 열 네 자의 자음, 27종의 받침을 활용해 수천 개의 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음소문자로서 세계 공용어화 되어 있는 영어와 견주어도 효율성이 월등합니다.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다르며,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분되고, 꼭 글자대로 읽혀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발음기관과 발음 작용을 본떠 만들어진 한글의 과학성은 정보화 시대의 진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보면 하늘을 뜻하는 ‘·’, 땅을 뜻하는 ‘ㅡ’, 사람을 뜻하는 ‘ㅣ’ 석자로 수십 가지의 모음을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자음은 동일한 자판을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예삿소리(ㄱ)→거센소리(ㅋ)→된소리(ㄲ) 순으로 변환돼 간단한 조작으로 모든 글자를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뛰어난 한글의 편이성이 우리의 높은 휴대전화 보급률과 선도적 기술축적을 가능케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울러 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특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정연하게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두에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동기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말이 공용되는 한자와 통하지 않아 백성들이 제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실정임을 긍휼히 여겨 쉽게 익혀 편하게 쓸 수 있는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점을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는 보다 실감 있게 설명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한글은 이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자주적 실용주의가 투영돼 구성원리가 간명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문맹 퇴치 신화’를 이룩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습득의 용이성’이라는 한글의 장점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전도의 사명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역, 신분, 성별의 구별 없이 두루 보급되고 읽혀졌습니다. 그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가며 전도했고,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배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은 “한글이 진정한 우리 언어로 빠르게 자리 잡는 데 성경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국민일보 우성규 기자의 언급대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의 보급으로 한반도는 문맹에서 벗어났고, 이를 통해 전해진 복음의 메시지는 한국교회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됐던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한글임에도 근래 우리 사회의 한글 홀대는 선을 한참 넘어섰습니다. 온갖 은어, 비어, 속어, 정체불명의 약어와 합성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공공 방송에서조차 한글 규범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단 78년의 세월이 초래한 남북한 간의 언어 이질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민족의 명절인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북이 함께 기념하는 절기가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서 ‘설날’은 지금까지 우리 겨레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명일(名日)입니다. 궁극적인 ‘남북통일’은 단순한 ‘제도적 통일’을 넘어 ‘사람 간의 통합’에까지 이르러야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시풍속의 존속과 공유는 통일 여정에서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글은 다름 아닌 생각과 정신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말과 글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민족공동체로서 기본적 공감대의 토대가 이미 마련돼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이 기반이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방지 대책이 시급히 강구돼야만 할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글은 빛나는 우리의 문화 자산입니다. 겨레의 보물인 우리말, 우리글을 바로 지키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 온 국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과의 귀중한 소통 매체인 한글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언어가 역사와 문화의 창고를 여는 관건이듯이 성도들에게 한글은 은혜의 보고인 성경을 여는 소중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카타르의 낭보
  •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짓는 의미 있는 분수령이 됐습니다. 사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954년 제5회 스위스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다섯 번이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음에도 단 1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6월 4일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2대 0으로 꺾은 후 강호 포르투갈, 이탈리아, 우승 후보 스페인까지 연달아 격파하며 4강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모두에게 축구는 ‘그냥 축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팀의 경기를 매개로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춤추고 함께 함성을 질렀습니다. 세계적 명물로 자리 잡은 자생적 ‘길거리 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4강 신화에 세계가 놀랐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 스스로였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신감, 동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적 유대감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이 열기는 IMF 경제위기 극복, 폭발적인 참여민주주의 확대, 창발적인 한류 문화 확산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22년, 제22회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통계전문가들의 ‘16강 진출 가능성 9%’의 예측을 여지없이 깨뜨린 이 반전 드라마는 투철한 ‘원팀 정신’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위시한 코치진과 27명의 선수들이 똘똘 뭉쳤습니다. 그 결과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국형 ‘빌드업 축구’가 가능했고, 어떤 팀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강인한 뚝심이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구성원들 간의 신뢰 역시 돋보였습니다. 특히 주장 손흥민 선수의 리더십은 발군이었습니다. 그는 월드컵을 3주 앞두고 소속팀 경기에서 당한 안와골절로 안면 보호대를 착용한 채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년간 마스크를 쓰고 계신 국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의연히 대답했습니다. 개막 전 “단 1%의 가능성이 있어도 앞만 보고 달려가겠다”며 부상 투혼을 예고했던 그는 약속대로 “몸이 부서지도록” 뛰었습니다. 실제로 H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벼랑 끝에 몰렸던 한국팀은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황희찬으로 연결된 극적인 역전 골로 포르투갈에 2대 1 승리를 거두며 16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16강전 진출이 확정된 직후 권경원, 조규성 선수는 관중에게서 건네받은 태극기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뚜렷한 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본래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가 7수 끝에 세계 대회를 제패하며 했던 이 말은 다시 새롭게 부각되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선 대회 내내 보여준 대표팀의 모습이 압축된 표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흔들리는 이 세대에게 던지는 속 깊은 응원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팀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위축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불퇴전의 투혼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기간 특별히 우리 팀의 경기가 열렸던 13일간 축구 덕택에 대한민국은 모처럼 하나가 됐습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모두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표팀의 선전은 코로나 블루, 경제 한파, 잦은 사회적 갈등으로 침체돼 있던 한국 사회에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또 한 번의 ‘송구영신’의 시간을 맞으며 영혼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 스타디움을 뛰고 달렸듯 성도들도 인생의 경기장을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경주자처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인생행로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감사한 것은 이 신앙 노정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스타플레이어로 여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는 말씀대로 열렬한 서포터가 돼 뜨겁게 응원해 주십니다. 독자 여러분!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스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팬이 되어주십니다. 다가오는 2023년 새해, 예수님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12.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새책소개
    2025년은 하나님의 말씀 가득한 『감사QT 365』 와 함께
  •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 위한 최고의 선물! 하나님과 동행하는 2025년을 기대하는 성도들의 필독서 『감사QT 365』가 출간됐다. 매년 업그레이 되는 『감사QT 365』는 절대 긍정, 절대 감사를 실천하는데 도움을 주는 QT(Quiet Time) 서적으로 각광 받아 왔다. 감사와 QT, 그리고 필사가 어우러진 2025년 판 『감사QT 365』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집필됐다.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예화를 선별하고 간략하게 요약하여 삽입했다. 특히 성경 말씀을 필사할 수 있는 지면과 말씀 묵상의 적용을 돕기 위한 질문을 추가해 일 년 동안 매일 하루하루를 말씀으로 채우고 영적 성장에 힘쓸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영훈 담임목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지켜준다면 고난 중에도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책에는 매일 QT를 생활화하여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삶을 살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예배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저자의 마음이 이 책 『감사QT 365』 곳곳에 녹아져 있다. 이영훈 목사의 감사 목회 철학이 체험적으로 녹아 있는 365편의 묵상의 글과 은혜로운 예화들을 읽고 ‘나의 감사’란에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적어보자. 매일 주어진 일독성경 범위 내에서 제시된 그날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필사하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QT를 하루하루 실천하다 보면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사람이 되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을 따라 매일 주어진 분량의 성경 말씀을 읽으면 2025년 한 해 동안 구약 1독, 신약 2독을 하게 된다.
  • 2024.11.15 / 복순희 기자

    2024년 『감사QT365』 하루 한 장으로 하나님과 동행
  • 매일 통독, 말씀 묵상, 말씀 필사, 감사 쓰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절대긍정, 절대감사하는 새해를 계획했다면 『감사QT365』 2024년 판을 추천한다. 이번에 발간된 『감사QT365』는 감사와 QT, 필사가 어우러져 일 년 동안 매일의 삶을 말씀으로 채우고 영적 성장에 힘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이 책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집필됐다. 본문을 예화 중심이 아닌 말씀 중심으로 편성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예화를 선별해 요약했다. 더불어 성경 말씀을 필사할 수 있는 지면과 말씀 묵상의 적용을 돕기 위한 질문을 추가했다. 또한 매달 시작점에 월별 계획표(monthly plan)를 수록해 매일 성경통독 진도를 표시할 수 있도록 했다. 이영훈 목사의 감사 목회 철학이 체험적으로 녹아 있는 365편의 묵상의 글과 은혜로운 예화들을 매일 읽고 ‘나의 감사’란에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적어 나가다 보면 저절로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영훈 목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대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2023.12.15 / 복순희 기자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
  •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로 탄생한 기독교가 우주 만사의 정답이 된다. 혼란한 시대를 사는 인생들에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이기창 공로장로(반석대교구)가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를 펴냈다. 저자는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기록은 합리적이며 과학과도 합치하며 오히려 과학을 초월하고 있음을 깊이 있게 분석해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성을 논증했다. 이 책은 신, 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 내용을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면서 심도 깊게 해설하고, 기독교 교리와 신앙, 신학적 논리와 이론 및 사상, 우주의 창조로부터 역사, 종말 및 미래 발생할 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과학자인 저자는 과학과 철학의 논리로 신의 존재로부터 우주 만물 전체를 물질우주와 정신우주로 균형있게 조망하면서 과학-철학-신학을 통섭해 교집합의 우주론을 밝혀낸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인류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질문인 우주, 물질, 영혼, 생명, 죽음, 사후생, 세상종말 등 빅퀘스천 규명을 추구해 나간다. 응용과학인 전자통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공과대학 정교수를 역임한 이기창 공로장로는 교수 은퇴 후 10년간 물리학, 철학, 신학, 역사 등 인문학 연구에 몰두해 이 책을 만들었다. 그는 현대물리학에서 발견한 빅뱅 우주론과 부합하는 종교를 엄밀히 분석, 조사해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만이 현대과학과 부합하는 유일한 종교로서 진실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기독교가 공학, 물리학 등의 과학과 철학에 합치하는 유일한 종교이며 따라서 성경과 기독교는 ‘우주적 진리’라는 결론을 깨닫게 된다. 어디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몰라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추천하는 필수 교양 인문서적이다.
  • 2023.04.07 / 이미나 기자

    문화계 소식
    [영화 소개] 천성가는 밝은 길이
  • 사형수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박효진 장로의 간증을 토대로 제작한 ‘천성가는 밝은 길이’ 영화가 지난 4월 유튜브에 올라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박 장로는 전직 교도관 출신으로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다. 그의 간증은 사형장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형수들의 처절한 영적 사투를 통해 복음의 진리와 영적전쟁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이번 영화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수많은 기독교 영화를 제작한 홍의봉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박효진 장로 역은 이경영 배우가 맡아 열연했고, 신인 김양균과 유라성도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임동진(목사), 한인수 장로, 정욱, 정선일 등의 중견 배우들도 특별 출연했다. 영화는 유튜브에서 제목 검색을 통해 볼 수 있다.
  • 2023.06.09 / 김주영 기자

    기독교 복음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 7월 5일 국내 개봉  
  • 전미 박스오피스 4주간 연속 TOP 10 하나님의 사랑과 진정한 믿음으로 감동 전해 하나님의 치유 능력과 사랑을 경험케 하며 대한민국에 진정한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릴 기독교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가 오는 7월 5일 국내에 개봉한다. 전미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들며 놀라운 흥행을 기록해 그 해 최고의 종교 영화로 떠올랐다. <기적을 믿는 소녀>는 기도로 믿음을 증명하는 어린 소녀를 통해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이 믿음의 불꽃을 키워가는 엔터테이닝 복음 영화다. 가족과 함께 호수에 놀러 간 평범한 어린 소녀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케 하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죽은 새와 강아지의 부활, 그리고 하반신 마비를 가진 친구가 다시 걷게 되는 등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목격한 믿음의 소녀를 통해 점차 변화해 가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강렬한 울림과 함께 감동을 전한다.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 사람들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보는 내내 미소를 짓게 하는 스토리와 힐링을 선사하는 완벽한 케미스트리 등을 통해 종교인을 넘어서 일반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관람 후에는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듣고 계세요”라는 대사와 깊은 감동이 가슴에 남게 된다. 특히 <위대한 쇼맨> 오스틴 존슨부터 제68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미라 소르비노, 피터 코요테, 케빈 소르보까지 믿고 보는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해 막강 캐스팅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여 이목을 집중시킨다. 한편, GOODTV 기독교복음방송(대표이사 김명전)에서는 개봉 전부터 <기적을 믿는 소녀> 교회 상영을 진행해 한국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는 많은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밝혔다.
  • 2023.05.25 / 이미나 기자

    스마트폰 생활백서-저절로 성경일독
  • “스마트폰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보여요!” 잠금화면 활용한 성경 묵상 앱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매순간 단비와 같은 성경 말씀을 전달해 주는 앱이 있다. 바로 ‘저절로 성경일독’이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스마트폰 화면을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에는 성경 구절이, 하단에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화살표 기호와 북마크, 공유하기, 잠금해제 버튼이 있다. 화면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켜지면 다음 절로 넘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담 없이 성경을 일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앱에서는 말씀 공유 기능이 가장 눈에 띈다. 묵상하고 있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말씀 카드를 만들어 SNS로 즉시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모바일 전도 도구로도 활용이 가능해 전도 대상자에게 유용하다. 성경은 개역개정, 개역한글, 현대어성경, 새번역과 영어 성경인 KJV, NIV, NLT 버전을 제공하고 있는데 한글과 영어 두가지 성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개역개정, 개역한글, KJV 성경은 오디오도 함께 제공된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안드로이드기반(삼성 및 LG)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구글 Play스토어에서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앱을 실행하면 광고가 나타나지만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말씀을 묵상하고 공유하는데 지장이 없다. 또한 결제해야 이용할 수 있는 ‘읽기모드’는 우리 교회 앱 성경과 동일한 기능이므로 오랜 시간 성경을 읽을 때는 교회 앱을 활용할 것을 추천한다.
  • 2022.07.29 / 금지환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31. 후안무치(厚顔無恥)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솔로몬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된 시므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6~37) 3. 솔로몬의 숙청 작업과 시므이의 죽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숙청의 이유, 방법, 숙청당한 인물들만 보면 공포정치를 휘둘렀던 절대군주 못지않다. 숙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비아달, 다윗을 섬기며 충성을 다했던 군대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형이자 왕자였던 아도니야까지 잠재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둘째는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다니엘, 셋째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 넷째는 학깃이 낳은 아도니야였다.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열 번째쯤 된다(대상 3:1~5). 그런데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게 죽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 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 죽은 것이다. 둘째 아들 다니엘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성경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왕상 1:5~11). 이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요압과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왕하 1:7). 하지만 아도니야의 시도는 일일천하에 그쳤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도니야(왕상 1:51)를 살려주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상 1:52). 하지만 아도니야는 다윗의 침실에서 수종을 들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은 이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도니야를 처형해 버렸다(왕상 2:13~25). 2) 아비아달 아비아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10번째 대제사장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기약이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도시와 지역이 있었지만 다윗이 선택한 첫 장소는 대제사장이 있던 놉이었다(삼상 21:1).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고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삼상 21:4~10).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을 문제 삼아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을 한 날에 살육했다(삼상 22:18).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아달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아비아달은 지체 없이 한걸음에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향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에봇을 가지고 도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3:6). 아울러 우림과 둠밈을 대제사장의 에봇 흉패 안에 보관하라고 되어 있기에 우림과 둠밈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출 28:30). 다윗은 이렇게 사선을 넘어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직후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에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왕상 2:27). 3) 요압 요압이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이다’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볐던 군대 장관이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던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다윗이 사울의 남아있던 세력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장군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를 이끌던 요압이 맞붙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요압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요압은 이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자손들과 다윗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하고 통일왕국을 탄생시키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고 통일왕국의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뗐다(삼하 3:8~21).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 다시 헤브론으로 유인해 왔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브넬을 살해했다(삼하 3:27). 성경 여러 곳에서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요압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후 모든 공이 아브넬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에 대한 염려와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한 번에 갚고자 벌인 일이었다. 다윗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큰 용사였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압에게 묻지 않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로몬은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압이 죄 없는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이었던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었지만(왕상 2:31), 실상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시므이 솔로몬의 서슬이 퍼런 칼날은 그의 왕권을 위협할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대왕이었던 다윗이 살려 준 시므이를 향한 솔로몬의 마지막 경고이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절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왕상 2:36~37). 왜 솔로몬은 베냐민 자손이고 바후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시므이를 굳이 예루살렘 성에 붙잡아 두고 절대 떠나지 말라고 했을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 두 명이 도망을 가자 솔로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벗어났다(왕상 2:39~40). 솔로몬은 브나야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이를 단숨에 처형했다(왕상 2:45).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초라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가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였다. 하지만 압살롬에 의한 왕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엎드려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량과 은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8.01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30.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시므이의 죽음①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8~19) 사무엘하 15장과 19장은 후안무치한 시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골 어디에도 왕의 위엄과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다윗은 머리는 산발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윗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길을 역방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나 군사들에게 쫓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신세였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10명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다윗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친부로서의 자존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더 낮아질 수도 초라해질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이미 죽임을 당해 세상에 없었다. 다윗의 차남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나발의 아내였으나(삼하 2:2)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된(삼상 25:39~43)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이다(대상 3:1). 하지만 그의 이름 외에 추가적인 자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장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아(왕상 1:5~10) 다니엘은 일찍 죽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남과 차남이 죽은 상황에서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아버지 다윗을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압살롬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헤브론에서 시작한 반란은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거칠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바후림을 지나고 있을 때 사울의 친족이요 게라의 아들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다(삼하 16:5). 다윗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13). 자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이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사울의 남은 자손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참소하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울의 친족을 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친족들에게 많은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고 사울의 친족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했다. 그들의 토지나 소유권도 빼앗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은혜를 받았던 사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시므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부었다. 비록 피난길에 올랐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있었고 많은 백성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6:6).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말한다(삼하 16:9).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극심한 모멸감에 시달렸을 다윗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므이는 더없이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난이 은혜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므이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가 퍼붓는 저주를 묵묵히 참아냈다(삼하 16:11). 2. 급변한 시므이의 태도 다윗이 가장 힘들었을 때,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의 태도는 압살롬이 죽고 왕자의 난이 정리된 이후 급변한다. 압살롬이 죽자 제사장들과 신하들은 서둘러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진행한다(삼하 19:11~12). 다윗은 피난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올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던 바후림에 이르렀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귀환 행렬이 바후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엘하 19장 16~18절은 이때 시므이가 취한 행동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유다 사람들과 동행(삼하 19:16) 사울의 혈육으로 베냐민 지파였던 시므이는 급히 유다 사람들과 다윗을 맞으러 나간다. 다윗의 피난 행렬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에게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다시 바후림에 왔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2) 시므이의 세력(삼하 19:17) 사무엘하 19장 17절은 사울이 죽은 후 시므이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을 맞으러 나올 때 시므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기의 모든 세력을 데리고 나온다.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열다섯 명의 아들, 종으로 부리고 있던 하인 스무 명을 대동했다. 시므이는 호시탐탐 사울 왕조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이유도 없다. 3)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삼하 19:18~20) 시므이는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다윗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시므이가 특별히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던 날에 저질렀던 패역한 일'에 대한 용서였다(삼하 19:19). 그가 다윗을 쫓아가며 했던 저주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비새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삼하 19:2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므이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울의 남은 세력들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아량을 베푼다(삼하 19:22~23). 다윗은 자신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므이의 문제는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7.04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9.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Ⅱ)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뤄져야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2) 기브온족의 이스라엘 편입 가나안 족속의 종교 혼합주의, 쾌락주의, 윤리적 타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기이한 자연적 현상들은 다신론적 맹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손쉬운 다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종교적 편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과 방식대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아주 쉽게 유혹으로 이끌어 갔다. 그 결과 거룩한 삶은 죄 된 삶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나중에는 헤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나안 족속과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약 자체도 문제였지만 방법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전통에 따라 기브온 사람의 음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수 9:15). 서로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고 있었다. 성경은 기브온과 체결한 계약 방식이 '그들(기브온 사신)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9:14).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과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수 9:18)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6.06 / 이상윤 목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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