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사
[교회창립 65주년 특집] 더 넓게 더 멀리 도약하는 순복음 세계 선교 
  • 조용기 목사 전 세계에 복음의 씨앗 뿌려 풍성한 선교의 열매를 수확하는 이영훈 목사 세계를 교구 삼아 지구 120바퀴 이상을 비행하며 71개국에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한 조용기 목사에 이어 2008년 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이영훈 목사는 세계 곳곳에 심겨진 순복음의 씨앗을 잘 가꿔 아름다운 선교의 열매를 맺고 있다. 이영훈 목사는 지난 15년 동안 5대양 6대주를 종횡무진하며 목회자로 신학자로 민간 외교사절로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오순절 성령을 설파하는 동시에 사랑과 섬김의 모습을 보여 온 이영훈 목사는 이제 세계 교회 부흥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아시아 복음화는 아시아인이! 이영훈 목사는 2009년 본격적인 해외 성회를 시작했다. 중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 카자흐스탄 등 아시아 전역에 순복음의 영성과 오순절 성령을 전하며 세계 교회 부흥을 이끌었다. 특별히 이영훈 목사는 조용기 목사를 이어 일천만 구령을 이루기 위해 일본 선교에 앞장서고 있다. 이영훈 목사는 공산국가인 중국으로부터 한국 목회자로는 최초로 설교목적 종교비자를 받아 중국 항저우 숭일당교회에서 성령 충만의 메시지를 전파했고 중국 북경, 남경, 상해를 방문해 한·중 기독교 협력과 복음화의 문을 활짝 열었다. 이영훈 목사는 ‘아시아 선교는 아시아인이 담당하자’(Asia by Asians!)라는 슬로건 아래 아시아 지역 대형교회와 목회자를 연결하는 교회 네트워크 ‘아시아 리더스 서밋’(ALS)을 설립해 아시아 복음화에 앞장서고 있으며 ALS 성회와 콘퍼런스를 주최하고 있다. 선교의 원조 유럽에 우리나라 선교위상 빛내 이영훈 목사의 세계 선교는 유럽에서도 빛을 발했다. 2010년 영국 ‘에든버러 2010대회’를 시작으로 유럽 선교를 펼친 이영훈 목사는 이때 아시아 대표이자 오순절 신학자 대표로 초청됐다. 이는 100여 년 전 존 모트 선교사가 ‘한국은 동양의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한 예언이 증명된 역사적인 현장이었다. 선교사를 파송 받았던 한국이 이제는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 대국이 됐음을 세계적으로 선포하는 시간이었다. 이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22차 세계오순절대회에서 ‘성령운동’을 주제로 발표하며 74개국에서 모인 1900명의 지도자들에게 한국교회의 역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령사역을 소개했다. 이밖에도 영국·우크라이나·독일·러시아·프랑스 등 유럽 곳곳에서 현지인과 한인들에게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했다. 오순절 본고장 북미에 순복음영성 전해 이영훈 목사는 북미에도 순복음의 영성을 이어갔다. 미국 서부 로스엔젤레스부터 동부 뉴욕까지 전역 곳곳을 순회하며 성령 충만의 메시지를 전한 이영훈 목사는 한국 오순절 순복음 영성을 미국 내에 소개하고 순복음교회의 위상을 떨치며 파장을 일으켰다. 2018년 1월 한국인 목회자로는 최초로 마틴 루터 킹 재단으로부터 공식초청을 받아 ‘마틴 루터 킹 목사 50주기 추모예배’에서 자유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지난해에는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에 위치한 오랄로버츠대학교 졸업식에서 한국인 목회자로서는 처음 설교자로 나서 졸업생들의 앞날을 축복했다. 남미 오순절 운동에 새로운 비전 제시한 이영훈 목사 오순절 부흥으로 현재 급부상하고 있는 중남미 지역에 이영훈 목사는 일찍이 성령의 불씨를 지폈다. 2012년 볼리비아에서 초교파연합성회를 인도하며 “중남미가 세계 기독교의 흐름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콜롬비아로 넘어가 중남미 부흥을 위한 ‘익스플로전 성회’를 인도하며 우리 교회의 성령 충만의 복음과 세계최대 교회로 부흥한 폭발적인 교회성장비결에 대해 전했다. 중남미에서 열린 성회는 성령의 역사를 가속화하는 촉매제가 됐다. 브라질에서도 순복음중남미총회 소속 150여 명의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열린 목회자 세미나와 제24차 세계오순절대회에 주 강사로 나서 남미 오순절 운동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조용기 목사 이어 아프리카 대륙에 희망의 메시지 전해 1993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케냐 나이로비 대성회를 인도하며 아프리카 선교의 시작을 알린 조용기 목사의 배턴을 이어받은 이영훈 목사는 2016년, 2018년 두차례 코트디부아르에서 대성회와 교회성장 세미나를 인도했다. 주최 측은 서아프리카 선교의 중심지 코트디부아르에 이영훈 목사의 오순절 성령의 메시지가 전해져 내전으로 어려움을 겪은 나라에 영적 치유와 함께 제2의 부흥이 일어나길 기대했다. 성회에는 나이지리아, 가봉, 니제르, 가나 등 인근 나라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참석해 교회부흥에 대한 비전을 품었다. 연인원 30만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룬 코트디부아르 성회에 이어 이영훈 목사는 올해 7월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대성회를 인도할 예정이다. 오세아니아에도 임한 오순절 역사 2013년 호주 멜버른에 성령의 새 바람이 불어왔다. 이영훈 목사는 생명의 강 콘퍼런스에서 교회 성장에 관한 하나님의 역사와 기도의 능력을 강조했다. 또한 호주와 오세아니아 복음화를 위한 시드니 대성회와 오세아니아-아세안 선교사 콘퍼런스를 인도하며 순복음의 선교사들을 격려했다. 성회에는 오세아니아와 아시아에서 헌신하는 선교사 150여 명이 참석해 영적 재충전과 선교 사역의 노하우 및 비전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계 곳곳에서 이영훈 목사의 해외 성회와 각종 세미나 요청이 물밀듯이 쏟아지고 있다. 모세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던 여호수아와 같이 세계 선교의 기반을 다진 조용기 목사의 영적 리더십을 계승한 이영훈 목사의 세계 선교의 열정과 외침은 이제 더 넓게 더 멀리 퍼지고 있다.
  • 2023.05.19 / 금지환 기자

    [교회창립 65주년 특집]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노력 - 해외편
  • 순복음의 영성으로 세계 기독교의 흐름 이끌어
    섬김의 리더십 실천하며 온세상 복음으로 연합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는 이 때 이영훈 담임목사의 영적 리더십이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이영훈 목사는 수많은 해외 성회를 통해 K(KOREA) 스타일의 기도운동을 확산시키며 세계 교회 성장의 흐름을 주도 하고 있다. 또한 연합과 일치를 강조하며 세계 기독교의 흐름을 순복음의 영성으로 이끌고 있다. 이영훈 목사의 영적 리더십과 전 세계 기독교에 대한 영향력은 우리 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2010년 6월 영국 ‘에든버러 2010대회’에 아시아 대표이자 오순절 신학자 대표로 초청돼 한국교회의 위상을 높였고 이후 전 세계 교계를 연합하고 리드하는 자리에 빠르게 올랐다. 2018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50주기 추모예배에서 설교하고, 이스라엘 독립 70주년 기념 국가조찬기도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메시지를 전했다. 2022년에는 세계 선교에 대한 영적 리더십으로 오순절 신학을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의 대표적 기독 사립 오랄로버츠대학교 졸업식 예배에서 한국인 첫 설교자로 나선 데 이어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영훈 목사의 리더십은 2022년 10월 12~14일에 우리 교회에서 열린 제26차 세계오순절대회(PWC)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대표대회장을 맡은 이영훈 목사는 전 세계 개신교 오순절 교단의 가장 큰 축제인 세계오순절대회를 주관해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한국에서 24년 만의 개최이자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내에서 처음 열린 최대 규모의 국제 기독교 행사여서 큰 의미가 있었다. 전 세계 45개국에서 1500명의 오순절 목회자가 방한해 국내 3500명의 교회 리더들과 함께 현장에 참여했고 방언과 기도, 성령 충만의 역사가 넘쳐나며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남겼다. 세계오순절협회 총재 윌리엄 윌슨 목사는 “PWC를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하나님의 손이 이영훈 목사님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꼈다”며 “하나님께서 이영훈 목사님을 미래의 리더로 세우셨다.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더욱 전진해 복음의 지경을 넓힐 것을 믿는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예언가인 신디 제이콥스 목사도 “하나님께서 오순절이 10년간 전 세계적으로 크게 부흥할 텐데 그 중심에 여의도순복음교회와 한국교회가 있다고 하셨다”며 특별히 이영훈 목사를 부흥의 리더로 택하셨음을 여러번 강조한 바 있다. 지난해 10월 제26차 세계오순절대회에 앞서 이영훈 목사는 설립자 조용기 목사의 뒤를 이어 세계교회성장을 이끄는 CGI(Church Growth International) 2대 총재로 취임했다. 이영훈 목사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교회 회원들 사이에서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헌신하며 조용기 목사가 심은 복음의 씨앗을 거두고 풍성히 열매 맺고 있다. 세계 평화를 위한 행보도 거침없이 이어갔다. 한미수교 140주년이었던 2022년에는 한미수교 140주년 한국기독교기념사업회 대표회장으로서 한미수교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양국의 우호 관계 발전 및 복음통일과 세계 선교에 힘을 쏟았다. 또한 지난해 4월 이영훈 목사는 한-이스라엘 수교 60주년 기도회를 개최하며 민간외교사절 역할로 한·이 우호 관계도 돈독히 했다. 우리 교회 담임으로 취임한지 15년을 맞은 올해도 활발하게 사역했다. 1월에는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주 한인이민 120주년 및 한미동맹 70주년을 기념하는 한미 기독교지도자 조찬기도회를 개최해 한반도 평화를 위한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영훈 목사는 섬김의 리더십으로 세계 교회를 이끌고 주 안에 연합하며 오직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비춰 나아가고 있다.
  • 2023.05.19 / 이미나 기자

    [교회창립 65주년 특집] 연합과 일치를 위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노력 - 국내편
  • 양보와 섬김의 본으로 한국교회 연합 힘써
    교파 초월 목회자 사이에서 신망 두터워 한국교회 화해와 회복, 제 역할 위해 헌신 ‘한교총’ 창립에 헌신…보수 진보 아울러 이영훈 목사는 누구보다도 조용기 목사의 신학과 목회 철학을 잘 알고 있다. 국제신학연구원장 재임 시절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 성령운동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해 기독교 정통신학의 한줄기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했는데 이것이 우리 교회의 이단 논쟁을 종식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대한 교리 논쟁은 1980년대 당시 한국 교계 내에서 오랜 쟁점이었다. 1958년 개척 후 복음 전파에 총력을 기울여 왔지만 예수교장로회(통합, 이하 예장 통합) 측 일부 인사들이 조용기 목사에 대한 비난을 여론화하기 시작하고 여러 가지 쟁점들을 문제 삼으면서 이단 시비가 비롯됐다. 10여 년의 기나긴 논쟁과 다툼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인 1992년 5월, 조용기 목사의 부름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국제신학연구원장으로 부임한 이영훈 목사는 이단 시비에 맞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성서적이며 교리적으로 변증하는 두 권의 저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과 신학 I·II』를 편찬, 출간했다. 아울러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의 많은 신학자와 목사들을 만나 교류하고 변론하면서 우리 교회를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시각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때의 교류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두터운 관계가 유지되면서 이영훈 목사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향한 행보를 이어갈 수 있었다. 과거 한때 우리 교회에 비판적 입장에 섰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장자교회인 영락교회에서 2017년 10월 개최된 선교부흥회에 이영훈 목사가 주강사로 초청돼 말씀을 전한 건 화해와 회복, 협력 및 종교개혁 정신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뜻 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2011년 2월 이영훈 목사는 보수적인 교단의 목사로는 처음으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신임회장으로 취임하며 한국교회가 그동안 비판받아온 교권주의, 물량주의를 탈피하고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를 통해 변화된 모습으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며 교계 갱신을 외쳤다. 이영훈 목사는 2014년 9월 2일 만장일치로 제20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 대표회장에 취임, 한국교회의 회복과 연합을 위해 힘썼다. 또 한기총 내부 개혁 및 조직 재정비를 추진하고 통일 기금마련 캠페인과 통일나눔재단펀드 추진 등 통일한국을 준비하는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한기총 회장직은 2017년까지 이어졌다. 2016년 12월 28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여의도순복음총회 총회장이었던 이영훈 목사는 이성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 김선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장, 이종승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총회장, 여성삼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유관재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전명구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과 함께 모임을 갖고 가칭 한국교회총연합회의 출범을 전격 결의하고,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최초의 연합기구 탄생을 알렸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한교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모두 아우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 한국교회의 5대 교파가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이라는 단일연합기구 출범을 만장일치로 결의한 것은 한국 기독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역사적인 출범이 이루어진 데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간절히 바라는 이영훈 목사의 양보와 섬김의 리더십이 크게 작용했다. 2017년 3월 6일부터 8일까지 잠실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된 한국교회 대각성기도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여의도순복음총회, 기독교한국침례회 등 총 22개 교단이 참석한 역대 최초의 행사로 기록되기도 했다. 2023년 한교총 대표회장이 된 이영훈 목사는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다.
  • 2023.05.19 / 오정선 기자

    Hello, Israel
    이스라엘의 외로운 투쟁 ① - 국제 정세
  • 누구도 편이 없다 성경은 어려움 당한 이웃을 도우라고 말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배운다. 우리가 보기에 누가 강도당하고 외면당한 자일까? 이스라엘은 과연 어떤 위치일까? 이 글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겪는 곤란함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하기 전에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았다. 유럽과 북아메리카 그리고 남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일본,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열강의 국가들 사이에서 존재하며 살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열강의 역사는 그들의 역사였고 각 국가에 흩어져 살던 이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국가의 역사가 곧 그들의 역사라고 여겼던 시대가 있었다. 시기마다 어려움이 찾아오고 박해의 시기가 있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이겨 내왔고 잘 버텨왔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심해진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 민족주의가 가져온 반유대주의 흐름은 그들을 더 이상 그 땅과 나라에서 살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20세기 최악의 사건인 홀로코스트로 인해서 멸절될 뻔한 유대인들은 다시금 살아남았고 그들만의 국가인 유대국가, 이스라엘이 탄생하게 된 것이 75년 전의 일이다. 이스라엘의 독립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나 많은 일들을 이야기 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그리고 유대인들이 가지는 국제적 위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필자가 이스라엘에서 공부를 시작할 때 선택한 과정은 근현대 이스라엘 역사와 시오니즘에 대한 연구였다. 대학원 자체가 이 분야에 대해서만 연구하는 과정이었고 다른 목회자들처럼 성서학이나 고고학을 공부하기 보다는 지금 내가 살아가게 될 이 나라의 역사가 너무나 궁금했다. 고작 70년 남짓한 이 나라의 역사가 얼마나 있겠느냐 싶겠지만 이 나라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들은 너무나 방대하다. 이스라엘의 역사 이전에 유대인들의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오랜 시간 유럽에 살았던 유대인들 대부분들이 제대로 된 사회적 신분을 얻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19세기에 이르러 기독교로 강제 개종을 당하면서 신분을 얻어 사회에 흡수되어 가던 유대인들이 대거 주류사회에서 업적을 쌓아가면서 그들의 지위도 나아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다시금 등장한 반유대주의로 인해서 그들은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홀로코스트로 인해서 유럽 유대인들의 3분의 1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들도 안전하지만은 않았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하고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지만 이 작은 나라는 70년 동안 네 번의 큰 전쟁을 치르게 된다. 매번 풍전등화 같은 위기 속에서 굳건히 버티어 낸 것은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의 가장 큰 우방 국가는 어디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미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많이 지지해주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중동의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당시만 해도 미국은 중동에 이렇다할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중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나라는 독일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 승리하면서 차지하게 된 것이 아프리카와 중동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와 1930년에 탄생한 것이 지금의 중동 국가들이고 이전에는 아무런 나라가 없었다. 거대 제국들이 몰락하고 현대 유럽 강대국들이 중동을 분할하면서 탄생한 국가들은 이슬람이란 종교 세력과 유럽 국가들 이권 다툼 사이에서 힘을 저울질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의 중동에 대한 지배권은 약화되었고 중동의 많은 국가들은 오히려 독일을 지지했다. 당시 영국은 팔레스타인 점령지와 요르단과 연결되어 있었고, 프랑스는 레바논과 이집트 그리고 이라크 등과 연을 맺고 있었다. 독일은 시리아와 이란 등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미국은 어떤 국가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앞으로의 중동이 석유로 세계에 미칠 영향력을 생각했을 때 미국으로서는 반드시 거점이 필요했고 자신들을 대신해서 견제해줄 국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때마침 벤구리온과 시온주의 연합기구의 요청이 유엔에 올라와 있던 상황이었다. 전쟁의 승리국가로서 유엔 연합국의 최고 의결권을 지닌 미국은 이를 승인하였고 이스라엘이 독립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우방국가이기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보다 지정학적, 정치적 그리고 중동의 억제력으로서의 역할을 삼고자 하는 이유가 더 크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주위의 적대 국가들을 상대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의 중책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도 미국과의 관계성을 따져야 하고 중동 국가들에 대한 견제를 미국을 대신해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등지고 외면해 버린다면 누구도 이스라엘을 지지하지 않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난 4월말에서 5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긴장 관계로 인해서 수백발의 미사일이 이스라엘로 날아들었고 이스라엘은 이에 대항하여 아이언돔과 가자지구 주요거점 타격으로 대응했다. 그로 인해 각 국에서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수백발의 미사일을 쏘는 하마스와 그걸 요격하면서 대응방어를 하는 이스라엘 사이에서 많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언론에서는 이스라엘보다 팔레스타인의 피해를 더 드러내고 있다. 누구도 이스라엘 편이 아니다. 미국도 유럽도 어느 국가나 미디어도 다 이스라엘 편이 아니다. 이것이 국제 사회에서의 현재 이스라엘의 위치이다. 김요셉 목사
  • 2023.05.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우리가 오해하는 이스라엘 이야기③-반유대주의…오해 속에 자라난 미움과 박해의 역사 Ⅱ
  •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가톨릭 배경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로마교회가 가진 영향력이 크고 기독교적 요소들이 삶의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과거 로마제국 시절에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교회의 역사 가운데 동과 서로 갈라지는 시간도 있었지만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는 유럽 전역에 걸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웠다. 기독교가 제국의 중심으로 서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은 그리스도교의 시작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새롭게 중심으로 서게 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새로운 중심으로 서게 된다. 그리고 갈등을 겪던 유대인들의 자리들을 밀어내게 된다.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회의 중 하나가 니케아 공의회이다(325년). 최초의 공의회였던 예루살렘 공의회가 유대인 중심의 회의였다면 이 니케아 공의회는 유대인들을 배제한 이방인들로만 구성된 회의였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기독교적 교리가 재정됨과 동시에 유대교적인 요소들이 배제되기 시작한다. 절기와 안식일에 대한 규정들이 사라지고 일요일과 다른 절기들이 대체되었다. 교회의 교부들과 가르침들 속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대두된다. 유대인들에 대한 폄하와 오해,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민족 혹은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라는 명칭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이방인 교회가 중심 된 유럽의 역사는 이제 철저히 기독교 교리의 전파와 확장을 통해서 세력이 커지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오해와 왜곡도 같이 퍼져가게 된다. 중세시대에 유대인들은 식인종이나 어린아이를 잡아서 그 피를 먹는 사람들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들이 가진 삶의 양식과 전통이 기독교적 요소와 다르다고 해서 마녀 사냥을 당하기도 했다. 유럽의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은 거주할 땅을 얻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땅을 얻지도 농사를 짓는 일도 허락되지 않는 어정쩡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농사를 짓지 않고 다른 이들과 살아갈 수 있는 사업이라는 것들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의 우리가 알고 있는 금융업, 중개업, 무역 등이 그런 일이었다. 그 당시 농업이 허락받는 직업이고 다른 직업들은 천하게 여겼던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가장 천한 직업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근간에는 가톨릭에서 가르친 유대인들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오해가 그들을 박해하는 정당성이 된 것이고 교회사 속에서 수많은 지도자들이 그렇게 확증해 주었다. 루터도, 칼뱅도 그리고 성 어거스틴도 유대인들에 대해서 “돼지같은 자들”이라고 폄하했다. 유럽의 기독교는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영향력을 넓혀가게 되었고 19세기와 20세기는 유럽의 패권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에 대한 편협함과 오해는 계속 되어 왔고 민족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유대인들은 더욱더 변경으로 몰리게 되었다. 하지만 지성의 시대에 영향력을 끼치게 된 많은 이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폴란드의 마리 퀴리, 아인슈타인, 헝가리 출신의 프로이드와 융, 마르크스주의 칼 마르크스 등과 같은 이들은 다들 유대인들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 대한 여전한 박해는 결국 20세기 최대의 범죄인 나치의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한 민족에 대한 철저하고 오래된 오해와 폄하의 역사가 그런 슬픈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여전히 우리 안에는 반유대주의가 남아있어 우리도 모르게 유대인들에 대해 오해한다. 한편으로 유대인을 우러러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이 수전노로 돈만 밝히는 이들인 것처럼 보기도 한다. 우리는 이제 이런 편협함을 버리고 이스라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재등장함이 결코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유대인들의 바람으로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서 이스라엘과 열방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와 반유대주의를 벗어나 그들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길 기도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김요셉 목사
  • 2023.04.14 / 김용두 기자

    우리가 오해하는 이스라엘 이야기②-반유대주의…오해 속에 자라난 미움과 박해의 역사Ⅰ
  •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시 109:1~3). 셰익스피어의 소설 ‘베니스의 상인’에는 유대인 상인이 등장한다. 샤일록이라는 상인은 아주 잔인한 고리대금업자로 돈을 빌려주는 대신 못 갚은 안토니오의 심장 옆 살을 1파운드 베어내겠다는 계약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샤일록은 지혜로운 재판관에게 혹독하게 당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는 대표적인 유대인들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반유대주의적 배경에서 나오는 이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많이 언급하면서도 많은 분들이 불편해 하는 이야기가 바로 반유대주의에 대한 이야기이다. 많은 분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자는 과소평가하는 것이 반유대주의에 대한 것이다. 반유대주의는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시온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 기독교 시온주의 안에서도 반유대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한번쯤 곱씹어 봐야 하는 이야기이다. 반유대주의에 대한 이해가 조금 생기면 현대 이스라엘 사회와 국제 사회 안에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이해를 하는데 조금 도움이 될 수 있다. 반유대주의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정의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홈페이지에 아주 잘 나와 있다.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에 대해 맹목적인 적대감을 보이는 특정 인식을 말합니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뿐 아니라 그들의 재산과 관련된 기관, 종교 시설, 심지어는 유대인과 관계를 맺은 비유대인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며, 이 증오심은 이스라엘 국가를 향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이 인류(HUMANITY)를 해하려는 음모를 가지고, 세계 언론과 경제를 조종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로 인해 반유대주의자들은 세계 정치, 사회적 문제의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각종 연설이나 글, 시각적 자료와 부정적 고정관념, 직접적인 행동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출처: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반유대주의를 영어로 안티세미티즘(Anti-Semitism)이라고 하며 이는 유대인을 셈족의 대표성으로서 인정하면서 유대인들을 반대하는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대표적인 반유대주의적 사건은 20세기에 있었던 홀로코스트 사건이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반유대주의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불편한 시각이 있다. 그런 학살이 유대인들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며 역사적으로 지역적으로 그와 유사한 학살과 박해 그리고 차별의 역사는 존재했다고 이야기한다. 아시아인들과 아프리카인들에게 행해졌던 노예무역과 차별정책 그리고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차별주의가 바로 그런 것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반유대주의가 비단 근·현대 사회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난 2000년의 역사 가운데 민족적 박해와 미움의 형태로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듯이 역사 속에서 차별과 박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 민족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과 박해는 유대민족에게만 있는 비극적인 것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은 예수님이 사시던 2000년 전만이 아니라 성경의 역사 속에도 계속적으로 등장했다. 반유대주의는 위의 정의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만들려고 하는 배경에서 시작됐다. 성경 속에서도 히브리인들을 두려워한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하기 위해서 어린 아이들을 죽였던 예도 있다. 반유대주의적 흐름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기독교의 인물들을 통해서도 언급됐다. 서신서들 속에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유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 안에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비하하고 비판하는 것을 바울은 경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부터는 더욱 더 노골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비하와 비판 그리고 박해가 두드러지게 드러나기도 했다. 성 어거스틴은 유대인들을 돼지에 비유하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라고 매도했다. 또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나 칼뱅도 유대인들을 미워하거나 비판하고 매도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교회사에서는 이를 가르치지 않거나 가르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 민족에 대한 종교적 그리고 민족적 탄압은 유럽의 역사 가운데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폴란드 바르사뱌에 가면 폴란드 유대인 역사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폴란드 유대인들의 역사와 함께 왜 수많은 유대인들이 폴란드에서 살게 되었는가를 밝혀주고 있다. 그 배경에는 유럽 내에 만연한 빈유대주의와 유대인 박해가 그 저변에 깔려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들이 역사 속에서 당한 반유대주의에 따른 고통과 박해의 시간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다음편에 계속> 김요셉 목사
  • 2023.03.17 / 김용두 기자

    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I. 인간론(The Doctrine of Humanity) - 2
  • 영적인 상태와 직결되는 인간의 다섯가지 상태
    3. 인간의 상태 II 조직신학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조직신학의 인간 이해는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환경보다는 인간의 영적인 상태와 직결된다. 특별히 인간의 상태에 대한 이해는 창조와 타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최후의 심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의 상태는 다섯 가지로 이해 될 수 있다. 1)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Status Integritatis) 무죄의 상태에 있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언제든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 할 수 있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죽음의 공포, 질병, 고통, 슬픔, 불의 등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요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에 있는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간의 삶 속에 죄가 유입됐으며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2) 타락으로 인한 부패의 상태(status corruptionis) 완전한 선을 추구할 수 있었던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권리는 모두 박탈되었고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거룩성은 사라졌고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에덴동산의 풍요, 평화, 자유, 기쁨은 사라지고, 땀을 흘려야 먹고 해산의 수고와 고통을 짊어져야 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6~18).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잃었으며 하나님의 임재 밖으로 버려졌다. 목숨은 붙어 있었으나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상태였고 영혼은 부패했으며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다. 죄의 욕망에 따라 살며 결국에는 죄 가운데 죽어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마음의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고(창 6:5)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유한한 존재가 되었다. 3) 그리스도로 인한 선사된 은총의 상태(status gratiae) 칼빈(John Calvin)이 말한 ‘전적인 타락’에 놓인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 즉 은총(카리스)만이 필요하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도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한다(요 14:6).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어떤 이름도 주신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행 4: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우리의 영혼은 거듭나고 중생한다(롬 10:9). 이 거듭남과 중생의 결과로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총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진리를 소유함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된다(요 8:32).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사망의 종이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무죄 상태에 있던 아담과 달리 죄의 속성이 여전히 잔존해 있어서 끊임없이 죄의 유혹과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라고 절규하는 바울의 모습은 이런 인간의 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4) 구원을 받는 자들의 죽음 후 영광의 상태(status gloriae)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늙고 병든 육체를 벗고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 15:20), 우리 또한 부활의 기쁨과 함께 신령한 옷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영광스런 상태가 된다. 이것이 구원 받는 자들의 죽음 후 영광의 상태이다. 아담과 하와가 잃어 버렸던 무죄의 상태를 회복하며 더 이상 죄와 사망, 질병과 고통에 지배되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에 거리낌이 참여할 수 있다, 모든 희미하고 불분명했던 것들이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과 같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며(고전 13:12), 상함과 행함이 없는 완벽한 평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 5) 저주를 받은 자들의 죽음 후 저주 상태(status damnationis) 죽음 후 인간의 상태는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영광의 상태와 정반대되는 인간의 상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죽음 후 놓이게 될 저주의 상태이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기록된 글귀처럼 더 이상 어떤 소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함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사랑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심판의 고통만이 영원히 지속되며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나(마 25:30), 돌이킬 수 있는 방법과 기회는 사라진 상태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는 기대할 수 없고 사탄과 죽음의 권세로 다스려지는 처참한 인간의 상태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3.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 인간론 (The Doctrine of Humanity) - 1
  • 고대로부터 이어진 철학자들의 가장 주된 관심사와 질문은 ‘인간은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은 인간이 끊임없이 해 왔던 질문이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은 주로 인간의 본성이나 존엄성과 가치 등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에 대한 이해의 영역은 생물학적인 인간의 이해나 형이상학적 인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일반적인 인간론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론은 인류학적인 인간이나 철학적인 인간 이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 인간의 삶의 목적과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의 물리적 사회적 특성 또한 이해되고 논증되어야 한다. 이런 차이는 인간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접근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류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기준점은 ‘지금의 인간’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인간을 이해하는 시작은 ‘현세적인 인간’이 아니다. 죄로 인해 일그러진 인간이 아닌 창조 시점의 인간 즉 본래의 인간(original human being)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인간론은 인류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야 할 참된 인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 인간의 철학적 이해 플라톤(Platon)은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구별하는 이원론적 존재로 이해했다. 플라톤의 이런 인간의 이해는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극단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고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나 악한 것으로 여기는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중세를 지나며 인간에 대한 이분법적인 이해는 점차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인간을 영과 육으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이분법적 인간 이해보다는 인간의 실존과 이성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생각을 했고, 니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단순한 영혼과 육체의 분리와 조합이 아닌 자유와 책임과 같은 존재론적, 사회적-역사적 인간을 인간의 이해 대상으로 보았다. 2. 성경적 인간 이해 성경에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나눠진 이원론적 존재일까? 아니면 영, 혼, 육으로 구성된 삼원론적 존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혼’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라진다. 1) 구약의 인간 이해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어로는 하나님께서 땅의 ‘먼지’(히. 아파르)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히. 네페쉬)를 불어 넣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간혹 하나님께서 성령(히. 루아흐)을 부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고 말하는 설교자들이 있는데, 창세기 2장 7절은 성령이 아닌 ‘생기’(히. 네페쉬)를 불어 넣어 사람을 만드셨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2장 7절만 본다면 인간은 ‘육체’와 ‘생기’를 지닌 이원론적 존재이다. 그러나 욥기와 시편의 말씀을 종합하면 인간은 ‘먼지’(창 2:7; 3:19; 시 104:29)이지만 ‘생기’(창 2:7)와 ‘하나님의 숨결’(루아흐, 욥 27:3)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2) 신약의 인간 이해 구약성경은 ‘영’과 ‘혼’에 대한 구별이 분명하지 않아 ‘영혼’으로 쓰일 때가 많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혼’(헬. 프시케)와 ‘영’(헬. 프뉴마)에 대한 구별이 구약보다는 더욱 선명하다. 신약에서 ‘혼’(헬. 프시케)은 불멸적인 요소가 아니다. ‘프시케’는 종종 ‘인간 자신’(롬 2:9; 13:1)이나 ‘목숨, 생명’(마 10:39; 롬 6:4; 11:3)으로 쓰이고 있다. 신약성경의 삼분법적 인간 이해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프뉴마)과 혼(프시케)과 몸(소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육체와 영에 비교되는 ‘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육체의 부활’과 ‘영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만약 ‘혼’을 ‘몸’과 구별되는 또 다른 영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육체와 영의 부활’외에 다른 부활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육체의 부활’과 ‘영혼의 부활’을 주장하게 된다면 이것은 이미 ‘영’과 ‘혼’을 하나로 묶어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 짓는 이원론적인 인간 이해이다. 삼분법적인 인간관은 기독교 역사 초기의 희랍과 알렉산드리아 교부들(클레멘트, 오리겐, 그레고리)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예수님의 인성을 손상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거부되기 시작했다. 이후 점차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들을 포함한 서구 신학에서는 인간을 두 부분(육체와 영혼)으로 이해하는 기류가 형성되었다. 현대 신학자들에게 이분법적 혹은 삼분법적 인간 이해는 큰 논쟁의 대상이 못 된다. 칼 바르트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몸과 영혼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을 분리해 ‘육체’만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은 인간을 동물과 같이 생물학적, 해부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으로만 인간을 이해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적 제한성과 상황과 환경 속에서 인간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환경과 조건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다른 본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의 인간은 인간의 속성을 가질 수 없으며 반드시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상태에서만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3. 인간의 상태 조직신학적 인간이해는 인간의 상태를 다섯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타락 이전의 무죄의 상태, 둘째 타락으로 인한 부패의 상태, 셋째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한 은총의 상태, 넷째 구원을 받은 자들의 죽음 후의 영광의 상태, 다섯째 저주를 받은 자들의 죽음 후의 저주 상태이다. 1) 타락 이전의 무죄의 상태 타락 이전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무죄 상태였다(창 1:26~28). 무죄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도 살아 갈 수 있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었으며 고통과 슬픔도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을 추구하며 그것을 행할 자유(전 7:29)와 권한(창 1:26)을 부여 받았다.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인 인간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회복하게 될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2.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 신론 (The Doctrine of God) - 3
  •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 모습 왜곡될 수 있어
    4.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믿음의 대상이며 실체인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헤어 나오지 못할 블랙홀을 헤매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인간 속에 두신 하나님의 선재적 행위로 인해(롬 1:19)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무모한 신기루를 쫓는 행위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이다. 모든 사물은 의미와 이유를 갖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고유한 의미 없이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은 무질서하게 계획과 목적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 만약 어느 하나라도 궤도를 이탈하거나 다른 영역을 침범한다면 예기치 못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일정한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세심한 관찰 결과에 근거해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 목적론적 증명이다. 목적론적 논증은 고대 철학자들도 사용했던 방법론으로써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를 중심으로 한 스토아(Stoa) 학파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철학적인 용어인 ‘형상’(形相, form)과 ‘질료’(質料, matter)라는 단어를 썼다. 어떤 질료도 갖고 있지 않은 채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순수 형상(entelecheia)이라고 규정을 했는데, 이것을 신(God)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적인 복잡함을 제거하고 목적론적 증명을 신학적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면 이렇다. 세상 모든 만물은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는데, 그 목적을 부여하고 목적대로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순수 형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쟁과 당위성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에서 신 존재 증명은 신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분야는 아니다.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신학자들도 많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지난 호를 참조).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 혹은 학문적 방법론으로 증명하려는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있다. 1)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의미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각 사람의 개인 속에 거하시는, 혹은 인간의 삶과 공동체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신가?”아니면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초월적이신 분이신가?”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문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하는 주기도문 서두에도 잘 나타난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분명히 하나님의 초월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고 계신 내재적 하나님을 함축적으로 일컫는 단어이다. 2)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초월성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천지를 창조하시는 모습에서 극명하게 나타고 있다. 천지 창조 속에 인간은 한 피조물일 뿐 천지 창조의 역사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초월해 계시며 그의 창조물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넘을 수 없는 초월성을 갖고 계시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사건들은 자연적인 현상과 요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초월성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내재성마저 하나님의 초월성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칼 바르트(K. Barth)와 브라운(W.A. Brown)이 있다. (1) 칼 바르트(K. Barth)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보여 주신 것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의 ‘자기계시’조차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본성, 소유, 행위의 순수한 한계와 순수한 시초이며 인간과 모든 인간적인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무한한 질적인 차이 속에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 브라운(W.A. Brown)은 만약 하나님이 세계의 근거와 세계의 깊이로서 이 세상에 매어 있다면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되는 자신의 자유와 독자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언제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하나님의 주권은 쉽게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휴머니즘적인 사랑은 쉽게 동질화 될 수 있다. 즉, 다시 말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한 심판과 징벌도 하나님 사랑의 일부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는 없다. 그의 초월적 선택과 주권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내재성 하나님의 내재성은 역사적으로는 타락과 회개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전쟁에 개입하시며 개인의 삶을 주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의미한다.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로빈슨(John A. T. Robinson) 등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1) 본 회퍼는 하나님은 주변 세계나 배후 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의 중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는 ‘세상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9 (Aufl, 1959), 184f; 필만, 『교의학』, 189). (2) 틸리히는 관념주의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은 내재화된 초월자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초월성보다는 인간의 삶 속에 내재화된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3) 로빈슨은 하나님은 세계 위에, 또는 세계 밖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깊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인간의 자율성은 사라지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없으며 세상의 악과 부조리 또한 하나님의 의지로 치부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위험에 빠질 우려도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균형을 잡지 못하면 신앙은 변질되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의 모습은 심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깊은 신학적 고찰과 신앙적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11.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생명과학 이야기
    작약과 모란 구분법
  • (사진 위 '작약'/ 아래 '모란') 5월과 6월에 피는 꽃 중에서 작약과 모란은 피는 시기와 꽃 모양이 비슷하며 꽃 이름도 지역에 따라 다를뿐더러 같은 지역에서조차 달라서 혼돈을 일으키기 쉽다. 때로는 전혀 다른 꽃의 이름이 잘못 덧붙여져서 전파되면서 오히려 본래 자기 이름인 듯 대중 속에서 자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나중에 잘못을 바로 잡으려면 혼란만 더 가중 될 수도 있다. 작약은 봄에 피는 꽃 중에 가장 크면서 화려한 자태로 옛날부터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약용식물이다. 외형상 아름다운 큰 꽃잎과 그 안에 확연하게 보이는 풍성한 황금빛 수술은 품격을 한층 높여준다(사진). 일부에서 크고 탐스러워서 함박꽃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른 봄에 피는 목련나무와 비슷하고 흰색의 큰 꽃이 피는 함박나무가 따로 있으니 혼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란은 작약과 같은 시기에 피는 꽃으로 꽃모양과 잎이 비슷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주 혼돈하기도 한다. 이미 개인에 따라서 작약과 모란을 오해해서 부르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모란은 작은 관목으로 일종의 나무라서 목단(牧丹)이라고 부르며 겨울에 잎과 줄기가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지상에 남아 있다. 그러나 작약은 풀 같아서 서리가 오고 겨울이 되면 말라서 땅 위에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이들을 구분하려면 꽃과 잎, 줄기 사이를 손으로 헤쳐서 나뭇가지 같이 목질부가 있다면 모란이다. 들이나 산에서 식물을 잘 구분하는 방법은 집중해서 관찰하는 일이다. 같은 시기에 피는 꽃이라도 꽃과 잎이 비슷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혼돈하기도 한다. 관찰자 입장에서 작은 다름을 발견하고 기존의 알고 있던 것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눈여겨 봐야한다. 뿐만 아니라 꽃의 향기와 주변에 모여 있는 조류나 곤충류도 동시에 보면서 주변의 다양한 자연생태환경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형형색색 다양성과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전문적인 학술분야에서조차 무척이나 힘들고 버거운 일이다. 시편의 시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시여, 주는 우리를 위해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생각하시고 계획하신 그 놀라운 일은 아무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말하려고 하지만 너무 많아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현대인의성경 시 40:5) 윤철종(이학박사·또오고싶은교회 담임목사)
  • 2023.05.25 / 이미나 기자

    민들레 이야기
  • 민들레는 봄에 들판을 노란색으로 물들이는 야생화이다. 몇 잎 안 되는 잎사귀는 땅바닥에 바짝 붙이고 꽃대를 세우며 피어난다. 요즘은 도시의 보도블록 사이나 계단의 틈에도 피어나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을 만큼 생명력이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잔디밭이나 토끼풀이 군락을 이루어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없는 배타적인 환경에서도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자신의 자손을 전파하려는 처절한 모습을 볼 때 감탄을 자아낸다. 이러한 능력이 자연생태계에서 민들레의 영토를 넓히는 일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민들레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강하게 자라서 번식하는 모습은 자손을 널리 전파하는 방법에서도 탁월하다. 꽃이 진 후에 작은 하얀 솜사탕 같은 모양을 한 많은 깃털이 달린 씨앗들이 떠날 채비를 빠르게 준비하고 있다. 작게 일렁이는 바람에도 씨앗은 모체에서 떨어져 공중으로 날아서 주변은 물론이고 먼 곳까지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흩어진다. 민들레는 토종 민들레로 드물게 하얀 꽃이 피는 민들레가 있고 대부분이 노란 꽃이어서 노란 꽃으로 인식하고 있다. 요즘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들레는 외래종이다. 어린 잎사귀는 나물로 먹고 쌉싸래한 맛으로 식욕을 증진시키고 간염과 담관질환 등 소화기계에 효능이 있다. 호흡기계의 소염 기능과 함께 이뇨 및 항염 효과도 알려졌다. 다양한 영역에서 한약재로도 쓰인다. 모진 겨울을 견디고 살아나 밝은 꽃을 피우는 민들레의 삶처럼 우리와 친근감이 있다.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가족드라마 중에서 ‘민들레가족’, ‘하얀민들레’ 등이 있었고 이해인 시인의 ‘민들레의 영토’라는 시집과 어머니의 마음을 담은 카페 체인점으로 민들레영토(민토)가 알려져 있다. 한편 민들레 씨앗을 홀씨라고 불리게 된 경유는 1985년 당시 일부 강변가요제에서 ‘민들레 홀씨되어’가 장려상으로 입상하면서 항간에 ‘민들레 홀씨’라는 말이 익숙해졌고 1986년 드라마 ‘풀잎마다 이슬’의 주제곡에 삽입되면서 고착된 것 같다. 본래 ‘홀씨’라는 표현은 생물학적 학술용어로 보면 꽃을 피우지 않고 생식하는 고사리류, 이끼류 종류인 양치식물이 전파하는 방식으로 꽃을 피우지 않는 무성생식 방법으로 결실한 것을 포자(spore)라고 하는데 이를 우리말로 홀씨라고 한다. 그러나 민들레는 엄연히 꽃을 피워 암술과 수술이 있어 유성생식 하는 식물로 꽃씨를 홀씨라고 할 수 없다. 아마도 시인은 바람에 몸을 의지하고 모체로부터 홀연히 새로운 처소로 훌훌 떠나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여하튼 많은 사람에게 인정하고 불리는 민들레 홀씨라는 용어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후라서 교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때로는 유명한 드라마나 노래 가사로 혹은 시인의 아름다운 시로 전파되는 영향은 잘못 알려진 용어라도 생활 속에 정착하는 일들을 종종 보게 된다.
  • 2023.04.19 / 이미나 기자

    양지 바른 곳에 피는 할미꽃
  •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할미꽃이 피기 시작한다. 할머니꽃 이름에서 유래한 할미꽃은 ‘젊어서도 할미꽃은 늙어서도 할미꽃’으로 줄기가 마치 어깨가 굽고 허리등이 꼬부라진 모습이 골다공증(뼈엉성증)으로 고통받는 애잔한 모습은 문학작품이나 전래 동화에서 구전되어 왔다. 한자 이름으로도 노고초(老姑草) 혹은 백두옹(白頭翁)이라 부르는데 영락없이 모습이 의인화된 노인꽃이다. 할미꽃은 잎과 줄기, 꽃의 체표가 백색의 긴 털로 수북하게 덮인 모습이 하얗게 센 머리카락 같고 자기의 꽃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숙인 꽃대는 힘없이 아래로 향한 종모양의 통꽃이다. 식물분류를 보면 미나리아재비과의 독초로서 여러해살이풀로 국내 어디서에 물 빠짐이 좋은 건조한 산과 들에서 자란다. 그러므로 봄에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무덤의 분봉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자연환경이나 영양상태가 좋으면 꽃줄기 높이가 약 30~40cm 높이까지 자라고 보통은 내부가 검붉은 꽃이다. 학명으로 보면 한국이 원산지(Pulsatilla koreana)이며 토종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에 따라 자생하는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제주도에만 자생하는 가는잎할미꽃, 그리고 노랑할미꽃, 강원도 정선읍 동강근처에서 관찰되는 동강할미꽃, 북한에서 발견되는 산할미꽃, 분홍할미꽃 등이 있으며 요즘은 새로운 색상의 교배종도 화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일반인들이 주의할 것은 봄에 나는 대부분의 연한 새순이나 뿌리는 식용나물로 먹는 경우가 많지만 할미꽃은 독성분이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옛날 재래식 화장실 변기에 할미꽃 뿌리를 캐서 던져 넣으면 구더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속설이 전해질 만큼이나 살충 및 살균하는 독성이 있다. 장수하는 시대에 인류의 수명은 늘고 노인연령층의 비율은 높아지는데 할미꽃 군락지는 이제 구경하기 어려워졌다. 자연생태환경이 변한 이유이다. 산림이 울창해지고 숲속이 우거지면서 햇볕을 좋아하는 할미꽃의 생장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또한 장례문화가 바뀌어 매장하던 산소가 감소하고 크기가 작아지는 것과 선산의 산소들을 관리할 때 잔디 외에 다른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많은 양의 제초제를 뿌리기 시작하면서 할미꽃의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이 사라졌다. 할미꽃은 자체가 유독한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곤충이나 채식동물이 접근을 하지 않는 이유도 있다. 그러므로 벌이나 나비의 도움을 받는 충매화(蟲媒花)가 아닐 뿐더러 씨앗의 개체수가 적어서 같은 시기에 꽃을 피우는 민들레와 같은 식물보다 자신의 종자를 널리 퍼트리기 어려운 여건이기도 하다. 자연생태계에서 생존에 우세(優勢)하려면 환경변화에 잘 적응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강한 생명력이 필요하다. 자신을 천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독성분으로 무장하기보다 꿀과 향기로 곤충을 부르고 다량의 종자를 퍼트리는 전략이 있어야 한다.
  • 2023.04.02 / 이미나 기자

    성경 Think! 인생 Thank!
    저마다의 인생 ... 똑같지 않아  
  • “얘들아 너희는 다 계획이 있구나!”
    부모의 양육 태도, 애정과 통제 균형 이루어야 “엄마! 대학원에 가야 할지 취직을 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머뭇거리다 보면 겁이 날 거 같아요. 1년간 낯선 곳에 저를 던져 볼게요.” 2월에 대학을 졸업한 딸이 말한다. “수시로는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을 거 같아요. 정시 준비할 거라 학교 시험 안 봐요.”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의 통보다. “얘들아 너희는 다 계획이 있구나!” 저마다의 인생 재수를 하고 대학에 들어간 딸은 영어를 잘하고 싶다며 휴학을 하고 1년간 영어 학원을 다녔다. 복학 후 전공과목보다는 철학에 입덕하더니 글쓰기에 빠져 2년을 보낸 후 올해 졸업했다. 취업과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던 중 일사천리로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비자(비자를 발급해주는 국가에서 일도 하고 동시에 여행 어학연수 등 청년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비자)를 받았다. 딸에게 몇 차례 연봉이 높은 기업을 추천하며 취업을 종용했고, 학과 교수는 대학원으로 진로를 설계해 주었지만 생각은 단호했다. 1년간 낯선 곳에 자신을 던져 진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겠다며 떠났다. 마음으로는 이해가 됐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대학에 들어간 후 진정한 독립은 ‘재정 독립’에 있다며 학비를 제외한 모든 비용(교통비, 통신비, 학원비, 여행비 등)을 스스로 해결했다. 캐나다 워홀에 필요한 비자발급 비용을 시작으로 비행기 티켓, 홈스테이비 등도 스스로 지불하니 부모의 개입 여지를 1도 허락하지 않는다. 올해 고3인 아들은 2학년 때부터 수시로는 좋은 대학에 가기 힘드니 정시로 승부를 걸겠다며 내신을 버렸다. 정시를 준비한다며 일반적이지 않은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자식에 대한 욕망 평소 지론이 ‘평범한 것! 재미없어!’로, 여느 부모들과 다른 교육관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다. 자녀들과 적절하게 거리를 유지하며 관심을 보이고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게끔 개방적인 태도로 키웠다. 딸의 선택에 ‘재수랑 휴학을 하느라 2~3년을 까먹었는데 워킹홀리데이 비자까지… 취업이 어렵지 않을까’라는 불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취업은, 대학원은?” 혼자 중얼거린다. 학교에서 ‘오피스 빅뱅!’ 일터의 문화가 바뀌었고, 평생직장이 사라졌다고 가르치면서도 내심 자식에게는 일반적인 삶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나 보다. 아들도 마찬가지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데 수시랑 정시, 다 챙기면 좋을 텐데 학교생활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니 맘에 안 들기는 매한가지다. 지금이 딱 간섭하고 싶은 순간이지만 의식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친정엄마가 말한 “너랑 똑같은 자식 낳아보면 내 마음 알 것”이라는 그 말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친정 엄마는 늘 지시하고 염려하고 관여했기에 거기서 벗어나고자 부단히도 애쓰고 도망쳤다. 그래서 더 의식적으로 자녀들을 자유롭게 키우려 애썼는데 머리로 생각했던 것과 눈으로 지켜보는 문제는 달랐다. 애정과 통제 균형 이루어야 바움린드(D. B. Baumrind) 교수는 애정과 통제의 정도에 따라 부모의 양육 유형을 나눴다. 부모의 통제가 높고 애정이 낮을 경우, 체벌이나 강압적 방법으로 자녀를 훈육한다. 자녀는 걱정이 많고 지나치게 복종적이고 사회성이 부족하게 된다. 부모의 애정은 높으나 통제가 낮을 경우, 일관되지 못한 훈육을 하게 되며 자녀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벌주는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자녀는 쉽게 좌절하고 자기중심적이게 된다. 애정과 통제 모두 낮을 경우 자녀에 대한 애정이 없고 자식을 믿지 못한다. 자녀는 문제 행동을 많이 하고 적대감이 많으며 좌절감을 많이 느끼게 된다. 애정과 통제 모두 높을 경우 자아존중감이 높고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로 사회에 적응해 살아간다.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는 “한 사람의 부모가 백 명의 교사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부모가 자녀에게 애정과 통제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녀들은 자율성과 선택권을 가지고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 때론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겠지만 의식적으로 자신의 양육태도를 수정하며, 자녀들을 사랑하고 열렬히 응원해주자. 자녀들은 믿어준 만큼 큰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주님이 우리에게 하셨던 방법! 자유를 허락한 사랑이다. 자녀들을 이끌어주되 강요하거나 협박하지 않으며, 자녀들을 돕되 대가를 기대하지 않으며,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실패할 수 있는 자유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지 않는 것이다. Think! Thank! >>>>> Q1. 당신의 양육 스타일은 무엇인가요? Q2. 당신은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 어떤 장점이 있나요? 또 어떤 것을 고쳐야 할까요? Q3. 성경 구절을 암송해 보세요.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3.04.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말의 힘 ... 자신의 마음 및 영적 상태와 연결
  •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해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인정해야 ‘감사’와 ‘긍정’의 말들 쏟아져 말이 씨가 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 말이 얼마나 힘이 있는가를 드러내는 말들이다.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진 말이 힘이 되기도 하고 좌절되기도 한다. 자녀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 습관적으로 던진 말들이 결실을 맺기도 한다. 말은 이처럼 마음을 드러내고 파장을 일으키며 파동으로 세상을 움직이며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 말대로 해줄까? 개그우먼 이성미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아들에게 했다. “이 또라이야, 한심한 놈아, 야~ 정신 나간 놈아.” 시간이 갈수록 욕은 늘어났고, 눈에 차지 않는 아들을 볼 때마다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욕은 점점 세졌다. 아들이 17살이 되었을 때 여느 때와 같이 분풀이를 하는데 아들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더 악을 쓰며 막말을 했고, 아들은 “연예인이라는 인간이, 교회 집사라는 인간이! 사람들이 이러는 거 알아?”라고 소리쳤다. 순간 이 말을 듣고 놀란 그녀의 내면에서 ‘네가 말한 대로 해줄까?’라는 소리가 들렸다. 17년간 아들에게 했던 말들을 되돌아보니 비참했다. 아들은 피를 흘리며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미친개가 되어 있었다. 그녀에게 두려움이 다가왔고 진심으로 아들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구했다. 그녀는 사랑했던 아버지를 잃었고, 미혼모로 아이를 키우는 등 삶 자체가 고난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미움이 가득 찼고 그것이 욕으로 나와 아들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내 귀에 들린 대로 성경에도 “내 귀에 들린 대로 해주겠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 28). 읽다 보면 하나님 앞에서 말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화가 나고, 못마땅한 게 있어도 늘 긍정적으로 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노예로 있을 때 10가지 재앙을 통해 구출해 주셨다. 홍해를 갈라 건너가게 하셨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시고,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다. 이러한 광경들을 직접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애굽을 그리워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다(민 14:2~3).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은 단순히 부정적인 말을 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렇게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눈 앞에 펼쳐진 어려움 앞에서 무너지고 불평의 소리를 냈다. 성경에서 말하는 말의 힘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긍정적인 말을 반복하면 그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허나 성경에서는 더 높은 수준의 말의 힘을 강조한다. 우리가 하는 말은 자신의 마음 및 영적 상태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긍정적인 단어 몇 개를 사용해야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떠하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결국 자신이 어떠한 상태에서 구원받은 자인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남과 비교하여 불안하고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에서 하는 말은 자신은 물론 상대방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개그우먼 이성미 씨는 자신이 불행하고 불안했을 때 자식에게 죽이는 말만 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고 바뀌고 나니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달라졌다고 한다. 말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삶의 방향성을 결정한다(잠 18:21). 눈에 보이는 상황은 힘들고 어려울 수 있지만,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기에 ‘감사’와 ‘긍정’의 말들을 쏟아낼 수 있다. 우리 교회는 ‘내가 먼저 인사합니다’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마음은 없는데 입으로만 예쁘게 인사하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고 반갑게 인사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 값으로 산 공동체이며 가족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런 나도 구원해 주셨는데 저 사람도 하나님은 가능케 하실 수 있다고 믿으면 상대방을 살리는 말을 할 수 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지금 당장 10년 전에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것처럼 인사하자. “할렐루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Think! Thank! Q1. 당신에게 힘이 되었던 말은 무엇이었나요? Q2. 말의 힘에 대한 성경 구절을 나열해 보세요(마 15:11, 잠 18:21, 엡 4:29). Q3. 당신은 주변 사람들에게 어떠한 말을 해주고 싶나요?
  • 2023.03.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The Glory’(더 글로리) … 하나님의 영광 반사
  • 월화수목금토일 모든 날이 주의 날
    어떻게 살았는가를 반성하며 삶의 예배자로 살아야 끔찍한 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한 여자가 가해자를 응징하기 위해 온 生(생)을 거는 이야기 <더 글로리>가 인기다. 이 드라마 곳곳에는 기독교가 형편없이 그려지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던 <오징어게임>, <수리남>, <지옥> 등도 기독교인을 악하게 묘사하거나 기독교 신앙이 위선의 산물처럼 묘사되어 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기독교가 어떻게 비쳤는지 살펴보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예배자로서의 삶을 회복하자. 주일만 주의 날? <더 글로리>에서 주인공 문동은을 괴롭혔던 가해자 중 한 사람인 이사라는 새벽 예배에 나가고 찬양을 부르면서도 학교에서는 잔인하게 친구를 괴롭힌다. 여기에 마약과 문란한 생활을 하면서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는 이중적인 행동은 혀를 차게 한다. 교회생활과 세상의 삶이 분리된 이러한 모습은 어떠한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세상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신자는 사람의 눈치를 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고 있는 자들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참된 예배는 주일 예배시간 축도 후에 비로소 시작 된다”라고 말한다. 월화수목금토일, 모든 요일이 주의 날이며 매일 삶의 자리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살아내는 자들이다. 소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이 “사람의 주된 목적이 무엇이냐”로 쉽게 물으면 “너는 왜 사느냐”이다. 답은 “사람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 걸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자들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신에게만 죄를 고했다고? 성인이 된 후 이사라는 문동은이 찾아오자 거액을 건네며 “난 너한테 한 짓 다 회개하고 구원 받았어”라고 말한다. 과연 자신이 지은 죄를 신에게만 고하고 회개하면 죄가 다 없어지고 용서가 되는 걸까? 하나님 나라의 최고 계명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할 것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세리 삭개오는 일본의 앞잡이 노릇과 같은 일을 하는 자로 동족들에게 경멸 받았던 사람이다. 이런 삭개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라고 고백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며 살아가는 동안 죄짓고 실수하는 일이 태반이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반드시 회개하고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성령께서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하고 피해 내용을 변제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누구에게 위로를 받나? 문동은이 학교폭력을 당할 때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는 가해자들과 한편이 되었고 학교 선생님은 친구들끼리 그럴 수 있는 일이라며 도리어 그녀를 폭행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던 그녀는 영혼까지 부서진 여자라고 표현되고 있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약자이며 가난하다. 가난은 재정적인 상황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할 곳이 없는 마음적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회 공동체는 그들이 언제라도 달려올 수 있는 공동체였는지 고민해야 한다. 율법적으로 잣대를 들이대고 정죄하며 교회 문턱을 높이지 않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야훼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시 86:1). 아무도 내 편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편이시며 도와주실 것을 전해야 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잊으려 해도 몸과 마음에 아픔의 흔적이 남겨졌기 때문이다. 병원치료, 상담치료 등을 통해 치료 받아야 하고 좋은 사람들을 통해 회복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대면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시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도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에게 모든 요일이 주의 날이며 그분의 통치를 받고 그분을 위해 사는 우리는 다르게 살 수밖에 없다. 기독교는 상식적이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기독교가 어떻게 비쳤는지 살펴보고 다시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한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Think! Thank! >>>>>>>>>>>>>> Q1. 주일에 보이는 당신의 모습과 평일의 모습이 다르지는 않은가요? Q2. 세상에서 묘사하는 불편한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서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나요? Q3. 먹든지 마시든지 당신은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하나요?(고전 10:31)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3.02.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고전(古典)에서 길을 찾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 로렌스 형제 
  • 일상을 다시 숨쉬게 만드는 300년 된 책
    사소한 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구나 직업을 가지고 살아간다. 관련해서 챗GPT가 화제다. 생성형AI로 인해 사라질 위협을 받는 직종으로 회계사, 수학자, 작가 그리고 웹디자이너 등이 꼽혔기 때문이다. 5년 전 이지성 작가가 펴낸 책 ‘에이트’에 나오는 경고성 소제목 ‘10년 뒤 당신의 자리는 없다’를 보고 놀란지 5년이 지났다. 솥뚜껑만 보고도 화들짝 하는 요즘, 없어지지 않는 책 한권을 추천한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30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많이 읽히는 고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제목만 봐도 행복해진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일상이 다시 숨을 쉬다’ 숨이 막히는 세상, 갈 곳 없고 마음 둘 곳 없는 많은 이들에게 숨통을 터주는 귀한 책이다. 평안의 닻을 내리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프라이팬으로 달걀을 뒤집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했습니다’라는 말은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평생 부엌일과 신발 수선일을 했던 그의 믿음의 고백이다. 많이 배운 것도 경험이 풍성한 것도 아닌, 단순하고 소박한 시골청년이었던 로렌스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교훈을 우리에게 선물한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았던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면 우리의 믿음이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훨씬 생생해지며 더욱 적극적이 된다.” 하나님의 임재로 받게 되는 축복이다. 연습할수록 우리의 소망은 강해지고 우리의 믿음이 거룩한 연습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들 속으로 침투해 들어갈수록 우리의 소망도 점차 자라간다. 이 연습은 우리 의지에 거룩한 사랑의 불을 붙여, 우리에게 세상에서 구별되는 기쁨을 맛보게 해준다. 이는 우리가 대적하는 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산산이 깨뜨리시는 곧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과 항상 함께 있는 영혼이 누리는 유익이다. 하버드식 독서법이 있다. ‘목차’를 암기하듯 반복해서 읽는 것이다. 하버드생 상위 1%가 실천하고 있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모두 4개 단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단원이 전체를 요약했다고 볼 수 있다. 저자인 로렌스 형제와 나눈 대화 내용인데 서두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임재 연습, 일상이 다시 숨을 쉬다’라는 부분이다. 로렌스 형제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말씀드린다고 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있는 그대로 도움을 요청했는데, 지금까지 하나님은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었다. 참전 중 부상을 입어 평생 다리를 절뚝거리며 살아야 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천직(mission)처럼 여기며 살아갔다.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3.04.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 ‘힘쓰고 애써서’ 하는 무릎 기도 기도가 최고의 동력임을 알려주는 책 이 책을 손에 들면 걱정이 앞설 수도 있다. 무릎으로 살아야 한다니. 무릎을 꿇었을 때 땅에 닿는 부분이 화끈거리고 아픈 증상이 점액낭염이다. 무릎을 구부릴 경우 체중의 몇 배에 달하는 하중이 무릎에 가게 되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본 책 3장에 흥미로운 얘기가 등장한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언급이다. 서양인의 눈으로 본 한국에서의 부흥에 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이들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마지막 장 12장에는 이런 얘기도 나온다. ‘여섯 명의 대학생이 단지 서로의 방에서 기도 모임을 가지고서 기도문 없이 즉석에서 기도했다는 이유로 옥스퍼드대학에서 퇴학을 당하고 쫓겨난 것이 겨우 두 세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옥스퍼드대학교 출신인 저자의 기도에 대한 열정과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자는 끊임없이 기도에 대해 강조하며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앞부분 1장부터 5장까지에서는 기도에 대한 정의를 통해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한다. 뒷부분 8장부터 12장까지에는 기도 응답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고, 중간부분 6장과 7장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특별히 저자는 ‘힘쓰고 애써서’하는 기도를 강조한다. 새뮤얼 콜리지(Samuel T. Coleridge)의 말도 인용하고 있다. ‘기도는 인간의 본성에서 가능한 최고의 동력이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기도하는 것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 수행하는 전쟁에서 이루어 낼 수 있는 마지막이자 최고의 위업이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기도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또는 사람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 기도하는 것이다. 어떤 자세로 기도를 드리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든 서거나 앉거나 걷거나 일하며 기도하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얼마나 길게 하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소홀히 하면서까지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동시에 우리가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기도하는 시간을 더 늘린다면 일을 더 잘할 수 있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존 녹스(John Knox)처럼 “하나님, 내게 스코틀랜드를 주시든지 아니면 나를 죽여 주십시오”라며 울고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을 덮으면서 마음에 깊이 남는 것은 무릎으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다. 곧 ‘힘쓰고 애씀’이다. 임 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3.03.09 / 이미나 기자

    고백록 /어거스틴
  • 어거스틴이 쓰면서 울었다는 그 책
    ‘죄의 고백’과 ‘하나님 찬양’이 가득한 고전 이 책은 두껍다. 고전답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스토리로 읽어야 한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스토리’를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6가지 요소 중 하나로 뽑았다. 이미 손쉬운 검색으로 체크가 가능해진 시대여서 팩트(fact)는 즉각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거기에 감성적 임팩트가 더해진 것이 ‘스토리’이다. 세계 3대 고백록 또는 참회록으로 불리워지는 본서는 지성적인 어거스틴이 감성적으로 쓴 눈물의 스토리이다. 쉽게 접근하기 위해선 먼저 저자 자신의 평가를 들어보는게 빠르겠다. “그 책은 내가 그것을 쓰고 있을 때 나에게 그러한 영향을 끼쳤고, 내가 지금 그것을 읽을 때에도 나에게 그러한 영향을 아직도 끼치고 있다” 이 책이 고전중의 고전으로 빛을 발하는 고백이다. 또 어거스틴은 “나의 악한 행동과 선한 행동을 말함으로 공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해와 사랑을 자극하여 하나님에게 향하고 하고 있다”고 평가함으로 자서전의 분명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방탕한 생활을 하던 그가 아이들이 부르는 ‘들어서 읽어라’ 노랫소리를 듣고 성경을 펴서 보게 된 로마서 13장 11~14절 말씀을 읽고서였다. 그의 회심은 ‘지적인 회심’과 ‘마음의 회심’으로 나뉜다. 이 책은 어거스틴의 죄에 대한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언어들이 더 많이 나온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어린시절을 표현하면서 “주님은 인간에게 빚진 것이 하나도 없으시면서 마치 빚진 것처럼 그들에게 갚아 주십니다”라는 표현을 쓴다.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어거스틴은 다리우스(Darius)에게 보낸 서신에서 “내 고백록을 받아 선한 동기를 가지고 읽어라. 피상적으로 읽지 말고 기독교인의 사랑을 가지고 읽어라”라고 권면한다. 우리에게 주는 이 책을 읽는 길잡이다. 그는 포기하지 않은 어머니의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자신을 덮었다고 고백한다. 우리 모든 부모들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 빼먹지 말아야하는 부분이다. 미래학자들의 지적과 성경의 예언처럼 요즘 시대는 바쁘다.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바쁘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개미들도 늘 바쁘지 않은가.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 때문에 바삐 움직이는가이다”라는 말을 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뚜렷한 우선순위를 가지고 일한다” 세계 2위의 투자개발회사 대표인 게리 캘러의 조언이다.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가 ‘성공한 크리스천의 좋은 영향력’ 때문이라면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맨 앞자리에 서있다.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면서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결코 두꺼운 책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임 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3.02.09 / 이미나 기자

    고민 Tick, 상담 Talk
    ‘심리적 소외 조종해 공감 사는 이단’ 주의해야
  • ▶ 고민 Tick 일부 성도들이 이단, 사이비의 미혹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상담 Talk 최근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세계적 스트리밍 서비스가 이단의 민낯을 세상에 드러냈다. 이를 본 많은 이들의 의문점은 ‘도대체 어떻게 저런 비상식적이고 반사회적인 공동체에 미혹될 수가 있지?’ ‘저런 이들에게 미혹되는 사람들이 더 문제 아닌가?’라는 것이다. 상담자로서 각종 이단에 미혹됐던 사람들을 상담했던 경험에 비춰보면 어린 시절부터 심리적 결핍을 경험해 자신에게 평안함을 줄 수 있는 ‘안정애착 대상’을 간절히 찾던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이들의 주된 호소는 “가족과 교회공동체 중 아무도 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지 않고 공감해주지 않았어요”라는 것이다. 현대 가정과 교회가 이들을 품지 못하게 되자 이단, 사이비의 미혹이 “우리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줄께요”라고 속삭이며 다가가게 된 것이다. 이단은 포교 대상자에게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를 제공하며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개인과 공동체라고 믿게 만든다. 이는 안정 및 애착 대상에 갈급해있는 개인에게는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사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인간에게 에덴과 같은 완전한 행복과 안전을 제공해주는 환경을 찾는 것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천국 소망이 소중한 것이다. 소아과 의사이며 대상관계 심리학자였던 도널드 위니캇(D. W. Winnicott, 1896~1971)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자녀에게 최선을 다하는 어머니의 태도를 중시하였다. 이런 엄마는 ‘완벽한 엄마’(perfect mother)가 아닌 ‘충분히 좋은 엄마’(good enough mother)이다. 각 가정에서도 자녀를 양육하다보면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 때 부모가 “어차피 우리 부모님도 나를 포기했으니 나도 내 자녀를 완벽하게 키울 수는 없어”라고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완벽하시고 우리는 완벽할 수 없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먼저 자녀들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청지기 된 부모는 본인에게 주어진 환경과 능력 안에서 맡겨진 자녀에게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이다. 위니캇은 이 방법이 강하고 완벽한 부모 밑에서 요구되는 대로만 움직이는 ‘거짓자기’(false self)가 아닌 ‘참자기’(true self)를 지닌 자녀로 키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임상 현장에서 주목받고 있는 하인즈 코헛(H. Kohut, 1913~1981)의 자기심리학(self psychology)은 ‘심리적 호흡으로써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코헛은 크리스천 심리학자로서 심리학의 춘추 전국 시대에 탁월한 이론을 성립해 실제적으로 적용하고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자기애의 심리학으로 명명되기도 하는 그의 심리학에서는 영유아기에 심리적으로 건강한 두 기둥이 세워지는 경험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첫 번째는 “너는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야”라는 표현을 부모로부터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때에 형성되는 ‘거울 자기대상’의 기둥이다. 두 번째로는 “너는 나와 연결돼 있으니 안전해”라는 ‘이상화 자기대상’의 기둥이다. 이 두 기둥을 잘 세워주면 심리적으로 건강하고 안전한 내면을 구축해 위험한 대상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이 두 기둥이 잘 세워진 사람들은 공감이 가능한 사람으로 자라게 된다. 위 두 기둥과 함께 중요한 세 번째 공감의 경험은 “나는 너와 같은 편이고 나는 기쁨으로 너에게 지식과 기술, 신앙을 전수해 줄게”라는 ‘쌍둥이 자기대상’ 경험이다. 매우 안타까운 현실은 현대의 가정과 교회 및 기독교공동체가 이런 든든한 경험들을 충분히 공급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한 심리적 결핍이 쌓이는 경우 “우리와 함께 있을 때에만 안전해”라고 미혹하며 조종하는 이단. 사이비 같은 대상에게 집착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단들의 공통적인 포교 전략은 “포교대상의 결핍된 욕구를 발견해 채워주자”라는 것이다. 물론 바쁜 현대 사회에서 모두에게 심리적으로 충분한 공감을 제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첫 번째로는 서로를 바라보며 따뜻한 눈빛으로 “당신은 소중한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두 번째로 “당신은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안전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같은 편이며 함께 성장하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진심을 담아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가족 상담 현장과 교회 사역에서 위의 3가지 공감 방법을 적용해 개인과 공동체가 심리적으로 회복되고 부흥하는 역사는 계속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안전한 공동체 안에 담겨 있는 이들은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확증하신 말씀을 신뢰하고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건강한 공동체와 함께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3.04.1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자기평가’와 ‘자기조절’로 중독 예방
  • ▶ 고민 Tick 저는 바로 해야 할 일들을 미룬 채 스마트 기기 사용을 끊지 못하고 있어요. 저도 ‘중독’인가요? ▶ 상담 Talk 지난 25년간 상담 현장에서 내담자들의 삶의 고민들을 다양하게 만나왔다. 최근 남녀노소 내담자들의 가장 큰 고민은 ‘스마트기기 중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조사 결과 우리 국민 5명 중 1~2명이 스마트기기 과의존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영유아동 청소년의 경우에는 수면의 질이 떨어지고 정상적인 호르몬 분비를 교란시켜 정상적인 신체 발달도 저해된다. 스마트기기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뇌는 어떻게 될까? 한양대 정신건강의학과 노성원 교수는 뇌 전두엽의 기능인 생각하는 능력의 발달은 멈추고 계속 쉬운 것과 즐거운 것만 추구하게 되어 자기조절능력과 통제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다고 조언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4월 24일 회원국들에게 다음과 같은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만 2~4세 어린이가 하루 1시간 이상 스마트폰기기 화면을 보는 것을 금지해야 하며 특히 생후 1년 이하의 영아는 스마트기기에 절대로 노출되면 안 된다고 WHO는 경고한다. 스티브 잡스는 ‘자녀들이 아이패드를 좋아하느냐’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아이패드를 써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고, 빌 게이츠는 자신의 자녀들이 만13세(중2~3학년)가 되고 나서야 휴대폰을 사주었다고 고백했다. 2019년 3월부터 6월까지 덕양중학교에서는 중학생들에게 스마트폰이 아닌 폴더폰으로 생활해보도록 하는 ‘스마트폰 절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의 보고에 의하면 처음 일주일간은 불안하고 감정조절이 어려운 금단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점차 부모님과의 눈 마주치는 시간과 대화시간, 산책 시간이 늘어났다. 이전에는 관심 없던 책을 보게 됐다. 무엇보다 일찍 자고 깊이 자기 때문에 낮에 기분이 좋고, 학교생활도 즐거워졌다고 보고했다. 이들의 뇌 영상을 촬영한 김은주 세브란스 정신과 전문의는 프로그램 참여 후 전두엽 기능이 몰라보게 향상됐다고 보고했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모든 생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동물의 뇌와는 달리 전두엽이라는 기관을 선물로 주셨다. 이 전두엽의 중요성은 최근 뇌 과학 분야와 인지심리학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메타인지’의 기능으로 설명된다. ‘메타인지’ 연구로 저명한 콜롬비아대학 심리학과 리사 손 교수는 메타인지의 두 가지 기능이 ‘자기평가’와 ‘자기조절’이라고 설명한다. ‘자기평가’는 본인이 현재 보고 듣는 것이 정말 자신의 뇌에서 잘 생각, 적용, 기억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스스로 점검하는 것이다. ‘자기조절’은 언어와 행동을 언제까지 지속하고 그만해야 할지를 스스로 조절하는 기능이다. 이는 욕구 지연 능력의 중요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스마트 기기를 내려놓지 못하도록 조종하고 있는 ‘자동 재생 기능’이 바로 문제이다. 이 기능은 ‘알고리즘’의 지시대로 우리의 뇌가 생각, 자기조절, 욕구지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성인과 노인의 경우에도 스마트기기에 과의존하는 경우 기억력과 생각하는 능력의 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져 조기 치매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스마트기기 과의존 중독’의 폐해이다. 사실 이 유혹을 이기는 첫 번째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대부분의 플랫폼에서는 이 ‘자동 재생 기능’을 중지시킬 수 있다. 하지만 초기 설정에서 이 기능이 보통 켜져 있기 때문에 사용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 플랫폼에서 좀 더 오래 머물며 서서히 노예가 되어가는 것이다. 실제 상담에서도 내담자의 스마트폰에서 ‘자동 재생 기능’을 중지하도록 코칭하여 중독을 예방하기도 한다. 우리는 코로나 기간 동안 스마트기기를 통해 비대면으로 예배드리는 것에 거의 중독에 가까울 만큼 매우 익숙해졌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시 일상을 회복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따라서 서로 대면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를 통해 우리의 죄 된 본성과 연약한 의지를 하나님 앞에 스스로 고백하고 믿음을 확고히 다지는 ‘자기평가’와 ‘자기조절’ 기능이 회복돼야 한다. 특히 가정에서는 가족회의를 통해 자녀와 부모가 함께 눈을 마주치며 드리는 가정예배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씀을 읽고 자기 삶에 적용하는 것은 ‘자기평가’이다. 또 스마트 기기를 내려놓고 예배에 집중하는 것은 ‘자기조절’이다. 예배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특별히 선물로 주신 전두엽의 성숙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이 ‘스마트기기 중독’을 예방할 수 있는 기독교 가정과 교회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 2023.03.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신앙으로 세상보기
    뉴스 가려보기
  •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출현은 새로운 문명 시대를 열어왔습니다. 학자들은 ‘말’의 발명으로 수렵, 채집 생활이 시작된 1단계, ‘글’의 발명으로 농경사회가 형성된 2단계, ‘인쇄’의 발명으로 산업사회가 본격화된 3단계, 컴퓨터와 결합한 ‘텔레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등장으로 정보사회가 펼쳐진 4단계로 역사 발전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챗GPT’ 등 인공지능, 블록체인, 가상현실과 같은 디지털 범용 기술들이 새로운 4차 산업시대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나가리라 예측됩니다. 되돌아보면 인터넷, 휴대폰 등 뉴 미디어의 확산은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획기적 변혁을 초래했습니다. 우선 인터넷은 탁월한 개방성으로 공간의 제한을 무력화시키고 명실상부한 ‘지구촌 공동체’를 실현해 냈습니다. 또한 개인 미디어와 매스 미디어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을 일시에 무너뜨렸습니다. 이 결과 많은 사람들은 IT기술과 접목된 뉴미디어의 등장이 ‘표현의 자유’에 있어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람은 상당 부분 실현됐습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작용 또한 생겨났습니다. ‘가짜뉴스’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미디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막강합니다. ‘교과서’며 ‘재판관’이고 ‘세상을 향한 창’입니다. 실제로 영유아들은 부모나 교사보다 TV나 유튜브를 통해 먼저 세상을 배워 나갑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언론의 잣대에 의해 규정됩니다. 또한 개인들은 미디어가 설정해 놓은 프리즘을 통해 외부 환경을 파악하고 사회 현안을 해석합니다. 한 마디로 ‘가짜뉴스’란 ‘뉴스의 형태를 띠지만 실체는 사실이 아닌 거짓된 뉴스’(fake news)를 의미합니다. 이는 언론 매체에 대한 사회 일반의 기본적 신뢰를 숙주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진실을 조작해 이익을 챙기려는 불순한 시도입니다. 이런 행태는 근래 SNS상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편집 통제권’(editorial control) 없이 ‘이용자 통제권’(user control)만 존재함을 악용해 가짜뉴스 제작 배포, 마녀사냥식 신상 털기, 테러 수준의 명예훼손 등이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를 정치적 선동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가공된 뉴스를 활용해 주식시장을 흔들려 한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의 경우는 ‘조회’와 ‘구독자’ 수가 수익과 직결되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적 내용으로 꾸며진 괴담 수준의 가짜뉴스가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강하고 자극적인 발언을 할수록 보상이 올라 간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됐고, “유명해진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노이즈 마케팅이 일반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정착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가짜뉴스가 지닌 신속한 전파력입니다. 미국 MIT 공대 연구진에 따르면 자극적인 가짜뉴스는 일반적 뉴스에 비해 전파 속도가 평균 6배 빠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의표를 찌르는 폭로성 뉴스, 험담과 막말이 섞인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에 더욱 솔깃해하는 인간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언론 자유를 신장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던 디지털 공간에서 이처럼 민주 질서를 위협하는 행태들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윤리와 규범을 바로 세우고 사용자들의 책임 의식을 거듭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밀려오는 정보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변별력’을 길러나가는 일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을 통해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도 효과적 방안이 될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에게는 이 같은 여과 능력의 함양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5:8~9). 온라인을 이용해 범람하는 온갖 반기독교적 정보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예리한 통찰력과 분별력을 갖춰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오늘 이 지면을 빌려 혼탁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의연히 기독 언론의 정도를 걷고 계신 <순복음가족신문>에 새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신문은 저희가 온 마음 바쳐 사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보루이며, 곳곳에 고귀한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생생한 ‘교회행전’입니다. 지난 2년 이 귀중한 신문에 부족한 제가 신앙 시사칼럼을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외람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올리며, 한결같이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신 신문사 여러분과 졸문을 읽어 주시고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광과 찬송을 주님께! 할렐루야!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2.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한글, 빛나는 우리의 보물
  • 한국어 학습자가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0일 코리아헤럴드가 교육부 자료를 입수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어를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곳은 세계 42개국 1806개 초 중학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3년 만에 40%가 급증한 수치입니다. 온라인상에서의 한국어 열기 또한 뜨겁습니다. 5억 명 회원을 둔 글로벌 외국어 학습 서비스 ‘듀오링고’는 최근 ‘2022년 듀오링고 언어 리포트’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어 학습자는 1070만 명으로 전년 대비 29%가 증가, 수강자 수가 많은 언어 순위 5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향학열이 높아진 데는 물론 ‘한류 열풍’이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한글’ 자체가 지닌 문자로서의 탁월성과 매력입니다. 실제로 한글은 여러 ‘소리글자’ 가운데서도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입니다. 열 자의 모음, 열 네 자의 자음, 27종의 받침을 활용해 수천 개의 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음소문자로서 세계 공용어화 되어 있는 영어와 견주어도 효율성이 월등합니다.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다르며,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분되고, 꼭 글자대로 읽혀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발음기관과 발음 작용을 본떠 만들어진 한글의 과학성은 정보화 시대의 진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보면 하늘을 뜻하는 ‘·’, 땅을 뜻하는 ‘ㅡ’, 사람을 뜻하는 ‘ㅣ’ 석자로 수십 가지의 모음을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자음은 동일한 자판을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예삿소리(ㄱ)→거센소리(ㅋ)→된소리(ㄲ) 순으로 변환돼 간단한 조작으로 모든 글자를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뛰어난 한글의 편이성이 우리의 높은 휴대전화 보급률과 선도적 기술축적을 가능케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울러 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특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정연하게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두에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동기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말이 공용되는 한자와 통하지 않아 백성들이 제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실정임을 긍휼히 여겨 쉽게 익혀 편하게 쓸 수 있는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점을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는 보다 실감 있게 설명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한글은 이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자주적 실용주의가 투영돼 구성원리가 간명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문맹 퇴치 신화’를 이룩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습득의 용이성’이라는 한글의 장점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전도의 사명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역, 신분, 성별의 구별 없이 두루 보급되고 읽혀졌습니다. 그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가며 전도했고,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배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은 “한글이 진정한 우리 언어로 빠르게 자리 잡는 데 성경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국민일보 우성규 기자의 언급대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의 보급으로 한반도는 문맹에서 벗어났고, 이를 통해 전해진 복음의 메시지는 한국교회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됐던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한글임에도 근래 우리 사회의 한글 홀대는 선을 한참 넘어섰습니다. 온갖 은어, 비어, 속어, 정체불명의 약어와 합성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공공 방송에서조차 한글 규범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단 78년의 세월이 초래한 남북한 간의 언어 이질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민족의 명절인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북이 함께 기념하는 절기가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서 ‘설날’은 지금까지 우리 겨레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명일(名日)입니다. 궁극적인 ‘남북통일’은 단순한 ‘제도적 통일’을 넘어 ‘사람 간의 통합’에까지 이르러야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시풍속의 존속과 공유는 통일 여정에서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글은 다름 아닌 생각과 정신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말과 글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민족공동체로서 기본적 공감대의 토대가 이미 마련돼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이 기반이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방지 대책이 시급히 강구돼야만 할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글은 빛나는 우리의 문화 자산입니다. 겨레의 보물인 우리말, 우리글을 바로 지키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 온 국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과의 귀중한 소통 매체인 한글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언어가 역사와 문화의 창고를 여는 관건이듯이 성도들에게 한글은 은혜의 보고인 성경을 여는 소중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카타르의 낭보
  •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짓는 의미 있는 분수령이 됐습니다. 사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954년 제5회 스위스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다섯 번이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음에도 단 1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6월 4일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2대 0으로 꺾은 후 강호 포르투갈, 이탈리아, 우승 후보 스페인까지 연달아 격파하며 4강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모두에게 축구는 ‘그냥 축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팀의 경기를 매개로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춤추고 함께 함성을 질렀습니다. 세계적 명물로 자리 잡은 자생적 ‘길거리 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4강 신화에 세계가 놀랐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 스스로였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신감, 동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적 유대감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이 열기는 IMF 경제위기 극복, 폭발적인 참여민주주의 확대, 창발적인 한류 문화 확산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22년, 제22회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통계전문가들의 ‘16강 진출 가능성 9%’의 예측을 여지없이 깨뜨린 이 반전 드라마는 투철한 ‘원팀 정신’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위시한 코치진과 27명의 선수들이 똘똘 뭉쳤습니다. 그 결과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국형 ‘빌드업 축구’가 가능했고, 어떤 팀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강인한 뚝심이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구성원들 간의 신뢰 역시 돋보였습니다. 특히 주장 손흥민 선수의 리더십은 발군이었습니다. 그는 월드컵을 3주 앞두고 소속팀 경기에서 당한 안와골절로 안면 보호대를 착용한 채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년간 마스크를 쓰고 계신 국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의연히 대답했습니다. 개막 전 “단 1%의 가능성이 있어도 앞만 보고 달려가겠다”며 부상 투혼을 예고했던 그는 약속대로 “몸이 부서지도록” 뛰었습니다. 실제로 H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벼랑 끝에 몰렸던 한국팀은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황희찬으로 연결된 극적인 역전 골로 포르투갈에 2대 1 승리를 거두며 16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16강전 진출이 확정된 직후 권경원, 조규성 선수는 관중에게서 건네받은 태극기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뚜렷한 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본래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가 7수 끝에 세계 대회를 제패하며 했던 이 말은 다시 새롭게 부각되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선 대회 내내 보여준 대표팀의 모습이 압축된 표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흔들리는 이 세대에게 던지는 속 깊은 응원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팀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위축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불퇴전의 투혼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기간 특별히 우리 팀의 경기가 열렸던 13일간 축구 덕택에 대한민국은 모처럼 하나가 됐습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모두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표팀의 선전은 코로나 블루, 경제 한파, 잦은 사회적 갈등으로 침체돼 있던 한국 사회에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또 한 번의 ‘송구영신’의 시간을 맞으며 영혼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 스타디움을 뛰고 달렸듯 성도들도 인생의 경기장을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경주자처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인생행로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감사한 것은 이 신앙 노정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스타플레이어로 여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는 말씀대로 열렬한 서포터가 돼 뜨겁게 응원해 주십니다. 독자 여러분!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스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팬이 되어주십니다. 다가오는 2023년 새해, 예수님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12.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새책소개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
  •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로 탄생한 기독교가 우주 만사의 정답이 된다. 혼란한 시대를 사는 인생들에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이기창 공로장로(반석대교구)가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를 펴냈다. 저자는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기록은 합리적이며 과학과도 합치하며 오히려 과학을 초월하고 있음을 깊이 있게 분석해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성을 논증했다. 이 책은 신, 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 내용을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면서 심도 깊게 해설하고, 기독교 교리와 신앙, 신학적 논리와 이론 및 사상, 우주의 창조로부터 역사, 종말 및 미래 발생할 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과학자인 저자는 과학과 철학의 논리로 신의 존재로부터 우주 만물 전체를 물질우주와 정신우주로 균형있게 조망하면서 과학-철학-신학을 통섭해 교집합의 우주론을 밝혀낸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인류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질문인 우주, 물질, 영혼, 생명, 죽음, 사후생, 세상종말 등 빅퀘스천 규명을 추구해 나간다. 응용과학인 전자통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공과대학 정교수를 역임한 이기창 공로장로는 교수 은퇴 후 10년간 물리학, 철학, 신학, 역사 등 인문학 연구에 몰두해 이 책을 만들었다. 그는 현대물리학에서 발견한 빅뱅 우주론과 부합하는 종교를 엄밀히 분석, 조사해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만이 현대과학과 부합하는 유일한 종교로서 진실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기독교가 공학, 물리학 등의 과학과 철학에 합치하는 유일한 종교이며 따라서 성경과 기독교는 ‘우주적 진리’라는 결론을 깨닫게 된다. 어디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몰라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추천하는 필수 교양 인문서적이다.
  • 2023.04.07 / 이미나 기자

    성공에 이르는 12가지 지혜
  • - 이영훈 목사 지음 / 교회성장연구소 - 크리스천의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12가지 비결 이영훈 목사 “믿음으로 꿈꾸는 자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 이영훈 담임목사는 성공에 대해 “정성을 다해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 낸 것이 바로 성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불어 “성공은 이루고자 하는 꿈과 목표를 가진 자, 그 꿈과 목표를 향해 올바른 방법을 가지고 성실하게 노력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열매”라고 전한다. 이영훈 목사는 2023년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품은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하는 지 깨달은 바를 나누고 싶은 바람을 품었다. 그 바람은 신년 축복 열두 광주리 새벽기도회를 통해 ‘성공에 이르는 12가지 지혜’ 주제의 설교로 이어졌고 이 책은 이를 토대로 집필됐다. 혼란의 시대, 격변하는 세태 속에 모든 사람들은 예측할 수 없는 불안으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때에 가정과 일터, 교회 등 삶의 영역에서 믿음을 지키고 성공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크리스천들에게 이 책은 온전한 믿음과 인생의 성공 비결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품은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성공의 지혜를 12개의 주제로 다룬다. “꿈꾸는 자가 되라,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소유하라,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하라, 장애물을 뛰어넘어라,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라, 분명한 자화상을 가져라, 기도의 사람이 되라, 시간의 관리자가 되라, 자기를 계발하라, 삶의 자세를 바꿔라, 사명에 붙들려 살라, 존경받는 리더가 되라.” 이영훈 목사는 무엇보다 말씀 위에 굳건히 서서 믿음으로 꿈꾸는 자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는 12가지 성공의 지혜와 방법을 체크 리스트와 함께 제시해 인생에서 회복해야 할 것을 찾아 바로잡도록 하며,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미래로 도약할 수 있는 성공 다이어리도 적어보도록 구성됐다.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삶의 터닝 포인트가 필요하다면 이 책을 따라 삶을 관조하고 재정비해보면 어떨까? 단호하지만 진정 어린 저자의 조언은 삶의 무게에 지친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각 전환의 기회를 만들어줄 것이다.
  • 2023.03.17 / 복순희 기자

    ‘2023 감사QT365’ 출간
  • 성경일독, QT묵상, 감동예화, 감사쓰기가 한 권에
    풍성한 신앙생활을 위한 최고의 선물 2023년 풍성한 신앙생활을 이끌 최고의 안내서 『감사QT365』 가 출간됐다. 이번 감사QT 에디션은 한 권의 책으로 1년 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지난번에 이어 이영훈 목사의 새 감동 메시지가 365편 수록돼 있고 매일 ‘나의 감사’를 쓸 수 있는 란도 제공됐다. 책이 인도하는 대로 매일 감사 메시지를 읽고, 찬양과 말씀 묵상의 QT를 지속한다면 365일 감사가 넘치는 한 해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월력과 함께 매일 제시되는 ‘오늘의 일독성경’ 표에 따라 주어진 성경 말씀을 읽으면 신앙 훈련도 가능하다. 한 해 동안 구약 1독, 신약 2독을 하게 되니 이 책 한권이면 말씀과 감사가 충만한 1년을 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날의 말씀을 읽은 후에 함께 수록된 찬송가를 부르며 주님의 은혜를 구해보자. 찬송가 전 절의 가사가 제공돼 있어 책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이후 오늘의 일독성경 범위 내에서 주어진 그날의 감사 말씀을 읽고 ‘나의 감사’를 적으면 큰 감사부터 아주 작은 감사까지 생각나 은혜롭다. 또 이런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주님에 대한 사랑과 받은 은혜를 이웃에게 전한다면 기쁨과 성령 충만함이 배가될 것이다. 이 책에는 오늘 나의 사랑과 전도가 필요한 이들의 이름을 적고 그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적는 전도노트가 마련돼 있다. 저자인 이영훈 목사는 책 머리말에 “경건의 습관을 통해 신앙의 기초를 단단히 쌓아가면 어떤 풍랑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집을 지을 수 있다. 매일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며 이 책을 통해 1년 365일 모든 순간 절대감사, 한평생 감사, 넘치는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가 되기를 소망했다. 감사QT365를 통해 범사에 감사하며 마음의 평강을 누리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전도의 사명을 놓지 않는다면 2023년은 영적 성숙에 이르는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2022.12.09 / 김주영 기자

    문화계 소식
    기독교 복음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 7월 5일 국내 개봉  
  • 전미 박스오피스 4주간 연속 TOP 10 하나님의 사랑과 진정한 믿음으로 감동 전해 하나님의 치유 능력과 사랑을 경험케 하며 대한민국에 진정한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릴 기독교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가 오는 7월 5일 국내에 개봉한다. 전미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들며 놀라운 흥행을 기록해 그 해 최고의 종교 영화로 떠올랐다. <기적을 믿는 소녀>는 기도로 믿음을 증명하는 어린 소녀를 통해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이 믿음의 불꽃을 키워가는 엔터테이닝 복음 영화다. 가족과 함께 호수에 놀러 간 평범한 어린 소녀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케 하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죽은 새와 강아지의 부활, 그리고 하반신 마비를 가진 친구가 다시 걷게 되는 등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목격한 믿음의 소녀를 통해 점차 변화해 가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강렬한 울림과 함께 감동을 전한다.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 사람들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보는 내내 미소를 짓게 하는 스토리와 힐링을 선사하는 완벽한 케미스트리 등을 통해 종교인을 넘어서 일반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관람 후에는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듣고 계세요”라는 대사와 깊은 감동이 가슴에 남게 된다. 특히 <위대한 쇼맨> 오스틴 존슨부터 제68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미라 소르비노, 피터 코요테, 케빈 소르보까지 믿고 보는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해 막강 캐스팅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여 이목을 집중시킨다. 한편, GOODTV 기독교복음방송(대표이사 김명전)에서는 개봉 전부터 <기적을 믿는 소녀> 교회 상영을 진행해 한국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는 많은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밝혔다.
  • 2023.05.25 / 이미나 기자

    스마트폰 생활백서-저절로 성경일독
  • “스마트폰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보여요!” 잠금화면 활용한 성경 묵상 앱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매순간 단비와 같은 성경 말씀을 전달해 주는 앱이 있다. 바로 ‘저절로 성경일독’이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스마트폰 화면을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에는 성경 구절이, 하단에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화살표 기호와 북마크, 공유하기, 잠금해제 버튼이 있다. 화면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켜지면 다음 절로 넘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담 없이 성경을 일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앱에서는 말씀 공유 기능이 가장 눈에 띈다. 묵상하고 있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말씀 카드를 만들어 SNS로 즉시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모바일 전도 도구로도 활용이 가능해 전도 대상자에게 유용하다. 성경은 개역개정, 개역한글, 현대어성경, 새번역과 영어 성경인 KJV, NIV, NLT 버전을 제공하고 있는데 한글과 영어 두가지 성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개역개정, 개역한글, KJV 성경은 오디오도 함께 제공된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안드로이드기반(삼성 및 LG)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구글 Play스토어에서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앱을 실행하면 광고가 나타나지만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말씀을 묵상하고 공유하는데 지장이 없다. 또한 결제해야 이용할 수 있는 ‘읽기모드’는 우리 교회 앱 성경과 동일한 기능이므로 오랜 시간 성경을 읽을 때는 교회 앱을 활용할 것을 추천한다.
  • 2022.07.29 / 금지환 기자

    부활절 맞아 ‘기독 영화 특별전’열려
  • 유명 기독영화인『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 『바울』등을 극장에서 볼 수 있는 특별전이 열린다. CBS가 부활절을 맞이해 진행하는 기독영화 특별전은 4월 1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된다. 서울 지역은 서울극장, 인천 경기 지역은 CGV계양, 인천, 일산, 소풍, 롯데시네마 안산, 안산명화극장 등에서 볼 수 있다. 기독 영화 특별전에서는 영화 『바울』이 마지막으로 상영돼 아직 관람하지 못한 관객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누적 관객 수 약 30만 명을 기록한 『천로역정: 천국을 찾아서』와 개봉 이후 꾸준한 관심을 받고 있는 『예수는 역사다』, 『가나의 혼인잔치: 언약』등은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예정이다. 이어 코로나19로 IPTV에서 런칭한 영화들도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된다. IPTV 최초 개봉 영화 『내게 찾아온 사랑』,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아버지의 기억』에 이어 낮에는 목사님, 밤에는 프로레슬러가 된 목사님의 숨겨진 비밀이 담긴 『복면목사』 등 다양한 장르와 선호를 충족시킬 수 있는 영화를 선보인다.
  • 2021.03.25 / 이미나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31. 후안무치(厚顔無恥)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솔로몬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된 시므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6~37) 3. 솔로몬의 숙청 작업과 시므이의 죽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숙청의 이유, 방법, 숙청당한 인물들만 보면 공포정치를 휘둘렀던 절대군주 못지않다. 숙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비아달, 다윗을 섬기며 충성을 다했던 군대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형이자 왕자였던 아도니야까지 잠재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둘째는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다니엘, 셋째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 넷째는 학깃이 낳은 아도니야였다.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열 번째쯤 된다(대상 3:1~5). 그런데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게 죽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 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 죽은 것이다. 둘째 아들 다니엘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성경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왕상 1:5~11). 이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요압과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왕하 1:7). 하지만 아도니야의 시도는 일일천하에 그쳤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도니야(왕상 1:51)를 살려주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상 1:52). 하지만 아도니야는 다윗의 침실에서 수종을 들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은 이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도니야를 처형해 버렸다(왕상 2:13~25). 2) 아비아달 아비아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10번째 대제사장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기약이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도시와 지역이 있었지만 다윗이 선택한 첫 장소는 대제사장이 있던 놉이었다(삼상 21:1).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고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삼상 21:4~10).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을 문제 삼아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을 한 날에 살육했다(삼상 22:18).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아달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아비아달은 지체 없이 한걸음에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향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에봇을 가지고 도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3:6). 아울러 우림과 둠밈을 대제사장의 에봇 흉패 안에 보관하라고 되어 있기에 우림과 둠밈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출 28:30). 다윗은 이렇게 사선을 넘어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직후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에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왕상 2:27). 3) 요압 요압이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이다’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볐던 군대 장관이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던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다윗이 사울의 남아있던 세력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장군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를 이끌던 요압이 맞붙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요압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요압은 이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자손들과 다윗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하고 통일왕국을 탄생시키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고 통일왕국의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뗐다(삼하 3:8~21).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 다시 헤브론으로 유인해 왔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브넬을 살해했다(삼하 3:27). 성경 여러 곳에서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요압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후 모든 공이 아브넬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에 대한 염려와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한 번에 갚고자 벌인 일이었다. 다윗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큰 용사였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압에게 묻지 않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로몬은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압이 죄 없는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이었던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었지만(왕상 2:31), 실상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시므이 솔로몬의 서슬이 퍼런 칼날은 그의 왕권을 위협할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대왕이었던 다윗이 살려 준 시므이를 향한 솔로몬의 마지막 경고이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절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왕상 2:36~37). 왜 솔로몬은 베냐민 자손이고 바후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시므이를 굳이 예루살렘 성에 붙잡아 두고 절대 떠나지 말라고 했을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 두 명이 도망을 가자 솔로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벗어났다(왕상 2:39~40). 솔로몬은 브나야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이를 단숨에 처형했다(왕상 2:45).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초라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가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였다. 하지만 압살롬에 의한 왕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엎드려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량과 은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8.01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30.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시므이의 죽음①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8~19) 사무엘하 15장과 19장은 후안무치한 시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골 어디에도 왕의 위엄과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다윗은 머리는 산발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윗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길을 역방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나 군사들에게 쫓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신세였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10명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다윗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친부로서의 자존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더 낮아질 수도 초라해질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이미 죽임을 당해 세상에 없었다. 다윗의 차남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나발의 아내였으나(삼하 2:2)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된(삼상 25:39~43)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이다(대상 3:1). 하지만 그의 이름 외에 추가적인 자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장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아(왕상 1:5~10) 다니엘은 일찍 죽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남과 차남이 죽은 상황에서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아버지 다윗을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압살롬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헤브론에서 시작한 반란은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거칠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바후림을 지나고 있을 때 사울의 친족이요 게라의 아들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다(삼하 16:5). 다윗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13). 자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이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사울의 남은 자손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참소하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울의 친족을 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친족들에게 많은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고 사울의 친족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했다. 그들의 토지나 소유권도 빼앗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은혜를 받았던 사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시므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부었다. 비록 피난길에 올랐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있었고 많은 백성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6:6).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말한다(삼하 16:9).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극심한 모멸감에 시달렸을 다윗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므이는 더없이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난이 은혜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므이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가 퍼붓는 저주를 묵묵히 참아냈다(삼하 16:11). 2. 급변한 시므이의 태도 다윗이 가장 힘들었을 때,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의 태도는 압살롬이 죽고 왕자의 난이 정리된 이후 급변한다. 압살롬이 죽자 제사장들과 신하들은 서둘러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진행한다(삼하 19:11~12). 다윗은 피난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올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던 바후림에 이르렀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귀환 행렬이 바후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엘하 19장 16~18절은 이때 시므이가 취한 행동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유다 사람들과 동행(삼하 19:16) 사울의 혈육으로 베냐민 지파였던 시므이는 급히 유다 사람들과 다윗을 맞으러 나간다. 다윗의 피난 행렬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에게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다시 바후림에 왔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2) 시므이의 세력(삼하 19:17) 사무엘하 19장 17절은 사울이 죽은 후 시므이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을 맞으러 나올 때 시므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기의 모든 세력을 데리고 나온다.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열다섯 명의 아들, 종으로 부리고 있던 하인 스무 명을 대동했다. 시므이는 호시탐탐 사울 왕조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이유도 없다. 3)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삼하 19:18~20) 시므이는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다윗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시므이가 특별히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던 날에 저질렀던 패역한 일'에 대한 용서였다(삼하 19:19). 그가 다윗을 쫓아가며 했던 저주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비새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삼하 19:2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므이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울의 남은 세력들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아량을 베푼다(삼하 19:22~23). 다윗은 자신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므이의 문제는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7.04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9.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Ⅱ)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뤄져야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2) 기브온족의 이스라엘 편입 가나안 족속의 종교 혼합주의, 쾌락주의, 윤리적 타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기이한 자연적 현상들은 다신론적 맹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손쉬운 다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종교적 편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과 방식대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아주 쉽게 유혹으로 이끌어 갔다. 그 결과 거룩한 삶은 죄 된 삶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나중에는 헤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나안 족속과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약 자체도 문제였지만 방법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전통에 따라 기브온 사람의 음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수 9:15). 서로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고 있었다. 성경은 기브온과 체결한 계약 방식이 '그들(기브온 사신)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9:14).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과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수 9:18)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6.06 / 이상윤 목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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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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