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기사
[신년 인터뷰] 엄태욱 부목사(목회담당)
  • 전 세대 말씀 묵상으로 삶이 예배 되길 새해 핵심 사역으로 강조된 ‘예배’의 본질 회복을 위해 교회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려는 예배 관련 사역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목회 방침에 따라 주일예배와 수요말씀강해, 금요성령대망회, 새벽예배 등 모든 예배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성도들이 『감사QT 365』를 통해 삶의 자리에서도 예배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합니다. 성도들이 새벽예배에서, 또 각자의 처소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일상이 예배가 되고, 그 은혜가 다시 공예배의 감격으로 이어지는 시너지 효과가 일어날 수 있도록 교역자들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도와 구역·공동체 활성화를 통한 균형 있는 부흥을 위해 2026년에 계획 중인 주요 과제는 무엇입니까? 건강한 구역 공동체가 곧 전도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구역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갈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초대할 수 있고 새가족들도 편안하게 정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교역자들도 현장에서 수고하는 지·구역장들이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교육과 지원에 더욱 힘쓰려 합니다. 장년 세대의 부흥과 참여가 지속되기 위해 교회 차원에서 필요한 사역과 지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우리 모두가 장년국과 대교구3450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서 든든히 세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장년 성도들이 남·여선교회 등의 교회 기관에서 봉사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장년 성도들을 직접 만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교회의 허리 역할을 하는 장년 세대를 위해 같이 기도해주시고 응원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순복음 성령 충만의 신앙을 다음 세대에 계승하기 위해 교회와 가정이 함께 실천해야 할 역할로 무엇이 있을까요? 부모 세대가 신앙의 본을 보이고, 자녀들과 함께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 또 가정에서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습이야말로 자녀들에게 가장 큰 신앙 교육입니다. 교역자들도 청년이나 청소년은 물론이고 어린이들까지도 성령 받고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회에서 받은 은혜가 가정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부모님들도 믿음의 울타리가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새해 성도들이 신앙 안에서 비전을 세우고 적용하도록 돕기 위해 들려주고 싶은 조언이 있으실까요? 올해 우리 교회는 『감사QT 365』를 활용해 성도들이 말씀과 동행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온 가족이 함께 이 책을 길잡이 삼아 같은 말씀을 읽고 묵상한 은혜를 나누며 하나님께 감사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안에서 가정이 하나 되고, 넘치는 감사로 삶을 채워갈 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정리=오정선 / 사진=김용두 기자
  • 2026.01.09 / 오정선 기자

    [신년 인터뷰] 최경래 장로회장
  •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섬기겠습니다” 2026년을 맞이하는 장로회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무엇인가요? 2026년 장로회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기도와 섬김’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워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장로회는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성도들을 섬겨, 교회 안에 기쁨과 평안이 넘치도록 힘쓰고자 합니다. 섬김의 본을 보이는 장로회가 되어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돌아보며 교회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세심하게 살피겠습니다. 교회 부흥과 발전을 위해 올해 장로회가 중점적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장로회는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목회사역을 적극 지원하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기초 위에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사역이 더욱 힘있게 열매 맺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데 중점을 두고자 합니다.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를 통한 성령 충만한 신앙의 기초를 회복하도록 뒷받침하고, 교회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을 세심하게 살피겠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지속적인 부흥을 이루도록 헌신 하고자 합니다. 성도들의 하나 됨을 위해 장로회가 펼쳐갈 사역이나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장로회는 교회 각 기관이 연합하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 회복을 위해 기도로 함께하는 공동체를 세워가고자 합니다. 특별히 소외되거나 어려움을 겪는 성도들을 살피며, 교회 안에 사랑과 회복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 되어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신앙 생활하도록 돕는 것이 장로회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다음 세대 부흥, 청장년층 활성화, 이웃 섬김 등 교회의 사명과 역할이 중요합니다. 교회 발전을 위한 장로회의 구체적인 방향은 무엇인가요? 다음 세대와 청장년층이 교회의 미래라는 마음으로, 이들이 신앙 안에서 든든히 세워지도록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또한 교회가 지역과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도록 장로회가 앞장서겠습니다. 국내 선교뿐 아니라 세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와 헌신으로 동역하겠습니다. 교회 제직과 성도들에게 전하고 싶은 당부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2026년 새해에도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을 통해 전도에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세워가며,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장로회도 성도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으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제직과 모든 성도님들이 새해 주님 안에서 더욱 강건해지고, 마음에는 평안이 넘치며, 모든 일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정리=이미나 / 사진=김용두 기자
  • 2026.01.09 / 이미나 기자

    [신년 인터뷰] 김영석 부목사(국제담당)
  • 세계 교회와 동행한 CGI 희년 맞이해 우리 교회 국제 사역을 담당하는 CGI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CGI(Church Growth International)는 1976년 11월 조용기 목사님에 의해 설립된 국제 교회 성장 네트워크입니다. 세계 교회 성장과 부흥을 도모하며 국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CGI는 현재 이영훈 목사님께서 제2대 총재로 섬기고 계십니다. 설립 이후 현재까지 꾸준히 성장하며 전 세계 각 나라를 대표하는 저명한 목회자와 신학자, 복음 전도자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성경적 원리에 기초한 건강한 교회 모델을 나누며 동역하고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교회를 섬겨온 CGI가 이뤄온 주요 성과는 무엇인가요? CGI는 지난 50년 동안 국내에서만 30여 회의 콘퍼런스를 비롯해 100여 국에서 600회 이상의 해외 콘퍼런스와 목회자 세미나, 지도자 훈련을 개최하며 세계 여러 나라의 교회와 사역자들을 섬겨왔습니다. 지금까지 참여한 인원만 1200만명에 달합니다. CGI 대회에 참석해 교회 성장의 원리를 배운 목회자들이 각 나라에서 영향력 있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세계 교회 흐름 속에서 CGI는 현재 어떤 위치와 사명을 감당하고 있나요? 오늘날 세계 교회는 세속화와 다음 세대 이탈, 그리고 급변하는 사역 환경이라는 공통된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이영훈 목사님께서는 CGI를 통해 각 대륙과 국가에서 영향력 있는 대형교회 지도자들의 연합을 도모하며, 변하지 않는 복음의 본질과 성령의 역사를 다시 붙들도록 돕는 역할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CGI는 세계 교회가 서로 연결되고 지속적인 동행과 함께 회복과 부흥을 이루도록 섬기는 국제 사역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5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대성회와 콘퍼런스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올해 10월 28~31일 CGI 창립 50주년을 맞아 대성회와 국제 콘퍼런스가 열립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고, 제2대 총재이신 이영훈 목사님의 비전 아래 앞으로의 사명을 더욱 힘차게 펼쳐 나가는 자리로 준비되고 있습니다. 이영훈 목사님을 비롯해 각 국가를 대표하는 대형교회 담임목사들로 구성된 CGI 이사진의 말씀 집회와 기도회, 그리고 다음 세대를 향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세미나가 함께 진행될 예정입니다. 앞으로 CGI의 비전과 성도들의 동참 방법을 말씀해 주세요. 성도 여러분께서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칠 CGI와 50주년 성회를 위해 기도와 관심으로 동참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에 따라 물질과 봉사로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이 사역을 통해 CGI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 교회 부흥의 선봉장으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정리=금지환 / 사진=김용두 기자
  • 2026.01.09 / 금지환 기자

    Hello, Israel
    광야에서 들려오는 물의 이야기
  • 강, 시내, 샘이 들려주는 성경의 언어 겨울 우기가 되면 이스라엘은 비가 내린다. 한국처럼 비가 많이 내리는 곳에서 생각할 때는 뭐가 그리 특별할까 싶지만 국토의 3분의 1이 광야 지대이고 1년 중 비가 내리는 기간이 불과 2달도 채 안 되는 이스라엘에서 겨울비는 축복과도 같다. 특히나 광야에 사는 필자로서는 비가 무척이나 반갑고 행복한 순간이다. 지난 3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지독한 기근이 있었다. 비가 거의 오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 겨울에는 태풍과 함께 비가 많이 내렸고 또 그로 인해 기온도 예년보다 더 내려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좋은 것은 비가 내리고 광야의 풍경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 비가 오고 나면 생기는 것이 강과 시내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깨끗한 강이나 시내가 아니라 흙탕물이 흐르는 것이지만 비가 오고 나면 볼 수 있는 장관들이 있다. 모래와 자갈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들이 큰 강을 만들고 폭포를 만들어 쏟아지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리고 비가 온 뒤 광야는 어느새 푸르름을 띄기 시작하고 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광야에서 비는 단순한 자원인 물을 공급하는 것만이 아닌 생명과 약속의 사건임을 깨닫게 한다. 성경은 물길을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물, 강, 시내로 표현되는 것들이 히브리어로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먼저 강은 보통 나하르(Nahar)라고 한다. 계절에 따라 사라지기보다 ‘계속 흐르는 물줄기’의 뉘앙스가 강해서 창세기에서 에덴을 적시는 강 같은 장면과 잘 어울린다. 때로는 경계선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번영과 심판의 이미지로도 쓰인다. 반면 이스라엘 땅의 현실을 더 자주 닮은 단어는 나할(Nachal)이다. 우리나라말로 시내 혹은 개울로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비가 오면 급류가 되고 평소에는 메말라 있는 ‘와디’까지 품는 말이다. 성경이 이 단어를 자주 쓰는 것은 약속의 땅이 ‘항상 물이 넘치는 정원’만이 아니라 건기와 우기가 공존하는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이 말하는 물가는 더 섬세하다. 펠렉(Peleg)은 갈라진 물길, 수로, 물이 흘러가도록 나누어진 길과 같은 느낌이다. 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길이 여기에 속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다”(시 1:3)에 등장하는 시냇가는 자연 물길이 아닌 이런 인공적인 물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특별한 은혜의 통로에 심겨진 존재라는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샘은 마얀(Ma’ayan)이다. 광야의 샘은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광야의 숨겨진 샘은 동물들에게 그리고 광야를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생명과 쉼을 주는 공간이다. 샘은 광야에 사는 모든 생물들에게 생명이다. 그렇기에 종종 성경에서는 샘의 이미지가 숨겨진 은혜, 예상치 못한 공급, 길 위의 위로로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근원’ 혹은 ‘원천’을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것이 마코르(Maqor)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종종 근원적인 이야기를 할 때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이시라고 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예레미야 서에서 사람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물 저장고, 즉 썩어질 물을 가두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을 고발하는 장면이 나온다(렘 2:13). 이처럼 성경에서는 광야에 흐르는 물과 관련하여 다양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 특별히 다가오는 단어는 나할이다. 평소에는 메말라 있기에 여기는 뭐하는 곳인가 싶은 장소가 나할이다. 물길이라고 하지만 1년 중 물이 있는 기간이 얼마 안 되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거대한 강이 되어서 광야를 적시고 풀을 자라게 하며 생명이 움트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나할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명이 없는 메마른 삶에 주님의 생수가 흐르기 시작하면 우리의 삶에 생명의 물줄기를 나르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메마른 땅이 적셔지며 풀이 자라나며 생명이 움트게 되는 것이다. 광야는 메마르고 거칠기만 하다. 그런 광야는 비가 오는 순간만을 기다린다. 물을 머금고 생명을 피어 내는 땅이 되기 위해서 광야는 끊임없이 비를 간구하면서 기다린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의 메마른 삶에 촉촉한 단비와 생수의 강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겨울에 이스라엘을 방문하길 권한다. 이스라엘의 겨울비를 맞아가면서 이 땅을 돌아보는 여정은 평생의 기억이 될 것이다. 김요셉 목사
  • 2026.01.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하누카 속애서 비춰지는 이스라엘의 크리스마스
  • 이스라엘에서 가장 느끼기 어려운 절기는 바로 기독교 최대의 명절인 크리스마스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크리스마스를 소홀하게 보내지는 않는다. 요즘처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크리스마스 인사가 “메리 크리스마스”에서 “해피 홀리데이(즐거운 명절)”로 바뀌기는 했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는 전세계인들이 기다리는 명절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스라엘만큼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안 느껴지는 곳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빛의 절기인 하누카를 기념하는 주간이 겹쳐지기도 한다. 올해는 다행이도 하누카와 크리스마스가 겹쳐지지 않지만 작년처럼 겹쳐지게 되면 크리스마스는 더욱 더 무색하게만 느껴 질만큼 하누카 절기가 더 의미 있는 곳이 이스라엘이다. 다만 매년 이맘때쯤 팔레스타인 지역이면서 대부분이 무슬림이 사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은 어느 지역보다 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풍성한 곳이기도 하다. 과거 이슬람이 강성하게 다스리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무슬림에게도 베들레헴은 거룩하게 지켜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가톨릭 교회가 가장 견고하게 서 있는 곳인 베들레헴의 중앙인 예수 탄생교회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속에서도 지난 3년간 매년 크리스마스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찾아오는 순례객들이 많지 않기에 한가한 모습이기는 했지만 베들레헴의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곳이고 베들레헴에 사는 아랍 크리스천들과 사람들은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한다. 이런 가운데 이스라엘에서도 크리스마스의 분위기가 재작년부터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쇼핑몰마다 하누카와 크리스마스를 겸해서 축하하는 장식이나 색등이 등장하기도 하고 특히 러시아인들이 몰려 사는 하이피와 브엘세바 지역에서는 쇼핑몰이나 마켓에 한껏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장식과 산타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누카는 성경에 단한번 언급된 절기이다. 요한복음에 딱 한번 수전절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한 하누카는 하누카는 기원전 2세기, 유대 땅을 지배하던 셀레우코스 왕조(특히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유대인의 신앙과 율법을 억압하고 성전을 더럽힌 사건에서 시작된다. 이에 마타티아와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이 저항(마카비 혁명)을 일으켜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았고, 기원전 164년경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다시 봉헌(재헌당)한 일을 기념하는 절기가 하누카이다. 일반적으로 성전에서 켜는 촛대는 메노라(일곱가지 촛대)이다. 하지만 하누카 절기에 만은 아홉가지를 가진 촛대를 켜게 되어 있다. 이것은 유대인 랍비 전통에서 나온 것으로 하누키아라고 불리는 촛대는 하누카 절기가 가진 특수성과 의미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하누카 절기의 천설은 다음과 같다. 성전을 수복한 후 성전의 정화하고 다시금 촛대를 켜는 과정에서 성전 촛대의 기름이 하루분량 밖에 안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음 기름이 준비될 때까지 8일이라는 시간이 걸리기에 그 촛대의 기름이 없어서는 안되는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초의 기름의 8일동안 타올랐다고 한다. 그래서 아홉 가지를 가진 촛대로 기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누키아 촛대나 전설의 이야기는 사실 하누카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다. 이날은 유대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절기를 지켜내고자 한 열정과 용기 그리고 승리에 대한 이야기이며 결국 그 빛을 지켜낸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비록 하누키아란 촛대가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서 탄생한 것이긴 하지만 이 촛대에는 재미있는 것이 있다. 8일동안 켜져야 할 8개의 가지 외에 하누키아 가운데 높이 선 촛불은 샤마쉬이다. 샤마쉬는 ‘섬기는 자, 도우미’라는 뜻을 가진 불이다. 이 촛불은 자기 빛을 과시하지 않고 다른 촛불에 불을 옮겨 주어 모두를 밝히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 빛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빚진 자로서 “전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해 판단보다 눈물로 중보하고, 논쟁보다 사랑으로 축복하는 자세를 택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안에 머문 만큼, 우리는 더 낮아져 그 빛이 다시 흘러가게 하는 샤마쉬가 되어야 한다. 현재 이스라엘은 많은 어려움에 싸여 있다. 반유대주의와 전쟁 그리고 위협 속에서 마치 어두움이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때에 진정한 빛으로 소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비쳐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으면 한다. 김요셉 목사
  • 2025.12.28 / 김용두 기자

    상실을 다루는 자세 … 이스라엘의 장례문화
  • 가자지구에서의 전쟁이 2년만에 휴전을 맞이했다. 240명의 인질들이 집혀갔었고 휴전을 통해서 대부분 돌아왔다. 40여 명이 죽은 시신으로 돌아왔고 나머지 200명이 2년에 걸쳐서 생환됐다. 그 전장에서 생존한 인질들이 가족 품으로 돌아올 때, 이스라엘 전역은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시신으로 돌아온 이들도 있었다. 누구는 안도의 눈물을 흘리고, 누구는 무거운 침묵으로 관을 맞이했다. 놀라운 것은 시신으로 돌아온 자녀를 향해 울부짖는 대신 그들의 부모와 형제들이 “당신은 마지막까지 싸운 우리의 영웅이었다”라고 고백하며 상실의 아픔을 귀환의 명예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지 감정의 통제가 아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죽음을 받아들이고 애도하는 방식, 즉 장례문화 속에는 공동체적 신념과 깊은 종교적 통찰이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의 유대교 장례는 빠르고 단순하며 정결한 절차로 진행된다. 대부분의 유대인 장례는 사망 후 24시간 이내에 이루어지며 시신은 관 없이 흰 수의로 감싼 채 땅에 직접 매장된다. 이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말씀을 따른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이스라엘 장례는 꽃 장식도, 음악도, 긴 절차도 없다. 오직 단순한 땅의 품으로의 귀환이다. 이는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수용하고 남겨진 자들이 그 사실을 피하지 않도록 돕는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장례식이 3일 이상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슬픔을 나누고 고인을 기리는 다양한 의례와 조문객 문화가 발전되어 있다. 제사 문화나 위령제, 유골함 보존 등도 가족 중심의 애도 방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와 달리 이스라엘은 공동체 중심의 집단 애도 문화가 강하다. 매장 후 7일 동안은 ‘시브아(Shivah)’라는 애도의 시간을 가진다. 가족은 집에 머물며 검은 옷을 입고 공동체가 찾아와 위로하며 함께 슬픔을 지고 간다. 죽음을 숨기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함께 감당하는 것이 특징이다. 유대교는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되 부활에 대한 확고한 교리는 비교적 약하다. 탈무드나 랍비문헌에는 최후의 날에 의인이 부활할 것이라는 개념이 있으나 현대 유대인들의 정서에는 “지금의 삶”이 훨씬 중요하게 여겨진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소망을 분명히 선포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그리스도인에게 장례는 끝이 아니다. 관 위에 얹은 십자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일어날 날을 기다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민족이다. 그들은 전사자의 이름을 외우고, 사진을 붙이고 기억하며 울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그 울음은 주저앉는 절망이 아니라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 애도이다. 기독교인인 우리는 이러한 문화 속에서 죽음을 부정하거나 과도하게 미화하지 않되 부활의 소망으로 상실을 해석할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별을 맞이한다. 누군가는 먼저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새 시작이다. 이스라엘의 장례문화는 그것을 말없이 알려준다.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는 한 사람의 마지막. 그러나 그 안에는 공동체가 함께 애도하고 함께 기억하며 삶을 이어가는 힘이 담겨 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상실 속에서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그 믿음이 오늘 우리의 아픔 속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김요셉 목사
  • 2025.10.24 / 김용두 기자

    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II. 죄론(Hamartiology) - 4
  •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위한 기준 제시
    죄와 율법 죄론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죄와 율법의 관계이다. 죄와 율법의 관계에 분명한 명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죄의 선재성(pre-existence)이다. 죄가 율법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율법은 광야시대에 성문화 되었다. 성문화 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예를 들면 십계명이 생기고 나서 사람들이 열 가지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유대 공동체 내에 우상숭배, 살인, 간음, 절도, 위증 등과 같은 죄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것에 대한 죄 의식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죄들과 그 죄에 대한 형벌이 모세의 율법을 통해 문자화 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십계명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출애굽기 20장 22절~23장 33절로 대표 되는 계약법전이 있고, 레위기 17~26장의 성결법전이 있다. 이것을 종합하고 보완한 신명기법전(신 12~26장)이 있다. 이 외에 율법의 행동지침과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장로의 유전과 규례가 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셨던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과 규례이다. 1. 율법의 본질 바울은 율법의 한계와 은혜의 법 사이의 긴장관계를 그의 서신 거의 모든 곳에서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바울은 회심 이전 그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서 목숨을 다해 신봉해 왔던 율법에 대한 무한 신뢰를 파기하고 율법을 ‘초등학문’(골 2:20)과 ‘초등교사’(갈 3:24)로 평가절하시킨다. 바울은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convenantal nomism)를 포기하고 은혜의 법에 기초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과 윤리, 도덕적 가치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인들이 버려도 되는 것 혹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본질 때문이다. 율법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된 것이다. 율법의 제사법은 인간의 범죄와 정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죄를 가지고 그 앞에 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성결법전의 내용과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율법의 옹호자는 아니다. 그러나 파괴주의자도 아니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a)라는 말로 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항변하고 있다.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죄성(sinful nature)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율법의 한계성 바울의 율법에 대한 의도는 율법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 그 자체만으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거나 의롭게 할 수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당위성(롬 1:17)과 율법의 한계성을 역설하고 있다. 율법은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는 기능은 있으나 죄를 사하는 권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율법)을 대조시키고 있다(롬 8:2). 히브리서 또한 율법의 불완전성과 대제사장의 유한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3. 율법의 목적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분별한 반율법주의(antinomism)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반율법주의를 넘어 극단적 율법파괴주의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목적과 효용가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인간들이 그것을 다 준수할 것이라고 기대하셨을까? 물론 아니다.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율법이 없다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2) 율법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한 목적이 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도덕적 잣대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유용한 가치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8.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I. 죄론(Hamartiology) - 3 
  • 성경은 죄와 인간의 필연적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아무도 죄를 피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더 나아가 죄의 삯(wage, 급여, 보수)은 사망이라고 단언하고 있다(롬 6:23). 인간의 수고와 이마의 땀으로 얻게 되는 급여는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선고이다. 한글성경에서는 복수와 단수를 구별하지 않고 ‘삯’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본에서는 복수형을 써서 ‘옵소니아’, 즉 ‘급여들’, ‘보수들’이라고 복수형을 쓰고 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죄의 종류와 가지 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부과될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4) 죄에 대한 형벌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죄에 대한 형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이해했다. 그는 인간의 창조를 세 단계로 이해했다. 첫째, 인간은 땅의 먼지(KJV, dust)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 먼지로 지음을 받은 육체에 네페쉬(혼, 생명)를 가지게 되었으며, 셋째,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이 분리되는 죽음 맞게 되었다. 이것은 곧 영적인 죽음,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을 낳게 된다. (1) 영적인 죽음 죄는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킨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죄를 허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성으로 인해 죄를 품은 인간은 그의 임재 가운데 공존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이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영혼은 생명력을 상실했으며 더 이상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적인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상태가 되었다(창 6:5). 이것이 죄의 형벌로서의 영적인 죽음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죄를 깨끗하게 할 수는 없다(롬 3:20; 7:7). 이런 영적인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2) 삶의 고통 타락 이후 고통은 인간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인간의 삶은 쉽게 무너지고 각종 질병의 포로가 되었으며 불안과 고통을 늘 겪게 되었다. 풍족했던 에덴동산의 삶은 사라졌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더해 졌으며 인간은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창 3:16, 19). 창조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복은(창 1:28) 인간의 타락 이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뜻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인간의 삶 곳곳에 돋아나는 것이었다(창 3:18). (3) 육체적인 죽음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최초 인간 아담이 죽음을 전제로 한 유한한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죽음을 전제로 창조하셨다는 근거는 창조역사 속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주후 418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첫 사람 아담이 죽을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므로, 아담이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상관없이 아담이 죽은 것은 죄의 삯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육체적인 죽음, 즉 흙으로 창조된 인간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벌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언급되었다(창 3:19). 육체적인 죽음은 영적인 죽음과 함께 불순종한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인 것이다. 이 육체적인 죽음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4) 영원한 죽음 유물론자들은 죽음을 존재의 소멸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유물론적 사관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죽음은 삶의 종결, 혹은 죽음의 완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한 죽음은 벗어 날 수 없는 고통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말한다.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 지옥편에 보면 지옥문에 쓰여 있는 글귀가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마치 이 표현처럼, 영원한 죽음은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즉 죽음의 소망조차 품을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1:26). 이 말씀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통로이며 육체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것에 대한 약속이다. 죄는 형벌을 동반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형벌은 영생의 기쁨과 환희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7.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VII. 죄론(Hamartiology) - 2
  • 현대의 논쟁
    타락한 이후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동양에서는 순자(荀子)가 주장한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는 성악설(性惡說)과 맹자(孟子)가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性善說)이 팽배하게 대립하고 있다. 성경은 이 두 학설 중 성선설에 가깝다. 전도서 7장 29절은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힛솨본’인데 영어 성경(NKJV)은 ‘계략, 음모’(scheme)로 번역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이후 수많은 악한 꾀를 내는 존재가 됐다는 의미이다. 죄론에 대한 현대적 논쟁은 죄의 본질과 인식, 죄의 본편성과 전가성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원죄론에 대한 논쟁과 죄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죄의 본질 죄는 단지 인간이 행하는 그 무엇일 뿐만 아니라 죄가 인간 안에서 행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죄는 단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너머로 오기도 한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아담과 하와의 근원적 죄는 인간 내면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탄이라는 외부적 유혹에서부터 시작됐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함으로서 죄에 빠졌다. 죄에 대한 웨스트민스터의 대요리문답은 ‘죄란 하나님께서 이성적인 피조물에게 삶의 기준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치의 결여 또는 위반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2) 죄의 인식 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실존적 일치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떨어진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목표점으로 지향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 살며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자신도 철저하게 부패한 인간이 죄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죄를 인식 할 수 있을까? 선은 악이 있을 때 선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악은 선이 있을 때 악을 인식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칼 바르트(Karl Barth)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인이 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죄를 인간을 감금하는 ‘감옥’으로 생각했다. 이 감옥은 안에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밖에서만 열 수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만 그 열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없다면 죄를 인식할 수도 없고 죄에서 나올 수도 없다는 말이다. 3) 죄성(the nature of sin)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죄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내면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기회가 주어지면 죄를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죄의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것은 환경과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신약성경은 죄(Sin)와 죄들(sins)을 구별 짓고 있는데, 보통 전자는 죄의 본성을 말하고 후자는 죄성의 결과 및 표현들을 의미한다. 죄의 속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나 죄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죄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기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1) 죄의 보편성 성경은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선언한다(왕상 8:46; 시 143:2; 잠 20:9; 전 7:20; 롬 3:10~12; 롬 3:23; 요일 1:8).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욕구라고 할 수도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예외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피조 세계의 보편적이고 전 우주적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롬 5:19). (2) 죄의 전가성(the imputation of sin) 구약시대의 제사를 보면 죄인은 제사장에게 번제물을 가져가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번제물에게 전가하기 위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했다(레 1:4). 이 행위를 통해 죄인의 죄가 희생 제물에게 전가 되었다. 번제물은 죄인의 죄를 위해 희생되었고 죄인은 죄로부터 놓임을 받았다. 죄는 이런 전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죄의 전가성은 제물에게로 국한된다는 점이다. 나이든 부모가 자식의 죄를 대신해서 처벌을 받겠다고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듯이 성경에서 죄는 사람을 포함한 어떤 것에도 전가되지 않으며 오직 제물에게만 전가된다. 죄의 전가에 대한 제한적 적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게 볼 수 있는데 구약에서는 오직 희생제물에게만 적용되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5.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생명과학 이야기
    커피와 카페 이야기
  • 커피나무는 3~4년생부터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다. 재스민 향기의 작은 흰색 꽃이 핀다. 작은 대추처럼 초록색 열매(사진)가 맺히고 약 6~9개월이 지나면 익은 커피체리는 루비처럼 붉게 빛난다(사진). 열매에서 과육을 벗겨내면 연둣빛이 나는 흰색의 납작한 생두(Green bean)가 나온다(사진). 말린 원두는 뜨거운 열을 가해서 볶는 로스팅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때 생두는 갈색으로 변하면서 표면이 미세하게 터지거나 갈라지면서 고유의 향기와 오일이 배어난다. 로스팅 시간에 따라서 신맛과 단맛, 쓴맛으로 완성된다. 고운 분말로 갈아 커피 물을 내릴 때 커피의 고유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한 잔의 커피에는 산지에서 농부의 땀방울과 자연을 담은 커피 열매가 지낸 시간이 배어 있다. 그리고 바리스타의 정성이 모두 담겨 있다. 한편, 커피와 함께하는 카페 문화는 취향에 따라 바쁜 현대인의 몸과 마음을 위한 쉼과 회복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는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이 일반 아메리카 기준으로 약 405잔을 마시고 즐기는 나라이다. 소비량이 세계 평균의 두 배를 웃도는 수치로 커피는 단순한 기호식품을 넘어 한국인의 일상과 문화를 이루는 주요한 음료가 됐다. 한국인이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긴 노동 시간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카페인이 각성을 돕기 때문일 수 있다. 겨울철에도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신조어가 있을 정도로 얼음이 들어간 커피가 인기가 있는 것은 청량감을 즐기는 것도 있으나 과도하게 열 받은 가슴을 냉각시키고 싶은 마음도 있지 않을까. 요즘은 가성비를 생각하는 저가 커피 브랜드가 일상을 차지하기도 하지만 선호도에 따라서 고품질의 산지별 원두를 찾는 애호가도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커피 메뉴가 있다. 개인의 기호에 따라서 우유를 넣은 카페라떼, 우유 거품과 함께 계피(시나몬)를 넣은 카푸치노, 초콜릿 맛의 카페모카 등이 있다. 최근 커피를 마시는 카페는 주거 공간이나 가정을 개방하고 싶지 않은 현대인에게 제3의 소통을 하는 편한 공간이다. 카페에서 팝업 전시 등 지역 공동체와 소통하는 곳이다. 독서, 업무, 사교, 모임 등이 있는 거실이자 서재 역할을 한다. 현대 그리스도인에게도 커피와 카페는 성도 간에 소통과 교제는 물론이고 신앙 상담과 말씀 묵상의 공간이 되고 있다. 식사 후, 혹은 모임에서 안부를 묻고 사랑 안에서 덕담을 나누는 매개체이다.(행 2:46)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6.01.22 / 이미나 기자

    나무에 붙은 귀, 목이버섯
  • 나무에 달린 사람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목이(木耳)'라 불리는 버섯이 있다. 갓이 얇고 굴곡진 형태이며, 어릴 때는 컵 모양이다가 자라면서 넓은 귀 모양으로 주름이 생긴다. 죽은 나무에 붙어 자라는 목이버섯과 대조적으로, 바위 위나 절벽에 붙어 사는 귀 모양의 석이(石耳)버섯이 있다. 겉모양은 비슷해 보이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종류이다. 목이버섯은 담자균류에 속하는 버섯으로, 엽록체가 없는 일종의 진균류(곰팡이)이다. 광합성을 하지 못하고 죽은 나무에서 영양분을 얻어 자란다. 한편, 석이버섯은 이름에 '버섯'이 붙었지만 실제로는 버섯이 아니라 균류와 조류(藻類)가 공생하는 지의류(地衣類)의 일종이다. 목이버섯은 진균(버섯)이고 석이버섯은 광합성을 하며 두 종류의 생물이 함께 사는 공생체라는 점에서 전혀 다르다. 특히 지의류인 석이버섯은 성장 속도가 매우 느려 1년에 겨우 몇 밀리미터(mm) 정도만 자란다. 하지만 수명은 매우 길어 척박한 바위 표면에서 수십 년에서 수백 년 동안 생존한다. 대부분의 버섯은 고온 다습한 환경에서 잘 자란다. 목이버섯은 보통 여름철 비가 온 뒤 야생의 나무에서 발견되지만, 겨울에도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자라기도 한다. 젖어 있을 때는 젤리처럼 말랑하지만, 건조되면 종이처럼 얇아지고 가죽처럼 단단해진다. 일반적인 버섯은 보통 5~7일 정도면 갓이 피고 곧 시들거나 썩지만, 목이버섯은 수개월 동안 생존하며 비에 젖고 햇볕에 마르는 과정을 반복하는 강한 회복탄력성을 지니고 있다. 목이버섯은 식용버섯 중 식이섬유 함량이 가장 높아 변비 예방과 저속노화를 위한 탁월한 식품이다. 영양학적으로도 칼슘 흡수에 필요한 비타민 D와 칼슘이 풍부해 골다공증 예방과 뼈 건강에 좋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장 건강과 뼈 건강을 위해 목이버섯 섭취를 추천한다. 또한 혈관 내 혈전 생성을 억제하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는 데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화요리인 잡채, 탕수육, 짬뽕 등에 들어간 목이버섯은 특유의 쫄깃하고 꼬들꼬들한 식감이 매력적이다. 조리할 때는 찬물이나 미지근한 물에 충분히 불린 뒤 씻어서, 나무에 붙어 있던 단단한 밑동(꼭지) 부위를 잘라내야 한다. 건조된 목이버섯과 석이버섯은 다른 건조 버섯보다 부피가 훨씬 크게 부풀어 오른다. 물에 불리면 부피가 7~10배까지 증가하므로 조리 시 양 조절에 유의해야 한다. 끓는 물에 1분 정도 살짝 데쳐서 조리하면 식감이 더욱 좋아지고 위생적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도 늘 좋을 수만은 없다. 평탄할 때는 성장하고 시련 앞에 위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과 위축의 반복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비로소 깊어지고 성숙해진다. 이 과정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영성을 회복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의 탄력성을 갖게 된다(전7:14).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6.01.22 / 이미나 기자

    살아있는 생명 ‘동충하초’
  • 곤충만 표적으로 침입해서 성장과 증식하는 육식성 곰팡이가 있다. 특이한 진균(眞菌)으로 살아있는 곤충만을 대상으로 숙주 삼아서 살아가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 동충하초(冬蟲夏草)이다. 동충하초는 “겨울에는 벌레인데 여름에는 풀이다”라는 뜻이다. 살아 있는 애벌레에 감염되어 성장하면서 계절이 바뀌면 숙주의 몸 밖으로 자실체를 내밀고 있는 모습이 풀처럼 보인다는 표현을 한 사자성어이다. 동충하초는 알에서 부화한 곤충의 애벌레나 번데기를 숙주로 기생하는 곰팡이로 모습이 버섯에 가깝다. 처음에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곰팡이가 살아 있는 곤충 몸에 침입해서 숙주 삼아서 증식한다. 그 후에는 눈으로 보이는 크기로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로부터 중국 전통의학에서 동충하초는 산삼, 녹용과 함께 3대 명약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차마고도(茶馬古道)지역 중에 히말라야와 티베트에서 해발 약 4000~4500m 고원지대의 주민들은 동충하초를 채취한다. 그 지역 주민은 ‘야차굼바’라고 부르는데 고산 지형의 위험한 경로와 척박한 땅에서 채집하기 때문에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주요 약리적 성분으로 코디세핀과 아데노신, 베타글루칸, 에르고스테롤 등이 함유되어 있어 면역력 증진과 노화 방지, 혈관 확장 등 다양한 효능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세계적으로 알려진 동충하초의 종류는 약 750종이 존재한다. 국내에서도 70여 종이 보고되어 있다. 그중에 눈꽃동충하초(Paecilomyces tenuipes)는 1990년부터 누에를 대상으로 인위적으로 감염시켜 사업화에 성공했다. 그 외에도 밀리타리동충하초(Cordyceps militaris)를 이용해서 일부 곤충이나 번데기를 이용해서 인공배양을 하고 있다. 한편, 동충하초 종류 중에는 식용이나 약재 외에 해충을 없애는 자연 살충제가 있다. 일단 감염된 곤충은 행동이 느려지고 높은 곳으로 이동하여 단단하게 고정되며 죽는다. 이러한 현상은 곰팡이 포자가 널리 전파해서 다른 숙주에게 기회감염이 될 확률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므로 감염된 곤충의 몸 밖으로 나온 자실체는 널리 전파되어 대량 살충효과를 볼 수 있다. 저자가 경기도 포천시 주목나무에서 발견한 백강균(白殭菌, Beauveria bassiana)에 감염된 사마귀를 발견했다.(사진) 백강균은 동충하초처럼 살아 있는 곤충만을 숙주로 삼아 증식하는 육식성 곰팡이이다. 백강균의 뜻은 ‘몸을 굳게 만드는 흰색 곰팡이’로 곤충의 얇은 막을 뚫고 들어가 흰색 균사체를 형성하는 모습이 특징이다.(사진) 이러한 특성을 이용해서 해충의 천연방제제로 이용할 수 있다. 농약을 취급하는 곳에서는 백강균을 대량으로 배양해서 시판하고 있다. 백강균은 곤충 외에 인체나 동물에는 해롭지 않은 장점이 있고 화학제품의 농약처럼 약제내성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살아가며 발병할 수 있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치유할 수 있는 다양한 천연 강장제(强壯劑)를 준비하셨다. 그리고 해충을 퇴치할 수 있는 다양한 천적도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연구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도 주셨다.(벧후 1:3)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교회, 이학박사)
  • 2025.11.27 / 이미나 기자

    성경 Think! 인생 Thank!
    서울·자가·대기업보다, 베들레헴
  • 모두가 오르려 할 때 예수님의 내려오심 성공의 자리보다 사랑의 자리로 옆자리 직원이 “수지자가대기업배부장입니다”라고 말하기에 ‘그게 뭔 소리야?’ 하고 웃었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제목이 〈서울자가대기업김부장〉이라 했다. 제목만 봐도 이 시대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서울’은 기회의 상징, ‘자가’는 안정의 상징, ‘대기업’은 부와 권력의 상징, 그리고 ‘김부장’이라는 이름은 사회적 성공과 인정의 표식처럼 들린다. 많은 이들이 믿는다. “올라가야 성공이고, 오르지 못하면 실패다.” 하지만 12월, 우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는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가장 낮은 자리인 베들레헴 마굿간에 오셨고 사람의 옷을 입고 세상 한가운데로 ‘내려오셨다.’ 김부장의 자리, 예수님의 자리 세상은 말한다. “높이 올라야 산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낮아져야 크다.” 예수님의 첫 요람은 금빛 요람이 아니라 초라한 여물통이었다. 그분은 왕궁이 아닌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그분의 첫 손님은 권력자가 아니라 평범한 목자들이었다. 드라마 속 ‘김부장’이 지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것처럼 우리도 종종 신앙마저 성과와 위치로 평가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타이틀을 보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서 있는가를 보신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머리로 아는 복음, 삶으로 잃은 복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것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권력의 반전이었다. 왕이신 분이 제자의 발을 씻기신 것이다. 그분은 실제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무릎을 꿇으셨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머리의 지식으로만 남아 있을 때가 많다. 예배에서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래도 나는 올라야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내려오셨고, 우리는 여전히 오르려 한다. 그래서 복음은 머리로는 아는데 삶에서는 사라진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낮아짐 속의 진짜 능력 예수님은 세상의 방식으로 성공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고 제자에게 배신당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홀로 남으셨다. 그러나 바로 그 낮아짐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었다. 예수님은 권력으로 세상을 바꾸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랑으로 세상을 품으셨다. 그분의 낮아짐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고, 그분의 침묵은 포기가 아니라 용서였다. 우리는 종종 “강해야 산다”고 믿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크리스마스, 내려놓음의 계절 크리스마스는 축하의 날이 아니라 내려놓음의 계절이다. 내가 쥐고 있던 자랑과 불안, 비교와 욕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다시 서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부요함을 버리고 가난한 자로 오셨으며 강함을 버리고 약함으로 오셨다. 그분의 내려옴이 있었기에 우리의 구원이 가능했다. 이제 우리의 신앙도 그분을 따라 내려와야 한다. 사람 위에 서는 자리보다 사람 곁에 서는 자리로, 칭찬받는 자리보다 섬기는 자리로, 그곳에서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 누군가에게 먼저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일 - 외롭고 힘든 이웃에게 작은 선물을 나누는 일 - 가족에게 “고마워”라는 말을 먼저 하는 일 - 내 주장 대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 - 혹은 오랫동안 미루었던 용서의 한마디를 건네는 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베들레헴의 예수님을 닮아 이 땅에서 실천할 수 있는 ‘내려옴의 복음’이다. Think! 나는 예수님처럼 내려올 용기가 있는가? 복음이 내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이 되고 있는가? Thank! 주님, 높아지려는 마음을 비우고 베들레헴의 예수님처럼 낮아진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12.1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
  • 경직된 신앙에서 벗어나, 일상 속 놀이를 회복하는 길 자연·문화·공동체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웃으며 살기 11월이면 사람들은 단풍을 따라 나서고 모임 약속이 많아진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논다’는 말은 왠지 죄스러운 단어처럼 들릴 때가 있다. 예배와 교회 모임 외에는 다른 여유를 누리기 어렵고 신앙이란 ‘참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시지 않았다. 신앙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웃는 자유의 길이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유희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라고 불렀다. 그는 놀이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어 내는 창조적 힘이라 했다. 놀이는 마음을 가볍게 만들고, 사람을 자유롭게 하며 관계를 풍성하게 한다. 성경 역시 유희를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때 “온 힘을 다해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다”(삼하 6:14). 잠언은 말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잠 17:22) 하나님이 주신 놀이와 기쁨은 신앙의 부차적 요소가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또 하나의 길이다. 웃음과 노래, 축제와 놀이 속에도 하나님은 함께하신다. 2. 거룩하게 노는 법 기독교인이 ‘놀이하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세속적 쾌락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풍성히 누리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자연을 거닐며 창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문화와 예술을 하나님의 선물로 향유하며 공동체 안에서 웃음과 즐거움을 나누는 삶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다”(행 2:46). 놀이와 즐거움은 교회를 세우는 힘이 된다. 먹고 마시고 웃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기억할 때, 그 모든 것이 예배가 된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 말씀은 우리의 놀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거룩하게 논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웃는다는 뜻이다. 3. 레고 블록처럼 살아가는 신앙 아이들이 레고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떠올려보자. 작은 블록을 맞추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너뜨리고 웃으며 다시 시작한다. 그들은 실패와 성공의 과정 자체를 즐긴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며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라” 하셨다. 여기서 ‘경작하다(아바드)’는 단순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돌보고 창조적으로 가꾸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색깔의 블록 같은 삶의 재료들을 주셨다. 믿음의 사람은 그것을 움켜쥐고 두려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적으로 조립하며 즐겁게 세상을 빚어가는 존재이다. 삶은 만들어 가는 예술이며 동시에 놀이이다. 4. 천국을 앞당겨 맛보는 놀이 놀이의 본질은 자유와 기쁨이다. 억지로 하는 노동이 아니라 몰입과 웃음이 있는 활동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아이의 웃음과 놀이는 천국의 작은 그림자이다. 신앙은 무겁게 짊어지는 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을 즐겁게 향유하고 서로 웃음을 나누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미리 경험하는 삶이다. 경직된 신앙의 옷을 벗고 하나님이 주신 자유와 유희를 누리자. 그곳에서 우리는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신앙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놀이와 기쁨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신앙은 무거운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누리는 축제다. 우리가 웃고 노는 그 순간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다. Think! 나는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어떻게 누리고 있는가? Thank! 하나님, 놀이와 웃음을 통해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11.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인생 사계절, 감사 모먼트
  • 변화하는 삶 속, 변치 않는 은혜 작은 계절에도 숨은 하나님의 선물 10월은 굳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해놓은 것이 없어 후회가 밀려오기도 하고 두 달 남은 연말이 무겁게 다가오기도 한다. 누군가에게는 쓸쓸한 달, 또 다른 이에게는 풍요로운 달로 다가오는 10월은 삶의 다양한 색채를 보여준다. 심리학자 다니엘 레빈슨(Daniel Levinson)은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했다. 봄은 시작, 여름은 성장, 가을은 결실, 겨울은 마무리와 소망의 시간이다. 성경 역시 인생을 계절에 따라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한다(시 1:3). 계절이 변하듯 우리의 삶과 신앙도 주기를 따라 흐른다. 봄, 은혜의 시작을 기억하다 봄은 새싹이 돋아나듯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계절이다. 복음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침례의 감격, 교회 공동체에 뿌리내렸던 순간들이 모두 봄의 선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열정은 희미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기억을 붙들면 신앙은 다시 회복된다. 새벽예배를 향하던 발걸음, 말씀 앞에서 흘린 눈물, 하나님의 부르심을 처음 들었던 순간은 모두 신앙의 봄을 증언한다. 봄의 감사는 미완의 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실 것을 신뢰하는 데서 시작된다. 작은 걸음이 큰 길을 열어간다는 믿음이 바로 봄의 은혜다. 여름, 열정으로 땀 흘린 계절 여름은 성장과 도전의 시간이다. 신앙인의 여름은 봉사와 섬김의 자리이며 땀 흘리며 감당한 사역의 순간들이다. 여름성경학교, 단기선교, 수련회, 직장과 가정에서의 묵묵한 책임 모두가 여름의 열정이다. 때로는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고전 15:58). 작은 섬김이라도 주님께 올려드릴 때 그것은 영원한 열매가 된다. 여름의 감사는 땀방울마다 스며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데 있다. 가을, 결실을 돌아보며 성찰하다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계절이다. 직장에서 쌓인 경험, 가정에서 지켜낸 사랑, 공동체 안에서 맺힌 신뢰 모두가 하나님의 결실이다. 그러나 신앙의 가을은 결실만이 아니라 성찰의 계절이다. 이루지 못한 것을 돌아보며 겸손히 자신을 점검한다. 풍성한 열매에서 오는 기쁨도 크지만 부족함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데서 더 깊은 감사가 솟는다. 추수는 또한 사명의 시간이다. 아직 남은 추수의 현장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일꾼으로 자신을 내어드릴 때 가을의 감사는 한층 풍성해진다. 겨울, 기다림 속의 소망 겨울은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이지만 사실은 봄을 준비하는 계절이다. 신앙의 겨울은 건강의 한계, 관계의 단절,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찾아오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다. 눈 속에 묻힌 씨앗이 봄을 기다리듯 하나님은 겨울 속에서 새로운 일을 예비하신다. 고요한 시간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기회가 된다. 기도와 말씀 속에서 훈련된 기다림은 소망으로 이어진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2)라는 말씀처럼 겨울의 감사는 인내와 소망에서 빛난다. 인생의 어느 계절에 있든, 신앙인은 감사할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봄의 시작, 여름의 열정, 가을의 결실, 겨울의 기다림, 모든 순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의 시간이다. 우리의 계절은 제각각이지만, 그 모든 계절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Think! 지금 내 인생의 계절은 어디일까? Thank! 그 계절 속에서도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김선희 교수(교육학 박사)
  • 2025.10.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고전(古典)에서 길을 찾다
    『루터: 로마서 강의』
  • 루터의 뜨거운 심장이 담긴 고전 ‘오직 믿음’이라는 나침반를 장착한 책 이 책에 대한 리뷰는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됐다. 600페이지가 넘는 결코 만만치 않은 두께에 그 중 90페이지가 서문(Editor’s Preface)이라는 점, 400년 동안 읽혀지지 않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그 진가를 들어낸 고전이라는 점이 궁금증을 배가시켰다. 고전의 중요성은 거듭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12세기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드 샤르트르(Bernard de Chartres)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그들의 위대한 선조들보다 더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는 말로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르틴 루터의 <루터: 로마서 강의>는 이신칭의의 개념이 로마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종교개혁자들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칼 홀(Karl Holl)은 “오늘날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이며 천재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명확하고 인상 깊은 책이다. 루터는 이 책을 만든 2년 뒤,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 논제’를 게시했고 이로부터 종교 개혁이 시작됐다. 루터는 이 책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제공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라는 핵심 구절이다. ‘하나님의 의’는 루터가 성경을 해석하는 주요 주제가 된다. 하나님 앞에 인간은 죄인이고 죄인일 뿐이다. <루터: 로마서 강의>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의롭게 하며,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라고 재차 강조한다. 루터는 강의를 통해 자신이 교회의 개혁자가 된 사상가임을 보여 준다. <역사는 어떻게 진보하고 왜 퇴보하는가>라는 책에서 저자 파리드 자카리아(Fareed Zakaria)는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의 말을 빌어 21세기는 ‘전통적인 좌우 경계’가 사라지고 ‘개방 vs 폐쇄’라는 커다란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루터는 가톨릭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개방으로 나아간 종교개혁의 아이콘이다. 이 책은 그런 루터의 뜨거운 심장이 담겨있다. 가장 강력한 추천 사유이다. 요한웨슬리도 이 책을 읽고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했다. 전어가 돌아오기도 전에 추워져 혼란스러운 요즘, 신앙적인 호기심 앞에 <루터: 로마서 강의>는 정확한 나침반과 같다. 임훈 목사 (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 2025.11.06 / 이미나 기자

    『마틴 루터의 기도』 마틴 루터
  •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으로 기도하기 복음주의 묵상에 대한 순수한 설명 1533년 마틴 루터가 쓴 원제 『A Simple Way to Pray』를 적확하게 번역한 책이 국내에 많지 않다. 여러 번역본이 있으나 각각 편집의 방향을 달리한다. 그 가운데 서울신학대학교 유재덕 교수의 ‘마틴 루터의 기도’라는 책을 기본으로 삼아 소개한다. 친구였던 이발사 피터를 위해 쓰인 마틴 루터의 ‘A Simple Way to Pray’는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시작점으로 삼아 기도에 대한 유용한 조언을 제공한다. 이 소책자는 기도에 집중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자주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격려해 주는 가이드 역할을 한다. 루터는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며 책을 시작한다. “나는 다른 일과 생각 때문에(육신과 사탄은 기도를 항상 막고 방해하므로) 기도하는데 냉담해지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기분이 들 때마다 성경 시편을 들고 급히 내 방으로 들어간다. 낮에 시간이 난다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교회로 가서 십계명과 사도신경을 외우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어린아이들이 그리하듯이 맘속으로 시편의 말씀을 조용히 외운다.” 루터는 시편의 성구들 그리고 사도신경 암송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면 그때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또한 주기도문을 한 문장씩 생각하면서 각각의 문장에서 시작하여 확장하며 기도문을 노트에 쓰라고 조언한다. ‘확장’이 핵심이다. 기도 끝은 항상 감사 기도로 마무리 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개념도 나온다. ‘기도를 소홀히 하고 행함을 기도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유혹’에 대한 부분이다. 각종 일을 기도라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기도 자체에 무관심해지고, 게을러지고, 냉담해지고, 싫증이 날 수 있다. 그 이유로 루터는 사탄은 게으르지 않으며 무관심하지 않아서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기도의 시간을 따로 마련하지 못하도록 바쁘게 하고 ‘행함 가운데 기도하기’로 만족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의 ‘일하는 영성’과 대척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 앞서 기도가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기도보다 앞서지 말고,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라는 교훈이다. 사탄은 이 약점을 공격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력한 독일 개신교 지도자인 루터는 이 책을 통해 ‘복음주의 묵상에 대한 순수한 설명’을 하고자 했다. 십계명, 사도신경 그리고 주기도문에 기초하여 교훈과 묵상, 신학 그리고 기도의 통합을 도모한 역작이다. 올 가을 꼭 읽어보자. 한글판보다는 영문판을 추천한다. 두껍지 않고 쉽고 명료한 단어들로 되어있어서 이해하기 더 용이하다.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5.10.09 / 이미나 기자

    『순종의 학교』앤드류 머레이
  • 순종의 시작은 새벽기도 책 『순종의 학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앤드류 머레이는 노벨평화상을 받은 존 모트(John R. Mott)의 말을 빌려 재차 강조한다. “새벽 기도 시간을 지키는 것은 적어도 매일의 첫 30분을 홀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하버드대 교수인 센딜 멀레이너선은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책에서 우리는 모두 결핍 상태에 있으며 그 결핍을 통해 더 나은 성공적인 일들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새벽기도가 제일 힘들다고 고백하는 성도는 분명 그 영적인 결핍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성령께 계속해서 순종하며 살 수 있는 길은 매일 하루가 시작되는 때 분명하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순종의 생활에 필요한 은혜를 받는 것밖에 없다. 그 길에 대한 강한 확신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게 새벽기도이다. 쉽진 않지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위해 살고 하루 종일 하나님의 임재를 얻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기꺼이 치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한다. 시간과 편안함을 희생하겠다는 결심이다. 최근 몇 년간 화제가 되었던 『저속 노화』의 저자 정희원 교수의 “편안함은 저속 노화가 아니라 가속 노화를 부른다”라는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사실 이 책의 초점이 새벽기도 권면에 있지는 않다. 성경이 교과서이므로 『순종의 학교』에서는 성경대로의 행동을 강조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해 기록된 것을 성경에서 찾고 또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순전한 소원을 가지고 성경을 대해야 함을 일깨운다. 저자는 순종을 ‘천상적인 기술이고, 우리 본성에는 낯설기 짝이 없는 기술’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순종을 배워 가신 길은 아주 더디고 멀어서 우리가 그 기술을 즉시 습득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주님의 발 앞에서 묵상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일에, 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희생하는 일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그 부분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순종의 학교』라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순종은 배워야 하는 덕목이다. 배워야 함은 또한 가르치는 스승이 존재하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던 그 순종을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한다. 먼저 스스로가 자아에 대한 철저한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 부정과 겸손을 깨닫는 것이 그리스도처럼 죽기까지 순종하는 방법임을 이 책은 담담하게 제시한다. 임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군산교회 담임)
  • 2025.09.12 / 이미나 기자

    고민 Tick, 상담 Talk
    따뜻한 눈빛과 말 한마디의 중요성
  •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이자 향기 마음 밭 기경하며 주님의 재림 기다려 ▶ 고민 Tick 아동 청소년기에 교회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자녀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지 고민입니다. ▶ 상담 Talk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에 재학 중인 이 전도사님의 이야기는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교회공동체에서의 인격적 돌봄이 얼마나 인생 전반에 걸쳐 좋은 토양으로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 증명해 준다. 이 전도사님은 해외 지사에서 20년 넘게 성공적으로 근무하며 4명의 딸, 아내와 함께 현지 한인교회 교육부에서 기쁨으로 최선을 다해 봉사하였다. 이 전도사님은 직장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은퇴 후에는 신학교에 입학하여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바치고 싶다는 소원을 늘 마음속에 품고 있다가 올 봄 웨신대 목회학과에 입학하여 꿈을 이룬 것이다. 이 전도사님은 사실 불신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전도사님의 부모님께서 본인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서도 어린 그를 집 앞 교회에 보내주셨다. 이 전도사님은 그 당시 국민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자주 혼내시고 꾸지람하시던 모습과는 달리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늘 웃는 눈과 밝은 미소로 자신을 바라봐 주시고 칭찬과 격려의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명확히 기억하였다. 특히 5~6학년 때 교회학교 선생님은 항상 진심으로 이 전도사님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따뜻한 눈빛과 인격적 언어로 대해주셨다. 그 덕분에 이 전도사님은 학업에서나 사회에서 성공하여 본인 결혼식에도 교회 선생님을 초대했다고 한다. 해외 지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던 어느 해에 이 전도사님은 그 교회 선생님을 꼭 다시 뵙고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모 교회에 연락해 보니, 70대의 권사님이 되신 선생님께서 아직 살아계심을 확인하고 아내와 함께 인사를 갔다. 교회 선생님은 오히려 이 전도사님에게 신앙 안에서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고 하시며 안아주셨다고 한다. 이 전도사님은 교회 선생님께서 본인의 아동 청소년 시절에 대해주셨던 것처럼 자신의 딸들과 봉사 대상 아동 청소년들에게도 인격적으로 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고 한다. 현재 이 전도사님의 어머니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계시며 돌아가신 아버님도 하나님을 구주로 고백하시고 소천하셨다고 하였다. 기독교 상담학 수업 시간에 늘 강조하였던 교회 공동체만이 이 땅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제대로 된 사랑과 인격적 공동체라는 증거가 이 전도사님의 삶 속에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사실에 필자는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경험했다. 모든 학생들에게 필자가 변함없이 강조하는 한 가지 입장은 다음과 같다. 상담심리를 공부하는 목표는 길 가 밭, 돌 밭, 가시떨기 같은 ‘나쁜 마음 밭’이 복음의 씨앗이 잘 뿌리내리는 ‘좋은 마음 밭’이 될 수 있도록 ‘기경(起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마 13:3~8).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존재 이유는 복음의 씨앗이 삼십, 육십, 백배의 결실을 맺도록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씨앗을 뿌려도 새들이 먹어버리고, 타버리고, 기운이 막혀 자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상담 현장에서 만나는 잃어버린 양들은 복음 씨앗이 마음 밭에 뿌려졌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밭으로 기경 되지 못한 채 길 가, 돌 밭, 가시떨기 속에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나쁜 밭에 뿌려진 복음 씨앗들도 교회공동체의 따뜻한 눈빛과 공감적 대화 속에서 제대로 양육된다면 잘 자랄 수 있다. 해석학적 목회상담의 권위자인 안톤 보이슨(Anton Boisen)은 인간을 ‘살아 있는 인간문서들(living human documents)’이라고 했다. 찰스 거킨(Charls Y. Gerkin)은 보이슨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목회상담자로서 개인 삶의 이야기로 구성되는 『살아있는 인간문서(living human document)』는 각각 그 삶의 이야기들로 완전한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목회 상담의 중요한 토대를 세운 거킨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우리 인간들 자체가 ‘살아있는 인간문서’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복음 전파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편지’이자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복음이 뿌리내리고 열매 맺은 우리 삶의 간증이 또 하나의 복음 씨앗인 것이다. 그 씨앗이 잘 뿌리 내리도록 교회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은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과 이웃의 마음 밭을 사랑으로 ‘기경(起耕)’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함께 기다려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 16:23~24).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6.01.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응답 전도의 열매 맺는 그날 그때
  •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은 ‘순종’ 그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 고민 Tick “타종교에 깊이 빠져 있는 분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요” ▶ 상담 Talk 필자는 주중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와 금요일 영산신학연구원 상담 전문 과정에서 가르치고, 주일에는 청년부 담당 목사를 하면서 늘 목회자, 선교사, 평신도 사역자들과 함께 하고 있다. 이번 가을학기 영산신학연구원 상담 과정 신입생 중에는 신 선생님이라는 놀라운 분이 계신다. 그녀는 노년기임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상담 전문 과정의 문을 두드렸다. 신 선생님은 평생 불교 신자로서 절을 집처럼 오가며 사셨다. 그동안 신 선생님께는 함께 교회에 다녀보자고 전도했던 많은 분들의 중보기도가 있었다. 그 쌓인 기도는 올 여름 한꺼번에 열매를 맺었다. 그녀의 간증 핵심은 복음과 말씀을 향한 궁금함과 간절함이다. 작년부터 신 선생님은 평생 몸담았던 불교에서는 배울 만큼 다 배운 것 같다는 마음과 함께 성경이 매우 궁금해지는 특별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대한 궁금증이 참을 수 없는 지점에 다다르자 그녀는 서점에 가서 직접 성경을 구입해 열심히 읽어보았지만, 혼자서 읽기에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답답한 마음에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던 중 학창 시절 읽어서 이해가 잘 안될 때는 쓰면서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려 스스로 성경 필사를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것은 필사를 하는 동안 자신에게 교회를 소개했던 분들의 기도가 응답 되듯 실제로 본인의 발걸음이 교회로 향했다는 것이다. 그 길로 바로 교회에 등록하고 교육과 침례를 받은 신 선생님은 어느 날 교회 안에서 우연히 영산신학연구원 상담 사역자 전문 과정의 포스터를 보게 되었다. 신 선생님은 평소에도 관심 있던 상담 분야였기에 주저함 없이 바로 신청하게 되었다며 다음과 같은 간증을 선배들 앞에서 나누었다. “제가 정말 신앙생활 연한은 짧고 아는 것은 없지만 성경을 읽고 필사하며 성령님께서 주신 마음은 ‘순종’입니다. 지금까지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신 참 복음을 모르고 살아 온 세월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봉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신 선생님이 새신자이자 신입생으로서 나눈 간증을 들으며 필자를 포함하여 모태신앙과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온 선배들에게는 감동과 눈물이 교실 안에 가득 차 올랐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는 말씀처럼 신 선생님이 필사하며 만난 성경 구절들은 그가 수십 년 동안 붙잡아 온 불교 경전과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위로와 확신을 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성경 말씀을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쓰며 말씀 속에서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생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심을 체험했다. 물론 앞으로 그녀의 신앙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며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상담자인 필자와 영산신학연구원 상담 과정 선배들은 앞으로 2년 동안 매주 금요일 신 선생님을 만나고 공부하는 과정을 통해 그녀의 두려움과 불안에 공감하고 도울 것이다. 또한, 에릭 에릭슨(Eric Ericson, 1902~1994)의 심리 사회 발달 단계에서 노년기 발달 과제인 ‘자아 통합 대 절망’ 속에서 복음이 그녀에게 어떻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는지 깨닫도록 도와줄 것이다. 에릭슨이 노년기로 분류한 단계는 65세 이후에 해당한다. 이때부터 개인은 삶의 마지막 단계를 준비하기 시작해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한 시기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의 삶을 수용하거나 삶의 좌절들을 의연하게 되돌아보게 된다. 이때 삶에 있어서 절망스럽던 기억들에 매몰되지 않고 보람이 있었던 추억들에 감사하며 자아 통합(ego-integrity)을 이룬다는 것은 삶을 충만하게 수용한다는 뜻이다. 과거의 실패에 대한 죄책감을 갖는 것은 우울감과 무기력을 야기하기 때문에 계속 마음속에 담아두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는 은밀한 기도와 안전한 공동체에서의 대화, 그리고 전문 상담을 통해 바깥으로 표현해 내야 한다. 에릭슨은 성공과 실패를 모두 귀한 교훈과 인격적 성숙의 과정으로 받아들일 때, ‘지혜’는 노년기 발달 과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였다는 결과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하였다. 심리학에서 ‘지혜’는 죽음을 직면하면서 여전히 삶에 대한 관심에 대해 받아들이고 죽음과 삶을 공정하게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정의된다. 성경에서의 ‘지혜’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맞게 살아내려 애쓰는 삶의 태도이다. 에릭슨은 노년기 단계에서 ‘지혜’라는 덕목을 달성하는 것은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증거이며 의연하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신 선생님은 노년기를 맞이하면서 자신의 죽음 이후의 삶에 직면하였고, 죽음과 삶을 공정하게 바라보았을 때 영생의 축복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천국 복음에 맞닿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의 삶도 신 선생님의 간증처럼 매 순간 하나님의 눈앞에 서 있는 인생길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만이 모든 인생길을 평탄케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대저 사람의 길은 야훼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잠 5:21).
  • 2025.10.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양육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에 힘든 부모
  • 사랑과 기도는 그 어떤 치료제보다 강력해 가정은 따뜻한 은혜 경험하는 공간 돼야 ▶ 고민 Tick “저는 자녀 양육에 대한 고민이 깊습니다. 자녀의 학교 성적뿐만 아니라, 정서적, 영적 건강까지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속에서 때로는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 상담 Talk 자녀의 성적, 친구, 미래 진로에 관한 걱정 때문에 상담실을 찾아오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지만 자녀들과 상담을 해 보면 자녀들은 부모가 정말 자신을 사랑하는지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자신이 공부를 잘하거나 부모가 원하는 것을 해 드릴 때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피터 포나기(Peter Fonagy) 박사는 ‘정신화(Mentalization)’라는 개념을 통해 부모 자녀 관계의 핵심을 이야기합니다. 정신화란 우리 자신의 행동이나 타인의 행동 이면에 있는 생각, 감정, 의도 등을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자녀의 행동을 보며 그 마음을 헤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나기 박사는 이 부모의 ‘정신화’ 능력이 자녀의 정서적 안정과 건강한 자아 발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는 자녀의 ‘정신화’ 능력으로도 연결된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기독교 상담의 관점에서는 ‘정신화’ 능력이 하나님과의 관계 능력으로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걱정되기 때문에 자녀의 문제 행동에만 초점을 맞추기 쉽습니다. 자녀가 공부를 안 하는 것 같으면 ‘게으르다’, 친구와의 관계에 어려움이 생기면 ‘성격이 예민하다’라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포나기 박사는 자녀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원인에 주목하라고 조언합니다. 공부가 하기 싫은 자녀의 마음속에는 ‘부모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소망’이나 ‘부모의 바람대로 공부를 더 잘 하고 싶지만 성적이 부모의 기대만큼 나오지 않을 때마다 실망하는 부모의 모습이 보기 싫기 때문에’ 더 공부에 집중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애착 이론의 창시자인 존 볼비(John Bowlby, 1907~1990)는 안정애착 관계가 자녀의 정서 발달에 필수적이라고 주장 하였는데 포나기는 그 안정애착이 바로 부모의 ‘정신화’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뇌과학자인 다니엘 시겔(Daniel Siegel)이 말하는 ‘마음의 거울(mirroring)’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부모가 부정적인 행동을 보이는 자녀의 감정에 대해 ‘화가 났구나’, ‘속상했구나’라며 공감적으로 대해줄 때, 자녀의 뇌는 그렇게 대해주는 부모를 자신의 거울로 인식하여 자신이 어떤 감정인지 인식하고 조절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로 인해 늘 지적받던 아동을 상담했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 부모에게 ‘정신화’와 ‘마음의 거울’ 되어주기를 훈련했더니 자녀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부모가 자녀 행동의 근원을 이해하고 ‘너도 많이 두렵고 무서웠겠구나’라고 공감해 줄 때, 자녀의 마음은 열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히 이 가정은 크리스천 가정이었기에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부모는 이전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컸지만 상담을 받고 예배를 회복한 후부터 하나님께 이 자녀를 주심에 감사하고 잘 키울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는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9세 때 만나서 치료했던 아동이 지금은 고3이 되어 공부도 잘하고 신앙생활도 잘한다는 소식을 최근 접했습니다. 이처럼 자녀 행동의 동기를 읽어주고 자녀 마음의 거울이 되어주는 부모의 사랑과 기도는 그 어떤 치료제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정신화는 부모가 아이의 마음을 읽는 능력일 뿐만 아니라 부모 자신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포나기는 이를 ‘반성적 기능(Reflective Functioning)’이라고 부릅니다. 아이의 통제할 수 없는 행동에 부모가 버럭 화를 낼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 부모는 아이의 마음에 집중하기보다 부모 역할의 피로감에 압도된 상태일 수 있습니다. ‘반성적 기능’은 이때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라고 스스로 질문하며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자기성찰인 회개와 깊이 연결됩니다. 물론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포나기 이론에 따르면, 부모가 100% 자녀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의 마음을 잘못 읽었을 때 솔직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능력’입니다. “아빠, 엄마가 네 마음을 오해하고 화내서 미안해”라고 말하며 부모가 자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은 아이에게 공부나 친구 관계에서 ‘좀 실수해도 괜찮아. 다시 회복하려는 용기가 중요해’라는 안정감을 줍니다. 이는 또한 부모 자녀 관계는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자녀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신앙 관계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차가운 율법이 아닌 따뜻한 은혜를 경험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가 먼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자녀에게 용서를 구할 때 자녀는 부모의 사랑이 조건적이지 않으며 실수는 회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우게 될 것입니다. 박은정 교수(목회상담학)
  • 2025.08.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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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출현은 새로운 문명 시대를 열어왔습니다. 학자들은 ‘말’의 발명으로 수렵, 채집 생활이 시작된 1단계, ‘글’의 발명으로 농경사회가 형성된 2단계, ‘인쇄’의 발명으로 산업사회가 본격화된 3단계, 컴퓨터와 결합한 ‘텔레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등장으로 정보사회가 펼쳐진 4단계로 역사 발전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챗GPT’ 등 인공지능, 블록체인, 가상현실과 같은 디지털 범용 기술들이 새로운 4차 산업시대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 나가리라 예측됩니다. 되돌아보면 인터넷, 휴대폰 등 뉴 미디어의 확산은 커뮤니케이션 활동에 획기적 변혁을 초래했습니다. 우선 인터넷은 탁월한 개방성으로 공간의 제한을 무력화시키고 명실상부한 ‘지구촌 공동체’를 실현해 냈습니다. 또한 개인 미디어와 매스 미디어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함으로써 ‘공공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을 일시에 무너뜨렸습니다. 이 결과 많은 사람들은 IT기술과 접목된 뉴미디어의 등장이 ‘표현의 자유’에 있어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바람은 상당 부분 실현됐습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부작용 또한 생겨났습니다. ‘가짜뉴스’는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 미디어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막강합니다. ‘교과서’며 ‘재판관’이고 ‘세상을 향한 창’입니다. 실제로 영유아들은 부모나 교사보다 TV나 유튜브를 통해 먼저 세상을 배워 나갑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언론의 잣대에 의해 규정됩니다. 또한 개인들은 미디어가 설정해 놓은 프리즘을 통해 외부 환경을 파악하고 사회 현안을 해석합니다. 한 마디로 ‘가짜뉴스’란 ‘뉴스의 형태를 띠지만 실체는 사실이 아닌 거짓된 뉴스’(fake news)를 의미합니다. 이는 언론 매체에 대한 사회 일반의 기본적 신뢰를 숙주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진실을 조작해 이익을 챙기려는 불순한 시도입니다. 이런 행태는 근래 SNS상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기술적 특성으로 인해 뉴스를 취사선택하는 ‘게이트 키핑’(gate keeping)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편집 통제권’(editorial control) 없이 ‘이용자 통제권’(user control)만 존재함을 악용해 가짜뉴스 제작 배포, 마녀사냥식 신상 털기, 테러 수준의 명예훼손 등이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가짜뉴스를 정치적 선동의 수단으로 삼기도 하고, 가공된 뉴스를 활용해 주식시장을 흔들려 한 사례들도 있었습니다. 특히 유튜브 등 개인 미디어의 경우는 ‘조회’와 ‘구독자’ 수가 수익과 직결되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선정적 내용으로 꾸며진 괴담 수준의 가짜뉴스가 경쟁적으로 쏟아지고 있습니다. “강하고 자극적인 발언을 할수록 보상이 올라 간다”는 것은 이미 통설이 됐고, “유명해진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노이즈 마케팅이 일반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정착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가짜뉴스가 지닌 신속한 전파력입니다. 미국 MIT 공대 연구진에 따르면 자극적인 가짜뉴스는 일반적 뉴스에 비해 전파 속도가 평균 6배 빠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의표를 찌르는 폭로성 뉴스, 험담과 막말이 섞인 특정인에 대한 인신공격에 더욱 솔깃해하는 인간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언론 자유를 신장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던 디지털 공간에서 이처럼 민주 질서를 위협하는 행태들이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윤리와 규범을 바로 세우고 사용자들의 책임 의식을 거듭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밀려오는 정보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변별력’을 길러나가는 일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교육을 통해 초등학교 때부터 각종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힘을 키워나가는 것도 효과적 방안이 될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에게는 이 같은 여과 능력의 함양이 더욱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경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5:8~9). 온라인을 이용해 범람하는 온갖 반기독교적 정보에 올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예리한 통찰력과 분별력을 갖춰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오늘 이 지면을 빌려 혼탁한 미디어 환경 속에서도 의연히 기독 언론의 정도를 걷고 계신 <순복음가족신문>에 새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신문은 저희가 온 마음 바쳐 사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보루이며, 곳곳에 고귀한 땀과 눈물이 배어있는 생생한 ‘교회행전’입니다. 지난 2년 이 귀중한 신문에 부족한 제가 신앙 시사칼럼을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외람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올리며, 한결같이 따뜻한 격려를 보내주신 신문사 여러분과 졸문을 읽어 주시고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광과 찬송을 주님께! 할렐루야!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2.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한글, 빛나는 우리의 보물
  • 한국어 학습자가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10일 코리아헤럴드가 교육부 자료를 입수해 보도한 바에 의하면 지난해 말 현재 한국어를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채택한 곳은 세계 42개국 1806개 초 중학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3년 만에 40%가 급증한 수치입니다. 온라인상에서의 한국어 열기 또한 뜨겁습니다. 5억 명 회원을 둔 글로벌 외국어 학습 서비스 ‘듀오링고’는 최근 ‘2022년 듀오링고 언어 리포트’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한국어 학습자는 1070만 명으로 전년 대비 29%가 증가, 수강자 수가 많은 언어 순위 5위에 올랐습니다. 이처럼 한국어에 대한 관심과 향학열이 높아진 데는 물론 ‘한류 열풍’이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한글’ 자체가 지닌 문자로서의 탁월성과 매력입니다. 실제로 한글은 여러 ‘소리글자’ 가운데서도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입니다. 열 자의 모음, 열 네 자의 자음, 27종의 받침을 활용해 수천 개의 말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음소문자로서 세계 공용어화 되어 있는 영어와 견주어도 효율성이 월등합니다.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다르며, 대문자와 소문자가 구분되고, 꼭 글자대로 읽혀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발음기관과 발음 작용을 본떠 만들어진 한글의 과학성은 정보화 시대의 진전에 따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휴대전화의 자판을 보면 하늘을 뜻하는 ‘·’, 땅을 뜻하는 ‘ㅡ’, 사람을 뜻하는 ‘ㅣ’ 석자로 수십 가지의 모음을 다 적을 수 있습니다. 자음은 동일한 자판을 한 번씩 누를 때마다 예삿소리(ㄱ)→거센소리(ㅋ)→된소리(ㄲ) 순으로 변환돼 간단한 조작으로 모든 글자를 쉽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뛰어난 한글의 편이성이 우리의 높은 휴대전화 보급률과 선도적 기술축적을 가능케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아울러 한글은 ‘배우기 쉽다’는 특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를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정연하게 설명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두에서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의 동기를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라의 말이 공용되는 한자와 통하지 않아 백성들이 제 뜻을 능히 표현하지 못하는 실정임을 긍휼히 여겨 쉽게 익혀 편하게 쓸 수 있는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든다”는 내용입니다. 이 점을 당시 예조판서 정인지는 보다 실감 있게 설명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다….” 한글은 이런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자주적 실용주의가 투영돼 구성원리가 간명하고 배우기 쉽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가 주목하는 ‘문맹 퇴치 신화’를 이룩한 배경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습득의 용이성’이라는 한글의 장점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전도의 사명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에 의해 지역, 신분, 성별의 구별 없이 두루 보급되고 읽혀졌습니다. 그들은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가며 전도했고, 신앙을 가지려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 위해 한글을 배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은 “한글이 진정한 우리 언어로 빠르게 자리 잡는 데 성경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국민일보 우성규 기자의 언급대로 “한글 성경과 찬송가의 보급으로 한반도는 문맹에서 벗어났고, 이를 통해 전해진 복음의 메시지는 한국교회 예배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됐던 것”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한글임에도 근래 우리 사회의 한글 홀대는 선을 한참 넘어섰습니다. 온갖 은어, 비어, 속어, 정체불명의 약어와 합성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물론 공공 방송에서조차 한글 규범 파괴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단 78년의 세월이 초래한 남북한 간의 언어 이질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민족의 명절인 ‘설’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남북이 함께 기념하는 절기가 점차 사라지는 추세에서 ‘설날’은 지금까지 우리 겨레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명일(名日)입니다. 궁극적인 ‘남북통일’은 단순한 ‘제도적 통일’을 넘어 ‘사람 간의 통합’에까지 이르러야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시풍속의 존속과 공유는 통일 여정에서 의미 있는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과 글은 다름 아닌 생각과 정신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말과 글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민족공동체로서 기본적 공감대의 토대가 이미 마련돼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이 기반이 더이상 허물어지지 않도록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남북한 언어 이질화의 방지 대책이 시급히 강구돼야만 할 것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한글은 빛나는 우리의 문화 자산입니다. 겨레의 보물인 우리말, 우리글을 바로 지키고 가꾸어 나가기 위해 온 국민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과의 귀중한 소통 매체인 한글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언어가 역사와 문화의 창고를 여는 관건이듯이 성도들에게 한글은 은혜의 보고인 성경을 여는 소중한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카타르의 낭보
  •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짓는 의미 있는 분수령이 됐습니다. 사실 한국 축구대표팀은 1954년 제5회 스위스대회에 첫 출전한 이래 다섯 번이나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았음에도 단 1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하지만 6월 4일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2대 0으로 꺾은 후 강호 포르투갈, 이탈리아, 우승 후보 스페인까지 연달아 격파하며 4강에 오르는 대이변을 연출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 기간 모두에게 축구는 ‘그냥 축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팀의 경기를 매개로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수백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함께 춤추고 함께 함성을 질렀습니다. 세계적 명물로 자리 잡은 자생적 ‘길거리 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한국 축구의 4강 신화에 세계가 놀랐지만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 스스로였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자신감, 동시대를 살아가는 국민적 유대감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이 열기는 IMF 경제위기 극복, 폭발적인 참여민주주의 확대, 창발적인 한류 문화 확산으로 이어지며 우리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22년, 제22회 카타르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은 또 한 번의 기적을 일구어냈습니다. 통계전문가들의 ‘16강 진출 가능성 9%’의 예측을 여지없이 깨뜨린 이 반전 드라마는 투철한 ‘원팀 정신’으로부터 비롯됐습니다. 파울루 벤투 감독을 위시한 코치진과 27명의 선수들이 똘똘 뭉쳤습니다. 그 결과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한국형 ‘빌드업 축구’가 가능했고, 어떤 팀과 맞붙어도 밀리지 않는 강인한 뚝심이 발휘될 수 있었습니다. 구성원들 간의 신뢰 역시 돋보였습니다. 특히 주장 손흥민 선수의 리더십은 발군이었습니다. 그는 월드컵을 3주 앞두고 소속팀 경기에서 당한 안와골절로 안면 보호대를 착용한 채 전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불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년간 마스크를 쓰고 계신 국민들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의연히 대답했습니다. 개막 전 “단 1%의 가능성이 있어도 앞만 보고 달려가겠다”며 부상 투혼을 예고했던 그는 약속대로 “몸이 부서지도록” 뛰었습니다. 실제로 H조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벼랑 끝에 몰렸던 한국팀은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황희찬으로 연결된 극적인 역전 골로 포르투갈에 2대 1 승리를 거두며 16강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16강전 진출이 확정된 직후 권경원, 조규성 선수는 관중에게서 건네받은 태극기를 펼쳐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뚜렷한 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본래 프로게이머 김혁규 선수가 7수 끝에 세계 대회를 제패하며 했던 이 말은 다시 새롭게 부각되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선 대회 내내 보여준 대표팀의 모습이 압축된 표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흔들리는 이 세대에게 던지는 속 깊은 응원의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팀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제골을 허용하고도 위축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불퇴전의 투혼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기간 특별히 우리 팀의 경기가 열렸던 13일간 축구 덕택에 대한민국은 모처럼 하나가 됐습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모두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대표팀의 선전은 코로나 블루, 경제 한파, 잦은 사회적 갈등으로 침체돼 있던 한국 사회에 심기일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에 섰습니다. 또 한 번의 ‘송구영신’의 시간을 맞으며 영혼과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을 때입니다. 성경은 신앙생활을 경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 스타디움을 뛰고 달렸듯 성도들도 인생의 경기장을 달음박질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경주자처럼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인생행로를 달려가고 있습니다. 한없이 감사한 것은 이 신앙 노정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한 스타플레이어로 여겨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는 말씀대로 열렬한 서포터가 돼 뜨겁게 응원해 주십니다. 독자 여러분!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힘을 내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스타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팬이 되어주십니다. 다가오는 2023년 새해, 예수님 안에서 항상 승리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김성동 장로(전 국회의원)
  • 2022.12.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새책소개
    2025년은 하나님의 말씀 가득한 『감사QT 365』 와 함께
  • 풍성하고 열매 맺는 신앙생활 위한 최고의 선물! 하나님과 동행하는 2025년을 기대하는 성도들의 필독서 『감사QT 365』가 출간됐다. 매년 업그레이 되는 『감사QT 365』는 절대 긍정, 절대 감사를 실천하는데 도움을 주는 QT(Quiet Time) 서적으로 각광 받아 왔다. 감사와 QT, 그리고 필사가 어우러진 2025년 판 『감사QT 365』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집필됐다.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예화를 선별하고 간략하게 요약하여 삽입했다. 특히 성경 말씀을 필사할 수 있는 지면과 말씀 묵상의 적용을 돕기 위한 질문을 추가해 일 년 동안 매일 하루하루를 말씀으로 채우고 영적 성장에 힘쓸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영훈 담임목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은혜를 받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지켜준다면 고난 중에도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넘치는 감사를 드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책에는 매일 QT를 생활화하여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삶을 살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예배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저자의 마음이 이 책 『감사QT 365』 곳곳에 녹아져 있다. 이영훈 목사의 감사 목회 철학이 체험적으로 녹아 있는 365편의 묵상의 글과 은혜로운 예화들을 읽고 ‘나의 감사’란에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적어보자. 매일 주어진 일독성경 범위 내에서 제시된 그날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필사하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QT를 하루하루 실천하다 보면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사람이 되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을 따라 매일 주어진 분량의 성경 말씀을 읽으면 2025년 한 해 동안 구약 1독, 신약 2독을 하게 된다.
  • 2024.11.15 / 복순희 기자

    2024년 『감사QT365』 하루 한 장으로 하나님과 동행
  • 매일 통독, 말씀 묵상, 말씀 필사, 감사 쓰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절대긍정, 절대감사하는 새해를 계획했다면 『감사QT365』 2024년 판을 추천한다. 이번에 발간된 『감사QT365』는 감사와 QT, 필사가 어우러져 일 년 동안 매일의 삶을 말씀으로 채우고 영적 성장에 힘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특히 이 책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돕기 위해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집필됐다. 본문을 예화 중심이 아닌 말씀 중심으로 편성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예화를 선별해 요약했다. 더불어 성경 말씀을 필사할 수 있는 지면과 말씀 묵상의 적용을 돕기 위한 질문을 추가했다. 또한 매달 시작점에 월별 계획표(monthly plan)를 수록해 매일 성경통독 진도를 표시할 수 있도록 했다. 이영훈 목사의 감사 목회 철학이 체험적으로 녹아 있는 365편의 묵상의 글과 은혜로운 예화들을 매일 읽고 ‘나의 감사’란에 주님께 감사할 제목들을 적어 나가다 보면 저절로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이영훈 목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묵상한 말씀대로 살아가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2023.12.15 / 복순희 기자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
  •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로 탄생한 기독교가 우주 만사의 정답이 된다. 혼란한 시대를 사는 인생들에게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이기창 공로장로(반석대교구)가 『성경과 기독교 진실성 파헤치기』(제1권: 구약시대) (제2권:신약시대)를 펴냈다. 저자는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기독교의 교리와 성경기록은 합리적이며 과학과도 합치하며 오히려 과학을 초월하고 있음을 깊이 있게 분석해 성경과 기독교의 진리성을 논증했다. 이 책은 신, 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 내용을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관통하면서 심도 깊게 해설하고, 기독교 교리와 신앙, 신학적 논리와 이론 및 사상, 우주의 창조로부터 역사, 종말 및 미래 발생할 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세계관을 다루고 있다. 과학자인 저자는 과학과 철학의 논리로 신의 존재로부터 우주 만물 전체를 물질우주와 정신우주로 균형있게 조망하면서 과학-철학-신학을 통섭해 교집합의 우주론을 밝혀낸다. 이런 방식으로 저자는 인류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질문인 우주, 물질, 영혼, 생명, 죽음, 사후생, 세상종말 등 빅퀘스천 규명을 추구해 나간다. 응용과학인 전자통신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공과대학 정교수를 역임한 이기창 공로장로는 교수 은퇴 후 10년간 물리학, 철학, 신학, 역사 등 인문학 연구에 몰두해 이 책을 만들었다. 그는 현대물리학에서 발견한 빅뱅 우주론과 부합하는 종교를 엄밀히 분석, 조사해 성경에 기반한 기독교만이 현대과학과 부합하는 유일한 종교로서 진실성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기독교가 공학, 물리학 등의 과학과 철학에 합치하는 유일한 종교이며 따라서 성경과 기독교는 ‘우주적 진리’라는 결론을 깨닫게 된다. 어디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몰라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추천하는 필수 교양 인문서적이다.
  • 2023.04.07 / 이미나 기자

    문화계 소식
    [영화 소개] 천성가는 밝은 길이
  • 사형수들의 아버지로 불렸던 박효진 장로의 간증을 토대로 제작한 ‘천성가는 밝은 길이’ 영화가 지난 4월 유튜브에 올라 큰 감동을 주고 있다. 박 장로는 전직 교도관 출신으로 사형수들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다. 그의 간증은 사형장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사형수들의 처절한 영적 사투를 통해 복음의 진리와 영적전쟁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 이번 영화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수많은 기독교 영화를 제작한 홍의봉 감독이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박효진 장로 역은 이경영 배우가 맡아 열연했고, 신인 김양균과 유라성도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임동진(목사), 한인수 장로, 정욱, 정선일 등의 중견 배우들도 특별 출연했다. 영화는 유튜브에서 제목 검색을 통해 볼 수 있다.
  • 2023.06.09 / 김주영 기자

    기독교 복음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 7월 5일 국내 개봉  
  • 전미 박스오피스 4주간 연속 TOP 10 하나님의 사랑과 진정한 믿음으로 감동 전해 하나님의 치유 능력과 사랑을 경험케 하며 대한민국에 진정한 믿음에 대한 경종을 울릴 기독교 영화 <기적을 믿는 소녀>가 오는 7월 5일 국내에 개봉한다. 전미 4주 연속 박스오피스 10위권 안에 들며 놀라운 흥행을 기록해 그 해 최고의 종교 영화로 떠올랐다. <기적을 믿는 소녀>는 기도로 믿음을 증명하는 어린 소녀를 통해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이 믿음의 불꽃을 키워가는 엔터테이닝 복음 영화다. 가족과 함께 호수에 놀러 간 평범한 어린 소녀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케 하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죽은 새와 강아지의 부활, 그리고 하반신 마비를 가진 친구가 다시 걷게 되는 등 하나님의 치유 능력을 목격한 믿음의 소녀를 통해 점차 변화해 가는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강렬한 울림과 함께 감동을 전한다.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이 사람들의 삶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뿐만 아니라 보는 내내 미소를 짓게 하는 스토리와 힐링을 선사하는 완벽한 케미스트리 등을 통해 종교인을 넘어서 일반관객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관람 후에는 “하나님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듣고 계세요”라는 대사와 깊은 감동이 가슴에 남게 된다. 특히 <위대한 쇼맨> 오스틴 존슨부터 제68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미라 소르비노, 피터 코요테, 케빈 소르보까지 믿고 보는 최고의 배우들이 총출동해 막강 캐스팅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여 이목을 집중시킨다. 한편, GOODTV 기독교복음방송(대표이사 김명전)에서는 개봉 전부터 <기적을 믿는 소녀> 교회 상영을 진행해 한국교회와 성도들로부터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는 많은 기적의 역사를 체험했다고 밝혔다.
  • 2023.05.25 / 이미나 기자

    스마트폰 생활백서-저절로 성경일독
  • “스마트폰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보여요!” 잠금화면 활용한 성경 묵상 앱 말씀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에게 매순간 단비와 같은 성경 말씀을 전달해 주는 앱이 있다. 바로 ‘저절로 성경일독’이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스마트폰 화면을 켤 때마다 성경구절이 나타난다. 화면 중앙에는 성경 구절이, 하단에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는 화살표 기호와 북마크, 공유하기, 잠금해제 버튼이 있다. 화면에 나오는 성경 구절은 화면이 꺼졌다 다시 켜지면 다음 절로 넘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부담 없이 성경을 일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앱에서는 말씀 공유 기능이 가장 눈에 띈다. 묵상하고 있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면 그 자리에서 말씀 카드를 만들어 SNS로 즉시 공유할 수 있다. 이는 모바일 전도 도구로도 활용이 가능해 전도 대상자에게 유용하다. 성경은 개역개정, 개역한글, 현대어성경, 새번역과 영어 성경인 KJV, NIV, NLT 버전을 제공하고 있는데 한글과 영어 두가지 성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징도 있다. 참고로 개역개정, 개역한글, KJV 성경은 오디오도 함께 제공된다. 저절로 성경일독 앱은 안드로이드기반(삼성 및 LG) 스마트폰에서 제공하는 구글 Play스토어에서만 서비스가 제공된다. 앱을 실행하면 광고가 나타나지만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면 말씀을 묵상하고 공유하는데 지장이 없다. 또한 결제해야 이용할 수 있는 ‘읽기모드’는 우리 교회 앱 성경과 동일한 기능이므로 오랜 시간 성경을 읽을 때는 교회 앱을 활용할 것을 추천한다.
  • 2022.07.29 / 금지환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31. 후안무치(厚顔無恥) 시므이의 죽음②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솔로몬에 의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된 시므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왕상 2:36~37) 3. 솔로몬의 숙청 작업과 시므이의 죽음 솔로몬은 왕이 된 후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다. 숙청의 이유, 방법, 숙청당한 인물들만 보면 공포정치를 휘둘렀던 절대군주 못지않다. 숙청의 대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던 대제사장 아비아달, 다윗을 섬기며 충성을 다했던 군대사령관 요압, 그리고 자신의 형이자 왕자였던 아도니야까지 잠재적으로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도니야 아도니야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아들은 암논이었고, 둘째는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다니엘, 셋째는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가 낳은 압살롬, 넷째는 학깃이 낳은 아도니야였다. 솔로몬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서 열 번째쯤 된다(대상 3:1~5). 그런데 첫째 아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압살롬에게 죽임 당했고, 압살롬은 반란 후 죽임을 당했다. 다윗의 첫째와 셋째 아들이 죽은 것이다. 둘째 아들 다니엘은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둘째 아들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성경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찍 죽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왕상 1:5~11). 이때 다윗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요압과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다(왕하 1:7). 하지만 아도니야의 시도는 일일천하에 그쳤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제단 뿔을 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아도니야(왕상 1:51)를 살려주며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왕상 1:52). 하지만 아도니야는 다윗의 침실에서 수종을 들었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의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솔로몬은 이것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아도니야를 처형해 버렸다(왕상 2:13~25). 2) 아비아달 아비아달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10번째 대제사장이었다.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기약이 없는 망명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스라엘 땅에 많은 도시와 지역이 있었지만 다윗이 선택한 첫 장소는 대제사장이 있던 놉이었다(삼상 21:1). 심신이 지쳐있던 다윗은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음식을 먹고 그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얻었다(삼상 21:4~10).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것을 문제 삼아 도엑을 시켜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을 한 날에 살육했다(삼상 22:18). 이때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였던 아비아달만이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아비아달은 지체 없이 한걸음에 그일라에 있던 다윗에게로 향했다. 아비아달이 제사장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에봇을 가지고 도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상 23:6). 아울러 우림과 둠밈을 대제사장의 에봇 흉패 안에 보관하라고 되어 있기에 우림과 둠밈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볼 수 있다(출 28:30). 다윗은 이렇게 사선을 넘어 온 아비아달을 대제사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직후 아비아달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에 아비아달을 제사장 직분에서 파면시키고 그의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왕상 2:27). 3) 요압 요압이라는 이름의 뜻은 ‘야훼는 아버지이다’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는 뜻이다. 요압은 다윗과 함께 오랜 세월 전쟁터를 누볐던 군대 장관이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고, 헤브론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던 다윗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하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다윗이 사울의 남아있던 세력과 벌인 최초의 전투이다. 이때 이스보셋의 장군인 아브넬과 다윗의 군대를 이끌던 요압이 맞붙게 되었다. 기브온 전투는 요압의 승리로 끝났지만, 요압의 동생 아사헬은 아브넬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요압은 이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었다. 한편 아브넬은 사울의 자손들과 다윗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종식하고 통일왕국을 탄생시키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헤브론에 있던 다윗을 찾아와 평화의 조약을 맺고 통일왕국의 꿈을 향한 큰 걸음을 뗐다(삼하 3:8~21). 뒤늦게 이것을 알게 된 요압은 아브넬을 쫓아가 다시 헤브론으로 유인해 왔다. 그리고 그에게 조용히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속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아브넬을 살해했다(삼하 3:27). 성경 여러 곳에서 정치적 야망을 숨기지 못했던 요압이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진 후 모든 공이 아브넬에게 돌아갈 것을 걱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통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 것에 대한 염려와 전쟁 중에 죽은 동생의 원한을 한 번에 갚고자 벌인 일이었다. 다윗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모든 백성에게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큰 용사였던 아브넬이 죽은 것을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다윗은 아브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요압에게 묻지 않았고 어떤 벌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솔로몬은 달랐다. 표면적인 이유는 요압이 죄 없는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이었던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죽인 것 때문이었지만(왕상 2:31), 실상은 요압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시므이 솔로몬의 서슬이 퍼런 칼날은 그의 왕권을 위협할 현재와 미래의 잠재적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선대왕이었던 다윗이 살려 준 시므이를 향한 솔로몬의 마지막 경고이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신 절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고 경고했다(왕상 2:36~37). 왜 솔로몬은 베냐민 자손이고 바후림에서 터를 잡고 있던 시므이를 굳이 예루살렘 성에 붙잡아 두고 절대 떠나지 말라고 했을까?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다윗을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그러나 시므이는 이것을 너무나 쉽게 생각했다. 자신의 노예 두 명이 도망을 가자 솔로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벗어났다(왕상 2:39~40). 솔로몬은 브나야에게 명령을 내려 시므이를 단숨에 처형했다(왕상 2:45).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초라한 모습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를 따라가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를 퍼붓던 시므이였다. 하지만 압살롬에 의한 왕자의 난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엎드려 비굴한 모습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다윗의 아량과 은혜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시므이는 솔로몬에 의해 그의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되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8.01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30.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시므이의 죽음①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겸허히 받아들인 다윗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8~19) 사무엘하 15장과 19장은 후안무치한 시므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무엘하 15장 30절은 다윗의 인생 중 가장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이었지만 그의 몰골 어디에도 왕의 위엄과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때 다윗은 머리는 산발하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감람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 다윗은 천 년의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으며 호산나를 외치던 길을 역방향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눈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방 나라의 왕이나 군사들에게 쫓긴 것도 아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잡혀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신세였다. 압살롬은 아버지인 다윗이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10명의 후궁들과 공개적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었다. 다윗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친부로서의 자존감도 철저히 묵살되었다. 더 낮아질 수도 초라해질 수도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수 있었다.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 때문에 이미 죽임을 당해 세상에 없었다. 다윗의 차남은 다니엘이다. 다니엘은 나발의 아내였으나(삼하 2:2)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된(삼상 25:39~43)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 낳은 아들이다(대상 3:1). 하지만 그의 이름 외에 추가적인 자료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의 넷째 아들이었던 아도니야가 장남 행사를 한 것으로 보아(왕상 1:5~10) 다니엘은 일찍 죽었을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의 장남과 차남이 죽은 상황에서 셋째 아들이었던 압살롬은 조금만 인내력을 가지고 기다렸으면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아버지 다윗을 죽여서라도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압살롬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는 듯했다. 헤브론에서 시작한 반란은 수도인 예루살렘 입성까지 파죽지세로 거칠 것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 다윗에게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이 예루살렘을 버리고 바후림을 지나고 있을 때 사울의 친족이요 게라의 아들이었던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기 시작했다(삼하 16:5). 다윗은 물론 그의 추종자들에게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고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13). 자신을 그렇게 집요하게 괴롭히고 죽이려고 했던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다윗이다. 그러나 사울이 죽고 난 이후에도 사울의 남은 자손들은 끊임없이 다윗을 참소하고 그의 왕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다윗이 마음만 먹었다면 사울의 친족을 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친족들에게 많은 특혜와 은혜를 베풀었고 사울의 친족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했다. 그들의 토지나 소유권도 빼앗지 않았다. 이런 다윗의 은혜를 받았던 사울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 시므이다. 그렇게 살아남았던 시므이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피난길에 오르자 저주를 퍼부었다. 비록 피난길에 올랐지만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공을 세웠던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있었고 많은 백성이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삼하 16:6).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있던 다윗의 군대장관 아비새가 당장 가서 시므이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말한다(삼하 16:9).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인해 극심한 모멸감에 시달렸을 다윗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분풀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므이는 더없이 좋은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는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책망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고난이 은혜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므이의 생명을 뺏지 않고 그가 퍼붓는 저주를 묵묵히 참아냈다(삼하 16:11). 2. 급변한 시므이의 태도 다윗이 가장 힘들었을 때, 조롱과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의 태도는 압살롬이 죽고 왕자의 난이 정리된 이후 급변한다. 압살롬이 죽자 제사장들과 신하들은 서둘러 다윗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키는 일을 진행한다(삼하 19:11~12). 다윗은 피난을 왔던 길을 따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예루살렘을 빠져 나올 때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던 바후림에 이르렀다. 바후림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이라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시므이는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귀환 행렬이 바후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무엘하 19장 16~18절은 이때 시므이가 취한 행동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1) 유다 사람들과 동행(삼하 19:16) 사울의 혈육으로 베냐민 지파였던 시므이는 급히 유다 사람들과 다윗을 맞으러 나간다. 다윗의 피난 행렬을 쫓아가며 돌을 던지고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에게서 다윗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이 다시 바후림에 왔을 때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2) 시므이의 세력(삼하 19:17) 사무엘하 19장 17절은 사울이 죽은 후 시므이가 어떻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윗을 맞으러 나올 때 시므이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자기의 모든 세력을 데리고 나온다.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열다섯 명의 아들, 종으로 부리고 있던 하인 스무 명을 대동했다. 시므이는 호시탐탐 사울 왕조의 재건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 고대 근동에서 개인이 이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운영할 이유도 없다. 3) 용서를 구하는 시므이(삼하 19:18~20) 시므이는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는 다윗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시므이가 특별히 구하고 싶었던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던 날에 저질렀던 패역한 일'에 대한 용서였다(삼하 19:19). 그가 다윗을 쫓아가며 했던 저주이다. 이 말을 들은 아비새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던 시므이를 살려 둘 수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당장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삼하 19:21). 이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던 시므이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사울의 남은 세력들의 잠재적 위협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고 그의 생명을 살려주는 아량을 베푼다(삼하 19:22~23). 다윗은 자신이 시므이를 용서하는 것으로 더는 피를 흘리지 않고 모든 것을 덮고 이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므이의 문제는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7.04 / 이상윤 목사 기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9.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Ⅱ)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뤄져야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그들에게 물으니라"(삼하21:1~2) 2) 기브온족의 이스라엘 편입 가나안 족속의 종교 혼합주의, 쾌락주의, 윤리적 타락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시대에 기이한 자연적 현상들은 다신론적 맹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유대교는 손쉬운 다신론이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다. 유일신 사상은 인간의 감성이나 종교적 편의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율법에 기록된 내용과 방식대로 종교적 행위가 이루어져야 했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한 삶이 요구되었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아주 쉽게 유혹으로 이끌어 갔다. 그 결과 거룩한 삶은 죄 된 삶으로 쉽게 바뀌었다. 이런 위험에 노출되고 나중에는 헤어날 수 없게 될 것을 아셨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한 것은 가나안 족속과 근원적인 단절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아 조약을 체결했다. 그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이방 족속의 방식대로 계약을 체결했다. 조약 자체도 문제였지만 방법과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고대 근동의 전통에 따라 기브온 사람의 음식을 취하는 방식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수 9:15). 서로 먹고 마시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의 조약이 이루어졌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족에게 속고 있었다. 성경은 기브온과 체결한 계약 방식이 '그들(기브온 사신)의 양식을 취하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수 9:14).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과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이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수 9:18) 다시 바꿀 수 없었다.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1.06.06 / 이상윤 목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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