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윤성호 목사(여의도직할성전 담당) - “예수님만 의지하라” 
  • 한 목회자가 목회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교회 리더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면 결정된 사항을 다음날 번복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원인을 조사해 보니 한 제직이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목사는 답답해서 한 성도에게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를 물었다. “우리는 모두 그 분께 도움받은 적이 있고, 지금도 도움을 받고 있기에 그분의 말을 따라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한 제직이 성도들에게 신앙의 대상이었다. 결국 그 목회자는 제대로 목회하지 못했고 때가 되어 다른 사역지로 이동했다. 오랜 후에 그 사역지를 다시 방문해 보니 교인들 상당수가 흩어져 있었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다. 성경 신명기에는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야훼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신 17:16)라고 말한다. 고대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좋은 말을 많이 확보해 놓아야 했다. 애굽은 명마 생산지이기에 좋은 말을 구하려면 반드시 애굽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왕에게 ‘말을 의지하지 말고, 말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군사력만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권력을 가진 사람, 즉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고 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시 146:3). 우리에게 도움을 준 사람, 심지어 형제, 친척, 친구들도 사랑하고 존경할 대상이지 결코 믿고 의지할 대상은 아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나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응답받고 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올해 우리가 결정해야 할 수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어떤 일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결정해도 되지만, 어떤 일은 촌음을 다퉈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인지, 지금 내리는 결정이 옳은 것인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아마 바둑 1급 1000명이 머리를 모아도 프로 바둑 기사 9단 1명을 이길 수 없다. 수많은 사람의 경륜과 전문가의 식견보다 예수님 한 분의 지혜가 훨씬 뛰어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유일한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생의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 2025.01.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영목 목사(목회기획국 담당) -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보는 새해
  • 미국 흑인들의 애환을 그린 유명한 소설 『뿌리』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는 자신의 사무실에 이상한 그림을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거북이가 높은 담장의 꼭대기에 혼자 올라가 있는 그림입니다. 그 그림을 본 많은 사람들은 꼭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이상한 그림을 걸어 놓았소?” 그러면 헤일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난 내가 쓴 작품을 볼 때 ‘어떻게 이런 위대한 글을 쓸 수 있었는가, 어디서 이런 영감을 얻을 수가 있었는가’ 생각하며 스스로 교만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저 그림을 보고 생각합니다. 저 거북이가 제 힘으로 스스로 저 높은 담장에 올라갈 수 있었을까? 누군가의 도움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2024년을 잘 보낸 것도 또 다가온 2025년을 살아갈 때도 나의 나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했지만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개인적으로 여러 어려움들이 우리에게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우심만 찬양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 믿고 나아간다면 분명 하나님이 우리의 2025년 한 해를 우리 삶에 가장 빛나는 시간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새해부터 우리 교회는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025년 한 해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 우리들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하시고 우리 나라를 선한 길로, 축복의 길로 또 우리들을 선한 길로, 축복의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제 한 주가 지나고, 새롭게 한 주가 남았습니다. 끝까지 열두광주리 가득 기도를 채워 하나님의 은혜와 응답을 받고 누리는 믿음의 자녀되길 바랍니다.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5~6).
  • 2025.01.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양승호 부목사(목회담당) - 사잇길로 가신 예수님처럼!
  • 누가복음 17장 11절은 예수님의 특별한 여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길을 지나셨습니다. 단순한 길 안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처럼 양편으로 대립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오갈 때 세 가지 경로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길은 요단강 동편을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유대인 마을이 많아 유대인들이 안전을 위해 선호하던 길이었습니다. 두 번째 길은 비교적 긴 거리로 요단강 서편, 즉 지중해 해안을 따라 걷는 길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길은 ‘조상들의 길’이라 불리던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사잇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 동안 갈등과 대립 속에 서로를 혐오하고 미워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 갈등이 극에 달해 유혈사태가 일어날 정도였기에 이 사잇길을 다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이 길을 자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걸으신 이유는 서로 갈라지고 대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해와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요? 현재 우리 사회는 태극기와 촛불,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 그 어느 때보다 분열과 갈등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극단적인 대치를 중재하려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걸으셨던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길’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이 길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이 섞여 있던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셨고, 강도 만난 유대인을 돕는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잇길에서 서로 대립하는 사람들 간에 사랑과 화해의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지금 나와 다른 사람들 때문에 갈등하고 대립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처럼 정치 논리에 갇혀 마음속으로 분열과 대립에 동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의 길로 지나가셨다”라는 말씀처럼 새해에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그 길을 걸어봅시다. 그 길에 우리의 소망되시는 예수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2025.01.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99) 사도행전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④
  • 사도행전은 신구약 성경에서 오순절 성령 사역의 다양한 측면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4. 장차 이루어질 일을 미리 말씀하시는 성령 (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2) 성령은 신약시대에도 제자들을 통해 말씀하신다. (1) 성령이 예루살렘 출신의 아가보라는 선지자(성령의 은사 중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를 통해 안디옥에서 흉년을 예언하도록 하셨다(11:27~28). (2) 바울이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고별설교를 할 때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린다는 성령의 말씀을 전했다(20:23). (3) 바울이 3차 선교여행 말미에 두로에 들렀을 때 두로의 제자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했다(21:4). (4) 바울이 가이사랴의 빌립의 집에 머물 때 아가보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고 예언하였다(21:11). 이 같은 현상은 구약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성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2:16~18). 5. 성령과 방언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처음으로 임하신 사건이 모두 다섯 번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2장), 사마리아 대부흥(8장), 사도 바울의 회심(9장), 고넬료 집 모임(10장), 에베소 대부흥(19장).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4; 2:6, 8 참조; 오순절 성령강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8:17; 사마리아 대부흥)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9:17; 고전 14:18 참조; 사도 바울)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10:45~46; 고넬료 집)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19:6; 에베소 대부흥) 이상의 다섯 가지 경우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대부흥 기사에서만 방언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때문에 성령이 처음 임하실 때(성령침례시) 반드시 방언이 나오는 것이 맞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대해 우리 오순절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에서는 빌립의 사마리아 대부흥 기사(행 8장)에 방언이란 단어는 안 나왔지만 베드로와 요한의 안수를 받은 사람이 성령 받은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마술사 시몬이 즉시 돈을 주고 그 능력을 사기를 원한 것(8:18~24)을 미루어 볼 때, 성령 받기 전과 받은 후의 즉각적인 차이는 방언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침례의 외적 표적은 방언이라고 믿으며 이를 가리켜 ‘은사 방언’과 구별된 ‘표적 방언’이라고 말한다.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5.01.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98) 사도행전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③
  • 사도행전은 신구약 성경에서 오순절 성령 사역의 다양한 측면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3.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는 성령의 특징(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2)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주권적으로 보내시는 성령 (1) 안디옥 교회에 의해 따로 구별된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제1차 선교여행을 시작한다(13:4). (2)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침례를 베푼 후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가이사랴에 가게 하셨다(8:38~40). (3) 바울은 3차 선교여행 끝 무렵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초청해서 “고별 설교”(20:18~35)를 하면서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20:28)라고 권면함으로써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4) 바울은 “성령 안에서”(개역개정에는 없음)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고서 후에 로마에 이르는 여행을 계획한다(19:21). 이것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바울이 결정했음을 말해준다(이런 이해는 20:22~23에서 더 분명히 나타난다.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3) 성령을 속이거나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께 그렇게 하는 것 (1) 베드로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3~4)라고 말함으로써 성령이 곧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라는 말은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행 4:31)라는 표현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의 실제적인 대결은 베드로 대 아나니아가 아니라 성령 대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2) 또한 베드로는 삽비라에게도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5:9)고 질책하고 있다. (3) 공회에 잡힌 스데반도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조상들이 성령을 거스른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7:51). 4. 장차 이루어질 일을 미리 말씀하시는 성령 1) 사도행전은 구약 예언들의 실질적인 주체가 성령임을 밝히고 있다. (1) 베드로는 가룟 유다 대신 다른 사람을 12사도에 들이도록 할 것을 말하면서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시 69:25, 109:8]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1:16; 20절 참조)라고 말했다. (2) 베드로와 요한 일행이 석방된 후 주의 제자들이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라고 말하고 있다(4:25~26; 시 2:1~2). (3) 로마의 유대인들이 바울의 강론을 듣고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28:25~27)라고 말하고서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졌음을 밝히고 있다(28:28).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4.12.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97) 사도행전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②
  • 사도행전은 신구약 성경에서 오순절 성령 사역의 다양한 측면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가르침을 살펴본다. 2. 성령 충만 (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3) 성령 충만할 때 나타난 현상 (1) 사도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교회 지도자로 세웠다. 예루살렘 교회가 급속히 부흥하자 교회 내의 과부 구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6:3)을 안수하여 지도자로 세웠다. (2) 사도행전은 사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아 많은 군중 앞에서 설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① 베드로는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못 걷던 사람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고친 후 공회에 끌려가 심문을 받을 때 “성령이 충만하여”(4:8)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 이것은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눅 12:11~12)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다. ② 스데반도 공회에 끌려와 최후 심문을 받을 때 담대히 설교한 후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7:55). (3) 바나바의 경우, 성령충만함을 받았을 때 안디옥의 새로 믿은 그리스도인들을 잘 양육시켜 큰 부흥이 일어나도록 했다(11:24). (4)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자를 물리침 사도 바울은 제1차 선교여행의 첫 선교지인 구브로 섬의 바보에 도착해서 총독 서기오 바울을 전도할 때 유대인 박수 바예수(또는 엘루마)가 방해하자 “성령이 충만하고” 그를 저주하여 시각 장애를 겪도록 했다(13:10~11). (5)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있었던 것과 같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성령충만할 때 단호히 이를 이겨내고 기쁨과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다(13:52). 3. 사도행전이 기록하고 있는 성령의 특징 1)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에게 명령하시는 성령 (1)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다(1:2). (2) 성령은 빌립에게 에디오피아 내시가 탄 수레로 나아가라고 명령하셨다(8:29). (3)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기를 주저하자 성령께서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라고 명하셨다(10:19~20, 11:12). (4)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금식할 때 성령께서 선교를 위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명하셨다(13:2). (5) 성령은 바울 선교팀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16:6). (6) “예수의 영”이 바울 선교팀을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로 가지 못하게 하셨다(16:7). (7)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론으로 성령께서 “우상 제물, 피, 목매어 죽인 것, 음행”을 멀리하는 것 이외의 짐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지우지 않으셨다(15:28~29). 김호성 목사(목회담당 부목사 겸 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4.11.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73) 종교개혁⑬
  • 하이델베르크 논쟁 면죄부와 교황의 권위를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고 있던 1518년 초, 가브리엘 베네투스가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 총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서신을 통해 마르틴 루터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며 그를 ‘진정시키고 달래줄’ 학자들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베네투스 총장은 당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원장이자 비텐베르크 초대학장을 지낸 슈타우피츠에게 이를 전달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는 루터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처리하되 학문적인 토론으로 해결하려 했다. 마침 3년마다 열리는 총회가 하이델베르크에서 예정되어 있었고 이를 활용하기로 했다. 이에 루터는 총회 참석을 위해 비텐베르크 대학에 휴가를 요청했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뷔르츠부르크의 총대주교 프리드리히 폰 비르스베르크 그리고 팔츠의 선제후 루드비히 5세 등으로부터 하이델베르크로의 여행 안전 보장도 확인받았다. 루터는 특별히 제공받은 마차를 거절하고 규정에 따라 4월 11일 동료 수도사와 함께 도보로 떠났다. 코부르크, 뷔르츠부르크를 거쳐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을 때 루터는 그곳 선제후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크게 환영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518년 4월 25일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 총회에 참석했다. 다음날인 26일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예술학부 강의실에서 루터의 문제와 관련하여 변론회가 열렸다. 루터는 변론을 위해 미리 28개의 신학적 논제와 12개의 철학적 논제를 준비했다. 그의 논제들은 전체적으로 스콜라신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죄와 은혜에 대한 간결하고 날카로운 가르침이 포함되었다. “인간의 행위는 아무리 아름다워 보이고 선해 보일지라도 분명히 치명적인 죄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행위는 아무리 불완전해 보이고 나빠 보일지라도 (구원을 위한) 참된 불멸의 공로이다”(논제3, 논제4). “자유 의지는 타락 이후에는 공허한 개념에 불과하다.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행하게 될 때 죽음의 죄를 짓는 것이다”(논제13). 이 밖에도 루터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대조하며 로마가톨릭을 향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변론회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행사이기도 했다. 이는 루터에게 영예로운 것이었으며 환대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와 하이델베르크 대학 관계자들 그리고 그곳 시민들과 팔츠 선제후 궁정의 대표자들이 관객으로 참석했다. 루터와 논쟁을 벌인 여섯 명의 박사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 회서, 요도쿠스 브레히텔, 마쿠스 슈티어, 피터 샤이벤하르트, 게오르그 슈바르츠, 로렌츠 볼프. 기록에 따르면 청중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여섯 명의 신학 교수들은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지만 예술학부 교수들과 학생들은 루터에게 열렬하게 동의했다. 루터는 1518년 5월 18일 조지 스팔라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박사들은 나의 변론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매우 겸손하게 논쟁을 벌였기에 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에게 내 주장은 낯선 것이었지만 예리하고 훌륭하게 반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다만 다섯 번째 가장 나이 어린 박사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루터가 말한 어린 박사는 게오르그 슈바르츠였다. 그는 청중의 웃음을 유발하며 루터의 논제를 농민들이 알게 되면 그를 돌로 쳐 죽일 것이라고 분노했다. 루터의 변론을 기록한 이들 중에서 마틴 부처의 기록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그는 변론회가 끝난 후 루터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부처는 루터가 에라스무스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라며 열광했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은 ‘행위로 얻는 의’에 대한 루터의 비판과 ‘십자가 신학’에 대한 그의 신학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목사)
  • 2024.12.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2) 종교개혁⑫
  • 95개조 논제에 대한 반응들이 종교개혁의 밀물이 되다 95개조 논제는 루터가 예기치 못한 일들을 일으켰다. 면죄부 문제보다는 오히려 교황의 권력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1517년 12월 17일 마인츠의 대주교였던 알브레히트는 “거룩한 교황께서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이에 대한 루터의 오류를 반박하고 훈계해달라”며 95개조 논제를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1518년 1월 20일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 요하네스 텟젤과 당시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n der Order) 대학 총장이었던 콘라트 빔피나는 루터의 논제들을 고려하여 만든 106개의 논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열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면죄부 이론과 판매에 대해 정당함을 강하게 방어했다. 루터의 수많은 주장 가운데 특별히 ‘교황의 권한 제한’과 ‘연옥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하여 오류이며 모독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은 흔히 이단 심문에서 통용되던 것이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토론회를 근거로 도미니크 수도회는 루터에게 이단 혐의를 두어 로마에 고소키로 했다. 1518년 2월경 잉골슈타트의 저명한 신학자 요하네스 엑크는 『오벨리스키(날카로운 기둥들)』라는 저서를 통해 루터가 ‘보헤미아의 바이러스를 퍼뜨린다’라고 비난하며 그의 오류들을 질책했다. ‘보헤미아의 바이러스’란 15세기 초 보헤미아 왕국(현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루터를 향한 일련의 격렬한 반응들은 오히려 루터의 개혁 의지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1518년 8월에 출판된 “면죄부의 효용에 대한 논쟁의 해결”에서 루터는 95개조 논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주장들을 더욱 세밀하고 예리하게 설명했다. 그는 참회에 대한 신약성서의 근거들을 더욱 명확하게 제시했으며, 교황의 권한에 대해서도 더욱 날카롭게 비판했다. 믿음에 대해서도 다른 어떤 신앙 행위와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강조했다. 성례전과 연옥설에 대해서도 로마가톨릭 주장의 오류를 한층 강하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특히, 직접적으로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루터는 알브레히트를 향해 ‘최악의 이교도’로 칭하며 더 나아가 교황이 면죄를 통해 새로운 신앙 교리를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지금의 교회는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일도, 교황의 일도, 수많은 추기경의 일도 아닌, 하나님만의 일이다. 종교개혁의 때는 오로지 시간을 창조하신 그분만이 알고 있다. 우리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명백한 오류를 부인할 수 없다. 교황의 죄 사함의 권세는 오용되고 있고 그는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자임이 틀림없다. 개혁의 밀물이 이미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다. 우리의 악행이 그것을 벌어들였다(렘 14:7).” 물론 루터에게는 그 종교개혁을 이끌려는 강력한 의지나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글에서 그는 자신의 95개조 논제를 “철회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교황의 처분에 따를 것임을 밝히고 있다. “거룩한 아버지, 나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의 거룩성에 맡깁니다. 살려주시든, 죽이시든, 부르시든, 철회하시든, 불쌍히 여기시든, 쫓아내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당신의 음성을 당신 안에서 이끄시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내가 죽을 만한 일을 저질렀다면, 나는 죽기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땅과 충만한 모든 것이 주의 것이며, 그는 영원히 찬양받으실 것입니다”(WA 1,529,23-27). 루터는 부조리한 로마가톨릭과 교황의 결정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겨드렸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11.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1) 종교개혁⑪
  • 면죄부 판매와 95개조 논제 오래전부터 기독교인들은 기도나 성지 순례 외에도 돈으로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교회는 연옥을 지옥으로 갈 정도로 큰 죄를 짓지 않은 죄인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으로 생각했다. 즉, 천국으로 직행할 수 없는 영혼들이 연옥에서 다음 심판을 기다리며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에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이나 대리인의 선행과 회개 그리고 보상의 노력에 따라 연옥에 머무는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연옥을 뜻하는 라틴어 푸르가토리움(Purgatorium)은 ‘정화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연옥을 땅속 깊은 곳의 불구덩이로 묘사했고 단테는 죄인들이 눈꺼풀을 철사로 꿰맨 채 머물고 있는 언덕으로 그렸다. 종교적인 해석이나 상상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연옥의 이미지는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로마가톨릭은 이런 공포심을 이용하여 필요한 재정을 채우려고 했다. 예를 들어 교황이나 대주교들은 성당을 짓거나 보수할 때 또는 십자군전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면죄부(엄밀히 말해서 면벌부)를 팔아서 돈을 모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당시 스콜라철학의 논리를 끌어들이고 있었다(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스콜라주의를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터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는 로마에 베드로성당을 신축하려고 했고, 그에 필요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1506년 대규모의 면죄부를 발행했다. 독일에서는 마인츠와 막데부르크의 대주교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에게 면죄부 판매를 위임했다. 율리우스 2세는 그에게 면죄부 판매를 통한 수입의 절반을 푸거 가문에게서 차용한 9만9000굴덴(당시 100굴덴 정도면 지방 부호의 큰 저택 한 채 값이었고, 중산층 가족의 1년 생활비 정도였다)의 융자금을 상환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와 별도로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 수입 가운데 2만4000두카덴(중세 유럽의 금화 명칭)을 마인츠 교구와 막데부르크 교구를 인수하는 데 드는 상납금으로 교황청에 지불했다.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던 요하네스 텟젤이 베드로성당 건립을 위한 면죄부 판매 실무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십자가와 교황의 깃발을 든 텟젤은 알브레히트가 관할하는 세 교구의 도시마다 찾아가서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판매했다. 마르틴 루터는 영혼의 구원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이러한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면죄(사면)의 신학적 부당성을 95개조 논제로 작성하여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보냈다. 알브레히트가 루터의 신학적 이의 제기를 무시해 버리자 크게 실망한 루터는 항의를 결심하고 비텐베르크 성당 문을 향해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한 손에 망치를 들고 세상을 바꾸게 될 벽보를 성당 문에 못 박았다. 루터의 절친한 동지였던 필립 멜란히톤은 루터가 죽은 후에 그의 저술을 모아 책을 출판하면서 그 서문에 “루터는 1517년 만성절 전날 비텐베르크 성당에 면죄(사면)를 반박하는 95개조 논제를 게시했다”라고 기록했다. 오랫동안 루터의 비서였던 게오르크 뢰러는 “1517년 만성절 전야에 비텐베르크의 모든 교회와 문들에 면죄부를 비판하는 마르틴 루터 박사의 논제가 붙었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게시 방법에는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오늘날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1517년 10월 31일에 시작되었다고 확신한다. 다음은 95개조 논제를 시작하는 루터의 목소리이다. “진리를 향한 사랑과 진리를 밝히고자 하는 열정으로 아래와 같은 논제를 가지고 (면죄부 신학에 관해) 토론할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향한 루터의 열정을 사용하셔서 세상을 변화시키셨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10.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뿌리깊은 순복음
    (156)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9>
  •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사랑이 없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무례히 행할 수밖에 없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 그 이유는 진정한 사랑은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기 때문이다. ‘무례히 행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아스케모네오’는 ‘수치스런 행동을 하다’ ‘비열하게 행동하다’ ‘보기 흉하게 행동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무례’라는 것은 ‘예의가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기본적인 에티켓이 없는 태도이며 상대방에게 모멸감이나 혐오감을 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사람됨의 기본 즉 ‘예의’는 바로 상호 간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지닌다. 선후배 사이나 어른과 젊은이의 관계에 있어서 무례해서는 곤란하다. 윗사람에게 예의를 갖추는 겸손이 훌륭한 인격이다. 윗사람을 대적해 무례히 행하는 하극상이나 격렬히 반항하는 모습은 사회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행위이다. 이와는 반대로 나이가 많다고 해서 젊은 후배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이처럼 성령 충만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성도들은 누구에게도 절대로 무례히 행해서는 안 된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무시하는 것도 무례이며 조그마한 사업을 하면서 몇 명 안 되는 고용인들에게 무례한 이들도 있다. 또한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탄압하는 것도 무례이며 능력이 있다고 해서 능력이 조금 부족한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약한 자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도 그렇다. 사랑은 오히려 넉넉한 자가 부족한 자와 나누는 것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보고 지키고 일으켜 주는 것이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보호하고 이를 감당해 줘야 한다. 이렇듯 사랑은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다(롬 12:15).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사랑은 소외되고 탄압받고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이들을 보았을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배고픈 자에게 빵을 주셨으며 결코 그들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으셨다. 주님은 가장 천대받고 약했던 사회적 약자들을 무례히 대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바로 ‘무례히 행치 않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진정 무례히 행치 않으시는 예의 바른 분이시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왕이시지만 우리의 동의 없이 함부로 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시고 문밖에 서서 마음 문을 두드리신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음을 기억하고 우리도 그렇게 행하여야 한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1.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55)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8>
  • 교만 버리고 겸손해야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고 때가 되면 높여주셔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사도 바울은 항상 교만에 대해서 경계하며 ‘교만한 마음’을 버리라고 권면했다(고전 4:6). 우리의 구원은 스스로 성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았다. 고린도 교인들의 근본적인 잘못은 바로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높아진 교만이었다. 그래서 『신학대전』의 저자로 알려진 중세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 1224~1274)는 “교만은 우리의 영혼을 죽이는 죄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라고 말씀한다. 이처럼 많은 성경은 제일 먼저 겸손을 최고의 덕(德)으로 여기며 그것을 가르친다. 사실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삼덕(三德)인 지인용(智仁勇, 지혜, 인자함, 용기)을 말해왔다. 여기에 겸손은 없다. 서양 특히 헬라의 윤리 사상을 보면 이 세 가지에 절개(節槪) 즉 ‘굽히지 않는 신념’을 더해 사덕(四德)을 말한다. 동서양 모두 가장 주요한 덕(德)에는 교만을 멀리하는 겸손이 빠져있다. 오직 성경만이 겸손을 가장 귀한 덕으로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겸손을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눅 14:11), 친히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 잡히시기 전날 밤 수건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친히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겸손한 종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고,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셨고 자기를 비우고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빌 2:5~8). 단테의 『신곡』 중 연옥편에 있는 이야기이다. 단테가 연옥을 지나다가 한구석에 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에 무거운 돌을 얹고 허리를 잔뜩 꾸부리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안내자에게 이유를 물으니 “저 사람들은 살면서 너무 교만해서 한 번도 허리를 굽혀 본 적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천국에 올라가는 문은 낮아서 허리를 굽혀야만 통과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그 연습을 하느라고 저리 애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비슷하게 성지순례에 가면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는 곳을 기념한 예배당이 있다. 특이한 것은 예배당은 매우 큰데 그 문은 아주 좁고 낮다는 점이다. 한 사람씩만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낮은 데 그것도 겸손히 머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가 있다. 이렇듯 예수님께로 나아가려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성도는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높여주신다. “…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6).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12.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54)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67>
  • 하나님 잊어버리고 대적하며 불순종하는 것이 교만, 그것이 곧 사탄의 성품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성경에는 겸손의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교만으로 인해 안타깝게 최후를 맞이하는 이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사울도 처음에는 겸손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을 기뻐하사 왕위를 견고케 하시고 전쟁에서 계속 이기게 하셨다(삼상 14:47~48). 사울 왕이 계속 승리한 것은 사울의 지략과 용맹이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 주셨기 때문이다. 그랬던 사울이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마음이 교만해져 말씀에 순종치 않았고 회개조차 하지 않음으로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았다(삼상 15:23, 28). 사울 왕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했다(삼상 15:9).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몰락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보다 백성을 두려워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야훼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 15:24).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다.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삼상 15:11). 셋째, 스스로 자기를 과시하고 높이려 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삼상 15:12, 30). 넷째,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했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야훼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삼상 15:15). 이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대적하며 불순종하는 것이 교만이고 그것은 곧 사탄의 성품이다(엡 2:2). 이렇듯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지식(고전 8:1), 재물(겔 28:5), 권력과 권세(단 4:30)이며, 이와 더불어 무언가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형통할 때 교만은 소리 없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한다(대하 18:1). 이렇듯 인간이 소망하는 것들과 교만은 연결돼 있으므로 항상 교만을 경계하고 늘 조심해야 한다. 교만을 피하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며(출 1:15), 사도 바울처럼 스스로를 작게 여겨야 하고(고전 15:9),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고전 10:31).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은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고전 15:10), 겸손한 마음과 행동으로 헌신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의 참된 모습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11.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독교 설교자 열전
    아우구스티누스(Ⅱ)
  • 성경해석의 기준은 ‘사랑’ 하나님의 초월적 은혜 없이 설교 불가능해 회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설교의 목적 모든 설교자는 성경을 해석하고 이를 근거로 설교한다. 설교의 권위는 설교자가 아니라 성경에서 오기 때문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 성경을 주신 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최초의 설교학 교과서라고 불리는 『기독교 교리』(On Christian Doctrine,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교양』(CH북스, 2017) 또는 『기독교 학문론』(북랩, 2018)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에서 성경해석과 설교방법론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4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1~3권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는 반면 4권은 성경을 해석한 내용을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성경해석의 열쇠는 ‘사랑’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는 사물을 향유하기 위한 것과 사용하기 위한 것, 향유하고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구분한다. 향유하기 위한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만 사용하기 위한 것은 행복을 추구하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것을 향유한다는 것을 “그 자체를 사랑함으로서 그것에 굳게 붙어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인간이 진정으로 향유해야 할 것은 성삼위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성육신 사건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향유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향유하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 역시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이며 인간이 인간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성경이란 “하나님을 즐기고[향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들로써 다른 모든 것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33).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용해 어떻게 하나님을 향유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요 사랑은 그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자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다섯 가지 영적 단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 경건, 지식, 강인 그리고 자비이다. 자비가 강조된 이유는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결국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함을 나타낸다.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하고 이를 근거로 설교를 한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자 먼저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사로서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고 그들이 악한 것을 깨우치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게으른 사람을 분발시키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미래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를 알려주어야 한다. 특히 성경과 관련해 설교자는 성경의 내용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설교자가 자신의 성경해석에 대해 늘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의 목적을 세 가지로 가르친다. 설교란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 세 목적 중에 가장 주된 것은 가르치는 것이며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들은 기쁨을 얻고 설득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가르칠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르치려는 내용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화려하고 유창한 말솜씨로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 성경을 연구하고 연구한 내용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꾸어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수사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 수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라고 충고한다. 그가 제시하는 수사학적인 방법은 차분한 화법, 절제된 화법, 당당한 화법이다. 다양한 화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 세 가지 화법 중에 어느 한 가지만으로도 설교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지만, 다른 두 가지의 화법이 설교에 다양함을 제공해주며 지루함을 방지하는 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교 설교 역사』, 83). 한편 수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우구스티누스는 강조한다. 설교에서 수사학을 사용하는 이유는 미사여구를 사용함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들의 삶이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교 설교 역사』, 83).
  • 2025.01.10 / 이미나 기자

    설교자 - 아우구스티누스(Ⅰ)
  • 로마서 말씀 통해 하나님의 소명 깨달아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로 회심 수사학에 뛰어난 재능 보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목회자, 설교자, 신학자가 등장했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을 꼽는다면 힙포의 어거스틴으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지역 누미디안 마을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태어난 것은 354년의 일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로마의 대박해가 304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306년 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를 통해 로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고 오랜 박해 속에 있던 기독교 역시 제국 종교로 변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였다. 그녀의 헌신적인 기도와 노력 덕분에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로 개종하기까지 그의 젊은 시절은 방탕과 욕망으로 가득했다. 당시 부유층 자제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17세가 되었을 때 수사학, 변증법, 로마법 등을 배우기 위해 카르타고에서 수학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난 학생이었고 마침내 수사학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마니교에 심취하게 된다. 마니교는 세상에 두 영역, 즉 빛의 왕국과 흑암의 왕국이 존재하며 두 왕국 사이의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선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 88).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를 변호할 정도로 깊이 빠져있었다. 동시에 아데오단투스라는 사생아를 얻기도 했다. 카르타고에서의 그의 삶은 방탕과 일탈의 연속이었다. 고향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교사 생활을 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를 이끌어준 사람은 로마 제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심마쿠스였다. 로마의 귀족이었고 집정관까지 지냈던 심마쿠스의 도움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불과 30세의 나이에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로 임명됐다. 로마 제국의 법정이 밀라노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수사학 교수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는 황제와 그 해의 집정관들을 돕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27).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적인 방황 가운데 놓여있었다. 몸담고 있는 로마 정치계는 너무 복잡했고 그 어디에서도 영적인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 여전히 붙잡고 있던 마니교 사상은 그런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안식을 찾기 위해 심취했던 그리스 철학 역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 아들과는 달리 어머니 모니카는 자신의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신앙 안에서 살아가길 기도하고 간구했다. 그런 그녀의 오랜 기도와 간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속적인 성공의 최정점에 이르렀을 때 응답됐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로마 생활은 회의와 갈등 속에 놓여있었다. 그 속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했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비취게 되었다. 바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기 위해 간 것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보다 나은 연설가가 되려는 목적이 먼저였다. 그러나 암브로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전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회심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데 그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 출신의 폰티티안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수도사 안토니와 이집트 수도사들의 성결한 삶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던 그는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래소리를 듣게 됐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Tolle, lege; tolle, lege). 그것은 “집어들고 읽으라, 집어들고 읽으라”라는 뜻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성경을 들어 읽었고 그 말씀이 바로 로마서에 기록된 말씀이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이 말씀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았다. 그는 『고백록』에서 그 순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고 쓰고 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387년 부활절에 침례를 받았고 남은 삶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단했다. 기독교 역사에 놀라운 족적을 남기게 되는 힙포의 어거스틴의 사역이 비로소 시작하게 된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4.11.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키프리아누스(Ⅱ)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약 65편의 편지와 12개의 논문 남겨 교회 단일성과 교회 감독의 중요성 강조 ‘권위 있는 성경 해석’ 추구해 키프리아누스의 작품은 약 65편의 편지와 12개 정도의 논문이 남겨져있다. ‘도나투스트에게’에서는 침례를 통해 일어나는 도덕적 변화와 이를 통한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순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데메트리우스에게’에서는 이교도들이 가지는 해악성을 고발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배교자들에게 필요한 회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배교자들』과 참된 교회의 하나 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교회의 단일성』은 그가 가진 신학적 소양과 탁월함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키프리아누스를 많은 교부들로부터 두드러지게 한 것은 그가 가진 교회론과 그 교회론에 근거한 교회 감독의 위치에 대한 그의 의견 때문일 것이다.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이 말은 노바티안파 - 로마교회의 장로였던 노바티안과 카르타고교회의 장로였던 노바투스를 따르던 분파 - 와의 논쟁 가운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는 『교회의 단일성』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노아의 방주 밖에 있었던 자마다 구원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교회 밖에 머물러 있게 될 자 또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예수님의 옷이 로마 군병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나누어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었다는 사실을 들기도 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교회 감독의 직무와도 밀접하게 관련시켰다. 그는 감독이 교회 안에 있고 교회가 감독 안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만일 감독과 함께 있지 않는 자들은 교회 안에 있지 않는 것이다. “감독 없이 교회도 없다.”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은 이후 로마가톨릭교회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감독직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이다. 당시 로마 정부의 박해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면서 교회 체계가 흔들리게 됐고 이런 상황을 틈타 평신도 중심의 신앙을 추구하려는 이단들이 발흥하게 됐다. 키프리아누스는 그런 상황을 염려하며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설교자로서 키프리아누스는 성경에서 발견하는 진리를 전달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는 웅장하고 장엄한 웅변조의 설교가 아니라 순수하고 담백한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교자가 전하는 순수하고 담백한 설교를 통해 청중들은 성경에 담긴 진리를 발견하고 설득되며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을 품게 된다고 믿었다. 그는 도나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설교자들이여] 교묘하면서도 유창하게 말하지 말고 진중한 말로 하십시오! 세련된 수사학을 통해 회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억지로] 말을 치장하지 말고, 진실하고 순박한 자세로 하나님의 자비를 ‘간단명료하게’ 선포하되 청중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적절하게 전하십시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72). 특히 키프리아누스는 설교를 위한 성서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폴 스콧 윌슨은 그와 같은 키프리아누스의 성경 해석을 “권위 있는 성서 해석”이라고 부른다. 앞서 살펴본 대로 키프리아누스 시대에는 다양한 이단들이 발흥하며 교회를 위협하고 성도들을 현혹시켰다. 문제는 그들 역시 성경 본문을 근거로 자신들의 이단 사상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성경 해석이 옳으며 그와 같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키프리아누스는 성경 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거를 교회의 구전 전통에서 찾았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교회와 교회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키프리아누스의 모습과 맥을 닿아있다. 올바른 해석을 판단하는 기준은 교회가 사용하는 구전 전통, 곧 신앙의 규칙(the rule of faith)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성경이 문자적으로 이해되지 않거나 신앙의 규칙을 통해서 분명하게 해석되지 않을 경우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설교를 행함에 있어서 키프리아누스는 성경 이외에 다른 교부들의 말이나 책의 내용을 인용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설교 내용을 보다 권위 있는 것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나 저작에서 발견되는 가장 특징 중 하나는 성경 인용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점이다. 성경을 인용할 때마다 키프리아누스는 그 부분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인용 자체가 하나의 ‘선포’가 되는 효과를 내게 했다. 이와 같은 설교 방법론은 오늘날 설교자들에게도 좋은 선례가 된다. 설교 가운데 인용되는 성경 구절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된다. 성경의 말씀들 대부분은 기록되기 이전에 하나의 선포로 세상 가운데 전해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4.08.08 / 이미나 기자

    기독교 렌즈로 보는 문화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
  • 대림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며 보내는 절기이다. 이 기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 바로 ‘수태고지’(受胎告知), 즉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알리는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고 특히 누가복음에서 그 내용이 더욱 세밀하고 감동적으로 묘사된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한다. 이어지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과 마리아의 찬가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쁨을 고조시킨다. 이러한 구주의 탄생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분위기는 수많은 화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실제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와 마주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만 해도 120여 점이 넘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1284~1344)의 <수태고지>는 고딕 미술의 걸작으로 불린다. 이탈리아 시에나 출신인 마르티니는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배제하고 고딕 양식 특유의 정교하고 화려한 색채와 유려한 곡선을 활용하여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냈다. 그의 대표작인 <수태고지>는 이러한 고딕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현재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금박으로 장식된 화려한 배경과 정교하게 묘사된 인물 및 사물을 통해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림 속에서 마리아는 책을 읽던 중 천사 가브리엘이 갑자기 나타나 잉태 소식을 전하자 굳은 얼굴로 옷깃을 여미면서 몸을 뒤로 젖힌다. 그러한 몸짓과 함께 그녀가 입은 어두운 옷이 황금색 배경과 강렬하게 대비되어 화면 전체에 긴장감과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천사 가브리엘의 위로 솟은 날개와 펄럭이는 망토는 그가 하늘에서 막 내려온 듯한 인상을 준다. 무릎 꿇은 천사의 오른손 검지가 화면 중앙 위쪽에 있는 비둘기를 가리키며 이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임을 암시한다.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는 천사와 마리아 사이에 백합이 담긴 물병이 놓여있는데 이 부분이 주목해볼 만하다.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한다. 그래서 수태고지를 묘사한 많은 작품에서 가브리엘은 백합을 든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마르티니는 특이하게 백합 대신 올리브 가지를 선택했다. 백합이 피렌체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독립 도시국가들의 집합체로 시에나와 피렌체는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시에나 출신인 마르티니는 천사가 백합을 들어 마치 피렌체의 영광을 구현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순결을 나타내는 백합을 배제하기도 어려운 노릇이었기에 그는 백합을 화병에 담아 중앙 뒤에 배치하고 천사에게 시에나를 상징하는 올리브 가지를 쥐여주는 묘안을 떠올렸다. 가브리엘이 들고 있는 올리브 가지와 머리에 쓴 올리브 화관은 평화와 왕권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마리아가 잉태할 아기는 세상에 평강과 승리를 가져올 왕과 같은 존재임을 나타낸다. 또한 가브리엘의 입에서 마리아의 귀로 이어지는 문자들은 누가복음 1장 28절의 말씀인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상단의 둥근 장식 무늬 안에는 구약시대에 메시아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한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가 등장하여 구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이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됨을 암시한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는 평면적이고 뾰족한 고딕 양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우아한 감수성과 감미로운 색채로 수태고지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마리아를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거쳐야 할 인간적인 고뇌와 두려움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가고 그녀의 입에서 순종의 고백이 나온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결국 마리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드리기로 결심했다. 12월이 되면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과 다채로운 크리스마스 장식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분위기 속에서 성탄절의 참된 의미가 흐려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밝힌다(마 1:21).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은 어떤 선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는 때로 마리아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뜻을 마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리아의 순종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한 것처럼, 우리의 순종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풍성한 은혜를 주실 길을 열어줄 것이다. 대림절 기간에 마르티니의 작품을 묵상하며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길 바란다. 나아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다가오는 성탄을 기대하고 준비하기를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4.12.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 새는 날개를 단지 하늘을 날기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는다. 때로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날개를 사용한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쬘 때 어미 새는 두 날개를 활짝 펴서 새끼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다. 뜨거운 햇볕을 등지고 있어서 자신은 입을 벌리고 헉헉거리면서도 새끼를 위해 날개로 그늘을 마련하는 것이다. 어미 새의 날개는 새끼에게 피난처이자 안식처이다. 우리의 피난처와 안식처는 어디일까? 찬송가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Under His Wings)를 작사한 미국 출신 윌리엄 쿠싱(William Cushing) 목사는 우리의 피난처와 안식처가 바로 ‘주님의 날개 아래’에 있다고 전한다. 결혼한 지 10년이 되던 해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리자 심히 괴로워했다. 병세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아내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목사의 아내로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헌신했지만, 넉넉하지 못한 생활과 남편의 바쁜 사역을 내조하면서 그녀의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던 것이다.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던 쿠싱 목사는 깊이 고민한 끝에 아내를 위해 사역지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하며 아내와 첫사랑을 나눴던 시어스버그로 돌아가면 아내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내는 그곳으로 이주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쿠싱 목사는 목회 사역과 아내 간호로 인한 과로로 피로가 누적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목소리는 점차 쉰 소리로 변해갔다. 나중에는 성대가 심각하게 손상되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사람들과 글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내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목소리까지 잃게 된 것이다. 목숨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낙심한 쿠싱 목사는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다. “주님, 저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랑하는 아내도 데려가시고 이제는 말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제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말조차 하지 못하는 이 몸을 데려가 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절망에 빠진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다. “너는 내 것이다. 말하지 못하는 입술도, 병든 네 몸도 모두 내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쿠싱 목사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백했다. “주님, 건강한 몸으로 주님께 충성하지 못했지만, 이제 병든 몸으로라도 충성하고자 합니다. 제가 할 일을 알려주세요.” 그 후 그는 돈도 명예도 건강도 그리고 자신의 생명까지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며 살겠다는 믿음의 고백을 담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글이 찬송가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의 가사가 되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찬송가 1절 가사처럼, 그는 ‘밤 깊고 비바람 부는’ 삶의 어려운 순간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좌절과 절망을 넘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 아래 있는 “주 날개 밑”이다. 그의 고백처럼 “주 날개 밑”은 모든 성도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고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만족과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원한 안식과 참된 소망은 오직 주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여전히 예수님은 주의 날개 아래에 거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보호해주신다. 삶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주님께 나아가 참된 평안과 안식을 경험하자.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시는 “주 날개 밑”에 거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시 91:4). 국제신학연구원
  • 2024.11.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하프를 켜는 다윗 왕>
  • 홀로 하프를 연주하는 노인이 보인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듯 그의 머리와 수염은 하얗게 세고 얼굴과 손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다. 품격 있는 손끝으로 섬세하게 하프를 켜는 노인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 평화로움을 자아낸다. 어둠 속에서 어딘지 모를 먼 곳을 바라보며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이 노인은 바로 노년에 이른 다윗이다. 구약성경에서 다윗의 이름은 848번 등장한다. 이는 구약성경의 모든 인물 중 가장 높은 빈도이다. 그만큼 다윗의 이야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한다. 성경에 묘사된 다윗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미술사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어왔다. 대부분 예술가는 다윗을 젊고 용맹한 모습으로 표현하여 그의 강인함과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하려고 했다. 다윗을 모티브로 한 수많은 작품 중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 역시 탄탄한 근육과 강인한 얼굴을 지닌 젊은 다윗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바로크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달랐다. 루벤스가 그린 다윗은 힘이 넘치는 청년이나 위엄 있는 권력자가 아닌 그저 홀로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 늙은 악사의 모습이다. 루벤스가 노년의 다윗을 화폭에 담은 이유는 그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곳에 루벤스의 고향 안트베르펜이 있다. 루벤스는 이곳에서 미술을 처음 시작했다. 그는 23세에 안트베르펜을 떠나 이탈리아에 머물며 고대미술과 르네상스 거장들의 화법을 배웠다. 이로 인해 루벤스의 작품에는 사물의 표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알프스 북부의 화풍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탈리아 고전주의의 특성이 모두 나타난다. 강렬하고 역동적인 구성과 생생한 색채로 이루어진 루벤스의 그림들은 당대의 이목을 끌었으며 바로크 미술이 확립될 수 있도록 큰 영향을 끼쳤다.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거머쥔 루벤스의 삶은 말년까지도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지병인 통풍이 심해지면서 그는 더 이상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루벤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자화상을 보면 통풍으로 뒤틀린 오른손을 장갑 안에 숨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루벤스는 63세의 나이에 통풍으로 인한 심장발작으로 생을 마감하였고 <하프를 켜는 다윗 왕>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얀 보에크호르스트(Jan Boeckhorst, 1604~1668)가 그림의 왼쪽과 하단을 마무리하면서 오늘날의 <하프를 켜는 다윗 왕>이 탄생했다. 말년의 루벤스는 나날이 쇠약해지는 육체와 화려한 명성 뒤에 숨겨진 허무함을 깨닫고 혈기 왕성한 청년 다윗보다 노년의 다윗에게 더 깊은 애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하프를 켜는 다윗 왕>은 그의 강렬하고 생동감 넘치던 기존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보다 사색적이고 고요한 분위기를 풍긴다. 신앙심이 깊었던 루벤스는 40년 권력의 무게를 내려놓고 홀로 하프를 켜며 찬양하는 다윗을 그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찬란했던 인생은 한때 피고 지는 꽃과 같으며 결국 주님만이 참된 구원자이시며 피난처 되신다고 스스로 되새겼을지도 모른다. 다윗은 이를 그 누구보다 깊이 깨달은 사람이었다.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믿음으로 순종했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많은 부와 권력을 누렸으며 영원히 지속할 왕위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도 순식간에 죄악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는 부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죄로 인해 큰 슬픔과 좌절을 경험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 혈육 간의 살상, 부하들의 배신 등 많은 아픔으로 얼룩진 말년에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더욱 통렬히 깨달았을 것이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위대함은 완전함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데에 있었다. 위엄 있는 왕관과 화려한 옷을 모두 벗어버린 채 하나님을 바라보며 정성스레 찬양을 올려드리는 다윗의 모습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우리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또한 삶의 끝자락에서 어떤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을까. 이 땅에서 우리의 인생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소망을 찾을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잡으려고 분주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잠시 쉼표를 찍고, 오늘 이 그림 속 다윗을 깊이 묵상해보자. 다윗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고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을 우리도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 역시 주님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그런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깨닫길 바란다. 또한, 사라질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며 일평생 하나님 앞에 나의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찬양을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4.10.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선교 뉴스
    케냐 영산신학교 2024년 졸업식
  • 아프리카 케냐에 설립된 아프리카 영산신학교(이한용 선교사) 제12회 졸업식이 11월 26일 거행돼 18명의 목회자가 배출됐다. 졸업식에는 오남식·임은미 선교사가 참석해 졸업생들을 격려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복음 사역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이한용 선교사는 “신학교에서 배운 순복음의 신학과 신앙을 근거로,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믿음을 가지고 절망뿐인 상황을 바라보지 말고 희망의 복음을 전하여 아프리카 복음화에 헌신하자”고 강조했다. 졸업식에는 가족과 지인 등 200여 명이 참석해 졸업생들을 축하했다 케냐 영산신학교는 2006년 케냐 교육부로부터 인가를 받고 올해까지 22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이중 32명이 교회를 개척하고 97명이 교회 사역자로 활동 중이다. 특히 남·북수단처럼 복음의 문이 닫혀 있는 국가의 학생들을 훈련시켜 본국으로 파송, 선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돕는데 최선을 다하는 등 동아프리카로 선교 영향력을 확장시킬 계획이다.
  • 2024.12.13 / 오정선 기자

    최성규·우원식 목사 선교사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17일 대성전에서 드려진 주일4부 예배에서 홍콩 선교사로 파송되는 최성규(사진 위)·우원식 목사에게 각각 파송장을 수여하고 홍콩 복음화를 위한 선교사명 감당과 동행하는 선교사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최성규 목사는 교민 대상 홍콩순복음교회 담임으로, 우원식 목사는 현지인 대상 순복음소금과빛교회 담임으로 사역하게 된다.
  • 2024.11.21 / 오정선 기자

    일본 순복음가와고에교회 창립 25주년 기념 예배 
  • 일본 순복음가와고에교회가 창립 25주년을 맞아 14일 기념예배를 드렸다.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영상 축사를 통해 “순복음가와고에교회 창립 25주년은 일본을 향한 우리 순복음 선교의 귀한 결실이자 열매”라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교회로 성장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날 예배는 순복음가와고에교회 담임 타나베 야베스 목사의 사회로 순복음일본총회장 시가끼 시게마사 목사가 ‘일심동체’(요 15:1~7)를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며 “25주년을 기념해 성도들이 성령 충만으로 하나 돼 복음과 찬양이 넘치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교회로 부흥되길 기대한다”고 축복했다. 이날 예배에는 순복음일본총회 도호쿠지방회장 안양원 목사 등 지방회 목회자들이 참석해 순복음가와고에교회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창립 25주년을 축하했다. 2021년 타나베 야베스 목사가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현재는 성인·청년·교회학교로 나눠 예배를 드리며 부흥을 이어가고 있다.
  • 2024.10.17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채정기 선교사(루마니아)
  • 상처로 얼룩진 집시들의 마음, 복음으로 위로하다 집시 마을 곳곳에 교회 개척하고 미션 홈 사역 방과후학교 개설하고 다음세대 교육에도 힘써 생명수가 흐르는 소망의 땅 루마니아에서 중보자들께 감사드립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10월 20일부터 일찍 찾아 온 추위에 겨울을 걱정했는데, 낮에는 기온이 올라 밤과 낮 기온 차이가 많이 납니다. 많은 변화와 빠르게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늘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며 매일 매 순간 “감사와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라는 찬양을 주께 드리며 믿음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루마니아에서 집시 복음화 사역을 하다보면 집시에 대한 일종의 인종적인 편견이 숨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일삼는다는 둥, 생계를 꾸리라고 준 가축과 곡식을 몽땅 먹어치웠다는 둥, 원래부터 그런 인종으로 규정하는 편견이 사람들 사이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집시들은 19세기 중엽까지 노예로 존재했기 때문에 이들과 관련한 다양한 정황들은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저하게 자신들의 느낌과 감정을 노래로, 소수 종족의 한을 춤으로 표현하는 집시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은 금속 세공과 음악 연주입니다. 제가 사역하는 루마니아의 엘리자 마을은 헝가리계·독일계 루마니아인, 헝가리 언어권의 루마니아 집시들 그리고 루마니아인들이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다양한 인종들이 작은 마을에 살고 있기에 사용하는 언어도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그리고 독일어와 집시 방언 등입니다. 물론 행정적인 공용어는 루마니아어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민족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루마니아의 엘리자 마을에서 저는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을 하고 있습니다. 2주 전에는 8명 새신자를 교육하고 침례를 주었습니다. 이곳에 계속 복음이 전파 되도록 기도를 요청합니다. 저희는 집시들 뿐 아니라 이 마을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 독거노인들을 위해 미션 홈을 세우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루마니아 정부로부터 국비 보조를 받기 위해 미션 홈에 대한 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부족한 부분은 제자 교회들이 조금씩 충당해주길 요청했습니다. 시간은 소리도 없이 빠르게 흐르고 하루하루 치러야 할 일들이 많기만 합니다. 일에 묻혀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과오를 최소한 줄이기 위해 가정에서, 사무실에서, 선교관 건축 현장에서, 어디서든 틈나는 대로 기도모임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지역교회들의 요청과 필요에 따라 더 많은 설교도 하고 있습니다. 사투마레를 방문했을 때는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집시들과 루마니아어를 사용하는 집시들의 차이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으로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 되어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면서 집시들의 교회가 주변 작은 마을마다 세워지길, 전국의 루마니아 집시들이 주께 돌아오길 기대하며 복음의 진리 전파에 나서고 있습니다. 집시들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18~1989) 독재 정권 아래서 핍박, 고통 등을 당해 마음 아픈 사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시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방문해 복음으로 위로하며 시골 마을과 자매결연해 집을 보수하거나 전기를 놓고 재정적 도움을 주는 등 돕고 있습니다. 9월 중순부터 시작한 방과후학교에서는 55명의 집시 아이가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대개 학교에 급식비를 내고 점심을 사먹게 돼 있는데 급식비를 낼 수 없는 환경이라 방과후학교에서 점심을 굶는 아이들을 위해 급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집시 선교 측면에서 미션홈과 방과후학교 운영은 아주 필요합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에 한해서 점심을 제공하고 있기에 집시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점심을 먹은 후에는 미션홈에 남아 신앙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며 학교에서 배웠던 것까지 복습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아이들의 교육에 필요한 노트북 컴퓨터 지급을 위해 기도 중에 있습니다. 또한 130㎞ 떨어진 루데슈티에 집시들 교회가 세워져 약 160여 명이 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에 다음세대를 위한 모임 장소를 증축해 아이들 신앙 교육을 힘쓰려고 합니다. 후원해주신 귀한 물질로 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으니 마무리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 2024.11.29 / 오정선 기자

    김한수 목사(독일)-세대교체로 선교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베를린순복음교회
  • 지역 사회에 한국 문화 알리며 복음 전파 코로나 팬데믹으로 힘들었던 베를린순복음교회는 이제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다. 교회 1세대인 연로하신 파독 광부와 간호사 출신 성도들이 코로나로 인해 소천 또는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성도 대다수를 차지했던 유학생들도 본국으로 귀국했다. 장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 어떻게 교회 사역을 이끌어가야 할지 참으로 막막했다. 그러던 중 한 젊은 집사님 가정이 베를린순복음교회를 찾아오셨다. 홍콩에 살면서 홍콩순복음교회를 출석했던 이 가족은 남편이 직장에 해외 연수를 신청하면서 어린 세 자녀 교육도 시킬 겸 독일에 왔다고 했다. 에너지가 넘치는 이 가정이 우리 교회를 출석하면서 교회에는 새 부흥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어린 세 자녀가 친구들을 교회에 데리고 오면서 교회학교 아이들이 늘었고, 아이들이 늘자 주변 이웃들이 자녀들을 교회학교로 보냈다. 또 자녀를 따라 젊은 부부들이 교회에 오기 시작했고 교회에 기둥같은 일꾼들이 세워졌다. 막막했던 사역의 길 앞에서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간구할 때 하나님이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고 놀라운 일을 보여주신 것이다. 독일 사역 초기부터 힘들었던 코로나 기간에도 우리는 특히 새벽기도를 쉬지 않고 드리며 복음 사역의 확장을 간구했다. 현재 베를린순복음교회는 장년층의 유입으로 점차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50여 명의 성도들은 주일이면 아이들과 특별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모든 세대가 한 자리에서 찬양으로 예배를 시작하다 찬양이 끝날 무렵 모든 어른들이 아이들을 향해 축복송을 부른다.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들이 많다보니 자연스레 우리 교회 교회학교 소식이 주변에 알려졌고 교회학교가 점차 부흥하고 있다. 그래서 내년도 우리 교회 목표는 교회학교 시설 및 교사 확충이다. 올해 우선적으로 교회 앞마당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시설을 설치했다. 모두 성도들의 자발적인 헌신으로 만들어졌다. 놀이시설에서 아이들이 맘껏 뛰어놀고 그 모습을 보는 어른들의 마음은 그저 행복하다. 교회 안에 또 다른 기쁜 소식은 교회의 문턱을 넘어서는 지역 주민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코로나 기간 문을 닫아야 했던 태권도장이 교회학교 시설을 무료로 사용하게 되면서 교회는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문화원이 됐다. 마침 불어온 K-문화 열풍으로 무슬림도 교회 문턱을 넘어서고 있어 전도의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우리는 해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나눔 행사를 진행한다. 어른에서 아이까지 다양한 음식과 생필품을 가져와 교회 앞마당에 펼쳐 놓고 필요한 이웃들이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한다. 지난해 교회 뒤편에 사는 한 난민이 “실직을 해서 먹고 살기 막막했는데 고맙다”며 통조림 여러 개를 가져간 적이 있다. 어려운 이웃들을 돌볼 수 있는 사명까지 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했다. 코로나 이후 활기를 찾은 베를린순복음교회는 이제 새 도약을 위해 많은 비전을 계획하고 있다. 가장 큰 일은 오래된 교회 시설 보수다. 지난해 월계순복음교회 최화용 목사님의 후원으로 청년들이 독일을 방문해 교회 보수 봉사를 진행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 권사님의 아들은 군 제대 후 단기 선교로 독일을 방문해 교회를 돕기로 했다. 독일 종교청으로부터 임대받아 사용하고 있는 우리 교회를 잘 리모델링해서 사용할 계획이다. 또 다른 계획은 헌신된 일꾼 양성을 위한 제3기 제자훈련 진행이다. 매주일 모여 6개월간 교육하면 청년들은 교회부흥과 독일 복음화를 위한 일꾼으로 성장 될 것이다. 젊어지고 있는 베를린순복음교회를 통해 하나님은 분명 놀라운 일을 보여주실 것이라 확신한다. 이를 위해 주어진 선교사명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베를린순복음교회의 부흥 역사를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의 힘찬 중보기도를 간절히 요청드린다.
  • 2024.11.01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김기태 선교사(일본)
  • 일본 군마현,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순복음의 기적 코로나 위기 속 부흥의 불길 소도시에서 타오르다 할렐루야! 일본 군마현 마에바시시에서 순복음군마교회를 섬기고 있는 김기태 선교사입니다. 2020년 2월 코로나 팬데믹의 혼란 속에서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이 땅에 왔습니다. 당시 우리 교회는 주일 예배 출석이 2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공동체였습니다. 마에바시는 도쿄에서 북서쪽으로 100㎞ 떨어진 조용한 소도시입니다. 한때 한인들로 북적였지만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많은 이들이 떠나 현재는 약 1000명 미만의 한인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곳에서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영훈 목사님이 항상 강조하신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으로 이 난관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코로나 확산으로 대면 모임이 어려워지자 ‘사랑의 희망박스’를 만들어 성도들 가정을 직접 방문하며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명의 성도를 위해 오전 9시 예배를 새로 개설해 때로는 혼자서라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작은 실천이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확산되는 팬데믹 가운데 우리는 온라인 사역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매주 예배와 설교를 라이브로 중계했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를 떠났던 이들이 우리 공동체와 연결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작은 시작이 큰 변화의 불꽃이 되었습니다. 청년부와 교회학교에서 기적 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부임 당시 존재하지 않았던 청년부가 이제는 매주 10명 이상의 활기찬 젊은이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기도회와 독서 모임을 시작했고, 이것이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청년들은 이제 교회학교 교사, 찬양팀, 통역 봉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의 자녀 세 명으로 시작한 교회학교는 현재 매주 10명의 아이가 즐겁게 예배를 드립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여름성경학교의 폭발적인 성장입니다. 첫 해 8명으로 시작한 작은 모임이 올해 4회를 맞이했는데, 22명의 아이들이 참가하는 큰 행사로 발전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영적 불모지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주일 예배 평균 출석 인원이 두 배 이상 늘어나 매주 50명 이상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등록 교인은 70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중 약 30%가 일본인 성도입니다. 일본인들에게 유일신 사상을 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일본의 토속 종교인 신토를 바탕으로 한 다신교적, 범신교적 종교관을 가진 일본인들에게 유일신 개념을 소개하는 것은 큰 도전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경험한 일본인 신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헌신적입니다. 이는 순복음의 영성이 일본 선교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 신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일본인 리더십 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난 5년간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육관 겸 사택을 구입할 수 있었고 교회 묘지까지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고령의 한인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교회에 대한 헌신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메시지를 바탕으로 다양한 사역을 정기적으로 펼치고 있습니다. 매년 ‘한국음식 바자회’,‘아나바다 바자회’를 개최해 선교와 구제에 힘쓰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 연 2회 12주 과정의 성경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청년부와 장년부를 위한 독서모임, ‘건강한 교회와 행복한 성도’라는 표어에 맞게 부쩍 늘어난 40~50대 성도들을 위한 맞춤형 영성 프로그램을 개발해 운영하고자 합니다. 또한 일본인 성도들을 위한 특별한 선교적, 목회적 맞춤 돌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 여러분, 영적 불모지인 일본에 부흥의 불꽃이 더욱 힘차게 타오르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은 소도시에서 시작된 순복음의 불꽃이 전 일본을 밝히는 큰 불길로 번져나가기를 소망합니다. 이영훈 목사님의 일본 선교에 대한 비전과 성도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으로 반드시 일본 복음화의 새 역사가 열릴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 2024.10.04 / 오정선 기자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
    이재훈 선교사(에티오피아)
  • 에티오피아 수도 외 다른 지역의 내전 및 반군활동으로 인해 지방 사역에 어려움이 큽니다. 원활한 사역 진행을 위해 안전과 평화가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2025.01.10 / 오정선 기자

    정지영 선교사(파라과이)
  • - 2024년을 잘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기대감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 수양관 건축을 계속할 수 있도록 - 신학교 학생들이 10명을 넘을 수 있도록
  • 2024.12.20 / 오정선 기자

    홍정연 선교사(대만)
  • - 성경공부 및 소그룹 모임 통해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 교회 부흥과 재정을 위해 - 실버 및 어린이 사역을 위해 - 교회 차량 구입을 위해
  • 2024.12.13 / 오정선 기자

    순복음영성스케치
    기도의 종류(Ⅳ) - 중보 기도
  • 세계적인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는 “위대한 일을 행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먼저 기도의 사람을 세우신다”고 말했다. 그가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 스스로가 기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그를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던 무명의 기도 동역자들의 영적 지원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역시 그의 사역에 있어 중보 기도의 능력을 인정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기도의 사람 백 명을 원했다고 한다. 타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하고 연약함과 어려움을 지탱해주고자 하는 중보 기도는 영적 지도자를 위한 중보 기도로 이어질 때 더욱 강한 능력으로 나타난다. 1. 중보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 중보(intercession)의 문자적 의미는 ‘사이에 나아가다’, ‘상치하는 양자를 화해하기 위해 행동하다’의 의미가 있으며 법정에서 의뢰인을 돕는 변호사나 법률적 행위를 대신해주는 대리인의 개념을 갖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앞선 중보의 개념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하는 최고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다. 2. 예수님의 중보 기도와 훈련 모델 능력 있는 중보 기도자가 되고자 소원하는 사람은 단연코 최고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한 명의 중보 기도자가 세워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중보 기도자로서의 소원과 결심이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최우선 순위는 기도였는데 어떠한 때에 기도하셨는지를 알아보면 중보 기도자로 서는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1)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침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다(눅 3:21~22). (2)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전성기 때에 많이 기도하셨다. (3) 진리에 대한 계시가 필요할 때 기도하셨다. (4) 제자들을 선택하고 훈련하실 때 기도하셨다. (5) 사랑과 용서가 필요할 때 기도하셨다. 3. 중보 기도의 올바른 태도 중보 기도자로서 훈련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 증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아래의 5가지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기만 해도 효과적인 중보 기도자로 설 수 있다. (1) 자발적으로 중보 기도하라 억지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이다. (2) 구체적으로 중보 기도하라 중언 부언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마 6:7). 구체적인 기도는 응답을 통하여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된다. (3) 올바르게 중보하며 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고 정당한 것을 구해야 한다. 응답이 올 때까지 찾고 두드리는 실행의 과정을 능동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4) 전심으로 중보하며 구하라 두 마음을 품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약 1:8). 이런저런 생각이 많으면 기도에 집중하기 어렵다. 마음이 분산되는 것을 막는 실제적인 방법은 크게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5) 쉬지 말고 중보 기도하라 기도는 호흡이요 습관이 되어야 한다. 한꺼번에 일시적으로 많은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자주 드리는 기도가 효과적이다. 4. 영적 지도자를 위한 중보 기도 중보 기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지도자를 위한 기도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지도자를 판단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시 66:18). 그리고 아래와 같이 영적 지도자의 영성과 생활과 사역의 3가지 영역에서 중보하며 기도하면 사역에 큰 능력이 나타난다. (1) 영성을 위하여(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기도) 지도자의 위치에서 듣게 되는 비난과 겪게 되는 억울한 일들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2) 생활을 위하여(개인적인 삶을 위한 기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며, 행복한 가정의 모범이 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3) 사역을 위하여(사명 감당을 위한 기도)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끝까지 사명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어 가야 한다. 성도들은 영적 지도자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끝> 김현동 선임목사(교무국 기도처지원팀)
  • 2023.12.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Ⅲ) - 방언 기도
  • 올해는 우리 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이 창립한 지 70년이 되는 해로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오순절 운동을 되돌아보게 한다. 오순절 운동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려는 운동으로서 성령 침례의 결과가 방언, 신유, 능력으로 나타남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성령 충만과 방언 기도를 강조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신유 사역과 사회 참여를 통하여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했다. 오늘은 우리 교회와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부흥의 큰 원동력이 된 방언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 방언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의 영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다짐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1. 방언 기도의 의미와 성경 상의 언급 방언 기도는 영적인 언어로 말하는 기도로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며 개인 신앙 발전에 큰 유익을 주는 기도이다. 방언은 성령 침례의 외적 증거이며 성경 많은 곳에서 성령 침례의 표적으로 나타난 방언 기도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행 2:1~4), 둘째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집안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의 성령의 임재(행 10:44~46), 덧붙여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의 성령의 임재(행 19:5~6)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2. 현대 오순절 운동과 방언 기도 성경 상에 등장하였던 방언 기도는 20세기 초 현대 오순절 운동에서 재발견된다. 1901년에 감리교 목사 찰스 팔함(Charles F. Parham)은 그가 가르치는 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던 중, ‘방언이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임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이렇게 발견한 말씀의 내용을 철저히 믿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침례와 방언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작이다. 이어 방언 기도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은 1906년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의 아주사 부흥으로 이어졌다. 방언과 방언 통역, 예언, 축사, 신유 등이 강력하게 나타났던 아주사 거리 집회는 무려 3년이나 지속되며 기도의 불길을 이어갔다. 3. 방언 기도의 유익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1) 방언 기도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준다. 성경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방언)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다(행 2:4). 한편 믿는 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한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막 16:17). 성령 침례를 받으면 방언이라는 표적을 통하여 분명하게 성령 충만의 증거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방언 기도를 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에게나 듣는 자에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가져다준다. (2)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나누는 비밀한 언어이다. 방언 기도에 대해 비교적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을 하나님과 비밀한 영적 교통을 나누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고 하면서 또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 14:14)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비밀의 기도이기 때문에 사탄도 알아듣지 못한다. (3) 방언 기도는 자기 신앙의 덕을 세운다.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전 14:4)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것의 원어적 의미는 ‘집을 지어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방언 기도를 통하여 마치 집을 짓듯이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다. (4) 방언 기도는 마음을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시켜준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잠재 의식 속에 있는 모든 불안, 초조, 절망, 미움, 원한, 상처 입은 것을 깨끗이 청산해 준다. 마음의 공간이 방언 기도를 통하여 깨끗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되어 절대긍정의 마음으로 변화 된다. (5) 방언 기도는 연약함을 돕는 탄식의 기도이다. 성경은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고 있다(롬 8:26~27). 방언 기도를 통하여 탄식하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6) 방언은 깊고 오랜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증거하고 있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시간이 길어야 한다. 방언 기도는 기도의 언어로서 기도를 오래 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코로나19 엔데믹 선언 이후인 지금은 성도 개개인이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한 영성을 회복하고 교회 내외적으로 전례 없는 부흥을 꿈꾸어야 할 때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교회 성령 충만과 부흥의 토대가 된 오랜 시간의 깊은 방언 기도를 회복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 모두가 부흥으로 향하는 최선의 지름길을 제공해 줄 것이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1.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Ⅱ): 대적 기도
  •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한 영들과의 영적 전쟁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적 전쟁에 대해 무의미하게 여기거나 막연히 신비적인 것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성경 여러 곳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오늘날도 실제적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체험되고 있다. 이러한 영적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적 기도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 권세(창 3:15)에 힘입어 선포하는 대적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대적 기도의 의미와 특징 대적 기도는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에 힘입어 악한 영들에게 명령하고 선포하는 기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형식이지만 대적 기도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으로 간구가 아닌 명령과 선포의 형태를 지닌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다(눅 10:19).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악한 영들을 대적함으로써 승리하였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이 주신 권세와 능력을 믿고 명령하며 선포함으로써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2. 성경에 나타난 대적 기도 성경은 영적 전쟁을 실제적으로 묘사하면서 대적 기도의 상대인 악한 영들과 이들을 어떻게 상대하여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1) 대적 기도의 대상 성경은 우리가 물리쳐야 할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하거나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한다. 이러한 성경의 언급을 통해 우리의 대적이 바로 ‘마귀’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2) 대적 기도의 사례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는 방법(막 9:25)과 명하여 내어 쫓는 방법(눅 8:29)을 통하여 대적 기도를 행하셨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에 힘입어 빌립보의 귀신 들린 여종을 향하여 명하였고, 귀신은 즉시 나오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는 명령과 선포는 오늘날 대적 기도의 대표적인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3. 대적 기도의 방법 대적 기도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영적 대결이므로 마치 전쟁터에서 배수의 진을 친 것과 같은 비장한 각오로 준비하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1) 보혈을 의지하는 기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의 보혈에 대한 예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에서 보호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출 12:13).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흘려주신 보혈의 권세를 갖고 있으므로, 보혈에 의지하는 기도는 마귀에게 대적하는 가장 큰 기초가 된다.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들은 매일 같이 마귀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특별히 개인의 감정과 사회적 관계 그리고 환경 가운데 보혈을 뿌리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예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는 기도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시어 오신 이유는 우리의 상실한 권세를 회복해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으나 부활하셔서 승리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8:1).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요 1:12). 성경은 예수님의 권세에 의지할 때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고(마 16:18), 매고 푸는 권세가 있어서 마귀들을 묶고 포로된 자들을 구원하는 권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마 16:19). (3)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기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대적의 수중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겼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패배 의식에 빠지고 좌절과 낙심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대장 되신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주셨으며, 흉악과 결박에서 놓임 받게 해주심을 굳게 믿고 마귀를 대적하며 기도해야 한다. 4. 대적 기도의 실제와 유익 대적 기도를 통하여 의심, 두려움, 교만, 불안, 낙심과 염려 등 마음의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사라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적 기도는 육체의 치유와 믿음의 회복도 가져다준다. 우리는 각종 암, 우울증, 중풍, 고혈압, 당뇨병, 만성 피로 등 육체의 질병에 대해 꾸짖고 명령하고 선포하여 승리할 수 있고, 영적 성장과 신앙생활에 방해를 주는 악한 영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대적하며 기도할 수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사람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괴롭히는 악한 원수 마귀야! 지금 즉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떠나갈지어다!” 이러한 선포를 통하여도 우리는 마귀와 효과적으로 대결하고 영적 전쟁의 승리에 다가설 수 있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0.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시보는 영산 신학과 목회
    영산의 세계선교
  •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꿈과 비전으로 충만하게 된다(행 1:8). 성령님은 영산에게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세계선교의 꿈을 부어주셨다. 그때부터 영산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은빛 날개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꿈’을 품었다. 그 꿈처럼 영산은 당시 해외 여권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때 이미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전 세계는 주님의 교구입니다.” 웨슬리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영산의 고백은 절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머물렀던 수많은 선교 현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기적의 장소였다. 영산이 세계선교를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된 배경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5월 세계오순절총회를 마친 영산은 100일 동안 18개국, 39개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던 그는 결국 스위스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밑에 놓인 엽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으니 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종이 되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적고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쇠약해졌던 영산의 몸은 이튿날이 되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그때의 체험은 영산의 사역 가운데 세계선교를 항상 강조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영산은 유럽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계 교회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국제기관을 조직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6년 11월 4일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이하 CGI: 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영산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성장에 관한 노하우를 전 세계 교회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부흥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CGI는 설립 이래 2022년 현재까지 한국을 비롯한 100여 개국 이상에서 총 600회 이상 CGI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여기에 전 세계에서 연인원 120만명이 참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계선교와 교회 성장에 이바지한 CGI는 2022년 10월 이영훈 목사를 제2대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하면서 ‘다음 세대의 부흥’을 외치며 제2기 사역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산은 세계선교의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000년 3월 28일 DCEM(David Cho Evangelistic Mission)을 설립했다. 이 기구를 통해 전 세계 선교지와 선교단체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선교 자원의 교류에 힘썼다. DCEM은 교파를 초월해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심어주는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영산은 그 목회 사역 동안에 약 600회 이상의 해외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런 왕성한 사역은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과 열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영산의 선교 사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서구권의 기독교 인구가 서구권의 기독교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기독교 신학이나 선교가 서구권 교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서구권 교회는 갈수록 쇠퇴를 거듭했고, 반대로 비서구권의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영산의 세계선교 사역은 기독교 선교의 주체를 서구권 교회에서 비서구권 교회로 전환하는 데 아주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산은 선교가 ‘순복음’의 최우선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진정한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이고 선교하는 성도가 진짜 ‘순복음성도’(Full Gospel Christian)이다. 교회가 선교를 멈추는 순간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영산 안에 넘쳤던 복음의 확신과 순복음의 영성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하나님 사명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David Yonggi Cho’라는 이름은 안다”라는 말이 수많은 증인에 의해 회자된 것만 보아도 그가 가진 세계선교의 열정과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순복음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나아가 선교하는 삶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선교에 평생을 바친 영산의 삶이었고, 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은 모든 순복음 성도들의 꿈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의 본을 따라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히 12:1). 오늘날 교회가 영산으로부터 반드시 전해 받아야 하는 믿음의 영적 바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교의 바통’이다. 이제 영산의 뒤를 이어 우리도 성령 충만함 가운데 ‘선교 바통’을 이어받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계선교의 꿈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산의 신유 사역 
  •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그의 핵심적인 목회 철학 중 하나였다. 영산은 신유의 기적이 과거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역임을 확고히 믿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으로 값없이 병 고침 받는 것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산이 믿었던 신유의 은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자 ‘아직’, 그러나 반드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영산은 치유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믿는 자의 부활을 보았다. 그래서 영산은 목회 현장이나 부흥회 사역에서도 병 고침을 강조했는데,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질병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거리는 수없이 많다. 영산이 이같이 신유를 강조하게 된 것은 어떤 특정한 치유 신학을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를 ‘신유의 종’으로 만든 것은 그가 처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 경험했던 치유의 하나님 때문이었다.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주님을 만나서 완치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또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 중풍에 걸린 여인이 낫고 걷지 못했던 소년이 일어나 뛰며 듣지 못했던 사람이 듣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영산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과 목회 현실에서 신유의 역사를 분명하게 체험했기에 영산은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의 신유 사역은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영산의 개척교회가 빈민촌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영산은 신유를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적으로 보고 목회 사역에 열심히 적용하고 실행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 신유 사역”(막 16:18)이 복음 전파에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회고할 때도 신유 사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복음에 저항적이던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을 치료받고 은혜를 받아 복음의 말씀을 세상에 나아가 강력하게 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신유 공동체로 보았다. 영산의 신유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믿음이다. 영산은 그 어느 목회자보다도 병 고침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선포했고 신유의 기적도 많이 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성령이 필요에 따라 자신을 통해 은사를 나타내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산 자신이 분명히 받았다고 주장하는 은사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은사’였다. “내가 받은 은사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습니다.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 뒤에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천막교회 시절에 나타났다. 걷지 못하던 소년이 영산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그가 낫는다는 것을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영산이 한 시간이 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자 뭉게구름 같은 믿음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산은 그때의 기분이 마치 지구를 자기 손으로 밀면 지구가 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간증한 바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할 때 영산은 그 소년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영산은 오늘날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영산에 따르면 신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셔서 은사를 베푸시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산은 신유가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분명히 믿었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신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에 자신의 아픈 부분에 손을 얹고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을 통한 성령의 신유 사역은 여의도순복음교회뿐 아니라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신유의 복음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순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유익을 주었다. 앞으로도 영산의 신유 사역의 원리를 계속 연구하고 실행함으로 새로운 신유행전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길 희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문서·방송 선교의 선구자…1988년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창간
  • 영산은 미디어의 활용이 미미하던 시절, 문서 선교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사역에 적용한 선구자였다. 영산은 자신이 가진 뜨거운 선교적 영성을 담아내어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순복음의 신앙이 한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떤 교회보다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서 전도』의 저자 조지 버워는 “기독교 문서는 인쇄된 선교사”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 선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영산은 누구보다도 문서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역에 적용하였다. 1964년 당시 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순복음지』를 발간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78년에 이르러서는 영산의 설교와 칼럼, 성도들의 신앙 간증과 구역 성경 공부 및 교회 소식을 담은 『순복음뉴우스』가 되었다. 이후 『순복음가족신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문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영산은 또한 순복음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잡지 『신앙계』를 창간함으로 문서 선교의 폭을 확장했다. 『신앙계』는 기독교의 대중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양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기독교 잡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대중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신앙계』를 능가하는 잡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앙계』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운동의 건전한 보급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신앙계』야말로 오순절 신앙을 한국교회에 널리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영산의 문서 선교의 열정은 『순복음가족신문』과 『신앙계』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한 이단 종교 단체가 일간 신문을 발간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산은 만약 그 단체에서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일간지 창간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988년 세계 최초의 기독교계 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정부와 사회에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산은 신문사를 설립하는 과정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근거 없는 비난의 목소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복음 실은 일간지 『국민일보』는 매일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땅에 전파하는 발 없는 전도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 정신으로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로서 한국 교계의 대사회적인 발언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 문화의 채널로써 한국 사회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 사명도 이뤄가고 있다. 영산의 『국민일보』 창간은 대한민국 1200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스컴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영산은 문서 선교뿐 아니라 방송 선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영산은 복음 전도의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방송 선교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던 영산은 1966년 라디오 설교와 1979년 컬러TV 방송을 송출했다. 영산의 라디오 설교 방송은 1979년, 1980년 연속, 전국 청취자 애청 프로그램 조사 결과 청취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청취자가 많았다. 이처럼 한국교회 방송 선교의 선구자는 단연 영산이었다. 당시 흑백 TV에 익숙했던 공중파 제작자들이 방송 장비와 시스템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견학을 올 정도였다. 방송 선교는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영산의 방송 선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위성과 인터넷을 활용한 예배와 설교 실황은 각 지성전 및 지교회 설립과 더불어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영산의 방송 선교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KCWC사의 특별 기획으로 주일 예배 실황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필리핀, 남아공 등 25개국에 동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산의 성령 충만의 복음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함께 전 세계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산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 설교뿐 아니라 설교를 전달하는 매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영산의 설교와 성령 충만의 영성은 멀티미디어 사역 시스템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이러한 사역이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복음의 메시지는 불변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영산의 멀티미디어 사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유훈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9.23 / 김용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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