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권혁세 목사(동대문성전 담당) - 분별하는 그리스도인
  • 손 안의 컴퓨터인 스마트폰은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개발 후 전 세계 인구의 약 67%가 사용하고 있으며 전화 통화는 물론 업무, 쇼핑, 내비게이션, SNS 등 스마트폰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또한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의 상황도 확인할 수 있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스마트폰 사용은 사용자의 문제해결 및 의사결정능력을 떨어지게 합니다. 실제로 주변에서 의사 결정을 할 때 챗GPT에게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으로 의사 결정을 하는 것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방대한 정보 가운데 유튜브와 같은 AI 알고리즘을 통한 맞춤 서비스는 내가 관심 있고 좋아하는 것을 계속 보게 됩니다. 이는 내 생각은 옳고 내 생각은 세상과 같다고 판단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하게 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사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진리를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분별은 세상 물정에 대한 바른 생각이나 판단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분별력’에서 일상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아는 영적인 통찰이자 경험지식이 분별이며, 우리가 각자의 소명과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주님께 합당하게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방향에 귀를 기울이며 격려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분별이라고 했습니다. 분별하지 못하고 선악과를 보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좋아 보여 사명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옳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옳은 것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럽지 않도록 힘쓰는 헌신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좋음과 하나님 말씀으로 옳음을 분별하여 좋음이 아닌 옳음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고 부끄럽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하나님의 비전이 나의 비전이 되는 하나님의 일꾼이며 예수님의 좋은 군사인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2025.04.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차진호 목사(양서성전 담당)  - ‘도마’ 도 부활을 믿었습니다
  • 2023년 7월 서울에서 열린 ‘2023 청소년 사역 콘퍼런스’에서 2021년 26개국 2만4870명의 기독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글로벌 리서치 결과가 발표됐다. 설문 내용 중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후 부활한 것을 믿느냐’는 질문에 다른 나라 기독 청소년은 33%가 ‘그렇다’고 대답했으나 한국 기독 청소년은 28%만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학교에 출석하는 학생들 100명 중 72명은 예수님의 부활 신앙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교회학교 학생들의 믿음은 다른 나라 기독 청소년들의 믿음보다 많이 떨어진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 한국교회 청소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도마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우리는 도마를 기억할 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손가락으로 예수님의 몸에 난 창 자국을 만져본 이후에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겠다고 했던 도마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불신앙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의심투성이 도마는 과연 평생 불신앙으로 살다가 죽었을까? 그렇지 않다. 본인은 도마가 불신앙에서 부활 신앙으로 180도 바뀌었다는 증거를 직접 목격할 기회가 있었다. 2005년 여의도순복음교회 대학청년국 월드미션 지도목사로 있을 때 청년들과 인도 남부 지역에 위치한 첸나이라는 도시로 단기선교를 갔다. 그 곳에서는 도마가 엄청 믿음이 좋은 예수님의 제자요 선교사로 알려져 있었다. 도시 곳곳에 도마의 이름이 들어있는 교회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교회들을 방문할 때마다 예배실과 복도 벽에 걸려 있는 도마의 순교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그 그림들 속에는 기도 중이던 도마가 한 자객의 창에 찔려 순교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의심 많았던 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 신앙으로 인도에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런 도마의 순교를 통해 첸나이를 중심으로 인도 남부 대부분의 도시에는 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많은 영혼을 구원한 도마의 흔적이 남게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평상시 의심이 가득했던 불신앙의 도마가 순교하기까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파했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마가다락방의 성령 체험이었다. 바람 같은 성령, 불같은 성령을 체험함으로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고 불신앙이 부활 신앙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제 100명 중 100명 모두가 부활 신앙으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교회 모든 성도가 부활 신앙으로 거듭난 제2의 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2025년 부활절이다. 우리 교회의 교회학교 친구들과 각자의 가정의 자녀들에게 부활을 기념하는 달걀을 선물하면서 부활의 예수님도 함께 선물했으면 좋겠다.
  • 2025.04.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김남준 목사(남대문성전 담당) - 십자가로 가는 길
  •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과 핍박을 받으신 후 십자가로 가는 길에서 만난 첫 번째 사람은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그는 온갖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서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었던 예수님을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되었을 때 심정이 어땠을까? 성경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마 27: 32). 그렇다. 그는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까지 함께 걸어간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을 향해 욕하며 소리치는 사람들과 그들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는 예수님을 바로 옆에서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 구레네 시몬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안타깝게도 성경에는 그때 그의 생각이 나와 있지 않다.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는 길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이 구레네 시몬 역시 그의 마음이 뒤흔들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뭐지? 왜? 죄도 없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거지? 왜?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을 저런 긍휼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거지?” 하면서 그의 마음이 뒤흔들렸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사건 이후 구레네 시몬은 결국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마가복음 15장 21절에 구레네 시몬의 이름이 다시 등장하는데, 우리는 그에게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두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 16장에 그 두 아들 중 루포의 이름이 다시 등장한다. 사도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 즉 구레네 시몬의 아내를 향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던 구레네 시몬을 통해 결국 그의 온 가족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 우리 역시 때론 억지로 십자가를 감당해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생각할 때 스스로 자원해서 감당해야 은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감당하면 그 속에 은혜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감당해야 할 십자가는 무엇이 있는지 묵상하고 그 십자가를 반드시 감당해내자. 우리가 십자가를 감당해내면 그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 2025.04.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102) 사도행전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②
  • 지금까지 다양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성령께서 임하시는 장면이 사도행전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확인해 보았다. 사도행전은 또한 기도를 통해 영적 리더를 세워 가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2. 기도와 영적 지도자의 연관성(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1) 영적 지도자나 사역자를 선택할 때의 기도 (4) 바나바와 바울은 제1차 선교여행을 통해 세운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했다(14:23). 이 구절은 이방 지역에서 장로들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증언해 준다. 2) 기도는 사도의 직무 중 주요 요소 초대교회가 급성장하여 믿는 자들이 많아짐에 따라 구제하는 일이 원활히 되지 않자 일곱 ‘집사’(원어:봉사자)를 따로 세우고, 12사도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만 힘쓰기로 했다(6:4). 3) 영적 지도자들의 고난 중의 기도 (1)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마지막까지 기도를 드렸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7:59).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 그런데 이 기도는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떠올리게 한다(눅 23:34, 46 참조).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예수님처럼 살다가 예수님처럼 숨을 거둔 참 제자로 소개된다. (2)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심하게 매 맞은 후 감옥에 갇혔지만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다(16:25). (3)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서 고별설교를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고 눈물로 작별했다(20:36~38). (4)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두로에 들렀다가 다시 떠날 때 제자들이 처자와 함께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작별했다(21:5~6). 3. 기도의 생활화 1) 기도는 초대교회의 생활의 주요 요소 (1)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성도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2:42). (2) 헤롯왕(아그립바 1세)에게 잡혀 감옥에 갇혀서 죽을 위험에 처했던 베드로를 주의 사자가 구출해주자 베드로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갔는데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12:12). 2) 규칙적으로 기도 생활을 하는 모습 (1)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 시(오후 3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美門) 앞에서 나면서부터 못 걷는 자를 고침(3:1). (2)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10:2). 그가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할 때 환상을 보고 베드로를 초청해서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말씀을 들었다(10:3, 30). (3) 베드로가 “제 육 시(정오) 기도 시간”에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 환상을 보고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10:9). (4) 바울이 빌립보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유대인의 회당이 없어서 안식일에 혹시 “기도할 곳”(원문: 프로슈케, ‘기도처’)이 있나 해서 강가로 나갔다가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를 만나 침례를 베풀고 주님을 영접하게 했다(16:12~15).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5.04.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1) 사도행전의 기도에 관한 가르침①
  • 지금까지 사도행전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을 정리해 보았다. 이번에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과 기도는 사도행전의 전편인 누가복음의 공통된 주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신약성경의 그 어떤 저자들보다 성령과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1. 성령과 기도의 연관성 바울과 마찬가지로(롬 8:26, 엡 6:18 참조) 누가도 사도행전에서 기도와 성령이 밀접한 관계를 기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1) 성령을 받기 위한 합심기도 (1)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명령(1:5)에 순종하여 열한 사도들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을 때(1:14),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이들 가운데서 초대교회가 태어나게 됐다. (2) 오순절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믿는 자들)가 전심으로 기도하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2:1~4). (3) 베드로와 요한이 석방되어 돌아오자 형제들이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마쳤을 때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전했다(4:31). 이것은 성령 재충만에 대한 중요한 증거 구절이다. 2)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심 (1)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2:38)라고 설교했다. (2) 전도자 빌립(21:8)을 통해 사마리아가 복음화 되자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파송해 사마리아 신자들을 안수 기도하여 성령 받도록 했다(8:14~17). (3) 다메섹의 “제자”(그리스도인) 아나니아가 사울이 머물고 있는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할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9:17) 됐다. 나중에 사울(로마식 이름은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라고 밝힘으로써 방언의 은사를 받았음을 분명히 했다. (4)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요한의 침례만 알고 있었던 열두 명 정도의 제자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베푼 후 안수하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19:1~7). 2. 기도와 영적 지도자의 연관성 1) 영적 지도자나 사역자를 선택할 때의 기도 (1) 열두 번 째 사도 선택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열두 사도에 들어갈 사람을 뽑을 때,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님께 택하신 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인지를 보이시옵소서…”라고 기도한 후에(1:24~25)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택했다. 예수께서도 열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 산에 올라가 밤새워 기도하셨다(눅 6:12). (2) 헬라파 지도자(‘집사’) 일곱을 선택 예루살렘교회가 급성장한 결과 구제 문제로 인해 히브리파 과부와 헬라파 과부 사이에 분열이 생길 위험에 처했을 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여 세웠다(6:6). (3) 바나바와 사울을 제1차 선교여행을 보냄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13:1~3).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5.03.1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0) 사도행전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⑤
  • 지금까지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령의 가르침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성령 침례, 성령 충만,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성령의 특징, 성령과 방언 등이 그것이었다. 이제 성령에 대한 사도행전의 그 밖의 서술을 살펴보기로 하자. 6. 성령에 대한 그 밖의 사도행전의 서술 (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1) 사도행전의 기적과 이사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과 복음 사역자들을 통해 놀라운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행 2:43). 이것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행 2:19)이 성취된 결과였다. 성서학자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기적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1) 다양한 신유 기적 : 성전 미문 앞의 못 걷던 걸인을 일으킴(행 3:1~10), 바울의 시력 회복(행 9:18), 애니아의 중풍병 치료(행 9:32~35), 루스드라의 못 걷던 사람을 고쳐줌(행 14:8~10), 사마리아에서의 빌립의 치유 사역(행 8:7), 멜리데 섬에서의 바울의 치료 사역(행 28:8~9) (2) 죽은 자를 살림 : 베드로가 다비다(행 9:36~41)를 바울이 유두고(행 20:9~12)를 살림 (3) 놀라운 능력이 나타남 : 베드로의 그림자(행 5:15~16)와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 (행 19:11~12)를 통한 치료 (4) 저주 선포 :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행 5:1~11), 유대인 박수 엘루마의 시력 상실(행 13:8~11) (5) 기적적인 구출 : 베드로(행 5:19~24, 12:6~11), 바울(행 16:26, 28:3~6) 2) 성령은 증인(헬라어: 마르튀스)이 되게 하시며, 성령 자신이 증인이 되신다. 사도행전에서 “증인”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탄생한 초대교회의 사도와 복음 전도자들의 사명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십자가 구원 사건의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기 때문이다(행 2:32, 3:15, 5:32, 10:39, 41, 13:31, 22:15, 20, 26:16 참조). 예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성령 충만이 곧 증인이 되는 우선적인 조건임을 분명히 하셨다. 더 나아가 성령 자신도 증인이 되신다. “우리는 이 일(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임금과 구주되심)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행 5:32). 예루살렘 사도회의 때 베드로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 유대인]에게와 같이 그들[=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행 15:8). 3) 성령의 위로 성령께서는 박해와 환난 가운데 있는 사도들과 복음 전파자들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심으로써 그들이 든든히 서 가고, 더욱 부흥 성장하게 하신다(행 9:31). 지금까지 사도행전이 가르치고 있는 성령에 관한 사항을 살펴보았다. 사도행전은 무엇보다도 이전까지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소수의 사람들에게 한시적으로 임했던 하나님의 영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계기로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에게 대규모로 역사하셔서 각종 방언을 말하게 하시고, 담대함과 권능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증인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순복음 신앙은 바로 이런 사도행전적인 성령 운동을 21세기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신앙이다. 따라서 순복음의 성도들은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사모하고 모셔 드림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5.02.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77) 종교개혁⑰
  •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 그리스도교 신분의 개선에 관하여 쾰른과 뢰벤 대학의 신학자들이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비판하는 평가를 제출하자 로마 교황청은 이를 근거로 1520년 6월 15일 파문 교서인 「주여 분기하소서」(Exsurge Domine)를 공포했다. 이 교서는 루터의 저술에서 발췌한 41개의 문장을 정죄하고 60일 이내에 이를 취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루터는 7월 중순이 돼서야 이 파문 결정 사실을 접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집필 중이던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단 판결을 앞두고 있던 루터의 심리적 긴장과 불안한 처지가 이 저술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루터는 이 초창기 개혁 선언서에서 특정한 제후들을 지목하기보다 일반적인 귀족층 전체에 호소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글에 나타난 교황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은 울리히 폰 후텐(Ulrich von Hutten)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후텐은 1517년에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의 저작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교황권의 세속적 권위를 정당화해 온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가 위조된 것임을 논증하고 있었다. 루터는 1520년 초에 이 책을 읽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확신하게 됐다. 루터는 글 속에서 자신을 수도사이자 신학박사로 소개하며 궁정 광대처럼 교회의 폐단을 지적하려 한다. 당시 궁정 광대는 왕이나 높은 귀족에 의해 고용되어 공연하던 이들이었는데 공연 속에서 권력자들에게 날카로운 첨언도 할 수 있었다.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는 최종 교정 없이 출간되었으며 초판은 1520년 8월 5일 비텐베르크에서 발행되어 단 3일 만에 4000부가 모두 소진됐다. 이후 독일어로 15판, 이탈리아어로 2판이 발간되었으며 전체 인쇄 부수는 약 6만 8000부로 추정된다. 이 글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든 ‘로마주의자들(주교, 신부, 수도사, 학자들)’의 세 가지 장벽에 대한 비판, 앞으로 공의회에서 다루어야 할 의제, 27개의 구체적 개혁 조항들이다. 세 가지 장벽이란 첫째는 영적 계급은 세속적 계급 위에 있다는 교리, 둘째는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며 그의 해석은 오류가 없다는 교리, 셋째는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교리이다. 루터는 로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이 세 겹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글에서 루터는 속히 공의회가 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의회에서 교황청의 행정기구를 대폭 축소하고 독일에서 로마로 빠져나가는 자금의 흐름을 차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지막으로 27개의 개혁 조항들은 ‘교황과 교회 권위의 제한’(1-12),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개혁’(13-18), ‘미사와 종교 행위 개혁’(19-23), ‘교회 교육 및 신학 개혁’(24-25), 그리고 ‘사회와 경제적 개혁’(26-27)으로 나뉜다. 특별히 20번 조항은 미신적 신앙 타파가 종교와 사회를 위한 개혁의 열쇠임을 강조하고 있다. “빌스낙의 ‘기적의 피 교회(die Wunderblutkirche)’, 슈테른베르크의 ‘성혈 예배당(die Kapelle des Heiligen Blutes)’, 트리어의 ‘거룩한 치마(der heilige Rock)’, 그림멘탈(Grimmenthal)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성모 마리아 성지들(Marienheiligtumer)은 모두 악마의 속임수(Teufelsspuk)이다. 그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열광적인 신앙을 보라. 이러한 은총의 장소로 순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 교회 안에 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침례, 성례, 설교 그리고 당신의 이웃이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4.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6) 종교개혁⑯
  • 성례전에 관한 설교들 루터는 에크(2월 23일자 참조) 그리고 카예탄(1월 26일자 참조)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성례전 교리를 확립할 필요를 느꼈다. “성례전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가, 아니면 성례전에 참여하는 사람의 믿음이 그를 의롭게 하는가”라는 쟁점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1519년 루터는 회개, 침례, 성만찬 외에 다른 성례전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히며 세 편의 설교를 했다. 먼저, 회개의 성례전에 대한 루터의 설교를 살펴보자. “죄의 용서는 교황, 감독, 사제 또는 이 땅 위에서 주어지는 사람의 직위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자신의 믿음에 달려 있다. 그는 우리를 향한 그의 위로와 축복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자신과 말씀 위에 세우셨다.” 루터는 성례전으로서 회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죄의 용서를 구하는 회개자의 믿음에 있음을 강조했다. 다음은 침례에 대한 루터의 설교 중 일부이다. “침례의 의미는 영적인 죄의 죽음이며,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의 부활이다. 죄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난 옛사람은 사라지고, 새로운 인간이 은혜 안에서 부활한다 … 침례를 통해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여러분과 동행하시며 하나가 되신다는 위로의 언약을 세우신다 … 그러므로 우리가 침례의 성례전을 통해 가져야 할 믿음은 이것이다. 침례는 인생의 마지막 날에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며, 그때야 비로소 인간은 새롭게 되어 죄없이 영원히 살 것이다. 또한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죽을 때까지 죄와 싸우며 살아가야 한다.” 흥미롭게도 루터는 침례 후에도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에, 죽는 날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성찬에 대한 설교에서 루터는, 빵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성례는 모든 그리스도의 몸 된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를 의미하며,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개개인의 믿음을 통해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는 하나의 영적인 몸이다. 그것은 마치 한 도시의 주민들이 하나의 공동체요 한 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영적이며 영원한 신의 도성인 교회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성도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진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과 연합하여 그의 지체가 된다.” 특히 루터는 성도의 교제로서 성찬의 특별한 은사는 ‘죄의 용서’라고 강조한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믿음 안에서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엄한 심판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도록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내어 준 바 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기쁨으로 성찬에 참여하여, 성도의 교제 한가운데에 자신의 불행을 내려놓고, 영적인 몸인 모든 지체로부터 도움을 찾으라.” 결국 루터에게 있어서 성찬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성찬에서 ‘빵’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며, 성도의 교제로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사랑의 중요성에 관해서도 강조한다. “빵은 땅의 여러 곡물을 혼합하여 만든다. 이때 각각의 곡물은 그 형체와 몸을 상실하고 빵이라는 하나의 몸을 가지듯 … 만약 우리가 성찬을 바르게 사용한다면,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으로 우리와 동일하게 되셨고, 우리와 함께 죄와 죽음과 모든 악에 대항하여 싸우셨다 … 우리도 그 사랑으로 변화되어 다른 성도의 연약함과 필요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변화되며 사랑으로 교제하게 된다. 사랑이 없이는 이러한 변화는 있을 수 없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3.2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5) 종교개혁⑮
  • 라이프치히 논쟁 1519년 6월 28일 칼 5세는 독일 황제로 선출되었다.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이었고 독일 지역 7명의 제후는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칼 5세는 스페인의 황제이기도 했는데 만약 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까지 차지하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교황청의 입지가 크게 약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교황청은 이를 반대하며 그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루터에 대한 소송도 늦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새로운 신학적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가리켜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7일까지 벌어진 라이프치히 논쟁이라고 한다. 요한네스 에크는 독일 출신의 신학자로 로마가톨릭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7월 2일까지 에크는 종교개혁 초기 루터의 신학적인 동지였던 칼슈타트와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에크의 언변은 매우 뛰어나 칼슈타트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종교개혁을 지지하던 잉골슈타트 대학의 다른 교수들조차도 에크에게 압도당했다. 그러나 7월 4일부터 루터가 직접 에크와 토론을 벌이기 시작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루터와 에크는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의 권위에 대해서 먼저 논쟁을 벌였고 이후 면죄부, 참회, 연옥 등의 문제로 토론이 이어졌다.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논쟁은 이미 1518년 12월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에크는 수위권을 옹호하는 12개 논제를 제시했으며 이에 루터 역시 12개 반대 논제를 내세우며 맞섰다. 그러자 에크는 13번째 논제를 가지고 루터의 주장을 재반박했다. 에크는 “로마 교회가 실베스터(교황 실베스터 1세, 314~335) 이전에는 다른 교회보다 높지 않았다는 주장을 우리는 부인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성 베드로의 신앙과 직위를 가진 그를 우리는 항상 베드로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루터 역시 13번째 반대 논제를 추가하며 “로마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400년 이후에야 등장한 로마 교황의 빈약한 교령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1100년의 신앙의 역사와 성서 본문과 모든 공의회 가운데 가장 거룩한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는 이것을 반대한다”고 반박했다.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이러한 논제를 토론할 기회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 『교황의 권력에 대한 13개 논제 해설』을 인쇄하여 미리 배포했다. 루터는 교황의 수위권이 ‘신의 뜻에 근거한 법’이라는 로마가톨릭의 주장을 부인하며 교황은 인간이 만든 하나의 제도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교황에게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한 번도 로마의 통치를 받지 않았던 동방 교회들에게는 그런 주장이나 요구가 제기된 적이 없음을 상기시켰다. 루터의 주장은 교회가 성서에 근거하지 않은 어떤 것을 구원에 절대적인 조건으로 강요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라이프치히 논쟁의 진정한 핵심은 ‘면죄부’나 ‘참회’의 문제가 아니라 성서에 근거한 ‘참된 교회에 관한 이해’였다. 1519년 8월 루터는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전개한 자신의 논제를 바탕으로 세 개의 글을 작성했다: 『교황의 권한에 대한 13개조 논제 해설』, 『라이프치히 논제 해설』 그리고 『요한네스 에크의 사악한 판결 반박』이다. 한편, 에크는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쾰른 대학과 뢰벤 대학의 신학자들을 선동해서 루터의 주장을 비판하도록 했다. 그들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루터의 8개 문구를 정죄하고 면죄부와 참회에 대한 그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루터의 글들을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외적으로는 에크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상 라이프치히 논쟁은 루터의 신학적 승리로 기억되고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목사)
  • 2025.02.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뿌리깊은 순복음
    (159)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2>
  • 무례히 행함은 절대로 사랑이라 말할 수 없어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원어적으로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고전 7:36)라고도 번역되며 이것은 예의에 어긋난 거친 행동을 의미한다. 이를 토대로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사랑은 다른 이에게 책망을 받을 만한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혹은 ‘사랑에 어울리지 않게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사실 ‘무례한’ 행위는 자기를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려는 마음 즉, 교만에서 나오는 행위이다. 그런 이유로 마음이 교만해 무례한 사람의 행동은 불의하고 불손하며 질서에서 이탈해 버릇없이 행하는 방자한 모습이다. 정말 나쁜 경우는 바로 자신보다 약한 자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자기보다 강한 자들에게는 꼼짝하지도 못하면서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약하다고 생각되면 무례하게 행하는 사람은 진정 참된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입으로는 끊임없이 사랑을 외치면서 행동은 상대방을 무례히 대하며 고통을 주고 힘들게 하기도 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만의 착각에 빠져 사랑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자기를 합리화하며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괴롭히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도 무례히 행하는 것은 사랑이라 말할 수 없다. 무례히 행함은 사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준 본분과 위치 그리고 자리에 맞게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부모는 부모답게 자녀는 자녀답게 스승은 스승답게 제자는 제자답게 남편은 남편답게 아내는 아내답게 사랑하며,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평신도를 사랑하며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목회자를 사랑해야 한다. 무례히 행치 않는 사랑은 사랑 안에서의 질서를 의미한다. 사랑은 절대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아가페 사랑은 놀라운 질서를 통해 드러난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으며”라는 말씀은 그래서 예의 바르고 정돈된 질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가라는 중요한 요구이다. 이러한 모습은 모세를 통해 잘 드러난다. 출애굽기 33장 11절은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야훼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은 친구처럼 모세를 대하셨지만 모세는 단 한 번도 하나님께 대해 무례히 행치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사랑의 관계이다. 그 사랑은 거룩한 두려움과 함께 공존하는 사랑이다. 죄인이며 피조물이라는 자기 위치를 지켜가며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로서의 사랑을 누리는 이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거룩한 삶을 살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항상 지켜 머물며, 올바른 방식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성도의 본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4.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58)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1>
  • 세상 사람들보다 한층 더 예의 바른 삶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드러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우리말 ‘예절’을 표현하는 영어 표현 중에 ‘코터시’(courtesy)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본래 “궁중 혹은 왕에게 초대받은 자의 예의범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실 혹은 궁중의 예절은 매우 어렵고 엄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강화도령으로 유명했던 철종도 왕세자 시절 궁중 예절을 지키기가 너무 어려워서 “나 왕세자 안하고 강화도로 돌아가겠다”고 몇 번씩이나 고충을 토로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처럼 궁중의 예절과 법도를 배우고 익히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고 한다. ‘예절’을 표현하는 또 다른 영어 단어 중에 ‘에티켓’(Etiquette)이 있다. 예의범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 ‘에티켓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어원적으로 보면 이 단어는 ‘정하다’라는 뜻의 고대 프랑스어 ‘에쓰띠께’(estiquer)에서 나온 말이다. 이 동사에서 파생된 ‘에쓰띠껫뜨’(Estiquete)는 ‘정해진 것’을 가리켰고, 이것이 영어로 차용되면서 지금의 ‘에티켓’이 된 것이다. 처음 그 단어는 물건에 사용됐다. 어떤 물건이 정해지면 그것에 일종의 꼬리표를 붙여 나머지 것들과 구별했는데 이때 사용한 종이 혹은 천 조각 그리고 작은 나무 팻말 따위를 ‘에쓰띠껫뜨’라고 불렀다. 이 단어가 출현한 14세기에는 주로 법률 용어로 쓰였다. 이 말이 프랑스어로 ‘궁중의 예식’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14~15세기의 부르고뉴(Bourgogne) 궁정 시대부터이다. 당시 프랑스의 국왕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부르고뉴 공(公) 필립 르 봉(Philippe le Bon)은 자신의 궁정에서 전례 없는 엄격한 언행과 예의를 강조하고 규율했다. 그 궁정의 사람들은 하루 동안 해야 할 일들을 일일이 적어 두고 스스로 언어와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예로는 그 시절 프랑스 파리 교외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아름다운 화원이 있었다. 그곳에 잘 가꾸어 놓은 잔디와 꽃을 보호하기 위해 ‘출입 금지’ 푯말이 세워졌는데, 거기에 ‘에쓰띠껫뜨’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남의 소유물에 손대는 것,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눈을 찌푸리게 하는 애정행각 등은 에티켓에 어긋난 행위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에티켓에 어긋난 행위를 하는 사람은 신용 없고 믿을 수 없어 사귈 수 없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천들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대사이다(벧전 2:9). 크리스천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한층 더 예의 바른 삶의 규모와 특성을 몸소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그리스도인의 덕을 세우려는 간절한 사랑에서 비롯된다. 성령으로 충만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는 성도는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3.21 / 김용두 기자

    (157)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0>
  • 무례함 버리고 예의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예의라는 덕목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린 사람은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예의는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질서다. 이 질서를 이탈하고 행복하게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예의가 필요하며 가족 중에도 손윗사람과 손아랫사람 사이에 예의가 필요하다. 가정에서 먼저 부모를 공경하는 가운데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 이러한 질서의 시작이다. 사회생활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상사와 부하, 동료와 동료 그리고 이웃과 이웃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사회가 질서 정연하고 행복한 사회가 된다. 예의를 지키는 것은 서로 ‘무례히 행치 아니하는’ 것이다. 그 근본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것은 그 무엇보다 인간 상호 간의 예의 회복이다. 예의가 붕괴된 사회에는 희망과 행복과 기쁨이 있을 수 없다. 성경은 종말적인 사회 현상으로 예의범절의 실종과 인간됨의 변질을 들고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이 말씀처럼 오늘날의 현실은 안타깝게도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지키지 아니하고 이웃도 가족까지도 무시하며 강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처음에 흥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후에 반드시 베인 채소처럼 시들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해치는 사람들이며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질서와 법도를 지키는 것에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있다. 우리는 먼저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공동체를 존중하여 예의범절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잘되고 ‘이웃’이 잘 되는 비결이다. 무례히 행치 않으며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는 깊은 깨달음과 거룩한 삶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성령 충만한 성도로서 온전한 사랑의 자세를 갖춰야 할 것이다. 성숙한 성도로 성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런 무례히 행치 않음을 통해 사랑으로 조화를 이뤄 상대를 대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래서 만만치 않다. 이제는 진정한 사랑을 우리의 삶에서 스스로 드러내야 한다. 무례함을 버리고 예의를 실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훈련받아야 할 거룩한 삶의 자세임을 잊지 말자.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2.1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독교 설교자 열전
    교회의 역사는 설교의 역사라 할 수 있어
  • 김운용 교수 『한국교회 설교 역사』, 조용기 목사 다뤄 교회는 설교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로부터 초대교회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에드워드 다간은 “기독교의 역사는 설교의 역사”라고까지 말했다. 이번 호에서는 그와 같은 기독교회의 설교 역사를 기록한 책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에드워드 다간(Edward Dargan)이 쓴 『설교의 역사』(A History of Preaching)일 것이다. 모두 2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1905년에 출판됐으며 무려 1200여 쪽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으로 교부들로부터 종교개혁 시기까지(1권, 70~1572년), 종교개혁 말기로부터 19세기까지(2권, 1572~1900년)의 설교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솔로몬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모두 3권으로 출간됐다. 스웨덴의 신학자이자 교회사 교수였던 잉베 브릴리오트(Yngve T. Brilioth)가 1945년에 쓴 『간략한 설교의 역사』(A Brief History of Preaching)라는 책도 있다. 1965년 영어로 번역된 이 책은 유대의 회당에서 시작된 설교로부터 초대교회의 설교, 헬라의 설교,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중세 설교, 루터로부터 카르프조프(Carpzov)의 설교, 에큐메니칼적인 관점에서의 설교 연구(가톨릭교회 설교, 스위스 개혁주의 설교, 프랑스 개혁주의 설교, 청교도 전통의 설교, 미국의 설교, 성공회 설교)를 다루고 있다. 최근에 나온 설교 역사에 대한 책은 O. C. 에드워드 Jr.(O. C. Edwards Jr.)가 쓴 『설교의 역사』가 있다. 2004년에 출판된 이 책은 신약의 설교와 유대의 회당 설교로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설교의 기원에 대해 살핀 후에 초대교부들의 설교, 중세 교회의 설교, 13~14세기의 설교,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까지의 설교, 근대의 설교, 현대의 설교 등을 다루고 있다. 에드워드의 책은 기독교 설교의 시작을 2세기 이후, 곧 신약성경이 집대성된 이후로 잡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설교는 오늘날의 설교와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는 오늘날의 설교는 성경 해석을 근거로 행해지지만 신약성경의 설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설교를 이렇게 정의한다. “설교란 권위를 부여받은 설교자가 성경 구절에 근거한 교리에 대해 예배에 모인 기독교 청중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설교자는 청중들이 자신의 설교 내용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근거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비유적인 이야기나 다양한 수사학적인 장치들을 사용한다.” 한편 그의 주장을 반박하며 다른 입장을 제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임마누엘 칼리지의 교수였던 폴 스캇 윌슨이 그런 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설교란 성경 해석 이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신약성경이 집대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복음을 증거하는 기독교 설교는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폴 스캇 윌슨에게 예수님을 비롯해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과 제자들은 이미 설교를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사도들이 보냈던 서신들 역시 하나의 설교라고 생각한다. 그 서신들은 수신자들의 교회와 교회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를 복음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사도들의 설교라는 것이다. 에드워드의 책은 『교부들의 설교』(은혜출판사, 2017)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폴 스캇 윌슨 역시 설교 역사에 관한 책을 썼다. 이 책은 한신대에서 설교학을 가르친 김윤규 교수에 의해 『그리스도교 설교의 역사』(A Concise History of Preaching, 대한기독교서회, 2015)라는 제목으로 번역됐다. 이 책의 특징은 책 제목 그대로 기독교 설교 역사를 간략하게 인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는 점이다. 또한, 신약성경을 하나의 설교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설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나라의 설교학자가 쓴 설교 역사에 관한 책 중에는 정장복 교수가 쓴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라는 책이 있다. 1986년 출판된 상권은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찰스 그랜디슨 피니까지 인물별로 살펴보고, 1990년에 출판된 하권에서는 비이처를 비롯해 20세기 미국의 설교자들을 거쳐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까지 살펴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신대 김운용 교수가 쓴 『한국교회 설교 역사』가 있다. 904쪽이나 되는 이 책에서 김 교수는 초창기 선교사들의 설교로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의 설교,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의 설교, 1970년대 이후 교회 성장기의 설교 등을 인물로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각 시대를 대표했던 설교자들의 삶과 설교를 잘 분석해놓았다는 점이다. 우리 교회 설립자이신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를 분석해 놓은 부분이 눈에 띈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5.04.18 / 이미나 기자

    아우구스티누스(Ⅳ)
  • 다양한 문장 반복으로 리듬감과 속도감 높여 질문과 대답 통해 청중과 대화 이끌어 현대 설교자들에게 설교학적 가르침 전달 지난 호에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설교가 그가 목회자로 안수 받았던 391년 성탄절에 행한 설교이다. 모두 세 개의 단락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겸손을 굳게 붙들지어다’, ‘기뻐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라’, ‘그리스도의 두 탄생’으로 구성된 이 설교 중에 지난 호에서는 첫 번째 단락을 살펴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탄절 설교의 두 번째 단락에서도 그의 수사학적 재능이 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먼저는 짧은 문장들을 여럿 열거함으로써 설교의 속도감을 주는 부분이다. 두 번째 단락의 서두를 언급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남자들도 기뻐하고 여자들도 기뻐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각 성별이 영광을 받았습니다”라고 선포한다. 이런 짧은 문장이 연속해서 나옴으로써 청중들은 설교의 속도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짧은 문장들에 이어 등장하는 문장을 좀 더 길게 만듦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짧은 문장들이 하나로 정리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음악의 강약의 효과처럼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을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문장을 통한 속도감과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반대되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가 남자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남자[아담] 안에서 저주받은 모든 사람이 두 번째 남자[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에 팔아넘긴 것은 여자[하와]였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도 여자[마리아]였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the likeness of the flesh of sin, 롬 8:3)이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육신(the flesh of sin)이 깨끗케 되고 정결케 되었습니다.” 이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뻐하라’(rejoice)라는 선언구를 통해 거룩한 형제들, 거룩한 자매들을 언급한다. 여기서 거룩한 형제들은 결혼하지 않기로 서약한 사람들이다. 인간은 남녀의 결혼과 육체적 결합을 통해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결혼, 곧 성령님을 통해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결혼을 포기한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거룩한 자매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동정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와 결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락은 의로운 자들, 약하고 병든 자들, 종들, 자유로운 사람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뻐하라는 권면을 함으로써 마감된다. 성탄절 설교의 마지막 단락은 “그리스도의 두 탄생”을 다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단락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이 갖는 영적인 의미와 육적인 의미를 언급한다. 그의 탄생은 한마디로 ‘역설’이다. 육체적으로 어머니에게 태어남으로서, 예수님은 그 날[성탄의 날]을 모든 세대에게 [선물로] 주셨으며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심으로서, 모든 세대를 창조하셨다. 그와 같은 탄생은 육신의 어머니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육신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나셨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던 분인 것이다. 이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일련의 질문과 ‘혹은’(or)이라는 접속사를 통해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말한다. “누가 그의 출생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사 53:8) 시간 밖에서 태어나신 분을, 혹은(or) 씨 없이 태어나신 분을? 시작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전례 없는 이 탄생을?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이 탄생을? 끝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시작이 곧 끝인 이 탄생을.” 세 번째 단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이 온전한 아이로 태어나신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가 한 여인의 돌봄을 받으셨고, 우리의 존재 근원이신 그가 그녀의 품에 안기셨으며, 우리의 양식이신 그가 그녀의 젖을 빨고 계셨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의 그런 연약함과 경이로운 겸손 속에 ‘온전한 신성’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그 아기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보다 더 큰 분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능하신 분이 자신에게 의존하는 어머니를 다스리고 계셨으며, 어머니의 젖을 먹으시면서도 진리로 그녀를 양육하고 계셨다.” 이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성탄절 설교를 살펴보았다.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뛰어난 설교자 이전에 작가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그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글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다양한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런 표현을 통해 청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현대 설교자들에게 설교학적으로 다양한 가르침과 테크닉을 전수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5.03.14 / 이미나 기자

    아우구스티누스(Ⅲ)
  • 즉흥 설교의 달인 아우구스티누스 설교 준비에 늘 최선 다해 은유, 대조, 비유적 표현 사용 성탄절 설교에서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 강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설교를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약 1500편의 설교는 대부분 속기사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의 많은 것들이 자신이 아니라 속기사에 의해 기록된 이유는 그의 설교가 가진 즉흥성 때문이다. 그는 예배 시간에 읽은 성경 구절에 대한 짧은 묵상이나 짧은 기도 외에 별다른 준비 없이 설교를 행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설교를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 누구보다 설교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그 사전 준비에는 수사학의 마스터뿐만 아니라 많은 성경 구절들의 암기, 교회사에서 거의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의 탁월한 신학적 고찰, 또 깊은 기도생활 등”이 포함되었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42).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한 편을 분석하면서 그의 설교의 특징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설교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St. Augustine, The Works of Saint Augustine Part III ; Sermons: Volume 6, Sermons 184-229Z, Trans. Edmund Hill (New York: New City Press, 1993), 17-20. 이 설교는 그가 막 목회자로 안수를 받은 391년 전후에 행한 성탄절 설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 설교에는 그의 수사학적인 특징들, 예를 들어 은유, 대조, 비유적 표현들이 다수 발견된다. 이 설교는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된다. 1.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겸손을 굳게 붙들지어다 / 2. 기뻐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라 / 3. 그리스도의 두 탄생. 첫 번째 단락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겸손을 굳게 붙들지어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의 성탄절을 “진리가 땅에서 솟아난 날”, “영원한 낮이 우리의 낮으로 태어난 날”이라고 표현한다. 매우 시적인 표현이요,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표현 중 하나다. 특히 사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와 서신 여러 곳에서 예수님을 진리로 표현하고 있다(요 1:14, 17, 14:6, 18:37, 요일 5:20). “진리가 땅에서 솟아났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진리 되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영원한 낮”, 곧 영원한 빛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죄와 사망의 어둠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빛이 비취었고 이제 우린ㄴ 밤이 아니라 낮의 삶, 빛의 삶, 해방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의 탄생을 ‘겸손’이라고 표현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성육신은 예수님의 자기비움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겸손한 예수님을 진리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겸손한 자들’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한다. 한편 그는 예수님의 겸손한 성육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사람들을 “저 높이에 이르지 못하고, 텅 비고 가볍게, 오만하고 자만한 채로 하늘과 땅 사이의 바람 부는 중간 지점에 매달려 있습니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 일에는 지혜로울지 모르지만 “세상을 만드신 분”, 곧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소유하지는 못한 것이다. 이 단락에서 가장 빼어난 표현은 “그분의 신성한 능력이 아기의 몸에 담겨있으면서도 우주의 전체 질량에서 벗어나지 않으셨다”라는 부분과 “온 우주는 그[예수님]가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동안 그의 작품이며, 우리에게 오신 그의 작품은 동정녀의 탄생입니다.”라고 부분이다. 아기 예수 안에 하나님의 온전한 신성이 담겨있다는 것,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우주의 전체 질량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 곧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어지럽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나아가 온 우주는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작품이라면,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것은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님의 작품이라고 표현한다. 즉, 우주 창조와 동정녀 탄생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단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탄절이라는 절기에 담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성육신, 그리고 동정녀 탄생의 신비를 다루는 동시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을 계속해서 대조한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와 같은 탄생을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경멸한다. 그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신성을 경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는 동정녀로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에 동정녀였던 것처럼 출산 후에도 동정녀로 발견되었으며, 남편에 의해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남으로 인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정녀가 아이를 낳아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신성하게 보입니다.”라고 설교하면서 첫 번째 단락을 마무리한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5.02.07 / 이미나 기자

    기독교 렌즈로 보는 문화
    고통의 십자가상
  • 라인란트(Rheinland)는 라인강 유역에 있는 독일 서부지역이다. 이 지역은 중세 근대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중심지 중 하나로 풍부한 문화와 역사적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유럽의 다양한 예술적 흐름을 받아들여 독창적인 스타일과 기법을 형성함으로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세 후기 라인란트에서 만들어진 그리스도 수난상은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미술사에서 주목을 받았다. 전통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경건하고 신성하게 묘사되었으나 14세기와 15세기의 라인란트에서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을 강조한 십자가상이 유행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십자가형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제작되었지만, 라인란트에서는 열십자(十) 형태가 아닌 Y자 형태의 십자가상이 등장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십자가상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여 ‘고통의 십자가상’으로 불리게 되었다. 라인란트에서 ‘고통의 십자가상’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당시의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깊은 관련이 있다. 14세기 초 독일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비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 흐름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하인리히 수소(Heinrich Suso, 1295~1366)를 들 수 있다. 하인리히 수소가 태어난 13세기 말 독일은 극심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교황과 황제 간의 대립이 심화되며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지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와 흑사병의 유행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동시에 시민계급과 수공업자의 등장으로 사회 구조도 급속히 변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기독교 신비주의 운동이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이 운동은 도미니크 수도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수소는 13세의 나이에 이 수도회에 들어가 신학 공부에 매진하며 자신의 사상을 형성해 나갔다.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고 그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요하게 여겼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고귀한 표현으로 이해했고 금욕적인 생활과 육체적 고통을 통해 영적 깨달음을 추구했다. 14세기에 그의 사상이 독일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성도들 역시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모방하고 참회의 삶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권위 있고 위엄 있는 왕으로서의 그리스도보다는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필요로 했던 시대적인 요구가 반영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끼며 그리스도와의 유대감을 강화하고 동시에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호소하려고 했다. 이것이 ‘고통의 십자가상’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다. 라인란트의 ‘고통의 십자가상’ 중 대표적인 작품은 쾰른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의 십자가상이다. 1304년경 제작된 이 작품은 독일에서 제작된 가장 초기의 Y자형 십자가 중 하나이다. 이 조각상에는 그리스도의 고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150㎝의 몸체에서 상체는 비율에 맞지 않게 과장되어 있다. 늑골은 앙상하게 드러나 있으며 채찍에 맞고 창에 찔린 상처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축 처진 머리로부터 가시관에 찔려 새어 나온 피가 얼굴 전체를 타고 흘러내린다. 힘겹게 미간을 찡그린 채 양 눈을 감고 겨우 숨을 쉬는 듯한 모습은 고통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가늠케 한다. 그리스도의 두 팔은 Y자형으로 높이 들어 올려진 채 못 박혀 있다. 이 자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상태를 더욱 고통스럽고 불안정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겉가죽이 벗겨진 손바닥을 관통하는 길고 두꺼운 대못은 보는 이로 하여금 처절한 고통을 실감하게 한다. 하체는 천 한 조각으로 간신히 가려져 있고 앙상한 두 다리는 하나의 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못이 박힌 발등 사이로는 갈라진 근육과 드러난 뼈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이 십자가상은 예배를 드리러 온 이들에게 강렬한 충격을 준다. 작품 앞에 선 사람들은 침묵 속에 깊은 묵상에 잠기거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한참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온몸으로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은 죄악 속에서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자녀들을 향한 사랑을 절대 멈추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 위에서 확증하신 사랑은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 것이다.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고통의 십자가상을 바라보며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되새겨보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묵상해보길 권한다. 우리의 죄인 됨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깊이 잠길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뜨겁게 우리를 덮을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5.04.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마태수난곡
  •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절기이다. 이 절기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시작하여 부활절 전날까지 이어지는 40일간의 영적 여정이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며 연단을 받았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며 사탄의 유혹을 이겨 내셨다. 이러한 성경적 배경에서 초대교회는 40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금식과 기도, 회개 등의 영적 훈련을 실천했다. 오늘날에도 교회는 사순절이 되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회개와 기도를 통해 경건한 시간을 보내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사순절 기간에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울림을 선사하는 음악이 있다.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마태수난곡’(Matthaus-Passion)이다.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흐는 독일 작센주 아이제나흐에서 교회 오르가니스트였던 요한 암부로지우스의 여덟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루터교 신앙에서 자란 그는 교회의 성가대원으로 시작하여 평생에 교회와 궁정에서 활동하며 1000곡 이상을 작곡했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바흐는 기독교 정통주의가 무너지는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음악이야말로 기독교적 경건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도구라고 믿었다. 이후 그는 독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에서 음악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성경을 바탕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음악을 만들어 기독교적 교훈을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이러한 신념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1727년에 완성된 ‘마태수난곡’이다. 마태수난곡은 총 78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이 작품은 마태복음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곡으로써 1부는 예수님이 체포되기 전까지의 이야기, 2부는 체포 이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곡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바흐가 예수님의 고난을 음악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것이다. 이 곡은 예수님의 두려움과 고통, 슬픔과 죽음을 나타내는 구절이 등장할 때마다 불협화음과 반음계적 진행을 사용하여 불안감과 애절함을 극대화한다. 예수님이 채찍질 당하는 장면에서는 날카로운 부점 리듬을 활용하여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며, 천둥과 번개가 치는 장면에서는 빠른 연주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거나 등장인물의 독백이 있는 대목에서는 현악기가 은은하게 깔리면서 마치 후광이 비치는 듯한 효과를 연출한다. 예를 들어 마태수난곡 78곡 중 제47곡 아리아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는 장면이 애절한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알토의 아리아(오케스트라의 반주가 있는 서정적 독창곡)로 시작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Erbarme dich Mein Gott) 나 이렇게 눈물 흘리고 있나이다 (um meiner Zahren willen) 나를 보시옵소서 (Schaue hier) 당신 앞에서 애통하게 울고 있는 (Herz und Auge weint vor dir) 나의 마음과 눈동자를 보시옵소서 (Bitterlich)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 아리아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더 이상 예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의 마음이 청중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베드로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닭이 울자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베드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아마도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눅 22:61)라는 말씀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 깊이 다가온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기도하셨다는 말씀이었을지도 모른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 22:31~32).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하여 넘어지는 순간에도 예수님이 자신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생각났을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을 끝까지 붙들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깨어지고 상한 심령으로 애통해하며 눈물로 참된 회개를 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마태수난곡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고 실패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시는 예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는 사순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5.03.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피터르 브뤼헐의 <바벨탑>
  •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등장한다. 노아의 대홍수 이후 시날 땅에 정착한 노아의 후손들은 하늘까지 닿을 만큼 크고 높은 탑을 세우려고 했다. 이는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건축이 중단되도록 하셨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지게 하셨다. 인간의 교만을 상징하는 바벨탑은 16세기 네덜란드 화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이 시기에 바벨탑을 주제로 한 그림만 백 점이 넘게 그려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 the Elder)의 <바벨탑>(The Tower of Babel)이다. 브뤼헐은 바벨탑을 소재로 세 점의 그림을 그렸으며 오늘 살펴볼 작품은 그가 1563년 안트베르펜에서 완성한 것이다. 브뤼헐은 1525~1529년경 네덜란드 남부 브레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수많은 개신교도를 탄압하고 처형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브뤼헐은 그림의 세부 묘사를 통해 스페인의 압제를 은연중에 드러내거나 네덜란드의 사회상을 간접적으로 나타냈다. <바벨탑> 역시 단순히 성경에서 말하는 장면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스페인 제국에 대한 비판 의식이 담긴 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원형 구조로 된 바벨탑은 중앙에 크게 자리 잡고 있으며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나선형 형태를 띠고 있다. 브뤼헐은 이 탑을 그릴 때 로마의 콜로세움을 참고했으며, 당시 고대 문헌 중 유일하게 바벨탑을 묘사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도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직 건축이 끝나지 않아 탑의 내부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고 배경에는 들판과 바다가 펼쳐져 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구약 시대의 바벨탑 배경이 아닌 16세기 네덜란드의 도시 풍경과 건축 기술, 선박 등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상황을 바벨탑 사건과 연결 지으려는 화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의 왼쪽 아래에는 한 왕이 수행원들과 함께 건축 현장을 둘러보고 있으며 석공들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고 있다. 로마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에서 바벨탑 건설을 주도한 인물이 니므롯 왕이라고 기록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니므롯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인물이었으며 독재적으로 바벨탑 건설을 추진했다고 한다. 브뤼헐은 이 점을 통해 니므롯 왕을 당시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와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속에서 왕에게 절하는 석공들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 국민을 상징하며 바벨탑 자체는 스페인의 억압적 통치를 암시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바벨탑은 구름보다 더 높이 솟아 있다.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건축자재, 무거운 돌들을 들어 올리는 크레인, 거대한 쳇바퀴가 달린 기중기, 탑을 완성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수백 명의 일꾼이 보인다. 그러나 탑은 애초부터 수직으로 곧게 세워지지 않고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또한 아래층이 완성되기도 전에 위층을 쌓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탑의 일부가 이미 무너져 내렸고 기초가 되는 반석에는 금이 가 있다. 이러한 불안정한 구조는 바벨탑이 붕괴될 것을 암시하며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인간의 교만은 결국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를 전달한다. 브뤼헐이 수백 년 전에 그린 <바벨탑>은 오늘날에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한다. 바벨탑은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은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준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탑의 크기나 높이에 달려 있지 않다. 더 높아지려는 욕망과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집착은 결국 불행과 재앙을 불러올 뿐이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서 온다. 오늘 브뤼헐의 <바벨탑>을 묵상하며 혹시 내 안에도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었는지 돌아보자. 만약 그렇다면 교만한 마음을 겸손히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권 앞에 엎드리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주님 안에서 만족과 행복을 누리며 내게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며 살아가길 소망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국제신학연구원>
  • 2025.02.1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선교 뉴스
    성광엽 목사, 프랑스 선교사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9일 수요1부 예배 설교 후 프랑스 한인교회인 파리순복음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되는 성광엽 목사에게 선교사 파송장을 수여하고 안수했다. 성광엽 목사는 국제사역국에서 외국인 성도들을 목양해 왔다.
  • 2025.04.11 / 오정선 기자

    김연중 목사, 홍콩 선교사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16일 성전비서실에서 홍콩 선교사로 파송되는 김연중 목사를 안수하고 파송장을 수여했다. 홍콩순복음교회 부교역자로 임명받은 김연중 목사는 그동안 교무국, 국제신학연구원, 서대문대교구, 목회기획국에서 사역했다.
  • 2025.03.20 / 오정선 기자

    베트남영산신학교 졸업식 
  • 베트남영산신학교(학장 이상용) 졸업식과 목사 임직식이 2월 27일 베트남 호치민 소재 희망교회에서 거행됐다. 학부 과정을 마친 현지 신학생 4명은 졸업증서를 수여받고 현지 교회의 미래를 책임질 지도자로 사명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졸업식은 신관식 목사의 설교, 김남균 목사의 축사, 갓서번트찬양팀의 특별 찬양이 있었다. 또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순복음동남아총회 조재영 인도차이나지방회장의 권면 등이 있었다. 이어 목사임직식이 진행돼 유바울 순복음동남아총회장과 끄엉 베트남순복음총회장은 모이세 목사에게 임직 증서를 수여했다. 안수위원 6명은 기도를 통해 모이세 목사의 향후 사역을 축복했다. 베트남영산신학교는 순복음동남아총회 인도차이나지방회, 베트남순복음총회와 긴밀한 협력을 통해 현지인 제자 양육에 힘써 국제 선교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 2025.03.13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홍정연 선교사(대만)
  • 대만 복음화, 다음 세대 영적 부흥 위한 기도 요청 1872년 캐나다 선교사가 북부지역에 복음 전파 고령화 시대 대비 선교 전략…‘원더풀 사역’ 저는 대만 북부 단수이에서 단수이순복음교회(淡水純福音敎會)를 섬기고 있는 홍정연 선교사입니다. 단수이는 대만 선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로 153년 전(1872년), 캐나다 국적의 맥케이(George Leslie Mackay) 선교사가 단수이를 중심으로 북부 지역에 복음을 전하며 병원과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대만 사람들의 삶과 신앙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분명한 사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연하게나마 중국어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에서 중문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시절 CAM 대학선교회 수련회에서 뜨겁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그때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후 세 차례 대만 단기 선교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께서 저를 중화권 선교에 사용하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대만으로 어학연수를 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지금의 대만인 남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2004년 남편과 저는 함께 첫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지금의 단수이순복음교회를 개척해 섬기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 사회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데 대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실버 세대는 복음에 대한 마음이 굳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중년층을 집중적으로 전도 대상으로 삼아, 그들이 인생을 돌아보고 앞날을 준비하는 시기에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전 아래 ‘원더풀(Wonderful)’ 모임을 만들어 시니어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모르는 시니어들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원더풀 사역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한편 성도들에게는 성경 공부와 일대일 제자훈련을 통해 영적 성장을 돕고 있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다음 세대를 잘 양육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바람은 우상숭배가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된 대만 땅에서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접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수이 지역의 더 많은 사람이 교회로 오기를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또 단수이순복음교회의 영적 부흥과 성장을 위해, 원더풀 사역이 더 확장될 수 있도록, 필요한 재정이 채워지게 성도님들이 중보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2025.04.04 / 오정선 기자

    구대진 선교사(도미니카공화국)
  • “새해 비전은 제4지교회 개척입니다” 산티아고에서 선교센터 사역, 빈민지역 3곳 지교회 설립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는 순복음 성도들에게 감사 샬롬! 주님의 이름으로 2025년 새해 문안드립니다. 저는 도미니카공화국에서 사역하는 구대진 선교사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선교를 위해 항상 기도해주시고 또한 후원해주시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전 세계 모든 선교지를 향한 후원과 기도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와 복음이 더욱 더 확장되며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세상 끝 날까지 모든 성도님과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사역하고 있는 도미니카공화국은 북아메리카 카리브 제도에 위치한 섬나라로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남동쪽으로 1080㎞ 떨어진 지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도미니카가 위치한 섬을 히스빠뇰라(영어명 : 히스파니올라·hispaniola)라고 부르며 섬 서쪽은 아이티(Haiti)가 3분의 1 정도 면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카리브 제도의 국가 중 쿠바에 이어 두 번 째로 큰 나라인 도미니카공화국은 국토면적이 4만8671㎢로서 한반도의 4분의 1 크기에 해당합니다. 전체 인구는 2023년 기준으로 약 1133만명입니다. 저는 도미니카공화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산티아고(Santiago)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선교센터(한인교회 & 스페인어 예배)와 지교회 3곳을 섬기고 있습니다. 선교센터를 통해서 이뤄지는 선교는 축호·노방 전도, 의료사역입니다. 그리고 여성 용품 나눔과 영어 수업을 통한 구제와 교육 사역에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선교센터 외에 모든 지교회-제1지교회(은혜순복음교회), 제2지교회(소망순복음교회), 제3지교회(성막순복음교회)-는 씨엔 푸에고스(Cien fuegos), 비자 로스2와 3(Villa Rosa 2 y3) 그리고 라 치바(La Chiva)라는 빈민촌 지역에 각각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도시의 모든 쓰레기가 모이는 쓰레기 매립지가 있어서 쓰레기장 마을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는 참으로 큽니다. 동네 공원 큰 아름드리나무 아래서 시작했던 예배는 제2지교회(소망순복음교회)가 되었고, 아이티 피난민들을 구제하며 선교하던 사역은 열매를 맺으면서 제3지교회(성막순복음교회)가 되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지난 2024년에는 성막순복음교회 부지를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2025년 새해 목표는 제4지교회 개척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선교 사역을 감당할 예정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할 수 있도록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신 야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무엇보다 이곳 선교지를 위해서 항상 함께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주시는 이영훈 담임목사님과 모든 성도님들에게 진심을 다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2025.01.31 / 오정선 기자

    채정기 선교사(루마니아)
  • 상처로 얼룩진 집시들의 마음, 복음으로 위로하다 집시 마을 곳곳에 교회 개척하고 미션 홈 사역 방과후학교 개설하고 다음세대 교육에도 힘써 생명수가 흐르는 소망의 땅 루마니아에서 중보자들께 감사드립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10월 20일부터 일찍 찾아 온 추위에 겨울을 걱정했는데, 낮에는 기온이 올라 밤과 낮 기온 차이가 많이 납니다. 많은 변화와 빠르게 흐르는 세월 속에서도 늘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며 매일 매 순간 “감사와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라는 찬양을 주께 드리며 믿음을 구하며 나아갑니다. 루마니아에서 집시 복음화 사역을 하다보면 집시에 대한 일종의 인종적인 편견이 숨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일삼는다는 둥, 생계를 꾸리라고 준 가축과 곡식을 몽땅 먹어치웠다는 둥, 원래부터 그런 인종으로 규정하는 편견이 사람들 사이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집시들은 19세기 중엽까지 노예로 존재했기 때문에 이들과 관련한 다양한 정황들은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저하게 자신들의 느낌과 감정을 노래로, 소수 종족의 한을 춤으로 표현하는 집시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은 금속 세공과 음악 연주입니다. 제가 사역하는 루마니아의 엘리자 마을은 헝가리계·독일계 루마니아인, 헝가리 언어권의 루마니아 집시들 그리고 루마니아인들이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다양한 인종들이 작은 마을에 살고 있기에 사용하는 언어도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그리고 독일어와 집시 방언 등입니다. 물론 행정적인 공용어는 루마니아어입니다. 이처럼 다양한 민족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루마니아의 엘리자 마을에서 저는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을 하고 있습니다. 2주 전에는 8명 새신자를 교육하고 침례를 주었습니다. 이곳에 계속 복음이 전파 되도록 기도를 요청합니다. 저희는 집시들 뿐 아니라 이 마을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 독거노인들을 위해 미션 홈을 세우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루마니아 정부로부터 국비 보조를 받기 위해 미션 홈에 대한 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부족한 부분은 제자 교회들이 조금씩 충당해주길 요청했습니다. 시간은 소리도 없이 빠르게 흐르고 하루하루 치러야 할 일들이 많기만 합니다. 일에 묻혀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과오를 최소한 줄이기 위해 가정에서, 사무실에서, 선교관 건축 현장에서, 어디서든 틈나는 대로 기도모임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지역교회들의 요청과 필요에 따라 더 많은 설교도 하고 있습니다. 사투마레를 방문했을 때는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집시들과 루마니아어를 사용하는 집시들의 차이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으로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 되어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면서 집시들의 교회가 주변 작은 마을마다 세워지길, 전국의 루마니아 집시들이 주께 돌아오길 기대하며 복음의 진리 전파에 나서고 있습니다. 집시들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1918~1989) 독재 정권 아래서 핍박, 고통 등을 당해 마음 아픈 사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시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방문해 복음으로 위로하며 시골 마을과 자매결연해 집을 보수하거나 전기를 놓고 재정적 도움을 주는 등 돕고 있습니다. 9월 중순부터 시작한 방과후학교에서는 55명의 집시 아이가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대개 학교에 급식비를 내고 점심을 사먹게 돼 있는데 급식비를 낼 수 없는 환경이라 방과후학교에서 점심을 굶는 아이들을 위해 급식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집시 선교 측면에서 미션홈과 방과후학교 운영은 아주 필요합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에 한해서 점심을 제공하고 있기에 집시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는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점심을 먹은 후에는 미션홈에 남아 신앙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하며 학교에서 배웠던 것까지 복습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아이들의 교육에 필요한 노트북 컴퓨터 지급을 위해 기도 중에 있습니다. 또한 130㎞ 떨어진 루데슈티에 집시들 교회가 세워져 약 160여 명이 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이곳에 다음세대를 위한 모임 장소를 증축해 아이들 신앙 교육을 힘쓰려고 합니다. 후원해주신 귀한 물질로 공사가 잘 진행되고 있으니 마무리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 2024.11.29 / 오정선 기자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
    김형식 선교사(필리핀)
  • - 조속한 비자 발급을 위해 - 앙겔레스순복음교회 및 제자교회 부흥과 재정 자립을 위해 - 가족의 현지 적응(언어, 기후, 문화, 생활)을 위해
  • 2025.04.25 / 오정선 기자

    장완호 선교사(대만)
  • - 전도와 선교하는 교회 - 현지인 사역자와 직분자들이 영적 성장하는 교회 - 개개인의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교회
  • 2025.04.18 / 오정선 기자

    한병기 선교사(몽골)
  • - 4월에 열리는 이영훈 목사님 초청 대성회를 통해 성령의 역사가 몽골에 임하길 - 산사르순복음교회의 토지 연장 허가가 속히 나올 수 있도록 - 부활절 예배와 행사를 위해
  • 2025.04.11 / 오정선 기자

    순복음영성스케치
    기도의 종류(Ⅳ) - 중보 기도
  • 세계적인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는 “위대한 일을 행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먼저 기도의 사람을 세우신다”고 말했다. 그가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 스스로가 기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그를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던 무명의 기도 동역자들의 영적 지원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역시 그의 사역에 있어 중보 기도의 능력을 인정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기도의 사람 백 명을 원했다고 한다. 타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하고 연약함과 어려움을 지탱해주고자 하는 중보 기도는 영적 지도자를 위한 중보 기도로 이어질 때 더욱 강한 능력으로 나타난다. 1. 중보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 중보(intercession)의 문자적 의미는 ‘사이에 나아가다’, ‘상치하는 양자를 화해하기 위해 행동하다’의 의미가 있으며 법정에서 의뢰인을 돕는 변호사나 법률적 행위를 대신해주는 대리인의 개념을 갖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앞선 중보의 개념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하는 최고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다. 2. 예수님의 중보 기도와 훈련 모델 능력 있는 중보 기도자가 되고자 소원하는 사람은 단연코 최고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한 명의 중보 기도자가 세워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중보 기도자로서의 소원과 결심이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최우선 순위는 기도였는데 어떠한 때에 기도하셨는지를 알아보면 중보 기도자로 서는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1)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침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다(눅 3:21~22). (2)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전성기 때에 많이 기도하셨다. (3) 진리에 대한 계시가 필요할 때 기도하셨다. (4) 제자들을 선택하고 훈련하실 때 기도하셨다. (5) 사랑과 용서가 필요할 때 기도하셨다. 3. 중보 기도의 올바른 태도 중보 기도자로서 훈련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 증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아래의 5가지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기만 해도 효과적인 중보 기도자로 설 수 있다. (1) 자발적으로 중보 기도하라 억지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이다. (2) 구체적으로 중보 기도하라 중언 부언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마 6:7). 구체적인 기도는 응답을 통하여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된다. (3) 올바르게 중보하며 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고 정당한 것을 구해야 한다. 응답이 올 때까지 찾고 두드리는 실행의 과정을 능동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4) 전심으로 중보하며 구하라 두 마음을 품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약 1:8). 이런저런 생각이 많으면 기도에 집중하기 어렵다. 마음이 분산되는 것을 막는 실제적인 방법은 크게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5) 쉬지 말고 중보 기도하라 기도는 호흡이요 습관이 되어야 한다. 한꺼번에 일시적으로 많은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자주 드리는 기도가 효과적이다. 4. 영적 지도자를 위한 중보 기도 중보 기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지도자를 위한 기도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지도자를 판단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시 66:18). 그리고 아래와 같이 영적 지도자의 영성과 생활과 사역의 3가지 영역에서 중보하며 기도하면 사역에 큰 능력이 나타난다. (1) 영성을 위하여(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기도) 지도자의 위치에서 듣게 되는 비난과 겪게 되는 억울한 일들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2) 생활을 위하여(개인적인 삶을 위한 기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며, 행복한 가정의 모범이 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3) 사역을 위하여(사명 감당을 위한 기도)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끝까지 사명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어 가야 한다. 성도들은 영적 지도자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끝> 김현동 선임목사(교무국 기도처지원팀)
  • 2023.12.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Ⅲ) - 방언 기도
  • 올해는 우리 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이 창립한 지 70년이 되는 해로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오순절 운동을 되돌아보게 한다. 오순절 운동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려는 운동으로서 성령 침례의 결과가 방언, 신유, 능력으로 나타남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성령 충만과 방언 기도를 강조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신유 사역과 사회 참여를 통하여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했다. 오늘은 우리 교회와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부흥의 큰 원동력이 된 방언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 방언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의 영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다짐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1. 방언 기도의 의미와 성경 상의 언급 방언 기도는 영적인 언어로 말하는 기도로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며 개인 신앙 발전에 큰 유익을 주는 기도이다. 방언은 성령 침례의 외적 증거이며 성경 많은 곳에서 성령 침례의 표적으로 나타난 방언 기도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행 2:1~4), 둘째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집안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의 성령의 임재(행 10:44~46), 덧붙여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의 성령의 임재(행 19:5~6)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2. 현대 오순절 운동과 방언 기도 성경 상에 등장하였던 방언 기도는 20세기 초 현대 오순절 운동에서 재발견된다. 1901년에 감리교 목사 찰스 팔함(Charles F. Parham)은 그가 가르치는 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던 중, ‘방언이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임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이렇게 발견한 말씀의 내용을 철저히 믿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침례와 방언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작이다. 이어 방언 기도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은 1906년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의 아주사 부흥으로 이어졌다. 방언과 방언 통역, 예언, 축사, 신유 등이 강력하게 나타났던 아주사 거리 집회는 무려 3년이나 지속되며 기도의 불길을 이어갔다. 3. 방언 기도의 유익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1) 방언 기도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준다. 성경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방언)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다(행 2:4). 한편 믿는 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한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막 16:17). 성령 침례를 받으면 방언이라는 표적을 통하여 분명하게 성령 충만의 증거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방언 기도를 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에게나 듣는 자에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가져다준다. (2)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나누는 비밀한 언어이다. 방언 기도에 대해 비교적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을 하나님과 비밀한 영적 교통을 나누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고 하면서 또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 14:14)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비밀의 기도이기 때문에 사탄도 알아듣지 못한다. (3) 방언 기도는 자기 신앙의 덕을 세운다.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전 14:4)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것의 원어적 의미는 ‘집을 지어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방언 기도를 통하여 마치 집을 짓듯이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다. (4) 방언 기도는 마음을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시켜준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잠재 의식 속에 있는 모든 불안, 초조, 절망, 미움, 원한, 상처 입은 것을 깨끗이 청산해 준다. 마음의 공간이 방언 기도를 통하여 깨끗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되어 절대긍정의 마음으로 변화 된다. (5) 방언 기도는 연약함을 돕는 탄식의 기도이다. 성경은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고 있다(롬 8:26~27). 방언 기도를 통하여 탄식하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6) 방언은 깊고 오랜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증거하고 있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시간이 길어야 한다. 방언 기도는 기도의 언어로서 기도를 오래 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코로나19 엔데믹 선언 이후인 지금은 성도 개개인이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한 영성을 회복하고 교회 내외적으로 전례 없는 부흥을 꿈꾸어야 할 때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교회 성령 충만과 부흥의 토대가 된 오랜 시간의 깊은 방언 기도를 회복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 모두가 부흥으로 향하는 최선의 지름길을 제공해 줄 것이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1.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Ⅱ): 대적 기도
  •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한 영들과의 영적 전쟁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적 전쟁에 대해 무의미하게 여기거나 막연히 신비적인 것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성경 여러 곳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오늘날도 실제적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체험되고 있다. 이러한 영적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적 기도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 권세(창 3:15)에 힘입어 선포하는 대적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대적 기도의 의미와 특징 대적 기도는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에 힘입어 악한 영들에게 명령하고 선포하는 기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형식이지만 대적 기도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으로 간구가 아닌 명령과 선포의 형태를 지닌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다(눅 10:19).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악한 영들을 대적함으로써 승리하였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이 주신 권세와 능력을 믿고 명령하며 선포함으로써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2. 성경에 나타난 대적 기도 성경은 영적 전쟁을 실제적으로 묘사하면서 대적 기도의 상대인 악한 영들과 이들을 어떻게 상대하여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1) 대적 기도의 대상 성경은 우리가 물리쳐야 할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하거나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한다. 이러한 성경의 언급을 통해 우리의 대적이 바로 ‘마귀’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2) 대적 기도의 사례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는 방법(막 9:25)과 명하여 내어 쫓는 방법(눅 8:29)을 통하여 대적 기도를 행하셨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에 힘입어 빌립보의 귀신 들린 여종을 향하여 명하였고, 귀신은 즉시 나오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는 명령과 선포는 오늘날 대적 기도의 대표적인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3. 대적 기도의 방법 대적 기도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영적 대결이므로 마치 전쟁터에서 배수의 진을 친 것과 같은 비장한 각오로 준비하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1) 보혈을 의지하는 기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의 보혈에 대한 예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에서 보호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출 12:13).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흘려주신 보혈의 권세를 갖고 있으므로, 보혈에 의지하는 기도는 마귀에게 대적하는 가장 큰 기초가 된다.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들은 매일 같이 마귀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특별히 개인의 감정과 사회적 관계 그리고 환경 가운데 보혈을 뿌리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예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는 기도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시어 오신 이유는 우리의 상실한 권세를 회복해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으나 부활하셔서 승리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8:1).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요 1:12). 성경은 예수님의 권세에 의지할 때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고(마 16:18), 매고 푸는 권세가 있어서 마귀들을 묶고 포로된 자들을 구원하는 권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마 16:19). (3)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기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대적의 수중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겼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패배 의식에 빠지고 좌절과 낙심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대장 되신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주셨으며, 흉악과 결박에서 놓임 받게 해주심을 굳게 믿고 마귀를 대적하며 기도해야 한다. 4. 대적 기도의 실제와 유익 대적 기도를 통하여 의심, 두려움, 교만, 불안, 낙심과 염려 등 마음의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사라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적 기도는 육체의 치유와 믿음의 회복도 가져다준다. 우리는 각종 암, 우울증, 중풍, 고혈압, 당뇨병, 만성 피로 등 육체의 질병에 대해 꾸짖고 명령하고 선포하여 승리할 수 있고, 영적 성장과 신앙생활에 방해를 주는 악한 영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대적하며 기도할 수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사람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괴롭히는 악한 원수 마귀야! 지금 즉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떠나갈지어다!” 이러한 선포를 통하여도 우리는 마귀와 효과적으로 대결하고 영적 전쟁의 승리에 다가설 수 있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0.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시보는 영산 신학과 목회
    영산의 세계선교
  •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꿈과 비전으로 충만하게 된다(행 1:8). 성령님은 영산에게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세계선교의 꿈을 부어주셨다. 그때부터 영산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은빛 날개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꿈’을 품었다. 그 꿈처럼 영산은 당시 해외 여권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때 이미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전 세계는 주님의 교구입니다.” 웨슬리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영산의 고백은 절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머물렀던 수많은 선교 현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기적의 장소였다. 영산이 세계선교를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된 배경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5월 세계오순절총회를 마친 영산은 100일 동안 18개국, 39개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던 그는 결국 스위스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밑에 놓인 엽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으니 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종이 되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적고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쇠약해졌던 영산의 몸은 이튿날이 되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그때의 체험은 영산의 사역 가운데 세계선교를 항상 강조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영산은 유럽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계 교회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국제기관을 조직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6년 11월 4일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이하 CGI: 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영산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성장에 관한 노하우를 전 세계 교회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부흥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CGI는 설립 이래 2022년 현재까지 한국을 비롯한 100여 개국 이상에서 총 600회 이상 CGI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여기에 전 세계에서 연인원 120만명이 참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계선교와 교회 성장에 이바지한 CGI는 2022년 10월 이영훈 목사를 제2대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하면서 ‘다음 세대의 부흥’을 외치며 제2기 사역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산은 세계선교의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000년 3월 28일 DCEM(David Cho Evangelistic Mission)을 설립했다. 이 기구를 통해 전 세계 선교지와 선교단체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선교 자원의 교류에 힘썼다. DCEM은 교파를 초월해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심어주는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영산은 그 목회 사역 동안에 약 600회 이상의 해외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런 왕성한 사역은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과 열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영산의 선교 사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서구권의 기독교 인구가 서구권의 기독교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기독교 신학이나 선교가 서구권 교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서구권 교회는 갈수록 쇠퇴를 거듭했고, 반대로 비서구권의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영산의 세계선교 사역은 기독교 선교의 주체를 서구권 교회에서 비서구권 교회로 전환하는 데 아주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산은 선교가 ‘순복음’의 최우선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진정한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이고 선교하는 성도가 진짜 ‘순복음성도’(Full Gospel Christian)이다. 교회가 선교를 멈추는 순간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영산 안에 넘쳤던 복음의 확신과 순복음의 영성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하나님 사명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David Yonggi Cho’라는 이름은 안다”라는 말이 수많은 증인에 의해 회자된 것만 보아도 그가 가진 세계선교의 열정과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순복음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나아가 선교하는 삶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선교에 평생을 바친 영산의 삶이었고, 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은 모든 순복음 성도들의 꿈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의 본을 따라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히 12:1). 오늘날 교회가 영산으로부터 반드시 전해 받아야 하는 믿음의 영적 바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교의 바통’이다. 이제 영산의 뒤를 이어 우리도 성령 충만함 가운데 ‘선교 바통’을 이어받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계선교의 꿈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산의 신유 사역 
  •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그의 핵심적인 목회 철학 중 하나였다. 영산은 신유의 기적이 과거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역임을 확고히 믿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으로 값없이 병 고침 받는 것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산이 믿었던 신유의 은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자 ‘아직’, 그러나 반드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영산은 치유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믿는 자의 부활을 보았다. 그래서 영산은 목회 현장이나 부흥회 사역에서도 병 고침을 강조했는데,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질병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거리는 수없이 많다. 영산이 이같이 신유를 강조하게 된 것은 어떤 특정한 치유 신학을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를 ‘신유의 종’으로 만든 것은 그가 처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 경험했던 치유의 하나님 때문이었다.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주님을 만나서 완치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또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 중풍에 걸린 여인이 낫고 걷지 못했던 소년이 일어나 뛰며 듣지 못했던 사람이 듣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영산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과 목회 현실에서 신유의 역사를 분명하게 체험했기에 영산은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의 신유 사역은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영산의 개척교회가 빈민촌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영산은 신유를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적으로 보고 목회 사역에 열심히 적용하고 실행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 신유 사역”(막 16:18)이 복음 전파에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회고할 때도 신유 사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복음에 저항적이던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을 치료받고 은혜를 받아 복음의 말씀을 세상에 나아가 강력하게 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신유 공동체로 보았다. 영산의 신유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믿음이다. 영산은 그 어느 목회자보다도 병 고침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선포했고 신유의 기적도 많이 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성령이 필요에 따라 자신을 통해 은사를 나타내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산 자신이 분명히 받았다고 주장하는 은사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은사’였다. “내가 받은 은사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습니다.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 뒤에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천막교회 시절에 나타났다. 걷지 못하던 소년이 영산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그가 낫는다는 것을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영산이 한 시간이 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자 뭉게구름 같은 믿음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산은 그때의 기분이 마치 지구를 자기 손으로 밀면 지구가 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간증한 바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할 때 영산은 그 소년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영산은 오늘날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영산에 따르면 신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셔서 은사를 베푸시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산은 신유가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분명히 믿었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신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에 자신의 아픈 부분에 손을 얹고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을 통한 성령의 신유 사역은 여의도순복음교회뿐 아니라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신유의 복음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순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유익을 주었다. 앞으로도 영산의 신유 사역의 원리를 계속 연구하고 실행함으로 새로운 신유행전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길 희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문서·방송 선교의 선구자…1988년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창간
  • 영산은 미디어의 활용이 미미하던 시절, 문서 선교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사역에 적용한 선구자였다. 영산은 자신이 가진 뜨거운 선교적 영성을 담아내어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순복음의 신앙이 한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떤 교회보다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서 전도』의 저자 조지 버워는 “기독교 문서는 인쇄된 선교사”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 선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영산은 누구보다도 문서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역에 적용하였다. 1964년 당시 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순복음지』를 발간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78년에 이르러서는 영산의 설교와 칼럼, 성도들의 신앙 간증과 구역 성경 공부 및 교회 소식을 담은 『순복음뉴우스』가 되었다. 이후 『순복음가족신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문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영산은 또한 순복음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잡지 『신앙계』를 창간함으로 문서 선교의 폭을 확장했다. 『신앙계』는 기독교의 대중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양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기독교 잡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대중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신앙계』를 능가하는 잡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앙계』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운동의 건전한 보급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신앙계』야말로 오순절 신앙을 한국교회에 널리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영산의 문서 선교의 열정은 『순복음가족신문』과 『신앙계』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한 이단 종교 단체가 일간 신문을 발간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산은 만약 그 단체에서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일간지 창간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988년 세계 최초의 기독교계 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정부와 사회에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산은 신문사를 설립하는 과정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근거 없는 비난의 목소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복음 실은 일간지 『국민일보』는 매일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땅에 전파하는 발 없는 전도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 정신으로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로서 한국 교계의 대사회적인 발언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 문화의 채널로써 한국 사회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 사명도 이뤄가고 있다. 영산의 『국민일보』 창간은 대한민국 1200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스컴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영산은 문서 선교뿐 아니라 방송 선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영산은 복음 전도의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방송 선교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던 영산은 1966년 라디오 설교와 1979년 컬러TV 방송을 송출했다. 영산의 라디오 설교 방송은 1979년, 1980년 연속, 전국 청취자 애청 프로그램 조사 결과 청취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청취자가 많았다. 이처럼 한국교회 방송 선교의 선구자는 단연 영산이었다. 당시 흑백 TV에 익숙했던 공중파 제작자들이 방송 장비와 시스템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견학을 올 정도였다. 방송 선교는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영산의 방송 선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위성과 인터넷을 활용한 예배와 설교 실황은 각 지성전 및 지교회 설립과 더불어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영산의 방송 선교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KCWC사의 특별 기획으로 주일 예배 실황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필리핀, 남아공 등 25개국에 동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산의 성령 충만의 복음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함께 전 세계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산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 설교뿐 아니라 설교를 전달하는 매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영산의 설교와 성령 충만의 영성은 멀티미디어 사역 시스템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이러한 사역이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복음의 메시지는 불변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영산의 멀티미디어 사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유훈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9.23 / 김용두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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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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