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평균의 종말 - 조지훈 목사 (순복음선교연합회 담당)
  • 토드 로즈가 쓴 『평균의 종말』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40년 말 미국 공군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비행기 성능이 좋아졌지만 많은 사고가 여러 기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원인을 찾던 조사 담당자들은 비행기 조종석 설계로 눈을 돌렸다. 조종석을 최초로 만들었던 것은 1926년이었다. 당시 엔지니어들은 조종사 수백 명의 신체 치수를 잰 뒤 평균을 냈고 이를 기준으로 조종석을 만들었다. 평균에 맞추어 조종석 내부와 헬멧의 크기 등을 정했던 것이다. 평균에 바탕한 기준은 30년이 넘도록 변하지 않았다. 이에 조사 담당자들은 조종사들의 체격이 이전보다 커졌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조종사 평균 치수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새로운 평균에 따라 비행기를 설계하면 많은 문제가 개선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구원 중 길버트 대니얼스 중위는 이런 해결책에 의문을 가졌다. 대학 시절 남학생 250명의 손 모양을 비교·분석했던 그는 어떤 학생도 평균치의 손 모양을 가지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의 문제 제기에 따라 조사한 결과 조종사들의 신체 치수의 평균에 맞는 조종사들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개인 맞춤형 조종석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새로운 원칙이 마련됐다. 조절 가능한 조종석, 조절 가능한 헬멧 조임 끈, 조절 가능한 비행복 등이 제작됐고 이후 미 공군은 최강의 공군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평균을 추종한다. 그 평균 속에서 우리 각자의 얼굴은 사라져버리고 우리 각자가 가진 고유한 삶의 이야기도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평균을 지향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각자의 얼굴을 가진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새로운 소명을 거부했던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15)이라고 소개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다른 방식으로 만나주셨고, 그들 각자의 삶을 다른 방법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서 우리 각자의 삶을 다른 모습, 다른 방식, 다른 색깔로 인도하신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고유한 얼굴을 갖는다. 우리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갖는다. 우리만의 고유한 색깔을 갖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 안에서 언제나 평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영원히 변치 않는 방법이시다.
  • 2023.11.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만종’에 그려진 감사의 기도 -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장 프랑수아 밀레는 프랑스 화가로서 ‘씨 뿌리는 사람’,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로 유명하다. 특히 ‘만종’은 프랑스의 자랑이라고 여겨지며, 빈센트 반 고흐, 클로드 모네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우리나라의 박수근 화백이 열두 살 때 만종의 원색 도판을 처음 보고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달라고 늘 기도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만종’(저녁 종)의 원제목은 ‘삼종기도(L'Angelus)’이다. 중세 시대 하루에 세 번(아침 6시, 낮 12시, 저녁 6시) 교회 종이 울릴 때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를 말한다. 이 그림은 늦가을 무렵 울긋불긋 물들어 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으며, 감자 수확 중인 남녀 한 쌍(아마도 부부)이 마주 서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해 질 무렵 어둑해진 분위기와 노란색 석양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따듯함과 평안함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저 멀리 지평선 위로 작고 흐릿하게 보이는 교회 종탑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들판 전체로 울려 퍼지고 있는 듯하다. 밀레는 어릴 적부터 농사짓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온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그리고 힘들게 일하면서도 진심으로 땅을 아끼고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가난한 프랑스 농민의 일상을 통해, 힘들고 고달픈 상황 가운데에서도 감사하며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밀레는 ‘만종’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종은 내가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린 그림이라네. 옛날에 우리가 밭에서 일할 때 저녁 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지. 어쩌면 그렇게 우리 할머니는 한 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우리 일손을 멈추게 하고는 삼종기도를 올리게 하셨는지 모르겠어. 그러면 우리는 모자를 손에 꼭 쥐고서 아주 경건하게 고인이 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했지!” 만약 밀레가 자기 경험을 그림에 투영해서 그린 것이라면 만종 속 부부의 기도는 단순히 자신들이 수확한 감자에 관한 감사 기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갓 캐낸 감자 앞에서도 고통과 죽음 가운데 있는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크고 작은 수확을 감사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이 순간도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가난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자. 그들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큰 감동과 울림을 주는 한 폭의 명화가 될 것이다.
  • 2023.11.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소유보다 귀한 것 - 김진수 목사(서대문성전 담당)
  • 가을에는 좋은 날씨 덕분에 종종 막내 아이를 뒤에 태우고 자전거를 탄다. “아빠는 언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어요?” 아이가 물었다. 어렸을 때 많이 아팠던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자전거를 처음 탔고, 이어 첫 자전거를 갖게 된 이야기도 해주었다. 당시 아버지께서는 출퇴근 하실 때 자전거를 이용하셨는데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싶은 마음에 내 자전거가 갖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며칠 후 아버지께서는 새 자전거를 선물해주셨는데 아버지의 출퇴근용 자전거를 팔고 나를 위해 자전거를 사오셨다는 사실을 알고 울컥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이가 “그 때는 따릉이가 없어서 빌려 탈 수 없었나 봐요. 난 지금 아빠랑 같이 탈 수 있는데요”라고 하는데 문득 얼마 전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다. 2024년 메가트렌드 중 하나가 소유에서 임대로 개념이 이전된다는 것이었다. 기존세대처럼 무리하게 집 한 채를 소유하기보다 소비자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는 렌탈 수요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소유하지 않는 삶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계시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우리 삶이 “소유한 것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2장 말씀처럼 내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많이 쌓아놓은 소유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작게는 자전거부터 크게는 집까지 우리는 매일 소유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쌓아가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 열심들이 내 것을 소유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영혼의 구원을 위한 사명과 나눔에 이어지지 않는다면 헛수고나 다름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무소유에 가까운 삶을 사시고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가 필요한 것을 이미 아셔서 채워주실 것이니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소유에 대한 마음이 내려놓아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인생의 최종목적지’를 떠올리면 된다. 시편기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했다. 인생의 최종목적지가 주어진 생애뿐이라면 소유에 몰두해도 상관없겠지만, 우리 인생의 최종목적지는 생애를 넘어서는 곳에 있으니 본질에 집중하여 달려가는 편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 된다. 짧은 인생, 유행에 민감하고 소유에 몰두하기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 나라에 주의 백성들이 돌아오도록 이끄는 인생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공급해주시고 덤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 2023.11.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85) 가이사랴의 벨릭스 총독 앞에서의 재판
  •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성전에서 정결예식을 지키다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사로잡혀서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로마 천부장의 극적인 개입으로 성전 옆 로마 군인들의 안토니오 요새에 구금되었다. 천부장은 그곳에서 바울을 채찍질하면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이유를 심문하려 했지만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자 그를 고문하는 대신 산헤드린(공회)에 세워서 자초지종을 알고자 했다. 70명 공회원의 절반이 바리새인인 것을 간파한 바울이 그들 앞에서 자신이 바리새인의 가치인 ‘죽은 자의 부활’을 전하다가 심문을 받는다고 하자 바리새인들이 바울 편을 들고 사두개인들과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혼란이 야기 돼 천부장은 다시 그를 영내로 데려가도록 했다. 그후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는 40여 명의 결사대가 바울 암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지자 천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천부장 루시아는 밤에 삼엄한 경호 하에 바울을 총독이 주둔하고 있는 해안가의 가이사랴로 호송하면서 그에게 서신까지 함께 보냈다. 총독은 바울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바울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면 재판을 열겠다고 하면서 그를 헤롯 궁에 가둘 것을 명했다. 닷새 후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들 몇과 더둘로라고 하는 변호사(연설가)와 함께 가이사랴로 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했다. 그러자 바울도 소환되었다. 더둘로가 먼저 재판장에게 아첨하는 말을 한 후에 본격적으로 고발 사항을 늘어놓았다. 바울을 극단적인 이단자로 매도했다.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행 24:5). 그러고는 그가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그를 잡았다고 하면서 총독이 직접 심문하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자 함께 온 유대인들도 이에 동조해서 옳다고 외쳤다. 이에 총독이 바울에게 말하라고 머릿짓을 했다. 바울은 총독을 높이는 말을 한 후에 자신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12일밖에 안 됐고, 성전에서 누구와 변론하거나 회당이나 시중에서 아무런 소동을 일으키지 않았기에 자신을 고발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강변했다. 그러고는 담대하게 신앙고백을 했다. 자신은 유대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십자가 복음)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하나님께 향한 소망, 즉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확신하노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을 호소했다. 여러 해 만에 예루살렘에 간 것도 동족을 구제하고 제물을 드리며 예배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정결예식을 수행하면서 아무런 모임이나 소동이 없었는데도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그를 잡았는데, 자신을 반대할 사건이 있다면 총독 앞에 와서 고발하든지 아니면 산헤드린 심문 때 무슨 옳지 않은 것을 보았다면 그것을 말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슈는 단 하나,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라고 한 말뿐이라고 했다. 바울이 유대인들의 참소로 일 대 수십 명의 비대칭적 재판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그들을 이긴 것은 주님의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1~12)는 말씀대로 성령께서 바울과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b). 김호성 부목사(목회)
  • 2023.11.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84)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사로잡혀 성전 밖으로 끌어내져서 살해당하기 직전에 로마 천부장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그런데 로마군 수비대로 오르는 층계에서 유대인 군중들에게 한 연설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사태가 험악해지자 천부장이 그를 부대로 끌어가 채찍질하며 심문하라고 했다. 그 순간 바울이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자 천부장은 로마 시민을 학대한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공회(산헤드린)에 세워서 유대인들이 그를 고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고자 했다. 바울이 공회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구성된 것에 착안하여 자신이 바리새인의 가치인 죽은 자의 부활 신앙을 수호하다가 이런 곤경 속에 빠졌다고 하자 두 당파 사이에 논쟁이 격화되어 큰 소란이 일게 되어 천부장이 다시 바울을 로마군 병영으로 데리고 갔다. 바울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급기야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무리들이 생겨났는데 무려 40여 명이나 되었다(행 23:12~13). 이들은 천부장에게 바울을 공회로 다시 보내달라고 요구해서 오는 길에 매복하고 있다가 그를 죽이려는 흉계를 꾸몄다. 다행히 이 계획을 바울의 조카가 미리 알게 되어, 바울의 지시를 받아 천부장에게 이를 알렸다. 그러자 천부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부하들에게 ‘바울 긴급 야간 이송 작전’을 지시했다. 매복 암살조까지 있는 상황에 천부장은 최선을 다해 호송 인원을 증강했다. 출발 시간은 밤 ‘제 삼 시’(오늘날 밤 9시). 목적지는 로마 총독이 주둔하고 있는 가이사랴. 호송 병력은 보병 200명, 기병 70명, 창병 200명이 동원되었다. 또한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96.5㎞ 떨어진 가이사랴까지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탈 짐승까지 준비하도록 했다. 일개 죄수를 호송하는데 이처럼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쏟아붓는 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그런데 로마 시대의 기록을 보면 지방 관리들이 로마 시민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막대한 경비를 지출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끝으로 천부장은 총독에게 편지까지 써 보냈다. 이 편지에서 글라우디오 루시아라는 천부장의 이름이 밝혀지게 된다. 그 편지는 바울서신에서처럼 문안으로 시작한다. 그러고는 바울을 그에게 보내는 이유가 설명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루시아는 로마 시민권자인 바울을 채찍질하며 심문하라고 명령한 잘못을 숨긴 채 사실과 동떨어진 보고를 한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행 23:27~28). 그러나 그는 총독에게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행 23:29)라고 씀으로써 바울의 무죄를 확신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리고 바울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알려 줘서 총독에게 보낸다는 말로 서신을 끝맺는다. 천부장의 명령대로 보병이 밤에 바울을 예루살렘에서 약 56㎞ 떨어진 안디바드리까지 호송하고, 나머지는 이튿날 기병이 그를 가이사랴까지 이끌어 총독 앞에 세우게 된다. 오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곤경에 처하더라도 능히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과 함께 사도 바울의 결코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오뚝이 신앙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김호성 부목사(목회)
  • 2023.10.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83) 바울을 죽이려는 흉계를 꾸민 유대인들
  •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죽임 당하기 직전 로마 천부장의 발 빠른 개입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다. 로마 군인들의 영내로 올라가는 층계에서 그를 죽이려는 유대인 무리에게 연설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그들을 분노하게 하자 천부장은 그를 영내로 끌고 가서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흥분하는지 그 이유를 채찍을 치며 심문하라고 명령했다. 그때 바울이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자 천부장은 두려워하면서 심문 대신 제사장들과 공회(산헤드린)를 소집해서 바울의 죄목을 밝히고자 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러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선 사람들에게 그의 입을 치라고 명령했다. 그때 바울이 강하게 맞대응했다. “회칠한 담[‘겉만 번지르르한 취약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이는 재판도 없이 처벌을 명함으로써 율법(신 19:15)을 범했다는 것이다. 이에 곁에 선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라고 꾸짖었다. 그제야 바울은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했다고 하면서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라는 율법(출 22:28)을 인용했다. 그리고는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라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70명의 공회원의 절반은 사두개인이고 나머지 절반은 바리새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두개인들은 모세5경만 받아들이면서 부활, 천사, 영의 존재를 전면 부인하고, 바리새인들은 구약 성경을 다 받아들이고 부활, 천사, 영을 다 믿었기 때문에(행 23:8) 바울은 자신이 부활을 증거하다가 이렇게 잡혀서 심문을 받는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져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때 바리새인 쪽 서기관 몇이 일어나 강한 어조로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라고 하자 큰 분쟁이 생겼다.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염려하여 군인들에게 “바울을 빼내어 영내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그날 밤 주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가 로마에 가기 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었다. 날이 새자 유대인 중 사십여 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라고 맹세하고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바울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보려는 척하면서 천부장에게 부탁해서 그를 그들에게로 데려오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면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매복하고 있다가 그를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바울의 ‘생질’(조카)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급히 로마 군인의 영내로 들어가 바울에게 알렸다. 바울은 한 백부장에게 그의 조카가 천부장에게 할 말이 있으니 그에게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천부장은 그를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서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이에 바울의 조카는 유대인들의 바울 암살 계획을 말했다. 천부장은 그에게 그 사실을 함구하라고 경계하고 나서, 한밤중에 로마 군대의 삼엄한 호위 하에 바울을 총독 벨릭스가 있는 가이사랴로 이송할 계획을 세운다. 이처럼 바울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를 구출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보이시고 그에게 큰 위로와 확신을 공급해 주셨다. 김호성 부목사(목회)
  • 2023.09.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60) 중세후기⑩
  • 장미전쟁<1>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전혀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20년 뒤 그의 지시로 공식적인 조사가 진행되고 교황청은 유죄 판결을 취소한다. 어쨌든 잔의 죽음은 별다른 파장을 낳지 않았다. 점차 밀리고 있던 잉글랜드의 헨리 6세와 함께 섭정으로 통치하고 있던 베드퍼드 공작 존이 죽자 부르고뉴의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와 관계를 끊고 재빠르게 샤를 7세와 아라스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전세는 완전히 프랑스 쪽으로 넘어갔다. 1450년 4월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궤멸시키고 그해 8월 셰르부르를 함락시키면서 노르망디 전역을 석권한 프랑스군은 프랑스 내 잉글랜드의 마지막 지역인 가스코뉴마저 함락(1453년)함으로써 사실상 승리를 확정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지역적인 전투가 발생했지만 1475년 헨리 6세가 칼레(현재 도버해협의 프랑스 지역에 위치한 도시)를 지키기 위해 노르망디와 아키텐 영지의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사실상 백년전쟁이 막을 내렸다. 칼레는 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그곳은 양모를 집산하는 중요한 항구도시였지만, 이후 메리 1세(블러디 메리)가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빼앗기고 말았다. 훗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계기로 지브롤터(스페인 남단)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잉글랜드는 지금까지 완전한 섬나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백년전쟁으로 프랑스 사회에서는 잉글랜드인들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잉글랜드에서도 프랑스인에 대한 냉소와 경멸감이 확산했다. 그때까지 잉글랜드 지배계급에서 사용되던 프랑스어는 금지됐다. 영어가 국왕의 공식적인 언어가 됐다. 15세기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 사이의 적대감은 민족주의적 의식이 팽배하게 된 당시 유럽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내 봉건 귀족 세력이 극도로 약화됐다. 반면, 국왕의 권력은 크게 강해졌다. 샤를 7세는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을 강화하며 귀족 세력을 누르고 중앙 집권제를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백년전쟁 직후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30년간에 걸친 일명 ‘장미전쟁’(1455-1485년)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으로 돌아온 전사 귀족들이 왕권을 놓고 다시 치열하게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다 자멸한 비극적인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왕권 쟁탈전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헨리 6세였다. 1453년경 정신병이 악화되면서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요크가의 리처드 공작이 대신하여 섭정을 맡으려 했다. 헨리 6세의 왕비 마가렛을 포함한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 사람들이 제거당할 위험에 처했고 결국 요크 가문(흰 장미)과의 전쟁으로 확대됐다. 30년 동안 양가가 벌인 살육전에 의해 수많은 귀족이 무모한 죽음으로 내몰렸다. 전쟁은 요크 가문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동생 에드워드 5세와 함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삼촌 리처드 3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됐다. 그의 무자비한 왕위 찬탈은 요크 가문 내에서도 반발을 불러왔고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헨리 7세-영국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헨리 8세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리처드 3세를 제거하면서 튜더 왕조 시대가 열렸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11.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59) 중세후기⑨
  • 백년전쟁<3>
    샤를 7세의 대관식 이후에 프랑스 곳곳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영토 가운데 잉글랜드의 헨리 5세를 따르는 지역과 프랑스의 샤를 7세를 따르는 지역들로 나뉘었다. 두 왕을 두고 프랑스가 둘로 나뉘자 잔 다르크가 나섰다. 그녀는 잉글랜드에게 빼앗긴 파리를 수복하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적이 쏜 화살에 부상을 입고 퇴각해야만 했다. 이듬해 벌어진 콩피에뉴 전투에서 잔은 잉글랜드와 손을 잡고 프랑스를 배신한 부르고뉴파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잔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부르고뉴파와 동맹을 맺고 싶어 했기에 이를 강경하게 반대하던 잔을 적극적으로 구조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백성들 사이에서 자기보다도 위대한 인물로 여겨지던 잔의 존재는 그에게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포로가 된 그녀를 구해 낸 쪽은 잉글랜드였다. 당시 1만 리브르(현재 약 45억원 정도의 가치)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잉글랜드는 잔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를 이단 재판에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잉글랜드는 하나님이 프랑스가 아니라 자신들의 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다. 재판부는 잉글랜드나 부르고뉴파의 인물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녀를 ‘이단자’로 지목할 꼬투리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증법을 훈련한 명망 있는 학자 60명은 배운 것 없고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는 열아홉 살의 시골처녀를 상대로 약 5개월 동안 29번의 심문을 벌였다. 여러 차례 공개재판이 열렸으나 재판관들은 잔에게 어떤 죄도 찾아낼 수 없었다. 잔은 교묘한 재판관들의 질문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자기의 말을 가로채거나 답변 중에 다른 질문으로 몰아부치면, “고귀한 어른들이여, 하나하나 차례차례로 하시오!”, “그 문제는 벌써 답변하였소. 저 서기장에게 물어보시오!”라고 하는 식이었다. 당황한 재판관들은 엉뚱한 질문을 쏟아냈으나 잔은 하나하나 통쾌하게 반박했다. “미가엘 천사장에게 털이 있는가? (재판관)” “왜 밀어버리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잔)”, “벌거벗었던가? (재판관)” “하나님이 그에게 옷도 못 입힐 정도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가? (잔)”, “성 마가렛은 영어로 말하던가? (재판관)” “그가 영국인 편도 아닌데 어찌 영어를 쓰리라고 생각하시오? (잔)”, “깃발과 칼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는가? (재판관)” “칼보다 깃발이 훨씬 더 좋소. 난 직접 깃발을 들었소. 적이 공격해 올 때 사람 죽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오.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은 없소 (잔)”. 잔 다르크는 심문 내내 하나님의 음성을 향해 기도하며 오로지 자기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행한 모든 일에 대해 (가톨릭) 교회가 내리는 결정에 승복하겠냐’는 최종 질문에 잔은 대답했다. “하나님과 천국의 교회가 나를 프랑스 왕에게 보냈소. 내가 이룬 모든 행위와 내가 앞으로 이룰 행위는 승리하는 그 천상교회에 바쳐지는 것이니 지상교회에 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지금 답변할 수 없소. 이 세상 누구도 우리 주님이 명하신 일과 명하실 일을 못 하도록 나를 훼방 놓을 수 없소. 하나님이 맡긴 사명에 어긋나는 일을 하라고 교회가 요구한다면 세상 전부를 준다 해도 거절하리다.” 5월 29일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마녀이자 예언가인 죄, 이단인 죄, 마법으로 적을 살해하려 한 죄, 악령의 도움을 받은 죄 등 무려 70여 가지의 죄목으로 화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5월 30일 아침 9시경 영국군들은 잔 다르크를 루앙의 옛 장터에 설치된 처형장으로 끌고 갔다. 잔은 십자가를 가슴에 얹고 자신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빌며, 하나님께 영혼을 의탁했다. 마녀가 부활할 수 있다는 우려에 그녀는 세 번 화형 당했고, 그녀의 뼛가루는 센 강에 뿌려졌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10.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58) 중세후기⑧
  • 백년전쟁<2>
    잔 다르크(1412~1431)는 독일에 인접한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주현절(1월 6일)에 태어났다. 평범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잔은 독실했던 어머니 이사벨에게 신앙과 경건의 삶을 배우며 자랐다. 그녀가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백년전쟁(1339~1453) 당시였다. 프랑스 내 부르고뉴파와 손잡고 1415년 노르망디 전체를 정복한 영국은 파죽지세로 파리를 점령하고 루아르 지역까지 진격하여 1428년 10월에는 프랑스 남부지역의 마지막 보루인 오를레앙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제후들은 왕세자 샤를 7세를 왕으로 추대해 영국군대에 맞서고 있었으나 전세는 매우 불리했다. 전쟁의 혼란 가운데 잔 다르크의 마을 로렌 역시 강도질이나 방화 등의 내분으로 혼란스러웠고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잔 다르크는 이와 같은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잔의 나이 약 열일곱 때의 일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잔은 전쟁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말을 타거나 전쟁을 할 줄 모르는 힘없는 소녀일 뿐”이라고 거절했으나, 하나님의 음성은 보쿨뢰르 성채의 사령관 보드리쿠르를 찾아가면 군대를 내어줄 것이며 이들이 오를레앙의 점령군을 몰아내리라고 말씀했다. 잔 다르크는 보쿨뢰르 성채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이 원하신다!” 외치며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나만이 프랑스 왕을 도울 수 있소. 나는 가야 하오. 일해야 하오. 행동하기를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이오.” 그녀의 열정에 감동한 그곳의 경비대 대장이 그녀를 시농에 있는 왕에게 인도했고 고위성직자들과 법학자와 왕정위원회의 청문회를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전투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잔 다르크의 자신에 찬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고, 그녀가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요 투사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잔 다르크는 하얀 갑옷을 입고 백합 무늬로 덮인 휘장과 칼을 손에 쥐었다. 잔이 군대의 지휘권을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가 군대의 명분과 사기를 북돋웠다. 사병들은 잔을 믿고 따랐으며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잔의 군대는 주저함 없이 생루 요새와 르투렐르 요새를 공격해서 탈환했다. 잔과 프랑스 군대의 기세에 눌린 영국군은 달아나기에 바빴고 그녀의 활약에 고무된 프랑스군은 영국군이 점령했던 요새들을 차례로 탈환했다. 오를레앙 전역이 수복되면서 샤를 7세는 결국 잔 다르크가 탈환한 랭스에서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1429년 7월 16일 랭스의 대성당에서 샤를 7세는 왕으로 선포되었으며, 잔은 대관식 내내 깃발을 들고 제단 옆에 서 있었다. 왕은 이날 잔 다르크의 아버지를 만나 그를 비롯한 동레미의 모든 농부에게 각종 조세를 영원히 면제하리라고 약속했다. 거리 곳곳에는 인파가 몰려들었고 어떤 여인들은 기도서와 성화를 들고나와서 잔이 한 번이라도 손을 대주기를 바랐다. 그해 감행된 파리 공격에서 적이 쏜 화살이 잔의 갑옷을 뚫고 정강이에 박혔고,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와 잔의 하얀 깃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결국 실패로 돌아간 파리 전투는 결국 그녀의 운명에 불길한 징조가 되었다. 그녀는 이듬해 벌어진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 군대에게 포로로 잡혔다. 1430년 5월 23일 저녁 여섯 시쯤이었다. 이후 잔은 루앙에서 이듬해 1월 9일을 시작으로 5월 30일 화형당할 때까지 6개월간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그녀가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전투에서보다 더욱더 감동적이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9.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뿌리깊은 순복음
    (142)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 <55>
  •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사도 바울은 끊임없이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시비를 거는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고후 10:12)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들이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분란은 바로 ‘자기 자랑’에 충만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는 지혜 없는’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범위의 한계’(고후 10:13)에서 벗어나 마치 궤도를 이탈해 탈선한 폭주 기관차처럼 신앙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자랑은 마치 누룩처럼 온 사방으로 퍼져나간다(고전 5:6). 잠언 27장 2절 말씀도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고 경고했다. 이렇듯 스스로 높이며 자랑하는 것은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어느 날, 뉴욕에 있는 카네기 연주 홀에서 성대한 피아노 발표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어떤 젊은 피아니스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했다. 연주가 끝나자 모든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런데 오직 한사람, 맨 앞에 앉은 어떤 나이 지긋한 노인만은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그 젊은 피아니스트를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었다. 한참 동안의 박수 소리가 멈추자, 사람들은 그 젊은 피아니스트를 둘러싸고 악수를 청하며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칭찬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그 젊은 피아니스트는 얼굴빛이 매우 어두웠다. 이어서 그는 “저의 연주는 오늘 그리 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늘도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 맨 앞에 앉으신 노인이 저의 스승님이신데 박수를 치지도 않으셨고 일어나지도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단을 내려와 황급히 연주 홀을 빠져나갔다. 그렇다. 아무리 많은 관중이 열광적 박수를 보내고 칭찬했어도 자신의 스승이 칭찬하지 않았으므로 그 피아니스트는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장 의미있는 칭찬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승의 칭찬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고 말씀했던 사도 바울의 권면처럼,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오로지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은 참된 성도의 모습을 얻도록 경주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11.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41)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 <54>
  • 오직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자랑’ 혹은 ‘자화자찬’(自畵自讚)은 권장되는 미덕(美德)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삼가야 할 악덕(惡德)으로 여겨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B.C.427~347 )은 말할수록 손해 보는 것 그래서 항상 비밀로 해야 하는 6가지 중에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포함시켰다. “항상 비밀로 해야 하는 6가지가 있다. 첫째, 다른 사람의 단점을 말하지 마라. 누군가의 단점을 쉽게 말하면 자신의 이미지만 나빠진다. 둘째, 스스로 자랑치 마라. 남이 칭찬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떠벌리면 자신이 한 일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셋째, 자신의 사생활을 필요 이상으로 발설치 마라. 혹시 관계가 틀어지면 그것으로 인해 곤란해진다. 넷째, 자신의 약점을 말하지 마라. 사람들은 타인의 약점을 통해 위안을 얻으며 자신도 모르는 새 은근히 즐긴다. 다섯째, 스스로 부(富)를 자랑치 마라. 인간은 상대방이 자신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도 상처받는 존재다. 앞에서는 다들 박수를 쳐 주는 듯해도 속마음은 그렇지 못하다. 여섯째, 자신의 목표에 대해 말하지 마라. 어차피 그 목표를 만들고 이뤄내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최대의 승리는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중세 페르시아의 시성(詩聖)으로 불렸던 사디(M. Al-Sa'di, 1213~1291)는 “자화자찬하는 사람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법이다. 자신만을 보는 사람의 신세보다는 오히려 보지 못함이 더욱 낫다”고 했다. 또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L. Tolstoy, 1828~1910)는 “이름을 널리 알리려면 자화자찬하지 말며 칭찬하는 소리도 들으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했고, 『팡세』의 저자인 철학자 파스칼(B. Pascal, 1623~1662)도 이와 유사하게 “칭찬받기를 원하면 자화자찬을 하지 말라”라고 강조하며 스스로를 칭찬하는 ‘자랑’에 대해 경고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7~18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라고 권면했다. 그렇다. 진정한 칭찬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받는 칭찬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영광이다. 하물며 자기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자랑’이야 말로 성령 충만한 성도의 미덕은 아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하시고 칭찬하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며, 기쁘게 그리고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8~11).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10.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40)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53>
  • 성령의 사람은 십자가 신앙으로 자신의 연약함 자랑하는 예수님의 사람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어떤 사람이든 남보다 좋은 것을 갖고 있으면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로 뛰어난 것 같지 않아 보여도 스스로 보기에 자랑스럽고 뽐내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외모 자랑, 재산 자랑, 건강 자랑, 권력 자랑, 인맥 자랑 등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자랑은 입술의 말로 이뤄진다. 자랑은 혀를 사용한 언어로 행해지는 허탄한 행위이다(약 4:16). 성령으로 충만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성도라면 우리의 자랑은 자아도취적인 세상의 자랑과는 달라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해야 한다. 시편 20편 7절은 “야훼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했으며, 역대상 16장 10절은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야훼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라고 기록한다. 둘째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 삶의 모든 일은 겉으로는 모두 우리 자신의 공로 같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잘 살펴보면 모두 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이다. 이것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된다. “너희는 야훼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대상 16:8~9). 셋째로 주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한다. 현시대에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도 바울의 시대에는 십자가는 죄수를 벌주기 위한 끔찍한 형틀이요,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십자가를 생각하거나 말하기도 싫어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까지 했다(고전 1:18~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고 그 진리를 아는 것이다. 십자가의 진리를 알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모든 것을 다 알아도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십자가만을 자랑하기를 소망한다.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까지도 고백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성령의 사람은 세상에서 잘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고 못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자랑하는 것이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3~1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9.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독교 설교자 열전
    설교자 -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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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교회 사도들을 잇는 교부들의 설교
    기독교 교리 기틀 세우며 박해 가운데도 기독교의 합리성 옹호 오리게누스, 금욕과 청빈의 삶 살며 복음 전해 영국 성공회 신학자이자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기독교 역사를 초기 교회 시기(100년~500년),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500년~1500년), 종교개혁 시기(1500년~1650년), 근대 시기(1650년~1914년), 현대 시기(1914년~현대)로 나눈다. 신약성경이 완성된 100년 이후부터 칼케돈 공의회가 있었던 451년의 시기를 교부 시대(the partristic period)라고 한다. 여기서 ‘교부’(patristic)란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테르’에서 왔다. 이 용어는 교부 시대와 그 시대에 발전한 독특한 사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이 시대의 특징은 오늘날까지도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다양한 기독교 교리가 발전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시기는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시기였다. 박해를 받는 가운데 기독교를 이방인들에게 설명하려는 변증학이 발전했다. 변증학이란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옹호하고 설명하는 학문이다. 순교자 유스티누스(100~165년), 리용의 이레니우스(130~200년), 오리게누스(185~254년), 테르툴리아누스(160~225년),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등 이 시대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자요 설교자들이 나타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삼위일체론, 교회론 등 그리스도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이방인들에게 기독교를 알리는 시기였다. 교부 시대의 설교는 이전 사도 시대의 설교보다 능력 면에서 다소 뒤처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초기에는 교육받은 목회자가 설교하기보다는 일반인을 포함해 누구나가 설교를 할 수 있었다. 교사들, 복음전도자들, 사도들, 예언자들을 포함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장로와 주교만이 설교할 수 있도록 했다. 초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오리게누스는 185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구약성경의 헬라어판인 ‘칠십인역’(Septuagint)을 번역한 곳도 알렉산드리아다. 그의 아버지 레오니데스는 알렉산드리아대학에서 헬라문학을 교수했다. 그는 아들 오리게누스에게 매일 성경을 가르쳤고 문법, 수학, 논리학, 수사학을 교육했다. 또한 오리게누스는 성 판테누스가 설립한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에 다니는 동안 클레멘트에게 교육을 받았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교부 중 하나였던 클레멘트는 헬라철학과 기독교 교리를 결합하는 데 관심이 많았고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를 통해 많은 제자를 길러내기도 했다. 클레멘트에게 사사 받을 당시 오리게네스는 이미 철학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202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북아프리카 지역에 가한 핍박으로 인해 오리게누스의 아버지 레오니데스는 투옥되었고 결국 순교하고 말았다. 오리게누스 역시 아버지를 따라 순교하고 싶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옷가지를 감추는 바람에 집을 나설 수 없었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그의 스승 클레멘트도 핍박으로부터 피신하게 되었고 오리게누스가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의 수장으로 지명되었다. 그의 나이 18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밤마다 맨땅에서 잠을 청했으며 계속해서 금식을 행했다. 단벌옷에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줄곧 평신도 설교자로 지냈던 그는 228년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을 방문하기 위해 머물던 가이사랴에서 안수를 받았다. 약 20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던 그는 아테네와 아라비아 등 넓은 지역에서 설교 사역을 행했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고 그 중에 암브로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는데 오리게누스의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고 오리게누스의 여생을 돌보아주었다. 특히 암브로스는 오리게누스가 하는 말을 받아 적을 속기사들과 필사자들을 고용했고 그들이 기록한 내용을 출판하도록 했다. 오늘날까지 오리게누스의 설교가 많이 남아있는 이유가 바로 암브로스의 헌신적인 도움 덕분이다. 250년 6월 로마 황제 데시우스의 칙령이 공표됐다. 이 칙령은 지방의 로마 관리들에게 로마의 신들과 황제에게만 희생 제사를 바쳐야만 한다고 명령했다. 희생 제사를 바친 사람에게는 증명서가 발급되기도 했다. 이 박해로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이 혹독한 악형, 감금, 공갈로 고통당하다가 순교했다. 오리게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붙잡힌 그는 갖은 고문을 당했다. 251년 데시우스가 군사 원정 도중 숨지면서 박해는 끝났지만 감옥에서 풀려난 오리게누스는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다. 옥고로 인해 그의 몸은 지쳐있었고 옥에서 풀려난 후 4년이 지난 254년 69세의 나이로 두로에서 생을 마감했다. 조지훈 목사(선교연합회 담당)
  • 2023.11.10 / 김용두 기자

    설교자 - 야고보(Ⅱ)
  • 탁월한 적용으로 설교, 성도의 변화 이끌어 신앙 속 믿음과 행함의 균형 강조 은유 통해 말씀의 의미 쉽게 전달 야고보의 설교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특징은 적용의 탁월성이다. 성경 기록의 1차적인 목적은 기록이 아니다. 성경은 “창조로부터 재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로 초대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계시되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당대에 그리고 후대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적용”해온 결과물이다. 즉 성경은 특정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적용된 결과물이다. 설교를 증인(witness)이 행하는 증언으로 정의하는 토마스 롱은 성경적 설교란 “설교할 때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인용하느냐와 상관없이 현재적 경험과 관련하여 얼마나 성경을 신실하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좋은 설교의 요소 중 하나는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회중들의 경험과 삶에 잘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들의 삶에 적용되지 않는 설교는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일 뿐이다. 설교의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야고보의 설교는 뛰어나다. 그는 “말씀을 따르십시오”라거나 “말씀을 행하십시오”라고 불명확하게 설교하지 않는다. 실제적인 삶의 적용을 강조하는 그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잘 다스리는 것, 교회의 지체 간에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서로 자랑하지 않는 것 등 실제적인 적용의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서 적용은 눈에 보이는 것 같고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다. 셋째, 야고보의 설교는 신앙생활에서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과 행함에 대해 사도 야고보가 사도 바울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고보는 ‘행함’(약 2:14)을 강조했던 반면 바울은 ‘믿음’(롬 3:23~24, 갈 2:16)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설교가 전혀 다른 상황과 대상을 향해 행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할례나 음식법과 같이 유대교의 행위들이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했던 반면 야고보는 그저 머리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과 야고보의 설교의 대상이 서로 달랐다. 바울은 아직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설교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반면 야고보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구원 이후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도 행위로(by works) 구원받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도 행위를 만들어 내는(producing) 것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선한 행위로(by) 구원을 받지 않지만, 선한 행위를 위해(for) 구원을 받는다.” 야고보는 구원에 필요한 믿음에 행위를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데 행함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믿음을 통한 구원 이후의 행함은 자주 강조되지 않는 부분이다. 사도 야고보는 이렇듯 믿음과 행함의 적절한 균형을 강조함으로써 성도들이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해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넷째, 사도 야고보의 설교에는 적절한 은유가 사용되고 있다. 은유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다른 대상을 이용해서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문학적 기술”이다. 사도 야고보는 자신의 메시지를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은유를 사용한다. 그의 은유가 특별한 것은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의 핵심을 좀 더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야고보서 1장 23~25절에서 야고보는 거울이라는 물건을 통해 말씀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또한 샘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언어 사용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11). 이렇듯 사도 야고보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자주 접하는 물건이나 장소를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좀 더 분명하게 했다. 일상의 삶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사도 야고보는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조지훈 목사(순복음선교연합회 담당)
  • 2023.10.12 / 이미나 기자

    설교자 - 야고보(Ⅰ)
  • 예수님 부활과 성령 침례 통해 참 신앙 갖게 돼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믿음 강조 예수님은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를 따라 갈릴리 나사렛에 정착하셨다(마 2:22~23; 눅 2:4~6). 성경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 예수라는 아들 외에 다른 자녀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예수님에게 형제, 자매가 있었다는 것이다(마 12:46; 눅 8:19; 막 3:31).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중 하나였다(마 13:55). 예수님의 다른 형제들이었던 요셉, 시몬, 유다와는 달리 야고보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한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 1:18~19). 이뿐 아니라 바울은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였음을 기록하고 있다(갈 2:9). 특히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이방 기독교인들에 관한 문제로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놓여있을 때 중재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행 15:1~21).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기록한 성경이 ‘야고보서’이다. 야고보서의 서두에서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약 1:1)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야고보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으로,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고백했던 것은 아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과 친척들은 예수님을 종교적 광신주의자로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막 3:21).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물론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천사를 만났고(눅 1:26~38), 어린 시절 예수님의 명민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눅 2:42~52).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이해와 생각이 그녀의 다른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던 같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종교에 미친 광인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어떻게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증인들의 목록을 보여준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고전 15:7)라는 구절 속에서 우리는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증인이요 사도들과 함께 활동했던 초대교회의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 침례를 받기 위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해 예수님의 형제들과 제자들이 함께 기도했다.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야고보는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며 열정적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침례의 경험이야말로 야고보가 자신의 형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야고보서는 설교자 야고보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야고보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야고보의 설교의 특징은 먼저 믿는 자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진리의 말씀’(약 1:18)은 행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한다(약 2:14). 그가 생각하는 경건함은 신자로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주의하며(약 1:19, 26),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약 1:27),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킬 때 가능한 것이다. 즉, 진정한 신앙은 내적으로는 자신의 언행에 주의하며 외적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약 1:22)이다. 이와 같은 말씀과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기독교인의 행동을 좌우하는 진정한 행동 지침이라는 사실 역시 의미한다. “‘진리의 말씀’(약 1:18)은 구체적 행위를 추동하고 삶의 실천으로 이끌어가는 하나의 힘”인 것이다.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9.08 / 이미나 기자

    순복음영성스케치
    기도의 종류(Ⅲ) - 방언 기도
  • 올해는 우리 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이 창립한 지 70년이 되는 해로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오순절 운동을 되돌아보게 한다. 오순절 운동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려는 운동으로서 성령 침례의 결과가 방언, 신유, 능력으로 나타남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성령 충만과 방언 기도를 강조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신유 사역과 사회 참여를 통하여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했다. 오늘은 우리 교회와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부흥의 큰 원동력이 된 방언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 방언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의 영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다짐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1. 방언 기도의 의미와 성경 상의 언급 방언 기도는 영적인 언어로 말하는 기도로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며 개인 신앙 발전에 큰 유익을 주는 기도이다. 방언은 성령 침례의 외적 증거이며 성경 많은 곳에서 성령 침례의 표적으로 나타난 방언 기도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행 2:1~4), 둘째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집안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의 성령의 임재(행 10:44~46), 덧붙여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의 성령의 임재(행 19:5~6)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2. 현대 오순절 운동과 방언 기도 성경 상에 등장하였던 방언 기도는 20세기 초 현대 오순절 운동에서 재발견된다. 1901년에 감리교 목사 찰스 팔함(Charles F. Parham)은 그가 가르치는 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던 중, ‘방언이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임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이렇게 발견한 말씀의 내용을 철저히 믿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침례와 방언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작이다. 이어 방언 기도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은 1906년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의 아주사 부흥으로 이어졌다. 방언과 방언 통역, 예언, 축사, 신유 등이 강력하게 나타났던 아주사 거리 집회는 무려 3년이나 지속되며 기도의 불길을 이어갔다. 3. 방언 기도의 유익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1) 방언 기도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준다. 성경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방언)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다(행 2:4). 한편 믿는 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한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막 16:17). 성령 침례를 받으면 방언이라는 표적을 통하여 분명하게 성령 충만의 증거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방언 기도를 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에게나 듣는 자에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가져다준다. (2)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나누는 비밀한 언어이다. 방언 기도에 대해 비교적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을 하나님과 비밀한 영적 교통을 나누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고 하면서 또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 14:14)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비밀의 기도이기 때문에 사탄도 알아듣지 못한다. (3) 방언 기도는 자기 신앙의 덕을 세운다.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전 14:4)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것의 원어적 의미는 ‘집을 지어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방언 기도를 통하여 마치 집을 짓듯이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다. (4) 방언 기도는 마음을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시켜준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잠재 의식 속에 있는 모든 불안, 초조, 절망, 미움, 원한, 상처 입은 것을 깨끗이 청산해 준다. 마음의 공간이 방언 기도를 통하여 깨끗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되어 절대긍정의 마음으로 변화 된다. (5) 방언 기도는 연약함을 돕는 탄식의 기도이다. 성경은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고 있다(롬 8:26~27). 방언 기도를 통하여 탄식하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6) 방언은 깊고 오랜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증거하고 있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시간이 길어야 한다. 방언 기도는 기도의 언어로서 기도를 오래 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코로나19 엔데믹 선언 이후인 지금은 성도 개개인이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한 영성을 회복하고 교회 내외적으로 전례 없는 부흥을 꿈꾸어야 할 때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교회 성령 충만과 부흥의 토대가 된 오랜 시간의 깊은 방언 기도를 회복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 모두가 부흥으로 향하는 최선의 지름길을 제공해 줄 것이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1.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Ⅱ): 대적 기도
  •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한 영들과의 영적 전쟁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적 전쟁에 대해 무의미하게 여기거나 막연히 신비적인 것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성경 여러 곳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오늘날도 실제적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체험되고 있다. 이러한 영적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적 기도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 권세(창 3:15)에 힘입어 선포하는 대적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대적 기도의 의미와 특징 대적 기도는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에 힘입어 악한 영들에게 명령하고 선포하는 기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형식이지만 대적 기도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으로 간구가 아닌 명령과 선포의 형태를 지닌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다(눅 10:19).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악한 영들을 대적함으로써 승리하였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이 주신 권세와 능력을 믿고 명령하며 선포함으로써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2. 성경에 나타난 대적 기도 성경은 영적 전쟁을 실제적으로 묘사하면서 대적 기도의 상대인 악한 영들과 이들을 어떻게 상대하여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1) 대적 기도의 대상 성경은 우리가 물리쳐야 할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하거나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한다. 이러한 성경의 언급을 통해 우리의 대적이 바로 ‘마귀’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2) 대적 기도의 사례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는 방법(막 9:25)과 명하여 내어 쫓는 방법(눅 8:29)을 통하여 대적 기도를 행하셨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에 힘입어 빌립보의 귀신 들린 여종을 향하여 명하였고, 귀신은 즉시 나오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는 명령과 선포는 오늘날 대적 기도의 대표적인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3. 대적 기도의 방법 대적 기도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영적 대결이므로 마치 전쟁터에서 배수의 진을 친 것과 같은 비장한 각오로 준비하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1) 보혈을 의지하는 기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의 보혈에 대한 예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에서 보호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출 12:13).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흘려주신 보혈의 권세를 갖고 있으므로, 보혈에 의지하는 기도는 마귀에게 대적하는 가장 큰 기초가 된다.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들은 매일 같이 마귀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특별히 개인의 감정과 사회적 관계 그리고 환경 가운데 보혈을 뿌리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예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는 기도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시어 오신 이유는 우리의 상실한 권세를 회복해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으나 부활하셔서 승리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8:1).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요 1:12). 성경은 예수님의 권세에 의지할 때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고(마 16:18), 매고 푸는 권세가 있어서 마귀들을 묶고 포로된 자들을 구원하는 권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마 16:19). (3)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기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대적의 수중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겼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패배 의식에 빠지고 좌절과 낙심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대장 되신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주셨으며, 흉악과 결박에서 놓임 받게 해주심을 굳게 믿고 마귀를 대적하며 기도해야 한다. 4. 대적 기도의 실제와 유익 대적 기도를 통하여 의심, 두려움, 교만, 불안, 낙심과 염려 등 마음의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사라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적 기도는 육체의 치유와 믿음의 회복도 가져다준다. 우리는 각종 암, 우울증, 중풍, 고혈압, 당뇨병, 만성 피로 등 육체의 질병에 대해 꾸짖고 명령하고 선포하여 승리할 수 있고, 영적 성장과 신앙생활에 방해를 주는 악한 영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대적하며 기도할 수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사람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괴롭히는 악한 원수 마귀야! 지금 즉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떠나갈지어다!” 이러한 선포를 통하여도 우리는 마귀와 효과적으로 대결하고 영적 전쟁의 승리에 다가설 수 있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0.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Ⅰ): 금식 기도
  • 음식물의 섭취는 인간의 기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매우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이러한 음식물 섭취를 끊고 금식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초월한다는 결연한 의미가 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셨을 때 금식하며 기도하셨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마 4:4)라고 말씀하셨다. 금식 기도는 단순히 음식물 섭취를 끊는 것의 의미를 넘어서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겠다는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오늘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귀한 신앙 체험의 기회로서 금식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금식 기도의 의미와 필요성 사전적인 의미의 금식 기도는 ‘일정 기간 음식을 먹지 않으며 올리는 기도’를 말하며, ‘종교적 계율로서 음식을 절제하는 것’이라는 의미도 있다. 금식은 히브리어로 ‘촘’이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네스튜오’라고 하는데 ‘음식을 삼가다’라는 의미가 있다. 어떤 정의에 따르더라도 금식 기도는 음식물 섭취를 끊고 기도에 집중한다는 의미를 가지며, 우리의 관심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서 성령님과의 교제로 이끄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경쟁 사회 속에 치열한 혈과 육의 전투(엡 6:12)를 벌이는 현대인들에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동참하는 영적인 승리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서 금식 기도는 매우 절실한 필요를 가진다. 2. 성경에 나타난 금식 기도 성경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대한 기본적인 지침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금식 기도에 관해서도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1) 구약의 금식 기도 구약의 금식 기도는 공적인 금식 기도와 개인적인 금식 기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공적인 금식 기도의 예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나라가 위기에 있거나 민족적인 위기를 겪을 때 백성 모두가 금식하며 기도했다. 에스더의 금식 기도(에 4:16)와 미스바에서의 금식 기도(삼상 7:6)가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개인적인 금식 기도는 사명 받은 선지자들이 주로 행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했고(출 34:28), 다니엘도 3주간을 금식하며 기도했다(단 10:2~3). (2) 신약의 금식 기도 신약의 금식 기도는 예수님과 바울 그리고 초대교회의 금식 기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셨는데, 이는 복음 전파와 인류 구원의 사역을 준비하시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고(행 9:9), 초대교회에서는 선교사 파송(행 13:2~3)이나 직분자를 세울 때(행 14:23)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금식하며 기도했다. 3. 금식 기도의 유익 금식 기도는 개인적인 체험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의 유익이 있다. (1) 믿음의 성장(영적 유익) 금식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철저히 깨닫게 해주는 데 도움을 주며, 자신의 능력과 가진 것들을 믿었던 지난날을 회개하는데 도움을 준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도와주는 금식 기도는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고 환난과 시험을 극복하는 능력 있고 담대한 믿음으로 성장시켜준다. (2) 건강의 회복(육적 유익) 현대인들은 필요 이상의 다량의 음식물을 섭취하면서 질병의 원인을 제공하기 쉽다. 그런데 금식 기도는 이렇게 과도한 음식 섭취를 제한함으로서 의학적인 치료의 효과를 얻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더욱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 기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치료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사 58:8). (3) 정신적 회복(혼적 유익) 금식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치료는 육신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신적인 회복도 가져다준다. 금식 기도의 유익을 체험했던 사람들의 경험을 빌리자면 금식 기도는 정신력의 강화, 두뇌 능력의 향상, 집중력 증대, 인생관 재정립 등 정신적인 면에서 삶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 4. 금식 기도 시 유의 사항 (1)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함 금식 기도에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목표가 없을 경우 쉽게 권태감을 느끼고 포기하게 된다. 본인에게 가장 절실하고 급박한 문제를 택해 하나님께 매달리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져야 끝까지 승리할 수 있다. (2)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아야 함 금식 기도를 할 때 근신하며 겸손하게 행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간혹 금식 기도를 하는 것에 대해 자랑하는 사람도 있는데(마 6:17~18), 금식 기도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 행하는 기도임을 결코 잊지말아야 한다. (3) 교만의 유혹을 물리쳐야 함 장기간 금식 기도를 했다고 하여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된다면 마귀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금식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지고, 나 자신이 죽어서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만이 나타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09.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선교 뉴스
    정대섭 목사, 미국 선교사로 파송
  • 동부성전 담당 정대섭 목사가 미국 뉴욕순복음연합교회 담임으로 임명돼 5일 주일 4부 예배 때 선교사 파송장을 받았다. 파송식에서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정 목사에게 파송장을 전달하고 선교 사명 감당을 위해 안수기도했다.
  • 2023.11.10 / 오정선 기자

    A총회 몽골서 성회 및 임원회의 진행
  • 선교사역을 위해 헌신하는 A총회는 8월 14~18일 몽골을 방문해 지역교회 탐방과 함께 성회 및 임원 회의를 진행했다. A국과 몽골에서 사역 중인 선교사 9명과 이들을 후원하는 중화권선교회장 한철용 장로를 비롯 회원 8명도 참석해 순복음의 선교사역을 응원하고 함께 기도했다. 이 기간 16일에는 울란바타르순복음교회 창립 20주년 기념축복성회가, 17일에는 날라이흐순복음교회 창립 15주년 기념 감사예배가 열렸다. 전호윤 목사(순복음강북교회)는 각각 말씀을 전하고 현지 성도들의 신앙을 격려했다. 17일 A총회는 곽이삭 총회장의 진행으로 임원회의를 개최하고 선교사 사역 보고 및 지원 정책을 논의했다.
  • 2023.10.20 / 오정선 기자

    선교대회 봉사 나선 네이션스비전 팀
  • “선교사님 오랜만에 만나니 행복합니다” 코로나19가 엔데믹으로 바뀌면서 올해 열린 제49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는 4년만에 전세계에 파송됐던 선교사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축제 분위기 속에 진행된 선교대회에는 섬김의 손길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네이션스 비전(Nations Vision) 팀이다. 선교국에서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선교훈련인 FMTC(Full Gospel Missionary Training course) 동문들로 구성된 네이션스비전 팀 30여 명은 영산수련원에서 열린 선교사수련회 동안 섬김의 봉사로 큰 감동을 줬다. 프로그램 사이 쉬는 시간 선교사들의 재충전을 돕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비롯해 과일 다과 등 다양한 간식들을 준비했고, 특별히 마련한 포토존에서는 선교사들이 추억을 남길 수 있도록 촬영과 인화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사진을 받아든 선교사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다. 네이션스비전 팀 총무 오희철 장로는 “그리웠던 선교사님들을 만나 행복한 시간이었다”며 “선교사님들을 섬기면서 선교지와 선교사님들을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매주일 모임을 진행하며 선교사들을 위한 중보기도와 함께 선교지 필요에 대한 전략적인 후원과 재능 기부에 나서고 있는 네이션스비전 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순복음가족신문 온라인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하단 클릭) <네이션스비전 팀 소개 바로가기>
  • 2023.06.08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심정미 선교사(부룬디)
  • 탄자니아 이어 부룬디에서 복음 사역 전개
    현재 부줌부라지역에 청년훈련센터 건축 중 다음세대 일으켜 하나님 나라 세워지길 소망 부룬디는 동부 아프리카에 속한 나라로 국토면적은 남한의 4분의 1 크기이며 인구는 약 1200만명입니다. 국토 대부분이 산지로 이뤄진 부룬디에서 국민들은 주로 농업 위주의 경제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후투족(85%)이 대다수를 차지하며 투치족(14%), 투와족(1%)으로 구성돼 있고 종교는 기독교(대부분 가톨릭)가 전국민의 67%, 토속종교가 23%, 이슬람교가 10%인데 이슬람교가 점점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2023년도 IMF의 보고에 의하면 부룬디는 1인당 국민소득이 249달러로 조사대상 190개국 중 최하위 최빈국 나라입니다. 1993년부터 2008년까지 내전이 있었고 제노사이드 즉 인종학살로 최소 25만여 명이 희생되고 수십 만명이 주변국인 탄자니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탈출한 역사가 있습니다. 계속된 내전으로 말미암아 고아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2021년 부룬디에 왔을 때도 반군들의 공격이 2주에 한 번씩 일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언론에서는 버스터미널에서 수류탄 폭발 사고, 부줌부라공항에서 박격포 공격이 일어나 ‘정치인 19명 사상’이라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불안정한데도 부룬디 국민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긴 내전, 부족 간 살상의 역사로 국민들은 자신과 다른 부족에 대한 경계심과 증오를 안고 살아가는 실정입니다. 저는 2021년, 비자 문제로 16년 동안 사역하던 탄자니아를 떠나 부룬디로 사역지를 옮겼습니다. 탄자니아에서는 1기 사역으로 탄자니아 송게아순복음교회를 개척했고, 2기 사역으로 제자훈련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2기 사역을 시작하는 시점에 탄자니아 이민법 개정으로 장기간 비자갱신이 되지 않았고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던 중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부룬디로 임지 이동을 결정하게 됐습니다. 이곳에 와 보니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국민 대부분은 하루 한 끼 식사를 간신히 할 정도로 환경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교회들은 우후죽순 세워지고 있지만 오랜 기간 내전으로 제대로 된 신학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아 기초적인 성경 지식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는 이단들과 협력하는 목회자들이 생겨 현지 교단 내에 혼란이 야기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가장 절실한 사역은 목회자 훈련과 청년 훈련입니다. 탄자니아에서 준비하고 계획했던 훈련센터 즉, 하나님의 군사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워가는 사역을 부룬디에서 하게 됐습니다. 현재 부룬디 현지 교단인 BAGF(Burundi Assemblies of God Fellowship. 부룬디·하나님의성회) 교단과 협력해 옛 수도인 부줌부라지역에 청년훈련센터(Youth Training Center)를 건축 중입니다. 이곳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경건 훈련(새벽기도, 말씀교육)과 기술교육(양장, 목공, 용접)을 진행해 신앙의 성숙과 경제적 자립을 목표로 운영할 예정입니다. 또 사역 중인 목회자를 대상으로 세미나와 영성훈련 프로그램 등 기도와 말씀훈련을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부룬디 교회 안에 영적 성장과 성숙이 이뤄져 교회들이 든든히 설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부룬디 훈련센터를 통해 선교사를 배출, 부룬디뿐 아니라 탄자니아와 콩고민주공화국에도 교회 개척 목표를 두고 있으며 장기적인 사역계획으로는 어린이들의 열악한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실생활의 어려움을 돕는 구제 사역을 통해 미래의 일꾼들을 세워가는 비전을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 성도님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항상 성령 충만함으로 주님이 주인 되어 주셔서 삶과 사역을 주관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부룬디에서의 선교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청년훈련센터(Youth Training Center) 건립이 순적하게 이뤄져 말씀 훈련과 기술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의 청년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함과 말씀으로 든든하게 세워짐으로 하나님의 나라 이루기를 소망합니다. 선교사들의 안전과 건강,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 부탁드립니다.
  • 2023.11.03 / 오정선 기자

    노진환 선교사(가나)
  • 가나가 믿음의 큰 나라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순복음 선교사들이 사역한 지 올해 25년 돼 2001년 조용기 목사 성회 후 복음의 문 활짝 열려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아프리카 가나에서 순복음교회 선교사들이 사역을 시작한지 올해로 25년이 되었습니다. 가나는 2001년 8월 조용기 목사 초청 대성회를 통해 복음의 큰문이 열린 것을 발판 삼아 저는 현재 수도인 아크라 인근 테마(Tema)에서 사역하고, 북쪽의 볼가탕가(Bolgatanga)에서 지인희 선교사가 각각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가나는 떠오르는 대륙 아프리카의 나라 중에서 가장 큰 잠재 가능성을 가진 나라입니다. 황금이 풍부해서 예로부터 가나의 해변은 골드 코스트(Gold Coast)라고 불렸으며,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 생산량이 전 세계 생산의 4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가장 긴 볼타강을 끼고 있어 아프리카 최초로 댐을 건설해 수자원이 풍부합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가나는 아프리카 어떤 나라보다 국가와 학부모들이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어 수많은 학교를 통해 양성되는 인적자원 또한 풍부한 나라입니다. 가나는 민주주의와 왕정의 혼합국가로 지역마다 작은 소도시마다 혹은 동네마다 왕이 있습니다. 이들의 권한은 대통령제 국가임에도 아직도 강력해 땅을 사더라도, 행사를 하더라도, 또 교회를 세우려 해도 이 왕들에게 허락을 받고 조정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역이 힘들 수도 있지만 이 왕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면 선교사역이 수월해지기도 합니다. 대통령제와 공존하는 왕정제도라는 이중적 정치 사회 구조 때문에 가나는 항상 분열과 갈등의 조건들이 있는 것 같지만 두 체제가 상호 무시할 수 없어 협조, 견제함으로 오히려 쿠데타, 전쟁, 무정부 상태 등 큰 사회적 소요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대화 및 조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무력 충돌이 적게 발생합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아프리카 국가 중 오히려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 상태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시무하는 가나순복음교회는 25년이 된 교회입니다. 1대 이영신 목사님, 2대 서상욱 목사님, 3대 문기중 목사님, 4대 박종기 목사님에 이어 제가 5대 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가나순복음교회는 대서양 참치잡이를 직업으로 살아가는 한인들을 위해 복음의 문을 열고 사역하는 동시에 아프리카 원주민 선교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습니다. 가나순복음교회는 주아퐁(Juapong) 지역에 그동안 3개의 교회를 개척하고 1개의 학교, 1개의 유치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1개의 교회와 유치원을 현지 교단과 정부에 이양하고 현재는 부카리코페순복음교회, 아보티아순복음교회 그리고 부카리코페순복음학교를 운영 및 지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모든 원주민 교회와 학교를 통해 복음의 씨앗이 심어지고 있고 성령 충만한 현지 목회자들은 순복음의 선한 일꾼으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도시화가 빠르게 이루어져 젊은 인구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아프리카의 시골 마을이지만 그럼에도 성도들은 모이기를 힘쓰고 한국인 성도들의 사랑으로 지어진 교회에 감사하면서 힘 있게 사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에 베풀어주신 축복을 성취하기 위해 절대순종 절대감사의 정신으로 복음에 대한 열정을 품고 쉼 없이 달려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가나 사람들은 여느 아프리카 나라와는 조금 다르게 다혈질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금방 화를 냈다가도 금방 웃는 사람들이 많아 처음 사역할 때는 다혈질의 원주민들과 부딪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제게 주신 마음은 가나 사람들이 한국 사람과 비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다혈질의 민족성을 가진 대한민국을 사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가나 역시 하나님께서 마지막 선교의 시간에 반드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가나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섬길 수 있는 믿음의 큰 나라가 되도록 중보기도를 요청드립니다. 1. 2024년 대통령 선거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의 대통령이 세워져서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도록 2. 북쪽 사막으로부터 무슬림 인구가 많이 유입되어 직간접적으로 교회와 성도가 억압되고 있는데 무슬림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3. 가나순복음교회가 주님의 큰 축복을 받아 한인과 원주민 교회를 향한 하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4. 볼가탕가 지역에서 사역하는 지인희 선교사의 건강과 사역의 기름 부으심을 위해, 테마에서 사역하는 노진환 선교사 가족의 건강, 성령 충만해 사명 감당하도록
  • 2023.10.06 / 오정선 기자

    조재영 선교사(캄보디아)
  • 죽음의 땅에서 피어오른 복음의 씨앗 순복음 성도들의 신앙 열정 엿볼 수 있어 희망의 복음 피워낼 순복음 일꾼 양성이 비전 킬링필드(Killing Fields)의 땅 캄보디아에 복음이 들어온 지 100여 년이 됐습니다.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간직한 캄보디아는 전체 25개 주로 구성되어 있고, 특히 캄퐁츠낭(Kampong Chhnang) 지역은 수도인 프놈펜에서 북서쪽으로 약 90㎞ 떨어진 곳으로 캄보디아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똔레쌉 강줄기와 맞닿아 있고 주로 도자기와 그릇을 만드는 지역입니다. 캄퐁츠낭순복음교회는 2011년 4월 창립예배를 드리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캄퐁츠낭 시내의 한 집을 빌려 교회와 한글학교를 시작했고 지역에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과 청년들을 모아 학교를 보내주며 말씀과 신앙 교육을 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나서 캄퐁츠낭 시내에서 배를 타고 똔레쌉을 건너 섬 지역인 캄퐁레잉 뜨러바엑 마을에서 전도와 주일학교 사역을 하다 지금의 지성전인 뜨러바엑 성전을 건축하고 제2의 사역도 펼쳐나가게 되었습니다. 캄보디아는 전체 인구의 약 65%가 35세 미만의 젊은 세대입니다. 높아지고 있는 자녀 교육열을 고려해 교육사역의 필요성을 판단한 우리는 유치원 사역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캄퐁츠낭 시내 근교의 저렴하고 넓은 땅을 알아보다가 ‘언동 르싸이’라는 곳의 땅을 구입해 유치원과 사택, 캄보디아 청소년들이 함께 기거할 수 있는 숙소가 있는 센터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캄퐁츠낭 교육청에 ‘벧엘유치원’에 대한 허가를 신청하고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 귀한 사역을 감당하며 청소년 학사도 같이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이후 같이 생활하던 청소년들이 모두 떠나고 유치원이 폐쇄되었으며, 예배도 정상적으로 드리기 어려웠지만 지난해 선교대회를 기점으로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과의 대면이나 모임이 정상적인 수준으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사역지를 허락하셨습니다. 캄퐁츠낭 시내에서 약 15㎞ 정도 떨어진 떠꺼 마을을 위한 사역입니다. 떠꺼 교회는 과거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의 도움을 받았지만 지금은 후원이나 협력이 없어 현지 사역자가 힘겹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이곳 사역자를 만나 협력을 시작했습니다. 선교 현장에서 14년 사역하며 내가 사역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사역 지경이 넓어지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떠꺼 교회는 후임도 없는 나이 많은 사역자가 각 예배 처소를 돌며 예배를 인도하기엔 영역이 너무 넓습니다. 때문에 성도나 제자들에게 제대로 된 교육이나 양육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곳을 돌아보며 순복음교회의 초창기와 같은 성도들의 순박함과 열정을 마주하게 된 우리는 각 예배 처소였던 곳에 순복음 구역장 같은 일꾼을 세워 훈련하고 구역의 개념을 확장시켜 나갈 것입니다. 또한 그곳의 청소년들이 확실한 비전을 갖도록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각자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이끌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중심 사역지와 각 지성전 그리고 떠꺼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역지마다 순복음의 영성이 충만하도록 젊은 봉사자나 일꾼들을 훈련하고 세우는 사역에 중점을 둘 것입니다. 캄퐁츠낭 순복음교회의 사역을 위해 성도님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합니다. 첫째, 캄퐁츠낭 센터의 등기와 명의 변경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해 주세요. 둘째, 각 사역지를 담당하는 현지 사역자들이 성령 충만하고 건강하도록 기도해 주세요. 셋째, 새롭게 동역하게 된 떠꺼 교회와의 사역이 더욱 다양하고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기도해 주세요. 넷째, 한국에서 사역을 준비하고 있는 청년 사역자 가정이 선교지에 나와서 같이 동역할 수 있도록 모든 제반 문제가 해결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다섯째, 함께 재능기부하고 동역할 청년 장단기 사역자가 세워져 같이 사역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여섯째, 예배를 인도할 예배자를 세워주시고 더불어 교사가 세워지도록 기도해주세요. 일곱째, 어려운 아이들을 도와 학사를 해야 되는데 필요한 재정과 환경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저희 가족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 2023.09.01 / 오정선 기자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
    김보혜 선교사(르완다)
  • - 특수교실 아이들의 장애 개선, 보호자 없이도 생활이 가능해 질수 있도록 - 마사카교회 건축 계획이 교단과 조율되도록 - 무부가교회 건축이 순조롭도록 - 냐비타레교회 산하 유치원 건축 허가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 협력하는 PEFA 교단 산하 26개 교회 목회자 및 성도들의 성령 충만과 재정 자립을 위해
  • 2023.11.17 / 오정선 기자

    김열매 선교사 (V국)
  • - V 교회 청소년들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 J 훈련생들이 말씀 따라 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 사역자들의 성령 충만을 위해 - 새종교법으로 인해 침체된 V 교회 부흥을 위해
  • 2023.11.10 / 오정선 기자

    홍정연 선교사(대만)
  • - 단수이순복음교회 부흥과 재정을 위해 - 실버 사역과 어린이 사역을 위해 - 성도들이 1년 1독 성경 읽기를 통해 영적 성장이 있도록 - 교회 차량 구입을 위해
  • 2023.11.03 / 오정선 기자

    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시보는 영산 신학과 목회
    영산의 세계선교
  •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꿈과 비전으로 충만하게 된다(행 1:8). 성령님은 영산에게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세계선교의 꿈을 부어주셨다. 그때부터 영산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은빛 날개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꿈’을 품었다. 그 꿈처럼 영산은 당시 해외 여권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때 이미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전 세계는 주님의 교구입니다.” 웨슬리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영산의 고백은 절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머물렀던 수많은 선교 현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기적의 장소였다. 영산이 세계선교를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된 배경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5월 세계오순절총회를 마친 영산은 100일 동안 18개국, 39개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던 그는 결국 스위스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밑에 놓인 엽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으니 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종이 되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적고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쇠약해졌던 영산의 몸은 이튿날이 되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그때의 체험은 영산의 사역 가운데 세계선교를 항상 강조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영산은 유럽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계 교회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국제기관을 조직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6년 11월 4일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이하 CGI: 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영산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성장에 관한 노하우를 전 세계 교회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부흥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CGI는 설립 이래 2022년 현재까지 한국을 비롯한 100여 개국 이상에서 총 600회 이상 CGI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여기에 전 세계에서 연인원 120만명이 참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계선교와 교회 성장에 이바지한 CGI는 2022년 10월 이영훈 목사를 제2대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하면서 ‘다음 세대의 부흥’을 외치며 제2기 사역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산은 세계선교의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000년 3월 28일 DCEM(David Cho Evangelistic Mission)을 설립했다. 이 기구를 통해 전 세계 선교지와 선교단체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선교 자원의 교류에 힘썼다. DCEM은 교파를 초월해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심어주는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영산은 그 목회 사역 동안에 약 600회 이상의 해외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런 왕성한 사역은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과 열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영산의 선교 사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서구권의 기독교 인구가 서구권의 기독교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기독교 신학이나 선교가 서구권 교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서구권 교회는 갈수록 쇠퇴를 거듭했고, 반대로 비서구권의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영산의 세계선교 사역은 기독교 선교의 주체를 서구권 교회에서 비서구권 교회로 전환하는 데 아주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산은 선교가 ‘순복음’의 최우선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진정한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이고 선교하는 성도가 진짜 ‘순복음성도’(Full Gospel Christian)이다. 교회가 선교를 멈추는 순간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영산 안에 넘쳤던 복음의 확신과 순복음의 영성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하나님 사명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David Yonggi Cho’라는 이름은 안다”라는 말이 수많은 증인에 의해 회자된 것만 보아도 그가 가진 세계선교의 열정과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순복음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나아가 선교하는 삶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선교에 평생을 바친 영산의 삶이었고, 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은 모든 순복음 성도들의 꿈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의 본을 따라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히 12:1). 오늘날 교회가 영산으로부터 반드시 전해 받아야 하는 믿음의 영적 바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교의 바통’이다. 이제 영산의 뒤를 이어 우리도 성령 충만함 가운데 ‘선교 바통’을 이어받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계선교의 꿈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산의 신유 사역 
  •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그의 핵심적인 목회 철학 중 하나였다. 영산은 신유의 기적이 과거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역임을 확고히 믿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으로 값없이 병 고침 받는 것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산이 믿었던 신유의 은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자 ‘아직’, 그러나 반드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영산은 치유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믿는 자의 부활을 보았다. 그래서 영산은 목회 현장이나 부흥회 사역에서도 병 고침을 강조했는데,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질병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거리는 수없이 많다. 영산이 이같이 신유를 강조하게 된 것은 어떤 특정한 치유 신학을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를 ‘신유의 종’으로 만든 것은 그가 처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 경험했던 치유의 하나님 때문이었다.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주님을 만나서 완치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또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 중풍에 걸린 여인이 낫고 걷지 못했던 소년이 일어나 뛰며 듣지 못했던 사람이 듣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영산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과 목회 현실에서 신유의 역사를 분명하게 체험했기에 영산은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의 신유 사역은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영산의 개척교회가 빈민촌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영산은 신유를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적으로 보고 목회 사역에 열심히 적용하고 실행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 신유 사역”(막 16:18)이 복음 전파에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회고할 때도 신유 사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복음에 저항적이던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을 치료받고 은혜를 받아 복음의 말씀을 세상에 나아가 강력하게 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신유 공동체로 보았다. 영산의 신유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믿음이다. 영산은 그 어느 목회자보다도 병 고침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선포했고 신유의 기적도 많이 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성령이 필요에 따라 자신을 통해 은사를 나타내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산 자신이 분명히 받았다고 주장하는 은사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은사’였다. “내가 받은 은사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습니다.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 뒤에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천막교회 시절에 나타났다. 걷지 못하던 소년이 영산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그가 낫는다는 것을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영산이 한 시간이 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자 뭉게구름 같은 믿음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산은 그때의 기분이 마치 지구를 자기 손으로 밀면 지구가 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간증한 바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할 때 영산은 그 소년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영산은 오늘날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영산에 따르면 신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셔서 은사를 베푸시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산은 신유가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분명히 믿었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신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에 자신의 아픈 부분에 손을 얹고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을 통한 성령의 신유 사역은 여의도순복음교회뿐 아니라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신유의 복음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순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유익을 주었다. 앞으로도 영산의 신유 사역의 원리를 계속 연구하고 실행함으로 새로운 신유행전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길 희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문서·방송 선교의 선구자…1988년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창간
  • 영산은 미디어의 활용이 미미하던 시절, 문서 선교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사역에 적용한 선구자였다. 영산은 자신이 가진 뜨거운 선교적 영성을 담아내어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순복음의 신앙이 한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떤 교회보다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서 전도』의 저자 조지 버워는 “기독교 문서는 인쇄된 선교사”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 선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영산은 누구보다도 문서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역에 적용하였다. 1964년 당시 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순복음지』를 발간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78년에 이르러서는 영산의 설교와 칼럼, 성도들의 신앙 간증과 구역 성경 공부 및 교회 소식을 담은 『순복음뉴우스』가 되었다. 이후 『순복음가족신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문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영산은 또한 순복음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잡지 『신앙계』를 창간함으로 문서 선교의 폭을 확장했다. 『신앙계』는 기독교의 대중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양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기독교 잡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대중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신앙계』를 능가하는 잡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앙계』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운동의 건전한 보급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신앙계』야말로 오순절 신앙을 한국교회에 널리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영산의 문서 선교의 열정은 『순복음가족신문』과 『신앙계』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한 이단 종교 단체가 일간 신문을 발간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산은 만약 그 단체에서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일간지 창간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988년 세계 최초의 기독교계 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정부와 사회에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산은 신문사를 설립하는 과정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근거 없는 비난의 목소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복음 실은 일간지 『국민일보』는 매일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땅에 전파하는 발 없는 전도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 정신으로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로서 한국 교계의 대사회적인 발언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 문화의 채널로써 한국 사회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 사명도 이뤄가고 있다. 영산의 『국민일보』 창간은 대한민국 1200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스컴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영산은 문서 선교뿐 아니라 방송 선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영산은 복음 전도의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방송 선교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던 영산은 1966년 라디오 설교와 1979년 컬러TV 방송을 송출했다. 영산의 라디오 설교 방송은 1979년, 1980년 연속, 전국 청취자 애청 프로그램 조사 결과 청취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청취자가 많았다. 이처럼 한국교회 방송 선교의 선구자는 단연 영산이었다. 당시 흑백 TV에 익숙했던 공중파 제작자들이 방송 장비와 시스템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견학을 올 정도였다. 방송 선교는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영산의 방송 선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위성과 인터넷을 활용한 예배와 설교 실황은 각 지성전 및 지교회 설립과 더불어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영산의 방송 선교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KCWC사의 특별 기획으로 주일 예배 실황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필리핀, 남아공 등 25개국에 동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산의 성령 충만의 복음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함께 전 세계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산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 설교뿐 아니라 설교를 전달하는 매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영산의 설교와 성령 충만의 영성은 멀티미디어 사역 시스템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이러한 사역이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복음의 메시지는 불변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영산의 멀티미디어 사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유훈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9.23 / 김용두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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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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