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 - 윤성호 목사(선교국장)
  • 독일 헤른후트에 모라비안 공동체가 있다. 체코의 모라비안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박해를 피해 독일 작센지방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는데, 그때 진젠도르프 백작은 이들을 자기 영지에 거주하게 했다. 모라비안은 그곳을 주님의 보호(Lord’s Watch)라는 뜻을 가진 헤른후트(Herrnhut)라고 불렀다. 1722년부터 모라비안은 매일 3차례 모임을 갖고 간절히 기도했다. 1727년 8월 13일 기도 중에 강력한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으며 8월 18일에는 어린이들까지도 성령 침례를 받았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모라비안은 복음을 들고 전 세계로 나가기 시작했다. 1732년 레온하르트 도버와 다비드 니츠만을 서인도제도에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을 필두로 그린란드, 수리남, 아프리카, 미국, 중국, 이란, 자메이카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특히 서인도제도에 사탕수수와 코코아 농장에서 일할 노예를 매년 10만명씩 데리고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일부 모라비안은 스스로 노예로 자원했다. 그들은 노예와 같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다. 모라비안 공동체는 1930년까지 3000명의 선교사를 전 세계 오지에 파송하여 근대선교에 불을 지폈다. 모라비안은 독일 작센지역에 있던 작은 공동체에 불과했지만 그 공동체가 보여준 선교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모라비안 공동체는 ‘복음을 전하다 죽으라 그리고 잊혀져라’라는 모토를 갖고 전 세계로 흩어져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철저히 잊혀졌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로 인해 수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게 되었고 근대선교를 주도했던 것이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고후 6:9). 여기서 ‘무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노우메노이’는 ‘무시당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이 땅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이 땅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천국에서는 유명한 자다. 이들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이며 영원한 상급이 예비된 유명한 자이다. 제49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가 5월 31일부터 6월 2일까지 개최된다. 전 세계 63개국에서 사역하시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600여 명의 선교사들이 참석한다. 우리는 보내는 선교사로서 타 문화권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드러내고 철저히 자신을 감추는 사역을 감당하는 선교사들을 중보하고 후원해야 할 사명이 있다. 이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무명한 자일지 모르나 천국에서는 유명한 자로 영원토록 남을 것이다.
  • 2023.05.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여의도순복음교회’라는 브랜드의 특징 -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우리 교회가 창립 65주년을 맞았다. 1958년 5월 18일 대조동 천막 교회에서 시작된 교회가 불과 15년 만에 서대문 성전을 거쳐 지금의 여의도 성전으로 옮겨, 한 때 등록 성도 80만 명에 이르는 폭발적인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라고 하면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조차 일종의 ‘브랜드’가 된지 오래이다. 또 한 번의 교회 창립일을 맞아 이 브랜드, 다시 말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특징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여의도순복음교회라고 하면 ‘대한민국 최대 교회’, 아니 ‘세계 최대 교회’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우리 교회에 초청 받은 국내외 강사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어떻게 수요 예배에, 그리고 새벽 예배에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모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일 정도로 모이는 데 있어서는 단연 으뜸을 자랑한다. 또한 강단에서 선포되는 카리스마 넘치는 메시지야말로 우리 교회를 특징짓는 주요한 요소이다. 설립자이신 영산 조용기 목사뿐만 아니라 2대 당회장 이영훈 목사의 말씀 충만, 성령 충만의 강력한 설교는 인본주의적 철학 강연이 아니라 그야말로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 다가온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사역이 오순절 성령 운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탄생한 사도행전적인 교회를 재현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 교회의 성령 사역이다. 따라서 온 성도가 성령 충만 받아 방언을 말하며 신유를 체험하고 삶의 현장에서 성령의 열매 맺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열정적으로 뜨겁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순복음 신앙의 유명한 특징이다. ‘주여’ 삼창으로 시작하는 통성 기도, 안수 기도, 방언 기도, 중보 기도는 우리 교회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국내외 선교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는 것도 여의도순복음교회 브랜드의 장점이다.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우리 사회와 세계 여러 나라에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 교회는 매년 일 년 예산의 3분의1 이상을 구제와 선교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 밖에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그 밖의 각종 헌금으로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답하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 방침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을 갖고있다. 남선교회, 여선교회 뿐만 아니라 어떤 부서 어떤 조직이든지 전 구성원이 합심해서 ‘원 팀’으로 사역하는 신앙, 지구역 식구들을 내 가족처럼 섬기고 아끼는 신앙, 교회 생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절대긍정, 절대감사’를 실천하는 신앙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자랑스런 특징을 우리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난 65년의 세월 동안 잘 가꾸어왔다. 이제 교회 창립 70주년, 더 나아가 100주년을 바라보며 이 같이 보석보다 귀한 브랜드를 더욱더 갈고 닦아 하나님께 더욱 크게 영광 돌리고, 21세기 세계 부흥을 선도하는 교회로 우뚝 서기를 기대하며 기도드린다.
  • 2023.05.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부정적인 생각, 긍정적인 생각 - 성영목 목사(개척국장)
  • 미국의 어느 철도 회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회사에서는 지정된 역에서 냉동차가 역에 들어오면 객차 내부를 청소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냉동차 문을 열어 보니 냉동이 가동되지도 않은 객차 안에서 싸늘하게 얼어 죽은 시체 한 구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냉동차는 일단 역에 들어오면 스위치를 뽑아 놓고 공기도 순환 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얼어 죽거나 질식해 죽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시신이 발견 되어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했습니다. 나중에 조사를 해본 결과 이 사람이 죽은 이유는 부정적인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열차 안에 갇히자 ‘아~ 냉동차 안에 갇혔으니 이제 얼어 죽겠구나’ 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했고, 이 생각이 그를 사로잡자 그의 몸은 점점 얼어갔고 실제로 죽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죽을만한 환경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이제 냉동차 안에서 죽는구나’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이 그의 몸과 마음과 생각을 얼어 죽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은 우리들의 삶에 엄청난 파괴력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평안한 자리를 고통의 자리로 만들기도 하고, 부요의 자리를 궁핍의 자리로 만들기도 하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자리를 나 홀로의 자리로 만들어서 절망하고 낙심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은 절망의 자리에서도 소망을 만들고, 어렵고 힘든 일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긍정의 마음으로 그 일을 이루게 되고, 질병의 고통에서도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우리의 삶이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과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자리일지라도 부정적인 마음을 물리치고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선택함으로 매일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순복음의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인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 2023.05.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79)제3차 선교여행 -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울
  •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마친 후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그를 뜨겁게 환영했다. 다음날에는 야고보와 장로들을 문안하고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일들을 자세히 보고했다. 그러자 그들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이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대부분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유대교의 율법도 중시하고 있어서 바울이 로마제국의 판도를 세 차례나 오가며 복음을 전파하면서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듣고는 바울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유대인 신자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묘안을 바울에게 알려 주었다. 그것은 “지금 네 사람이 정결 예식을 지키기로 서원했는데 그들과 함께 정결 예식을 행하고, 그들이 머리 깎을(아마도 나실인 서약) 비용을 부담하라”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들었던 바울의 이방 선교에 대한 풍문이 사실이 아니고, 바울도 율법을 존중하고 잘 지키는 사람인 줄 알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전의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론, 즉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행 21:25; 15:20, 29 참조). 바울은 사도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서원한 사람들과 함께 정결 예식을 행한 후에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정결 예식 기간이 언제 끝나는지를 신고했다. 정한 기간인 일주일이 거의 다 되었을 때 ‘아시아’(소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그를 붙잡고,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전에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시내에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줄로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만일 그들의 생각처럼 드로비모가 성전에 들어갔다면 당시 규정에 의해 바울보다 그가 처벌을 받아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성경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이들의 고발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바울을 죽이려고 그를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러자 불길한 징조처럼 예루살렘 성전 문들이 곧 닫혔다. 이렇게 닫힌 성전 문들은 다시는 바울을 위해 열리지 않았다. 이제 바울은 꼼짝없이 그들에게 죽을 위기에 처했다. 바로 그때 성전 경내가 소란스럽다는 소식이 로마 군대 천부장에게 전해졌다. 그는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과 함께 달려 내려갔다. 로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요가 발생하면 즉시 개입할 수 있도록 성전 북서쪽에 안토니아 요새를 만들어 성전 경내를 바라보면서 성전 바깥뜰과 층계로 연결해 놓았기 때문에 이처럼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었다. 군인들을 보자 유대인 무리들은 그제야 바울 치기를 멈췄다. 사도행전을 보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유대인들은 호시탐탐 바울을 죽이려고 온갖 흉계를 다 부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피할 길을 예비하셔서 바울을 보호하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건하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살후 3:3).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3.05.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8)제3차 선교여행 -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
  • 밀레도 항구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초청해서 고별 설교를 마친 바울은 배편으로 두로와 가이사랴를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바울 일행은 먼저 밀레도에서 고스, 로도, 바다라로 가서 베니게로 가는 배로 갈아타고 두로에 상륙했다. 여기서부터 다시 ‘우리’라는 1인칭 복수형 관점에서 사건이 서술된다.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행 21:1). 바울은 두로에 일주일을 머물렀는데 제자들(믿는 자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한 목소리로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만류했다. 하지만 그는 초지일관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고자 했다(행 20:24 참조). 두로의 제자들은 하는 수 없이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나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바울을 전송했다.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는 서서 하는 것이 보통인데(눅 18:11 참조), 바울과 제자들은 밀레도에서와 마찬가지로(행 20:36)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이는 그들이 바울의 생사 문제를 놓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가를 보여 준다. 바울은 두로에서 배를 타고 돌레마이에 도착해서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이튿날 그곳을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헬라파 일곱 지도자 중 하나인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큰 부흥을 일으킨 이래로 살고 있어서(행 6:5, 8:40 참조) 그 집에 들어가서 머물렀다. 여기에서 빌립은 ‘전도자’라고 불리는데(행 21:8) 이것은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도 ‘사도, 선지자, 목사와 교사’와 함께 언급되는 초대교회 내의 직분(복음 전하는 자) 중 하나로 생각된다. 그에게 딸 넷이 있었는데 모두 미혼으로서 ‘예언하는 자’(또는 선지자)였다고 기록되어 있다(행 21:9). 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며칠 후 전에 안디옥에서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라고 예언했던(행 11:28) 선지자 아가보가 가이사랴에 와서 이사야를 방불하게 하는 행동 예언을 했다. 그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서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말했다(행 21:11).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바울을 권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1:13)고 말하면서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무리들은 어쩔 수 없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면서 그만두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세 번째 기록된 바울의 ‘고난 예고’이다. 처음 것은 성령께서 바울에게 직접 하신 말씀(행 20:23)이고, 두 번째 것은 두로의 형제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을 말리면서 한 말(행 21:4)이다. 세 번의 고난 예고 모두 성령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특히 셋째 예언 중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고난 예고(눅 18:32~33)에도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장소인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던 것처럼 바울도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 길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한참 후 바울 일행은 가이사랴의 몇 제자들과 구브로 출신의 오랜 제자인 나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반갑게 영접했다. 다음날 바울 일행은 주의 형제 야고보와 장로들과 만났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하신 일을 자세히 설명하자 온 무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렇게 해서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은 막을 내리게 된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3.04.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7)제3차 선교여행 - 바울의 밀레도 고별설교(하)
  • 제3차 선교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밀레도 항구로 초청해서 마지막 설교를 한다. 그의 설교의 요지는 양떼들을 그들에게 맡기니 자신이 소아시아에 들어온 첫 날부터 나갈 때까지 행한 바를 잘 기억해서 그대로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가 믿는 자들을 위해 사랑과 헌신, 희생과 수고를 아끼지 않은 그의 언행 하나하나가 교회 지도자들의 교과서가 된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것을 곳곳의 성령 충만한 형제들이 만류하면서 거기에 가면 결박과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에 매여” 그곳으로 간다고 하면서 무슨 일이 있다 해도 복음 전파 사명 완수를 위해서라면 목숨조차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바울은 그들에게 앞으로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제2차 선교여행 때부터 자신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러 지역을 오가며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증언했다. 이 말은 자신이 복음 전파 사역을 할 만큼 다 했으니 말씀을 듣고도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본격적으로 에베소 장로들에게 영적 지도자로서의 품격을 두려운 마음으로 갖출 것을 당부한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여기에서의 “감독자”는 초대 교회에서 “감독”의 직분(빌 1:1)을 말할 때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들은 장로들로서 감독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맡은 양 떼들을 잘 살펴야할 책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들에게 친히 주신 직무였다. 양 떼의 감독자로서 그들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영적으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나운 이리”(요 10:10)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고 지키는 일이었다. 이단과 사설, 거짓 교사와 거짓 선지자들을 옳게 분별해서 양 떼들로부터 철저하게 차단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후에 에베소 교회를 맡게 된 바울의 제자 디모데는 이들과 맞서서 싸워야 했다(딤전 1:19~20, 4:1~3, 딤후 2:17~18, 3:1~9 참조). 또한 요한계시록에도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에베소 교회가 미워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계 2:6). 바울은 그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에베소 장로들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며 그들을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하실 것을 간구했다(행 20:32). 끝으로 그는 남의 물질을 탐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일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동행들의 쓸 것을 충당하며 보여준 모본을 따라 그들도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할 것을 장로들에게 당부했다. 고별 설교를 마치고 바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했다. 그들은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로 인해 근심하며 크게 울며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배 타는 곳까지 그를 전송했다. 그리하여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갔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3.03.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54) 중세후기④
  • "동프랑크 왕국"
    칼 대제의 후계자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프랑크왕국은 베르뎅조약(843년-21년 6월 27일자 기사 참조)을 통해 중프랑크 왕국(이탈리아), 서프랑크 왕국(프랑스), 동프랑크 왕국(독일)으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칼 대제의 손자이자 루드비히 1세의 셋째 아들)는 중프랑크 왕국의 로타르 1세가 아들 루드비히 2세(=이탈리아의 루드비히 2세)에게 물려준 영토와 황제의 지위를 탐내고 있었다. 때마침 이탈리아의 루드비히 2세가 적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875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의 아들 중에 카를로만이 후계자로 지목됐다. 아마도 남부 해안에서 이슬람 세력에게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던 교황청과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의 소원이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칼 2세(대머리 칼)가 먼저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점령하고 황제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루드비히 2세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그는 이미 피핀 2세(피핀 1세의 아들)가 차지하고 있던 아키텐과 로타르 2세(로타르 1세의 아들)가 다스리던 로타링기아의 서쪽 지역을 점령하면서(870년 메르센 조약-21년 7월 25일자 기사 참조) 서프랑크 왕국을 확장하고 있었다.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칼 2세와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876년). 그가 죽은 뒤 동프랑크 왕국은 세 부분(바이에른, 작센, 슈바벤)으로 나뉘었고, 이후 서프랑크 왕국의 칼 2세가 사망하면서 황제의 지위는 동프랑크 왕국을 통일한 슈바벤의 칼 3세에게 돌아갔다. 당시 서프랑크 왕국은 칼 2세(877년 사망)의 뒤를 이어 즉위한 루이 2세가 죽고(879년) 그의 세 아들 중 두 아들(루이 3세와 샤를로망)에게 분할되어 상속되었으나 이들마저 사망하면서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동프랑크 왕국의 칼 3세를 황제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당시 막내 샤를은 너무 어렸다). 루드비히 1세의 죽음 이후 분열되었던 프랑크 왕국이 다시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됐다. 칼 3세는 지나친 비만으로 각종 병환에 시달리는 한편 통치자로서도 무능력했다. 로마교황청의 보호자 역할을 하지 못했고, 바이킹족, 슬라브족, 마자르족과 같은 외적의 침입에도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제후들의 반란을 통해 아르눌프가 칼 3세를 폐위시키고 동프랑크 왕으로 즉위했다(887년). 한편, 서프랑크 왕국은 루드비히 1세의 외손자이자 파리 백작인 외드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칼 3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던 루이 2세의 아들 샤를이 왕위계승권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발생했고, 교황청의 지지를 얻어 샤를 3세로 즉위할 수 있었다. 동프랑크 왕국의 아르눌프는 샤를 3세의 즉위에 반대하면서 다시 한번 외드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결국 외드 측과 샤를 3세 측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샤를 3세가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차지하게 됐다. 이렇게 하여 서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게 됐다. 아르눌프가 죽은 후(899년) 루드비히 4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때 동프랑크 왕국은 마자르족이 지속적으로 국경을 넘어와 곳곳을 약탈하는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부 바이킹족과 함께 동프랑크 왕국의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했다. 마자르족의 침략이 극심해지고 루드비히 4세가 이를 막아내지 못하자 귀족들은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루드비히 4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911년)하면서 각 지방의 제후들은 차기 국왕 선출을 결정해야만 했다. 결국 프랑켄의 공작 콘라트가 새로운 왕이 됐다. 이렇게 하여 동프랑크 왕국은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고 이후 마인츠 대주교 및 쾰른 대주교와 프랑켄 지역의 공작, 작센 주의 공작, 슈바벤 주의 공장 그리고 바이에른 주의 공작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자신들의 국왕을 직접 선출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5.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53) 중세후기③
  • “서프랑크 왕국”
    ‘중세후기’(Late Middle Ages)에 들어서 교황권의 권위는 추락했지만 세속 군주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그러나 칼 대제의 죽음 이후 후계자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거세지면서 절대 권위였던 세속 군주의 지위는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칼 대제의 후계자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프랑크 왕국은 베르뎅조약(843년, 2021년 6월 27일자 기사 참조)을 통해 중프랑크 왕국(이탈리아), 서프랑크 왕국(프랑스), 동프랑크 왕국(독일)으로 나뉘었으며, 결국 메르센조약(870년, 2021년 7월 25일자 기사 참조)을 통해 동프랑크 왕국과 서프랑크 왕국으로 재편되었다. 이 가운데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 왕조는 루이 5세(987년 사망)에 이르러 끝나고 파리의 백작이자 대장군이었던 위그 카페가 왕에 선출(987년)되면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참고로 역사가들은 바로 이 카페 왕조로부터 본격적인 프랑스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이 당시 서프랑크 왕국은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제후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노르망디 공국이나 가스코뉴 공국과 같이 공작들이 다스리는 공작령이 있었고, 플랑드르 백국, 툴루즈 백국과 같이 백작들이 다스리는 백작령이 있었다. 왕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령은 파리와 오를레앙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러한 체제 아래에서 노르망디 공국의 기욤 2세는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침공했다(1066년).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윌리엄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이후부터 노르망디 공국의 제후는 잉글랜드의 왕이었지만 프랑스의 봉신이기도 한 어정쩡한 상황이 되었다. 서프랑크 제국 내 수많은 제후령은 서로 병합되거나 나눠지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던 중 12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앙주 백국의 헨리 2세는 노르망디 공국을 복속(1144년)하고 잉글랜드의 왕위까지 차지(1154년)했으며, 정략결혼을 통해 아키텐 공국(1152년)과 브르타뉴 공국(1166년)까지 획득하여 거의 프랑스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 역할을 거부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이러한 서프랑크 왕국 내 왕과 봉건 제후들 사이의 권력 구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십자군 전쟁 때문이었다. 당시 왕이나 제후들은 십자군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돌아오지 못하거나 귀환이 지연되는 상황이 생기면서 다른 제후의 영토를 빼앗아 권력을 확장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잉글랜드의 왕 헨리가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리처드(훗날 사자왕으로 불리움)는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제후로서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필리프 2세 역시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지만 서둘러 다시 프랑스로 귀환했다. 필리프 2세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 출정한 리처드의 귀환이 늦어지자 그가 다스리고 있던 제국령을 공격하여 흡수해버렸다. 뒤늦게 귀환한 리처드는 빼앗긴 프랑스 내 영토를 되찾기 위해 필리프 2세를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지만 전사하고 말았다(1199년). 이후 리처드의 동생 존은 형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플랑드르, 불로뉴와 함께 연합군을 조직했으나, 부빈 전투에서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에게 패하면서 결국 잉글랜드와 아키텐, 그리고 노르망디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리처드의 영토가 필리프 2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지금의 프랑스와 영국이 포함된 서프랑크 왕국 내 이러한 정치 상황은 훗날 왕위계승 문제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100년 이상 지속된 백년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4.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52)중세후기②
  • 피렌체, 르네상스의 중심지
    ‘르네상스’라는 말의 뜻은 ‘다시 태어남(재생)’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서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난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시기에는 문학, 예술, 철학, 정치, 과학, 신학, 법률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그리스 고대 문화에 대한 재해석과 적용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한두 가지의 원인 때문에 촉발된 것은 아니었다. 먼저 교황권의 부패와 타락은 로마 가톨릭 중심의 교회 권위를 약화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십자군 전쟁의 연이은 실패와 흑사병의 창궐을 통해 중세의 경제, 사회 및 정치 구조를 지탱해 오던 봉건제까지 무너져 내렸다. 교황권의 약화로 인해 대립 관계에 있던 왕권이 강화되면서 200여 개가 넘는 도시국가들이 난립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지중해와 인접한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에 상인들이 몰려들면서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경제적인 호황으로 엄청난 인구가 도시로 모여들었다. 막대한 부를 쌓은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길드’라는 조합을 만들어 경제 권력을 형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교육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다. 수많은 수도원과 학교들이 설립되었고 더 나아가 대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을 등장시키면서 학문과 문학 및 예술 등에 대한 대중들의 의식과 소비가 발달했다. 이탈리아 내에서도 피렌체공화국은 상공업이 매우 발달한 곳이었다. 도시 중앙을 흐르는 아르노 강을 중심으로 상거래가 활발했는데, 고대 로마시대에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길은 피렌체로 통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특별히 피렌체는 황금 거래의 중심지였으며, 양모 무역과 고리대금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피렌체에서 태어난 단테는 르네상스의 신호탄이라고 일컬어지는 『신곡』을 출판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단테 자신이었는데, 그가 연모했던 베아트리체를 찾아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이루어진 지하세계를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서 ‘연옥’이라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단계가 등장하는데, 중세 사람들은 비록 죽은 자일지라도 여기에서 머무는 동안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제의 호황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은 이 ‘연옥’이란 개념에 열광했다. 기독교 세계관이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돈에 대한 인식은 아주 부정적이었다. 성경에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라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돈 많은 상인들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으며, 중세 상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매우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이러한 까닭에 당시 부자 상인들은 죽을 때 수도원 지하에 묻혀있는 수호성인들의 유골과 가장 가까운 곳에 묻히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 성인들이 최후의 심판장에서 자신들을 변호해주리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재정적인 문제로 수도원이나 성당에서도 당시 성직자에게만 허용했던 묘지를 부자 상인에게 팔기 시작하면서 상인들에게 예배당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하도록 했다. 당시 가장 유력했던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피렌체의 많은 부자 상인들은 저마다 최고의 예배당을 만들기 위해 앞다투어 당시 제일 유명한 화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무역과 상업활동을 통해 쌓은 부로 특권층에 편입된 상인들의 구원에 대한 열망이, 마침내 르네상스를 촉발한 예술작품의 생산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 원인이 된 것이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3.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뿌리깊은 순복음
    (136)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9>
  • 다른 사람의 평가 따라 행복과 불행 결정되는 삶은 참 평안 없어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자랑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과 입을 통해 자신을 분명히 나타내려는 노력’이다. 사실 이것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공들이는 허망한 노력이다. 세상에는 뛰어난 사람도 많으며 또한 사람들은 누군가를 칭찬하는 것에 매우 인색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자랑거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누구든 불만이 생기거나 열등감에 빠진다. 우리 한국은 외모와 명품에 대한 자랑이 심한 편이다. 여성들 중에는 외모를 위해 성형 수술이나 미용시술을 받은 사람도 많고 최근에는 남성들까지 좀 더 나은 외모를 위해 성형을 하는 실정이다. 청소년들의 최대 관심사도 외모이다. 명품이나 값비싼 것을 과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각종 명품의 천국이고 형편상 명품 구매가 어려운 사람들은 짝퉁으로 명품 흉내라도 내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자기 신체를 아름답게 하거나 좋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지나치게 민감한 것이다. 누군가 다른 이들의 이목과 평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삶은 진정한 평안이 없는 불행한 삶이다. 유난히 힘이 장사인 개미가 있었다. 다른 개미들은 쌀 한 톨을 겨우 드는데 이 개미는 두 톨씩도 거뜬히 들어 올렸다. 많은 개미들이 이 괴력을 지닌 개미를 우러러보고 부러워했다. 기고만장해진 그 개미는 보다 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싶어져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시장으로 찾아가서 자신의 힘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쌀 두 톨을 들어 올려 집어던지기도 하며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며 자랑했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누구 하나 개미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누군가의 커다란 신발에 밟혀 죽고 말았다. 다른 개미들의 선망하는 눈빛과 평판이 그 개미를 스스로 우쭐하게 만들어 허무한 죽음으로 이끈 것이다. 이처럼 힘이 세든 외모가 아름답든 돈이 많아 명품으로 온몸을 치장하든 그것이 왜 문제가 될까?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통해 스스로 못할 것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한낱 개미에 불과하다. 인간이 가진 힘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겨우 쌀 두 톨 드는 개미의 힘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다. 세상의 것, 사람의 소유한 것 중에 진정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야훼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5.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35)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8>
  • 자신을 낮추고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복된 삶의 지름길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자랑은 일반적으로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높여 우쭐대고 뽐내는 것이다. 은근히 자기를 높여 자랑하며 남들 앞에 스스로 과시하고 남을 낮추려는 마음.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성령 충만한 신앙으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나보다 더 높게 여겨야 한다. 한 아이가 가을 운동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마을 친구들과 어른들을 보며 말했다. “야! 걔 참 빠르더라. 제비같이 빠르더라. 정말 잘 달리더라.” 그러자 친구들이 물었다. “누구 말이야?” 그러자 그 아이는 태연하게 “못 봤어요? 바로 내 뒤에 바짝 따라오던 그 아이 말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자기 뒤에 따라오던 아이가 빠르다면 자기는 얼마나 더 빠르다는 말인가? 이 아이는 이렇게 은근히 자기를 내세우며 스스로 자랑한 것이다. 오래전에 피아노가 아주 귀했던 시절 우리 동네 천여 가구 중 피아노가 서너 집 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동네 친구의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하는 3남매의 맏이였던 큰딸에게 피아노를 사 주었다. 그런데 그 큰 언니가 학교에 가고 나면, 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아 피아노를 칠 줄도 모르는 막내딸이 집에 손님만 오면 그 피아노 앞에 앉아서 피아노를 치는 흉내를 내곤 했다. 그러다 손님이 가면 금방 피아노 두드리는 일을 멈추고 내려왔다. 내가 친구인 그 아이의 오빠를 만나러 갈 때마다 그랬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집에 피아노 있다’라고 자랑이 하고 싶던 것이다. 그 어린아이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나 그것은 별로 좋은 마음이 아니다. 신약성경 로마서 12장 10절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권면한다. 이는 ‘상대방이 먼저 나를 존경하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상대방을 존경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빌립보서 2장 3절도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씀한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것이 어쩌면 진정한 사랑의 참모습이다. 우리가 남을 업신여겨 낮게 여기고 스스로 으스대면 우리도 상대방도 불행하게 되고 하나님께서도 영광 받으실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낮추고 남을 낫게 여기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상대방에게도 복이 되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5~6).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4.1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34)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7>
  • 육체적이고 허탄한 자랑 던져 버리고 오직 십자가만 자랑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4절). 성경에서 ‘자랑’은 영적으로 가치 있는 일로 지칭되는 예가 드물다. 시편 10편 3절은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야훼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라고 기록하며, 고린도후서 11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라고 말했다. ‘자랑’은 이처럼 현저히 육체적이고 허탄한 행위로 이해된다. 자랑의 대상들은 대부분 가치 없는 것이거나 그 가치가 한시적인 것들이다. 비록 지금 자랑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잠시 잠깐 후에는 쓸모없는 것이 돼 버리거나 창피스럽고 민망한 일이 돼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 평등 시리즈라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우선 사람의 나이 40대가 되면 지식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한다. 공부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은 어릴 때 학창 시절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40이 넘어가면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똑같다. 또한 50대가 되면 외모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한다. 예쁜 사람 못생긴 사람의 차이는 어리고 젊은 시절 이야기이다. 50이 넘어가면 똑같이 배도 나오고 엉덩이도 쳐져 외모도 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진다는 것이다. 이어서 60대가 되면 성의 평등이 찾아와 남자나 여자나 평준화가 된다. 남자는 순해지고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비슷하게 된다는 것이다. 70대가 되면 건강의 평등이 찾아온다. 건강한 사람이나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나 고만고만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같이 늙어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80대가 되면 재물의 평등이 찾아온다고 한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돈이 많으면 무엇하겠는가? 즉 가진 사람이나 못 가진 사람이나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90대가 되면 생사의 평등이 찾아온다. 다시 말해 이 나이쯤 되면 삶과 죽음이 별 차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살고 내일 죽으나 내일 살고 모레 죽으나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은 서글픈 이야기지만 그만큼 우리네 인생에는 자랑할 것이 별로 없다는 의미를 이해하는 예로는 적절한 이야기로 보인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5절을 통해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고백하듯 말하였다. 이처럼 성령 충만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성도들에게는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3.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독교 설교자 열전
    설교자 바울(Ⅱ)
  • 설교 대상에 깊은 관심과 이해 가져 각 사람에 맞게 친숙한 내용으로 전달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그의 설교가 가지는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모두 24개의 연설이 담겨있는데 이는 사도행전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중 바울의 연설은 9개이며 6개가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이 설교들은 비시디아 안디옥(13:16~41, 46~47), 루스드라(14:15~17), 아덴(17:22~31), 밀레도(20:17~38), 예루살렘(22:1~21, 23:1~11), 가이사랴(26:1~32) 등에서 행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설교를 행했을 것이다(9:20, 22, 28~29). 사도행전에서 발견되는 바울의 설교의 첫 번째 특징은 목양 설교(pastoral preaching)와 전도 설교(evangelistic preaching)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C. H. 다드와 A. M. 헌터는 자신들의 책 『설교의 원형과 그 발전: 케리그마』에서 초대교회의 설교를 디다케(didache) 설교와 케리그마(kerigma) 설교로 나누고 있다. 디다케 설교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즉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성숙되도록 양육하고 가르치기 위한 설교이다. 이를 목양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행한 목양 설교의 전형은 사도행전 20장 18~35절에 기록된 것이다. 제3차 선교여행을 마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 여정 속에서 밀레도에 도착한 그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행한다. 그의 설교의 요지는 앞으로 있을 환난의 때를 대비해 자신이 교훈한 것들을 기억하며 자신의 사역을 이어서 잘 감당해달라는 것이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바울은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목양의 관점에서 설교했던 것이다. 한편 케리그마 설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설교, 즉 전도설교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고 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한 것이다. 바울이 선교여행 가운데 가장 많이 했던 설교가 이것이었다.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 헬라인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했던 이방인들이었다(13:16). 중요한 사실은 바울은 그 대상에 따라 설교의 강조점을 조금씩 달리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을 향한 설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행했다. 사도행전 13장 16~41절에 기록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는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언급한 뒤에 그 역사의 종결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로 결론을 맺고 있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행 13:32~33). 바울은 유대인들이 친숙한 구약성경의 내용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했고 이를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했다. 반면 이방인을 향한 바울 설교의 강조점은 하나님이었다. 에덴에서 행한 설교(17:22~31)를 보면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시며(24절),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며(25절), 인간의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분이며(26절), 인간과 관계하시는 분(27절)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렇듯 바울은 목양설교와 전도설교를 행했고 각각의 설교를 행하면서 대상에 따라 설교의 강조점을 달리했다. 바울이 행한 목양설교와 전도설교를 통해 발견하는 그의 설교가 가지는 두 번째 특징은 그가 설교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향한 설교를 그들이 친숙한 내용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대상에 따라 설교의 강조점을 달리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에게 친숙한 구약성경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게로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를 다루었던 반면 이방인들에게는 그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면에서 이방신들과 다른지를 다루고 있다. 바울이 설교 대상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했다는 것은 그만큼 설교 대상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 관심사를 어떻게 복음에 접목시킬 것인지, 어떻게 설교를 시작해야 그들이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등 설교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가 바울에게 있었던 것이다.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5.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설교자 바울(Ⅰ)
  • 바울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교회공동체에 13개의 편지 보내며 권면 신약성경은 27권으로 되어있다. 이중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가 4권이고 역사서(사도행전)가 1권이며 예언서(요한계시록)가 1권이다. 이상의 6권을 제외한 21권이 편지이다. 그런데 21개의 편지 중에서 바울이 쓴 것이 무려 13개나 된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바울이 쓴 것이다. 바울 서신은 크게 교회공동체를 위한 것이 9개(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이고, 개인에게 보낸 것이 4개(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이다. 초대교회 당시 편지는 단순히 편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편지는 그것을 보낸 사람을 대신했고 보낸 사람이 가진 권위를 그대로 가지는 것이었다. 즉, 편지는 송신자와 동일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편지는 단순히 글로 여겨지지 않았다.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 퍼져있던 교회에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바울의 편지들은 대독자(代讀者)에 의해 큰 소리로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특히 데살로니가전서가 대표적인 예이다.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살전 5:27). 또한 바울의 편지는 한 지역 또는 한 교회에서만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 4:16). 바울의 편지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유대적인 배경과 헬라적인 배경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헬라 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유대 가정에서 유대적인 관습에 따라 성장했다(빌 3:5). 그는 유대적인 유산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고(롬 9:3, 11:1), 늘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빌 3:6). 그는 유대 전통을 수호하는데 있어서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이 있던 사람이었다(갈 1:14). 다소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과 유대적인 전통 속에서 교육받고 성장했다는 것은 바울이 헬라문화와 유대문화에 모두 잘 적응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헬라 도시에 잘 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방문하는 어떤 도시가 되었던 가장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았던 이유 역시 그의 출신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가장 적절했던 바울을 준비시키셨고 가장 적절한 때에 그를 부르셔서 사용하셨던 것이다. 바울의 이름으로 보내진 신약성경의 13개의 편지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설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다(행 9장). 회심을 경험한 것이다. 바울이 경험한 회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회심과는 조금은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미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바울은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죄에서 의(義)로 회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의 회심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의 변화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바울에게 있어 구원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롬 9:30).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바울은 당시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했던 내용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됐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바울은 더 이상 다른 메시야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야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야로 깨닫게 되는 순간 바울은 구약성경을 비롯해 모든 것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예수님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바울이 이와 같이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 9:18).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면서 바울은 구약성경의 사건 역시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구약 출애굽기에 기록된 홍해 사건과 광야 사건을 그리스도를 통해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해석해낸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성령을 따라 난 자와 육체를 따라 난 자를 대표한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갈 4:22~31).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울에게 이 세상과 성경을 새롭게 읽어내는 새로운 렌즈가 되어주신 것이다.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4.07 / 이미나 기자

    설교자 베드로(Ⅱ)
  •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희망, 새로운 시작 뜻하는 종말론적 설교 전해 성경 뜻 풀고 적용시켜 크리스천의 삶 가르쳐 베드로의 설교가 갖는 세 번째 특징은 종말론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종말’을 강조하고 왜곡하는 많은 이단으로 인해 한국교회에서 ‘종말’ 또는 ‘종말론’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될 때가 많다. 종말은 단순하게 역사의 끝이나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서 구원을 이루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며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종말은 하나님의 뜻이 세상 가운데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사 22:2; 미 4:1; 렘 3:17). 하나님의 평화와 공의가 세상에 있을 것이며(사 2:4) 자연에는 평화가 깃들 것이다(사 11:6, 65:25).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될 것이다(렘 31:31~34). 베드로는 구약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종말의 시간, 곧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완성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선포했다. 또한 성령 강림 사건이야말로 종말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증거라고 강변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 2:16~18). 예수님의 부활은 베드로를 비롯해 오순절 날 성령 침례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이전의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예수의 부활로 인해 종말은 이미 시작됐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되는 종말의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행 2:20~21). 예수님의 재림은 그와 같은 종말의 시간의 완성을 의미한다. 넷째로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제시한다. 설교는 크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의미를 풀어주고 그 의미를 삶 속에서 적용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벧전 1:1)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베드로전서는 전반부에 신학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이후에 실천적인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다룬 뒤에 곧이어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자신의 설교를 통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베드로에게 그의 청중들은 ‘거듭난’ 사람들이고(벧전 1:3), “산 소망”(벧전 1:3)이 있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유업을 얻고(벧전 1:4),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크신 능력으로 보호해주시는 사람들(벧전 1:5)이다. 이제 그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며(벧전 2:9),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사람들이다(벧전 2:10).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답게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①먼저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영원히 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벧전 2:11). 이 땅에 잠시 머물고 떠나는 방문객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본향은 천국이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때를 기다리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 ②베드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상태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까지 그들은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죄와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금할 수 있다. 그들 안에 있는 욕심과 욕망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어하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계속해서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사는 동안 계속해서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권면한다(벧전 2:12). 육체를 제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노력이라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외적으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그들을 향해 악행한다고 비방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함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자인 동시에 종이다(벧전 2:16). 결론적으로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고 설교하고 있다.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3.09 / 이미나 기자

    순복음영성스케치
    성경 인물의 기도
  •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할 수 있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성경 인물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듯이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1. 구약의 기도 구약 인물의 기도는 지도자들의 기도였다. 그들은 족장, 선지자, 왕이었다. 그들의 기도는 한 민족의 생사를 좌우할 정도로 위대한 기도였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니엘, 다윗의 기도가 그와 같은 기도였다. (1) 아브라함의 기도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기도는 대표적인 중보 기도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거주하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계획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땅이 심판받아 멸망하지 않도록 중보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응답하셔서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곳을 심판하지 않기로 하셨다(창 18:32).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중보 기도를 드린 아브라함의 간구를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들어주셨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기도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드리는 간절한 기도이다. (2) 모세의 기도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한 민족을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건져낸 위대한 기도의 모범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 내려올 때 이스라엘 민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다.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백성을 멸하려 하셨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셔서 민족을 구원해주시기를 간구했고,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셨다. 결국 모세의 구원 기도로 수많은 백성이 목숨을 건지게 됐다(출 32:12). 모세는 자기 민족과 각자의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크고 작은 지도자들을 위한 좋은 기도의 모범을 보여준다. (3) 사무엘의 기도 사무엘상 7장에 나오는 사무엘의 기도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구국 기도의 모범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미스바에 백성을 모아 금식 기도를 했다. 미스바의 금식 기도는 우상숭배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나약해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한 능력의 기도였다(삼상 7:5~6). 미스바에 모인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위협에서 건져내셨다. 미스바 가운데 모인 회중과 사무엘의 금식 기도는 이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구국 기도’이다. (4) 다윗의 기도 시편 25편에서 다윗이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찬양과 감사 기도의 모범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지만 일평생 많은 고난을 겪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녔고, 왕이 된 후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생명까지 위태로웠다. 그러나 그는 환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기도했다(시 25:15~17). 시편에는 야훼, 주,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1200회 이상 나타난다. 이는 다윗이 크고 작은 환난 가운데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시선이 흐려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다윗의 기도에서 우리는 어떠한 고난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잊지 않는 믿음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5) 다니엘의 기도 다니엘 6장은 한 사람의 기도가 좋은 습관으로 발전될 때 얼마나 위대한 능력이 되는가를 보여준다. 다니엘은 포로로 사로잡혀 간 이방 땅에서조차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무릎을 꿇고 습관을 좇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단 6:10). 이렇게 습관을 지켜 기도하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좋은 습관이 된 기도는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내었고 역사에 남는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낸 비결이 됐다. 2. 신약의 기도 신약에는 사도들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 등 주옥같은 기도의 모범이 포함되어 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와 초대교회의 기도를 살펴보자. (1)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주기도문)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일평생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올바른 기도의 모범을 가르쳐 주셨다.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는 이 기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성숙한 기도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마 6:9~1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기도해야 할 모든 내용과 대상이 함축적으로 담겨있다. 단순히 예배나 모임의 마침을 위한 절차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과 뜻이 담겨있는 주기도문을 날마다 외우고 되새겨야 하겠다. (2) 초대교회의 기도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도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도의 모범을 보여준다. 첫째, 골방 기도는 개인 기도의 모델로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다(행 10:9).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마 6:6). 둘째, 다락방 기도이다. 골방 기도와 비교할 때 다락방 기도는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행 1:14).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는 능력 있는 기도이다. 베드로를 위기에서 구해낸 것도 초대교회 성도들의 합심 기도였음을 기억하자(행 12:12). 셋째, 성전 기도이다(행 2:42~46). 성전은 하나님이 택하셔서 거룩하게 하신 곳으로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향하는 곳이다(대하 7:16). 따라서 기도하는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기도하는 교회는 부흥하며 성장한다. 김현동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영성훈련소장)
  • 2023.05.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와 응답
  •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신다. 기도의 응답은 성경에 약속되어 있으며(마 7:7~8), 응답이 없는 기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기도한 후에 응답이 오지 않는다며 좌절한다. 그러나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도한 바대로 응답받지 못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해 계신 분이며(빌 4:7),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과 다르게 응답하실 수 있는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반드시 응답하시는 분이시며 그 응답은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히 11:6).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시며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을 명확하게 분별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자세를 알아보고자 한다. 1. 기도 응답의 유형 기도의 응답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간구한 바대로 응답을 주시는 경우 간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할 때 우리가 기도한 바대로 응답받게 된다. 우리는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 응답 자체가 아니라 그분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해야 한다. 또한 응답받은 바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구하며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2) 간구한 바와 다르게 응답을 주시는 경우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또 다른 응답의 방법이다. 우리의 시각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만을 응답으로 여기지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신다. 우리는 당장 눈앞의 일밖에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미래에 있을 모든 것들을 다 살피시고 응답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결과 앞에서도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믿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해야 한다. (3) 간구한 바에 대한 응답이 지연되는 경우 우리는 당장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기를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가장 적당한 때에 우리 기도에 응답해주신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거나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응답이 더디더라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하며 응답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새벽이 가깝다’라는 격언처럼 지연되는 응답으로 인해 고통이 크더라도 오히려 하나님의 응답이 가까웠음을 믿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2. 응답받는 기도자의 자세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 무엇보다 우리는 기도자로서 올바른 자세와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삼상 16:7)을 보시고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기 하나님의 뜻에 맞는 간구라면 반드시 허락의 응답을 받게 된다(요일 5:14).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 첫째로 겸손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이다(눅 18:10~14). 하나님은 상한 심령으로 나아오는 자를 원하신다(시 51:17). 둘째로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실천하려는 기도이다(롬 12:2).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분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릴 때 기뻐 받으시고 응답해주신다(요일 3:22). (2) 믿음으로 구하기 기도할 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성경은 믿음 없이 드리는 기도를 가리켜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다고 말씀한다(약 1:6~7). 믿음 가운데 구하는 기도는 첫째로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믿고 확신하며 드리는 기도이다(렘 29:12). 비록 응답은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막 11:24). 둘째로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란 의심과 싸워 이기며 구하는 기도이다(민 23:19). 의심하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불신이기도 하다. 의심의 마음을 제거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명확해진다. (3) 끝까지 인내하기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된다(히 10:36). 그러므로 오래 참음으로 기도의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중단하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간절히 청하는 자에게 응답하심을 말씀하셨다(눅 11:8). 또한 낙심과 두려움을 버리고 인내하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딤후 1:7). 이러한 기도에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신다. (4)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기도의 응답을 받으려면 하나님 앞에 죄로 인해 막힌 것이 없는 깨끗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깨끗한 마음을 갖기 위하여 첫째로 죄에 대해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죄인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회개는 모든 기도 응답의 기초이다(사 59:1~2). 둘째로 외식하지 않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마 6:5). 마지막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란 세속적인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고(약 4:3),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도의 응답을 체험한 사람만이 진정한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기도 응답의 여러 가지 형태를 통해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을 깨닫고 더욱 기도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김현동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영성훈련소장)
  • 2023.04.21 / 금지환 기자

    기도 훈련 - ② 체계적인 기도 훈련의 필요성과 단계들
  • 성령 충만을 통한 영적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거룩한 목표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 생활을 스스로 점검하고, 기도의 자리를 찾아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성도 스스로 이러한 기도의 삶을 지속해 나아가기란 쉽지 않다. 성도 한 명, 한 명이 기도의 용사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계적인 훈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수영이나 볼링 등 운동을 처음 배울 때를 생각해보자. 올바른 자세 또는 기초적인 이론 등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다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 오히려 올바르지 않은 자세로 무리하게 연습하다가 부상당하기 십상이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성도 개개인이 일단 기도를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계적인 훈련 과정을 통해 성령 충만한 기도 용사로서 성장해 나아갈 수 있다. 오늘은 영적 성장을 위한 기도 훈련의 단계들을 살펴보고, 실제 기도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유용한 지침들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1. 기도 훈련의 단계들 군대에서 병사들을 훈련할 때도 단계가 있듯이 기도 훈련에도 단계가 있다. 각자의 수준에 맞춰서 차근차근 노력하다 보면 누구나 성령으로 충만한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다. (1) 기도의 방해 요소 제거하기 기도 생활에는 상당한 장애물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의 장애물들을 제거하여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① 이기적인 목적(약 4:3) ② 회개하지 아니한 죄(사 59:1,2) ③ 마음속의 우상(겔 14:3) ④ 가난한 사람과 하나님의 사역에 인색한 마음(잠 21:13) ⑤ 용서하지 못하는 영혼(막 11:25) ⑥ 부부간의 갈등(벧전 3:7). (2) 기도를 습관으로 만들기 “우리가 가진 모든 탁월함은 습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기도 역시 습관이 될 때 우리는 탁월한 기도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공생애 동안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던 예수님처럼(눅 22:39) 우리도 개인적인 기도의 시간과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새벽이나 오전이나 저녁 등 지혜롭게 시간과 장소를 정하되 꾸준한 기도 생활의 루틴(일정하게 반복하는 절차)을 만들어야 한다. 주일예배, 새벽예배, 소그룹 기도 모임, 가정예배 등을 활용해 정기적인 기도의 자리를 만드는 것도 바람직하다. (3) 순종하는 기도자 되기 우리가 힘써야 할 기도의 다음 단계는 순종의 단계이다. 기도 가운데 깨닫게 된 바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인정하고, 그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기도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자기 뜻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 의지를 갖추고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막 8:34). (4) 중보자로서 기도하기 성숙한 기도자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우리 자신과 공동체에 역사하실 것을 바라며 기도하는 사람이다(마 6:9~10). 이러한 사람은 자신을 위한 기도뿐만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기도의 짐을 기꺼이 지려 한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결렬된 틈을 막고 서는 중보자의 심정을 가지고 꾸준히 타인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는 기도 생활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도 훈련이다. 2. 기도 훈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침들 앞서 설명한 기도 훈련의 단계들 안에서 아래의 영적 지침들을 적용할 때 더욱 효과적인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 (1) 회개하며 드리는 기도 성경은 기도를 통한 회개와 자백의 유익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2) 찬양하며 드리는 기도 하나님은 찬송 가운데 임하신다(시 22:3). 모든 기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고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구속의 은혜, 성령님의 인도하심 등을 진심으로 찬양할 때 우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일어나고, 이는 우리를 더욱 깊은 기도로 이끈다. (3) 감사하며 드리는 기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믿고 기도 가운데 항상 감사의 고백을 드려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부지불식간에 감사 없는 기도, 형식적인 감사로 기도하곤 한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한 두 마디의 기도가 때로는 백 마디 간구보다 더욱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가 된다. (4) 기록하며 드리는 기도 기도 훈련으로 유명한 미국의 존 맥스웰(John C. Maxwell) 목사는 기도의 제목이나 응답의 기록을 강조했다. 기도의 제목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수준의 믿음을 갖게 된다. 받은 것을 헤아릴 때 의심의 구름이 걷히고 이성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성령 충만한 기도의 사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도 훈련에 유용한 지침들을 숙지하고 단계적인 기도 훈련의 과정을 차곡차곡 밟아가다 보면 어느새 기도의 사람으로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김현동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영성훈련소장)
  • 2023.03.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선교 뉴스
    서상진 선교사, 홀리스피리츠맨 메달리온 수상
  • 대만에서 선교하는 타이중순복음교회 서상진 선교사가 25일 제18회 홀리스피리츠맨 메달리온을 받았다. 사단법인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에서 주관하는 시상식은 한국기독교성령센터에서 진행됐다. 서 선교사는 1991년 대만 선교를 시작해 대만한국선교사연합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인세계선교사회 동북아대표, 순복음세계선교회 대만총회장으로 헌신하며 대만 복음화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선교사 부문에서 수상했다.
  • 2023.05.26 / 이미나 기자

    남기선 목사, 캄보디아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는 2일 주일 4부 예배에서 남기선 목사 캄보디아 선교사 파송식을 진행했다.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남기선 목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캄보디아에서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주의 사랑을 전하는 큰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성도들에게는 선교사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당부하기도 했다. 남기선 목사는 성시화운동본부를 비롯해 영등포·마포1·서대문대교구, 선교국에서 사역했으며 캄보디아에서는 프놈펜순복음교회 담임으로 사역하게 된다.
  • 2023.04.07 / 오정선 기자

    송준혁 목사, 호주 선교사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19일 성전비서실에서 호주 브리즈번순복음교회 부교역자로 파송되는 송준혁 목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선교 사역을 위한 헌신을 당부했다.
  • 2023.03.24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이승준 목사(미국)
  • 거룩한 성도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교회 기대 1990년 미군 남편 둔 한인여성 중심으로 교회 창립 2017년 부임 후 ‘성도들의 삶 변화’에 초첨 맞춰 사역 할렐루야!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인디애나순복음반석교회 이승준 목사입니다. 제가 사역하는 인디애나주는 미국 중서부에 위치한 곳으로 과거 인디언들이 거주했다고 해서 ‘인디언의 땅’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도는 인디애나폴리스(Indianapolis)로 그 외 다른 지역들은 대부분 콩과 옥수수를 재배하는 곡창지대인 시골입니다.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라 한인 이민자들이 거의 살지 않는 곳입니다. 인디애나순복음반석교회는 1990년 9월에 창립됐습니다. 근방에 4개의 미군 부대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을 중심으로 교회는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군부대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해 현재 남겨진 여성들은 남편들이 은퇴 군인이거나 이혼한 분들이 남아 있습니다. 군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교회 주변은 우범지대로 변질하여 위험한 지역이 되곤 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의 총기 사고, 은행 강도, 살인사건, 다양한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인인 남편들이 은퇴하기 전부터 계속 살던 삶의 터전이라 성도 대부분은 교회 주변에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2017년 선교지 발령을 받고 처음 교회에 왔을 때, 한 권사님이 저에게 세 가지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십일조, 술, 담배에 관련된 설교는 하지 말아주세요.” 십일조 설교 때문에 이전 목사님들과 다툼이 있었고, 대부분 여성들이 술과 담배를 해서 조심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사역하면서 술과 담배, 도박, 돈놀이, 계모임, 불륜 사건 등 교회 안팎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일어났습니다. 만약 계속 이런 모습을 보고도 방관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물론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이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성도들 삶의 변화를 중점적인 핵심 사역으로 두고 2018년 표어를 ‘삶이 예배가 되게 하라’고 정하고 새벽마다 성도들과 고린도전서를 묵상하며 올바른 교회의 모습이 무엇이며 거룩한 삶, 물질 문제, 이성 문제, 술과 담배의 문제점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습니다. 2019년에는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돼라’라는 표어를 가지고 계속해서 말씀을 전했고, 이듬해인 2020년에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2021년에는 ‘내가 반드시 성숙한 삶을 살리라’는 표어를 세워가며 성도들의 삶의 변화를 소망했습니다. 코로나가 발생했을 때는 자주 모임을 할 수 없어 온라인상으로 ‘하루 묵상’이라는 묵상 채널을 만들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매일 10분씩 말씀 묵상을 나눴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된 성도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술과 담배, 도박을 끊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계모임, 돈놀이, 술 모임 등의 문화가 사라졌습니다. 또 성도 대부분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2022년 우리는 “과거 나의 상처를 치유하자”라는 주제로 내적 치유 및 성경 공부를 시작했는데 단순히 성경 공부를 넘어 서로가 마음을 열고 자기 과거의 상처와 아픔을 나누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치유와 변화의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이렇게 6년의 세월을 성도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성도들 삶의 모습은 놀랍도록 변했습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습들이 목회자인 제가 봐도 감동인데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기쁘실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2023년 우리는 ‘믿음의 모델이 되는 삶을 살라’는 표어를 세워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삶의 변화를 넘어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신앙의 모델이 되기 위함입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 성도들이 더욱더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 안에서 어떤 비전을 발견하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저의 목표는 이 공동체 안에서 제게 맡겨진 영혼들이 그리스도의 강한 군사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거룩한 군대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인디애나순복음반석교회를 위해 고국에 있는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2023.03.31 / 오정선 기자

    타나베 야베스 선교사(일본)
  • ‘일본 일천만 구령’과 이웃 사랑 실천 위해 전진합니다 5명 성도로 출발해 60여 명 성도 함께 예배 드려 우크라이나 이어 튀르키예 등 지진 피해 성금 전달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일본 사이타마현에 위치한 순복음가와고에교회를 2021년 8월부터 섬기고 있는 타나베 야베스 선교사입니다. 가와고에는 도쿄에서 북쪽으로 약 40㎞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인구 35만명의 핵심 도시입니다. 가와고에는 역사가 깊고, 에도 시대에 성곽도시로 번영한 도시로 작은 에도 ‘고에도’(小江戶)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터, 유적, 역사적 건축물이 많아 국가로부터 ‘역사도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순복음가와고에교회는 1999년 4월 4일 한 음식점에서 5명이 모여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해 11월 예배할 장소가 주어져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2008년에는 약 142평의 건물을 주셔서 지금의 자리에 입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23년 현재 일본, 한국, 중국, 대만 출신 성도 약 60명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가와고에에는 약 20개의 교회가 있어 매월 목회자 모임을 통해 가와고에 부흥과 교회 발전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현재 담임 목사님들 나이가 대부분 70세 이상이고, 가장 많은 분은 90세이십니다. 모두 현역으로 교회를 섬기고 계십니다. 놀랍게 보이지만 일본 교회에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후임자가 없어서 계속 목회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일본에서는 무목교회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의 기독교는 전체인구의 1%도 안 되고, 개신교는 그 중 0.4%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의 첫 번째 비전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본 일천만 구령’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인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교회를 사랑하고 일본을 사랑하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날마다 실천하고 있습니다. 예배와 기도, 말씀을 통해 신앙과 영적 성장 그리고 성령 충만함을 항상 추구하며 기쁨과 감사 그리고 평안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비전은 성도들의 가족 구원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아직 가족이 구원받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교회에서 멀어졌다는 가정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가족, 자녀들이 교회에 와서 함께 손을 잡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조금씩이지만 행사 때 얼굴을 보여주시고, 교회 예배에 참여해주시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모두 실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비전은 이웃에 대한 사랑 나눔으로 우리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 편부모 자녀, 독거노인 등 사회적 약자인 분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봉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삶의 의미와 꿈과 희망을 나누며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시설을 운영하는 기독교 단체와 협력 및 지원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 교회는 전쟁과 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튀르키예와 시리아의 이재민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2022년 7월에 이어 올해 2월에 각국 선교사님들에게 주님의 사역을 위해 총 100만엔(1000만원)을 후원했습니다. 이렇게 국내 뿐 아니라 해외의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얼마 전 이영훈 목사님이 일본에 오셔서 강렬한 순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부흥하고 복음화가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우리 신앙의 실천을 통해 가와고에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를 기도하고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일본에 부흥의 불길이 곳곳에서 타오르도록, 순복음의 뜨거운 기도와 함께 성령운동이 다시 한번 일어나 모든 교회에 폭발적인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기도의 용사인 우리 순복음교회가 이 일본에 세워진 줄 믿습니다. 둘째, 가와고에에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크리스천들이 일어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사, 절 등 역사적인 건물과 문화가 있기 때문에 영적인 싸움이 많이 있습니다. 셋째, 다음세대의 부흥과 신앙의 계승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젊은 세대들이 속속 일어나 우리의 신앙을 이어받아 복음의 밭을 경작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중보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마다 항상 일본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도 항상 한국을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 2023.03.03 / 오정선 기자

    이상용 목사(베트남순복음교회)
  • 순복음의 영성으로 지역 교민 섬기며 현지 복음화 꿈꿔 법인 설립 및 세금 문제, 하나님의 뜻 안에 해결 되기를 ‘안끄’ 지역 집짓기 프로젝트 … 교회 처소 되길 기도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님들에게 주님의 평강이 넘치시기를 소망합니다. 멀리 베트남 호치민에서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는 베트남 남부 지역인 호치민에 위치합니다. 2004년에 창립된 베트남순복음교회는 지역 교민들을 섬기는 교회로 순복음의 영성과 신앙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베트남순복음교회 4대 담임목사로 2019년에 파송됐습니다. 파송되자마자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됐고 3년이라는 긴 코로나의 기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지나오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순복음교회에는 오랜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2012년 부과된 세금이 10년간 연체되어 베트남 정부 당국에 우리가 내야 할 세금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액수로 불어났습니다. 지난해 9월에는 베트남 정부가 10년간 세금을 내지 않았기에 강제집행을 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정부가 토지와 건물을 회수하기 전에 마지막 절차로 소유자에 대한 모든 재산 정보를 공개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해부터 세금 납부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하는데 주님의 은혜로 지난해 6월 이영훈 목사님께서 세금에 대한 비용을 지원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모교회에서 세금 원금을 은행을 통해 보내 주셨는데 베트남 은행에서 지급을 거절했습니다. 그 당시 보내준 금액을 찾지 못하면 베트남 정부 당국의 절차대로 토지와 건물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은행으로부터 돈을 찾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이기도 하고 대한민국의 세법이나 토지 사용의 개념과 차이가 있어 현재 우리 교회가 처한 상황을 조사하고 해결하는 과정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법률용어와 세무용어를 통역해 듣다 보니 해석의 차이가 생기기도 했고 토지와 건물에 대한 서류 중 없는 것들이 많아 준비 과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1월 이영훈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 방문하시고 성도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더불어 우리 교회 리더들과 만난 자리에서 세금 문제의 해결과 재산권을 보호하는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는 올해 세금과 관련한 모든 문제를 마무리하고 재산권 보호를 위해 법인 설립과 외국인단독교회(International Church) 등록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베트남과 베트남순복음교회를 위해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저희 가족을 비롯한 성도님들의 체류 비자 발급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길었던 코로나를 이겨내고 성도님들이 베트남 땅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이 땅에 순복음의 깃발을 높이 들고 많은 영혼을 살리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선교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지역이 있습니다. ‘안끄’라는 곳으로 이 지역은 호치민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떨어져 있고 5개의 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농업이 주된 지역으로 가난한 소작농이나 품꾼, 빈민들이 많은 곳입니다. 최근에는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바닷물이 역류해 농사를 망치는 일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안끄 지역에는 아직 교회가 없습니다. 베트남순복음교회는 작년부터 안끄 지역의 적십자와 인민위원회를 통해 장학금 전달과 빈민 구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복음 전파와 함께 교회 이름으로 구제사역을 하며 더불어 베트남 현지 사역자들이 지역 사회에 흡수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안끄 지역의 많은 집들은 흙바닥에 바나나 잎으로 비와 햇빛만 피할 수 있는 형편입니다. 올해 이곳에 집짓기 프로젝트가 이루어지는데 기도하기는 세워지는 가정이 교회의 처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안끄 지역 인민위원회와 함께 하는 집짓기 프로젝트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현지인 사역자들이 세워지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라 베트남순복음교회는 베트남을 섬기며, 선교에 앞장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모교회 성도님들의 많은 관심과 중보를 부탁드리며 성도님들의 가정과 삶의 자리 가운데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 2023.02.03 / 오정선 기자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
    박승혜 선교사(코트디부아르)
  • - 선교대회 통해 은혜와 도전받는 시간 되도록 - 두우궤 교회 건축 마무리가 잘 되도록 - 성령 충만과 가족의 건강
  • 2023.05.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안진희 선교사(인도네시아)
  • - 코로나가 완전히 종식 되도록 - 성령 충만과 건강을 위해 - 주일예배(성인, 청소년, 주일학교)가 회복 되도록
  • 2023.05.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김주영 선교사(콜롬비아)
  • - 리오아차 현지인 사역자(칠레 국적)의 콜롬비아 비자신청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 예배와 모임을 위한 성전구입을 위해 - 장애인 사역(베데스다선교회) 계획이 잘 추진되도록
  • 2023.05.12 / 오정선 기자

    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시보는 영산 신학과 목회
    영산의 세계선교
  •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꿈과 비전으로 충만하게 된다(행 1:8). 성령님은 영산에게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세계선교의 꿈을 부어주셨다. 그때부터 영산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은빛 날개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꿈’을 품었다. 그 꿈처럼 영산은 당시 해외 여권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때 이미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전 세계는 주님의 교구입니다.” 웨슬리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영산의 고백은 절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머물렀던 수많은 선교 현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기적의 장소였다. 영산이 세계선교를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된 배경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5월 세계오순절총회를 마친 영산은 100일 동안 18개국, 39개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던 그는 결국 스위스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밑에 놓인 엽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으니 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종이 되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적고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쇠약해졌던 영산의 몸은 이튿날이 되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그때의 체험은 영산의 사역 가운데 세계선교를 항상 강조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영산은 유럽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계 교회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국제기관을 조직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6년 11월 4일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이하 CGI: 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영산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성장에 관한 노하우를 전 세계 교회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부흥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CGI는 설립 이래 2022년 현재까지 한국을 비롯한 100여 개국 이상에서 총 600회 이상 CGI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여기에 전 세계에서 연인원 120만명이 참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계선교와 교회 성장에 이바지한 CGI는 2022년 10월 이영훈 목사를 제2대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하면서 ‘다음 세대의 부흥’을 외치며 제2기 사역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산은 세계선교의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000년 3월 28일 DCEM(David Cho Evangelistic Mission)을 설립했다. 이 기구를 통해 전 세계 선교지와 선교단체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선교 자원의 교류에 힘썼다. DCEM은 교파를 초월해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심어주는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영산은 그 목회 사역 동안에 약 600회 이상의 해외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런 왕성한 사역은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과 열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영산의 선교 사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서구권의 기독교 인구가 서구권의 기독교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기독교 신학이나 선교가 서구권 교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서구권 교회는 갈수록 쇠퇴를 거듭했고, 반대로 비서구권의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영산의 세계선교 사역은 기독교 선교의 주체를 서구권 교회에서 비서구권 교회로 전환하는 데 아주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산은 선교가 ‘순복음’의 최우선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진정한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이고 선교하는 성도가 진짜 ‘순복음성도’(Full Gospel Christian)이다. 교회가 선교를 멈추는 순간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영산 안에 넘쳤던 복음의 확신과 순복음의 영성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하나님 사명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David Yonggi Cho’라는 이름은 안다”라는 말이 수많은 증인에 의해 회자된 것만 보아도 그가 가진 세계선교의 열정과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순복음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나아가 선교하는 삶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선교에 평생을 바친 영산의 삶이었고, 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은 모든 순복음 성도들의 꿈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의 본을 따라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히 12:1). 오늘날 교회가 영산으로부터 반드시 전해 받아야 하는 믿음의 영적 바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교의 바통’이다. 이제 영산의 뒤를 이어 우리도 성령 충만함 가운데 ‘선교 바통’을 이어받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계선교의 꿈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산의 신유 사역 
  •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그의 핵심적인 목회 철학 중 하나였다. 영산은 신유의 기적이 과거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역임을 확고히 믿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으로 값없이 병 고침 받는 것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산이 믿었던 신유의 은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자 ‘아직’, 그러나 반드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영산은 치유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믿는 자의 부활을 보았다. 그래서 영산은 목회 현장이나 부흥회 사역에서도 병 고침을 강조했는데,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질병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거리는 수없이 많다. 영산이 이같이 신유를 강조하게 된 것은 어떤 특정한 치유 신학을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를 ‘신유의 종’으로 만든 것은 그가 처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 경험했던 치유의 하나님 때문이었다.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주님을 만나서 완치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또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 중풍에 걸린 여인이 낫고 걷지 못했던 소년이 일어나 뛰며 듣지 못했던 사람이 듣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영산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과 목회 현실에서 신유의 역사를 분명하게 체험했기에 영산은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의 신유 사역은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영산의 개척교회가 빈민촌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영산은 신유를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적으로 보고 목회 사역에 열심히 적용하고 실행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 신유 사역”(막 16:18)이 복음 전파에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회고할 때도 신유 사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복음에 저항적이던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을 치료받고 은혜를 받아 복음의 말씀을 세상에 나아가 강력하게 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신유 공동체로 보았다. 영산의 신유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믿음이다. 영산은 그 어느 목회자보다도 병 고침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선포했고 신유의 기적도 많이 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성령이 필요에 따라 자신을 통해 은사를 나타내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산 자신이 분명히 받았다고 주장하는 은사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은사’였다. “내가 받은 은사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습니다.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 뒤에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천막교회 시절에 나타났다. 걷지 못하던 소년이 영산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그가 낫는다는 것을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영산이 한 시간이 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자 뭉게구름 같은 믿음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산은 그때의 기분이 마치 지구를 자기 손으로 밀면 지구가 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간증한 바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할 때 영산은 그 소년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영산은 오늘날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영산에 따르면 신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셔서 은사를 베푸시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산은 신유가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분명히 믿었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신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에 자신의 아픈 부분에 손을 얹고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을 통한 성령의 신유 사역은 여의도순복음교회뿐 아니라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신유의 복음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순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유익을 주었다. 앞으로도 영산의 신유 사역의 원리를 계속 연구하고 실행함으로 새로운 신유행전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길 희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문서·방송 선교의 선구자…1988년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창간
  • 영산은 미디어의 활용이 미미하던 시절, 문서 선교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사역에 적용한 선구자였다. 영산은 자신이 가진 뜨거운 선교적 영성을 담아내어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순복음의 신앙이 한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떤 교회보다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서 전도』의 저자 조지 버워는 “기독교 문서는 인쇄된 선교사”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 선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영산은 누구보다도 문서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역에 적용하였다. 1964년 당시 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순복음지』를 발간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78년에 이르러서는 영산의 설교와 칼럼, 성도들의 신앙 간증과 구역 성경 공부 및 교회 소식을 담은 『순복음뉴우스』가 되었다. 이후 『순복음가족신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문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영산은 또한 순복음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잡지 『신앙계』를 창간함으로 문서 선교의 폭을 확장했다. 『신앙계』는 기독교의 대중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양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기독교 잡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대중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신앙계』를 능가하는 잡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앙계』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운동의 건전한 보급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신앙계』야말로 오순절 신앙을 한국교회에 널리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영산의 문서 선교의 열정은 『순복음가족신문』과 『신앙계』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한 이단 종교 단체가 일간 신문을 발간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산은 만약 그 단체에서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일간지 창간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988년 세계 최초의 기독교계 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정부와 사회에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산은 신문사를 설립하는 과정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근거 없는 비난의 목소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복음 실은 일간지 『국민일보』는 매일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땅에 전파하는 발 없는 전도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 정신으로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로서 한국 교계의 대사회적인 발언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 문화의 채널로써 한국 사회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 사명도 이뤄가고 있다. 영산의 『국민일보』 창간은 대한민국 1200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스컴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영산은 문서 선교뿐 아니라 방송 선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영산은 복음 전도의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방송 선교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던 영산은 1966년 라디오 설교와 1979년 컬러TV 방송을 송출했다. 영산의 라디오 설교 방송은 1979년, 1980년 연속, 전국 청취자 애청 프로그램 조사 결과 청취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청취자가 많았다. 이처럼 한국교회 방송 선교의 선구자는 단연 영산이었다. 당시 흑백 TV에 익숙했던 공중파 제작자들이 방송 장비와 시스템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견학을 올 정도였다. 방송 선교는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영산의 방송 선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위성과 인터넷을 활용한 예배와 설교 실황은 각 지성전 및 지교회 설립과 더불어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영산의 방송 선교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KCWC사의 특별 기획으로 주일 예배 실황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필리핀, 남아공 등 25개국에 동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산의 성령 충만의 복음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함께 전 세계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산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 설교뿐 아니라 설교를 전달하는 매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영산의 설교와 성령 충만의 영성은 멀티미디어 사역 시스템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이러한 사역이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복음의 메시지는 불변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영산의 멀티미디어 사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유훈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9.23 / 김용두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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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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