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예배와 식사 - 마웅갑 목사(교회학교장)
  • 러시아 사할린에 가면 다른 러시아 지방보다 색다른 음식 메뉴를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배경을 설명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1950년대 러시아 사할린에는 먹을 것이 없어 러시아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조선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계속 입에 넣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대부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끌려온 사람들이었는데 러시아인들이 가서 보니 산나물, 미역, 다시마, 조개, 명태, 오징어, 문어 등 당시 유럽 사람들은 알지도 먹지도 못하는 것들을 찾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조선인의 음식을 먹다 보니 지금의 사할린 러시아인들은 유럽 사람들과는 다른 음식 메뉴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먹을 것에 관심이 많다. 사람에게 주어진 첫 번째 하나님의 명령도 그리고 첫 번째 죄도 먹을 것에 관한 것이었다. 먹지 말라는 것을 호기심에 잘못 먹었더니 에덴에서 쫓겨나 유한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먹을 것에 대한 관점은 약간 다르다. ‘얼마나 다양한 먹거리를 어떻게 맛있게 먹고 건강해지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먹느냐를 더 중요하게 본 것이다. “아론 자손의 남자는 모두 이를 먹을지니 이는 야훼의 화제물 중에서 대대로 그들의 영원한 소득이 됨이라 이를 만지는 자마다 거룩하리라”(레 6:18). 아론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고운 곡물가루를 주님께 드린 후에 나머지를 성막에서 나누어 먹었다. 이 식사는 맛이 문제가 아니라 성소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소박하지만 나누어 먹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예배와 더불어 식사에서 하나님의 것을 나눔으로 그들도 거룩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것을 거룩한 곳, 성전에서 먹고 나누는 가운데 주의 백성이 되어 간다. 구약이나 신약에서 주님이 정하신 예배는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예배이고 두 번째는 공동식사이다. 공동식사를 준비하는 자는 예배를 준비하는 제사장과 마찬가지이다. 처음에는 영적인 말씀을 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고 다음은 육을 위한 음식 즉,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준비한 음식을 나누는 것이다. 이로서 예배는 완성된다. 처음 말씀을 나누는 예배와 다음의 애찬을 나누는 시간도 모두 예배인 것이다. 이는 인터넷에서 설교만 듣는 것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예배와 식사를 나누는 그곳에 성령님은 임하신다. 올해는 우리의 예배 가운데 거룩한 성찬을 온전히 준비하며 주님의 말씀을 나누고, 모든 모임에서 예배와 교제의 식사가 은혜로 활성화되길 소망한다.
  • 2023.01.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새롭다는 것은 - 이일섭 목사(선교국장)
  • 모든 인생에 있어 새롭다는 것,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새롭다는 것은 각각의 인생에 변화와 회복 그리고 희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동경하고 추구하지만 저마다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고 절망함으로, 다시 무언가를 시도하지 못하고 포기하거나 현실에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꿈 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현실에 순응하여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살아가다 인생에 염증을 느끼는 순간도 찾아옵니다. 하지만 언제든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바로 길과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일본의 개신교 사상가였던 우치무라 간조(1861~1930)는 그의 저서 일일일생(一日一生)에서 “기독교는 날마다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 역사의 출발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주님만을 신뢰하기로 믿음으로 결단하고, 전폭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여 세상 속에서 전진할 때 변화하고 성장하며 또 다른 소망을 품을 수 있은 단계로 올라서게 됩니다. 헬라어로 ‘새롭다’는 의미를 지닌 ‘카이노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카이노스’는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을 의미할 때 쓰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는 말씀의 ‘새로운 피조물, 새 것’에 ‘카이노스’가 사용됩니다.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변화됐음을 의미합니다. 성도를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면 생각과 꿈이 새로워지고, 입술의 고백과 믿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질적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성도는 어떠한 일이 닥치더라도 위기의 순간에 마침내 나에게 기회가 왔다고 믿음으로 선언하고 성령님과 함께 담대하게 전진해야 합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희망을 향해 앞으로 나아갑시다 - 백근배 목사(여의도직할성전 담임)
  • 소망의 해가 밝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뒤로 하고 희망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 바닷가에 진을 치던 때에 애굽왕 바로의 군대의 추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앞은 홍해요 뒤는 무서운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은 것입니다. 실로 진퇴유곡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내용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앞으로 나가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려운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나아갈 때 하나님이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거라는 지난해를 뒤돌아 보지 말고 새로운 새해를 향해 앞으로 나가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약속의 땅으로 가는 중에 시련의 관문을 만난 것입니다. 이들이 만난 것은 앞은 홍해요 뒤는 애굽 군대이며 양 옆은 험한 산입니다. 축복의 땅에 대한 모든 공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감사와 찬송의 소리가 갑자기 원망과 탄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래도 낙심치 말고 앞으로 나가라고 말씀합니다. 어떠한 환난과 어려움이 와도 낙심하지 말고 앞으로 전진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넘어지지 않는 법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가르침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또 일어나 나가는 것입니다. 올해 우리에게 어떠한 애굽, 홍해, 산이 우리의 앞을 막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미국의 토크쇼 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10대 여성 가운데 한 명이며 영화감독이자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명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9살 때 사촌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14살에 임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세계적인 인물입니다. 그녀가 이러한 축복 된 삶을 살게 된 것은 할머니가 세 살부터 주기도문을 외우게 하고 교회 중심,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금년 한 해 우리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어도 희망을 가지고 나갈 때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가 무너지고, 애굽이란 적군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물러서지 아니하고 나갈 때 하나님이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금년 한 해도 새 소망과 꿈을 안고 앞을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 2023.01.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75) 제3차 선교여행 - 에베소에서 드로아까지
  • 에베소에서 아데미 여신의 형상을 은으로 만들어 팔아 부를 축적하던 은장색(銀匠色) 중 데메드리오가 일으킨 소란(행 19:23~35)이 진정되자 바울은 제자들(믿는 자들)을 불러서 권면(위로)한 후에 작별하고 에베소를 떠나 제2차 선교여행 지역이었던 마게도냐로 갔다. 그곳에서도 제자들을 권면한 후 ‘헬라’(좁은 의미로는 남부 아가야)에 도착해 거기서 석 달을 지냈다. 이러한 여정은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성경학자들은 이때 바울이 고린도에서 가이오의 환대를 받으며 로마서를 저술했다고 본다(참조. 롬 16:23). 그 후 바울이 배편으로 수리아(여기에서는 예루살렘)로 가려고 했으나 그 배에서 유대인들이 항해 중에 바울을 죽일 음모를 꾸민 것이 알려져서 경로를 바꾸어 다시 마게도냐를 거쳐 돌아가기로 했다. 바울은 다양한 지역 출신의 회심자이자 동역자 일곱 명을 먼저 드로아로 보내고 자신은 후에 합류하기로 했다. 이를 통해 바울이 얼마나 광활한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수행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도행전의 이 부분에서 다시 1인칭 복수 관점에서 여행기를 서술하는 “우리-본문”이 시작된다(행 20:5~15; 이전. 16:10~17).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가서 먼저 간 제자들과 재회했다. 이 여정은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을 출발할 때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 사흘 만에 갔던 것(행 16:11~12)의 역방향이었다. 일주일 후 “그 주간의 첫날”(주일)에 “떡을 떼려 하여”(성찬, 예배를 위해, 행 2:42 참조) 모였을 때 바울이 다음날 그곳을 떠날 계획이었기 때문에 밤새도록 말씀을 전했다. 성도들이 많이 모여서 다락에까지 등불을 많이 켰는데 밤은 깊어가고 등불의 그을음과 연기가 천장에 가득하다 보니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뚫려 있는 공간)에 걸터앉아서 듣다가 졸음에 빠져 3층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바울이 그 즉시 옛날 선지자 엘리야(왕상 17:17~24)와 엘리사(왕하 4:33~36)처럼 죽은 청년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음으로써 그의 생명을 되살려 놓았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신유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서 심지어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에게 얹어도 나을 정도였는데(행 19:12) 이번에는 죽은 사람까지 살리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유두고는 그의 이름이 ‘운이 좋은 친구’라는 뜻 그대로 바울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운 좋게 ‘제2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성경학자들은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은 그의 영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신분이 낮은 종이었기 때문에 예배에 늦을 수밖에 없었고, 가장 높은 곳에 앉을 수밖에 없었으며 바울의 설교가 길어짐에 따라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참조. 고전 11:17~34). 하마터면 가장 비극적인 불상사가 될 일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가장 은혜로운 기적으로 바뀜에 따라 성도들이 유두고로 인해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다”(행 20:12). 이처럼 바울 일행이 에베소에서 드로아까지 이동하는데도 흑암의 세력의 위협과 방해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위험에서 건져주시며 어두운 길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큰 능력을 베푸심으로써 복음 전파의 길은 중단 없이 계속될 수 있었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3.01.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4)제3차 선교여행 - 에베소 대소동
  • 바울의 에베소 사역은 성령 사역의 전형이었다. 바울이 그곳의 믿는 자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말씀 양육 사역을 회당에서 석 달,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 펼치자 에베소 인근 지역에까지 구원의 복음이 확산되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 귀신이 쫓겨나고 병자가 고침 받는 놀라운 기적과 이사도 일어났다. 그에 따라 수많은 이교도들, 심지어는 마술사들까지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대부흥이 일어났다. 그러자 바울은 그곳을 떠나 바다 건너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서 예루살렘에 들린 후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행 19:21)는 계획을 세우고 자기를 돕는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먼저 마게도냐로 보냈다. 그 무렵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색(銀匠色, 은 가공업자)으로 인해 큰 소동이 벌어졌다. 에베소는 달의 여신 아데미 숭배로 유명했는데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엄청난 규모의 아데미 신전이 그곳에 있을 정도였다. 그것은 길이 137m, 너비 69m, 높이 18m에 이르는 거대한 석조 건물로 원주형 기둥 127개가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바울이 “[하나님의]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와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고 한 것이 이 건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지적한다. 아데미 여신상을 은으로 만들어 고수익을 올리던 데메드리오 입장에서는 “우상 숭배를 버리라”고 외치는 바울이 눈엣가시와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료 업자들과 직공들을 한데 모아놓고 대규모 규탄대회를 열었다. 그는 “이 바울이…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행 19:26~27)고 무리들을 선동했다. 자신이 처한 경제적 위기를 아데미 여신 숭배로 교묘히 포장해서 화근을 제거하려는 속셈이었다. 동료 은장색들이 이 말을 듣고 분이 가득해서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면서 시내를 돌아다니자 순식간에 군중이 불어나서 온 도시가 요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은 바울 일행인 마게도냐 사람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들어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바울은 아시아 관리 중 그와 가까운 사람들의 통지를 듣고 그곳을 피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연극장으로 몰려들다 보니 무슨 이유로 모였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이들을 선동하려고 유대인들이 알렉산더를 연단에 올려서 상황 설명을 하려 했지만 반유대적 에베소 사람들은 그를 무시하고 그저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를 연호할 뿐이었다. 이렇게 두 시간이 지나자 에베소의 서기장이 무리들 앞에 나타나 군중들을 지혜롭게 설득했다. 서기장은 무엇보다 그들에게 경솔히 행동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나서 “고발할 것이 있으면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하면 된다고 하면서 이 소요 사태와 불법 집회를 빨리 끝내라고 촉구함으로써 큰 문제없이 무리를 해산시켰다(행 19:35~41). 이처럼 사도행전은 구원의 복음이 강력하게 전파될 때마다 흑암의 무리들은 그것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박해와 장애물을 쏟아 붓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예비하사 결과적으로 승리하게 하신다는 것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고전 10:13 참조).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2.12.0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3)제3차 선교여행 - 에베소 대부흥
  • 바울의 제3차 선교여행의 주요 사역지는 소아시아의 주도(州都) 에베소였다. 바울은 먼저 성령 충만 사역을 펼쳤다. 그곳에서 바울은 열두 명쯤 되는 믿는 자들과 만났는데 그들은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고” 요한의 침례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이들이 그들과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던 아볼로(행 18:25~26)에 의해 믿음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본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강림하셔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침례도 하게 되었다.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에베소의 오순절’, 또는 ‘이방인의 오순절’이라고 부른다. 다음으로 바울은 말씀 사역에 매진했다. 처음에는 회당에서 석 달간, 그리고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날로 증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했다. 그러자 아시아 지역의 많은 유대인들과 ‘헬라인’(이방인)들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행 19:10). 바울이 이처럼 성령과 말씀 사역을 전개해 나가자 놀라운 능력이 수반되었다. 그에게 신유의 능력과 귀신 내쫓는 능력이 얼마나 강하게 나타났는지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천막 작업용)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병 고침을 받고 악귀가 쫓겨 나갈 정도였다. 이것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서 병 고침을 받은 혈루증 걸린 여인 이야기(막 5:25~34)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그림자가 지나갈 때 병든 자가 치료 받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떠났던 사건(행 5:15~16)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능력의 근원은 이런 물건이나 도구 자체에 있지 않고 주님께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이때 한 가지 웃지 못 할 일이 일어났다. 유대인 유랑 마술사들 중 자칭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바울의 은사 사역을 흉내 내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악귀야, 물러가라!”라고 외쳤다. 그러자 악귀 들린 사람이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김에 따라 그들이 상처를 입은 채 벗은 몸으로 줄행랑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에베소 전역에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면서 주께로 나아왔다. 그런데 이 유대인 마술사들은 빌립의 사마리아 선교 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돈을 주면서 안수함으로써 성령을 받게 하는 능력을 사고자 했다가 베드로에게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들은 마술사 시몬을 떠올리게 한다(행 8:17~24). 마술사 시몬이 베드로의 사역을 방해했던 것처럼 마술사인 스게와의 아들들이 바울의 사역을 방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 충만, 말씀 충만, 능력 충만의 대부흥이 일어나자 에베소 사람들 가운데서 대규모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목격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주께로 돌아와 자복하며 회개하고 주를 영접했다. 그중에는 마술사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주로 비밀 주문을 기록한 두루마리)을 가지고 와서 사람들 앞에서 불로 태웠는데 그 책값이 은 오만 드라크마나 될 정도였다. 이것은 에베소가 고대 세계에서 마술의 중심지였다는 기록과 연관이 있다. 이 시점에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고 사도 바울의 에베소 선교를 요약하고 있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2.11.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50)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⑥
  • 스콜라철학
    ‘스콜라’는 ‘학교’ 또는 ‘학파’를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스콜라철학’이란 중세 유럽에 생겨난 수많은 학교(2022년 12월 23일자 기사 참조)에서 성행했던 진리탐구의 사조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조직이 발전하고 신앙의 규범이 완성되어가면서 당시 세계관이었던 플라톤철학 사상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탐구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러한 사상의 흐름을 가리켜 신플라톤주의라고 한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적 통찰력을 기반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조명하는데 크게 기여했는데,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하려 했던 그의 신학 방법론은 스콜라철학의 뿌리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기독교 세계관 아래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사색적인 철학 방법론을 통해 신앙의 내용을 관찰하고 이해하고자 했다. 5~6세기경 위(가짜)-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이 대표적인 예이다. 부정신학이란 사람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언어로는 전부 묘사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적인 표현으로만 서술해야 한다는 신학 사상을 말한다(예: “하나님은 태어나지 않으신 분이다”). 특별히 8세기 말 프랑크 왕국의 칼 대제가 세운 궁정학교는 이러한 초기 스콜라철학의 모판이 됐다(2021년 4월 25일자 기사 참조). 여기에서 발달한 스콜라철학의 방법론은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고, 11세기까지 이어지면서 중세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이성적으로 증명하려는 스콜라철학의 경향은 켄터베리의 안셀름(?~1109)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그가 강조한 것은 이성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스콜라철학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의 유명한 ‘신존재증명’을 살펴보자: (1) 신은 그 이상으로 크게 생각될 수 없는 존재이다. (2) 이렇게 큰 존재는 인간의 생각 속에만 존재할 수 없다. (3) 그러므로 신은 반드시 실존해야 한다. 안셀름을 이어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1079~1142)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1096~1160)는 이성적이고 비평적인 방법으로 성경의 명제들이 설명돼야 함을 강조하면서 스콜라철학의 위치를 더욱 공고하게 했다. 때마침 이런 상황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이 서방으로 전해졌다. 십자군 전쟁 가운데 상인들에 의해 동·서방 문물이 전해지면서 아랍어로 번역돼 보존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재발견됐다. 플라톤 사상 위에서 공고하게 서 있던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플라톤 사상과 대조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도전 앞에 서게 됐다. 13세기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193~1280)와 그의 제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조화시켜 스콜라철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특별히 아퀴나스는 계시 없이도 이성의 도움을 통해 계시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주지주의). 이와 반대로 둔스 스코투스와 오캄의 윌리엄은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자유 안에서 선택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주의주의). 이렇듯 중세 스콜라철학과 신학의 전성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도전에 대한 진지한 응답에서 비롯됐고 이는 계몽주의와 르네상스 그리고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1.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49)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⑤
  • 대학의 발전, 보편논쟁,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중세 유럽은 이미 9세기경 카롤링 왕조 당시 특별한 문화적 번영을 경험했다(2021년 4월 25일자 기사 참조). 칼 대제의 문예와 교육 장려 정책을 통해 신학과 일반 학문 연구가 활발해졌고 이는 결과적으로 변증학과 논리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학문 연구의 발달은 11세기 들어서면서 대학이라는 새로운 무대를 등장시켰다. 수도원이나 교회에서 설립한 대학이 있었고, 유명한 학자들 중심으로 형성된 대학이나 국가에서 경영하는 대학이 생겨났다(1088년 최초로 세워진 볼로냐대학). 당시 신학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최고 학예였으며 그러한 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이른바 ‘보편논쟁’이었다. 이는 3세기경 그리스 철학자 포르피리오스에게서 출발한 논쟁으로서 개별자들(사물)을 공통의 특성으로 묶는 상위 개념으로서의 ‘보편자’가 실재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이후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플로티누스의 일자론을 기독교 사상으로 승화시킨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하나님은 온 우주의 최상위 존재로 이해되었고, 보편자의 존재(=실재론)는 로마가톨릭의 입장이 되었다. 9세기 에리우게나와 11세기 안셀무스와 샹포의 기욤 등이 이러한 실재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실재론에 이견이 생긴 건 11세기경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 지역에서 보존되어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주해들이 다시 서구 학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면서부터였다(=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대부분은 플라톤의 사상에 밀려 서구 세계에서 잊혀져 있었고, 오히려 아랍 철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실재는 이데아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고 여겼고,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 그러한 보편진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근거로 당시 학자들은 “보편자는 실재하지만, 사물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입장을 가리켜 ‘온건실재론’이라 한다(예를 들어, 아벨라르두스, 아퀴나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지역마다 교회들이 많아짐에 따라 보편논쟁은 가열되었다. 지역교회들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보편자인데 왜 로마 교회만이 보편 교회로서 모든 교회들의 머리가 되려는가, 개별 교회도 보편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가톨릭은 이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하나님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은 곧 개별 교회들에 대한 로마교회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기독교 중요 교리들을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실재론과 온건실재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유명론’이 등장했다. 이 주장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인 로스켈리누스였다. 그는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고 단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보편은 명칭일 뿐이며 사물 뒤에 오는 일반적인 기호나 이름이라는 것이다. “정신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일반적 진리나 사상은 없다”고 주장했던 14세기 영국의 오컴 출신의 윌리엄 역시 대표적 유명론자이다. 그에게 보편자는 정신적 개념이며 마음 밖에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보편이란 개념은 신학에는 불필요한 이론이었다. 그에게 하나님은 개별자 안에 계실 수 있으며, 동시에 개별자를 초월하여 계실 수 있는 분이었다. 유명론은 기독교 세계관 아래의 중세에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이러한 사고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을 천상 중심에서 지상 중심의 자연주의 사상을 초래했다. 유명론은 종교의 시대로 대변되는 중세 말기에 개별자인 사람과 이성을 강조하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2.12.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48)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④
  • 탁발수도회
    십자군 전쟁 이후 등장한 급진적 청빈운동을 이끌었던 알비인들은 로마 가톨릭 측에서 볼 때 한낱 급진적 이단자들에 불과했다. 이노센트 3세와 호노리우스 3세 당시 그들을 선교하려던 모든 노력은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해가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도미니크회와 프란시스코회와 같은 탁발수도회가 창설되었다. 걸식수도회라고도 불리는 탁발수도회는 수도사들이 탁발(걸식)로 생활하는 데서 유래된 명칭이었다. 대표적으로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시스 수도회가 이에 속한다. 이들은 수도원 안에서 은둔하면서 영적인 삶에 몰두했던 기존 수도회와는 달리, 더 이상 은둔하지 않고 도시 안에서 직접 시민에게 설교하여 큰 영향을 끼쳤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창설자는 도미니크였다. 그는 1211년 라보르 시에서 이단자들이 군중들의 돌에 맞아 죽거나 화형되거나 십자가에 매달리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러한 알비인들과 관련된 유혈 사태를 겪으면서 그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운동을 결심했다. 기존의 수도회처럼 고정된 장소나 적막한 곳에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도심 한가운데로 들어가 청빈의 본을 보이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꿨다. 그들은 성서와 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주요 일과로 삼았는데 학문연구를 위해서라면 찬송과 기도도 멀리할 수 있다는 규칙도 정했다. 이들의 중요 목표가 하나님의 말씀을 시민들에게 설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수도원 결성이 금지된 상황(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으로부터 수도회의 결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모자가 달린 검은색 외투를 착용하고 다녔으며, 회원들에게는 신학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일반지식도 갖추도록 요구했다. 주로 남자 수도사는 설교에 집중하고, 여자 수도사는 교육과 봉사에 집중하도록 했다. 유명한 도미니크회 사제들로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엑크 하르트, 타울러, 사보나롤라 등과 같은 중세 스콜라신학의 대가들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말기 도미니크회는 교황의 사냥개라고 일컬어지면서 종교개혁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되었다. 면죄부 설교자 텟첼, 추기경 카제탄, 잉골슈타트의 신학교수 에크 등 당시 개혁자 마르틴 루터를 공격하던 인물들은 도미니크회에 속해 있었다. 프란시스 수도회는 아시시의 프란시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전쟁 참가 중 중병을 치르면서 변화되었다. 그는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파송 설교에 감명을 받고 청빈했던 예수님과 사도들의 뒤를 따르기로 결단했다. 그 후 로마 순례 중 무너져가는 작은 교회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프란시스여, 가서 네가 보듯 폐허가 되어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거라.”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창고에 있던 옷을 팔아서 허름한 교회를 복구했는데 이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하는 그의 삶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외에는 다른 아버지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절대적인 청빈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았다. 이후 프란시스 수도사들은 사랑으로 뭉쳐 철저한 청빈의 삶을 실천했고 둘씩 다니며 전도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외쳤고 문둥병자와 버림받은 자들을 도우며 함께 생활했다. 이러한 걸식수도회와 함께 12세기에는 카르멜리터의 은둔파 수도회, 13세기에는 어거스틴의 규율을 철저히 지켰던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특별히 후자는 마르틴 루터가 머물던 수도회로 잘 알려져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뿌리깊은 순복음
    (132)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5>
  • 스스로 높아져 자랑치 말고 우릴 구속하신 예수님만 자랑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자신에게 침례를 베푼 사도들을 자랑했고 신령한 은사들을 자랑했다. 이를 지적하며 사도 바울은 고전 1장에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다며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다(고전 1:29~31). 아무리 세상 것을 자랑해도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속담처럼 세상에는 나보다 더 큰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다. 스스로 가진 것이나 이룬 것 자랑치 말고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속하신 예수님만을 자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신다(고전 1:26). 다시 말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육체라도 자랑치 못하도록 연약한 우리를 택하신 것이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은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기록한다. 이것은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졌다’고 자랑치 말라는 의미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자랑도 헛되다. 인생들이 주로 자랑하는 것은 돈·명예·자식·권력·힘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 가치가 오래 보존되지 않는다. 육체적이며 세속적인 가치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가치를 자랑할 수 없는 사람은 육체적인 가치라도 자랑하며 살 수밖에 없다. 자랑은 영적이기 보다는 육적인 것으로 성경은 기록한다(갈 6:13). 이처럼 자랑은 헛된 것이 대부분이다.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자랑치 않고 자랑할 필요도 없으며 오히려 자랑하면 어색하고 그 가치를 추락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스스로 약하고 부족한 것을 채우신 예수님만 자랑해야 한다. 우리들의 입에는 하나님 자랑하는 이야기, 예수님 자랑하는 이야기, 성령님 자랑하는 이야기, 우리 교회, 우리 담임목사님 자랑하는 이야기, 성도 자랑하는 이야기 그리고 온전히 예수님을 믿어 복을 받은 이야기만 가득해야 한다. 이를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야 복을 받고 병이 나으며 예수님을 믿어야 천국에 가는 거구나 이제 나도 예수님을 믿어야 겠다” 고백하며 교회를 찾아오게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번성하고 더불어 예수님이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성도의 본분이다(갈 6:1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3.01.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31)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4>
  • 힘써 자신의 강함을 자랑치 않고 스스로 약함과 낮아짐만 자랑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사용한 것을 보니 ‘자랑하는 일’은 성령 충만한 성도들에게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자랑하는 것의 그 밑바탕에는 허영과 교만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랑을 하게 되면 누군가와 자신을 견주어 비교하고 저울질하므로 저절로 시기심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설사 자랑하는 사람은 그런 의도와 동기가 없다고 해도 어떤 자랑이든 상대방에게는 절망감 혹은 시기와 질투를 유발한다. 예를 들면, 우리 아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자랑하면 다음 날 옆집 아이의 얼굴이 구겨져 있기 쉽고, 우리 남편이 잘해준다고 자랑하면 그날 저녁 옆집 부부의 다툼 소리를 듣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자랑하는 것은 상대적이고 경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자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듣는 이들 모두에게 ‘공공의 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은 어떠셨는가?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28)고 가르치시며 스스로 높아지는 자랑이 아닌 스스로 낮아지는 섬김을 몸소 실천하셨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스스로 높이는 ‘자기’ 중심이 아닌 먼저 서로를 섬기는 ‘주님’ 중심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 헌신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전 1:31; 고후 10:17)고 말씀했다. 주안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첫째, 스스로의 이름을 내세우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해야 하고(대상 16:10; 시 20:7; 44:8; 105:3), 둘째, 세상의 것 세상의 일에 대해 자랑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자랑해야 한다(롬 15:1; 살전 2:19; 고후 1:14). 셋째, 그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며(갈 6:14) 넷째, 힘써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지 않고 스스로 약한 것과 낮아진 것만을 자랑해야 한다(고후 11:30; 고후 12:5,9; 약 1:9~10). 이처럼 우리는 스스로 약하고 부족함을 고백하고 그 부족함을 채우시는 예수님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들의 입에는 하나님만 자랑하는 소리 예수님만 자랑하는 소리 성령님만 자랑하는 소리 십자가만 자랑하는 소리 교회를 자랑하는 소리 성도들 간에 서로를 높이고 자랑하는 소리 예수님을 믿고 복을 받아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며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됐다는 ‘거룩한 자랑’만이 넘쳐나길 소망한다(요삼 1:2). 김에녹 목사
  • 2022.12.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30)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3>
  • 자기 자랑으로 충만한 삶이 아닌 성령 충만의 삶 살아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무엇보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신실한 성도들은 자랑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각종 광고로 넘쳐나고 있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여기저기 광고가 눈에 띄고 듣고 싶지 않아도 각종 광고의 소리에 묻혀 살아간다. 각종 방송매체를 통한 온라인 광고는 물론이요 거리 곳곳마다 건물마다 현란한 광고로 요란하다. 현시대는 범람하는 광고들에 휩쓸려 사는 ‘광고 홍수의 시대’라 정의할 수 있다. 이런 넘쳐나는 광고는 비단 기업들의 광고 전쟁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각종 인터넷 플랫폼과 사회관계접속망(SNS)을 통해 자신의 외모나 재능 그리고 사생활까지도 당당하게 노출해 광고하는 개인들도 많아졌다. 현시대는 자기를 드러내는 ‘자기 광고의 시대’임에 분명하다. 물론 이런 것이 모두 부정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자극적으로 변질해 가는 것은 우려할 만한 상황임에 틀림없다. 심리학에서 어떤 개인의 심리상태를 측정하는 방법 중에 일정한 시간 동안 그 대상자의 연설 대화 혹은 일정한 길이의 문장에서 ‘나’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그 횟수를 측정하는 조사법이 있다. 이에 따르면 ‘나’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그 심리상태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한 언어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600만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 Hitler, 1889~1945)는 ‘나’라는 단어를 53단어에 한 번씩 사용했고, 그의 동조자였던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 A. A. Mussolini, 1883~1945)는 ‘나’라는 단어를 83단어에 한 번씩 사용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나’로 충만했던 두 독재자가 일으킨 전쟁이 온 세계를 절망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6~21)를 살펴봐도 부자의 언어인 짧은 3개의 절(눅 12:17~19)에 ‘내가, 내’라는 자기중심적 단어가 6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자기중심적 삶의 결과는 과연 무엇일까? 독특하지만 의미심장한 분석을 본적이 있다. 영어에서 ‘죄’를 의미하는 단어 ‘sin’의 중심에는 ‘나’를 의미하는 단어 ‘i’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죄는 자기중심적인 ‘자기 충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죄’의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제일 무서운 우상은 바로 ‘나’라는 우상이다. 성도는 세상 풍조를 따라 ‘자기 충만’으로 살지 말고 말씀을 따라 ‘성령 충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김에녹 목사
  • 2022.11.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독교 설교자 열전
    설교자 예수
  • 신학자 알프레드 가비는 “어떤 주제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주제의 역사를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속 설교자들을 살펴보는 것은 기독교 설교를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들의 삶과 설교를 살펴봄으로써 말씀 기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설교자 열전’을 통해 기독교 역사 속 설교자들의 삶과 설교를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시작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아들 되신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향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선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라는 요한복음의 내용과 맥이 닿아있다(요 1:14).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셨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기도 했다. 기독교의 시작점인 예수님이 기독교 설교의 출발점인 이유가 이것이다. 예수님의 설교 속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수님은 설교자로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아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명확히 알고 계셨다. 바로 복음 전파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눅 4:43). 이와 같은 자신의 임무에 대한 예수님의 인식은 갈릴리 회당에서 처음으로 행했던 설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선포하심으로써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다. 둘째, 예수님의 설교는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청중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셨다. 비유는 예수님의 설교가 가지는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설교 방법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막 4:34). 그것은 비유라는 것이 “다른 방식으로 전달될 수 없는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것을 요구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된 세상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살아갈 것을 요청한다. 그러기에 비유라는 설교 방법을 통해 예수님은 청중에게 일상적인 풍경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도록 인도하셨다.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요청하셨다. 양들을 통해(눅 15:3~10), 처녀들을 통해(마 25:1~13), 누룩(마 13:33)과 동전(눅 15:3~10)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하셨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시며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가르치셨다(요 14:6). 그러기에 예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주께서 내게 이르시기를”이나 “야훼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셋째,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던 대상들은 대부분 일반인이었다. 당시 종교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 중에 예수님의 설교를 청종했던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다. 넷째, 예수의 설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약부터 있어 온 예언자들과 회당의 랍비들이 계속해 온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해석이었다. 다섯째, 예수님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설교를 행하셨다. 복음은 언제 어디에서나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여섯째,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 선포 사역을 제자들에게 일임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조지훈 목사(은평대교구장, 한세대 설교학 겸임교수)
  • 2023.01.06 / 김용두 기자

    다시보는 영산 신학과 목회
    영산의 세계선교
  •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꿈과 비전으로 충만하게 된다(행 1:8). 성령님은 영산에게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세계선교의 꿈을 부어주셨다. 그때부터 영산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은빛 날개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꿈’을 품었다. 그 꿈처럼 영산은 당시 해외 여권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때 이미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전 세계는 주님의 교구입니다.” 웨슬리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영산의 고백은 절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머물렀던 수많은 선교 현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기적의 장소였다. 영산이 세계선교를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된 배경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5월 세계오순절총회를 마친 영산은 100일 동안 18개국, 39개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던 그는 결국 스위스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밑에 놓인 엽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으니 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종이 되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적고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쇠약해졌던 영산의 몸은 이튿날이 되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그때의 체험은 영산의 사역 가운데 세계선교를 항상 강조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영산은 유럽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계 교회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국제기관을 조직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6년 11월 4일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이하 CGI: 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영산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성장에 관한 노하우를 전 세계 교회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부흥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CGI는 설립 이래 2022년 현재까지 한국을 비롯한 100여 개국 이상에서 총 600회 이상 CGI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여기에 전 세계에서 연인원 120만명이 참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계선교와 교회 성장에 이바지한 CGI는 2022년 10월 이영훈 목사를 제2대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하면서 ‘다음 세대의 부흥’을 외치며 제2기 사역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산은 세계선교의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000년 3월 28일 DCEM(David Cho Evangelistic Mission)을 설립했다. 이 기구를 통해 전 세계 선교지와 선교단체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선교 자원의 교류에 힘썼다. DCEM은 교파를 초월해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심어주는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영산은 그 목회 사역 동안에 약 600회 이상의 해외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런 왕성한 사역은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과 열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영산의 선교 사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서구권의 기독교 인구가 서구권의 기독교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기독교 신학이나 선교가 서구권 교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서구권 교회는 갈수록 쇠퇴를 거듭했고, 반대로 비서구권의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영산의 세계선교 사역은 기독교 선교의 주체를 서구권 교회에서 비서구권 교회로 전환하는 데 아주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산은 선교가 ‘순복음’의 최우선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진정한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이고 선교하는 성도가 진짜 ‘순복음성도’(Full Gospel Christian)이다. 교회가 선교를 멈추는 순간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영산 안에 넘쳤던 복음의 확신과 순복음의 영성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하나님 사명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David Yonggi Cho’라는 이름은 안다”라는 말이 수많은 증인에 의해 회자된 것만 보아도 그가 가진 세계선교의 열정과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순복음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나아가 선교하는 삶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선교에 평생을 바친 영산의 삶이었고, 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은 모든 순복음 성도들의 꿈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의 본을 따라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히 12:1). 오늘날 교회가 영산으로부터 반드시 전해 받아야 하는 믿음의 영적 바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교의 바통’이다. 이제 영산의 뒤를 이어 우리도 성령 충만함 가운데 ‘선교 바통’을 이어받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계선교의 꿈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산의 신유 사역 
  •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그의 핵심적인 목회 철학 중 하나였다. 영산은 신유의 기적이 과거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역임을 확고히 믿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으로 값없이 병 고침 받는 것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산이 믿었던 신유의 은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자 ‘아직’, 그러나 반드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영산은 치유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믿는 자의 부활을 보았다. 그래서 영산은 목회 현장이나 부흥회 사역에서도 병 고침을 강조했는데,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질병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거리는 수없이 많다. 영산이 이같이 신유를 강조하게 된 것은 어떤 특정한 치유 신학을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를 ‘신유의 종’으로 만든 것은 그가 처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 경험했던 치유의 하나님 때문이었다.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주님을 만나서 완치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또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 중풍에 걸린 여인이 낫고 걷지 못했던 소년이 일어나 뛰며 듣지 못했던 사람이 듣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영산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과 목회 현실에서 신유의 역사를 분명하게 체험했기에 영산은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의 신유 사역은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영산의 개척교회가 빈민촌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영산은 신유를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적으로 보고 목회 사역에 열심히 적용하고 실행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 신유 사역”(막 16:18)이 복음 전파에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회고할 때도 신유 사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복음에 저항적이던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을 치료받고 은혜를 받아 복음의 말씀을 세상에 나아가 강력하게 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신유 공동체로 보았다. 영산의 신유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믿음이다. 영산은 그 어느 목회자보다도 병 고침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선포했고 신유의 기적도 많이 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성령이 필요에 따라 자신을 통해 은사를 나타내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산 자신이 분명히 받았다고 주장하는 은사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은사’였다. “내가 받은 은사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습니다.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 뒤에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천막교회 시절에 나타났다. 걷지 못하던 소년이 영산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그가 낫는다는 것을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영산이 한 시간이 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자 뭉게구름 같은 믿음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산은 그때의 기분이 마치 지구를 자기 손으로 밀면 지구가 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간증한 바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할 때 영산은 그 소년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영산은 오늘날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영산에 따르면 신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셔서 은사를 베푸시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산은 신유가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분명히 믿었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신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에 자신의 아픈 부분에 손을 얹고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을 통한 성령의 신유 사역은 여의도순복음교회뿐 아니라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신유의 복음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순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유익을 주었다. 앞으로도 영산의 신유 사역의 원리를 계속 연구하고 실행함으로 새로운 신유행전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길 희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문서·방송 선교의 선구자…1988년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창간
  • 영산은 미디어의 활용이 미미하던 시절, 문서 선교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사역에 적용한 선구자였다. 영산은 자신이 가진 뜨거운 선교적 영성을 담아내어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순복음의 신앙이 한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떤 교회보다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서 전도』의 저자 조지 버워는 “기독교 문서는 인쇄된 선교사”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 선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영산은 누구보다도 문서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역에 적용하였다. 1964년 당시 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순복음지』를 발간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78년에 이르러서는 영산의 설교와 칼럼, 성도들의 신앙 간증과 구역 성경 공부 및 교회 소식을 담은 『순복음뉴우스』가 되었다. 이후 『순복음가족신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문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영산은 또한 순복음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잡지 『신앙계』를 창간함으로 문서 선교의 폭을 확장했다. 『신앙계』는 기독교의 대중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양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기독교 잡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대중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신앙계』를 능가하는 잡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앙계』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운동의 건전한 보급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신앙계』야말로 오순절 신앙을 한국교회에 널리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영산의 문서 선교의 열정은 『순복음가족신문』과 『신앙계』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한 이단 종교 단체가 일간 신문을 발간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산은 만약 그 단체에서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일간지 창간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988년 세계 최초의 기독교계 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정부와 사회에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산은 신문사를 설립하는 과정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근거 없는 비난의 목소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복음 실은 일간지 『국민일보』는 매일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땅에 전파하는 발 없는 전도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 정신으로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로서 한국 교계의 대사회적인 발언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 문화의 채널로써 한국 사회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 사명도 이뤄가고 있다. 영산의 『국민일보』 창간은 대한민국 1200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스컴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영산은 문서 선교뿐 아니라 방송 선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영산은 복음 전도의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방송 선교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던 영산은 1966년 라디오 설교와 1979년 컬러TV 방송을 송출했다. 영산의 라디오 설교 방송은 1979년, 1980년 연속, 전국 청취자 애청 프로그램 조사 결과 청취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청취자가 많았다. 이처럼 한국교회 방송 선교의 선구자는 단연 영산이었다. 당시 흑백 TV에 익숙했던 공중파 제작자들이 방송 장비와 시스템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견학을 올 정도였다. 방송 선교는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영산의 방송 선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위성과 인터넷을 활용한 예배와 설교 실황은 각 지성전 및 지교회 설립과 더불어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영산의 방송 선교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KCWC사의 특별 기획으로 주일 예배 실황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필리핀, 남아공 등 25개국에 동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산의 성령 충만의 복음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함께 전 세계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산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 설교뿐 아니라 설교를 전달하는 매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영산의 설교와 성령 충만의 영성은 멀티미디어 사역 시스템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이러한 사역이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복음의 메시지는 불변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영산의 멀티미디어 사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유훈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9.23 / 김용두 기자

    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선교 뉴스
    김도훈 목사, 미국 선교사로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22일 주일 4부 예배 후 대성전에서 미국으로 파송되는 김도훈 목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안수기도했다. 이영훈 목사는 “미국이 전해준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떠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순종해 교회를 부흥시키고 지역을 복음화 하는데 헌신할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기도했다. 김도훈 목사는 2003년 6월 우리 교회 교역자로 사역을 시작해 대학청년국 카리스선교부장, 금옥성전 담임 등을 역임했다. 미국에서는 시카고에 위치한 순복음중앙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한다.
  • 2023.01.26 / 오정선 기자

    전영훈 선교사, 필리핀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6일 성전비서실에서 필리핀으로 파송되는 전영훈 선교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전 선교사는 필리핀에서 교민 대상인 일로일로제일좋은교회와 현지인 대상 리잘순복음교회를 동시에 맡아 사역하게 된다.
  • 2022.11.11 / 오정선 기자

    순복음일본총회, 영산수련원서 2022년 총회 진행
  • 순복음 열정으로 ‘일본 일천만 구령’ 전진** **이영훈 목사 성령대망회와 세미나 인도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순복음일본총회 2022년도 총회가 17~19일 경기 파주 영산수련원에서 진행됐다.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17일 오후 성령대망회와 18일 오전 세미나를 인도하고 ‘일본 일천만 구령’ 위해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격려하고 응원했다. 이영훈 목사는 17일 성령대망회에서 ‘성령을 받았느냐’(행 19:1~7)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일본 교회에 불같은 성령이 일어나 권능을 받고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되길 기대한다. 10년 동안 일본에 1만 교회가 세워질 것을 기대하며 이 일에 순복음 선교사들이 앞장서 주길 바란다. ‘일본 일천만 구령’이 머지않아 이뤄질 것을 믿는다”라고 강조했다 18일 오전 이영훈 목사는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 오순절 성령 운동’는 주제로 세미나 강의를 이끌며 “순복음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에서 완성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라고 말했다. 이영훈 목사는 세미나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과정을 교회 개척기(1958~1961), 성장발전기(1961~1973), 세계화 시기(1973~현재)로 나눠 조용기 목사의 목회 철학 ‘삼중축복, 오중복음, 4차원영성의 적용’을 설명했다. 이영훈 목사는 “조용기 목사님의 삼중축복 메시지는 절망에 처해있던 한국사회에 꿈과 희망을 전했고 십자가 대속의 결과로 나온 삼중축복은 오중복음으로 확대돼 전파됐다”며 “십자가 대속을 통해 이미 이뤄진 삼중축복·오중복음이 오늘날 삶속에 적용되려면 우리의 생각 꿈 믿음 말이 절대긍정으로 바뀌어야 한다. 선교사들이 일본 성도들에게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을 전하는 주역이 되어 조용기 목사님의 목회 신앙을 계승해 나가길 기도한다”고 말했다. 이번 총회에 참석한 순복음일본총회 선교사들은 18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묘지의 조용기 목사 산소를 찾아 추모예배를 드리고 조용기 목사 기념관도 둘러봤다. 같은 날 저녁에는 찬양예배가 열려 사단법인 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동아시아선교회 전규원 회장과 부회장단이 참석해 일본 복음화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이 밖에도 총회에서는 목사안수식 및 총회 보고, 각 지방회 모임, 실행위원회 등이 진행됐다. 순복음일본총회장 시가끼 시게마사 목사는 “조용기 목사님이 강조하신 일천만 구령 비전을 위해 일본 주요 도시마다 순복음교회가 세워졌다. 순복음 사명으로 일본 복음화의 열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 2022.10.21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조대희 선교사(몽골)
  • 날라이흐와 거르덕 순복음교회 통한 성령의 역사 현지인 목회자 양성으로 복음 전진 나서 다음세대·목회자 지원 위한 센터처치 설립 추진 1990년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1991년 몽골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새롭게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몽골은 칭기즈칸의 후예로 지금도 13세기 당시의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도시 사람들 모습도 볼 수 있어 21세기와 13세기가 공존하는 사회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저희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32㎞ 떨어진 날라이흐라는 도시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구소련 연방공화국 시절에 질이 좋은 석탄이 나오는 탄광촌 작은 마을로 시작해 이제는 한국의 분당, 일산과 같은 곳으로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지역민 대부분은 울란바타르로 매일 출퇴근하는 사람들이며 그 수가 계속 늘고 있는 상황입니다. 날라이흐는 28개 교회가 있는 축복받은 지역입니다. 지역 관할구청이 종교에 대해 관용적인데다 최근에는 지역교회 연합으로 관할구청과 협업해 추진하는 일들이 많아져 좋은 관계 속에서 사역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날라이흐순복음교회는 올해로 설립된 지 14년이 지났습니다. 작은 아파트 거실에서 시작된 교회는 비밀경찰과 지역 관공서로 신고가 들어가면서 전통 게르로 교회를 옮겼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의 교회 건물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처음 시작한 사역은 예배와 기도사역(새벽기도) 그리고 한 장로님의 후원으로 시작된 어린이 무료급식 사역이었습니다. 어린이 무료급식은 몇 년 후 지역 학교, 이어 어린이 유치원 사역으로 변경 돼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올 9월 신학기에 건물주의 갑작스런 계약 해지 통보로 신학기 어린이를 받아야 하는 기간에 쫓겨나 거리에 나앉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임시 건물에서 유치원을 여는 경험을 하게 됐습니다. 이번 일로 ‘하나님께 입을 크게 벌려 유치원 건물을 구입 해야겠다’는 마음을 주셔서 현재 이를 추진 중입니다. 유치원은 현재 원아 18명, 방과 후 학교 17명 총 35명 아이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청소년 문화 공간으로 작은 카페 사역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어려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잘 견디고 이제 이곳은 날라이흐순복음교회의 나라 목사 부부가 카페를 넘겨받아서 사역을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날라이흐에서 8㎞ 떨어진 거르덕 지역에 거르덕순복음교회를 개척한지도 7년이 지났습니다. 유목민으로 형성된 작은 게르촌에서 시작된 교회는 예배 사역에 이어 ‘실로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게르촌은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는 공중샤워장이 한 곳도 없습니다. 저희가 공중샤워장을 건축한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지역민 모두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재정을 모아 건축하려했는데 코로나에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가 몽골에도 닥치면서 건축 회사를 통해 건축 하는게 어려워 직접 나서기로 했습니다. 지난 5월부터 10월까지 모든 재정을 동원해 공중샤워장을 지었는데 현재는 70% 정도 지어진 상황입니다. 부족한 재정은 여의도순복음분당교회의 지원으로 마무리 중에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루 빨리 ‘실로암 프로젝트’가 완공 돼 지역민들에게 따뜻한 물을 공급하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이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영적 생수인 복음도 함께 전해져 열린 문의 복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지난 10월 2일 날라이흐·거르덕순복음교회에서 헌신하는 나랑게를·에르뜬바타르 사역자가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현지인 목회자에게 교회를 위임하고, 저는 새롭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이루기 위해 울란바타르 시내에서 다음세대와 몽골 목회자 지원 그룹을 운영할 수 있는 센터처치를 설립하고자 합니다. 이곳에서는 앞으로 몽골 사역에 필요한 다양한 사역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첫 번째 문서사역입니다. 신학교 교재와 각종 필요한 책을 몽골어로 번역하는 사역입니다. 둘째는 몽골 다음세대 세우기와 회복·중보기도 사역입니다. 몽골은 청소년의 80%가 학교나 가정, 친구들 관계에서 왕따를 겪은 경험이 있습니다. 이들의 상한 마음 회복은 물론 청소년들이 바로 세워질 수 있도록 중보기도 사역에 나설 겁니다. 셋째로 몽골 목회자 지원 그룹 사역입니다. 이 사역은 몽골 전역을 다니면서 목회자 보수 및 성경 교육을 집중적으로 하는 사역입니다. 교회 설립과 동시에 센터 사역을 위해 많은 기도와 재정적 지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러한 사역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가운데 또 하나님의 시간에 잘 이뤄질 수 있도록 성도님들의 중보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에르뜨네 전도사(간경화, 간암1기)의 회복과 막내딸 인느넬(중증뇌성마비)의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해주시길 요청드립니다.
  • 2022.12.02 / 오정선 기자

    세노 미츠키 목사(일본)
  • 크리스천의 비율이 1%도 안 되는 나라, 일본
    항공사 크리스천 기도모임으로 시작된 순복음나리타교회 순복음 신앙으로 ‘일본 일천만 복음화’ 위해 전진 할렐루야, 순복음 가족 여러분! 일본 일천만 영혼의 구원을 위해 언제나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음이 많이 자라지 못한 일본 땅(크리스천 비율 0.6%)에서 순복음의 선교사들이 40년에 걸쳐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지켜온 것은 성도 여러분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순복음 가족 여러분의 기도로 순복음선교회 순복음일본총회(총회장 시가끼 시게마사 목사)소속 순복음 교회는 지금도 성령의 불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40년 전 조용기 목사님이 일본 땅에 뿌리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복음의 씨가 90개 교회로 자라났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곳은 도쿄 국제공항이 있는 나리타입니다. 이곳에는 1년에 3000만명이라는 가장 많은 참배자가 방문하는 나리타산 신쇼지라는 절이 있습니다. ‘절과 함께 발전해 온 300년’이라 표현할 만큼 나리타는 이 절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더 기도 없이는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 나리타입니다. 25년 전, 대한항공 및 아시아나 항공 소속 크리스천이 모여 기도 모임을 결성해 순복음치바교회(고 김재현 목사)에서 모임을 이어오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계기가 돼 개척된 교회가 바로 순복음나리타교회입니다. 순복음나리타교회는 현재 한국인과 일본인을 중심으로 9개국 성도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예배는 일본어 및 한국어로 드려지고 있으며, 모든 예배에서 영어로 통역이 되면서 국제 교회가 됐습니다.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인해 나리타공항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공항 관련 업무 종사자였던 많은 한국인 성도들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됐고 저희는 2년 반 동안 훈련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으로 예배의 자리를 지키자 지금은 이전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로 회복됐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저희는 나리타 지역을 중심으로 순복음 교회가 없는 치바현 동부 지역 100만명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에 힘쓰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감염 확대 방지를 위해 대면 예배 인원수가 한정돼 한때 참석자가 감소했지만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와 지혜를 주셔서 순복음 신앙을 가진 자들을 위해 온라인 선교가 시작됐습니다. 가장 먼저 코로나로 인해 드리지 못했던 새벽기도회와 철야기도회를 줌(Zoom)을 통한 온라인으로 바꿔 진행했습니다. 온라인 사역은 전 세계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해 평균 70여 명이 모였습니다. 평소 대면예배 참석자수를 생각해보면 이는 불가능한 인원이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일은 온라인 사역을 시작한 첫 날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일예배 온라인 생방송(YouTube Live)의 경우는 100여 명이 참석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는 등록 성도 70명, 출석 성도 30여 명이던 일본의 작은 교회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숫자였습니다. 전세계에서 일본은 기독교 인구 비율이 가장 적습니다. “두 J의 복음화는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듯 일본(Japan)과 이스라엘(유대인·Jewish)의 복음화는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귀환 정책(아리아 운동)을 통해 100만이 넘는 크리스천(6%)인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일본뿐입니다. 일본 복음화를 위해 계속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9월 도쿄에서 열린 조용기 목사님 추모예배에서 이영훈 목사님은 강렬한 순복음 메시지를 전해주셨습니다. 일본은 반드시 부흥할 것입니다. 정말 작고 볼 품 없는 저이지만, 저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믿음으로 열심히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일본 정부는 지난 10월 11일부터 코로나 관련 입국 규제를 완화하고 개인 관광을 허용했습니다. 여행으로, 비즈니스로 일본 나리타 공항을 이용하신다면 꼭 순복음나리타교회에 오셔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교회의 기도제목을 공유합니다. ①치바 동부지역 100만명을 섬기는 교회가 되도록 ②300명의 예배자가 모이는 교회가 되도록 ③기도를 토대로 봉사와 전도하는 교회가 되도록 ④찬양과 기쁨, 감사가 넘치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중보기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022.11.04 / 오정선 기자

    김주영 선교사(콜롬비아)
  • 보고타를 중심으로 순복음교회 세워 현지 복음화에 헌신
    도둑 두 번 침입해 선교비 전부 털려 큰 낙심 그러나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 깨달아 주님 주신 새 비전 ‘교회 개척 넘어 소외 계층 섬김’ 할렐루야! 남미 살사와 커피의 나라 콜롬비아에서 현지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김주영 선교사입니다. 저는 2016년 11월 콜롬비아에 도착해 2년 여 준비과정을 거쳐 2018년 4월 수도인 보고타에 콜롬비아순복음교회를 창립하고 지금까지 주님께서 명령하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콜롬비아에 도착한 후 사택에 두 번이나 도둑이 침입해 사역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선교비 전부를 털려 낙심이 컸지만 그 일로 ‘선교는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한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분들이 저희를 찾아오셨고 그분들로 인해 성전과 사택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집을 임대 계약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있음을 고백하게 됐습니다. 선교지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시는 이영훈 목사님과 모교회 성도님들의 중보기도의 힘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보고타에 세워진 콜롬비아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베네수엘라와 가까운 리오아차 시에 현지인 교역자 가정을 파송해 리오아차순복음교회를 세우고 복음증거와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전진기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과히라 주에 위치한 리오아차는 베네수엘라 국경에 인접한 마이카오를 거쳐 베네수엘라 난민들이 일자리를 찾고 몰려드는 도시로 난민촌들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또 콜롬비아순복음교회는 성도 개개인의 신앙성장을 우선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초점을 맞춰 사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린 후에는 성도들과 주일 말씀을 토대로 나눔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나눔 사역을 통해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희 사역 비전은 교회 개척을 넘어 현지 소외계층을 향한 섬김입니다. 지난 선교대회 때 한국에서 특수선교(장애인)를 하시는 목회자를 만나 교제하면서 콜롬비아에서도 접목할 수 있는 귀한 사역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역지로 돌아온 후 이러한 비전을 현지 성도들과 공유했는데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섬김 사역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올해에는 사단법인 신청을 위한 서류준비를 진행하고 주변 장애우시설과 가정을 방문해 장애우와 장애우 가정들이 겪는 어려움을 듣고 공감하는 시간을 갖도록 했습니다. 내년에는 사역의 구체적인 계획과 프로젝트를 준비할 예정입니다. 또한 필요한 인적 및 물적 재원을 확보하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특수 선교에 사용될 공간(1000평)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기도하며 나아가려 합니다. 모교회 성도님들의 관심과 중보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2022.09.30 / 오정선 기자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
    김영애 선교사(스페인)
  • - 경제 침체로 실업자 증가, 성도들의 안정된 직장을 위해 - 추운 겨울 가스 부족으로 인해 난민(전쟁, 정치)들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 현지인 사역자들과 가족의 건강, 사역을 위해
  • 2023.01.27 / 오정선 기자

    김열매 선교사(D국)
  • - 새해부터 시행되는 개정 종교법으로 인해 사역이 위축 되지 않도록 - 교회 지도자와 성도가 연합될 수 있도록 - J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된 삶으로 이웃 전도에 나서도록 - 모든 지도자들의 성령 충만을 위해
  • 2023.01.06 / 오정선 기자

    이요한 선교사(아르헨티나)
  • - 사역자들의 성령 충만과 영적 리더십을 위해 - 교회 건축 등 부지 확장을 위해 - 지교회의 사역과 지역 사회 복음화를 위해
  • 2022.12.23 / 오정선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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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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