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홍승원 목사(종로중구대교구장) - 지성소의 문이 열렸다
  • 지성소의 문이 열렸다 홍승원 목사(종로중구대교구장) 레위기 16장은 레위기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본문이며 내용적으로도 레위기 전체의 핵심이다. 이 장이 다루고 있는 대속죄일은 히브리어로 ‘욤키푸르’이다. ‘욤’은 ‘날’, ‘키푸르’는 ‘덮다, 가리다’를 뜻하는 ‘케페르’에서 나온 말이다. 죄를 덮고 가린다는 뜻에서 속죄의 날, 대속죄일이라 부른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자신의 죄를 위해 수송아지를 잡고 백성의 죄를 위해 염소 두 마리를 준비했다. 먼저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향 연기로 가득 채운 지성소에 들어가 언약궤 뚜껑, 곧 속죄소 위에 일곱 번, 그 앞 바닥에 일곱 번 피를 뿌렸다. 이어 염소 한 마리를 잡아 같은 방식으로 지성소와 성소와 번제단을 피로 정결하게 했다. 하나님의 집 전체를 일 년에 한 번 대청소하는 것이다. 남은 염소 한 마리에는 두 손을 얹어 온 백성의 죄를 고백한 뒤 진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단절된 광야로 내보냈다. ‘아사셀 염소’는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백성의 죄가 떠났음을 눈에 보이게 선언하는 상징이었다. 한편 백성은 성회로 모여 스스로를 괴롭게 하며―유대 전통은 이를 금식으로 이해했다―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성경은 이날을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 불렀다. 죄가 사함받아야 참된 안식이 오기 때문이다. 대속죄일은 예표이고 그림자다. 원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이다. 일곱 번 뿌려지던 염소의 피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되었고, 영문 밖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한 아사셀 염소는 골고다에서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 이는 옛 언약의 예표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인 동시에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는 복음이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대제사장만 들어가던 곳에 이제 누구든 들어간다. 일 년에 하루 들어가던 곳에 이제 아무 때나 들어간다. 새벽에도, 낮에도, 밤에도, 365일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매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겸손히 붙드는 것이다. 이 놀라운 구원은 공로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고 덮지 못할 것이 없으며 끝이 없다. 대속죄일의 복음이 우리의 삶 가운데 충만하기를 소망한다.
  • 2026.07.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최진용 목사(강서1대교구장) - 잠시 멈출 줄 아는 사람이 사람을 얻습니다
  • 강물은 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바다에 이르고 깊은 숲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생명을 품습니다. 사람의 말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많은 말보다 잠시 멈추는 침묵이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말이 많아질수록 관계가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처를 주고받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가장 깊은 아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거창한 사건이 아닙니다.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내뱉은 한마디,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한 성급함, 이해하기보다 먼저 반응하려는 마음이 서로의 마음에 작은 균열을 만들곤 합니다. 제퍼슨 피셔의 『잠시 멈춤』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대화의 목적은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논쟁에서 이길 수는 있어도 사람을 잃을 수 있습니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있어도 상대의 마음까지 얻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대화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연결입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에 말씀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하나님께서는 먼저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시 반응하기보다 잠시 멈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분노는 가라앉고 상처는 이해로 바뀌며 닫혔던 마음은 다시 열리기 시작합니다. 목회의 길을 걸으며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말했는가를 더 오래 기억합니다. 논리보다 사랑을 기억하고, 정답보다 진심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진리는 사랑이라는 옷을 입을 때 비로소 사람의 마음에 스며듭니다. 예수님은 넘어지고 실패한 사람들을 정죄하기보다 다시 일으켜 세우셨고, 상처 입은 영혼들을 긍휼로 품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권위는 큰 목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랑과 진실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목소리가 아닙니다. 더 날카로운 논쟁도 아닙니다. 잠시 멈추어 상대의 말을 들어 줄 수 있는 마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성숙함, 그리고 사람을 이기기보다 사람을 얻으려는 사랑입니다. 말은 칼이 될 수도 있고 씨앗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급한 한마디는 평생의 상처를 남기지만 사랑으로 건네는 한마디는 메마른 마음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 줍니다. 그러므로 기억해야 합니다. 대화의 목적은 승리가 아닙니다.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을 얻는 길은 언제나, 잠시 멈추어 사랑을 선택하는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 2026.06.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윤호근 목사(은평대교구장) - 화목, 행복의 다른 이름
  • 1938년에 시작된 미국 하버드 의대의 ‘성인 발달 연구’는 인간의 행복과 건강의 비결을 밝히기 위한 세계 최장기 연구 가운데 하나이다. 연구진은 하버드 대학생들과 보스턴 빈민가 청소년들, 총 724명의 삶을 수십 년 동안 추적하며 관찰했다. 그 결과 행복하고 건강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재산이나 명예, 학벌이 아니라 ‘좋은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50세 무렵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만족한 사람들이 80세에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성경은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고 증언한다(롬 3:25). 여기서 ‘화목제물’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은 구약의 속죄소, 곧 법궤 위의 ‘시은좌’(법궤의 뚜껑)를 의미하기도 한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어린양의 피를 뿌려 이스라엘의 죄를 사함 받았던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친히 피 흘려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다. 그 보혈의 공로로 원수 되었던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화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본질은 단순한 종교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를 씻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는 것,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행복한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영혼과 육체, 그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는 ‘샬롬(Shalom)’의 복을 받게 된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풍요 속에서도 외로움이 깊어지고 있다. 가족 안에서도 대화가 단절되고 교회 안에서도 상처와 오해가 생긴다. 사회는 갈등과 분열로 점점 메말라가고 있다. 이런 시대 속에서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기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화해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상처보다는 사랑을 선택하고 미움보다 용서를 선택하며 정죄보다 회복을 선택해야 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하나님과 화목할 때, 그리고 사람과 화목할 때 참된 행복이 시작된다.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 2026.06.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116) 사도행전의 설교에 관한 가르침 ⑪
  • 이번 호에서는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함으로써 배편으로 로마로 압송되는 상황과 로마에 도착해서 유대인들과의 만남을 가졌을 때의 바울의 설교(연설)를 살펴보기로 한다. 8) 상황: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압송되는 과정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생사의 고비를 넘을 때(27:13~44) (1) 대상: 배 안의 사람 276명(37절) (2) 바울의 위로의 말(21~26절)과 상륙 전날 음식 먹기를 권하는 말(33~36절) ① 내 말대로 그레데에서 출항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21b절) ②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22절). ③ 환상 설명 -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3~24절). ④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절). ⑤ 표류 열나흘 째 날, 바울이 배 안 사람들에게 음식 먹기를 권함: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34절). (3) 결과: 바울이 탄 배가 2주 동안 표류하다가 멜리데섬에서 파선했지만 그의 예언대로 배 안의 276명 모두 구조됨(38~44절) 9) 상황: 로마 도착 사흘 후 바울이 유대인 고위층들을 청해 자기 상황을 설명(28:16~20) (1) 대상: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17a절) (2) 바울의 자기 상황 설명(17b~20절)과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21~25a절) ①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이나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다고 설명(17b절) ②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18~19절). ③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20절). ④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바울에 대한 말을 듣지 못했으니, 날짜를 정해 그의 사상이 어떤지 듣자고 함(21~23a절) ⑤ 그들이 정한 날에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23절). (3) 결과: ①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짐(24~25a절) ② 이에 대해, 바울은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25b절; 사 6:9~10)라고 하면서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28절)라고 선언함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6.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15) 교회 창립 68주년 기념 “사도행전적 교회”
  •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8주년을 맞게 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조용기 목사님의 삼중축복, 오중복음, 4차원의 영성 그리고 이영훈 담임 목사님의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 작은 예수의 영성과 섬김의 제자도를 통해 오래 전부터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위치에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있기까지 수많은 성도님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수고와 헌신에도 감사드립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무성하고,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일이 일상화 된 이 때에, “희망의 70년”을 넘어 그 이후까지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즉 “사도행전적 교회”로 재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첫째로,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입니다. 교회가 탄생한 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결과였습니다. 사도들뿐 아니라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자 놀라운 은사들이 나타나고 성령의 열매가 삶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말씀으로도 충만한 교회입니다. 사도들의 성령 충만한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반응했습니다(행 2:37). 그 결과로, 하루에 삼천씩(행 2:41), 오천씩(행 4:4) 회개하고 침례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늘 기도하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구하는 교회입니다.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쓰더라.”(행 1:14, 2:42)라는 구절은 사도행전적 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말해 줍니다. 교회가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행 4:24) 기도할 때 “모인 곳이 진동”하고,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함을 받는(행 4:31)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넷째로, 표적과 이사가 넘치는 능력 충만한 교회입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었을 때 병자들이 고침 받고, 귀신이 쫓겨 가는 놀라운 기적이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의 사역을 초대교회가 성령 안에서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다섯째로, 땅 끝까지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 구원의 복음이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해 나갔습니다. 여섯째로, 그 어떤 고난과 박해에도 넘어지지 않고 승리하며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초대교회의 시작부터 흑암의 세력들은 교회를 파괴하고자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공격해왔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성도들의 굳센 믿음으로 이를 이겨내고 더욱 부흥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일곱째로, 공동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사도들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은 무리들이 집과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와 온 성도들과 나눔으로써 “가난한 사람이 없게 되는”(행 4:33~35) 경제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도행전 교회의 주요 특징이 지난 68년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사역에서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사역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날 때 미래의 모습이 더욱 영광스럽고 찬란하게 될 것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8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6.05.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14) 사도행전의 설교에 관한 가르침 ⑩
  • 이번 호에서는 베스도 총독으로부터 바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아그립바 왕이 그를 심문하는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7) 상황: 아그립바 2세 왕의 심문 시 바울의 자기 “변명”(26:1~32) (1) 대상: 아그립바 왕, 왕비 버니게, 천부장들, 시중(市中) 높은 사람들, 베스도 총독(25:23) (2)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바울의 자기 변명(26:2~23) ① 우호적인 인사(2~3절) ② 바울의 젊은 시절을 유대인들이 다 알고 있음(4~8절) - 나를 고발한 자들도 “내가…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라고 할 것(5절) - 지금 심문 받는 것도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6~7절) -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8절) ③ 바울의 그리스도인 박해 설명(9~11절) -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함 ④ 다메섹 도상 체험 설명(12~18절) -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감(12절) - 정오에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둘러 비추자 일행이 다 땅에 엎드러지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는 소리가 들림(13~14절) - 내가 “주님, 누구시니이까?”라고 여쭙자, 주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심(15~18절) ⑤ 바울의 전도 사역과 체포 과정 설명(19~23절) -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순종하여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 자” 함(19~21절) -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증언하는 것: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22~23절) (3) 결과 ① 아그립바 왕: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28절) ② 바울: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29절) ③ 왕, 총독, 버니게, 함께 앉은 사람들: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30~31절) ④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32절) 김호성 목사(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담임)
  • 2026.04.1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91) 종교개혁㉛
  • 스위스의 종교개혁 II - 칼뱅과 제네바 자신의 성직록을 포기하고 개신교 진영에 가담하기 전, 두 가지 사건이 칼뱅의 결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첫 번째 사건은 지난 호에서 살펴본 1533년 니콜라 코프 사건이었다. 두 번째 사건은 르페브르를 방문한 일이었다. 르페브르는 개혁을 이야기하면서도 끝까지 기존 교회 안에 머무르려 했다. 칼뱅은 그를 만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낡은 교회 체제 안에서 진정한 개혁이 가능한가? 기존 교회에 계속 복종하는 것이 오히려 복음의 개혁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가? 결국 칼뱅은 성직록을 포기했고 개신교로 개종하게 됐다. 그는 더 이상 중간 지대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개종한 칼뱅에게 운명의 도시 제네바는 처음부터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고자 했다. 이 무렵 제네바는 정치적 격변 속에 있었다. 전통적으로 제후 주교와 사보이 공작의 권세 아래 있던 제네바 시민들은 종교적·정치적 자유를 얻기 위해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이를 위해 스위스 동맹의 도시들과 관계를 강화했다. 그중에서도 1528년 이미 개신교 개혁을 받아들인 베른은 제네바의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후원 세력이었다. 제네바 시민들 가운데 이처럼 스위스 동맹을 지지하던 이들을 ‘에드그노’라고 불렀다. 이들은 처음부터 개신교 신앙을 위해 일어선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더 절실했던 것은 사보이 공작과 제후 주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베른과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개신교 개혁 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 제네바의 정치적 독립운동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된 셈이다. 이 점에서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신학적 논쟁에서 출발한 루터의 개혁과 중요한 차이가 있다. 1532년 이후 파렐을 비롯한 개신교 설교자들이 제네바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사와 교황권의 남용을 비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새로운 교회를 주장했다. 베른의 후원과 시민들의 지지 속에서 분위기가 점차 개신교 쪽으로 기울어지는 가운데 1535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 논쟁이 거세지면서 제네바의 미사는 중지되었고 성직자들에게는 새로운 복음적 신앙을 받아들이거나 도시를 떠나라는 선택이 주어졌다. 그리고 1536년 5월 25일 제네바 시민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법에 따라 살며 교황권의 남용을 폐지하겠다고 서약함으로써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미사는 중지되었지만, 새로운 예배와 교리 교육, 권징과 시민의 삶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제네바에는 개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도시 전체를 말씀 위에 세울 신학자가 필요했다. 바로 그때 칼뱅이 제네바에 도착했다. 사실 그는 제네바를 목적지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삶을 위해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길이 전쟁으로 막히자 잠시 들르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1536년에 출판한 『기독교강요』를 통해 개신교 신앙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던 칼뱅의 도착은 단순한 우연으로만 보기 어려운 절묘한 사건이었다. 칼뱅은 바로 그 당시 제네바가 절실히 필요로 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시각에서 볼 때 칼뱅이 제네바를 이끌었는지, 제네바가 칼뱅을 이끌었는지 곱씹어 보는 묘미가 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6.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90) 종교개혁㉚
  • 스위스의 종교개혁 II - 장 칼뱅 마르틴 루터가 면벌부 문제를 계기로 종교개혁의 문을 열었다면 장 칼뱅은 루터와는 다른 길을 걸으며 종교개혁의 또 다른 중심 인물이 되었다. 칼뱅의 개혁은 수도사나 신학 교수로서가 아니라 인문주의 교육과 법학 훈련을 받은 젊은 지식인으로서 성경을 깊이 읽고 교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었다. 칼뱅은 1509년 프랑스 북부 누아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 행정 관련 일을 했는데 그 영향으로 칼뱅은 어려서부터 교회 및 학문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1523년 열네 살의 칼뱅은 파리로 유학을 떠나 라 마르슈 콜레주와 몽테규 콜레주에서 라틴어와 철학, 논리학 등을 배웠다. 당시 프랑스에는 에라스무스주의의 영향 아래 성경 원전과 고전 문헌을 새롭게 읽으려는 학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칼뱅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경과 고전 문헌을 읽고 해석하는 법을 익혔으며, 이는 훗날 그의 종교개혁 사상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 점에서 칼뱅은 수도원과 신학 강단에서 죄와 은혜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던 루터와 구별된다. 칼뱅은 열여덟 살 무렵 오를레앙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법학자의 길을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다른 질문이 싹트고 있었다. 교회는 과연 성경이 말하는 교회인가.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가. 당시 프랑스에는 종교개혁 운동이 전파되고 있었지만, 그것을 억압하려는 움직임도 강해지고 있었다. 칼뱅은 이 긴장 속에서 종교개혁 사상에 심취해 갔다. 칼뱅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회심이 일어난 것도 이때쯤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심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를 통해 자신을 복종하게 하셨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회심은 뜨거운 감정의 체험이라기보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생각과 삶의 방향이 바뀌는 사건이었다. 그는 중세 가톨릭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성경 중심의 구원 이해로 나아갔다. 프랑스에서 종교개혁 사상이 강하게 억압받던 1533년 니콜라 코프 사건이 터졌다. 코프는 파리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개신교 복음주의를 옹호하는 연설을 했고, 이 일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칼뱅도 박해의 위험에 놓였고 결국 파리를 떠나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칼뱅은 스위스는 물론, 이탈리아, 독일 등을 다니며 여러 종교개혁자와 교류할 수 있었고 이러한 유랑의 시간 속에서 그의 종교개혁 사상은 더욱 분명해졌다. 1536년 칼뱅은 바젤에서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간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이 책은 프랑스 개신교 성도들이 무정부적 재세례파나 과격한 이단으로 오해받는 상황에서 그들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프랑스 왕에게 변증하고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쓰였지만 곧 종교개혁 신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핵심을 명료하게 설명하였다. 훗날 제네바의 목회자로서 종교개혁을 이끌어가기 전부터 칼뱅은 성경 말씀과 교회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 젊은 학자였다. 아직 본격적인 개혁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때론 광장의 외침으로 시작되기도 하지만 책상 앞에서 성경을 읽는 한 젊은이의 조용한 순종 속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5.2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89) 종교개혁㉙
  • 스위스 종교개혁 - 그 외 츠빙글리의 개혁과 죽음 츠빙글리의 개혁은 예배 개혁이나 성만찬 논쟁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개혁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 세례의 의미 그리고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의 확산 속에서 더 큰 긴장과 갈등을 낳았고 마침내 그의 생애 마지막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맞이하게 됐다. 츠빙글리는 신앙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가 바로 서야 할 뿐 아니라, 그 믿음이 공동체의 삶과 사회의 질서 속에서도 나타나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세속 정부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공적 권위로서 평화를 지키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일에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츠빙글리 개혁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츠빙글리는 더 급진적인 개혁자들과 부딪히게 됐다. 그들은 교회가 국가 권력과 가까워져서는 안된다고 보았고 믿음을 스스로 고백한 사람들만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차이는 세례 문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츠빙글리는 유아세례를 인정했지만 재세례파는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보며 믿음의 고백을 재확인하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갈등은 단순히 세례 방식의 차이만이 아니었다. 교회란 무엇인가, 또 교회와 사회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취리히 시의회는 재세례파를 도시 질서를 흔드는 세력으로 보았고 결국 강하게 탄압했다. 그 과정에서 재세례파는 다른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됐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이 로마가톨릭과의 갈등만이 아니라 개혁 진영 안에서도 깊은 긴장을 안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성 갈렌, 베른, 바젤 같은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모든 지역이 같은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도시는 개혁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가톨릭 편에 선 도시들도 있었다. 이렇게 스위스는 신앙의 차이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는 가운데 점점 더 큰 긴장 속으로 빨려들었다. 츠빙글리는 개혁을 위해 도시들 사이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보았고 종교개혁은 점차 신학 논쟁을 넘어 현실 정치적인 문제와 맞물리게 됐다. 1529년 한 차례 충돌은 가까스로 진화했지만 결국 1531년 제2차 카펠전쟁이 일어났다. 츠빙글리는 종군목사로 전장에 나갔다가 10월 11일 생을 마감했다. 츠빙글리의 죽음이 곧 스위스 종교개혁의 끝은 아니었다. 그의 뒤를 이어 하인리히 불링거가 개혁을 더 안정되게 이끌었다. 그러나 교회를 새롭게 하려 했던 개혁자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은 당시 종교개혁이 얼마나 치열한 현실 속에서 진행되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츠빙글리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신앙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어떻게 세상 속에서 책임 있게 드러나야 하는가. 츠빙글리는 완전한 답을 남기진 못했지만 그 어려운 문제를 끝까지 붙들고 씨름한 개혁자였다. 그는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삶과 사역은 스위스 종교개혁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4.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뿌리깊은 순복음
    (173)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6>
  • 자기 유익 내려놓고 이웃의 유익 먼저 살피는 것이 참된 사랑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성경에서 ‘구한다’는 단어는 현재형으로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자기의 세력과 소유를 쌓기 위해 쉬지 않고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흔히 이기심 또는 이기주의라고 부른다. ‘구한다’는 원어 ‘제이테오’는 ‘애쓴다’, ‘찾아 다닌다’로도 번역된다. 이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맹렬하게 추구하는 모습을 뜻한다. 보통 이러한 사람을 ‘이기주의자’ 혹은 ‘얌체’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자기의 것을 구하기 위해 온갖 잔머리와 잔재주를 부리는 사람치고 하나님께 크고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익만을 좇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마음을 귀하게 보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데 몰두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유익에는 점점 무관심해진다는 점이다. 이처럼 자기의 유익만 구하려는 마음은 너무도 쉽게 남에게 해를 입히는 마음으로 악하게 성장해 간다. 결국 그것이 심해지면 남은 망해도 자기만 잘되면 된다는 이기적이고 사악한 마음이 그 인생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되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 되어 가며 도둑이나 깡패, 심지어 살인자까지 될 수 있는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인물이 바로 구약에 등장하는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이다. 아합은 나봇의 아름다운 포도원을 탐냈으나 나봇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이라며 거절하였다. 아합은 속이 상해 식사도 거른 채 누워 버렸다. 이를 본 아합의 아내 악녀 이세벨은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에게 주었다. 아합과 그 아내 이세벨은 전형적으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랑 없이 자기 유익만 구하는 자를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신다. 결국 아합은 전쟁터에서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맞아 비참하게 죽었고, 그의 피는 개들이 핥았다. 이세벨 또한 창에서 던져져 죽고 그 시체는 개들의 먹이가 되었다. 잘될 것 같았으나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결말을 맞은 것이다.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거짓과 욕심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자는 규모가 크든 작든 아합과 다를 바 없다. 참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내려놓고 이웃의 유익을 먼저 살피는 데 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셨다.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 모두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도리어 이웃의 유익을 구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6.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72)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5>
  • 사랑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거룩한 초대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이런 내용을 전달한 배경을 살펴보면, 이것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처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의 은사가 더 우월하다고 제각기 주장하며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우상숭배의 제단에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는 문제에서는 자기에게 먹을 자유가 있다는 권리를 내세워 믿음이 연약한 형제의 신앙을 흔들었다. 성찬식에서는 형편이 넉넉한 이들이 먼저 와서 배불리 먹는 바람에,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굶주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오직 남을 위함이 아닌 오직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바울은 자신이 직접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았다고 고백했으며(고전 10:33), 사도로서 사역에 대한 수고비를 받을 권리(고전 9:11~12, 18)와 결혼을 할 수 있는 권리(고전 9:5)도 충분히 있었지만 복음을 위해 스스로 그 권리들을 내려놓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 생각이 아예 없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은 건강하게 자신을 돌보는 일까지 포기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며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하라는 것도 아니고, 불의를 보고도 입을 다물라는 뜻도 아니다. 바울 자신도 꼭 필요한 순간에는 사도로서의 권위를 분명히 밝혔고, 베드로가 잘못했을 때는 면전에서 거침없이 지적하기도 했다(갈 2:11~14). 사랑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강함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양보하는 것이다. 권리가 있는 줄 몰라서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내 권리를 충분히 알면서도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한발 물러서는 것이다. 이 사랑의 가장 완전한 모습은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우셨다(빌 2:6~7). 온전히 모든 권리를 가지신 분이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놓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의 완전한 표본이며, 동시에 우리도 그 사랑을 본받아 몸소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이기적인 자기중심성을 송두리째 완전히 소멸시키라는 거룩한 초대이다. 그것은 ‘이것은 나의 권리인데’라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권리 행사가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먼저 헤아리는 것이며, ‘스스로가 옳다’는 생각이 일어날 때, 옳고 그름보다는 상호 관계와 상대방의 유익을 먼저 떠 올리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무게와 위치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3).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5.22 / 김용두 기자

    (171) 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84>
  • 참된 사랑은 마음 깊이 뿌리내린 자기의 유익을 위한 자기중심성 거부하는 것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에 이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여기서 말하는 ‘자기의 유익’을 의미하는 말은 원어를 번역하면 ‘자기 자신의 것들’이라고 표현된다.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이익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자기의 권리, 방식, 편의, 명예, 의견 등 자기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현대의 영어 번역들이 이 구절을 “자기 방식을 주장하지 않는다”(ESV),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NIV)로 다양하게 옮기는 것도 이 구절이 품고 있는 넓은 의미 때문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린 자기중심성을 거부하라는 사랑의 명령이다. 그렇다면 자기중심성이 왜 그토록 위험할까? 그것은 세 가지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첫째, 자기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둘째, 자기 생각을 어떻게든 관철시키려 한다. 셋째,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별로 관심이 없다. 흥미로운 것은 세 가지가 언제나 함께 움직인다는 점이다. 자기가 기준인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기 뜻을 밀어붙이게 되고, 그런 사람은 상대방의 입장과 형편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다. 이 삼중 구조가 인간관계를 통해 작동하면 그 결과는 참으로 안타깝다. 그것은 결국 외로움, 우울, 분노, 미움, 배신, 심지어 질병까지 줄줄이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나는 전혀 문제없어, 저 사람이 문제지’라고 쉽게 단정 짓는 사람에게 오히려 문제가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두 남매를 키워 결혼시킨 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 어머니가 딸네 집을 방문했을 때, 마침 사위가 혼자 아침을 해 먹고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는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 눈에는 딸을 아껴 주는 사위가 참 대견하게 보였다. 그런데 아들네 집에 갔을 때, 아들이 똑같이 혼자 아침을 해 먹고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아들이 한없이 측은하고, 며느리가 몹시 괘씸하게 느껴졌다. 일어난 상황은 똑같은 데, 마음으로 느껴지는 감정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중심적 주관성의 민낯이다. 우리의 삶 곳곳에서 이런 모습은 쉽게 발견된다.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다. 남이 천천히 운전하면 소심한 것이고, 내가 천천히 운전하면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며느리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고, 딸은 남편을 잘 다스려야 한다. 우습지만,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이런 이중 잣대를 갖고 살아간다. 그 근본 원인은 자신의 주관적 판단에 대한 맹신과 자기중심성이 단단히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는 성도는 스스로 자기 안에 남아있는 자기중심성을 부인하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참된 사랑은 이중 잣대를 내려놓고 자기중심적 주관성을 솔직히 인정하며,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동등한 무게와 위치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하는 사랑의 핵심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6.04.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독교 설교자 열전
    가경자 베다(1)
  • 영국 교회사 집필, 민족 정체성 형성 기여 로마에서 물품 가져와 지역교회 성장 도모 평생 성경 연구하며 수련 수사들 훈련시켜 평생 수도원 밖을 나가지 않았음에도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던 수도사가 있다. 중세 초기 영국에서 활동하던 ‘가경자 베다’(Beda Venerablilis, 672~735)이다. 베다 수도사는 현재 영국 잉글랜드의 선덜랜드 지방에 있는 웨어마우스(Wearmouth)의 성 베드로 수도원과 재로우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수도했다. 베다 선교사가 중세 시대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은 성경 연구 분야뿐만 아니라 영국의 교회 역사 집필에도 뛰어난 자질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731년경에 쓴 『영국인의 교회사』는 영국 기독교회는 물론 영국 역사를 다룬 것으로 영국에서의 기독교 성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라틴어로 쓰여진 이 책은 앵글로색슨 역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본 중 하나이며 영국의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모두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수집된 문서 자료는 물론 구술 증언에 대한 진위 여부를 매우 비판적으로 검토했기 때문이다. 고대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7왕국 중 하나였던 노섬브리아에서 태어난 베다 수도사는 7세 때에 웨어마우스의 성 베드로 수도원에 맡겨졌고 그곳에서 양육되고 자랐다. 이후 재로우에 있는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735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수도했다. 19세에 부제 서품을 받았고 30세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수도 생활과 성경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수도 규칙의 규율을 지키고 교회에서 매일 찬송하는 일 속에서도 배우고 가르치고 글을 쓰는 것이 언제나 나의 기쁨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수도원에서의 삶에 만족했었던 인물이다. 평생 로마를 다섯 차례 방문했던 베다 수도사는 여행 때마다 수도원에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 목록에는 그림이나 성직에 필요한 물품들뿐만 아니라 유리를 다루는 직공들과 로마 베드로 성당의 수석 성가대원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로마에서 가져온 물품 중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것은 다양한 종류의 기독교 서적들이었다. 이런 서적들을 통해 당시 로마교회의 신학과 문화가 영국 교회에도 전파될 수 있었다. 베다 수도사는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라틴 수사학에 대해 능통했으며 라틴 교부들의 설교를 연구한 마지막 설교자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 앞에 ‘가경자’(the Venerabilis)라는 말이 붙은 것은 주목할만한다. 라틴어 ‘Venerabilis’는 영어의 ‘venerable’이라는 말의 어원으로, ‘존경스러운’, ‘공경할 만한’이라는 의미이다. 중세교회에서 이 칭호는 성인 추대 과정 중 첫 번째 단계에 오른 사람에게 붙인다. 우리말로는 ‘가경자’(可敬者)로 번역되며, 단순히 나이가 많다라는 의미를 넘어 그 사람이 지닌 도덕적 가치나 품격에 대한 경의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베다 수도사에게 붙여짐으로써 이 칭호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가경자’라는 칭호가 붙여졌다는 것은 베다 수도사가 영국 교회에서 수석 부주교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칭호를 통해 베다 수도사가 당대는 물론 이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베다 수도사는 평생을 성경 연구에 바쳤다. 그가 연구하는 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그의 글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나는 비록 규칙적인 훈련을 준수해 왔고, 또 교회 합창단에서 매일 찬양해 왔지만, 나의 주된 즐거움은 언제나 공부하고 가르치며 글을 쓰는 것이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p.183). 또한 그는 자신의 연구와 사역을 통해서 성직자들을 세우기를 원했다. 그는 그와 같은 사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성직을 받은 그때로부터 59살에 이르기까지 나는 덕망 있는 교부들의 성경에 관한 작품들로부터 짧은 발췌문들을 수집하기 위해서, 그것들의 의미와 해석에 해설을 달기 위해서, 또 나 자신의 유익과 내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일해 왔다”(『교부들의 설교』, p.183~184). 성 바울로 수도원에서 그는 수련 수사들을 훈련시켰다. 교육과정에는 기초 과목인 읽기, 쓰기, 셈하기 교육을 비롯해서 라틴어까지 포함됐다. 그는 수련 수사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그들의 모국어로 시를 배우도록 했으며, 교회력의 축제들의 날짜를 계산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특히 라틴어를 배울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앵글로 색슨어로 번역을 시도하기도 했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6.06.12 / 이미나 기자

    그레고리 대제(2)
  • 알레고리적, 도덕적 성경 해석 권장해 목회 규칙』 통해 목회자들에게 설교 중요성 알려 이방인 개종과 성도 교육의 가장 좋은 수단 설교자로서 그레고리 대제는 매우 성실했다. 그는 설교를 행하고 설교를 통해 회중을 가르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생각했다. 그의 설교문은 모두 62개가 남아있다. 그중 22개가 에스겔서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는 복음서를 설교한 것이다. 이 설교문들은 주로 그가 작성한 것이며 어떤 것들은 속기사가 기록한 후에 그레고리 자신이 수정했다고 한다. 그레고리의 설교는 주로 짧은 것들이었지만 때로는 상당히 긴 것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설교는 성경 본문에 대한 알레고리적인 해석에 근거하며 본문을 의역한 후에 도덕적인 적용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다간은 그레고리의 설교가 종종 거칠고 세련되지 못했으며 사상이 깊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단순하고 솔직한 내용들로 구성되어있어서 일반 회중이 이해하기 쉬웠다. 특히 그레고리 대제의 설교의 특징 중 눈에 띄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발견하는 내용들이 성경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한 예화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회중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 밖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가져왔다. 그는 이미 6세기에 설교에 있어서 이야기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그레고리는 단순히 알레고리적인 성경 해석만을 행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성경을 세 가지 관점에서 해석했다. 첫째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었고, 둘째는 알레고리적으로 보는 것이었으며, 셋째는 도덕적인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었다. 때로 그는 3중의 방법 모두를 사용해서 성경 본문을 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교부들의 설교』, 180). 또한 그레고리의 설교는 신앙생활에서 묵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즉, 그는 “활동적인 생활과 명상적인 생활을 영적 성장에 있어서 두 가지 서로 다른 단계”로 보지 않고 서로 보완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74). 이런 그의 모습은 수도원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의 생각과 훈련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는 기독교 예배에서 설교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그레고리 대제는 목회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관심들이 『목회 규칙』(Pastoral Rule)이라는 논문에 담겨있다. 『목회 규칙』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Nazianzen)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현직에 있는 목회자들과 앞으로 회중을 이끌 목회 후보생들을 위한 내용들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회중들의 특징에 따라 다른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대목은 눈여겨볼만 한다. 모두 네 권으로 쓰여진 『목회 규칙』은 제1권에서 목회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사항들과 그들이 목회 현장에서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다. 제2권에서는 교구 설교자들에게 필요한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교구 설교자는 침묵과 언어에 있어서 신중할 것,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맞서 단호히 대처할 것, 자신의 즐거움을 지나치게 추구하지 말 것, 성경을 자주 묵상할 것과 같은 내용들이 담겨있다. 제3권은 다른 책들보다 거의 두 배 정도의 분량인데, 다양한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설교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이렇듯 목회자들을 위한 그레고리의 『목회 규칙』의 주제는 설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가 설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후에 이 『목회 규칙』은 알프레드 황제(Alfred the Great)에 의해 앵글로색슨어(Anglo-Saxon)로 번역되었고,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가 제정한 제정한 법령들을 통해 권장되었다(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01, 128). 앞서 언급한 대로 그레고리 대제는 설교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설교를 통해 성경의 복음이 선포될 때, 사람들이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간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설교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에 의하여 이교도들이 개종”할 수 있기 때문이며, “신실한 신도들이 기독교적인 삶 안에서 교육받고, 이단들이 융화되며, 교회가 개혁되기 때문이다”(『교부들의 설교』, 181). 다간에 따르면 그레고리의 성품과 그의 설교를 포함한 저작들은 그를 고대 교회와 중세 교회를 있는 파라오가 되게 했다(History of Preaching 01, 129). 즉, 그는 고대와 중세를 이어줌으로서 초대교회의 설교적인 유산을 고스란히 담아 중세교회에 넘겨준 사람이었던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6.06.04 / 이미나 기자

    그레고리 대제(1)
  • 사회와 교회를 함께 섬겼던 그레고리 대제 유력 집안에서 태어나 수사학 등 최고 교육 받아 교황임에도 수도원 머물며 수도사로 생활해 그레고리 대제(540-604년) 역시 설교의 침체기 또는 암흑기로 말해지는 7-8세기에 활동하던 설교자이다. 로마의 명망 높은 아니키우스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정치적 위상과 영적 유산을 동시에 물려받았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과 두 명의 교황(펠라기우스 2세, 펠릭스 3세)가 이 집안 출신이었다는 것이 그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 고르디아누스는 로마의 행정관을 지낸 재력가였고 그의 어머니 실비아와 그의 두 고모는 훗날 성인으로 추대될 만큼 경건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사실 그레고리가 태어나던 6세기 중반에 로마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있었다. 당시 동로마제국이 황제였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로마의 재정복을 목표로 서방 영토 회복에 주력했따.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고,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정복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막대한 재정 부담을 남겼고 제국의 약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전쟁의 과정에서 도시 로마는 점령과 탈환을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도시 기반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와 하수도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특히 589년 티베르강의 대홍수로 도시가 잠겼고, 뒤이어 들이닥친 흑사병으로 교황 펠라기우스 2세를 포함해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레고리 대제가 태어났고 교황으로서 활동했다. 지금까지 이 연재를 통해 살펴보았던 것과 같이 초대교회와 중세교회 시대의 지도자들은 모두 당시 최고 교육인 수사학과 법학 등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그레고리 대제 역시 수사학, 법학, 변증학을 섭렵했다. 30대 초반 그는 아버지를 따라 로마 시의 최고 행정관인 ‘집정관’의 직위에 올랐다. 이 시기의 활동에 대한 내용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그는 정부를 위한 상당한 활동을 했었던 것 같다. 집정관으로서의 재직을 마쳤을 때, 그는 수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그는 “기도의 삶에 자신을 헌신하려는 그 자신의 열망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돌아보도록 그가 받은 많은 부름들 사이에서의 갈등”을 경험하고 있었다고 후에 진술한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71). 그러나 그의 갈등은 어떤 면에서 기우처럼 생각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성직자의 활동은 물론 로마 시민들을 위한 구제사업 역시 활발히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물려받은 상당한 재산을 모두 팔아 시칠리아 섬에 6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그리고 로마의 중심지에 있던 자신의 집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가 자신의 집을 수도원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과 보다 깊은 관계 맺음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열망은 5년 정도 이어졌을 뿐이다. 교황의 부사제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579년 그레고리는 교황 펠라기우스 2세의 사절이 되어 콘스탄틴노플에 있는 최고 관구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7년을 머물렀다. 590년 흑사병으로 교황 펠라기우스 2세가 선종했을 때, 그레고리는 황제의 승인을 받아 교황의 직을 물려받았다. 당시 서로마제국은 476년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동로마(비잔티움)제국은 서로마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전혀 주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흑사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족의 공격 가운데 교회를 지켜내야 하는 것이 황제 그레고리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한마디로 교황 그레고리가 이끄는 교회가 ‘정부’의 기능을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서로마에는 ‘시민 정부’가 존재했었다. 원로원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고 행정 시스템은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젊은 시절 집정관으로서의 그레고리의 경험이 이런 상황을 헤쳐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중세역사에서 그레고리를 기점으로 교황이 세속적 군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업무로 인해 그레고리가 영적인 삶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목자가 아니라 세속 통치자가 된 것 같다.”라고 탄식했던 그는 수도사로 남아 계속 공동체 생활을 했다. 특히 그는 교회의 주된 사업이 구제가 아니라 ‘영혼구원’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런 우선순위에 대한 그의 의식은 세상이 금방 끝날 것이라는 그의 확신으로 인하여 더욱 강렬해졌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73).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6.06.04 / 이미나 기자

    기독교 렌즈로 보는 문화
    빛 되신 예수님
  • 만약 세상에서 24시간 동안 빛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먼저 지구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이로 인해 항상 따뜻하던 지역조차 한겨울과 같은 혹한을 겪게 되고 급격한 기온 변화 탓에 폭풍과 태풍 같은 이상기후가 발생하여 큰 피해가 생긴다. 두 번째로 식물 생태계가 파괴되기 시작한다. 식물은 광합성을 할 수 없게 되어 산소 배출을 멈추고 시들어 죽어간다. 이는 인간의 식량 문제와 직접 연결되므로 인류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세 번째로 사회 전반에 극심한 혼란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식량과 생필품을 사재기하기 시작하고 정신적인 마비와 함께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진다. 인공조명에만 의지해야 한다는 공포심 때문에 전력 소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결국 일상생활은 마비되고 만다. 일주일 동안 빛이 사라진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자연 생태계는 사실상 완전히 붕괴되고 인간 사회 역시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다. 지구의 기온은 영하 20℃ 이하로 곤두박질쳐 전 세계 모든 지역이 남극과 같은 혹한의 환경으로 변한다. 물은 얼어붙고 전력 공급마저 완전히 끊긴다. 식물은 얼어 죽고, 곤충과 동물들도 굶어 죽기 시작한다. 인간이 그동안 축적해 놓은 에너지는 빠르게 고갈되어 바닥을 드러낸다. 결국 전 세계는 완전한 암흑에 휩싸인다. 곳곳에서 폭동과 범죄가 일어나지만 그 어떤 관리와 통제도 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 당연하게 만나는 빛은 비록 흔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생명과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만드신 것도 바로 빛이다. 빛의 역할을 살펴보면 그 중요성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첫째, 빛은 생명의 에너지 근원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에너지는 태양 빛에서 시작된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에너지를 만들고, 초식동물은 그 식물을 먹으며, 육식동물은 다시 초식동물을 먹는다. 인간 또한 이 식물과 고기를 섭취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은 태양의 빛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변환된 결과물인 셈이다. 둘째, 빛은 지구를 따뜻하게 해주는 열을 품고 있다. 빛이 열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인간과 동식물이 살아가기에 가장 적절한 온도가 유지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빛이 없다면 지구는 엄청난 추위에 갇히게 된다. 또한 태양의 열은 바람을 일으키고 비와 눈을 내리게 함으로써, 지구 전체의 에너지가 선순환하도록 돕는다. 셋째, 어둠을 밝히는 조명의 역할이다. 인류는 과거부터 빛을 조절하고 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를 썼다. 옛날에는 해가 지면 모든 활동을 멈추어야 했다. 그러나 불과 촛불, 전구를 거쳐 오늘날의 인공조명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빛을 다스려왔다. 덕분에 밤에도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고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 사회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는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작품을 완성했다(사진). 작가는 이 그림에 표현할 한밤중의 달빛과 등불 효과를 생생하게 관찰하기 위해, 밤마다 밖에 나가 추위에 떨며 작업에 몰두했다. 또한 성경적인 배경과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자 예루살렘 지역을 여러 차례 순례하기도 했다. 그는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신앙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평생 작가로 활동했다. 이 작품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근거로 하여 완성했다. 그림 속에서 예수님은 깊은 밤중에 어느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계신다. 이 그림에는 두 가지 빛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왼손에 들고 계신 등불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머리 뒤에서 빛나는 후광이다. 왼손의 등불은 무성한 풀과 잡초들로 표현된 인간이 가진 죄의 형태를 비추는 진리와 양심의 빛을 의미한다. 이 빛은 인간의 더럽고 추악한 죄악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어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연약함까지 비추어 회개와 변화의 자리로 이끄는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 뒤편을 밝히는 후광은 예수님이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실 참된 빛이심을 나타낸다. 이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빛이다. 그분만이 죄와 죽음의 어둠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유일한 분임을 밝히 보여준다. 특히 이 그림에서 주목할 점은 문 바깥쪽에 손잡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 문이 안에서만 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지만 결코 강제로 열지 않으신다. 오직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이기를 기다리신다. 우리는 세상의 분주한 소리에 묻혀 주님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세상 속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이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6.06.19 / 김용두 기자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 1998년 개봉해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영화 <타이타닉>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 6개 부문을 수상했다. 실제 타이타닉호는 1912년 당시 축구장 3개를 합친 것보다 긴 269의 길이에 높이는 53로 아파트 20층 규모 정도였다. 이 배는 인간의 기술력이 정점에 달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의 상징이었다. 배 안에는 수영장과 체육관, 목욕탕이 있었고 실내 장식도 최고급 목재와 금빛 조명, 대리석 등으로 인테리어 되어 그 가치를 더했다.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충돌하여 침몰하고 만다. 영화는 잭과 로즈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장면이 있다. 바로 침몰 직전 갑판 위에서 연주를 이어가던 악단의 모습이다. 배가 가라앉는 순간에도 악단은 경쾌하고 빠른 합주곡부터 다양한 노래를 연주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그들이 연주를 멈추려는 순간, 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혼자 남아 찬송가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흩어지던 다른 연주자들이 다시 모여 끝까지 연주를 이어간다. 이때 울려 퍼진 찬송가가 새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Nearer, My God, to Thee)’이다. 이 곡은 창세기 28장을 중심으로 쓰여졌다.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하던 중 홀로 돌베개를 베고 잠들 만큼 고생을 한다. 형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된 야곱은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꿈속에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다리와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다.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다. 잠에서 깬 야곱은 돌베개를 세워 그곳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짓고 기념한다. 이 찬송가의 작사가인 사라 플라워 아담스 또한 고통 가운데 이 가사를 썼다. 영국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시와 찬송시를 쓰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던 중 출석하던 교회의 윌리엄 폭스 목사와 함께 찬송집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이 찬송시를 쓰게 되었다.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든 야곱의 모습은 병과 고난 속에 있던 자신의 삶과도 겹쳐 보였다. 결국 그녀는 고통마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통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찬송을 남겼다. 한국에서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최초로 악보가 있는 찬송가집 「찬양가」에 수록하며 소개했다. 이 찬송가는 한국인들이 부를 수 있도록 7·5조(일곱 글자, 다섯 글자)에 맞춘 형식으로 번역되어서 한국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찬송가에는 1절에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2절에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3절에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라는 가사가 나온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야곱과 같은 고난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고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야곱은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하늘 사다리를 보았다. 절망의 장소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로 변화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일이 잘 풀릴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고난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듯이 ‘십자가 짐 같은 고난’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이자 과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난의 순간마다 두려움과 원망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야곱이 돌베개 위에서도 하나님을 만났듯이, 우리의 삶 속 작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러므로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기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찬송은 형편이 좋아질 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해 올려 드리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의 시선은 문제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지고, 두려움은 소망으로 바뀌게 된다. 고난의 시기가 하나님을 만나는 때이다. 외로울 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때이다. 절망의 순간이 하나님의 임재가 이뤄지는 때이다. 힘든 상황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때이다. 고통의 길을 걸을 때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때이다. 이 ‘때’에 참된 생명이 있다. 이 ‘때’에 참된 기쁨이 있다. 이 ‘때’에 참된 평안이 있다. 이 진리를 늘 마음에 새기고 고난 중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 2026.05.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의 무게(The Weight of the Bible)
  • 1562년 네덜란드 판화가 위제 알라드(Huijeh Allardt)가 새긴 한 장의 그림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준다. <성경의 무게(The Weight of the Bible)>라 불리는 이 판화는 종교개혁의 핵심 원리인 ‘오직 성경’을 가장 직관적으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저울이다. 그림의 중앙에 있는 이 저울은 작품 전체를 좌우로 나누는 기준이 된다. 저울에 달린 양쪽 접시 위에는 서로 다른 물건들이 놓여 있어 긴장감을 자아낸다. 왼쪽 저울 접시 위에는 화려한 것들이 가득하다. 교황의 절대 권위를 상징하는 삼중관(Tiara), 베드로의 열쇠 그리고 수 세기 동안 교회를 지탱해 온 방대한 교회법전과 전통의 기록 등이 쌓여 있다. 반면, 오른쪽 접시에는 단 한 권의 책, 성경만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다르다. 온갖 물건들이 쌓인 접시는 가볍게 위로 솟아올라 있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성경 쪽 접시는 바닥에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다. 알라드는 이 극적인 대비를 통해 진리의 힘을 드러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거창해도 말씀이라는 실재적인 무게 앞에서는 깃털처럼 가볍다는 사실이다. 저울이 성경 쪽으로 기울자 당황한 수도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이는 접시 위로 올라가 무게를 더하고 어떤 이는 체중을 실어 저울의 줄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심지어 그들 틈에는 사탄의 기만과 속임수를 상징하는 이미지까지 가세하여 저울을 조작하려 애쓴다. 이 장면은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나 인위적인 노력이 진리를 이길 수 없음을 풍자한다. 성경에 담긴 진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증명한다. 성경 주변에 서 있는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을 보라. 그들은 저울을 붙들거나 조작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말씀이 지닌 본연의 무게가 승리하는 과정을 확신에 찬 눈빛으로 지켜볼 뿐이다. 종교개혁가들의 머리 위 벽면에는 둥근 초상화들이 걸려 있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 먼저 믿음의 길을 갔던 초대교회 사도들과 교부들이다. 알라드는 이 장치를 통해 종교개혁이 결코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혁명이 아님을 나타낸다. 성경의 무게를 지지하는 이들은 교회의 가장 뿌리 깊은 선조들이었다. 종교개혁은 변질된 전통의 가벼움을 걷어내고, 사도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말씀의 묵직한 정통성을 회복하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성경 한 권이 지닌 무게 속에는 구약의 예언자들로부터 신약의 사도들 그리고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고백했던 진리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위제 알라드의 저울은 오늘날 우리 각자의 삶 앞에도 놓여 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저울 위에 수많은 가치를 올려둔다. 나의 경력, 사회적 평판, 쌓아 올린 지식, 안정적인 미래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들을 한쪽 접시에 가득 채우곤 한다. 때로는 그 무게가 너무나 대단해 보여서 그것이 내 인생을 지탱해 줄 절대적인 무게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고난의 폭풍이 불어오고 삶의 본질적인 의미를 물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화려했던 것들이 얼마나 가볍게 흩어지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그때 우리를 바닥에 단단히 고정해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말씀의 무게를 견디는 신앙이란 내 삶의 모든 판단 기준을 그 묵직한 성경 아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때로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불편함일 수도 있고 나의 자아를 짓누르는 거룩한 부담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게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잡힌 인생을 살 수 있다. 위제 알라드가 묘사한 저울의 바늘은 지금도 변함없이 성경을 가리키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과학적 이론과 화려한 문화를 동원하여 저울의 균형을 맞추려 해도 진리의 질량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은 저울 접시 위에 더 많은 장식품을 얹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유혹하는 가벼운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바닥에 묵직하게 닿아 있는 말씀의 무게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 거룩한 성경의 무게를 신뢰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그림 속에 있는 종교 개혁가들처럼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으로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 2026.04.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선교 뉴스
    FMTC 제22기 종강
  • 25명 졸업·수료, 몽골·인도네시아 단기선교 파송
    지난 2월 1일 이영훈 담임목사의 개강예배로 시작됐던 제22기 평신도·전문인 선교훈련(FMTC·Full Gospel Missionary Training Course)이 그동안 훈련 과정을 마치고 6월 27일 종강 및 단기선교 파송예배를 드렸다. 선교국 주관으로 세계선교센터 11층 강의실에서 열린 예배에서는 훈련생 25명이 졸업 및 수료했다. 예배에서 엄태욱 부목사(목회)는 ‘주 예수께 받은 사명’(행 20:24)을 제목으로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붙잡아야 할 ‘사명’에 대해 설교했다. 엄 목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예수님 안에서만 영혼의 방황과 구원의 문제가 해결된다”며 “선교는 바로 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사명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삶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변화시킨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한 후 졸업생들에게 수료증 수여와 축복 기도했다. 안경회 선교위원장은 격려사를 통해 “우리의 사명은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선교 담당 정용훈 목사는 졸업·수료생들에게 십자가 목걸이를 걸어주며 “모든 사역을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신다”고 권면했다. 졸업생들은 7, 8월 몽골과 인도네시아 단기선교를 통해 훈련의 열매를 현장에서 이어갈 예정이다.
  • 2026.07.03 / 오정선 기자

    선교국-웨신대 상호 협력 위한 ‘MOU 체결’
  • 선교국은 18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본관 총장회의실에서 상호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 체결식을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배광식 총장과 김판호 대외부총장을 비롯한 대학 관계자들과 선교국 담당 정용훈 목사, 선교위원장 안경회 장로 등이 참석했다. 양 기관은 이번 협약을 통해 긴밀한 교류와 협력을 바탕으로 상호 발전을 도모하고, 선교 사역 확대와 우수한 사역자 양성에 힘쓰기로 했다. 또한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체계를 구축해 교회와 선교 현장에 기여하며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계획이다.
  • 2026.06.19 / 오정선 기자

    윤성호(브라질)·연은영(캄보디아) 선교사 파송 
  • 7일 주일 4부 예배 설교 후 대성전에서 선교사 파송식이 열렸다.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브라질로 파송되는 윤성호 목사(사진 위. 상파울로순복음교회 담임)와 캄보디아로 파송되는 연은영 선교사(깜뽕치낭순복음교회 담임)에게 각각 파송장을 수여하고 선교 사명 감당을 위해 안수기도 했다.
  • 2026.06.12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김미정 선교사(우크라이나)
  • 끝나지 않은 전쟁,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 우크라이나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선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에서 사역하는 김미정 선교사입니다. 저는 우크라이나 전쟁 가운데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선교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분명히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크라이나는 지금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뉴스에서는 예전만큼 다루지 않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폭격과 드론 공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선교대회에 참석하기 전 우리 교회(드니프로임마누엘순복음교회) 바로 옆에 드론이 떨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큰 피해가 예상되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사람도 다치지 않았고 건물도 크게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경험했습니다. 전쟁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전기가 자주 끊기던 때였습니다. 특히 겨울철에는 하루 중 몇 시간만 전기가 공급되었고 밤마다 들려오는 폭격 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우울감과 무기력함에 빠져들었습니다. 저 역시 심한 무기력함으로 이틀 동안 거의 일어나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모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일어나 사람들을 만나고 말씀을 선포하세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그 한마디가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 후 저는 사람들을 만나며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제 자신도 다시 힘을 얻었고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들도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믿는 사람들이 만나면 예수님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해야 합니다. 전쟁터에서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한마디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됩니다. 전쟁을 겪으며 저는 믿음의 중요성을 더욱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평안을 누렸지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더욱 깊은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우리를 붙드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전쟁 가운데서도 선교의 문을 열고 계십니다.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난민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 흩어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고난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교의 통로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여러 지역에서 우크라이나 성도들이 예배드리고 선교사와 목회자로 훈련받으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저는 다음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코로나와 전쟁으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교회를 중심으로 방과후학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몇 곳만 계획했지만 지금은 여러 교회에서 아이들이 영어와 수학, 음악과 미술을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도 배우고 있습니다. 또한 청소년 수련회와 훈련을 통해 믿음의 다음 세대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크라이나를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힘이시고 소망이시며 생명이십니다. 우크라이나 교회들과 성도들 그리고 전쟁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로와 평강을 주시고 복음의 빛이 더욱 널리 전해지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와 평강을 더하여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 2026.07.03 / 오정선 기자

    김경식 목사(호주)
  • ‘사명자·헌신자·선교사’를 세우는 것이 교회 비전 골드코스트순복음교회서 27년 째 목회 사역 순복음 성령 사역으로 다음 세대 일으켜 샬롬! 저는 호주 동부에 위치한 골드코스트에서 27년째 목회하고 있는 김경식 선교사입니다. 골드코스트는 온화한 기후와 아름다운 해변, 풍부한 자연환경 그리고 편리한 생활 인프라를 갖춘 도시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인구 유입이 늘면서 교통 체증도 생기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고 사랑하는 도시입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골드코스트순복음교회는 1993년 시드니순복음교회의 지교회로 개척되었습니다. 저는 다섯 번째 담임목사로 1999년 이곳에 파송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몇 주 동안 주일예배를 돕고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후임자가 세워지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맡게 되었고 어느덧 지금까지 사역을 이어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목회를 꿈꾸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호주에 왔습니다. 목회보다는 선교와 학문적인 사역에 더 관심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저를 골드코스트순복음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돌아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목회는 제 인생 최고의 특권이며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저는 주저 없이 목회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저는 다른 사람을 따라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사와 장점에 집중했습니다. 특별히 청년 사역 경험을 살려 교회 전체를 청년부와 같은 열린 분위기 속에서 섬기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배의 감격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습니다. 골드코스트순복음교회 사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예배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설교와 찬양, 기도 가운데 성도들이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고 감동받는 예배를 추구해 왔습니다. 또한 성령 침례와 성령 충만, 방언의 은사를 강조하며 성도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한 사람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면 교회 전체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는 공동체 문화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현재 우리 교회는 약 250명 성도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팬데믹 이후 유학생들과 젊은 세대의 유입도 다시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제 아내인 홍효정 전도사가 오랜 시간 예배인도자로 섬기며 교회의 영적 분위기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감당해 왔습니다. 저는 목회 초창기부터 제자훈련을 꾸준히 진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은혜를 받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로 성장하도록 돕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핵심 비전은 ‘사명자, 헌신자, 선교사’를 세우는 것입니다. 저는 늘 성도들에게 “은혜를 받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질문하며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도전해 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 훈련받은 청년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목회자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제 목회 철학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저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기보다 현재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그래서 성도들과 자주 나누는 인사말이 “주님이 지금도 잘해 주고 계십니다” 입니다.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결국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나누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역은 성경 통독입니다. 특별히 바울서신 집중 통독을 통해 성도들이 복음을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를 반복해서 수백 번 읽도록 권면하며 성경을 분석하기보다 먼저 많이 읽도록 강조합니다. 많은 성도가 반복 통독을 통해 성경 전체를 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고,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큰 은혜를 경험했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령운동과 말씀운동이 반드시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불이 타오른다면 말씀 통독은 그 불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장작과 같습니다. 앞으로도 성령의 역사와 말씀 중심의 신앙을 통해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축복하는 교회를 세워가기를 소망합니다. 현재 골드코스트순복음교회의 주요 기도 제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사명자와 헌신자, 선교사를 계속 세워가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축복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증가하는 성도들을 위해 자체 예배당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학교 강당을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지만 공간의 한계를 느끼고 있어 성전 구입을 중요한 비전으로 품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지금까지의 모든 목회 여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걸음 한 걸음 저와 성도들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앞으로도 성령과 말씀을 통해 다음 세대를 세우며 어디서든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들을 배출하는 교회로 쓰임받기를 소망합니다.
  • 2026.06.05 / 오정선 기자

    박민규 선교사(싱가포르)
  • 동남아 허브 싱가포르에 세워진 순복음교회 예배 및 문화 사역 등 ‘미션 허브’로 쓰임 받길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 여러분, 동남아시아의 허브 싱가포르에서 사역하는 박민규 목사입니다. 제가 섬기는 싱가포르순복음교회는 싱가포르에서 두 번째로 개척된 한인교회입니다. 그 시작은 1985년 네 가정의 기도모임으로부터였습니다. 담임 목회자가 없는 상태로 2년간 지속된 기도모임은 공동체를 넘어 교회로 발돋움하게 되었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담임교역자 파송을 의뢰하여 첫 담임목사가 부임한 이래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1인당 GDP가 9만 달러에 이르는 경제 선진국입니다. 하지만 물가의 급상승으로 인한 높은 생활비 감당은 정부로부터 특별한 혜택과 지원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들이 생활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환경입니다. 한인 성도들은 코로나 이후 많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실제 국내 유수 기업들이 싱가포르의 높은 물가와 비용에 대한 부담으로 주재원 파견을 주저하는 현실입니다. 싱가포르는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의 국가로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의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엄격한 규제와 법 적용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개적인 전도활동이 불가능한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의 20%가 기독교인이며 교회가 점점 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청소년과 청년 기독교인의 비중이 늘고 있어 기독교의 미래는 참으로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에는 한인들이 대략 2만5000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11개의 한인교회가 연합해 한인 복음화를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교단을 초월해 다양한 교회들이 꾸준히 연합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싱가포르순복음교회는 작지만 단단한 교회로 저력이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따라 많은 것을 함께 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운영과 유지를 위한 막대한 재정도 기도하며 함께 만들어 가는 가운데 채우시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누구나 하나님 품으로 나아와 그 안에 거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교회 공간 중 일부를 지역사회와 공유하는 일환으로 기독교 서점을 운영하려고 준비중입니다. 그래서 준비중인 서점 이름도 ‘StayinG(Stay in God의 약자)로 정했습니다. 한인들에게 좋은 글과 책, 소품들을 제공하며 관련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도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화에 젖어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려는 것입니다. 동남아시아 주변 국가들에도 한국 기독교 서점이 없는 상황이라 미션허브(Mission Hub)로도 쓰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싱가포르 안에는 미얀마와 필리핀 등에서 건너온 헬퍼(도우미)나 근로자들이 많아 서점을 통해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각자의 나라로 복음을 들고 역파송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연합하는 많은 이들로 하나님의 나라가 함께 지어져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저는 싱가포르순복음교회에 새로운 성도들, 특히 초신자가 많은 것이 감사합니다. 비록 교인 수는 작지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집 같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더불어 사택을 이용해 환대(Hosting)사역도 진행 중인데 이 사역이 한국과 각지에서 방문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좋은 통로 역할이 되길 기대합니다. 우리의 모든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도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성도님들을 위해서 중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6.04.03 / 오정선 기자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
    유베르나도 선교사(U국)
  • - 성령의 역사로 중동 6개국의 영혼들이 복음의 진리를 듣도록 - D교회에 성령 충만의 은혜가 임해 사명 잘 감당하도록 - 가족의 건강, J전도사가 지혜롭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 2026.07.03 / 오정선 기자

    김덕수 선교사(영국)
  • - 런던 핀칠리순복음교회 전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의 증인 되도록 - 유학생 전도의 풍성한 열매와 제자화가 이뤄지도록 - 런던 복음화의 동역자들(장년부, 청년부, 교회학교)이 세워지도록
  • 2026.06.26 / 오정선 기자

    임봉의 선교사(뉴질랜드)
  • - 교육 중심 도시, 더니든에서 공부하는 한인 2세 디아스포라(이민자)와 캠퍼스 복음을 통해 아시안 대학생들 선교가 큰 열매 맺도록 - 젊은 영혼들을 살리고 제자를 세워 열방으로 파송하는 더니든순복음교회의 사명을 위해 - 교회의 재정 자립과 아내의 암 수술 예후가 좋아지고 회복 되길
  • 2026.06.19 / 오정선 기자

    순복음영성스케치
    기도의 종류(Ⅳ) - 중보 기도
  • 세계적인 설교자 찰스 스펄전 목사는 “위대한 일을 행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먼저 기도의 사람을 세우신다”고 말했다. 그가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 스스로가 기도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며, 특히 그를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던 무명의 기도 동역자들의 영적 지원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역시 그의 사역에 있어 중보 기도의 능력을 인정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만 사랑하는 기도의 사람 백 명을 원했다고 한다. 타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도하고 연약함과 어려움을 지탱해주고자 하는 중보 기도는 영적 지도자를 위한 중보 기도로 이어질 때 더욱 강한 능력으로 나타난다. 1. 중보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 중보(intercession)의 문자적 의미는 ‘사이에 나아가다’, ‘상치하는 양자를 화해하기 위해 행동하다’의 의미가 있으며 법정에서 의뢰인을 돕는 변호사나 법률적 행위를 대신해주는 대리인의 개념을 갖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8절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증거하고 있는데, 앞선 중보의 개념에 따르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을 중보하는 최고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지금도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도와주신다. 2. 예수님의 중보 기도와 훈련 모델 능력 있는 중보 기도자가 되고자 소원하는 사람은 단연코 최고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한 명의 중보 기도자가 세워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중보 기도자로서의 소원과 결심이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최우선 순위는 기도였는데 어떠한 때에 기도하셨는지를 알아보면 중보 기도자로 서는 훈련에 도움이 될 수 있다. (1)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침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다(눅 3:21~22). (2) 사람들에게 인정받던 전성기 때에 많이 기도하셨다. (3) 진리에 대한 계시가 필요할 때 기도하셨다. (4) 제자들을 선택하고 훈련하실 때 기도하셨다. (5) 사랑과 용서가 필요할 때 기도하셨다. 3. 중보 기도의 올바른 태도 중보 기도자로서 훈련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훈련 방법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매일 일정한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 증진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아래의 5가지 올바른 태도를 유지하기만 해도 효과적인 중보 기도자로 설 수 있다. (1) 자발적으로 중보 기도하라 억지로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이다. (2) 구체적으로 중보 기도하라 중언 부언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마 6:7). 구체적인 기도는 응답을 통하여 능력을 체험하는 통로가 된다. (3) 올바르게 중보하며 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고 정당한 것을 구해야 한다. 응답이 올 때까지 찾고 두드리는 실행의 과정을 능동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4) 전심으로 중보하며 구하라 두 마음을 품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신다(약 1:8). 이런저런 생각이 많으면 기도에 집중하기 어렵다. 마음이 분산되는 것을 막는 실제적인 방법은 크게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5) 쉬지 말고 중보 기도하라 기도는 호흡이요 습관이 되어야 한다. 한꺼번에 일시적으로 많은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는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자주 드리는 기도가 효과적이다. 4. 영적 지도자를 위한 중보 기도 중보 기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 지도자를 위한 기도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지도자를 판단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시 66:18). 그리고 아래와 같이 영적 지도자의 영성과 생활과 사역의 3가지 영역에서 중보하며 기도하면 사역에 큰 능력이 나타난다. (1) 영성을 위하여(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기도) 지도자의 위치에서 듣게 되는 비난과 겪게 되는 억울한 일들을 견디고 이길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2) 생활을 위하여(개인적인 삶을 위한 기도)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며, 행복한 가정의 모범이 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3) 사역을 위하여(사명 감당을 위한 기도)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 끝까지 사명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귀한 뜻을 이루어 가야 한다. 성도들은 영적 지도자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끝> 김현동 선임목사(교무국 기도처지원팀)
  • 2023.12.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Ⅲ) - 방언 기도
  • 올해는 우리 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이 창립한 지 70년이 되는 해로서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오순절 운동을 되돌아보게 한다. 오순절 운동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려는 운동으로서 성령 침례의 결과가 방언, 신유, 능력으로 나타남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성령 충만과 방언 기도를 강조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신유 사역과 사회 참여를 통하여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했다. 오늘은 우리 교회와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부흥의 큰 원동력이 된 방언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 방언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의 영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다짐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한다. 1. 방언 기도의 의미와 성경 상의 언급 방언 기도는 영적인 언어로 말하는 기도로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며 개인 신앙 발전에 큰 유익을 주는 기도이다. 방언은 성령 침례의 외적 증거이며 성경 많은 곳에서 성령 침례의 표적으로 나타난 방언 기도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 날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행 2:1~4), 둘째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집안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의 성령의 임재(행 10:44~46), 덧붙여 바울이 에베소의 제자들에게 안수할 때의 성령의 임재(행 19:5~6)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2. 현대 오순절 운동과 방언 기도 성경 상에 등장하였던 방언 기도는 20세기 초 현대 오순절 운동에서 재발견된다. 1901년에 감리교 목사 찰스 팔함(Charles F. Parham)은 그가 가르치는 신학교 학생들과 함께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던 중, ‘방언이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임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이렇게 발견한 말씀의 내용을 철저히 믿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침례와 방언을 체험하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 오순절 운동의 시작이다. 이어 방언 기도를 강조하는 오순절 운동은 1906년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의 아주사 부흥으로 이어졌다. 방언과 방언 통역, 예언, 축사, 신유 등이 강력하게 나타났던 아주사 거리 집회는 무려 3년이나 지속되며 기도의 불길을 이어갔다. 3. 방언 기도의 유익 성령 침례의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 기도는 다음과 같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1) 방언 기도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준다. 성경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방언)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증거하고 있다(행 2:4). 한편 믿는 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한다고 분명히 적고 있다(막 16:17). 성령 침례를 받으면 방언이라는 표적을 통하여 분명하게 성령 충만의 증거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방언 기도를 한다는 것은 기도하는 자에게나 듣는 자에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령 충만의 확신을 가져다준다. (2)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통을 나누는 비밀한 언어이다. 방언 기도에 대해 비교적 많은 언급을 하고 있는 고린도전서에서는 방언을 하나님과 비밀한 영적 교통을 나누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전 14:2)고 하면서 또한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고전 14:14)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방언 기도는 하나님과 비밀의 기도이기 때문에 사탄도 알아듣지 못한다. (3) 방언 기도는 자기 신앙의 덕을 세운다. 성경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전 14:4)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것의 원어적 의미는 ‘집을 지어 올라간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방언 기도를 통하여 마치 집을 짓듯이 우리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다. (4) 방언 기도는 마음을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시켜준다. 방언으로 기도하면 우리의 잠재 의식 속에 있는 모든 불안, 초조, 절망, 미움, 원한, 상처 입은 것을 깨끗이 청산해 준다. 마음의 공간이 방언 기도를 통하여 깨끗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부정적인 상태에서 해방되어 절대긍정의 마음으로 변화 된다. (5) 방언 기도는 연약함을 돕는 탄식의 기도이다. 성경은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고 있다(롬 8:26~27). 방언 기도를 통하여 탄식하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6) 방언은 깊고 오랜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15절에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 증거하고 있다.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시간이 길어야 한다. 방언 기도는 기도의 언어로서 기도를 오래 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코로나19 엔데믹 선언 이후인 지금은 성도 개개인이 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한 영성을 회복하고 교회 내외적으로 전례 없는 부흥을 꿈꾸어야 할 때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 교회 성령 충만과 부흥의 토대가 된 오랜 시간의 깊은 방언 기도를 회복하는 것은 교회와 성도 모두가 부흥으로 향하는 최선의 지름길을 제공해 줄 것이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1.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의 종류(Ⅱ): 대적 기도
  • 그리스도인들에게 악한 영들과의 영적 전쟁은 선택 사항이 아닌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과정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적 전쟁에 대해 무의미하게 여기거나 막연히 신비적인 것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영적 전쟁은 성경 여러 곳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오늘날도 실제적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체험되고 있다. 이러한 영적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적 기도를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오늘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 권세(창 3:15)에 힘입어 선포하는 대적 기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대적 기도의 의미와 특징 대적 기도는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세에 힘입어 악한 영들에게 명령하고 선포하는 기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의 형식이지만 대적 기도는 악한 영들에 대한 것으로 간구가 아닌 명령과 선포의 형태를 지닌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세를 주셨다(눅 10:19).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악한 영들을 대적함으로써 승리하였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이 주신 권세와 능력을 믿고 명령하며 선포함으로써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2. 성경에 나타난 대적 기도 성경은 영적 전쟁을 실제적으로 묘사하면서 대적 기도의 상대인 악한 영들과 이들을 어떻게 상대하여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1) 대적 기도의 대상 성경은 우리가 물리쳐야 할 대상에 대해 직접적으로 ‘대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하거나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말한다. 이러한 성경의 언급을 통해 우리의 대적이 바로 ‘마귀’임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2) 대적 기도의 사례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는 방법(막 9:25)과 명하여 내어 쫓는 방법(눅 8:29)을 통하여 대적 기도를 행하셨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에 힘입어 빌립보의 귀신 들린 여종을 향하여 명하였고, 귀신은 즉시 나오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행 16:18)는 명령과 선포는 오늘날 대적 기도의 대표적인 형태로 활용되고 있다. 3. 대적 기도의 방법 대적 기도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영적 대결이므로 마치 전쟁터에서 배수의 진을 친 것과 같은 비장한 각오로 준비하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1) 보혈을 의지하는 기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의 보혈에 대한 예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에서 보호하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출 12:13).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친히 흘려주신 보혈의 권세를 갖고 있으므로, 보혈에 의지하는 기도는 마귀에게 대적하는 가장 큰 기초가 된다.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는 우리들은 매일 같이 마귀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데 특별히 개인의 감정과 사회적 관계 그리고 환경 가운데 보혈을 뿌리며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2) 예수 이름의 권세를 의지하는 기도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시어 오신 이유는 우리의 상실한 권세를 회복해 주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셨으나 부활하셔서 승리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8:1). 이러한 예수님의 권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과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요 1:12). 성경은 예수님의 권세에 의지할 때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고(마 16:18), 매고 푸는 권세가 있어서 마귀들을 묶고 포로된 자들을 구원하는 권세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마 16:19). (3)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는 기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대적의 수중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겼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패배 의식에 빠지고 좌절과 낙심 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우리는 대장 되신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주셨으며, 흉악과 결박에서 놓임 받게 해주심을 굳게 믿고 마귀를 대적하며 기도해야 한다. 4. 대적 기도의 실제와 유익 대적 기도를 통하여 의심, 두려움, 교만, 불안, 낙심과 염려 등 마음의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사라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적 기도는 육체의 치유와 믿음의 회복도 가져다준다. 우리는 각종 암, 우울증, 중풍, 고혈압, 당뇨병, 만성 피로 등 육체의 질병에 대해 꾸짖고 명령하고 선포하여 승리할 수 있고, 영적 성장과 신앙생활에 방해를 주는 악한 영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대적하며 기도할 수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노니, 사람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괴롭히는 악한 원수 마귀야! 지금 즉시 하나님의 자녀에게서 떠나갈지어다!” 이러한 선포를 통하여도 우리는 마귀와 효과적으로 대결하고 영적 전쟁의 승리에 다가설 수 있다. 김현동 선임목사(목회자제직훈련소)
  • 2023.10.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시보는 영산 신학과 목회
    영산의 세계선교
  • 선교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복음 전도와 선교에 대한 꿈과 비전으로 충만하게 된다(행 1:8). 성령님은 영산에게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부터 세계선교의 꿈을 부어주셨다. 그때부터 영산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은빛 날개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하는 꿈’을 품었다. 그 꿈처럼 영산은 당시 해외 여권을 얻기도 쉽지 않았을 때 이미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전 세계는 주님의 교구입니다.” 웨슬리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하는 영산의 고백은 절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는 세계 최대 교회를 세우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선교 사역을 감당했다. 그가 머물렀던 수많은 선교 현장은 성령님이 역사하는 기적의 장소였다. 영산이 세계선교를 위한 뜨거운 열정을 갖게 된 배경은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7년 5월 세계오순절총회를 마친 영산은 100일 동안 18개국, 39개 도시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던 그는 결국 스위스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침대 밑에 놓인 엽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님의 종으로 부름 받았으니 이 시대에 한 획을 긋는 종이 되리라”라는 글귀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적고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다. 다시는 못 일어날 만큼 쇠약해졌던 영산의 몸은 이튿날이 되자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기적처럼 회복되었다. 그때의 체험은 영산의 사역 가운데 세계선교를 항상 강조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영산은 유럽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세계 교회성장을 위해 봉사하는 국제기관을 조직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76년 11월 4일 국제교회성장연구원(이하 CGI: 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설립했다. 영산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흥성장에 관한 노하우를 전 세계 교회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 세계 교회가 함께 부흥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CGI는 설립 이래 2022년 현재까지 한국을 비롯한 100여 개국 이상에서 총 600회 이상 CGI 콘퍼런스를 개최했고, 여기에 전 세계에서 연인원 120만명이 참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세계선교와 교회 성장에 이바지한 CGI는 2022년 10월 이영훈 목사를 제2대 총재로 만장일치 추대하면서 ‘다음 세대의 부흥’을 외치며 제2기 사역에 돌입하게 되었다. 영산은 세계선교의 사역을 더욱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2000년 3월 28일 DCEM(David Cho Evangelistic Mission)을 설립했다. 이 기구를 통해 전 세계 선교지와 선교단체 간에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선교 자원의 교류에 힘썼다. DCEM은 교파를 초월해 영적으로 갈급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심어주는 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영산은 그 목회 사역 동안에 약 600회 이상의 해외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런 왕성한 사역은 성령님이 주시는 비전과 열정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럼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영산의 선교 사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20세기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기독교의 무게 중심이 서구권에서 비서구권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1980년대에 들어와서 비서구권의 기독교 인구가 서구권의 기독교 인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기독교 신학이나 선교가 서구권 교회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서구권 교회는 갈수록 쇠퇴를 거듭했고, 반대로 비서구권의 교회는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영산의 세계선교 사역은 기독교 선교의 주체를 서구권 교회에서 비서구권 교회로 전환하는 데 아주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산은 선교가 ‘순복음’의 최우선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선교하는 교회가 진정한 ‘순복음교회’(Full Gospel Church)이고 선교하는 성도가 진짜 ‘순복음성도’(Full Gospel Christian)이다. 교회가 선교를 멈추는 순간 침체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영산 안에 넘쳤던 복음의 확신과 순복음의 영성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희망을 불러일으켰고 나도 하나님 사명에 쓰임 받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David Yonggi Cho’라는 이름은 안다”라는 말이 수많은 증인에 의해 회자된 것만 보아도 그가 가진 세계선교의 열정과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순복음 신앙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나아가 선교하는 삶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선교에 평생을 바친 영산의 삶이었고, 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은 모든 순복음 성도들의 꿈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의 본을 따라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히 12:1). 오늘날 교회가 영산으로부터 반드시 전해 받아야 하는 믿음의 영적 바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교의 바통’이다. 이제 영산의 뒤를 이어 우리도 성령 충만함 가운데 ‘선교 바통’을 이어받아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계선교의 꿈을 이뤄가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1.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영산의 신유 사역 
  •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그의 핵심적인 목회 철학 중 하나였다. 영산은 신유의 기적이 과거 예수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사역임을 확고히 믿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면 믿음으로 값없이 병 고침 받는 것도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영산이 믿었던 신유의 은사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은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영산에게 신유 사역은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자 ‘아직’, 그러나 반드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 영산은 치유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믿는 자의 부활을 보았다. 그래서 영산은 목회 현장이나 부흥회 사역에서도 병 고침을 강조했는데, 그가 인도하는 집회에서 질병의 치료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거리는 수없이 많다. 영산이 이같이 신유를 강조하게 된 것은 어떤 특정한 치유 신학을 공부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를 ‘신유의 종’으로 만든 것은 그가 처한 삶의 현장 속에서 실제 경험했던 치유의 하나님 때문이었다.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을 때 주님을 만나서 완치되었던 경험이 그것이다. 또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 중풍에 걸린 여인이 낫고 걷지 못했던 소년이 일어나 뛰며 듣지 못했던 사람이 듣게 되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런 경험을 통해 영산은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었다. 자신의 삶과 목회 현실에서 신유의 역사를 분명하게 체험했기에 영산은 가는 곳마다, 서는 곳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영산의 신유 사역은 교회 부흥에도 크게 기여했다. 실제로 영산의 개척교회가 빈민촌 지역사회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었다. 그래서 영산은 신유를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적으로 보고 목회 사역에 열심히 적용하고 실행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표적으로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낫게 되는 신유 사역”(막 16:18)이 복음 전파에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이후에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회고할 때도 신유 사역의 중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다. 복음에 저항적이던 사람들이 육체의 질병을 치료받고 은혜를 받아 복음의 말씀을 세상에 나아가 강력하게 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를 신유 공동체로 보았다. 영산의 신유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믿음이다. 영산은 그 어느 목회자보다도 병 고침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선포했고 신유의 기적도 많이 행했지만 정작 자신이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성령이 필요에 따라 자신을 통해 은사를 나타내실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영산 자신이 분명히 받았다고 주장하는 은사가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은사’였다. “내가 받은 은사를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담대한 믿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경은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보다 앞선다고 하지 않습니다. 표적이 여러분의 믿음 뒤에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역사는 천막교회 시절에 나타났다. 걷지 못하던 소년이 영산을 찾아왔을 때 처음에는 그가 낫는다는 것을 믿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영산이 한 시간이 넘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자 뭉게구름 같은 믿음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영산은 그때의 기분이 마치 지구를 자기 손으로 밀면 지구가 밀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간증한 바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믿음으로 기도하고 선포할 때 영산은 그 소년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영산은 오늘날 병 낫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의 기도를 잘 드리지 못하거나 주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잘 알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고 말했다. 영산에 따르면 신유의 역사는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때까지 성령님이 살아 역사하셔서 은사를 베푸시고 병든 자들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산은 신유가 지금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분명히 믿었다. 따라서 성도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신유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기에 자신의 아픈 부분에 손을 얹고 믿음으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영산을 통한 성령의 신유 사역은 여의도순복음교회뿐 아니라 국내외 수많은 교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신유의 복음을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적인 순복음을 이해하는데 큰 유익을 주었다. 앞으로도 영산의 신유 사역의 원리를 계속 연구하고 실행함으로 새로운 신유행전의 역사가 계속 나타나길 희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문서·방송 선교의 선구자…1988년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창간
  • 영산은 미디어의 활용이 미미하던 시절, 문서 선교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사역에 적용한 선구자였다. 영산은 자신이 가진 뜨거운 선교적 영성을 담아내어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순복음의 신앙이 한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떤 교회보다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서 전도』의 저자 조지 버워는 “기독교 문서는 인쇄된 선교사”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 선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영산은 누구보다도 문서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역에 적용하였다. 1964년 당시 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순복음지』를 발간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78년에 이르러서는 영산의 설교와 칼럼, 성도들의 신앙 간증과 구역 성경 공부 및 교회 소식을 담은 『순복음뉴우스』가 되었다. 이후 『순복음가족신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문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영산은 또한 순복음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잡지 『신앙계』를 창간함으로 문서 선교의 폭을 확장했다. 『신앙계』는 기독교의 대중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양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기독교 잡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대중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신앙계』를 능가하는 잡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앙계』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운동의 건전한 보급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신앙계』야말로 오순절 신앙을 한국교회에 널리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영산의 문서 선교의 열정은 『순복음가족신문』과 『신앙계』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한 이단 종교 단체가 일간 신문을 발간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산은 만약 그 단체에서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일간지 창간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988년 세계 최초의 기독교계 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정부와 사회에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산은 신문사를 설립하는 과정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근거 없는 비난의 목소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복음 실은 일간지 『국민일보』는 매일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땅에 전파하는 발 없는 전도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 정신으로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로서 한국 교계의 대사회적인 발언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 문화의 채널로써 한국 사회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 사명도 이뤄가고 있다. 영산의 『국민일보』 창간은 대한민국 1200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스컴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영산은 문서 선교뿐 아니라 방송 선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영산은 복음 전도의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방송 선교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던 영산은 1966년 라디오 설교와 1979년 컬러TV 방송을 송출했다. 영산의 라디오 설교 방송은 1979년, 1980년 연속, 전국 청취자 애청 프로그램 조사 결과 청취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청취자가 많았다. 이처럼 한국교회 방송 선교의 선구자는 단연 영산이었다. 당시 흑백 TV에 익숙했던 공중파 제작자들이 방송 장비와 시스템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견학을 올 정도였다. 방송 선교는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영산의 방송 선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위성과 인터넷을 활용한 예배와 설교 실황은 각 지성전 및 지교회 설립과 더불어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영산의 방송 선교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KCWC사의 특별 기획으로 주일 예배 실황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필리핀, 남아공 등 25개국에 동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산의 성령 충만의 복음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함께 전 세계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산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 설교뿐 아니라 설교를 전달하는 매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영산의 설교와 성령 충만의 영성은 멀티미디어 사역 시스템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이러한 사역이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복음의 메시지는 불변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영산의 멀티미디어 사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유훈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9.23 / 김용두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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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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