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보혈의 은혜 - 김범석 목사(반석대교구장)
  • 아프리카 우간다 선교지를 방문했던 적이 있다. 분홍색 지붕으로 올망졸망하게 지어진 가옥들과 연초록으로 물든 생소한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정작 눈이 가는 것은 다른데 있었다. 그것은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짙은 황톳길이었다. 온통 황토로 덮인 그 길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그래서 시선이 멈추곤 할 때마다 경탄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그런 찬사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다. 일정에 따라 선교지 교회를 방문하러 차를 타고 가다 보니 곧 그 황톳길이 곤욕스러운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렁이는 황토 먼지가 팔과 신발뿐 아니라 어느새 입안과 콧속까지 끈적끈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숙소로 돌아와서 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온통 황토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 폭의 그림 같았던 그 길이 아이러니하게도 모두를 먼지 투성이로, 그리고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도 숙소엔 깨끗이 씻을 물이 있어 불편하긴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흙먼지로 더럽혀져도 씻을 물이 있으면 다시 깨끗하고 개운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간다의 그 황톳길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세상은 쳐다만 보면 참 아름다워 보인다. 그런데 그런 세상 역시 지나쳐 보면 흙먼지가 풀풀 난다. 누구나 원하든 원하지 않든 죄악의 흙먼지가 몸에 묻거나 스며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 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소망이 되는 것이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세상에서 일렁이는 죄의 흙먼지를 뒤집어써 주홍 같을 수 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며 씻어주시길 간청하면 예수님의 보혈이 양털처럼 희게 깨끗이 씻어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는 세상을 이길 복 받은 인생이다. 예수님의 보혈은 퍼주고 나누어주어도 모자람이 없다. 아무리 사용해도 마르지 않는 영생의 샘물이다. 그래서 그 보혈 안에서 우리는 늘 소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깨뜨리신 몸과 흘리신 보혈을 기념하는 시월의 첫 주 성찬 주일이다. 지금도 변함없이 마르지 않는 생명의 보혈은 우리에게 묻은 죄악의 먼지를 씻어내 줄 것이다. 그 보혈이 온 마음과 몸을 정결하고 깨끗하게 해줄 것이라 확신하며 씻어야겠다.
  • 2022.09.30 / 김용두 기자

    인생수업 - 이성광 목사(구로대교구장)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각자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들이 진짜 중요한 것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하다. 얼마 전 한 연예인이 방송에서 호스피스의 죽음체험이라는 것을 통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죽음체험이란 자신의 죽음을 가장(假裝)해서 인생의 마지막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연예인에게 호스피스 한분이 종이 한 장을 주면서 신체 중 가장 소중한 부위 5개를 적으라고 하였다.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눈, 입, 귀 등 5개를 적었다. 그 다음은 가장 소중한 보물, 그 다음은 소중한 가족 이름을, 그 다음은 내 인생에 놓치기 싫은 것들을 적었다. 호스피스 분이 “당신은 병원에 입원했는데 당신에게 안 좋은 병이 생겼습니다. 목록 중에서 5개를 지우세요”라고 하여 5개를 지웠다. 다시 호스피스 분이 “다음날입니다. 당신의 상태가 아주 안 좋습니다. 2개를 더 지우세요”하자 계속해서 하나씩 목록을 지워 갔다. 결국 소중한 신체 부위를 다 지웠다. 소중한 일도 지웠다. 소중하게 생각한 집도 지우고 통장도 지우고 계속 지워 나갔는데 마지막 가족만이 남았다. 아이들을 지우려고 했는데 안 지워진다는 것이다. 눈물이 나면서 도저히 가족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호스피스 분의 말이 “죽음을 앞둔 많은 환우 분들이 하고 계십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더 많은 시간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더 많은 시간 더 웃으면서 추억을 되새기세요.” 그는 머리에 큰 망치를 맞은 것 같다고 말하였다. 덜 중요한 것에 집중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가족을 더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되면서 내가 일을 왜 하는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 중요한 것들은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 2022.09.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채움과 비움 - 김태선 목사(마포1대교구장)
  •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문제들은 대부분 부족함 때문에 생기는 것보다 지나침 때문에 생기는 일들이 더 많다. 1960~1970년대에는 잘 먹지 못함이 서러움이었다면 지금은 너무 잘 먹어서 문제가 생긴다. 인스턴트식품 그리고 기름진 음식과 과식으로 인해 우리의 몸은 점점 병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질병으로 진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육체의 비만을 넘어 마음의 비만이 문제다. 우리의 인생은 채워도 채워도 만족할 수 없다. 무엇인가 더 채우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욕심이라고 한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바흠이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이 청년은 땅을 얻기 위해 바시키르라는 유목지에 가게 된다. 하루 종일 걸은 만큼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말에 부지런히 땅을 밟게 된다. 그러나 조건이 한 가지가 있었는데 해가 지기 전까지 출발지로 돌아오지 못하면 모두 무효라는 것이다. 욕심으로 가득 찬 바흠은 하루 종일 많은 땅을 밟기는 했지만 출발점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가 얻은 땅은 그를 장사하고 묻은 한 평의 땅이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흠처럼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멈춰야 할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세상 것으로 더 채우기 위해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것이 또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채움과 비움 사이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우리는 사도 바울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인생의 가치관이 흔들렸고 이방인과 복음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나서는 그의 인생의 채움과 비움을 깨닫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한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사도 바울에게 채움은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 외 모든 것은 비움의 대상이었다.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가을이 시작됨을 느낀다. 이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신앙에 무엇을 채워야 할지 그리고 무엇을 비워야 할지 거룩한 고민과 함께 가을을 맞이하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 2022.09.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다시보는 영산 신학과 목회
    문서·방송 선교의 선구자…1988년 기독교 일간지 국민일보 창간
  • 영산은 미디어의 활용이 미미하던 시절, 문서 선교와 방송 선교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닫고 사역에 적용한 선구자였다. 영산은 자신이 가진 뜨거운 선교적 영성을 담아내어 빠르게 전파할 수 있는 멀티미디어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 놀라운 교회 성장을 이루었다. 순복음의 신앙이 한국과 세계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한국의 그 어떤 교회보다 멀티미디어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문서 전도』의 저자 조지 버워는 “기독교 문서는 인쇄된 선교사”라고 말한 바 있다. 문서 선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영산은 누구보다도 문서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사역에 적용하였다. 1964년 당시 순복음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와 관련된 각종 소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순복음지』를 발간했다.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1978년에 이르러서는 영산의 설교와 칼럼, 성도들의 신앙 간증과 구역 성경 공부 및 교회 소식을 담은 『순복음뉴우스』가 되었다. 이후 『순복음가족신문』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문서 선교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영산은 또한 순복음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월간 잡지 『신앙계』를 창간함으로 문서 선교의 폭을 확장했다. 『신앙계』는 기독교의 대중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교양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지, 교회를 하나로 묶는 기독교 잡지로서 자리매김했다. 해방 이후 대중적인 기독교 잡지로는 『신앙계』를 능가하는 잡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신앙계』가 말씀에 기초한 성령운동의 건전한 보급과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성장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인 박명수 박사는 “『신앙계』야말로 오순절 신앙을 한국교회에 널리 전파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영산의 문서 선교의 열정은 『순복음가족신문』과 『신앙계』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7년 한 이단 종교 단체가 일간 신문을 발간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산은 만약 그 단체에서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기독교 일간지 창간에 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1988년 세계 최초의 기독교계 일간지 『국민일보』가 창간되었다. 정부와 사회에 기독교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언론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영산은 신문사를 설립하는 과정 가운데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근거 없는 비난의 목소리로 큰 고통을 받았지만, 믿음의 확신으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나갔다. 복음 실은 일간지 『국민일보』는 매일 하나님의 복음을 한국 땅에 전파하는 발 없는 전도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기독교 정신으로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일간지로서 한국 교계의 대사회적인 발언의 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나아가 기독교 문화의 채널로써 한국 사회에 기독교 세계관을 전파하는 사명도 이뤄가고 있다. 영산의 『국민일보』 창간은 대한민국 1200만 기독교인을 대변하는 신문으로서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매스컴 선교의 새 장을 열었다는 데 큰 의의를 가진다. 영산은 문서 선교뿐 아니라 방송 선교를 통해서도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당시 영산은 복음 전도의 방법을 새로운 형태로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보다도 방송 선교의 파급력과 중요성을 일찍 깨달았던 영산은 1966년 라디오 설교와 1979년 컬러TV 방송을 송출했다. 영산의 라디오 설교 방송은 1979년, 1980년 연속, 전국 청취자 애청 프로그램 조사 결과 청취율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청취자가 많았다. 이처럼 한국교회 방송 선교의 선구자는 단연 영산이었다. 당시 흑백 TV에 익숙했던 공중파 제작자들이 방송 장비와 시스템을 구경하기 위해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견학을 올 정도였다. 방송 선교는 교단의 장벽을 뛰어넘는 데 중요한 매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하는 통로가 되었다. 영산의 방송 선교를 통해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설교 말씀을 듣고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또 위성과 인터넷을 활용한 예배와 설교 실황은 각 지성전 및 지교회 설립과 더불어 교세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영산의 방송 선교는 국내를 넘어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국경을 초월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 1982년에는 미국 TV 프로그램 제작 회사인 KCWC사의 특별 기획으로 주일 예배 실황이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이스라엘, 홍콩, 필리핀, 남아공 등 25개국에 동시 위성 중계되기도 했다. 이처럼 영산의 성령 충만의 복음은 21세기 정보화 시대와 함께 전 세계에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영산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다. 설교뿐 아니라 설교를 전달하는 매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라도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영산의 설교와 성령 충만의 영성은 멀티미디어 사역 시스템을 통하여 세계 곳곳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고 이러한 사역이 세계 교회에 끼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복음의 메시지는 불변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영산의 멀티미디어 사역이 우리에게 남겨준 값진 유훈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9.23 / 김용두 기자

    구역조직
  • 1964~1965년 영산은 건강을 잃고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 보냈다. 이때 그는 성령과 깊이 교제하는 가운데 성경에서 나타난 ‘가정교회’와 ‘평신도 리더’의 중요성을 크게 깨닫게 되었다. 초창기 영산은 자신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건강을 잃고서야 그러한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그 많은 성도를 성실하게 치리할 수 있을지 성령님께 물을 수밖에 없었고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가운데 가정모임을 만들어 모든 성도가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러한 모임을 이끌어갈 수 있는 평신도 리더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통해 영산은 목회가 자기 개인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이를 구역조직 체계를 통해 구체화했다. 구역조직의 도입 이후 교회는 날마다 성장했다.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1980년 15만명의 교인과 1만 구역이었던 교세가 1990년대 초반에는 50만명의 교인과 1만5000여 개의 구역으로 늘어났고 2008년에 이르러서는 75만명의 성도와 2만개의 구역으로 성장했다. 이처럼 조용기 목사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구역조직’이라는 용어는 1978년 그가 직접 집필한 『성공적인 구역조직』이라는 책을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구역조직은 영어로 셀 그룹(cell group)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성공적인 구역조직』을 『Successful Home Cell Group』이라는 영어 제목으로 번역하여 출판한 것에서 기인한다. 영산의 구역조직은 셀 교회 운동 이론에 기초가 되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세계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수되고 있다. 영산은 구역조직을 통해 평신도와 동역하는 것의 중요성을 늘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과 내가 동역하고 나와 성도들이 동역하는 것이 나의 목회였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자신의 사역을 훈련된 평신도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영산은 자신에게 부여된 많은 일을 평신도들과 나누어 짊어짐으로써 그들이 성장해나갈 수 있도록 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이 더욱 풍성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1983년 시작된 구역장대학과 같은 훈련프로그램을 통해 평신도들이 리더로서 갖추어야 할 지식과 자질을 지속적으로 함양할 수 있게 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목회 철학 때문이었다. 영산은 구역조직을 활성화하기 위해 구역예배를 고안했다. 교회가 부흥하고 커질수록 모든 구성원이 골고루 목회적 돌봄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목회자 혼자서 모든 예배를 감당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산은 ‘교구, 지역, 구역’으로 구성되는 조직체계를 고안하여 구성원 모두가 소외됨 없이 목회적 돌봄을 받음과 동시에 예배와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특별히 영산은 구역을 조직하면서 이를 관리하고 인도할 구역장에 여성을 임명했다. 하지만 1960년대에 여성을 리더로 세운다는 것은 당시 사회적인 통념과 인식에 비추어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깊은 고민 가운데 영산은 성경에서 바울도 많은 여성과 동역했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6장 1절은 뵈뵈를 겐그레아 교회의 여집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녀가 사도 바울의 권위 아래에 있긴 했지만, 교회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바울은 그녀를 로마 교회에 위탁했고 이에 뵈뵈는 설교자로서의 권위를 갖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영산은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 내에서 그들과 동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구역조직의 확장과 이를 통한 부흥 성장의 발판에는 이러한 여성 구역장들의 역할이 있었으며 그들이 바로 지금까지 ‘빨간 가방’으로 회자되는 놀라운 부흥의 주역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 나아가 당시 억압받던 한국 여성들의 지위를 고려할 때 이러한 여성을 등용하여 이뤄낸 혁신적인 평신도 사역은 앞으로도 한국 교회사 가운데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영산의 구역조직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은 성도들 하나하나가 작은 공동체로 연합되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소그룹으로 이루어진 조직은 예배와 기도모임, 그리고 친교와 같은 신앙생활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일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구조라는 점에서 교회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모습이다. 영산은 구역조직의 핵심이 바로 이러한 연합, 유대감 형성에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교회를 부흥으로 이끄는 핵심적인 요소라고 확신했다. 더 나아가 영산은 구역조직을 ‘세포조직’으로 비유한다. 세포조직이 자생력을 가지고 스스로 성장하고 확장하는 것처럼 구역조직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분할하여 확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이지만 동시에 가장 작은 단위의 교회들의 모임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도들은 자신의 조직이 나누어지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구역이 성장하여 분할될 때 가장 기초적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으며 이야말로 가장 생명력 넘치는 구조임을 강조했다. 우리 교회의 DNA와도 같은 구역조직의 중요성을 잊지 않고 구역장의 사명과 역할을 소중히 감당하여 영산의 꿈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열매 맺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목회연구소 제공
  • 2022.08.26 / 김용두 기자

    영산의 설교 신학
  • 설교학자 에드윈 다간은 자신의 명저 『설교의 역사』에서 설교야말로 인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Edwin Dargan, A History of Preaching, 8~9). 설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도록 하는 촉매 역할을 하기도 했고, 새로운 문화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인간의 윤리, 관습, 예술, 사회, 과학 등이 변화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교회 내적으로도 설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설교와 교회 부흥이 언제나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 선포가 강력하게 진행되는 곳에는 말씀의 아름다운 역사들이 강하게 일어났으며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부흥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설교자들이 등장해 각 시대의 설교를 갱신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러한 노력들은 설교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했으며, 그 능력의 회복과 함께 설교가 다시 적절하게 되어지는 설교의 부흥을 경험”했던 것이다(김운용,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100). 이런 의미에서 조용기 목사의 삶이야말로 설교의 능력을 회복하고 설교를 통해 교회의 부흥을 경험했던 삶임을 알 수 있다. 설교야말로 영산 조용기 목사의 인생이었던 것이다. 영산은 목회 초기부터 설교자가 ‘설교 철학’을 가져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목회나 설교에 있어서 한 베이스, 즉 한 철학이 있어서 다른 모든 것을 거기에 받아들여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조용기, 『설교와 목회자 관리』, 129). 그렇다면 영산의 설교 철학, 곧 설교 신학은 무엇인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다. 영산의 설교는 철저히 성경 중심, 예수님 중심, 십자가 중심의 설교이다. 그와 같은 설교의 중심에 오중복음, 곧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죄 용서받은 것(중생의 복음), 성령의 은혜를 받는 것(성령 충만의 복음), 질병에서 치료받는 것(신유의 복음), 저주에서 해방을 얻는 것(축복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것(재림의 복음)이 있다. 또한 영산이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이곳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심을 증거했다는 점에서 그의 설교의 중심에 삼중축복이 놓여있음도 알 수 있다. 영산은 오중복음을 바탕으로 성도들이 삼중축복을 받는 것을 설교의 목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조용기, 『설교와 목회자 관리』, 139). 한편 영산 설교 신학의 근거가 되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은 그의 성경해석과 설교의 내용을 구성하는 근거이기도 했다. 영산은 말한다. “삼박자 축복을 외침과 동시에 저는 오중복음의 진리도 외쳤습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주님과 화목을 이루고, 병 고침을 받고, 저주에서 해방을 얻고, 영생 천국까지 얻게 되니 사람들에게 강력히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메시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쉬지 않고 삼박자 축복과 오중복음의 전인구원을 외치니 그들은 점차 희망을 갖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조용기, 『교회성장과 성도관리』, 45~46). 즉, 영산은 창조-타락-구원-축복이라는 삼중축복의 틀을 통해 성경 본문을 해석하고 오중복음의 내용을 자신의 설교 속에 녹여냈던 것이다. 영산은 보기 드물게 목회자로서 설교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집필했다. 그것은 『나는 이렇게 설교한다』(서울말씀사, 1984)와 『설교는 나의 인생』(서울말씀사, 2005)이다. 이 책들은 단순히 그의 설교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것을 어떻게 하나의 설교문으로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그의 경험을 담아낸 것들이다. 그러나 이 책들은 단순한 경험담을 진술한 것이 아니다. 현대 설교 이론에 근거해 설교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설교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성삼위 하나님 중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기 목사의 설교는 언제나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중심성을 가진다. 이것은 현대 설교학자들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현대 설교에서 하나님 중심성이 차츰 옅어지면서 “예수님의 복음의 메시지가 약화되고 대신 윤리적인 삶과 성공 신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조지훈,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설교 신학”, 78). 또한 설교에 있어서 성령의 강조 역시 영산 조용기 목사가 한국교회 설교 사역에 끼친 영향 중 하나이다. 영산은 성령님을 지금 이곳에서 체험되는 분으로 인식했고 이를 통해 설교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할을 강조했다. 설교와 관련해 영산이 이해한 성령님의 역할은 ‘현재성’과 ‘우발성’으로 요약된다. 성령님은 시대와 공간과 문화를 초월해 지금 이곳에서 역사하시는 ‘현재적인 성령님’이시다. 또한 ‘우발성’이란 ‘즉흥성’과 같은 의미로 설교 현장에서 설교자의 생각이나 계획과는 달리 원하시는 대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설교가 행해지는 ‘지금’ 이곳에서 성령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시도록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 들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기도를 통해 성령과 교통하는 훈련을 많이” 해야 한다(조지훈,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설교 신학”, 81).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영산 조용기 목사의 육성 설교를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남긴 설교학적 유산은 여전히 한국교회의 부흥과 설교 발전을 위해 필요한 디딤돌이다. 그 디딤돌을 딛고 일어설 후배 설교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한국교회 가운데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2.07.2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평신도를 위한 사도행전 이야기
    (71)제2차 선교여행-고린도교회의 부흥
  •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서 꽃을 피운 곳은 고린도였다. 고린도에 오기까지 그가 헬라의 주요 도시 네 곳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끊임없는 박해와 환난 속에서 겨우 탈출하는 위기일발의 연속이었다. 그에 따라 선교의 열매도 그다지 풍성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인적, 물적 교역이 가장 활발했고 경제적으로는 풍요했지만 각종 이방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음란 방탕으로 영적 도덕적으로는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하게 하는 고린도에 도착했으니 바울이 의기소침해지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장미꽃을 피우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바울의 든든한 동역자가 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먼저 로마에서 고린도로 보내셔서 천막 만드는 일에 종사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생업이 같은 바울은 자연스레 그들과 함께 살며 일도 같이 하게 되었다.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거기에 모인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권면했다(행 18:4). 그때 마침 베뢰아에 있던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로 내려와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있고 데살로니가를 급히 떠난 바울을 여전히 사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살전 3:6~8). 기쁜 소식을 들은 바울은 더욱 담대히 “예수가 메시야(그리스도)”임을 선포했다. 그러자 회당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하기 시작했다. 이에 바울은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 18:6)라고 선언하고 회당 옆에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이방인 중에서 유대교 신앙을 가진)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갔다. 바로 이 집이 고린도교회가 되었다. 새로운 모임 장소에서 회당장 그리스보 일가를 비롯해서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 그즈음 밤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담대함과 확신을 주셨다.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b~10). 이 말씀 그대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 바울 일행이 2차 선교여행 중 가장 긴 기간인 1년 6개월 동안이나 고린도에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다.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이 되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서 법정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총독에게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라고 고발했다. 바울이 이에 대해 해명하려고 하자, 총독은 그를 제지하면서 “문제가…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라고 하면서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냈다. 그러자 그들은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렸지만 갈리오는 모르는 척 했다. 며칠 후 바울은 고린도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2차 선교여행의 출발지인 안디옥을 향해 떠났다. 인간의 눈과 하나님의 눈은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바울의 고린도 선교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복음의 불모지 같았던 고린도가 부흥의 도가니가 되어서 바울이 2년 가까이 그곳에 머물며 복음을 전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인간의 모든 불가능은 가능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2.09.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0)제2차 선교여행 - 고린도 선교의 시작(행 18:1~11)
  • 바울은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도착했다. 그때의 바울의 심경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다. 그가 지나온 네 개의 도시에서 큰 성과 없이 겨우 목숨만 보전해서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마게도냐의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어느 한 곳에서도 박해와 고난이 없었던 곳이 없었다. 아가야의 아덴에서는 물리적 박해는 없었지만 세상 철학과 다신론적 우상 숭배라는 정신적, 영적 박해로 인해 많은 회심자를 얻지 못했다(행 16~17장). 이런 상황에서 고린도는 바울에게 더더욱 기대감을 주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고린도는 우상숭배와 음란, 방탕이 성행하는 세속적인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해주는 좁은 지협(地峽)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서로 두 개의 항구를 끼고 있어서 수 많은 사람들과 문물이 오가는 교통과 교역의 요지였다. 그래서 고대 시인 호머는 그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 ‘부유한 고린도’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고린도에는 ‘사랑과 미의 여신’으로 섬기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1000명이 넘는 ‘성창’(聖娼)들이 있어서 그곳을 찾는 자들과 음행을 벌였다고 한다(고전 6:12~20의 배경). 이처럼 물질적으로는 풍요했지만 영적, 도덕적으로는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하게 하는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의 바울의 심경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이런 바울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장차 그의 든든한 동역자가 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미리 고린도로 가게 하셔서 그를 돕게 하신다. 사실 이들은 로마에서 살고 있었는데 당시의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가 공포한 ‘유대인 추방령’(AD 49년)에 따라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로 이주했다. 마침 그들의 직업이 바울의 직업과 같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어서 바울은 그들 부부와 함께 살면서 같이 일을 하며 고린도에 정착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고 떨고 있던 바울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확신의 말씀을 주셨다(행 18:9~10). 하나님께서는 먼저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고 말씀하신다. 우상숭배와 음란의 도성이라고 해서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고 명령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다음 하나님께서는 마치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듯이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나중에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담대하게 선포했다(롬 8:31). 끝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으니라”는 말씀으로 바울에게 고린도 선교에 대한 확신을 주신다. 이 말씀대로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나 고린도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지고 바울은 2년 가까이 그곳에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행 18:11). 영적으로 볼 때 가장 열악한 지역이라고 생각되었던 고린도에서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은 귀중한 교훈을 준다. 우리 눈으로 볼 때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황무지가 변하여 장미꽃 동산으로 바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2.08.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69)제2차 선교여행 - 아덴 선교(하)(행 17:22~34)
  • 마게도냐(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에서 온갖 박해를 당한 뒤 아가야의 아덴(아테네)으로 피신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면서 온 도시에 가득한 우상과 신전들을 보고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대 헬라 문화와 철학, 문명의 발상지로서 아덴의 웅장한 건물들과 조각, 신전들은 바울의 눈에는 한갓 우상 박물관이자 전시물에 불과했다. 그래서 바울은 만나는 사람마다 헛된 우상숭배를 그만두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했다. 그러자 뭔가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는 아덴 사람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 법정으로 데려가서 할 말을 하라고 했다. 바울은 법정 가운데 서서 아덴 사람들의 만신전(판테온) 숭배를 연결 고리로 삼아 그의 설교를 시작한다. 아덴 사람들의 유별난 ‘종교심’을 언급하면서 신전들 중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을 보게 되었는데, 바로 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취지로 그의 설교를 풀어나간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분”)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천지의 주재”)이심을 분명히 밝힌다. 또한 우상숭배의 대상이 아니시며(“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온 생명체를 보존, 유지하시는 분(“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이시라고 설명한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으로부터 인류가 시작되어 온 세상에 퍼져 살게 하시고 그들이 사는 기간과 살 지역을 특정하셨는데, 이를 통해 그들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도록 하시기 위함(롬 1:20 참조)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강변한다. 계속해서 바울은 성경을 모르는 아덴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고대의 유명한 시인들의 말을 인용한다. 에피메니데스의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는 말과 아라투스의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바울은 이 문구가 곧 하나님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으니 하나님을 사람들이 만든 우상처럼 섬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끝으로 바울은 지금까지는 잘 몰라서 행한 우상숭배를 회개하고(“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를 믿으라(“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는 구원의 메시지로 결론을 맺는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아덴 사람들은 엇갈린 반응을 나타냈다. 어떤 자들은 바울이 말한 “죽은 자의 부활”을 조롱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다시 듣고 싶다고 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날 때 몇몇 사람들이 믿었는데, 그중에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행 17:34). 바울의 전도 전략인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고전 9:22)이 아덴에서보다 더 잘 나타난 곳이 없다. 구약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 청중 앞에서 성경 대신 그들이 익숙한 그리스 문화를 접촉점으로 해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구원의 열매를 맺어 나갔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b). 김호성 부목사(목회신학)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약산책 신약산책
    요한계시록-세상의 끝을 보다
  •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간의 흐름을 따라 흐른다. 그 시간은 언젠가는 끝에 다다를 것이다. 시간의 끝에 이르렀을 때 세상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간의 끝, 즉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될까? 요한계시록에 그 해답이 담겨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배경, 구조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1:1~2). 사도 요한은 주후 90년경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정치범수용소인 밧모섬에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때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도미티아누스는 황제숭배를 로마 전역에 강요했던 군주로 자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형벌을 가했다. 오직 예수님만을 구주로 고백했던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대대적인 박해에 시달렸고 많은 이들이 순교를 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야 했던 공포의 시대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요한이 주님께 계시를 받아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기록되어있다.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의 공통점은 예수님께만 충성을 바치라는 것이다. 4~11장은 세상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인 일곱 인과 일곱 나팔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12~19장은 예수님의 승리와 사탄의 패배가 기록되어 있다. 20~22장은 천년왕국의 시작과 사탄의 완전한 패망,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의 도래가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의 장르 요한계시록은 편지이다(1:4).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주님께 말씀을 받아 기록한 내용을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수신자들이 있고, 발신자인 사도 요한의 구체적인 메시지가 담겨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이다(1:3, 22:7). 예언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하는 말이다.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만큼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길고 자세하게 다룬 책은 없다. 요한계시록은 묵시이다(1:1). 묵시도 예언처럼 앞으로 벌어질 일을 말하지만, 예언과 구별되는 점은 예언이 ‘현재의 세상’이 변화될 것을 전한다면, 묵시는 ‘현재의 세상’이 지나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올 것임을 전한다는 것이다. 묵시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지금의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 즉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 기독교 묵시의 핵심 주제이다. 요한계시록을 볼 때 유념할 점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하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징으로 가득 채워진 이 어려운 책을 해석함에 있어서 무엇을 유념해야 하는지 살펴보는 일은 가능하다. 첫째, 요한계시록을 역사의 사건이 차례대로 기록된 책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이 역사에 벌어질 일들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책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이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적 역사관에서는 ‘역사 속에 펼쳐질 구체적인 사건들을 알아가는 것’보다 ‘예수님이 초림하심으로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역사 속에 일어날 일을 알려 하기보다 예수님이 구원을 완성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됐다는 확신을 품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둘째, 요한계시록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한 편지임을 기억한다. 혹자들은 요한계시록을 현대에 있을 일을 암호화하여 기록한 책처럼 여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편지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요한계시록이 ‘현대’에 있을 사건을 암호화한 책이라면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 했던 ‘2000년 전’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책이 처음 쓰였을 때의 목적을 살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교훈 시대정신에 고개 숙이지 말라 요한계시록이 쓰일 당시 로마제국은 다신교 문화가 시대정신을 지배했으며 이 같은 풍조에 편승하지 않으면 큰 손해가 따랐다. 사회적으로 소외됐으며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다신’(多神) 중 하나인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일하신 예수님만을 섬겨야 하는 그리스도인이 이 같은 시대정신을 따를 수는 없었다. 요한계시록은 다신교라는 반기독교적 시대정신에 휩쓸릴 위험에 놓인 성도들에게 유일하신 예수님만을 따르라고 말씀한다(14:4).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충성을 바친 성도에게는 ‘생명의 관’이 수여될 것이다(2:10).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기독교적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시대정신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두려워 말고 소망하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을 유발하는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 승리하실 것임을 말씀하는 책이며, 우리가 받을 구원과 우리가 입성할 하나님 나라를 예언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위로의 책이고, 사랑의 책이며, 소망의 책이다. 요한계시록 중간 중간에 기록된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찬양은 우리에게 하늘의 감격을 선사하고 결미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는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품도록 해준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우리, 그리스도 안에 속한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의 끝 날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다. <끝>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12.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교회를 지켰던 믿음의 선조들
  •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1:4) 성경에는 예레미야와 같은 긴 책도 있는 반면 매우 짧은 책도 존재한다. 이번에 다룰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가 그렇다. 짧은 책의 장점은 하나의 핵심 메시지가 일관되고 분명하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를 개관하고 이 책들이 전하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요한이서 요한이서 개관 요한이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사도 요한의 영향력 아래 있던 작은 교회 공동체였을 것이라 생각된다(1:1). 요한이서는 동일한 저자의 책인 요한일서와 강조하는 메시지가 유사하다. 바로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에서 울려 퍼지는 요한의 목소리를 통해 이단으로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호하고 교회를 지키고자 했던 노(老)사도의 열심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이서의 교훈 ① 서로 사랑하라(1:5): 요한일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책답게 요한이서는 사랑의 메시지가 강조된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특별히 성도 간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했다. 이는 한편으로 교회 내의 조직이나 위계적 직제에 대해 요한이 유독 거부 반응을 보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교회의 조직과 직제는 필요하다. 왜냐하면 교회를 질서 있게 운영하고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효율적으로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과 직제 때문에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조직과 직제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겨 운영돼야 한다. ②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1:7): 저자 요한은 교회를 향해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고 목 놓아 외친다. 이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자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지 않으셨으면 즉 육체로 오지 않으셨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십자가 대속은 성육신을 전제한다. 따라서 성육신 없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요한삼서 요한삼서 개관 요한삼서의 저자 또한 사도 요한이다. 요한삼서의 특별한 점은 저자가 특정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가이오'라는 성도이다(1:1). 나아가 요한은 요한삼서에서 특정 개인을 책망한다. 그 사람은 '디오드레베' 당시 교회 지도자이다(1:9). 이처럼 특정인들의 이야기가 담긴 요한삼서의 특징을 통해 우리는 교리적 메시지뿐 아니라 성도 개개인의 삶과 이야기도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자, 가이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1:2). 우리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이 성경 구절은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전한 말이다. 가이오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 같은 축복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요한삼서에 따르면 가이오는 참된 것을 분별할 줄 알았다. 그는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러 온 순회 설교자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사랑으로 환대했으며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1:5~6). 우리도 가이오처럼 참된 것을 분별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삼중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다서 유다서 개관 유다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이다(1:1). 저자가 유대인이기 때문인지 유다서는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유다서는 유대인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가 내용 중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유다서는 이단, 특히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핵심 메시지이다. 그런데 유다서의 독특한 점은 보통의 서신들이 이단들의 거짓된 주장을 교리적으로 반박하는 일에 집중하는 데 반해 유다서는 이단들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힘을 쏟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단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규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는 귀중하다 유다서에서 책망 받는 이단 영지주의는 육체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 육체를 어찌나 혐오했던지 이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육체를 지니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기까지 했다. 성육신에 대한 부인은 명백한 이단적 주장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육체는 정말 무가치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성육신이 그 증거이다. 부활한 예수님이 '육체'를 지니셨다는 것 또한 증거가 된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셨다고 말씀한다(고전 15:20, 44). 하나님은 '육체'를 지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창 1:31). 우리 또한 마지막 날에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육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값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전인격을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육체는 무가치하니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틀렸다. 그리스도인은 영, 혼, 육 모두를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거룩하고 온전하게 지켜야 한다. 유다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분이라고 말씀한다(1:24). 우리를 흠 없이 거룩하게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마지막까지 우리의 육체를 거룩하게 지켜나가자.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11.2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요한일서-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신학자 윌리엄 틴데일은 요한일서에서 받은 감동을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요한일서는 사랑의 서신이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요한일서의 저자, 특징 요한일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다.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저자 자신이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는 표현은 저자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요한임을 증명한다. 요한은 자신의 또 다른 편지인 '요한복음'에서 스스로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요 13:23)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요한일서에서도 사랑을 핵심 가치로 내세운다. 그래서 요한에게 붙여진 별명이 '사랑의 사도'이다. 요한일서의 특징은 '사랑'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의 의'를 강조했던 로마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또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씀한다(롬 3:26). 반면 하나님의 사랑을 기치로 내세우는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씀한다(4:9). 이는 요한의 또 다른 편지인 요한복음에서도 강조되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요한일서의 배경 요한일서는 주후 90년경에 쓰였다. 당시 교회는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영지주의 이단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거룩하지만 육신은 부정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면 육신은 아무렇게나 내버려 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육신으로 죄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요한일서는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해 진리의 빛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라고 역설한다. 영지주의자들은 한술 더 떠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지 않으셨고 오직 영으로만 오셨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이 부정한 육신을 입으실 리 없으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영으로만 오셨다는 이단 사설을 '가현설'이라 한다. 요한일서는 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반대한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첫 번째 구절에서부터 자신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즉 예수님은 성육신하셨다고 말한다(1:1). 요한일서의 구조 요한일서는 비교적 짧은 서신이지만 그 안에서 핵심 주제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1장은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해 말씀한다. 빛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거짓이 없이 진리 안에서 행해야 한다. 혹 죄를 범했다면 필히 죄를 자백해야 한다. 스스로를 속여 죄가 없다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실 것이다. 2장에서도 빛 안에 거하는 삶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특별히 2장에서는 형제 사랑을 강조한다. 그리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찬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이단을 물리치라 말씀한다. 3장은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관해 말씀한다. 재림의 소망을 지닌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3: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3:9). 요한일서는 죄를 짓지 않는 삶을 구체화하는데,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4장은 이단을 분별하라 말씀한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이 육체를 지니고 오셨다는, 즉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는 이단적 사상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보이셨고, 이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5장은 예수님이 "물과 피"를 지니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한다(5:6). 이는 예수님이 육신을 지니셨음을 증언하는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육신을 제물로 드리신 십자가 사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며 죽으시고 구원을 이루셨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도록 한다. 요한일서의 교훈 성육신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도 없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주셨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육신을 지니고 오셔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4:9~10). 그러므로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부인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하나님을 만난다. 사랑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독생자를 희생하신 사랑의 하나님께 속하게 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요한일서는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4:7). 사랑의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가장 값진 예수님을 내어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자!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실 것이다(4:12).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10.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 성경읽기
    (19)영적 무장을 위한 3대 신앙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했다면 영적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영적 무장이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전쟁에 임하는 병사가 무장 없이 맨몸으로 나서는 법이 없듯이 영적 전쟁에서도 영적 무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번 시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무장, 곧 3가지 신앙적 무장에 대해서 알아보자. 1. 창조 신앙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리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장본인이시다. 이 세상 모든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아무리 과학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진화론과 같은 이론으로 이 세상을 설명하려고 해도 그런 과학은 극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우화가 있다. 어느 날 과학자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와 말했다. “우리 과학이 발전해 흙으로 사람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죠.” 하나님이 답하셨다. “정말 그러한가? 그렇다면 네 말대로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보아라. 대신 네 흙으로 해라.” 이 우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 우주의 근원은 어디 있는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셨다.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전 12:1~2).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렇다면 창조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 영광을 올려 드리며 살아야 한다. 2. 십자가 신앙 예수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함을 얻으며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축복을 얻은 것이다. 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말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어야 함을 천명한 것이다. 달리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빼놓고서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갈라디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예수님이 율법이 정한 대로 나무에 달려 죽는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그렇다면 십자가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담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앞에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만큼 나를 사랑하셨고 모든 저주의 굴레에서 해방하셨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우리가 삶의 형편과 조건, 세상의 시선에 위축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3. 부활 신앙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은 부활 신앙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써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정사실이다. 그 증거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 둘째, 부활의 목격자들이 있다. 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비겁한 도망자들이 되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다시 그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자까지 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부활이 거짓일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이런 증거에도 부활이 거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셋째,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이 200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거짓에 자기 목숨을 걸 수 있었겠으며 자기 인생을 헌신해 가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부활은 사실이고 진리이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을 가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결단코 세상에 얽매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는 인생길을 걷고 있으며 잠시 왔다가 떠날 나그네 인생을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 삶의 종착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기 선교 온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말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이 세상에 얽매여 잠시 잠깐뿐인 헛된 것을 찾다가 인생의 허망함에 무릎을 치며 후회하지 말고 부활 후 누릴 영원한 생명을 바라며 살아가자. 오정섭 목사
  • 202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긍정의 믿음
  •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선교라고 정의되는 시대가 찾아왔다.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만큼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목받는 시대라는 뜻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전하는 복음의 진정성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에서 찾는다. 따라서 성경을 삶의 원리 원칙으로 삼는 성경적인 삶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절대긍정의 믿음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결론은 성도의 최후 승리를 말하고 있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이 성도의 최후 승리를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절대긍정의 믿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그 땅을 정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반응에서 절대긍정의 믿음이 지녀야 할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각 지파에서 대표 한 사람씩을 선발해 모두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낸다. 그들은 40일간 그 땅을 돌아본 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며 그 땅의 과일들은 극상품이라고 할 수 있고 그들이 누리는 것은 풍요롭다는 데에 일치된 의견을 내놓는다(민 13:25~27).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의견은 긍정적인 의견 2명, 부정적인 의견 10명으로 갈린다.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두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갈렙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민 13:3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취하고자 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로운 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비관적인 전망과 비판적인 어조에 쉽게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은 미래를 알 수 없고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일 마주하는 삶의 과제 앞에 불안, 염려, 두려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자녀 된 우리의 삶을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신 분이시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한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민 14:7~9).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육신의 눈으로 확인되는 그 땅 주민들의 어떠함에 주목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며 자신들에 대해서도 악평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삶에 부정적이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분명히 차지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하나님은 그 땅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고, 모세에게 정탐꾼을 보내라고 말씀하실 때도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했기에 그 땅을 차지하는 데에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성경 말씀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책이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단순한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온갖 좋은 약속을 붙잡는 적극적인 신앙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소유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실 것에 대한 거룩한 원함,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으로 충만한 절대긍정의 믿음으로 살아가자.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을 차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6.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구속사적인 삶 - 감사(2)
  • 대한민국 법 중에 최고 상위법은 헌법이다.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행복추구권이다. 그런데 행복권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국가도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해 줄 따름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해진 조건이 있으면 국가가 일정 수준의 국민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행복의 근원, 감사 그렇다면 행복은 어디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에 있다. 감사하면 행복해진다. 감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감사가 저절로 되거나 쉽게 되지 않는다. 만약 감사가 저절로 되고 쉽게 되는 것이면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니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감사는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감사가 쉬운가? 불평이 쉬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한 달 동안 5층 집까지 매일 걸어가야 한다고 가정하자. 억지로라도 계단을 오를 일이 생겨 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할까? 아니면 곧바로 불평할까? 감사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원망 불평이 자연스러운 우리 본성이라는 중력, 그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감사가 등산처럼 힘든 이유다. 그러나 등산도 하면 할수록 쉬워진다. 감사가 그렇다. 산 정상을 향해 오르다 보면 달라지는 것이 있다. 시야다.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감사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못 보던 것을 보게 된다. 감사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불평하는 일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일들 외에는 제대로 못 본다. 불평하는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물론 해결이 돼도 불평할 거리는 또 있다. ‘왜 이제야 해결이 되는 거지?’ 감사하는 사람은 시야가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다르다. 눈에 거슬리는 것보다 세상 아름다운 것이 훨씬 더 많다. 보이는 게 다르니 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집착했지?’ 하는 생각이 드니까 감사하는 사람의 말에는 여유가 있다. 타인에 대한 포용의 한도가 그만큼 크다. 원망 불평으로 마음의 용량이 늘 마이너스가 되어 가면 타인에 대한 용납의 한도가 계속 줄어든다. 감사를 결단하고 훈련하자. 감사한 다음에 기쁨이 따라오고 불평한 다음에 짜증이 따라온다. 감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가지만 불평은 사탄이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삶을 이끌어 간다. 감사의 종점은 천국이고 원망 불평의 종점은 지옥이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 넘치는 감사 우리의 감사가 어떠한 감사가 되어야 하는지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우리 삶은 예수님 안에 있다. 예수님께 우리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다. 여기저기 왔다 갔다, 이리저리 오락가락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콕 박혀서 사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성장하는 여정이다. 말씀대로 살면서 굳센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정리하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셨으니 예수님 안에 뿌리내리고 말씀 따라 사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이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누가 믿음이 강한 사람일까? 감사하는 사람이다. 내 믿음의 강도는 감사가 말해 준다. 내 믿음이 명품인지 불량품인지는 감사가 보여 준다. 감사는 명품 믿음의 보증서다. 감사가 없다면 불량품 믿음이다. 감사는 넘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넘치는 감사다. 자기 분량 이상의 감사를 하는 것이다. 내 기준 이상의 감사, 내 판단 이상의 감사, 내 감정 이상의 감사, 내 선택 이상의 감사다. 그러려면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가 가능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주로 영접했기 때문이다. 주는 ‘주인’을 말한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니까 감사하라는 것이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으니”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영접했으니”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직분, 예수는 이름이다.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는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그리스도가 먼저 나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서 하신 일에 강조점이 있다. 구원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떠난 내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다. 나의 주님이 되셔서 천국 가는 그날까지 내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책임져 주신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경이 다시 쓰이기 전까지는 변하지 않는다. 내 삶의 형편과 조건은 오락가락해도 나를 향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주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삶의 형편, 조건, 기분, 감정과 상관없이 감사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범사에 감사, 무조건 감사, 일평생 감사할 수 있다. 감사하자.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될 때 감사하자. 감사하면 사탄이 틈타지 못한다. 영적 시야가 넓어지고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관계가 회복되고 인생이 달라지고 행복해진다. 아니 이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anksgiving’뿐만 아니라, ‘Thanks-living’하자! 오정섭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신학연구소)
  • 2022.05.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뿌리깊은 순복음
    (128)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1>
  • 허탄하고 악한 자랑은 스스로 올무와 함정에 빠지게 만들어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특히 ‘자랑’은 그 특성상 풍선처럼 부풀려 과시하며 말하게 되는 습성이 있어 자주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거나 과시하려고 허위로 자신의 이력이나 경력을 부풀려 기록했다가 망신을 당하는 유명 인사들의 이야기는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흔한 일이 돼버렸다. 그들의 결말은 너무나 부끄럽고 비참하다. 이처럼 성경은 ‘이생의 자랑’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고 악마적이라고 말씀하며(요일 2:15~16), 이러한 자랑은 허탄한 자랑이며 악한 것이라고 기록한다(약 4:16). 사슴 한 마리가 숲속의 샘에서 물을 먹는데 물에 비친 자기 자신을 보니 뿔이 얼마나 장엄하고 훌륭한지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와 달리 얇은 다리를 보니 너무 볼품이 없어 불만이었다. 다른 동물들 앞에서도 뽐을 내며 자신의 뿔을 자랑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사자 한 마리가 덤벼들었고 사슴은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사자도 빠르지만 평지에서 뛰는 것은 사슴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끝까지 사자가 쫓아오자 사슴은 울창한 숲으로 숨어들었다. 아뿔사, 그것은 실수였다. 울창한 나뭇가지에 사슴이 그렇게 자랑하던 뿔이 걸리고 말았다. 사슴은 스스로 뽐내던 장엄한 뿔 때문에 결국 사자에게 잡아먹혔다. 누구든지 자랑을 하다 보면 그것의 올무에 걸리고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이목구비도 수려하며 특히 그 머릿결은 여느 여자들보다 아름답고 탐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잘 난 것을 감사히 여기고 아버지 다윗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했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반란의 우두머리가 돼 아버지 다윗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반역을 꾀했다. 어느 날 아버지를 쫓아가다 그 탐스러운 머리채가 상수리나무에 걸리게 됐다. 결국 타고 가던 노새만 빠져나가고 나무에 매달려 버둥거리고 있는데, 때마침 다윗의 장수 요압의 군사들이 발견했고 그를 쳐 죽이고 말았다(삼하 18:1~18). 허탄한 자랑이 그를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는 성도들은 자랑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야훼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야훼의 말씀이니라”(렘 9:23~2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2.09.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27)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40>
  • 십자가 사랑 체험해 성령 충만한 성도는 결코 자기를 자랑치 않아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자랑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원어 ‘페르페류오마이’는 보다 쉬운 의미로 ‘풍선처럼 부풀려 말하다’라는 뜻과 ‘무익한 잡담을 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타락한 인간 본성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고무풍선처럼 부풀려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자기를 자랑하며 잘난척함을 의미하는 우리말 ‘뻐기다’는 ‘우쭐대며 자랑하다’라는 뜻을 잘 드러낸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자랑은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감추려 하는 무의식적 행동’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진정한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해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결코 자기를 자랑하지 않는다(갈 6:14). 세계정복을 꿈꿨던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왔던 워털루 전투(1815년)의 영웅 웰링턴(A. Wellesley, 1769~1852) 장군이 승전기념 파티를 열었다. 함께 공을 세운 육해공군의 장군들이 모두 모였다. 우쭐해진 웰링턴은 참석자들에게 보석이 촘촘히 박힌 자신의 지갑을 자랑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방금까지 있던 지갑이 사라졌다. 깜짝 놀란 웰링턴은 “이 방에 내 보석 지갑을 훔친 범인이 있다. 어서 문을 닫아라!”라고 소리쳤다. 순간 참석자들은 소지품 검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때 한 노(老) 장군이 소지품 검사를 반대하며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결국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던 그가 범인으로 소문이 났다. 1년 후에 다시 파티가 열렸다. 1년 만에 파티 외투를 입던 웰링턴은 깜짝 놀랐다. 도둑맞은 줄 알았던 보석 지갑이 외투 주머니에 있었던 것이다. 웰링턴은 황급히 그 노장군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이렇게 물었다. “그런데 왜 소지품은 검사를 거부했는가?” 노장군은 “사실 그날 밤 아내와 아이들이 집에서 굶고 있었고, 제 주머니에는 가족에게 줄 빵 몇 조각이 들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답했다. 그 말에 웰링턴은 눈물을 흘리며 하며 다시 용서를 구했다. 자신이 호화스런 잔치를 여는 동안 부하의 가족은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웰링턴은 그 어떤 것도 자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고난을 겪고 있는 이들을 생각하며 자랑치 않음으로 참된 사랑을 실천하길 소망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약 1:9~11).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2.08.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26)순복음의 7대 신앙 ­-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39>
  • 지나친 자랑은 형편 어려운 이웃에게 좌절과 상실감 안겨줘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 ‘자랑하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원어 ‘페르페류오마이’는 ‘허영심이 강한, 허풍을 잘 떠는’이라는 뜻을 가진 ‘페르페로스’에서 유래했다. 주로 쓰이는 의미로는 ‘자만심이 강하다’ ‘허영심이 강하다’ ‘허풍떨다’ ‘자랑하다’ 등이 있는데, 온갖 미사여구를 사용해 상대방을 칭찬하며 아부하는 ‘아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오직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 단 한 번 사용됐다. 초대교회 중 하나인 고린도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신령한 은사들이 나타났다. 문제는 때로는 그러한 것들이 자랑거리로 왜곡돼 변질해 버렸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를 경고하며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으며,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다(고전 1:29~31). 자랑은 시기, 질투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시기와 질투가 다른 이들과 비교해 자신이 열등하다고 여길 때 일어나는 감정이라면 자랑은 이웃과 비교해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될 때 일어나는 감정이다. 자랑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연약하고 형편이 어려운 이웃에게 깊은 좌절과 상실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높은 장벽을 쌓는 계기가 돼 다시 메꿀 수 없는 거리감을 형성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요일 2:16). 네 명의 아이들이 풍선을 들고 운동장에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한 아이는 노란 풍선, 다른 아이는 하얀 풍선, 또 다른 아이는 파란 풍선 그리고 나머지 아이는 빨간 풍선을 들고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놀던 중 갑자기 파란 풍선이 ‘뻥’ 터져 버렸다. 그 아이는 노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서럽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곁에 있던 하얀 풍선을 갖고 있던 아이가 순간 자기의 풍선을 꼬집어 터뜨렸다. 그러자 울던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그것을 바라봤다. 바로 옆에 있던 노란 풍선을 갖고 있던 아이도 자기의 풍선을 꼬집어 터뜨렸다. 뒤이어 빨간 풍선을 갖고 있던 아이는 자기의 풍선을 하늘 높이 날려버렸다. 그 순간 한 아이가 웃기 시작하자 나머지 세 아이 모두 ‘깔깔’대며 웃었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이란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고통과 어려움을 함께하고 자기를 부인(否認)하는 행동이다. 성령으로 충만해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깨달아 실천하는 성도들은 결코 자기 자랑을 늘어놓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깊이 인식해 항상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의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빌 2:3~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2.07.22 / 김용두 기자

    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46)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②
  • 급진적 청빈운동 - 발두스파와 카타리파
    계속되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인해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동방의 성지에서 굶주리고 헐벗은 가운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고향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물질적인 것에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청빈한 삶을 본받으려는 열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더욱 자세히 알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참전을 종용했지만 이제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은 외면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세속화된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더 이상 사람들의 영적·지적 목마름을 해소해주지 못했고, 결국 이러한 상황은 12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종교적 개혁 운동을 출현시켰다. 12세기의 청빈운동은 성직자 수도자에게서 영적 목마름을 채우지 못한 신자들이 직접 복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생활로 돌아가려는 개혁 운동이었다. 그 출발선에 발두스파와 카타리파가 있었다.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청빈, 설교, 참회, 자선이었다. 특별히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라고 불리웠던 발두스파는 1173년경 부유한 상인이었던 발두스가 모든 재산을 나눠주고 자국어로 된 성경 읽기를 강조하며 청빈과 속죄에 대해 설교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나 리옹의 주교는 그들이 라틴어 성경을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평신도로서 설교하는 것을 못마땅해했고 결국 1184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발두스파는 보편적 사제직만을 인정하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완전한 청빈생활을 하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전할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며 점차 교회로부터 이탈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단 심문자들은 수상쩍은 사람에게 “사도신경을 외워 보라”고 하고 외우지 못하면 발두스파 사람으로 간주해서 이단으로 처벌했다. 이는 발두스파가 사도신경을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가 만들어낸 것으로 여겨 강하게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삶을 추구했던 발두스파와 달리 카타리파는 마니교의 이원론을 따르는 자들이었다. 프랑스 알비를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알비파라고도 불린다. 이들에 따르면 전쟁과 죽음, 가난과 질병으로 가득 찬 세상은 구약의 악한 신(=렉스 문디)에 의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신약의 선한 신은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천사 중의 하나였던 그리스도를 오점이 없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자’(카타리)로 파견해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철저한 금욕생활을 강요했으며 결혼조차 거부했다. 또한 세속적 권력과 부를 탐하며 가난한 백성을 돌보지 않는 교회와 성직자들을 사탄의 회당이요 위선자로 폄하하며 성사를 거부했다. 카타리파 성직자들의 철저한 금욕생활과 청빈생활은 당시 고단한 삶을 살아가며 부유한 교회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던 많은 이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받으며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러한 급진적 청빈운동들은 로마 가톨릭의 거센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이단으로 탄압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특히 1208년 카타리파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결성된 십자군을 가리켜 알비십자군이라고 일컫는데, 20년간 약 100만 명을 학살하면서 종교재판이라 불리는 이단심문제도를 출현시키기도 했다. 그들이 카타리파와 평범한 가톨릭 신자를 구분하는 법은 다음과 같았다. “일단 모두 죽여라. 주님께서는 누가 당신의 백성인지 아신다. 주님께 판단을 맡겨라!”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2.09.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45)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①
  • 경제 체제의 변화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전쟁을 주도한 교황과 그의 지지기반이었던 제후, 기사 계급은 크게 몰락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 농민으로 구성된 십자군의 패퇴는 봉건제 기반의 유럽의 경제가 몰락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한편 십자군 원정은 이슬람 세계와의 교역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랜 기간 동안 타지에서 머물 수밖에 없던 십자군은 보급품 외에도 여러 가지 물품들이 필요했고 상인들은 이를 조달하여 이득을 챙길 수 있는 기회는 물론, 향료 같은 진귀한 동방의 상품과 오렌지, 레몬, 커피, 설탕, 면화 등을 서방으로 들여와 비싼 값에 되팔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더욱이 10세기 이후 중세는 급격한 인구 증가의 상황에 있었고, 이런 수요의 증가는 시장의 수요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으며 더 나아가 봉건 제도 체제에서 화폐 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가속시켰다. 한편 상업과 도시의 발달로 토지 경작 인력은 급감했다. 영주들은 경작에 필요한 농노들을 수급하기 위해 농작물이 아닌 화폐로 대가를 지급하기 시작했고 이는 농민들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재화의 축적이 가능해지자 농노들은 땅의 주인이었던 영주 또는 교회에 대한 권리와 의무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경우에 따라 일정 금액을 지불해 자유를 인정받는 특허장을 얻어내기도 했지만 간혹은 유혈 투쟁을 통해 자치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베네치아를 시작으로 11세기 초 이탈리아 제노바와 피사, 11세기 후반 롬바르드 지방, 라인강 유역, 북부 프랑스 도시로 확대된 자치권 확보 투쟁은 결국 12세기 대부분의 도시들에게 전파되었다. 결국 도시는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자치구역’이 되었으며, 심지어 도망친 노예라 할지라도 ‘1년과 하루’를 도시에 거주하면 자유인으로 인정하는 관습까지 생겼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낳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자유는 도시민의 신분적 특권이었다. 이러한 도시의 매력은 농노들을 끌어들이는 요인이 되었으며, 결국 자급자족의 장원 경제에 기초를 둔 봉건제는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구 증가와 화폐 경제 발달은 상공업의 발달로 직결되었다. 때마침 조선술과 항해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지중해권은 물론 북유럽 지역까지 상업적 거래가 크게 확대되었다. 베네치아, 제노아, 피사 등 이탈리아의 주요 상업 도시들은 비잔틴 제국 및 팔레스타인 지역과의 무역 거래를 주도하면서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러한 상업의 활성화는 전례 없는 수공업의 발달을 불러왔다. 원거리 무역의 증가를 기회로 삼아 지역마다 여러 가지 특산품들을 가공하여 상품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큰 무역 중심지에서는 1~2주 정도 정기시(fair)가 열렸다. ‘정기시’란 사람들이 모여 농산물이나 다른 상품들을 전시하고 거래하며, 여흥까지 즐길 수 있도록 축제 등을 수반하는 박람회나 장터를 말한다. 이러한 정기시들은 정주(定住) 상인들이 운영하는 가게 등과 함께 중요한 상업 거래소가 되었다. 상공업의 발달로 새로운 상업 조합(길드)이 형성되었다. 조합은 조합원 간의 평등을 바탕으로 상호간의 이익과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공동 제작 단체였다. 이렇게 형성된 조합들은 영업시간, 매매가격, 제품의 양과 질의 규제를 통해 과도한 경쟁을 배제하고 최대 이윤을 추구해 나갔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2.08.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44)십자군전쟁⑥ - 계속되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
  • 1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이 차지한 에데사 백국(백작 보두앵 1세), 트리폴리 백국(백작 레몽), 안디오키아 공국(공작 보에몽), 예루살렘 왕국(국왕 고드푸루아) 등은 전쟁 직후 주변 이슬람 세력에겐 수복해야 할 지역일 수밖에 없었다. 특별히 이슬람이 십자군의 공세에 밀려 최악의 상태에 놓였을 때 이들을 구원한 바 있던 모술(지금의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이슬람 도시)의 지도자 이마드 앗딘 장기는 이슬람 세력(=사라센인)을 이끌고 에데사 백국을 공격했다. 결국 1144년 12월 24일 에데사는 이슬람 수중으로 다시 넘어갔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학살이 벌어졌다. 이로써 다른 십자군 점령 도시들도 언제 다시 이슬람 세력의 침략에 무너질지 모르는 극도의 불안에 휩싸였다. 이러한 상황은 1차 전쟁의 승리에 도취해 있던 서방을 충격에 휩싸이게 했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신속하게 교서를 발표하여 1차 십자군 원정의 영광을 재현할 것을 촉구했으며 프랑스의 루이 7세와 영국의 에티엔 그리고 독일의 콘라트 3세가 이끄는 2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그 유명한 설교자 클레르보의 베른하르트는 이때 민중들이 십자군에 참여하도록 큰 영향을 끼친 바 있다. 드디어 1147년 2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한 겨울에 아나톨리아(현재 터키) 지역을 횡단해야 하는 무리한 일정과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중에 만난 투르크 마적들, 그리고 질병 및 보급품 부족 등으로 인해 결국 2차 십자군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패턴으로 1270년(8차)까지 이어진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반복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확장은 서방의 위기의식을 자극했고, 이러한 위기감은 교회와 왕들의 거병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매번 십자군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좌초되고 말았다. 특별히 살라딘과 같은 뛰어난 리더십을 갖춘 이슬람 영웅의 등장은 십자군 원정의 성공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약 200년에 걸쳐 감행된 십자군 원정은 대실패였다. 1차 원정을 제외한 나머지 7번의 원정이 모두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모집된 십자군은 궁극적으로 연합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언어나 통치 질서를 생각하면 매번 반복되는 짧은 기간의 원정 준비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실패 원인은 십자군 결성의 목적이 점차 변질되었기 때문이었다. 신앙심과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점차 상업적 목적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베네치아 상인들의 지중해 상권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4차 십자군 동원을 선포했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결국 이로 인해 서유럽인들 사이엔 십자군 전쟁 자체에 대한 불신이 번져가기 시작했고 이는 간접적이지만 간과할 수 없는 실패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실패 원인은 서유럽의 봉건체제에 있었다. 즉, 정신적 지주로서 교황, 실제적 동원의 주체였던 황제, 그러나 실제 전투 수행 주체로서 각국의 군주나 제후들 사이에서 일사불란한 전투 지휘는 불가능했다. 설사 일시적으로는 승리하기도 했으나(1차 원정) 정복한 도시를 지속적으로 다스려 나아갈 수 있는 강력한 식민정책의 주체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었다. 이 밖에도 장거리 원정 정복으로 인해 본국으로부터의 신속한 지원이 불가능했다는 점, 원정지에서의 향수병, 풍토병, 전염병 등 전의를 상실케 할 수 있는 상황들도 중요한 실패 원인으로 언급할 수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2.07.29 / 금지환 기자

    선교 뉴스
    김원일 선교사, 알래스카로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는 9월 25일 주일 4부 예배 후 대성전에서 김원일B 목사에 대한 선교사 파송식을 진행했다.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미국으로 파송되는 김원일 목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교민 목회 및 지역 복음화를 위해 안수 기도했다. 김원일 목사는 미국 알래스카 은혜와평강순복음교회가 페어뱅크스 지역에 설립하는 지교회에서 교민 목회를 할 예정이다. 김원일 목사는 교회창립60주년행사단, 은평대교구, 복지사업국 등에서 사역해왔다.
  • 2022.09.29 / 오정선 기자

    이의현 선교사 영국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는 21일 성전비서실에서 선교사 파송식을 진행했다.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이의현 선교사에게 파송장을 수여하고 안수기도하며 세계 복음화에 헌신할 것을 당부했다. 이의현 선교사는 영국 런던에서 사역한다.
  • 2022.09.23 / 복순희 기자

    이원석 목사, 인도네시아로 선교사 파송
  • 재단법인 순복음선교회는 11일 주일 4부 예배 후 대성전에서 선교사 파송식을 진행했다. 이사장 이영훈 목사는 인도네시아 말랑으로 파송되는 이원석 목사에게 선교사 파송장을 수여하고 안수기도했다. 이원석 목사는 그동안 강서2대교구와 전도새가족부, 호주 시드니순복음교회에서 사역했으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에클레시아말랑순복음교회 부교역자로 사역할 예정이다.
  • 2022.09.15 / 오정선 기자

    선교지 소식
    김주영 선교사(콜롬비아)
  • 보고타를 중심으로 순복음교회 세워 현지 복음화에 헌신
    도둑 두 번 침입해 선교비 전부 털려 큰 낙심 그러나 ‘선교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 깨달아 주님 주신 새 비전 ‘교회 개척 넘어 소외 계층 섬김’ 할렐루야! 남미 살사와 커피의 나라 콜롬비아에서 현지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김주영 선교사입니다. 저는 2016년 11월 콜롬비아에 도착해 2년 여 준비과정을 거쳐 2018년 4월 수도인 보고타에 콜롬비아순복음교회를 창립하고 지금까지 주님께서 명령하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콜롬비아에 도착한 후 사택에 두 번이나 도둑이 침입해 사역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선교비 전부를 털려 낙심이 컸지만 그 일로 ‘선교는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한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분들이 저희를 찾아오셨고 그분들로 인해 성전과 사택을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집을 임대 계약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곳에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있음을 고백하게 됐습니다. 선교지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시는 이영훈 목사님과 모교회 성도님들의 중보기도의 힘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보고타에 세워진 콜롬비아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베네수엘라와 가까운 리오아차 시에 현지인 교역자 가정을 파송해 리오아차순복음교회를 세우고 복음증거와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전진기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과히라 주에 위치한 리오아차는 베네수엘라 국경에 인접한 마이카오를 거쳐 베네수엘라 난민들이 일자리를 찾고 몰려드는 도시로 난민촌들이 형성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또 콜롬비아순복음교회는 성도 개개인의 신앙성장을 우선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초점을 맞춰 사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린 후에는 성도들과 주일 말씀을 토대로 나눔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나눔 사역을 통해 성도들이 말씀 안에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고 실생활에 적용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희 사역 비전은 교회 개척을 넘어 현지 소외계층을 향한 섬김입니다. 지난 선교대회 때 한국에서 특수선교(장애인)를 하시는 목회자를 만나 교제하면서 콜롬비아에서도 접목할 수 있는 귀한 사역으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역지로 돌아온 후 이러한 비전을 현지 성도들과 공유했는데 모두가 한 마음으로 섬김 사역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올해에는 사단법인 신청을 위한 서류준비를 진행하고 주변 장애우시설과 가정을 방문해 장애우와 장애우 가정들이 겪는 어려움을 듣고 공감하는 시간을 갖도록 했습니다. 내년에는 사역의 구체적인 계획과 프로젝트를 준비할 예정입니다. 또한 필요한 인적 및 물적 재원을 확보하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특별히 특수 선교에 사용될 공간(1000평)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말씀을 붙들고 열심히 기도하며 나아가려 합니다. 모교회 성도님들의 관심과 중보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2022.09.30 / 오정선 기자

    이한용 선교사(케냐)
  • 아프리카에 절대긍정 절대감사 신앙으로 희망 복음 전파
    현지인 제자 양성 통해 인근 선교 제한국으로 재파송 해 할렐루야! 2011년에 선교사 파송을 받아 케냐 나이로비 외곽에 위치한 영산 아프리카 미션센터를 맡아 사역하고 있는 이한용 선교사입니다. 동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케냐는 한반도 면적의 2.6배 크기로 한국과 비슷한 인구수를 가지고 있으며 공용어로 영어와 스와힐리어를 사용합니다. 케냐는 약 50개 언어를 사용하는 부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케냐의 종교는 역사적으로 전통종교와 이슬람과 기독교로 나눌 수 있습니다. 케냐의 이슬람은 온순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소말리아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무슬림 세력들이 케냐에서 활동하면서 크고 작은 테러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케냐 무슬림들은 케냐 전역에 도로, 주유소와 식당 그리고 작은 모스크를 세우는 일에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으며 도시와 지방 구분 없이 들어가 사회경제를 장악하기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정치와 교육, 법률, 군사 쪽으로도 새로운 엘리트들을 배치하고 있으며 아프리카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동조해 동부 아프리카 관문인 케냐를 식민지 이전 이슬람 국가로 되돌리려는 거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첫째, 목회자 양성 사역(영산신학교, 목회자 훈련, 현지인 사역자 파송) 둘째, 차세대 리더 양성 사역(어린이 사역, 장학 사역) 그리고 셋째 교회개척 사역(성전건축 및 자립교회)입니다. 우리는 케냐 영산 미션센터를 중심으로 케냐 영산신학교 특히 남·북수단, 에티오피아 무슬림 지역처럼 복음의 문이 닫혀 있는 국가의 학생들을 훈련시켜 본국으로 파송해 목회사역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오순절신학과 4차원의 영성 등 필수과목을 반드시 이수시키고 매학기 영성훈련 특별주간을 마련해 졸업생들이 개척한 교회로 전도 여행을 떠나 노방전도, 축호전도, 설교 훈련 등 다양하고 실질적인 사역 경험들을 쌓도록 돕고 있습니다. 케냐 영산신학교는 케냐 뿐 아니라 복음이 닫혀있는 인근국가로 현지인 제자들을 파송시켜 복음 전파를 확장시킬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영산신학교에서 배출한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나이로비 슬럼지역을 비롯한 지방도시에는 20개의 지교회와 5개의 학교가 세워져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의 소득증대를 위한 자립프로젝트로 2018년부터 젖소 분양 사역을 시작해 지금까지 50가정에 젖소를 분양하였는데 코로나로 인한 기근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사역을 간략히 소개하면, 젖소를 분양받은 성도는 첫 출생 송아지(첫 열매)를 교회에 봉헌해야만 분양받은 소가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 생긴 첫 열매 송아지는 다음 성도에게 돌아가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선순환 구조로, 교회 공동체가 함께 젖소 프로젝트에 동참하며 선한 일들을 하는데 앞장서고 있습니다. 우유를 팔아 얻은 수입 중 일부를 헌금해 교회를 건축했고 코로나 때 식량이 없어 끼니를 굶고 있는 다른 성도들을 위해 구제헌금을 걷어 식량이 필요한 곳에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선한 일들과 교회에 출석하면 젖소를 분양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져 교회는 부흥하고 있고 젖소를 분양받은 성도 가정마다 경제적 자립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993년 케냐에서는 조용기 목사님을 주강사로 아프리카성령화대성회가 열렸습니다. 2023년 7월 이영훈 담임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케냐 성회 30주년 기념 성회’가 개최될 예정입니다. 오순절 성령운동이 다시 한번 아프리카 케냐를 중심으로 부흥되길 기대하며 이곳 목회자들과 기도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을 통해 큰 회개와 성령의 역사가 이곳에서 나타날 수 있도록 기도로 동참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2022.08.05 / 오정선 기자

    김정중 선교사 (필리핀)
  • 필리핀 두 번째 큰 섬 민다나오에서 5개 지역 순회 사역 할렐루야! 날마다 우리 주님이 부어 주시는 평안이 성도님들의 삶에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저는 2018년 12월 선교사 임명을 받고 2022년 현재까지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김정중 선교사입니다. 필리핀은 2022년 6월 현재 1억1380만명에 달하는 세계에서 12번째로 인구가 많은 인력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필리핀 민다나오 지역은 수도 마닐라에서 700㎞ 가량 떨어진 섬으로 면적은 9만4630㎢로 남한 면적과 비슷한 필리핀에서 두 번째로 큰 섬입니다. 주도는 다바오로 잠보앙가, 카가얀데오로 등 대도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자원이 가장 풍부한 섬으로 팜유, 망고, 바나나 등이 많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2022년 현재 민다나오 인구는 약 2700만명으로 종교는 가톨릭(63%), 이슬람교(24%), 개신교(7%)로 이루어져 있으며 필리핀 전체 무슬림의 93%에 해당하는 약 600만명 무슬림(모로족)이 살고 있습니다. 이곳은 가톨릭 신자가 많아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미신적 정령숭배사상이 만연해 있고 강성 무슬림 지역이 많아 위험한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민다나오 주도인 다바오 지역에 주 사역지를 두고, 5개 도시에 흩어져 있는 제자교회를 순회하며 신학교 사역과 빈민촌 밥퍼 사역, 청소년 사역 등에 나서고 있습니다. 선교사역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사역이 멈춘 2년여 시간 동안 저희는 델타 변이와 아내의 대장암 발병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주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으로 회복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팬데믹 초기부터 필리핀 정부의 도시 봉쇄 정책과 집회 금지 조치로 통행이 제한되어 순회 사역과 신학교 사역이 중단됐던 상황은 모두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신학교를 보수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구호물품 전달, 개별적 심방과 가정예배를 지속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2021년에는 새로운 사역으로 한국인이 갈 수 없는 무슬림 자치구역 따위따위 섬으로 신학교 졸업생을 파송, 일터사역을 통해 마을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많은 사역자들을 훈련해 앞으로 주변의 더 많은 섬으로 파송할 예정입니다. 현재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다시 제자교회 순회사역과 밥퍼 사역을 시작했고, 한류 열풍으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한국어를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필리핀 청소년들에게 복음의 접촉점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차세대 평신도 리더와 신학교 사역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많이 양성할 수 있도록 또한 민다나오순복음교회 건축을 위해 중보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팬데믹 이전보다 더 좋은 일상이 회복되어 예배에 부흥의 불길이 모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비롯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선교지 교회 위에 임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님들 삶 가운데 항상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 2022.07.01 / 오정선 기자

    선교사를 위한 중보 기도
    김종오 선교사(케냐)
  • - 심한 가뭄이 멈추고 충분한 양의 비가 내리도록 - 본 교회를 비롯한 지교회 목회자들의 성령 충만과 각 교회 부흥을 위해 - 보건소, 에이즈 센터, 교도소 사역 등을 통해 예비된 영혼이 구원되도록 - 선교사 부부의 안전과 건강
  • 2022.09.30 / 오정선 기자

    이피터 선교사(B국)
  • - 하반기 사역과 많은 영혼 구원을 위해 - 학생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도록 - 모든 교회 담당 사역자들의 사역과 건강을 위해 - 새로 개척한 가정교회 부흥을 위해
  • 2022.09.23 / 오정선 기자

    손강국 선교사(엘살바도르)
  • - ‘어린이 음악 교실’을 통해 아이들이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 무료 급식에 필요한 안정적인 재정이 확보되도록 - 제3의 교회 개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순조롭게 이뤄지도록 - ‘열방의 빛 교회’와 ‘벧엘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 매주 각 사역지를 위해 1000㎞ 이상 주행하는데 안전하도록
  • 2022.09.16 / 오정선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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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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