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Q&A
‘사순절’은 어떤 절기인가요?
  • 개신교회에서 가장 큰 절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한 가지 절기를 더한다면 가을 추수의 은혜에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다. 이 중에 부활절과 관련해 이른 봄에 교회에 가면 자주 듣게 되는 절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순절’(四旬節)이다. ‘사순절’을 뜻하는 영어 ‘렌트’(Lent)는 고대 앵글로색슨어 ‘Lang’에서 유래된 말로 독일어의 ‘Lenz’와 함께 ‘봄’이란 뜻을 갖는 명칭인데 우리말로는 ‘40일간의 기념일’이라는 뜻의 희랍어 ‘테살코스테’를 따라 ‘사순절’로 번역한다. 부활절을 기점으로 역으로 계산해 주일을 뺀 40일간을 주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하고 묵상하며 경건히 지내는 절기이다. 올해는 부활주일이 4월 20일이니 3월 5일(수)~4월 19일(토)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이 사순절 기간이다. ‘40’이라는 수는 광야에서 예수께서 받으신 40일간의 시험, 예수님의 부활에서 승천까지 40일 등과 같이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성경에 자주 등장한다. 사순절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구약의 유월절 만찬을 새롭게 해석해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성찬식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먼저 주님이 겪은 수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금식했던 것으로부터 유래했다. 사순절 기간에는 즐거움을 위한 지나친 오락 행위가 금지됐고 자선과 예배 참석 기도 금식 등이 권장됐다. 물론 영광의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의 고대적 의식들을 현대에도 그대로 받아 실천하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절제’의 마음가짐과 ‘헌신’의 미덕만큼은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김에녹 목사
  • 2025.02.21

    유대인들은 어떻게 새해 첫날을 맞이하나요?
  • 유대인들의 새해는 다른 민족과는 차이가 있다. 매년 9월 25일은 유대력으로 새해인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 곧 ‘나팔절’이다. ‘로쉬 하샤나’는 이틀을 지키기 때문에 9월 24일 해질 때부터 9월 26일까지 계속된다. 레위기 23장 24절에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날은 유대력으로 일곱 번째 달인 티슈리월의 첫째 날이다. 유대인의 격언집인 ‘미쉬나’에 따르면 이날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이다. 그날에 나팔을 부는 이유는 영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일깨워 다가올 심판을 준비하라는 경고이다. 이날 회당 예배는 매우 길게 진행되며 오후에는 많은 유대인이 시냇물이나 샘이 솟는 곳에서 흐르는 물에 자신의 죄를 상징하는 빵이나 음식 혹은 조약돌을 던지는 ‘타슐리흐’의 의식을 갖는다. 이날에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 음식을 먹는다. 사과를 꿀에 찍어 먹는 이유는 새해가 달콤하고 행복한 삶이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혀와 같은 짐승의 머리에 있는 고기를 먹기도 하는데 이것은 한 해의 머리인 첫날을 의미하고 또 꼬리가 되지 말고 우두머리가 되라는 의미가 있다. 석류를 먹는 것은 풍성하게 넘치는 복을 소망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로쉬 하샤나’를 하나님께서 지난 일 년을 돌아보시고 사람들을 판단하시는 날로 이해한다. 그들은 이날을 주로 기도와 회개의 날로 보내며 지난해의 모든 허물과 빚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유대인들은 이날이 오기 전에 친구들과 가족들로부터 용서를 구하며 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고 회당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주로 아브라함에 관한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양을 제물로 삼으신 것을 기념해 회당에서 양각 나팔을 불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도 한다. 김에녹 목사
  • 2025.01.24

    크리스마스의 유래가 궁금해요
  • 크리스마스(Christmas)는 성탄절의 영어표현이다. 먼저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께 드리는 미사’(Christ mass)라는 단어의 줄임말로서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배 의식을 드리는 날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성탄절은 X-mas라고도 표기하는데 X는 희랍어로 그리스도를 뜻하는 크리스토스(Xristos)의 첫 글자이다. 결국 크리스마스와 같은 뜻의 명칭이다. 사실 크리스마스처럼 거의 전 세계가 함께 축제로 보내는 날도 참 드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탄생을 축하해야 하는 ‘성탄절’인 크리스마스가 세상의 여흥과 환락 그리고 상술만이 판치는 날이 돼버렸다. 심지어 일부 아이들은 크리스마스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의 생일”로 알고 있다는 웃픈(=웃기고도 슬픈) 이야기도 들려오니 입맛이 참 씁쓸하다. 하지만 성탄절이 왜 그토록 기쁜 날인지 그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며 진정한 마음과 몸가짐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있는지는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온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대신 죽으신 사역과 구원의 의미가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12월 25일 성탄절이 공식적인 교회 절기로 교회력에 제정된 것은 354년에 로마 교회의 리베리우스 교황에 의해 제정되었고 성경에는 그 분명한 날짜는 기록돼 있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교사들이 들어온 1885년부터 성탄절을 지키게 되었다. 기쁘다 구주오셨네…! 김에녹 목사
  • 2024.12.20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요?
  •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는 사랑이 많이 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곧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 성품의 본질이며 그분의 본성 자체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한다. 십자가는 우리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의 표현이다(요일 4:7~12).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아니 우리 중에 과연 누가 남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킬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바로 우리를 위해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애절하고도 피맺힌 사랑을 알지 못한다.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고 있다(요일 4:9).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F. Nansen, 1861~1930)이 북극 근방 바다의 깊이를 재려고 동아줄을 내렸으나 그 끝이 도저히 해저에 닿지 않았다. 결국 “이 동아줄보다 더 깊음”이라고 기록하고는 다음날 더 긴 줄을 사용했지만 역시 해저에 이르지 못했다. 같은 작업을 며칠 계속하던 그는 일기에 결국 이렇게 적었다. “이 근방의 바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같다. 진정으로 끝없이 깊은 바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잴 수 있는 측량 도구는 세상에 없다. 십자가는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상징이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다음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11.22

    “율법과 죄, 그리고 십자가는 어떤 관계인가요?”
  • 인간의 모든 고통의 근원은 사실 모두 ‘죄’의 문제이다. 그 ‘죄’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은 곧 ‘죄의 멍에’를 상징한다. 초대 교부 제롬(Jerome)은 “율법은 속박의 멍에이다”라고 말했다. 율법으로 의로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멍에를 맨 황소와 같다. 황소는 열심히 밭을 갈고 수고하지만 결국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 죽고 만다. 이처럼 스스로 의로움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헛되이 힘쓰고 애만 쓰다 율법의 정죄 아래서 마침내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죽음을 헛된 죽음으로 끝나지 않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율법을 도말하여 제하며(골 2:14), 율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갈 3:13), 율법의 완성을 감당한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17). 율법은 죄의 문제를 들춰 드러나게 하지만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을 때, 우리는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능력에 힘입어 영혼육이 모두 구원받고 새생명을 얻게 된다. 율법이 할 수 없는 것들을 십자가는 온전히 이뤄낸 것이다. 십자가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요한은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고 기록했다(요 8:36).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이다(갈 5:1). 우리의 자유는 은과 금으로 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얻게 된 것이다(롬 8:1~4).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10.25

    ‘십자가의 순종’이란 무슨 뜻인가요? 
  •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모범이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순종’을 보여준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단지 죄의 문제만을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이 전부였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33년간 스스로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시며 고생하시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사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계신 영광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또한 그분은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다(빌 2:5~11). 예수님의 이러한 순종은 첫 사람인 아담 단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아픔을 이기시기 위한 위대한 ‘순종’이었다. 로마서 5장 19절은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땅에서 고통받을 이유도 아픔을 겪을 이유도 없으셨던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 몸소 고난과 고통을 겪으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히 5:8~9).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고난의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이러한 순종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몸소 가르쳐주신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순종’이나 ‘헌신’이 사라져 버린 이 시대에 던져주는 위대한 ‘순종’의 모범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9.20

    ‘십자가의 대속(代贖)’이란 무슨 뜻인가요?
  •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완성을 상징한다. 원래 범죄자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자들에게 집행되었던 형벌이 십자가형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를 대신해 그가 당하셨던 고난과 수치와 굴욕을 상징하며 죄악 중에 출생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한 대속 행위의 증표였다. ‘대속(代贖)’이란 바로 ‘누군가를 대신해 대가를 치르고 속량해 주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음으로 대속하신 희생에 대한 상징이다(막 10:45). 십자가는 죄로 인하여 완전히 단절돼 버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는 ‘화평과 화목’의 의미를 지닌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기록했고, 에베소서 2장 15절에서 16절은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리시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셨다. 우리를 대신해 징계를 당함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됐고, 그가 채찍에 맞으시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됐다(사 53:5~11). 이 모든 것을 이루신 가장 중요한 자리요 사건이 바로 ‘십자가’다. 고대로부터 죄인들에게 집행된 저주받은 형벌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이제 더 이상 형벌이 아니다. 십자가는 이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로운 신분으로 거듭나게 됨을 의미하게 됐다(히 12:2). <다음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8.23

    ‘십자가’는 왜 기독교의 상징인가요?
  • 개신교 교회와 가톨릭 성당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는 것 중에 쉽게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또한 십자가는 일반인들에게도 익숙한 형상이다. 여성들이 즐겨 사용하는 목걸이와 귀걸이 중에는 ‘십자가’의 형상을 사용한 것들이 많다. 이처럼 십자가가 기독교의 대표적 상징이라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닌 일반인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원래 십자가는 노예 도적 암살자 등을 처형하던 고대 사회의 처형 도구였다. 구약성경 신명기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신 21:22~23)고 기록한다. 이처럼 십자가는 법률적으로 죄인들을 처형하는 형틀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유대인들에게는 끔찍한 형상이요 도구였다. 따라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것이었다(고전 1:23; 갈 3:13). 이 점은 로마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가형은 형틀에 못 박혀 매달린 사형수를 근육경련과 질식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해 고통스럽게 죽게 하는 공개처형이었다. 사형수들은 겉옷과 속옷을 강제로 빼앗겨 벌거벗겨지고 부끄러운 부분만 겨우 가린 상태로 처형되며(눅 23:34), 자기가 못 박힐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 가야 한다(눅 23:26)는 점은 십자가형의 잔인성을 보여준다. 로마의 정치가요 철학자인 키케로(M. T. Cicero 주전 106~43년)가 “십자가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로마시민들의 생각이나 눈과 귀에서조차 완전히 제거돼야만 한다. 왜냐하면 단지 십자가형의 실제적 집행뿐만 아니라 그것의 언급마저도 로마시민과 자유인에게는 합당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십자가형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바로 이런 저주와 치욕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대신해 달려 죽으신 것이다.<다음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4.07.26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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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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