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목사의 행복편지
기다리며, 닮아가며
  • ↵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은 산골짜기 시골 마을에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소설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어니스트는 어머니로부터 마을 입구에 있는 사람 형상의 큰 바위 얼굴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언젠가 이 마을 출신 중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아직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니스트가 성장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칭송하는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수완이 좋은 상인으로 돈을 많이 번 부자, 여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유명한 장군, 뛰어난 말솜씨로 대통령감으로 거론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린 정치가, 아름다운 글을 쓰는 시인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마을에서 오래도록 기다려 온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이 아니었습니다. 외형적으로 큰 바위 얼굴을 닮지 않은 것도 있지만, 어니스트는 이들에게서 무엇인가 모자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부자는 영악하고 탐욕이 가득해 나누는 일에 인색했고 장군에게서는 지혜와 자비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정치인에게서는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시인 역시 시에 담긴 훌륭한 사상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여러 번의 실망에도 불구하고 어니스트는 여전히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대한 사람이 나타나리라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큰 바위 얼굴처럼 되기를 소망하며 바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평범한 농부였던 어니스트는 마을에서 진리와 사랑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먼 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니스트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니스트의 얼굴이 큰 바위 얼굴과 정말 닮았어요!” 그곳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어니스트의 얼굴과 큰 바위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니스트는 평생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위인을 기다리며 자신도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을 간절히 기다려 온 덕분에 어니스트 자신도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가고 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우리 역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니스트가 위대한 사람을 기다리며 큰 바위 얼굴을 닮아간 것처럼,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사는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기를 바랍니다. 성탄의 계절인 12월을 맞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욱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 2023.12.01

    절대 감사
  • 2023.11.24

    우리 인생을 연주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 천재 플루티스트에서 최전방 선교사로 변신한 송솔나무 씨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송솔나무라는 특이한 이름은 예명이 아니라 아버지가 지어주신 본명입니다. ‘허준’, ‘이산’과 같이 인기 드라마 OST를 작곡하며 플루티스트로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을 만큼 인정받은 그이지만 인생이 늘 탄탄대로였던 것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쫓기듯 한국을 떠나 미국에 있는 친척 집에 얹혀살기도 했고, ABC 알파벳도 모른 채 미국에 가게 되어 학교에서 말 한마디 하는 것도 힘들었으며 친구들은 그런 그를 왜소한 동양인이라고 따돌렸습니다. 괴롭히는 아이들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 숨어있던 어느 날, 그는 변기 위에 쭈그리고 앉아 하나님께 따지듯 물었습니다. “저는 실수로 태어난 것 아닌가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셔서 “나는 네 머리카락까지 세는 하나님이란다. 내가 널 만들었단다”라며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어디선가 플루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때부터 플루트의 매력에 빠진 그는 밴드부에 들어가 플루트를 배웠고 플루트 연주자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플루트 연주자로 성공하기 힘든 약점이 있었습니다. 알레르기성 천식으로 인해 폐를 64%밖에 사용할 수 없었고, 새끼손가락이 남들보다 한 마디 정도 짧았기 때문입니다. 불리한 조건 속에서 누구도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미국 줄리아드 예비학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뉴욕의 링컨센터와 카네기 홀에서 독주를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고 명실공히 ‘하나님의 연주자’로 전 세계 118개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플루티스트로서 복음을 전하던 그가 얼마 전 갑자기 우크라이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누구라도 와서 도와 달라”는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의 절규가 그의 마음을 울렸기 때문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우크라이나로 간 그는 최전방 전투지역에서 구호물자를 전달하거나 어린이들, 노약자들을 치료해 주고 있습니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치열한 전투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송솔나무 선교사는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늘 ‘주님, 금과 같은 인생을 만들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남들 눈에 멋있어 보이길 원합니다. 하지만 정말 멋있는 것은 금 같은 악기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날 때가 아니라 볼품없이 초라한 악기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올 때입니다. 연주자에 따라서 소리가 달라지듯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연주하시면 상상을 초월하는 소리가 납니다. 하나님이 연주하시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때때로 삶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우리 인생을 연주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감사를 고백해봅시다. 언제나 우리 인생을 책임져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것으로 사랑의 결실을 맺는 11월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3.11.03

    가장 ‘나’다울 때
  • 우리가 스스로 가장 나답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나답다는 의미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정 사건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 도전하는 것도 나다운 모습이고 평소 자기답지 않게 무엇인가 포기하는 것도 나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대의 지성으로 불렸던 이어령 교수님은 나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며 무언가가 되어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나답다는 것은 ‘이런 내가 되고 싶다’라는 지향점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런 목표도 없이 삶이 흘러가는 대로 살다 보면 자기 자신을 잃을 뿐 아니라 의미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사람이 자기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나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돌아보게 합니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새벽부터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던 성실한 영업 사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깬 그는 자신이 커다란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란 것도 잠시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어서도 자신을 걱정하기보다는 출근을 못 하는 것, 그로 인해 가족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게 될 것을 걱정했습니다. 이같이 그의 삶에는 사회를 구성하는 ‘영업 사원’,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그레고르만 있을 뿐 자기 본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상황과 조건 속에 떠밀려 살았던 그레고르의 마지막은 비참했습니다. 일생을 바쳤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았고 가족들은 돈을 벌지 못하는 그를 귀찮고 부담스럽게 여겼습니다. 직장에서는 유능한 영업 사원으로, 가정에서는 유일하게 생계를 책임지며 ‘꼭 필요한 존재’였던 그레고르는 벌레가 되면서 ‘혐오스러운 존재’ 심지어는 ‘없어졌으면 하는 존재’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애물단지로 전락한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서 생긴 상처로 인해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확인한 가족들이 안심하며 소풍을 나서는 모습으로 소설은 마무리됩니다. 사람이 나다운 모습을 잃어버릴 때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우리 시대의 영적 거장 중 한 명이자 목회자들의 목회자라고 불렸던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저서 『잘 산다는 것』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도란 하나님 편으로 구별된 상태를 뜻합니다. 이 단어는 인간이 톱니바퀴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상황의 물결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이 하시는 중요한 일을 위해 선택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세상의 기준에 휩쓸려 어느새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먹고사는 오늘의 문제에만 끌려 다니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글귀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다움을 잃고 세상에 떠밀려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직장에서 얼마나 유능하고 가정에서 얼마나 책임감이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예수님을 닮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또 하나님이 하시는 존귀한 일에 얼마나 힘을 내어 동참하고 있는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며 나를 나 되게 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참된 나다움을 발견하는 10월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3.09.27

    또 하나의 언어 ‘침묵’
  • 우리는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의도와 상관없이 무분별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결핍이 아닌 과도함이 우리로 하여금 참과 거짓을 분별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말을 아끼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하지만 ‘지혜는 들음으로 생기고 후회는 말함에서 생긴다’라는 영국 속담에서 알 수 있듯 백 마디 잘해서 얻는 이득보다 한 마디 실수로 인한 손해가 더 큰 법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말과 관련된 속담이 많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처럼 가볍게 한 말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한 번 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을뿐더러 순식간에 멀리까지 퍼져 나가기 때문에 말을 신중히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처럼 아무리 비밀스럽게 한 말이어도 반드시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게 되어있으니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말을 조심하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말은 보태고 떡은 뗀다’는 속담은 말을 여러 사람에게 옮길수록 부정적인 것이 더해지고 떡은 여러 사람을 거칠수록 줄어든다는 의미입니다. 그 예로 남편과 싸웠다는 말이 몇 사람을 거치면 이혼을 고민하고 있다는 소문으로 와전되는 상황을 들 수 있습니다. 남들이 잊어줬으면 하는 말일수록 더 또렷이 기억되고 감추고 싶은 말일수록 급속도로 전파되기 마련입니다. 공든 탑을 하루아침에 무너트리는 것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말은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면 좋겠지만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오해만 생길 뿐입니다. 우리가 말의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침묵의 힘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유창한 말보다 굳게 다문 입이 더 영향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 심문을 받으시던 예수님은 불합리한 증언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갖은 모욕과 조롱에도 묵묵히 침묵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죄로 인해 절대 절망에 처한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희망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또한, 침묵은 입을 다무는 행위를 넘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입니다. 내가 할 말을 줄이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관심을 가져보십시오. 말의 실수가 줄어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민족의 명절 추석이 다가오는 9월입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흩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나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소중한 날, 사소한 말실수로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이 없도록 부정적인 말, 험담하는 말을 들을 때는 침묵의 언어를 사용해봅시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귀 기울이며 화목을 이루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2023.09.01

    내 평생에 가는 길
  •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은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위로와 힘을 가져다줍니다. 그런데 이 찬송의 작사가인 호레이쇼 스패포드(Horatio Spafford) 역시 큰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패포드는 미국 시카고의 법무법인 대표이자 법리학 교수였습니다. 또한 무디 부흥사를 도와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신실한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1871년 10월 8일 불길이 시카고 전체를 삼키는 대화재가 일어났습니다. 이때 스패포드가 섬기던 교회와 그의 전 재산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대화재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는 4살 된 아들이 성홍열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스패포드는 낙심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스패포드 부인은 몸과 마음이 약해져 의사가 안정을 위해 휴식을 취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마침 영국에서 무디 부흥성회가 열리게 되어 스패포드 부부는 성회도 참석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4명의 딸과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로 계획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시카고 대화재의 후속 처리를 해야 해 가족들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그런데 스패포드의 가족을 실은 여객선이 대서양을 순항하던 중 영국 범선과 충돌하면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의식을 잃은 부인은 구조됐지만 4명의 딸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영국으로 향하던 스패포드에게 선장이 “지금 우리는 아이들이 타고 있던 배가 침몰한 지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스패포드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선실로 들어와 밤새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일을 가장 귀하게 여겼고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환하게 동이 틀 무렵에 하나님의 말씀과 평안이 스패포드의 몸을 감싸 안았습니다. 이렇게 쓴 찬송이 바로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 늘 잔잔한 강 같든지 /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 내 영혼 평안해 /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이후 스패포드 부부는 매년 3만명 이상의 아이를 돌보는 스패포드 아동센터를 설립했고, 다시 얻은 두 자녀와 함께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이주해 평생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고난이 다가옵니다. 하지만 고난의 때에 굳건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면 넘치는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고난을 넉넉하게 이겨내고, 또 고난 가운데 있는 이웃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3.08.04

    치료의 페이스메이커
  • 미국에서 페이스메이커스(PACEMAKERS) 운동을 펴고 있는 채영광 교수(미국 시카고 노스웨스턴 의대)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페이스메이커스 운동은 고된 치료의 과정을 마라톤처럼 달리고 있는 환자와 보호자 옆에서 의료진이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다독이며 끝까지 완주하도록 돕는 페이스메이커가 되자는 취지로 시작됐습니다. 지금은 환자에게 긍휼의 마음을 흘려보내며 치료의 페이스메이커로서 귀한 일을 감당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까지 채영광 교수는 남과 비교하는 습관이 있어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우쭐해하고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보고는 우울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채영광 교수의 이러한 마음의 배후엔 엘리트들이 갖고 있는 자기 사랑과 자기 연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한 후 하나님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죄로 여기며 모두 하나님께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그 비워진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자 채영광 교수의 진료실은 곧 선교지가 됐습니다.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매우 귀하게 여기며 환자들에게 “당신을 응원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암 환자들에게 “암은 당신 탓이 아닙니다”라고 격려하며, 투병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에게는 손을 잡고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될까요?”라고 물은 후 진심을 다해 기도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믿지 않는 환자들도 채영광 교수의 진료를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전심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는 채영광 교수는 페이스메이커스 운동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과대학 시절엔 의사의 자질에 관해 항상 객관적인 위치에서 냉정하게 일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환자에게 잘못된 희망을 심어주어서도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감정적 번아웃을 피하려면 환자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그런데 ‘함께 우시는 예수님’을 만난 뒤로 제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환자와 함께 우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합니다(롬 12:15). ‘저 의사가 진짜로 환자인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구나’라는 믿음을 심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끝까지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습니다.” 가정, 학교, 직장, 사업장 등 각자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치료의 페이스메이커가 된 채영광 교수처럼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 모두가 큰 기쁨을 누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될 것입니다.
  • 2023.06.30

    다시 일어나 희망을 꿈꿉시다
  • 자신에게 일어난 불의의 사고를 극복하고 꿈을 찾아 나선 이지선 교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지선 교수는 2000년 당시 대학교 4학년 때 만취한 음주 운전자가 낸 7중 교통사고로 타고 있던 차에 불이 나 전신 55%에 3도의 중화상을 입었습니다. 이지선 교수는 화상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여기가 끝이다.’, ‘차라리 다 끝나버리면 좋겠다.’, ‘하나님, 나 어떻게 하실 거예요?’라고 원망 섞인 질문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지선 교수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약속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여기가 끝이 아니다. 너를 세상 가운데 반드시 세울 것이고, 너를 병들고 약하고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할 것이다.” 이지선 교수는 자신조차도 사랑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변함없이 사랑하는 딸이라고 부르시는 것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 이후로 40번이 넘는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라는 가사의 찬양을 들으며 고통을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사고의 자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슬퍼하기를 멈췄습니다. “사고를 만났고 사고와 잘 헤어질 수 있다”라며 절대 긍정의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 과정을 마치고 유학을 떠나 11년 반 만에 보스턴대학교에서 재활상담학 석사, 콜롬비아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 UCLA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2017년부터는 한동대학교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 교수로 근무했으며, 올해 3월에는 사고 이후 23년 만에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지난 2월 최종 합격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울었다며 이지선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사고를 만났다. 사고와 부딪혀 만났지만 툭툭 털고 헤어져 그다음의 시간을 살았다. 나는 사고와 잘 헤어진 사람이다. 기나긴 면접 채용 과정을 지나며 다리도 억세지 못하고 목소리도 작은 자라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스물셋에 사고를 만나고 떠나게 된 이화여자대학교에 23년 만에 교수로 돌아왔다. 모교에서 가르치는 기쁨을 누리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문제와 사고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계속 머물러 불평할 것인지, 아니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새로운 희망을 향해 달려갈 것인지에 따라 그 인생은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 놓일지라도 절대 긍정으로 일어나 희망을 향해 힘차게 달려 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3.06.02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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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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