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목사의 행복편지
진정한 성공의 비결
  • 시중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지퍼 상단을 보면 ‘YKK’라는 영문 이니셜이 새겨져 있습니다. 암호처럼 보이는 이 글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글자의 유래와 의미를 살펴보면 진정한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지퍼는 1891년 미국의 발명가 휘드컴 저드슨이 구두끈을 대신할 목적으로 발명했습니다. 그러나 초기 제품은 지금과 달리 여러 가지 불편함이 많았습니다. 이후 1913년 스웨덴의 기드언 선드백이 기존 지퍼의 단점을 보완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대중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YKK’가 새겨진 지퍼는 이 두 사람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회사에서 생산한 것입니다. ‘YKK’는 1934년 일본의 요시다 타다오가 설립한 지퍼제조회사로 ‘요시다 공업 주식회사(Yoshida Kogyo Kabushikikaisha)’의 첫 글자를 따온 이름입니다. 미국에서 발명한 지퍼가 오히려 일본 제조회사의 이름으로 더욱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한 매체에서는 ‘YKK’의 성공 비결을 창업자 요시다 타다오의 아들이자 CEO인 요시다 타다히로의 독특한 경영철학 덕분이라고 분석합니다. 요시다 타다히로는 기존의 경영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CEO를 신격화하고 내부 관계자들만 이익을 공유하며 경영자가 전문가의 의견을 무시하며 간섭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요시다 타다히로는 회사에 입사한 후 노조위원장을 맡을 만큼 직원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경영자 중심의 회사 경영방식을 버리고 “회사는 경영자의 것이 아니라 사원들의 것”이라며 ‘믿고 맡긴다’는 직장 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또한 직원들에게 “실패해서 곤란한 사람은 여러분이 아니라 사장인 나”라며 “일의 성공, 실패에 연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주길 바랍니다”라고 격려했습니다. 그 결과 ‘YKK’는 연간 75억 개의 지퍼를 생산하며 세계 지퍼 시장의 절반을 차지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또 전 세계 70여 개국에 100여 개의 자회사를 두고 있으며 지퍼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YKK’의 성공 사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 하기보다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할 때 더 크고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나 혼자의 능력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공동체 안에서 함께 걸어갈 때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고 더욱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자리에서 사랑과 배려로 하나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귀한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5.04.04

    사랑과 희생
  • 진정한 사랑은 희생과 섬김을 동반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가장 거룩한 희생의 본보기이며 참된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이 같은 사랑을 실천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과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던 야누시 코르차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유대계 폴란드인이자 의사, 아동 교육가 그리고 고아원 원장이었던 코르차크는 유망한 의사로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르차크는 자신의 안락함보다 소외된 어린 생명들을 돌보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단순한 보호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소중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며 그의 고아원도 전쟁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독일군은 가슴에 별 모양의 배지를 달고 있는 유대인 아이들을 모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유대인 아이들은 그 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포에 떨었고 그런 아이들을 독일군이 무자비하게 끌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두려움에 떨며 코르차크를 꼭 끌어안았습니다. 독일군은 코르차크를 향해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코르차크는 여자아이를 따뜻하게 품에 안아 주었고 아이들과 함께 가스실로 향하는 트럭에 올라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어디를 가든 선생님이 함께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우리 함께 기도하자.” 아이들은 코르차크의 말을 따라 두 손을 모았고 코르차크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이제 마음이 편안해졌니?”라는 물음에 아이들은 한결같이 “네, 편안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침내 가스실에 도착했을 때 독일군은 폴란드인이었던 코르차크를 끌어내려고 했지만 코르차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입니다. 어떻게 이 아이들만 죽음으로 보낼 수 있단 말입니까?” 코르차크는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며 곁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코르차크의 사랑과 희생을 기념하여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 앞마당에 아이들을 끌어안고 있는 코르차크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혹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나요? 유대인 아이들이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코르차크를 통해 위로와 평안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할 때 참된 소망과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희생과 섬김을 통해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나누고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5.02.28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법
  • 아프리카 오지에 병원을 세워 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한 ‘아프리카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는 ‘행복은 나눌 때 배가 되는 유일한 것’이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슈바이처 박사처럼 평생을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한 의료인이 있습니다. ‘봉천동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윤주홍 원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윤주홍 원장은 본래 국어국문과를 전공했지만 결핵으로 7년간 고생한 후 지금부터는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동기들보다 8년이나 늦게 의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의대 편입 시험 중 정답 대신 “노폐물로 가득한 정맥 같은 삶을 버리고 의사가 되어 동맥 같은 삶을 살고 싶다”라는 진심 어린 글을 적어 입학 관계자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습니다. 의대를 마친 윤주홍 원장은 경찰병원 수련의로 들어가자 바로 봉사의 삶에 뛰어들었습니다. 서해안의 낙안도, 외도, 간월도, 내파수도, 장고도, 고대도 등 진료시설이 없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섬이라면 어디든 찾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윤주홍 원장이 신림보건소를 가다가 타이어에 펑크가 나 차에서 내렸는데 길옆에 판자 아래로 사람의 발을 발견했습니다. 시체인 줄 알고 가 보니 자는 사람의 발이었습니다. 그길로 윤 원장은 봉천동 판자촌 사이에 ‘윤주홍 의원’을 개원해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돈보다 생명이 먼저라는 신조대로 진료비에 연연하지 않고 가난한 환자들에게 무상 또는 절반의 진료비만 받으며 치료에 전념했습니다. 봉천동 판자촌에서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두 명의 강도로부터 위협을 당했는데 그중 한 강도가 윤주홍 원장이 자기 아들을 치료했던 의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른 강도를 설득해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습니다. 또 한번은 주문하지 않은 자장면을 배달받은 적도 있습니다. 수년 전 인근 보육원의 맹장염을 앓는 아이를 무상으로 수술해 줬는데 아이가 중식점에 취직한 후 은혜를 갚고자 자장면을 들고 온 것이었습니다. 일평생 봉사와 나눔을 실천해 온 윤주홍 원장은 사회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민대상, 국민훈장 동백장, 청룡봉사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 같은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실 그렇게 나누고 봉사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죠. 없는 사람에게는 삼분지 일도 힘든 법이에요. 그래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1할 중 2푼은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는 거예요. 힘들 때 나누는 건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는 고통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해요. 그래야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법이거든요.” 윤주홍 원장이 보여준 삶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행을 통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5.01.31

    우리의 결산
  • 2025.01.03

    기적의 시작
  • 많은 사람에게 새해는 소망하는 바를 꿈꾸고 계획하는 희망의 해이지만 한편으로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간절히 기적을 바라는 해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얼어붙은 경제로 말미암아 모두가 어려운 이때, 절망의 자리에서 희망의 기적을 써내려간 제프 핸더슨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제프 핸더슨은 라스베이거스의 최고급 호텔인 벨라지오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로 총주방장이 된 유능한 요리사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렸을 때부터 탄탄대로를 걸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프 핸더슨은 마약을 두고 온갖 범죄가 난무하는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동네에서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으며 많은 어머니들은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이 같은 주변 환경 속에서 제프 핸더슨도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그 여파로 어린 시절부터 도둑질을 일삼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역시 청소년기에 마약의 세계로 발을 들이게 되었고, 결국 마약 밀거래 죄로 체포되어 징역 19년 7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교도소에 간 그는 주방에 배정되어 하루에 세 번 1500명 분량의 식기를 닦아야 했습니다. 뜨거운 솥에 살갗을 데었으며 끝없는 설거지로 손은 퉁퉁 붓고 갈라졌습니다. 그런데 제프 핸더슨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설거지부터 온갖 잡일을 거치며 성실하게 기술을 익혔고, 이를 통해 10년 만에 보호관찰로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이후에는 레스토랑에서 접시닦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요리사 경력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절망의 자리가 바로 그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제프 핸더슨은 메리어트 호텔, 리츠칼튼 호텔, 벨에어 호텔, 레르미타주 호텔의 주방을 거쳐 라스베이거스의 시저스팰리스 호텔 주방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미국 테이스팅 협회 선정 2001년 최고의 요리사 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벨라지오 호텔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총주방장이 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제프 핸더슨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나는 희망이다(Impossible is Nothing)』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나의 성공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오늘 어떤 절망의 자리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나요? 예수님을 만나면 그 절망의 자리가 기적의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희망의 새해를 써내려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5.01.03

    사랑하면 할 수 있지요
  • 매해 겨울이 되면 대한결핵협회에서 결핵 퇴치 기금을 모으기 위해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합니다. 지금은 범국민적으로 시행된 결핵 퇴치 사업이 성과를 거둬 결핵 환자가 많이 줄었지만, 결핵은 오랫동안 인류의 생명을 앗아간 감염 질환으로 우리나라 역시 결핵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온 의료선교사들도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큰 힘을 쏟았습니다. 그중 1949년부터 1974년까지 25년간 한국의 결핵 환자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준 미국의 허버트 카딩턴 선교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카딩턴 선교사는 우리나라 땅을 밟기 전 미국 뉴욕주 코넬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고,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시에 있는 유니언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1949년 미국 남장로교를 통해 한국에 파송되어 목포프렌치병원에 부임해 활동하다가 1951년 광주제중병원의 제5대 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1966년까지 광주제중병원장을 역임했고 1967년부터 1974년까지 결핵과 과장으로 재직하며 결핵 퇴치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렇게 의료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친 카딩턴 선교사는 선교병원만큼은 가난한 환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편이 어려워 진료비를 낼 수 없는 환자도 기꺼이 진료하고 처방을 내주었습니다. 또한 결핵은 전염력이 강해 치료하는 사람도 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카딩턴 선교사는 전혀 거리낌 없이 환자를 대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 몸을 안아 일으키고 수혈이 필요하면 자신의 팔을 걷어붙였으며 응급 시에는 직접 인공호흡을 해 기도에 막힌 핏덩이를 빼내곤 했습니다. 어느 날 동료 선교사가 어떻게 이런 힘든 선교를 할 수 있는지 묻자 카딩턴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랑하면 할 수 있지요.” 이후 카딩턴 선교사는 1974년에 한국보다 의료 환경이 더 열악한 방글라데시로 떠나 1999년까지 25년간 콜레라, 결핵, 한센병 환자를 돌봤습니다. 이처럼 의료선교를 하며 50년을 보낼 동안 두 자녀를 잃었고, 아내는 병들었으며 본인 역시 암에 걸렸지만 끝까지 가난한 환자의 곁을 지킨 카딩턴 선교사는 ‘결핵 환자의 아버지’, ‘작은 예수’, ‘바보 성자’ 등의 여러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카딩턴 선교사는 죽음을 앞두고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라고 묘비에 써달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언처럼 우리는 모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을 다시금 기억하며 올겨울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나누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24.11.29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역경을 마주합니다. 어떤 이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낙담하거나 좌절하지만 이와 반대로 꿋꿋하게 역경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나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각 장애를 딛고 일어나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강영우 박사의 이야기는 우리가 고난을 만났을 때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 큰 가르침이 됩니다. 강영우 박사는 13살 때 친구들과 공놀이하다가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실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얼마 후 홀로 계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누나마저 세상을 떠나 그는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고아가 되기 직전 누나의 손에 이끌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전신인 대조동 천막교회를 찾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 강영우 박사의 삶은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으로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영의 눈을 뜬 것과 더불어 해외 유학의 꿈을 꾸었고,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아내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렇게 한국 최초의 시각 장애인 박사가 된 그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냈고,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 겸 루스벨트 재단 고문으로 7억명에 가까운 세계 장애인의 복지 향상을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2012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강영우 박사의 꿈은 아내 석은옥 여사와 두 아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석은옥 여사는 남편의 뒤를 이어 시각 장애인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해외 연수 기회를 제공하여 ‘제2의 강영우’가 될 인재를 육성하고 있습니다. 또한 첫째 아들은 안과의사로, 둘째 아들은 변호사로 어머니와 함께 장학사업에 힘쓰며 세계 곳곳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장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던 강영우 박사는 자신의 유고작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에서 삶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저에게 장애는 축복 그 자체였습니다. 저를 보면 어둠인데 주님을 보니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만 보았습니다. 장애는 불편함일 수는 있어도 불완전함은 아닙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질병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을 지배하는 생각의 장애, 마음의 장애, 영의 장애를 뛰어넘어 나의 장애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꿈은 이뤄집니다 … 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희망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습니다. 제 생애는 결코 고통의 시간들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을 낙심하게 하는 문제는 무엇인가요? 내게 닥친 역경이 태산처럼 너무나 커 눈앞을 캄캄하게 가릴 때 그 역경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믿음으로 나아가면 어느새 그 꿈을 모두 이루는 위대한 승리자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2024.11.01

    시선
  • 우리는 일상 속에서 수많은 상황을 마주하고 다양한 장면을 목격하며 살아갑니다. 아름다운 자연이나 선한 행동을 보며 감동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유혹과 어둠이 가득한 세상을 마주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무엇에 시선을 고정하는가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마음과 생각이 형성되고 나아가 우리의 행동까지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지만 풍랑과 바람에 시선을 빼앗겨 두려워하는 순간 물에 빠졌습니다(마 14:30).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할 때 흔들림 없는 믿음과 평안을 가질 수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반대로 세상의 두려움과 어려움에 시선을 빼앗기면 곧 혼란과 불안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작은 마을에 오래된 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집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창문은 오랜 세월 동안 먼지와 얼룩으로 가득해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집 주인은 창문을 방치한 채 살면서 창밖을 보며 이웃의 집이 지저분하고 정리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매일 창밖을 보며 ‘왜 저 집은 그렇게 엉망일까?’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던 중 친구가 찾아왔고 집 주인은 친구에게 이웃집이 얼마나 더럽고 정리되지 않았는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친구는 잠시 창문을 유심히 보더니 “창문을 한 번 닦아보는 게 어떨까?”라고 제안했습니다. 마지못해 창문을 닦기 시작한 집 주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창문이 깨끗해지자 이웃집이 전혀 지저분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깔끔하고 정리된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창문에 묻은 먼지로 인해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시선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창문을 닦아야 바른 시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우리 마음과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유혹과 불안, 편견에 사로잡혀 왜곡된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시선을 고정할 때 비로소 세상의 혼란 속에서도 평안과 소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편 123편 1절)라는 고백처럼 우리의 시선이 향해야 할 곳은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삶은 우리에게 혼란과 불안을 이겨내고 평안을 누리는 길을 열어줍니다. 세상의 불안이 우리를 덮치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집중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는지를 점검하며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소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2024.10.04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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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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