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렌즈로 보는 문화
예수가 거느리시니
  • 2025년 희망의 새해가 밝았다. 하지만 정치적인 혼란과 무안공항 비행기 참사로 인해 우리 사회 분위기는 어둡기만 하다. 불안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조셉 길모어(Joseph Gilmore) 목사님이 작사한 ‘예수가 거느리시니’(He Leadeth Me)라는 찬송가는 불안과 혼돈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이 찬송가는 미국 남북전쟁(1861~1865)이 한창일 때 길모어 목사님이 전한 설교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그 당시 사람들은 여러 차례 새해를 맞이했지만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과 희망보다는 늘 걱정과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전쟁하는 이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서로 피를 흘리며 싸웠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1862년 3월 26일 길모어 목사님은 필라델피아 제일침례교회에서 시편 23편 말씀을 가지고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그날 목사님과 성도들은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경험했다. 예배 후 길모어 목사님은 한 성도의 집에 초대를 받아 여러 성도와 함께 받은 은혜와 간증을 나누었다. 그때 성도들이 받은 감동을 잊지 못한 목사님은 설교원고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인도하시네.” 길모어 목사님은 이 찬송시를 아내에게 건네주었고, 아내는 이것을 목사님에게 알리지 않고 『파수꾼과 반사경』(Watchman and Reflector)이라는 정기 간행물에 기고했다. 이후 작곡자 윌리엄 브래드버리(William Bradbury)가 이 찬송시에 곡을 붙여 1864년에 그의 찬송곡집 『황금빛 향로』(The Golden Censer)에 수록하면서 이 곡이 미국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3년 후인 1865년 길모어 목사님은 뉴욕 로체스터 제2침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첫 설교에 어울리는 곡을 찾으려고 찬송가를 뒤적거리다가 아내에게 찬송시를 건네줬던 게 기억났다. 그는 절망과 불안 속에 지친 성도들에게 시편 23편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했던 찬송가의 가사를 떠올리며 이렇게 설교했다. “성도 여러분, ‘예수가 거느리신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주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삶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주십니다. 주님은 낮과 밤에 깨고 자는 것까지 돌봐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인도자이십니다. 때로는 병들고 실패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고쳐주시고 일으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인생길에서 질병의 고통, 이별의 아픔, 궁핍과 상실감, 외로움을 만나도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과 이별할 때 마귀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복을 주십니다. 이 땅의 짧은 번영은 허무함과 절망으로 끝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의 기쁨은 영원할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한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혼란하다. 하지만 이러할 때일수록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와 함께 거느리시는 예수님과 더욱 가까이 동행해야 한다. 어떤 위기가 찾아온다고 할지라도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굳세게 살아가는 소망의 한 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 /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아멘. <국제신학연구원>
  • 2025.01.17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
  • 대림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념하고,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며 보내는 절기이다. 이 기간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야기가 있다. 바로 ‘수태고지’(受胎告知), 즉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알리는 사건이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고 특히 누가복음에서 그 내용이 더욱 세밀하고 감동적으로 묘사된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고한다. 이어지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과 마리아의 찬가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쁨을 고조시킨다. 이러한 구주의 탄생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분위기는 수많은 화가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실제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와 마주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만 해도 120여 점이 넘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1284~1344)의 <수태고지>는 고딕 미술의 걸작으로 불린다. 이탈리아 시에나 출신인 마르티니는 비잔틴 미술의 영향을 배제하고 고딕 양식 특유의 정교하고 화려한 색채와 유려한 곡선을 활용하여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어냈다. 그의 대표작인 <수태고지>는 이러한 고딕 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현재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금박으로 장식된 화려한 배경과 정교하게 묘사된 인물 및 사물을 통해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림 속에서 마리아는 책을 읽던 중 천사 가브리엘이 갑자기 나타나 잉태 소식을 전하자 굳은 얼굴로 옷깃을 여미면서 몸을 뒤로 젖힌다. 그러한 몸짓과 함께 그녀가 입은 어두운 옷이 황금색 배경과 강렬하게 대비되어 화면 전체에 긴장감과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천사 가브리엘의 위로 솟은 날개와 펄럭이는 망토는 그가 하늘에서 막 내려온 듯한 인상을 준다. 무릎 꿇은 천사의 오른손 검지가 화면 중앙 위쪽에 있는 비둘기를 가리키며 이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할 것임을 암시한다. 올리브 가지를 들고 있는 천사와 마리아 사이에 백합이 담긴 물병이 놓여있는데 이 부분이 주목해볼 만하다.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한다. 그래서 수태고지를 묘사한 많은 작품에서 가브리엘은 백합을 든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마르티니는 특이하게 백합 대신 올리브 가지를 선택했다. 백합이 피렌체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독립 도시국가들의 집합체로 시에나와 피렌체는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시에나 출신인 마르티니는 천사가 백합을 들어 마치 피렌체의 영광을 구현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순결을 나타내는 백합을 배제하기도 어려운 노릇이었기에 그는 백합을 화병에 담아 중앙 뒤에 배치하고 천사에게 시에나를 상징하는 올리브 가지를 쥐여주는 묘안을 떠올렸다. 가브리엘이 들고 있는 올리브 가지와 머리에 쓴 올리브 화관은 평화와 왕권을 상징한다. 이를 통해 마리아가 잉태할 아기는 세상에 평강과 승리를 가져올 왕과 같은 존재임을 나타낸다. 또한 가브리엘의 입에서 마리아의 귀로 이어지는 문자들은 누가복음 1장 28절의 말씀인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상단의 둥근 장식 무늬 안에는 구약시대에 메시아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한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가 등장하여 구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이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됨을 암시한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는 평면적이고 뾰족한 고딕 양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우아한 감수성과 감미로운 색채로 수태고지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마리아를 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거쳐야 할 인간적인 고뇌와 두려움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순간이 지나가고 그녀의 입에서 순종의 고백이 나온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결국 마리아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드리기로 결심했다. 12월이 되면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과 다채로운 크리스마스 장식이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분위기 속에서 성탄절의 참된 의미가 흐려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밝힌다(마 1:21).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은 어떤 선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는 때로 마리아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뜻을 마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리아의 순종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한 것처럼, 우리의 순종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풍성한 은혜를 주실 길을 열어줄 것이다. 대림절 기간에 마르티니의 작품을 묵상하며 성탄의 의미를 되새기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길 바란다. 나아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다가오는 성탄을 기대하고 준비하기를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4.12.20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 새는 날개를 단지 하늘을 날기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는다. 때로는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날개를 사용한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쬘 때 어미 새는 두 날개를 활짝 펴서 새끼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다. 뜨거운 햇볕을 등지고 있어서 자신은 입을 벌리고 헉헉거리면서도 새끼를 위해 날개로 그늘을 마련하는 것이다. 어미 새의 날개는 새끼에게 피난처이자 안식처이다. 우리의 피난처와 안식처는 어디일까? 찬송가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Under His Wings)를 작사한 미국 출신 윌리엄 쿠싱(William Cushing) 목사는 우리의 피난처와 안식처가 바로 ‘주님의 날개 아래’에 있다고 전한다. 결혼한 지 10년이 되던 해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알 수 없는 병에 걸리자 심히 괴로워했다. 병세는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아내의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목사의 아내로서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고 헌신했지만, 넉넉하지 못한 생활과 남편의 바쁜 사역을 내조하면서 그녀의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던 것이다.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던 쿠싱 목사는 깊이 고민한 끝에 아내를 위해 사역지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처음 목회를 시작하며 아내와 첫사랑을 나눴던 시어스버그로 돌아가면 아내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내는 그곳으로 이주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쿠싱 목사는 목회 사역과 아내 간호로 인한 과로로 피로가 누적되었고, 그로 인해 그의 목소리는 점차 쉰 소리로 변해갔다. 나중에는 성대가 심각하게 손상되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사람들과 글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내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목소리까지 잃게 된 것이다. 목숨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낙심한 쿠싱 목사는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다. “주님, 저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랑하는 아내도 데려가시고 이제는 말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제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말조차 하지 못하는 이 몸을 데려가 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절망에 빠진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다. “너는 내 것이다. 말하지 못하는 입술도, 병든 네 몸도 모두 내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쿠싱 목사는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백했다. “주님, 건강한 몸으로 주님께 충성하지 못했지만, 이제 병든 몸으로라도 충성하고자 합니다. 제가 할 일을 알려주세요.” 그 후 그는 돈도 명예도 건강도 그리고 자신의 생명까지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 거하며 살겠다는 믿음의 고백을 담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글이 찬송가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의 가사가 되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찬송가 1절 가사처럼, 그는 ‘밤 깊고 비바람 부는’ 삶의 어려운 순간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좌절과 절망을 넘어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 아래 있는 “주 날개 밑”이다. 그의 고백처럼 “주 날개 밑”은 모든 성도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고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으며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만족과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원한 안식과 참된 소망은 오직 주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여전히 예수님은 주의 날개 아래에 거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보호해주신다. 삶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주님께 나아가 참된 평안과 안식을 경험하자.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시는 “주 날개 밑”에 거하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시 91:4). 국제신학연구원
  • 2024.11.15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하프를 켜는 다윗 왕>
  • 홀로 하프를 연주하는 노인이 보인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듯 그의 머리와 수염은 하얗게 세고 얼굴과 손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다. 품격 있는 손끝으로 섬세하게 하프를 켜는 노인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 평화로움을 자아낸다. 어둠 속에서 어딘지 모를 먼 곳을 바라보며 연주에 몰두하고 있는 이 노인은 바로 노년에 이른 다윗이다. 구약성경에서 다윗의 이름은 848번 등장한다. 이는 구약성경의 모든 인물 중 가장 높은 빈도이다. 그만큼 다윗의 이야기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한다. 성경에 묘사된 다윗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미술사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어왔다. 대부분 예술가는 다윗을 젊고 용맹한 모습으로 표현하여 그의 강인함과 영웅적인 면모를 강조하려고 했다. 다윗을 모티브로 한 수많은 작품 중에서 걸작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 역시 탄탄한 근육과 강인한 얼굴을 지닌 젊은 다윗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바로크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는 달랐다. 루벤스가 그린 다윗은 힘이 넘치는 청년이나 위엄 있는 권력자가 아닌 그저 홀로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 늙은 악사의 모습이다. 루벤스가 노년의 다윗을 화폭에 담은 이유는 그의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곳에 루벤스의 고향 안트베르펜이 있다. 루벤스는 이곳에서 미술을 처음 시작했다. 그는 23세에 안트베르펜을 떠나 이탈리아에 머물며 고대미술과 르네상스 거장들의 화법을 배웠다. 이로 인해 루벤스의 작품에는 사물의 표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알프스 북부의 화풍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탈리아 고전주의의 특성이 모두 나타난다. 강렬하고 역동적인 구성과 생생한 색채로 이루어진 루벤스의 그림들은 당대의 이목을 끌었으며 바로크 미술이 확립될 수 있도록 큰 영향을 끼쳤다.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를 거머쥔 루벤스의 삶은 말년까지도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지병인 통풍이 심해지면서 그는 더 이상 붓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루벤스가 마지막으로 남긴 자화상을 보면 통풍으로 뒤틀린 오른손을 장갑 안에 숨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루벤스는 63세의 나이에 통풍으로 인한 심장발작으로 생을 마감하였고 <하프를 켜는 다윗 왕>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얀 보에크호르스트(Jan Boeckhorst, 1604~1668)가 그림의 왼쪽과 하단을 마무리하면서 오늘날의 <하프를 켜는 다윗 왕>이 탄생했다. 말년의 루벤스는 나날이 쇠약해지는 육체와 화려한 명성 뒤에 숨겨진 허무함을 깨닫고 혈기 왕성한 청년 다윗보다 노년의 다윗에게 더 깊은 애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하프를 켜는 다윗 왕>은 그의 강렬하고 생동감 넘치던 기존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보다 사색적이고 고요한 분위기를 풍긴다. 신앙심이 깊었던 루벤스는 40년 권력의 무게를 내려놓고 홀로 하프를 켜며 찬양하는 다윗을 그리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찬란했던 인생은 한때 피고 지는 꽃과 같으며 결국 주님만이 참된 구원자이시며 피난처 되신다고 스스로 되새겼을지도 모른다. 다윗은 이를 그 누구보다 깊이 깨달은 사람이었다.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믿음으로 순종했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많은 부와 권력을 누렸으며 영원히 지속할 왕위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도 순식간에 죄악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는 부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죄로 인해 큰 슬픔과 좌절을 경험했다. 아들 압살롬의 반역, 혈육 간의 살상, 부하들의 배신 등 많은 아픔으로 얼룩진 말년에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더욱 통렬히 깨달았을 것이다. 시편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위대함은 완전함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데에 있었다. 위엄 있는 왕관과 화려한 옷을 모두 벗어버린 채 하나님을 바라보며 정성스레 찬양을 올려드리는 다윗의 모습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우리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또한 삶의 끝자락에서 어떤 신앙고백을 드릴 수 있을까. 이 땅에서 우리의 인생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소망을 찾을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잡으려고 분주하게 살아가는 일상에 잠시 쉼표를 찍고, 오늘 이 그림 속 다윗을 깊이 묵상해보자. 다윗이 만난 하나님을 우리도 만나고 다윗이 고백한 하나님을 우리도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 역시 주님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며 그런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금 깨닫길 바란다. 또한, 사라질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며 일평생 하나님 앞에 나의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찬양을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4.10.17

    내 평생에 가는 길
  • ‘꽃길만 걷자’라는 유행어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하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어떤 때는 꽃길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걷지만 어떤 때는 가시밭길을 걸으며 눈물을 흘린다. 갈림길이 나오면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서성인다. 막다른 길을 만나면 지나온 인생을 후회하면서 방황하기도 한다. 이렇듯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인생이다. 이러한 인생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찬송가 ‘내 평생에 가는 길’(It is Well with My Soul)을 작사한 호래이쇼 스패포드(Horatio Gates Spafford, 1828~1888)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의 길을 걸으라고 말한다. 그는 부유한 변호사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들이 계속되면서 어두운 길을 걸어야 했다. 42세가 되던 해에 급성 전염병 피부질환으로 아들을 잃고 다음 해인 1871년에 시카고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전 재산을 잃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시련을 겪었다. 사랑하는 네 딸을 모두 잃게 되는 사고를 당한 것이다. 당시 아들과 전 재산을 잃은 충격으로 인해 절대적인 휴식이 필요했던 그는 아내와 네 딸과 함께 유럽 여행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갑자기 처리해야 할 급한 업무가 생겨서 아내 안나와 어린 네 딸(11살, 9살, 5살, 2살)을 유럽행 여객선 ‘빌르 드아브로’에 먼저 승선시켰다. 이때 1873년 11월 15일 313명을 태운 여객선이 뉴욕항을 떠나 파리로 향하던 중 영국 범선 ‘로크언’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아내인 안나를 포함한 87명은 구조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는 네 딸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뉴스를 통해 사고 소식을 접한 그는 배를 타고 사고지점에 도착해 극심한 고통과 슬픔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며 부르짖었다. “주님, 저는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겼고 주님을 사랑했는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이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절망 속에 탄식하며 부르짖던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음 날 아침 선실 창가 사이로 햇살을 비추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달려가서 그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왕하 4:26). 그는 이 말씀 속에 ‘평안’이라는 단어가 계속 마음에 남았고 평생 느껴보지 못한 깊은 평안을 경험했다.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It is well. It is well with my soul. God’s will be done.) 그렇게 주님이 주신 영감으로 한 편의 시를 써 내려갔는데, 그 시가 ‘내 영혼 평안해’(It is well with my soul)이다. 이후 시카고로 돌아와 무디 목사님에게 인정을 받아 음악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는 필립 블리스에게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의 고백과 시에 감동을 받은 블리스가 바로 그 자리에서 곡을 붙여주어 탄생하게 된 찬양이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이다. 스패포드는 자신의 인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을 붙잡아 참된 평안을 경험했다. 이해할 수 없는 그 길을 ‘이해’라는 방법으로 걷지 않고, 예수님을 붙잡는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참된 평안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원의 은혜를 믿는 것(엡 2:8; 벧전 2:24)과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끝까지 신뢰(시 36:5~6)하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믿고 신뢰할 때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우리가 어떤 길을 걷고 있든 참된 평안을 주시는 예수님을 붙잡지 않으면 그 길은 멸망의 길이 될 수밖에 없다. 설령 그 길이 휘파람이 저절로 나오는 아름다운 꽃길이라 해도, 예수님이 없다면 그 끝에는 허무와 절망만이 있을 뿐이다. 반대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걷더라도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 길이야말로 참된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길이 될 수 있다. 스패포드가 작사한 찬송가의 1절 가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교훈을 준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어떤 길을 걷든 예수님만을 따르는 믿음의 길을 걸으며 참된 평안을 경험하자.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기에 우리의 길은 어떤 상황에서도 의미 있고 축복된 길이 될 것이다. 믿음으로 지금 내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계속해 나가길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4.08.16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있다. 약 2000년의 기독교 역사 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사건은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이는 뛰어난 예술 작품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오늘 다루게 될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newald, 1470~1528)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도 그중 하나이다. 그뤼네발트에 관해서는 16세기 초 독일에서 활동했다는 점 외에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가 남긴 26점의 회화와 37점의 소묘작품은 모두 성경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 후기 고딕 양식과 북유럽 회화로부터 사실주의 기법의 영향을 받은 그뤼네발트는 강렬하고 과장된 표현방식으로 20세기 초 표현주의의 선구자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그뤼네발트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이젠하임에 위치한 성 안토니오 수도원의 종교 제단화로 제작된 작품이다. 2.7m 높이와 3m 너비의 여러 패널에 그려진 이 제단화는 당시까지 전례 없는 크기였으며, 수태고지,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부활의 장면 등 총 9개의 유화로 이루어져 있다. 완성되기까지 4년이 걸린 이 작품은 현재 프랑스 콜마르의 운터린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라는 제목은 이 제단화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그림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그림에서 비롯되었다. 그림 속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참혹한 모습은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종교화에서 추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예수님을 성스럽고 근엄하게 표현한 기존 작품들과 달리 매우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그뤼네발트의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쓰러지는 마리아를 부축하는 사도 요한과 심하게 몸이 휘어지면서 강렬한 슬픔을 나타내는 막달라 마리아가 기도하는 자세로 그려져 있다. 오른쪽에는 예수님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는 침례 요한이 등장하는데, 그의 얼굴 옆에는 라틴어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illum oportet crescere me autem minui)는 요한복음 3장 30절의 말씀이 적혀있다. 예수님 발아래 십자가를 짊어지고 성배에 피를 흘리고 있는 어린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오신 예수님을 나타낸다(요 1:29). 한마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요한복음의 요약판이라 부를 만하다. 짙고 어두운색으로 그려져 있는 십자가의 종렬은 거기에 매달려 있는 예수님의 핏기 없는 몸과 잘 대비된다. 예수님의 머리 상단에는 INRI라 쓰인 팻말이 붙어있는데, 이는 라틴어 ‘Iesus Nazarenus Rex Iudaeorum’의 약자로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를 의미한다. 숨이 다한듯한 예수님의 고개는 바닥을 향해 힘없이 떨구어져 있다. 십자가의 휘어진 횡렬 위에 끊어질 듯 양팔이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은 예수님의 실재적인 무게감과 함께 죽음의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날카로운 가시면류관이 살갗을 파고들어 상처 난 머리, 미간에 깊게 잡힌 주름과 감긴 눈, 치아와 혀를 드러내며 새파랗게 질린 채 말라버린 입술은 예수님이 견뎠을 극심한 괴로움을 짐작게 한다. 이와 함께 움푹 들어간 배와 한껏 부풀어 오른 갈비뼈의 대비는 예수님이 숨 막히는 고통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마지막 숨을 들이쉰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십자가의 뒤쪽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큰 대못이 박혀 뒤틀려 있는 손은 마치 예수님이 하늘을 향해 자신을 바치는 듯한 묘사를 하고 있다. 예수님의 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푸릇푸릇한 반점과 상처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는 당시 유행한 맥각병의 상처와 매우 유사하다. 여러 전염병이 확산했던 중세 후기에 성 안토니오 수도원 병원은 주로 맥각병 환자를 돌보았다. 맥각병은 곡물에서 발생하는 균으로 인해 피부가 손상되고 상처가 깊이 들어가 신경과 혈관을 훼손하여 죽음까지 이르게 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당시로 보면 1500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 사건인데 왜 그뤼네발트는 예수님의 몸에 맥각병으로 보이는 상처들을 그려 넣었을까? 이는 그림을 접하는 환자들이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 아픔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계신 예수님을 통해 위안을 얻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수도원은 환자들을 제단화 앞으로 데려가 그림을 묵상하도록 권면했고 그들은 그림 속 예수님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뤼네발트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과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상기시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온전히 순종하여 스스로 대속 제물이 되사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대신 지셨다.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겪어내심으로써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다. 우리는 매주 예배당에서 십자가를 마주한다.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날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 차는가? 어쩌면 우리는 십자가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매일의 삶에서 그 가치를 깊이 묵상하는 일에 소홀해지지 않았을까. 십자가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서는 주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가 삶 속에 깊이 자리 잡기 어렵다. 오늘 그뤼네발트의 작품을 묵상하면서 십자가의 은혜가 당연하게 되어버린 삶을 돌아보고 그 의미를 다시금 발견하기를 바란다. 더 나아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짊어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절대 긍정의 믿음과 소망을 얻기를 기도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4.07.19

    깊은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
  • 나뭇잎 위에 화려하게 내려앉은 계절의 빛깔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햇살이 머물다 간 자리마다 단풍이 곱게 물든 그림 같은 풍경에 감탄한 적이 있는가? 프랑스의 소설가인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의 산문집 『예찬』(Celebrations)에 보면 이런 글이 있다. “예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떤 아름다운 음악가, 한 마리 우아한 말, 어떤 장엄한 풍경, 심지어 지옥처럼 웅장한 공포 앞에서 완전히 손들어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투르니에는 우리가 자연과 인생을 바라볼 때 깊은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깊은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무심코 지나쳐 버렸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우리의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 차고 우리의 입술에서는 예찬이 흘러나오게 된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How Great Thou Art)는 스웨덴 민요의 선율에 예찬시를 덧붙여 만든 찬송가이다.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솜씨에 대한 기쁨과 감사, 경탄과 경외감이 담겨있는 이 찬송가의 가사는 원래 ‘오 스토어 구드’(O Store Gud: O Great God)라는 시로서 1885년에 스웨덴의 시인이자 평신도인 칼 보버그(Carl Boberg)가 쓴 것이다. 찬송가학자 J. 어빙 에릭슨(J. Irving Erickson)에 따르면 이 시는 보버그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뇌우와 강한 바람을 동반한 폭풍을 경험하고 뒤이어 활짝 갠 하늘의 태양과 숲의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면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자연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놀라운 창조 솜씨를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겼던 그의 경험이 시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가사는 스웨덴 전통 민요와 만나서 시가 쓰인 지 3년 후인 1888년에 교회에서 처음으로 불렸다. 이후 이 찬송가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독일어, 러시아어로 번역 및 각색되었다. 그러다 1920년대 초 영국 감리교 선교사 스튜어트 하이네(Stuart K. Hine)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고 현대식으로 새롭게 편곡되어 오늘날 우리가 애창하는 찬송가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하이네는 원가사의 핵심 줄거리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내용을 추가했다. 하나는 러시아의 어느 한 마을에 있던 사람의 회심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근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우크라이나를 떠나 영국 서머싯(Somerset)에 정착한 폴란드 난민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하이네는 실향민이 된 그들이 큰 고난을 겪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두 절은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위엄을 찬양하고, 후반부 두 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을 기대한다. 하늘에 펼쳐진 수많은 별 들과 함께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뇌성은 시편 기자가 기록했듯이 하나님의 권능이 야훼의 소리(시 29:1~11)로서 위대함을 선포하고(1절), 숲의 새와 고요히 흐르는 시냇물은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시 46:4)하는 찬양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솜씨가 온 만물로 숨을 내쉬고 있음을 보여준다(2절). 이는 창조주의 위엄이 만물을 통해 드러나고 만물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고전 8:6).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이 땅에 행하신 일 중 가장 위대한 것이 구원의 위업인데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3절). 죄가 하나도 없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그를 믿는 모든 이에게 영생을 주신 일은 주 예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기 위함인 것이다(요 3:16; 살후 1:12). 나아가 영원한 나라, 저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그날을 기대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4절).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는 근심과 고통으로 인해 눈물의 양식을 먹으며 살아가지만, 승리의 나팔 소리와 영원한 기쁨으로 가득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주실 주님을 고대하며 찬송가는 마무리된다. 칼 보버그와 스튜어트 하이네가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그저 감탄하는 데서 멈추고 그 안에 숨겨진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면 이와 같은 찬송가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깊은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 속에는 지존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깊은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다. 그러니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제신학연구원>
  • 2024.06.14

    카라바조의 <성 마태의 소명>
  •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순간을 화폭에 담은 화가가 있다. 바로 서양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라 불리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이다. 카라바조는 1599년 로마의 산 루이지데이 프란체시 교회의 콘타렐리 예배당에 전시할 작품을 의뢰받았다. 그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마태를 주제로 하여 <성 마태의 소명> <성 마태와 천사> <성 마태의 순교> 세 점의 유화를 그렸다. 그중에 오늘 살펴볼 <성 마태의 소명>은 카라바조의 대표작이자 바로크 미술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카라바조는 바로크 미술의 대표적인 특징인 빛과 어둠의 대조를 활용하여 성경에서 한 문장으로 기록된 마태의 소명 장면을 극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광경으로 재구성했다. 그림 속 장면은 독특한 화면 구성 방식을 통해 마치 연극무대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협소한 공간에 인물들을 모아놓고 주의를 산만하게 할 다른 요소들은 과감히 생략하여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또한 어둠으로 짙게 쌓인 공간에 직선으로 강렬하게 침투하는 빛을 그려 넣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이는 카라바조가 창안해 낸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는 명암법이 적용된 것으로 인물의 내면세계와 동작을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더욱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명암의 대비를 극대화한 표현 방법이다. 그림에서 빛은 공간 전체를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빛을 따라가다 보면 그림에 묘사된 인물들의 표정을 빠짐없이 읽을 수 있다. 그림을 보면 다섯 명의 사내가 테이블에 둘러앉아 돈을 세고 있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손을 들어 마태를 가리킨다.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과는 달리 수척한 얼굴에 남루한 옷 아래로 맨발을 드러낸 예수님과 베드로의 모습이 보인다. 예수님이 등장하는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쏟아지는 강렬한 빛이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비춘다. 이때 두 명은 예수님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동전을 세고 있다. 나머지 세 명은 고개를 돌려 제각기 다른 눈빛으로 입구 앞에 서 있는 예수님과 베드로를 보고 있다. 탁자에 앉은 다섯 명 중 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로 묘사된 마태는 한 손에 동전을 집은 채 예수님의 부르심에 놀란 눈빛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고요한 손짓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 중 <아담의 창조>의 아담의 손과 흡사하다. 실제로 카라바조는 아담의 손에 영감을 받아 예수님의 손을 그렸다고 한다. 하나님이 손을 통해 아담에게 생명을 주는 것처럼 예수님 역시 손을 들어 새로운 소명을 부여하시는 걸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마태만이 그 부르심의 손짓에 반응한다. 탁자 주변의 인물들은 마태가 살았던 로마 제국 시대가 아니라 카라바조가 활동하던 시대에 유행하던 의상을 입고 있다. 이는 그림에 현재성과 현장감을 불어넣어 성경 속 이야기가 마치 눈앞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기 위한 화가의 의도로 보인다. 또한 예수님 옆에 있는 베드로는 탁자에 앉아 있는 인물들의 생생한 색채의 옷차림과는 달리 헝클어진 머리와 초라한 행색을 하고 있다. 베드로와 같은 위대한 인물을 성스럽고 위엄있게 표현했던 종래의 전통에서 벗어나 평범한 서민과 같이 소박한 모습으로 그린 카라바조의 시도는 당시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작품이 걸려있는 콘타렐리 예배당은 실제로 그림의 오른쪽에 창이 있어 빛이 들어오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그래서 현실의 공간과 그림의 공간이 하나인 듯한 느낌을 주어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실감이 나게 만든다. 카라바조는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과 그림 속의 빛을 연장함으로써 그림과 현실, 가상과 실제의 경계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이 빛은 세속적인 욕심에 잠겨 있는 어둠을 밝히는 구원의 빛으로 표현된다. 그 강력한 빛 한 줄기를 직시하고 있는 마태는 동족에게 세금을 착취하여 멸시와 배척을 받던 세리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또한 다섯 명의 사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에 한 자리가 비어 있다. 이것은 그림을 보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화가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마태의 삶의 자리에 찾아오셔서 그를 부르신 예수님은 지금 이 그림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도 찾아오셔서 우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부르신다. 우리는 그림 속에 있는 사내 중 누구와 같이 반응하는가? 그저 동전을 헤아리는 데 정신을 빼앗겨 부르심을 외면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마태와 같이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머물던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인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살다 보면 그 길을 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우리를 불러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떠올려야 한다. 자격 없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4.05.17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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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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