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렌즈로 보는 문화
빛 되신 예수님
  • 만약 세상에서 24시간 동안 빛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먼저 지구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이로 인해 항상 따뜻하던 지역조차 한겨울과 같은 혹한을 겪게 되고 급격한 기온 변화 탓에 폭풍과 태풍 같은 이상기후가 발생하여 큰 피해가 생긴다. 두 번째로 식물 생태계가 파괴되기 시작한다. 식물은 광합성을 할 수 없게 되어 산소 배출을 멈추고 시들어 죽어간다. 이는 인간의 식량 문제와 직접 연결되므로 인류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세 번째로 사회 전반에 극심한 혼란이 찾아온다. 사람들은 식량과 생필품을 사재기하기 시작하고 정신적인 마비와 함께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진다. 인공조명에만 의지해야 한다는 공포심 때문에 전력 소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결국 일상생활은 마비되고 만다. 일주일 동안 빛이 사라진다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자연 생태계는 사실상 완전히 붕괴되고 인간 사회 역시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진다. 지구의 기온은 영하 20℃ 이하로 곤두박질쳐 전 세계 모든 지역이 남극과 같은 혹한의 환경으로 변한다. 물은 얼어붙고 전력 공급마저 완전히 끊긴다. 식물은 얼어 죽고, 곤충과 동물들도 굶어 죽기 시작한다. 인간이 그동안 축적해 놓은 에너지는 빠르게 고갈되어 바닥을 드러낸다. 결국 전 세계는 완전한 암흑에 휩싸인다. 곳곳에서 폭동과 범죄가 일어나지만 그 어떤 관리와 통제도 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 당연하게 만나는 빛은 비록 흔하고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생명과 삶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만드신 것도 바로 빛이다. 빛의 역할을 살펴보면 그 중요성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첫째, 빛은 생명의 에너지 근원이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에너지는 태양 빛에서 시작된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에너지를 만들고, 초식동물은 그 식물을 먹으며, 육식동물은 다시 초식동물을 먹는다. 인간 또한 이 식물과 고기를 섭취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은 태양의 빛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변환된 결과물인 셈이다. 둘째, 빛은 지구를 따뜻하게 해주는 열을 품고 있다. 빛이 열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인간과 동식물이 살아가기에 가장 적절한 온도가 유지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빛이 없다면 지구는 엄청난 추위에 갇히게 된다. 또한 태양의 열은 바람을 일으키고 비와 눈을 내리게 함으로써, 지구 전체의 에너지가 선순환하도록 돕는다. 셋째, 어둠을 밝히는 조명의 역할이다. 인류는 과거부터 빛을 조절하고 통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를 썼다. 옛날에는 해가 지면 모든 활동을 멈추어야 했다. 그러나 불과 촛불, 전구를 거쳐 오늘날의 인공조명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빛을 다스려왔다. 덕분에 밤에도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고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 사회는 끊임없이 발전하고 성장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는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작품을 완성했다(사진). 작가는 이 그림에 표현할 한밤중의 달빛과 등불 효과를 생생하게 관찰하기 위해, 밤마다 밖에 나가 추위에 떨며 작업에 몰두했다. 또한 성경적인 배경과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자 예루살렘 지역을 여러 차례 순례하기도 했다. 그는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신앙적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평생 작가로 활동했다. 이 작품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근거로 하여 완성했다. 그림 속에서 예수님은 깊은 밤중에 어느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계신다. 이 그림에는 두 가지 빛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예수님이 왼손에 들고 계신 등불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머리 뒤에서 빛나는 후광이다. 왼손의 등불은 무성한 풀과 잡초들로 표현된 인간이 가진 죄의 형태를 비추는 진리와 양심의 빛을 의미한다. 이 빛은 인간의 더럽고 추악한 죄악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어 우리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감추고 싶어 하는 연약함까지 비추어 회개와 변화의 자리로 이끄는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 뒤편을 밝히는 후광은 예수님이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실 참된 빛이심을 나타낸다. 이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빛이다. 그분만이 죄와 죽음의 어둠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유일한 분임을 밝히 보여준다. 특히 이 그림에서 주목할 점은 문 바깥쪽에 손잡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 문이 안에서만 열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지만 결코 강제로 열지 않으신다. 오직 우리가 스스로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이기를 기다리신다. 우리는 세상의 분주한 소리에 묻혀 주님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세상 속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이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6.06.19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 1998년 개봉해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은 영화 <타이타닉>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포함 6개 부문을 수상했다. 실제 타이타닉호는 1912년 당시 축구장 3개를 합친 것보다 긴 269의 길이에 높이는 53로 아파트 20층 규모 정도였다. 이 배는 인간의 기술력이 정점에 달했다는 자부심과 자신감의 상징이었다. 배 안에는 수영장과 체육관, 목욕탕이 있었고 실내 장식도 최고급 목재와 금빛 조명, 대리석 등으로 인테리어 되어 그 가치를 더했다.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충돌하여 침몰하고 만다. 영화는 잭과 로즈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장면이 있다. 바로 침몰 직전 갑판 위에서 연주를 이어가던 악단의 모습이다. 배가 가라앉는 순간에도 악단은 경쾌하고 빠른 합주곡부터 다양한 노래를 연주하며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그들이 연주를 멈추려는 순간, 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혼자 남아 찬송가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흩어지던 다른 연주자들이 다시 모여 끝까지 연주를 이어간다. 이때 울려 퍼진 찬송가가 새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Nearer, My God, to Thee)’이다. 이 곡은 창세기 28장을 중심으로 쓰여졌다.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하던 중 홀로 돌베개를 베고 잠들 만큼 고생을 한다. 형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된 야곱은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꿈속에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다리와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다.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다. 잠에서 깬 야곱은 돌베개를 세워 그곳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을 짓고 기념한다. 이 찬송가의 작사가인 사라 플라워 아담스 또한 고통 가운데 이 가사를 썼다. 영국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시와 찬송시를 쓰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던 중 출석하던 교회의 윌리엄 폭스 목사와 함께 찬송집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창세기 28장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이 찬송시를 쓰게 되었다.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든 야곱의 모습은 병과 고난 속에 있던 자신의 삶과도 겹쳐 보였다. 결국 그녀는 고통마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통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찬송을 남겼다. 한국에서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 최초로 악보가 있는 찬송가집 「찬양가」에 수록하며 소개했다. 이 찬송가는 한국인들이 부를 수 있도록 7·5조(일곱 글자, 다섯 글자)에 맞춘 형식으로 번역되어서 한국인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찬송가에는 1절에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2절에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3절에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라는 가사가 나온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야곱과 같은 고난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고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다. 야곱은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하늘 사다리를 보았다. 절망의 장소가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로 변화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일이 잘 풀릴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고난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지만,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듯이 ‘십자가 짐 같은 고난’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통로이자 과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난의 순간마다 두려움과 원망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야곱이 돌베개 위에서도 하나님을 만났듯이, 우리의 삶 속 작은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신다. 그러므로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리기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찬송은 형편이 좋아질 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을 향해 올려 드리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의 시선은 문제에서 하나님께로 옮겨지고, 두려움은 소망으로 바뀌게 된다. 고난의 시기가 하나님을 만나는 때이다. 외로울 때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때이다. 절망의 순간이 하나님의 임재가 이뤄지는 때이다. 힘든 상황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때이다. 고통의 길을 걸을 때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때이다. 이 ‘때’에 참된 생명이 있다. 이 ‘때’에 참된 기쁨이 있다. 이 ‘때’에 참된 평안이 있다. 이 진리를 늘 마음에 새기고 고난 중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며 풍성한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 2026.05.22

    성경의 무게(The Weight of the Bible)
  • 1562년 네덜란드 판화가 위제 알라드(Huijeh Allardt)가 새긴 한 장의 그림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준다. <성경의 무게(The Weight of the Bible)>라 불리는 이 판화는 종교개혁의 핵심 원리인 ‘오직 성경’을 가장 직관적으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저울이다. 그림의 중앙에 있는 이 저울은 작품 전체를 좌우로 나누는 기준이 된다. 저울에 달린 양쪽 접시 위에는 서로 다른 물건들이 놓여 있어 긴장감을 자아낸다. 왼쪽 저울 접시 위에는 화려한 것들이 가득하다. 교황의 절대 권위를 상징하는 삼중관(Tiara), 베드로의 열쇠 그리고 수 세기 동안 교회를 지탱해 온 방대한 교회법전과 전통의 기록 등이 쌓여 있다. 반면, 오른쪽 접시에는 단 한 권의 책, 성경만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다르다. 온갖 물건들이 쌓인 접시는 가볍게 위로 솟아올라 있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성경 쪽 접시는 바닥에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다. 알라드는 이 극적인 대비를 통해 진리의 힘을 드러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거창해도 말씀이라는 실재적인 무게 앞에서는 깃털처럼 가볍다는 사실이다. 저울이 성경 쪽으로 기울자 당황한 수도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떤 이는 접시 위로 올라가 무게를 더하고 어떤 이는 체중을 실어 저울의 줄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심지어 그들 틈에는 사탄의 기만과 속임수를 상징하는 이미지까지 가세하여 저울을 조작하려 애쓴다. 이 장면은 인간의 종교적 열심이나 인위적인 노력이 진리를 이길 수 없음을 풍자한다. 성경에 담긴 진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증명한다. 성경 주변에 서 있는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가들을 보라. 그들은 저울을 붙들거나 조작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말씀이 지닌 본연의 무게가 승리하는 과정을 확신에 찬 눈빛으로 지켜볼 뿐이다. 종교개혁가들의 머리 위 벽면에는 둥근 초상화들이 걸려 있다. 이들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에 먼저 믿음의 길을 갔던 초대교회 사도들과 교부들이다. 알라드는 이 장치를 통해 종교개혁이 결코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혁명이 아님을 나타낸다. 성경의 무게를 지지하는 이들은 교회의 가장 뿌리 깊은 선조들이었다. 종교개혁은 변질된 전통의 가벼움을 걷어내고, 사도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말씀의 묵직한 정통성을 회복하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성경 한 권이 지닌 무게 속에는 구약의 예언자들로부터 신약의 사도들 그리고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고백했던 진리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위제 알라드의 저울은 오늘날 우리 각자의 삶 앞에도 놓여 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저울 위에 수많은 가치를 올려둔다. 나의 경력, 사회적 평판, 쌓아 올린 지식, 안정적인 미래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들을 한쪽 접시에 가득 채우곤 한다. 때로는 그 무게가 너무나 대단해 보여서 그것이 내 인생을 지탱해 줄 절대적인 무게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고난의 폭풍이 불어오고 삶의 본질적인 의미를 물어야 하는 순간이 오면 그 화려했던 것들이 얼마나 가볍게 흩어지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그때 우리를 바닥에 단단히 고정해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말씀의 무게를 견디는 신앙이란 내 삶의 모든 판단 기준을 그 묵직한 성경 아래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때로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불편함일 수도 있고 나의 자아를 짓누르는 거룩한 부담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게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잡힌 인생을 살 수 있다. 위제 알라드가 묘사한 저울의 바늘은 지금도 변함없이 성경을 가리키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과학적 이론과 화려한 문화를 동원하여 저울의 균형을 맞추려 해도 진리의 질량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은 저울 접시 위에 더 많은 장식품을 얹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유혹하는 가벼운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바닥에 묵직하게 닿아 있는 말씀의 무게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 거룩한 성경의 무게를 신뢰하며 나아갈 때 우리는 그림 속에 있는 종교 개혁가들처럼 흔들리지 않는 평온함으로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 2026.04.17

    가짜가 진짜로 변화되는 기적
  • 비행기를 타고 밤늦게 한국에 입국하는 외국인들은 도심 곳곳에 수놓은 듯한 붉은 십자가를 보고 놀란다고 한다. 이 풍경을 본 그들은 ‘한국이 기독교 국가였나?’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기독교 역사가 오래된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밤새도록 십자가 조명을 켜두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전혀 다른 현실이 펼쳐진다. 한국오픈도어선교회가 2025년에 발표한 ‘세계 기독교 박해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3년 연속으로 세계에서 기독교인을 가장 심하게 박해하는 나라로 꼽힌다. 북한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과 같다.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겪는 사람이 수만 명에 이른다. 성경 한 권을 소지하거나 짧은 기도문을 외우는 것조차 발각될 경우 잔혹한 구타와 고문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충격과 아픔을 안겨준다. 작년 말에 개봉되어 100만명이 넘게 본 영화 ≪신의 악단≫은 북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그 과정에서 찬양이 얼마나 사람의 마음에 큰 울림과 감동을 자아내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는 상상하여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북한 당국은 국제 NGO로부터 약 2억 달러(약 2750억원)의 지원금을 지원받기 위해 ‘가짜 찬양단’을 조직했다. 사실 영화 속 가짜 찬양 단원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목숨이 위험하기에 그들은 철저히 신앙을 숨기고 당의 지시와 감시 아래 찬양을 연습한다. 그러던 중 그들을 감시하던 북한 고위 간부들조차 직접 찬양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놀랍게도 치밀하게 연출된 예배 속에서 당의 지시에 따라 찬양을 부를 때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가 일상에서 즐겨 부르는 「은혜」, 「광야를 지나며」, 「주 예수 나의 산 소망」과 같은 찬양이 그들의 억눌렸던 마음을 어루만지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는 바로 이 ‘가짜’의 연기가 ‘진짜’의 고백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생생하게 담아낸다. 특히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다’라는 찬양을 부를 때 매 순간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던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당연한 권리조차 누리지 못했던 그들에게 ‘은혜’라는 단어는 생소하면서도 강렬한 빛으로 다가왔다. 이처럼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삶 속에서 느끼는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담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곡조 있는 기도’이다. 곡조 있는 기도가 선율을 타고 울려 퍼지자 북한의 주체사상으로 세뇌되었던 그들의 완고한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이후 사방이 흰 눈으로 뒤덮인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단원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전율에 가까운 은혜를 선사한다. 그 순간의 찬양은 더 이상 외화를 벌기 위한 수단이나 연기가 아니었다. 발각되는 즉시 사형을 당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그들이 온 마음을 다해 찬양했던 이유는 죽음조차 빼앗아갈 수 없는 참된 평안과 자유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모든 장면 중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기는 장면은 북한 고위 간부가 찬송가 272장(통 330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를 부르는 대목이다. 이 찬양은 억압과 굶주림이라는 고난의 현실을 넘어 영혼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갈망하는 그들의 처절하고 소망 찬 고백이었다. 이 간절한 고백은 북한의 비극적인 실상을 드러내는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우리 역시 삶 속에서 ‘고통의 멍에’를 메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고통스러운 질병의 멍에를, 누군가는 무거운 물질의 멍에를, 또 누군가는 무너진 관계의 멍에를 메고 신음한다. 그러나 영화 ≪신의 악단≫이 증명하듯, 찬양은 우리의 마음과 괴로운 현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가짜 찬양도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 되었는데, 하물며 전심을 다해 올려드리는 우리의 찬양에 하나님이 어찌 역사하지 않으시겠는가. 찬양은 모든 결박을 푸는 열쇠이자, 가장 깊은 절망도 소망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강력한 무기다. 영화 속 인물들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누렸던 그 참된 평안이 오늘 우리의 찬양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임하길 소망한다. 우리의 목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며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를 얽매던 모든 멍에가 벗겨지고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희락이 강물처럼 넘칠 것이다. 오늘도 그 찬양의 능력을 힘입어,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전심으로 주를 높이는 거룩한 예배자가 되길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6.03.20

    기억하려면 기록해야 한다
  •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잡지 중 하나인 <타임>은 매년 ‘올해의 인물’을 선정한다. 특이하게도 2025년에는 특정 개인이 아닌 AI 시대를 설계한 IT 공학자 8명을 선정했다. 이 명단에는 일론 머스크, 마크 저커버그, 젠슨 황 등 우리 시대의 거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인류의 미래를 바꾼 이들의 공통점은 ‘데이터’, 즉 방대한 기록의 힘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시간을 거슬러 1999년,밀레니엄을 앞두고 의미 있는 작업이 있었다. 보우버스 부부와 고트리브 부부는 수년 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지난 1000년간 가장 위대한 인물 1000명을 선정한 『1000년, 1000명(1,000 Years, 1,000 People: Ranking the Men and Women Who Shaped the Millennium)』을 출간했다. 당시 <타임>에서도 지난 1000년간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을 선정하여 발표했는데 두 조사에서 1위로 선정된 인물은 동일했다. 그 인물은 바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이다. 그는 세상을 놀라게 한 위대한 사상가나 정치인이 아니라 세공업자이자 인쇄업자였다. 그러나 그가 발명한 금속 활판인쇄기는 인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이전까지 기록물은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쓰거나 목판으로 찍어내야 해서 시간과 인력의 소모가 크고 품질 또한 낮았다. 하지만 활판인쇄기가 발명되자 대량 인쇄가 가능해져 지식의 전파 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졌다. 인쇄술의 발전은 복음 전파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 반박문’이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할 수 있었던 것도, 라틴어 성경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일반 대중의 손에 들려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인쇄술 덕분이었다. 기록되었기에 인쇄할 수 있었고, 인쇄할 수 있었기에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기록은 역사적 사건과 개인의 경험을 보존하여 미래로 전달하는 핵심 동력이다. 기록은 문화의 토대가 되고 문화를 기록하는 과정은 공동체의 유대감 형성과 지식을 공유하는 역할을 한다. 즉, 기록과 문화는 ‘바늘과 실’, ‘불과 연기’, ‘수레와 바퀴’ 같이 뗄 수 없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천재라고 불린 인물 301명의 일상을 조사한 결과도 흥미롭다.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에이브러햄 링컨, 토마스 에디슨, 벤저민 프랭클린 등의 삶을 연구한 미국의 심리학자인 캐서린 콕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격과 특성은 모두 다르지만, 이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종이에 기록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기록은 기독교 신앙과 문화를 전승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 중 13개의 서신을 기록하여 당시 교회들을 믿음 위에 굳게 세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하나님의 도성』 등 100여 권의 저서와 설교, 편지 등을 남겨 중세 신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존 번연이 감옥에서 쓴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고전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예로부터 기록을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훈민정음 해례본』, 『동의보감』 등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을 20건 이상 보유한 것이 그 증거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국가기록원을 통해 국가의 주요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보존하며 그 정신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 조선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은 “기록하기를 좋아하라. 쉬지 말고 기록해라. 생각이 떠오르면 수시로 기록하라. 기억은 흐려지고 생각은 사라진다. 머리를 믿지 말고 손을 믿어라”라고 강조하며 500여 권의 책을 남겼다. 이순신 장군 역시 7년간 『난중일기』를 쓰며 생각을 정리하고 치밀한 승리의 전략을 세웠다. 기록은 단순히 과거를 담아두는 창고가 아니라, 현재의 나를 세우고 미래를 설계하는 설계도이다. 기록되지 않은 경험은 단편적인 기억으로 흩어지지만, 기록된 경험은 성찰의 도구가 되어 지혜로 응축된다. 우리가 매일의 삶을 기록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기록하는 행위를 통해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힘을 얻기 위함이다. 결국 기록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경영하며,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도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기록된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하고 생명을 얻게 한다(요 20:31).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게 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 기록된 그 말씀이 오늘 하루를 살아갈 힘을 주며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롭고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지금도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혜는 너무나도 많다. 이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으려면 기록해야 한다. 특히 올해는 『감사QT 365』를 통해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감사를 적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2026년 새해에는 감사와 기도, 응답과 찬양의 기록을 남겨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는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6.01.16

     가장 낮은 곳에서 들려온 기쁜 소식 - 카라바조의 ‘목자들의 경배’
  •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는 바로크 미술의 문을 연 거장이자 미술사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논란 많은 인물이다. 그는 화폭에서는 ‘빛과 어둠의 마술사’로 불렸지만 현실에서는 분노와 폭력에 휘말려 살았다. 1606년 로마에서 테니스 경기 중 사소한 시비가 결투로 번졌고 그는 상대를 살해하고 말았다. 화려하던 명성은 한순간에 ‘살인자’라는 낙인으로 바뀌었고 도망자 신세가 됐다. 1609년, 시칠리아 메시나에 도착한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나폴리와 몰타를 전전하며 쫓겨 다닌 그의 내면은 죄책감과 죽음의 공포로 가득했다. 그러나 절망의 끝자락에서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카라바조의 작품 <목자들의 경배>는 ‘가장 낮은 이들’에게 구원의 소식이 전해진 거룩한 밤을 그려냈다. 성경은 그 밤을 이렇게 기록한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8~11). 구원의 첫 소식은 왕궁이 아닌 들판의 목자들에게 전해졌다. 당시 목자들은 ‘암 하아레츠(땅의 백성)’라 불리며 멸시받던 유대 사회 최하층민이었다. 안식일을 지킬 여유도, 회당에 들어갈 자격도, 법정에서 증언할 권리도 없던 이들에게 하나님의 천사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카라바조는 이 장면을 이상화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찬란한 천사도, 웅장한 건물도 없다. 낡은 나무 기둥, 거친 돌바닥, 메마른 짚더미가 흩어진 초라한 마구간이 전부다. 그러나 이 초라함이야말로 성육신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가장 낮은 곳에 오셨다는 사실을 그는 가감 없이 담아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놀라운 신비가 일어난다.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님에게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온다. 카라바조는 등잔도, 횃불도 그리지 않았다. 아기 예수가 유일한 빛의 근원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 8:12)라는 말씀이 마구간이라는 현실 공간에서 시각적으로 구현된 셈이다. 이 빛은 지친 산모 마리아를 어루만지고 목자들의 거칠고 주름진 얼굴을 따뜻하게 감싼다. 화폭 속 목자들의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 투박한 양털 옷, 흙투성이 맨발, 굽은 등, 굳은살 박인 손까지 양을 치다 급히 달려온 목자의 삶이 그대로 배어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모두 아기 예수에게 모인다. 지팡이에 기댄 늙은 목자도, 허리를 깊이 숙인 젊은 목자도 경외감에 잠겨 있다. 가장 작고 연약한 아기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신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존재가 모든 것을 내어주는 역설을 카라바조는 빛과 구도로 표현했다. 그의 명암법(키아로스쿠로)은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신앙 고백이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는 말씀처럼 주변의 어둠이 짙을수록 아기 예수의 빛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빛은 차별이 없다. 왕이든 목동이든 그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오히려 가장 낮고 가난한 이들이 이 빛을 가장 먼저 맞이했다. 어쩌면 살인자이자 도망자였던 카라바조에게 이 그림은 처절한 기도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내면에 깃든 어둠은 목자들의 밤보다 훨씬 깊고 짙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붓끝으로 빛을 그려내며 자신이 갈망하던 용서와 구원을 화폭에 담았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시대의 어둠은 더욱 복잡하고 미묘하다. 물질은 풍요롭지만 영혼은 메마르다.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지만 고립은 더 깊어진다. 정보는 넘치지만 진리를 향한 갈증은 더욱 커진다. 밤새 양을 지키던 목자들처럼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탄은 한 가지 사실을 선포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둠 속으로 친히 들어오셨다. 2000년 전 마구간에서 시작된 그 빛은 시공간을 넘어 오늘 우리의 어둠 속에도 여전히 비추고 있다. 성경은 말한다. “목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더라”(눅 2:20). 목자들은 경배를 마친 뒤 다시 척박한 들판으로 향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들 안에는 이제 ‘빛’이 있었다. 어두운 현실을 견딜 이유, 희망의 근거가 생긴 것이다. 죄책감과 두려움에 시달리던 카라바조가 어둠 속의 빛을 그려 넣은 것처럼 400년이 지난 오늘 이 그림은 우리에게 진리를 건넨다. 가장 어두운 순간에도 희망의 빛은 존재하며 그 빛은 가장 낮은 마음을 가진 자에게 먼저 닿는다는 사실을. 성탄절을 맞아 목자들처럼 꾸미지 않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그 빛 앞에 서기를 소망한다. 마구간의 어둠 속에서 시작된 생명의 빛이, 우리 삶에 드리운 어둠까지 따뜻하게 밝혀 주기를 기도한다. 그것이야말로 성탄이 주는 약속이며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이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5.12.19

    다 감사드리세
  • 17세기 초 유럽은 깊은 혼란 속에 있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100년이 지났지만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간의 갈등이 여전히 심각했다. 이러한 갈등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권력을 차지하려는 여러 왕의 야망과 얽히며 더욱 정세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결국 1618년 보헤미아(체코)에서 개신교 탄압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란이 불씨가 되어 유럽 전역을 피로 물들인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이 전쟁의 주 무대가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그중에서도 작센 지역의 작은 도시 아이렌부르크(Eilenburg)가 가장 참혹한 상황을 겪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가 안전할 것이라 믿고 몰려들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도시는 난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 거리 곳곳에는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쓰러진 시신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 마틴 린카르트(Martin Rinkhart, 1586~1649)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가 되었다. 하지만 목회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흑사병까지 기승을 부리던 1637년 그는 혼자 하루에 50여 명의 장례를 치렀으며 그해 집례한 장례만 4000건이 넘었다. 더욱이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는 깊은 슬픔을 겪었다. 그러나 린카르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믿으며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다. 가진 것을 내어 굶주린 자들을 먹이고 설교 때마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잃지 말자고 권면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수많은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그는 방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날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바라봐야 했다. 그들이 대부분 믿음의 형제자매이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나라의 소망을 품고 있음에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흘러나왔다. 그날 저녁 린카르트는 온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우리가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 있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마음과 목소리를 다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눈앞의 현실은 절망과 고난으로 가득했지만 그의 입술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감사가 넘쳐났다. 시를 즐겨 쓰던 그는 식사 전 드리던 감사기도를 바탕으로 한 찬송시를 지었다. 그 찬송시가 바로 우리가 부르는 새찬송가 66장 「다 감사드리세」(Nun danket alle Gott)이다. 찬송가 가사에는 그의 믿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참혹한 고난 속에서도 린카르트는 과거부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여전히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하며 찬양을 올려드렸다. “사랑의 하나님 언제나 함께 계셔/ 기쁨과 평화의 복 내려주옵소서/ 몸과 맘 병들 때 은혜로 지키사/ 이 세상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 그는 전쟁의 폐허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며 지켜주심을 굳게 믿었다. 참된 기쁨과 평화는 오직 주님께 있으며 주님만이 이 세상의 악과 고난에서 건져주실 진정한 구원자이심을 고백했다. “감사와 찬송을 다 주께 드리어라/ 저 높은 곳에서 다스리시는 주님/ 영원한 하나님 다 경배하여라/ 전에도 이제도 장래도 영원히” 린카르트는 하나님이 세상의 왕이자 통치자 되심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높여드렸다. 그의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전에도 이제도 장래도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이 성도로서 마땅한 삶임을 깨닫게 한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이다.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돌아보며 감사드리는 날이다. 감사는 환경을 초월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기쁨의 순간뿐 아니라 눈물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절망의 한가운데일지라도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와 영생의 소망을 붙들며 온 마음을 다해 감사드리자. 오늘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고백이 모든 어둠을 이기고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5.11.14

    그리스도의 얼굴
  • 바르셀로나에서 북쪽으로 200㎞, 피레네산맥 기슭의 작은 마을 타훌에 가면 1123년에 그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벽화를 만날 수 있다. 성 클레멘트 교회의 제단 뒤편 공간을 가득 채운 이 그리스도상은 900년의 세월을 넘어 오늘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매일 기다리던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물고기, 어린양과 같은 상징으로만 표현했다. 인격적인 얼굴을 그리려는 시도는 수백 년이 지나서야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마치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의 못 자국을 만져보려 했듯이 그들도 예수님을 형상으로라도 만나고자 열망했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님의 용모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교회는 시대마다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왔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얼굴을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고 고백한 신앙의 내용이었다. 그리스도의 얼굴은 시대마다 달랐다. 초기에는 아폴로를 닮은 젊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때로는 철학자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로마 카타콤에서는 선한 목자로 비잔틴 시대에는 만유의 주로서 위엄 있게 표현되었다. 중세 서유럽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강조되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상적인 인간미가 부각되었다. 이처럼 각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와 이해에 맞게 그리스도를 표현했다. 특히 콘스탄틴 황제 이후 기독교가 공인되자 박해받던 교회의 상징이던 예수님은 황제의 모습처럼 왕좌에 앉아 세계를 다스리는 주로 나타났다. 이는 단순히 권력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역사의 주관자이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려는 신앙의 표현이었다. 타훌의 그리스도상도 이러한 전통 위에 서 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아몬드형 광채 안에 앉아 계신 예수님은 심판자이면서 동시에 구원자이시다. 푸른색, 흰색, 붉은색으로 장식된 옷은 믿음과 순결, 희생을 상징한다. 이 벽화에서 예수님은 오른손을 들어 축복을 베푸시는 손짓을 하고 왼손에는 책을 들고 계신다. 그 책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은 독특한 긴장감을 담고 있다. 크게 뜬 눈과 정면을 향한 시선은 보는 이를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 그리스도상은 동방교회 성화의 초월성, 서방교회 성화의 인간성, 아프리카 교회의 흑인 그리스도,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그리스도라는 다양한 측면을 모두 담아낸다. 벽화의 세부적인 표현도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님 후광의 십자가, 알파와 오메가, 네 생물의 상징은 모두 그리스도의 신성과 구원 사역을 증언한다. 세 개와 다섯 개의 점들은 삼위일체와 창조의 신비를 암시한다. 모든 장식과 추상적 무늬는 하나의 목적을 지향한다. 그것은 성육신의 신비,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경이로운 사건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려는 노력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가? 성공과 번영만을 약속하는 그리스도인지 내 편만 들어주는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고난 받는 이웃 속에 함께하시는 그리스도인지 말이다. 초기 교회가 당시 문화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를 표현했듯이 우리도 오늘의 언어로 그분을 증언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분은 심판자이면서 구원자이시고, 왕이면서 종이시며 멀리 계시면서 가까이 계신다. 무엇보다 그분의 눈은 오늘도 우리를 바라보신다. 요구하기보다 베풀어주시고 정죄하기보다 용서하시며 파멸이 아닌 구원을 원하시는 사랑의 눈으로. 성전에 들어가 이 벽화를 올려다본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그분의 눈이 우리를 꿰뚫어 보실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우리는 심판이 아닌 은혜를 정죄가 아닌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시대마다 다르게 그려진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사실이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지금도 우리를 비추고 있다. 그 빛은 어둠을 밝히고, 길을 잃은 이들을 인도하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준다.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비치는 빛이 우리를 통해 어두운 세상에 밝게 비치길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 2025.10.17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