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설교자 열전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Ⅲ)
  •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약 600편 남아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 전달 사회 정의에 관심 가졌던 ‘자선의 예언자’ 다양한 수사학 기법 사용하기도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문은 약 600편이 남아있다. 이들 대부분은 안디옥에서 행한 것이며 속기사들이 기록했다고 한다. 이 설교들을 통해 그의 설교가 적어도 1시간 이상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설교의 특징은 무엇일까? 남아있는 그의 설교를 통해 몇 가지 특징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크리소스토무스는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 전달이라고 믿었다. 그는 설교자가 인간적인 찬사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청중들의 찬사를 강력히 거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가 설교했을 때 많은 경우 청중들은 자주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러나 박수갈채에 환호하는 대신 그는 박수를 치는 청중들을 강하게 질책했다. 그가 그들을 질책한 이유는 설교자가 칭찬에 대한 열망으로 설교하게 되면 청중들에게 보탬이 되는 설교가 아니라 그저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식 설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청중들이 보내는 박수갈채를 거부했던 이유는 그들이 선포된 말씀을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삶 속에서 행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에 닿아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고, 마침내 그들의 생활방식이 변화되는 것임을 크리소스토무스는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청중의 박수와 찬사를 거부했던 크리소스토무스는 당시 안디옥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문화를 반대했다. 그리스문화는 이교도적이고 세속적인 것이었다. 천국에 이르는 길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가 비기독교적인 자료 중에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셋째,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중에는 금욕주의적인 성향을 띄는 것들이 많았다. 그가 금욕주의적인 성향을 갖게 된 것은 381년 집사 안수 후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를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런 그의 성향 때문인지 크리소스토무스는 경제적인 부와 자선의 의미를 자주 다루었고 사회 정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정교회 신학자 중 한 명인 조지 플로로브스키는 크리소스토무스를 ‘자선의 예언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플로로브스키에 따르면 크리소스토무스는 인간의 번영은 가장 위험한 것이며 혹독한 핍박보다 더 잔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번영이야말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번영에 사로잡힌 인간은 부주의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Father George Florovsky, “Saint John Chrysostom: The Prophet of Charity”, 「St. Vladimir’s Seminary Quarterly」 (1955): 37). 넷째, 크리소스토무스가 당시 세속적인 문화를 배격했다고 해서 그의 설교에서 완전히 성경 이야기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직유와 은유를 사용했다. 직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유사성이 있는 다른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수사법”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릴 적 불렀던 동요의 가사 중에 ‘사과 같은 내 얼굴’이라는 표현이 바로 직유법이다. ‘A는 B와 같다’ 또는 ‘B 같은 A’라는 식으로 표현되며, ‘∼ 같은’, ‘∼처럼’, ‘∼ 듯이’ 등이 쓰인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유법이다. 한편, 은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비겨서 표현하는 것이다. 직유와는 달리 ‘A는 B이다’라고 표현하며 A를 B로 대치해버린다. “손이 얼음장이네”라는 표현은 손이 얼음장이 아니라 얼음처럼 차갑다는 의미이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런 직유와 은유를 통해 설교의 내용을 청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이뿐 아니라 특별한 단어나 소리의 반복, 수사학적 질문과 대답, 익살스럽거나 쾌활한 이야기 등을 사용해 청중들이 자신의 설교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크리소스토무스가 이와 같은 수사학적 기법들을 사용했던 것은 그가 어릴 적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수사학을 공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수사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기독교 신앙을 위해 수사학자나 소피스트의 길이 아니라 신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다섯째, 교리문답식 설교에 있어서 크리소스토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중에는 침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리문답적 설교들이 담겨있다. 당시 많은 설교자가 교리문답적 설교에서 주기도문, 침례에 대한 신조, 성례전의 의미에 대해 다루었다. 그러나 크리소스토무스는 그런 의식을 거행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의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더 중요한 것은 평생을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던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4.06.07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Ⅱ)
  • 안디옥교회의 문자적 성경해석을 따라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예언한 것 사도행전의 저자를 누가라고 주장해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가지는 권위는 설교자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오는 권위이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교수는 “설교자들이 주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받은 주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라야 그들의 권위가 인정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 『성경 해석과 성경적 설교』, P.34).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경해석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보여왔다. 바로 알렉산드리아교회가 사용하던 알레고리적(풍유적) 해석과 안디옥교회가 사용하던 문자적 해석이다.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의 생애와 설교 방법론을 살펴보면서 이미 설명했다. 이번 호에서는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방법론을 다루기 전에 그가 사용했던 문자적 해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랐던 안디옥교회의 영향 때문이었다.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은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지도자들이 강조했던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을 거부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성경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성경 단어들이 가지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요, 성경에서 상식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다. 알레고리적 해석처럼 성경 본문 속에 숨어있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의 문자가 가지는 직접적이고, 표면적이고, 문법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특히나 안디옥교회의 성경 읽기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의 사건들을 위한 예표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예언자들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의식적으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베르너 진론드, 『신학적 해석학』, P.43).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이 알레고리적이고 영적인 해석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알레고리로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왕대일, “성서해석사에서 배우는 설교의 과제”, P.29). 결론적으로 알레고리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성경해석법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안디옥교회가 성경 본문의 단어와 문법이 가진 중요성을 강조할 때,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경 본문이 가진 보다 깊은 의미를 깨닫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왕대일, P.29).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데 이 방법론들은 좋은 도구들이다. 안디옥에서 나고 자랐으며 신학교육을 받은 크리소스토무스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던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자적 성경해석을 옹호했던 그는 성경을 읽을 때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문법적인 의미와 역사적 의미를 선호했다. 문법적인 의미는 성경이 가지는 상식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었고 역사적 의미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온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었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P.55~56). 특히 그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은유적인 표현이 성경 밖에 존재하는 의미를 가리키기보다는 성경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성경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강조했던 크리소스토무스의 성경해석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었다. 첫째,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이해했다. 그는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예언한 글’로 생각했다. 또한 구약 시대의 유대 절기를 더이상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진리 자체[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폴 스콧 윌슨, P.56). 둘째, 크리소스토무스는 복음서 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복음서 사이의 차이점을 불리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조화들이 “모든 의심들로부터 복음서를 건져주고 오히려 [복음서] 저자들의 특징에 대해 더 명확하게 말해준다”라고 믿었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P.97). 또 마태복음 서두에 기록된 예수님의 계보에서 마리아 이전에 등장하는 세 여인, 즉 다말, 룻, 밧세바 등 3명만 언급된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셋째, 크리소스토무스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라는 사실을 밝혀내려고 했다. 그는 사도행전의 주제가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에 주목했고 그 저자가 바울의 동료였던 누가라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그는 바울의 편지가 회중을 위한 감사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했고, 로마서가 기록된 이후에 골로새서가 기록됐고, 다음으로 디모데후서가 기록됐다고 추론했다. 이런 크리소스토무스의 성경해석법은 “당대의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오늘날의 신약학자들과 더 유대감이 있어 보인다”(O. C. 에드워드, P.98).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4.04.12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Ⅰ)
  • ‘황금의 입’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위대한 설교자 알레고리적 해석이 아닌 문자적 해석 배워 기독교 부흥기에 불의와 압제에 과감히 맞서 기독교 역사에서 주후 4세기는 엄청난 변화의 시기였다. 설교학자 에드워드 다간은 이 시기가 인류 문명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으며 기독교의 역사와 기독교 설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Edward Dargan, History of Preaching 1, P.60~61). 주후 64년 로마 대화재로 촉발된 기독교에 대한 길고 긴 박해의 시대가 가고 로마제국을 기독교의 깃발로 뒤덮을 놀라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첫 그리스도인 황제라고 평가받는 콘스탄티누스의 회심이 있다. 3세기 후반 로마제국은 외적의 침략, 내전, 역병, 경제 불황 등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결국 나라를 네 개로 나눠 네 명의 통치자가 다스리는 ‘4두 체제’(Tetrarchy)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방안으로 제시되었고 실시됐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287년 시작된 4두 체제는 324년 콘스탄티누스가 모든 정적을 물리치고 통일된 로마의 유일한 황제에 오르면서 마무리됐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적 자유를 얻은 기독교는 이후 통일 로마의 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제국의 종교로 부상했다. 제국 전역에 통일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내에 존재하는 교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길 원했다. 이것이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중요한 이유이다. 이제 기독교는 법의 보호 아래 번성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가 크게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종교에 대한 국가 지원이 끊기면서 로마 사회에서 다른 종교에 대한 귀족들과 시민들의 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유럽의 많은 지역에 큰 교회당을 지었고 이를 통해 기독교가 그 지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했다. 다른 종교에 대한 국가 지원은 물론 개인적인 지원이 끊기면서 그들의 신전은 기독교회로 바뀌는 경우도 자주 일어났다(알리스터 맥그래스 『기독교의 역사』, P.101~102). 이제 기독교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적응하며 차츰 제국의 종교가 되어가던 344년(혹은 345년) 지금의 시리아 지역에 있던 안디옥에서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태어났다. ‘크리소스토무스’라는 말은 ‘황금의 입’(golden mouth)라는 의미로 위대한 설교자였던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요한네스의 아버지는 로마의 고위 공무원이었지만 그가 유아였을 때 죽었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 안투사는 기독교 신앙에 헌신하며 아들 양육에 전념했다. 그는 당시 뛰어난 수사학자였던 리바니우에게서 수학하면서 웅변술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375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 약 6년을 머물면서 성경 연구에 몰두했다. 이 기간 그는 스승 디오도루스로부터 당시 유행하던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이 아니라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성경 연구 방법을 배웠다. 381년 처음 집사에 임직된 크리소스토무스는 386년 안디옥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가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387년에 일어난 폭동 때문이었다.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 흥분한 안디옥 시민들은 황제와 황후의 동상을 부수며 격렬히 항의했다. 이때 크리소스토무스는 “조각상들에 관하여”라는 21편의 설교를 연속으로 행했고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 약 12년 동안 안디옥에서 활동하던 그는 397년 지방 총독의 소환을 받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에 올랐다. 50세가 채 되지 않은 젊은 감독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말씀을 전했다. 특히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사치를 멀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것을 권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에 반응했지만 부자들과 고급 관리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처음에 그를 열렬히 환영했던 서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부부(특히 황후 유독시아),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하려던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빌로스 그리고 지역의 종교 관계자들은 절제와 온유와 구제를 강조하는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에 분개했고 고발장을 작성해 그를 추방하고 말았다(404년). 그러나 여전히 그를 추종하던 더 많은 사람이 그의 귀환을 요구하며 궁전을 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때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고 황후 유독시아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크리소스토무스를 복귀시켰다. 복귀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설교를 통해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비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대성당에 세워진 자신의 은조각상을 세운 황후 유독시아를 구약의 ‘이세벨’과 비교하며 비판했다. 이 일로 다시 추방된 그는 흑해의 고립된 마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407년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조지훈 목사(순복음선교연합회 담당)
  • 2024.03.08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Ⅲ) 
  • 설교 역사에서 최초로 설교 형식을 제시한 오리게누스 성경 본문의 역사적, 문법적인 연구 강조 성경 주석에 기초한 설교 발전시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오리게누스가 사용한 알레고리라는 방법론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어떤 설교학자는 “공상에 더 가까운 비유적 해석에 빠져 들어가서 성서의 설명과 적용에서 이탈되곤 했다”라고 평가한다(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P.42). 그렇다면 그는 성경 본문 해석에서 어떤 식으로 알레고리를 사용했던 것일까? 그가 행한 설교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아브라함의 3일 간의 여행은 탐색, 갈망, 분별을 상징한다; 창세기의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을 가리킨다; 요셉이 입은 자색옷은 다양한 지식을 의미한다; 부정한 고기에 대한 규칙들은 검소함에 대한 가르침을 뜻한다; 발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깨끗한 짐승은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성찰하는 정통주의자(the orthodox)를 의미한다…보리떡과 기적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의미하고 물고기는 헬라 철학을 상징한다”(Hugh Thomson Kerr, Preaching in the Early Church, P. 113~114). 그러나 설교학자 클라이드 팬트(Clyde E. Fant)는 알레고리적인 성경 해석방법으로 인해 오리게누스가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알레고리 성경 해석은 오리게누스가 발전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팬트는 그가 기독교 설교 역사에 행한 일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팬트는 오리게누스가 설교 역사에서 두 가지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Clyde E. Fant, 20 Centuries of Great Preaching: Biblical Sermons to Savonaola, 1971, P. 32~33). 첫째, 오리게누스는 설교 역사에서 설교의 형식을 제시한 최초의 설교자였다. 그에게 설교는 설교자가 택한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설이었다. 설교자는 자신이 택한 성경 본문을 연구한 후에 그것을 청중들에게 설명하고 적용해야 한다. 이것이 오리게누스가 생각한 설교였다. 그러나 오리게누스가 지금과 같은 설교 형식을 제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가 행한 설교의 구조는 수사학적인 이론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즉, 그의 설교들은 “논리적 형식이나 또는 수사학적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P. 43). 둘째, 오리게누스는 성경 본문의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연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최초의 설교자였다. 그는 설교를 위해 선택된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본문의 문법적인 사항을 주의 깊게 주석(exegesis)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보다 깊이 있는 성경연구를 위해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후에 6개의 성경 번역문을 하나로 묶은 ‘헥사플라’(Hexapla)를 만들었다. 또한 어떤 본문에 있는 단어가 다른 본문에서는 어디에서 발견하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상징을 개발했다. 기독교 설교 역사의 초창기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설교는 학습되지 않은 것이었고 구조적으로도 엉성한 것이었다. 오리게누스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학자층과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리게누스는 설교자가 성경에서 3가지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교 설교의 역사』,P. 48~49). 첫째, 육적이거나 문자적인 의미이다. 이 해석 방법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성서 해석의 잘못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둘째, 혼(魂)적 또는 도덕적인 의미이다. 이 해석법은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영혼을 일깨워준다. 셋째, 영적 혹은 신비적-종말론적인 의미이다. 이것은 “한 사람을 진리에 연합시키려는 목적”의 방법론이다. 오리게누스에게 육적이고 혼적인 성경 연구방법은 성서의 영적인 의미를 찾아가기 위한 징검다리였다. 즉, 그에게 “문자적인 해석이란 단순히 성서 본문의 의미를 보다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 통과해야만 하는 기본적인 성서 해석의 한 단계”였던 것이다(폴 스콧 윌슨, P. 49). 오리게누스는 기독교 설교 역사의 막을 열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알레고리 성경 해석을 행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로서 그의 업적은 기독교를 이방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었다는 것과 다양한 성서 해석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특히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좀 더 깊이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의 공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본문의 주석에 기초한 설교를 생성시킨 그의 공로는 기독교사에 그 본격적인 첫 장(章)을 펼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설교의 역사를 이끌어 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 (상)』,P. 43~44). 조지훈 목사(순복음선교연합회 담당)
  • 2024.02.08

    설교자 -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Ⅱ)
  •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 통해 성경의 진리 탐구 성경의 문자 이면에 담긴 영적 의미 찾아 유대 학자 필로와 플라톤주의로부터 영향 받아 오리게누스의 설교를 이해하기 전에 그의 신학과 성경 해석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신학과 성경 해석법은 그의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오리게누스의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헬라 철학, 곧 플라톤주의였다. 그가 이런 영향을 받게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에서 그를 가르쳤던 클레멘트 때문이었다. 클레멘트는 헬라 철학과 기독교 교리를 결합하는데 관심이 많았고 그의 관심은 고스란히 그의 제자였던 오리게누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도 오리게누스는 플라톤주의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신피타고라스학파 철학자였던 아파메아의 누메니우스에게 영향을 받았다. 유대교 학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모세 오경을 해설하면서 플라톤주의와 스토아학파의 방법론을 차용했다. “종교의 근본 원리를 마련하기 위해 철학을 사용한 것”이다(제임스 네빌 버드샐, 『새성경사전』, P.1708). 오리게누스가 주장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내용은 필로에게서 영향받은 것이다. 오리게누스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파메아의 누메니우스는 플라톤 철학의 내용이 피타고라스에게까지 연결이 되며 동시에 브라만교, 유대교, 동방의 신비 종교 등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누메니우스 역시 헬라 철학과 다른 종교 간의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플라톤 철학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세계는 인간이 사는 이 세상과 신들의 세계라고 하는 ‘이데아의 세계’로 구분된다. 신들의 세계는 참된 세상이고 우월적인 세계이며 규범이 되는 세계이다. “참된 사물의 실재가 있는 세계가 바로 신들의 세상이다”(윤주현, 『그리스도교 영성의 원류인 오리게네스』, P.208). 이와는 달리 이 세상은 하위의 세계이며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현상이며 신들의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플라톤주의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오리게누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현세를 상징적이고 상대적인 세계로 보는 것이다. 이 세상은 신들의 영적 세계의 환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신들 세계의 그림자인 이 세상은 끊임없이 영적인 세계를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필로의 신학과 플라톤 철학은 오리게누스의 성서 해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런 영향 아래 오리게누스가 사용한 성경 해석법을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이라고 한다.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은 오리게누스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미 헬라 철학자들과 유대학자 필로가 사용하고 있었다. ‘알레고리’라는 말은 “말한 바와 다른 무엇” 혹은 “말한 바에 추가된 또 다른 무엇”이라는 의미이다(최진봉, 『본문과 삶 간의 유비적 읽기로서의 새로운 설교학에 대한 이해』, P.261).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자들은 성경의 문자 이면에 영적이며 신학적인 의미가 있고 그러한 의미가 성도들의 삶에 적용될 수 있는 윤리적인 내용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을 사용했던 오리게누스는 성경을 “숨겨진 신비들이 담겨 있는 상징의 보고(寶庫)”라고 생각했다(윤주현, P.209).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인 내용 이면에 담겨 있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해석자의 임무인 것이다. 그는 교육받은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구별했다. 교육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인 의미를 찾을 뿐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그리스도인은 “본문의 표면 아래로 들어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사용하여 그 표면 아래 숨어 있는 더 심오한 ‘영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기독교의 역사』, P.77).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구약성경 해석에서였다. 오리게누스는 구약의 사건, 제의, 이야기들을 천상의 영원한 원리를 가리키는 표상으로 이해했다. 이와 같은 성경 해석은 오리게누스의 스승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게서도 발견된다. 클레멘트는 성경을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사람의 몸에 해당하는 문자적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참된 의미인 영적인 의미이다. 영적인 의미는 문자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즉,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영원한 영적 진리를 가리키는 지시체(pointer)인 것이다. 조지훈 목사(순복음선교연합회 담당)
  • 2023.12.15

    설교자 -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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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교회 사도들을 잇는 교부들의 설교
    기독교 교리 기틀 세우며 박해 가운데도 기독교의 합리성 옹호 오리게누스, 금욕과 청빈의 삶 살며 복음 전해 영국 성공회 신학자이자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기독교 역사를 초기 교회 시기(100년~500년),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500년~1500년), 종교개혁 시기(1500년~1650년), 근대 시기(1650년~1914년), 현대 시기(1914년~현대)로 나눈다. 신약성경이 완성된 100년 이후부터 칼케돈 공의회가 있었던 451년의 시기를 교부 시대(the partristic period)라고 한다. 여기서 ‘교부’(patristic)란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테르’에서 왔다. 이 용어는 교부 시대와 그 시대에 발전한 독특한 사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이 시대의 특징은 오늘날까지도 교회 역사에서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다양한 기독교 교리가 발전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시기는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시기였다. 박해를 받는 가운데 기독교를 이방인들에게 설명하려는 변증학이 발전했다. 변증학이란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옹호하고 설명하는 학문이다. 순교자 유스티누스(100~165년), 리용의 이레니우스(130~200년), 오리게누스(185~254년), 테르툴리아누스(160~225년),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등 이 시대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신학자요 설교자들이 나타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삼위일체론, 교회론 등 그리스도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이방인들에게 기독교를 알리는 시기였다. 교부 시대의 설교는 이전 사도 시대의 설교보다 능력 면에서 다소 뒤처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초기에는 교육받은 목회자가 설교하기보다는 일반인을 포함해 누구나가 설교를 할 수 있었다. 교사들, 복음전도자들, 사도들, 예언자들을 포함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장로와 주교만이 설교할 수 있도록 했다. 초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오리게누스는 185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구약성경의 헬라어판인 ‘칠십인역’(Septuagint)을 번역한 곳도 알렉산드리아다. 그의 아버지 레오니데스는 알렉산드리아대학에서 헬라문학을 교수했다. 그는 아들 오리게누스에게 매일 성경을 가르쳤고 문법, 수학, 논리학, 수사학을 교육했다. 또한 오리게누스는 성 판테누스가 설립한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에 다니는 동안 클레멘트에게 교육을 받았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교부 중 하나였던 클레멘트는 헬라철학과 기독교 교리를 결합하는 데 관심이 많았고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를 통해 많은 제자를 길러내기도 했다. 클레멘트에게 사사 받을 당시 오리게네스는 이미 철학과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202년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북아프리카 지역에 가한 핍박으로 인해 오리게누스의 아버지 레오니데스는 투옥되었고 결국 순교하고 말았다. 오리게누스 역시 아버지를 따라 순교하고 싶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옷가지를 감추는 바람에 집을 나설 수 없었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그의 스승 클레멘트도 핍박으로부터 피신하게 되었고 오리게누스가 알렉산드리아 교리학교의 수장으로 지명되었다. 그의 나이 18세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고 밤마다 맨땅에서 잠을 청했으며 계속해서 금식을 행했다. 단벌옷에 맨발로 다녔다고 한다. 줄곧 평신도 설교자로 지냈던 그는 228년 아가야 지방의 교회들을 방문하기 위해 머물던 가이사랴에서 안수를 받았다. 약 20년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던 그는 아테네와 아라비아 등 넓은 지역에서 설교 사역을 행했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고 그 중에 암브로스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는데 오리게누스의 가르침에 큰 감명을 받고 오리게누스의 여생을 돌보아주었다. 특히 암브로스는 오리게누스가 하는 말을 받아 적을 속기사들과 필사자들을 고용했고 그들이 기록한 내용을 출판하도록 했다. 오늘날까지 오리게누스의 설교가 많이 남아있는 이유가 바로 암브로스의 헌신적인 도움 덕분이다. 250년 6월 로마 황제 데시우스의 칙령이 공표됐다. 이 칙령은 지방의 로마 관리들에게 로마의 신들과 황제에게만 희생 제사를 바쳐야만 한다고 명령했다. 희생 제사를 바친 사람에게는 증명서가 발급되기도 했다. 이 박해로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이 혹독한 악형, 감금, 공갈로 고통당하다가 순교했다. 오리게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붙잡힌 그는 갖은 고문을 당했다. 251년 데시우스가 군사 원정 도중 숨지면서 박해는 끝났지만 감옥에서 풀려난 오리게누스는 평생 불구로 살아야 했다. 옥고로 인해 그의 몸은 지쳐있었고 옥에서 풀려난 후 4년이 지난 254년 69세의 나이로 두로에서 생을 마감했다. 조지훈 목사(선교연합회 담당)
  • 2023.11.10

    설교자 - 야고보(Ⅱ)
  • 탁월한 적용으로 설교, 성도의 변화 이끌어 신앙 속 믿음과 행함의 균형 강조 은유 통해 말씀의 의미 쉽게 전달 야고보의 설교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특징은 적용의 탁월성이다. 성경 기록의 1차적인 목적은 기록이 아니다. 성경은 “창조로부터 재창조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로 초대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계시되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당대에 그리고 후대를 향하여 지속적으로 적용”해온 결과물이다. 즉 성경은 특정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 적용된 결과물이다. 설교를 증인(witness)이 행하는 증언으로 정의하는 토마스 롱은 성경적 설교란 “설교할 때 성경을 얼마나 많이 인용하느냐와 상관없이 현재적 경험과 관련하여 얼마나 성경을 신실하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말했다. 좋은 설교의 요소 중 하나는 그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회중들의 경험과 삶에 잘 적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들의 삶에 적용되지 않는 설교는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일 뿐이다. 설교의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야고보의 설교는 뛰어나다. 그는 “말씀을 따르십시오”라거나 “말씀을 행하십시오”라고 불명확하게 설교하지 않는다. 실제적인 삶의 적용을 강조하는 그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 자신의 말과 행동을 잘 다스리는 것, 교회의 지체 간에 비방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서로 자랑하지 않는 것 등 실제적인 적용의 내용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의 설교에서 적용은 눈에 보이는 것 같고 손에 잡힐 듯 구체적이다. 셋째, 야고보의 설교는 신앙생활에서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과 행함에 대해 사도 야고보가 사도 바울과 다른 의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고보는 ‘행함’(약 2:14)을 강조했던 반면 바울은 ‘믿음’(롬 3:23~24, 갈 2:16)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설교가 전혀 다른 상황과 대상을 향해 행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할례나 음식법과 같이 유대교의 행위들이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설교했던 반면 야고보는 그저 머리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과 야고보의 설교의 대상이 서로 달랐다. 바울은 아직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설교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는다고 설교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반면 야고보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구원 이후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도 행위로(by works) 구원받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도 행위를 만들어 내는(producing) 것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선한 행위로(by) 구원을 받지 않지만, 선한 행위를 위해(for) 구원을 받는다.” 야고보는 구원에 필요한 믿음에 행위를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데 행함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믿음을 통한 구원 이후의 행함은 자주 강조되지 않는 부분이다. 사도 야고보는 이렇듯 믿음과 행함의 적절한 균형을 강조함으로써 성도들이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해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넷째, 사도 야고보의 설교에는 적절한 은유가 사용되고 있다. 은유란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다른 대상을 이용해서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문학적 기술”이다. 사도 야고보는 자신의 메시지를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은유를 사용한다. 그의 은유가 특별한 것은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의 핵심을 좀 더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야고보서 1장 23~25절에서 야고보는 거울이라는 물건을 통해 말씀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또한 샘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언어 사용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약 3:11). 이렇듯 사도 야고보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자주 접하는 물건이나 장소를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좀 더 분명하게 했다. 일상의 삶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사도 야고보는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조지훈 목사(순복음선교연합회 담당)
  • 2023.10.12

    설교자 - 야고보(Ⅰ)
  • 예수님 부활과 성령 침례 통해 참 신앙 갖게 돼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믿음 강조 예수님은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를 따라 갈릴리 나사렛에 정착하셨다(마 2:22~23; 눅 2:4~6). 성경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 예수라는 아들 외에 다른 자녀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예수님에게 형제, 자매가 있었다는 것이다(마 12:46; 눅 8:19; 막 3:31).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중 하나였다(마 13:55). 예수님의 다른 형제들이었던 요셉, 시몬, 유다와는 달리 야고보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한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 1:18~19). 이뿐 아니라 바울은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였음을 기록하고 있다(갈 2:9). 특히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이방 기독교인들에 관한 문제로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놓여있을 때 중재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행 15:1~21).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기록한 성경이 ‘야고보서’이다. 야고보서의 서두에서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약 1:1)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야고보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으로,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고백했던 것은 아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과 친척들은 예수님을 종교적 광신주의자로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막 3:21).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물론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천사를 만났고(눅 1:26~38), 어린 시절 예수님의 명민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눅 2:42~52).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이해와 생각이 그녀의 다른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던 같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종교에 미친 광인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어떻게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증인들의 목록을 보여준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고전 15:7)라는 구절 속에서 우리는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증인이요 사도들과 함께 활동했던 초대교회의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 침례를 받기 위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해 예수님의 형제들과 제자들이 함께 기도했다.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야고보는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며 열정적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침례의 경험이야말로 야고보가 자신의 형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야고보서는 설교자 야고보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야고보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야고보의 설교의 특징은 먼저 믿는 자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진리의 말씀’(약 1:18)은 행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한다(약 2:14). 그가 생각하는 경건함은 신자로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주의하며(약 1:19, 26),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약 1:27),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킬 때 가능한 것이다. 즉, 진정한 신앙은 내적으로는 자신의 언행에 주의하며 외적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약 1:22)이다. 이와 같은 말씀과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기독교인의 행동을 좌우하는 진정한 행동 지침이라는 사실 역시 의미한다. “‘진리의 말씀’(약 1:18)은 구체적 행위를 추동하고 삶의 실천으로 이끌어가는 하나의 힘”인 것이다.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9.08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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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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