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설교자 열전
설교자 - 야고보(Ⅰ)
  • 예수님 부활과 성령 침례 통해 참 신앙 갖게 돼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믿음 강조 예수님은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를 따라 갈릴리 나사렛에 정착하셨다(마 2:22~23; 눅 2:4~6). 성경은 요셉과 마리아 부부에게 예수라는 아들 외에 다른 자녀들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예수님에게 형제, 자매가 있었다는 것이다(마 12:46; 눅 8:19; 막 3:31).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중 하나였다(마 13:55). 예수님의 다른 형제들이었던 요셉, 시몬, 유다와는 달리 야고보는 성경에서 자주 등장한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야고보가 주님의 형제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갈 1:18~19). 이뿐 아니라 바울은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였음을 기록하고 있다(갈 2:9). 특히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이방 기독교인들에 관한 문제로 교회가 분열될 위기에 놓여있을 때 중재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행 15:1~21).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기록한 성경이 ‘야고보서’이다. 야고보서의 서두에서 야고보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약 1:1)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야고보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으로,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고백했던 것은 아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가족들과 친척들은 예수님을 종교적 광신주의자로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막 3:21).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물론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천사를 만났고(눅 1:26~38), 어린 시절 예수님의 명민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눅 2:42~52).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마리아의 이해와 생각이 그녀의 다른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했던 같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을 종교에 미친 광인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어떻게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고백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증인들의 목록을 보여준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고전 15:7)라는 구절 속에서 우리는 야고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증인이요 사도들과 함께 활동했던 초대교회의 지도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 침례를 받기 위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해 예수님의 형제들과 제자들이 함께 기도했다.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야고보는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형제들과 함께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며 열정적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침례의 경험이야말로 야고보가 자신의 형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는 통로였던 것이다. 야고보서는 설교자 야고보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야고보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야고보의 설교의 특징은 먼저 믿는 자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진리의 말씀’(약 1:18)은 행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고 강조한다(약 2:14). 그가 생각하는 경건함은 신자로서 자신의 말과 행동에 주의하며(약 1:19, 26),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약 1:27),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킬 때 가능한 것이다. 즉, 진정한 신앙은 내적으로는 자신의 언행에 주의하며 외적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약 1:22)이다. 이와 같은 말씀과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기독교인의 행동을 좌우하는 진정한 행동 지침이라는 사실 역시 의미한다. “‘진리의 말씀’(약 1:18)은 구체적 행위를 추동하고 삶의 실천으로 이끌어가는 하나의 힘”인 것이다.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9.08

    설교자 요한(Ⅱ)
  • 요한 설교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 강조 불신자와 믿는 자 모두 아우르는 설교 전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요한복음 20장에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이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요한이 설교자로서 가졌던 몇 가지 특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첫째, 요한은 자신이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이를 통해 생명을 얻게 할 목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다. 설교자 요한에게는 자신이 행하는 설교의 목적이 분명했던 것이다. 설교학자 토마스 롱은 모든 설교에는 초점과 기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점이란 설교 전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주제를 의미하며 기능이란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 회중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을 의미한다. 그는 초점과 기능이 있는 설교를 만들기 위해서 설교 전에 반드시 초점문과 기능문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요한은 자신의 선포에 있어서 주제가 되는 초점이 무엇이며 자신의 선포를 듣거나 읽게 될 사람들의 삶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선포의 초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설교의 기능은 자신의 선포를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었다. 둘째, 요한의 선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20장 31절의 ‘믿게 하려 함이요’라는 동사는 어떤 사본에서는 헬라어 문법상 부정과거 가정법으로 쓰였고 다른 사본에서는 현재 가정법으로 기록되어있다. 전자의 경우, 믿는다는 것은 “믿음의 행위를 하는 것, 즉 예수를 메시야로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자는 “이미 예수 안에서 형성된 믿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성경 원본이 없는 상황에서 사도 요한이 어떤 내용을 기록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각각의 동사를 사용한 사본의 비율이 비슷하다는 점을 통해 우리는 요한의 복음서를 필사했던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내용이 불신자들은 물론 믿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알리는 강력한 도구이다. 동시에 성경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계속해서 성숙되게 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우리의 신앙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끊임없이 새롭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앞서 잠시 살펴보았듯이 요한의 선포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였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모두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각 복음서에서 중점적으로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조금씩 상이하다. 마태복음은 첫 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를 내세움으로써 왕이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한다. 족보가 생략된 마가복음은 이 땅에 오셔서 섬기고 고난 당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누가복음은 완전하신 인간이셨던 예수님의 모습, 곧 인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한편 요한이 그리고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예수님 역시 하나님과 같은 신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그의 복음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셨고 만물을 창조하실 때도 하나님과 함께하셨다는 선포로 시작된다(요 1:1~3).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던 분이시며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고백의 결론은 ‘그 이름을 힘입어 얻게 되는 생명’이다. 그 생명은 새로운 시대의 생명이며 ‘종말론적인 생명’이며 구원자의 은혜를 힘입어 그리고 그와 연합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보는 다가올 세계의 생명이다.” 요한은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창조주가 되시는 예수님,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선포함으로써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고 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교제를 누리길 소망하고 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8.11

    설교자 요한(Ⅰ)
  • ‘보아너게’라는 별칭을 가졌던 사도 요한 예수님과 만남 통해 거듭나고 변화돼 확고한 신앙에 근거해 복음 선포 신약성경에서 ‘요한’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책은 모두 다섯 권이다.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요한계시록.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다섯 권의 책을 쓴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으로 이해해왔다. 설교자로서 요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영적으로 어떤 변화를 경험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가 세베대라는 사람의 아들들이었다고 소개하는 마가복음은 이 형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 3:17). ‘보아너게’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온 것으로 ‘소란’(tumult) 또는 ‘대소동’(uproar)이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그와 같은 별칭을 붙여주신 이유는 감정이 격발하는 그들의 성향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누가복음 9장에 등장하는 사건이다. 구약시대 북왕국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는 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앗수르의 이방인 이주 정책에 의해 사마리아 지역에는 유대인과 이방인 간 혼인으로 인한 혼혈 민족이 생기게 됐다(왕하 17:24-41). 순수한 혈통이라 자부했던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은 순수 혈통을 더럽힌 혼혈 민족이 되고 말았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적대적 감정이 본격화한 것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의 성전 건축을 사마리아인들이 방해했기 때문이었다(스 4장).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로 인해 예수님 당시까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예수님이 자라셨던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 지역 중간에 위치한 사마리아를 지나쳐야 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적대감으로 인해 많은 유대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지름길을 버려두고 요단강을 건너 사마리아 맞은 편 지역을 지난 뒤 다시 요단강을 건너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9장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길 원하셨고 이를 위해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몇 사람의 제자들을 보내셨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 일행이 자신들의 마을을 지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소식을 접한 야고보와 요한은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라고 말했다. 예수님 일행을 거부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려 응징하자는 것이었다.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라는 별칭에 걸맞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요한은 어떤 사람이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자신이 그들을 제지했다고 말했던 적이 있으며(눅 9:49~50), 예수님에게 무엇이든지 자신들이 구하는 것을 해주실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막 10:35~44). 이렇듯 세베대의 아들 요한은 “폭력적이며 화를 잘 내는 동시에 또한 매우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측근으로 삼으셨고, 늘 함께하셨으며,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는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의탁하셨다(요 19:26~27). 그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자기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다(요 13:23, 19:26, 20:2, 21:20, 24). 무엇이 조급하고 폭력적이던 요한을 변화시킨 것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그런 그를 부르셨고, 사랑하셨고, 함께하셨던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할 잠재력이 있음을 보신 예수님의 선택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용납과 사랑과 인정을 통해 야생마 같던 요한이 “강하면서도 온유하고, 직선적이면서도 자애롭고, 용기가 있으면서도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현웅 교수는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확고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라며 “자기가 확신하는 것만이 확신 있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요, 듣는 사람에게도 확신 있게 받아들여지게 된다”라고 말했다. 설교자로서 요한이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삶은 물론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확신 있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분명히 변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을 변화시켜주신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에 근거해 예수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7.07

    설교자 바울(Ⅲ)
  • 성경뿐 아니라 다양한 자료를 설교에 사용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 알아 청중이 원하는 것 아닌 ‘반드시 들어야 할 말씀’ 전해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 설교의 세 번째 특징은 그가 어느 곳에서나 복음을 전했다는 점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곳은 유대인의 회당, 고등법원, 시장, 가정집, 감옥 등 다양했다. 유대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행 13:16~41), 거리에서 이방인에게 전한 메시지(행 14:15~17), ‘강의실’에서 지성인들에게 보낸 메시지(행 17:22~31)를 통해 우리는 바울이 어디에서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의 증인으로서,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어디서나 말씀을 전했던 것이다. 네 번째로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뿐만 아니라 다른 자료들을 사용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17장 15~34절은 아덴(아테네)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스의 수도였던 아덴은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도시 중 하나였고 세계 문명의 발상지로 철학, 문학, 예술 등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다. 바울이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 아덴은 로마에 합병된 상태였지만 여전히 자유시의 지위를 얻고 있었다.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인들과 경건한 이방인들을 상대로 설교했고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에비오구레(에피쿠로스)와 스도이고(스토아) 철학자들과 만나 변론을 벌였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을 삶의 최고의 선으로 여겼다. 반면 창조를 부인하고 생명의 발생이나 운명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했으며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믿지 않았다. 한편 금욕적이었던 스토아학파는 사후의 심판이나 내세를 부정했지만 사물의 영원성을 믿었다.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이방 철학자들을 향해 선포된 바울의 설교는 이방인들을 직접으로 상대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설교하면서 바울은 당시 철학적인 내용을 토대로 설교했다. 특히 그는 그리스 시인이었고 크레타의 현인으로 알려진 에피메니데스와 클린티스의 시를 인용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바울이 아덴의 이방인들을 상대로 설교하면서 이방 시인의 시를 인용한 것은 그들이 구약성경의 내용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와 같이 이방 시인의 시를 인용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구약성경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알고 있는 내용으로부터 설교를 행함으로써 자신이 전하는 내용을 그들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들을 수 있도록 했다.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다양한 자료를 사용하는 바울의 모습은 현대 설교자들에게도 도전이 되는 부분이다. 바울의 설교가 갖는 다섯 번째 특징은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도착한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하는 모습을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행 13:16). 이 구절을 쉬운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바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짓을 해 가며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 여러분,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현대 설교학자들은 설교에서 있어서 비언어적 요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설교자의 메시지가 청중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언어적 요소가 미치는 영향이 35%에 불과한 것에 비해 비언어적 요소(얼굴표현, 눈맞춤, 손의 움직임 등)가 미치는 영향은 65%에 달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설교에서 비언어적 요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 설교가 그런 바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의 설교를 통해 성도들이 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듣기 원치 않는,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말씀도 선포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에서 바울은 잠깐 머물렀던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초청했다(행 20:17). 그들을 향한 권면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행 20:20).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 바울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주저하지 않고 전했다. 그들이 듣기 원하는 것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들어야만 하는 말씀을 전한 것이다. 바울은 2000년 전에 살았던 설교자이지만 그가 행한 설교의 내용과 형식은 현대 설교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그의 행적과 편지는 오늘을 살아가는 설교자들에게 진정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에베소 장로들에게 행했던 다음과 같은 설교의 구절이 현대 설교자들의 마음에 여전히 큰 울림으로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6.09

    설교자 바울(Ⅱ)
  • 설교 대상에 깊은 관심과 이해 가져 각 사람에 맞게 친숙한 내용으로 전달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설교를 통해 우리는 그의 설교가 가지는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모두 24개의 연설이 담겨있는데 이는 사도행전의 약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중 바울의 연설은 9개이며 6개가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이 설교들은 비시디아 안디옥(13:16~41, 46~47), 루스드라(14:15~17), 아덴(17:22~31), 밀레도(20:17~38), 예루살렘(22:1~21, 23:1~11), 가이사랴(26:1~32) 등에서 행한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설교를 행했을 것이다(9:20, 22, 28~29). 사도행전에서 발견되는 바울의 설교의 첫 번째 특징은 목양 설교(pastoral preaching)와 전도 설교(evangelistic preaching)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C. H. 다드와 A. M. 헌터는 자신들의 책 『설교의 원형과 그 발전: 케리그마』에서 초대교회의 설교를 디다케(didache) 설교와 케리그마(kerigma) 설교로 나누고 있다. 디다케 설교는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즉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성숙되도록 양육하고 가르치기 위한 설교이다. 이를 목양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행한 목양 설교의 전형은 사도행전 20장 18~35절에 기록된 것이다. 제3차 선교여행을 마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 여정 속에서 밀레도에 도착한 그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 장로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행한다. 그의 설교의 요지는 앞으로 있을 환난의 때를 대비해 자신이 교훈한 것들을 기억하며 자신의 사역을 이어서 잘 감당해달라는 것이었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바울은 자신이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목양의 관점에서 설교했던 것이다. 한편 케리그마 설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설교, 즉 전도설교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고 전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한 것이다. 바울이 선교여행 가운데 가장 많이 했던 설교가 이것이었다.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 헬라인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했던 이방인들이었다(13:16). 중요한 사실은 바울은 그 대상에 따라 설교의 강조점을 조금씩 달리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을 향한 설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행했다. 사도행전 13장 16~41절에 기록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는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언급한 뒤에 그 역사의 종결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로 결론을 맺고 있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행 13:32~33). 바울은 유대인들이 친숙한 구약성경의 내용으로부터 설교를 시작했고 이를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시했다. 반면 이방인을 향한 바울 설교의 강조점은 하나님이었다. 에덴에서 행한 설교(17:22~31)를 보면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시며(24절),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분이며(25절), 인간의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분이며(26절), 인간과 관계하시는 분(27절)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렇듯 바울은 목양설교와 전도설교를 행했고 각각의 설교를 행하면서 대상에 따라 설교의 강조점을 달리했다. 바울이 행한 목양설교와 전도설교를 통해 발견하는 그의 설교가 가지는 두 번째 특징은 그가 설교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을 향한 설교를 그들이 친숙한 내용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대상에 따라 설교의 강조점을 달리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에게 친숙한 구약성경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게로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를 다루었던 반면 이방인들에게는 그들이 믿고 있는 신들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면에서 이방신들과 다른지를 다루고 있다. 바울이 설교 대상에 따라 강조점을 달리했다는 것은 그만큼 설교 대상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들이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그 관심사를 어떻게 복음에 접목시킬 것인지, 어떻게 설교를 시작해야 그들이 그의 설교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등 설교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이해가 바울에게 있었던 것이다.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5.12

    설교자 바울(Ⅰ)
  • 바울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교회공동체에 13개의 편지 보내며 권면 신약성경은 27권으로 되어있다. 이중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가 4권이고 역사서(사도행전)가 1권이며 예언서(요한계시록)가 1권이다. 이상의 6권을 제외한 21권이 편지이다. 그런데 21개의 편지 중에서 바울이 쓴 것이 무려 13개나 된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바울이 쓴 것이다. 바울 서신은 크게 교회공동체를 위한 것이 9개(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이고, 개인에게 보낸 것이 4개(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이다. 초대교회 당시 편지는 단순히 편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편지는 그것을 보낸 사람을 대신했고 보낸 사람이 가진 권위를 그대로 가지는 것이었다. 즉, 편지는 송신자와 동일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편지는 단순히 글로 여겨지지 않았다.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 퍼져있던 교회에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바울의 편지들은 대독자(代讀者)에 의해 큰 소리로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특히 데살로니가전서가 대표적인 예이다.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살전 5:27). 또한 바울의 편지는 한 지역 또는 한 교회에서만 읽혀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에서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 4:16). 바울의 편지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유대적인 배경과 헬라적인 배경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헬라 도시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유대 가정에서 유대적인 관습에 따라 성장했다(빌 3:5). 그는 유대적인 유산에 긍지를 가지고 있었고(롬 9:3, 11:1), 늘 율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빌 3:6). 그는 유대 전통을 수호하는데 있어서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이 있던 사람이었다(갈 1:14). 다소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과 유대적인 전통 속에서 교육받고 성장했다는 것은 바울이 헬라문화와 유대문화에 모두 잘 적응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헬라 도시에 잘 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방문하는 어떤 도시가 되었던 가장 먼저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았던 이유 역시 그의 출신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가장 적절했던 바울을 준비시키셨고 가장 적절한 때에 그를 부르셔서 사용하셨던 것이다. 바울의 이름으로 보내진 신약성경의 13개의 편지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그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 수 있다. 바울의 설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그리스도’이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다(행 9장). 회심을 경험한 것이다. 바울이 경험한 회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회심과는 조금은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미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바울은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죄에서 의(義)로 회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의 회심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한 관점에서 다른 관점으로의 변화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바울에게 있어 구원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롬 9:30).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바울은 당시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했던 내용이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됐다.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바울은 더 이상 다른 메시야를 기다릴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야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야로 깨닫게 되는 순간 바울은 구약성경을 비롯해 모든 것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예수님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보고,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바울이 이와 같이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사도행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행 9:18).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면서 바울은 구약성경의 사건 역시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구약 출애굽기에 기록된 홍해 사건과 광야 사건을 그리스도를 통해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해석해낸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성령을 따라 난 자와 육체를 따라 난 자를 대표한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갈 4:22~31). 다메섹으로 가는 길 위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은 바울에게 이 세상과 성경을 새롭게 읽어내는 새로운 렌즈가 되어주신 것이다.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4.07

    설교자 베드로(Ⅱ)
  •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희망, 새로운 시작 뜻하는 종말론적 설교 전해 성경 뜻 풀고 적용시켜 크리스천의 삶 가르쳐 베드로의 설교가 갖는 세 번째 특징은 종말론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종말’을 강조하고 왜곡하는 많은 이단으로 인해 한국교회에서 ‘종말’ 또는 ‘종말론’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될 때가 많다. 종말은 단순하게 역사의 끝이나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서 구원을 이루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며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에게 종말은 하나님의 뜻이 세상 가운데 이루어지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사 22:2; 미 4:1; 렘 3:17). 하나님의 평화와 공의가 세상에 있을 것이며(사 2:4) 자연에는 평화가 깃들 것이다(사 11:6, 65:25). 하나님의 율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될 것이다(렘 31:31~34). 베드로는 구약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종말의 시간, 곧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완성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선포했다. 또한 성령 강림 사건이야말로 종말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증거라고 강변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 2:16~18). 예수님의 부활은 베드로를 비롯해 오순절 날 성령 침례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은 “이전의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예수의 부활로 인해 종말은 이미 시작됐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되는 종말의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행 2:20~21). 예수님의 재림은 그와 같은 종말의 시간의 완성을 의미한다. 넷째로 베드로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를 제시한다. 설교는 크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의미를 풀어주고 그 의미를 삶 속에서 적용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벧전 1:1)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베드로전서는 전반부에 신학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이후에 실천적인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베드로는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다룬 뒤에 곧이어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자신의 설교를 통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베드로에게 그의 청중들은 ‘거듭난’ 사람들이고(벧전 1:3), “산 소망”(벧전 1:3)이 있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유업을 얻고(벧전 1:4),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이 크신 능력으로 보호해주시는 사람들(벧전 1:5)이다. 이제 그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며(벧전 2:9),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사람들이다(벧전 2:10).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들답게 이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①먼저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영원히 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거류민과 나그네”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킨다(벧전 2:11). 이 땅에 잠시 머물고 떠나는 방문객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본향은 천국이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때를 기다리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한다. ②베드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영향을 받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상태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까지 그들은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기에 죄와 죄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금할 수 있다. 그들 안에 있는 욕심과 욕망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어하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계속해서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사는 동안 계속해서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권면한다(벧전 2:12). 육체를 제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노력이라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외적으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그들을 향해 악행한다고 비방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함으로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자인 동시에 종이다(벧전 2:16). 결론적으로 베드로는 그들을 향해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벧전 2:17)고 설교하고 있다. 조지훈 목사(굿피플 사목)
  • 2023.03.09

    설교자 베드로(Ⅰ)
  • 베드로 설교의 큰 특징은 성령 충만 담대히 복음 전할 때 3000명 구원 받아 고대 사회에서 ‘편지’(서신)는 그 편지를 보낸 발신인과 동일시됐다. 편지는 발신인의 의견이나 생각을 대변했고 그것을 읽는 수신인들은 편지를 통해 발신인을 만난다고 믿었다. 특히나 통신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지역 교회의 문제를 다룰 때 편지만큼 좋은 수단은 없었다. 편지는 그 편지를 보내는 사람의 목소리를 대신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약성경에 기록된 서신을 하나의 설교로 보려는 학자들이 많다. 설교자들이 각 지역 교회의 문제를 다룰 때 편지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의 설교를 행했다는 것이다. 폴 스캇 윌슨 교수는 신약의 서신들 가운데 처음부터 설교로 작성된 것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성경에 담긴 베드로나 바울의 서신들은 그들의 설교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번 호에는 사도행전과 베드로전·후서를 중심으로 베드로의 설교가 갖는 특징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베드로의 설교와 성령 충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베드로의 설교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사도행전 2장이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오순절 날 성령이 임했고 그들은 여러 나라의 말, 곧 방언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큰일을 말하기 시작했다(행 2:11).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술에 취했다고 놀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베드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성령침례사건은 구약성경 요엘서 예언의 성취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과 부흥의 결과라는 것이 오순절날 베드로 설교의 요지이다. 오순절날 베드로가 행한 설교의 모든 과정은 성령님의 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임했고(행 2:1~4), 이로 인해 베드로가 담대히 복음을 전했고(행 2:14~40), 그날 3000명의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행 2:41). 성령 충만을 통해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 것이다. 둘째,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님 중심(Jesus-centeredness) 설교였다. 예수님 중심 설교란 단순히 설교 가운데 예수님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설교가 아니다. 예수님 중심 설교란 설교의 전 과정, 곧 성경 해석으로부터 청중을 이해하고 실제 설교를 행하는 모든 과정을 예수님과의 연관성 속에서 행한다는 의미이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는 철저히 예수님 중심적이다. 먼저 그는 성령침례 사건의 근거를 구약 요엘서에서 가져온다. 요엘 2장 28~32절에 기록된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는 예언이 지금 성취되었다는 것이 베드로의 주장이다. 그가 요엘서의 예언이 지금 성취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승천 전에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 때문이다(행 1:5, 8). 또한 베드로는 시편 16편 8~11절 역시 예수님을 통해 해석한다(행 2:25~28). 베드로의 구약 해석은 철저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해석된 구약성경 이야기를 자신의 청중들(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에게 적용하는 과정에서도 예수님 중심성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 그는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그들에게 다윗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고 동시에 그들이 얼마 전 십자가에서 처형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대 율법에 대한 그들의 지적인 면과 예수 처형이라는 경험적인 면 모두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철저히 예수님 중심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계속>
  • 2023.02.09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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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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