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설교자 열전
아우구스티누스(Ⅳ)
  • 다양한 문장 반복으로 리듬감과 속도감 높여 질문과 대답 통해 청중과 대화 이끌어 현대 설교자들에게 설교학적 가르침 전달 지난 호에 이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설교가 그가 목회자로 안수 받았던 391년 성탄절에 행한 설교이다. 모두 세 개의 단락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겸손을 굳게 붙들지어다’, ‘기뻐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라’, ‘그리스도의 두 탄생’으로 구성된 이 설교 중에 지난 호에서는 첫 번째 단락을 살펴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탄절 설교의 두 번째 단락에서도 그의 수사학적 재능이 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먼저는 짧은 문장들을 여럿 열거함으로써 설교의 속도감을 주는 부분이다. 두 번째 단락의 서두를 언급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남자들도 기뻐하고 여자들도 기뻐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각 성별이 영광을 받았습니다”라고 선포한다. 이런 짧은 문장이 연속해서 나옴으로써 청중들은 설교의 속도감을 느끼게 된다. 한편 짧은 문장들에 이어 등장하는 문장을 좀 더 길게 만듦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짧은 문장들이 하나로 정리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음악의 강약의 효과처럼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을 의도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설교를 듣는 청중들이 문장을 통한 속도감과 리듬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반대되는 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가 남자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남자[아담] 안에서 저주받은 모든 사람이 두 번째 남자[그리스도]에게로 오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에 팔아넘긴 것은 여자[하와]였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준 것도 여자[마리아]였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the likeness of the flesh of sin, 롬 8:3)이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죄의 육신(the flesh of sin)이 깨끗케 되고 정결케 되었습니다.” 이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뻐하라’(rejoice)라는 선언구를 통해 거룩한 형제들, 거룩한 자매들을 언급한다. 여기서 거룩한 형제들은 결혼하지 않기로 서약한 사람들이다. 인간은 남녀의 결혼과 육체적 결합을 통해 태어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결혼, 곧 성령님을 통해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결혼을 포기한 사람들을 부르고 계신다. 거룩한 자매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동정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와 결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단락은 의로운 자들, 약하고 병든 자들, 종들, 자유로운 사람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기뻐하라는 권면을 함으로써 마감된다. 성탄절 설교의 마지막 단락은 “그리스도의 두 탄생”을 다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단락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이 갖는 영적인 의미와 육적인 의미를 언급한다. 그의 탄생은 한마디로 ‘역설’이다. 육체적으로 어머니에게 태어남으로서, 예수님은 그 날[성탄의 날]을 모든 세대에게 [선물로] 주셨으며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심으로서, 모든 세대를 창조하셨다. 그와 같은 탄생은 육신의 어머니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육신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나셨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던 분인 것이다. 이어 아우구스티누스는 일련의 질문과 ‘혹은’(or)이라는 접속사를 통해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말한다. “누가 그의 출생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사 53:8) 시간 밖에서 태어나신 분을, 혹은(or) 씨 없이 태어나신 분을? 시작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전례 없는 이 탄생을?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이 탄생을? 끝이 없는 그 탄생을, 혹은(or) 시작이 곧 끝인 이 탄생을.” 세 번째 단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이 온전한 아이로 태어나신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가 한 여인의 돌봄을 받으셨고, 우리의 존재 근원이신 그가 그녀의 품에 안기셨으며, 우리의 양식이신 그가 그녀의 젖을 빨고 계셨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의 그런 연약함과 경이로운 겸손 속에 ‘온전한 신성’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은 그 아기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보다 더 큰 분임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능하신 분이 자신에게 의존하는 어머니를 다스리고 계셨으며, 어머니의 젖을 먹으시면서도 진리로 그녀를 양육하고 계셨다.” 이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성탄절 설교를 살펴보았다.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뛰어난 설교자 이전에 작가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그의 설교를 직접 들을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글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다양한 수사학적 표현을 사용했으며 이런 표현을 통해 청중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현대 설교자들에게 설교학적으로 다양한 가르침과 테크닉을 전수해주고 있는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5.03.14

    아우구스티누스(Ⅲ)
  • 즉흥 설교의 달인 아우구스티누스 설교 준비에 늘 최선 다해 은유, 대조, 비유적 표현 사용 성탄절 설교에서 마리아의 동정녀 탄생 강조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설교를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약 1500편의 설교는 대부분 속기사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의 많은 것들이 자신이 아니라 속기사에 의해 기록된 이유는 그의 설교가 가진 즉흥성 때문이다. 그는 예배 시간에 읽은 성경 구절에 대한 짧은 묵상이나 짧은 기도 외에 별다른 준비 없이 설교를 행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설교를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 누구보다 설교 준비에 최선을 다했다. “그 사전 준비에는 수사학의 마스터뿐만 아니라 많은 성경 구절들의 암기, 교회사에서 거의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의 탁월한 신학적 고찰, 또 깊은 기도생활 등”이 포함되었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42).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한 편을 분석하면서 그의 설교의 특징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설교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St. Augustine, The Works of Saint Augustine Part III ; Sermons: Volume 6, Sermons 184-229Z, Trans. Edmund Hill (New York: New City Press, 1993), 17-20. 이 설교는 그가 막 목회자로 안수를 받은 391년 전후에 행한 성탄절 설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독교로 회심하기 전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수사학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 설교에는 그의 수사학적인 특징들, 예를 들어 은유, 대조, 비유적 표현들이 다수 발견된다. 이 설교는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된다. 1.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겸손을 굳게 붙들지어다 / 2. 기뻐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의 탄생일이라 / 3. 그리스도의 두 탄생. 첫 번째 단락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의 겸손을 굳게 붙들지어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의 성탄절을 “진리가 땅에서 솟아난 날”, “영원한 낮이 우리의 낮으로 태어난 날”이라고 표현한다. 매우 시적인 표현이요,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나타내는 표현 중 하나다. 특히 사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와 서신 여러 곳에서 예수님을 진리로 표현하고 있다(요 1:14, 17, 14:6, 18:37, 요일 5:20). “진리가 땅에서 솟아났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진리 되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영원한 낮”, 곧 영원한 빛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죄와 사망의 어둠에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빛이 비취었고 이제 우린ㄴ 밤이 아니라 낮의 삶, 빛의 삶, 해방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의 탄생을 ‘겸손’이라고 표현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성육신은 예수님의 자기비움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겸손한 예수님을 진리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겸손한 자들’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한다. 한편 그는 예수님의 겸손한 성육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사람들을 “저 높이에 이르지 못하고, 텅 비고 가볍게, 오만하고 자만한 채로 하늘과 땅 사이의 바람 부는 중간 지점에 매달려 있습니다.”라고 표현한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 일에는 지혜로울지 모르지만 “세상을 만드신 분”, 곧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소유하지는 못한 것이다. 이 단락에서 가장 빼어난 표현은 “그분의 신성한 능력이 아기의 몸에 담겨있으면서도 우주의 전체 질량에서 벗어나지 않으셨다”라는 부분과 “온 우주는 그[예수님]가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동안 그의 작품이며, 우리에게 오신 그의 작품은 동정녀의 탄생입니다.”라고 부분이다. 아기 예수 안에 하나님의 온전한 신성이 담겨있다는 것,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우주의 전체 질량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 곧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가 어지럽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나아가 온 우주는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작품이라면,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것은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님의 작품이라고 표현한다. 즉, 우주 창조와 동정녀 탄생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단락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탄절이라는 절기에 담긴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성육신, 그리고 동정녀 탄생의 신비를 다루는 동시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을 계속해서 대조한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와 같은 탄생을 허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경멸한다. 그것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의 신성을 경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마리아는 동정녀로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에 동정녀였던 것처럼 출산 후에도 동정녀로 발견되었으며, 남편에 의해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니라 발견”된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남으로 인해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정녀가 아이를 낳아 사람이 태어났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신성하게 보입니다.”라고 설교하면서 첫 번째 단락을 마무리한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5.02.07

    아우구스티누스(Ⅱ)
  • 성경해석의 기준은 ‘사랑’ 하나님의 초월적 은혜 없이 설교 불가능해 회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설교의 목적 모든 설교자는 성경을 해석하고 이를 근거로 설교한다. 설교의 권위는 설교자가 아니라 성경에서 오기 때문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 성경을 주신 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최초의 설교학 교과서라고 불리는 『기독교 교리』(On Christian Doctrine,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 교양』(CH북스, 2017) 또는 『기독교 학문론』(북랩, 2018)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에서 성경해석과 설교방법론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4권으로 구성된 이 책의 1~3권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는 반면 4권은 성경을 해석한 내용을 어떻게 전해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성경해석의 열쇠는 ‘사랑’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일까? 그는 사물을 향유하기 위한 것과 사용하기 위한 것, 향유하고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구분한다. 향유하기 위한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만 사용하기 위한 것은 행복을 추구하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것을 향유한다는 것을 “그 자체를 사랑함으로서 그것에 굳게 붙어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인간이 진정으로 향유해야 할 것은 성삼위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성육신 사건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향유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향유하는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 역시 하나님을 향유하는 것이며 인간이 인간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성경이란 “하나님을 즐기고[향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들로써 다른 모든 것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33).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용해 어떻게 하나님을 향유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성경의 핵심이요 사랑은 그 성경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자가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다섯 가지 영적 단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 경건, 지식, 강인 그리고 자비이다. 자비가 강조된 이유는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결국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함을 나타낸다.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하고 이를 근거로 설교를 한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자 먼저 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사로서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선한 것을 가르치고 그들이 악한 것을 깨우치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게으른 사람을 분발시키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미래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를 알려주어야 한다. 특히 성경과 관련해 설교자는 성경의 내용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설교자가 자신의 성경해석에 대해 늘 겸손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의 목적을 세 가지로 가르친다. 설교란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 세 목적 중에 가장 주된 것은 가르치는 것이며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들은 기쁨을 얻고 설득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 사람들을 가르칠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르치려는 내용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화려하고 유창한 말솜씨로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 성경을 연구하고 연구한 내용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바꾸어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뛰어난 수사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 수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라고 충고한다. 그가 제시하는 수사학적인 방법은 차분한 화법, 절제된 화법, 당당한 화법이다. 다양한 화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 세 가지 화법 중에 어느 한 가지만으로도 설교 전체를 이끌어 갈 수 있지만, 다른 두 가지의 화법이 설교에 다양함을 제공해주며 지루함을 방지하는 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교 설교 역사』, 83). 한편 수사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우구스티누스는 강조한다. 설교에서 수사학을 사용하는 이유는 미사여구를 사용함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들의 삶이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교 설교 역사』, 83).
  • 2025.01.10

    설교자 - 아우구스티누스(Ⅰ)
  • 로마서 말씀 통해 하나님의 소명 깨달아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로 회심 수사학에 뛰어난 재능 보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목회자, 설교자, 신학자가 등장했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을 꼽는다면 힙포의 어거스틴으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지역 누미디안 마을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태어난 것은 354년의 일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로마의 대박해가 304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306년 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를 통해 로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고 오랜 박해 속에 있던 기독교 역시 제국 종교로 변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였다. 그녀의 헌신적인 기도와 노력 덕분에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로 개종하기까지 그의 젊은 시절은 방탕과 욕망으로 가득했다. 당시 부유층 자제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17세가 되었을 때 수사학, 변증법, 로마법 등을 배우기 위해 카르타고에서 수학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난 학생이었고 마침내 수사학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마니교에 심취하게 된다. 마니교는 세상에 두 영역, 즉 빛의 왕국과 흑암의 왕국이 존재하며 두 왕국 사이의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선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 88).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를 변호할 정도로 깊이 빠져있었다. 동시에 아데오단투스라는 사생아를 얻기도 했다. 카르타고에서의 그의 삶은 방탕과 일탈의 연속이었다. 고향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교사 생활을 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를 이끌어준 사람은 로마 제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심마쿠스였다. 로마의 귀족이었고 집정관까지 지냈던 심마쿠스의 도움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불과 30세의 나이에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로 임명됐다. 로마 제국의 법정이 밀라노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수사학 교수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는 황제와 그 해의 집정관들을 돕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27).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적인 방황 가운데 놓여있었다. 몸담고 있는 로마 정치계는 너무 복잡했고 그 어디에서도 영적인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 여전히 붙잡고 있던 마니교 사상은 그런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안식을 찾기 위해 심취했던 그리스 철학 역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 아들과는 달리 어머니 모니카는 자신의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신앙 안에서 살아가길 기도하고 간구했다. 그런 그녀의 오랜 기도와 간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속적인 성공의 최정점에 이르렀을 때 응답됐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로마 생활은 회의와 갈등 속에 놓여있었다. 그 속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했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비취게 되었다. 바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기 위해 간 것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보다 나은 연설가가 되려는 목적이 먼저였다. 그러나 암브로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전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회심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데 그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 출신의 폰티티안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수도사 안토니와 이집트 수도사들의 성결한 삶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던 그는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래소리를 듣게 됐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Tolle, lege; tolle, lege). 그것은 “집어들고 읽으라, 집어들고 읽으라”라는 뜻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성경을 들어 읽었고 그 말씀이 바로 로마서에 기록된 말씀이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이 말씀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았다. 그는 『고백록』에서 그 순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고 쓰고 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387년 부활절에 침례를 받았고 남은 삶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단했다. 기독교 역사에 놀라운 족적을 남기게 되는 힙포의 어거스틴의 사역이 비로소 시작하게 된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4.11.08

    키프리아누스(Ⅱ)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약 65편의 편지와 12개의 논문 남겨 교회 단일성과 교회 감독의 중요성 강조 ‘권위 있는 성경 해석’ 추구해 키프리아누스의 작품은 약 65편의 편지와 12개 정도의 논문이 남겨져있다. ‘도나투스트에게’에서는 침례를 통해 일어나는 도덕적 변화와 이를 통한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순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데메트리우스에게’에서는 이교도들이 가지는 해악성을 고발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배교자들에게 필요한 회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배교자들』과 참된 교회의 하나 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교회의 단일성』은 그가 가진 신학적 소양과 탁월함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키프리아누스를 많은 교부들로부터 두드러지게 한 것은 그가 가진 교회론과 그 교회론에 근거한 교회 감독의 위치에 대한 그의 의견 때문일 것이다.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이 말은 노바티안파 - 로마교회의 장로였던 노바티안과 카르타고교회의 장로였던 노바투스를 따르던 분파 - 와의 논쟁 가운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는 『교회의 단일성』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노아의 방주 밖에 있었던 자마다 구원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교회 밖에 머물러 있게 될 자 또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예수님의 옷이 로마 군병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나누어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었다는 사실을 들기도 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교회 감독의 직무와도 밀접하게 관련시켰다. 그는 감독이 교회 안에 있고 교회가 감독 안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만일 감독과 함께 있지 않는 자들은 교회 안에 있지 않는 것이다. “감독 없이 교회도 없다.”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은 이후 로마가톨릭교회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감독직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이다. 당시 로마 정부의 박해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면서 교회 체계가 흔들리게 됐고 이런 상황을 틈타 평신도 중심의 신앙을 추구하려는 이단들이 발흥하게 됐다. 키프리아누스는 그런 상황을 염려하며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설교자로서 키프리아누스는 성경에서 발견하는 진리를 전달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는 웅장하고 장엄한 웅변조의 설교가 아니라 순수하고 담백한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교자가 전하는 순수하고 담백한 설교를 통해 청중들은 성경에 담긴 진리를 발견하고 설득되며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을 품게 된다고 믿었다. 그는 도나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설교자들이여] 교묘하면서도 유창하게 말하지 말고 진중한 말로 하십시오! 세련된 수사학을 통해 회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억지로] 말을 치장하지 말고, 진실하고 순박한 자세로 하나님의 자비를 ‘간단명료하게’ 선포하되 청중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적절하게 전하십시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72). 특히 키프리아누스는 설교를 위한 성서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폴 스콧 윌슨은 그와 같은 키프리아누스의 성경 해석을 “권위 있는 성서 해석”이라고 부른다. 앞서 살펴본 대로 키프리아누스 시대에는 다양한 이단들이 발흥하며 교회를 위협하고 성도들을 현혹시켰다. 문제는 그들 역시 성경 본문을 근거로 자신들의 이단 사상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성경 해석이 옳으며 그와 같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키프리아누스는 성경 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거를 교회의 구전 전통에서 찾았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교회와 교회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키프리아누스의 모습과 맥을 닿아있다. 올바른 해석을 판단하는 기준은 교회가 사용하는 구전 전통, 곧 신앙의 규칙(the rule of faith)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성경이 문자적으로 이해되지 않거나 신앙의 규칙을 통해서 분명하게 해석되지 않을 경우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설교를 행함에 있어서 키프리아누스는 성경 이외에 다른 교부들의 말이나 책의 내용을 인용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설교 내용을 보다 권위 있는 것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나 저작에서 발견되는 가장 특징 중 하나는 성경 인용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점이다. 성경을 인용할 때마다 키프리아누스는 그 부분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인용 자체가 하나의 ‘선포’가 되는 효과를 내게 했다. 이와 같은 설교 방법론은 오늘날 설교자들에게도 좋은 선례가 된다. 설교 가운데 인용되는 성경 구절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된다. 성경의 말씀들 대부분은 기록되기 이전에 하나의 선포로 세상 가운데 전해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4.08.08

    키프리아누스(Ⅰ)
  •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 이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나 늦은 나이에 개종 로마 박해 시기 교회 일치 이끌어 타스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는 A.D. 200년경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태어났다. 부유했던 그의 이교도 부모들은 그에게 법과 수사학을 가르쳤고 약 245년 기독교로 개종하기까지 그는 카르타고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개종 이후 침례를 받는 과정에서 키프리아누스는 그때까지 자신을 사로잡았던 무익하고 죄로 가득한 생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특이한 것은 침례를 받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가 카르타고의 주교로 선출되었고 서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의 주교 선출에는 그의 경쟁자였던 노바투스와 그를 따르는 감독들의 적잖은 반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키프리아누스의 생애에서 있어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의 사건이 있다. 첫 번째는 로마 황제 데시우스의 박해였다. 249년 황제가 된 데시우스는 로마에 닥친 야만족의 침입, 경제적 위기, 사회적 불안이 로마 시민들이 전통적으로 섬겨오던 신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신들을 다시금 잘 섬긴다면 로마의 영화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로마의 옛 신들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을 반역자로 여겼고 멸절시키려고 했다. 250년 기독교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데시우스의 기독교 박해는 이전 박해와는 달리 기독교인들을 살해하는 대신 협박하고 고문하고 회유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로마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숭배한 사람들에게 증명서를 발부했는데, 이 증명서가 없는 사람은 범죄자로 취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의 회유에 변절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며 투옥되고 마침내 순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박해로 인해 기독교 내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들(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 로마 감독 파비안, 안디옥 감독 바빌라스 등), 감옥에 가는 것도 불사하며 굳건히 신앙을 지킨 고백자들(Confessors) 그리고 신앙을 버린 배교자들이었다. 이 박해 과정에서 키프리아누스는 목숨을 부지했다. 그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교인들의 간청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자신의 교인들을 돌보기 위해 1년 동안 은신하라는 환상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떤 주장이 맞건 간에 그는 생명을 부지했고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 자신이 도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널리 알렸다. 자신의 주교를 잃은 로마의 감독들이 그에게 편지를 써서 유감을 표했기 때문이다. 251년 데시우스가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죽자 기독교인을 향한 박해가 그쳤다. 그러나 박해가 사라진 교회의 상황은 이전보다 더욱 복잡해졌다. 앞서 언급했듯이 교회에는 박해 시기 신앙을 지킨 고백자들과 그 반대에 서있는 변절자들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신앙을 버린 변절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교회의 최대 숙제였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했던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을 겪었던 한국교회와 같이 4세기 교회 역시 그런 갈등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변절자들을 절대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론자들과 그들이 회개한다면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화해론자들이 팽팽히 대립했다. 점점 분열의 가운데로 빠져들어가는 교회를 지켜볼 수 없었던 키프리아누스는 감독회의를 소집했고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① 로마 제국이 제시하는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조건 없이 교회로 받아들일 것 ②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임종 시나 새로운 박해 시기에 회개의 진실성을 보일 때 교회로 받아들일 것 ③ 제사에 참석했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로 받아들이지 말 것 등이다. 그러나 252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자 배교자들의 복원 사업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많은 배교자가 박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보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키프리아누스의 생애에 있어 중요했던 두 번째 사건은 250년 부활절에 에티오피아에서 창궐한 흑사병이다. 이 전염병은 이듬해에 로마는 물론 그리스와 동쪽으로 시리아에까지 전파되었다. 무려 20년 동안 지속됐던 흑사병으로 인해 로마에서만 하루에 5000명의 사람이 죽었다. 이 전염병의 급속한 전파 이유는 가울을 공격했던 게르만족과 같은 이민족들이 일으킨 수많은 침략 전쟁 때문이었다. 이 전염병을 ‘키프리아누스의 흑사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저서 『죽음』(On Mortality)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흑사병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반박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교회가 흑사병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흑사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선과 봉사를 베푸는 사랑의 장소임을 강조했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4.07.12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Ⅲ)
  •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약 600편 남아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 전달 사회 정의에 관심 가졌던 ‘자선의 예언자’ 다양한 수사학 기법 사용하기도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문은 약 600편이 남아있다. 이들 대부분은 안디옥에서 행한 것이며 속기사들이 기록했다고 한다. 이 설교들을 통해 그의 설교가 적어도 1시간 이상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설교의 특징은 무엇일까? 남아있는 그의 설교를 통해 몇 가지 특징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크리소스토무스는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 전달이라고 믿었다. 그는 설교자가 인간적인 찬사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청중들의 찬사를 강력히 거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가 설교했을 때 많은 경우 청중들은 자주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러나 박수갈채에 환호하는 대신 그는 박수를 치는 청중들을 강하게 질책했다. 그가 그들을 질책한 이유는 설교자가 칭찬에 대한 열망으로 설교하게 되면 청중들에게 보탬이 되는 설교가 아니라 그저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식 설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청중들이 보내는 박수갈채를 거부했던 이유는 그들이 선포된 말씀을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삶 속에서 행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에 닿아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고, 마침내 그들의 생활방식이 변화되는 것임을 크리소스토무스는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청중의 박수와 찬사를 거부했던 크리소스토무스는 당시 안디옥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문화를 반대했다. 그리스문화는 이교도적이고 세속적인 것이었다. 천국에 이르는 길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가 비기독교적인 자료 중에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셋째,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중에는 금욕주의적인 성향을 띄는 것들이 많았다. 그가 금욕주의적인 성향을 갖게 된 것은 381년 집사 안수 후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를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런 그의 성향 때문인지 크리소스토무스는 경제적인 부와 자선의 의미를 자주 다루었고 사회 정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정교회 신학자 중 한 명인 조지 플로로브스키는 크리소스토무스를 ‘자선의 예언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플로로브스키에 따르면 크리소스토무스는 인간의 번영은 가장 위험한 것이며 혹독한 핍박보다 더 잔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번영이야말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번영에 사로잡힌 인간은 부주의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Father George Florovsky, “Saint John Chrysostom: The Prophet of Charity”, 「St. Vladimir’s Seminary Quarterly」 (1955): 37). 넷째, 크리소스토무스가 당시 세속적인 문화를 배격했다고 해서 그의 설교에서 완전히 성경 이야기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직유와 은유를 사용했다. 직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유사성이 있는 다른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수사법”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릴 적 불렀던 동요의 가사 중에 ‘사과 같은 내 얼굴’이라는 표현이 바로 직유법이다. ‘A는 B와 같다’ 또는 ‘B 같은 A’라는 식으로 표현되며, ‘∼ 같은’, ‘∼처럼’, ‘∼ 듯이’ 등이 쓰인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유법이다. 한편, 은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비겨서 표현하는 것이다. 직유와는 달리 ‘A는 B이다’라고 표현하며 A를 B로 대치해버린다. “손이 얼음장이네”라는 표현은 손이 얼음장이 아니라 얼음처럼 차갑다는 의미이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런 직유와 은유를 통해 설교의 내용을 청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이뿐 아니라 특별한 단어나 소리의 반복, 수사학적 질문과 대답, 익살스럽거나 쾌활한 이야기 등을 사용해 청중들이 자신의 설교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크리소스토무스가 이와 같은 수사학적 기법들을 사용했던 것은 그가 어릴 적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수사학을 공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수사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기독교 신앙을 위해 수사학자나 소피스트의 길이 아니라 신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다섯째, 교리문답식 설교에 있어서 크리소스토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중에는 침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리문답적 설교들이 담겨있다. 당시 많은 설교자가 교리문답적 설교에서 주기도문, 침례에 대한 신조, 성례전의 의미에 대해 다루었다. 그러나 크리소스토무스는 그런 의식을 거행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의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더 중요한 것은 평생을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던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4.06.07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Ⅱ)
  • 안디옥교회의 문자적 성경해석을 따라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예언한 것 사도행전의 저자를 누가라고 주장해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가지는 권위는 설교자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오는 권위이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교수는 “설교자들이 주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받은 주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라야 그들의 권위가 인정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 『성경 해석과 성경적 설교』, P.34).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경해석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보여왔다. 바로 알렉산드리아교회가 사용하던 알레고리적(풍유적) 해석과 안디옥교회가 사용하던 문자적 해석이다.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의 생애와 설교 방법론을 살펴보면서 이미 설명했다. 이번 호에서는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방법론을 다루기 전에 그가 사용했던 문자적 해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랐던 안디옥교회의 영향 때문이었다.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은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지도자들이 강조했던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을 거부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성경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성경 단어들이 가지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요, 성경에서 상식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다. 알레고리적 해석처럼 성경 본문 속에 숨어있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의 문자가 가지는 직접적이고, 표면적이고, 문법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특히나 안디옥교회의 성경 읽기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의 사건들을 위한 예표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예언자들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의식적으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베르너 진론드, 『신학적 해석학』, P.43).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이 알레고리적이고 영적인 해석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알레고리로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왕대일, “성서해석사에서 배우는 설교의 과제”, P.29). 결론적으로 알레고리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성경해석법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안디옥교회가 성경 본문의 단어와 문법이 가진 중요성을 강조할 때,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경 본문이 가진 보다 깊은 의미를 깨닫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왕대일, P.29).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데 이 방법론들은 좋은 도구들이다. 안디옥에서 나고 자랐으며 신학교육을 받은 크리소스토무스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던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자적 성경해석을 옹호했던 그는 성경을 읽을 때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문법적인 의미와 역사적 의미를 선호했다. 문법적인 의미는 성경이 가지는 상식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었고 역사적 의미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온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었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P.55~56). 특히 그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은유적인 표현이 성경 밖에 존재하는 의미를 가리키기보다는 성경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성경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강조했던 크리소스토무스의 성경해석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었다. 첫째,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이해했다. 그는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예언한 글’로 생각했다. 또한 구약 시대의 유대 절기를 더이상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진리 자체[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폴 스콧 윌슨, P.56). 둘째, 크리소스토무스는 복음서 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복음서 사이의 차이점을 불리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조화들이 “모든 의심들로부터 복음서를 건져주고 오히려 [복음서] 저자들의 특징에 대해 더 명확하게 말해준다”라고 믿었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P.97). 또 마태복음 서두에 기록된 예수님의 계보에서 마리아 이전에 등장하는 세 여인, 즉 다말, 룻, 밧세바 등 3명만 언급된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셋째, 크리소스토무스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라는 사실을 밝혀내려고 했다. 그는 사도행전의 주제가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에 주목했고 그 저자가 바울의 동료였던 누가라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그는 바울의 편지가 회중을 위한 감사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했고, 로마서가 기록된 이후에 골로새서가 기록됐고, 다음으로 디모데후서가 기록됐다고 추론했다. 이런 크리소스토무스의 성경해석법은 “당대의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오늘날의 신약학자들과 더 유대감이 있어 보인다”(O. C. 에드워드, P.98).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4.04.12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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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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