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설교자 열전
설교자 - 아우구스티누스(Ⅰ)
  • 로마서 말씀 통해 하나님의 소명 깨달아 어머니 모니카의 간절한 기도로 회심 수사학에 뛰어난 재능 보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목회자, 설교자, 신학자가 등장했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을 꼽는다면 힙포의 어거스틴으로 알려진 아우구스티누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지역 누미디안 마을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태어난 것은 354년의 일이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로마의 대박해가 304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306년 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를 통해 로마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고 오랜 박해 속에 있던 기독교 역시 제국 종교로 변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안고 아우구스티누스가 태어나고 자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였다. 그녀의 헌신적인 기도와 노력 덕분에 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로 개종하기까지 그의 젊은 시절은 방탕과 욕망으로 가득했다. 당시 부유층 자제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17세가 되었을 때 수사학, 변증법, 로마법 등을 배우기 위해 카르타고에서 수학했다. 그는 재능이 뛰어난 학생이었고 마침내 수사학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마니교에 심취하게 된다. 마니교는 세상에 두 영역, 즉 빛의 왕국과 흑암의 왕국이 존재하며 두 왕국 사이의 계속되는 전쟁 속에서 선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 88).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를 변호할 정도로 깊이 빠져있었다. 동시에 아데오단투스라는 사생아를 얻기도 했다. 카르타고에서의 그의 삶은 방탕과 일탈의 연속이었다. 고향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교사 생활을 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더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를 이끌어준 사람은 로마 제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심마쿠스였다. 로마의 귀족이었고 집정관까지 지냈던 심마쿠스의 도움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불과 30세의 나이에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로 임명됐다. 로마 제국의 법정이 밀라노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의 수사학 교수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밀라노의 수사학 교수는 황제와 그 해의 집정관들을 돕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127).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적인 방황 가운데 놓여있었다. 몸담고 있는 로마 정치계는 너무 복잡했고 그 어디에서도 영적인 평안을 누리지 못했다. 여전히 붙잡고 있던 마니교 사상은 그런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안식을 찾기 위해 심취했던 그리스 철학 역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런 아들과는 달리 어머니 모니카는 자신의 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려서부터 계속해서 신앙 안에서 살아가길 기도하고 간구했다. 그런 그녀의 오랜 기도와 간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세속적인 성공의 최정점에 이르렀을 때 응답됐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로마 생활은 회의와 갈등 속에 놓여있었다. 그 속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했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비취게 되었다. 바로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스를 만나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기 위해 간 것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보다 나은 연설가가 되려는 목적이 먼저였다. 그러나 암브로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는 기독교 신앙을 전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회심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데 그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프리카 출신의 폰티티안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수도사 안토니와 이집트 수도사들의 성결한 삶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던 그는 아이들이 놀면서 부르는 노래소리를 듣게 됐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Tolle, lege; tolle, lege). 그것은 “집어들고 읽으라, 집어들고 읽으라”라는 뜻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성경을 들어 읽었고 그 말씀이 바로 로마서에 기록된 말씀이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는 이 말씀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았다. 그는 『고백록』에서 그 순간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고 쓰고 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387년 부활절에 침례를 받았고 남은 삶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단했다. 기독교 역사에 놀라운 족적을 남기게 되는 힙포의 어거스틴의 사역이 비로소 시작하게 된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4.11.08

    키프리아누스(Ⅱ)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약 65편의 편지와 12개의 논문 남겨 교회 단일성과 교회 감독의 중요성 강조 ‘권위 있는 성경 해석’ 추구해 키프리아누스의 작품은 약 65편의 편지와 12개 정도의 논문이 남겨져있다. ‘도나투스트에게’에서는 침례를 통해 일어나는 도덕적 변화와 이를 통한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순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고, ‘데메트리우스에게’에서는 이교도들이 가지는 해악성을 고발하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서 배교자들에게 필요한 회개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배교자들』과 참된 교회의 하나 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교회의 단일성』은 그가 가진 신학적 소양과 탁월함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키프리아누스를 많은 교부들로부터 두드러지게 한 것은 그가 가진 교회론과 그 교회론에 근거한 교회 감독의 위치에 대한 그의 의견 때문일 것이다.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이 말은 노바티안파 - 로마교회의 장로였던 노바티안과 카르타고교회의 장로였던 노바투스를 따르던 분파 - 와의 논쟁 가운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는 『교회의 단일성』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노아의 방주 밖에 있었던 자마다 구원받을 수 없었던 것처럼, 교회 밖에 머물러 있게 될 자 또한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그는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예수님의 옷이 로마 군병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나누어지지 않고 온전히 보전되었다는 사실을 들기도 했다.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교회 감독의 직무와도 밀접하게 관련시켰다. 그는 감독이 교회 안에 있고 교회가 감독 안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만일 감독과 함께 있지 않는 자들은 교회 안에 있지 않는 것이다. “감독 없이 교회도 없다.”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키프리아누스의 교회론은 이후 로마가톨릭교회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감독직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이유이다. 당시 로마 정부의 박해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하면서 교회 체계가 흔들리게 됐고 이런 상황을 틈타 평신도 중심의 신앙을 추구하려는 이단들이 발흥하게 됐다. 키프리아누스는 그런 상황을 염려하며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설교자로서 키프리아누스는 성경에서 발견하는 진리를 전달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진리를 전달함에 있어서는 웅장하고 장엄한 웅변조의 설교가 아니라 순수하고 담백한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교자가 전하는 순수하고 담백한 설교를 통해 청중들은 성경에 담긴 진리를 발견하고 설득되며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는 확신을 품게 된다고 믿었다. 그는 도나투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설교자들이여] 교묘하면서도 유창하게 말하지 말고 진중한 말로 하십시오! 세련된 수사학을 통해 회중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억지로] 말을 치장하지 말고, 진실하고 순박한 자세로 하나님의 자비를 ‘간단명료하게’ 선포하되 청중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적절하게 전하십시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72). 특히 키프리아누스는 설교를 위한 성서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폴 스콧 윌슨은 그와 같은 키프리아누스의 성경 해석을 “권위 있는 성서 해석”이라고 부른다. 앞서 살펴본 대로 키프리아누스 시대에는 다양한 이단들이 발흥하며 교회를 위협하고 성도들을 현혹시켰다. 문제는 그들 역시 성경 본문을 근거로 자신들의 이단 사상을 전파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성경 해석이 옳으며 그와 같이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키프리아누스는 성경 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근거를 교회의 구전 전통에서 찾았다. 이것은 앞서 살펴본 교회와 교회 감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키프리아누스의 모습과 맥을 닿아있다. 올바른 해석을 판단하는 기준은 교회가 사용하는 구전 전통, 곧 신앙의 규칙(the rule of faith)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그는 성경이 문자적으로 이해되지 않거나 신앙의 규칙을 통해서 분명하게 해석되지 않을 경우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설교를 행함에 있어서 키프리아누스는 성경 이외에 다른 교부들의 말이나 책의 내용을 인용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설교 내용을 보다 권위 있는 것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교나 저작에서 발견되는 가장 특징 중 하나는 성경 인용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점이다. 성경을 인용할 때마다 키프리아누스는 그 부분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인용 자체가 하나의 ‘선포’가 되는 효과를 내게 했다. 이와 같은 설교 방법론은 오늘날 설교자들에게도 좋은 선례가 된다. 설교 가운데 인용되는 성경 구절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생생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된다. 성경의 말씀들 대부분은 기록되기 이전에 하나의 선포로 세상 가운데 전해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4.08.08

    키프리아누스(Ⅰ)
  •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 이교도 부모에게서 태어나 늦은 나이에 개종 로마 박해 시기 교회 일치 이끌어 타스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는 A.D. 200년경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태어났다. 부유했던 그의 이교도 부모들은 그에게 법과 수사학을 가르쳤고 약 245년 기독교로 개종하기까지 그는 카르타고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개종 이후 침례를 받는 과정에서 키프리아누스는 그때까지 자신을 사로잡았던 무익하고 죄로 가득한 생활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특이한 것은 침례를 받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가 카르타고의 주교로 선출되었고 서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의 주교 선출에는 그의 경쟁자였던 노바투스와 그를 따르는 감독들의 적잖은 반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키프리아누스의 생애에서 있어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의 사건이 있다. 첫 번째는 로마 황제 데시우스의 박해였다. 249년 황제가 된 데시우스는 로마에 닥친 야만족의 침입, 경제적 위기, 사회적 불안이 로마 시민들이 전통적으로 섬겨오던 신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 신들을 다시금 잘 섬긴다면 로마의 영화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에 로마의 옛 신들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을 반역자로 여겼고 멸절시키려고 했다. 250년 기독교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데시우스의 기독교 박해는 이전 박해와는 달리 기독교인들을 살해하는 대신 협박하고 고문하고 회유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기독교 신앙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로마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숭배한 사람들에게 증명서를 발부했는데, 이 증명서가 없는 사람은 범죄자로 취급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제의 회유에 변절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며 투옥되고 마침내 순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박해로 인해 기독교 내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들(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 로마 감독 파비안, 안디옥 감독 바빌라스 등), 감옥에 가는 것도 불사하며 굳건히 신앙을 지킨 고백자들(Confessors) 그리고 신앙을 버린 배교자들이었다. 이 박해 과정에서 키프리아누스는 목숨을 부지했다. 그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교인들의 간청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자신의 교인들을 돌보기 위해 1년 동안 은신하라는 환상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떤 주장이 맞건 간에 그는 생명을 부지했고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내 자신이 도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널리 알렸다. 자신의 주교를 잃은 로마의 감독들이 그에게 편지를 써서 유감을 표했기 때문이다. 251년 데시우스가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죽자 기독교인을 향한 박해가 그쳤다. 그러나 박해가 사라진 교회의 상황은 이전보다 더욱 복잡해졌다. 앞서 언급했듯이 교회에는 박해 시기 신앙을 지킨 고백자들과 그 반대에 서있는 변절자들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신앙을 버린 변절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교회의 최대 숙제였다.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했던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갈등을 겪었던 한국교회와 같이 4세기 교회 역시 그런 갈등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변절자들을 절대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론자들과 그들이 회개한다면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화해론자들이 팽팽히 대립했다. 점점 분열의 가운데로 빠져들어가는 교회를 지켜볼 수 없었던 키프리아누스는 감독회의를 소집했고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① 로마 제국이 제시하는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조건 없이 교회로 받아들일 것 ②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임종 시나 새로운 박해 시기에 회개의 진실성을 보일 때 교회로 받아들일 것 ③ 제사에 참석했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로 받아들이지 말 것 등이다. 그러나 252년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황제의 박해가 일어나자 배교자들의 복원 사업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많은 배교자가 박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보이길 원했기 때문이다. 키프리아누스의 생애에 있어 중요했던 두 번째 사건은 250년 부활절에 에티오피아에서 창궐한 흑사병이다. 이 전염병은 이듬해에 로마는 물론 그리스와 동쪽으로 시리아에까지 전파되었다. 무려 20년 동안 지속됐던 흑사병으로 인해 로마에서만 하루에 5000명의 사람이 죽었다. 이 전염병의 급속한 전파 이유는 가울을 공격했던 게르만족과 같은 이민족들이 일으킨 수많은 침략 전쟁 때문이었다. 이 전염병을 ‘키프리아누스의 흑사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저서 『죽음』(On Mortality)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흑사병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반박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교회가 흑사병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흑사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선과 봉사를 베푸는 사랑의 장소임을 강조했다. 조지훈 목사(한세대 설교학 교수)
  • 2024.07.12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Ⅲ)
  •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약 600편 남아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 전달 사회 정의에 관심 가졌던 ‘자선의 예언자’ 다양한 수사학 기법 사용하기도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문은 약 600편이 남아있다. 이들 대부분은 안디옥에서 행한 것이며 속기사들이 기록했다고 한다. 이 설교들을 통해 그의 설교가 적어도 1시간 이상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설교의 특징은 무엇일까? 남아있는 그의 설교를 통해 몇 가지 특징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크리소스토무스는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 전달이라고 믿었다. 그는 설교자가 인간적인 찬사나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가 청중들의 찬사를 강력히 거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가 설교했을 때 많은 경우 청중들은 자주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러나 박수갈채에 환호하는 대신 그는 박수를 치는 청중들을 강하게 질책했다. 그가 그들을 질책한 이유는 설교자가 칭찬에 대한 열망으로 설교하게 되면 청중들에게 보탬이 되는 설교가 아니라 그저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인먼트식 설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청중들이 보내는 박수갈채를 거부했던 이유는 그들이 선포된 말씀을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삶 속에서 행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의 마음에 닿아 그들의 마음을 감동하고, 마침내 그들의 생활방식이 변화되는 것임을 크리소스토무스는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 청중의 박수와 찬사를 거부했던 크리소스토무스는 당시 안디옥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그리스문화를 반대했다. 그리스문화는 이교도적이고 세속적인 것이었다. 천국에 이르는 길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가 비기독교적인 자료 중에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셋째,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중에는 금욕주의적인 성향을 띄는 것들이 많았다. 그가 금욕주의적인 성향을 갖게 된 것은 381년 집사 안수 후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를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런 그의 성향 때문인지 크리소스토무스는 경제적인 부와 자선의 의미를 자주 다루었고 사회 정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정교회 신학자 중 한 명인 조지 플로로브스키는 크리소스토무스를 ‘자선의 예언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플로로브스키에 따르면 크리소스토무스는 인간의 번영은 가장 위험한 것이며 혹독한 핍박보다 더 잔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번영이야말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번영에 사로잡힌 인간은 부주의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Father George Florovsky, “Saint John Chrysostom: The Prophet of Charity”, 「St. Vladimir’s Seminary Quarterly」 (1955): 37). 넷째, 크리소스토무스가 당시 세속적인 문화를 배격했다고 해서 그의 설교에서 완전히 성경 이야기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청중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직유와 은유를 사용했다. 직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유사성이 있는 다른 대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수사법”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릴 적 불렀던 동요의 가사 중에 ‘사과 같은 내 얼굴’이라는 표현이 바로 직유법이다. ‘A는 B와 같다’ 또는 ‘B 같은 A’라는 식으로 표현되며, ‘∼ 같은’, ‘∼처럼’, ‘∼ 듯이’ 등이 쓰인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비유법이다. 한편, 은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다른 대상에 비겨서 표현하는 것이다. 직유와는 달리 ‘A는 B이다’라고 표현하며 A를 B로 대치해버린다. “손이 얼음장이네”라는 표현은 손이 얼음장이 아니라 얼음처럼 차갑다는 의미이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이런 직유와 은유를 통해 설교의 내용을 청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이뿐 아니라 특별한 단어나 소리의 반복, 수사학적 질문과 대답, 익살스럽거나 쾌활한 이야기 등을 사용해 청중들이 자신의 설교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크리소스토무스가 이와 같은 수사학적 기법들을 사용했던 것은 그가 어릴 적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수사학을 공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수사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지만 기독교 신앙을 위해 수사학자나 소피스트의 길이 아니라 신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다섯째, 교리문답식 설교에 있어서 크리소스토무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중에는 침례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리문답적 설교들이 담겨있다. 당시 많은 설교자가 교리문답적 설교에서 주기도문, 침례에 대한 신조, 성례전의 의미에 대해 다루었다. 그러나 크리소스토무스는 그런 의식을 거행한 이후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의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더 중요한 것은 평생을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던 것이다.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4.06.07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Ⅱ)
  • 안디옥교회의 문자적 성경해석을 따라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예언한 것 사도행전의 저자를 누가라고 주장해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가지는 권위는 설교자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부터 오는 권위이다.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교수는 “설교자들이 주님께로부터 말씀을 받고 그 받은 주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라야 그들의 권위가 인정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시드니 그레이다누스, 『성경 해석과 성경적 설교』, P.34).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해석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성경해석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보여왔다. 바로 알렉산드리아교회가 사용하던 알레고리적(풍유적) 해석과 안디옥교회가 사용하던 문자적 해석이다. 알레고리적 해석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의 생애와 설교 방법론을 살펴보면서 이미 설명했다. 이번 호에서는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 방법론을 다루기 전에 그가 사용했던 문자적 해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랐던 안디옥교회의 영향 때문이었다.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은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지도자들이 강조했던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을 거부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성경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성경 단어들이 가지는 의미를 밝히는 것이요, 성경에서 상식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다. 알레고리적 해석처럼 성경 본문 속에 숨어있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의 문자가 가지는 직접적이고, 표면적이고, 문법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특히나 안디옥교회의 성경 읽기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구약성경을 신약성경의 사건들을 위한 예표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예언자들이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의식적으로 이야기”했다는 것이다(베르너 진론드, 『신학적 해석학』, P.43).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이 알레고리적이고 영적인 해석을 완전히 거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알레고리로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왕대일, “성서해석사에서 배우는 설교의 과제”, P.29). 결론적으로 알레고리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성경해석법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안디옥교회가 성경 본문의 단어와 문법이 가진 중요성을 강조할 때,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경 본문이 가진 보다 깊은 의미를 깨닫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왕대일, P.29).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데 이 방법론들은 좋은 도구들이다. 안디옥에서 나고 자랐으며 신학교육을 받은 크리소스토무스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던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자적 성경해석을 옹호했던 그는 성경을 읽을 때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문법적인 의미와 역사적 의미를 선호했다. 문법적인 의미는 성경이 가지는 상식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었고 역사적 의미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온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었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 설교의 역사』, P.55~56). 특히 그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은유적인 표현이 성경 밖에 존재하는 의미를 가리키기보다는 성경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했다. 성경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강조했던 크리소스토무스의 성경해석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었다. 첫째,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이해했다. 그는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예언한 글’로 생각했다. 또한 구약 시대의 유대 절기를 더이상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진리 자체[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폴 스콧 윌슨, P.56). 둘째, 크리소스토무스는 복음서 연구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복음서 사이의 차이점을 불리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조화들이 “모든 의심들로부터 복음서를 건져주고 오히려 [복음서] 저자들의 특징에 대해 더 명확하게 말해준다”라고 믿었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 P.97). 또 마태복음 서두에 기록된 예수님의 계보에서 마리아 이전에 등장하는 세 여인, 즉 다말, 룻, 밧세바 등 3명만 언급된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셋째, 크리소스토무스는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라는 사실을 밝혀내려고 했다. 그는 사도행전의 주제가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에 주목했고 그 저자가 바울의 동료였던 누가라는 사실을 주장했다. 이 밖에도 그는 바울의 편지가 회중을 위한 감사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했고, 로마서가 기록된 이후에 골로새서가 기록됐고, 다음으로 디모데후서가 기록됐다고 추론했다. 이런 크리소스토무스의 성경해석법은 “당대의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오늘날의 신약학자들과 더 유대감이 있어 보인다”(O. C. 에드워드, P.98). 조지훈 목사(한세대학교 설교학 교수)
  • 2024.04.12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Ⅰ)
  • ‘황금의 입’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위대한 설교자 알레고리적 해석이 아닌 문자적 해석 배워 기독교 부흥기에 불의와 압제에 과감히 맞서 기독교 역사에서 주후 4세기는 엄청난 변화의 시기였다. 설교학자 에드워드 다간은 이 시기가 인류 문명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으며 기독교의 역사와 기독교 설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Edward Dargan, History of Preaching 1, P.60~61). 주후 64년 로마 대화재로 촉발된 기독교에 대한 길고 긴 박해의 시대가 가고 로마제국을 기독교의 깃발로 뒤덮을 놀라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첫 그리스도인 황제라고 평가받는 콘스탄티누스의 회심이 있다. 3세기 후반 로마제국은 외적의 침략, 내전, 역병, 경제 불황 등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결국 나라를 네 개로 나눠 네 명의 통치자가 다스리는 ‘4두 체제’(Tetrarchy)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방안으로 제시되었고 실시됐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287년 시작된 4두 체제는 324년 콘스탄티누스가 모든 정적을 물리치고 통일된 로마의 유일한 황제에 오르면서 마무리됐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적 자유를 얻은 기독교는 이후 통일 로마의 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제국의 종교로 부상했다. 제국 전역에 통일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내에 존재하는 교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길 원했다. 이것이 325년 니케아 공의회가 열린 중요한 이유이다. 이제 기독교는 법의 보호 아래 번성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가 크게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종교에 대한 국가 지원이 끊기면서 로마 사회에서 다른 종교에 대한 귀족들과 시민들의 관심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유럽의 많은 지역에 큰 교회당을 지었고 이를 통해 기독교가 그 지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했다. 다른 종교에 대한 국가 지원은 물론 개인적인 지원이 끊기면서 그들의 신전은 기독교회로 바뀌는 경우도 자주 일어났다(알리스터 맥그래스 『기독교의 역사』, P.101~102). 이제 기독교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 사회에 적응하며 차츰 제국의 종교가 되어가던 344년(혹은 345년) 지금의 시리아 지역에 있던 안디옥에서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태어났다. ‘크리소스토무스’라는 말은 ‘황금의 입’(golden mouth)라는 의미로 위대한 설교자였던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요한네스의 아버지는 로마의 고위 공무원이었지만 그가 유아였을 때 죽었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 안투사는 기독교 신앙에 헌신하며 아들 양육에 전념했다. 그는 당시 뛰어난 수사학자였던 리바니우에게서 수학하면서 웅변술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375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 약 6년을 머물면서 성경 연구에 몰두했다. 이 기간 그는 스승 디오도루스로부터 당시 유행하던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이 아니라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성경 연구 방법을 배웠다. 381년 처음 집사에 임직된 크리소스토무스는 386년 안디옥의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가 설교자로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387년에 일어난 폭동 때문이었다.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 흥분한 안디옥 시민들은 황제와 황후의 동상을 부수며 격렬히 항의했다. 이때 크리소스토무스는 “조각상들에 관하여”라는 21편의 설교를 연속으로 행했고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 약 12년 동안 안디옥에서 활동하던 그는 397년 지방 총독의 소환을 받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에 올랐다. 50세가 채 되지 않은 젊은 감독은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말씀을 전했다. 특히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사치를 멀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것을 권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에 반응했지만 부자들과 고급 관리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처음에 그를 열렬히 환영했던 서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부부(특히 황후 유독시아),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하려던 알렉산드리아 감독 데오빌로스 그리고 지역의 종교 관계자들은 절제와 온유와 구제를 강조하는 크리소스토무스의 설교에 분개했고 고발장을 작성해 그를 추방하고 말았다(404년). 그러나 여전히 그를 추종하던 더 많은 사람이 그의 귀환을 요구하며 궁전을 습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때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고 황후 유독시아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크리소스토무스를 복귀시켰다. 복귀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설교를 통해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비판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대성당에 세워진 자신의 은조각상을 세운 황후 유독시아를 구약의 ‘이세벨’과 비교하며 비판했다. 이 일로 다시 추방된 그는 흑해의 고립된 마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407년 하나님께로 옮겨졌다. 조지훈 목사(순복음선교연합회 담당)
  • 2024.03.08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Ⅲ) 
  • 설교 역사에서 최초로 설교 형식을 제시한 오리게누스 성경 본문의 역사적, 문법적인 연구 강조 성경 주석에 기초한 설교 발전시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오리게누스가 사용한 알레고리라는 방법론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어떤 설교학자는 “공상에 더 가까운 비유적 해석에 빠져 들어가서 성서의 설명과 적용에서 이탈되곤 했다”라고 평가한다(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상)』,P.42). 그렇다면 그는 성경 본문 해석에서 어떤 식으로 알레고리를 사용했던 것일까? 그가 행한 설교를 잠깐 살펴보도록 하자. “아브라함의 3일 간의 여행은 탐색, 갈망, 분별을 상징한다; 창세기의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을 가리킨다; 요셉이 입은 자색옷은 다양한 지식을 의미한다; 부정한 고기에 대한 규칙들은 검소함에 대한 가르침을 뜻한다; 발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깨끗한 짐승은 하나님의 율법을 신실하게 성찰하는 정통주의자(the orthodox)를 의미한다…보리떡과 기적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의미하고 물고기는 헬라 철학을 상징한다”(Hugh Thomson Kerr, Preaching in the Early Church, P. 113~114). 그러나 설교학자 클라이드 팬트(Clyde E. Fant)는 알레고리적인 성경 해석방법으로 인해 오리게누스가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알레고리 성경 해석은 오리게누스가 발전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팬트는 그가 기독교 설교 역사에 행한 일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팬트는 오리게누스가 설교 역사에서 두 가지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Clyde E. Fant, 20 Centuries of Great Preaching: Biblical Sermons to Savonaola, 1971, P. 32~33). 첫째, 오리게누스는 설교 역사에서 설교의 형식을 제시한 최초의 설교자였다. 그에게 설교는 설교자가 택한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설이었다. 설교자는 자신이 택한 성경 본문을 연구한 후에 그것을 청중들에게 설명하고 적용해야 한다. 이것이 오리게누스가 생각한 설교였다. 그러나 오리게누스가 지금과 같은 설교 형식을 제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가 행한 설교의 구조는 수사학적인 이론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즉, 그의 설교들은 “논리적 형식이나 또는 수사학적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O. C. 에드워드, 『교부들의 설교』,P. 43). 둘째, 오리게누스는 성경 본문의 역사적이고 문법적인 연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최초의 설교자였다. 그는 설교를 위해 선택된 본문의 역사적 배경과 본문의 문법적인 사항을 주의 깊게 주석(exegesis)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보다 깊이 있는 성경연구를 위해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후에 6개의 성경 번역문을 하나로 묶은 ‘헥사플라’(Hexapla)를 만들었다. 또한 어떤 본문에 있는 단어가 다른 본문에서는 어디에서 발견하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상징을 개발했다. 기독교 설교 역사의 초창기에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설교는 학습되지 않은 것이었고 구조적으로도 엉성한 것이었다. 오리게누스는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학자층과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오리게누스는 설교자가 성경에서 3가지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폴 스콧 윌슨, 『그리스도교 설교의 역사』,P. 48~49). 첫째, 육적이거나 문자적인 의미이다. 이 해석 방법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성서 해석의 잘못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둘째, 혼(魂)적 또는 도덕적인 의미이다. 이 해석법은 성도가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영혼을 일깨워준다. 셋째, 영적 혹은 신비적-종말론적인 의미이다. 이것은 “한 사람을 진리에 연합시키려는 목적”의 방법론이다. 오리게누스에게 육적이고 혼적인 성경 연구방법은 성서의 영적인 의미를 찾아가기 위한 징검다리였다. 즉, 그에게 “문자적인 해석이란 단순히 성서 본문의 의미를 보다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 통과해야만 하는 기본적인 성서 해석의 한 단계”였던 것이다(폴 스콧 윌슨, P. 49). 오리게누스는 기독교 설교 역사의 막을 열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알레고리 성경 해석을 행했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로서 그의 업적은 기독교를 이방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었다는 것과 다양한 성서 해석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특히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를 좀 더 깊이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의 공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본문의 주석에 기초한 설교를 생성시킨 그의 공로는 기독교사에 그 본격적인 첫 장(章)을 펼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설교의 역사를 이끌어 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라고 평가할 수 있다(정장복, 『인물로 본 설교의 역사 (상)』,P. 43~44). 조지훈 목사(순복음선교연합회 담당)
  • 2024.02.08

    설교자 -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Ⅱ)
  •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 통해 성경의 진리 탐구 성경의 문자 이면에 담긴 영적 의미 찾아 유대 학자 필로와 플라톤주의로부터 영향 받아 오리게누스의 설교를 이해하기 전에 그의 신학과 성경 해석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신학과 성경 해석법은 그의 설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오리게누스의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헬라 철학, 곧 플라톤주의였다. 그가 이런 영향을 받게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교리학교에서 그를 가르쳤던 클레멘트 때문이었다. 클레멘트는 헬라 철학과 기독교 교리를 결합하는데 관심이 많았고 그의 관심은 고스란히 그의 제자였던 오리게누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도 오리게누스는 플라톤주의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와 신피타고라스학파 철학자였던 아파메아의 누메니우스에게 영향을 받았다. 유대교 학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모세 오경을 해설하면서 플라톤주의와 스토아학파의 방법론을 차용했다. “종교의 근본 원리를 마련하기 위해 철학을 사용한 것”이다(제임스 네빌 버드샐, 『새성경사전』, P.1708). 오리게누스가 주장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내용은 필로에게서 영향받은 것이다. 오리게누스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파메아의 누메니우스는 플라톤 철학의 내용이 피타고라스에게까지 연결이 되며 동시에 브라만교, 유대교, 동방의 신비 종교 등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누메니우스 역시 헬라 철학과 다른 종교 간의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플라톤 철학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제시한다. 세계는 인간이 사는 이 세상과 신들의 세계라고 하는 ‘이데아의 세계’로 구분된다. 신들의 세계는 참된 세상이고 우월적인 세계이며 규범이 되는 세계이다. “참된 사물의 실재가 있는 세계가 바로 신들의 세상이다”(윤주현, 『그리스도교 영성의 원류인 오리게네스』, P.208). 이와는 달리 이 세상은 하위의 세계이며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현상이며 신들의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플라톤주의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오리게누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현세를 상징적이고 상대적인 세계로 보는 것이다. 이 세상은 신들의 영적 세계의 환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 신들 세계의 그림자인 이 세상은 끊임없이 영적인 세계를 닮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필로의 신학과 플라톤 철학은 오리게누스의 성서 해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런 영향 아래 오리게누스가 사용한 성경 해석법을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이라고 한다.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은 오리게누스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미 헬라 철학자들과 유대학자 필로가 사용하고 있었다. ‘알레고리’라는 말은 “말한 바와 다른 무엇” 혹은 “말한 바에 추가된 또 다른 무엇”이라는 의미이다(최진봉, 『본문과 삶 간의 유비적 읽기로서의 새로운 설교학에 대한 이해』, P.261).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자들은 성경의 문자 이면에 영적이며 신학적인 의미가 있고 그러한 의미가 성도들의 삶에 적용될 수 있는 윤리적인 내용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을 사용했던 오리게누스는 성경을 “숨겨진 신비들이 담겨 있는 상징의 보고(寶庫)”라고 생각했다(윤주현, P.209).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인 내용 이면에 담겨 있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해석자의 임무인 것이다. 그는 교육받은 그리스도인과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을 구별했다. 교육받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인 의미를 찾을 뿐이다. 그러나 교육받은 그리스도인은 “본문의 표면 아래로 들어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사용하여 그 표면 아래 숨어 있는 더 심오한 ‘영적’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알리스터 맥그래스, 『기독교의 역사』, P.77).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이 빛을 발하는 부분은 구약성경 해석에서였다. 오리게누스는 구약의 사건, 제의, 이야기들을 천상의 영원한 원리를 가리키는 표상으로 이해했다. 이와 같은 성경 해석은 오리게누스의 스승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게서도 발견된다. 클레멘트는 성경을 두 가지 의미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사람의 몸에 해당하는 문자적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참된 의미인 영적인 의미이다. 영적인 의미는 문자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즉,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영원한 영적 진리를 가리키는 지시체(pointer)인 것이다. 조지훈 목사(순복음선교연합회 담당)
  • 2023.12.15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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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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