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담임목사 주일설교
조용기 원로목사 주일설교
오늘의 묵상
12월 13일(토) - 세상을 이기는 믿음
  • ◎ 말씀 : 요일 5:4~5 ◎ 찬송 : 357장(통 397장)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성도가 세상을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요일 4:4). 세상을 이기는 힘은 바로 우리의 믿음에서 나옵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어떤 문제도 우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고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그럴 때 낙심하지 말고 믿음의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권세를 힘입어 세상을 향해 담대히 외치십시오. “나는 하나님께 속한 승리자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날마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며 담대히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상황에도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2.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2월 12일(금) -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 ◎ 말씀 : 요일 3:23~24 ◎ 찬송 : 515장(통 256장)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그 믿음 안에서 날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장 큰 명령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한 이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 가능해집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먼저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깊이 묵상할 때 마음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질 때 미워하던 사람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며 사는 삶,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가장 아름다운 간증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사랑의 삶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이웃에게 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2.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2월 11일(목) - 참된 즐거움
  • ◎ 말씀 : 요엘 1:10~12 ◎ 찬송 : 28장(통 28장) 요엘 선지자는 메뚜기 떼가 유다 땅을 덮쳐 모든 작물을 파괴하고 땅이 황폐해지며 사람들의 기쁨이 사라지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이 재앙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에 내린 심판이었습니다. 특히 모든 나무가 시든 모습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진 그들은 영혼이 메마르고 기쁨도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마음이 황폐해지고 영혼은 평안을 잃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가득 채워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참 생명을 얻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살피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2.0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순복음의 12대 핵심진리
    4. 갈보리 십자가 신앙
  •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구원의 은혜 감사하며 믿음 위에 굳게 서야 순복음의 12대 핵심진리 중 ‘순복음 7대 신앙’은 성도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신앙의 기초를 제시한다. 곧 갈보리 십자가 신앙, 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 땅 끝까지 전하는 신앙, 좋으신 하나님 신앙, 병을 짊어지신 예수님 신앙, 다시 오실 예수님 신앙, 나누어 주는 신앙이다. ‘갈보리 십자가 신앙’은 순복음 교리의 핵심이며 인간이 구원받을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임을 철저히 믿는 신앙이다. 1.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풍성한 삶을 누렸으나,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뱀의 유혹에 넘어가 따먹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무시한 불순종의 죄였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끊어지고 두려움 속에 숨는 존재가 되었다. 땅은 저주받고, 고통과 질병,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다.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나무 잎으로 몸을 가렸으나 가릴 수 없었고, 하나님은 짐승의 가죽옷으로 입히셨다. 이는 죄 사함을 위해 반드시 피 흘림이 필요함을 예표한 것으로, 장차 흠 없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것을 상징한다(히 9:22).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가운데 살아가며 궁극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 상태에 놓여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구약 시대엔 짐승의 피로 속죄했으나 그것은 불완전한 제사로 반복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단번에, 영원히 속죄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으셨다. 그때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셨고, 바울도 그 사실을 증언했다(고전 15장).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보증한다. 3. 거듭남의 은혜 크리스천은 두 번 태어난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거듭남은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시는 사건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거듭남은 회개와 믿음으로 온다. 회개는 ‘메타노이아’, 곧 삶의 방향을 완전히 돌이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믿고,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그 결과 구원받은 자는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사람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칭의). 우리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게 되었다. 그래서 참된 크리스천은 “예수님만이 나의 의이며 나의 모든 것”이라고 고백한다. 결론적으로 순복음 성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과 부활을 통해 죄 사함 받았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믿음 위에 굳게 서는 것이 바로 ‘갈보리 십자가 신앙’이다. 정리=오정선 기자
  • 2025.12.05 / 오정선 기자

    3. 강건함의 축복
  • 믿음의 기도와 거룩한 삶, 헌신 속에서 완성되는 강건의 복 단순한 치유 넘어 하나님 중심된 삶 이뤄야 순복음 신앙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을 ‘전인구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게 된 영적·육체적·환경적 영역을 모두 아우르는 복을 ‘삼중축복’이라 한다. 이러한 전인적인 축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요한삼서 1장 2절이다. 이 삼중축복의 세 번째에 해당하는 복이 ‘강건함의 축복’이다. 강건함(Good Health)은 단순한 육체의 건강을 넘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강건함을 근간으로 한 온전한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강건함의 복을 마땅히 구하며 살아야 한다. 강건함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선포하는 창조적 믿음의 고백이다. 몸이 연약하거나 질병 중에 있을지라도 “나는 건강하다”, “나는 평안하다”고 믿음으로 선포할 때 그 긍정적인 믿음의 언어가 현실을 변화시킨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약 5:15)는 말씀처럼 현상에 집중하지 않고 치유보다 치유하시는 하나님께 시선을 둬야 한다.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사 22:22)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기도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죄와 음행, 탐욕, 중독 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고 정결함을 지킬 때 마귀가 틈타지 못하고 성령께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다스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몸으로 주를 섬기고 이웃을 위해 ‘봉사와 헌신하는 자’에게 강건의 복을 주신다. 조용기 목사는 17세에 폐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섰다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 받았다. 이후 조용기 목사는 “건강해야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 강건함은 사명을 위한 복”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육체의 건강은 단순한 생존의 조건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사명의 자원이다. 그러므로 건강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한 도구이다. 건강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고 건강해야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말씀을 통해 단순한 병이 낫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 강건함의 축복을 받기 위해 우리가 드려야 할 믿음의 기도와 거룩한 삶, 봉사와 헌신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표현이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믿음에서 시작된다. 복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시선을 둘 때 우리의 영혼은 견고해지고 삶은 새로워진다. 주님이 주시는 강건함으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그것이 바로 삼중축복 신앙의 완성이자 순복음 신앙의 본질이다.
  • 2025.10.31 / 금지환 기자

    2. 범사가 잘되는 축복
  • 하나님 안에서의 나눔은 ‘플러스’ 우리는 저주를 속량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받고 형통한 삶을 살게 됐다. 하나님은 본래 뜻대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지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인간의 삶은 저주의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이게 됐다(창 3:17~18). 그 결과 인간은 땀 흘려야 먹고 사는 존재로 전락해 버렸으며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고통의 저주 가운데 살게 됐다. 인간은 이런 저주와 고통의 운명을 바꾸려고 애썼지만 어떤 방법으로도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이러한 인간의 저주받은 운명을 회복시킨 분이 예수님이시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를 짊어지고 피 흘리심으로 우리는 저주에서 벗어나 축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갈 3:13~14).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모든 저주에서 벗어나 범사에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모든 일이 저절로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오히려 하나님께 힘과 지혜를 구하면서 주어진 일을 감당해 나가며 요한삼서 2절에 기록된 ‘범사에 잘되는’ 형통의 복을 실제로 경험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발적인 가난이나 청빈한 삶만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의 축복 신앙을 단순한 기복 신앙으로 오해한 데서 나온 생각이다. 물론 물질적인 축복만을 추구하는 태도는 문제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말하는 복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복이 되어 다른 이들에게 그 복을 흘려보내길 원하신다. 영혼뿐 아니라 범사에 임하는 복은 크리스천이 마땅히 구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다(출 20:6). 크리스천은 물질에 지배당하는 자가 아니라 물질을 다스리며 사는 자이다. 그래서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복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며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헌금은 거짓이나 속임이 없이 온전해야 한다(말 3:8~10).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이웃과 함께 나누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 진정한 복이 된다. 하나님의 계산법은 세상의 방식과 다르다. 하나님 안에서의 나눔은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다. 하나님은 나누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은혜와 축복을 더해주신다(눅 6:38). 그렇기에 우리는 받은 복을 움켜쥐고 있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나누는 자에게 더욱 풍성한 복으로 채워주시는 분이다. 우리를 복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해서라도 축복해 주실 것이다.
  • 2025.10.03 / 김주영 기자

    선교 열전
    (18) 김창식 목사
  • 머슴 출신 한국인 최초 목회자 박해 속 복음 지키며 ‘한국의 바울’로 불려 한국 초기 교회사의 빛나는 별 중 한 사람인 김창식 목사는 머슴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됐다. 한평생 순회 전도인으로 살아간 그는 당시 선교사들의 회고록에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굳게 붙들었던 ‘한국의 바울’로 기록되어 있다. 1857년 황해도 수안군 성동면 생금리에서 태어난 그는 머슴살이를 하던 시절, 선교사들에 대한 괴소문을 접했다. 당시 “아이들의 간을 떼어 약을 만든다”, “눈을 빼어 만든 것이 카메라다”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미국 북감리교 올링거 선교사의 집에 잡부로 취직해 선교사의 사생활을 감시했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행동은 전혀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올링거 부부의 인격과 겸손한 삶에 감동을 받아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1888년 4월 아펜젤러에게 침례를 받은 뒤 선교사들의 든든한 조력자가 됐다. 김창식 목사가 ‘한국의 바울’로 불린 가장 큰 계기는 1894년 평양에서 일어난 기독교인 박해 사건이었다. 이때 김창식도 잡혀가 죽을 지경의 고문을 받았으나, “나는 기독교가 옳다는 사실을 안 이상 기독교 신자로 살 것이며 나가서도 복음을 전하겠다”며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그는 감옥에서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라는 말씀과 함께 “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석방 직후 곧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평양은 격전지가 됐고 교회와 병원은 피난민들의 은신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김창식은 홀 선교사와 함께 남아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과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홀 선교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김창식 목사는 평양 선교 전반을 홀로 맡아 감당했다. 이후 그는 노블 선교사와 함께 평양 이북 지역의 교회를 이끌었다. 거리와 산골을 누비며 복음을 전해 ‘길바닥의 목사’, ‘민중 전도인’으로 불렸던 그는 1901년 5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회 사역 동안 김창식 목사는 48개 교회를 개척하고 전국 170여 교회를 돌보며 교파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순행 사역자로 전국을 누비며 목회에 헌신했다. 교인들에게 스스로 신앙을 세우고 전도하는 ‘자립·자전’ 정신을 강조했던 김창식 목사는 1929년 1월 29일 향년 72세로 소천 받았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가장 작은 자’라 칭하며 겸손과 헌신의 삶을 살았다.
  • 2025.08.29 / 금지환 기자

    (17) 존 로스
  •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으로 선교 토대 마련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하고 이후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는데 기여한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조선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로스는 조선의 복음화를 꿈꾸며 한글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젊은 날을 헌신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로스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비롯해 독일어, 중국어 등 외국어를 공부했다. 사람들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를 묻자 로스는 “예수님은 너희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당연히 많은 외국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답했다. 신학생 시절 로스는 중국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의 강연에 참석해 “중국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채 죽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선교사가 될 것을 결단했다. 1872년 중국에 도착한 로스는 먼저 선교 중이던 존 매킨타이어와 함께 길거리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나눠주며 전도를 시작했다. 로스가 중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유창한 어학 실력을 갖추게 된 후에는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순회 전도를 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유교적 표현을 이용해 기독교 교리를 이해시키려 노력했고 현실에 지쳐 불교·도교 사원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중국인뿐 아니라 조선인, 러시아인, 일본인 등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거주했다. 주변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을 알게 된 로스는 만주 지역에서 전도하며 머지않아 조선에도 복음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을 확신했다. 그는 “조선인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한글 성경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않겠습니까?”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글 성경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고 번역에 힘썼다. 그는 당시 한문으로 된 성경은 이미 있었지만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통해 복음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로스는 자신이 한글을 공부하면서 정리한 내용과 예문을 바탕으로 조선을 방문할 선교사들에게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어 교재인 ‘조선어 첫걸음’이라는 책도 저술했다. 비록 그는 조선의 쇄국 정책과 기독교 박해로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과 가까운 중국 만주를 선교 거점으로 삼고 조선인들과 교류하며 복음을 전해 조선에 공식적인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기독교 신앙이 자리 잡도록 기틀을 마련한 선교사다.
  • 2025.05.23 / 금지환 기자

    (16) 말콤 펜윅
  • 초기 한국기독교 토대 마련 성경·찬송 번역하며 46년간 헌신한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은 국내에서 헌신하며 신약성경과 찬송을 우리말로 번역한 선교사다. 찬송이 수록된 『복음찬미』, 전도를 위한 성경 구절을 모은 『만민됴흔긔별』 발간뿐 아니라 1919년에는 『신약젼셔』 를 출판했다. 캐나다인인 그는 26살 때 초교파 모임인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해 성경을 공부하던 중 인도 선교사로 활동한 로버트 와일더의 “사막에서 애타게 물을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담긴 물이 아닌 오직 물이다”라는 간증을 듣고 선교사로 결단했다. 1889년 입국한 펜윅은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며 25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펜윅은 장로교 조사 서경조와 동행하며 한국어를 배워 황해도 송천에서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s Me), ‘나는 참 기쁘다’(I am so glad) 찬송과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해 소년들에게는 성경을 가르치고 마을의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성경 공부를 이끌었다. 그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신념을 갖고 개신교 선교부가 없는 원산으로 이동해 자립 선교의 토대 마련을 위해 농장을 운영했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한 펜윅은 다른 사람이 전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 정책으로 삼고 원산을 중심으로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소외된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교단의 목사와 전도사는 순회사역자가 되어 전국에서 전도 활동을 펼쳤고 교인들도 전도 현장에 투입돼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펜윅은 전도자들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신앙을 격려했고 가는 곳마다 사경회를 개최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집회가 끝나면 참석자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해 원산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단 활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펜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교에 힘썼다. 복음 전파를 향해 기관차처럼 달려온 그는 원산의 자택에서 72세의 나이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말콤 펜윅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래 46년간 선교하며 어떤 교파에도 의지하지 않고 한국인 사역자와 함께 초기 한국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 2025.01.31 / 박찬웅 기자

    주일설교 요약본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하라
  •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야훼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야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느헤미야 8장 8~10절) 하나님의 말씀 깨달아 기쁨과 감사의 삶 살며 날마다 주님 은혜 누리고 이웃 사랑 실천해야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넘어질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죄에서 돌이킬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품어주시고 복된 삶으로 이끄십니다. 유다 백성이 우상숭배로 심판받았으나 하나님은 회개한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에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우리도 유다 백성처럼 무너진 신앙의 성벽을 다시 세우기를 소망합니다. 1. 말씀의 은혜 성벽 재건을 마친 유다 백성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야훼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야훼께 경배하니라”(느 8:6).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되고 그 뜻이 해석되어 백성에게 전달되자 유다 백성은 선포된 말씀의 뜻을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느 8:8~9).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죄와 연약함이 드러나고 잃어버렸던 하나님 사랑에 대한 감동이 다시 그들 마음에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말씀의 은혜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말씀의 은혜가 임하면 회개의 눈물이 흐르고 감사의 눈물도 함께 회복됩니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의 눈에서는 주님을 향한 눈물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눈물이 메마르니 기쁨과 감사가 사라지고 마음에는 원망과 불평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은혜로 회개와 감사의 눈물을 회복하고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그 첫사랑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시길 소망합니다(계 2:4).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사랑의 언어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동시에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찔러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주의 말씀은 우리 발에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며, 순금보다 사모할 만하고 꿀보다 더 달콤합니다(시 119:103, 105; 시19:10). 그러므로 무너진 마음의 성벽을 다시 세우듯이 인생의 길잡이인 말씀 앞에서 다시 일어나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2. 나눔의 은혜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말씀 앞에서 울던 백성들에게 근심을 거두고 살진 것을 먹으며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권면했습니다. 성벽 공사를 하느라 백성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지쳤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야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 8:10). 말씀의 은혜를 깨달은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가 음식을 먹고 이웃과 나누며 큰 기쁨을 누렸습니다(느 8:12). 하나님의 은혜는 나눌 때 더욱 깊어집니다. 세상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가지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가지면 가질수록 탐욕은 커집니다. 그러나 탐욕의 유혹은 나눔을 실천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부자는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는 나눔의 공동체였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4~46). 그들은 한마음과 한뜻으로 아낌없이 나누었기에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나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사람이 없었습니다(행 4:32, 34~35).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큰 칭송을 받았고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행 2:47). 오늘 우리 교회도 나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사회적 약자를 섬기고 우리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야 합니다. 사랑은 나눌 때 더욱 커지고 붙들고만 있으면 오히려 불안한 마음만 더욱 커질 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베풀고 나누는 은혜가 넘쳐흐르기를 소망합니다. 3. 기쁨 충만의 은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기뻐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근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임을 기억하라고 말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야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 8:10).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가 주는 기쁨이 우리의 힘이며 능력이기에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 주님을 찬양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온 땅이여 야훼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야훼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1~2). 교회 오기 전에 우리의 마음이 무겁고 처져 있다가도 주님을 예배하는 순간 다시 힘이 솟고 기쁨이 충만해져 모든 어려움을 이기며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내며 “항상 기뻐하라”라고 말했습니다(살전 5:16). 바울의 이 말씀은 명령형입니다. 기쁨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순종해야 할 명령입니다. 속상해도 기뻐하고 답답해도 기뻐하고 우울해도 기뻐하고 마음에 여러 가지 고통과 괴로움이 있어도 기뻐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면 그 기쁨이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다 물리치고 넘치는 감사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기쁨과 감사로 하루를 채우며 그 기쁨을 이웃에게 나누고 어려운 사람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우리도 받은 은혜를 마음에 새기며 기쁨과 넘치는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기뻐하고 서로 나누며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 기쁨 충만의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말씀의 은혜를 깨닫고 주님이 주신 첫사랑을 회복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1.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환경을 초월한 감사
  •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야훼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하박국 3장 17~19절) 절망에서 희망을 노래하며 감사의 고백을 드릴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시온의 대로 열어주셔 일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나 예상치 못한 절망의 순간을 마주합니다. 사업의 실패, 갑작스러운 자녀의 일탈, 질병과 깊은 마음의 고통 등 감당하기 어려운 염려와 근심이 우리의 삶을 뒤흔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도 우리는 환경을 뛰어넘어 감사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 절망의 환경 하박국 선지자가 하박국서를 기록하던 당시 유다 왕국은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멸망 직전이었습니다. 정치와 사회는 흔들리고 도덕은 무너졌으며 종교는 타락했고 경제까지 침체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죄악 가운데 타락한 유다를 바벨론을 통해 징계하실 것을 알고 앞으로 유다가 맞게 될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하나님의 심판 예고에 하박국 선지자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썩이는 것이 내 뼈에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 3:16). 이방 민족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 노예처럼 살아가게 될 백성의 미래를 보며 그는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절망의 문제들이 다가옵니다. 그중 가장 큰 절망은 마음의 절망입니다. 마음의 절망은 몸의 질병으로 이어지고 결국 환경적인 절망을 불러옵니다. 성경은 무엇보다 마음을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절망의 때일수록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은 인간적으로 보면 완전한 절망이었습니다(합 3:17).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는 식량의 주재료였으며 양의 털로 옷을 만들고 소는 밭을 갈며 또한 제사에 사용되는 중요한 제물이었습니다. 이것들이 모두 없다는 것은 삶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터전을 다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 상황을 “못하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라는 반복되는 부정적 표현 여섯 번을 통해 강조합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이런 깊은 절망 속에서도 탄식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며 희망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모두 잃고 잿더미 가운데 앉아 있는 듯한 절망을 마주할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2. 절대 감사의 근거 하박국 선지자가 절망의 환경 속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희망을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야훼 하나님입니다. “나는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8). 우리 역시 어떤 절망 앞에서도 절대 희망의 근원 되시는 주님이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시기에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시 18:1). 세상과 환경, 사람을 바라보면 우리는 결국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 완전한 사람이 없기에 사람에게서는 온전한 만족을 얻을 수 없고 우리 자신을 바라봐도 낙심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당한 때의 구원자시여”라고 불렀고(렘 14:8), 시편 기자도 “야훼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라고 노래했습니다. 절대 감사의 신앙은 절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절망에 사로잡혀 과거에 붙잡혀 있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꿈꾸는 사람, 믿음의 사람, 감사의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기적을 주십니다. 3. 감사의 기적 하박국 선지자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힘과 능력이 되시며 환난을 이길 힘을 주시는 분임을 고백했습니다. “주 야훼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9). 사슴은 험한 산악에서도 민첩하게 달리고 맹수가 쫓아와도 능히 맹수를 피하며 산을 뛰어다니는 자유를 누립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함께하시면 우리도 사슴처럼 절망의 산을 뛰어넘으며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에서 기뻐할 이유가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라도 주님이 함께하시면 우리는 언제나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절망의 밤을 만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업이 어려워지고,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육신이 병들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을 지나더라도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의 힘 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주님은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고 회복시키며 구원하여 승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한 번, 두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 주님의 손을 붙잡고 믿음으로 전진 또 전진해야 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바벨론을 멸망시키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나아가 그 민족 가운데 메시야가 탄생하게 하셔서 온 세계가 주목하는 귀한 나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고난으로 끝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고난 뒤에는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영광의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신앙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 앞에 시온의 대로를 열어주십니다. 원망과 불평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문제보다 크신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넘치도록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환경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일평생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흔들림 없이 주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1.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절대 감사의 삶
  •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편 23편 1~3절) 오늘은 한 해 동안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리는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절기는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낯선 땅의 고난을 이겨내고 맞이한 첫 수확을 하나님께 감사로 올려드린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한 해 동안 함께해주신 주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1. 목자 되신 하나님 시편 23편은 다윗이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하나님께 드린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는 한평생 수많은 고비와 위험 속에서 자신을 지켜주신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양들의 삶은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좋은 목자를 만나면 양은 행복하고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풍성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나쁜 목자를 만나면 상처와 결핍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원수 마귀는 바로 그런 나쁜 목자와 같습니다.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일평생 주님께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우리를 돌보십니다. 양과 인간은 공통점이 많다고 합니다. 두려움, 소심함, 완고함, 어리석음, 군중심리, 잘못된 습관 등 닮은 점이 많습니다. 게다가 양은 고도 근시라 약 50~ 60cm밖에 보지 못해 목자가 인도하는 대로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부족하고 연약하고 문제투성이인 우리를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주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공로 없는 우리에게 “너는 내 것이라”라고 말씀하시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시고 목자가 되어 주셔서 우리의 일생을 붙들고 인도해 주십니다. 2. 우리의 인도자 되시는 하나님 목자가 되신 하나님은 우리를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이끄시며 은혜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다윗은 수많은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시는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의지했습니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시 31:3).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갈 때도 주님은 우리의 참 목자가 되셔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시 78:52).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그 사랑의 품에 품으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하나님은 절망과 고통 중에 있는 우리를 일으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우리가 인생의 문제로 낙심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세워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열 번 넘어졌을지라도 열한 번 일으켜 주시고 의의 길로, 은혜의 길로, 복된 길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삶의 모든 순간을 세심히 살피시고 지친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인도하심 앞에, 날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우리의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공급자가 되십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리게 됩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우리가 사람과 환경, 혹은 나 자신을 바라보면 늘 부족한 것이 먼저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이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필요와 문제를 아시는 주님이 우리 삶을 넘치게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10). 목자가 양을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복된 말씀으로 우리를 먹이시고 살리시며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또한 성령의 생수가 흘러넘치는 물가로 인도하여 주셔서 성령충만함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너희 성도들아 야훼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야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9~10).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실 뿐만 아니라,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다윗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 10여 년 동안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산과 들에서 새우잠을 자며 이곳저곳을 쫓겨 다녔으며, 왕이 된 후에도 크고 작은 전쟁을 계속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마다 주님이 다윗을 보호하시고 함께하시며 오히려 축복의 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갈 때 복되고 부족함이 없는 은혜의 삶을 누리게 됩니다. 한평생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절대 감사의 신앙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우리의 목자 되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늘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며 받은 은혜를 강물처럼 널리 흘려보내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절대 감사의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11.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 인물
    (113) 사랑의 사도, 요한
  • 요한복음 등 저서 통해 복음 전파 예수님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돼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이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이며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기록했고 신약성경의 유일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썼다.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에서 어부로 지내던 중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다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바로 예수님께 달려가 제자가 됐다. 예수님을 따른 이 두 형제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열 두 제자에 속했지만 감정이 격발할 때가 많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소란을 뜻하는 의미의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실 정도였다. 요한은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었지만 어디든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조급하고 폭력적이던 성격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변화됐다. 그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했을 때에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따라갔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 중에 유일하게 그곳을 지킨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맨 먼저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의탁하셨고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극진히 모셨다. 초대교회 설립의 핵심 인물이었던 요한은 사도 바울에게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라고 칭함을 받기도 했다. 노년을 에베소에서 설교와 저술활동으로 보내던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에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밧모섬에 유배됐다. 그곳에서 신약의 마지막 복음서인 요한계시록을 저술했다. 사면되어 다시 에베소로 귀환한 그는 교회들을 지도하고 성경을 기록하며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 자기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설교할 때마다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늘 예수 그리스도였다. 우리 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강조하며 불신자와 믿는 자 모두를 아우르는 설교를 했다. 그가 남긴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에 가장 강조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전도지나 교회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듣는 이 성경 구절 안에 사도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히 담겨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 2024.11.29 / 이미나 기자

    (112) 한나
  • ‘간절한 기도의 여인’ 표상 문제 앞에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얻게 돼 한나는 ‘기도의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괴로움을 극복할 만한 힘과 능력이 없을 때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 한나를 통해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에브라임 산지 여로암의 아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 두 아내가 있었다. 소실인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이름의 뜻인 ‘은총’과는 달리 자녀가 없었다. 매년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한나는 고통 중에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야훼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0~11). 한나가 주께 드린 기도는 처절한 절규였으며 가슴에 멍이 드는 탄식의 간구였다. 그런 한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하시고 한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성경 사무엘상 2장 1~10절은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격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야훼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먼저 자녀를 두어 그동안 한나를 업신여겼던 브닌나의 교만을 꺾어주시며 가정의 질서 또한 바로 세워주셨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삼상 2:5).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삼상 2:9). 한나의 고백적 탄원과 언약의 서원을 보면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은총에 의해 태어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도 얻게 된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헤아리신다는 것이다. 한나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응답을 얻을 때까지 기도했다. 또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 엘리 제사장이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의 절박하고 애끓는 기도를 드렸다. 기도 없이는 결코 응답을 얻을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역전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 신다. 자녀가 없던 한나는 브닌나의 업신여김을 참고 견뎌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나가 간구할 때 ‘은총’을 허락하셨고 고난의 주인공에서 영광의 주인공으로 그 삶을 변화시켜주셨다. 셋째, 한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깊은 통찰력과 겸손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기까지 숱한 고통을 겪었지만 사무엘을 낳은 후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 자녀가 내 소유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다(시 127:3). 이 땅에 사는 동안 청지기 사명을 가지고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라도록 욕심을 버리고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며 한나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 2024.11.01 / 오정선 기자

    (111) 안디바
  •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주님을 섬기는 일에 타협 없던 안디바 한 사람의 순교가 지역 변화시켜 소아시아 버가모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로 유명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갖은 이유로 타협하고 우상숭배를 할 때 단 한 사람, 안디바는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그는 뛰어난 석공이었지만 로마 황제의 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놋 가마 위에서 순교했다. 안디바는 로마 제국의 명령을 거절한 대가로 철판 위에 산 채로 구워져 순교를 당했지만 버가모교회 부흥의 씨앗이 됐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높여주셨다. 안디바라는 이름도 ‘모든 사람을 반대하는 자’라는 뜻이다. 안디바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로마 관리들에게 당당했다. 그는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예수 외에는 내가 절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를 통해 책망받던 초대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교회가 변화됐다.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지나온 삶을 끊지 못한 채 죄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던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은 안디바의 순교를 보고 180도 달라졌다.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고 흔들리던 이들이 우상숭배로 만연한 지역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버가모교회가 있는 지역은 해발 300m의 높은 지역에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탄의 권좌’라고 불리는 무려 12m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과 로마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라틴 교부였던 터툴리안의 『순교자에 대해서』라는 책을 보면 안디바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시 버가모교회의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은 할례, 음식에 대한 규제,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또 다른 부류는 이방인이지만 기독교인이 된 헬라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거리낌 없이 해 왔던 우상숭배, 성적인 문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한 삶을 지켜가는 것에서 갈등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순종한 안디바의 신실한 믿음은 신앙이 흔들리던 많은 크리스천의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생계를 위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난과 박해가 두려워 주님을 의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면 고통 속에서도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의지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를 기억하자.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 2024.10.04 / 박찬웅 기자

    예수님의 팔복
    ⑧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 의를 위한 고난은 복된 길 산상수훈은 신앙생활의 핵심 천국 소망 갖고 믿음 지켜야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는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제자들과 무리를 향해 가르치신 말씀이다. 기독교 윤리와 신앙생활의 핵심을 담고 있는 예수님의 설교 중 가장 위대한 가르침이라고도 불린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마지막 팔복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가장 도전적인 말씀이자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대한 기준을 제시한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는 말씀은 고난이라는 현실 너머에 있는 하늘의 상과 위로를 선포한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의’란 윤리적 정의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뜻한다. 인간의 행위로 얻는 의로움이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 의다. 그러므로 의로운 삶이란 곧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어둠을 드러내는 의와 진리는 세상의 가치와 충돌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라고 격려한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은 이렇게 덧붙인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이러한 복은 단지 위로의 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이라는 증거다. 예수님 때문에 조롱받고 오해받는 그 길은 하나님이 그 위에 함께하신다는 확증이 된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씀한다. 세상에 빛과 소금되신 의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많은 핍박을 받으셨다. 빛은 어둠을 불편하게 하고, 소금은 부패를 막아 거부감을 일으킨다. 예수를 따르는 삶은 세상과 갈등하게 마련이고 박해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자연스럽게 따르는 열매인 것이다. 팔복의 시작과 끝은 모두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는 동일한 복으로 연결된다. 이는 팔복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과 궁극적 소망을 드러내는 말씀임을 보여준다. 믿음의 길에는 고난이 따르지만 가장 복된 길이다. 예수님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살다가 핍박을 받는 자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는 이미 천국의 시민이며 하늘의 상이 예비 됐기 때문이다. 의로운 삶은 하늘의 상급으로 이어지며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때 고난이 오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자. 그 길 끝에는 주님의 상급과 위로가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
  • 2025.07.31 / 이미나 기자

    ⑦ 화평하게 하는 자
  • 피스메이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 평화의 왕 예수님 세상에 전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는 복 누려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복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 소개하는 팔복에서 일곱 번째로 소개된 ‘화평하게 하는 자’는 헬라어 ‘에이레네포이오스’로 ‘에이레네’(평화)와 ‘포이에오’(만들다)의 합성어이다. ‘팔복’에서 화평은 성경의 평화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갈등을 중재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뜻한다. 일명 ‘피스메이커’(Peace Maker)이다. 성경이 말하는 피스메이커는 혼자 평화롭게 살면서 평화의 열매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과 공동체를 화해시키는 어려운 일에 자신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이다. 대표적인 피스메이커로는 예수님이 있다. 그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처한 인류의 ‘피스메이커’로 오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됐다(롬 5:1). 독단과 분열이 가득했던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화평의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군림하고 누리는 삶을 살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셨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갈등과 분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는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삶을 본받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때 이 세상에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는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화평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전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점이다(사 52:7).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평화가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전파하는 것이 곧 평화를 이루는 핵심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중세 평화의 사도인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우리도 세상의 화해자가 되어야 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신앙을, 거짓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 2025.07.04 / 금지환 기자

    ⑥ 마음이 청결한 자
  • 천국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 볼 수 있어 예수님의 보혈 의지해 마음 지켜 나아가야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한 이영훈 목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정결해야 했다. 흠이 있는 것은 드릴 수 없었다”면서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흠이 없는 모습으로 나아와야 한다. 우리는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기 때문에 예수의 보혈로 우리가 정결함을 입고 변화 받아야한다. 주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가 정결한 모습으로 흠이 없는 모습으로 드려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나님은 구만리장천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닌 무소부재하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고 율법적으로 온전하고 정결해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 자세만큼은 순전하고 순수할 수 있다. 이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을 청결히 하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 음란의 죄, 누추함의 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회개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마음을 청결히 하고 매 순간 성령님께 마음을 드리고 정결케 해주시기를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조용기 목사는 마음 상태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르게 보인다고 설명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내 주먹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해를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달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별들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꽃 한 포기를 봐도 ‘아! 하나님이 묘하게 지으셨구나’ 사람들을 봐도 ‘하나님이 얼마나 이쁘고 아름답게 사람을 만드셨느냐’라고 말한다”고 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밉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밉게 보인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미운 가운데도 모든 아름다운 것이 눈에 보인다. 마음이 나의 환경을 바라보게 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전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스스로 마음을 잘 지켜서 하나님만 바라볼 때 천국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이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다.
  • 2025.05.30 / 복순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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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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