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담임목사 주일설교
조용기 원로목사 주일설교
오늘의 묵상
10월 8일(토) - 승리하는 삶
  • ◎ 말씀 : 민 31:48~54 ◎ 찬송 : 새 351장(통 389장)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먼저 이스라엘을 타락시켜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했던 미디안과의 전쟁을 치릅니다. 미디안의 다섯 왕이 죽고 이스라엘이 취한 전리품의 목록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 전쟁은 매우 큰 규모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 후 지휘관들이 군인들을 계수하여 모세에게 보고한 결과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 큰 전쟁을 치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허락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도 매일 전쟁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 매순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오니 모든 문제 가운데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2.09.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월 7일(금) - 온유한 권면
  • ◎ 말씀 : 갈 6:1 ◎ 찬송 : 새 304장(통 404장) 우리는 가정, 학교, 직장 등에서 관계로 인한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믿음과 지혜가 부족하여 서툰 행동과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당황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이 사람에게 권면을 좀 해줘야겠다’라는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런데 권면하기 이전에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 안에 그 사람과 상황에 대해 먼저 이해하고 그 사람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는지 헤아려봐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라고 말씀합니다. 권면에 앞서 상대방을 한 번 더 생각하며,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온유함으로 권면할 때 상대방도 권면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웃을 대할 때 언제나 온유한 마음을 가지게 하옵소서. 먼저 나를 돌아보고 이웃의 상황을 이해하며 말하고 행동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2.09.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월 6일(목) - 감사로 순종하는 삶
  • ◎ 말씀 : 출 34:23~24 ◎ 찬송 : 새 382장(통 432장)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안식일, 유월절, 무교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등 7대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절기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광야 길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성도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때를 따라 도우시고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은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이요,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가 넘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2.09.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 인물
    (87)아볼로
  • 지성과 인성 두루 갖춘 위대한 전도자
    바울과 동역하며 고린도교회 부흥 이끌어 아볼로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학자이자 초대교회 전도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초대 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설교가로 인정받을 만큼 달변가였고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사용했다. 그는 일찍이 침례 요한으로부터 구약성서에 대해 배웠는데 얼마나 총명했는지 성경은 그를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하며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행 18:24~25). 하지만 그는 구약성경에 능통했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불완전했었다(행 18:25). 그가 전한 메시지에는 인류의 구원자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복음이 없어 ‘팥소 없는 찐빵’과 같았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나오는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완전했던 그의 복음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면서 완벽해졌다. 이들은 에베소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에 대해 더 정확하게 알려줬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이 구원과 영생, 참된 자유를 얻게 된 것을 뜻한다. 아볼로는 대학자이자 구약성경에 능통한 자였음에도 천막 제조업자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경험한 복음을 귀담아 들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완전하게 얻었다. 이는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았다는 뜻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자 하는 열정이 남들보다 더 갈급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후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도움으로 에게 해를 건너 고린도를 수도로 하고 있는 그리스 남부 지역인 아가야로 떠났다. 그는 아가야에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유대인 앞에서 힘 있게 증거했다(행 18:27~28). 그의 메시지는 많은 유대인들을 변화시켰다. 아볼로는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교회에 가서도 사역을 하게 됐는데 이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의 설교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볼로는 타고난 언변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이러한 존경은 이내 교회를 분열시키는 추종세력을 낳게 됐다. 크게 아볼로와 바울파로 나뉘었고 게바파, 그리스도파까지 형성됐다. 이 소식을 접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전하며 자신은 밭에 씨앗을 심은 사람으로, 아볼로는 그 씨앗에 물을 주는 사람으로 비유하며 각각의 달란트가 다름을 알려주고 이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완곡하게 권면했다(고전 3:6). 교회 내 다툼이 생길 때 잠시 자리를 떠났던 아볼로는 바울의 편지로 모든 것이 일단락 된 후에야 다시 고린도교회로 돌아와 본인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했다. 지성과 인성을 두루 갖춘 아볼로의 행실을 살펴볼수록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아볼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격과 지식의 정도가 깊어질수록 점점 더 겸손해지고 복음의 열정을 회복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큰 교훈을 주고 있다.
  • 2022.09.30 / 금지환 기자

    (86)미리암
  • 일순간 교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산 여인
    모세는 애굽 왕 바로에게서 박해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내고 이들을 광야에서 40년 동안 인도한 하나님이 선택한 인물이다. 이런 모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아 수많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왔다. 그의 출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어머니보다 누나인 ‘미리암’이지 않을까 싶다. 미리암은 남동생을 살리고자 역청과 진을 칠한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보았다. 동생을 강에 떠밀고 혹시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가지는 않을지, 다른 것들의 먹잇감이 되지는 않는지 먼발치에서 노심초사 지켜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떨림의 순간에도 미리암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동생을 구원할 것을 확신하고 바라봤다. 때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와 모세를 거두게 되고 젖을 먹일 수 있는 유모를 찾으니 미리암이 지혜롭게 유모를 구해오겠다고 나선다(출 2:3~7).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도 눈에 띈 활약을 한 여성이 바로 미리암이다. 그녀는 출애굽 당시 바짝 추격해 오는 애굽의 파라오의 말과 병거와 마병을 홍해에서 수장시킨 하나님을 기리며 승전가도 지어 불렀다.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그들에게 화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야훼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더라”(출 15:20~21). 그런데 애굽을 탈출한 후 미리암은 사뭇 달라진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아론과 함께 모세를 비방하며 심지어 “야훼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 12:1)라며 모세의 영적 지도력에 대항한다. 이런 미리암에게 야훼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벌을 내리신다.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있게 된다(민 12:9~10, 15). 아론이 모세에게 용서를 빌며 “우리가 어리석은 일을 하여 죄를 지었으나 청하건대 그 벌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민 12:11) 하니 모세가 야훼께 부르짖어 고쳐 달라 기도해 고침을 받았다. 미리암은 동생을 살리고 최측근으로 있을 만큼 지혜로운 여성이었으나 교만에 빠져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고 비방을 일삼은 여인이 되었다. 그를 보면 잠언 16장 18절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는 훈계 말씀이 적절하다. 겸손함이 없는 지혜는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칠 뿐이다. 또한 미리암이 이레 동안 갇힘으로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하지 못하고 광야에 진을 치고 머무르게 된 것처럼 자신의 부족함과 문제를 보지 못하고 타인의 잘못만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발전과 성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김주영 기자
  • 2022.09.02 / 김주영 기자

    (85)실라
  • 바울과 함께 이방인 선교에 앞장선 지도자 실라는 초기 교회의 통합과 선교를 이끈 지도자로 기록되어 있다.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의 초기 지도자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진 몇 안 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다. 사도행전에서 불린 ‘실라’라는 이름은 유대식 이름인데 바울서신과 베드로서신에서는 라틴식 이름인 실루아노로 불린다.(고후 1:19; 살전 1:1; 살후 1:1; 벧전 5:12)그는 바울의 선교 동역자요, 베드로가 베드로전서를 기록할 때 실제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며(벧전 5:12), 선지자 중 하나였다(행 15:32). 실라는 성경에서 사도행전 15장에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함께 처음 등장한다. 그는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예루살렘 공의회의 편지를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말로도 보고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행 15:27), 중요 서신을 전달할 정도로 유다와 실라에 대한 예루살렘교회의 신임이 두텁고 교회 내에서 상당한 신분의 위치에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실라는 바울의 선교 동역자로 활동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체류했을 때 그곳에서 바나바의 조카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심히 다투고 결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행 15:37~39). 당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해 선교여행의 동역자로 삼았다. 그들은 함께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으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히 했다(행 15:40,41). 그 선교여행 중에 그가 바울과 함께 빌립보 감옥에 갇히는 일이 발생했다. 그들이 빌립보에서 선교 사역을 하던 중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준 것이 빌미가 되어 로마 사람들의 풍속을 더럽히는 사람들이라 하여 고소를 당했다. 결국 체포되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했고 죄수들은 이를 들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사람들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자다 깬 간수가 죄수들이 모두 도망했을 것이라 생각하여 칼로 자결하려자 그때 바울이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몸을 상하지 말라고 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려 그는 물론이고 그의 가족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된다.(행 16:30~32) 이후 바울과 실라가 로마 시민권자인 것을 안 그곳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그 성에서 떠나달라고 청한다. 그들은 신자인 루디아의 집에 들러 형제들을 격려하고 데살로니가로 내려가서 많은 복음의 열매를 거두고 베뢰아에서도 전도했다. 실라는 디모데와 함께 그곳에 머물러 남은 일을 하고 바울은 아덴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는 실라와 디모데도 그리로 가서 합류했다. 디모데와 마찬가지로 실라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보낼 때 함께 그 서신을 보낸 사람으로 되어 있다(살전 1:1; 살후 1:1) 실라가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나타낸 곳은 마케도니아의 고린도였다(행 18:5). 그곳에서 실라는 바울과 함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후 1:19). 실라는 초기 교회의 주요 지도자인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와 거의 동급인 자격으로 이방인 선교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 2022.08.04 / 복순희 기자

    선교열전
    (12)이기풍 선교사
  • 제주도 복음화에 헌신한 한국 최초의 선교사 13년간 제주 전 지역에 30개 교회 설립 이기풍 선교사는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 7인 중 1명이자 첫 공식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1865년 11월 21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이기풍 선교사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6세 때 유교의 기본 경전인 사서삼경을 외웠고 12세에는 붓글씨로 백일장 장원에 뽑힐 정도로 특출났다. 이기풍 선교사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이기풍 선교사는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에게 돌을 던져 턱을 크게 다치게 했는데 그가 훗날 스승인 된 모펫 선교사였다. 이기풍 선교사는 소안론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모펫 선교사에게 용서를 구했고 그가 세운 조선 최초의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서경조, 길선주, 방기창, 한석진 등과 함께 신학을 공부했다. 1907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같은 날 동기인 길선주 목사의 집례로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됐다. 이것이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 파송이었다. 1908년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 선교사는 조랑말을 타고 전도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그가 복음을 전할 때면 도민들은 그에게 굴욕을 주었고 집단 구타까지 행했다.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을 잊지 않았다. 그런 그의 선교 사역에 물꼬가 트이는 사건이 발생한다. 제주도에 큰 홍수가 나서 주민들이 떠내려갈 때 이기풍 선교사가 물속으로 뛰어 들어 주민 5명을 구조한 것이다. 또한 구렁이 신에게 제물로 바쳐진 소녀를 구하며 기독교인은 사람을 살리는 존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도민들에게 큰 신뢰를 얻게 됐고 그가 세운 제주 성안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 지역 복음화를 위해 순회 전도사역을 이어갔고 금성·조천·모슬포·한림·용수 등의 지역에 교회를 설립했다. 중간에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내륙으로 돌아왔지만 이내 다시 돌아가 13년 동안(1909~1915, 1927~1932) 제주도에서 사역하며 3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제주도 사역을 마무리하고 순천에서 사역하던 그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발하다 미제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1938년 체포됐다. 순천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그는 1942년 6월 20일 77세의 나이로 소천 받았다. 제주시 조천읍에는 제주도 복음화에 한 획을 그은 이기풍 선교사를 기리기 위한 '이기풍선교기념관'이 건립됐다. 현재는 코로나19의 여파로 운영이 중단되어 모든 자료는 제주 모슬포교회 '이기풍 기념관'으로 이관됐다.
  • 2022.04.24 / 금지환 기자

    (11)에릭 리들
  • “주일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날입니다” 영화 ‘불의 전차’ 통해 그의 일생 알려져 올림픽 금메달 영광 버리고 선교사 결단 “저는 주일에는 뛰지 않습니다.” 1924년 8회 파리올림픽 육상 100m 금메달 후보였던 영국의 한 선수가 한 말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중국 선교사인 그의 이름은 에릭 리들이다. 에릭은 아버지 제임스 리들 선교사의 아들로 1902년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가 됐을 때 처음으로 참가한 교내 육상대회에서 100m 1등, 200m 2등을 하며 육상선수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에든버러 대학으로 진학해 교내는 물론 영국이 자랑하는 최우수 육상선수가 됐고 마침내 올림픽 단거리 육상선수로 발탁됐다. 에릭은 올림픽 육상 100m 경기가 평일이 아닌 주일에 열려 경기를 포기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주일은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는 날이라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에릭은 평일에 열린 200m와 400m 경기에 출전해 예상을 뒤엎고 동메달과 금메달을 획득했다. 특히 400m 경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처음 200m는 제 힘으로 최선을 다해 뛰었고, 나머지 200m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더 힘차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라는 말을 남겨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올림픽 이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명성이 높아갈 때쯤 에릭 리들은 사람들에게 중국 선교사가 될 것을 선포했다. 이전부터 아버지와 형을 이어 중국 선교사가 되고 싶었던 에릭은 이듬해 23세의 젊은 나이로 중국 선교사로 파송됐다. 에릭 선교사는 12년간 톈진 중영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이후 7년 동안 자신이 태어난 샤오창 지역에서 농촌 사역을 펼쳤다. 그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사역지를 옮긴 이유는 선교사로 활동하던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과 일본군의 침략으로 수많은 농촌 주민들이 전쟁의 희생양이 됐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에릭 선교사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일하며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마을을 방문해 전도 집회를 열었다. 또한 외국인 선교 활동이 제한될 것을 예상하고 제자훈련과 교인양육 지침서 등을 직접 저술하며 현지인 사역자를 세우기 위한 방안도 모색했다. 1939년 현지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던 에릭 선교사는 뜻하지 않게 중국에 억류됐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중국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면서 외국인들을 수용소에 억류했다. 이때 에릭 리들은 1만 8000여 명의 서양인들이 모인 수용소를 제2의 사역지로 삼고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일에 힘썼다.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분쟁을 해결하는 대표로 활동하며 사람들을 섬기는 일에 매진했다. 에릭은 1945년 2월 뇌출혈로 수용소에서 43세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훗날 에릭 리들의 일생을 담은 영화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가 제작돼, 이를 계기로 에릭 리들의 일생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 2022.03.27 / 금지환 기자

    (10)김윤식 선교사
  • 한국인 최초로 중국에 파송된 의료 선교사 현지인 및 선교사 가족 건강 돌보며 자비량 선교 관청에 의료 지원하며 수감자 전도에도 앞장서 김윤식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중국 복음화를 위해 활동했다. 그는 의료선교의 초시였던 알렌 선교사처럼 서양의술을 활용해 미전도종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1891년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숭실학교를 거쳐 세브란스전문의학교를 졸업했다. 1917년 학교 공부를 마친 후 유학을 계획했지만 당시 대구제일교회 홍승한 목사와 아버지의 권유로 중국 의료선교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됐다. 1918년 대한민국 개신교는 의사로 활동하던 그를 중국 라이양으로 파송했다. 김윤식 선교사의 파송은 알렌 선교사가 내한한지 34년 만에 개신교 의료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7세의 나이로 중국 라이양에 도착한 김윤식 선교사는 제일 먼저 선교사 가족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김 선교사는 질병에 대처할 마땅한 방도가 없었던 선교사와 가족들의 건강을 돌보며 그들의 선교활동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현지인도 함께 진료했고 그들에게 신앙서적을 나눠주며 전도 활동에도 매진했다. 병약했던 방효원 선교사의 아내 계은승 사모는 김 선교사로부터 아홉 번이나 수술을 받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당시 한국교회는 의료선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에 그를 목사나 선교사처럼 지원하지 않았다. 김윤식 선교사는 오직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선교를 자비량으로 해결했다. 선교지에 도착한 그해 12월, 개인 비용으로 셋집을 얻어 ‘계림의원’을 개업했다. 계림의원은 당시 라이양에서 서양의학을 시술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서양선교사 가족들은 물론 현지 교회와 학교 구성원 모두 이 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의료선교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김윤식 선교사는 많은 헌신과 희생을 감내해야했다. 활동 초기에는 중국인들에게 아편장사로 오인 받았고 선교지에서 활동한지 4년 만에 자녀를 둘씩이나 천국으로 보내야했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라이양에서 청도로 이주한 김윤식 선교사는 ‘중앙의원’을 개원해 의료선교를 이어갔다. 그는 서양인과 현지인 구분 없이 모두에게 친절히 진료하며 지역에서 큰 존경을 받았고 관청에서도 촉탁을 받아 수감자들의 치료와 위생을 담당했다. 이로 인해 조선예수교장로회는 ‘감옥 전도 사업’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은 그가 중국 땅을 밟은 후 거둔 의료선교의 결실이었다. 김 선교사는 1940년대 들어서 광복군 군자금에 관계된 것이 드러나 체포됐다. 이후 영구 출국을 당하면서 그는 더 이상 의료선교를 할 수 없게 됐다. 선교지에서는 의료선교사로, 고국에서는 장로이자 의사로 활동한 그는 위암으로 투병하다 1958년 8월 향년 6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금지환 기자
  • 2021.11.28 / 금지환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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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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