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담임목사 주일설교
조용기 원로목사 주일설교
오늘의 묵상
10월 26일(토) - 복된 삶
  • ◎ 말씀 : 렘 17:5~8 ◎ 찬송 : 539장(통 483장) 하나님은 두 종류의 사람을 언급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고 자기의 힘을 믿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죽고 나면 썩어 없어질 혈과 육을 가진 존재이기에 무력한 사람의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저주받을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삶은 마치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무익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영원함을 누리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복된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람을 의지하기보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복된 인생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10.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월 25일(금) - 예레미야의 중보기도
  • ◎ 말씀 : 렘 14:20~21 ◎ 찬송 : 452장(통 505장) 하나님이 악해질 대로 악해진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탄식하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신이 속한 곳의 중보자로 세우셨습니다.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며 간절히 기도했던 예레미야처럼 우리도 사랑과 긍휼함을 가지고 중보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함께 기도할 때 나라와 사회와 개인이 회복되고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중보자인 것을 기억하며 그 역할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10.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0월 24일(목) -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진 복음
  • ◎ 말씀 : 갈 3:13~14 ◎ 찬송 : 295장(통 417장) 우상을 숭배하던 집안에 태어난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모든 사람이 누리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중보자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중보자로 오셔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죄인들이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감당하시고 저주의 십자가를 은혜의 상징으로 바꾸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가 하나님 은혜로 아브라함의 복을 거저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로서 주변에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귀한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전달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은혜로 구원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을 주변에 전할 기회와 용기를 허락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10.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 인물
    (111) 안디바
  •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주님을 섬기는 일에 타협 없던 안디바 한 사람의 순교가 지역 변화시켜 소아시아 버가모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로 유명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갖은 이유로 타협하고 우상숭배를 할 때 단 한 사람, 안디바는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그는 뛰어난 석공이었지만 로마 황제의 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놋 가마 위에서 순교했다. 안디바는 로마 제국의 명령을 거절한 대가로 철판 위에 산 채로 구워져 순교를 당했지만 버가모교회 부흥의 씨앗이 됐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높여주셨다. 안디바라는 이름도 ‘모든 사람을 반대하는 자’라는 뜻이다. 안디바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로마 관리들에게 당당했다. 그는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예수 외에는 내가 절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를 통해 책망받던 초대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교회가 변화됐다.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지나온 삶을 끊지 못한 채 죄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던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은 안디바의 순교를 보고 180도 달라졌다.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고 흔들리던 이들이 우상숭배로 만연한 지역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버가모교회가 있는 지역은 해발 300m의 높은 지역에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탄의 권좌’라고 불리는 무려 12m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과 로마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라틴 교부였던 터툴리안의 『순교자에 대해서』라는 책을 보면 안디바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시 버가모교회의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은 할례, 음식에 대한 규제,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또 다른 부류는 이방인이지만 기독교인이 된 헬라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거리낌 없이 해 왔던 우상숭배, 성적인 문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한 삶을 지켜가는 것에서 갈등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순종한 안디바의 신실한 믿음은 신앙이 흔들리던 많은 크리스천의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생계를 위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난과 박해가 두려워 주님을 의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면 고통 속에서도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의지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를 기억하자.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 2024.10.04 / 박찬웅 기자

    (110) 엘리
  • 하나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했던 제사장
    잘못된 자녀 교육으로 비극 낳아 이스라엘이 왕정 시대로 넘어가기 전 사사시대 말기에 40년을 하나님의 제사장이자 사사로 활동한 사람이 있다. 바로 엘리 제사장이다. 엘리는 사무엘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가르친 사무엘은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세운 제사장으로 유명하다. 엘리 제사장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32㎞ 지점에 위치한 실로 성소를 지키는 제사장이었다. 엘리가 처음 성경에 등장하는 곳은 사무엘상이다.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와 아내 한나는 매년 매년제와 서원제를 드리기 위해 실로에 있는 성소를 순례했다. 엘나가에게는 브닌나와 한나라는 두 아내가 있었는데 한나는 자녀가 없었지만 엘나가의 사랑을 더 받았다. 그래서 늘 브닌나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그 해는 유독 괴롭힘이 심했는지 마음의 답답함을 토로할 곳이 없었던 한나는 성소에서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때마침 야훼 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있었던 엘리가 이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무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이는 모습이 꼭 술에 취한 모습 같았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한나는 엘리에게 그동안의 서러움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었다고 말했고 이에 엘리는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다. 이후 한나는 엘리의 축복대로 사무엘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서원했고 제사장 엘리에게 사무엘을 맡긴다. 사무엘은 엘리의 가르침에 따라 야훼를 섬기며 훌륭한 하나님의 제사장이자 사사로 성장했다. 하지만 엘리는 사무엘과 달리 자녀들을 올바른 제사장으로 가르치지 못했다.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제사장 직권을 남용했고 야훼의 제사를 멸시했다. 물론 아버지로서 엘리는 아들들을 꾸짖었다. 하지만 그들은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히려 무시하고 더한 패역을 저질렀다. 성경은 이에 대해 엘리가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나타나 말한다. “너는 나보다 네 아들들을 더 귀하게 여기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에게 바치는 고기 중에서 제일 좋은 부분을 먹어 살이 쪘도다”(쉬운성경 삼상 2:28~29). 결국 엘리는 자신의 제자인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삼상 3:14). 얼마 후 엘리의 두 아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한다. 두 자녀의 죽음과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비보를 들은 엘리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삼상 4:1~18). 40년간 사사와 제사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섬겼던 그의 공직 생활이 비참하게 끝난 것이다. 엘리가 만약 두 아들을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계했다면 그들은 올바른 선지자로 더 큰 복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나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소중히 여길 것이고,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나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쉬운성경 삼상 2:30). 엘리의 가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경외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 2024.08.30 / 금지환 기자

    (109) 실라
  • 바울, 베드로, 디모데의 신실한 동역자
    복음 증거 사역의 중요한 요소 ‘협력’ 사도행전을 펼치면 가슴을 뛰게 하는 놀라운 사건의 기록들로 가득하다. 그중 16장에는 바울이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불쌍히 여겨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줬지만 칭찬을 받기는커녕 감옥에 갇히게 된 일이 기록되어 있다. 귀신 들렸던 여종의 주인이 자신의 수입이 끊어지게 됐다며 바울과 실라를 관리들에게 끌고 갔고 동네를 요란스럽게 한다는 이상한 죄목으로 고발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옷이 찢기고 매질을 당하며 감옥에 갇혔다. 그때 바울만 끌려간 것이 아니라 동역하던 실라도 같이 감옥에 갇혔다. 억울하게 맞고 갇힌 처지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했다. 어찌나 담대히 당당하게 찬양했는지 그 소리를 감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정도였다. 찬양과 기도 소리를 하나님도 들으셨는지 갑자기 큰 지진으로 옥문이 열렸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나가지 않았다. 놀라 깬 간수가 죄수들이 모두 도망쳤을 것이라 절망해 칼로 자결하려 하자 바울은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몸을 상하지 말라”며 간수의 목숨을 살렸다. 이 일로 간수와 가족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후 바울과 실라가 로마 시민권자임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그들에게 떠나달라고 간청을 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후 빌립보교회는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사건에 앞선 15장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 체류했을 때 바나바의 조카 마가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심하게 다투고 결별하는 사건이 있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선교여행의 동역자로 실라를 택했다. 실라는 바울처럼 로마 시민권자였고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였다. 상상컨대 바울이 바나바와 안좋게 결별한 가장 힘들고 어려울 그때 실라는 바울의 손을 잡아주어 하나님의 사역을 이어가게 해준 사람이었다. 실라는 헬라파 유대인으로서 그의 로마식 이름은 ‘실루아노’이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실라’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지만 고린도후서와 베드로전서,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는 ‘실루아노’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라는 바울 뿐 아니라 초기 교회 지도자 모두의 동역자로서 활약한 흔적을 성경 곳곳에 남겼다. 실라는 베뢰아 전도에서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아덴으로 떠난 바울을 대신해 디모데와 더불어 사역하기도 했고(행 17:13∼14), 나중에는 고린도에서 바울을 다시 만나 사역을 했다.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마지막으로 실라는 더 이상 성경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교회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의 조력자로 계속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실라를 ‘신실한 형제’(벧전 5:12)로 부르고 있다. 많은 성경연구가들은 실라의 동역이 없었다면 바울의 사역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실라의 조력이 없었다면 말년의 베드로도 여러 가지로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복음 증거의 사역에 동역자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바로 실라이다.
  • 2024.08.02 / 복순희 기자

    선교 열전
    (15)로티 문(Lottie Moon) 선교사
  • 일평생 중국 복음화 위해 헌신한 선교사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일평생 수 만명의 중국인에게 찬양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한 독신 여성 선교사가 있다. 미국 남침례교에서 파송한 로티 문이다. 1840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로티 문은 어릴 적부터 침례교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로티의 본명은 샬롯 딕스 문(Charlotte Diggs Moon)이다. 미국 버지니아 알베말 출신인 로티는 18세가 되던 해에 브라더스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했다. 이후 대학에서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을 주도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갑작스런 사고로 아버지를 일찍이 여읜 로티는 당시 남녀 차별이 심각했던 시대적 배경에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고등교육까지 받아 미국 남부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여인이 됐다. 1873년 중국에서 학원 사역을 펼치고 있었던 선교사 부부를 돕기 위해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 로티는 평일에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주말에는 시골 마을을 순회하며 전도에 매진했다. 로티는 1885년 외국인이 한 명도 없고 외국인 보호 조약과 거리가 먼 지역인 핑투라는 곳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현지인 복음화에 앞장섰다. 전도를 위해서는 먼저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며 선교지에서 관계 전도를 이어갔던 그는 현지인과 같은 옷을 입고 활동하며 마을에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현지인들의 핍박이 거셌다. 그러던 어느 날, 현지에서 로티가 가르치는 성경을 비난하고자 참석했던 중국인 리 쇼우팅이 성경을 접하며 개종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후 리 쇼우팅은 사도 바울처럼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 되어 북부를 다니며 전도하고 1000여 명에게 침례를 베풀며 귀하게 쓰임 받았다. 38년간 중국에서 헌신한 로티의 노력으로 16개 교회와 56개 학교가 세워져 많은 학생을 배출하게 하는 열매를 맺었다. 또한 남성 전도사 42명, 여성 전도사 14명의 현지인 제자를 세웠고 이들을 통해 2000여 명 현지인이 침례를 받았다. 1912년 로티는 미국 남침례교의 재정 상황의 악화로 더 이상 선교 지원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 거기에 기근까지 들어 아이들이 굶주리게 되자 자신의 식사를 나눠주며 본인은 금식을 하다 결국 25㎏까지 몸무게가 줄었다.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지만 미국으로 가는 길에 72세의 생일을 일주일 앞둔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추리아 호에서 소천을 받았다.
  • 2024.02.23 / 금지환 기자

    (14) 서만수 선교사
  • 한국 교회 최초 인도네시아로 파송 된 선교사
    정글 지대 순회하며 현지에 384개 교회 세워 현지인 사역자 양성 위해 스틴신학교도 설립 한 평생 인도네시아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주의 종이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선교사로 40년 동안 활동하면서 384개의 교회를 세운 그는 한국 교회에서 처음으로 인도네시아로 파송한 서만수 선교사이다. 1939년 평양에서 태어난 서만수 선교사는 6·25 전쟁 중 월남해 서울에 정착했다. 그는 남한에서 주의 종의 소명을 받고 목회자로 사역을 하다 1970년 9월 아내 정소라 선교사와 함께 인도네시아로 파송 받았다. 그는 파송 1년 만에 한국인과 인도네시아 현지인 25명과 함께 최초의 한인교회인 자카르타한인연합교회를 개척했다. 교회가 설립될 당시만 해도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많지 않았는데 한인들은 이 교회에서 타향살이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달랬다. 한인 공동체가 형성되자 그는 한인들의 고민이었던 자녀 교육을 해결하기 위해 1973년 한인 유치원을, 그 이듬해에는 자카르타 한인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서 선교사는 한인교회 사역과 동시에 정글 지대를 순회하며 각 지역에서 전도집회와 부흥회를 인도했다. 차가 갈 수 없는 오지 촌락은 말과 당나귀를 타고 순회 선교를 이어갔는데 그는 식인 풍습이 남아있는 수마트라와 이리얀자야 지역을 다닐 때 몇 차례 죽을 고비도 넘겼다고 했다.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겠다’는 조지 휫필드처럼 그는 인도네시아 복음 전파에 매진했다. 그런데 1997년 그의 선교 활동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정글 순회 사역의 후유증으로 근무력증을 진단 받은 것이다. 더 이상 순회 선교를 할 수 없게 됐지만 서 선교사는 “선교사는 아프다는 것을 피난처로 삼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기며 귀국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인도네시아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슬람 국가에서 외국인이 직접 선교 활동을 하는 것에는 제한이 많았다. 이에 서 선교사는 정부와 마찰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는데 그것이 바로 현지인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틴(STTIN) 신학대학교를 설립해 현지인을 대상으로 신학교육과 교회개척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이는 인도네시아 미전도종족 선교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인도네시아에서 40년 세월을 한결같이 선교하던 서만수 선교사는 2009년 9월 16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소천 받았다. 그는 생전에 자카르타에서 추진하던 종합대학교 건립 부지 근교 공원묘지에 안치됐다. 인도네시아에 3000개 교회 개척을 목표로 삼았던 서만수 선교사. 우리는 그의 선교 열정을 기억하고 그가 이룬 인도네시아 선교가 앞으로도 계속해 발전해 나아가도록 힘써 기도해야만 할 것이다.
  • 2023.07.21 / 금지환 기자

    (13) 코리 텐 붐 여사
  • 전 세계에 용서의 복음 전한 위대한 전도자
    나치 독일로부터 800여 명의 유대인 구출하고 전쟁 후유증 겪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 전해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 전쟁을 일으킨 당시 나치 독일은 도시 곳곳에서 유대인들과 이들을 돕는 사람들까지도 학살했다. 이때 죽음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도운 사람이 바로 네덜란드의 전도자 코리 텐 붐 여사이다. 코리 텐 붐 여사는 1892년 네덜란드 하를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앙교육을 받아온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을 도와야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 난민들을 숨겨주고 탈출하는 일을 도왔다. 당시 나치 독일 정권이 유럽계 유대인들을 제도적으로 탄압하고 조직적으로 학살했는데 이때 텐 붐 여사가 탈출시킨 유대인은 800여 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1944년 2월 28일, 전쟁 종식을 앞두고 독일 나치의 정치경찰인 게슈타포에 의해 발각돼 그녀의 일가족이 체포됐다. 유대인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유치장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이후 나치 수용소에 수감 된 그녀는 열흘 만에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이 의지했던 아버지의 소천 소식에 깊은 절망에 빠졌던 그였지만 슬픔을 뒤로하고 몰래 들여온 성경을 보며 하나님을 예배했다. 하루하루 버티며 사는 것이 전부였던 수용소에서 언제 목숨을 잃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텐 붐 여사는 매일 밤 성경공부 모임을 갖고 수감자들과 군인들을 위해 기도했다. 절망이 드리운 수용소에 복음은 한 줄기 희망이 됐고 수감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후 기적적으로 석방된 그녀는 전쟁으로 상처 입은 이들이 회복할 수 있는 재활센터를 설립했다. 텐 붐 여사는 가족과 친척을 잃은 고아, 수용소에서의 트라우마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사람 그리고 전쟁 중 독일과 협력했던 실직한 자국민들까지도 센터에 입소시켰다. 이는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차별이 없음을 실천한 것이었다. 코리 텐 붐 여사하면 널리 회자 되는 이야기가 있다. 독일의 한 교회에서 용서에 대한 강연을 마치고 나왔는데 강제수용소에서 언니 베시를 고문했던 악랄한 간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텐 붐 여사는 그를 본 순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그를 용서 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언니를 죽게 한 장본인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그를 용서하게 하셨습니다.” 세계 각국을 다니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전한 텐 붐 여사는 그녀의 삶의 여정이 담긴 『주는 나의 피난처』 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전쟁 중에도 전쟁 후에도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그녀는 1983년 4월 15일 91번째 생일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2022.10.21 / 금지환 기자

    주일설교 요약본
    떨기나무 인생
  •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야훼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야훼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출애굽기 3장 1~4절) 인본주의 모습 속에 떨기나무 같은 인생이 성령의 불로 하나님 만나면 복음의 증인으로 변화 돼 고대 그리스에서는 배우들이 다양한 감정을 나타내는 가면을 쓰고 연극을 했는데 그 가면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연극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도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크리스천들은 인본주의의 가면을 모두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1. 떨기나무 인생 나일강에 버려져 죽을 운명이었던 모세는 바로의 공주에게 발견되어 왕자의 신분으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 사람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살해함으로 인해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또 40년을 보냈습니다. 80세 노인이 되어 모든 인생의 꿈을 접고 무기력하게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은 호렙산의 한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를 만나주셨습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야훼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1~2).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살아온 80년의 인생은 떨기나무 인생이었습니다. 모세처럼 우리도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어느새 마음에 가시가 자라난 떨기나무 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있는 이 연약함에 대해 탄식하며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 이처럼 떨기나무 같은 우리 인생에 참된 희망과 생명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축복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셔 들임으로써 우리 안에 있던 가시들이 사라지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인생으로 변화되길 소망합니다. 2. 불붙은 떨기나무 모세가 광야에서 한 떨기나무를 주목했던 이유는 그 나무에 불이 붙어있음에도 나무가 불타 소멸하지 않는 광경 때문이었습니다. “야훼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출 3:2~3). 하나님은 아무 곳에도 쓸데없는 그 떨기나무에 불을 붙이셨고 그 자리를 모세의 삶의 전환점으로 만드셨습니다. 마른 막대기 같은 우리 인생도 예수님을 모셔 들이고 성령의 불이 붙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은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의 지식과 경험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성령의 불이 꺼져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온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서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할 것을 강조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성령 충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체험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작은 예수로서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에 전할 수 있습니다. 떨기나무 같은 우리 인생도 성령의 불을 받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성령의 은혜가 떠나고 성령을 소멸하게 되면 우리는 다시 떨기나무 인생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첫사랑의 감격을 누리며 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계 2:4~5).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면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를 우리 삶에 부어주셔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생을 선물로 받고 마침내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모세는 떨기나무의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야훼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출 3:4). 이때 모세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지난 80년 동안 그가 들어왔던 수많은 소리와 어떤 이야기들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그중 대부분은 부정적이며 우리 마음에 상처와 절망을 남기는 불필요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를 살리고 치유하는 음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그분의 음성을 듣고 살아야 합니다. 항상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그분의 말씀 앞에서 결단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목자이시며 생명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하나님이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을 보내셔서 그를 유럽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 16:9). 이에 따라 바울은 아시아 대신 마게도냐, 즉 그리스 지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유럽 복음화의 시발점이 되었고 훗날 유럽을 넘어 미국, 나아가 세계 곳곳에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각자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붙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불러 주신 그 부름의 상을 받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전진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이처럼 우리도 늘 성령으로 충만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일평생 믿음으로 전진하고 또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떨기나무 인생을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으로 세워주심을 감사합니다. 나의 일생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여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10.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예수님의 흔적
  •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라디아서 6장 17~18절) 십자가 사랑으로 예수의 흔적을 새기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며 섬김과 나눔의 삶 살아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속담처럼 누구나 이 땅에 살면서 자신이 살아온 흔적을 남기길 원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인생을 살며 자신의 이름과 업적이 아닌 예수님의 아름다운 흔적만을 남기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 평생토록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예수님의 흔적을 남긴 뒤 천국으로 향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1. 사도 바울의 유일한 자랑 사도 바울은 한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과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행 7:58).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당시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이단자라 생각했기에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며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크리스천들을 잡아들이고 교회를 훼파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있던 크리스천들을 붙잡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받아 먼저 다메섹으로 향했습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행 9:1~2).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 예수님이 빛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3~5). 바울은 자신 앞에 직접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 진리임을 깨달았고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하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자 사도가 되었습니다. 변화된 사도 바울은 이전에 유익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한평생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사도 바울과 같이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자랑이자 닮아갈 분이 되신다고 고백하며 힘을 다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사도 바울이 지닌 예수님의 흔적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예수님의 흔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여기서 흔적은 로마 시대에 주인의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해 불에 달군 인두로 종의 몸에 찍는 낙인을 의미합니다. 즉, 사도 바울은 자신이 낙인찍힌 종과 같이 예수님의 소유가 된 존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새겨진 예수님의 흔적은 십자가 사랑의 흔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그였음에도 예수님은 그를 친히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그분의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바울은 어떠한 고난에 맞서더라도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그의 온몸에는 고난의 흉터가 가득했지만 그 흉터들은 오히려 그가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예수님의 흔적이란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고집과 교만을 버리고 섬김과 배려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때로는 우리가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눈물과 고통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굳게 붙들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삶에는 바울과 같은 예수님의 흔적이 남게 될 것입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예수님의 흔적을 갖고 살아가는 믿음의 자녀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합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갈 6:18).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며 자신이 누리는 예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도 함께하기를 축복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깨닫게 하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선한 능력을 공급하는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면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 어떠한 고난과 시련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삶과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자기 능력으로만 믿음의 사명을 감당하려 하면 우리는 금방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면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께 위로받고 새 힘을 얻어 믿음으로 전진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합니다. 그래서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오를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낮아지고 겸손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크신 은혜와 축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야훼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라는 고백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넘치는 감사를 드리며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한평생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을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우리 삶에 새기며 사는 사명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기쁨과 감사로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10.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일어나라
  •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5장 41~43절) 절대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 음성듣고 일어나면 절대 긍정의 믿음 얻고 복된 삶을 살게 돼 모든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절망과 씨름하고 고통받으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절망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바라볼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절망은 축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1. 절망에 처한 인간 갈릴리 가버나움 지역의 회당장이었던 야이로의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이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 5:22~23). 야이로는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는 기적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금했기에 예수님을 찾아가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외동딸이 곧 죽어가는 긴급한 상황이 되자 어떤 비난도 각오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 도움을 간구했습니다. 그는 신분이나 체면, 자존심 같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겸손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야이로처럼 절망적인 문제나 어려움을 만나면 예수님 앞에 나아가 겸손히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문제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딸을 고쳐달라는 야이로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녀를 고치시기 위해 야이로의 집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인파 속에서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다가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막 5:25~28). 이 여인은 열두 해 동안 하혈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가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러자 병이 즉시 나았고 이 사실을 아신 예수님은 그녀를 찾으셨습니다. 여인이 예수님 앞에 엎드렸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예수님은 지금도 혈루증 여인과 같은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면 예수님은 그 믿음에 감동하셔서 우리에게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런데 혈루증 여인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야이로의 집에서 그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막 5:35). 이처럼 우리가 문제 해결을 위해 기도해도 상황이 나아지기보다 오히려 악화되거나 또 다른 문제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더욱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하면 능히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사람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절대 절망의 문제 속에서 우리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서 우리 삶의 모든 절망이 물러가는 기적이 임할 것입니다. 2. 믿음의 전진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속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막 5:36).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망적인 문제나 심각한 병으로 고통받고 있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흔들림 없이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야이로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죽음이라는 절대 절망 속에서 눈을 감은 아이의 손을 잡아 “일어나라!”고 외치셨습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막 5:41). 이에 예수님의 사랑의 손, 치료의 손에 붙들린 그 아이는 곧 일어나 걷기 시작했고 모든 사람은 큰 놀라움에 휩싸였습니다.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막 5:42). 오늘날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해 삼중 저주를 받은 이후 모든 사람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열등감과 비교 의식으로 인해 늘 어두운 마음을 품고 있거나, 과거의 깊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특히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평생을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죽어있는 모든 사람은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는 권능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우리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영적 죽음의 환경에서 다시 생명을 얻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싼 질병과 저주, 절망이 떠나가고 우리는 믿음의 승리자로 당당히 설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38년 동안이나 절망의 자리에 누워있던 병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가끔 천사가 내려와 연못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이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병자는 혼자 힘으로는 물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절망만이 가득했고 그의 마음과 육신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곧 생명의 능력이 되어 절망에 사로잡힌 그의 마음을 회복시키셨고, 그는 육신의 병에서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실패의 자리에 누워있다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된다는 믿음을 붙들고 늘 힘차게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비추게 하실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야훼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아직 절망 속에 살고 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모든 죄와 불신앙을 회개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새것과 같이 깨끗이 하여 주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말씀을 붙들고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믿음의 전진을 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인생의 절망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믿음으로 전진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절대 긍정의 믿음으로 나아가는 복된 삶을 살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능력으로 날마다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4.09.2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