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담임목사 주일설교
조용기 원로목사 주일설교
오늘의 묵상
7월 19일(토) - 오직 은혜로
  • ◎ 말씀 : 마 26:74~75 ◎ 찬송 : 290장(통 412장)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을지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자신 있게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 고백은 불과 몇 시간 만에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이 심문당할 때 그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고 닭 우는 소리를 듣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흘린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모습은 십자가 앞에 설 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시다. 베드로를 변화시켜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죄인 됨과 연약함을 깊이 깨닫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살아가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7.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월 18일(금) -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
  • ◎ 말씀 : 시 27:1~6 ◎ 찬송 : 413장(통 470장) 고난 중에서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선언한 다윗의 고백은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신뢰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을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하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살아갔습니다. 다윗이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영적 무기인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단지 두려움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한가운데에서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평안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과 능력을 의지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평안을 누리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떠한 두려움을 마주하든 항상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7.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7월 17일(목) - 깨어 있으라
  • ◎ 말씀 : 마 24:42~44 ◎ 찬송 : 176장(통 163장)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시며 마지막 때의 징조와 재림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환난과 주님의 재림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경고하시며 그날과 그 시간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라는 권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며 재림하신 예수님은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약속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기를 소망하며, 매일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날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면서 깨어 준비하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7.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예수님의 팔복
    ⑦ 화평하게 하는 자
  • 피스메이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사람 평화의 왕 예수님 세상에 전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는 복 누려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세상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복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 소개하는 팔복에서 일곱 번째로 소개된 ‘화평하게 하는 자’는 헬라어 ‘에이레네포이오스’로 ‘에이레네’(평화)와 ‘포이에오’(만들다)의 합성어이다. ‘팔복’에서 화평은 성경의 평화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갈등을 중재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을 뜻한다. 일명 ‘피스메이커’(Peace Maker)이다. 성경이 말하는 피스메이커는 혼자 평화롭게 살면서 평화의 열매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과 공동체를 화해시키는 어려운 일에 자신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이다. 대표적인 피스메이커로는 예수님이 있다. 그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처한 인류의 ‘피스메이커’로 오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됐다(롬 5:1). 독단과 분열이 가득했던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화평의 길이 열린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군림하고 누리는 삶을 살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베푸셨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갈등과 분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는 ‘피스메이커’가 되어야 한다.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삶을 본받아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될 때 이 세상에 평화가 임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 받는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화평에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을 전하는 것도 포함된다는 점이다(사 52:7).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로 말미암아 궁극적인 평화가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전파하는 것이 곧 평화를 이루는 핵심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중세 평화의 사도인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우리도 세상의 화해자가 되어야 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신앙을, 거짓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 2025.07.04 / 금지환 기자

    ⑥ 마음이 청결한 자
  • 천국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하나님 볼 수 있어 예수님의 보혈 의지해 마음 지켜 나아가야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한 이영훈 목사는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에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것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정결해야 했다. 흠이 있는 것은 드릴 수 없었다”면서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흠이 없는 모습으로 나아와야 한다. 우리는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기 때문에 예수의 보혈로 우리가 정결함을 입고 변화 받아야한다. 주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가 정결한 모습으로 흠이 없는 모습으로 드려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나님은 구만리장천 먼 곳에 계신 분이 아닌 무소부재하신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고 율법적으로 온전하고 정결해질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 자세만큼은 순전하고 순수할 수 있다. 이는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을 청결히 하여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우상숭배의 죄, 음란의 죄, 누추함의 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회개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마음을 청결히 하고 매 순간 성령님께 마음을 드리고 정결케 해주시기를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조용기 목사는 마음 상태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르게 보인다고 설명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내 주먹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해를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달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별들을 봐도 하나님이 보이고 꽃 한 포기를 봐도 ‘아! 하나님이 묘하게 지으셨구나’ 사람들을 봐도 ‘하나님이 얼마나 이쁘고 아름답게 사람을 만드셨느냐’라고 말한다”고 했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밉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밉게 보인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미운 가운데도 모든 아름다운 것이 눈에 보인다. 마음이 나의 환경을 바라보게 하고 결정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전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을 간구하고 예수님의 보혈에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스스로 마음을 잘 지켜서 하나님만 바라볼 때 천국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이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교제하면서 살아가는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다.
  • 2025.05.30 / 복순희 기자

    ⑤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 깊고 심오한 하나님의 가르침 진정한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회복 가져와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나온 팔복 중 다섯 번째는 ‘긍휼’에 관한 내용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불쌍히 여김을 의미한다. 사랑과 자비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긍휼에 관한 가르침으로 누가복음 10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기도 했다. 강도 만난 유대인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쳤지만 사마리아인은 긍휼한 마음으로 그를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주고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대가를 지불하겠다며 자비의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나타낸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짓고 불의해 추악해진 인생들을 긍휼히(불쌍히) 여기셨기에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제물로 삼으셨다. 아들을 제물로 바쳐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하게 하시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용서와 의, 영광을 얻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탁월하신 긍휼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영광 중에 재림의 주를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무궁하신 긍휼과 자비의 결과이다. 따라서 긍휼을 받은 우리는 긍휼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야고보서 2장 13절은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남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고 혹독히 심판하면 자신도 긍휼이 필요할 때 긍휼을 받지 못하고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된다. 사랑 실천과 용서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가 된다. 예수님은 긍휼, 자비의 실천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성경은 긍휼을 베푸는 자가 긍휼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이다. 마태복음 6장 14절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라고 기록하고 있다. 긍휼을 입은 자는 부모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부모는 자녀가 60세가 되어도 그 자녀를 언제나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긍휼의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긍휼에 빚진 자들은 더 많아지고 또 다른 긍휼의 마음을 양산해 더 많은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대한민국은 지금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 심화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때 크리스천은 절망 대신 희망의 빛이 대한민국에 살아나도록 긍휼의 마음을 안고 서로를 바라봐야 한다. 가족과 이웃, 지역 속에서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면 우리 안에 서로를 향한 불신과 미움의 마음은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게 된다.
  • 2025.05.02 / 오정선 기자

    선교 열전
    (17) 존 로스
  •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으로 선교 토대 마련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출판하고 이후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하는데 기여한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조선인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로스는 조선의 복음화를 꿈꾸며 한글 성경 번역에 자신의 젊은 날을 헌신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 입학한 로스는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비롯해 독일어, 중국어 등 외국어를 공부했다. 사람들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유를 묻자 로스는 “예수님은 너희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는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당연히 많은 외국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답했다. 신학생 시절 로스는 중국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의 강연에 참석해 “중국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모른채 죽어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듣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선교사가 될 것을 결단했다. 1872년 중국에 도착한 로스는 먼저 선교 중이던 존 매킨타이어와 함께 길거리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성경을 나눠주며 전도를 시작했다. 로스가 중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만큼 유창한 어학 실력을 갖추게 된 후에는 직접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순회 전도를 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유교적 표현을 이용해 기독교 교리를 이해시키려 노력했고 현실에 지쳐 불교·도교 사원으로 도피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중국인뿐 아니라 조선인, 러시아인, 일본인 등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거주했다. 주변 선교사들을 통해 조선을 알게 된 로스는 만주 지역에서 전도하며 머지않아 조선에도 복음의 문이 반드시 열릴 것을 확신했다. 그는 “조선인이 쉽게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우리가 한글 성경을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않겠습니까?”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글 성경에 대한 필요성을 알리고 번역에 힘썼다. 그는 당시 한문으로 된 성경은 이미 있었지만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통해 복음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로스는 자신이 한글을 공부하면서 정리한 내용과 예문을 바탕으로 조선을 방문할 선교사들에게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국어 교재인 ‘조선어 첫걸음’이라는 책도 저술했다. 비록 그는 조선의 쇄국 정책과 기독교 박해로 조선 땅을 밟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과 가까운 중국 만주를 선교 거점으로 삼고 조선인들과 교류하며 복음을 전해 조선에 공식적인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기독교 신앙이 자리 잡도록 기틀을 마련한 선교사다.
  • 2025.05.23 / 금지환 기자

    (16) 말콤 펜윅
  • 초기 한국기독교 토대 마련 성경·찬송 번역하며 46년간 헌신한 선교사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은 국내에서 헌신하며 신약성경과 찬송을 우리말로 번역한 선교사다. 찬송이 수록된 『복음찬미』, 전도를 위한 성경 구절을 모은 『만민됴흔긔별』 발간뿐 아니라 1919년에는 『신약젼셔』 를 출판했다. 캐나다인인 그는 26살 때 초교파 모임인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해 성경을 공부하던 중 인도 선교사로 활동한 로버트 와일더의 “사막에서 애타게 물을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담긴 물이 아닌 오직 물이다”라는 간증을 듣고 선교사로 결단했다. 1889년 입국한 펜윅은 국내에서 복음을 전하며 250여 개의 교회를 세웠다. 펜윅은 장로교 조사 서경조와 동행하며 한국어를 배워 황해도 송천에서 ‘예수 사랑하심은’(Jesus Loves Me), ‘나는 참 기쁘다’(I am so glad) 찬송과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해 소년들에게는 성경을 가르치고 마을의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성경 공부를 이끌었다. 그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 15:20)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신념을 갖고 개신교 선교부가 없는 원산으로 이동해 자립 선교의 토대 마련을 위해 농장을 운영했다.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한 펜윅은 다른 사람이 전하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 정책으로 삼고 원산을 중심으로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소외된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교단의 목사와 전도사는 순회사역자가 되어 전국에서 전도 활동을 펼쳤고 교인들도 전도 현장에 투입돼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펜윅은 전도자들이 개척한 교회들을 돌아보며 그들의 신앙을 격려했고 가는 곳마다 사경회를 개최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집회가 끝나면 참석자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해 원산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이단 활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펜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교에 힘썼다. 복음 전파를 향해 기관차처럼 달려온 그는 원산의 자택에서 72세의 나이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말콤 펜윅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래 46년간 선교하며 어떤 교파에도 의지하지 않고 한국인 사역자와 함께 초기 한국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 2025.01.31 / 박찬웅 기자

    (15)로티 문(Lottie Moon) 선교사
  • 일평생 중국 복음화 위해 헌신한 선교사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일평생 수 만명의 중국인에게 찬양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한 독신 여성 선교사가 있다. 미국 남침례교에서 파송한 로티 문이다. 1840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로티 문은 어릴 적부터 침례교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로티의 본명은 샬롯 딕스 문(Charlotte Diggs Moon)이다. 미국 버지니아 알베말 출신인 로티는 18세가 되던 해에 브라더스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했다. 이후 대학에서 성경 공부와 기도 모임을 주도하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갑작스런 사고로 아버지를 일찍이 여읜 로티는 당시 남녀 차별이 심각했던 시대적 배경에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고등교육까지 받아 미국 남부에서 가장 학식이 높은 여인이 됐다. 1873년 중국에서 학원 사역을 펼치고 있었던 선교사 부부를 돕기 위해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 로티는 평일에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주말에는 시골 마을을 순회하며 전도에 매진했다. 로티는 1885년 외국인이 한 명도 없고 외국인 보호 조약과 거리가 먼 지역인 핑투라는 곳에 정착해 본격적으로 현지인 복음화에 앞장섰다. 전도를 위해서는 먼저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며 선교지에서 관계 전도를 이어갔던 그는 현지인과 같은 옷을 입고 활동하며 마을에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할 때마다 현지인들의 핍박이 거셌다. 그러던 어느 날, 현지에서 로티가 가르치는 성경을 비난하고자 참석했던 중국인 리 쇼우팅이 성경을 접하며 개종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후 리 쇼우팅은 사도 바울처럼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 되어 북부를 다니며 전도하고 1000여 명에게 침례를 베풀며 귀하게 쓰임 받았다. 38년간 중국에서 헌신한 로티의 노력으로 16개 교회와 56개 학교가 세워져 많은 학생을 배출하게 하는 열매를 맺었다. 또한 남성 전도사 42명, 여성 전도사 14명의 현지인 제자를 세웠고 이들을 통해 2000여 명 현지인이 침례를 받았다. 1912년 로티는 미국 남침례교의 재정 상황의 악화로 더 이상 선교 지원금을 받지 못하게 됐다. 거기에 기근까지 들어 아이들이 굶주리게 되자 자신의 식사를 나눠주며 본인은 금식을 하다 결국 25㎏까지 몸무게가 줄었다. 쇠약해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지만 미국으로 가는 길에 72세의 생일을 일주일 앞둔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추리아 호에서 소천을 받았다.
  • 2024.02.23 / 금지환 기자

    주일설교 요약본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마태복음 8장 23~27절 거센 인생의 풍랑 앞에 함께 하시는 구원자 예수님 절대 긍정의 믿음 선포하면 풍랑 이기고 승리하게 돼 우리는 지금 혼돈과 불안이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연재해, 전쟁, 경제적 위기, 질병 등 말세의 징조들이 세상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절망의 순간에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할 분은 전지전능하신 만군의 야훼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1. 인생의 풍랑이 다가올 때 하루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실 때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마 8:23~24).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아무런 예고 없이 인생의 풍랑이 다가오면 마음은 염려와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날 제자들의 배에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고난이 없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고난은 크리스천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온다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 때로는 주님이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불순종하며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살 때는 하나님이 사랑의 채찍으로 우리를 돌이키십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인생의 풍랑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녀, 건강을 잃는 극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우리도 건강을 잃거나 재정적 어려움, 가족 간의 갈등 등 인생의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풍랑을 ‘만나느냐 안 만나느냐’가 아니라 그 풍랑을 ‘어떻게 잘 극복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에 익숙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풍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스스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풍랑은 점점 더 거세졌고 배는 물에 잠길 위기에 처했습니다(막 4:37). 사람들은 환난을 만나면 누구나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이끄십니다. 우리가 겸손히 두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고쳐주시며,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2. 구원자 예수님 예수님은 우리가 만난 풍랑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 8:24~25). 큰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은 잠들어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기에 풍랑이 다가와도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버티다가 결국 두려움과 원망이 뒤섞인 마음으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해결해 보려 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불평하고 남 탓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배에는 예수님이 함께 타고 계십니다. 선장님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주님은 우리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거친 풍랑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을 깨우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깨운다는 것은 간절히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어떤 풍랑 속에 있든지 주님께 엎드려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로 주님을 깨우기만 하면 그분의 말씀이 풍랑을 잔잔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직 기도만이 인생의 풍랑을 이기는 길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세상의 방법이나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배의 노를 내 힘으로 젓기보다 기도의 노를 붙들고 주님의 손을 의지해야 합니다. 때로는 주님이 주무시는 것처럼 느껴지고 내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끝까지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응답과 축복이 반드시 임합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b).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자 주님은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고 곧바로 풍랑은 잠잠해졌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마 8:26). 우리 모두 인생의 풍랑 앞에서 구원자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기도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3.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거센 풍랑이 곧 잠잠해지고 바다는 고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바람과 파도까지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에도 때때로 예상치 못한 풍랑이 몰아칩니다. 사탄은 사람과 환경, 물질을 통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믿음의 선포를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풍랑을 가져오는 흑암의 권세는 물러갈지어다!” 이 믿음의 고백에 주님은 응답하시고 우리 인생의 모든 풍랑을 잠잠케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개인의 문제, 가정과 자녀, 직장과 사업, 육신의 질병까지, 예수님이 “잠잠하라!”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모든 것이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할 때 우리 삶에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담대히 믿음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합니다. 예수님은 믿음 없는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8:26). 마가복음에서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며 수많은 기적을 경험했지만 풍랑 앞에서는 여전히 두려워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여전히 작은 문제 앞에 염려하고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왜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인생의 풍랑 앞에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절대 긍정의 믿음’입니다. 잠시 인생의 풍랑이 몰아칠 수 있지만 예수님이 명하시면 그 어떤 풍랑도 반드시 잠잠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담대히 믿음으로 기도하여 응답과 기적을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두려움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인생의 풍랑 속에서도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갖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7.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예수님의 절대 지상명령
  •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18~20절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며 성도가 감당할 하나님의 뜻 성령으로 증인된 삶 살아가며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야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크리스천이 순종해야 할 절대 지상명령입니다. 선교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며 성령의 능력을 받은 성도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교하는 교회는 부흥하고 선교하는 나라는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1. 가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마 28:19).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죄와 절망, 질병과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은 그분의 권세와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교회는 함께 예배하는 성도의 모임이자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일 때에는 예배와 기도에 힘쓰고 흩어져서는 전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한 후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서 사도들을 제외한 성도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오히려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행 8:4).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겠다’라고 마음으로 다짐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직접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담대히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전도의 길을 나설 때, 그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 주시는 아름다운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우리의 가까운 이웃에서부터 시작하여 학교와 직장 그리고 온 열방에 이르기까지 문화와 이념을 넘어서 우리는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의지하고 용기 내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2. 제자를 삼으라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단지 복음을 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복음을 받은 이들을 제자로 삼기까지 책임과 열정을 다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마 28:19a). 오늘날 교회에 신자는 많지만 참된 제자는 적다는 사실을 우리가 스스로 돌아보며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 각자는 예수님이 거룩한 사명을 믿고 맡기실 수 있는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길 소망하며 확고한 믿음의 정체성을 세워나갈 때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온 세상에 온전히 전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크리스천은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우리가 속한 사회 전반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는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은혜 안에 있기에 더 이상 자기의 생각이나 감정에 지배당하거나 이끌려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며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길을 따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우리는 끊임없이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신앙이 자라지 않으면 환난이 닥칠 때 쉽게 무너지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 믿음을 잃고 세상으로 돌아갈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기력한 신앙에서 벗어나 날마다 믿음이 성장하고 우리의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판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체계적으로 배우며 암송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늘 동행하며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은 참된 제자가 되려면 삶 속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말씀을 바라볼 때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경험하게 되고 성령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며 점차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작은 예수의 모습으로 사는 제자들이 되어 우리가 받은 은혜를 세상에 전하며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소망합니다. 3. 침례를 베풀라 예수님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마 28:19b). 여기서 침례를 베풀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해 들은 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고 새롭게 거듭난 크리스천으로 세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침례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예식입니다. 로마 시대에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박해는 10명의 황제를 거치며 약 25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을 영접한 이들은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흐르는 물가로 나아가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위해 생명까지도 드릴 수 있다는 믿음의 결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침례를 받을 때 생명의 위협은 없지만 침례는 여전히 우리의 목숨을 다해 예수님께 충성하고 내 모든 삶을 그분께 드리겠다는 믿음의 고백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의 크리스천들은 신앙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오랜 박해가 마침내 끝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목숨을 다해 복음을 전하며 로마를 변화시킨 결과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당시 로마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의 8%에 불과했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에도 단 8%만이 온전히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도 한 나라가 변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곳곳에 위험과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기에 맡은 사명을 다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로 가든지 함께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비록 제자들은 연약했지만 보혜사 성령님이 그들과 동행하시며 모든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복음을 전하며 수많은 고난을 겪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어려움을 이기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우리가 복음을 들고 제자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마 28:20).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권세와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죄와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정을 다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2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스더 4장 13~16절)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말씀과 기도로 나아갈 때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이 실패를 승리의 길로 이끄셔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며 지금도 하나님은 세계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구약 에스더서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뒤 페르시아 땅에 흩어져 살던 유다 백성이 직면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1.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가온 절망적 상황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멸망했고 남유다 또한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멸망당했습니다. 이후 남유다 백성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하며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사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바사 곧 페르시아 제국은 아하수에로 왕 통치시대에 세력이 더욱 확장되어 애굽에서 인도까지 127개 지방을 관할하는 최대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바사의 아하수에로 왕은 즉위 3년에 자기 명을 거역한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전국에서 아름다운 처녀를 구해 그중에서 왕비를 뽑게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 그곳에 포로로 끌려와 살고 있던 유대인 에스더가 수많은 후보자 가운데 새 왕비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제칠년 시월 곧 데벳월에 에스더가 왕궁에 인도되어 들어가서 왕 앞에 나가니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에 2:16~17). 에스더는 일찍 부모를 잃은 고아였으나 사촌 오빠 모르드개가 그녀를 딸처럼 키웠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의 왕궁 문 앞에서 일하는 신하였습니다(에 3:2). 아하수에로 왕은 하만을 모든 대신들보다 높이고 백성들에게 그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라고 명령했는데, 하나님만 섬기던 모르드개는 왕의 명령일지라도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하만은 유대인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탈취할 수 있도록 왕의 허락을 받아 조서를 전국에 반포했습니다(에 3:13~14).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은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전멸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크리스천이 핍박과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릎 꿇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모르드개가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믿음을 굳건히 지켰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섬기고 살아가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2. 기도와 결단의 신앙 왕의 조서가 전국 각처에 전달되어 유다 민족이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자 온 유대인은 애통하고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에 4:3).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고 어려움을 겪더라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리저리 뛰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전갈을 보내어 왕 앞에 나아가 유다 민족을 위해 간청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왕의 부름 없이 왕 앞에 나아가는 자는 왕이 금 규를 내밀지 않는 한 곧바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에 4:11). 그럼에도 에스더는 유다 민족을 살리기 위해 3일간 금식하고 왕에게 나아가기로 결단합니다.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 4:15~16). 이처럼 믿음은 결단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여 문제 앞에서 망설인다면 어떤 일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절대 긍정의 믿음을 가지고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 믿음으로 전진해 나아갈 때 기적이 임합니다. 우리가 마주한 절망의 상황을 희망과 축복으로 바꾸는 능력은 기도에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의 기도가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응답으로 역사하십니다. 기도하는 백성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우리가 문제 앞에서 에스더와 같이 결사 각오의 기도로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3.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에스더가 예복을 갖추어 입고 왕궁 뜰에 서자 아하수에로 왕은 그녀를 기쁘게 맞이하며 금 규를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에 5:2~3). 에스더는 자신의 요청을 곧바로 말하지 않고 지혜롭게 왕과 하만을 연회에 초청합니다. 기분 좋게 연회에 다녀온 아하수에로 왕은 그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아서 역대 일기를 가져오게 하여 읽다가 마침 왕을 암살하려던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해 막았던 사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를 높이기 위해 왕복을 입히고 왕의 말을 태워 성중 거리를 돌게 하며 그가 왕이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백성들 앞에서 공표하게 합니다. 왕이 모르드개의 충성과 왕의 생명을 구한 공로를 알게 된 것은 에스더의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더와 유다 민족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모든 일을 친히 주관하신 것입니다. 에스더는 두 번째 연회 자리에서 왕에게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히고 유다 민족의 생명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며 그들을 말살할 음모를 꾸민 자가 하만임을 폭로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에스더의 소원대로 유다 민족을 구원해 주었고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한 장대에 자신이 달려 죽게 되었습니다(에 7:10). 하만이 유대인을 멸하려고 정한 아달월 13일은 오히려 유다 민족을 치려고 하던 자들이 멸망한 날이 되었고, 그다음 날은 ‘부림절’이라 불리며 유대인들 사이에 오늘날까지 기쁨의 축제로 지켜지게 되었습니다(에 9:31). 하나님은 절망의 날을 구원의 날로 바꾸셨고 실패처럼 보인 상황을 승리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우리의 인생 또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담대히 나아가 승리하고 믿음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동행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에 때때로 고난이 찾아오더라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길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자녀가 되어 모든 문제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6.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경 인물
    (113) 사랑의 사도, 요한
  • 요한복음 등 저서 통해 복음 전파 예수님 만나 사랑의 사도로 변화돼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은 이며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제자이며 요한복음,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를 기록했고 신약성경의 유일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을 썼다.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은 형제 야고보와 함께 갈릴리에서 어부로 지내던 중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다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자 바로 예수님께 달려가 제자가 됐다. 예수님을 따른 이 두 형제는 예수님께 사랑받는 열 두 제자에 속했지만 감정이 격발할 때가 많았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소란을 뜻하는 의미의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실 정도였다. 요한은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었지만 어디든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조급하고 폭력적이던 성격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변화됐다. 그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다른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했을 때에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따라갔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 중에 유일하게 그곳을 지킨 제자였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으로 맨 먼저 달려간 사람도 요한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자신의 어머니를 그에게 의탁하셨고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극진히 모셨다. 초대교회 설립의 핵심 인물이었던 요한은 사도 바울에게 교회의 기둥 같은 인물이라고 칭함을 받기도 했다. 노년을 에베소에서 설교와 저술활동으로 보내던 요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에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죄목으로 밧모섬에 유배됐다. 그곳에서 신약의 마지막 복음서인 요한계시록을 저술했다. 사면되어 다시 에베소로 귀환한 그는 교회들을 지도하고 성경을 기록하며 에베소에서 말년을 보냈다. 요한은 요한복음에 자기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제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설교할 때마다 성도들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강조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늘 예수 그리스도였다. 우리 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강조하며 불신자와 믿는 자 모두를 아우르는 설교를 했다. 그가 남긴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에 가장 강조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전도지나 교회에서 가장 많이 보고 듣는 이 성경 구절 안에 사도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확실히 담겨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 2024.11.29 / 이미나 기자

    (112) 한나
  • ‘간절한 기도의 여인’ 표상 문제 앞에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얻게 돼 한나는 ‘기도의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자신의 괴로움을 극복할 만한 힘과 능력이 없을 때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 한나를 통해 우리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 에브라임 산지 여로암의 아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 두 아내가 있었다. 소실인 브닌나에게는 자녀가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이름의 뜻인 ‘은총’과는 달리 자녀가 없었다. 매년 고통을 겪어야 했던 한나는 고통 중에 부르짖고 또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야훼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야훼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야훼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0~11). 한나가 주께 드린 기도는 처절한 절규였으며 가슴에 멍이 드는 탄식의 간구였다. 그런 한나의 부르짖음에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하시고 한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셨다. 성경 사무엘상 2장 1~10절은 한나가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격의 내용이 기록돼 있다.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야훼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먼저 자녀를 두어 그동안 한나를 업신여겼던 브닌나의 교만을 꺾어주시며 가정의 질서 또한 바로 세워주셨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삼상 2:5).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삼상 2:9). 한나의 고백적 탄원과 언약의 서원을 보면 아들 사무엘이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은총에 의해 태어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보면서 몇 가지 교훈도 얻게 된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헤아리신다는 것이다. 한나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응답을 얻을 때까지 기도했다. 또 성전에 나와 기도할 때 엘리 제사장이 술에 취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의 절박하고 애끓는 기도를 드렸다. 기도 없이는 결코 응답을 얻을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역전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 신다. 자녀가 없던 한나는 브닌나의 업신여김을 참고 견뎌야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나가 간구할 때 ‘은총’을 허락하셨고 고난의 주인공에서 영광의 주인공으로 그 삶을 변화시켜주셨다. 셋째, 한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의 깊은 통찰력과 겸손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기까지 숱한 고통을 겪었지만 사무엘을 낳은 후 자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다. 자녀가 내 소유물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이다. 자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다(시 127:3). 이 땅에 사는 동안 청지기 사명을 가지고 자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라도록 욕심을 버리고 말씀과 기도로 양육하며 한나와 같은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 2024.11.01 / 오정선 기자

    (111) 안디바
  •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주님을 섬기는 일에 타협 없던 안디바 한 사람의 순교가 지역 변화시켜 소아시아 버가모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도시로 유명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갖은 이유로 타협하고 우상숭배를 할 때 단 한 사람, 안디바는 우상숭배를 거부했다. 그는 뛰어난 석공이었지만 로마 황제의 신상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놋 가마 위에서 순교했다. 안디바는 로마 제국의 명령을 거절한 대가로 철판 위에 산 채로 구워져 순교를 당했지만 버가모교회 부흥의 씨앗이 됐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충성된 증인이라고 높여주셨다. 안디바라는 이름도 ‘모든 사람을 반대하는 자’라는 뜻이다. 안디바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핍박하는 로마 관리들에게 당당했다. 그는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예수 외에는 내가 절하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순교를 통해 책망받던 초대교회 중 하나인 버가모교회가 변화됐다.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지나온 삶을 끊지 못한 채 죄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던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은 안디바의 순교를 보고 180도 달라졌다.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고 흔들리던 이들이 우상숭배로 만연한 지역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게 된 것이다. 버가모교회가 있는 지역은 해발 300m의 높은 지역에 있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사탄의 권좌’라고 불리는 무려 12m나 되는 거대한 제우스 신전과 로마 황제를 예배하는 신전도 있었다. 라틴 교부였던 터툴리안의 『순교자에 대해서』라는 책을 보면 안디바에 대해 알 수 있다. 당시 버가모교회의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은 할례, 음식에 대한 규제, 율법을 지키는 것과 복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또 다른 부류는 이방인이지만 기독교인이 된 헬라 성도들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 거리낌 없이 해 왔던 우상숭배, 성적인 문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경건한 삶을 지켜가는 것에서 갈등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도 당당히 하나님께 순종한 안디바의 신실한 믿음은 신앙이 흔들리던 많은 크리스천의 마음에 경종을 울렸다. 생계를 위한다는 이유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난과 박해가 두려워 주님을 의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면 고통 속에서도 주님 한 분만을 바라보며 의지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를 기억하자.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 2024.10.04 / 박찬웅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