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힐링
공동체는 최후의 변증이다
  • 18세기 독일 복음주의 운동의 구심체였던 모라비안 형제단을 이끈 진젠도르프 백작은 공동체를 강조했다. 어떤 경우에도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함께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정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공동체 없이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다”(There is no Christianity without community)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라브리 공동체 운동을 시작한 프란시스 쉐퍼 역시 공동체를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관계는 세상이 우리(교회)의 메시지가 진실한지 아닌지 판단하는데 사용하는 척도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최종적인 변증입니다.” 참다운 공동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의 진실성을 가르는 최후의 변증(final apologetic)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공동체에서 어떤 진실한 사랑의 행위가 펼쳐지는 지를 보고 판단한다. 쉐퍼는 세상의 모든 이들, 부한 자나 가난한 자, 높은 자나 낮은 자, 모두 함께 모여 떡을 떼고 나누는 공동체성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했다. 라브리는 피난처란 의미다. 지금 사회 전체적으로 개인주의화가 만연되면서 공동체성은 극도로 약화되고 있다. 특히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교회에서마저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비대면 예배의 확산으로 모이기를 힘쓰는 분위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진젠도르프나 쉐퍼가 했던 공동체에 대한 언급을 심각하게 되새겨야 할 것이다. 공동체 없이는 기독교가 아니다! 참다운 공동체는 기독교인들의 최후의 변증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7.19

    기적일기
  • 강원도 태백의 개신교 영성공동체인 예수원을 창립한 고 대천덕 신부는 매일 ‘기적일기’를 썼다고 한다. 생전에 그는 우리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매순간 우리에게 기적 같은 일들을 보여주시고, 경험하게 해주신다면서 자신의 기적일기장은 하루도 빠짐없이 풍성한 내용들로 넘쳤다고 말했다. 의사이자 심리학자로 『아직도 가야할 길』을 쓴 스캇 펙은 의과대학에 다닐 때 자신은 기적이란 없다고 확신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적이 있음을 믿게 되었고 의사로서 기적적인 치유의 가능성도 열어두었다고 고백했다. ‘기적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갖게 되자 그는 일상적인 존재들을 기적이라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흔히들 기적이라고 하면 하늘에서 들리는 우렁찬 소리 등 너무 극적인 것만 연상하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매순간의 사건들을 기적의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캇 펙과 같이 기적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지닐 때 우리 삶은 훨씬 더 풍성하며 감사로 넘치게 될 것이다. 돌아보면 삶은 기적의 연속이다. 아니, 기적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엄청난 우주에서 한 점에 불과한 지구에서 우리가 살 수 있게 된 것, 그 중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 것, 믿음을 갖게 된 것이 기적이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기적의 대상이며 무엇보다 내가 지금 살아 있음을 기적으로 여길 때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6.14

    바닥이라는 은총
  • 인생길 가다 보면 ‘바닥을 쳤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현실에서 바닥을 친 경험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은 바닥을 쳤다는 절망감에서 삶의 줄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바닥을 치는 것은 쓰라린 경험이지만 믿음의 측면에서는 뜻밖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하늘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바닥에서야 삶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력(自力)이 아니라 타력(他力)임을 깨닫게 된다. 성경 속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바닥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살 소망도 끊어졌다”고 고백했다. 바닥을 쳤을 때 살 소망이 끊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바닥에서 우린 진짜로 죽을 수 있다. 나의 자아와 목적, 의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진정한 소망과 삶의 원동력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회복은 바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바닥으로의 추락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일 수 있다. 천양희 시인의 시 ‘새가 있던 자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그렇다.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믿음의 영역에서 바닥으로의 추락과 거기로부터의 회복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이다. 오늘도 바닥을 쳤다고 꺼이꺼이 우는 이들에게 “바닥이야말로 하나님 만나기에 참 좋은 곳”이라는 말로 위로를 하고 싶다. 살 소망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 참 소망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비상(飛上)의 은총이 임하기를….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5.17

    풍성한 삶의 비결, 기도
  •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한다. 부를 축적하거나 건강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사람들이 마음 깊숙하게 원하는 것은 뭔가 꽉 찬 것 같은 풍성한 삶, 충만한 삶이다. 물론 부나 건강도 그 충만한 삶의 필요 요소이긴 하지만 충분 요소는 아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살아갈 삶이 살아온 삶보다 적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더 깊은 여정에 들어가고 더 깊이 사랑하며 살기 원한다. 그것이 풍성한 삶이라고 직감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믿음의 선배들의 말을 종합하면 풍성한 삶의 비결은 기도하는 것이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하고 일을 하십시오. 일을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그런 다음 다시 일을 하십시오. 평생 하루도 거르지 말고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풍성한 삶의 비결은 간단하다. 기도하고 일하고, 일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루의 모든 삶에서 기도가 중심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늙어갈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하십시오. 그래야 신령한 일에 냉랭해지지 않습니다.” 뭔가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찰나의 욕망이 영원에 대한 갈망을 밀어내는 것 같을 때의 처방전은 단순하다. 삶에서 기도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헨리 나우웬은 “기도한다는 것은 모든 삶과 모든 사랑의 중심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라고 했다. 기도의 정신으로 하루를 살아보자. 기도의 나날이 축적될 때 어느 순간 충만한 사랑의 삶을 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4.19

    믿음이 실재가 되는 삶
  •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라고 말했다. 믿음은 결코 우리가 언젠가 도달해야 할 이상(理想)이 아니다. 믿음은 실상이며 생생한 증거다.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믿음이 실재가 되는 삶이다. ‘고아의 아버지’로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은 조지 뮬러가 평생 추구했던 것은 바로 믿음이 실재가 되는 삶이었다. 스스로 자기 인생의 최고 목표는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그가 5만 번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합 가운데 믿음이 실재가 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믿음은 도달하고 싶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이 아니었다. 생생한 실재였다. 그럼 어떻게 믿음이 실재가 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조지 뮬러는 믿음이 실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진실한 마음,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믿음이 실재가 되는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럴 때라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일상은 기적과 사랑의 연속이 된다. 신자로서 우리 모두 조지 뮬러와 같이 하나님과의 연합 가운데 믿음이 실재가 되는 삶을 사는 여정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개인과 교회, 나라의 부흥도 가능하다. 이 소망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된다. 믿음은 이상이 아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이 글을 접하는 모든 분들이 믿음이 실재가 되는 거룩한 도전을 하시기 바란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3.15

    행복한 의존자
  • 기독 작가 브레넌 매닝은 “신뢰의 길은 말할 것도 없이 모험의 길이다”라고 말했다. 보람을 느끼지 못해 돌연 직종을 바꾸는 것, 늙으신 부모를 힘겹게 봉양하는 것,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과 함께 침묵과 고독 속에 꼬박 사흘을 보내는 것,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후 환멸을 이겨내는 것 등 모든 도전은 기꺼이 미지의 세계를 걸으려는 모험과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려는 각오를 요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그분에 대한 우리의 신뢰일 것이다. 우리가 신뢰하는 대상은 만군의 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을 신뢰할 때 우리는 행복한 의존자(依存者)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신뢰의 길을 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신뢰의 대상이신 그분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많기에 우리는 의존자가 되기보다는 자존자(自存者)가 되려 한다. 자존자로서 철저히 자기의 힘, 즉 자력(自力)을 믿고 나간다. 그런데 정작 우리 삶은 대부분 자력이 아니라 타력(他力)에 의해 이끌려진다. 이츠키 히로유키는 “타력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나 이외의 뭔가 커다란 힘이 내 삶의 방식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고방식”이라고 했다. 나 이외의 타자가 나라는 존재를 떠받치고 있다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삶을 떠받치고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어떤 경우에도 그분께 의지하는 의존자가 되는 것이 신뢰다. 오늘도 우리는 그분을 향한 신뢰의 길을 떠나야 한다. 그래야 삶이 정돈되며 행복해진다. 신뢰라는 모험을 포기할 때, 우리는 삶을 버리는 모험을 하는 셈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2.16

    갈라진 틈에 서는 자
  • 지금 우리 주변의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갈라져 있는 것 같다. 정치와 경제는 물론이고 남북관계 등에서도 갈라진 틈이 좁혀지기는커녕 더욱더 커지는 것만 같다. 최근 남북 간의 긴장 수준은 예사롭지 않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했고, 이에 윤석열 대통령은 “만일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몇 배로 응징할 것”이라고 강 대 강 대응 방침을 분명히 했다. 한반도에 평화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위험한 상황이다. 정치계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그야말로 피 튀기듯 싸우고 있다. 포용과 타협, 조화라는 단어는 사라진 지 오래다. 시간이 갈수록 서로의 진영이 철옹성처럼 강화되고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갈라져 있다. “나는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지키려고 성벽을 쌓고,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서서, 내가 이 땅을 멸망시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보았으나, 나는 찾지 못하였다”(겔 22:30, 표준새번역). 무너진 성벽의 틈에 선 자를 찾지 못했다며 탄식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지 않은가. 그리스도인들은 갈라진 틈 사이에 서서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평화이시고,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다. 자신의 몸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담을 허무신 분이다. 오늘 이 땅을 바라보시며 갈라진 틈에 선 자를 찾고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때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1.19

    여호사밧의 기도
  • 미국의 기독교 저자인 스탠리 게일은 삶의 무게에 처절히 짓눌려 있을 때, ‘대적불가’(對敵不可)의 적을 만날 때엔 ‘여호사밧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호사밧은 다윗의 혈통을 계승한 아사 왕의 아들로 남유다 왕국의 네 번째 왕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법도를 신실하게 지켰던 선한 왕인 그 앞에 모압과 암몬 자손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대적불가의 적이었다. 여호사밧이 직감적으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뿐이었다. 여호사밧은 절규하듯 기도한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주만 바라봅니다!” 이에 하나님이 말하신다.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내게 속한 것이니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야훼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형통하리라.” 오직 주 앞에 엎드려 모든 것을 맡긴 그의 겸손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셨고 응답하셨다. 역대하 20장 30절에는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다”고 나와 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는 사람, 온갖 종류의 대적불가의 적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에게 절박한 마음으로 여호사밧의 기도를 드려볼 것을 권해본다. 그때 내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가 되어 그분이 풀어주실 것이다. 기도는 최후의 방법이 아니라 최선의 방법이다! 기도로 2023년 한해를 마감하자.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3.12.15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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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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