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힐링
십자가의 환상 
  •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십자가를 좇아야 한다.” 영국 출신의 성공회 주교로 35년간 인도 선교사를 지낸 레슬리 뉴비긴의 말이다. 그는 선교사로서만이 아니라 수많은 신학자와 선교학자, 기독교 사상가에게 영향을 미친 이 시대의 영적 스승이다. 삶의 상당 부분을 세계교회협의회에서 활동했기에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그를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한 인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주의자는 물론 복음주의자, 은사주의자들과도 깊은 교류를 한 폭넓은 인물이었다. 흔히 자유주의자와 영적 체험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뉴비긴은 강력한 체험의 신앙을 지녔다. 특히 케임브리지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보았던 십자가의 환상은 그를 평생 한길 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했다. 당시 한밤중에 깨어 있는 상태로 누워 있던 그에게 십자가의 환상이 보였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에 걸쳐 있는 십자가와 온 세계를 끌어안고 있는 팔이 보이는 환상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로운 일로서 그 십자가는 가장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인간에게 내려와 생명과 승리를 약속하는 상징과 같았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날 밤의 환상이 계기가 되어 나는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십자가를 좇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나는 길을 잃을 때 어떻게 내 위치를 찾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지요. 나의 지식이나 용기가 다 떨어졌을 때 과연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 세상을 이해하고 그 바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좇아야 한다. 십자가를 따르면 우린 결코 인생의 길을 잃지 않는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9.16

    펠릭스 솔리튜드
  • 라틴어 펠릭스(Felix)는 행복, 행운을 뜻한다. 유럽에서는 펠릭스란 이름의 남성들이 많다. ‘한여름 밤의 꿈’을 작곡한 멘델스존의 이름도 펠릭스다. 펠릭스를 넣어 다양한 조어(造語)를 할 수 있다. 펠릭스 뒤에 고독을 뜻하는 영어 단어 솔리튜드(Solitude)를 넣으면 ‘펠릭스 솔리튜드’(행복한 고독)가 된다. ‘행복한 고독’은 요즘에 아주 필요한 개념이다.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외로운, 고독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혼밥’, ‘혼술’이 흔해졌고 사람들은 수많은 이들과 함께 살아도 군중 속의 고독을 느낀다. ‘고독사’라는 단어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누구나 닥치는 퇴직 이후에 대부분 고독감과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다. 고독이 사무치는 외로움이 되지 않고 행복한 고독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끝까지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고독을 누리는 자가 되기 위한 여러 필요조건이 있을 것이다. 일찍부터 육체적 근육, 영적 근육, 재정적 근육을 잘 키운다면 노년이 되어 고독하더라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개연성이 높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동행할 때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펠릭스 솔리튜드’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선하신, 좋으신 주님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평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주님과 함께라면 고독의 시간은 침묵의 은혜가 넘치는 참된 행복의 순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살며 필사적으로 생명의 주님을 만나야 한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8.19

    자존자인가, 의존자인가?
  • 자기 스스로의 깃발을 들고 일어서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을 영웅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영웅은 될 수도, 발견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리의 대적(大敵)에 비해 너무나 연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시험에 무너진다. 외부의 시험 뿐 아니라 더욱 강력한 내부의 시험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우리의 대적은 치밀하게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파고드는데 탁월하다. 그래서 우리는 전능자의 그늘 속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거기가 안전하다. 그분은 우리보다도 우리의 대적보다도 훨씬 더 크고 강력한 분이시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간파한 독일의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실할 수 없고 그분이 우리 손을 잡아주셔야 한다. 우리가 그분을 위해 싸울 수 없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싸우셔야 한다.” 지금은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신뢰해야 할 때다. 우리의 일은 자기 힘을 다해 깃발을 드는 것이 아니라 전능자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존자(自存者)가 아니라 철저히 의존자(依存者)다. 전능하신 그분을 의존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존하는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일하시도록 해야 한다. 유약한 내가 아니라 ‘힘센 장수’이신 그분이 내 대신 싸워야 인생의 전쟁이란 큰 판에서 결국 이길 수 있다. 그분이 무대 위로 오를 때 게임은 끝난다. 우리의 대적은 절대로 이 의존의 원리를 이해할 수 없다. 철저한 자존자인 그에게 ‘신뢰’란 단어는 없기 때문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7.15

    우리들의 블루스
  •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형식의 TV 드라마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 편에 녹아 있다. 옴니버스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몇 개의 독립된 짧은 이야기를 늘어놓아 만든 한 편의 작품을 의미한다. 삶의 우여곡절이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엮어내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작가가 의도하는 하나의 주제로 수렴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공동체적인 연대감과 화해라는 주제가 들어 있다. 그래서 타이틀이 ‘너와 나의’ 블루스가 아니라 ‘우리들의’ 블루스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작가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주제는 행복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명 하나. 우리는 이 땅에 괴롭기 위해 불행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행복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 모두 행복하세요.” 마지막 회가 끝나면서 화면에 새겨진 글귀다. 성경은 여러 저자가 긴 세월에 걸쳐 쓴 66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지만 주제와 결론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옴니버스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한 가지는 바로 이 땅에 오실, 오신, 그리고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이야말로 우여곡절 많은 우리네 인생의 해석자요 해결자이시다. 드라마의 엔딩대로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그렇다면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 해답은 한 가지.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필코 그분을 만나야 한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6.19

    자유
  • 10일 열린 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자유’를 35번이나 외쳤다. 그는 “자유는 보편적 가치”라고 규정하며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자유로운 정치적 권리, 자유로운 시장이 숨 쉬고 있던 곳은 언제나 번영과 풍요가 꽃 피었다”고 말했다. “번영과 풍요, 경제적 성장은 바로 자유의 확대”라고도 강조했다. 자유는 믿음의 측면에서도 가장 중시되는 가치 가운데 하나다. 자유가 너무나 중요하기에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자유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주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선포하셨다. 교회사는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지난한 역사이기도 하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목숨을 걸고 추구했던 것이 신앙의 자유였다. 마틴 루터와 장 칼뱅, 얀 후스 등이 종교개혁을 위해 자신을 던진 것도 진리를 향한 진정한 자유를 갈구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개신교도인 위그노들이 긴 세월 동안 탄압을 받으면서 가톨릭 중심의 봉건 체제에 저항했던 것 역시 신앙의 자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비진리에 저항하며 자원해서 광야로 나가 참된 예배를 드렸다. 자유인으로서 개혁자와 진리의 수호자로 살기 위해 기꺼이 생명을 던졌다. 진정한 자유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다. 그분의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이 자유가 대한민국에 넘치게 되기를 바란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5.15

    죽어도 살겠고
  • 오래전 이 땅을 떠난 교회 후배의 어머님이 최근 요양병원에 들어가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랜 세월 홀로 사시다 결국 인생의 말년을 요양병원에서 지내야 하는 그 어르신의 모습이 너무나 처연해 보여 가슴 아팠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는 스스로 활동하는 분들도 있지만 ‘살아 있으나 죽은 자’ 같은 상태의 분들도 많다. 그들에게도 화려한 젊은 날이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침대에 누워 떠날 날 만을 기다리고 있다. 누구나 피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말년이다. 그들을 보면서 요한복음 11장 25절 말씀을 떠올린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참으로 위대한 주님의 말씀이다. 특별히 ‘죽어도 살겠고’란 말이 강력하게 다가온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지금 내가 보고 듣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상의 삶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살아 있으나 죽은 자’ 같은 요양병원의 모든 환자들이 다시 벌떡 일어나 활기 있게 활동하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믿을 때 부활은 현존하는 실재가 된다. 주님이 생명 자체이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죽어도 살게 되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결국 언젠가 요양병원 신세를 지게 될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허망하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어떤 상태에서도 하늘의 소망을 지닐 수 있다. 평생 주님을 신실하게 믿은 후배 어머님이 이 부활의 아침에 살아 계신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4.17

    가장 중요한 일
  • 최근 이 땅을 떠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생전에 “진짜 성공은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끝없이 가는 것”이라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성공은 ‘새로운 성공’이라고 말했다. 그 새로운 성공은 사람들로 하여금 뉴 라이프(New Life)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들어가길 간절히 원했던 이 전 장관이 추구한 뉴 라이프의 삶을 살기 위해선 ‘자아의 죽음’이 필수적이다. 자아를 포기하지 않고선 결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금세기 최고의 기독변증가인 C.S. 루이스 역시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자아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옛 자아는 사라지고 진정한 새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매일의 야망과 이루고 싶은 바람들의 죽음을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몸의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것입니다.” 결국 이 전 장관이 꿈꿨던 뉴 라이프의 삶을 살거나 루이스가 말한 새사람이 되기 위해선 자아의 포기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 가능하지 않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인간은 유한하다. 한국과 영국에서 ‘최고의 지성’이란 소리를 듣던 이어령도, 루이스도 이 땅을 떠났다. 주 예수님만이 영원하시다. 그 주님이 우리를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뉴 라이프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유한한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생명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3.20

    비판과 사랑
  • 제20대 대통령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공식 선거운동의 시작으로 거리에 후보자들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리는 등 분위기가 고조 되고 있다. 선거일인 3월 9일 저녁 늦게 당선자의 윤곽이 나올 것이다. TV토론 등 치열한 선거전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비판’이다. 비단 이번 대선만이 아니겠지만 유독 이번에는 비판의 수위가 높고 그 질도 좋지 않다. 건설적이며 정책적인 비판은 사라지고 온갖 네거티브가 판을 치고 있다. 비판은 비판으로 돌아온다. 비판의 악순환이다. 오직 승리만 바라보고 질주하는 후보자들에게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다. 비판의 기저에는 선과 악의 잣대가 있다. 물론 비판자는 ‘자신은 선이고, 상대는 악’이라는 절대 명제를 갖고 있다. 비판 거리를 찾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상대를 뜯어본다. 거기에는 사랑과 선, 격려라는 단어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경쟁자의 악을 끄집어내면 그 역시 상대의 악을 찾으려 온갖 방법을 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서로 ‘발악’(發惡)을 하게 되는 것이다. 비판의 공간은 온갖 악이 발하는 진흙탕이 되어버리고, 이성적이며 건설적 판단은 사라지게 된다.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비판은 눈을 멀게 하지만 사랑은 눈을 뜨게 한다”고 말했다. 사랑으로 눈을 뜨게 하는 후보자는 누구인가? 이번 대선에서 그런 후보자가 있는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인가? 부디 주께서 이 나라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2.02.20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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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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