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힐링
문학에는 구원이 없다!
  •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삼촌인 대전 행복이넘치는교회 담임 한충원 목사가 최근 조카에게 보내는 장문의 공개 서신을 발표했다. 한 목사가 굳이 ‘공개 서신’이란 이름을 빌려 한강 작가에게 메시지를 전한 것은 한 영혼의 구원, 더 나아가 이 땅의 잃어버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 역시 문학도를 꿈꿨던 한 목사는 서신에서 “문학에는 구원이 없다”면서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강 작가에게 문학도로서 세상에 소망을 주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일들이 진저리나게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이 세상에 어둠과 절망을 더 얹어주는 작품이 아니라 세상을 밝게 비춰주고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을 안겨주는 작품을 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먼저 조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빛을 받아 그 빛을 세상에 비추기를 바랄 뿐이네. 이 지구촌의 영원한 베스트셀러요 인류를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핏빛 사랑의 편지인 성경책을 반드시 읽어보길 바라네.” 그는 “사랑하는 조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과 같이 뜨거운 사랑의 작가요, 창조주 하나님께 인정과 칭찬을 받는 작가요, 사람들한테서도 사랑받는 작가로 다시 태어나길 축원하네”라고도 썼다. 한 목사의 말대로 문학이 구원의 도리를 전하는 멋진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문학 자체에는 구원이 없다. 구원은 오직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받아들여야 올 수 있다. 이 사실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한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11.15

    기쁨의 회복
  • 십여 년 전에 영국의 언론인 다니엘 튜더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는 한국이 이룬 놀라운 경제성장 등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한국인들은 그런 기적을 이루면서 많은 것들을 희생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기쁨이라고 했다. 기적과 기쁨을 절묘하게 대조하며 한국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한 제목이었다. 이후 한국은 발전을 거듭했고 많은 세계인들이 방문하기 원하는 대단한 나라가 됐다. 그럼에도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면에서 기쁨이 넘친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사실 크리스천은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뤄주시는 야훼로 인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크리스천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복을 추구하고 빵보다 더 중요한 기쁨의 양식인 말씀을 먹는 사람이다. 그래서 언제나 충만한 기쁨 가운데 살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기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미국의 영성 철학자인 댈러스 윌라드는 “무엇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삶이 아주 신나는 삶이며 그분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세상은 한국을 주목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뉴스는 홍수와도 같이 밀려온다. 이것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것으로는 결코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없다. 오직 기쁨 자체이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내면에 가득 찰 때 참된 기쁨을 회복하며 비로소 야훼를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10.17

    동행
  •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생전에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다. 뜻밖에도 그는 “나는 실패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내게는 친구가 없어요. 그래서 내 삶은 실패했습니다. 혼자서 나의 그림자만 보면서 동행자 없이 숨 가쁘게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동행자가 없다는 것은 사랑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말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이 전 장관의 그 말이 늘 생각이 난다. 누구나 진정한 동반자를 원하지만 정작 인간 세상에서 평생 변하지 않는 동행자를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 전 장관은 “더러는 동행자가 있었지만 나중에 경쟁자로 변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쉽지만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혼자 사는 즐거움’, ‘친구가 없어도 좋다’는 등의 이야기가 보편화되고 있다. 관계의 측면에서도 변화하는 세태를 반영하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동행자가 있다면 행복한 일이지만 없더라도 크게 슬퍼할 필요는 없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동행자보다는 주님을 동행자로 삼아 평생을 살아갔다.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린 조지 뮬러는 하나님을 영접한 이후 평생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 동행의 삶을 ‘거룩한 독립’이라고 말했다. 주님과 함께 걸으며 환경과 사건, 친구, 죽음 등 세상의 변수로부터 요동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관건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과 동행하면 우리는 거룩한 독립을 이루며 언제나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이태형 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9.12

    내가 문제입니다
  •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타인을 정죄하는 ‘비난 문화’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스포츠계에서도 서로를 향한 날선 비난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개인사에서도 상대를 향한 비난은 일상화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20세기 초에 영국의 런던타임즈는 “이 세상은 무엇이 문제일까?”(What’s wrong with the world?)란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졌다. 저명한 여러 작가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는데 영국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G.K. 체스터튼이 아주 간단한 답을 런던타임즈 편집장에게 보냈다. “내가 문제입니다.” 가장 짧은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체스터튼의 답이야말로 이 세상 문제의 원인을 간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길은 나를 버리고 내 안에 주님을 채우는 과정이다. 자아를 버리며 점점 더 겸손한 사람이 되는 여정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성숙해지면서 강도를 높여가며 자신이 문제의 근원임을 고백했다. 결국 그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였다”라고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국가적인 죄악을 보면서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다. 그들이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문제의 근원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난의 문화를 벗어나 존중의 문화를 펼쳐나갈 수 있다. 이 존중의 문화가 갈가리 찢어진 이 땅에 넘치기를 소망해본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8.16

    공동체는 최후의 변증이다
  • 18세기 독일 복음주의 운동의 구심체였던 모라비안 형제단을 이끈 진젠도르프 백작은 공동체를 강조했다. 어떤 경우에도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함께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정신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공동체 없이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다”(There is no Christianity without community)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라브리 공동체 운동을 시작한 프란시스 쉐퍼 역시 공동체를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관계는 세상이 우리(교회)의 메시지가 진실한지 아닌지 판단하는데 사용하는 척도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최종적인 변증입니다.” 참다운 공동체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의 진실성을 가르는 최후의 변증(final apologetic)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의 공동체에서 어떤 진실한 사랑의 행위가 펼쳐지는 지를 보고 판단한다. 쉐퍼는 세상의 모든 이들, 부한 자나 가난한 자, 높은 자나 낮은 자, 모두 함께 모여 떡을 떼고 나누는 공동체성이야말로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했다. 라브리는 피난처란 의미다. 지금 사회 전체적으로 개인주의화가 만연되면서 공동체성은 극도로 약화되고 있다. 특히 팬데믹 사태를 겪으면서 교회에서마저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비대면 예배의 확산으로 모이기를 힘쓰는 분위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진젠도르프나 쉐퍼가 했던 공동체에 대한 언급을 심각하게 되새겨야 할 것이다. 공동체 없이는 기독교가 아니다! 참다운 공동체는 기독교인들의 최후의 변증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7.19

    기적일기
  • 강원도 태백의 개신교 영성공동체인 예수원을 창립한 고 대천덕 신부는 매일 ‘기적일기’를 썼다고 한다. 생전에 그는 우리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매순간 우리에게 기적 같은 일들을 보여주시고, 경험하게 해주신다면서 자신의 기적일기장은 하루도 빠짐없이 풍성한 내용들로 넘쳤다고 말했다. 의사이자 심리학자로 『아직도 가야할 길』을 쓴 스캇 펙은 의과대학에 다닐 때 자신은 기적이란 없다고 확신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적이 있음을 믿게 되었고 의사로서 기적적인 치유의 가능성도 열어두었다고 고백했다. ‘기적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갖게 되자 그는 일상적인 존재들을 기적이라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흔히들 기적이라고 하면 하늘에서 들리는 우렁찬 소리 등 너무 극적인 것만 연상하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매순간의 사건들을 기적의 증거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캇 펙과 같이 기적에 대한 개방적 태도를 지닐 때 우리 삶은 훨씬 더 풍성하며 감사로 넘치게 될 것이다. 돌아보면 삶은 기적의 연속이다. 아니, 기적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엄청난 우주에서 한 점에 불과한 지구에서 우리가 살 수 있게 된 것, 그 중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 것, 믿음을 갖게 된 것이 기적이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기적의 대상이며 무엇보다 내가 지금 살아 있음을 기적으로 여길 때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6.14

    바닥이라는 은총
  • 인생길 가다 보면 ‘바닥을 쳤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현실에서 바닥을 친 경험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은 바닥을 쳤다는 절망감에서 삶의 줄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바닥을 치는 것은 쓰라린 경험이지만 믿음의 측면에서는 뜻밖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하늘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바닥에서야 삶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력(自力)이 아니라 타력(他力)임을 깨닫게 된다. 성경 속 믿음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바닥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살 소망도 끊어졌다”고 고백했다. 바닥을 쳤을 때 살 소망이 끊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바닥에서 우린 진짜로 죽을 수 있다. 나의 자아와 목적, 의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진정한 소망과 삶의 원동력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회복은 바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바닥으로의 추락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일 수 있다. 천양희 시인의 시 ‘새가 있던 자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그렇다.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믿음의 영역에서 바닥으로의 추락과 거기로부터의 회복은 모두 하나님의 은총이다. 오늘도 바닥을 쳤다고 꺼이꺼이 우는 이들에게 “바닥이야말로 하나님 만나기에 참 좋은 곳”이라는 말로 위로를 하고 싶다. 살 소망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 참 소망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비상(飛上)의 은총이 임하기를….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5.17

    풍성한 삶의 비결, 기도
  •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한다. 부를 축적하거나 건강하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사람들이 마음 깊숙하게 원하는 것은 뭔가 꽉 찬 것 같은 풍성한 삶, 충만한 삶이다. 물론 부나 건강도 그 충만한 삶의 필요 요소이긴 하지만 충분 요소는 아니다. 특히 크리스천들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살아갈 삶이 살아온 삶보다 적어지고 있다고 느낄 때, 더 깊은 여정에 들어가고 더 깊이 사랑하며 살기 원한다. 그것이 풍성한 삶이라고 직감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믿음의 선배들의 말을 종합하면 풍성한 삶의 비결은 기도하는 것이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뮬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하고 일을 하십시오. 일을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기도하고, 그런 다음 다시 일을 하십시오. 평생 하루도 거르지 말고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풍성한 삶의 비결은 간단하다. 기도하고 일하고, 일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루의 모든 삶에서 기도가 중심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늙어갈수록 기도를 더 많이 하십시오. 그래야 신령한 일에 냉랭해지지 않습니다.” 뭔가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찰나의 욕망이 영원에 대한 갈망을 밀어내는 것 같을 때의 처방전은 단순하다. 삶에서 기도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헨리 나우웬은 “기도한다는 것은 모든 삶과 모든 사랑의 중심으로 옮겨간다는 것”이라고 했다. 기도의 정신으로 하루를 살아보자. 기도의 나날이 축적될 때 어느 순간 충만한 사랑의 삶을 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4.19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