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힐링
최후변론
  • 헌법재판소는 지난달 25일 윤석열 대통령과 국회 측의 최후진술을 끝으로 대통령 탄핵심판 변론을 마쳤다. 윤 대통령과 국회 측은 이날 ‘최후변론’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최후변론’이라는 엄중한 단어를 생각해보았다. 이 땅을 사는 누구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지면 별문제 아니지만 인생들 누구나 마지막에 ‘판결의 골짜기’에 서게 된다. 거기서 헌법재판관과 같이 우리의 영원을 좌지우지할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최후변론을 하게 된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때 어떤 말로 자신을 변호할 것인가. 아니, 이 땅을 떠나기 전 우리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 될 것인가. 1945년 4월 9일 나치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진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이것이 마지막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목회자의 목회자’로 불린 유진 피터슨 목사는 2018년 10월 22일, 이 땅을 떠나기 전에 “함께 가자(Let’s go)”란 말을 남겼다. “이제 함께 새로운 믿음의 세계로 가자”란 뜻이다. 복음주의 지성 댈러스 윌라드 박사는 2013년 5월 8일, “땡큐(Thank You)”란 단어를 남기고 떠났다. 평생 주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던 그는 감사하며 본향으로 떠난 것이다. 사람은 모두 살아온 방식대로 죽는다.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최후변론을 하고 저 하늘의 본향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사람들이다. 그날, 판결의 골짜기에서 어떤 최후진술을 할지 생각한다면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결정될 것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원 대표)
  • 2025.03.14

    행복한 사람
  • 세계적인 심리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인 칼 융은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심각한 정신 질환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안감과 불행감”이라고 말했다. 요즘 대한민국의 상황을 돌아보면 더욱 이해가 되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불안하다. 개인의 삶이, 가정이, 공동체가, 나라가 불안하다. 불안감은 불행감으로 이어진다. 불안한 사회에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지내야 할 아이들도 일찍부터 삶의 무게를 느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불안감과 불행감을 단절해야 한다.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불행감을 느끼는 사람보다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최고의 전도법은 크리스천들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불행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을 주목하며 질문하게 된다. “도대체 당신의 행복 비결은 무엇이요?” 그때 행복의 이유를 말해줘야 한다. 신자들이 행복한 이유는 하늘 아버지인 하나님이 행복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행복한 분이셨다. 행복한 하나님과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는 자는 누구나 상황과는 상관없는 초자연적인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야훼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신 33:29).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해야 한다. 그분을 붙들어야 한다. 행복한 크리스천들이 넘쳐나고 그들이 행복 전도사가 될 때 이 사회의 불안감과 불행감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5.02.14

    배 안에 계신 예수님
  • 마태복음 8장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큰 풍랑으로 침몰 위기에 처한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제자들은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다급히 외친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시고,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당시 제자들이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을 상상해본다. 그들은 거센 물결에 금방 뒤집혀질 것 같은 배 안에서 패닉 상태였을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주무시던 예수님이 일어나 말씀 한 마디로 바다를 진정시키셨다. 공포와 두려움, 혼동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평안이 찾아왔다. 초자연적인 위기 속에서 그들이 간과했던 것은 배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존재였다. 배 안에 계신 분은 다름 아닌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실 하나님이신 주님이셨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분의 놀라우신 능력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 풍랑이 일시에 잠잠해지자 놀라며 말했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지금 대한민국은 거센 풍랑 속에 좌초될 위기의 배와 같은 상태에 처해 있다. 모두가 당혹함과 놀람을 넘어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2025년 대한민국호는 좌초 위기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것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의 배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그분이 일어나 한 마디만 하면 이 모든 혼동은 일시에 잠잠해질 것이다. 다시 대한민국호에 평온이 찾아오리라. 이 믿음 간직하며 주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기대하자.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5.01.17

    하나님의 다스림
  • 지금부터 51년 전인 1973년에 전 세계는 모로코의 지진, 리비아의 홍수 등 극심한 기상 이변과 재난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기상이변 뿐 아니라 심각한 영적 타락이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만연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당시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교회 담임이었던 데이비드 윌커슨 목사는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시선으로 지금 시대에 일어나는 일과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해 분별하자면서 온갖 혼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을 다스리고 계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 시대야말로 하늘을 가르는 하나님의 권능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의 떡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비상계엄 사태로 인해 대한민국에는 극심한 혼동이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한치 앞을 예측하지 못할 엄중한 상황이다. 언제 이 혼동이 종식될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상황 속에서도 확신해야 하는 것은 윌커슨 목사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여전히 이 대한민국을 다스리고 계시다”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지금 한국을 지켜보고 계신다. 하늘 아버지이신 그분은 우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이 인간의 잘 조직한 계획과 음모, 야망으로 진행되는 것 같이 보여도 이 땅의 현실을 이끌고 가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그분의 손길이다. 인간의 헛된 기도와 음모는 분쇄되고 끝내 그분의 뜻만이 우뚝 서게 된다. 지금은 다른 때가 아니다. 기도할 때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이 땅의 현실을 바르게 정리해달라고 구해야 할 때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 대한민국을 다스리고 계심을 확신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간구해 나가자.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12.13

    문학에는 구원이 없다!
  •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 작가의 삼촌인 대전 행복이넘치는교회 담임 한충원 목사가 최근 조카에게 보내는 장문의 공개 서신을 발표했다. 한 목사가 굳이 ‘공개 서신’이란 이름을 빌려 한강 작가에게 메시지를 전한 것은 한 영혼의 구원, 더 나아가 이 땅의 잃어버린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간절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 역시 문학도를 꿈꿨던 한 목사는 서신에서 “문학에는 구원이 없다”면서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강 작가에게 문학도로서 세상에 소망을 주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일들이 진저리나게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이 세상에 어둠과 절망을 더 얹어주는 작품이 아니라 세상을 밝게 비춰주고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을 안겨주는 작품을 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먼저 조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빛을 받아 그 빛을 세상에 비추기를 바랄 뿐이네. 이 지구촌의 영원한 베스트셀러요 인류를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핏빛 사랑의 편지인 성경책을 반드시 읽어보길 바라네.” 그는 “사랑하는 조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과 같이 뜨거운 사랑의 작가요, 창조주 하나님께 인정과 칭찬을 받는 작가요, 사람들한테서도 사랑받는 작가로 다시 태어나길 축원하네”라고도 썼다. 한 목사의 말대로 문학이 구원의 도리를 전하는 멋진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문학 자체에는 구원이 없다. 구원은 오직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받아들여야 올 수 있다. 이 사실을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한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11.15

    기쁨의 회복
  • 십여 년 전에 영국의 언론인 다니엘 튜더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는 한국이 이룬 놀라운 경제성장 등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한국인들은 그런 기적을 이루면서 많은 것들을 희생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기쁨이라고 했다. 기적과 기쁨을 절묘하게 대조하며 한국이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한 제목이었다. 이후 한국은 발전을 거듭했고 많은 세계인들이 방문하기 원하는 대단한 나라가 됐다. 그럼에도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면에서 기쁨이 넘친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사실 크리스천은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뤄주시는 야훼로 인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크리스천은 세상의 복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복을 추구하고 빵보다 더 중요한 기쁨의 양식인 말씀을 먹는 사람이다. 그래서 언제나 충만한 기쁨 가운데 살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기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미국의 영성 철학자인 댈러스 윌라드는 “무엇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삶이 아주 신나는 삶이며 그분이 기쁨으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세상은 한국을 주목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뉴스는 홍수와도 같이 밀려온다. 이것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것으로는 결코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없다. 오직 기쁨 자체이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내면에 가득 찰 때 참된 기쁨을 회복하며 비로소 야훼를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10.17

    동행
  •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생전에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다. 뜻밖에도 그는 “나는 실패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내게는 친구가 없어요. 그래서 내 삶은 실패했습니다. 혼자서 나의 그림자만 보면서 동행자 없이 숨 가쁘게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동행자가 없다는 것은 사랑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말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이 전 장관의 그 말이 늘 생각이 난다. 누구나 진정한 동반자를 원하지만 정작 인간 세상에서 평생 변하지 않는 동행자를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이 전 장관은 “더러는 동행자가 있었지만 나중에 경쟁자로 변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쉽지만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혼자 사는 즐거움’, ‘친구가 없어도 좋다’는 등의 이야기가 보편화되고 있다. 관계의 측면에서도 변화하는 세태를 반영하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동행자가 있다면 행복한 일이지만 없더라도 크게 슬퍼할 필요는 없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동행자보다는 주님을 동행자로 삼아 평생을 살아갔다. 고아들의 아버지로 불린 조지 뮬러는 하나님을 영접한 이후 평생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 동행의 삶을 ‘거룩한 독립’이라고 말했다. 주님과 함께 걸으며 환경과 사건, 친구, 죽음 등 세상의 변수로부터 요동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관건은 주님을 만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과 동행하면 우리는 거룩한 독립을 이루며 언제나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이태형 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9.12

    내가 문제입니다
  •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타인을 정죄하는 ‘비난 문화’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스포츠계에서도 서로를 향한 날선 비난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개인사에서도 상대를 향한 비난은 일상화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20세기 초에 영국의 런던타임즈는 “이 세상은 무엇이 문제일까?”(What’s wrong with the world?)란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졌다. 저명한 여러 작가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는데 영국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G.K. 체스터튼이 아주 간단한 답을 런던타임즈 편집장에게 보냈다. “내가 문제입니다.” 가장 짧은 에세이라고 할 수 있는 체스터튼의 답이야말로 이 세상 문제의 원인을 간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길은 나를 버리고 내 안에 주님을 채우는 과정이다. 자아를 버리며 점점 더 겸손한 사람이 되는 여정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성숙해지면서 강도를 높여가며 자신이 문제의 근원임을 고백했다. 결국 그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였다”라고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국가적인 죄악을 보면서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다. 그들이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문제의 근원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난의 문화를 벗어나 존중의 문화를 펼쳐나갈 수 있다. 이 존중의 문화가 갈가리 찢어진 이 땅에 넘치기를 소망해본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장)
  • 2024.08.16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