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오순절 조직신학
VII. 죄론(Hamartiology) - 4
  •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위한 기준 제시
    죄와 율법 죄론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죄와 율법의 관계이다. 죄와 율법의 관계에 분명한 명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죄의 선재성(pre-existence)이다. 죄가 율법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율법은 광야시대에 성문화 되었다. 성문화 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예를 들면 십계명이 생기고 나서 사람들이 열 가지 계명을 지키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미 유대 공동체 내에 우상숭배, 살인, 간음, 절도, 위증 등과 같은 죄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것에 대한 죄 의식도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죄들과 그 죄에 대한 형벌이 모세의 율법을 통해 문자화 된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십계명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출애굽기 20장 22절~23장 33절로 대표 되는 계약법전이 있고, 레위기 17~26장의 성결법전이 있다. 이것을 종합하고 보완한 신명기법전(신 12~26장)이 있다. 이 외에 율법의 행동지침과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장로의 유전과 규례가 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셨던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과 규례이다. 1. 율법의 본질 바울은 율법의 한계와 은혜의 법 사이의 긴장관계를 그의 서신 거의 모든 곳에서 날카롭게 드러내고 있다. 바울은 회심 이전 그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서 목숨을 다해 신봉해 왔던 율법에 대한 무한 신뢰를 파기하고 율법을 ‘초등학문’(골 2:20)과 ‘초등교사’(갈 3:24)로 평가절하시킨다. 바울은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convenantal nomism)를 포기하고 은혜의 법에 기초한 믿음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과 윤리, 도덕적 가치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율법을 그리스도인들이 버려도 되는 것 혹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본질 때문이다. 율법의 본질은 다음과 같다. 1)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된 것이다. 율법의 제사법은 인간의 범죄와 정결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죄를 가지고 그 앞에 설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한 성결법전의 내용과 목적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바울은 율법의 옹호자는 아니다. 그러나 파괴주의자도 아니다.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롬 7:7a)라는 말로 율법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항변하고 있다.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인간의 죄성(sinful nature)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2. 율법의 한계성 바울의 율법에 대한 의도는 율법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한계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율법은 율법 그 자체만으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거나 의롭게 할 수 없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로마서 서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통해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인의 당위성(롬 1:17)과 율법의 한계성을 역설하고 있다. 율법은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는 기능은 있으나 죄를 사하는 권세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율법)을 대조시키고 있다(롬 8:2). 히브리서 또한 율법의 불완전성과 대제사장의 유한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3. 율법의 목적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분별한 반율법주의(antinomism)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반율법주의를 넘어 극단적 율법파괴주의에 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의 목적과 효용가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1)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인간들이 그것을 다 준수할 것이라고 기대하셨을까? 물론 아니다.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로마서 3장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율법이 없다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다. 2) 율법에는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한 목적이 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도덕적 잣대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준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유용한 가치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8.30

    VII. 죄론(Hamartiology) - 3 
  • 성경은 죄와 인간의 필연적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씀한다. 이것은 아무도 죄를 피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더 나아가 죄의 삯(wage, 급여, 보수)은 사망이라고 단언하고 있다(롬 6:23). 인간의 수고와 이마의 땀으로 얻게 되는 급여는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선고이다. 한글성경에서는 복수와 단수를 구별하지 않고 ‘삯’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본에서는 복수형을 써서 ‘옵소니아’, 즉 ‘급여들’, ‘보수들’이라고 복수형을 쓰고 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죄의 종류와 가지 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부과될 것임을 말씀한 것이다. 4) 죄에 대한 형벌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죄에 대한 형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이해했다. 그는 인간의 창조를 세 단계로 이해했다. 첫째, 인간은 땅의 먼지(KJV, dust)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둘째, 먼지로 지음을 받은 육체에 네페쉬(혼, 생명)를 가지게 되었으며, 셋째,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영혼과 육체, 하나님의 형상의 결합이 분리되는 죽음 맞게 되었다. 이것은 곧 영적인 죽음,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을 낳게 된다. (1) 영적인 죽음 죄는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킨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죄를 허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성으로 인해 죄를 품은 인간은 그의 임재 가운데 공존할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이었다. 죄로 인해 인간의 영혼은 생명력을 상실했으며 더 이상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적인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인”상태가 되었다(창 6:5). 이것이 죄의 형벌로서의 영적인 죽음이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죄를 깨끗하게 할 수는 없다(롬 3:20; 7:7). 이런 영적인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2) 삶의 고통 타락 이후 고통은 인간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인간의 삶은 쉽게 무너지고 각종 질병의 포로가 되었으며 불안과 고통을 늘 겪게 되었다. 풍족했던 에덴동산의 삶은 사라졌고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더해 졌으며 인간은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게 되었다(창 3:16, 19). 창조 이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복은(창 1:28) 인간의 타락 이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뜻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인간의 삶 곳곳에 돋아나는 것이었다(창 3:18). (3) 육체적인 죽음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근거로 최초 인간 아담이 죽음을 전제로 한 유한한 존재로서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죽음을 전제로 창조하셨다는 근거는 창조역사 속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주후 418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첫 사람 아담이 죽을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으므로, 아담이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 상관없이 아담이 죽은 것은 죄의 삯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육체적인 죽음, 즉 흙으로 창조된 인간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벌은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언급되었다(창 3:19). 육체적인 죽음은 영적인 죽음과 함께 불순종한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인 것이다. 이 육체적인 죽음에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4) 영원한 죽음 유물론자들은 죽음을 존재의 소멸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유물론적 사관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죽음은 삶의 종결, 혹은 죽음의 완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원한 죽음은 벗어 날 수 없는 고통의 끊임없는 연속성을 말한다.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 지옥편에 보면 지옥문에 쓰여 있는 글귀가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마치 이 표현처럼, 영원한 죽음은 어떤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즉 죽음의 소망조차 품을 수 없는 고통의 연속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 11:26). 이 말씀은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아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통로이며 육체의 죽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것에 대한 약속이다. 죄는 형벌을 동반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형벌은 영생의 기쁨과 환희로 바뀌게 될 것이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7.05

    VII. 죄론(Hamartiology) - 2
  • 현대의 논쟁
    타락한 이후 인간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동양에서는 순자(荀子)가 주장한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다는 성악설(性惡說)과 맹자(孟子)가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性善說)이 팽배하게 대립하고 있다. 성경은 이 두 학설 중 성선설에 가깝다. 전도서 7장 29절은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힛솨본’인데 영어 성경(NKJV)은 ‘계략, 음모’(scheme)로 번역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이후 수많은 악한 꾀를 내는 존재가 됐다는 의미이다. 죄론에 대한 현대적 논쟁은 죄의 본질과 인식, 죄의 본편성과 전가성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원죄론에 대한 논쟁과 죄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죄의 본질 죄는 단지 인간이 행하는 그 무엇일 뿐만 아니라 죄가 인간 안에서 행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죄는 단지 인간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너머로 오기도 한다. 이전에 살펴본 것처럼 아담과 하와의 근원적 죄는 인간 내면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탄이라는 외부적 유혹에서부터 시작됐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함으로서 죄에 빠졌다. 죄에 대한 웨스트민스터의 대요리문답은 ‘죄란 하나님께서 이성적인 피조물에게 삶의 기준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일치의 결여 또는 위반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2) 죄의 인식 죄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과의 실존적 일치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떨어진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을 목표점으로 지향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 살며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을까? 자신도 철저하게 부패한 인간이 죄 가운데 살면서 어떻게 죄를 인식 할 수 있을까? 선은 악이 있을 때 선으로 인식할 수 있으며, 반대로 악은 선이 있을 때 악을 인식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해 칼 바르트(Karl Barth)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죄인이 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죄를 인간을 감금하는 ‘감옥’으로 생각했다. 이 감옥은 안에서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밖에서만 열 수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만 그 열쇠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없다면 죄를 인식할 수도 없고 죄에서 나올 수도 없다는 말이다. 3) 죄성(the nature of sin)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죄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내면 깊숙한 곳에 간직하고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기회가 주어지면 죄를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죄의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것은 환경과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신약성경은 죄(Sin)와 죄들(sins)을 구별 짓고 있는데, 보통 전자는 죄의 본성을 말하고 후자는 죄성의 결과 및 표현들을 의미한다. 죄의 속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나 죄는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죄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기에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다. (1) 죄의 보편성 성경은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고 선언한다(왕상 8:46; 시 143:2; 잠 20:9; 전 7:20; 롬 3:10~12; 롬 3:23; 요일 1:8).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결코 피할 수 없는 보편적 욕구라고 할 수도 있다. 로마서 3장 23절은 예외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죄에 무방비로 노출된 피조 세계의 보편적이고 전 우주적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 가셨다(롬 5:19). (2) 죄의 전가성(the imputation of sin) 구약시대의 제사를 보면 죄인은 제사장에게 번제물을 가져가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번제물에게 전가하기 위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해야 했다(레 1:4). 이 행위를 통해 죄인의 죄가 희생 제물에게 전가 되었다. 번제물은 죄인의 죄를 위해 희생되었고 죄인은 죄로부터 놓임을 받았다. 죄는 이런 전가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죄의 전가성은 제물에게로 국한된다는 점이다. 나이든 부모가 자식의 죄를 대신해서 처벌을 받겠다고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법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듯이 성경에서 죄는 사람을 포함한 어떤 것에도 전가되지 않으며 오직 제물에게만 전가된다. 죄의 전가에 대한 제한적 적용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게 볼 수 있는데 구약에서는 오직 희생제물에게만 적용되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상윤 목사(순복음홍콩신학교 학장)
  • 2024.05.03

    VII. 죄론(Hamartiology) - 1
  • 죄의 근본적 정의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
    인간은 죄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선언하고 있는데, ‘모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판테스는 인류 전체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단어이다. 우리 나라 말은 ‘죄’, 영어는 ‘sin’이라는 단어로 죄에 대해 포괄적인 의미로 지칭하고 있으나 성경은 ‘죄’에 해당하는 단어를여러 가지로 쓰고 있다. 구약성경은 8가지 다른 단어와 신약은 12가지의 다른 단어가 ‘죄’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 여러 단어 중에 헬라어 ‘하마르티아’가 죄론 (Hamartiology)의 어원이 되었다. ‘하마르티아’의 뜻은 ‘과녁에서 벗어나다’는 의미이다. ‘하마르티아’가 의미하듯 죄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는 살인과 도둑질과 같은 범법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최초 인류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볼 수 있듯이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불순종이다. 불순종은 단지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인간의 한계성을 넘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는 행위로 나타났다(창 3장). 또한 하나님의 보좌를 침범하는 행위와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을 의미 한다(사 14:13). 바울은 죄를 하나님의 ‘원수’(롬 5:10, 골 1:21)라고 했으며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롬 1:30)라고 했다. 1. 죄의 기원 (The Origin of Sin) 죄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죄가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했거나 진정한 행복을 선사한 적은 한 순간도 없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 가운데서 천사의 창조와 죄의 창조는 찾아 볼 수 없다. 모든 것이 다 보시기에 좋았고 악한 것은 없었다. 그럼 죄는 어디에서부터 온 것일까? 죄론에서 다루는 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로 간주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죄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할 수는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가운데 두셨다고 해서 인간의 타락을 유도했다고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결단코 악을 행하지 않으시며, 전능자는 결코 불의를 행치 않으신다(욥 34:10).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그의 안에는 불의가 전혀 없다(신 32:4; 시 92:16).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기능은 강요가 아닌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위함이다.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은 순종의 표현이며 과녁에서 벗어나지 않은 삶을 이어가기 위한 결단이다. 2) 죄는 천사의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타락을 말씀하고 있는 창세기 3장을 보면 인간이 죄를 짓기 이전에 이미 ‘뱀’으로 형상화 된 사탄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창 3:1). 이것은 죄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사야 14장 12~14절에 계명성으로 대변되는 천사의 타락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이 계명성을 영어 성경 KJV은 루시퍼(Lucifer)라고 번역을 했다. 사탄이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이미 존재했으며 이들로부터 죄가 인간에게 들어 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죄에 대해 인간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3) 죄는 인간의 고의적인 행위로 말미암은 것(롬 5:12, 18, 19) 죄는 외부로부터 온 유혹과 그 유혹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반응에서 시작되었다. 성경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만큼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선한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서 죄가 인간에게 들어 왔다. 인간은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면 안 된다. 4) 죄의 이해 (1) 교부 시대의 죄의 이해 동방 교부들은 죄를 포괄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이에 반해 서방 교부들은 죄의 문제를 윤리적인 것으로 심화했다. 그래서 교황을 비롯한 가톨릭의 성인들은 아무 죄(윤리적인 죄)를 짓지 않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아타나시우스). 서방 신학의 아버지인 터툴리안에 의해 처음으로 원죄론이 대두되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타락 전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지만, 타락 후에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2) 중세시대 토마스 아퀴나스는 죄의 종류를 ‘용서할 수 있는 죄’, ‘죽을 죄’,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범하는 죄’, ‘원죄 또는 유전 죄’, ‘행위 죄’, ‘원래적인 의의 결핍’, ‘질료’, ‘탐욕’ 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려고 했다. 루터는 죄를 철저히 인격적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죄를 감각적, 육체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의 영혼 안까지 도달한다고 생각했다. 멜란히톤은 죄를 ‘원래적인 의의 결핍’과 ‘탐욕’으로 이해했다. 칸트는 죄를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철저한 악’이라고 선언했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10.06

    Ⅵ. 인간론(The Doctrine of Humanity) - 3
  • 인간은 하나님의 실존이 투영돼 창조된 존재
    4. 하나님의 형상 (The Image of God, Imago Dei)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첼렘)과 ‘모양’(떼무트)대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26). 히브리어로 형상은 ‘첼렘’이다. 그 뜻은 ‘그늘지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그림자’(시 39:7)라는 뜻이며 ‘모양’은 ‘떼무트’인데 ‘닮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며 이 두 단어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두 단어가 주는 의미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실존이 그림자처럼 투영되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천지창조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다른 피조물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으며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특성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두 가지의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둘째는 타락한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1)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1) 형상(Image)과 모양(Appearance)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둘은 동일시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가 동일한 의미라며 창세기 1장 26절에서 굳이 이 단어를 구별해서 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 가톨릭과 개신교는 서로 다른 이해를 하고 있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형상(image)과 하나님의 모양(appearance)을 일반화하지 않고 구별해서 이해해왔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속성(attributes)과 성품(character)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모양은 외형적인 모습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하나님의 형상이나 모양을 하나님의 외형적인 모습으로 이해하면, 인간의 외형적인 모습과 같이 하나님도 눈이 두 개, 팔이 두 개, 손가락과 발가락이 있는 인간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모양과 틀에 갇혀 있을 수 없는 영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다(요 4:24).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외모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분명히 아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이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피조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2) 광의적 하나님의 형상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동의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의 범위와 의미에 대해서는 이견을 나타내고 있다. 개신교 내에서도 루터파와 개혁주의 뿐만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존재한다. 루터파는 제한된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요소로 제한시키고 있다. 그 결과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칼빈도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전적인 타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후기 개혁주의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광의적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이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사회적 성품, 지성, 인격, 윤리와 가치, 도덕적 성품까지 확대된 것을 말한다.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 에밀 브루너(Emil Brunner, 1889~1966)와 같은 신정통주의자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성 혹은 인간이 인간 사이에 맺고 있는 인격적 관계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2)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거룩하고 영적인 것으로 제한한다면,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의 타락은 영적인 죽음을 의미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과 그의 임재로부터 추방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광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 속에 남아 있게 된다(롬 1:19). 에덴동산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이 세상에 살면서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고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창 4:1~4)은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이후에도 인간에게 남아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는 바울이 말한 ‘하나님을 알만한 인간의 지성’을 인간에게 남겨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지혜가 인간에게 남아 있기에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타락 이전 하나님의 권한을 위임받아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한이 인간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을 상당부분 잃어 버렸고,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이것을 회복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6.30

    VI. 인간론(The Doctrine of Humanity) - 2
  • 영적인 상태와 직결되는 인간의 다섯가지 상태
    3. 인간의 상태 II 조직신학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조직신학의 인간 이해는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환경보다는 인간의 영적인 상태와 직결된다. 특별히 인간의 상태에 대한 이해는 창조와 타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최후의 심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의 상태는 다섯 가지로 이해 될 수 있다. 1)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Status Integritatis) 무죄의 상태에 있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으며 언제든 하나님의 임재에 참여 할 수 있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죽음의 공포, 질병, 고통, 슬픔, 불의 등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요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에 있는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간의 삶 속에 죄가 유입됐으며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2) 타락으로 인한 부패의 상태(status corruptionis) 완전한 선을 추구할 수 있었던 인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에덴동산에서 누렸던 권리는 모두 박탈되었고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거룩성은 사라졌고 하나님의 거룩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에덴동산의 풍요, 평화, 자유, 기쁨은 사라지고, 땀을 흘려야 먹고 해산의 수고와 고통을 짊어져야 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6~18).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잃었으며 하나님의 임재 밖으로 버려졌다. 목숨은 붙어 있었으나 이미 사망 선고가 내려진 상태였고 영혼은 부패했으며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었다. 죄의 욕망에 따라 살며 결국에는 죄 가운데 죽어갈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마음의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고(창 6:5)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유한한 존재가 되었다. 3) 그리스도로 인한 선사된 은총의 상태(status gratiae) 칼빈(John Calvin)이 말한 ‘전적인 타락’에 놓인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 즉 은총(카리스)만이 필요하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도 다른 길이 없다고 말한다(요 14:6).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어떤 이름도 주신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행 4: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우리의 영혼은 거듭나고 중생한다(롬 10:9). 이 거듭남과 중생의 결과로 인간은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은총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진리를 소유함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된다(요 8:32).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사망의 종이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법 아래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무죄 상태에 있던 아담과 달리 죄의 속성이 여전히 잔존해 있어서 끊임없이 죄의 유혹과 육체의 소욕과 싸워야 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라고 절규하는 바울의 모습은 이런 인간의 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다. 4) 구원을 받는 자들의 죽음 후 영광의 상태(status gloriae) 육체의 죽음은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늙고 병든 육체를 벗고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전환점을 맞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고전 15:20), 우리 또한 부활의 기쁨과 함께 신령한 옷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영광스런 상태가 된다. 이것이 구원 받는 자들의 죽음 후 영광의 상태이다. 아담과 하와가 잃어 버렸던 무죄의 상태를 회복하며 더 이상 죄와 사망, 질병과 고통에 지배되지 않는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절대적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함에 거리낌이 참여할 수 있다, 모든 희미하고 불분명했던 것들이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과 같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며(고전 13:12), 상함과 행함이 없는 완벽한 평화를 맛보게 될 것이다. 5) 저주를 받은 자들의 죽음 후 저주 상태(status damnationis) 죽음 후 인간의 상태는 믿는 자들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질 영광의 상태와 정반대되는 인간의 상태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죽음 후 놓이게 될 저주의 상태이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 기록된 글귀처럼 더 이상 어떤 소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함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사랑은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심판의 고통만이 영원히 지속되며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나(마 25:30), 돌이킬 수 있는 방법과 기회는 사라진 상태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는 기대할 수 없고 사탄과 죽음의 권세로 다스려지는 처참한 인간의 상태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3.03

    VI. 인간론 (The Doctrine of Humanity) - 1
  • 고대로부터 이어진 철학자들의 가장 주된 관심사와 질문은 ‘인간은 무엇인가’이다. 이 질문은 인간이 끊임없이 해 왔던 질문이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은 주로 인간의 본성이나 존엄성과 가치 등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를 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에 대한 이해의 영역은 생물학적인 인간의 이해나 형이상학적 인간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일반적인 인간론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간론은 인류학적인 인간이나 철학적인 인간 이해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기독교의 인간론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 인간의 삶의 목적과 의미뿐만 아니라 인간의 물리적 사회적 특성 또한 이해되고 논증되어야 한다. 이런 차이는 인간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접근에서부터 시작된다. 인류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기준점은 ‘지금의 인간’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인간을 이해하는 시작은 ‘현세적인 인간’이 아니다. 죄로 인해 일그러진 인간이 아닌 창조 시점의 인간 즉 본래의 인간(original human being)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인간론은 인류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과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야 할 참된 인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 인간의 철학적 이해 플라톤(Platon)은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구별하는 이원론적 존재로 이해했다. 플라톤의 이런 인간의 이해는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극단적으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고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나 악한 것으로 여기는 영지주의자들의 사상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중세를 지나며 인간에 대한 이분법적인 이해는 점차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인간을 영과 육으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이분법적 인간 이해보다는 인간의 실존과 이성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생각을 했고, 니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단순한 영혼과 육체의 분리와 조합이 아닌 자유와 책임과 같은 존재론적, 사회적-역사적 인간을 인간의 이해 대상으로 보았다. 2. 성경적 인간 이해 성경에서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나눠진 이원론적 존재일까? 아니면 영, 혼, 육으로 구성된 삼원론적 존재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혼’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달라진다. 1) 구약의 인간 이해 창세기 2장 7절을 보면 “야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어 원어로는 하나님께서 땅의 ‘먼지’(히. 아파르)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히. 네페쉬)를 불어 넣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간혹 하나님께서 성령(히. 루아흐)을 부어 사람이 되게 하셨다고 말하는 설교자들이 있는데, 창세기 2장 7절은 성령이 아닌 ‘생기’(히. 네페쉬)를 불어 넣어 사람을 만드셨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 2장 7절만 본다면 인간은 ‘육체’와 ‘생기’를 지닌 이원론적 존재이다. 그러나 욥기와 시편의 말씀을 종합하면 인간은 ‘먼지’(창 2:7; 3:19; 시 104:29)이지만 ‘생기’(창 2:7)와 ‘하나님의 숨결’(루아흐, 욥 27:3)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2) 신약의 인간 이해 구약성경은 ‘영’과 ‘혼’에 대한 구별이 분명하지 않아 ‘영혼’으로 쓰일 때가 많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혼’(헬. 프시케)와 ‘영’(헬. 프뉴마)에 대한 구별이 구약보다는 더욱 선명하다. 신약에서 ‘혼’(헬. 프시케)은 불멸적인 요소가 아니다. ‘프시케’는 종종 ‘인간 자신’(롬 2:9; 13:1)이나 ‘목숨, 생명’(마 10:39; 롬 6:4; 11:3)으로 쓰이고 있다. 신약성경의 삼분법적 인간 이해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프뉴마)과 혼(프시케)과 몸(소마)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육체와 영에 비교되는 ‘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육체의 부활’과 ‘영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만약 ‘혼’을 ‘몸’과 구별되는 또 다른 영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육체와 영의 부활’외에 다른 부활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육체의 부활’과 ‘영혼의 부활’을 주장하게 된다면 이것은 이미 ‘영’과 ‘혼’을 하나로 묶어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 짓는 이원론적인 인간 이해이다. 삼분법적인 인간관은 기독교 역사 초기의 희랍과 알렉산드리아 교부들(클레멘트, 오리겐, 그레고리)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예수님의 인성을 손상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면서 거부되기 시작했다. 이후 점차 어거스틴과 종교개혁자들을 포함한 서구 신학에서는 인간을 두 부분(육체와 영혼)으로 이해하는 기류가 형성되었다. 현대 신학자들에게 이분법적 혹은 삼분법적 인간 이해는 큰 논쟁의 대상이 못 된다. 칼 바르트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몸과 영혼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을 분리해 ‘육체’만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은 인간을 동물과 같이 생물학적, 해부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에 불과하다.),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으로만 인간을 이해하는 것 또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적 제한성과 상황과 환경 속에서 인간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환경과 조건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다른 본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의 인간은 인간의 속성을 가질 수 없으며 반드시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상태에서만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 3. 인간의 상태 조직신학적 인간이해는 인간의 상태를 다섯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타락 이전의 무죄의 상태, 둘째 타락으로 인한 부패의 상태, 셋째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한 은총의 상태, 넷째 구원을 받은 자들의 죽음 후의 영광의 상태, 다섯째 저주를 받은 자들의 죽음 후의 저주 상태이다. 1) 타락 이전의 무죄의 상태 타락 이전 최초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무죄 상태였다(창 1:26~28). 무죄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도 살아 갈 수 있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었으며 고통과 슬픔도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선을 추구하며 그것을 행할 자유(전 7:29)와 권한(창 1:26)을 부여 받았다. 타락 이전의 무죄 상태인 인간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회복하게 될 본래의 인간의 모습이다. <다음 호에 계속>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3.02.03

    V. 신론 (The Doctrine of God) - 3
  •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 모습 왜곡될 수 있어
    4.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믿음의 대상이며 실체인 하나님을 철학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헤어 나오지 못할 블랙홀을 헤매는 것과 같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인간 속에 두신 하나님의 선재적 행위로 인해(롬 1:19)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무모한 신기루를 쫓는 행위로만 규정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목적론적 증명(Teleological argument)이다. 모든 사물은 의미와 이유를 갖고 있다. 그 어떤 것도 고유한 의미 없이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은 무질서하게 계획과 목적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하늘의 수많은 별들 중 만약 어느 하나라도 궤도를 이탈하거나 다른 영역을 침범한다면 예기치 못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세상의 모든 것이 일정한 목적과 기능을 수행하도록 의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세심한 관찰 결과에 근거해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 목적론적 증명이다. 목적론적 논증은 고대 철학자들도 사용했던 방법론으로써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플라톤(Plato)과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를 중심으로 한 스토아(Stoa) 학파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신학적인 언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철학적인 용어인 ‘형상’(形相, form)과 ‘질료’(質料, matter)라는 단어를 썼다. 어떤 질료도 갖고 있지 않은 채 형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순수 형상(entelecheia)이라고 규정을 했는데, 이것을 신(God)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적인 복잡함을 제거하고 목적론적 증명을 신학적으로 단순하게 접근하면 이렇다. 세상 모든 만물은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는데, 그 목적을 부여하고 목적대로 사물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순수 형상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논쟁과 당위성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에서 신 존재 증명은 신학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분야는 아니다. 신 존재 증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신학자들도 많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지난 호를 참조). 현대 신학자들의 관심은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 혹은 학문적 방법론으로 증명하려는 노력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있다. 1)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의미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각 사람의 개인 속에 거하시는, 혹은 인간의 삶과 공동체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신가?”아니면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초월적이신 분이신가?”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문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시작하는 주기도문 서두에도 잘 나타난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분명히 하나님의 초월성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맺고 계신 내재적 하나님을 함축적으로 일컫는 단어이다. 2)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초월성은 그의 피조물인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천지를 창조하시는 모습에서 극명하게 나타고 있다. 천지 창조 속에 인간은 한 피조물일 뿐 천지 창조의 역사에서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초월해 계시며 그의 창조물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넘을 수 없는 초월성을 갖고 계시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적인 사건들은 자연적인 현상과 요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초월성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내재성마저 하나님의 초월성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칼 바르트(K. Barth)와 브라운(W.A. Brown)이 있다. (1) 칼 바르트(K. Barth)는 인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보여 주신 것만큼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의 ‘자기계시’조차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본성, 소유, 행위의 순수한 한계와 순수한 시초이며 인간과 모든 인간적인 것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서 무한한 질적인 차이 속에 대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 브라운(W.A. Brown)은 만약 하나님이 세계의 근거와 세계의 깊이로서 이 세상에 매어 있다면 하나님은 세상과 구별되는 자신의 자유와 독자성을 상실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언제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하나님의 주권은 쉽게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휴머니즘적인 사랑은 쉽게 동질화 될 수 있다. 즉, 다시 말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기 위한 심판과 징벌도 하나님 사랑의 일부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는 없다. 그의 초월적 선택과 주권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내재성 하나님의 내재성은 역사적으로는 타락과 회개를 반복하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전쟁에 개입하시며 개인의 삶을 주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의미한다.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불트만(Rudolf Karl Bultmann),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 로빈슨(John A. T. Robinson) 등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있다. (1) 본 회퍼는 하나님은 주변 세계나 배후 세계가 아니라 우리 세계의 중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서 우리는 ‘세상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9 (Aufl, 1959), 184f; 필만, 『교의학』, 189). (2) 틸리히는 관념주의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은 내재화된 초월자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초월성보다는 인간의 삶 속에 내재화된 모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3) 로빈슨은 하나님은 세계 위에, 또는 세계 밖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깊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인간의 자율성은 사라지는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없으며 세상의 악과 부조리 또한 하나님의 의지로 치부될 수 있다.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위험에 빠질 우려도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균형을 잡지 못하면 신앙은 변질되기 쉽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강조되면 하나님의 모습은 심하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깊은 신학적 고찰과 신앙적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 2022.11.04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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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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