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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는 어릴 때 올챙이로 살아간다 
  • 대부분의 개구리 종류와 도롱뇽은 서식하는 환경이 물과 물 밖의 육지라는 생태환경에서 동시에 살아가는 동물이라서 양서류(兩棲類)라고 한다. 개구리가 낳은 알에서 성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모습이 매우 다르다. 대부분 양서류는 곤충이 알에서 성장해서 성충으로 변태(metamorphosis)하는 과정처럼 외모의 변화가 크다. 알에서 갓 부화한 모습은 몸통과 꼬리만 있어 보인다. 물고기처럼 아가미가 있어서 물속에서만 살아야 한다. 큰 몸통과 꼬리를 좌우로 흔들어 움직이며 전진하는 모습을 보면 사뭇 우스꽝스럽다. 나중에 수영하는 유선형 성체를 보며 육지에서 점프하는 개구리나 의젓하게 앉아 있는 모습과 비교가 된다. 과거에 자신의 초라했던 처지를 모르고 거드름 피우는 이들에게 ‘개구리가 올챙이 때 생각하지 못 한다’라는 핀잔을 받는 일은 개구리 어린 시절 올챙이 때를 잊었다는 의미일거다. 한편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개구리는 올챙이 때와 같은 생활을 하면 안 되고 성체가 된 이후는 성숙한 삶이 되어야 한다.(고전13:11) 개구리는 봄이 되면 얇은 호수나 연못에 산란을 한다. 자연 상태에서 부화하여 작은 올챙이가 된다. 이때는 물속에 식물성 플랑크톤이나 조류(藻類, algae)를 먹으며 나중에는 동물성 플랑크톤을 주로 먹는다. 시간이 지나면 몸통에서 뒷다리가 먼저 나오고 나중에 앞다리가 나온다. 성장과정을 볼 때 서식환경이 올챙이 때는 살던 수중에서 육지로 옮겨가고 호흡기는 아가미에서 양서류 특유의 폐로 호흡한다. 필요한 부분은 축축한 피부점막을 통해서 산소를 흡수한다. 먹이는 수중 식물류에서 구하다가 육지의 동물성 곤충으로 바뀐다. 여기서 흥미로운 일은 올챙이 꼬리는 점점 작아지다가 결국 없어진다. 그 이유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영양분을 얻기 때문이다. 꼬리를 이루고 있는 세포가 스스로 죽어 몸으로 소화됨으로 개구리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영양분을 공급하는 창고 역할을 한다. 일종의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세포로 이루어진 꼬리이다. 신앙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과 이후의 삶이 달라져야 한다. 세상을 향해 진정성 있는 경건한 믿음생활의 본을 보여야 한다. 과거에는 세속에서만 살 수 밖에 없었던 삶에서 새로 거듭난 인생으로 사는 일이다.(요3:3)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윤철종 목사(또오고싶은 교회, 이학박사)
  • 2025.04.29 / 이미나 기자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
  •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장 15~17절) 사람의 일생은 만남과 관계의 일생입니다. 좋은 사람과의 만남은 그 일생을 행복하게 만들고, 나쁜 사람과의 만남은 그 일생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근본은 평생 안 바뀐다고 합니다. 급한 사람은 평생 급한 성격대로 살고, 온순한 사람은 평생 온순하게 산다고 합니다. 한 번 배신하면 또다시 배신하고, 정말로 힘들고 어려울 때 의리를 지킨 사람은 끝까지 의리를 지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머니께서 저에게 가르치신 말씀 가운데 하나가 “사람을 사귀려면 3년을 지켜보고 나서 그 사람을 알고 난 다음에 마음의 문을 열어라”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저는 처음 만나서부터 무조건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을 믿는데, 그러다가 많은 실수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기준을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찾아가셔서 그를 용서하고 다시 세워주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제자 가운데 수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최측근에서 전 제자들의 대표 역할을 하면서 많은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붙잡혀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려갔을 때 그 집 뜰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닭 울음소리를 듣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너는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라 할 것이다.” 그 말씀이 생각나자 그는 밖으로 나가 통곡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75절은 설명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는 스승에게 가장 사랑받던 수제자였는데 자기 스승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배신자라고 하는 좌절감에 빠져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의 고향 갈릴리로 내려갔습니다. 갈릴리로 내려가서 옛날 물고기를 잡던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주신 사람 낚는 어부라는 사명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자신을 배신하고 멀리 도망간 베드로를 잊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를 배우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1. 용서하시는 예수님 먼저 용서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실패와 좌절과 고통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떠나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밤새 그물을 던지고 또 던지고 또 던졌지만, 물고기 한 마리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어디로 그물을 던지면 고기가 잡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밤새 그물을 던져도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인생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아무리 인생의 그물을 던져도 무엇 하나 건지지 못하는 그러한 헛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3절은 설명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밤새 한 마리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절망과 좌절에 처해 힘없이 뱃머리에 앉아 있는 그 절망에 찬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물가에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차마 배를 타고 도착할 때까지 배에 타고 있을 수 없어서 물에 풍덩 뛰어들어 헤엄쳐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온몸에 물이 젖어 떨며 물을 뚝뚝 흘리며 예수님께 나가고 다가갔을 때, 예수님은 그를 위해 모닥불을 피워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 9절입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밤새 그물을 던지고 한 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해 배도 고프고 피곤하고 지치고 또 춥고 떨리는 모습으로 올 베드로라는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아침을 준비해 놓으시고 그를 따뜻한 사랑으로 맞아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허물, 남의 과거, 남의 실패, 남의 상처에 관심이 많습니다. 자신도 크고 작은 허물이 많음에도, 스스로 의로워서 밤낮 지나간 남의 과거를 들춰내고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 실패와 상처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그러한 허물 많은 사람을 용서하시고 품으시고 다시 회복시켜주시고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도 이제부터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손에 들었던 비난의 돌을 내려놓고 사랑과 용서로 화목하며 하나 되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음식도 마련해 놓고, 추위에 떨었다는 것을 아시고 모닥불을 펴놓고 계셨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마음속에 내가 스승님을 배반했다고 하는 그 상처는 평생 그를 붙잡는 트라우마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와 보니까 자기가 모닥불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는데, 예수님이 모닥불 펴놓고 기다리고 계시니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겠습니까? 예수님을 모닥불 앞에서 부인했던 자신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배신했던 그 자리에서 그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품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누구보다도 낙심하고 좌절하고 스스로 깊은 상처에 빠져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배신자라고 하는 그 좌절감을, 상처를 치료해 주기 위해서 친히 그를 모닥불 앞에 부르시고, 배신한 장소를 용서의 장소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2. 사명을 주시는 예수님 세 번 배신한 베드로에게 세 번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심으로 그 마음의 상처를 완전히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그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때때로 배신하고 등지고 세상을 향해 나갔다고 할지라도,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주시고 우리에게 다시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1) 내 어린 양을 먹이라(Feed my lambs) 그에게 주신 첫 번째 사명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네 이웃이나 네 가족이나 너의 명예나 너의 지위나 너의 가진 그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이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돈을 더 사랑할 때가 있고, 세상의 지위, 권세를 더 사랑할 때가 있고, 명예를 더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는 오늘 주님 앞에서 우리의 가슴에 손을 꼭 얹고 물어봐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 모든 걸 다 잃어도 내가 변함없이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고백할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이 어린 양이라는 것은 교회 안에 약한 지체들, 믿음이 약한 성도들, 아직 성숙하지 못한 믿음이 어린 새신자를 말합니다. 그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고 신앙이 잘 자라도록 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무관심하거나 소홀히 대할 수 있는 우리 어린 자녀들, 청소년들, 다음 세대에 대해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요즘 많은 아이가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나기에 문제아가 됩니다. 우울증에 빠지고 또 성격 장애가 생겨나고, 인터넷 중독, 핸드폰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스스로 절망에 처한 삶을 삽니다. 부모의 무관심 속에 아이들의 병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를 위해서 좋은 것은 다 한다고 하면서 그저 학원 열심히 다니고 좋은 대학 가는 것에만 목표를 세워서 너무나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줍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좌절해서 통계에 따르면 중고등학교 중퇴자가 50만 명이 넘습니다. 저들이 학교 밖에서 지금도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어린 양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합니다. 사랑의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품어야 합니다. 이 아이들이 우리 교회의 미래요,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이기에 주의 사랑으로 어린 양들을 돌봐야 합니다. 새신자를 돌봐야 합니다. 2) 내 양을 치라(Take care of my sheep) 주님께서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다음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고 두 번째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말씀하신 다음에 다시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치라” 요한복음 21장 16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내 양을 치라는 말은 나의 양들을 보호하라 보살피라 이 말씀입니다. 이 양은 우리 교회 구성원들을 말합니다. 우리 좌우 옆에 있는 우리 성도님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을 이단과 무속 신앙,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지키고 보호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많은 이단이 우리 주변에 와서 서성거리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낚아채 가서 이단에 빠지게 합니다. 신천지가 들끓고, ‘하나님의교회’라고 하는 이단이 들끓고, 주변에서 이런 이단들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온갖 무속 신앙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자꾸 유혹해서 잘못에 빠지게 합니다. 마귀가 우리 삶을 도둑질하기 위해서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어려움 당한 성도,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를 주의 사랑으로 돌봐야 합니다. 장애인 교우들, 절망 가운데 사는 탈북자 가정, 독거노인들, 다문화 가족 등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돌보는 것이 그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5절, 36절, 40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제부터 우리의 관심을 우리 이웃에게 돌려서 우리 주변에 나보다 어렵고 힘들게 사는 많은 이웃들을 주의 사랑으로 돌보는 주님의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살면 된는 것은 얼마나 못된 신앙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이기주의적인 모습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올바른 신앙관이 아닙니다. 받은 은혜를 나눠주는 것이 올바른 신앙관이요, 베풀고 섬기는 것이 그것이 복 받은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돌봐라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사명으로 알고, 이제부터는 우리 여생, 우리 주변에 약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문제 있고 힘없는 사람, 인권 사각지대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 양을 먹이라(Feed my sheep) 다시 한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다음 세 번째로 또 사명을 준 것이 “내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7절입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여기 첫 번째 “내 어린 양을 먹이라”와 여기 세 번째 물음에서 “내 양을 먹이라” 하는 것은 그 대상이 다릅니다. 이것은 영적 성장과 관계가 있습니다. 교회 내에 이제 이미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기존 성도님들을 잘 양육하고 그들을 영적으로 강건하게 만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새신자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이미 신앙생활을 하는 분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심하여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말씀으로 잘 양육하고 훈련해서 건강한 성도가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건강한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난 제자를 찾아오셔서 다시금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세 번이나 강조해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고꾸라졌습니다. 나는 배신자인데 나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예루살렘을 떠나 이곳 갈릴리까지 와서 고기를 잡는 옛 어부의 모습으로 돌아갔는데, 그 자리까지 찾아오셔서 본인을 세 차례나 사랑하냐고 물으시고 그를 사랑하고 용서하시고 사명을 주신 그 사랑이 너무 감동되었어요. 그때로부터 그의 여생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진 하나님의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주님의 제자의 일생이요, 또 마지막 네로 황제 시대 때 그가 순교해서 순교로서 주님 앞에 그 사랑의 빚을 갚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가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난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하고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되어서 사도행전 전반부 1장부터 12장까지 그 모든 사역의 중심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전반부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역한 베드로의 기록이고, 후반부는 이방 선교를 한 사도 바울의 기록인데, 그렇게 위대한 사도로 그의 남은 인생 쓰임 받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어린 양을 돌보라고 말씀합니다. 상처 입은 이웃을 돌보라고 말씀합니다. 주변에 있는 성도들을 말씀으로 잘 양육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상처 입은 이웃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시작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사명자가 되어서 주님 앞에 순교하기까지 그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헌신한, 일사각오로 헌신했던 주기철 목사님이 계십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1897년 11월 25일 경남 창원 웅천에서 태어나셨는데 4남 3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때 형을 따라서 교회를 처음 방문한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이었습니다. 평양 오산학교에 진학해서 기독교 신앙을 깊이 받아들이고 난 다음 이름을 원래 이름이 기복이었는데 기철로 바꿨습니다. 기독교를 철저히 믿겠다고 이름을 기철로 바꾼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믿을 때 이미 사명자로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1916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는데, 지병인 안질이 악화되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부흥회 때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주의 종이 되기를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25년 목사 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를 차례로 담임하면서 목회자로서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 준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내가 섬길 수 없습니다.”라며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신사참배 거부 결의안을 그 노회에서 우리로 말하면 지방회에서 만들어서 항의하기도 하고,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면서 하나님 나라 회복을 위해서 그는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며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나 1938년 9월 10일 장로교 제27차 총회에서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일본 순사와 경찰이 둘러싸고 있는 그 자리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합니다. ‘신사참배를 하는 것은 신앙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식적인 거니까 와서 절해도 된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이것은 우상을 숭배한 것이라고 단호하게 거부했고 일제가 그를 붙잡아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감옥에 집어넣을 때 그의 죄목이 황실 불경죄, 천왕에 대해서 그가 불경했다. 그리고 치안유지법 위반, 즉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질서를 무너뜨렸다.’ 그래서 감옥을 집어넣었는데 1938년 2월에 그해 가을에 2차로, 1939년 8월에 3차로, 1940년 5월에 4차로 약 7년 동안 감옥에 집어넣어서 혹독한 고문을 시키다가 거의 죽게 되면 풀어 놓아서 집에 가서 이제 응급 치료받고 좀 회복이 되면 또 잡아넣고 또 잡아넣고 손자인 주승중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가장 심한 혹독한 고문이 뭐였냐 하면 채찍질하고 쇠못 박기, 코에 고춧가루를 넣은 고춧물 뿌리기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혹독한 고문은 널빤지에 팔과 발을 다 묶어놓고 아랫도리를 벗기고 요도에다가 쇠꼬챙이를 찔러 넣어서, 한두 달 동안 얼마나 고통이 심한지 소변을 볼 때 피고름이 나고, 기어 다녀야 하셨고, 그런 고통을 받다가 결국 1944년 4월 21일 광복을 1년여 앞두고 49세를 일기로 그의 일생을 마무리합니다. 마지막 감옥 들어가기 전에 유언과 같은 설교를 남깁니다. 그의 고별 설교 내용을 우리가 함께, 목사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버리지 마세요.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기철이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결단코 하나님 외에 무릎 꿇고 절할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는 이보다 차라리 죽어 없어져 주님 향한 정절을 깨끗이 지키려 합니다. 주님 따르는 죽음은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너무너무 사랑하셔서, 우리가 주님을 배신하고 멀리 떠났어도 찾아오셔서 다시 사명을 주시고 우리를 세워주셨습니다. 우리가 배신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을 더 사랑하며 우상을 섬겼고, 물질을 더 사랑하며 우상을 섬겼고 잘못된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고 또 용서하여 주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정말 여생 주기철 목사님처럼 일사각오로 주님 잘 섬기고 예수의 사랑을 인생에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찬송가 508장(통 270)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1절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세 후렴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2절 주 예수 말씀이 온 세상 만민들 흉악한 죄에서 떠나라 하시니 이 말씀 듣고서 새 새명 얻으라 이 기쁜 소식 전하세 3절 영생의 복락과 천국에 갈 길을 만백성 알도록 나가서 전하세 주 예수 말씀이 이 복음 전하라 우리게 부탁하셨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선조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아낌없이 주님께 내려놓았는데, 우리는 너무나 모든 것을 움켜쥐고 살아왔습니다. 알량한 자존심을 움켜쥐고 가진 얼마 안 되는 물질을 움켜쥐고 명예를 움켜쥐고 세상 권력을 움켜쥐고 살았던 우리의 잘못을 회개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상이었습니다. 이 모든 우상을 이 시간 다 제거해 버리게 하시고 일사각오로 주님을 잘 섬기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 2025.04.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5월 3일(토)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 ◎ 말씀 : 빌 3:8~9 ◎ 찬송 : 94장(통 102장) 바울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체험하고 깨달은 지식이었습니다. 바울은 과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동안 열정을 다해 좇던 삶의 목적과 가치가 배설물처럼 여겨지는 큰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이 변화를 통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야말로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꿀이 달다는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맛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꿀의 달콤함을 직접 경험한 사람만이 그 참맛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그분께 드리는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가게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주님을 체험함으로 최상의 가치가 예수님께 있음을 깨닫는 우리가 되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4.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5월 2일(금) - 사랑의 표현
  • ◎ 말씀 : 빌 1:3~8 ◎ 찬송 : 85장(통 85장) 바울은 그가 선교를 시작할 당시부터 교류했던 빌립보 성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의 머리말에서 바울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기쁨으로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성도들에게 잘 보여서 호의를 얻기 위한 아첨의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친밀한 사귐은 표현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종종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어색해하거나 주저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사랑도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그 마음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담아두지 않고 겉으로 표현할 때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처럼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며 나아가 그 사랑의 마음을 표현함으로써 이웃과 더욱 깊은 관계를 추구해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교회와 이웃을 바라보며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4.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5월 1일(목) - 고난 속에서 굳건해지는 믿음
  • ◎ 말씀 : 왕상 17:24 ◎ 찬송 : 370장(통 455장) 사르밧 지역에 한 과부가 살았습니다. 그 과부는 아들과 함께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자신의 가난한 처지에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엘리야가 그 집에 찾아왔습니다. 엘리야의 말에 순종하여 음식을 준비한 과부는 음식이 계속해서 채워지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아들이 병에 걸려 죽게 되자 과부는 엘리야를 원망했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로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녀는 엘리야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름 없는 한 과부의 속사정까지 헤아리고 도와주시는 참으로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실 리가 없습니다. 고난과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 오늘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4.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4월 30일(수) - 참사랑
  • ◎ 말씀 : 엡 5:1~2 ◎ 찬송 : 270장(통 214장) ‘사랑’이란 단어는 아름답고 귀하면서도 다채롭게 다가옵니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그 의미와 무게는 달라질 수 있지만 요즘 사람들은 너무 쉽게 사랑을 말하고 때로는 너무 쉽게 사랑을 포기하곤 합니다. 순간적인 감정에 빠져 사랑한다고 했다가 막상 그 사랑에 대해 책임지거나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쉽게 사랑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스턴트 사랑’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쉽게 얻고 잃을 수 있는 인스턴트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참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이처럼 목숨까지 아끼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바로 참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그 사랑을 전하는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희생적인 사랑을 하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4.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4월 29일(화) - 분노를 털어 버리라
  • ◎ 말씀 : 엡 4:26~27 ◎ 찬송 : 274장(통 332장) 오늘 본문에서는 옛 사람의 성품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의 성품을 입은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희로애락의 감정을 갖고 있기에 특정 상황에서 분노할 수는 있지만 그 분노를 품은 채 하루를 마무리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분노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것을 빨리 털어내지 않으면 또 다른 죄로 이어질 수 있으며 마귀가 그 틈을 타 시험에 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초반에 다스리지 않으면 전체를 태우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분노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되 혹여나 우발적으로 분노하더라도 그 분노에 잠식되지 않아야 합니다. 온유하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분노를 빨리 털어 버리고 마음을 평온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지켜 분노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살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4.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4월 28일(월) - 조용한 성전 건축
  • ◎ 말씀 : 왕상 6:7 ◎ 찬송 : 220장(통 278장)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성전 터에서는 돌을 다듬거나 나무를 조각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망이나 도끼 등의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조용한 성전 건축이 가능했던 이유는 세밀하고 철저하게 준비된 성전 설계도에 따라 미리 다듬고 가공된 돌과 나무를 가져와 조립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거룩한 장소인 성전은 이렇듯 철저하고 경건하게 건축되었습니다. 주님은 모난 돌과 같은 우리를 다듬으셔서 주님의 몸 된 성전을 지어가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모난 모습으로 인해 교회 안에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거룩한 은혜의 성소가 지어질 때 거친 연장 소리가 나지 않았듯 교회에는 다툼과 갈등이 없어야 함을 기억합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몸 된 성전으로서 다른 지체들과 갈등하지 않고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며 살게 해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2025.04.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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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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