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신앙
요한계시록-세상의 끝을 보다
  •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0~21)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시간의 흐름을 따라 흐른다. 그 시간은 언젠가는 끝에 다다를 것이다. 시간의 끝에 이르렀을 때 세상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시간의 끝, 즉 종말의 때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될까? 요한계시록에 그 해답이 담겨있다. 요한계시록의 저자, 배경, 구조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1:1~2). 사도 요한은 주후 90년경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정치범수용소인 밧모섬에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때 요한계시록을 기록했다. 도미티아누스는 황제숭배를 로마 전역에 강요했던 군주로 자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차 없이 형벌을 가했다. 오직 예수님만을 구주로 고백했던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대대적인 박해에 시달렸고 많은 이들이 순교를 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인이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야 했던 공포의 시대에 기록되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에는 요한이 주님께 계시를 받아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기록되어있다.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의 공통점은 예수님께만 충성을 바치라는 것이다. 4~11장은 세상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인 일곱 인과 일곱 나팔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12~19장은 예수님의 승리와 사탄의 패배가 기록되어 있다. 20~22장은 천년왕국의 시작과 사탄의 완전한 패망,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의 도래가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의 장르 요한계시록은 편지이다(1:4).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주님께 말씀을 받아 기록한 내용을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수신자들이 있고, 발신자인 사도 요한의 구체적인 메시지가 담겨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이다(1:3, 22:7). 예언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하는 말이다.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만큼 앞으로 벌어질 일을 길고 자세하게 다룬 책은 없다. 요한계시록은 묵시이다(1:1). 묵시도 예언처럼 앞으로 벌어질 일을 말하지만, 예언과 구별되는 점은 예언이 ‘현재의 세상’이 변화될 것을 전한다면, 묵시는 ‘현재의 세상’이 지나가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올 것임을 전한다는 것이다. 묵시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재림이 있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지금의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 즉 하나님 나라가 도래한다는 것이 기독교 묵시의 핵심 주제이다. 요한계시록을 볼 때 유념할 점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하게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상징으로 가득 채워진 이 어려운 책을 해석함에 있어서 무엇을 유념해야 하는지 살펴보는 일은 가능하다. 첫째, 요한계시록을 역사의 사건이 차례대로 기록된 책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이 역사에 벌어질 일들을 순차적으로 기록한 책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이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독교적 역사관에서는 ‘역사 속에 펼쳐질 구체적인 사건들을 알아가는 것’보다 ‘예수님이 초림하심으로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역사 속에 일어날 일을 알려 하기보다 예수님이 구원을 완성하심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시작됐다는 확신을 품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둘째, 요한계시록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한 편지임을 기억한다. 혹자들은 요한계시록을 현대에 있을 일을 암호화하여 기록한 책처럼 여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은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편지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요한계시록이 ‘현대’에 있을 사건을 암호화한 책이라면 목숨을 걸고 신앙생활 했던 ‘2000년 전’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책이 처음 쓰였을 때의 목적을 살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교훈 시대정신에 고개 숙이지 말라 요한계시록이 쓰일 당시 로마제국은 다신교 문화가 시대정신을 지배했으며 이 같은 풍조에 편승하지 않으면 큰 손해가 따랐다. 사회적으로 소외됐으며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다신’(多神) 중 하나인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유일하신 예수님만을 섬겨야 하는 그리스도인이 이 같은 시대정신을 따를 수는 없었다. 요한계시록은 다신교라는 반기독교적 시대정신에 휩쓸릴 위험에 놓인 성도들에게 유일하신 예수님만을 따르라고 말씀한다(14:4).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충성을 바친 성도에게는 ‘생명의 관’이 수여될 것이다(2:10).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기독교적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시대정신을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두려워 말고 소망하라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을 유발하는 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 승리하실 것임을 말씀하는 책이며, 우리가 받을 구원과 우리가 입성할 하나님 나라를 예언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위로의 책이고, 사랑의 책이며, 소망의 책이다. 요한계시록 중간 중간에 기록된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찬양은 우리에게 하늘의 감격을 선사하고 결미에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는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품도록 해준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우리, 그리스도 안에 속한 우리가 지녀야 할 마음은 무엇일까?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상의 끝 날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다. <끝>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12.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교회를 지켰던 믿음의 선조들
  •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요이 1:4) 성경에는 예레미야와 같은 긴 책도 있는 반면 매우 짧은 책도 존재한다. 이번에 다룰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가 그렇다. 짧은 책의 장점은 하나의 핵심 메시지가 일관되고 분명하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를 개관하고 이 책들이 전하는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요한이서 요한이서 개관 요한이서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사도 요한의 영향력 아래 있던 작은 교회 공동체였을 것이라 생각된다(1:1). 요한이서는 동일한 저자의 책인 요한일서와 강조하는 메시지가 유사하다. 바로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에서 울려 퍼지는 요한의 목소리를 통해 이단으로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호하고 교회를 지키고자 했던 노(老)사도의 열심을 발견할 수 있다. 요한이서의 교훈 ① 서로 사랑하라(1:5): 요한일서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책답게 요한이서는 사랑의 메시지가 강조된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특별히 성도 간의 평등한 관계를 강조했다. 이는 한편으로 교회 내의 조직이나 위계적 직제에 대해 요한이 유독 거부 반응을 보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교회의 조직과 직제는 필요하다. 왜냐하면 교회를 질서 있게 운영하고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효율적으로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과 직제 때문에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조직과 직제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그릇에 담겨 운영돼야 한다. ②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1:7): 저자 요한은 교회를 향해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고 목 놓아 외친다. 이 거짓 교사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들이다. 성육신을 부정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부정하는 자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모르는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지 않으셨으면 즉 육체로 오지 않으셨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십자가 대속은 성육신을 전제한다. 따라서 성육신 없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요한삼서 요한삼서 개관 요한삼서의 저자 또한 사도 요한이다. 요한삼서의 특별한 점은 저자가 특정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가이오'라는 성도이다(1:1). 나아가 요한은 요한삼서에서 특정 개인을 책망한다. 그 사람은 '디오드레베' 당시 교회 지도자이다(1:9). 이처럼 특정인들의 이야기가 담긴 요한삼서의 특징을 통해 우리는 교리적 메시지뿐 아니라 성도 개개인의 삶과 이야기도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자, 가이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1:2). 우리가 무척이나 사랑하는 이 성경 구절은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전한 말이다. 가이오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 같은 축복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요한삼서에 따르면 가이오는 참된 것을 분별할 줄 알았다. 그는 올바른 가르침을 전하러 온 순회 설교자들을 알아보고 그들을 사랑으로 환대했으며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1:5~6). 우리도 가이오처럼 참된 것을 분별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면,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삼중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유다서 유다서 개관 유다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유다이다(1:1). 저자가 유대인이기 때문인지 유다서는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유다서는 유대인의 조상들에 관한 이야기가 내용 중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유다서는 이단, 특히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핵심 메시지이다. 그런데 유다서의 독특한 점은 보통의 서신들이 이단들의 거짓된 주장을 교리적으로 반박하는 일에 집중하는 데 반해 유다서는 이단들을 향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데 힘을 쏟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단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규탄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는 귀중하다 유다서에서 책망 받는 이단 영지주의는 육체를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 육체를 어찌나 혐오했던지 이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육체를 지니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기까지 했다. 성육신에 대한 부인은 명백한 이단적 주장이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육체는 정말 무가치한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성육신이 그 증거이다. 부활한 예수님이 '육체'를 지니셨다는 것 또한 증거가 된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하셨다고 말씀한다(고전 15:20, 44). 하나님은 '육체'를 지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창 1:31). 우리 또한 마지막 날에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육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값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전인격을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육체는 무가치하니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틀렸다. 그리스도인은 영, 혼, 육 모두를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거룩하고 온전하게 지켜야 한다. 유다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분이라고 말씀한다(1:24). 우리를 흠 없이 거룩하게 세우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마지막까지 우리의 육체를 거룩하게 지켜나가자.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11.2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요한일서-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9) 신학자 윌리엄 틴데일은 요한일서에서 받은 감동을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됐다." 요한일서는 사랑의 서신이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다고 말씀한다.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구원받은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요한일서의 저자, 특징 요한일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다.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저자 자신이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는 표현은 저자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요한임을 증명한다. 요한은 자신의 또 다른 편지인 '요한복음'에서 스스로를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요 13:23)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요한일서에서도 사랑을 핵심 가치로 내세운다. 그래서 요한에게 붙여진 별명이 '사랑의 사도'이다. 요한일서의 특징은 '사랑'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의 의'를 강조했던 로마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또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씀한다(롬 3:26). 반면 하나님의 사랑을 기치로 내세우는 요한일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말씀한다(4:9). 이는 요한의 또 다른 편지인 요한복음에서도 강조되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요한일서의 배경 요한일서는 주후 90년경에 쓰였다. 당시 교회는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영지주의 이단 때문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거룩하지만 육신은 부정하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영혼의 구원을 받았으면 육신은 아무렇게나 내버려 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육신으로 죄짓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요한일서는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해 진리의 빛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라고 역설한다. 영지주의자들은 한술 더 떠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지 않으셨고 오직 영으로만 오셨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이 부정한 육신을 입으실 리 없으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영으로만 오셨다는 이단 사설을 '가현설'이라 한다. 요한일서는 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반대한다. 요한일서의 저자는 첫 번째 구절에서부터 자신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즉 예수님은 성육신하셨다고 말한다(1:1). 요한일서의 구조 요한일서는 비교적 짧은 서신이지만 그 안에서 핵심 주제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1장은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해 말씀한다. 빛이신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거짓이 없이 진리 안에서 행해야 한다. 혹 죄를 범했다면 필히 죄를 자백해야 한다. 스스로를 속여 죄가 없다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실 것이다. 2장에서도 빛 안에 거하는 삶에 관한 말씀이 나온다. 특별히 2장에서는 형제 사랑을 강조한다. 그리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 찬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이단을 물리치라 말씀한다. 3장은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관해 말씀한다. 재림의 소망을 지닌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3: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3:9). 요한일서는 죄를 짓지 않는 삶을 구체화하는데,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다. 4장은 이단을 분별하라 말씀한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님이 육체를 지니고 오셨다는, 즉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는 이단적 사상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보이셨고, 이 사랑을 경험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5장은 예수님이 "물과 피"를 지니고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한다(5:6). 이는 예수님이 육신을 지니셨음을 증언하는 것이며, 나아가 자신의 육신을 제물로 드리신 십자가 사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흘리며 죽으시고 구원을 이루셨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도록 한다. 요한일서의 교훈 성육신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도 없다 사랑은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래서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주셨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육신을 지니고 오셔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4:9~10). 그러므로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을 부인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하나님을 만난다. 사랑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독생자를 희생하신 사랑의 하나님께 속하게 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요한일서는 말씀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4:7). 사랑의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은 가장 값진 예수님을 내어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이웃을 사랑하자!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실 것이다(4:12).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10.2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베드로후서-진리를 좇고 거짓에 맞섰던 사도
  •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7~18) 사도 베드로가 죽음을 앞두고 교회를 향해 권면의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는 성도들이 더욱더 성숙해지고 재림의 때까지 진리 위에 바로서기를 바랐던 베드로의 간절함이 담겨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 목적 베드로후서의 저자는 베드로이다. 베드로후서에는 책의 저자가 베드로임을 증명할 수 있는 구절들이 등장한다. 1장 14절에서 저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순교를 예고했음을 말하고 있으며, 1장 16~18절에서는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하신 예수님을 목격했던 사건을 언급한다. 베드로후서의 목적은 교회를 내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다. 초대교회는 내외부의 적들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외부의 적은 교회를 박해했던 로마제국이었고 내부의 적은 교회에 침투했던 이단들이었다. 외부의 적이 칼과 제도로 교회를 박해했다면 내부의 적은 거짓과 술수로 교회를 공격했다. 베드로후서의 구조 총 3장으로 이루어진 베드로후서는 장별로 내용의 구분이 뚜렷해 구조화하기가 수월하다. △ 1장은 재림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신앙과 재림의 확실성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1:4)을 받았다. 이러한 약속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해야 한다. 연이어 베드로후서는 예수님의 재림이 신화와 같은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씀한다(1:16).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의 근거로 두 가지를 든다. 첫째, 베드로 자신이 봤던 공생애 시절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이다.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화는 예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셔서 만물에게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증거이다. 둘째, 구약 성경에 언급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들이다(1:20~21). 구약의 예언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우리는 이것들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 믿어야 한다. △ 2장은 하나님이 거짓 선지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베드로후서에서 말씀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를 부인한다(2:1).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님이 참하나님이자 참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왜곡되게 받아들인다. 둘째, 방탕한 삶을 산다(2:2). 거짓 선지자들의 방탕한 삶은 자신들이 영혼의 구원을 이미 받았으니 육신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그릇된 사상에 기인했다. 셋째, 성도들에게서 이득을 취했다(2:3). 탐심이 많던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된 말로 성도들의 재물을 취했다. 베드로후서는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2:9). △ 3장에서 베드로후서는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번에는 좀 더 상세히 재림의 확실성에 대해 논증한다. 당시 몇몇 이단은 재림을 부인했다. 이들의 주장은 두 가지 근거에 기인했다(3:4). 첫째, 예수님께 직접 재림의 약속을 받은 자들이 이미 상당수 죽었다는 것. 둘째,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먼저 재림은 약속을 받은 자들의 생사 여부에 상관없이 언제나 유효하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은 영원히 기억돼야 한다(3:2). 또한 세상은 창조 이후 홍수로 이미 변화를 경험했다(3:5~6). 이때의 변화는 재림 이후 있을 마지막 변화,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근거이다(3:13). 베드로후서의 메시지 지연되는 재림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재림은 우리의 기대와 달리 속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왜일까? 베드로후서는 그 이유가 영혼 구원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에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3:9). 나아가 인간의 시간 개념에 따르면 재림은 지연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재림은 지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시간을 초월해 계시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장 8절은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라고 말씀한다.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라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베드로후서는 하나님과 같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1:4). 그 신성한 성품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베드로후서는 이를 순차적으로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1:5~7). 흥미로운 사실은 이 여덟 가지 가치의 처음과 끝이 각각 '믿음'과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시작해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됨으로 완성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08.2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베드로전서-‘산 소망’을 품은 나그네들
  •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책에는 그 책의 키워드가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베드로전서에도 키워드가 있다. 바로 ‘나그네’이다(1:1, 17;2:11).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을 본향은 하늘에 있고 이 땅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로 지칭한다. 천국 시민으로서 낯설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그네와 같은 그리스도인들, 이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하는 책이 바로 베드로전서이다. 베드로전서의 저자, 배경, 특징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책의 이름에 나와 있듯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이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를 직접 쓰지 않고 실루아노라는 동역자의 손을 빌렸다(5:12). 베드로전서는 로마의 5대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대대적으로 박해하던 시기에 쓰였다. 베드로는 로마제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끝까지 박해를 견디도록 권면하기 위해 베드로전서를 썼다. 여러 초대교회 성도들이 베드로의 서신을 읽고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의 특징은 다른 신약 서신 대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거짓 교사를 경계하라는 내용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생명을 위협하는 박해를 견뎌내는 일이 무척이나 시급하고 힘겨웠기에 거짓 교사의 위험은 상대적으로 크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베드로전서가 쓰일 시점에 기독교 박해는 매우 격심했다. 베드로전서의 구조 베드로전서의 구조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1장 1절~2장 10절은 마지막 때에 받을 구원이라는 성도의 소망이 주제이다. 중반부 2장 11절~4장 11절은 마지막 때의 구원이라는 소망을 지닌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 방법이 주제이다. 후반부 4장 12절~5장 14절은 박해를 견디며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 성도가 지녀야 할 삶의 자세가 주제이다. △ 전반부(1:1~2:10): 베드로전서는 박해로 고통 받고 있는 성도들을 향한 위로의 메시지로 시작된다. 그 위로의 근거는 소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주께서 다시 오실 때 구원받아 천국에 이를 것이니 그날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받는 박해를 견디라는 것이다. 베드로전서는 ‘여러 가지 시험’이 있을 수 있으나 기뻐하라고 말씀한다. 왜냐하면 박해를 이긴 성도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1:6~7). 나아가 베드로전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언급하며 성도를 위로한다. 세상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은 그저 평범하거나 하찮은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2:9)이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존재들이다. 사람들에게 버림당한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듯이 그리스도인도 세상에서는 멸시와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나님께 택함받은 하늘나라 백성이다. △ 중반부(2:11~4:11): 중반부에서 베드로전서는 천국 소망을 지닌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한다. 세상의 권력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다루는 2장 13~17절은 베드로전서만의 독특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베드로전서는 세상의 정치 제도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씀한다(2:13).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그 제도에 순응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세상의 제도에 순응하는 태도가 ‘주를’ 위하는 길이다. 베드로전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고 있을까? 그것은 세상과 다퉈서는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선행’을 베풀고 섬겨야 할 대상이다(2:15). 만약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섬길 때 세상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을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 중에는 노예가 많았다. 베드로전서는 노예 신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의 말을 전한다. 예를 들면 노예들에게 어떤 주인을 만날지라도 그에게 순종하고 오래 참으며 성실히 일하라고 말씀한다. 내용 전반을 미루어보아 베드로전서가 성도들에게 강조하는 삶의 자세는 ‘화목’으로 점철된다. 화목에 대한 베드로전서의 강조는 다음과 같은 베드로전서의 권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3:9). △ 후반부(4:12~5:14): 후반부에 또 한 번 베드로전서는 성도에게 박해를 견디라고 권면한다. 박해와 시험을 당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성도는 마지막 때에 즐거워할 것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신다(4:12~14). 베드로전서는 목회자를 향한 권면도 잊지 않는다. 베드로전서는 목회자에게 권위적인 자세를 취하지 말고 성도를 자신의 뜻대로 이끌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대신에 성도에게 본을 보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성도를 인도하라고 권한다(5:2~3). 베드로전서의 메시지: 나그넷길의 위로자 필자는 서론에서 베드로전서의 키워드가 나그네라고 언급했다. 베드로전서는 천국에 본향을 둔 나그네와 같은 성도의 삶을 다루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그네의 삶은 고달프다. 한곳에 정착해 자신의 보금자리에서 사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바람이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나그넷길을 걷는 성도도 힘겨운 삶을 산다. 성도는 어서 빨리 천국에 안착해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성도에게는 고단한 나그넷길을 걷는 데 위로해줄 분이 계시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나그넷길을 걷는 성도에게 위로자가 되실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성도에 앞서 그 길을 걸으셨고 그 여정을 완수하여 먼저 천국에 올라가 계시기 때문이다. 성도가 예수님을 본받아 그 자취를 따라간다면 언젠가는 예수님을 따라 하늘 본향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나아가 성도가 천국 소망을 주저함 없이 품을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1:19). 우리의 구원은 완전하고 우리의 소망도 완전하다. 그러므로 성도는 변치 않는 소망을 붙들고 늘 ‘은혜에 굳게’ 서야 한다(5:12).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07.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야고보서-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하늘의 처소가 예비 돼 있다. 사실 천국에 갈 자격을 얻었다면 성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만을 기다려야 할까? 아니다. 장차 천국에 이르게 될 자격을 얻었을지라도 성도는 이 땅에서의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야고보서는 이에 대해 답해준다. 야고보서의 저자, 배경, 특징 △ 저자: 야고보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다. 야고보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보낼 당시에는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았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됐다(고전 15:7). 바울이 이방 지역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면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바울의 이방인 사역을 승인해준 것은 야고보의 큰 업적 중 하나이다. △ 배경: 야고보서가 기록된 시기는 주후 60~62년경으로 본다. 이 시기는 네로 황제가 로마를 통치할 때인데 당시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다. 야고보는 주후 62년 순교했다. △ 특징: 바울서신과 히브리서 등 신약의 여러 책은 주로 구약성경의 구절을 인용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바로 구약의 성취임을 말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야고보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을 많이 인용했다. 야고보서의 구조 및 메시지 구조를 구성하기에는 야고보서의 구조가 매우 밋밋하다. 왜냐하면 야고보서는 여러 짤막한 교훈이 나열된 일종의 지혜 문헌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야고보서의 구조를 파악하기보다 야고보서 전체를 교훈 단위별로 나눠서 하나씩 살펴보고 그에 따른 메시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 시련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1:2~12): 그리스도인도 시련을 겪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시련 중에도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련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더욱더 온전해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시련을 통과한 그리스도인은 마지막 때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 유혹은 어디에서 오는가(1:13~18): 죄의 유혹은 우리 안에 있는 욕심에서부터 비롯된다.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물욕, 음욕, 명예욕 등 우리 안의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 말씀을 듣는 것과 실천하는 것(1:19~27):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말씀을 실천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2:1~13): 야고보서는 부자에게는 친절하고 빈자에게는 불친절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지적한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를 동일하게 사랑해야 한다.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2:14~26): 말로만 타인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하다고 할 수 없다. 믿음 역시 마찬가지다. 믿는다고 하면서 의롭게 행하지 않는 사람은 참된 믿음을 지녔다고 할 수 없다. △ 혀의 힘(3:1~12): 혀는 몸에서 매우 작은 지체이나 그 힘은 실로 대단하다. 말에게 재갈을 물려 말을 제어하듯, 우리는 혀에 재갈을 물려 우리의 온몸을 제어해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맞춰야 한다. △ 위로부터 오는 지혜(3:13~18):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욕심을 따라 행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를 구하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그 지혜란 성결, 화평, 관용, 양순함, 긍휼과 같은 선한 열매이다. △ 순종과 화목에 대한 가르침(4:1~12): 야고보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라고 가르친다. 죄의 유혹과 마찬가지로 다툼도 인간의 욕망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리스도인이 욕망을 제어하고 겸손 하다면 갈등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 부를 좇는 삶의 허망함(4:13~5:6): 야고보는 부를 좇는 삶이 얼마나 헛된지 지적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미 부를 얻은 자는 사치하거나 방종하지 말며 품꾼에게 정당한 삯을 지불해야 한다. △ 인내하라는 권고(5:7~11): 세상에서의 삶은 힘들다. 생계의 문제가 있고 인간관계에서 겪는 어려움도 있으며 박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품고 인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어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 병자를 위한 기도(5:13~18): 교회는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해주어야 한다. 죄를 회개하고 병 낫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다. 야고보서와 이신칭의 어떤 이들은 야고보서가 바울의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받는다는 신앙에 반대하는 서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동의하기가 어렵다. 성령님께 영감을 받아 기록된 성경의 각 권이 서로 모순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고보서는 왜 이토록 행함을 강조하며 심지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야고보서가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 쓰였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당시 몇몇 사람들은 이신칭의를 오해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받았으면 굳이 의롭게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해진 사람은 마땅히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줄기차게 강조했다(롬 6:12; 골 3:5; 살전 4:1). 바울은 믿음과 행함을 결코 분리하지 않았다. 바울에게 행함은 믿음의 당연한 결과였다. 야고보서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그릇되게 이해해 행함의 중요성을 무시했던 자들에게 바른 지식을 전했던 책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06.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히브리서-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라
  •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우월성과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에 대한 변증을 유려한 필치와 탁월한 수사로 기록한 매우 인상 깊은 책이다. 박해와 고난이 따를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권고는 매우 준엄하게 다가온다. 히브리서의 기자, 특징, 배경 “하나님만 아시는 사실이다.” 교부 오리게네스가 히브리서의 기자가 누구인지를 두고 한 말이다. 히브리서를 누가 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히브리서의 기자는 구약성경에 해박하고 헬라어에 능통하며 또 자신의 지적 능력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우월성을 설명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특징은 이 책이 편지보다는 설교문의 성격이 짙다는 것이다. 상당수 신약성경의 책이 발신자와 수신자가 정해진 편지의 형식을 지니는 반면 히브리서는 의도적으로 설교를 위해 쓰인 책이다. 또한 히브리서는 탄탄한 구조, 풍부한 구약 인용 등을 특징으로 한다. 히브리서가 쓰인 시기는 대략 주후 85~90년경으로 추정된다. 히브리서의 기록 시기만큼 중요한 것이 당시 교회의 상황이다. 주후 1세기 말 교회는 극심한 박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에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떠났다. 히브리서는 배교의 유혹에 흔들리는 성도들을 향해 박해를 견디고 끝까지 예수님을 붙들라고 권고한다. 히브리서의 구조 1장 1절부터 4장 1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 말씀한다. 특별히 이 부분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모두를 조화롭게 강조하며 예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히브리서 기자의 수사가 돋보인다. 1장 1절부터 4절에서 기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언급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만유의 상속자’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다(1:2~3). 이처럼 위대하신 예수님은 천사보다 뛰어나시다(1:5~14).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천사를 숭배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의식하고 예수님이 천사보다 뛰어나심을 밝혔다. 천사는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처럼 사람이 되셨다는 것 또한 예수님이 천사보다 탁월하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를 대신해 고난당하심으로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기 때문이다(2:10).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 이루실 수 있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천사보다 높으시다. 나아가 예수님은 모세보다 뛰어나시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예수님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논쟁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히브리서 기자 역시 모세의 뛰어남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세가 어디까지나 성막을 지키는 ‘종’일 뿐이라고 말한다(3:5).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3:6). 종을 어떻게 주인의 아들에 비할 수 있겠는가. 4장 14절부터 10장 18절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는데 이는 히브리서 기자가 가장 중점적으로 다룬 주제이다. 왜 히브리서 기자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이란 주제에 집중했을까?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주는 직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분임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히브리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관해 말씀하기 위해 레위지파 반열의 제사장들과 예수님을 비교한다. 레위지파 반열의 제사장은 인간이기 때문에 죄가 있고 그 역시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5:3).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고 완전하시다. 히브리서는 레위지파 제사장의 제사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도 비교한다. 레위지파 제사장의 제사는 효력이 영구적이지 못해 계속해서 드려져야 한다(9:25). 그래서 수없이 많은 동물이 희생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번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7:27, 9:12).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제사를 여러 번 드릴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그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사하셨기 때문이다. 10장 19절부터 13장 17절은 성도들의 믿음을 독려하는 내용이 나온다. 전반부와 중반부까지 예수님의 우월성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완전함을 전한 히브리서는 이제 그러한 예수님을 끝까지 붙들라고 말씀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원하고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님만을 믿으라는 것이다. 박해가 있을지라도 결코 이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끝까지 믿은 사람은 마지막 날에 구원받아 천국에 이를 것이다. 마지막 때의 구원과 천국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 천국은 ‘실상’이며, 천국이 있다고 믿는 믿음 자체가 ‘보이지 않는’ 천국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다(11:1). 아벨,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신앙의 선진은 이처럼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천국을 바라보며 살았고, 지금은 모두 천국의 ‘허다한 증인들’이 되었다(12:1). 성도는 믿음의 선진을 본받아 믿음으로 하늘 본향을 바라보며 고난이 따를지라도 끝까지 예수님을 붙들어야 한다. 히브리서의 메시지 참하나님이자 참인간이신 예수님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모두를 조화롭게 강조한다. 예수님은 참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은 완전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재자가 되실 수 있으시다. 또한 예수님은 참사람으로서 우리보다 먼저 고난을 경험하시고 승리를 이루셨다. 우리는 이처럼 사람이 되셔서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더불어 사람이 되셨던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으시다(히 4:14~16). 성문 밖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 내부가 아닌 성문의 밖이었다(13:11). 예수님은 안정적인 성문 안을 떠나 ‘성문 밖’, 즉 고난과 멸시가 있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 세상이 두려워 숨기보다 담대히 세상에 나아가 세상에서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안전한 곳에 웅크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일어나 선을 행하고 나누어주는 일에 힘써야 한다(13:16).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05.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빌레몬서
  •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몬 1:16) 성경에는 천지창조,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등 거대하고 장엄한 사건이 기록되어있음과 동시에 한 개인의 사적인 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하나님은 참으로 섬세한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빌레몬서는 바울의 개인적인 부탁이 담긴 매우 짧은 편지이다. 우리는 이 짤막한 편지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세 남자 이야기 바울의 3차 선교여행은 오늘날 터키가 자리한 소아시아에서 에베소를 거점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바울은 소아시아 내륙에 있던 도시 골로새에서도 사역했는데 그곳에서 빌레몬이라는 사람을 전도했다. 빌레몬은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와 더불어 그의 가족까지 교회의 일원이 됐다. 이후 바울은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강성 유대주의자들이 많던 예루살렘은 바울에게 위험한 곳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율법을 어겼다는 누명을 쓰고 강성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체포돼 재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압송됐다.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당도한 바울은 그곳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있었다. 그때 우연히 한 젊은이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이름은 오네시모였다.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오네시모는 날이 갈수록 믿음이 성장했다. 결국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1:10)이자 “내 심복”(1:12)이라 불리기에 이른다. 그런데 세상이 참 좁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알고 보니 오네시모는 바울이 일전에 골로새에서 전도했던 빌레몬의 노예였던 것이다. 골로새에 있던 노예가 어떻게 머나먼 로마에까지 오게 됐을까? 그렇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금전적인 손해를 입히고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나왔던 도망 노예였던 것이다. 바울은 난처했을 것이다. 로마에서 제자로 삼은 청년이 몇 년 전 자신이 골로새에서 전도했던 성도의 집에서 도망 나온 노예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비록 도망 노예였을지라도 바울이 보기에 이제 그는 ‘유익한’ 자였다(1:11). 오네시모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성도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함께 사역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오네시모는 치러야 할 죗값과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오네시모는 바울과 함께 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네시모가 해를 입힌 사람은 바울이 맺었던 또 다른 구원의 열매 빌레몬이었다. 오네시모의 죄와 빚이 청산되지 않은 상태로 바울이 오네시모와 계속 동역했다면 바울은 빌레몬의 낯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고 부탁하기로 결심했다. 오네시모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으니 이제는 그를 노예로 대하지 말고 형제로 받아들여달라고 요청하기로 한 것이다(1:16). 만일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바울 자신이 갚겠다는 의사 또한 빌레몬에게 전하고자 했다(1:17). 그리고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했다면 다시 자신에게 보내 자신과 동역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부탁하기로 했다. 바울은 이러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오네시모에게 쥐여 주고 그를 빌레몬에게 보냈다. 이 편지는 지금 우리에게 빌레몬서로 전해진다. 이 편지에는 바울, 빌레몬, 오네시모, 세 남자의 사연이 얽혀있다. 빌레몬서의 특징과 구조 빌레몬서의 특징은 보통의 바울서신과 달리 복음에 대한 논증과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교훈이 수록돼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빌레몬서는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는 빌레몬을 향한 바울의 요청으로만 채워져 있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 하나님의 뜻은 논증이나 교훈으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삶에서 벌어지는, 어찌 보면 사사로울 수 있는 사건을 통해서도 전달될 수 있다. 빌레몬서는 바울, 빌레몬, 오네시모 사이에 있었던 한 사건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안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크고 작은 사건 안에도 하나님의 메시지와 섭리가 서려있다. 빌레몬서는 매우 짧은 편지로 구조를 구성하기가 쉽지 않다. 최대한 내용을 구조화해보면 다음과 같다. 1~3절은 여느 서신에서와 같이 바울의 인사가 나온다. 4~7절은 빌레몬을 향한 바울의 칭찬이 나온다. 이러한 바울의 칭찬에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해줄 것이라는 바울의 기대가 담겨있다. 8~22절은 서신의 본문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신에게 다시 보내달라는 바울의 빌레몬을 향한 부탁이 담겨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이기에 권위 있게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으나 그러지 아니하고 사랑으로 당부한다고 말한다(1:8~9). 바울의 겸손을 발견할 수 있다. 나아가 바울은 빌레몬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용서해줄 것을 원했다(1:14). 왜냐하면 선한 일은 자원함으로 행할 때 더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23~24절은 바울의 끝인사가 나온다. 빌레몬서의 메시지 교회는 구별된 공동체 중세까지 세계 대부분의 사회는 출생이 사람의 신분을 결정했다. 부모가 귀족이면 자식도 귀족이고, 부모가 노예이면 자식도 노예였다. 과거 이러한 신분제는 매우 공고해서 웬만해서는 신분을 넘나들 수 없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신분제가 타파되었다. 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평등했던 것이다. 빌레몬서는 교회가 사회의 체제와 악습을 극복하고 모두가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실화를 통해 알려준다. 그리고 오늘날의 교회에게 이를 닮도록 독려한다. 오늘날에는 신분제는 없지만 재산이나 지위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지위가 낮은 사람을 하대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이처럼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평등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누가 높거나 누가 낮을 수 없다. 빌레몬이 자신의 노예 오네시모에게 ‘형제’라고 불러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1:16).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이그나티우스의 서신 중 하나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다.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사람이요 너희(에베소교회)의 감독인 오네시모의 인격으로….” 이는 도망 노예로서 비천한 범죄자였던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용서받은 후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존경받으며 사역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21.04.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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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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