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신앙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마지막회) - 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흐름 속에서 창립되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떤 교회이며 무엇을 중요시 하며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필연적으로 현대 오순절 운동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는 11주에 걸쳐 ‘현대 오순절운동의 역사’에 대해 연재하고자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현대 오순절 운동의 이해 ②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적 배경 ③현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핵심 ④현대 오순절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 ⑤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 ⑥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⑦한국 초기 오순절 운동 ⑧오순절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⑨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지도자들 ⑩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와 극복 ⑪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편집자 주> 1953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 교단의 부흥과 성장을 이끈 조용기 목사 나와 일제강점기의 탄압과 6.25 전쟁의 시련은 한국의 오순절 운동에 가해진 일대 도전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불굴의 생명력으로 한국 오순절 운동이 다시 일어서게 되었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최초의 오순절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탄생이었다. 이제 한국 오순절 운동은 교단을 기반으로 하여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교회 성장을 가져온 조용기 목사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번 주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의 마지막 회로, 이후의 한국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에 대해서는 본지에 연재된 교회 창립 60년의 관련 기사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1.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탄생 6.25 전쟁 발발 직후 한국에 군목으로 입국한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의 종군 목사인 엘로드는 한국 내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파악하러 다니다가 허 홍 목사를 만나 교제하게 되었다. 1951년 미국으로 돌아간 엘로드는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보고하였다. 이 무렵 박성산 목사도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와 교인들이 처한 어려움을 알리면서 미국 하나님의성회 측에 한국 선교를 시작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엘로드와 박성산의 노력으로 1952년 여름에 미국 하나님의성회 동양 선교부장인 오스굿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직접 조사한 후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한국 선교를 시작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다. 이에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당시 일본 주재 선교사인 체스넛을 1952년 12월에 한국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체스넛의 내한으로 교단 결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인화력이 뛰어난 박성산 목사는 순천, 부산, 거제, 광주 등지를 순회하며 오순절교회와 교인들을 모으는 일에 헌신하였다. 마침내 1953년 4월 8일 허 홍 목사가 담임하던 서울 용산구 한강로의 남부교회에서 체스넛, 박성산, 허 홍, 배부근, 윤성덕, 곽봉조, 박귀임과 그 외 4인의 참관자를 포함해 총 11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교단이 창립되었다. 창립총회에서 교단의 명칭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로 결정되었고 초대 총회장에는 체스넛 목사가, 서기 겸 재무에는 허 홍 목사를 선출하였다. 또한 교역자 양성을 위해 순복음신학교를 속히 세울 것을 결의하였고 신설될 학교 교장에 체스넛 목사를, 학감에 허 홍 목사를 선출하였다. 순복음신학교는 1953년 5월 허 홍 목사가 담임하던 남부교회에서 문을 열었다. 2. ‘성장통’을 겪은 교단 교단이 발족하자 모든 교역자와 성도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교회부흥에 전력을 기울였다. 1953년 10월 7일 교단 창립 후 처음으로 개최된 광주 총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교세는 9개 교회에 약 500명의 교인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외 9개의 교회가 교단 가입을 신청중이었다. 한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을 주도하였던 체스넛 선교사가 1955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여러 문제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총회장이었던 체스넛 선교사는 한국을 떠나면서, 리더십 부재 현상이 나타났고 다음해 순복음신학교에서 동맹 휴학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1956년 4월 26일 총회를 열고 제2대 총회장으로 허 홍 목사를 선출하였다. 하지만 곧 개교회 재산의 교단 귀속 문제를 놓고 교단 내에 의견 대립이 발생하였다. 개교회의 재산은 개교회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허 홍 목사 측과 개교회의 재산은 교단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선교사 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서 결국 교단 분열로 이어졌다. 1957년 11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종교재단법인으로 등록하였고 이를 반대하던 허홍 목사와 그 지지자들이 교단을 이탈해 대한오순절교회를 설립함에 따라, 교단은 창립 4년 만에 분열되고 말았다. 3.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안정 분열로 인한 큰 고통을 겪은 교단 지도부는 교단의 안정과 확장을 위한 일련의 부흥 집회를 개최하였다. 1957년 가을 미국 하나님의성회 부흥사인 허만 목사가 내한하여 중앙청 앞 광장에서 24일간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 집회는 하나님의성회에서 개최한 최초의 대규모 집회였다. 1958년 여름에는 버드 목사가 내한하여 수원, 대전, 부산 등지에서 성회를 인도하였다. 한편, 미국 ‘치유의 소리’(Voice of Healing) 선교회 소속의 신유사역자인 샘 토드 목사가 내한하여 1961년 9월 1일부터 10월 중순까지 서대문 네거리에 천막을 치고 성회를 개최하였다. 미국 하나님의성회도 분열의 상처를 겪은 한국 교회에 영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전 지구적인 교세 확장을 위해 세계의 주요 도시에 선교 거점을 세워 이를 통해 집중적으로 도시선교를 전개한다는 ‘지구정복’(Global Conquest) 프로그램을 가동하였다. 특별히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1959년 말 한국을 지구정복 프로그램의 시범사업 국가로 지정하고 약 2만 달러의 거액을 투입하여 교회사업, 문서사업, 선교사업, 신학교 확장 등에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대조동에 신학교 이전용 대지 약 1만 평을 구입해 1960년 3월 5일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서대문에 292평의 대지를 구입해 1962년 2월 18일 약 1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순복음부흥회관’을 준공하였다. 그리고 문서선교의 일환으로 1964년 6월 ‘월간 순복음’이란 오순절 잡지를 발간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장차 교단의 부흥과 성장을 이끌 젊고 능력 있는 사역자인 조용기 목사가 등장하였다. 부산에서 활동하던 리차드 선교사를 통해 오순절 신앙을 받아들인 조용기 목사는 1956년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해 1958년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신학교 동기인 최자실 목사와 함께 서울시 대조동에서 천막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처럼 전쟁의 와중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이 창립되었고 교단은 잠시 분열의 아픔을 겪었으나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은 후 체제를 정비하고 안정을 찾게 되었다. 1957년에 교단에서 이탈한 허 홍 목사 측도 15년이 지난 1972년에 다시 교단으로 들어와 재통합을 이루었다. 이러한 교단의 안정 가운데 한국 오순절 운동을 힘차게 이끌어갈 목회자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가운데 바로 조용기 목사가 있었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8.06.0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10) - 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와 극복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흐름 속에서 창립되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떤 교회이며 무엇을 중요시 하며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필연적으로 현대 오순절 운동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는 11주에 걸쳐 ‘현대 오순절운동의 역사’에 대해 연재하고자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현대 오순절 운동의 이해 ②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적 배경 ③현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핵심 ④현대 오순절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 ⑤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 ⑥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⑦한국 초기 오순절 운동 ⑧오순절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⑨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지도자들 ⑩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와 극복 ⑪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편집자 주> 일제 탄압과 한국전쟁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뿌리내린 오순절 신앙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도입된 오순절 신앙은 허 홍, 박성산, 배부근 같은 초기 한국 오순절 지도자들에 의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국권 회복과 애국 계몽 운동을 못마땅히 여긴 일제는 기독교를 무참히 와해시키고자 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 극심해진 일제의 탄압으로 한국 오순절 교회도 큰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번주에는 한국 오순절 교회에 임한 위기와 그 극복 과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사참배 강요가 극심해진 것은 일제의 만주침략과 연관 있었다. 만주를 거쳐 중국까지 침략하려는 일본은 식민지였던 조선을 완전히 장악해야 할 필요가 커졌고, 신사참배는 이를 위한 전략 중 하나였다.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일왕과 일본 왕실의 조상들을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럼시 선교사가 허 홍과 함께 서빙고교회를 세운 1932년은 이러한 일제의 신사참배강요가 극심해질 무렵이었다. 럼시 선교사의 제안으로 함께 사역하기 위해 일본에서 귀국한 박성산이 한국에 도착한 것도 같은 해였다. 일제의 오순절 교회에 대한 탄압으로 인해 럼시 선교사는 1939년 2월 10일 강제 출국을 당했다. 배부근 목사와 함께 두 번째 오순절 교회인 수창동교회에서 사역했던 메르디스 선교사와 베시 선교사 역시 1940년 12월 20일에 강제 출국당했다. 설상가상으로 오순절 교회의 전도를 책임지고 있던 허 홍 목사는 중병에 걸렸고, 수창동교회와 서빙고교회는 경제적 어려움마저 겹쳐 문을 닫게 되었다. 아직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한 오순절 교회는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피어오르던 한국 오순절 신앙의 불꽃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 아래 마치 풍전등화와 같았다. 2. 한국 오순절 교회의 회복 1) 광복 이후 한국 오순절 교회 위기에 휩싸인 한국 오순절 교회가 다시 활기를 되찾은 계기는 바로 조국의 해방이었다. 해방이 되자 오순절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귀국하면서, 한국 오순절 교회는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먼저 곽봉조가 있었다. 그는 일본 이코마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이미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하던 오순절 신앙인이었다. 신학교 졸업 후 오사카에서 ‘조선예수교오순절’이라는 한인 교회를 개척하여 복음 전도에 힘쓰던 그는 광복을 맞게 되자 망설임 없이 귀국했다. 그리고 윤성덕 역시 일본에 거주하던 중 이코마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한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을 맞이해 귀국한 후 1948년 전남 광산군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오순절 신앙을 뜨겁게 증거하였다. 광복 이후 이러한 오순절 신앙의 전파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이복덕은 전남 해남의 한 장로교회에서 오순절 신앙의 은혜를 체험했다. 그녀에게 방언과 예언, 그리고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자, 다니던 교회에서 출교당하였으며 그녀는 작은 예배처를 세워 독립하였다. 이곳 예배처를 방문하여 큰 은혜를 받은 표 씨 부인이란 여인은 자기 집으로 돌아간 후 예배처를 만들어 오순절 신앙을 증거하는 데 매진했다. 당시 이 집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 박귀임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1947년 6월 표 씨 부인을 만나 오순절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령침례를 받은 박귀임은 자신이 출석하고 있던 순천중앙장로교회로부터 출교당하게 되었다. 그녀는 함께 출교당한 오순절 성도들과 함께 순천 남내동에 있는 가옥을 빌려 ‘대한기독교 순천오순절교회’를 개척했다. 교회가 부흥하자 박귀임은 박헌근 장로를 전임 전도사로 초빙했고, 이후 교회는 300여 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박귀임은 광주에 또 하나의 교회를 개척했는데 이 교회는 훗날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광주순복음교회가 되었다. 박귀임의 제안으로 박헌근 전도사가 순천오순절교회에 부임하게 된 지 1년 6개월이 되었을 때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중에 열심을 다해 성도를 돌보던 박헌근 전도사는 공산군에게 검거되어 한국 오순절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2)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 개최 해방 이후 서울과 전라도를 중심으로 오순절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일본에서 귀국한 김성환 목사는 목포시 산정동에 있던 자기 집을 교회로 삼아 1948년 여름에 창립 예배를 드렸다. 같은 시기에 전남 광산군에서는 윤성덕 목사가 교회를 건축하고 헌당 예배를 드렸다. 서울 광화문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박성산 목사는 해방이 되자 배부근, 허 홍 목사와 함께 서울을 중심으로 오순절 교회의 재건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며 동역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는 박귀임 전도사가 순천과 광주에서, 김성환 목사는 목포와 무안군 일대에서, 그리고 윤성덕 목사는 광산에서 오순절 신앙을 전파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전국의 오순절 교회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1950년 4월 9일, 전라남도 순천에서 박헌근 전도사가 주축이 되어 제1회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가 개최되었다. 박성산, 윤성덕, 허 홍, 김성환 목사, 박헌근, 박귀임 전도사 등의 목회자를 비롯하여 약 200여 명의 교인들이 모였다. 이 대회는 한국의 오순절 교회가 연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이 치열했던 1952년에는 잠시 대회가 중단되었으나, 이후 제2회(1952. 5. 4), 제3회(1952. 10. 5) 대회가 연이어 개최되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와 기독교 말살 정책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가 미처 회복되기도 전에 일어난 6·25전쟁으로 인해 한국 오순절 교회는 크나큰 피해를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전 전인 1952년 말까지 총 8개의 교회들이 재건되거나 새롭게 창립되었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전쟁의 처참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해 오순절 신앙 공동체의 발흥은 꺾여질 수 없었다. 이렇듯 오순절 신앙의 씨앗은 한국 땅에 뿌려진 후 일제강점기의 기독교 탄압에 철저히 짓밟혔으며 광복을 맞이하여 잠시 회복된 듯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또다시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혹독한 시련 가운데도 오순절 신앙은 결코 그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비바람을 이겨낸 한국 오순절 교회는 이제 위대한 부흥의 거목으로 성장할 토양을 지니게 되었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8.05.2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9)-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지도자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흐름 속에서 창립되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떤 교회이며 무엇을 중요시 하며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필연적으로 현대 오순절 운동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는 11주에 걸쳐 ‘현대 오순절운동의 역사’에 대해 연재하고자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현대 오순절 운동의 이해 ②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적 배경 ③현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핵심 ④현대 오순절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 ⑤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 ⑥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⑦한국 초기 오순절 운동 ⑧오순절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⑨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지도자들 ⑩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와 극복 ⑪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편집자 주> 메리 럼시 선교사와 함께 시작된 한국의 오순절 신앙은 최초의 오순절 교회인 서빙고교회를 태동하였다. 이후 허 홍, 박성산, 배부근 등의 한국인 지도자들의 활약을 통해 널리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번 주에는 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한국 최초의 오순절 교회 ‘서빙고교회’ 1928년 한국에 입국해 오순절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럼시 선교사는 1933년 서울 변두리 지역인 서빙고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당시 서빙고는 한강 변에 있는 가난한 어촌마을로 마을 주민들은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이었고 여러 미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또한 마을 주민 대부분은 기독교를 배척하고 복음을 적대시하였다. 럼시는 서빙고에 기도처를 마련하고 어린아이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며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기도처를 교회로 세울 것을 결심한 럼시는 일본 성서신학원 원장이던 존 주르겐 센에게 박성산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박성산은 신학 과정을 끝내고 사역지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럼시의 청빙을 받고 박성산은 귀국하였고 이어 1933년 봄에 박성산을 담임으로 하는 서빙고교회가 정식으로 창립되었다. 방언과 신유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배척을 당해왔던 럼시에게 서빙고교회의 창립은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교회를 향한 주변의 비난과 박해가 적지 않았지만, 서빙고교회는 빠르게 성장하였다. 사도행전에 입각한 신앙인으로서 성령침례와 방언, 신유, 권능을 강조하던 담임 목회자 박성산의 지도로 서빙고교회는 설립 다음 해에 장년 70명, 주일 학생 200여 명에 이르는 알찬 교회로 성장하였다. 2. 한국 초기 오순절 지도자 한국 초기의 대표적인 오순절 지도자로 허 홍, 박성산, 배부근을 들 수 있다. 1) 허 홍(1907∼1991) 허 홍은 1907년 12월 9일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세군 사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구세군에 입대하여 사역했다. 그러나 허 홍은 나라 없는 슬픔과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로 인해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럼시 선교사를 만나 통역으로 그녀를 도우면서 그녀에게서 오순절 신앙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럼시 선교사가 서빙고에 최초의 오순절 교회를 개척할 때 도와주었고, 후에 북아현동에 연희장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하였다. 해방 후, 허 홍은 한국에 오순절 교단의 탄생과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1953년 4월 8일 그가 시무하던 서울남부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함으로써 출발하였다. 허 홍은 창립 직후 설립된 순복음신학교의 학감으로 사역하였고 1956년 5월에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제2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 9월에는 대한오순절교회를 재건하고 총회장이 되었다. 허 홍은 순천오순절교회 담임목사로 복음을 전했고 후에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2) 박성산(1908∼1956) 한국 최초의 오순절교회인 서빙고교회를 담임한 박성산은 1908년 1월 20일 경상북도 군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장로교 초창기 전도사로 사역하였다.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박성산은 청년 시절에 농촌 문제, 사회개발 문제, 청소년 문제, 금주, 금연 운동 등 민족계몽운동에 활발히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배워야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 박성산은 가족을 고향에 두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 시절 그는 신문팔이, 상점 점원 등 여러 일을 전전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던 중 노방 전도를 하던 청년들에게 감동해 오순절 신앙을 지니게 되었다. 박성산은 존 주르겐 센이 설립한 성서신학원에 입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고 1933년 서빙고에 세워진 오순절 교회의 담임 목회자로 청빙을 받아 귀국하였다. 당시 서빙고 주민들은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와 박성산의 헌신으로 서빙고에도 오순절 신앙의 불길이 타올랐고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서빙고교회는 1940년 일제의 종교 탄압으로 인해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박성산은 광화문에 ‘성문당’이라는 서점을 내고 훗날을 준비했고,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가 전도에 힘쓰다가 1952년 11월 부산시 서대신동에 ‘부산교회’를 창립하였다. 박성산 목사는 인화력이 뛰어났다. 그는 교단을 설립하기 위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과 성도들을 모으는 데 힘을 썼다. 1953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도 그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3) 배부근(1906∼1970) 배부근은 1906년 6월 16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배부근은 1924년 춘천 주재 남감리교회 선교사 브랜넌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1928년 송도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존 주르겐 센이 운영하던 성서신학원에서 공부를 하였다. 존 주르겐 센 밑에서 성령침례를 체험한 그는 1933년 귀국해서 5월경 영국 선교사 베시와 메레디드와 함께 서울 사직동에 수창동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종교 탄압이 거세지면서 수창동교회를 지원하던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 되자 수창동교회는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1944년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한 배부근은 이곳에서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 종군 목사인 엘로드를 만나 그로부터 수십 상자의 성경을 선교용으로 증정받아 축호 전도에 힘썼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대구로 내려가 김두년 전도사와 함께 대구시 남산동에 오순절 교회인 대구 남산동교회를 개척하였다. 배부근은 1953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고 순복음신학교 사감과 교수를 지냈다. 한국 오순절 운동의 시작은 매우 연약했다. 왜냐하면, 오순절 신앙은 오순절 교단이나 선교 단체에서 정식으로 파송한 선교사가 아닌 ‘메리 럼시’라는 한 독립선교사를 통해 한국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럼시는 허 홍, 박성산, 배부근 같은 초기 오순절 지도자들을 발굴하고 지원하였다. 이들 오순절 지도자들은 해방 후 오순절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창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오늘날 이 땅에 오순절 신앙이 널리 증거되는 데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8.05.13 / 국제신학교육연구원 기자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8)-오순절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흐름 속에서 창립되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떤 교회이며 무엇을 중요시 하며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필연적으로 현대 오순절 운동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는 11주에 걸쳐 ‘현대 오순절운동의 역사’에 대해 연재하고자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현대 오순절 운동의 이해 ②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적 배경 ③현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핵심 ④현대 오순절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 ⑤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 ⑥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⑦한국 초기 오순절 운동 ⑧오순절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⑨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지도자들 ⑩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와 극복 ⑪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편집자 주> 일제강점기 동안 회개와 기도 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의한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오순절 신앙이 선교사들에 의해 증거 되었다. 이번 주에는 오순절 선교사들의 입국과 그 활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럼시(Mary C. Rumsey)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1) 럼시 선교사의 입국 우리나라에 최초로 오순절 신앙을 전파한 사람은 메리 럼시 선교사이다. 럼시 선교사는 1885년경 미국 뉴욕 주 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성장 과정은 다소 불우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일찍 떠나 그녀는 외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럼시는 선교사로 한국에 오기 전까지 뉴욕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또한 감리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면서 뉴욕 주의 로체스터 성경훈련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런 어느 날, 럼시는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의 대부흥 집회(1906∼1907년)에 참석하여 크게 은혜를 받고 성령 침례와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이 때 “한국으로 가라”는 생생한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이 선교적 명령을 평생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으로 갈 여비를 마련하지 못하여 오랫동안 선교 후원자를 위해 기도하였다. 럼시는 마침내 같은 교회에 출석하던 덴버드라는 성도의 후원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녀는 한국에 입국하기 전 먼저 일본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미국 하나님의성회가 파송한 주일(駐日) 선교사 헤리엇 디쓰리지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였다. 중보기도 사역과 교육 그리고 전도 사역으로 선교부의 오순절 운동에 힘을 보탰다. 2) 럼시 선교사의 활동 럼시 선교사는 한국 선교에 대한 사명을 받은 지 약 20년이 지난 1928년 봄, 서울 정동에 도착하였다. 럼시가 한국에 처음 여정을 푼 곳은 정동에 위치한 시병원(施病院)이었다. 이 병원은 의료 선교사 스크랜튼과 헤론이 세운 병원이었는데 당시 내한 선교사들의 임시 거처이기도 했다. 럼시는 짐을 풀자마자 먼저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멀고 먼 한국에 왔습니다. 나로 하여금 이 땅에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하시옵소서. 럼시는 엄세(嚴世)라는 한국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그녀는 어느 날 구세군 조선본영 사무실에 들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던 청년 허홍을 만났다. 부친이 구세군 사관이었던 허홍은 구세군에 입대하여 성경통신관의 사무를 보고 있었다. 당시 허홍은 사역에 한계를 느꼈으며 그 한계를 극복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럼시의 방문을 받고, 럼시로부터 선교 사업을 같이하자는 제안을 받자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였다. 허홍은 어려서부터 선교사들과 함께 생활한 관계로 영어를 잘해 럼시의 통역 또는 럼시의 선교 사역을 잘 도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럼시는 먼저 허홍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오순절 신앙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성령침례의 증거가 방언이라는 것과 신유의 역사에 대해 알려 주었으며 허홍 역시 성령침례를 받게 되었다. 럼시는 허홍과 함께 시병원에 선교 본부를 두고 오순절 신앙을 전파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펼치기에 시기가 좋지 않았다. 럼시가 한국에 도착한 1928년 바로 그 다음해, 감리교의 이용도 목사가 이끄는 부흥집회가 시작되었다. 집회의 열기가 더해가면서 많은 사람이 방언과 신유의 은사를 체험하였고, 그 열띤 반응이 짧은 시간 내에 사회 전반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러자 기존 교회 측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신앙형태가 한국 교회를 다 휩쓸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소리가 높아졌고, 결국 이용도 목사의 부흥 운동이 절정을 이루던 1931년, 평양노회에서 성도들에게 금족령을 내리는 강력한 제재를 가하게 되었다. 이런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럼시와 허홍은 적극적인 활동을 할 형편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는 5년간 계속 되었고, 193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 최초의 오순절 교회인 서빙고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럼시는 일본에서 미국 하나님의성회 파송 선교사와 함께 사역한 기록은 남아 있으나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 선교사는 아니었다. 미국의 엘림 선교회의 후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오순절 신앙을 전한 최초의 선교사였다. 2. 오순절 신앙을 전한 선교사들 아주사 거리 부흥을 통해 오순절 신앙을 체험하고 한국에 온 선교사는 럼시만이 아니었다.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로 1954년부터 1977년까지 사역했던 존 스텟츠(John Stetz)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한국에 온 럼시를 비롯한 10명의 여성 선교사를 언급하고 있다. 미국 출신으로는 메리 럼시, 글래디스 파슨, 엘프레다 오프스태드 선교사가 있고, 영국 출신 선교사는 엘시 메레디드, 릴리 베시, 밀드레드 M. 배시이다. 노르웨이에서 온 선교사는 린드퀘스트, 스테빅이며 그리고 호주에서 온 두 명의 무명 미혼 여성 선교사들이다. 이 중 파슨은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속한 교회에서 개인 선교사 자격으로 1930년도에 한국에 왔다. 그녀는 한국에 3년 정도 머물렀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엘프레다 오프스테드가 입국하였다. 이 두 여성은 오순절 사역자 배부근이 수창동교회를 세울 때 재정적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1933년 영국에서 메레디드와 베시가 파슨의 초청으로 오게 되었다. 이 두 여성은 영국 하나님의성회 교인으로 개인 자격으로 한국에 온 것이다. 메레디드와 베시 또한 배부근이 시무하는 교회에 재정적 지원을 하였다. 한국에 입국하여 활동한 오순절 선교사들은 여성이며 자비량 선교사라는 특징을 지닌다. 이것은 한국에서 활동한 장로회나 감리교와 같은 타 교단의 선교사들이 대부분 남성이며, 정식으로 교단의 파송을 받았다는 점과 차이가 있다. 이들 오순절 선교사들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복음 증거를 위해 헌신하였으며 이러한 헌신은 이후 오순절 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수 있는 소중한 토양이 되었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8.05.06 / 국제신학교육연구원 기자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7) - 한국 교회 초기 성령 운동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흐름 속에서 창립되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떤 교회이며 무엇을 중요시 하며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필연적으로 현대 오순절 운동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는 11주에 걸쳐 ‘현대 오순절운동의 역사’에 대해 연재하고자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현대 오순절 운동의 이해 ②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적 배경 ③현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핵심 ④현대 오순절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 ⑤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 ⑥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⑦한국 초기 오순절 운동 ⑧오순절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⑨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지도자들 ⑩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와 극복 ⑪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편집자 주> 한국 교회에 나타난 현대 오순절 운동은 한국 기독교를 형성하는 주춧돌과 같다. 오순절 운동을 통해 한국의 기독교는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굳건한 신앙을 형성하게 되었고 교회의 위대한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짧은 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기독교의 성장과 선교의 확장을 가져왔다. 이번 주에는 한국 교회 초기 성령 운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한국 교회 성령 운동의 발단 한국의 초기 성령 운동은 1903년 8월 원산에서 열린 기도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미국 남감리교 소속의 하디(Robert A. Hardie) 목사는 강원도 지역에서 선교하던 의료 선교사로 3년 동안 의료 선교를 하며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척박한 선교지에서의 생활은 그를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지치게 만들었다. 영적인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하디 선교사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화이트(M. C. White) 선교사를 초청하여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일주일간 원산 창전교회에서 성경 연구와 기도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 모임에서 영적인 고갈을 느끼고 있었던 선교사들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 후 하디 선교사는 한국 교인들 앞에서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간증하고 자신의 교만과 무력함을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이 때 선교사들의 모임에 임했던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온 회중에게 임했고 원산 지역의 큰 부흥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원산 부흥 운동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교파의 장벽을 허물고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904년 1월 원산에서 개최된 교파별 연합 기도회에서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럽(A. F. Robb)이 성령을 체험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고 선교사를 중심으로 시작된 기도회는 점차 장로교와 감리교 및 다른 교파의 일반 성도들이 참석하는 집회로 확대되었다. 이런 부흥의 역사는 쉽게 식지 않았고 1907년에 일어날 평양 대부흥 운동의 단초가 되었다. 2. 평양 대부흥 운동 한국 교회 초기 성령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큰 부흥 운동은 1907년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났던 평양 대부흥 운동이다. 원산 부흥 운동 이후 한국 교회의 달라진 변화는 성경 공부를 중심으로 한 사경회(査經會)이다. 신년이 되면 많은 교회들이 사경회로 모여 낮에는 성경 공부를 하고 밤에는 부흥 집회를 했다. 1907년 장대현교회도 1월 첫째 주일부터 사경회로 모였다. 1월 2일부터 사경회가 시작되었고 6일부터 15일까지는 저녁 기도회가 열렸는데, 기도회에는 매일 약 1500명이 넘게 모였다.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그레함 리(한국명 이길함) 선교사와 블레어 선교사, 스왈런(한국명 소안련) 선교사, 그리고 목사 안수를 앞두고 있던 길선주 장로가 기도회를 인도했다. 길선주 장로가 성도들 앞에서 자기의 죄를 철저히 고백할 때, 성령의 불이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게 되었다. 평양 대부흥 운동을 통해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평양 대부흥 운동 이후, 전국 곳곳에 많은 부흥 집회가 일어났고 복음 증거를 위한 열정이 불타올랐다. 1909∼1910년 사이에는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 ‘100만명구령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09년 7월 산상기도회 후 전도여행을 떠나며 시작되었는데, 같은 해 10월 ‘연합선교사총협의회’가 서울에서 열렸으며 이때 ‘100만 인을 그리스도에게’라는 구호에 의해 복음 전도가 가속화되었다. 이후 100만명 구령운동은 초교파적 사업으로 확대되어 많은 전도의 큰 결실을 맺게 되었다. 3. 한국 교회 초기 성령 운동의 지도자들 한국 교회 초기 성령 운동에 의해 나타난 한국 교회의 뚜렷한 변화 중 하나는 선교사 중심의 성령 운동이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와 같은 한국인 지도자 중심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이다. 길선주 목사는 1907년 평양 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 장대현교회 목사로 임직되었다. 길선주 목사는 성경의 절대권위를 강조하고 성경공부를 최우선으로 삼았다. 특히 그는 요한계시록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며 종말론적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강조하였다. 성도가 물질뿐만 아니라 시간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생각한 길선주 목사는 성도들에게 특정한 시간을 구별하여 전도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면하였다. 길선주 목사의 주도로 시작된 성령 운동은 새벽 예배나 철야 기도와 같은 기독교 전통을 마련했으며, 한국 교회의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는 28년 동안 2만 번 이상의 설교를 했고, 3000명 이상에게 침례를 베풀었으며, 60개 이상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1910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황해도 신천장로교회 목사로 임명되었다. 김익두 목사는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을 향해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신유 운동은 예식과 형식에 얽매인 한국 교회에 도전을 주고 각성케 했다. 김익두 목사는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사모하고 초대 교회의 뜨거운 열정을 사모할 것을 권면했다. 그의 목회 활동을 통해 가난하고 병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를 받았다. 그는 전국을 돌며 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부흥 집회와 전도 집회를 통해 약 2만 8000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신유를 경험했다. 이용도 목사는 1928년 협성신학교(감리교 신학교 전신)를 졸업하고 강원도 동천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열심히 목회하였지만 어떤 열매도 맺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금강산에서 1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고, 성령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능력의 메시지와 기도로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이끌게 되었다. 이용도 목사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과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초기 성령 운동은 한국 기독교를 견고하게 세우는 디딤돌이 되었으며 한국 교회의 부흥을 이끄는 힘이 되었다. 한국 교회는 성령 운동을 통해 스스로 서게 되었으며 또 복음을 열정적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 초기 성령 운동은 한국 교회가 널리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위대한 유산이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8.04.29 / 국제신학교육연구원 기자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6) - 미국 하나님의성회 창립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흐름 속에서 창립되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떤 교회이며 무엇을 중요시 하며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필연적으로 현대 오순절 운동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는 11주에 걸쳐 ‘현대 오순절운동의 역사’에 대해 연재하고자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현대 오순절 운동의 이해 ②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적 배경 ③현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핵심 ④현대 오순절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 ⑤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 ⑥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⑦한국 초기 오순절 운동 ⑧오순절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⑨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지도자들 ⑩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와 극복 ⑪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편집자 주> 신학적 정체성 확립 통해 1914년 핫스프링스에서 창립 미국 오순절 교단 중 가장 영향력 있는 교단으로 발전 미국의 오순절 운동은 아주사 부흥 운동 이후, 신학적 정체성의 확립과 새롭게 탄생한 오순절 교회들의 목회적 요청에 따라 교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1914년 아칸소 주 핫 스프링스(Hot Springs)에서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교단이 창립되었다. 이후 미국 하나님의성회 교단은 미국 오순절 교단 중 가장 영향력이 있는 교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 교단 조직의 필요성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교단을 조직하는 것에 대체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조직화’가 성령의 역동성과 개교회의 목회적 자율성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외부적으로 타 교단들로부터 오순절주의자들이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과 표적에만 열중한다는 이유로 심하게 배척당했고, 내부적으로는 비성경적인 은사를 주장하며 파당을 형성하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따라서 오순절 교회들은 신학적으로 뒷받침할 교리와 신조의 확립, 그리고 일원화된 해외 선교와 법률적, 재정적 대표성을 가질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처럼 시대적, 목회적 요구들이 증가하게 됨에 따라 교단 형성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2. 교단의 형성 미국의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정기간행물을 구독하거나 비정기적인 캠프 미팅이나 회의를 통해 동질감을 형성하고 있었을 뿐 어떤 조직체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위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교단의 필요성을 절감한 대다수의 오순절주의자들은 1913년 12월 이후 교단의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 제1차 총회 1913년 12월 20일 핀슨과 콜린스를 중심으로 오순절주의자들은 ‘오순절 성도 및 그리스도하나님의교회의 총회’를 소집하는 기사를 당시 최대 오순절 정기간행물이었던 <말씀과 증언>에 게재하였다. 이들은 총회 소집의 목적, 하나님의성회 헌법 제정, 상임실행위원회 구성, 신학교 설립 등 총회에서 다루어질 주제들도 같이 공시하였다. 그러나 최초의 총회 소집 요청은 오순절주의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이후 1914년 4월 6일 아칸소 주 핫 스프링스의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 제1차 총회가 열리게 되었다. 제1차 총회를 위한 모임은 1914년 4월 2일에 시작되었으나 며칠 동안 교단 창립을 위한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오직 설교, 기도, 교제에 전념했다. 1914년 4월 6일 마침내 임시 실행의장이었던 벨(E. N. Bell)의 개회로 역사적인 하나님의성회 제1차 총회가 개최되었고, 벨은 총회장으로, 플라워(J. R. Flower)는 총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제1차 총회를 통해 공식적인 교리가 제정되거나 교단으로서 완벽한 조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서는 선교활동의 지원, 성경 교육 센터 건립에 협력을 강화하기로 결의하였다. 1차 선언문과 2차 결의문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는데 1차 선언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교회, 성경의 권위, 하나님의성회의 정체성에 대한 선언”에 대해 밝혔으며, 2차 결의문은 “하나님의성회 교회들의 자발적인 협력의 원칙 및 합법적인 개념”을 명시화했다. 1차 총회의 중요한 결의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성회, 사도신앙선교회, 순복음오순절선교회 등 다양한 명칭의 오순절 교회들을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라는 이름 아래 두기로 한다. (2) 벨이 발행하고 있던 정기간행물인 <말씀과 증인>과 플라워의 <기독교 복음>을 총회의 공식 기관지로 선정한다. (3) <문예학교>와 <복음신학교>를 교단 신학교로 승인하고 목회자 자격증은 ‘하나님의성회 총회’의 이름으로 오순절교회, 사도 신앙교회, 그리스도하나님의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이혼자와 재혼자에 대한 신임장은 거부된다. 2) 제2차 총회 제1차 총회 이후, 새롭게 창립된 하나님의성회 본부는 오하이오 주 핀들래이에서 레오나드가 제공했던 작은 인쇄소와 학교 부지에서 시작하였다. 1914년 8월 제1차 총회에서 의결된 <말씀과 증언>과 <기독교 복음>의 발행처도 핀들래이로 옮겼다. 벨과 플라워는 복음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성회 총회의 임원으로 사역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선교사들의 필요를 정기 간행물에 게재하고 선교 자금을 전달함과 동시에 출판에 관한 일들을 감독하고, 인쇄 장비와 시설을 유지 보수해야 했으며 설교와 저술 활동까지 해야 했다. 이런 과중한 업무를 총회 차원에서 분담하기 위해 벨과 플라워는 1914년 가을, 제2차 총회를 요청하게 되었다. 제2차 총회는 1914년 11월 15일부터 29일까지 시카고의 스톤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제2차 총회 동안 새로운 임원진들이 구성되었다. 상임실행위원회는 12명의 위원에서 16명의 위원으로 확충되었고 해외 선교 사역과 총회 산하의 여러 기관들의 기능을 규정하고, 서로의 협력을 조정하는 총회의 대표 기관이 되었다. 제2차 총회를 통해 총회 차원에서 관리할 인쇄기의 구입을 위한 예산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출판물을 관장하던 <복음출판사>는 오하이오 주 핀들래이에서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로 옮겨갔다. 또한 상임실행위원회 만장일치로 하나님의성회 본부도 세인트루이스로 이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제2차 총회를 통해 하나님의성회는 더욱 견고한 토대 위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1914년 제1차 총회와 제2차 총회를 거치며 오순절주의자들의 자발적인 요청과 필요에 의해 교단으로 설립되었다. 교단 창립은 교회들의 모든 현안들을 민주적인 절차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의결함으로써 오순절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이끌어 가며 나아가 세계 선교를 더욱 활발하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연합체를 지니게 되었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8.04.22 / 국제신학교육연구원 기자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5) - 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흐름 속에서 창립되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떤 교회이며 무엇을 중요시 하며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필연적으로 현대 오순절 운동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는 11주에 걸쳐 ‘현대 오순절운동의 역사’에 대해 연재하고자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현대 오순절 운동의 이해 ②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적 배경 ③현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핵심 ④현대 오순절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 ⑤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 ⑥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⑦한국 초기 오순절 운동 ⑧오순절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⑨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지도자들 ⑩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와 극복 ⑪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편집자 주> 1901년 미국 캔사스주 토페카의 벧엘성경학교에서 찰스 팔함 목사와 학생들이 체험한 성령 침례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토페카의 영적 체험은 텍사스 휴스턴의 믿음성경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윌리엄 시무어 목사에 의해 아주사 거리 부흥으로 이어졌다. 아주사 거리 부흥에 참석한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사로 몰려왔고, 이들은 성령의 역사를 자신의 지역과 나라로 확산시켰다. 토페카에서 일어난 부흥이 현대 오순절 운동의 출발점이었다면, 이 운동이 전 세계로 확산된 된 것은 바로 아주사 거리 부흥 운동이었다. 이번 주에는 아주사 거리 부흥 운동이 전 세계에 끼친 영향과 그 확산의 원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아주사 거리 부흥의 영향 아주사 거리 부흥 운동은 미국을 넘어 유럽,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1) 유럽 1906년 노르웨이의 감리교 목사인 토마스 바렛은 선교 모금을 위해 미국 뉴욕을 방문했는데, 거기서 그는 아주사 거리 부흥 소식을 듣게 되었고, 편지를 통해 아주사 부흥을 이끈 지도자들로부터 방언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다. 3개월간 기도에 전념한 바렛은 10월에 성령 침례와 방언을 받았고 12월에 노르웨이 오슬로로 돌아가서 오순절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웃 나라의 목회자들은 오슬로의 바렛이 이끄는 부흥회에 참석하여 성령 침례를 체험하였고, 각자 고국으로 돌아가 오순절 부흥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들 중에 스웨덴 침례교회 목사였던 레위 피드루스가 있었다. 그는 1907년 1월 오슬로에서 성령 침례를 체험하고 스톡홀름에서 부흥 운동을 이끌었으며 이후 스웨덴 하나님의성회를 조직하였다. 2) 라틴 아메리카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난 오순절 부흥 운동은 라틴 아메리카로 이어졌다. 1889년 칠레로 파송 받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윌리스 후버가 1909년 기도회에서 오순절적인 성령을 체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사람들과 함께 후버는 1910년 그들과 함께 칠레의 오순절 감리교회(Pentecostal Methodist Church)를 창립하였다. 스웨덴 출신이었던 다니엘 버그와 구나 빙그렌도 시카고에서 성령을 체험한 후 1910년 브라질 선교사로 자원하여 브라질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브라질 하나님의성회를 설립하였다. 3) 아시아 및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의 부흥도 아주사 거리 부흥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아주사 거리 부흥을 직접 체험한 알프레드 가르와 릴리안 가르 선교사 부부는 1907년 인도 콜카타 지역을 중심으로 큰 영적 부흥을 이끌었다. 또한 1901년부터 인도에서 사역하던 독일계 미국 선교사 조지 버그도 1908년 아주사 거리를 직접 방문하여 성령 침례를 받은 후 인도 방갈로 지역을 중심으로 오순절적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한국에는 비교적 늦은 1928년 메리 럼시(Mary C. Rumsey)에 의해 현대 오순절 운동이 전해졌다. 럼시 선교사는 한국의 허홍과 함께 한국 오순절 첫 번째 교회인 서빙고교회를 세웠는데 1953년 한국의 오순절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이 결성되었다. 현대 오순절 운동은 아프리카의 부흥에도 영향을 미쳤다. 1900년대 초 아프리카의 오순절 운동은 아프리카 남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선교사 존 레이크 등은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원주민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며 오순절 메시지를 전하였다. 초창기에 참석한 사람들은 주로 백인들이었는데 이들 중 수십 명이 성령 침례를 받는 역사가 나타났다. 2. 전 세계적 확산의 요인 아주사 거리에서 시작된 부흥 운동이 빠르게 확산되어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영향을 미치며 급속히 확산된 원인은 오순절 운동이 교단과 교파를 초월함과 동시에 성령의 역사가 동반된 기독교 영적 갱신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방언과 신유의 체험은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영적 갈급함을 해소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오순절 운동의 소망의 메시지는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이러한 요인에 의해 아주사 거리 부흥 운동은 북미는 물론 영국, 덴마크,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인도 등으로 확산 되었고, 1908년 중국, 1913년 중남미, 아프리카 등으로 퍼져 나갔다. 그 결과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오순절 교파인 하나님의성회의 성도들은 208.7%가 증가했고, 또한 다른 오순절 교파인 하나님의교회는 92.8%가 성장했다. 반면 같은 시기 미국의 개신교 교인 수는 200만 명이 감소했다. 현대 오순절 운동의 세계적 확산에 대해 하나님의성회 총회장을 역임한 토마스 짐머만(Thomas F. Zimmerman) 박사는 그 원인을 다음의 몇 가지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의미한 바가 크다. 그는 오순절주의자들은 ①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르며 ②성령의 임재를 통해 거룩하고 변화된 삶을 보여 주며 ③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를 강조하며 ④자유롭고 열정적인 예배를 사모하며 ⑤전도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20세기 초에 발원한 현대 오순절 운동은 아주사 거리의 부흥으로 인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오순절 운동은 지금까지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오순절 교파는 전 세계 개신교 교파 가운데 가장 괄목할 만한 교회 성장을 이루고 있다. 특히 비서구권에 속한 나라들의 급속한 성장은 전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세계 오순절 교회들의 모임인 ‘세계오순절대회’(Pentecostal World Conference: PWC)는 매 3년마다 열리는데 2016년에 열린 24회까지 2회 이상 개최한 5개 나라 가운데 한국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한국 오순절 운동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준다. 오순절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성도의 수는 2016년 추산 약 7억 명으로 집계된다. 기독교 역사상 유일하게 100년 이상 꾸준히 성장하고 있는 오순절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 그 부흥의 불길을 지펴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8.04.15 / 국제신학교육연구원 기자

    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4) - 현대 오순절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현대 오순절 운동의 흐름 속에서 창립되어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어떤 교회이며 무엇을 중요시 하며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필연적으로 현대 오순절 운동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는 11주에 걸쳐 ‘현대 오순절운동의 역사’에 대해 연재하고자 한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현대 오순절 운동의 이해 ②현대 오순절 운동의 역사적 배경 ③현대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핵심 ④현대 오순절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 ⑤현대 오순절 운동의 확산 ⑥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⑦한국 초기 오순절 운동 ⑧오순절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⑨한국 초기 오순절 교회와 지도자들 ⑩한국 오순절 교회의 위기와 극복 ⑪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편집자 주> 미국 기독교는 남북 전쟁 이후 영적 무기력으로 인해 심한 침체 현상을 겪게 되었다. 교회가 부유해지고 제도화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영적인 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처럼 무기력하고 형식주의에 물든 분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일단의 신자들은 기도와 금식과 성경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마지막 시대에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사역에 헌신하고자 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 오순절 운동이 태동하였고, 이를 주도한 초기 지도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번 주에는 초기 미국 오순절 운동을 대표하는 찰스 팔함(Charles F. Parham),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 그리고 윌리엄 덜함(William H. Durham)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찰스 팔함(Charles F. Parham) 1873년 아이오와 주의 머스커틴에서 태어난 팔함은 19세가 되던 1893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캔자스 주의 한 감리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1898년 팔함은 캔자스 주 토페카에서 ‘벧엘 치유의 집’과 ‘벧엘성경학교’를 설립했는데, 벧엘성경학교는 성경만을 교재로 삼고, 3시간의 기도 훈련과 노방 전도 및 축호 전도 실습을 강조하는 복음적인 사역 훈련소였다. 1900년 팔함은 학기 마지막 수업에서 성령 침례의 외적 증거가 방언임을 사도행전에서 확인하고, 12월 31일 40여 명의 학생들과 성령 침례를 위해 철야기도를 하였다. 다음 날인 1901년 1월 1일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이라는 여학생이 최초로 중국어 방언을 말하였고 3일 뒤 팔함과 다른 학생들도 성령의 침례와 동시에 방언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1903년, 팔함의 신유사역을 통해 시력을 회복한 여인 집에서 부흥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를 계기로 팔함은 캔자스 주 박스터 스프링스에 첫 번째 오순절 교회를 설립하였다. 또한 1905년 7월 텍사스 주 휴스턴에 ‘믿음성경학교’를 개설하여 오순절 운동의 개척자들을 양성하였다. 이때 팔함은 ‘순복음 메시지’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후 ‘순복음’(Full Gospel)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2.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 소규모의 지역적 운동을 넘어서지 못하던 미국의 오순절 운동을 국제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팔함의 제자이자 흑인 설교자인 윌리엄 시무어이다. 시무어는 팔함이 세운 휴스턴 믿음성경학교에 1905년에 입학해 이듬해까지 칭의, 성화, 성령 침례와 방언, 신유, 재림 등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배웠다. 1906년 4월 8일 시무어는 L.A.의 보니 브레 거리에 있는 한 성도의 집에서 집회를 인도하였는데, 그 가정에 모였던 7명의 사람들이 성령 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퍼져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아주사 거리에 있는 창고 건물로 장소를 옮겨 교파와 인종을 초월한 집회를 인도하였다. 시무어가 아주사 거리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 침례를 받는 동시에 각기 다른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집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찬송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성령 충만을 체험하면서 아침 10시부터 자정까지 3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집회는 특별히 정해진 순서나 광고 없이 즉흥적인 기도, 설교, 간증 등으로 진행되었고 여러 교파와 다양한 인종이 참여하였다. 집회의 대부분은 찬송과 간증과 기도로 이루어졌으며 방언과 방언 통역, 예언, 축사, 신유 등의 은사들이 나타났다. 이후 시무어와 동료들은 성령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아주사거리선교회’를 조직하였고, 4면의 월간 소식지인 ‘사도적 믿음’(The Apostolic Faith)을 간행하여 부흥의 소식을 더욱 널리 확산시켰다. 아주사의 현대 오순절 운동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나라에 영향을 미쳤다. 남미, 아시아, 유럽 등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 침례를 사모하며 아주사 거리로 몰려왔다. 그리고 이곳 아주사에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은 현대 오순절 운동을 미국 여타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전파하였다. 3. 윌리엄 덜함(William H. Durham) 1873년 켄터키 주 침례교 가정 출신의 윌리엄 덜함은 1901년 시카고에서 노스에비뉴선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1907년 3월 아주사 집회에서 성령 침례를 받고, 시카고로 돌아와 오순절 운동을 전파하는 설교가로 활동하였다. 이후 시카고에서 덜함의 사역을 통해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덜함이 사도행전의 말씀을 전할 때 다리를 못 쓰던 청년이 즉시 고침 받는 신유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덜함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에는 하나님의성회 초대 총회장을 지낸 벨(E. N. Bell)과 사중복음교회를 설립한 여성 신유 사역자 에이미 맥퍼슨(Aimee S. McPherson)도 있었다. 시카고 노스에비뉴선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덜함의 사역은 시카고를 넘어 광범위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 덜함은 성화에 관한 독특한 신학적 견해를 지녔는데 갈보리의 십자가는 단지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성화의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이는 중생과 구분되는 제2의 축복을 통해 성화를 받아야 한다고 한 기존의 성결 교리와는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이었다. 중생 이후에 성화를 위한 별도의 은혜가 필요 없이 갈보리의 십자가가 이미 모든 것을 완성했다는 덜함의 주장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완성된 사역의 신학’이라고 불린다. 성결운동 출신의 오순절주의자들은 덜함의 주장에 반발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견해를 지지하였다. 그들은 완전한 성화의 경험이 없이도 성령 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덜함의 주장을 적극 수용하였다. 덜함의 견해는 1914년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출범 당시 교단 신학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현대 오순절 운동의 태동에 있어 팔함, 시무어, 덜함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영적으로 침체 되어가던 미국 기독교를 새롭게 깨우며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영적 갈급함을 해소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미국의 현대 오순절 운동이 세계 각지로 확산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국제신학교육연구원>
  • 2018.04.01 / 국제신학교육연구원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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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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