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91) 종교개혁㉛
  • 스위스의 종교개혁 II - 칼뱅과 제네바 자신의 성직록을 포기하고 개신교 진영에 가담하기 전, 두 가지 사건이 칼뱅의 결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첫 번째 사건은 지난 호에서 살펴본 1533년 니콜라 코프 사건이었다. 두 번째 사건은 르페브르를 방문한 일이었다. 르페브르는 개혁을 이야기하면서도 끝까지 기존 교회 안에 머무르려 했다. 칼뱅은 그를 만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낡은 교회 체제 안에서 진정한 개혁이 가능한가? 기존 교회에 계속 복종하는 것이 오히려 복음의 개혁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가? 결국 칼뱅은 성직록을 포기했고 개신교로 개종하게 됐다. 그는 더 이상 중간 지대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개종한 칼뱅에게 운명의 도시 제네바는 처음부터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고자 했다. 이 무렵 제네바는 정치적 격변 속에 있었다. 전통적으로 제후 주교와 사보이 공작의 권세 아래 있던 제네바 시민들은 종교적·정치적 자유를 얻기 위해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이를 위해 스위스 동맹의 도시들과 관계를 강화했다. 그중에서도 1528년 이미 개신교 개혁을 받아들인 베른은 제네바의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후원 세력이었다. 제네바 시민들 가운데 이처럼 스위스 동맹을 지지하던 이들을 ‘에드그노’라고 불렀다. 이들은 처음부터 개신교 신앙을 위해 일어선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더 절실했던 것은 사보이 공작과 제후 주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베른과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개신교 개혁 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 제네바의 정치적 독립운동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된 셈이다. 이 점에서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신학적 논쟁에서 출발한 루터의 개혁과 중요한 차이가 있다. 1532년 이후 파렐을 비롯한 개신교 설교자들이 제네바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사와 교황권의 남용을 비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새로운 교회를 주장했다. 베른의 후원과 시민들의 지지 속에서 분위기가 점차 개신교 쪽으로 기울어지는 가운데 1535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 논쟁이 거세지면서 제네바의 미사는 중지되었고 성직자들에게는 새로운 복음적 신앙을 받아들이거나 도시를 떠나라는 선택이 주어졌다. 그리고 1536년 5월 25일 제네바 시민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법에 따라 살며 교황권의 남용을 폐지하겠다고 서약함으로써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미사는 중지되었지만, 새로운 예배와 교리 교육, 권징과 시민의 삶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제네바에는 개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도시 전체를 말씀 위에 세울 신학자가 필요했다. 바로 그때 칼뱅이 제네바에 도착했다. 사실 그는 제네바를 목적지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삶을 위해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길이 전쟁으로 막히자 잠시 들르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1536년에 출판한 『기독교강요』를 통해 개신교 신앙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던 칼뱅의 도착은 단순한 우연으로만 보기 어려운 절묘한 사건이었다. 칼뱅은 바로 그 당시 제네바가 절실히 필요로 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시각에서 볼 때 칼뱅이 제네바를 이끌었는지, 제네바가 칼뱅을 이끌었는지 곱씹어 보는 묘미가 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6.26

    (90) 종교개혁㉚
  • 스위스의 종교개혁 II - 장 칼뱅 마르틴 루터가 면벌부 문제를 계기로 종교개혁의 문을 열었다면 장 칼뱅은 루터와는 다른 길을 걸으며 종교개혁의 또 다른 중심 인물이 되었다. 칼뱅의 개혁은 수도사나 신학 교수로서가 아니라 인문주의 교육과 법학 훈련을 받은 젊은 지식인으로서 성경을 깊이 읽고 교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었다. 칼뱅은 1509년 프랑스 북부 누아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 행정 관련 일을 했는데 그 영향으로 칼뱅은 어려서부터 교회 및 학문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1523년 열네 살의 칼뱅은 파리로 유학을 떠나 라 마르슈 콜레주와 몽테규 콜레주에서 라틴어와 철학, 논리학 등을 배웠다. 당시 프랑스에는 에라스무스주의의 영향 아래 성경 원전과 고전 문헌을 새롭게 읽으려는 학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칼뱅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경과 고전 문헌을 읽고 해석하는 법을 익혔으며, 이는 훗날 그의 종교개혁 사상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 점에서 칼뱅은 수도원과 신학 강단에서 죄와 은혜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던 루터와 구별된다. 칼뱅은 열여덟 살 무렵 오를레앙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법학자의 길을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다른 질문이 싹트고 있었다. 교회는 과연 성경이 말하는 교회인가.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가. 당시 프랑스에는 종교개혁 운동이 전파되고 있었지만, 그것을 억압하려는 움직임도 강해지고 있었다. 칼뱅은 이 긴장 속에서 종교개혁 사상에 심취해 갔다. 칼뱅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회심이 일어난 것도 이때쯤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심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를 통해 자신을 복종하게 하셨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회심은 뜨거운 감정의 체험이라기보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생각과 삶의 방향이 바뀌는 사건이었다. 그는 중세 가톨릭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성경 중심의 구원 이해로 나아갔다. 프랑스에서 종교개혁 사상이 강하게 억압받던 1533년 니콜라 코프 사건이 터졌다. 코프는 파리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개신교 복음주의를 옹호하는 연설을 했고, 이 일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칼뱅도 박해의 위험에 놓였고 결국 파리를 떠나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칼뱅은 스위스는 물론, 이탈리아, 독일 등을 다니며 여러 종교개혁자와 교류할 수 있었고 이러한 유랑의 시간 속에서 그의 종교개혁 사상은 더욱 분명해졌다. 1536년 칼뱅은 바젤에서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간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이 책은 프랑스 개신교 성도들이 무정부적 재세례파나 과격한 이단으로 오해받는 상황에서 그들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프랑스 왕에게 변증하고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쓰였지만 곧 종교개혁 신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핵심을 명료하게 설명하였다. 훗날 제네바의 목회자로서 종교개혁을 이끌어가기 전부터 칼뱅은 성경 말씀과 교회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 젊은 학자였다. 아직 본격적인 개혁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때론 광장의 외침으로 시작되기도 하지만 책상 앞에서 성경을 읽는 한 젊은이의 조용한 순종 속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5.29

    (89) 종교개혁㉙
  • 스위스 종교개혁 - 그 외 츠빙글리의 개혁과 죽음 츠빙글리의 개혁은 예배 개혁이나 성만찬 논쟁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개혁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 세례의 의미 그리고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의 확산 속에서 더 큰 긴장과 갈등을 낳았고 마침내 그의 생애 마지막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맞이하게 됐다. 츠빙글리는 신앙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가 바로 서야 할 뿐 아니라, 그 믿음이 공동체의 삶과 사회의 질서 속에서도 나타나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세속 정부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공적 권위로서 평화를 지키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일에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츠빙글리 개혁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츠빙글리는 더 급진적인 개혁자들과 부딪히게 됐다. 그들은 교회가 국가 권력과 가까워져서는 안된다고 보았고 믿음을 스스로 고백한 사람들만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차이는 세례 문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츠빙글리는 유아세례를 인정했지만 재세례파는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보며 믿음의 고백을 재확인하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갈등은 단순히 세례 방식의 차이만이 아니었다. 교회란 무엇인가, 또 교회와 사회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취리히 시의회는 재세례파를 도시 질서를 흔드는 세력으로 보았고 결국 강하게 탄압했다. 그 과정에서 재세례파는 다른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됐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이 로마가톨릭과의 갈등만이 아니라 개혁 진영 안에서도 깊은 긴장을 안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성 갈렌, 베른, 바젤 같은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모든 지역이 같은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도시는 개혁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가톨릭 편에 선 도시들도 있었다. 이렇게 스위스는 신앙의 차이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는 가운데 점점 더 큰 긴장 속으로 빨려들었다. 츠빙글리는 개혁을 위해 도시들 사이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보았고 종교개혁은 점차 신학 논쟁을 넘어 현실 정치적인 문제와 맞물리게 됐다. 1529년 한 차례 충돌은 가까스로 진화했지만 결국 1531년 제2차 카펠전쟁이 일어났다. 츠빙글리는 종군목사로 전장에 나갔다가 10월 11일 생을 마감했다. 츠빙글리의 죽음이 곧 스위스 종교개혁의 끝은 아니었다. 그의 뒤를 이어 하인리히 불링거가 개혁을 더 안정되게 이끌었다. 그러나 교회를 새롭게 하려 했던 개혁자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은 당시 종교개혁이 얼마나 치열한 현실 속에서 진행되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츠빙글리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신앙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어떻게 세상 속에서 책임 있게 드러나야 하는가. 츠빙글리는 완전한 답을 남기진 못했지만 그 어려운 문제를 끝까지 붙들고 씨름한 개혁자였다. 그는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삶과 사역은 스위스 종교개혁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4.24

    (88) 종교개혁㉘
  • 스위스 종교개혁 - 성만찬 논쟁 츠빙글리의 사상은 여러 저술과 편지를 통해 전해진다. 소시지 사건과 관련해 쓴 “음식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1522.3.9.)는 그의 첫 종교개혁 저술로 금식 규정을 어긴 일이 왜 정당한지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했다. ‘콘스탄츠 감독에게 보낸 진정서’(1522.7.2.)와 “하나님 말씀의 명백성과 확실성에 대하여”(1522.9.6.)에서는 성직자 독신 제도의 폐지와 성경적인 복음 설교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교회와 신학을 개혁하는 가장 중요한 권위는 오직 성경이라고 주장했다. 취리히 시의회는 성경적 설교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자 1523년 1월 29일 공개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츠빙글리가 제시한 ‘67개 논제’는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교회 개혁의 방향을 밝힌 문서로서 스위스 종교개혁의 출발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선언이었다. 토론 과정에서 아무도 츠빙글리의 67개 논제를 반박하지 못하자 시의회는 그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결과 누구나 성경에 근거하여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신앙이 약한 이들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쓴 “기독교 입문서 요약”(1523.11.17.)에서 그는 성상 금지와 미사 폐지 등을 설명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취리히에서는 1524년 4월 사제들의 결혼이 이루어졌고, 기도 행진과 의전 행렬, 순례 등이 차례로 폐지되었다. 1524년 9월부터 1525년 3월 사이에 쓴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한 주석”에서 츠빙글리는 교황권, 미사의 희생 개념, 성인 숭배 그리고 행위로 얻는 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특별히 성만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면서 이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상징적 예식으로 이해했다. 그가 로마가톨릭의 화체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보는 주장이 자칫 골고다 십자가의 단번의 희생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성만찬의 빵과 잔은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아니라 그 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요 6:63).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루터와 끝내 하나가 되지 못했다. 루터는 츠빙글리와 달리 “이는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상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성만찬은 단순히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예식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였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고 해서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어디에나 임하실 수 있다고 이해했다. 반면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 안에 실제로 계실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터는 떡과 잔에 주님의 살과 피가 함께 임재함(공재설)을 주장하면서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논쟁은 1529년 마부르크 회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헤센의 필립은 루터와 츠빙글리를 한자리에 모아 개혁 진영의 일치를 이루고자 하였다. 양측은 여러 항목에서 의견을 같이했고 미사가 은혜를 얻는 반복적 희생이 아니라는 점에도 동의했다. 그러나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어떻게 임재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끝내 뜻을 모으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완전한 일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서로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는 함께 동의한 후 헤어졌다. 성만찬 논쟁은 단순한 예식 이해의 차이를 넘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싼 종교개혁 내부의 중요한 갈림길이 되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6.03.27

    (87) 종교개혁㉗
  • 츠빙글리와 스위스 종교개혁 성직 매매와 면죄부 남용, 왜곡된 예식 중심 신앙이 만연했던 16세기 유럽 교회의 위기 속에서 마르틴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이끌고 있을 때, 스위스에서는 취리히를 중심으로 츠빙글리가 새로운 개혁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수도사 출신으로 중세 가톨릭 전통 속에서 신앙적 갈등을 겪었던 루터와 달리, 츠빙글리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학자이자 성서 연구자였다. 1484년 스위스 알프스 산간 마을에서 태어난 츠빙글리는 바젤과 베른에서 기초교육을 받았으며 14세부터는 빈에서 고전문학, 철학, 신학, 과학을 공부했다. 이후 다시 바젤로 돌아와 석사 과정에 진학한 그는 고전과 교부 문헌 연구에 깊이 몰두했다. 1506년 석사학위를 마친 뒤 츠빙글리는 글라루스에서 첫 목회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스위스 사회의 큰 문제였던 용병 제도는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있었다. 용맹하기로 이름난 스위스 용병은 주변 국가들의 전쟁에 자주 동원되었고 이를 통해 스위스의 13개 도시(칸톤)는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츠빙글리는 종군 사제로도 사역하면서 이러한 현실을 직접 목격했고 용병 사업의 부도덕성을 비판하며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츠빙글리의 강경한 태도는 글라루스 지도층과의 갈등을 불러왔고 결국 1516년 아인지델른으로 전출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본격적으로 성경 연구에 몰두하여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연구는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킨 성경 중심 설교의 토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면죄부 판매 등 당시 로마가톨릭 교회의 개혁 필요성을 확신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1518년 츠빙글리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사제로 부임했다. 특히,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하는 그의 설교와 성경이 근거하지 않는 교회의 전통과 관습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결국 취리히 시의회는 모든 성직자에게 츠빙글리와 같이 성경 중심 설교를 하도록 명령했다. 그 결과 금식 강요, 성인 기도, 연옥 교리, 성상 숭배, 성직자 복장과 음악 등 중세 교회의 여러 전통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1522년 일어난 소시지 사건은 이러한 개혁이 취리히 전역으로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취리히의 인쇄업자 크리스토퍼 프로샤우어의 집에서 개혁 지지자들이 사순절 금식 기간에 소시지를 먹은 일이 논란이 된 것이다. 그 자리에 있었지만 유일하게 소시지를 먹지 않았던 츠빙글리는 “성경이 금하지 않은 일은 자유”라는 설교로 사순절 금식 관행을 비판했다. 그는 이 설교를 바탕으로 『음식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를 발표했고, 설교와 책자는 빠르게 퍼졌다. 흑사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며 시민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츠빙글리는 더욱 큰 지지를 얻게 되었다. 또한, 그가 제기한 성직자 결혼 문제를 둘러싸고 1523년 공식 논쟁이 열렸고 600여 명의 성직자와 평신도가 참석한 가운데 성경만을 권위로 한다는 원칙 아래 츠빙글리가 승리했다. 이후 개혁은 제도적으로 추진되어 1524년에는 성상 제거가 시작되었고 1525년에는 미사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6.02.20

    (86) 종교개혁㉖
  •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 양상의 변화 개혁은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진행된다. 독일의 작은 대학 도시 비텐베르크는 그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1521년, 루터는 선제후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쓴 두 번째 글은 『수도사 서원론』이라는 글이었다. 이 글에서 루터는 수도사들이 평생 지키겠다고 맹세한 가난, 순결, 복종이 과연 복음적인지 질문했다. 그의 결론은 분명했다. 그리스도인은 제도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양심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생각은 곧 비텐베르크의 현실을 바꾸기 시작했다. 일부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떠났고 수도사도 결혼할 수 있는지 공개적으로 논의됐다. 루터 자신은 여전히 수도복을 입고 있었지만 “나는 수도사이면서 동시에 수도사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앙의 중심이 점차 외형이 아니라 마음과 양심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524년 10월 4일 루터는 수도복을 벗었다. 루터가 자리를 비운 사이 비텐베르크에서는 예배 개혁이 빠르게 진행됐다. 사제들이 회중 없이 죽은 자를 위해 집행하던 개인미사는 폐지됐다. 공적을 쌓기 위해 드리는 희생 제사로서의 미사도 폐지되었으며, 평신도에게도 성찬의 잔이 주어졌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래 기다린 변화였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럽고 낯선 일이었다. 문제는 변화의 방향보다 속도였다. 충분한 설명과 합의 없이 제도가 먼저 바뀌자 도시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1522년 초에는 상황이 더욱 거칠어졌다. 과격론자들은 교회 안의 성상들을 부수고 예배형식을 일방적으로 바꿨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강하게 밀어붙여도 된다”는 생각이 힘을 얻었다. 이 무렵 ‘쯔비카우의 예언자들’이라 불린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비텐베르크의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이들은 외적인 계시로서 성경보다 성령의 직접적인 내적 계시를 강조하며 곧 세상이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외쳤다. 개혁은 점점 말씀에서 멀어지고 열정과 흥분에 치우치면서 위험한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비텐베르크의 사람들은 루터를 다시 불렀다. 그리하여 1522년 3월 루터는 바르트부르크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온 후 행한 첫 설교에서 분명히 말한다. “개혁은 강요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믿음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급하게 바뀐 많은 것들을 잠시 멈췄다. 미사는 당분간 기존의 방식으로 드렸고 성찬의 변화도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히 준비시키는 길을 택했다. 이것이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루터가 선택한 길은 빠른 개혁이 아니라 느린 개혁이었다. 그는 형식을 바꾸는 것보다,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자기 말로 고백하게 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확신에서 나온 작업이 바로 독일어 성서 번역이다. 1522년에 출간된 독일어 신약성서는 복음을 평범한 시민의 언어로 옮겨 놓았다. 비텐베르크의 개혁은 이제 한 도시의 경계선을 넘어 독일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은 단순한 개혁의 성공 사례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 빠른 개혁이 어떤 혼란을 낳는지, 그리고 기다릴 줄 아는 개혁이 어떻게 성공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6.01.23

    (85) 종교개혁㉕
  • “어떤 설교가 복음적 설교인가?”(루터의 기준) 1521년 5월 4일부터 이듬해 3월 3일까지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 머물렀다. 이곳은 루터에게 ‘밧모섬’과 같은 장소였다. 그는 이곳에서 여러 글을 집필했고 이는 이후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부재 가운데 칼슈타트와 멜란히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 출신 동료들을 중심으로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개혁 방식의 차이로 인해 혼란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루터는 이러한 상황을 방관하지 않고, 글을 통해 개혁을 바로잡고자 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이 난항을 겪는 근본 원인을 당시 설교자들의 설교에서 찾았다. 설교자들의 신학적 수준이 제각각이었고 성경 해석 역시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체류 동안 『교회 설교집(Church-Postil)』을 집필했다. 이 설교집은 설교자들에게는 복음적 설교의 기준을 제시하고 동시에 평신도들도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작성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제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교회 설교집』에서 루터가 제시한 설교의 기준은 분명하다. ① 루터에게 설교란 성경에 대해 설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시간이었다. 따라서 복음적 설교는 지식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② 루터의 설교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놓여 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기에 설교의 결론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가리켜야 한다는 것이다. ③ 이를 위해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명확히 구별했다. 율법은 인간의 죄와 한계를 드러내지만 복음은 무너진 인간을 다시 살린다. 이 둘이 혼동될 때 설교는 절망을 낳거나 값싼 위로로 전락한다. 따라서 루터는 율법을 통해 인간의 절망적인 실존을 드러낸 후,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과 자유의 복음으로 나아갔다. ④ 루터가 설교에서 강조하는 또 다른 기준은 ‘십자가 신학’이었다. 그는 인간의 공로와 종교적 성취를 강조하는 설교를 ‘영광의 신학’이라 비판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공과 강함 속에서가 아니라 약함과 고난, 곧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의 신학 위에 선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하신 분이다. 열심히 믿으면 복 받는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성공한다, 더 거룩해져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라고 말하지만 십자가의 신학 위에 선 설교자는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아무런 공로를 내세울 수 없을 때, 의지할 것이 전혀 없을 때 하나님은 절대 희망이요 절대 소망이 되신다! 너는 약해도 괜찮다. 망가진 상태로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다. 구원은 너의 힘과 능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일이다!”라고 말한다. ⑤ 흥미로운 점은 루터가 설교의 능력과 결과를 설교자에게서 철저히 분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설교자는 사람들의 귀에 말씀을 전할 수 있을 뿐, 그들의 마음에 믿음을 넣을 수는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믿음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생겨나며, 설교자는 그 결과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터의 설교가 삶과 무관한 신학적 이론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⑥ 오히려 그는 복음적 설교가 참된 믿음을 낳고, 그 참된 믿음은 이웃을 향한 책임과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루터에게 『교회 설교집』은 단순한 설교 모음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개혁이 폭력이나 급진적 행동이 아니라 참된 말씀의 선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주는 루터의 설교 신학이었다. 바르트부르크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집필된 이 설교집은 이후 비텐베르크의 혼란을 정리하고, 개신교 설교의 기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루터의 개혁은 제도보다 앞서 설교의 개혁이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12.26

    (84) 종교개혁㉔
  • 루터와 프리드리히 선제후 루터를 호위하기 위해 동행하던 황제의 전령과 작센의 의원들이 돌아간 후, 튀링엔 숲의 알텐슈타인 성 근처 계곡에 이르렀을 때, 루터는 무장한 기사들에 의해 납치됐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 은둔하게 될지는 알지 못했던 루터는 신약성경과 히브리어 성경만 손에 쥔 채 마차에서 끌어 내려져 손이 묶인 상태로 걸어가야 했다. 밤 11시쯤 되어서 도착한 곳은, 이후 루터가 융커 외르크라는 가명으로 약 10개월을 지내게 될 바르트부르크 성이었다. 작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자신의 영지에 속한 바르트부르크에 루터가 안전하게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그는 성유물을 수집하고 미사를 꾸준히 드리는 인물이었다. 그가 모은 성유물은 1만 9000점이 넘었고, 예수의 가시면류관에서 떨어진 가시 조각과 성모 마리아의 모친 성 안나의 엄지손가락 뼈 같은 귀중한 유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지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사순절마다 수도원에서 지내고 성지를 순례했으며, 교회 음악을 사랑하고 성당과 수도원 건립을 후원했다. 또한 종교 서적을 읽고, 에라스무스와 아벤티스 등 당대 유명한 지식인들과 신앙을 주제로 서신을 나누었으며, 이들과의 인연을 통해 루터와도 연결됐다. 프리드리히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영향력 있는 군주였다. 1486년부터 1525년까지 작센을 통치하면서 제국의회에 30차례 넘게 참석했고, 막시밀리안 황제의 조언자로 활동했다. 이러한 정치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개혁의 운명을 짊어진 루터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1518년 교황청이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자 프리드리히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아욱스부르크에서 교황청 사절과 면담하도록 조정했다. 끝까지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 루터를 인도해달라는 교황의 요구를 거절하며, 루터가 독일 내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황제를 설득했다. 비록 루터는 1521년에 파문되었지만,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미리 확보해 둔 안전통행증을 활용해 루터가 무사히 보름스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튀링엔 숲의 납치 작전 역시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그가 세운 계획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드리히와 루터는 직접적으로 소통한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연락은 선제후의 보좌 신부이자 루터의 친구였던 슈팔라틴을 통해 이루어졌다. 슈팔라틴의 기록에 따르면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분명 너그럽게 사랑하고 아꼈으나” 정작 루터의 주장은 항상 선제후를 괴롭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522년 루터의 책 한 권을 가리키며 프리드리히는 “마음에 드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저 책을 위해 내가 이렇게 고생한단 말이지”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루터의 개혁을 가로막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개혁의 가능성을 지켜낸 보호자였다. 1525년 종려주일에 프리드리히는 토르가우 인근 자신의 성에서 처음으로 루터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렸다. 2주 후에는 슈팔라틴이 집례한 성찬식에서 처음으로 빵과 포도주 모두를 받았다. 로마가 1415년에 평신도에게 잔을 주는 것을 금지한 뒤로 축성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사제만의 특권이었기에, 이는 그가 루터의 개혁신앙을 매우 신뢰했음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프리드리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통적 경건함과 개혁적 신앙 사이에서 참된 믿음을 찾으려 노력한 군주로 생을 마쳤다. 평범한 출신에 불과했던 한 수도사의 비범함과 열정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지했던 그의 혜안과 결단 덕분에,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역사는 실현될 수 있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11.28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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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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