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75) 종교개혁⑮
  • 라이프치히 논쟁 1519년 6월 28일 칼 5세는 독일 황제로 선출되었다.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이었고 독일 지역 7명의 제후는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칼 5세는 스페인의 황제이기도 했는데 만약 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까지 차지하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교황청의 입지가 크게 약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교황청은 이를 반대하며 그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루터에 대한 소송도 늦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새로운 신학적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가리켜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7일까지 벌어진 라이프치히 논쟁이라고 한다. 요한네스 에크는 독일 출신의 신학자로 로마가톨릭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7월 2일까지 에크는 종교개혁 초기 루터의 신학적인 동지였던 칼슈타트와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에크의 언변은 매우 뛰어나 칼슈타트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종교개혁을 지지하던 잉골슈타트 대학의 다른 교수들조차도 에크에게 압도당했다. 그러나 7월 4일부터 루터가 직접 에크와 토론을 벌이기 시작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루터와 에크는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의 권위에 대해서 먼저 논쟁을 벌였고 이후 면죄부, 참회, 연옥 등의 문제로 토론이 이어졌다.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논쟁은 이미 1518년 12월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에크는 수위권을 옹호하는 12개 논제를 제시했으며 이에 루터 역시 12개 반대 논제를 내세우며 맞섰다. 그러자 에크는 13번째 논제를 가지고 루터의 주장을 재반박했다. 에크는 “로마 교회가 실베스터(교황 실베스터 1세, 314~335) 이전에는 다른 교회보다 높지 않았다는 주장을 우리는 부인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성 베드로의 신앙과 직위를 가진 그를 우리는 항상 베드로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루터 역시 13번째 반대 논제를 추가하며 “로마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400년 이후에야 등장한 로마 교황의 빈약한 교령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1100년의 신앙의 역사와 성서 본문과 모든 공의회 가운데 가장 거룩한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는 이것을 반대한다”고 반박했다.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이러한 논제를 토론할 기회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 『교황의 권력에 대한 13개 논제 해설』을 인쇄하여 미리 배포했다. 루터는 교황의 수위권이 ‘신의 뜻에 근거한 법’이라는 로마가톨릭의 주장을 부인하며 교황은 인간이 만든 하나의 제도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교황에게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한 번도 로마의 통치를 받지 않았던 동방 교회들에게는 그런 주장이나 요구가 제기된 적이 없음을 상기시켰다. 루터의 주장은 교회가 성서에 근거하지 않은 어떤 것을 구원에 절대적인 조건으로 강요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라이프치히 논쟁의 진정한 핵심은 ‘면죄부’나 ‘참회’의 문제가 아니라 성서에 근거한 ‘참된 교회에 관한 이해’였다. 1519년 8월 루터는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전개한 자신의 논제를 바탕으로 세 개의 글을 작성했다: 『교황의 권한에 대한 13개조 논제 해설』, 『라이프치히 논제 해설』 그리고 『요한네스 에크의 사악한 판결 반박』이다. 한편, 에크는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쾰른 대학과 뢰벤 대학의 신학자들을 선동해서 루터의 주장을 비판하도록 했다. 그들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루터의 8개 문구를 정죄하고 면죄부와 참회에 대한 그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루터의 글들을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외적으로는 에크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상 라이프치히 논쟁은 루터의 신학적 승리로 기억되고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목사)
  • 2025.02.21

    (74) 종교개혁⑭
  • 아우구스부르크 심문 1518년 5월 초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 회원들은 대부분 루터를 지지했지만 작센의 도미니크파 수도회 회원들은 이단 혐의를 씌워 루터를 로마 교황청에 고발했다. 도미니크 교단 총회도 이러한 고소를 지지한 결과 교황 레오 10세는 교황청 신학자인 실베스터 프리에리아스에게 루터의 주장을 심사할 것을 명했다. 이를 근거로 1518년 6월 교황청 최고 판사인 체누치는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라는 출두명령서를 발부했다. 이 명령서는 카예탄 추기경을 통해 1518년 8월 7일 루터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는 당시 교황청 대사 자격으로 터키와의 전쟁에 필요한 독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아우구스부르크에 머물고 있었다. 루터의 지역 영주이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이 문제에 즉각 개입했다. 로마 교황청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으며 이로써 루터의 심문은 추기경 카예탄의 주관하에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1518년 8월 23일 교서를 통해 카예탄에게 루터를 심문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했으며 그 결과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아우구스부르크 푸거가(Fugger家)에서 루터 심문이 이루어졌다. 심문의 중요 내용은 루터의 95개조의 면죄부 반박문 중 58번째 논제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는 교황이 면죄부를 나누어주는 근거로써 주장하는 ‘교회의 보화’는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공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교황 없이도 그리스도의 공로는 속사람에게는 은혜를, 겉 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카예탄은 교회의 재정과 자원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강조하는 클레멘스 6세의 칙령(‘홀로 낳아진 자’)을 통해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반박했다. 그는 교황이 모든 공의회와 성서보다 우위에 있으며 루터는 자신의 모든 주장을 취소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루터는 생각할 시간을 요청했으며 자리를 떠났다. 10월 13일 루터의 두 번째 심문이 열렸다. 루터는 자신이 어떤 점에서 성서, 교부, 교황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가르쳤는지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루터는 적법한 교회의 판단에 복종할 것이며 어느 곳에서나 상관없이 공개 토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0월 14일 세 번째 루터 심문이 열렸다. 카예탄은 루터의 입장을 반박하는 글을 낭독했고 루터에게 입장을 취소할 것을 다시 한번 요구했다. 카예탄은 루터에게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함으로써 시련을 겪는 교회에 보화의 공로를 획득했다’고 기록된 문헌을 읽어 주었다. 이에 루터는 보화를 얻는 것과 보화 자체는 다르며 그리스도 그 자신이 바로 그 보화요, 교회의 근거라고 반박했다. 루터는 “잘 가르쳐야 할 거룩한 아버지에 대해 잘 가르치지 못한 교황과 그의 판사에 관하여”라는 호소문을 작성해 유포했고 10월 22일 아우구스부르크를 떠났다. 로마에서는 루터를 압송하려는 노력에 이어 이제 면죄부 교리를 합법적으로 선포하고자 했다. 1518년 11월 9일 레오 10세는 교황은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그의 권세에 근거하여 면죄부로 사면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이 면죄부는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사면이라는 방식으로, 죽은 자들에게는 중보기도라는 방식으로 베풀어진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그사이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진행된 자신의 심문을 다룬 『아우구스부르크 행적』(Acta Augustana)을 집필하여 12월에 출판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목사)
  • 2025.01.24

    (73) 종교개혁⑬
  • 하이델베르크 논쟁 면죄부와 교황의 권위를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고 있던 1518년 초, 가브리엘 베네투스가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 총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서신을 통해 마르틴 루터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며 그를 ‘진정시키고 달래줄’ 학자들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베네투스 총장은 당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원장이자 비텐베르크 초대학장을 지낸 슈타우피츠에게 이를 전달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는 루터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처리하되 학문적인 토론으로 해결하려 했다. 마침 3년마다 열리는 총회가 하이델베르크에서 예정되어 있었고 이를 활용하기로 했다. 이에 루터는 총회 참석을 위해 비텐베르크 대학에 휴가를 요청했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뷔르츠부르크의 총대주교 프리드리히 폰 비르스베르크 그리고 팔츠의 선제후 루드비히 5세 등으로부터 하이델베르크로의 여행 안전 보장도 확인받았다. 루터는 특별히 제공받은 마차를 거절하고 규정에 따라 4월 11일 동료 수도사와 함께 도보로 떠났다. 코부르크, 뷔르츠부르크를 거쳐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을 때 루터는 그곳 선제후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크게 환영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518년 4월 25일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 총회에 참석했다. 다음날인 26일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예술학부 강의실에서 루터의 문제와 관련하여 변론회가 열렸다. 루터는 변론을 위해 미리 28개의 신학적 논제와 12개의 철학적 논제를 준비했다. 그의 논제들은 전체적으로 스콜라신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죄와 은혜에 대한 간결하고 날카로운 가르침이 포함되었다. “인간의 행위는 아무리 아름다워 보이고 선해 보일지라도 분명히 치명적인 죄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행위는 아무리 불완전해 보이고 나빠 보일지라도 (구원을 위한) 참된 불멸의 공로이다”(논제3, 논제4). “자유 의지는 타락 이후에는 공허한 개념에 불과하다.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행하게 될 때 죽음의 죄를 짓는 것이다”(논제13). 이 밖에도 루터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대조하며 로마가톨릭을 향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변론회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행사이기도 했다. 이는 루터에게 영예로운 것이었으며 환대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와 하이델베르크 대학 관계자들 그리고 그곳 시민들과 팔츠 선제후 궁정의 대표자들이 관객으로 참석했다. 루터와 논쟁을 벌인 여섯 명의 박사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 회서, 요도쿠스 브레히텔, 마쿠스 슈티어, 피터 샤이벤하르트, 게오르그 슈바르츠, 로렌츠 볼프. 기록에 따르면 청중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여섯 명의 신학 교수들은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지만 예술학부 교수들과 학생들은 루터에게 열렬하게 동의했다. 루터는 1518년 5월 18일 조지 스팔라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박사들은 나의 변론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매우 겸손하게 논쟁을 벌였기에 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에게 내 주장은 낯선 것이었지만 예리하고 훌륭하게 반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다만 다섯 번째 가장 나이 어린 박사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루터가 말한 어린 박사는 게오르그 슈바르츠였다. 그는 청중의 웃음을 유발하며 루터의 논제를 농민들이 알게 되면 그를 돌로 쳐 죽일 것이라고 분노했다. 루터의 변론을 기록한 이들 중에서 마틴 부처의 기록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그는 변론회가 끝난 후 루터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부처는 루터가 에라스무스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라며 열광했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은 ‘행위로 얻는 의’에 대한 루터의 비판과 ‘십자가 신학’에 대한 그의 신학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목사)
  • 2024.12.27

    (72) 종교개혁⑫
  • 95개조 논제에 대한 반응들이 종교개혁의 밀물이 되다 95개조 논제는 루터가 예기치 못한 일들을 일으켰다. 면죄부 문제보다는 오히려 교황의 권력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1517년 12월 17일 마인츠의 대주교였던 알브레히트는 “거룩한 교황께서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이에 대한 루터의 오류를 반박하고 훈계해달라”며 95개조 논제를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1518년 1월 20일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 요하네스 텟젤과 당시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n der Order) 대학 총장이었던 콘라트 빔피나는 루터의 논제들을 고려하여 만든 106개의 논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열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면죄부 이론과 판매에 대해 정당함을 강하게 방어했다. 루터의 수많은 주장 가운데 특별히 ‘교황의 권한 제한’과 ‘연옥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하여 오류이며 모독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은 흔히 이단 심문에서 통용되던 것이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토론회를 근거로 도미니크 수도회는 루터에게 이단 혐의를 두어 로마에 고소키로 했다. 1518년 2월경 잉골슈타트의 저명한 신학자 요하네스 엑크는 『오벨리스키(날카로운 기둥들)』라는 저서를 통해 루터가 ‘보헤미아의 바이러스를 퍼뜨린다’라고 비난하며 그의 오류들을 질책했다. ‘보헤미아의 바이러스’란 15세기 초 보헤미아 왕국(현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루터를 향한 일련의 격렬한 반응들은 오히려 루터의 개혁 의지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1518년 8월에 출판된 “면죄부의 효용에 대한 논쟁의 해결”에서 루터는 95개조 논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주장들을 더욱 세밀하고 예리하게 설명했다. 그는 참회에 대한 신약성서의 근거들을 더욱 명확하게 제시했으며, 교황의 권한에 대해서도 더욱 날카롭게 비판했다. 믿음에 대해서도 다른 어떤 신앙 행위와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강조했다. 성례전과 연옥설에 대해서도 로마가톨릭 주장의 오류를 한층 강하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특히, 직접적으로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루터는 알브레히트를 향해 ‘최악의 이교도’로 칭하며 더 나아가 교황이 면죄를 통해 새로운 신앙 교리를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지금의 교회는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일도, 교황의 일도, 수많은 추기경의 일도 아닌, 하나님만의 일이다. 종교개혁의 때는 오로지 시간을 창조하신 그분만이 알고 있다. 우리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명백한 오류를 부인할 수 없다. 교황의 죄 사함의 권세는 오용되고 있고 그는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자임이 틀림없다. 개혁의 밀물이 이미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다. 우리의 악행이 그것을 벌어들였다(렘 14:7).” 물론 루터에게는 그 종교개혁을 이끌려는 강력한 의지나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글에서 그는 자신의 95개조 논제를 “철회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교황의 처분에 따를 것임을 밝히고 있다. “거룩한 아버지, 나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의 거룩성에 맡깁니다. 살려주시든, 죽이시든, 부르시든, 철회하시든, 불쌍히 여기시든, 쫓아내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당신의 음성을 당신 안에서 이끄시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내가 죽을 만한 일을 저질렀다면, 나는 죽기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땅과 충만한 모든 것이 주의 것이며, 그는 영원히 찬양받으실 것입니다”(WA 1,529,23-27). 루터는 부조리한 로마가톨릭과 교황의 결정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겨드렸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11.22

    (71) 종교개혁⑪
  • 면죄부 판매와 95개조 논제 오래전부터 기독교인들은 기도나 성지 순례 외에도 돈으로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교회는 연옥을 지옥으로 갈 정도로 큰 죄를 짓지 않은 죄인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으로 생각했다. 즉, 천국으로 직행할 수 없는 영혼들이 연옥에서 다음 심판을 기다리며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에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이나 대리인의 선행과 회개 그리고 보상의 노력에 따라 연옥에 머무는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연옥을 뜻하는 라틴어 푸르가토리움(Purgatorium)은 ‘정화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연옥을 땅속 깊은 곳의 불구덩이로 묘사했고 단테는 죄인들이 눈꺼풀을 철사로 꿰맨 채 머물고 있는 언덕으로 그렸다. 종교적인 해석이나 상상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연옥의 이미지는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로마가톨릭은 이런 공포심을 이용하여 필요한 재정을 채우려고 했다. 예를 들어 교황이나 대주교들은 성당을 짓거나 보수할 때 또는 십자군전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면죄부(엄밀히 말해서 면벌부)를 팔아서 돈을 모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당시 스콜라철학의 논리를 끌어들이고 있었다(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스콜라주의를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터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는 로마에 베드로성당을 신축하려고 했고, 그에 필요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1506년 대규모의 면죄부를 발행했다. 독일에서는 마인츠와 막데부르크의 대주교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에게 면죄부 판매를 위임했다. 율리우스 2세는 그에게 면죄부 판매를 통한 수입의 절반을 푸거 가문에게서 차용한 9만9000굴덴(당시 100굴덴 정도면 지방 부호의 큰 저택 한 채 값이었고, 중산층 가족의 1년 생활비 정도였다)의 융자금을 상환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와 별도로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 수입 가운데 2만4000두카덴(중세 유럽의 금화 명칭)을 마인츠 교구와 막데부르크 교구를 인수하는 데 드는 상납금으로 교황청에 지불했다.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던 요하네스 텟젤이 베드로성당 건립을 위한 면죄부 판매 실무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십자가와 교황의 깃발을 든 텟젤은 알브레히트가 관할하는 세 교구의 도시마다 찾아가서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판매했다. 마르틴 루터는 영혼의 구원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이러한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면죄(사면)의 신학적 부당성을 95개조 논제로 작성하여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보냈다. 알브레히트가 루터의 신학적 이의 제기를 무시해 버리자 크게 실망한 루터는 항의를 결심하고 비텐베르크 성당 문을 향해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한 손에 망치를 들고 세상을 바꾸게 될 벽보를 성당 문에 못 박았다. 루터의 절친한 동지였던 필립 멜란히톤은 루터가 죽은 후에 그의 저술을 모아 책을 출판하면서 그 서문에 “루터는 1517년 만성절 전날 비텐베르크 성당에 면죄(사면)를 반박하는 95개조 논제를 게시했다”라고 기록했다. 오랫동안 루터의 비서였던 게오르크 뢰러는 “1517년 만성절 전야에 비텐베르크의 모든 교회와 문들에 면죄부를 비판하는 마르틴 루터 박사의 논제가 붙었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게시 방법에는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오늘날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1517년 10월 31일에 시작되었다고 확신한다. 다음은 95개조 논제를 시작하는 루터의 목소리이다. “진리를 향한 사랑과 진리를 밝히고자 하는 열정으로 아래와 같은 논제를 가지고 (면죄부 신학에 관해) 토론할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향한 루터의 열정을 사용하셔서 세상을 변화시키셨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10.25

    (70) 종교개혁⑩
  • 종교개혁을 위한 루터의 각성 (1) 1512년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성서학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요한 슈타우피츠의 결정적인 역할 덕분이었다. 슈타우피츠는 수도원 업무로 인해 더 이상 성서학 교수직을 맡을 수 없게 되자 루터에게 그 자리를 대신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 시점부터 루터는 성서 주해에 집중하게 되었고, 이는 그에게 종교개혁을 위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가 시련을 겪을 때마다 그를 위로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언해 준 스승이자 친구였다. 루터는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몸부림칠 때 슈타우피츠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시작한다는 그의 말은 번개처럼 나를 강타했고, 장사의 화살처럼 내 영혼에 박혔다.” 또 한 번은 루터가 자신이 구원을 위해 예정된 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졌을 때 슈타우피츠는 이렇게 조언했다. “예정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시작해 보게.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고 죄인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슴에 새겨야 하네. 그러면 예정으로 인한 고뇌는 사라질 것이네.” 1512년 10월 루터는 비텐베르크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의 강의실에서 첫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창세기를 가르친 후 1513년 8월부터 1515년 7월까지 시편을 강의했다. 이때 루터는 시편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는 시편 31편 1절에서 말하는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구절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했다. 즉,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그를 구원하며 자유케 하는지 의문이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루터는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시편 구절들이 갖는 이중적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하나는 다윗에게 연관되는 문자적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연관되는 예언적 의미였다. 이 둘 가운데 루터는 예언적인 의미를 시편이 가진 본래적 의미로 여겼다. 다만 문자적인 의미와 예언적인 의미를 도덕적인 의미 안에서 이해할 때 그 본문 안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의 이러한 신학적 발전은 1515년 11월부터 1516년 9월까지 행한 로마서 강의에서 한층 발전했다. 그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안에 처음부터 내재한 원죄를 극복하고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extra nos in christo),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붙들게 하는 것이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소망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찬양은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하며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을 통해 교회 안에 임재하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적인 의로움과 구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간의 의로움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행위를 일으킨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쌓은 공적을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는 그런 의로움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는 의로움이며 오직 믿음 안에서만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로움이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09.27

    (69) 종교개혁⑨
  • 마르틴 루터의 로마 여행
    루터가 비텐베르크로 전출 가기 1년 전인 1510년 가을 그는 에얼랑엔, 뉘른베르크, 울름 그리고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의 쿠르를 지나 로마까지 이르는 길고도 험난한 여행을 해야 했다. 긴 여정과 한겨울의 날씨에 체력을 소진한 루터는 급기야 열병을 앓게 되었는데 훗날 그는 ‘그때 석류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여행의 목적은 로마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장들 그리고 가능하면 교황을 만나 청원서를 전하는 일이었다. 독일 에어푸르트 여러 지역에 있는 수도원들이 수도회 규정들을 둘러싸고 자율적으로 규정을 바꾸려 하면서 논쟁이 발생하자 수도회는 루터를 보내어 로마에 있는 교구 지도부에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청원하려 했던 것이다. 루터는 그때까지만 해도 로마가톨릭에 순종하는 충성심 가득한 종이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 독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이탈리아의 수도원들을 보고 감격해하면서 바닥에 엎드려 이렇게 외쳤다. “반갑다, 성스러운 로마여! 성스러운 순교자들의 피가 뿌려진 거룩한 도시여!” 루터는 로마에서 약 4주간 머물렀지만 그가 가져온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게 된 로마의 실상은 루터에게 여러 가지 실망을 안겨 주었다. 그는 셀 수 없는 미사를 되풀이 하며 그것들을 날림으로 대충 해치우는 사제들을 보고 ‘역겹다’고 생각했다. 또한 성찬대에서 거만하게 구는 경박한 신부들에 관해 한탄하며, ‘독일 사제들은 이탈리아 성직자들에 관해 크게 착각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루터는 교황이 성찬대에서 ‘황금 같은 입술’을 열어 미사 참석자들의 영혼을 치유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일’ 외에 교황은 루터에게 아무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라테란 성당 앞에 있는 ‘성스러운 계단’(scala sancta)은 당시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불리웠다. 당시 사람들은 맨 무릎으로 누구든지 그 28개의 계단을 오르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1545년 11월 15일 설교에서 마르틴 루터는 로마 여행 중 방문한 그 계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바 있다. “로마에 있을 때, 나는 내 할아버지를 연옥에서 구원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빌라도의 계단을 올라가며 각 단계마다 주기도문을 외웠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아버지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정상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것이 정말인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심이 깊었던 루터는 순례를 중단하지 않았다. 물론, 그때까지는 개혁과 같은 거창한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후 여행에서 돌아온 루터는 수도회 내에서 지위가 높아졌고, 비텐베르크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설교자로 일하게 되었다. 1512년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정식 신학 교수가 되면서 성경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종합해보면 로마 여행은 루터가 29세 되던 1513년 그의 내적인 갈등이 심해지면서 진정한 회심에 이르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08.23

    (68) 종교개혁⑧
  • 마르틴 루터의 수도원 생활
    루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기 맘대로 수도사가 되기로 결정한 아들에게 매우 실망했다. 문학 석사가 된 자랑스런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수도원의 두꺼운 벽 안에 갇혀 인생을 허비하겠다니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겠는가? 루터의 부모는 훗날 나머지 두 아들을 흑사병으로 잃고 나서야 루터를 향한 노기를 누그러뜨렸다. 루터는 웃음도 허락되지 않는 엄격한 규율 속에서 고요한 삶을 살게 되었다. 당시 인문학을 중시하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경제적으로도 제법 넉넉했지만 수도사들의 방에는 난로는커녕, 짚을 엮어 만든 침대와 담요가 전부였다. 수도사들은 끊임없이 죄에 관한 교리를 들어야 했으며, 더 나아가 매일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고해해야 했다. 그들은 “숨 쉴 때마다 죄를 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라며 불평하면서도 하루에 몇 시간씩 고해성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루터 역시 자신이 6시간 동안 죄를 고백한 적이 있다고 친구들에게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죄는 씻으면 씻을수록 점점 더 드러나게 된다”며 고해와 속죄 의식을 비난했다. 수도원에서 루터의 특이한 행동들은 일종의 정신질환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기록에 따르면 루터는 자신이 집례하는 첫 미사 때 바닥에 쓰러져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루터는 이 일에 관해 “미사 기도문을 낭송하면서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벌벌 떨었다”고 회고했다. 성찬대에 서서 자신이 누구에게 기도하는지 하나님에게 감히 말하고 있는 자신은 누구인지 혼란에 빠지면서 제단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했다. 어쨌든 루터는 이 일을 계기로 ‘제2의 바울’이라는 좋은 평판까지 얻었다. 이후 루터는 차부제, 부제를 거쳐 1507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의 성직 계급은 크게 주교, 사제, 부제로 나뉘는데 부제 밑 가장 낮은 성직이 차부제이다. 이때부터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는 데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는 붉은색 가죽으로 덮어씌운 라틴어 성경을 들고 다니며 집착하듯 성경을 읽었는데 나중에는 성경 전문을 거의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1508년 가을에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으로부터 강의 의뢰를 받고 윤리 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왕복 수일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그는 강도들이 출몰하는 위험한 산길을 지나 농가를 지나다니며 성실하게 강의를 다녔다. 수도회 내에서 지위가 높아지면서 루터는 1511년에 비텐베르크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로 전출을 가게 되었다. 이같은 신분 상승으로 루터는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29세가 되던 그해 루터는 난생처음으로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 별채의 독방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루터는 훗날 “초라한 쪽방에서 나와 교황의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1512년에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정식 교수직도 얻게 되었다. 당시 비텐베르크의 영주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였다. 그는 비텐베르크를 명망 있는 도시로 키우고자 했고 이를 위해 1502년 ‘하얀 언덕’(=비텐베르크) 위에 대학을 세웠다. 프리드리히 3세는 근처에 있던 라이프치히 대학을 뛰어넘겠다는 각오로 많은 투자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요청해 어렵사리 뛰어난 3명의 학자를 새로 영입했는데 그중에 한 명이 바로 마르틴 루터였다. 루터는 새로운 환경에서 성경을 더욱 깊이 연구했고, 특히 시편과 바울 서신서를 연구하면서 그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07.26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