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89) 종교개혁㉙
  • 스위스 종교개혁 - 그 외 츠빙글리의 개혁과 죽음 츠빙글리의 개혁은 예배 개혁이나 성만찬 논쟁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개혁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 세례의 의미 그리고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의 확산 속에서 더 큰 긴장과 갈등을 낳았고 마침내 그의 생애 마지막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맞이하게 됐다. 츠빙글리는 신앙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가 바로 서야 할 뿐 아니라, 그 믿음이 공동체의 삶과 사회의 질서 속에서도 나타나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세속 정부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공적 권위로서 평화를 지키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일에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츠빙글리 개혁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츠빙글리는 더 급진적인 개혁자들과 부딪히게 됐다. 그들은 교회가 국가 권력과 가까워져서는 안된다고 보았고 믿음을 스스로 고백한 사람들만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차이는 세례 문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츠빙글리는 유아세례를 인정했지만 재세례파는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보며 믿음의 고백을 재확인하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갈등은 단순히 세례 방식의 차이만이 아니었다. 교회란 무엇인가, 또 교회와 사회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취리히 시의회는 재세례파를 도시 질서를 흔드는 세력으로 보았고 결국 강하게 탄압했다. 그 과정에서 재세례파는 다른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됐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이 로마가톨릭과의 갈등만이 아니라 개혁 진영 안에서도 깊은 긴장을 안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성 갈렌, 베른, 바젤 같은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모든 지역이 같은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도시는 개혁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가톨릭 편에 선 도시들도 있었다. 이렇게 스위스는 신앙의 차이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는 가운데 점점 더 큰 긴장 속으로 빨려들었다. 츠빙글리는 개혁을 위해 도시들 사이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보았고 종교개혁은 점차 신학 논쟁을 넘어 현실 정치적인 문제와 맞물리게 됐다. 1529년 한 차례 충돌은 가까스로 진화했지만 결국 1531년 제2차 카펠전쟁이 일어났다. 츠빙글리는 종군목사로 전장에 나갔다가 10월 11일 생을 마감했다. 츠빙글리의 죽음이 곧 스위스 종교개혁의 끝은 아니었다. 그의 뒤를 이어 하인리히 불링거가 개혁을 더 안정되게 이끌었다. 그러나 교회를 새롭게 하려 했던 개혁자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은 당시 종교개혁이 얼마나 치열한 현실 속에서 진행되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츠빙글리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신앙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어떻게 세상 속에서 책임 있게 드러나야 하는가. 츠빙글리는 완전한 답을 남기진 못했지만 그 어려운 문제를 끝까지 붙들고 씨름한 개혁자였다. 그는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삶과 사역은 스위스 종교개혁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4.24

    (88) 종교개혁㉘
  • 스위스 종교개혁 - 성만찬 논쟁 츠빙글리의 사상은 여러 저술과 편지를 통해 전해진다. 소시지 사건과 관련해 쓴 “음식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1522.3.9.)는 그의 첫 종교개혁 저술로 금식 규정을 어긴 일이 왜 정당한지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했다. ‘콘스탄츠 감독에게 보낸 진정서’(1522.7.2.)와 “하나님 말씀의 명백성과 확실성에 대하여”(1522.9.6.)에서는 성직자 독신 제도의 폐지와 성경적인 복음 설교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교회와 신학을 개혁하는 가장 중요한 권위는 오직 성경이라고 주장했다. 취리히 시의회는 성경적 설교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자 1523년 1월 29일 공개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츠빙글리가 제시한 ‘67개 논제’는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교회 개혁의 방향을 밝힌 문서로서 스위스 종교개혁의 출발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선언이었다. 토론 과정에서 아무도 츠빙글리의 67개 논제를 반박하지 못하자 시의회는 그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결과 누구나 성경에 근거하여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신앙이 약한 이들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쓴 “기독교 입문서 요약”(1523.11.17.)에서 그는 성상 금지와 미사 폐지 등을 설명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취리히에서는 1524년 4월 사제들의 결혼이 이루어졌고, 기도 행진과 의전 행렬, 순례 등이 차례로 폐지되었다. 1524년 9월부터 1525년 3월 사이에 쓴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한 주석”에서 츠빙글리는 교황권, 미사의 희생 개념, 성인 숭배 그리고 행위로 얻는 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특별히 성만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면서 이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상징적 예식으로 이해했다. 그가 로마가톨릭의 화체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보는 주장이 자칫 골고다 십자가의 단번의 희생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성만찬의 빵과 잔은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아니라 그 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요 6:63).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루터와 끝내 하나가 되지 못했다. 루터는 츠빙글리와 달리 “이는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상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성만찬은 단순히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예식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였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고 해서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어디에나 임하실 수 있다고 이해했다. 반면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 안에 실제로 계실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터는 떡과 잔에 주님의 살과 피가 함께 임재함(공재설)을 주장하면서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논쟁은 1529년 마부르크 회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헤센의 필립은 루터와 츠빙글리를 한자리에 모아 개혁 진영의 일치를 이루고자 하였다. 양측은 여러 항목에서 의견을 같이했고 미사가 은혜를 얻는 반복적 희생이 아니라는 점에도 동의했다. 그러나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어떻게 임재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끝내 뜻을 모으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완전한 일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서로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는 함께 동의한 후 헤어졌다. 성만찬 논쟁은 단순한 예식 이해의 차이를 넘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싼 종교개혁 내부의 중요한 갈림길이 되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6.03.27

    (87) 종교개혁㉗
  • 츠빙글리와 스위스 종교개혁 성직 매매와 면죄부 남용, 왜곡된 예식 중심 신앙이 만연했던 16세기 유럽 교회의 위기 속에서 마르틴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이끌고 있을 때, 스위스에서는 취리히를 중심으로 츠빙글리가 새로운 개혁의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수도사 출신으로 중세 가톨릭 전통 속에서 신앙적 갈등을 겪었던 루터와 달리, 츠빙글리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학자이자 성서 연구자였다. 1484년 스위스 알프스 산간 마을에서 태어난 츠빙글리는 바젤과 베른에서 기초교육을 받았으며 14세부터는 빈에서 고전문학, 철학, 신학, 과학을 공부했다. 이후 다시 바젤로 돌아와 석사 과정에 진학한 그는 고전과 교부 문헌 연구에 깊이 몰두했다. 1506년 석사학위를 마친 뒤 츠빙글리는 글라루스에서 첫 목회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스위스 사회의 큰 문제였던 용병 제도는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있었다. 용맹하기로 이름난 스위스 용병은 주변 국가들의 전쟁에 자주 동원되었고 이를 통해 스위스의 13개 도시(칸톤)는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츠빙글리는 종군 사제로도 사역하면서 이러한 현실을 직접 목격했고 용병 사업의 부도덕성을 비판하며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츠빙글리의 강경한 태도는 글라루스 지도층과의 갈등을 불러왔고 결국 1516년 아인지델른으로 전출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가 본격적으로 성경 연구에 몰두하여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의 연구는 이후 큰 반향을 일으킨 성경 중심 설교의 토대가 되었을 뿐 아니라, 면죄부 판매 등 당시 로마가톨릭 교회의 개혁 필요성을 확신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1518년 츠빙글리는 취리히 그로스뮌스터 교회의 사제로 부임했다. 특히, 성경을 직접 읽고 해석하는 그의 설교와 성경이 근거하지 않는 교회의 전통과 관습은 폐지되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결국 취리히 시의회는 모든 성직자에게 츠빙글리와 같이 성경 중심 설교를 하도록 명령했다. 그 결과 금식 강요, 성인 기도, 연옥 교리, 성상 숭배, 성직자 복장과 음악 등 중세 교회의 여러 전통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1522년 일어난 소시지 사건은 이러한 개혁이 취리히 전역으로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취리히의 인쇄업자 크리스토퍼 프로샤우어의 집에서 개혁 지지자들이 사순절 금식 기간에 소시지를 먹은 일이 논란이 된 것이다. 그 자리에 있었지만 유일하게 소시지를 먹지 않았던 츠빙글리는 “성경이 금하지 않은 일은 자유”라는 설교로 사순절 금식 관행을 비판했다. 그는 이 설교를 바탕으로 『음식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를 발표했고, 설교와 책자는 빠르게 퍼졌다. 흑사병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며 시민들의 신망을 얻고 있던 츠빙글리는 더욱 큰 지지를 얻게 되었다. 또한, 그가 제기한 성직자 결혼 문제를 둘러싸고 1523년 공식 논쟁이 열렸고 600여 명의 성직자와 평신도가 참석한 가운데 성경만을 권위로 한다는 원칙 아래 츠빙글리가 승리했다. 이후 개혁은 제도적으로 추진되어 1524년에는 성상 제거가 시작되었고 1525년에는 미사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6.02.20

    (86) 종교개혁㉖
  •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 양상의 변화 개혁은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진행된다. 독일의 작은 대학 도시 비텐베르크는 그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1521년, 루터는 선제후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쓴 두 번째 글은 『수도사 서원론』이라는 글이었다. 이 글에서 루터는 수도사들이 평생 지키겠다고 맹세한 가난, 순결, 복종이 과연 복음적인지 질문했다. 그의 결론은 분명했다. 그리스도인은 제도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양심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생각은 곧 비텐베르크의 현실을 바꾸기 시작했다. 일부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떠났고 수도사도 결혼할 수 있는지 공개적으로 논의됐다. 루터 자신은 여전히 수도복을 입고 있었지만 “나는 수도사이면서 동시에 수도사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앙의 중심이 점차 외형이 아니라 마음과 양심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524년 10월 4일 루터는 수도복을 벗었다. 루터가 자리를 비운 사이 비텐베르크에서는 예배 개혁이 빠르게 진행됐다. 사제들이 회중 없이 죽은 자를 위해 집행하던 개인미사는 폐지됐다. 공적을 쌓기 위해 드리는 희생 제사로서의 미사도 폐지되었으며, 평신도에게도 성찬의 잔이 주어졌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래 기다린 변화였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럽고 낯선 일이었다. 문제는 변화의 방향보다 속도였다. 충분한 설명과 합의 없이 제도가 먼저 바뀌자 도시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1522년 초에는 상황이 더욱 거칠어졌다. 과격론자들은 교회 안의 성상들을 부수고 예배형식을 일방적으로 바꿨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강하게 밀어붙여도 된다”는 생각이 힘을 얻었다. 이 무렵 ‘쯔비카우의 예언자들’이라 불린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비텐베르크의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이들은 외적인 계시로서 성경보다 성령의 직접적인 내적 계시를 강조하며 곧 세상이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외쳤다. 개혁은 점점 말씀에서 멀어지고 열정과 흥분에 치우치면서 위험한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비텐베르크의 사람들은 루터를 다시 불렀다. 그리하여 1522년 3월 루터는 바르트부르크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온 후 행한 첫 설교에서 분명히 말한다. “개혁은 강요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믿음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급하게 바뀐 많은 것들을 잠시 멈췄다. 미사는 당분간 기존의 방식으로 드렸고 성찬의 변화도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히 준비시키는 길을 택했다. 이것이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루터가 선택한 길은 빠른 개혁이 아니라 느린 개혁이었다. 그는 형식을 바꾸는 것보다,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자기 말로 고백하게 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확신에서 나온 작업이 바로 독일어 성서 번역이다. 1522년에 출간된 독일어 신약성서는 복음을 평범한 시민의 언어로 옮겨 놓았다. 비텐베르크의 개혁은 이제 한 도시의 경계선을 넘어 독일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은 단순한 개혁의 성공 사례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 빠른 개혁이 어떤 혼란을 낳는지, 그리고 기다릴 줄 아는 개혁이 어떻게 성공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6.01.23

    (85) 종교개혁㉕
  • “어떤 설교가 복음적 설교인가?”(루터의 기준) 1521년 5월 4일부터 이듬해 3월 3일까지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 머물렀다. 이곳은 루터에게 ‘밧모섬’과 같은 장소였다. 그는 이곳에서 여러 글을 집필했고 이는 이후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부재 가운데 칼슈타트와 멜란히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 출신 동료들을 중심으로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개혁 방식의 차이로 인해 혼란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루터는 이러한 상황을 방관하지 않고, 글을 통해 개혁을 바로잡고자 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이 난항을 겪는 근본 원인을 당시 설교자들의 설교에서 찾았다. 설교자들의 신학적 수준이 제각각이었고 성경 해석 역시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체류 동안 『교회 설교집(Church-Postil)』을 집필했다. 이 설교집은 설교자들에게는 복음적 설교의 기준을 제시하고 동시에 평신도들도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작성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제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교회 설교집』에서 루터가 제시한 설교의 기준은 분명하다. ① 루터에게 설교란 성경에 대해 설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시간이었다. 따라서 복음적 설교는 지식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② 루터의 설교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놓여 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기에 설교의 결론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가리켜야 한다는 것이다. ③ 이를 위해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명확히 구별했다. 율법은 인간의 죄와 한계를 드러내지만 복음은 무너진 인간을 다시 살린다. 이 둘이 혼동될 때 설교는 절망을 낳거나 값싼 위로로 전락한다. 따라서 루터는 율법을 통해 인간의 절망적인 실존을 드러낸 후,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과 자유의 복음으로 나아갔다. ④ 루터가 설교에서 강조하는 또 다른 기준은 ‘십자가 신학’이었다. 그는 인간의 공로와 종교적 성취를 강조하는 설교를 ‘영광의 신학’이라 비판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공과 강함 속에서가 아니라 약함과 고난, 곧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의 신학 위에 선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하신 분이다. 열심히 믿으면 복 받는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성공한다, 더 거룩해져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라고 말하지만 십자가의 신학 위에 선 설교자는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아무런 공로를 내세울 수 없을 때, 의지할 것이 전혀 없을 때 하나님은 절대 희망이요 절대 소망이 되신다! 너는 약해도 괜찮다. 망가진 상태로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다. 구원은 너의 힘과 능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일이다!”라고 말한다. ⑤ 흥미로운 점은 루터가 설교의 능력과 결과를 설교자에게서 철저히 분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설교자는 사람들의 귀에 말씀을 전할 수 있을 뿐, 그들의 마음에 믿음을 넣을 수는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믿음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생겨나며, 설교자는 그 결과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터의 설교가 삶과 무관한 신학적 이론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⑥ 오히려 그는 복음적 설교가 참된 믿음을 낳고, 그 참된 믿음은 이웃을 향한 책임과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루터에게 『교회 설교집』은 단순한 설교 모음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개혁이 폭력이나 급진적 행동이 아니라 참된 말씀의 선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주는 루터의 설교 신학이었다. 바르트부르크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집필된 이 설교집은 이후 비텐베르크의 혼란을 정리하고, 개신교 설교의 기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루터의 개혁은 제도보다 앞서 설교의 개혁이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12.26

    (84) 종교개혁㉔
  • 루터와 프리드리히 선제후 루터를 호위하기 위해 동행하던 황제의 전령과 작센의 의원들이 돌아간 후, 튀링엔 숲의 알텐슈타인 성 근처 계곡에 이르렀을 때, 루터는 무장한 기사들에 의해 납치됐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 은둔하게 될지는 알지 못했던 루터는 신약성경과 히브리어 성경만 손에 쥔 채 마차에서 끌어 내려져 손이 묶인 상태로 걸어가야 했다. 밤 11시쯤 되어서 도착한 곳은, 이후 루터가 융커 외르크라는 가명으로 약 10개월을 지내게 될 바르트부르크 성이었다. 작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자신의 영지에 속한 바르트부르크에 루터가 안전하게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그는 성유물을 수집하고 미사를 꾸준히 드리는 인물이었다. 그가 모은 성유물은 1만 9000점이 넘었고, 예수의 가시면류관에서 떨어진 가시 조각과 성모 마리아의 모친 성 안나의 엄지손가락 뼈 같은 귀중한 유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지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사순절마다 수도원에서 지내고 성지를 순례했으며, 교회 음악을 사랑하고 성당과 수도원 건립을 후원했다. 또한 종교 서적을 읽고, 에라스무스와 아벤티스 등 당대 유명한 지식인들과 신앙을 주제로 서신을 나누었으며, 이들과의 인연을 통해 루터와도 연결됐다. 프리드리히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영향력 있는 군주였다. 1486년부터 1525년까지 작센을 통치하면서 제국의회에 30차례 넘게 참석했고, 막시밀리안 황제의 조언자로 활동했다. 이러한 정치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개혁의 운명을 짊어진 루터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1518년 교황청이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자 프리드리히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아욱스부르크에서 교황청 사절과 면담하도록 조정했다. 끝까지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 루터를 인도해달라는 교황의 요구를 거절하며, 루터가 독일 내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황제를 설득했다. 비록 루터는 1521년에 파문되었지만,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미리 확보해 둔 안전통행증을 활용해 루터가 무사히 보름스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튀링엔 숲의 납치 작전 역시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그가 세운 계획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드리히와 루터는 직접적으로 소통한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연락은 선제후의 보좌 신부이자 루터의 친구였던 슈팔라틴을 통해 이루어졌다. 슈팔라틴의 기록에 따르면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분명 너그럽게 사랑하고 아꼈으나” 정작 루터의 주장은 항상 선제후를 괴롭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522년 루터의 책 한 권을 가리키며 프리드리히는 “마음에 드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저 책을 위해 내가 이렇게 고생한단 말이지”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루터의 개혁을 가로막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개혁의 가능성을 지켜낸 보호자였다. 1525년 종려주일에 프리드리히는 토르가우 인근 자신의 성에서 처음으로 루터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렸다. 2주 후에는 슈팔라틴이 집례한 성찬식에서 처음으로 빵과 포도주 모두를 받았다. 로마가 1415년에 평신도에게 잔을 주는 것을 금지한 뒤로 축성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사제만의 특권이었기에, 이는 그가 루터의 개혁신앙을 매우 신뢰했음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프리드리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통적 경건함과 개혁적 신앙 사이에서 참된 믿음을 찾으려 노력한 군주로 생을 마쳤다. 평범한 출신에 불과했던 한 수도사의 비범함과 열정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지했던 그의 혜안과 결단 덕분에,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역사는 실현될 수 있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11.28

    (83) 종교개혁㉓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④ 이튿날인 4월 19일 금요일, 제국의회 의원들을 소집한 황제는 자신의 의견을 발표했다. 그의 말은 독일어로 통역되었는데 매우 굳어진 얼굴과 강한 어조로 루터의 주장에 강하게 반대하는 결연하고도 확신에 찬 연설이었다. “단 한 명의 수도사가 1000년에 걸쳐 이어져 왔으며 지금도 존중되는 기독교에 대해 지금까지의 모든 기독교인이 착각한 것이며, 지금도 그렇다고 말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칼 5세는 회의에 참석한 제후들의 책임을 상기시키며 계속 말했다. “황제인 저와 고귀하고 위대한 독일 제후 여러분이 지금 이단은 물론, 이단으로 생각되거나 기독교를 변질되게 만드는 사상이 민족의 정신에 스며드는 일을 막지 못한다면 심각한 불명예일 것이며,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영원히 오명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추가 심문을 거부하며 결론을 내렸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를 배척하고 그를 악명 높은 이단으로 고소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바른 기독교인인 것을 보여주고, 나에게 약속했듯이 신중한 결정을 내려주기 바란다!” 다음 날 제국의회 의원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밤사이에 알 수 없는 무리가 시청과 주교좌성당, 그리고 시내의 여러 문에 농민 반란을 암시하는 벽보를 붙였기 때문이었다. “분트슈! 분트슈! 분트슈!”라고 쓰인 벽보는 농민 봉기를 상징하는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영주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며 기사들이 신는 화려한 부츠와 대비되는 투박한 끈이 묶인 신발(분트슈)을 깃발에 그려 넣곤 했기 때문이었다. 400명의 기사와 8000명의 민중이 루터를 위해 싸울 태세였다. 황제의 침실에서도 협박 편지가 발견되었다. 편지에는 “꼬마가 왕인 나라에는 고통뿐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루터를 반대했던 마인츠의 대주교, 선제후이자 제국 최고의 영주인 알브레히트는 이러한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잔뜩 겁을 먹고 황제에게 루터의 청문회를 다시 열도록 제안했다. 황제는 그럴 뜻이 없었지만 강한 권력을 지닌 대주교의 제안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흘간 더 루터를 심문하고 철회를 유도할 것을 허락했다. 4월 24일 수요일 아침 6시부터 다시 루터의 청문회가 열렸다. 트리어의 선제후이자 대주교인 리하르트 폰 그라이펜클라우가 심리를 주재했다. 청문회 분위기는 심문이라기보다 좌담에 가까웠다. 루터는 훗날 “그렇게 부드럽고 정중하게 토론하는 분위기는 처음 경험했다”라고 고백했다. 다음 날인 25일 목요일에 계속된 청문회 역시,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루터의 완고함 때문에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결국 루터는 황제가 안전을 보증하는 3주 이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루터는 친구인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 1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이곳에선 그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네. 이 책이 너의 책인가? 그렇습니다. 이 책들의 내용을 취소하겠는가? 아닙니다. 알겠다, 물러가라! 아, 독일인은 얼마나 눈이 먼 민족인가, 어리석게 행동하면서 저 로마인들(교황과 교황의 지지자들)이 비겁하게 우리를 조롱하고 기만하도록 놔두고 있다니!” 4월 26일 금요일 오전 9시경 루터 일행은 길을 나섰다. 황제의 안전통행증이 있었지만 루터가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에게 설교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효력이 있었다. 그러나 5월 1일 수요일에 루터는 헤르스펠트에 도착한 후 이튿날 새벽 그곳 수도원에서 설교함으로써 황제의 안전통행증은 효력을 상실했다. 다음 날 아이제나흐에서도 설교했다. 황제의 지시에 따르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한 셈이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일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일보다 더욱 소중한 일이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10.24

    (82) 종교개혁㉒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③ 1521년 4월 18일 오후 4시 루터는 두 번째 심문을 받기 위해 의회장에 나왔다. 그곳은 이미 심문 광경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황제는 제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므로 루터는 사람들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두 시간 정도 지난 후 루터는 심문이 진행될 장소로 안내되었다. 전날 심문 받은 공간보다 훨씬 큰 홀이었지만 이내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 사람들의 열기로 홀은 더웠고 횃불이 방을 비추고 있었다. 루터는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전날과 달리 결연한 표정이었다. 트리어의 대주교인 엑켄은 첫째 날과 마찬가지로 루터에게 그의 책들을 수정하거나 철회할 것인지 물었다. 루터는 주저함 없이 답변했다. “내가 쓴 책들은 세 종류입니다. 신앙의 기본이 되는 설교들, 그리고 성경 해석들, 마지막으로 교황을 반박하는 글이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관한 논쟁입니다. 처음 두 가지 종류의 책들은 그 내용을 철회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세 번째 책의 경우는 이를 철회할 경우 불의와 불경건을 옹호하는 꼴이 됩니다. 성경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자신의 명백한 오류가 드러난다면 기꺼이 저 스스로 그 책들을 불에 던지겠습니다.” 약 10분간 이어진 루터의 답변은 전부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황제는 모국어처럼 사용했던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외에도 플랑드르어(현재 벨기에), 이탈리아어 그리고 독일어를 구사할 줄 알았지만 정확한 뉘앙스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라틴어로 다시 대답할 것을 요구했다. 루터는 동일한 내용을 다시 한번 라틴어로 대답했고, 이내 제후들과 시의회원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철회하겠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철회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 제후들은 심문관이었던 엑켄에게 명확한 대답을 루터에게 받아내라고 지시했다. “마틴! 당신은 확실하고 분명한 신앙으로 믿어야 할 것에 관해 토론하려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있소!” 엑켄은 정색하며 루터에게 주의를 준 뒤 다시 한번 그의 주장들을 철회할 것인지, 아닌지 ‘뿔 없는 대답(non cornutum responsum, 꾸밈없는 직설적인 대답)’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루터는 더욱 분명하게, 모든 사람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와 여러분들이 원하신다면 뿔도 이빨도 없는 소박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내 양심은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들에 의해 사로잡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습니다. 사실 나는 교황이나 공의회만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주 오류를 범하고 모순된 말까지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경의 증언과 명백한 이성적인 이유에 의해서 설득되지 않는 한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안전하지 않으며 구원마저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청중들 사이에 당혹감이 퍼졌다. 루터의 대답을 듣던 황제는 청문회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루터는 의회장을 빠져나갔다. 의사당 밖에는 이미 심문 내용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고, 그들은 루터를 향해 환호했다. 숙소에 도착한 루터는 승리한 사람처럼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통과했다! 내가 통과했다!” 심문 과정에서 루터는 칼 5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비텐베르크라는 작은 도시의 수도사이자 신학 교수의 흔들림 없는 확신을 목격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는 그날 저녁 책상에 앉아 프랑스어로 진지하게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써 내려간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09.26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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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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