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95) 종교개혁㉟
  • 스위스의 종교개혁 II – 칼뱅의 제네바, 개혁과 갈등의 도시 칼뱅이 1541년 제네바로 돌아와 교회 질서를 세우기 시작했지만 그의 개혁이 곧바로 도시 전체의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흔히 칼뱅이 제네바를 절대적으로 지배한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 그는 오랫동안 시의회와 반대 세력의 저항과 갈등 속에서 자신의 개혁을 정착시켜야 했다. 1541년 제정된 「교회법령」은 목사와 장로가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을 살피도록 했지만 교회가 시민들에게 직접 형벌을 내릴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교회법정(Consistory)은 잘못된 생활을 한 사람들을 권면하고 성찬 참여를 제한할 수 있었지만 실제 처벌은 시의회의 권한이었다. 특히 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두고 교회와 시 정부 사이에는 계속 긴장이 있었다. 칼뱅에게 종교개혁은 교리만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술 취함과 도박, 음란한 생활, 거짓말과 폭력까지도 복음에 합당하지 않은 삶으로 보았다. 참된 개혁은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시민이 이러한 엄격한 규율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특히 아미 페랭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교회의 간섭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칼뱅과 교회법정의 권한을 제한하려고 했다. 당시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 주는 일화도 있다. 테오도르 베자에 따르면 칼뱅을 싫어하던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개에게 칼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칼뱅의 개혁은 신학적으로도 여러 도전을 받았다. 자크 그뤼에는 교회법정을 비판했고 제롬 볼섹은 칼뱅의 예정론을 공개적으로 공격했다. 칼뱅은 이런 비판을 단순한 개인적 반대가 아니라 어렵게 세워 가고 있던 제네바 종교개혁 자체를 흔드는 문제로 받아들였다. 후대에는 이런 모습 때문에 제네바를 칼뱅이 모든 것을 통제한 엄격한 종교도시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실제로 칼뱅은 자신의 뜻을 언제나 관철시킨 절대권력자가 아니었다. 그는 약 14년에 걸쳐 시의회 및 정치적 반대 세력과 충돌하면서 개혁을 정착시켜야 했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1555년경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미 페랭을 비롯한 반대파가 정치적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칼뱅의 개혁은 보다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칼뱅이 꿈꾼 제네바는 단순히 개신교 신앙을 가진 도시가 아니었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이 예배당 안에 머무르지 않고 가정과 직업, 인간관계와 사회생활 속에서도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앙과 삶을 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교회는 성도들의 삶을 어디까지 지도할 수 있는가. 바른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신앙의 진리를 지키려는 열심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 대한 관용은 어떻게 함께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1553년 제네바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던 스페인 출신 의사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체포와 재판 그리고 처형은 이후 오랫동안 칼뱅을 둘러싼 가장 치열한 논쟁 가운데 하나가 됐다. 김형건 목사(여의도순복음영산신학원 총장)
  • 2026.10.23

    (94) 종교개혁㉞
  • 1538년 칼뱅을 추방한 뒤 제네바는 새로운 목회자들을 세웠지만 교회의 질서는 쉽게 안정되지 않았다. 종교개혁은 시작되었지만 예배와 성찬, 교회 조직과 권징을 어떤 원칙으로 세울 것인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었다. 1539년엔 가톨릭 추기경 야코포 사돌레토(Jacopo Sadoleto)가 제네바 시민들에게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라고 권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던 제네바는 스트라스부르에 있던 칼뱅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칼뱅은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답신」을 통해 자신을 추방한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신학적으로 변호했다. 이 사건은 제네바 지도자들에게 칼뱅의 필요성을 다시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사이 제네바의 정치 상황도 달라졌다. 칼뱅의 추방을 주도했던 세력은 점차 힘을 잃었고, 그에게 우호적인 인물들이 시의회에서 영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결국 1540년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에게 돌아와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내가 이보다 더 두려워하는 곳은 하늘 아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결국 부르심을 받아들여 1541년 제네바로 돌아왔다. 칼뱅이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는 1541년 「교회법령」을 마련하여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네 직분을 세웠다. 목사는 말씀과 성례를 맡고, 교사는 성경과 신학을 가르치며, 장로는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을 살피고, 집사는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돌보도록 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마르틴 부처에게 배운 교회에 대한 청사진을 제도화한 것이다. 특히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교회법정(Consistory)은 성도들의 신앙과 생활을 살피고 잘못이 있을 때 권면하는 역할을 했다. 술 취함이나 가정불화뿐 아니라 예배와 신앙생활도 그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지나친 간섭처럼 보일 수 있지만 칼뱅은 신앙이 교리의 동의에 머물지 않고 실제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러한 개혁을 모든 시민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교회가 판단할 것인지, 시의회가 결정할 것인지를 두고 갈등이 계속되었다. 아미 페랭(Ami Perrin)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은 칼뱅의 엄격한 교회 규율에 강하게 저항했다. 이렇듯 칼뱅의 개혁은 오랫동안 시의회와 반대 세력과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1550년대 중반이었다. 프랑스 등지에서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온 개혁교회 난민들이 늘어나면서 칼뱅을 지지하는 세력도 커졌다. 1555년을 전후해 반대 세력이 힘을 잃으면서 그의 개혁은 보다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칼뱅에게 종교개혁은 잘못된 교리를 고치는 일만이 아니었다. 바른 신앙은 바른 삶으로 이어져야 했고, 교회는 말씀을 가르치는 동시에 사람을 돌보고 훈련해야 했다. 물론 그 과정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이라는 한계도 있었다. 그러나 칼뱅이 제네바에서 붙들었던 질문은 분명했다. 복음이 옳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스트라스부르에서 배운 칼뱅은 이제 제네바에서 그 질문에 자신의 방식으로 답하기 시작했다. 김형건 목사(여의도순복음영산신학원 총장)
  • 2026.09.23

    (93) 종교개혁㉝
  • 스위스의 종교개혁 II - 스트라스부르에서의 만남 1538년 4월 칼뱅은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다. 자신이 개혁하려 했던 도시에서 쫓겨난 것이다. 당시 서른 살도 되지 않았던 칼뱅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칼뱅은 결국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한 사람을 만났으니 바로 마르틴 부처(Martin Bucer)였다. 칼뱅보다 열여덟 살가량 연상이었던 부처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다가 루터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에 참여한 뒤 스트라스부르의 개혁을 이끌고 있던 노련한 개혁자였다. 특히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고 교회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당시 칼뱅은 뛰어난 신학자였지만 목회와 교회 운영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자신의 신학적 확신을 실제 교회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교회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더 배워야 했다. 그런 칼뱅에게 부처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보낸 3년 동안 칼뱅은 프랑스 난민교회를 목회하며 부처의 종교개혁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부처는 교회의 직분자들이 예배와 교회 안의 일에만 머물지 않고 성도들의 삶을 돌보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등 지역사회를 섬겨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루터파와 츠빙글리파 사이의 갈등을 치유하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도 가능한 일치를 모색하며 끊임없이 대화했다. 칼뱅은 부처를 통해 신학적 옳음을 주장하는 것만으로 교회를 개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워갔다. 스트라스부르는 칼뱅에게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그의 신학과 목회가 한 단계 성숙한 곳이었다. 1539년 그는 6장으로 구성되었던 『기독교강요』를 17장으로 크게 확대하여 제2판을 출간했고 자신의 첫 주석서인 로마서 주석도 집필했다. 여러 종교회의에 참석하면서 종교개혁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현실도 경험했다. 신학자 칼뱅이 목회자이자 교회를 이끄는 개혁자로 성장해 간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에 칼뱅은 가정도 이루었다. 부처와 친구들의 권유로 배우자를 찾던 그는 1540년 재세례파 출신의 미망인 이델레트 드 뷔르와 결혼했다. 이델레트는 이후 칼뱅의 목회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칼뱅은 그녀를 자신의 삶에서 가장 훌륭한 동반자였다고 회고할 만큼 깊이 사랑했다. 이 모든 일이 제네바에서 쫓겨나 있던 기간에 일어났다. 생각해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스트라스부르로 갔고 그곳에서 부처와 이델레트를 만났다. 그리고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교회를 실제로 이끌어 갈 개혁자로 성숙했다. 1541년 칼뱅은 다시 제네바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제네바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지만 결국 부르심을 받아들였다. 제네바로 돌아온 칼뱅은 1536년의 젊은 칼뱅과 같지 않았다 그 사이에 스트라스부르의 3년이 있었다. 한 사람을 만드는 것은 재능만이 아니다. 실패했던 경험과 원하지 않았지만 머물러야 했던 시간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도 그를 만든다. 칼뱅에게 스트라스부르는 그런 곳이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자리에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배우느냐인지도 모른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8.28

    (92) 종교개혁㉜
  • 스위스의 종교개혁 II - 칼뱅, 제네바에서 추방되다 1536년 여름 27세의 젊은 신학자 장 칼뱅은 제네바에 도착했다. 그는 이 도시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전쟁으로 길이 막혀 하룻밤 묵은 후 다음 날 스트라스부르로 떠날 계획이었다. 그가 바라던 삶은 지도자가 아니라 조용히 연구하고 저술하며 교회를 섬기는 학자의 삶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짧은 하룻밤을 종교개혁의 역사를 바꾸는 전환점으로 사용하셨다. 당시 제네바에서는 기욤 파렐이 종교개혁을 이끌고 있었다. 시민들은 이미 로마 가톨릭과 결별했지만 개혁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미사를 폐지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성경적 교회가 세워질 수는 없었다. 파렐은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교회를 말씀 위에 세울 신학자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기독교강요』로 이름이 알려진 칼뱅의 제네바 도착이야말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확신했다. 칼뱅은 파렐의 동역 요청을 거절했다. 자신은 그런 사명을 감당할 사람이 못된다며 스트라스부르로 떠나겠다고 했다. 그러자 파렐은 “당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학문을 저주하실 것”이라고 외쳤다. 훗날 칼뱅은 이 순간을 떠올리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드시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결국 그는 제네바에 남기로 했다. 칼뱅과 파렐은 곧바로 교회 개혁에 착수했다. 그들이 꿈꾼 종교개혁은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말씀 중심의 예배를 세우고, 성경 교육을 통해 시민들이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며 성찬과 권징을 통해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려 했다. 종교개혁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을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처음엔 정치적 자유라는 환상에 급급해 무작정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시민들은 교회가 자신들의 삶까지 지도하려 하자 불편함을 느끼며 반발했다. 시의회도 성찬과 권징에 관한 권한을 교회가 행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여기에 동맹국 베른과 예배 방식까지 충돌하면서 긴장은 점점 높아졌다. 개혁자들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려 했고 시의회는 도시 통치권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갈등은 1538년 부활절에 폭발했다. 시의회는 누구에게나 성찬을 베풀 것을 명령했지만 칼뱅과 파렐은 신앙고백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찬을 집례할 수 없다고 맞섰다. 성찬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표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명령을 거부했고 시의회는 이들을 제네바에서 추방했다. 2년 남짓한 제네바에서의 첫 사역은 실패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달랐다. 추방된 칼뱅은 원래 목적지였던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마르틴 부처를 만나 목회와 교회 운영을 배우며 한층 더 성숙한 개혁자로 성장했다. 훗날 제네바 시민들도 칼뱅이 의도했던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됐다. 하나님께서는 추방이라는 시련을 통해 칼뱅과 제네바를 다시 만나게 하실 날을 준비하고 계셨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7.24

    (91) 종교개혁㉛
  • 스위스의 종교개혁 II - 칼뱅과 제네바 자신의 성직록을 포기하고 개신교 진영에 가담하기 전, 두 가지 사건이 칼뱅의 결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첫 번째 사건은 지난 호에서 살펴본 1533년 니콜라 코프 사건이었다. 두 번째 사건은 르페브르를 방문한 일이었다. 르페브르는 개혁을 이야기하면서도 끝까지 기존 교회 안에 머무르려 했다. 칼뱅은 그를 만나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낡은 교회 체제 안에서 진정한 개혁이 가능한가? 기존 교회에 계속 복종하는 것이 오히려 복음의 개혁을 가로막는 것은 아닌가? 결국 칼뱅은 성직록을 포기했고 개신교로 개종하게 됐다. 그는 더 이상 중간 지대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개종한 칼뱅에게 운명의 도시 제네바는 처음부터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고자 했다. 이 무렵 제네바는 정치적 격변 속에 있었다. 전통적으로 제후 주교와 사보이 공작의 권세 아래 있던 제네바 시민들은 종교적·정치적 자유를 얻기 위해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이를 위해 스위스 동맹의 도시들과 관계를 강화했다. 그중에서도 1528년 이미 개신교 개혁을 받아들인 베른은 제네바의 중요한 정치적·군사적 후원 세력이었다. 제네바 시민들 가운데 이처럼 스위스 동맹을 지지하던 이들을 ‘에드그노’라고 불렀다. 이들은 처음부터 개신교 신앙을 위해 일어선 사람들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더 절실했던 것은 사보이 공작과 제후 주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베른과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개신교 개혁 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 제네바의 정치적 독립운동이 종교개혁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된 셈이다. 이 점에서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신학적 논쟁에서 출발한 루터의 개혁과 중요한 차이가 있다. 1532년 이후 파렐을 비롯한 개신교 설교자들이 제네바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사와 교황권의 남용을 비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새로운 교회를 주장했다. 베른의 후원과 시민들의 지지 속에서 분위기가 점차 개신교 쪽으로 기울어지는 가운데 1535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 논쟁이 거세지면서 제네바의 미사는 중지되었고 성직자들에게는 새로운 복음적 신앙을 받아들이거나 도시를 떠나라는 선택이 주어졌다. 그리고 1536년 5월 25일 제네바 시민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법에 따라 살며 교황권의 남용을 폐지하겠다고 서약함으로써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미사는 중지되었지만, 새로운 예배와 교리 교육, 권징과 시민의 삶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다. 제네바에는 개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도시 전체를 말씀 위에 세울 신학자가 필요했다. 바로 그때 칼뱅이 제네바에 도착했다. 사실 그는 제네바를 목적지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삶을 위해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길이 전쟁으로 막히자 잠시 들르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1536년에 출판한 『기독교강요』를 통해 개신교 신앙의 핵심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던 칼뱅의 도착은 단순한 우연으로만 보기 어려운 절묘한 사건이었다. 칼뱅은 바로 그 당시 제네바가 절실히 필요로 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인 시각에서 볼 때 칼뱅이 제네바를 이끌었는지, 제네바가 칼뱅을 이끌었는지 곱씹어 보는 묘미가 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6.26

    (90) 종교개혁㉚
  • 스위스의 종교개혁 II - 장 칼뱅 마르틴 루터가 면벌부 문제를 계기로 종교개혁의 문을 열었다면 장 칼뱅은 루터와는 다른 길을 걸으며 종교개혁의 또 다른 중심 인물이 되었다. 칼뱅의 개혁은 수도사나 신학 교수로서가 아니라 인문주의 교육과 법학 훈련을 받은 젊은 지식인으로서 성경을 깊이 읽고 교회를 새롭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었다. 칼뱅은 1509년 프랑스 북부 누아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 행정 관련 일을 했는데 그 영향으로 칼뱅은 어려서부터 교회 및 학문과 친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1523년 열네 살의 칼뱅은 파리로 유학을 떠나 라 마르슈 콜레주와 몽테규 콜레주에서 라틴어와 철학, 논리학 등을 배웠다. 당시 프랑스에는 에라스무스주의의 영향 아래 성경 원전과 고전 문헌을 새롭게 읽으려는 학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칼뱅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경과 고전 문헌을 읽고 해석하는 법을 익혔으며, 이는 훗날 그의 종교개혁 사상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 점에서 칼뱅은 수도원과 신학 강단에서 죄와 은혜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던 루터와 구별된다. 칼뱅은 열여덟 살 무렵 오를레앙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법학자의 길을 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는 다른 질문이 싹트고 있었다. 교회는 과연 성경이 말하는 교회인가.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가. 당시 프랑스에는 종교개혁 운동이 전파되고 있었지만, 그것을 억압하려는 움직임도 강해지고 있었다. 칼뱅은 이 긴장 속에서 종교개혁 사상에 심취해 갔다. 칼뱅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 회심이 일어난 것도 이때쯤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심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를 통해 자신을 복종하게 하셨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회심은 뜨거운 감정의 체험이라기보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생각과 삶의 방향이 바뀌는 사건이었다. 그는 중세 가톨릭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성경 중심의 구원 이해로 나아갔다. 프랑스에서 종교개혁 사상이 강하게 억압받던 1533년 니콜라 코프 사건이 터졌다. 코프는 파리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개신교 복음주의를 옹호하는 연설을 했고, 이 일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칼뱅도 박해의 위험에 놓였고 결국 파리를 떠나 피신해야 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칼뱅은 스위스는 물론, 이탈리아, 독일 등을 다니며 여러 종교개혁자와 교류할 수 있었고 이러한 유랑의 시간 속에서 그의 종교개혁 사상은 더욱 분명해졌다. 1536년 칼뱅은 바젤에서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간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이 책은 프랑스 개신교 성도들이 무정부적 재세례파나 과격한 이단으로 오해받는 상황에서 그들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프랑스 왕에게 변증하고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쓰였지만 곧 종교개혁 신학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의 핵심을 명료하게 설명하였다. 훗날 제네바의 목회자로서 종교개혁을 이끌어가기 전부터 칼뱅은 성경 말씀과 교회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 젊은 학자였다. 아직 본격적인 개혁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때론 광장의 외침으로 시작되기도 하지만 책상 앞에서 성경을 읽는 한 젊은이의 조용한 순종 속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5.29

    (89) 종교개혁㉙
  • 스위스 종교개혁 - 그 외 츠빙글리의 개혁과 죽음 츠빙글리의 개혁은 예배 개혁이나 성만찬 논쟁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개혁은 교회와 사회의 관계, 세례의 의미 그리고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의 확산 속에서 더 큰 긴장과 갈등을 낳았고 마침내 그의 생애 마지막도 그 소용돌이 속에서 맞이하게 됐다. 츠빙글리는 신앙이 교회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회가 바로 서야 할 뿐 아니라, 그 믿음이 공동체의 삶과 사회의 질서 속에서도 나타나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세속 정부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공적 권위로서 평화를 지키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일에 책임이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츠빙글리 개혁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츠빙글리는 더 급진적인 개혁자들과 부딪히게 됐다. 그들은 교회가 국가 권력과 가까워져서는 안된다고 보았고 믿음을 스스로 고백한 사람들만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차이는 세례 문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츠빙글리는 유아세례를 인정했지만 재세례파는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보며 믿음의 고백을 재확인하고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갈등은 단순히 세례 방식의 차이만이 아니었다. 교회란 무엇인가, 또 교회와 사회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를 둘러싼 충돌이었다. 취리히 시의회는 재세례파를 도시 질서를 흔드는 세력으로 보았고 결국 강하게 탄압했다. 그 과정에서 재세례파는 다른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게 됐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이 로마가톨릭과의 갈등만이 아니라 개혁 진영 안에서도 깊은 긴장을 안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성 갈렌, 베른, 바젤 같은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모든 지역이 같은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도시는 개혁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가톨릭 편에 선 도시들도 있었다. 이렇게 스위스는 신앙의 차이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는 가운데 점점 더 큰 긴장 속으로 빨려들었다. 츠빙글리는 개혁을 위해 도시들 사이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보았고 종교개혁은 점차 신학 논쟁을 넘어 현실 정치적인 문제와 맞물리게 됐다. 1529년 한 차례 충돌은 가까스로 진화했지만 결국 1531년 제2차 카펠전쟁이 일어났다. 츠빙글리는 종군목사로 전장에 나갔다가 10월 11일 생을 마감했다. 츠빙글리의 죽음이 곧 스위스 종교개혁의 끝은 아니었다. 그의 뒤를 이어 하인리히 불링거가 개혁을 더 안정되게 이끌었다. 그러나 교회를 새롭게 하려 했던 개혁자가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은 당시 종교개혁이 얼마나 치열한 현실 속에서 진행되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츠빙글리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교회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신앙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어떻게 세상 속에서 책임 있게 드러나야 하는가. 츠빙글리는 완전한 답을 남기진 못했지만 그 어려운 문제를 끝까지 붙들고 씨름한 개혁자였다. 그는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삶과 사역은 스위스 종교개혁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겼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총장)
  • 2026.04.24

    (88) 종교개혁㉘
  • 스위스 종교개혁 - 성만찬 논쟁 츠빙글리의 사상은 여러 저술과 편지를 통해 전해진다. 소시지 사건과 관련해 쓴 “음식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1522.3.9.)는 그의 첫 종교개혁 저술로 금식 규정을 어긴 일이 왜 정당한지를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했다. ‘콘스탄츠 감독에게 보낸 진정서’(1522.7.2.)와 “하나님 말씀의 명백성과 확실성에 대하여”(1522.9.6.)에서는 성직자 독신 제도의 폐지와 성경적인 복음 설교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교회와 신학을 개혁하는 가장 중요한 권위는 오직 성경이라고 주장했다. 취리히 시의회는 성경적 설교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자 1523년 1월 29일 공개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츠빙글리가 제시한 ‘67개 논제’는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교회 개혁의 방향을 밝힌 문서로서 스위스 종교개혁의 출발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선언이었다. 토론 과정에서 아무도 츠빙글리의 67개 논제를 반박하지 못하자 시의회는 그의 손을 들어주었고 그 결과 누구나 성경에 근거하여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신앙이 약한 이들에게 개혁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쓴 “기독교 입문서 요약”(1523.11.17.)에서 그는 성상 금지와 미사 폐지 등을 설명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취리히에서는 1524년 4월 사제들의 결혼이 이루어졌고, 기도 행진과 의전 행렬, 순례 등이 차례로 폐지되었다. 1524년 9월부터 1525년 3월 사이에 쓴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한 주석”에서 츠빙글리는 교황권, 미사의 희생 개념, 성인 숭배 그리고 행위로 얻는 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특별히 성만찬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면서 이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상징적 예식으로 이해했다. 그가 로마가톨릭의 화체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보는 주장이 자칫 골고다 십자가의 단번의 희생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성만찬의 빵과 잔은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아니라 그 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요 6:63).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그는 루터와 끝내 하나가 되지 못했다. 루터는 츠빙글리와 달리 “이는 내 몸이다”라는 말씀을 상징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성만찬은 단순히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예식이 아니라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였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다고 해서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어디에나 임하실 수 있다고 이해했다. 반면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시므로 성만찬의 떡과 잔 안에 실제로 계실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루터는 떡과 잔에 주님의 살과 피가 함께 임재함(공재설)을 주장하면서 두 사람의 견해 차이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논쟁은 1529년 마부르크 회담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헤센의 필립은 루터와 츠빙글리를 한자리에 모아 개혁 진영의 일치를 이루고자 하였다. 양측은 여러 항목에서 의견을 같이했고 미사가 은혜를 얻는 반복적 희생이 아니라는 점에도 동의했다. 그러나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어떻게 임재하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끝내 뜻을 모으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완전한 일치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서로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데에는 함께 동의한 후 헤어졌다. 성만찬 논쟁은 단순한 예식 이해의 차이를 넘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둘러싼 종교개혁 내부의 중요한 갈림길이 되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6.03.27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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