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77) 종교개혁⑰
  •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 그리스도교 신분의 개선에 관하여 쾰른과 뢰벤 대학의 신학자들이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비판하는 평가를 제출하자 로마 교황청은 이를 근거로 1520년 6월 15일 파문 교서인 「주여 분기하소서」(Exsurge Domine)를 공포했다. 이 교서는 루터의 저술에서 발췌한 41개의 문장을 정죄하고 60일 이내에 이를 취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 루터는 7월 중순이 돼서야 이 파문 결정 사실을 접하게 되었고 이는 그가 집필 중이던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 보내는 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단 판결을 앞두고 있던 루터의 심리적 긴장과 불안한 처지가 이 저술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루터는 이 초창기 개혁 선언서에서 특정한 제후들을 지목하기보다 일반적인 귀족층 전체에 호소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글에 나타난 교황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은 울리히 폰 후텐(Ulrich von Hutten)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후텐은 1517년에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의 저작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교황권의 세속적 권위를 정당화해 온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문서’가 위조된 것임을 논증하고 있었다. 루터는 1520년 초에 이 책을 읽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로 확신하게 됐다. 루터는 글 속에서 자신을 수도사이자 신학박사로 소개하며 궁정 광대처럼 교회의 폐단을 지적하려 한다. 당시 궁정 광대는 왕이나 높은 귀족에 의해 고용되어 공연하던 이들이었는데 공연 속에서 권력자들에게 날카로운 첨언도 할 수 있었다. 『독일 크리스천 귀족들에게』는 최종 교정 없이 출간되었으며 초판은 1520년 8월 5일 비텐베르크에서 발행되어 단 3일 만에 4000부가 모두 소진됐다. 이후 독일어로 15판, 이탈리아어로 2판이 발간되었으며 전체 인쇄 부수는 약 6만 8000부로 추정된다. 이 글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든 ‘로마주의자들(주교, 신부, 수도사, 학자들)’의 세 가지 장벽에 대한 비판, 앞으로 공의회에서 다루어야 할 의제, 27개의 구체적 개혁 조항들이다. 세 가지 장벽이란 첫째는 영적 계급은 세속적 계급 위에 있다는 교리, 둘째는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며 그의 해석은 오류가 없다는 교리, 셋째는 교황만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는 교리이다. 루터는 로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이 세 겹의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글에서 루터는 속히 공의회가 열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의회에서 교황청의 행정기구를 대폭 축소하고 독일에서 로마로 빠져나가는 자금의 흐름을 차단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지막으로 27개의 개혁 조항들은 ‘교황과 교회 권위의 제한’(1-12), ‘성직자와 수도자에 대한 개혁’(13-18), ‘미사와 종교 행위 개혁’(19-23), ‘교회 교육 및 신학 개혁’(24-25), 그리고 ‘사회와 경제적 개혁’(26-27)으로 나뉜다. 특별히 20번 조항은 미신적 신앙 타파가 종교와 사회를 위한 개혁의 열쇠임을 강조하고 있다. “빌스낙의 ‘기적의 피 교회(die Wunderblutkirche)’, 슈테른베르크의 ‘성혈 예배당(die Kapelle des Heiligen Blutes)’, 트리어의 ‘거룩한 치마(der heilige Rock)’, 그림멘탈(Grimmenthal)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성모 마리아 성지들(Marienheiligtumer)은 모두 악마의 속임수(Teufelsspuk)이다. 그곳에 모여드는 사람들의 열광적인 신앙을 보라. 이러한 은총의 장소로 순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본 교회 안에 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침례, 성례, 설교 그리고 당신의 이웃이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4.25

    (76) 종교개혁⑯
  • 성례전에 관한 설교들 루터는 에크(2월 23일자 참조) 그리고 카예탄(1월 26일자 참조)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성례전 교리를 확립할 필요를 느꼈다. “성례전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가, 아니면 성례전에 참여하는 사람의 믿음이 그를 의롭게 하는가”라는 쟁점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1519년 루터는 회개, 침례, 성만찬 외에 다른 성례전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히며 세 편의 설교를 했다. 먼저, 회개의 성례전에 대한 루터의 설교를 살펴보자. “죄의 용서는 교황, 감독, 사제 또는 이 땅 위에서 주어지는 사람의 직위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 자신의 믿음에 달려 있다. 그는 우리를 향한 그의 위로와 축복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자신과 말씀 위에 세우셨다.” 루터는 성례전으로서 회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죄의 용서를 구하는 회개자의 믿음에 있음을 강조했다. 다음은 침례에 대한 루터의 설교 중 일부이다. “침례의 의미는 영적인 죄의 죽음이며,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의 부활이다. 죄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난 옛사람은 사라지고, 새로운 인간이 은혜 안에서 부활한다 … 침례를 통해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여러분과 동행하시며 하나가 되신다는 위로의 언약을 세우신다 … 그러므로 우리가 침례의 성례전을 통해 가져야 할 믿음은 이것이다. 침례는 인생의 마지막 날에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며, 그때야 비로소 인간은 새롭게 되어 죄없이 영원히 살 것이다. 또한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죽을 때까지 죄와 싸우며 살아가야 한다.” 흥미롭게도 루터는 침례 후에도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에, 죽는 날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성찬에 대한 설교에서 루터는, 빵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는 성례는 모든 그리스도의 몸 된 성도들의 연합과 교제를 의미하며,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개개인의 믿음을 통해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와 모든 성도는 하나의 영적인 몸이다. 그것은 마치 한 도시의 주민들이 하나의 공동체요 한 몸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영적이며 영원한 신의 도성인 교회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받아들여진 사람은 성도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진 것이고,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과 연합하여 그의 지체가 된다.” 특히 루터는 성도의 교제로서 성찬의 특별한 은사는 ‘죄의 용서’라고 강조한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믿음 안에서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엄한 심판이 우리에게 미치지 않도록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내어 준 바 되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기쁨으로 성찬에 참여하여, 성도의 교제 한가운데에 자신의 불행을 내려놓고, 영적인 몸인 모든 지체로부터 도움을 찾으라.” 결국 루터에게 있어서 성찬에 참여하는 가장 중요한 태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의지하는 믿음이었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성찬에서 ‘빵’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며, 성도의 교제로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사랑의 중요성에 관해서도 강조한다. “빵은 땅의 여러 곡물을 혼합하여 만든다. 이때 각각의 곡물은 그 형체와 몸을 상실하고 빵이라는 하나의 몸을 가지듯 … 만약 우리가 성찬을 바르게 사용한다면, 이러한 변화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랑으로 우리와 동일하게 되셨고, 우리와 함께 죄와 죽음과 모든 악에 대항하여 싸우셨다 … 우리도 그 사랑으로 변화되어 다른 성도의 연약함과 필요를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변화되며 사랑으로 교제하게 된다. 사랑이 없이는 이러한 변화는 있을 수 없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3.28

    (75) 종교개혁⑮
  • 라이프치히 논쟁 1519년 6월 28일 칼 5세는 독일 황제로 선출되었다.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이었고 독일 지역 7명의 제후는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칼 5세는 스페인의 황제이기도 했는데 만약 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까지 차지하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교황청의 입지가 크게 약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교황청은 이를 반대하며 그 문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루터에 대한 소송도 늦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새로운 신학적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를 가리켜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7일까지 벌어진 라이프치히 논쟁이라고 한다. 요한네스 에크는 독일 출신의 신학자로 로마가톨릭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7월 2일까지 에크는 종교개혁 초기 루터의 신학적인 동지였던 칼슈타트와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에크의 언변은 매우 뛰어나 칼슈타트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종교개혁을 지지하던 잉골슈타트 대학의 다른 교수들조차도 에크에게 압도당했다. 그러나 7월 4일부터 루터가 직접 에크와 토론을 벌이기 시작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루터와 에크는 교황의 수위권과 공의회의 권위에 대해서 먼저 논쟁을 벌였고 이후 면죄부, 참회, 연옥 등의 문제로 토론이 이어졌다. 교황의 수위권에 관한 논쟁은 이미 1518년 12월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에크는 수위권을 옹호하는 12개 논제를 제시했으며 이에 루터 역시 12개 반대 논제를 내세우며 맞섰다. 그러자 에크는 13번째 논제를 가지고 루터의 주장을 재반박했다. 에크는 “로마 교회가 실베스터(교황 실베스터 1세, 314~335) 이전에는 다른 교회보다 높지 않았다는 주장을 우리는 부인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성 베드로의 신앙과 직위를 가진 그를 우리는 항상 베드로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루터 역시 13번째 반대 논제를 추가하며 “로마 교회가 다른 모든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400년 이후에야 등장한 로마 교황의 빈약한 교령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1100년의 신앙의 역사와 성서 본문과 모든 공의회 가운데 가장 거룩한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는 이것을 반대한다”고 반박했다.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이러한 논제를 토론할 기회가 없을 경우를 대비해 『교황의 권력에 대한 13개 논제 해설』을 인쇄하여 미리 배포했다. 루터는 교황의 수위권이 ‘신의 뜻에 근거한 법’이라는 로마가톨릭의 주장을 부인하며 교황은 인간이 만든 하나의 제도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교황에게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으며 한 번도 로마의 통치를 받지 않았던 동방 교회들에게는 그런 주장이나 요구가 제기된 적이 없음을 상기시켰다. 루터의 주장은 교회가 성서에 근거하지 않은 어떤 것을 구원에 절대적인 조건으로 강요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라이프치히 논쟁의 진정한 핵심은 ‘면죄부’나 ‘참회’의 문제가 아니라 성서에 근거한 ‘참된 교회에 관한 이해’였다. 1519년 8월 루터는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전개한 자신의 논제를 바탕으로 세 개의 글을 작성했다: 『교황의 권한에 대한 13개조 논제 해설』, 『라이프치히 논제 해설』 그리고 『요한네스 에크의 사악한 판결 반박』이다. 한편, 에크는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쾰른 대학과 뢰벤 대학의 신학자들을 선동해서 루터의 주장을 비판하도록 했다. 그들은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루터의 8개 문구를 정죄하고 면죄부와 참회에 대한 그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루터의 글들을 소각하라고 명령했다. 외적으로는 에크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상 라이프치히 논쟁은 루터의 신학적 승리로 기억되고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목사)
  • 2025.02.21

    (74) 종교개혁⑭
  • 아우구스부르크 심문 1518년 5월 초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 회원들은 대부분 루터를 지지했지만 작센의 도미니크파 수도회 회원들은 이단 혐의를 씌워 루터를 로마 교황청에 고발했다. 도미니크 교단 총회도 이러한 고소를 지지한 결과 교황 레오 10세는 교황청 신학자인 실베스터 프리에리아스에게 루터의 주장을 심사할 것을 명했다. 이를 근거로 1518년 6월 교황청 최고 판사인 체누치는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라는 출두명령서를 발부했다. 이 명령서는 카예탄 추기경을 통해 1518년 8월 7일 루터에게 전달되었는데 그는 당시 교황청 대사 자격으로 터키와의 전쟁에 필요한 독일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아우구스부르크에 머물고 있었다. 루터의 지역 영주이던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이 문제에 즉각 개입했다. 로마 교황청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으며 이로써 루터의 심문은 추기경 카예탄의 주관하에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진행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1518년 8월 23일 교서를 통해 카예탄에게 루터를 심문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했으며 그 결과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아우구스부르크 푸거가(Fugger家)에서 루터 심문이 이루어졌다. 심문의 중요 내용은 루터의 95개조의 면죄부 반박문 중 58번째 논제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는 교황이 면죄부를 나누어주는 근거로써 주장하는 ‘교회의 보화’는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공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교황 없이도 그리스도의 공로는 속사람에게는 은혜를, 겉 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 그리고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카예탄은 교회의 재정과 자원에 대한 교황의 권리를 강조하는 클레멘스 6세의 칙령(‘홀로 낳아진 자’)을 통해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반박했다. 그는 교황이 모든 공의회와 성서보다 우위에 있으며 루터는 자신의 모든 주장을 취소해야 한다고 비난했다. 루터는 생각할 시간을 요청했으며 자리를 떠났다. 10월 13일 루터의 두 번째 심문이 열렸다. 루터는 자신이 어떤 점에서 성서, 교부, 교황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가르쳤는지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루터는 적법한 교회의 판단에 복종할 것이며 어느 곳에서나 상관없이 공개 토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0월 14일 세 번째 루터 심문이 열렸다. 카예탄은 루터의 입장을 반박하는 글을 낭독했고 루터에게 입장을 취소할 것을 다시 한번 요구했다. 카예탄은 루터에게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함으로써 시련을 겪는 교회에 보화의 공로를 획득했다’고 기록된 문헌을 읽어 주었다. 이에 루터는 보화를 얻는 것과 보화 자체는 다르며 그리스도 그 자신이 바로 그 보화요, 교회의 근거라고 반박했다. 루터는 “잘 가르쳐야 할 거룩한 아버지에 대해 잘 가르치지 못한 교황과 그의 판사에 관하여”라는 호소문을 작성해 유포했고 10월 22일 아우구스부르크를 떠났다. 로마에서는 루터를 압송하려는 노력에 이어 이제 면죄부 교리를 합법적으로 선포하고자 했다. 1518년 11월 9일 레오 10세는 교황은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그의 권세에 근거하여 면죄부로 사면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이 면죄부는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사면이라는 방식으로, 죽은 자들에게는 중보기도라는 방식으로 베풀어진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그사이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진행된 자신의 심문을 다룬 『아우구스부르크 행적』(Acta Augustana)을 집필하여 12월에 출판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목사)
  • 2025.01.24

    (73) 종교개혁⑬
  • 하이델베르크 논쟁 면죄부와 교황의 권위를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고 있던 1518년 초, 가브리엘 베네투스가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 총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서신을 통해 마르틴 루터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며 그를 ‘진정시키고 달래줄’ 학자들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베네투스 총장은 당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원장이자 비텐베르크 초대학장을 지낸 슈타우피츠에게 이를 전달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는 루터의 문제를 자연스럽게 처리하되 학문적인 토론으로 해결하려 했다. 마침 3년마다 열리는 총회가 하이델베르크에서 예정되어 있었고 이를 활용하기로 했다. 이에 루터는 총회 참석을 위해 비텐베르크 대학에 휴가를 요청했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뷔르츠부르크의 총대주교 프리드리히 폰 비르스베르크 그리고 팔츠의 선제후 루드비히 5세 등으로부터 하이델베르크로의 여행 안전 보장도 확인받았다. 루터는 특별히 제공받은 마차를 거절하고 규정에 따라 4월 11일 동료 수도사와 함께 도보로 떠났다. 코부르크, 뷔르츠부르크를 거쳐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을 때 루터는 그곳 선제후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크게 환영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518년 4월 25일 루터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 수도회 총회에 참석했다. 다음날인 26일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예술학부 강의실에서 루터의 문제와 관련하여 변론회가 열렸다. 루터는 변론을 위해 미리 28개의 신학적 논제와 12개의 철학적 논제를 준비했다. 그의 논제들은 전체적으로 스콜라신학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죄와 은혜에 대한 간결하고 날카로운 가르침이 포함되었다. “인간의 행위는 아무리 아름다워 보이고 선해 보일지라도 분명히 치명적인 죄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행위는 아무리 불완전해 보이고 나빠 보일지라도 (구원을 위한) 참된 불멸의 공로이다”(논제3, 논제4). “자유 의지는 타락 이후에는 공허한 개념에 불과하다. 인간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행하게 될 때 죽음의 죄를 짓는 것이다”(논제13). 이 밖에도 루터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을 대조하며 로마가톨릭을 향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변론회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행사이기도 했다. 이는 루터에게 영예로운 것이었으며 환대의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와 하이델베르크 대학 관계자들 그리고 그곳 시민들과 팔츠 선제후 궁정의 대표자들이 관객으로 참석했다. 루터와 논쟁을 벌인 여섯 명의 박사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 회서, 요도쿠스 브레히텔, 마쿠스 슈티어, 피터 샤이벤하르트, 게오르그 슈바르츠, 로렌츠 볼프. 기록에 따르면 청중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여섯 명의 신학 교수들은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했지만 예술학부 교수들과 학생들은 루터에게 열렬하게 동의했다. 루터는 1518년 5월 18일 조지 스팔라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날을 이렇게 회고했다. “박사들은 나의 변론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매우 겸손하게 논쟁을 벌였기에 큰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에게 내 주장은 낯선 것이었지만 예리하고 훌륭하게 반대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다만 다섯 번째 가장 나이 어린 박사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루터가 말한 어린 박사는 게오르그 슈바르츠였다. 그는 청중의 웃음을 유발하며 루터의 논제를 농민들이 알게 되면 그를 돌로 쳐 죽일 것이라고 분노했다. 루터의 변론을 기록한 이들 중에서 마틴 부처의 기록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그는 변론회가 끝난 후 루터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부처는 루터가 에라스무스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라며 열광했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은 ‘행위로 얻는 의’에 대한 루터의 비판과 ‘십자가 신학’에 대한 그의 신학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목사)
  • 2024.12.27

    (72) 종교개혁⑫
  • 95개조 논제에 대한 반응들이 종교개혁의 밀물이 되다 95개조 논제는 루터가 예기치 못한 일들을 일으켰다. 면죄부 문제보다는 오히려 교황의 권력에 대한 루터의 비판이 거센 반발을 일으켰다. 1517년 12월 17일 마인츠의 대주교였던 알브레히트는 “거룩한 교황께서 이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시고 이에 대한 루터의 오류를 반박하고 훈계해달라”며 95개조 논제를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1518년 1월 20일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 요하네스 텟젤과 당시 프랑크푸르트(Frankfurt an der Order) 대학 총장이었던 콘라트 빔피나는 루터의 논제들을 고려하여 만든 106개의 논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열었다. 그들은 여기에서 면죄부 이론과 판매에 대해 정당함을 강하게 방어했다. 루터의 수많은 주장 가운데 특별히 ‘교황의 권한 제한’과 ‘연옥에 대한 문제 제기’에 대하여 오류이며 모독이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비난은 흔히 이단 심문에서 통용되던 것이었다. 또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토론회를 근거로 도미니크 수도회는 루터에게 이단 혐의를 두어 로마에 고소키로 했다. 1518년 2월경 잉골슈타트의 저명한 신학자 요하네스 엑크는 『오벨리스키(날카로운 기둥들)』라는 저서를 통해 루터가 ‘보헤미아의 바이러스를 퍼뜨린다’라고 비난하며 그의 오류들을 질책했다. ‘보헤미아의 바이러스’란 15세기 초 보헤미아 왕국(현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루터를 향한 일련의 격렬한 반응들은 오히려 루터의 개혁 의지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1518년 8월에 출판된 “면죄부의 효용에 대한 논쟁의 해결”에서 루터는 95개조 논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주장들을 더욱 세밀하고 예리하게 설명했다. 그는 참회에 대한 신약성서의 근거들을 더욱 명확하게 제시했으며, 교황의 권한에 대해서도 더욱 날카롭게 비판했다. 믿음에 대해서도 다른 어떤 신앙 행위와도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강조했다. 성례전과 연옥설에 대해서도 로마가톨릭 주장의 오류를 한층 강하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특히, 직접적으로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루터는 알브레히트를 향해 ‘최악의 이교도’로 칭하며 더 나아가 교황이 면죄를 통해 새로운 신앙 교리를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결론적으로 루터는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지금의 교회는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일도, 교황의 일도, 수많은 추기경의 일도 아닌, 하나님만의 일이다. 종교개혁의 때는 오로지 시간을 창조하신 그분만이 알고 있다. 우리는 (로마가톨릭 교회의) 명백한 오류를 부인할 수 없다. 교황의 죄 사함의 권세는 오용되고 있고 그는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자임이 틀림없다. 개혁의 밀물이 이미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 없다. 우리의 악행이 그것을 벌어들였다(렘 14:7).” 물론 루터에게는 그 종교개혁을 이끌려는 강력한 의지나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글에서 그는 자신의 95개조 논제를 “철회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교황의 처분에 따를 것임을 밝히고 있다. “거룩한 아버지, 나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당신의 거룩성에 맡깁니다. 살려주시든, 죽이시든, 부르시든, 철회하시든, 불쌍히 여기시든, 쫓아내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당신의 음성을 당신 안에서 이끄시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내가 죽을 만한 일을 저질렀다면, 나는 죽기를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땅과 충만한 모든 것이 주의 것이며, 그는 영원히 찬양받으실 것입니다”(WA 1,529,23-27). 루터는 부조리한 로마가톨릭과 교황의 결정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맡겨드렸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11.22

    (71) 종교개혁⑪
  • 면죄부 판매와 95개조 논제 오래전부터 기독교인들은 기도나 성지 순례 외에도 돈으로 지옥의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교회는 연옥을 지옥으로 갈 정도로 큰 죄를 짓지 않은 죄인의 영혼이 머무르는 곳으로 생각했다. 즉, 천국으로 직행할 수 없는 영혼들이 연옥에서 다음 심판을 기다리며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에서 고통을 견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이나 대리인의 선행과 회개 그리고 보상의 노력에 따라 연옥에 머무는 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연옥을 뜻하는 라틴어 푸르가토리움(Purgatorium)은 ‘정화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가진다. 일찍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연옥을 땅속 깊은 곳의 불구덩이로 묘사했고 단테는 죄인들이 눈꺼풀을 철사로 꿰맨 채 머물고 있는 언덕으로 그렸다. 종교적인 해석이나 상상이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연옥의 이미지는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당시 로마가톨릭은 이런 공포심을 이용하여 필요한 재정을 채우려고 했다. 예를 들어 교황이나 대주교들은 성당을 짓거나 보수할 때 또는 십자군전쟁 자금을 모으기 위해 면죄부(엄밀히 말해서 면벌부)를 팔아서 돈을 모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당시 스콜라철학의 논리를 끌어들이고 있었다(종교개혁자들이 그토록 스콜라주의를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터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는 로마에 베드로성당을 신축하려고 했고, 그에 필요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1506년 대규모의 면죄부를 발행했다. 독일에서는 마인츠와 막데부르크의 대주교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에게 면죄부 판매를 위임했다. 율리우스 2세는 그에게 면죄부 판매를 통한 수입의 절반을 푸거 가문에게서 차용한 9만9000굴덴(당시 100굴덴 정도면 지방 부호의 큰 저택 한 채 값이었고, 중산층 가족의 1년 생활비 정도였다)의 융자금을 상환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와 별도로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 수입 가운데 2만4000두카덴(중세 유럽의 금화 명칭)을 마인츠 교구와 막데부르크 교구를 인수하는 데 드는 상납금으로 교황청에 지불했다. 도미니크회 수도사였던 요하네스 텟젤이 베드로성당 건립을 위한 면죄부 판매 실무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십자가와 교황의 깃발을 든 텟젤은 알브레히트가 관할하는 세 교구의 도시마다 찾아가서 신자들에게 면죄부를 판매했다. 마르틴 루터는 영혼의 구원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이러한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면죄(사면)의 신학적 부당성을 95개조 논제로 작성하여 알브레히트 대주교에게 보냈다. 알브레히트가 루터의 신학적 이의 제기를 무시해 버리자 크게 실망한 루터는 항의를 결심하고 비텐베르크 성당 문을 향해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한 손에 망치를 들고 세상을 바꾸게 될 벽보를 성당 문에 못 박았다. 루터의 절친한 동지였던 필립 멜란히톤은 루터가 죽은 후에 그의 저술을 모아 책을 출판하면서 그 서문에 “루터는 1517년 만성절 전날 비텐베르크 성당에 면죄(사면)를 반박하는 95개조 논제를 게시했다”라고 기록했다. 오랫동안 루터의 비서였던 게오르크 뢰러는 “1517년 만성절 전야에 비텐베르크의 모든 교회와 문들에 면죄부를 비판하는 마르틴 루터 박사의 논제가 붙었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게시 방법에는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오늘날 우리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1517년 10월 31일에 시작되었다고 확신한다. 다음은 95개조 논제를 시작하는 루터의 목소리이다. “진리를 향한 사랑과 진리를 밝히고자 하는 열정으로 아래와 같은 논제를 가지고 (면죄부 신학에 관해) 토론할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향한 루터의 열정을 사용하셔서 세상을 변화시키셨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10.25

    (70) 종교개혁⑩
  • 종교개혁을 위한 루터의 각성 (1) 1512년 루터가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성서학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요한 슈타우피츠의 결정적인 역할 덕분이었다. 슈타우피츠는 수도원 업무로 인해 더 이상 성서학 교수직을 맡을 수 없게 되자 루터에게 그 자리를 대신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 시점부터 루터는 성서 주해에 집중하게 되었고, 이는 그에게 종교개혁을 위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가 시련을 겪을 때마다 그를 위로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언해 준 스승이자 친구였다. 루터는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몸부림칠 때 슈타우피츠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시작한다는 그의 말은 번개처럼 나를 강타했고, 장사의 화살처럼 내 영혼에 박혔다.” 또 한 번은 루터가 자신이 구원을 위해 예정된 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졌을 때 슈타우피츠는 이렇게 조언했다. “예정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시작해 보게.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고 죄인을 위해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슴에 새겨야 하네. 그러면 예정으로 인한 고뇌는 사라질 것이네.” 1512년 10월 루터는 비텐베르크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의 강의실에서 첫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창세기를 가르친 후 1513년 8월부터 1515년 7월까지 시편을 강의했다. 이때 루터는 시편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어 그는 시편 31편 1절에서 말하는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구절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했다. 즉,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그를 구원하며 자유케 하는지 의문이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루터는 시편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시편 구절들이 갖는 이중적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하나는 다윗에게 연관되는 문자적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게 연관되는 예언적 의미였다. 이 둘 가운데 루터는 예언적인 의미를 시편이 가진 본래적 의미로 여겼다. 다만 문자적인 의미와 예언적인 의미를 도덕적인 의미 안에서 이해할 때 그 본문 안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터의 이러한 신학적 발전은 1515년 11월부터 1516년 9월까지 행한 로마서 강의에서 한층 발전했다. 그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안에 처음부터 내재한 원죄를 극복하고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extra nos in christo),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붙들게 하는 것이었다. 오직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소망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찬양은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하며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을 통해 교회 안에 임재하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루터는 로마서 1장 17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적인 의로움과 구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인간의 의로움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행위를 일으킨다.”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쌓은 공적을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는 그런 의로움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는 의로움이며 오직 믿음 안에서만 인간에게 주어지는 의로움이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제1부원장)
  • 2024.09.27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