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54) 중세후기④
  • "동프랑크 왕국"
    칼 대제의 후계자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프랑크왕국은 베르뎅조약(843년-21년 6월 27일자 기사 참조)을 통해 중프랑크 왕국(이탈리아), 서프랑크 왕국(프랑스), 동프랑크 왕국(독일)으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칼 대제의 손자이자 루드비히 1세의 셋째 아들)는 중프랑크 왕국의 로타르 1세가 아들 루드비히 2세(=이탈리아의 루드비히 2세)에게 물려준 영토와 황제의 지위를 탐내고 있었다. 때마침 이탈리아의 루드비히 2세가 적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875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의 아들 중에 카를로만이 후계자로 지목됐다. 아마도 남부 해안에서 이슬람 세력에게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던 교황청과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의 소원이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칼 2세(대머리 칼)가 먼저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점령하고 황제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루드비히 2세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그는 이미 피핀 2세(피핀 1세의 아들)가 차지하고 있던 아키텐과 로타르 2세(로타르 1세의 아들)가 다스리던 로타링기아의 서쪽 지역을 점령하면서(870년 메르센 조약-21년 7월 25일자 기사 참조) 서프랑크 왕국을 확장하고 있었다.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칼 2세와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876년). 그가 죽은 뒤 동프랑크 왕국은 세 부분(바이에른, 작센, 슈바벤)으로 나뉘었고, 이후 서프랑크 왕국의 칼 2세가 사망하면서 황제의 지위는 동프랑크 왕국을 통일한 슈바벤의 칼 3세에게 돌아갔다. 당시 서프랑크 왕국은 칼 2세(877년 사망)의 뒤를 이어 즉위한 루이 2세가 죽고(879년) 그의 세 아들 중 두 아들(루이 3세와 샤를로망)에게 분할되어 상속되었으나 이들마저 사망하면서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동프랑크 왕국의 칼 3세를 황제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당시 막내 샤를은 너무 어렸다). 루드비히 1세의 죽음 이후 분열되었던 프랑크 왕국이 다시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됐다. 칼 3세는 지나친 비만으로 각종 병환에 시달리는 한편 통치자로서도 무능력했다. 로마교황청의 보호자 역할을 하지 못했고, 바이킹족, 슬라브족, 마자르족과 같은 외적의 침입에도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제후들의 반란을 통해 아르눌프가 칼 3세를 폐위시키고 동프랑크 왕으로 즉위했다(887년). 한편, 서프랑크 왕국은 루드비히 1세의 외손자이자 파리 백작인 외드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칼 3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던 루이 2세의 아들 샤를이 왕위계승권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발생했고, 교황청의 지지를 얻어 샤를 3세로 즉위할 수 있었다. 동프랑크 왕국의 아르눌프는 샤를 3세의 즉위에 반대하면서 다시 한번 외드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결국 외드 측과 샤를 3세 측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샤를 3세가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차지하게 됐다. 이렇게 하여 서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게 됐다. 아르눌프가 죽은 후(899년) 루드비히 4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때 동프랑크 왕국은 마자르족이 지속적으로 국경을 넘어와 곳곳을 약탈하는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부 바이킹족과 함께 동프랑크 왕국의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했다. 마자르족의 침략이 극심해지고 루드비히 4세가 이를 막아내지 못하자 귀족들은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루드비히 4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911년)하면서 각 지방의 제후들은 차기 국왕 선출을 결정해야만 했다. 결국 프랑켄의 공작 콘라트가 새로운 왕이 됐다. 이렇게 하여 동프랑크 왕국은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고 이후 마인츠 대주교 및 쾰른 대주교와 프랑켄 지역의 공작, 작센 주의 공작, 슈바벤 주의 공장 그리고 바이에른 주의 공작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자신들의 국왕을 직접 선출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5.26

    (53) 중세후기③
  • “서프랑크 왕국”
    ‘중세후기’(Late Middle Ages)에 들어서 교황권의 권위는 추락했지만 세속 군주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그러나 칼 대제의 죽음 이후 후계자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거세지면서 절대 권위였던 세속 군주의 지위는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칼 대제의 후계자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프랑크 왕국은 베르뎅조약(843년, 2021년 6월 27일자 기사 참조)을 통해 중프랑크 왕국(이탈리아), 서프랑크 왕국(프랑스), 동프랑크 왕국(독일)으로 나뉘었으며, 결국 메르센조약(870년, 2021년 7월 25일자 기사 참조)을 통해 동프랑크 왕국과 서프랑크 왕국으로 재편되었다. 이 가운데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 왕조는 루이 5세(987년 사망)에 이르러 끝나고 파리의 백작이자 대장군이었던 위그 카페가 왕에 선출(987년)되면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참고로 역사가들은 바로 이 카페 왕조로부터 본격적인 프랑스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이 당시 서프랑크 왕국은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제후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노르망디 공국이나 가스코뉴 공국과 같이 공작들이 다스리는 공작령이 있었고, 플랑드르 백국, 툴루즈 백국과 같이 백작들이 다스리는 백작령이 있었다. 왕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령은 파리와 오를레앙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러한 체제 아래에서 노르망디 공국의 기욤 2세는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침공했다(1066년).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윌리엄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이후부터 노르망디 공국의 제후는 잉글랜드의 왕이었지만 프랑스의 봉신이기도 한 어정쩡한 상황이 되었다. 서프랑크 제국 내 수많은 제후령은 서로 병합되거나 나눠지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던 중 12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앙주 백국의 헨리 2세는 노르망디 공국을 복속(1144년)하고 잉글랜드의 왕위까지 차지(1154년)했으며, 정략결혼을 통해 아키텐 공국(1152년)과 브르타뉴 공국(1166년)까지 획득하여 거의 프랑스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 역할을 거부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이러한 서프랑크 왕국 내 왕과 봉건 제후들 사이의 권력 구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십자군 전쟁 때문이었다. 당시 왕이나 제후들은 십자군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돌아오지 못하거나 귀환이 지연되는 상황이 생기면서 다른 제후의 영토를 빼앗아 권력을 확장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잉글랜드의 왕 헨리가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리처드(훗날 사자왕으로 불리움)는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제후로서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필리프 2세 역시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지만 서둘러 다시 프랑스로 귀환했다. 필리프 2세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 출정한 리처드의 귀환이 늦어지자 그가 다스리고 있던 제국령을 공격하여 흡수해버렸다. 뒤늦게 귀환한 리처드는 빼앗긴 프랑스 내 영토를 되찾기 위해 필리프 2세를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지만 전사하고 말았다(1199년). 이후 리처드의 동생 존은 형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플랑드르, 불로뉴와 함께 연합군을 조직했으나, 부빈 전투에서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에게 패하면서 결국 잉글랜드와 아키텐, 그리고 노르망디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리처드의 영토가 필리프 2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지금의 프랑스와 영국이 포함된 서프랑크 왕국 내 이러한 정치 상황은 훗날 왕위계승 문제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100년 이상 지속된 백년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4.21

    (52)중세후기②
  • 피렌체, 르네상스의 중심지
    ‘르네상스’라는 말의 뜻은 ‘다시 태어남(재생)’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서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난 고대 그리스 문화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시기에는 문학, 예술, 철학, 정치, 과학, 신학, 법률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그리스 고대 문화에 대한 재해석과 적용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한두 가지의 원인 때문에 촉발된 것은 아니었다. 먼저 교황권의 부패와 타락은 로마 가톨릭 중심의 교회 권위를 약화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십자군 전쟁의 연이은 실패와 흑사병의 창궐을 통해 중세의 경제, 사회 및 정치 구조를 지탱해 오던 봉건제까지 무너져 내렸다. 교황권의 약화로 인해 대립 관계에 있던 왕권이 강화되면서 200여 개가 넘는 도시국가들이 난립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지중해와 인접한 이탈리아는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에 상인들이 몰려들면서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 경제적인 호황으로 엄청난 인구가 도시로 모여들었다. 막대한 부를 쌓은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길드’라는 조합을 만들어 경제 권력을 형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교육에 대한 수요가 폭발했다. 수많은 수도원과 학교들이 설립되었고 더 나아가 대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을 등장시키면서 학문과 문학 및 예술 등에 대한 대중들의 의식과 소비가 발달했다. 이탈리아 내에서도 피렌체공화국은 상공업이 매우 발달한 곳이었다. 도시 중앙을 흐르는 아르노 강을 중심으로 상거래가 활발했는데, 고대 로마시대에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르네상스 시대의 모든 길은 피렌체로 통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특별히 피렌체는 황금 거래의 중심지였으며, 양모 무역과 고리대금업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피렌체에서 태어난 단테는 르네상스의 신호탄이라고 일컬어지는 『신곡』을 출판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단테 자신이었는데, 그가 연모했던 베아트리체를 찾아 지옥, 연옥, 천국으로 이루어진 지하세계를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에서 ‘연옥’이라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단계가 등장하는데, 중세 사람들은 비록 죽은 자일지라도 여기에서 머무는 동안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제의 호황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들은 이 ‘연옥’이란 개념에 열광했다. 기독교 세계관이 지배하던 당시 사회에서 돈에 대한 인식은 아주 부정적이었다. 성경에도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라는 말씀이 있는 것처럼 돈 많은 상인들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으며, 중세 상인들에게 이러한 사실은 매우 큰 스트레스로 작용했다. 이러한 까닭에 당시 부자 상인들은 죽을 때 수도원 지하에 묻혀있는 수호성인들의 유골과 가장 가까운 곳에 묻히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 성인들이 최후의 심판장에서 자신들을 변호해주리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재정적인 문제로 수도원이나 성당에서도 당시 성직자에게만 허용했던 묘지를 부자 상인에게 팔기 시작하면서 상인들에게 예배당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하도록 했다. 당시 가장 유력했던 메디치 가문을 비롯한 피렌체의 많은 부자 상인들은 저마다 최고의 예배당을 만들기 위해 앞다투어 당시 제일 유명한 화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무역과 상업활동을 통해 쌓은 부로 특권층에 편입된 상인들의 구원에 대한 열망이, 마침내 르네상스를 촉발한 예술작품의 생산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 원인이 된 것이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3.24

    (51)중세후기①
  • 르네상스 운동과 인문주의
    중세후기는 스콜라철학의 쇠퇴기에 해당하는 기간으로서 14~15세기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시기 정치적으로는 왕권을 중심으로 강력한 민족국가가 형성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시민계급과 민족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오캄의 윌리엄으로 대표되는 유명론과 민중경건운동이 대두되었으며, 종교적 절대권위를 상실한 교황청이 몰락하자 그 자리는 제후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렇듯 중세후기는 지금까지 중세를 지탱해오던 전통들이 와해되고 새로운 질서들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교회가 분열로 난립되고 있을 무렵, 새로운 정신 문화가 등장하고 있었다. 14세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발했던 르네상스 운동이었다. 기존의 신중심적인 세계 구조와 이해에 대해 반기를 들며 인간에 관한 관심을 주제로 한 인간 재발견 운동이었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적인 시도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신앙적인 차원에 머물던 관심이 인간과 세속으로까지 확대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운동은 중세의 구조적 변화를 가속했고, 가톨릭교회의 약화와 교황중심의 교회구조를 쇠퇴시켰다. 르네상스 운동과 연관되어 시작된 인문주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고전문헌 연구를 통해 그 시대의 문화를 재조명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려했던 학문적 기풍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를 지탱해오던 기독교 신앙 위에 고전문학에서 발견되는 지혜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고전연구를 위해서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플라톤이나 세네카 등의 고전문헌 연구가 성행했다. 이 외에도 수많은 고대 기독교 문헌들이 발굴되고 재생산됐다. 인문주의의 기풍은 이성적인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기존에 전래되던 문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비평작업을 통해 그 진위를 검토하는 연구가 활발했으며, 이를 통해 위조로 밝혀진 문서들도 매우 많았다. 그 가운데 압권은 가톨릭교회에 전래되어 오던 ‘콘스탄티누스 증여’가 위조로 밝혀진 사건이었다. 이 문서의 내용은 로마제국의 통일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나병을 치료해 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감사의 표시로 로마 서부에 대한 통치권을 양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이 문서는 중세 교황의 세속 지배권을 뒷받침하던 가장 강력한 증거로 사용되어왔다. 11세기 이후 교황들은 서임권 다툼(22년 1월 23일자 기사 참조)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대항해 교황의 권력이 세속 군주의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서는 인문주의자들의 연구에 의해 8세기경 위조된 가짜문서임이 드러났다. 당시 부패와 타락으로 위기에 몰린 교황청이(21년 8월 29일자 기사 참조)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자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교황청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간섭을 배격하고 더 나아가 과거 서로마제국의 지역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주장하기 위해 가짜문서를 위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문주의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이 문서의 진위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결국 1440년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로렌초 발라는 그의 연구 <콘스탄티누스 증여의 위조에 관한 선언>에서 논리적인 모순들과 문헌학적 오류들 그리고 역사시대적 착오 등을 근거로 이 문서가 위조임을 밝혔다. 그는 이 문서의 위조는 교황의 권위에 대항하던 선구자들의 죽음을 불러일으킨 살인죄에 해당하며 인류에게는 일대 재앙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 1431~1447)는 이 문서가 교황청의 주도적인 위조가 아닌 누군가의 위서임을 인정한 바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2.24

    (50)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⑥
  • 스콜라철학
    ‘스콜라’는 ‘학교’ 또는 ‘학파’를 의미하는 라틴어이다. ‘스콜라철학’이란 중세 유럽에 생겨난 수많은 학교(2022년 12월 23일자 기사 참조)에서 성행했던 진리탐구의 사조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조직이 발전하고 신앙의 규범이 완성되어가면서 당시 세계관이었던 플라톤철학 사상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탐구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러한 사상의 흐름을 가리켜 신플라톤주의라고 한다. 특별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적 통찰력을 기반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조명하는데 크게 기여했는데, 인간의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하려 했던 그의 신학 방법론은 스콜라철학의 뿌리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기독교 세계관 아래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이성적이고 사색적인 철학 방법론을 통해 신앙의 내용을 관찰하고 이해하고자 했다. 5~6세기경 위(가짜)-디오니시우스의 부정신학이 대표적인 예이다. 부정신학이란 사람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언어로는 전부 묘사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정적인 표현으로만 서술해야 한다는 신학 사상을 말한다(예: “하나님은 태어나지 않으신 분이다”). 특별히 8세기 말 프랑크 왕국의 칼 대제가 세운 궁정학교는 이러한 초기 스콜라철학의 모판이 됐다(2021년 4월 25일자 기사 참조). 여기에서 발달한 스콜라철학의 방법론은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기 시작했고, 11세기까지 이어지면서 중세신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이성적으로 증명하려는 스콜라철학의 경향은 켄터베리의 안셀름(?~1109)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그가 강조한 것은 이성을 추구하는 신앙으로 스콜라철학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의 유명한 ‘신존재증명’을 살펴보자: (1) 신은 그 이상으로 크게 생각될 수 없는 존재이다. (2) 이렇게 큰 존재는 인간의 생각 속에만 존재할 수 없다. (3) 그러므로 신은 반드시 실존해야 한다. 안셀름을 이어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1079~1142)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1096~1160)는 이성적이고 비평적인 방법으로 성경의 명제들이 설명돼야 함을 강조하면서 스콜라철학의 위치를 더욱 공고하게 했다. 때마침 이런 상황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들이 서방으로 전해졌다. 십자군 전쟁 가운데 상인들에 의해 동·서방 문물이 전해지면서 아랍어로 번역돼 보존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재발견됐다. 플라톤 사상 위에서 공고하게 서 있던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플라톤 사상과 대조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도전 앞에 서게 됐다. 13세기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수사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193~1280)와 그의 제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조화시켜 스콜라철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특별히 아퀴나스는 계시 없이도 이성의 도움을 통해 계시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주지주의). 이와 반대로 둔스 스코투스와 오캄의 윌리엄은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자유 안에서 선택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주의주의). 이렇듯 중세 스콜라철학과 신학의 전성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도전에 대한 진지한 응답에서 비롯됐고 이는 계몽주의와 르네상스 그리고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이 됐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1.27

    (49)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⑤
  • 대학의 발전, 보편논쟁,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중세 유럽은 이미 9세기경 카롤링 왕조 당시 특별한 문화적 번영을 경험했다(2021년 4월 25일자 기사 참조). 칼 대제의 문예와 교육 장려 정책을 통해 신학과 일반 학문 연구가 활발해졌고 이는 결과적으로 변증학과 논리학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학문 연구의 발달은 11세기 들어서면서 대학이라는 새로운 무대를 등장시켰다. 수도원이나 교회에서 설립한 대학이 있었고, 유명한 학자들 중심으로 형성된 대학이나 국가에서 경영하는 대학이 생겨났다(1088년 최초로 세워진 볼로냐대학). 당시 신학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최고 학예였으며 그러한 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이른바 ‘보편논쟁’이었다. 이는 3세기경 그리스 철학자 포르피리오스에게서 출발한 논쟁으로서 개별자들(사물)을 공통의 특성으로 묶는 상위 개념으로서의 ‘보편자’가 실재하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이후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플로티누스의 일자론을 기독교 사상으로 승화시킨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러 하나님은 온 우주의 최상위 존재로 이해되었고, 보편자의 존재(=실재론)는 로마가톨릭의 입장이 되었다. 9세기 에리우게나와 11세기 안셀무스와 샹포의 기욤 등이 이러한 실재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실재론에 이견이 생긴 건 11세기경 십자군 전쟁 이후 이슬람 지역에서 보존되어오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와 주해들이 다시 서구 학자들의 손에 들어오게 되면서부터였다(=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대부분은 플라톤의 사상에 밀려 서구 세계에서 잊혀져 있었고, 오히려 아랍 철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실재는 이데아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고 여겼고,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 그러한 보편진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근거로 당시 학자들은 “보편자는 실재하지만, 사물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입장을 가리켜 ‘온건실재론’이라 한다(예를 들어, 아벨라르두스, 아퀴나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지역마다 교회들이 많아짐에 따라 보편논쟁은 가열되었다. 지역교회들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보편자인데 왜 로마 교회만이 보편 교회로서 모든 교회들의 머리가 되려는가, 개별 교회도 보편 교회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가톨릭은 이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만도 없었다. 하나님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은 곧 개별 교회들에 대한 로마교회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기독교 중요 교리들을 포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실재론과 온건실재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유명론’이 등장했다. 이 주장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프랑스 철학자인 로스켈리누스였다. 그는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고 단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보편은 명칭일 뿐이며 사물 뒤에 오는 일반적인 기호나 이름이라는 것이다. “정신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일반적 진리나 사상은 없다”고 주장했던 14세기 영국의 오컴 출신의 윌리엄 역시 대표적 유명론자이다. 그에게 보편자는 정신적 개념이며 마음 밖에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보편이란 개념은 신학에는 불필요한 이론이었다. 그에게 하나님은 개별자 안에 계실 수 있으며, 동시에 개별자를 초월하여 계실 수 있는 분이었다. 유명론은 기독교 세계관 아래의 중세에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이러한 사고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을 천상 중심에서 지상 중심의 자연주의 사상을 초래했다. 유명론은 종교의 시대로 대변되는 중세 말기에 개별자인 사람과 이성을 강조하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2.12.23

    (48)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④
  • 탁발수도회
    십자군 전쟁 이후 등장한 급진적 청빈운동을 이끌었던 알비인들은 로마 가톨릭 측에서 볼 때 한낱 급진적 이단자들에 불과했다. 이노센트 3세와 호노리우스 3세 당시 그들을 선교하려던 모든 노력은 폭력적인 양상으로 변해가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도미니크회와 프란시스코회와 같은 탁발수도회가 창설되었다. 걸식수도회라고도 불리는 탁발수도회는 수도사들이 탁발(걸식)로 생활하는 데서 유래된 명칭이었다. 대표적으로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시스 수도회가 이에 속한다. 이들은 수도원 안에서 은둔하면서 영적인 삶에 몰두했던 기존 수도회와는 달리, 더 이상 은둔하지 않고 도시 안에서 직접 시민에게 설교하여 큰 영향을 끼쳤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창설자는 도미니크였다. 그는 1211년 라보르 시에서 이단자들이 군중들의 돌에 맞아 죽거나 화형되거나 십자가에 매달리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러한 알비인들과 관련된 유혈 사태를 겪으면서 그는 새로운 형태의 수도 운동을 결심했다. 기존의 수도회처럼 고정된 장소나 적막한 곳에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도심 한가운데로 들어가 청빈의 본을 보이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꿨다. 그들은 성서와 학문을 연구하는 것을 주요 일과로 삼았는데 학문연구를 위해서라면 찬송과 기도도 멀리할 수 있다는 규칙도 정했다. 이들의 중요 목표가 하나님의 말씀을 시민들에게 설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시 수도원 결성이 금지된 상황(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황으로부터 수도회의 결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도미니크 수도사들은 모자가 달린 검은색 외투를 착용하고 다녔으며, 회원들에게는 신학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일반지식도 갖추도록 요구했다. 주로 남자 수도사는 설교에 집중하고, 여자 수도사는 교육과 봉사에 집중하도록 했다. 유명한 도미니크회 사제들로는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엑크 하르트, 타울러, 사보나롤라 등과 같은 중세 스콜라신학의 대가들이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말기 도미니크회는 교황의 사냥개라고 일컬어지면서 종교개혁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되었다. 면죄부 설교자 텟첼, 추기경 카제탄, 잉골슈타트의 신학교수 에크 등 당시 개혁자 마르틴 루터를 공격하던 인물들은 도미니크회에 속해 있었다. 프란시스 수도회는 아시시의 프란시스에 의해 설립되었다. 방탕한 젊은 시절을 보낸 그는 전쟁 참가 중 중병을 치르면서 변화되었다. 그는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파송 설교에 감명을 받고 청빈했던 예수님과 사도들의 뒤를 따르기로 결단했다. 그 후 로마 순례 중 무너져가는 작은 교회의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프란시스여, 가서 네가 보듯 폐허가 되어 가는 나의 집을 수리하거라.”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창고에 있던 옷을 팔아서 허름한 교회를 복구했는데 이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하는 그의 삶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외에는 다른 아버지는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절대적인 청빈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았다. 이후 프란시스 수도사들은 사랑으로 뭉쳐 철저한 청빈의 삶을 실천했고 둘씩 다니며 전도했다. 사람들에게 회개의 설교를 외쳤고 문둥병자와 버림받은 자들을 도우며 함께 생활했다. 이러한 걸식수도회와 함께 12세기에는 카르멜리터의 은둔파 수도회, 13세기에는 어거스틴의 규율을 철저히 지켰던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특별히 후자는 마르틴 루터가 머물던 수도회로 잘 알려져 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2.11.25

    (47)십자군 전쟁 이후 중세의 변화③
  • 교황권의 쇠퇴와 아비뇽 유수
    ‘카노사의 굴욕 사건’(21년 12월 25일자 참조)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중세 전반기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비록 하인리히 4세와 같이 왕권 강화를 위해 교황의 절대 권위에 대항하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으나 결국 수 세기 동안 형성되어 온 교권의 거대 권력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약 200년 동안 계속되는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이를 주도한 교황권의 위세를 크게 약화시켰고 자연스럽게 왕권의 강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였다. 그는 시대적인 상황 가운데 붕괴하기 시작한 교황의 지배력을 벗어나 강력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고자 했다. 당시 프랑스는 조부(루이 9세) 때부터 지속되어 왔던 십자군 원정(7차, 8차)의 실패로 인해 왕실 재정이 바닥이 난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와의 전쟁(1294~1303)과 플랑드르 공국과의 전쟁(1302~1304)이 연이어 발발하자 필리프 4세는 전쟁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프랑스 교회와 성직자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는 강수를 두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보니파시오 8세는 칙서를 통해 이러한 프랑스 왕의 조치에 따르지 못하도록 금지시켰고 이에 맞서 필리프 4세는 교황령과의 모든 교역을 차단하는 등 강력한 제제를 가했다. 그런 가운데 필리프 4세가 프랑스 성직자를 반역죄로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일이 발생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필리프 4세는 성직자, 귀족, 시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삼부회를 조직하여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를 기반으로 군인들을 동원하여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체포를 감행했다(1303년 아나니 습격 사건). 당시 교황은 교황권의 절대 우위를 주장하는 우남상탐이라는 칙서를 발표하고 국왕을 파문하려고 했다. 체포된 교황을 압송하는 과정에서 보니파시오 8세가 사망하고 말았다. 아나니 사건을 통해 교황권을 꺾은 필리프 4세는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보니파시오 8세의 후임으로 선출된 교황 베네딕토 11세가 8개월 만에 사망한 후 1년 동안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지 못했다. 추기경들이 필리프 4세와 화해를 모색하는 친프랑스파와 복수를 요구하는 반프랑스파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1305년이 되어서야 친프랑스파의 의견이 관철되어 프랑스 출신 베르트랑이 교황 클레멘스 5세로 피선되었다. 이후 교황청은 프랑스 왕의 강력한 간섭을 받았으며, 로마로 들어가지 못한 채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는데, 1309년에는 필리프 4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청이 아예 프랑스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후 1377년까지 70년간 교황청은 아비뇽에 머무르며 7명의 교황을 배출했다. 이 기간을 가리켜 ‘아비뇽 유수’(1309~1377)라고 일컫는다.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왕의 영향 속에서 프랑스에 의존하게 되었고 교황권은 더욱 쇠퇴했다. 교황청은 그레고리오 11세에 이르러서야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지만 이듬해 그가 사망하고 이탈리아인 교황 우르반 6세가 선출되자 프랑스 추기경들이 반발하여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선출하고 아비뇽으로 되돌아갔다. 유럽은 두 편으로 나뉘어 로마와 아비뇽의 교황을 각각 인정하였고 이러한 분열은 로마 가톨릭의 위상을 더욱 하락시켰다.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교회의 분열이 심화되자 중재 명목으로 피사에서 공의회(1409)가 열렸다. 이 회의의 의장이었던 필라르헤스는 스스로 알렉산더 5세로 즉위하여 새로운 교황으로 자처했다. 이로 인해 세 명의 교황이 공존하는 상황이 되었고 교회의 분열(1378~1417)은 심화되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2.10.21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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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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