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60) 중세후기⑩
  • 장미전쟁<1>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전혀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20년 뒤 그의 지시로 공식적인 조사가 진행되고 교황청은 유죄 판결을 취소한다. 어쨌든 잔의 죽음은 별다른 파장을 낳지 않았다. 점차 밀리고 있던 잉글랜드의 헨리 6세와 함께 섭정으로 통치하고 있던 베드퍼드 공작 존이 죽자 부르고뉴의 필리프 3세는 잉글랜드와 관계를 끊고 재빠르게 샤를 7세와 아라스에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전세는 완전히 프랑스 쪽으로 넘어갔다. 1450년 4월 포미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궤멸시키고 그해 8월 셰르부르를 함락시키면서 노르망디 전역을 석권한 프랑스군은 프랑스 내 잉글랜드의 마지막 지역인 가스코뉴마저 함락(1453년)함으로써 사실상 승리를 확정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지역적인 전투가 발생했지만 1475년 헨리 6세가 칼레(현재 도버해협의 프랑스 지역에 위치한 도시)를 지키기 위해 노르망디와 아키텐 영지의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사실상 백년전쟁이 막을 내렸다. 칼레는 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그곳은 양모를 집산하는 중요한 항구도시였지만, 이후 메리 1세(블러디 메리)가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빼앗기고 말았다. 훗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계기로 지브롤터(스페인 남단)를 차지하지 못했다면 잉글랜드는 지금까지 완전한 섬나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백년전쟁으로 프랑스 사회에서는 잉글랜드인들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불길처럼 번져나갔고, 잉글랜드에서도 프랑스인에 대한 냉소와 경멸감이 확산했다. 그때까지 잉글랜드 지배계급에서 사용되던 프랑스어는 금지됐다. 영어가 국왕의 공식적인 언어가 됐다. 15세기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 사이의 적대감은 민족주의적 의식이 팽배하게 된 당시 유럽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내 봉건 귀족 세력이 극도로 약화됐다. 반면, 국왕의 권력은 크게 강해졌다. 샤를 7세는 왕실의 재정을 정비하고, 국왕의 상비군을 강화하며 귀족 세력을 누르고 중앙 집권제를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백년전쟁 직후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30년간에 걸친 일명 ‘장미전쟁’(1455-1485년)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으로 돌아온 전사 귀족들이 왕권을 놓고 다시 치열하게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다 자멸한 비극적인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왕권 쟁탈전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은 헨리 6세였다. 1453년경 정신병이 악화되면서 통치가 불가능해지자 요크가의 리처드 공작이 대신하여 섭정을 맡으려 했다. 헨리 6세의 왕비 마가렛을 포함한 랭커스터 가문(붉은 장미) 사람들이 제거당할 위험에 처했고 결국 요크 가문(흰 장미)과의 전쟁으로 확대됐다. 30년 동안 양가가 벌인 살육전에 의해 수많은 귀족이 무모한 죽음으로 내몰렸다. 전쟁은 요크 가문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에드워드 4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동생 에드워드 5세와 함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면서 삼촌 리처드 3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됐다. 그의 무자비한 왕위 찬탈은 요크 가문 내에서도 반발을 불러왔고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튜더(헨리 7세-영국의 종교개혁을 일으킨 헨리 8세의 아버지)의 도움으로 리처드 3세를 제거하면서 튜더 왕조 시대가 열렸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11.24

    (59) 중세후기⑨
  • 백년전쟁<3>
    샤를 7세의 대관식 이후에 프랑스 곳곳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로써 프랑스 영토 가운데 잉글랜드의 헨리 5세를 따르는 지역과 프랑스의 샤를 7세를 따르는 지역들로 나뉘었다. 두 왕을 두고 프랑스가 둘로 나뉘자 잔 다르크가 나섰다. 그녀는 잉글랜드에게 빼앗긴 파리를 수복하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적이 쏜 화살에 부상을 입고 퇴각해야만 했다. 이듬해 벌어진 콩피에뉴 전투에서 잔은 잉글랜드와 손을 잡고 프랑스를 배신한 부르고뉴파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잔을 구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부르고뉴파와 동맹을 맺고 싶어 했기에 이를 강경하게 반대하던 잔을 적극적으로 구조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백성들 사이에서 자기보다도 위대한 인물로 여겨지던 잔의 존재는 그에게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포로가 된 그녀를 구해 낸 쪽은 잉글랜드였다. 당시 1만 리브르(현재 약 45억원 정도의 가치)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잉글랜드는 잔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를 이단 재판에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잉글랜드는 하나님이 프랑스가 아니라 자신들의 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다. 재판부는 잉글랜드나 부르고뉴파의 인물들로 구성되었으며 그녀를 ‘이단자’로 지목할 꼬투리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변증법을 훈련한 명망 있는 학자 60명은 배운 것 없고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는 열아홉 살의 시골처녀를 상대로 약 5개월 동안 29번의 심문을 벌였다. 여러 차례 공개재판이 열렸으나 재판관들은 잔에게 어떤 죄도 찾아낼 수 없었다. 잔은 교묘한 재판관들의 질문에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자기의 말을 가로채거나 답변 중에 다른 질문으로 몰아부치면, “고귀한 어른들이여, 하나하나 차례차례로 하시오!”, “그 문제는 벌써 답변하였소. 저 서기장에게 물어보시오!”라고 하는 식이었다. 당황한 재판관들은 엉뚱한 질문을 쏟아냈으나 잔은 하나하나 통쾌하게 반박했다. “미가엘 천사장에게 털이 있는가? (재판관)” “왜 밀어버리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잔)”, “벌거벗었던가? (재판관)” “하나님이 그에게 옷도 못 입힐 정도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가? (잔)”, “성 마가렛은 영어로 말하던가? (재판관)” “그가 영국인 편도 아닌데 어찌 영어를 쓰리라고 생각하시오? (잔)”, “깃발과 칼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는가? (재판관)” “칼보다 깃발이 훨씬 더 좋소. 난 직접 깃발을 들었소. 적이 공격해 올 때 사람 죽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오. 한 번도 사람을 죽인 적은 없소 (잔)”. 잔 다르크는 심문 내내 하나님의 음성을 향해 기도하며 오로지 자기의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행한 모든 일에 대해 (가톨릭) 교회가 내리는 결정에 승복하겠냐’는 최종 질문에 잔은 대답했다. “하나님과 천국의 교회가 나를 프랑스 왕에게 보냈소. 내가 이룬 모든 행위와 내가 앞으로 이룰 행위는 승리하는 그 천상교회에 바쳐지는 것이니 지상교회에 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지금 답변할 수 없소. 이 세상 누구도 우리 주님이 명하신 일과 명하실 일을 못 하도록 나를 훼방 놓을 수 없소. 하나님이 맡긴 사명에 어긋나는 일을 하라고 교회가 요구한다면 세상 전부를 준다 해도 거절하리다.” 5월 29일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마녀이자 예언가인 죄, 이단인 죄, 마법으로 적을 살해하려 한 죄, 악령의 도움을 받은 죄 등 무려 70여 가지의 죄목으로 화형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5월 30일 아침 9시경 영국군들은 잔 다르크를 루앙의 옛 장터에 설치된 처형장으로 끌고 갔다. 잔은 십자가를 가슴에 얹고 자신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빌며, 하나님께 영혼을 의탁했다. 마녀가 부활할 수 있다는 우려에 그녀는 세 번 화형 당했고, 그녀의 뼛가루는 센 강에 뿌려졌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10.27

    (58) 중세후기⑧
  • 백년전쟁<2>
    잔 다르크(1412~1431)는 독일에 인접한 프랑스 북동부 로렌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주현절(1월 6일)에 태어났다. 평범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잔은 독실했던 어머니 이사벨에게 신앙과 경건의 삶을 배우며 자랐다. 그녀가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백년전쟁(1339~1453) 당시였다. 프랑스 내 부르고뉴파와 손잡고 1415년 노르망디 전체를 정복한 영국은 파죽지세로 파리를 점령하고 루아르 지역까지 진격하여 1428년 10월에는 프랑스 남부지역의 마지막 보루인 오를레앙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제후들은 왕세자 샤를 7세를 왕으로 추대해 영국군대에 맞서고 있었으나 전세는 매우 불리했다. 전쟁의 혼란 가운데 잔 다르크의 마을 로렌 역시 강도질이나 방화 등의 내분으로 혼란스러웠고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잔 다르크는 이와 같은 고통을 멈추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잔의 나이 약 열일곱 때의 일이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잔은 전쟁에 참여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말을 타거나 전쟁을 할 줄 모르는 힘없는 소녀일 뿐”이라고 거절했으나, 하나님의 음성은 보쿨뢰르 성채의 사령관 보드리쿠르를 찾아가면 군대를 내어줄 것이며 이들이 오를레앙의 점령군을 몰아내리라고 말씀했다. 잔 다르크는 보쿨뢰르 성채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이 원하신다!” 외치며 이렇게 말했다. “오로지 나만이 프랑스 왕을 도울 수 있소. 나는 가야 하오. 일해야 하오. 행동하기를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이오.” 그녀의 열정에 감동한 그곳의 경비대 대장이 그녀를 시농에 있는 왕에게 인도했고 고위성직자들과 법학자와 왕정위원회의 청문회를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전투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잔 다르크의 자신에 찬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고, 그녀가 하나님이 보낸 예언자요 투사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잔 다르크는 하얀 갑옷을 입고 백합 무늬로 덮인 휘장과 칼을 손에 쥐었다. 잔이 군대의 지휘권을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가 군대의 명분과 사기를 북돋웠다. 사병들은 잔을 믿고 따랐으며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잔의 군대는 주저함 없이 생루 요새와 르투렐르 요새를 공격해서 탈환했다. 잔과 프랑스 군대의 기세에 눌린 영국군은 달아나기에 바빴고 그녀의 활약에 고무된 프랑스군은 영국군이 점령했던 요새들을 차례로 탈환했다. 오를레앙 전역이 수복되면서 샤를 7세는 결국 잔 다르크가 탈환한 랭스에서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1429년 7월 16일 랭스의 대성당에서 샤를 7세는 왕으로 선포되었으며, 잔은 대관식 내내 깃발을 들고 제단 옆에 서 있었다. 왕은 이날 잔 다르크의 아버지를 만나 그를 비롯한 동레미의 모든 농부에게 각종 조세를 영원히 면제하리라고 약속했다. 거리 곳곳에는 인파가 몰려들었고 어떤 여인들은 기도서와 성화를 들고나와서 잔이 한 번이라도 손을 대주기를 바랐다. 그해 감행된 파리 공격에서 적이 쏜 화살이 잔의 갑옷을 뚫고 정강이에 박혔고,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와 잔의 하얀 깃발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결국 실패로 돌아간 파리 전투는 결국 그녀의 운명에 불길한 징조가 되었다. 그녀는 이듬해 벌어진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 군대에게 포로로 잡혔다. 1430년 5월 23일 저녁 여섯 시쯤이었다. 이후 잔은 루앙에서 이듬해 1월 9일을 시작으로 5월 30일 화형당할 때까지 6개월간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그녀가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모습은 전투에서보다 더욱더 감동적이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9.22

    (57) 중세후기⑦
  • 백년전쟁<1>
    백년전쟁이란 1337년부터 1453년까지의 기간 동안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 약 100년 동안 지속됐던 전쟁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엔 아르마냑과 부르고뉴 사이에 일어났던 프랑스 내전(1410~1419)까지 포함된다. 흑사병과 함께 백년전쟁은 중세후기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를 계기로 유럽인들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구시대의 이념에서 벗어나 점차 개별 국가로서의 정체성과 국민 의식을 갖게 되었다. 백년전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왕위계승이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을 대제국으로 발돋움시켰던 카롤링 왕조 안에서 프랑스 지역의 왕이었던 루이 5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자, 강력한 귀족 가문의 후계자였던 위그 카페가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로써 중세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23년 4월 21일자 기사 참조). 왕은 제후들 가운데 선출되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국은 제후들이 다스리는 지역과 왕이 직접 다스리는 지역으로 구분되었다. 카페 왕조의 세 번째 주인공이었던 앙리 1세의 신하로서 노르망디 공국을 다스리던 기욤은 필리프 1세의 치하에서 잉글랜드를 정벌하여 윌리엄이란 이름으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프랑스 왕의 신하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애매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프랑스 왕조와 잉글랜드 왕조 사이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기욤이 죽은 뒤 잉글랜드 왕위는 여러 왕을 거쳐 헨리 2세에게로 이어졌고, 그가 노르망디 공국까지 지배하면서 카페 왕조의 여섯 번째 왕이었던 필립 2세와 극심한 대립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대립의 여파로 프랑스 왕조와 잉글랜드 왕조 사이에서 여러 차례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카페 왕조는 샤를 4세(1322~1328)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후계에 문제가 생겼다. 왕위를 누가 물려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두고 갈등이 일어났다. 유력한 후보는 두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한 명은 프랑스 내에 있던 친척, 곧 발루아의 필리프라 불리던 필리프 6세였고, 나머지 한 명은 잉글랜드에 있던 친척이자 잉글랜드 왕이기도 했던 에드워드 3세였다. 우여곡절 끝에 샤를의 유지를 따라 발루아의 필리프가 필리프 6세(1328~1350)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로서 카페 왕조가 끝나고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죽은 샤를 4세의 조카로서 가장 적법한 계승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지 못하자 크게 반발했다. 그러자 필리프 6세는 프랑스 왕의 신하이기도 한 잉글랜드 왕의 프랑스 내 영토(유럽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였던 아키텐의 가스코뉴)를 몰수해버리고 함대를 보내 잉글랜드를 위협했다. 상황이 극으로 치닫자 에드워드 3세 역시 반격을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 왕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잉글랜드가 경제권을 차지하고 있던 최대 양모 생산 지역 플랑드르를 잉글랜드의 영토로 선언하고, 몰수당한 가스코뉴 지역의 종주권을 주장하면서 1336년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감행했다. 초기 전쟁은 잉글랜드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다. 특히,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었던 일명 흑태자 에드워드의 활약이 대단했다. 하지만 흑태자와 에드워드 3세의 잇단 사망과 함께 시작된 내분으로 인해 잉글랜드는 전쟁에 몰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 무렵 프랑스 역시 왕실의 혼란으로 인한 내전이 일어나 결국 양국 간의 전쟁은 지루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잉글랜드는 헨리 5세에 이르러서야 내분을 극복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파죽지세로 오를레앙까지 밀고 들어가던 잉글랜드 군은 마지막 점령지를 남겨두고 대패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여인이 바로 잔 다르크였다.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 군에게 패하고 쫓겨가던 잉글랜드 군이 마지막 남은 영토 칼레를 확보하기 위하여 다른 지역들을 포기하면서(1475) 백년전쟁은 막을 내렸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8.25

    (56) 중세후기⑥
  • 흑사병
    ‘중세후기’란 유럽의 역사 가운데 14~15세기에 해당하지만 지난 몇 차례 그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동프랑크, 중프랑크, 서프랑크의 형성 과정을 자세히 살펴본 것은 이 시기 유럽에 셀 수 없이 많은 대소 제후와 자치 도시의 등장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함께 중세후기 상황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 14세기 중반 유럽에 창궐했던 흑사병이다. 1315년에서 1317년 사이에 일어났던 대기근과 마찬가지로 유럽을 강타한 두 번째 큰 자연재해인 흑사병은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페스트균에 의해 감염된 쥐의 피를 빨아먹은 벼룩이 사람에게 병을 옮기면서 번져갔다. 흑사병은 전염된 균이 일주일 정도 잠복기를 거친 후 주먹만 한 크기의 종기가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되어 결국 생명까지 앗아갔다. 유럽에서 흑사병이 제일 먼저 시작된 곳은 이슬람 제국과 맞닿아 있던 크림반도 페오도시아의 카파 항구로 알려져 있다. 1347년 이곳에서 일어난 이슬람 상인 살해 사건을 빌미로 몽골군이 쳐들어와 도시를 포위하게 되었는데 이때 병원균이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카파 항구는 동양으로부터 온 향료나 실크 등을 유럽으로 들여가는 중요 교역로였기 때문에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유럽은 연평균 기온이 하강하면서 대기근이 발생했고 이러한 영향으로 영양실조에 이른 사람들이 허다했다. 게다가 위생 개념이나 규정도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감기 같은 가벼운 질병들조차 당시 사람들에겐 심각한 중병으로 심화되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창궐한 흑사병은 사람들의 눈에 신이 내린 진노임이 틀림없었다. 그들에겐 오직 신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방법을 찾는 것이 최선의 치료책이었다. 곳곳에서 ‘채찍질 고행단’이 등장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흑사병 앞에서 사람들의 마비된 이성은 점차 광기로 변해갔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 사이에서 유대인들이 질병을 퍼뜨린다는 헛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이는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 증오로 이어졌다. 유대인 마을을 공격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수많은 유대인 학살이 발생했다. 한편, 천문학자들은 1341년 물병자리에 있는 세 행성인 토성과 목성, 화성이 일직선으로 겹친 천체이변의 결과로 흑사병이 창궐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희생자가 많아지면서 시신을 묻을 땅이 남지 않게 되자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6세는 론(Rhone)강을 축복하며 처리되지 않은 시신을 강물에 버리도록 했다. 이에 더하여 교황청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유럽 전역 가톨릭 신자들에게 로마를 순례하도록 강요했다. 당시 부활절에 약 120만 명, 성령강림절엔 약 100만 명의 순례자가 로마를 방문했는데 이는 오히려 흑사병을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당시 약 1억 2300만명이었던 유럽의 인구가 흑사병 이후 6500만명으로 감소함에 따라 노동력이 턱없이 부족해졌다. 당시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 절대적 위치에 있던 로마 가톨릭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더 나아가서 기존의 봉건제 사회 및 경제 구조의 변화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높아진 임금으로 인해 교회 소유의 영토에서 노동의무를 기피하는 성도들을 공개 파문하거나 엄벌에 처했다. 임종하는 신자들의 고해를 들어줄 사제의 수를 채우기 위해 자격이 모자란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서품하는 등 부패하고 부조리한 모순들이 드러났다. 결국 15세기까지 반복된 흑사병은 당시 로마 가톨릭의 다양한 모순을 심화시켜 종교개혁을 불가피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7.21

    (55) 중세후기⑤
  • 카롤링 왕조 이후의 동프랑크 왕국
    메르센조약(870년)으로 인해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으로 재편된 후에도 칼 대제의 손자이자 루드비히 1세의 막내아들이었던 서프랑크 왕국의 칼 2세(루드비히 1세의 손자 칼 2세와 구별할 것)는 호시탐탐 동프랑크 왕국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다. 그의 야욕이 멈춘 것은 결국 그의 죽음(877년)이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크왕국의 동·서 체제가 안정되어가면서 서프랑크 왕국은 중세 프랑스로, 동프랑크 왕국은 중세 독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프랑켄의 공작 콘라트(콘라트 1세)가 동프랑크 왕국의 황제가 됐지만(911년) 그는 제후들의 손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지배력은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프랑켄 공작령 안에 머무는 것이었으며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의 공작들보다도 약했다. 당시 동프랑크 왕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로타링기아의 제후들이 여전히 카롤링 왕조의 후손이었던 루이 3세(서프랑크 왕국)에게 투항하는 일도 벌어졌는데 이는 콘라트 1세의 정치적 위상이 어떠했음을 잘 보여준다. 설상가상으로 선왕이었던 루드비히 4세 시절부터 마자르족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콘라트 1세는 치세 기간 내내 불안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싸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콘라트 1세가 정치적 입지에서 주도권을 찾기 시작한 것은 슈바벤과 바이에른의 반란을 제압하면서부터였다. 911년 팔라틴의 백작 에르찬가르가 슈바벤의 새로운 제후가 되었고 바이에른에서도 아르눌프(899년 사망한 동프랑크 왕국의 왕 아르눌프와 구별할 것)가 제후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마자르족으로부터 큰 피해를 보자 무능한 왕을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콘라트 1세는 에르찬가르의 반란(913년)에 대항하여 그의 누이를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일단 화해를 꾀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그를 반역죄로 참수해버리고 부르하르트 2세를 슈바벤의 제후로 임명했다. 아르눌프의 반란에 대해서는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군사력을 통해 격파해버렸다(아르눌프는 도망쳤다). 이렇게 하여 중세 독일에서 콘라트 1세를 대적할 수 있는 세력은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1세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콘라트 1세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얻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죽음을 앞두게 되었고, 별다른 후계자를 두지 못했기 때문에 임종하면서 하인리히 1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내부적으로 독일의 강한 결속을 이루고 외부적으로도 마자르족을 격퇴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춘 인물은 하인리히 1세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독일에서 작센 왕조가 시작되었다. 하인리히 1세는 매 사냥 도중에 왕으로 선출되었는데 이 때문에 ‘매 사냥꾼 왕’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슈바벤 공작령과 바이에른 공작령은 그를 왕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이에 하인리히 1세는 그들에 대한 본격적인 토벌을 시작해서 921년에 두 지역의 제후들에게 항복을 받아내었다. 928년에는 서프랑크 왕국으로 편입되었던 로타링기아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1세의 직접적인 지배력은 작센 공작령에 한정되었으며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는 명목상의 권리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아직도 독일은 하나의 국가라기보다 제후들이 다스리는 지역의 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마자르족에 대해서 콘라트 1세는 926년 강화조약을 맺고 매년 공물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10년간의 평화를 얻어내었다. 그는 10년의 기간 동안 마자르족을 상대하기 위한 기병대를 양성한 후 933년 리아데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격퇴할 수 있었다(현재 튀링겐 지역). 이에 따라 하인리히 1세의 입지는 매우 탄탄해졌고 아들인 오토에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줄 수 있었다(936년). 이로써 칼 대제에게 주어졌던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는 독일 지역에 한정되는 지위로 굳어졌고, 신성로마제국의 역사는 독일의 역사로 좁혀진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6.23

    (54) 중세후기④
  • "동프랑크 왕국"
    칼 대제의 후계자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프랑크왕국은 베르뎅조약(843년-21년 6월 27일자 기사 참조)을 통해 중프랑크 왕국(이탈리아), 서프랑크 왕국(프랑스), 동프랑크 왕국(독일)으로 나뉘었다. 이 가운데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칼 대제의 손자이자 루드비히 1세의 셋째 아들)는 중프랑크 왕국의 로타르 1세가 아들 루드비히 2세(=이탈리아의 루드비히 2세)에게 물려준 영토와 황제의 지위를 탐내고 있었다. 때마침 이탈리아의 루드비히 2세가 적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875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의 아들 중에 카를로만이 후계자로 지목됐다. 아마도 남부 해안에서 이슬람 세력에게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던 교황청과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의 소원이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칼 2세(대머리 칼)가 먼저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점령하고 황제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루드비히 2세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그는 이미 피핀 2세(피핀 1세의 아들)가 차지하고 있던 아키텐과 로타르 2세(로타르 1세의 아들)가 다스리던 로타링기아의 서쪽 지역을 점령하면서(870년 메르센 조약-21년 7월 25일자 기사 참조) 서프랑크 왕국을 확장하고 있었다.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칼 2세와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사망하고 말았다(876년). 그가 죽은 뒤 동프랑크 왕국은 세 부분(바이에른, 작센, 슈바벤)으로 나뉘었고, 이후 서프랑크 왕국의 칼 2세가 사망하면서 황제의 지위는 동프랑크 왕국을 통일한 슈바벤의 칼 3세에게 돌아갔다. 당시 서프랑크 왕국은 칼 2세(877년 사망)의 뒤를 이어 즉위한 루이 2세가 죽고(879년) 그의 세 아들 중 두 아들(루이 3세와 샤를로망)에게 분할되어 상속되었으나 이들마저 사망하면서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들은 동프랑크 왕국의 칼 3세를 황제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당시 막내 샤를은 너무 어렸다). 루드비히 1세의 죽음 이후 분열되었던 프랑크 왕국이 다시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됐다. 칼 3세는 지나친 비만으로 각종 병환에 시달리는 한편 통치자로서도 무능력했다. 로마교황청의 보호자 역할을 하지 못했고, 바이킹족, 슬라브족, 마자르족과 같은 외적의 침입에도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제후들의 반란을 통해 아르눌프가 칼 3세를 폐위시키고 동프랑크 왕으로 즉위했다(887년). 한편, 서프랑크 왕국은 루드비히 1세의 외손자이자 파리 백작인 외드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칼 3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던 루이 2세의 아들 샤를이 왕위계승권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발생했고, 교황청의 지지를 얻어 샤를 3세로 즉위할 수 있었다. 동프랑크 왕국의 아르눌프는 샤를 3세의 즉위에 반대하면서 다시 한번 외드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결국 외드 측과 샤를 3세 측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샤를 3세가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를 차지하게 됐다. 이렇게 하여 서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 왕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게 됐다. 아르눌프가 죽은 후(899년) 루드비히 4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때 동프랑크 왕국은 마자르족이 지속적으로 국경을 넘어와 곳곳을 약탈하는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부 바이킹족과 함께 동프랑크 왕국의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했다. 마자르족의 침략이 극심해지고 루드비히 4세가 이를 막아내지 못하자 귀족들은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루드비히 4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911년)하면서 각 지방의 제후들은 차기 국왕 선출을 결정해야만 했다. 결국 프랑켄의 공작 콘라트가 새로운 왕이 됐다. 이렇게 하여 동프랑크 왕국은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고 이후 마인츠 대주교 및 쾰른 대주교와 프랑켄 지역의 공작, 작센 주의 공작, 슈바벤 주의 공장 그리고 바이에른 주의 공작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자신들의 국왕을 직접 선출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5.26

    (53) 중세후기③
  • “서프랑크 왕국”
    ‘중세후기’(Late Middle Ages)에 들어서 교황권의 권위는 추락했지만 세속 군주의 권위는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그러나 칼 대제의 죽음 이후 후계자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거세지면서 절대 권위였던 세속 군주의 지위는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칼 대제의 후계자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던 프랑크 왕국은 베르뎅조약(843년, 2021년 6월 27일자 기사 참조)을 통해 중프랑크 왕국(이탈리아), 서프랑크 왕국(프랑스), 동프랑크 왕국(독일)으로 나뉘었으며, 결국 메르센조약(870년, 2021년 7월 25일자 기사 참조)을 통해 동프랑크 왕국과 서프랑크 왕국으로 재편되었다. 이 가운데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 왕조는 루이 5세(987년 사망)에 이르러 끝나고 파리의 백작이자 대장군이었던 위그 카페가 왕에 선출(987년)되면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참고로 역사가들은 바로 이 카페 왕조로부터 본격적인 프랑스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이 당시 서프랑크 왕국은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제후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노르망디 공국이나 가스코뉴 공국과 같이 공작들이 다스리는 공작령이 있었고, 플랑드르 백국, 툴루즈 백국과 같이 백작들이 다스리는 백작령이 있었다. 왕이 직접 다스리는 직할령은 파리와 오를레앙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러한 체제 아래에서 노르망디 공국의 기욤 2세는 바다를 건너 잉글랜드를 침공했다(1066년).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윌리엄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이후부터 노르망디 공국의 제후는 잉글랜드의 왕이었지만 프랑스의 봉신이기도 한 어정쩡한 상황이 되었다. 서프랑크 제국 내 수많은 제후령은 서로 병합되거나 나눠지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던 중 12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앙주 백국의 헨리 2세는 노르망디 공국을 복속(1144년)하고 잉글랜드의 왕위까지 차지(1154년)했으며, 정략결혼을 통해 아키텐 공국(1152년)과 브르타뉴 공국(1166년)까지 획득하여 거의 프랑스의 절반을 차지하게 되면서 프랑스 왕의 신하 역할을 거부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이러한 서프랑크 왕국 내 왕과 봉건 제후들 사이의 권력 구도에 변화가 생긴 것은 십자군 전쟁 때문이었다. 당시 왕이나 제후들은 십자군 지휘관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돌아오지 못하거나 귀환이 지연되는 상황이 생기면서 다른 제후의 영토를 빼앗아 권력을 확장하는 기회로 삼으려 했다. 잉글랜드의 왕 헨리가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리처드(훗날 사자왕으로 불리움)는 프랑스 노르망디 공국의 제후로서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다.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필리프 2세 역시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지만 서둘러 다시 프랑스로 귀환했다. 필리프 2세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 출정한 리처드의 귀환이 늦어지자 그가 다스리고 있던 제국령을 공격하여 흡수해버렸다. 뒤늦게 귀환한 리처드는 빼앗긴 프랑스 내 영토를 되찾기 위해 필리프 2세를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지만 전사하고 말았다(1199년). 이후 리처드의 동생 존은 형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잉글랜드, 신성로마제국, 플랑드르, 불로뉴와 함께 연합군을 조직했으나, 부빈 전투에서 필리프 2세의 프랑스군에게 패하면서 결국 잉글랜드와 아키텐, 그리고 노르망디의 일부를 제외한 모든 리처드의 영토가 필리프 2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지금의 프랑스와 영국이 포함된 서프랑크 왕국 내 이러한 정치 상황은 훗날 왕위계승 문제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100년 이상 지속된 백년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부원장)
  • 2023.04.21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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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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