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86) 종교개혁㉖
  •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 양상의 변화 개혁은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며 진행된다. 독일의 작은 대학 도시 비텐베르크는 그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1521년, 루터는 선제후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 머물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가 쓴 두 번째 글은 『수도사 서원론』이라는 글이었다. 이 글에서 루터는 수도사들이 평생 지키겠다고 맹세한 가난, 순결, 복종이 과연 복음적인지 질문했다. 그의 결론은 분명했다. 그리스도인은 제도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양심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생각은 곧 비텐베르크의 현실을 바꾸기 시작했다. 일부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떠났고 수도사도 결혼할 수 있는지 공개적으로 논의됐다. 루터 자신은 여전히 수도복을 입고 있었지만 “나는 수도사이면서 동시에 수도사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앙의 중심이 점차 외형이 아니라 마음과 양심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524년 10월 4일 루터는 수도복을 벗었다. 루터가 자리를 비운 사이 비텐베르크에서는 예배 개혁이 빠르게 진행됐다. 사제들이 회중 없이 죽은 자를 위해 집행하던 개인미사는 폐지됐다. 공적을 쌓기 위해 드리는 희생 제사로서의 미사도 폐지되었으며, 평신도에게도 성찬의 잔이 주어졌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래 기다린 변화였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럽고 낯선 일이었다. 문제는 변화의 방향보다 속도였다. 충분한 설명과 합의 없이 제도가 먼저 바뀌자 도시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1522년 초에는 상황이 더욱 거칠어졌다. 과격론자들은 교회 안의 성상들을 부수고 예배형식을 일방적으로 바꿨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강하게 밀어붙여도 된다”는 생각이 힘을 얻었다. 이 무렵 ‘쯔비카우의 예언자들’이라 불린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비텐베르크의 혼란은 더욱 가중됐다. 이들은 외적인 계시로서 성경보다 성령의 직접적인 내적 계시를 강조하며 곧 세상이 완전히 바뀔 것이라고 외쳤다. 개혁은 점점 말씀에서 멀어지고 열정과 흥분에 치우치면서 위험한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비텐베르크의 사람들은 루터를 다시 불렀다. 그리하여 1522년 3월 루터는 바르트부르크를 떠나 비텐베르크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온 후 행한 첫 설교에서 분명히 말한다. “개혁은 강요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믿음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는 급하게 바뀐 많은 것들을 잠시 멈췄다. 미사는 당분간 기존의 방식으로 드렸고 성찬의 변화도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설교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히 준비시키는 길을 택했다. 이것이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루터가 선택한 길은 빠른 개혁이 아니라 느린 개혁이었다. 그는 형식을 바꾸는 것보다,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자기 말로 고백하게 되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확신에서 나온 작업이 바로 독일어 성서 번역이다. 1522년에 출간된 독일어 신약성서는 복음을 평범한 시민의 언어로 옮겨 놓았다. 비텐베르크의 개혁은 이제 한 도시의 경계선을 넘어 독일 사회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은 단순한 개혁의 성공 사례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 빠른 개혁이 어떤 혼란을 낳는지, 그리고 기다릴 줄 아는 개혁이 어떻게 성공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6.01.23

    (85) 종교개혁㉕
  • “어떤 설교가 복음적 설교인가?”(루터의 기준) 1521년 5월 4일부터 이듬해 3월 3일까지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에 머물렀다. 이곳은 루터에게 ‘밧모섬’과 같은 장소였다. 그는 이곳에서 여러 글을 집필했고 이는 이후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비텐베르크에서는 루터의 부재 가운데 칼슈타트와 멜란히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원 출신 동료들을 중심으로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개혁 방식의 차이로 인해 혼란과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루터는 이러한 상황을 방관하지 않고, 글을 통해 개혁을 바로잡고자 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종교개혁이 난항을 겪는 근본 원인을 당시 설교자들의 설교에서 찾았다. 설교자들의 신학적 수준이 제각각이었고 성경 해석 역시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체류 동안 『교회 설교집(Church-Postil)』을 집필했다. 이 설교집은 설교자들에게는 복음적 설교의 기준을 제시하고 동시에 평신도들도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작성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제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혁신적인 시도였다. 『교회 설교집』에서 루터가 제시한 설교의 기준은 분명하다. ① 루터에게 설교란 성경에 대해 설명하는 행위가 아니라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는 시간이었다. 따라서 복음적 설교는 지식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말씀하시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② 루터의 설교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놓여 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기에 설교의 결론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가리켜야 한다는 것이다. ③ 이를 위해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명확히 구별했다. 율법은 인간의 죄와 한계를 드러내지만 복음은 무너진 인간을 다시 살린다. 이 둘이 혼동될 때 설교는 절망을 낳거나 값싼 위로로 전락한다. 따라서 루터는 율법을 통해 인간의 절망적인 실존을 드러낸 후,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생명과 자유의 복음으로 나아갔다. ④ 루터가 설교에서 강조하는 또 다른 기준은 ‘십자가 신학’이었다. 그는 인간의 공로와 종교적 성취를 강조하는 설교를 ‘영광의 신학’이라 비판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공과 강함 속에서가 아니라 약함과 고난, 곧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의 신학 위에 선 설교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위대하고 강하신 분이다. 열심히 믿으면 복 받는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성공한다, 더 거룩해져야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라고 말하지만 십자가의 신학 위에 선 설교자는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아무런 공로를 내세울 수 없을 때, 의지할 것이 전혀 없을 때 하나님은 절대 희망이요 절대 소망이 되신다! 너는 약해도 괜찮다. 망가진 상태로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다. 구원은 너의 힘과 능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일이다!”라고 말한다. ⑤ 흥미로운 점은 루터가 설교의 능력과 결과를 설교자에게서 철저히 분리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설교자는 사람들의 귀에 말씀을 전할 수 있을 뿐, 그들의 마음에 믿음을 넣을 수는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믿음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생겨나며, 설교자는 그 결과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터의 설교가 삶과 무관한 신학적 이론에 머무는 것은 아니었다. ⑥ 오히려 그는 복음적 설교가 참된 믿음을 낳고, 그 참된 믿음은 이웃을 향한 책임과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보았다. 이렇듯 루터에게 『교회 설교집』은 단순한 설교 모음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개혁이 폭력이나 급진적 행동이 아니라 참된 말씀의 선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주는 루터의 설교 신학이었다. 바르트부르크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집필된 이 설교집은 이후 비텐베르크의 혼란을 정리하고, 개신교 설교의 기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루터의 개혁은 제도보다 앞서 설교의 개혁이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12.26

    (84) 종교개혁㉔
  • 루터와 프리드리히 선제후 루터를 호위하기 위해 동행하던 황제의 전령과 작센의 의원들이 돌아간 후, 튀링엔 숲의 알텐슈타인 성 근처 계곡에 이르렀을 때, 루터는 무장한 기사들에 의해 납치됐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 은둔하게 될지는 알지 못했던 루터는 신약성경과 히브리어 성경만 손에 쥔 채 마차에서 끌어 내려져 손이 묶인 상태로 걸어가야 했다. 밤 11시쯤 되어서 도착한 곳은, 이후 루터가 융커 외르크라는 가명으로 약 10개월을 지내게 될 바르트부르크 성이었다. 작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자신의 영지에 속한 바르트부르크에 루터가 안전하게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그는 성유물을 수집하고 미사를 꾸준히 드리는 인물이었다. 그가 모은 성유물은 1만 9000점이 넘었고, 예수의 가시면류관에서 떨어진 가시 조각과 성모 마리아의 모친 성 안나의 엄지손가락 뼈 같은 귀중한 유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지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사순절마다 수도원에서 지내고 성지를 순례했으며, 교회 음악을 사랑하고 성당과 수도원 건립을 후원했다. 또한 종교 서적을 읽고, 에라스무스와 아벤티스 등 당대 유명한 지식인들과 신앙을 주제로 서신을 나누었으며, 이들과의 인연을 통해 루터와도 연결됐다. 프리드리히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영향력 있는 군주였다. 1486년부터 1525년까지 작센을 통치하면서 제국의회에 30차례 넘게 참석했고, 막시밀리안 황제의 조언자로 활동했다. 이러한 정치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개혁의 운명을 짊어진 루터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1518년 교황청이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자 프리드리히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아욱스부르크에서 교황청 사절과 면담하도록 조정했다. 끝까지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 루터를 인도해달라는 교황의 요구를 거절하며, 루터가 독일 내에서 재판받아야 한다고 황제를 설득했다. 비록 루터는 1521년에 파문되었지만,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미리 확보해 둔 안전통행증을 활용해 루터가 무사히 보름스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왔다. 튀링엔 숲의 납치 작전 역시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그가 세운 계획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리드리히와 루터는 직접적으로 소통한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연락은 선제후의 보좌 신부이자 루터의 친구였던 슈팔라틴을 통해 이루어졌다. 슈팔라틴의 기록에 따르면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분명 너그럽게 사랑하고 아꼈으나” 정작 루터의 주장은 항상 선제후를 괴롭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522년 루터의 책 한 권을 가리키며 프리드리히는 “마음에 드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저 책을 위해 내가 이렇게 고생한단 말이지”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루터의 개혁을 가로막지 않았다. 프리드리히는 루터의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라, 어떠한 난관 속에서도 개혁의 가능성을 지켜낸 보호자였다. 1525년 종려주일에 프리드리히는 토르가우 인근 자신의 성에서 처음으로 루터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렸다. 2주 후에는 슈팔라틴이 집례한 성찬식에서 처음으로 빵과 포도주 모두를 받았다. 로마가 1415년에 평신도에게 잔을 주는 것을 금지한 뒤로 축성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사제만의 특권이었기에, 이는 그가 루터의 개혁신앙을 매우 신뢰했음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프리드리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통적 경건함과 개혁적 신앙 사이에서 참된 믿음을 찾으려 노력한 군주로 생을 마쳤다. 평범한 출신에 불과했던 한 수도사의 비범함과 열정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지했던 그의 혜안과 결단 덕분에,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역사는 실현될 수 있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11.28

    (83) 종교개혁㉓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④ 이튿날인 4월 19일 금요일, 제국의회 의원들을 소집한 황제는 자신의 의견을 발표했다. 그의 말은 독일어로 통역되었는데 매우 굳어진 얼굴과 강한 어조로 루터의 주장에 강하게 반대하는 결연하고도 확신에 찬 연설이었다. “단 한 명의 수도사가 1000년에 걸쳐 이어져 왔으며 지금도 존중되는 기독교에 대해 지금까지의 모든 기독교인이 착각한 것이며, 지금도 그렇다고 말하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 틀림없다!” 칼 5세는 회의에 참석한 제후들의 책임을 상기시키며 계속 말했다. “황제인 저와 고귀하고 위대한 독일 제후 여러분이 지금 이단은 물론, 이단으로 생각되거나 기독교를 변질되게 만드는 사상이 민족의 정신에 스며드는 일을 막지 못한다면 심각한 불명예일 것이며,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영원히 오명으로 남을 것이다.” 그는 추가 심문을 거부하며 결론을 내렸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를 배척하고 그를 악명 높은 이단으로 고소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여러분도 이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바른 기독교인인 것을 보여주고, 나에게 약속했듯이 신중한 결정을 내려주기 바란다!” 다음 날 제국의회 의원들은 불안에 휩싸였다. 밤사이에 알 수 없는 무리가 시청과 주교좌성당, 그리고 시내의 여러 문에 농민 반란을 암시하는 벽보를 붙였기 때문이었다. “분트슈! 분트슈! 분트슈!”라고 쓰인 벽보는 농민 봉기를 상징하는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영주에 대한 봉기를 일으키며 기사들이 신는 화려한 부츠와 대비되는 투박한 끈이 묶인 신발(분트슈)을 깃발에 그려 넣곤 했기 때문이었다. 400명의 기사와 8000명의 민중이 루터를 위해 싸울 태세였다. 황제의 침실에서도 협박 편지가 발견되었다. 편지에는 “꼬마가 왕인 나라에는 고통뿐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루터를 반대했던 마인츠의 대주교, 선제후이자 제국 최고의 영주인 알브레히트는 이러한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잔뜩 겁을 먹고 황제에게 루터의 청문회를 다시 열도록 제안했다. 황제는 그럴 뜻이 없었지만 강한 권력을 지닌 대주교의 제안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흘간 더 루터를 심문하고 철회를 유도할 것을 허락했다. 4월 24일 수요일 아침 6시부터 다시 루터의 청문회가 열렸다. 트리어의 선제후이자 대주교인 리하르트 폰 그라이펜클라우가 심리를 주재했다. 청문회 분위기는 심문이라기보다 좌담에 가까웠다. 루터는 훗날 “그렇게 부드럽고 정중하게 토론하는 분위기는 처음 경험했다”라고 고백했다. 다음 날인 25일 목요일에 계속된 청문회 역시,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루터의 완고함 때문에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결국 루터는 황제가 안전을 보증하는 3주 이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루터는 친구인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 1세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이곳에선 그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지 않았네. 이 책이 너의 책인가? 그렇습니다. 이 책들의 내용을 취소하겠는가? 아닙니다. 알겠다, 물러가라! 아, 독일인은 얼마나 눈이 먼 민족인가, 어리석게 행동하면서 저 로마인들(교황과 교황의 지지자들)이 비겁하게 우리를 조롱하고 기만하도록 놔두고 있다니!” 4월 26일 금요일 오전 9시경 루터 일행은 길을 나섰다. 황제의 안전통행증이 있었지만 루터가 돌아가는 길에 사람들에게 설교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효력이 있었다. 그러나 5월 1일 수요일에 루터는 헤르스펠트에 도착한 후 이튿날 새벽 그곳 수도원에서 설교함으로써 황제의 안전통행증은 효력을 상실했다. 다음 날 아이제나흐에서도 설교했다. 황제의 지시에 따르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한 셈이었다. 루터에게 있어서 성경의 진리를 전하는 일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일보다 더욱 소중한 일이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10.24

    (82) 종교개혁㉒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③ 1521년 4월 18일 오후 4시 루터는 두 번째 심문을 받기 위해 의회장에 나왔다. 그곳은 이미 심문 광경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황제는 제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므로 루터는 사람들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두 시간 정도 지난 후 루터는 심문이 진행될 장소로 안내되었다. 전날 심문 받은 공간보다 훨씬 큰 홀이었지만 이내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 사람들의 열기로 홀은 더웠고 횃불이 방을 비추고 있었다. 루터는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전날과 달리 결연한 표정이었다. 트리어의 대주교인 엑켄은 첫째 날과 마찬가지로 루터에게 그의 책들을 수정하거나 철회할 것인지 물었다. 루터는 주저함 없이 답변했다. “내가 쓴 책들은 세 종류입니다. 신앙의 기본이 되는 설교들, 그리고 성경 해석들, 마지막으로 교황을 반박하는 글이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관한 논쟁입니다. 처음 두 가지 종류의 책들은 그 내용을 철회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세 번째 책의 경우는 이를 철회할 경우 불의와 불경건을 옹호하는 꼴이 됩니다. 성경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자신의 명백한 오류가 드러난다면 기꺼이 저 스스로 그 책들을 불에 던지겠습니다.” 약 10분간 이어진 루터의 답변은 전부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황제는 모국어처럼 사용했던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외에도 플랑드르어(현재 벨기에), 이탈리아어 그리고 독일어를 구사할 줄 알았지만 정확한 뉘앙스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라틴어로 다시 대답할 것을 요구했다. 루터는 동일한 내용을 다시 한번 라틴어로 대답했고, 이내 제후들과 시의회원들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대체 무슨 소리인가? 철회하겠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철회할 수 없다는 이야기인가?” 제후들은 심문관이었던 엑켄에게 명확한 대답을 루터에게 받아내라고 지시했다. “마틴! 당신은 확실하고 분명한 신앙으로 믿어야 할 것에 관해 토론하려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있소!” 엑켄은 정색하며 루터에게 주의를 준 뒤 다시 한번 그의 주장들을 철회할 것인지, 아닌지 ‘뿔 없는 대답(non cornutum responsum, 꾸밈없는 직설적인 대답)’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루터는 더욱 분명하게, 모든 사람이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황제 폐하와 여러분들이 원하신다면 뿔도 이빨도 없는 소박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내 양심은 내가 인용한 성경 말씀들에 의해 사로잡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습니다. 사실 나는 교황이나 공의회만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주 오류를 범하고 모순된 말까지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경의 증언과 명백한 이성적인 이유에 의해서 설득되지 않는 한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안전하지 않으며 구원마저 위태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청중들 사이에 당혹감이 퍼졌다. 루터의 대답을 듣던 황제는 청문회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루터는 의회장을 빠져나갔다. 의사당 밖에는 이미 심문 내용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있었고, 그들은 루터를 향해 환호했다. 숙소에 도착한 루터는 승리한 사람처럼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통과했다! 내가 통과했다!” 심문 과정에서 루터는 칼 5세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비텐베르크라는 작은 도시의 수도사이자 신학 교수의 흔들림 없는 확신을 목격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는 그날 저녁 책상에 앉아 프랑스어로 진지하게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써 내려간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09.26

    (81) 종교개혁㉑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② 비텐베르크 시는 루터를 위해 금세공 장인이 만든 마차를 제공하고 추위와 비바람을 막기 위한 지붕을 달아주었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여행 경비로 20굴덴을 지원했으며 동료 수도사와 교수 그리고 친구들이 루터와 길을 나섰다. 루터 일행이 라이프치히와 바이마르를 지나 에어푸르트에 도착했을 때 도시 입구에는 에어푸르트 대학 총장이 기사 40명과 함께 루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엄한 행렬이 루터를 호위하며 성 안으로 안내했다. 이튿날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대성당에 몰려든 군중 앞에 서서 설교했다. 인파의 무게로 발코니가 무너지려고 하자 사람들이 창문을 깨고 대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루터는 거의 모든 도시에서 큰 환영을 받았으나 심적 갈등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여행 내내 스트레스로 인한 심한 복통과 변비에 시달렸으며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한편 보름스는 이미 연초부터 제국의회를 위해 1만명이 넘는 인파로 들끓고 있었다. 80명의 제후와 130명의 귀족 그리고 여러 나라의 왕이나 군주가 파견한 사절단이 모여들었고, 여기에 평의원, 성직자, 기사, 음악가, 하인, 광대들까지 몰려들었다. 인구가 7000명 남짓이던 도시는 갑작스러운 인구 폭증으로 큰 혼란에 빠졌다. 몇 달 전부터 이미 숙소가 동이 났고 의회와 총회를 열 장소와 사무국 및 법정을 마련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루터의 소환 소식은 더욱 큰 기대를 모았다. 마침내 4월 16일 오전 10시 루터의 도착을 알리는 대성당 나팔수의 신호가 울리자 사람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2000명가량의 인파가 몰려들어 거리는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황제의 전령 슈투름이 선두에 섰고 루터의 마차가 뒤따랐다. 루터는 요한 기사단 건물을 숙소로 배정받았으나 두 명의 작센 관료와 함께 한 방을 사용해야 했다. 그럼에도 교회 개혁의 주창자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한 헤센 지방의 귀족들, 학자들, 그리고 평의원들이 잇달아 그를 찾아왔다. 4월 17일 수요일 루터는 황제와 제국의회 앞에서 심문받기 위해 오후 4시까지 의회에 출두해야 했다. 황제의 전령과 총사령관이 루터를 데리러 왔다. 그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의 수도복을 입고 정수리를 말끔하게 깎은 차림으로 회의장에 들어섰다. 작고 초라한 방 안에는 젊은 황제 칼 5세가 앉아 있었다. 제국 통치자와 교회의 반항아가 처음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루터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황제는 교황의 특사 알레안더를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저자가 나를 이단으로 만드는 일은 없을 걸세!” 루터는 논쟁을 기대했지만 트리어 대주교의 신하 요한 폰 데어 엑켄이 진행한 심문은 예상과 크게 달랐다. 엑켄은 루터에게 탁자에 쌓아놓은 스무 권 가량의 책들을 가리키며 그것이 루터의 저술이 맞는지 또한 그 내용을 철회할 것인지 물었다. 질문은 라틴어와 독일어로 두 차례 반복됐다. 루터는 먼저 독일어로 이어 라틴어로 자신이 그 책들을 썼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철회 여부에 관한 즉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의 눈빛은 불안했고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확고하고 담대한 대답을 기대하던 많은 이들의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의회는 황제와 상의한 끝에 루터에게 하루의 시간을 주되 반드시 서면이 아닌 구두로 답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그렇게 루터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08.29

    (80) 종교개혁⑳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① “인쇄술은 이를 통해 하나님이 복음의 일을 전파시키기 위한 최고의 그리고 최근의 선물이다. 그것은 세상의 멸망에 앞선 마지막 불꽃이다.” 탁상담화에 남아 있는 루터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종교개혁 사상의 전파에 있어서 당시 인쇄술의 발달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인쇄술은 사실 동양에서 개발되었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곳은 유럽이었다. 1454년경 구텐베르크가 독일 마인츠에 첫 인쇄소를 세운 이후 유럽 전역으로 인쇄 기술이 확산됐다. 1480년에는 유럽 전역에 121개의 인쇄소가 운영됐고, 1500년에는 252개로 늘어났으며 그중 62개는 독일에 있었다. 1500년까지 252개 인쇄소에서 2만7000여 종의 작품이 약 2000만 부가 인쇄됐고, 그 가운데 약 3분의 1은 독일에서 생산됐다. 독일은 인쇄술의 중심지였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루터의 논문들도 몇 달 만에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었다. 루터의 사상이 빠르게 확산되자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이를 저지하고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에게 기롤라모 알레안더를 포함한 추기경 사절단을 파견했다. 교황은 루터의 개혁 사상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고 먼 친척이자 정치적 동맹이었던 칼 5세에게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당시 칼 5세는 1521년 1월 23일부터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해 독일 내 주요 사안을 다루고 있었는데 루터 문제에 대해서는 국외 추방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작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한 여러 제후들은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2023년 12월 29일자 기사 참조). 교황의 사절들과 이를 지지하던 제후들은 루터 문제를 조용히 마무리하길 원했다. 이미 루터에 대한 파문 교서가 공포됐기 때문에(1521년 4월 25일자 기사 참조), 교황의 판단을 재검토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을 꺼렸던 것이다. 반면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민중의 지지를 의식했다. 루터를 성급히 처벌할 경우 민심의 반발을 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논쟁이 격화된 나머지 루터를 반대하던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킴 선제후와 지지하던 프리드리히 선제후 사이에 멱살잡이까지 벌어졌고 평소 조용했던 팔츠의 루드비히 선제후도 소리를 치며 루터를 옹호하고 나섰다. 결국 황제는 루터를 제국의회에 직접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토론은 생략한 채 루터에게 이단적인 주장을 철회할 것인지 여부만 묻는 방식으로 심문을 진행하고자 했다. 의회는 루터가 일부 주장을 철회한다면 다른 사안에 대한 답변도 들을 수 있겠지만 끝내 입장을 고수한다면 칙령을 발표해 루터의 법적 권리를 박탈하는 데 합의하기로 했다. 황제는 의회의 제안을 수용하여 루터에게 안전통행증과 함께 초청장을 보냈다. 제국의회의 회원들에게서 나오 는 세금을 크게 의존하고 있던 황제는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황제는 루터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국 전역에 루터의 책을 몰수하고 새로운 인쇄물을 찍어내는 것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보름스에서 청문회를 열어 루터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교황이 루터에게 내린 일방적인 판결을 지지한 셈이었다. 황제의 초청장은 3월 6일 발송됐고 같은 달 15일이 돼서야 루터에게 전달됐다. 루터는 이제 정말 보름스로 출두해야 했다. 정작 보름스에서는 루터가 진짜 오면 어떡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루터는 제국의 대중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체 없이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07.25

    (79) 종교개혁⑲
  • 『크리스천의 자유』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가운데 마지막은 그가 1520년 가을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크리스천의 자유』이다. 이 글은 단순히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음이 한 사람의 마음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공개서한 형식으로 작성되었고 라틴어와 독일어로 동시에 발표되었다. 루터는 인간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며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행위, 자유와 순종의 관계를 설명한다. 루터는 먼저 영혼의 자유 곧 인간의 내적인 자유에 대해 말한다. 그는 외적인 조건이나 종교적 행위만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사람은 비로소 의롭고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라는 말씀에 근거한 이해이다. 루터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성도가 마치 신랑과 신부처럼 하나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께 속한 생명과 구원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죄와 죽음은 그리스도께 전가되어 십자가에서 소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과 믿음이 주는 참된 자유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믿음만 있으면 되는데, 굳이 선행은 왜 필요한가?” 루터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답한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내적으로는 어떤 사람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완전한 자유인이지만 동시에 그 자유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은 자연스럽게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코 게으를 수 없으며,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고 선한 일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선행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사람이 감사와 사랑으로 드리는 삶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올려드리고 사랑으로 이웃을 향해 자신을 낮추는 삶.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자유를 얻은 크리스천의 삶이다.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딤전 1:9)라는 바울의 말처럼 루터는 이러한 자유를 통해 크리스천이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며 당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촉구했다. 다음은 『크리스천의 자유』 중 한 단락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크리스천의 진정한 자유와 섬김의 의미를 곱씹어 보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완전히 섬기는 종이며 누구에게나 종이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서로 잘 조화된다. 이 두 명제는 모두 바울 자신이 말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9절에서 “나는 자유롭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을 만인의 종으로 만들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로마서 13장 8절에서는 “너희는 서로 간에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라고 말한다. 사랑이란 그 본질상 기꺼이 섬기고자 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그 대상에 대하여 기꺼이 그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러하시다. 그는 만물의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에게서 나셨으며 율법에 굴복하셨다(갈 4:4). 그는 자유자이며 동시에 종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시며, 동시에 종의 형상으로 계신다(빌 2:6f). 김형건 목사(국제신학연구원 담당)
  • 2025.06.27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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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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