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변화
김화자 권사(구로대교구) - 삶의 고비마다 살리신 하나님 찬양
  • 나는 2019년 백내장 수술을 받은 뒤 눈이 빠질 듯한 큰 통증을 겪었다. 다른 병원을 찾았더니 염증이라고 했고 치료를 받았지만 시야는 점점 흐려졌다. 마침 그 무렵 신년축복새벽기도회에서 이영훈 목사님이 성경 읽기를 권유하셨다. 나도 말씀에 순종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지만 큰 글씨 성경을 봐도 글씨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두 차례 염증 치료 후 안과에서는 “이제 더는 오지 마세요. 눈이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사셔야 합니다”라는 냉정한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집으로 돌아와 펑펑 울며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 눈이 안 보이면 혼자 어떻게 살아요. 부평에서 여의도까지 교회를 어떻게 가요.’ 나는 그날 이후로 매 순간 ‘예수님 도와 주세요’를 외쳤다. 그리고 믿음으로 내과 약을 모두 끊고 석 달에 15만원씩 들던 약값을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렸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2021년 7월 1일 식탁 위에 있던 성경 말씀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작은 글씨부터 큰 글씨까지 모두 보였다. 2년 반 만에 하나님께서 내 시력을 회복시켜 주셔서 나는 4회 성경 통독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치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7년 전에도 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기적을 체험했다. 양쪽 무릎 관절염 수술 후 재활치료를 받던 중 치료사가 “배에 달걀만한 덩어리가 만져진다”고 했다. 불안한 마음에 대학병원으로 가기 전, 나는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찾아가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때 가슴에 막혀 있던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기쁨이 밀려왔고, 나는 옆에 있던 집사님께 ‘나 치료받았어요!’라고 믿음의 고백을 했다. 이후 대학병원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난소암 말기 투명세포암과 췌장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수술을 시작했는데 상태가 심각해 보호자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순간, 남편이 오지 않아 결국 난소와 나팔관, 자궁만 제거하고 다른 부위는 수술하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상황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그 후 항암을 하게 됐다. 교구 성도들이 나를 위해 매일 중보기도를 해줬고 조용기 목사님께 2번의 기도를 받았다. 교회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 덕분에 평안하게 항암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6차 치료를 마친 뒤 주치의는 “세 차례 더 하면 좋겠다. 아주머니는 하늘이 도와서 이 자리에 있는 거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더욱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치료해 주시겠구나.’ 감사의 기도를 멈추지 않고 9차 항암까지 마쳤다. 재수술을 받았을 때 의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암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히 깨끗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 나를 살려주신 치료의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린다. 정리=김주영 기자
  • 2025.11.14 / 김주영 기자

    정금자 권사(마포1대교구) - 고난 중에도 감사할 일 주시는 하나님
  • 코로나 시기 개업했지만 식당 성업 중 신수동으로 이사를 온 뒤 남편은 맛집을 찾아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몇 달을 다니던 남편은 맛집이 아니라 빈 가게를 발견했다. 남편은 먹을 만한 곳이 없다면서 식당을 차려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남편은 공실로 2년 넘게 있던 자리를 임대계약 했다. 그리고 식당 개업 3일 전에야 나에게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황당한데 심지어 남편은 음식을 할 줄 몰라서 요리는 내 몫이라고 했다. 결혼 후 전업주부로만 살아온 내가 갑자기 남편의 결단력 때문에 식당을 하게 됐다. 화만 내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 얼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식당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하나님께서 마음에 응답을 주셨다. “네가 먹는 것처럼 식구들이 먹는 음식 하듯이 하면 된다”는 응답에 힘입어 식당을 열었다. 식당에 온 손님들이 “집에서 먹는 거랑 똑같다”고 말할 때 정말 기쁘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아버지는 음식을 많이 해서 나눠주는 것을 평생 즐겨 하셨는데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도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하는 것을 좋아한다. 지금도 5년 전 개업 날을 잊을 수가 없다. 정부에서 코로나 2.5단계를 발표한 날이기 때문이다. 거리두기와 인원이 제한되는 상황이라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사람들이 “남들은 다 문을 닫는 세상에 당신들은 왜 식당을 여느냐”고 모두 한마디씩 할 정도였다. 코로나 시기에 개업했지만 한 번도 어려웠던 적이 없다. 하나님이 계속 손님들을 보내주는 느낌이다. 입소문이 나서 점점 장사가 잘됐다. 해병대 출신인 남편의 친구들이 포항에 있어서 산지직송으로 신선한 해산물을 받아 손님상에 올린다. 올해 4월 메뉴판을 바꾸기 위해서 기존 메뉴판을 올라가서 떼다가 메뉴판이 갑자기 확 뜯어지면서 다리를 다쳤다. 왼쪽 다리에 금이 갔다. 나는 내가 건강하다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골다공증 위험이 있었다. 그대로 살았다면 모르고 방치했을 텐데 이렇게 발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또 남편과 둘이 하는 식당이라 가게 문을 한 달 넘게 닫았는데도 영업을 재개하자마자 다시 찾아 주신 분들, 투병 중에도 계속 기다려 주시고 빨리 문을 열었으면 좋겠다고 연락을 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하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 많기 때문에 주일에는 여선교회에서 대성전 안내 봉사를 하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날마다 좋은 일이 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감사할 것을 항상 주신다. 앞으로도 좋으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받은 은혜를 많은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고 싶다. 정리=복순희 기자
  • 2025.11.07 / 복순희 기자

    황지우 학생 (교회학교) - “세상에서 복음을 노래하고 싶어요”
  • 장래의 불안을 믿음으로 바꿔주신 하나님께 감사 요즘 주변 친구들을 보면 외로움과 불안으로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방황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뒤 그분만이 절망 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깨달았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유명 태권도 단체 소속으로 선수 생활을 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태권도를 했지만 조직적인 훈련과 엄격한 규율 속에서 즐거움은 사라지고 두려움과 막막함이 쌓여갔다. 중학교 2학년이 될 무렵 태권도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평생을 해오던 운동을 그만두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밤마다 하나님께 “하나님, 정말 제 인생에 계획이 있으신가요?”라고 물었다. 하나님께서 어린 시절 내가 노래를 좋아했었던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나는 부모님께 이 마음을 털어놓았고 그때부터 실용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해 기초도 없고 음정도 불안했지만 하나님이 주신 확신 하나로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기도하며 연습했고 마침내 고양예술고등학교 실용음악과에 합격했다. 이 합격은 나에게 있어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이끌어주시겠다는 첫 기적이었다. 예고에 진학한 후 나는 생각보다 하나님을 모르는 친구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실기나 시험 전마다 기도로 준비했는데 내 모습을 보고 한 친구가 교회에 나오게 됐다. 이후에도 3명의 친구를 더 전도했지만 세상 가치관이 확고한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신앙에 고민이 생길 무렵, 교회에서 ‘파워미션’ 단기선교 팀원 모집을 보게 됐다. 고3 수험생이었던 나는 실기시험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아 망설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이번이 아니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떠난 5박 6일간의 베트남 단기선교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사흘 동안 찬양사역을 이어가던 중, 둘째 날 함께 찬양하던 교회 동생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20분 넘게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온몸이 떨릴 정도로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시는 현장을 처음 경험했다. 그날 나는 하나님께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이 진정한 예배임을 깨달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했다. 찬양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 내 안에서도 꺼져가던 믿음의 불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단기 선교를 다녀온 후 나의 삶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입시 결과에 연연하며 미래가 불안하고 막막했지만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야훼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는 말씀을 의지해 결과가 어떠하든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책임지신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세상을 향해 복음을 노래하는 가수, 예수님의 향기를 전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소망한다. 정리=금지환 기자
  • 2025.10.31 / 금지환 기자

    이은지 성도(장년국) - 잃었던 주님 사랑 되찾아 행복합니다
  • 나는 모태신앙으로 열심히 교회 다니고 봉사도 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모든 예배와 학교생활 등이 온라인으로 전환돼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세상에 재밌는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아버렸다. ‘내가 왜 교회에 가야하지?’, ‘나 진짜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살면서 해보지도, 아니 해볼 생각조차 안했던 고민들을 하게 됐고 내린 결론이 ‘하나님 같은 건 없고 그럼 나도 교회를 안가도 된다’였다. 고등학교 1학년 말부터 교회를 안가기 시작하면서 부모님 속을 많이 태웠다. 그랬던 내가 올해 대입 재수를 준비하며 겨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이번 여름 장년국에서 진행한 독일 단기선교를 다녀오면서 신앙의 변화를 경험했다. 독일 순복음딘스라켄교회에 도착한 선교 첫 날, 디지털 금식(휴대폰 사용안하기)을 하게 됐다. 하나님을 더 깊게 만나고 세상에서 나를 힘들게 한 것들로부터 잠시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목사님의 사모님 얘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설마 그렇게까지 변화가 있겠어?’라며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만 일단 순종했다. 그러자 이틀, 사흘 지날수록 상상치도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선교 둘째 날부터는 ‘모.다.시’(모태신앙 다시 시작하기)시간을 가졌다. “하나님을 아직 모르겠다”는 나에게 목사님의 자녀는 “정말 간절할 때 힘들 때 하나님을 한 번만 찾아보라”고 권했다. 진짜 나를 만나주실지 궁금했기에 주님을 찾고 말을 걸어봤다. ‘내 삶도 좀 평탄하면 안 되냐’고, ‘공부하는 거 힘들다’고, ‘하나님이 계시면 내가 어떤 길을 가야할지 알려달라’고 주님께 털어놨다. 그 순간 눈물 한 방울 없던 로봇 같던 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도 몰랐던 나의 힘듦과 아픔을 주님은 알고 위로해주셨다. 그때 주님이 실제로 계신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느꼈다. 선교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도 매일 실패와 도전을 반복하는 현실과 마주하고 있지만 믿음 따라 살고 싶어 하는 나를 주님이 돌보아 주실 것을 확신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시 주께 돌아온 나는 독일 선교팀과 매일 큐티 챌린지를 이어가고 있다. 어느 날 이사야 57장 16절, 18절을 묵상했다.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내가 그의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를 슬퍼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우리를 정말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이 사랑하시는구나’라고 느꼈다. 특히 16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음은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크고 무서운 분으로만 느끼지 않도록, 또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가 지치지 않도록 노하심을 지속하지 않으신다니. 주님은 눈물 나도록 따뜻한 마음을 가지셨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 주님은 주님이 지으신 자녀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고, 직접 찾아와 위로해주시며 주님의 길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앞으로는 주님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정리=오정선 기자
  • 2025.10.24 / 오정선 기자

    한명희 권사(서대문대교구) - 기도는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 경제적 어려움과 남편 소천에도 다시 일어서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만나게 된다. 최근 예배 시간에 청년들이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생을 포기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아팠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생명을 어떤 이유로도 스스로 끊어서는 안 되건만, 그만큼 지금 세상이 힘들고 마음이 병든 시대임을 실감했다. 오늘날 우울과 절망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인생의 고난과 위기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 나 또한 수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예수님이 함께하셨기에 포기하지 않았고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예수님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시는 유일한 분이심을 확신한다. 나는 결혼 후 시어머니를 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면서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됐다. 믿음 생활을 시작했지만 환경은 녹록치 않았다. 남편의 사업 부도와 파산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닥쳤고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힘든 시절을 겪었다. 남편과 함께 생계를 이어가며 서울과 경기 지역을 옮겨 다닌 이사가 20번이 넘는다. 예배와 기도는 나의 유일한 힘이었다. 순복음교회에서 예배드리고 기도할 때면 답답했던 마음이 풀리고 평안이 찾아왔다. 특히 철야예배에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는 말씀을 주시며 고난 속에서도 위로와 힘을 얻게 하셨다. 우리 가족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매년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열리는 청장년금식기도회에 참여했다. 문제의 해결자이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믿음으로 나아갔다. 경제적 어려움과 풍파 속에서도 가족 간 불화가 없었던 것은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기도로 하나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빚을 갚고 이제 행복할 날만 기다리던 2015년 설날 예상치 못한 비극이 찾아왔다. 평소 건강해 병원 한 번 가지 않던 남편이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어려운 순간마다 복음성가 ‘주님 손잡고 일어서세요’라는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께 매달렸고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어느덧 남편이 소천한 지 10년이 됐다. 힘들고 외로웠던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셨고 그 은혜 속에서 2018년에는 권사로 취임하는 축복도 받았다. 자녀들도 “엄마는 하나님 때문에 살았다”고 고백하며 철야예배에서 기도하던 내 모습을 가장 깊이 기억한다고 한다. 온 가족이 교회에서 봉사하기를 소원했던 시어머니의 기도처럼 시동생과 시누이 모두 교회 중직으로 섬기고 있고 우리 가정 또한 3대가 믿음을 이어가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 할렐루야! 지금 당장은 어려움을 겪더라도 고난의 때 하나님께 나아가면 고난이 큰 축복이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 세상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정리=금지환 기자
  • 2025.10.17 / 금지환 기자

    이재훈 집사(대학청년국) - 헌혈 400회, 생명 나눔 33년째 이어가 
  • 헌혈 증서 모아 중증질환 어린이들에게 기부해 1992년 고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어머니의 권유로 마지못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안수집사회 헌혈행사에 참여하게 됐다. 그때의 작은 순종이 지금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헌혈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작은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즐거움으로 참여했다. 그러다 은장, 금장, 명예의 전당이라는 목표를 세우며 꾸준히 헌혈을 이어갔다. 어느새 200회, 300회를 지나 400회를 맞이했을 때는 더 이상 기록이나 선물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께 받은 건강을 이웃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400번째 헌혈을 마친 날 가족이 함께 축하해줬다. 아직은 헌혈의 의미를 모르는 8살 아들과 6살 딸이 자라서 사랑을 나누는 일에 동참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 같다. 나는 33년 동안 180,350㏄라는 혈액을 나누며 생명 나눔을 내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계속 전혈만 하던 중 간호사의 권유로 혈소판 헌혈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시간이 오래 걸려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헌혈이 끝난 후 고가의 장비에 새 키트를 교체하는 모습을 보며 한 팩의 혈소판(400㎖)을 얻기 위해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가능한 한 혈소판 헌혈에 참여하며 더 값진 나눔을 실천하려 노력했다. 그간 차곡차곡 모아온 헌혈 증서는 타인을 돕기 위해 사용하거나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에 기부하고 있다. ‘헌혈(Blood Donation)’이라는 영어 표현도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동안 Donation(기부)이라는 단어는 주로 ‘돈을 주는 행위’로만 여겨졌지만 피도 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울렸다.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한 몸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였다. 나는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는 CAM대학선교회 간사로 섬기며 대학생들에게 기부가 꼭 돈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따뜻한 생명 나눔의 의미를 담아 ‘온레드 캠페인(溫Red Campaign)’을 진행하고 있다. 청년들이 헌혈에 동참해 수혈이 필요한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함께 행복한 나눔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큰 힘을 얻는다. 성경 히브리서 13장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나누라고 주신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 건강을 나누고, 가진 것이 있다면 흘려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 믿는다. “한 사람이 100번 헌혈하는 것보다, 100명이 한 번 헌혈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많은 청년들이 주님이 주신 건강으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나의 헌혈이 작은 씨앗이 되어 더 많은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이 흘러가기를 기도한다. 정리=김주영 기자
  • 2025.10.10 / 김주영 기자

    오홍철 평신도선교사(잠비아 패밀리처치) - 잠비아 성도들과 함께 이룬 성전 건축의 꿈
  • “여보 딱 한 번 만 교회 가요.” 아내의 전도를 처음에는 마다했지만 어느 날 나랑 살아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아내의 간청을 무시하는 게 남편이냐 싶어서 따라나선 것이 40여 년 전 내가 처음 교회를 오게 된 계기다. 아내를 따라 주일 성수 하며 교회를 다니다 교회 내 순복음선교연합회 아프리카선교회를 알게 되어 열방을 품고 기도하는 회원이 됐다. 내 직업은 목수인데 일을 하던 중 돈을 안 갚는 사람이 있어 사기로 고소했다. 처음 고소라는 것을 하니 그날부터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교회 전도사님께 상담을 하니 “다 내려놓으세요. 하나님이 채워주십니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이튿날 바로 고소를 취하했고 비로소 평안이 생겼다. 일주일 뒤 고소했던 사람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돈을 갚겠다는 게 아니라 고소를 당했기 때문에 외국에 일을 못하러 가게 됐다면서 대신 나더러 건축 현장에 가달라고 했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1996년 잠비아에 가서 일을 하며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제를 나누면서 기쁨과 사랑이 솟는 경험을 했다. 이후 한국에서 2년 동안 교육을 받고 평신도선교사로서 2012년 잠비아로 파송을 받았다.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집을 팔아 전셋집으로 옮기고 선교사의 삶을 시작했다. 그들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해 늦은 나이에 영어를 배우고 무엇보다 문화를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 2년을 그렇게 지내다 말라리아에 걸렸다. 처음에는 병명도 모르고 3일간 물조차 마시지 못하고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동네 반장 역할을 하는 에바 집사가 광산에 의사가 있다며 의료진을 불러줬고, 이들이 말라리아라면서 주사를 놓고 약을 줘서 살아났다. 사경을 헤맬 때도 나는 걱정이 없고 마음은 평안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었다. 이후 에바 집사와 현지인 목회자 케네디 전도사님과 함께 패밀리처치를 개척하게 됐다. 가정집에서 교회가 시작됐고 이후 학교 교실을 빌려서 토요일과 일요일 예배를 드렸다. 30~40명이 된 후에는 더 큰 교실로 옮겼고 교회는 부흥했다. 나는 한국과 잠비아를 오가면서 돈을 벌면 교회 건축 자재를 샀고 교인들이 직접 건축을 해서 드디어 올해 성전이 완공됐다. 큰 도로 바로 옆 500평 땅에 250평 규모의 성전이 지어졌다. 강서1대교구 소성호 장로님, 아프리카선교회 김병현 장로님, 박영이 장로님, 조애자 권사님을 비롯해 회원들의 후원으로 성전 건축 뿐 아니라 교회 마당에 생수가 나오는 우물도 생겼다. 이제 이웃 마을로 물을 뜨러 다니던 마을 사람들이 다 교회로 온다. 또 내년 1월에는 유치원을 개원한다. 내가 사역하고 있는 솔웨지 마냐마 지역의 아이들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양육되어 더 큰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로 성장하길 꿈을 꾼다. 나를 이끄시고 지금도 꿈꾸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린다. 정리=복순희 기자
  • 2025.10.03 / 복순희 기자

    황미자 권사(종로중구대교구) -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요”
  • 뜨거웠던 올 여름 대교구 3450달란트에서 일본 군마로 단기 선교를 다녀왔다. 큰 아들 내외와 44개월 손자가 선교 여정에 동행했는데 아이를 통해 팀원들이 웃을 수 있었고 한 마음으로 사역에 임할 수 있었다. 내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은 큰 아들이 태어난 지 백일 무렵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유 없이 계속 울던 아이는 밤이 되면 울음이 더 심해졌다. 건강에 문제가 있나 싶어 병원 진료를 받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옆집에 살던 여의도순복음교회 지역장님이 나를 전도했고 교회를 갔다 오면 신기하게도 아이는 울지 않았다. 진짜 신앙생활은 큰 아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서였다. 질풍노도 시기의 아들을 잡기 위해 나는 주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며 아이를 하나님께 맡겼다. 그때부터 새벽 예배에 참석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좋으신 하나님은 나의 기도에 마침내 응답해 주셨고 아들은 교회 안에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 지금은 3450 예배에 적극 참여하며 열심히 주를 섬기는 일꾼이 됐다. 할렐루야! 1교구 안에서 장년층을 위한 예배가 시작된 건 2018년 무렵으로 나에게 대표지역장이라는 직분이 주어졌다. 토요일 오전 쉬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사람들이 모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자 놀라운 은혜가 임했다. 한 구역장이 대장에서 시작된 암이 간과 그 주변으로 전이된 친구를 예배 모임에 데려왔다. 성도들은 내 아픔처럼 주께 살려달라고 매달렸고 자매가 완치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안에 ‘문제가 있을 때는 기도가 답’임을 깨닫는 은혜가 임했다. 분당에 사는 아들 내외도 토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3450예배에 참여했다. 3명으로 시작한 1교구 3450예배는 인원이 30명으로 늘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50명 참석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예배를 사모하며 주를 위해 열심을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 가족에게 한없는 복을 허락해주셨다. IMF가 터졌을 때 남편이 다니던 사업장이 문을 닫게 됐다. 기술이 남달랐던 남편은 문 닫힌 회사의 기계를 인수받아 개인 사업을 시작했다. 나는 국민일보를 통한 문서 사역 확장을 위해 하나님께 믿음의 씨앗을 심었고, CIS중동선교회에 들어가 선교 활동도 동참했다. 무엇이든 하나님께 기도하며 믿음으로 순종하자 사업이 날로 번창했고 코로나 팬데믹 때도 공장은 쉼 없이 돌아가 사업 확장이라는 복도 받았다. 나는 2022년에 권사직분을 받았다. 나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주께 감사해 내게 주어진 지금이라는 시간, 최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서였다. 지난해 처음 대교구 3450에서 인도네시아로 단기 선교를 갔을 때 하나님은 ‘너를 사랑한다’는 음성과 함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것을 당부하셨다. 나는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고난없이 하나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힘써 봉사하고 싶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내 자녀,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져 하나님께 헌신하길 기도한다. 정리=오정선 기자
  • 2025.09.26 / 오정선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