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변화
김은미 집사(양천대교구) - 시니어 선교팀이 인도네시아에 전한 예수님 사랑
  • 아팠던 몸 선교 시작하자 통증 사라져
    올해 여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생겼다. 교구에서 12명이 팀을 이뤄 인도네시아 반둥으로 단기선교를 다녀왔다. 대부분 선교 경험이 없는 50~80대 시니어들로 구성된 팀이라 오로지 기도하며 하나님께만 의지해 이루어진 선교였다. 6월 25일부터 일주일간 선교사님을 도와 공부방 섬김과 예배 사역, 노숙자를 위한 도시락 만들기와 나눔 등을 하고 돌아왔다. 인도네시아 교인들과 협력해 300인분의 음식을 마련해 노숙자들에게 직접 전달하고 복음을 전했다. 또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부방에 모이는 학생들과 함께 김밥과 떡볶이 등을 만들어 나눠 먹으며 한국의 음식문화를 알리는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처음 교구장 목사님이 선교에 대해 이야기 하셨을 때는 전혀 갈 생각이 없었다. 선교를 좋아하긴했지만 가고 싶은 마음 반 걱정 반이었다. 선교를 가기로 하고 기도 모임에 참석하면서도 막연하기만 했다. 일주일이나 집을 비워야 했기에 남편의 배려가 필요했고, 비용도 있어야 했다. 감사하게도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인간적인 걱정과 달리 남편이 흔쾌히 선교 가는 것을 허락하고 심지어 비용까지도 부담해 주겠다고 해서 놀랐다. 기도 속에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며 하나님께서 내가 선교에 참여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 같았지만 준비부터 많이 힘에 부쳤다. 직장도 다니는데 따로 시간을 내어 매주 금요일 선교 세미나에 참석하고 율동과 찬양 연습을 하느라 몸 이곳저곳이 삐걱거렸다. 해외에서 음식과 물이 바뀌면 그것을 내가 잘 소화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급기야 선교 한 달 전부터 몸이 아팠다. 선교팀에서 친한 분에게 “나는 도저히 못가겠어요”라고 하니 “비행기 타면 괜찮아질 거예요”라고 말하셨다. 떠나기 전날 나는 잠을 한숨도 못 잤다. 머리가 빙빙 돌고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공항으로 갔다. 나는 뇌동맥류 시술과 고막 수술을 한 적도 있어 비행기에 타면 정말 큰일 치르겠다 싶었다. 그런데 비행기가 둥실 떠오르자 거짓말처럼 모든 통증이 사라졌다. 한국에서 각종 약을 잔뜩 챙겨 갔는데 아프기도 전에 미리 하나 먹은 것 외에는 그대로 다시 들고 돌아왔다. 노숙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때 그토록 무더운 나라에서 가면 같은 인형으로 얼굴을 가리고 구걸하는 사람들이 특히 안타까웠다. 선교사님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가 사정을 묻고 가족 수에 맞춰 도시락을 챙겨주셨다. 나도 그들이 구원받고 삶이 변화되길 기도하고 있다. 무엇보다 선교를 통해 중보기도의 위력을 알게 됐다. 현지 상황을 보고 온 후 선교지를 위한 구체적인 기도를 지속했더니 오랫동안 나오지 않던 교회의 건축허가가 나왔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나의 지경을 넓혀 주셔서 감사하다. 계속해서 선교에 동참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겠다. 정리=복순희 기자
  • 2023.09.15 / 복순희 기자

    김오경(가명) 성도(통일대교구) - “통일 기대하며 복음 일꾼 훈련 받아요”
  • 탈북 후 중국서 살아계신 하나님 만나
    가족 구원 통해 사랑의 하나님 깨달아 내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처음 알게 된 건 2011년이었고 지난해 10월 경 통일대교구 소속이 됐다. 1997년 북한을 탈출한 나는 중국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기독교에 대해 잘 몰랐다. 까만 표지로 된 책이 성경인지 모르고 들춰봤는데 마침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부분이 딱 보였다. 우리는 많이 굶주렸던 사람들이라 ‘양식’이라는 부분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신기한 책도 다 있네하며 앞뒤를 살피는데 사도신경, 십계명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하루는 라디오에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라는 가사가 들리는데 막 눈물이 났다. 중국에서 지내는 동안 한번은 교회에 갔다가 한국 대학생들이 부른 ‘천부여 의지 없어서’ 찬양을 다시 듣고 ‘하나님은 진짜 살아계신 분’임을 확신하게 됐다. 나는 공안에 잡혀 두 번 북송됐다. 2000년 10월 두 번째 잡혔을 때는 죽다 살아났는데 하나님은 고통 중에도 나를 살려주셨고 이듬해 2월 재탈출에 성공했다. 4명이 중국 그리고 제3국을 거쳐 한국에 오기까지 무수한 배고픔을 겪었다. 고인 빗물을 받아 마시고, 가시밭을 맨발로 지나오는 고통의 과정이 있었지만 2003년 11월 드디어 자유 대한민국에 올 수 있었다. 스스로 삶을 책임져야 하는 남한에서 나는 열심히 살았다. 2004년에는 남한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했는데 생활 습관의 차이가 많아 힘들었다. 거기에 시댁 어른들은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셔서 교구 등록도 못하고 몰래 교회를 다니며 예배만 드렸다. 교회 다니는 문제로 남편과 싸움도 잦았지만 그래도 남편은 주일이면 늘 교회까지 데려다줬다. 나는 코로나19 직전 다니던 직장을 퇴직하게 돼 우울증이 찾아왔다. 하나님께 울며 “왜 나를 많은 사람들 속에서 집단으로 왕따를 당하게 하셨냐”며 상처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데 “잠잠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마음에 울렸다. 곧이어 코로나가 터져 아침부터 저녁까지 찬양을 틀어놓고 기도를 하자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가족을 사랑하라. 그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내가 사랑하는 자들이다”라는 음성이 들렸다.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던 죄를 뉘우치며 ‘남편을 돈 버는 기계’로 인식하고 남편을 깊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지난날을 회개했다. 나는 남편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엄청 사랑하시더라. 그동안 잘못했다”며 용서를 구하고 남편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족욕 마사지를 해줬다. 이런 나의 모습에 흠칫 놀란 남편에게 나는 용기를 내어 함께 교회가기를 청했다. 남편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당신 소원 못 들어 주겠냐. 그동안 당신이 나로 인해 아팠다면 이제부터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현재 김포에 있는 순복음교회에 등록해 남선교회 봉사를 하면서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있다. 나는 올해 신학교에 입학했다. 통일 시대를 대비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쓰임 받고 싶다. 탈북민과 남한 주민들이 먼저 하나가 되면 하나님이 ‘보기 좋다’며 통일을 열어주시리라 확신한다. 할렐루야! 정리=오정선 기자
  • 2023.09.08 / 김용두 기자

    박은주 집사(동작대교구) - 하나님 신뢰할 때 건강과 물질의 복 임해
  • 전도에 힘쓰며 세상에 주님 사랑 전하고파
    내 삶에 빛으로 오셔서 송두리째 변화시켜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 올려드린다. 예수님을 알기 전 나는 암울한 인생이었다. 어릴 적 잠시 교회를 다니긴 했지만 당시에는 믿음이 없어 고난의 순간을 늘 원망했다. 그러던 2000년 내게 큰 위기가 찾아왔다.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신 것이다. 급히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수술까지 많은 시간이 지체돼 아버지는 결국 소천을 받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고 결국 우울증까지 앓게 됐다.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옆집 주민의 권유로 교회에 가게 됐다. 당시 대인기피증이 있었던 나는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싶었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가면 예배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소식에 남편과 함께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찬양과 기도가 유난히 뜨거웠던 순복음교회 예배를 통해 우울했던 내 마음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우울증을 극복하고 있을 무렵,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기적을 나타내셨다. 나는 결혼 후 난소에 문제가 있어 아이를 갖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인공수정 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자연 임신은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결혼 6년 만에 어떠한 의학적인 도움 없이 아들을 낳게 하셨다. 단란한 가정을 이룬 내게 성령님이 찾아오셨다. 나는 지·구역 식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성령 침례를 받았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지은 죄,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고 이후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평안함과 기쁨이 내 삶에 넘치게 임했다. 나는 그날 앞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것을 결단하며 더 많은 사람에게 이 복된 소식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나는 남편과 함께 10여 년 동안 남선교회 전도실에서 봉사하며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했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맞출 때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 쏟아졌다. 남편은 그동안 여러 직장을 다녔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남편을 영업왕이 되게 하셨고 직장에서도 인정받도록 세워주셨다. 또한 거주하던 집이 재개발 되면서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새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도록 조건이 변경되는 기적이 일어나 새 장막도 얻게 됐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기적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폐에 염증이 생겨 병원에 갔는데 염증 위치가 좋지 않아 생명에도 지장이 있을 수 있어 치료가 시급하다고 했다. 나는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며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당시 조용기 목사님께서 치유기도 시간에 “폐병에 걸리신 분, 오늘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셨습니다”라고 선포하셨고 나는 믿음으로 “아멘”을 외쳤다. 그 이후로 폐에 염증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올해는 10여 년 동안 전도하면서 가장 많은 120명 넘게 전도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 또한 남편 지명호 안수집사가 장로로 장립을 받는 복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의를 구할 때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이 모든 복을 누리게 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전도 사명을 감당하겠다. 정리=금지환 기자
  • 2023.09.01 / 금지환 기자

    김능완 원로장로(동부성전) - 뇌졸중으로 죽음 앞에서 새 생명 얻어
  • 하나님 의지하고 말씀 외우며 기도해 기적 체험
    나는 35년 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한 후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다. 하나님께서 영혼 구원에 대한 사명을 주셔서 남선교회 전도실에서 20년 간 봉사한데 이어 6년째 장로전도단에서 전도에 힘쓰고 있다. 2021년 장로전도단장으로 섬기다 임기를 마친 후 11월 20일 인천의 공사 현장을 가던 중 차에서 쓰러졌다.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곧 깨어나 다시 운전대를 잡고 힘겹게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며칠 후 출근하러 나가는 길에 주차장에서 다시 정신을 잃었다. 가족들의 도움으로 4시간 후에 병원에 가서 MRI를 찍었는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종합병원에서 다시 MRI, CT촬영을 하고 자세한 검진을 받은 결과 소뇌경색이라는 진단을 받게 됐다. 바로 입원해 중환자실에 들어갔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뿐이었다.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외우고 묵상하고 기도하라는 이영훈 담임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나 시편 23편과 91편, 103편을 외우며 기도했다. 내가 무슨 죄로 이 고통을 당하는지 힘들었는데 마음속에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너의 죄를 다 짊어졌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 고통이 나의 죄 때문이 아니라 더 기도하라고 하신 거라는 것을 알게 됐다.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마치 천사가 와서 돕는 듯 몸과 마음이 평안했다. 목사님과 전 성도들이 새벽예배와 금요성령대망회 때 중보기도 해주었고, 장로전도단 장로들도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기도의 능력을 깊이 체험한 나는 다시 움직일 수만 있다면 죽을 때까지 전도하겠다고 다짐했다. 중환자실에서 1주일, 일반 병실에서 20일간 있으면서 잠자고 식사하는 시간 빼고 계속 기도하니 내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면 1분 동안 뇌세포 190만개가 죽고 한 번 죽은 세포는 재생이 안 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내 기억과 정신을 온전히 지켜주셨다. 일상생활에도 지장 없도록 건강도 회복시켜주셨다. 할렐루야! 재활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재활치료 받고 있을 때 이영훈 목사님이 주일예배 설교에서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 40:2)라는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아멘’을 외치며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이후로 휠체어를 의존하지 않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확실히 체험한 순간이었다. 인생을 돌아보면 예수님 믿고 구원 받은 일이 가장 감사하다. 온 천하를 다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전도를 위해 힘쓸 것이다. 정리=이미나 기자
  • 2023.08.25 / 이미나 기자

    김명환 성도(남대문성전) - 하나님 믿을 때 우울증에서 해방됐어요
  • 삶 속에서 섬김 실천하며 주사랑 전하고파
    내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 6월부터였다. 우울증으로 8년간 병원 생활을 하다가 퇴원 후 남대문 인근 쪽방촌에서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이다. 예전부터 교회를 다녔기에 어느 교회를 갈지 고민하던 차에 최영분 권사님(사진 가운데)을 만나 같은 곳에서 사는 이건배 성도(사진 왼쪽)와 함께 남대문성전을 출석하게 됐다. 이건배 성도는 40년간 앓은 불면증으로 나와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환자들을 전도해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많을 때는 4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이건배 성도도 그중 한 명이었다. 신앙생활하면서 불면증을 고침받은 이 성도는 남대문성전을 출석하는 지금이 평안하다고 했다. 나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태중 7개월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는 우리 5남매를 힘겹게 키우셨다. 큰 형과 12살 차이인 나는 20대 때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오기 전 예수님을 영접한 나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 한 지 3개월 만에 방언을 받았다. 기도를 잘하지 못해도 기도하는 것이 좋았고 성경도, 찬송도 열심히 익혔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좋아 십일조 생활에 열심이었고, 많은 돈을 벌지 못해도 다니던 개척교회를 도와 물질을 심어가며 봉사도 했다. 신앙생활하면서 기적도 많이 체험했다. 10대 때부터 하혈이 심했으나 병원조차 원인을 찾지 못해 고통 속에 지내야 했던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루아침에 고침 받은 일, 폐결핵에 걸린 누님이 죽기 전 가보고 싶다는 기도원에서 기도로 병을 고침 받은 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가 내게 임했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나는 중식당 매니저로 일했다. 그런데 내성적인 내가 직장에서 모함을 당하면서 우울증을 앓게 됐다. 우울증이 심해질수록 죽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서 치료차 병원에 입원하게 됐고, 지금은 주님 안에서 많이 회복됐다. 더욱이 영적 멘토인 최영분 권사님의 가르침에 따라 새벽예배를 비롯해 예배를 빠지지 않고 드리니 삶에 활력도 생기고 있다. 비록 기초생활 수급자로 보조금을 받는 형편이지만 십일조를 잊은 적이 없고 가끔은 나보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웃을 보면 먹을 것을 주고 재워주며 복음을 전했다. 내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빌립보서 4장 11~13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이 그저 감사하고 은혜롭다. 그동안 받지 못했던 건강 수급비까지 받게 해주셨고 아픈 허리도 고쳐주셨다. 너무 아파 앉지도 구부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남대문성전 목사님의 기도를 받은 후 감쪽같이 병이 나았다. 나와 이건배 성도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순복음 짜장’이라는 이름으로 식당을 만들어 배고픈 이웃들에게 음식도 나눠주고 복음도 전하는 것이다. 이영훈 담임목사님도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 정리=오정선 기자
  • 2023.08.18 / 오정선 기자

    강순덕 집사(마포1대교구) - 죽여 달라고 기도했던 나를 살리신 하나님
  • 절망적 형편, 우울한 마음 감사로 바뀌어
    나는 17세였던 1988년 시골에서 홀로 상경했다. 아버지가 암으로 투병하시면서 가세가 기울어 내가 오빠의 학비를 대야했다. 방직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몸에 무리가 되어 1년도 안되어 종아리가 다 부어 곪았고 얼굴에는 큰 점이 생겼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19살에 새벽예배를 보름동안 작정해서 다녔다. 그때 나는 “하나님 저는 결혼도 못할 거 같아요. 저를 25살에 죽여주세요”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어머니가 친척의 전도를 받아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출석하게 되었고 나도 교회를 옮겼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며 대학청년국에서 구역장으로 교회를 섬겼다. 당시 구역에서 청년 중 하나가 가식 없고 성품이 좋아 내가 먼저 사귀자고 했다. 고백을 한 24살 여름과 가을 겨울을 지나 25살 봄을 맞았고 우리는 부부가 됐다. 너무 힘들어 죽여 달라고 한 기도가 생각났다. 나중에 남편에게 내 얼굴에 대해 왜 단 한 번도 물은 적이 없냐고 했더니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했다. 결혼 후 일 년 뒤 우리는 첫 아들을 품에 안았고 3년 뒤 둘째 아들도 낳았다. 그런데 첫째 아이가 성장하면서 다른 아이들보다 느린 발달을 보였다. 좀 늦을 뿐이라고 현실을 외면했다. 아이가 학교에 갔지만 도통 앉아 있지 못하니 학교생활이 안 되고 아이의 이러 저러한 행동 때문에 힘들다는 말을 여러 사람들에게 들으니 마음에 상처가 됐다. 교회에서만은 그런 말을 안 듣기를 바랐지만 결국 듣고 말았다. 상심해서 아동부에 아이를 안 보내고 대예배를 6개월 동안 다니면서 우울하기만 했다. “하나님 저는 이 아이를 데리고 갈 데가 없어요” 울면서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장애인대교구를 가라는 응답을 주셨다. 들어보기만 했던 곳에 아이를 대동해 대교구장 목사님과 상담을 했다. 아이를 한참 보시던 목사님께서 이 아이는 장애가 크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아동부로 아이를 보냈더니 잘 적응을 했다. 그러면 내가 받은 응답은 무엇인가 너무 궁금했다. 답을 구하기 위해 다시 장애인대교구를 찾았다. 장애인대교구에는 학생들의 모임인 소망부가 있었고 그곳에는 교사가 필요했다. 장애인대교구에서 교사 제안을 받아 소망부 학생들을 섬기면서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터져 나왔다. 한참을 회개하니 진짜 감사가 시작됐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마다 아들은 점점 좋아졌고, 사회성이 좋은 아들은 제과제빵을 배워 사회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나도 아이들을 키우면서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남편과 친정어머니, 시댁의 조력 덕분이다. 삶을 뒤돌아보며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고 말하고 싶다. 정리=복순희 기자
  • 2023.08.11 / 복순희 기자

    권영민 성도(대학청년국) - 상처받은 과거 치유해주신 하나님
  • 오사랑 훈련으로 마음의 위로 얻어
    나는 울산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것을 좋아해서 피아노를 배웠다. 서울로 이사 온 후에도 교회에서 찬양대와 찬양부에서 활동하며 여러 가지 악기를 배웠고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 행복했다. 교회에서는 항상 밝은 모습으로 지냈지만, 고등학교 3학년 졸업까지의 학창 시절은 너무 힘들었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일쑤였고 따돌림과 돈을 뺏어가는 일도 있어 학교에 나가기가 꺼려졌다. 그러다보니 학교를 밥 먹듯이 결석하게 되고 극한의 스트레스로 인해 자해하고 심지어 자살도 여러 번 시도했다. 무엇보다 가정 내에 불화가 이어지며 고2 때 부모님이 이혼하시게 됐다.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고3 말부터 담배를 피우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술을 마시며 크리스천답지 못한 이중적인 삶을 살아왔다. 하나님은 이러한 나의 모습을 보고 계셨고 교회에서 카자흐스탄으로 해외선교를 가게 됐을 때 연주자로서 봉사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그동안 거룩한 척했던 내 모습을 완전히 깨부수셨다. 선교 일정 동안 연주자보다는 선교팀원으로서 활동하는 게 좋겠다는 조언을 들었다. 나는 이 기간 성경 쓰기와 기도를 통해 성령의 재충만을 갈망하게 됐고 선교를 다녀온 후에는 어머니의 권유로 교회에서 진행하는 오순절사랑훈련학교(이하 오사랑) 청년 20기에 참가하게 됐다. 나는 오사랑에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고 회복해나가며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으로 다시 설 수 있게 됐다. 오사랑에서 매시간 받은 사랑의 편지를 보며 ‘내가 정말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 존재이구나. 내 힘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임을 깨달으며 봉사자로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됐다. 오사랑 훈련 이후 말씀과 기도를 통해 믿음 생활을 더욱 키워나갔고 3박 4일 동안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청년 22기부터 봉사자로서 참가자들을 섬기게 됐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부터 근무하는 곳에서 모임에 대한 규율이 엄격해지자 나는 회사 일정을 핑계로 찬양팀 사역을 한동안 하지 않으며 다시 방황하며 지냈다. 봉사하지 않는 편안한 삶에 익숙해지려 할 때 주님이 다시 한번 예배자의 마음을 주셨다. 2022년 5월 금요성령대망회에 참석하면서 온전한 예배자가 되기로 결단하고 그 이후 대학청년국 가스펠선교회 찬양팀 ‘마하나임’에서 악기팀장으로 봉사하게 됐다. 또한 8월 14일부터 진행하는 오사랑 청년 30기의 봉사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부족하고 연약한 나를 사랑하시고 내 삶을 통해 일하시는 주님을 참가자들도 만나고 경험하기를 기도한다. 정리=김주영 기자
  • 2023.08.04 / 김주영 기자

    정복희 권사(동작대교구) - “절망을 희망으로 역전시키시는 하나님 믿으세요”
  • 간절히 기도해 결혼 5년 만에 귀한 아들 얻어
    요즘 절망에 빠져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절망을 희망으로 역전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전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40년 전 절망에 처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한 줄기 빛 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한 후 180도 변화됐다. 당시 결혼 5년 차였던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려 의학과 민간요법 등을 동원해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임신을 할 수 없었다. 계속된 실패로 우리는 유명한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뜻밖의 결과를 들었다. 남편의 문제로 의학적으로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절망적인 진단을 듣고 낙심에 빠져 있을 때 단골손님이 찾아와 예수님에 대해 전했다. 평소에는 말수가 없던 분이 갑자기 말을 걸어 놀랐지만 계속된 권유에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가기로 했다. 당시 나는 교회를 다니며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 올라가 3일간 금식기도를 했는데 그때 성령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신 한 목사님이 아이 갖기를 위해 100일 새벽 기도를 해보라고 하셨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의 뜻하심을 믿고 작정 기도를 시작했다. 늦은 밤까지 사업장을 운영해 중간에 끊어지는 일도 있었지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며 기도를 이어갔다. 200여 일이 넘게 한나의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한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셨다.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병원에서는 의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며 우리 부부를 축하했다. 할렐루야! 나는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했다. 양가 통틀어 그 누구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 없어 전도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포기하지 않고 기도로 친인척 전도를 위해 간구할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나타내셨다. 평생을 완고하게 복음을 거부했던 아주버님이 폐결핵으로 임종을 선고받았는데 다시 깨어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병원에서 결핵환자는 숨을 거두면 균을 내뿜으니 소독을 해야한다고 모두 병실을 나가게 했다. 그 순간 마음 속에 ‘병균이 무섭더냐, 영혼의 죽음이 두렵더냐’는 음성이 들렸다. 순간 나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 아주버님의 영혼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 아주버님이 깨어났고 이내 또렷한 목소리로 결신기도와 회개기도를 따라 하며 ‘죽어도 시원찮은 인간에게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전도해 천국에 가게해줘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소천 받았다. 이후 시댁 식구 6남매 중에 5가정이, 친정 식구 7남매 중 5가정이, 사촌 7남매 중에 4가정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 올려드린다. 5년 전부터 선교지에 소망을 품고 기도했는데 굿피플에서 케냐 라무에 교육센터를 건축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침 하나님께서 재정도 채워주셔서 헌금했는데 7월 10일 완공된 교육센터를 방문할 수 있는 은혜까지 더해 주셨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며 살아가겠다. 정리=금지환 기자
  • 2023.07.28 / 금지환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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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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