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변화
최중란 권사(마포2대교구) - “매일 성경 읽으며 성령으로 충만
  • 고기를 먹는 것처럼 속이 든든해져 올해 내 나이 88세. 지난해 대교구에서 진행한 성경통독 챌린지를 통해 신구약을 2독하고 최고령자로 상을 받았다. 매일 나의 일과 중 오전 시간은 오롯이 성경 읽기에 집중한다. 성경을 읽으면 내 영이 성령으로 충만해진다. 마치 고기를 먹는 것처럼 속이 든든하게 느껴진다. 모든 성경의 내용은 다 은혜롭다. 요셉이 형들의 모함으로 노예로 팔렸다가 애굽의 국무총리가 돼 기근의 고통으로 애굽을 찾은 형들을 만나 눈물을 흘리던 장면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울컥하게 된다. 신앙생활의 전과 후를 비교하면 내 삶의 차이가 실로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은 서울대에서 트럼펫을 공부할 정도로 수재였다. 연주자였던 그가 1970년대 종로의 한 호텔에서 일어난 화재로 충격을 받으면서 사회와 단절했다. 작은 가게를 운영했지만 남편은 7년간 가게 뒷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안했다. 병든 남편을 위해 버는 족족 한약을 지어 먹였지만 차도가 없었다. 누군가 교회에 가면 남편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으나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러다 어릴 적 다녔던 교회가 생각나면서 교회에 나가면 살길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감이 생겼다. 갑자기 나에게 복음을 전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연락받고 찾아온 그는 순복음 구역장이었고 우리 가게에 오자마자 남편이 있는 뒷방으로 들어가 방언으로 기도했다. 구역장은 “내일 우리 집에서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니 남편을 보내라”고 했다. 남편은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는 은혜받고 울었다. 1979년 우리 가정의 신앙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교회를 다니면서 남편은 대인기피증, 우울증을 고침 받았고 나는 교회를 다닌 지 보름 만에 성령을 받았다. 예수님을 만나고부터 표정이 달라지자 가게에 오는 손님마다 “좋은 일이 생겼는지 얼굴이 환해졌다”고 했다. 남편은 믿음이 생기면서 10년 동안 멀리했던 트럼펫을 다시 불기 시작했다. 금요 철야예배, 전도실 봉사, 찬양대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을 볼 때면 감사 또 감사했다. 나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는 여선교회, 1990년부터 80세까지는 권사회에서 봉사하며 내 모든 시간을 주께 헌신했다. 받은 은혜가 커 주님께 뭐든 다 드리고 싶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 복을 부어주셨다.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한 세 자녀는 명문대 졸업 후 각 영역에서 최선의 삶을 살고 있다. 중국에서 생활하다 이번에 국내 대학에 합격한 친손녀는 엄마(작은 며느리)와 함께 찬양대에서 봉사하고 있다. 변호사를 준비하는 큰 친손녀, 엄마를 따라 교사를 꿈꾸는 외손자까지 하나님은 이전에 내가 상상도 못할 풍요로 내 삶을 가득 채워주셨다. 나는 팔십 넘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지금처럼 말씀을 늘 가까이 두고 매일같이 읽을 것이다. 말씀은 내 삶에 언제나 빛이 되었다. 정리=오정선 기자
  • 2025.01.17 / 오정선 기자

    이미자 권사(금천대교구) - 전도와 섬김으로 하나님 일 동참할 수 있어 감사
  •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특히 신년축복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가 시작되는 1월이면 맨발로 눈 위를 살포시 걸으며 가족 몰래 새벽예배를 나갔던 초등학생 시절이 떠오른다. 가족의 반대로 몰래 교회를 나갔던 나는 눈 밟는 소리에 가족이 잠에서 깰까 맨발로 살금살금 집 밖을 나서곤 했다. 그때의 그 신앙이 자양분이 돼 오늘날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는 복을 받게 됐다. 어릴 적 강원도 삼척에서 자란 나는 대학 입학과 취업을 위해 상경했다. 1990년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인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당시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며 독산동 개척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평일에는 어린이집에서, 주말에는 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로 헌신하며 배우자를 위해 기도했다. 당시 나는 믿음의 가정에 속한 배우자를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개척교회 목사님께서 새벽예배를 드리러 오셨던 여의도순복음교회 권사님을 대뜸 소개해 주셨다. 그리고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권사님 아들과 상견례를 하고 결혼을 했다. 남편의 가정은 정말 믿음의 집안이었다. 첫 방문 때 거실에서 찬양과 기도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셨구나’하는 감동이 왔다. 남편을 따라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니며 내 인생은 제2의 삶으로 전환됐다. 이전에는 그저 예수님만 바라보고 열심히 봉사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긍정적인 메시지와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믿음을 접하고 내 삶이 완전히 변했다. 이후 나는 평생 단 한 번도 부정적인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이러한 긍정적인 삶은 주일마다 내 옷을 숨기며 교회 가는 것을 반대하던 아버지와 오빠의 삶도 변화시켰다. 모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모든 영광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이제 아버지는 집에 놀러 가면 꼭 기도해달라고 하신다. 긍정의 삶은 독산동에 차린 작은 어린이집이 성장하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2004년 개원 1년 만에 원아들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어린이집은 늘 원아들로 붐볐고 더 큰 어린이집이 필요한 상황이 됐다. 기도 가운데 남편은 가족과 함께 거주할 아파트 분양권을 팔아 땅을 구매했다. 남편과 함께 그곳에 4층 건물을 세우고 240평 규모의 어린이집을 만들었다. 기존 어린이집보다 4배나 큰 규모였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서울 남자와 믿음의 가정의 배우자, 가족 구원, 어린이집 확장 운영.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기도에 응답하셨다. 나는 현재 여의도순복음교회 전도새가족부에서 16년간 봉사하며 새가족들이 신앙의 첫걸음을 잘 내디딜 수 있도록 섬기고 있다. 전도와 섬김의 기쁨을 통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어 감사하다. 남은 일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 전파와 새가족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 정리=금지환 기자
  • 2025.01.10 / 금지환 기자

    정용준 안수집사(은평대교구) - 늘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
  • 남선교회 봉사하며 날마다 은혜 받아 선교 비전 갖고 열방 위한 기도 힘써 올해도 기쁨과 감사로 새해를 맞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신앙생활하게 된 것이 참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이다. 36년 전 교회에 함께 가자고 강권한 지인의 인도로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오게 됐다. 순복음선교연합회 직장선교회에서 14년간 봉사했고 8년 전부터 성도들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돕는 남선교회 보호실에서 봉사하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희로애락을 경험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있다. 2019년 9월 집에서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잠시 쉬면 괜찮아지기를 반복하다가 12월 초 병원을 가보니 바로 큰 병원에 가야한다고 소견서를 써줬다. 종합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보니 협심증이었다. 12월 스텐트 삽입술을 해서 심장혈관에 3개의 스텐트를 넣었다. 2020년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를 드리면서 다시 건강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해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해 2023년까지 3독을 하면서 하나님이 이끌어주신 내 삶을 뒤돌아보게 됐다. 하나님은 매 순간 나를 지켜주셨다. 군대에 있을 때 총기 오발사고가 있었는데 물 마시러 일어난 순간 내가 있던 자리로 총알이 날아와 기적처럼 살았다. 불과 1~2초 사이의 일이었다. 매 순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4년 전 선교훈련을 받으며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됐다. 그 후 아내와 함께 훈련을 받고 카자흐스탄 선교를 8박 9일간 다녀왔다. 그 다음해에는 일본 선교를 다녀오면서 선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깨달았다. 새벽기도회 드리던 습관이 있어서 일본에서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묵상기도를 하는데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열방을 향해 뻗어가 그들을 변화시키는 환상을 보았다. 그 뒤로 일본 복음화를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해야겠다는 각오를 갖게 됐다. 일본 일천만구령운동을 펼치며 일본 선교에 힘쓰신 조용기 목사님의 헌신을 잊지 않고 나도 작은 힘을 보태 일본 복음화를 위해 힘쓸 것을 다짐했다. 2024년 신년축복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 마지막 날 이영훈 목사님께서 선교에 대해 강조하신 말씀이 아직도 가슴속에 뜨겁게 남아있다. 올해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에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가 너무 기대된다. 새벽기도회에 나와 기도할 때 세계선교를 위해 작은 실천을 해나갈 때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처럼 선교지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길 기도한다. 정리=이미나 기자
  • 2025.01.03 / 이미나 기자

    정신애 성도(대학청년국) - “함께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요”
  • 고난 중 하나님 은혜 깨닫고 선교 사명도 갖게 돼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모태신앙으로 자라나 큰 어려움 없이 지내왔는데 6년 전 우리 가족에게 고난이 닥쳤다. 사랑하는 외할머니가 갑자기 소천하셨고 어머니는 다리 통증과 안면 근육의 떨림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으셔야 했다. 그 상황에 아버지가 운영하던 무역회사까지 힘들어지면서 우리집은 갑작스런 역경에 처하게 됐다. 우리 가족은 힘을 모아 함께 기도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사업을 접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나는 아버지와 함께 회사 사무실을 정리하러 가게 됐다. 모든 집기를 정리하고 텅 빈 사무실에서 아버지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사업장을 세워주셔서 은혜로 잘 운영하고 이제 마무리합니다. 앞으로의 시간도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라며 기도하셨다. 마음이 매우 아프셨을 아버지의 신앙고백은 어떤 고난에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의 지침이 됐다. 아버지가 사업을 접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19가 발생했다. 만약 이때 정리하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은 큰 빚과 부도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순간 우리와 함께해주시고 교회와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통해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 주셨다. 나는 2018년부터 가스펠선교회 봉사부에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섬김을 이어왔다.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에게 인사하고 헌금 수전을 하는 등 예배가 온전히 진행될 수 있도록 봉사했는데 교회를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참 기뻤다. 지난해 열린 ‘더 홀리스피릿 페스티벌’에서 새벽부터 봉사를 하며 느낀 것은 하나님은 섬김의 자리에서 헌신할 때 특별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나는 봉사하면서 말씀과 묵상에 더욱 집중하게 됐고 예배를 더 소중히 여기게 됐다. 우리 가족에게 고난이 닥쳤을 때 계속 봉사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예배 전후로 진행된 기도회를 통해 나에게 닥친 문제를 보지 않고 하나님께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월드미션을 통해 아프리카 가나를 시작으로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선교지마다 아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됐다. 나는 월드미션 스태프로 봉사하며 지금의 남편도 만났는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선교를 가는 게 우리 부부의 비전이다. 2024년을 은혜의 자리에서 온전히 마무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분초를 다투며 살아가는 바쁜 사회에서 시간을 내어 봉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많은 청년들이 봉사의 자리에 참여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넘치는 은혜를 체험하길 소망한다. 정리=박찬웅 기자
  • 2024.12.27 / 박찬웅 기자

    민춘기 권사(양천대교구) - 하나님 기뻐하시는 교정 선교에 올인
  • 30년 간 전국 각지 교소도에서 복음 전해 기도로 낳은 자녀들과 손자 8명 자손 번창 감리교 집안에서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줄 알고 자랐다. 그런 내가 27살에 결혼했는데 남편은 교회를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특히 시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수시로 산에 있는 절에 불공을 드리러 다니셨다. 결혼 후 첫딸을 낳았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이를 낳았건만 시어머니는 아들이 아니라고 나를 구박하셨다. 남편이 3대 독자라 이해하려 노력했다. 둘째가 생기길 기다리는데 몇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니 어머니는 집을 나가라는 소리까지 하셨다. 불임검사를 하러 대학병원에 갔는데 어떤 환자에게 순복음교회 성도들이 와서 위로를 해주고 함께 찬송 부르는 모습을 봤다. 나에게도 익숙한 찬송이라 무심코 따라 부르다 무서운 시어머니 생각이 나면서 입을 틀어막고 “하나님 저 어머니 돌아가시면 교회갈께요”라는 이상한 타협을 했다. 그 혼잣말이 오히려 나에게 충격이 됐다. ‘안 되겠다. 내가 지금 가야겠구나’라는 결심이 서 그 주일부터 버스를 타고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찾아갔다. 다시 신앙생활을 하자 1981년 하나님이 둘째 딸을 주셨다. 이어 셋째 딸을 내리 낳자 시어머니의 핍박은 더욱 심해졌다. 그때부터 나는 성경에 있는 한나의 기도를 흉내내기 시작해 넷째가 잉태된 후에도 새벽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셨다. 남편은 아들이 태어나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성경학교의 모든 과정을 공부하면서 성령 충만을 받았다. 교회학교 교사를 20년 하고 지금은 남선교회에서 봉사 중이다. 나 역시도 한눈팔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무조건 순종했다. 교구에서 지·구역장으로 섬기던 중 교회 친구의 권유로 교정복지선교회에서 봉사를 시작했다. 하나님은 나에게 마태복음 25장 36절에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는 말씀을 주셨기에 한마디로 선교회 활동에 올인했다. 30년간 교정 선교를 하는 이유와 비결을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을 바꾸고 인생을 바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어 감사하다. 교도소에 갈 때마다 회원들이 힘을 모아 떡 한 가마니, 빵 수백 개, 여름에는 아이스크림 등 인원수에 맞게 간식을 전달하는 것도 큰 기쁨이다. 또 건강을 위해 노력한 적도 없는데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 흔한 성인병 하나 없이 건강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자녀들도 간호사, 고등학교 교사, 어린이집 교사, 회사원으로 잘 성장해 모두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나는 자녀들 덕에 여덟 명의 손자를 둔 다복한 할머니가 됐다. 자녀들이 성장할 때 기도만 했다. 만남의 복을 받아 어디를 가나 자녀들이 사랑받고 인정받고 지혜롭고 건강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를 항상 기도했다. 기도에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그 복을 누리길 소망한다. 정리=복순희 기자
  • 2024.12.20 / 복순희 기자

    방성필 성도(반석대교구) - 하나님이 강직성척추염 고쳐주셨어요!
  •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모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됐다. 그러나 대학 때부터 20대 중반까지 출석하던 교회가 이단이었음을 알고 분한 마음에 나를 지켜주지 않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신앙과 멀어졌다. 30대가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더 큰 목표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사업 상 만난 이들에게 믿음을 가지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정작 내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철학자들을 통해 답을 얻을 수 없었고, 당시 살던 일본 교토의 한 불교 사찰 스님과 상담해도 답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스님이 마지막으로 던진 “신은 있다”라는 말이 내 머리를 울렸다. 내가 아는 유일한 신은 하나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2015년 5월 어느 토요일 밤 유튜브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오래 전 젊은 시절 설교 영상을 보게 됐다. 믿음에 관한 설교였는데 그 안에서 내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속이 정말 시원했다. 설교 내용처럼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싶어졌고 내가 가진 오랜 병이 낫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온 몸의 뼈마디를 굳게 만드는 강직성척추염으로 고통스러웠다. 심하면 합병증으로 실명까지 올 수 있는 무서운 병이었다. 실제로 29살이었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앞이 보이지 않았고 10일간 앞을 보지 못한 일도 겪었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님 설교를 듣고 그날 밤 11시 간절함을 다해 기도하자 좋은 세포가 악성 세포를 공격하는 환상을 보게 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가 다음날인 주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일어난 지 한두 시간이 지났을 때 뭔가 이상함이 느껴졌다. 몸의 통증이 전혀 없었다. 기적이었다. 할렐루야! 그 길로 교토에 있는 한인 교회로 달려갔고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됐다. 치유를 받은 지 4년쯤 지난 후 나는 조용기 목사님께 병 고침의 기적과 은혜를 적은 편지를 보냈다. 답장을 기대했지만 아무런 답이 오지 않았고 신앙은 점점 느슨해져 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는 마음에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교회를 찾아왔는데 성전 안에서 들려오는 방언기도 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2023년 5월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정착하고 4개월 지났을 때 유튜브에서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영상(2019.5.5 설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을 보게 됐다. 그런데 중반쯤 내가 보낸 편지 내용이 소개됐다. 목사님의 답장이 몇 년이 지나 영상으로 나에게 온 것이다. 그 답장은 내 삶과 신앙에 또다시 활력이 됐다. 현재 나는 아내와 함께 반석대교구에서 3040 부흥을 위해 임원으로 봉사하며 헌신하고 있다. 신앙생활이 예배 설교만 듣는 것이 다가 아닌 말씀과 기도, 찬양 드리며 하나님을 생각하고 나아가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신앙임을 깨달았다. 정리=오정선 기자
  • 2024.12.13 / 오정선 기자

    박경수 집사·니쉬타 성도(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 - 거룩한 꿈꾸고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뤄주셔
  • 간절한 기도로 힌두교 아내 개종 기적 체험 인도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힌두의 땅으로 불리는 인도에 10년 째 살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여러 번 경험했다. 그 중 가장 큰 은혜이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인도인 아내를 만난 것이다. 나는 대학시절 기독교 동아리 CAM 간사님으로부터 인도 선교를 제안 받았다. 이후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봉사활동 혹은 직장을 구해 인도에 정착하기를 희망했다. 그렇게 여러 번 한국과 인도를 오가던 중 2018년 인도에 진출한 무역회사를 다닐 때 회사 통역을 담당하던 아내를 만났다. 서로의 끌림으로 교제를 시작했지만 종교가 다르다는 큰 문제가 있었다. 아내의 가족은 대대로 힌두교를 믿어왔던 터라 다른 종교는 다 돼도 기독교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리던 중 코로나19가 찾아와 모든 일상을 뒤바꿔 놓았다. 그때 예비 장인장모님이 “둘이 헤어지지 않고 계속 만날 것이면 결혼하라”고 갑작스레 결혼을 승낙해 주셨다. 늘 아내와의 결혼을 꿈꾸고 기도했는데 갑작스레 결혼이 승낙 돼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2021년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한국에서도 결혼식을 올리고 뜻하지 않게 2년이라는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야 했다. 나는 원래 몇 개월만 한국에 체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모든 환경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인간의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절망의 순간, 나는 그 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를 경험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나는 인도에서 그동안 이루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진 않을까하는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그때마다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절대 긍정 절대 감사의 신앙으로 돌파하려고 노력했다. 또 집 근처 여의도순복음동부교회에서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께 나의 모든 어려움을 아뢰고 또 아뢰었다. 인도로 다시 돌아가기 일주일 전 아내가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결심했다. 가족의 반대에도 기독교로 개종을 하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나도 인도로 돌아갈 시간이 늦춰져 우연찮게 건강검진을 했는데 대장에서 용종(선종성 용종)이 발견됐다. 얼마나 컸는지 제거하는 중에 출혈이 멈추지 않아 응급실에 가서 조치를 받을 정도였다. 또한 한국에 세우려던 법인 설립도 잘 해결돼 회사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업무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기도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긍정적인 생각과 꿈으로 나아갈 때 모든 문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결된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 부부는 올해 다시 인도에 들어왔다. 그리고 지난 11월 이영훈 목사님이 코타얌 대성회에 참석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아내와 함께 뉴델리에서 코타얌까지 약 2400㎞ 날아와 많은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인도 내 100개 교회 개척이라는 거룩한 비전을 상기시켜주셨다. 우리 가정이 인도 땅에 임할 부흥을 위한 도구로 쓰임받기를 소망한다. 정리=금지환 기자
  • 2024.12.06 / 금지환 기자

    이미라 집사(장년국) - “성경 읽고 기적 체험했어요”
  • 매일 시편 읽으며 기도 응답, 음식 알레르기 치유 받아 8살이 된 딸아이 로희는 유지방 알레르기가 있어서 우유, 유제품, 생크림을 못 먹는데 지난해부터 달걀 알레르기까지 생겼다. 각종 과일도 알레르기 반응이 나와서 아이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달걀 알레르기가 있다보니 지난해 독감주사를 맞고 응급실에 가기도 했다. 성장기인데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정되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지난 8월 교구장이신 신상윤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다. 기도는 해왔지만 말씀을 읽으며 더욱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고 싶었다. 목사님은 시편을 하루에 10분씩 아이와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하셨다. 나는 딸아이와 그날 바로 시편을 읽기 시작했고 알레르기들이 모두 사라지길 간구했다. 첫날은 기대에 부풀어있어서 즐겁게 성경을 읽었는데 점점 읽기 싫어지는 날들이 생겼다. 하지만 나와 딸아이는 하나님이 주실 기적을 바라보며 힘을 내어 말씀에 집중했다. 추석 때 친정에 갔는데 엄마가 로희에게 무심코 달걀을 묻힌 전을 먹이셨다. 로희는 달걀국에 잠시 넣었다가 뺀 숟가락으로 밥만 먹어도 눈과 입술의 피부가 벗겨지고 일주일동안 약을 먹고 발라야 겨우 진정되는 아이였다. 우리 가족은 너무 놀라 아이를 살폈는데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할렐루야! 달걀 알레르기를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것이다. 우리는 더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과일도 먹어보기로 했다. 로희는 특히 복숭아 알레르기가 심해서 복숭아를 먹으면 입 안이 따가워지고 기도가 부어올라 막히는 증상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셨음을 믿고 조심스레 복숭아를 먹여보았다. 자칫 위험할 수 있어서 긴장했는데 이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포도도 비슷한 증상이 있었는데 포도도 괜찮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마음에는 더욱 굳건히 시편을 읽어야겠다는 결단이 섰다. 딸 로희 뿐 아니라 나와 아들도 우유를 비롯한 유제품 일체, 특히 생크림을 절대 못 먹는다. 생크림이 들어간 빵이나 케이크를 먹으면 죽을 것 같은 극도의 복통이 일어난다. 심지어 나는 화장실에서 여러 번 기절한 적이 있었고, 두 아이는 구토와 설사를 멈추지 않다가 탈진으로 입원 한 적도 여러 번 있었을 정도였다. 그렇게 위험한 우유를 나와 딸과 아들, 셋이 둘러앉아 조금씩 컵에 따라 마셨다. 우유를 마시면 1분 안에 복통이 왔던 내가 아무렇지 않았다. 두 아이도 멀쩡했다. 나는 20년이 넘도록 우유를 마셔보지 못했는데 우유를 먹게 되니 정말 맛있었다. 그 다음 날은 딸기우유를 컵에 가득 채워서 셋이 마셨다. 어찌나 맛있던지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다. 내 간증을 들은 목사님은 함께 기뻐해주시며 우리가 말씀을 읽는 목적은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임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은 말씀 묵상의 목적이 아닌 결과라고 설명해주셨다. 나는 기적만 바라본 것을 반성하며 매일매일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작정했다. 바른 신앙생활의 방법을 알게 되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늘 말씀을 묵상하고 예수님과 하나 되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본다. 정리=이미나 기자
  • 2024.11.29 / 이미나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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