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과 변화
임복실 권사(마포1대교구) - 고난 중에 기도할 때 살리신 하나님의 기적  
  • 난소암과 아들의 심정지 회복 은혜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건강하던 나는 2018년 9월 갑자기 왼쪽 아랫배가 아파 병원에 가게 됐다. 처음엔 단순한 복통인 줄 알았는데 정밀검사 결과 난소암 4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종양이 장까지 붙어 있어 장 일부도 절제해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어떻게 이걸 몰랐을까 싶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내 마음은 평안하고 담담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병원에서 나와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시편 91편 14~16절 말씀을 주셨다.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그 말씀을 받는 순간 온몸이 뜨거워지며 하나님이 고쳐주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암 수치가 너무 높아서 3개월 동안 항암 치료를 한 뒤 그해 12월에 수술을 받았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너무도 평안한 마음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큰 수술이었지만 감사하게도 수술이 잘 되었고 2020년 6월까지 치료를 잘 마쳤다. 그런데 2022년 2월 암이 다시 재발됐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눈물이 멈추지 않았고 처음으로 마음이 완전히 무너졌다. 나는 하나님께 울면서 생떼를 쓰듯 간절히 기도했다. 그날 밤 꿈에서 하나님이 내 몸을 열고 큰 손과 칼로 수술하시는 장면을 보여주셨다. 그 꿈을 통해 하나님이 다시 고쳐주실 거라는 용기와 확신을 얻었다. 그 후 항암을 6번이나 받고 표적치료제까지 복용했지만 머리카락도 빠지지 않았고 몸무게는 오히려 늘었다. 하나님이 치료의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시고 내 몸을 특별히 지켜주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2024년 11월 초 병원에서 암 세포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나님의 기적은 큰아들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2024년 11월 18일 며칠 동안 소화가 안 되고 가슴에 답답함을 느낀 큰 아들이 병원을 찾았는데, 심장 혈관이 심하게 막혀 인공심장 장치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판정을 받았다. 급히 스텐트 시술에 들어갔지만 시술 중에 심정지가 발생해서 대학병원으로 이송됐다. 교구 목사님과 식구들에게 기도를 부탁드리고 둘째 아들 차를 타고 병원에 가는 내내 기도했다. 그 때 둘째가 나를 보더니 “엄마 몸에서 불이 나오고 있어”라고 말했다. 내가 병원에 도착할 즈음 큰아들이 기적처럼 깨어났다. 의사는 왼쪽 심장에 큰 스텐트를 삽입했지만 심정지 시간이 길어서 오른쪽 심장에 상처가 생겼고, 며칠 안에 회복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아들을 고쳐주신다는 확신을 주셨고 그 믿음대로 아들은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했다. 할렐루야!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 중 “고난이 축복입니다”라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 이 일을 겪으며 우리 가족은 믿음 안에서 더 단단해졌고 절망조차 깨끗이 잊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가족 간의 사랑이 더 깊어지는 시간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 가정을 위해 함께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정리=김주영 기자
  • 2025.04.25 / 김주영 기자

    신하준 성도(대학청년국) - 희귀난치병 치유, 지휘자 꿈 안고 비상
  •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기쁜 날 주님을 찬양할 수 있어 행복하다. 나는 어릴 적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했다. 4살 때 장염으로 입원했다가 골반에서 종양이 발견됐고 결국 대학병원에서 희귀난치병에 속하는 조직구증식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감사하게도 골반의 종양은 자연스레 없어졌다. 하지만 7살 때 아버지의 목사안수식 하루 전날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교회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나님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종양은 머릿속 정중앙 가장 깊은 곳에 위치했고 방사선 치료를 한차례 받으면서 저녁만 되면 몸도 마음도 힘들어서 많이 울었다. 그리고 7살이었지만 아버지를 따라 고등부 수련회에 즐겁게 참석했다. 수련회를 다녀온 후 신기하게도 더 이상 저녁마다 울지 않게 됐다. 이후 방사선 치료를 비롯한 그 어떤 치료를 하지 않았음에도 종양의 크기가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온가족특별새벽예배 때 이영훈 목사님께서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3년 전 정기 검진 때는 종양이 흔적만 남아 완치에 가깝다는 의사 선생님의 소견을 듣게 됐다. 사실 처음 발병했을 때 후유증으로 키 성장과 지능 발달 등에 이상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의사 선생님께서 놀라워하실 정도로 키도 잘 컸고 학업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일반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서울에 있는 음악대학에 들어갔다. 작곡과로 1년을 공부하다가 새로운 도전을 위해 휴학하고 준비했는데 몇 번의 실패를 하게 됐다. 나는 중등부부터 플루트 악기로 매주 봉사했고, 고2 때부터 겟세마네찬양대, 2년 전부터는 에벤에셀찬양대 앙상블에서 플루트로 봉사해왔다. 시험기간과 입시 시험 전날에도 또 가족 휴가 때도 봉사의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아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휴학기간 동안 교회에서 봉사하고 학비 마련을 위해 음악 활동을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로 인도하셨고 믿음의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게 됐다. 결국 올해 3월 연세대 교회음악과에 합창지휘 전공으로 입학하게 됐다. 이번 입시를 준비하면서 레슨비 또한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채워주셨다. 때로는 힘들었지만 마침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대성전에서 처음 플루트로 찬양했을 때 했던 기도를 기억한다.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서 끝까지 찬양하게 해주세요.” 치료의 하나님, 찬양을 기뻐하시며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음악으로 전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행복한 지휘자가 되길 꿈꾼다. 정리=이미나 기자
  • 2025.04.18 / 이미나 기자

    조현주 성도(마포1대교구) - 심장을 뛰게 하는 하나님이 주신 꿈
  • 환경을 뛰어넘어 꿈꾸던 승무원 합격 어려서부터 내 꿈은 전 세계 하늘을 날아다니는 승무원이었다. 중국어를 전공한 나는 중국에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대학졸업 후 항공사 지상직으로 취업했다. 적응을 잘했고 근무만족도 컸지만 꿈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승무원이 되고자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갔다. 좋은 직장 동료들을 만나 호주에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던 중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집안일로 잠시 한국에 들어왔는데 그사이 호주 국경이 막혔다. 내 생활 터전과 모든 게 그곳에 있는데 기한도 없이 한국에 머물며 1년간 재택근무를 했다. 결국 회사가 어려워져 실직자가 됐다. 서른이 넘었는데 너무나 막막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그때 어머니께서 “너는 외국어를 하니 남선교회 외국인안내실에서 봉사하면 좋겠다”고 권유하셨다. 봉사를 해보니 세계 각국에서 오는 외국인 성도들을 만나고 도우면서 보람이 생겼다. 동시에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평안함과 은혜를 느꼈다. 얼마 후 호주 국경이 열렸다. 집과 살림을 정리하려고 호주에 가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호주로 다시 돌아갈까? 아니, 내 꿈은 승무원인데…’ 하지만 코로나 시기를 지나며 나이를 먹었고 항공업계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의 진로를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이어나갔다. 어느 날 한 외국 항공사의 채용 기사를 봤다. 그 채용은 끝났지만 내겐 업계가 다시 살아난다는 희망으로 보였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얼마 후 중국어와 영어를 모두 활용할 수 있어 내가 가장 원했던 항공사가 채용의 문을 연다고 했다. 2024년 신년축복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에 참석해 하나님이 주신 꿈을 위해 기도하면서 기쁘게 완주했다. 드디어 5월에 내가 원하던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외에서 진행되는 각종 안전교육, 서비스 교육에서 수시로 입사 취소가 일어났다. 함께 입사한 동료들을 떠나보내며 심란한데 당장 공부할 양도 많아서 압박이 어마어마했다. 그럼에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는 말씀을 의지하고 기도하면 시험과 실전에서는 잘 헤쳐나갈 수 있었다. 예민한 상황에서 편을 갈라서 싸우는 일도 생기는데 우리 조에는 서로 도와주는 좋은 친구들만 있어 감사했다. 나는 지금 회사가 있는 홍콩에서 지내는 중이다. 쉬는 날을 몰아서 한국으로 온다. 가족이 그리운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여의도 대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봉사를 하기 위해서다. 내게는 주일 뿐 아니라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가 너무나 귀하다. 막막한 상황에서도 길을 내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참 좋으신 하나님을 세상 모두가 알기 바란다. 정리=복순희 기자
  • 2025.04.11 / 복순희 기자

    이은애 집사(반석대교구) - “하나님은 나에게 안전벨트 같은 분”
  • 나는 대학 졸업 후 남들이 부러워하는 유수 기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내가 롤모델로 삼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던 상사가 구조조정 1순위가 되는 것을 보면서 회의감에 빠졌다.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겠다고 부모님께 말하자 적잖이 충격을 받으셨다. 6개월 안에 어학공부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미련 없이 돌아올 테니 걱정 말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유학 생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척박한 광야에서의 삶 같았고 그로 인해 깊은 향수병과 우울증을 앓게 됐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기력해진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믿음의 이웃들을 보내어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갖게 하셨다. 덕분에 6개월 만에 어학공부를 마치고 원하던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유학 시절 열심히 교회에 다녔던 나는 매주 금요일 저녁이면 중보기도 모임에 참석했다. 우리의 기도는 오로지 중국 복음화에 초점이 맞춰졌고 자정 넘어서야 모임이 끝났다. 왜 기도를 시키시는지 알 수 없었지만 기도모임은 1년간 지속됐다. 한 번은 이웃의 신고로 공안이 출동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공안은 기도 모임을 유학생들의 시끄러운 파티쯤으로 생각하고 경고를 주는 것에 그쳤다. 하나님이 공안의 눈을 가려주신 것이었다. 유학 시절의 믿음생활은 잠들어 있던 나의 신앙 열정에 꺼지지 않는 불을 붙였다. 5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친 나는 캐나다에서 자리를 잡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내 계획과는 전혀 다르셨다. 중국어 통역을 잠시 맡아달라는 지인의 부탁은 대기업 계약직으로 이어졌고, 그 안에서 나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일이 주는 행복을 깨닫게 됐다. 또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등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안에 거하게 됐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또 있었다. 중국에서 공부할 때 출석했던 교회가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도 같은 교회를 다니며 제자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던 중이었다. 수료만 남겨 둔 상황에서 어느 날, 조용기 목사님을 꿈에 뵈었다. 나에게 초청장을 내미신 목사님은 순복음으로 돌아와 제자훈련에서 배운 선한 영향력을 모교회에서 펼쳐달라고 당부하셨다. 꿈이 하도 생생해 6월인데도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그렇게 나는 2017년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학청년국을 거쳐 지금은 반석대교구에 정착해 신앙생활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에는 반석대교구 3040 모임의 회장으로 부름 받았다. 올해 신년축복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나는 이영훈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 많은 은혜를 받았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를 당연하게 여겨왔던 나는 그 은혜가 할머니를 시작으로 어머니로 이어진 기도 덕분임을 깨달았다. 하나님 앞에 나의 교만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겸손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동안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만 같았던 내 인생에서 하나님은 항상 안전벨트처럼 나를 꽉 붙들어 주시고 위험하지 않도록 늘 보호해 주셨다. 그런 하나님을 위해 이제 내가 할 일은 반석 위에 세우신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더욱 굳건해지도록 겸손과 섬김의 마음으로 헌신하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 주님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주셨다고 생각한다. 정리=오정선 기자
  • 2025.04.04 / 오정선 기자

    엠마 지 성도(시티하베스트처치) - “기도할 때 8년간 앓던 피부병이 사라졌어요”
  • 지난해 1월 여의도순복음교회 신년축복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후 내 삶에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햇수로 8년 동안 날 괴롭혔던 유두종 바이러스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내가 처음 이 질환을 알게 된 것은 2016년이었다. 왼쪽 가운데 손가락에 검은색 점이 생긴 것이 그 시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혹처럼 커졌고 굳은살로 변하더니 단단해졌다. 병원에서는 다른 사람에게도 전염될 수 있어 치료가 시급하다고 했다. 이후 나는 싱가포르 국립 피부센터에서 2주에 한 번씩 부위를 긁어내고 액체 질소로 태운 뒤, 수포가 생기면 치료하는 방법을 반복했다. 2023년 12월까지 코로나 기간 2년을 제외하고 6년 동안 끊임없이 치료 받았다. 정말 길고도 지루한 치료 과정이었다. 병원을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과 불편함 그리고 늘어나는 치료비는 점점 더 나를 지치게 했다. 병원 간호사들이 나의 고등학교 생활부터 대학 졸업과 결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알 정도였다. 하지만 좀처럼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바이러스는 손목까지 번졌다. 그러던 2024년 1월이었다. 시티하베스트처치 성도들과 함께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린 신년축복 열두광주리 새벽기도회에 참석했을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이영훈 목사님이 설교 후 치유 기도를 해주셨는데, 그 순간 마음에 하나님께서 이 바이러스를 오늘 즉시 치유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나는 내 몸속에서 새살이 차올라 감염된 피부를 밀어내는 장면을 생각하며 방언으로 기도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말씀에 근거해 긍정적인 생각만 떠올렸고 그때마다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하지만 내 피부는 한국의 겨울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더 많이 갈라져 상처가 깊어졌다. 상처로 생긴 피딱지가 너무 심해 어디가 바이러스성 사마귀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는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리고 싱가포르로 돌아와 예정된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을 방문했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피딱지를 제거했을 때 피부는 이미 부드럽게 재생되어 바이러스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순간 나는 한국에서 새살이 돋는 생각을 하며 기도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8년간 고생했던 피부병을 치유해 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한 달 뒤 마지막 검진을 받고 나는 공식적인 완치 판정을 받았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어떤 유두종 바이러스도 재발하지 않고 깨끗한 피부를 유지하고 있다. 이 모든 영광 하나님께 올려드린다. ‘기도의 영성’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며 큰 은혜와 도전을 받았다. 앞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에 힘쓰겠다. 정리=금지환 기자
  • 2025.03.28 / 금지환 기자

    이지혜 성도(대학청년국) - 공황장애, 발목 통증 하나님 은혜로 치유
  • 학창시절 겪은 따돌림 주 안에 회복 나는 독일 뮌스터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있다. 모태신앙으로 어릴 때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녔던 나는 잠시 신앙생활에 소홀했다가 할머니와 엄마를 따라 고3 때 다시 교회에 나오게 됐다. 어렸을 때 따돌림을 겪으면서 우울과 불안이 심했지만 내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해 오랫동안 방치해 왔다.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돼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서 따돌림이 더 심해졌고 내 마음은 더욱 피폐해졌다. 왕따로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늘 무기력하고 불안했다. 공황장애로 갑자기 숨을 못 쉬어 위험한 상황이 오기도 했다. 횡단보도 조차 맘편히 건널 수 없었고, 버스를 못 타 2시간 거리를 걸어 다닌 적도 있다. 치료를 위해 클리닉이나 심리상담센터도 가봤지만 소용없었고 정신과 상담을 해도 약만 받아올 뿐 효과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약으로 인한 부작용만 심해졌다. 23살까지 약을 복용하고 중단하기를 반복하며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독일로 가라는 비전을 주셨고, 2023년부터 독일에서 어학 공부를 시작해 2024년 10월 뮌스터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을 앞두고 오른쪽 발목을 다쳐서 한국에서 두 달간 치료를 받았지만 통증이 없어지지 않았다. 독일로 돌아가 매일 붕대를 감고 학교에 다녔는데 너무 아파서 잠도 잘 수 없었다. 또한 공황장애로 길에서 발작이 오기도 하고 심한 우울감으로 바깥 활동이 어려워 학교도 자주 빠지게 됐다. 불규칙한 식사로 심한 위 통증까지 겪었다. 1학기를 마친 후 올해 1월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나는 한국에 다시 들어왔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양쪽 발목이 부어 걷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소염제를 복용하며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차도가 없어서 몸과 마음 모두 지쳐갔다. 그런데 2월 16일 주일 3부 예배 시간에 기적이 일어났다. 이영훈 담임목사님께서 설교 후 신유기도를 하시며 “한이 맺혀 온 몸이 아픈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치료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고 가슴이 불길처럼 타오르며 온 몸이 떨렸다. 가슴속 돌덩이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힘이 없던 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영훈 목사님은 계속해서 “위가 부어 있고 통증이 있는 사람이 치유됐다”고 선포하셨고 관절의 염증으로 인해 잘 걷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치유도 말씀하셨다. 그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침받는 느낌이 나면서 마치 파스를 붙인 것처럼 뼛속까지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설교 내내 있던 양 발목과 위의 통증이 사라지고 마음까지 편안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하나님께서는 단 한 순간에 나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셨다. 기적은 또 일어났다. 3월 초 오순절사랑훈련학교 180기에 참여하면서 내 안에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사라지고 예수님의 사랑이 채워졌다. 얼마 전만 해도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검사를 하면 또래 중에 불안수치가 최대였다.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성령을 받으면서 마음의 고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시간이 소중해졌고 날마다 감사를 고백하게 됐다. 하나님이 하시면 그 어떤 고통과 아픔도 치유된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의 고통을 겪는 분이 있다면 꼭 교회에 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길 소망한다. 정리=이미나 기자
  • 2025.03.21 / 이미나 기자

    정성금 성도(통일대교구) - 고난 가운데 찾은 하늘의 소망
  • 죽음의 고비마다 임한 주님의 손길 나는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는 중류 계급이라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를 비롯한 친척들도 당 간부이거나 군 고위 관계자였기 때문에 북한 제도를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난의 행군 시기가 오면서 남동생이 길거리에서 죽고 아버지는 더는 살 희망이 없다면서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남편이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매일 도박과 음란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1999년 말, 30대 초반에 북한을 탈출할 결심을 하게 됐다. 아들과 함께 두 차례 탈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세 번째 시도에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두고 먼저 중국에 가서 자리를 잡고 데리러 오겠다는 굳은 약속을 한 뒤 탈출에 성공했다. 두만강을 넘어 중국 길림성 산골에 사는 총각에게 인신매매로 팔려 15년을 생활했다. 북한에 두고 온 아들과 부모 형제를 생각하면 제대로 잠을 못 이루고 눈물로 지새우다 보니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심한 출혈로 병원에 가보니 자궁에 문제가 생겨 수술하지 않으면 3개월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동네 이웃의 전도로 한족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나를 안타깝게 여긴 한 교인이 벼를 팔아 번 돈을 주며 빨리 수술하라고 도와줬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나는 마태복음 10장 1절 말씀이 떠오르며 나를 치료한 것은 전적인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북한사람이라고 고발당해 공안차에 실려 길림성 감옥으로 가게 됐다. 나는 3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밤낮으로 중국어 찬양을 불렀다. 밤이 되고 내 찬양소리가 울려 퍼지던 중, 한 경찰이 다가와 자신도 기독교인이라며 내일 오후에 버스가 오면 북송될 텐데 지금부터 가짜로 죽는 흉내를 내면 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나는 입에 거품을 물고 바지에 물을 부어 실수한 것처럼 쓰려져 있었다. 다음 날 경찰들이 내게 다가와 눈을 뒤집으며 “죽어가고 있다”며 집으로 후송시켰다. 그 후 몇 차례 공안이 잡으러 왔지만 하나님과 교인들의 보살핌 속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고 2014년 제3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학과 4년을 졸업하고 치열하게 생활하다보니 연골이 심하게 닳아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해야만 했다.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의 기도와 격려 가운데 수술은 잘 되었지만 수술비가 문제였다. 그런데 “모든 것을 근심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병원 접수처에서 구청과 주민센터가 협력해서 수술비를 해결해줬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현재 평화나눔 봉사단의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다. 앞으로의 비전은 탈북민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작은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하늘의 소망을 품고 감사히 살아가겠다. 정리=김주영 기자
  • 2025.03.14 / 김주영 기자

    김용연 장로(강서1대교구) - 뇌경색으로 마비 왔지만 후유증 없이 회복
  • 하나님 은혜로 남선교회 28년 봉사 교구 성도들의 중보기도와 사랑받아 감사 지난해 11월 14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눈앞에 글자가 두 개로 보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출근을 하고 근무를 다 마치고 퇴근을 일찍 했다. 집에서 딸을 만났는데 간호사인 딸이 나를 보더니 어서 빨리 병원에 가자고 재촉을 했다. 응급센터로 가는 중에도 나는 내일 교회 감사위원회 일로 제주도를 가야하는데 내가 몸이 안 좋아 갈 수가 없을 것 같다고 장로님들께 연락을 했다. 검사 결과 뇌경색이었다. 목 뒤쪽이 혈전으로 막힌 것이었다. 그때부터 장로님들과 교구 목사님과 성도들의 중보기도가 물밀듯이 시작됐다. 금요성령대망회에서도 내 기도제목이 대성전 전광판에 올려져 예배에 참석한 전 성도가 함께 기도해 주셨다. 입원을 하고 3~4일 후 얼굴 감각이 이상해지고 입이 돌아가고 몸 왼쪽으로 마비가 왔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마음속에는 걱정이나 불안함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계속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장 5절 말씀을 암송하면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렸다. 집중치료실에 가서 보름 정도 있다가 일반병실로 옮겨졌고 한 달 만에 퇴원을 하고 수술 없이 재활치료와 약물 치료를 받았다. 병원에서 그만 오라고 할 정도로 성도들이 면회를 많이 와주셨다. 많은 분들의 기도 덕분에 지금은 후유증 없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정말 감사한 것은 딸 결혼이 12월 14일이었는데 딸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의료진도 이렇게 회복이 빠른 경우는 본 적이 없다며 놀라워했다. 아내의 끈질긴 전도 덕분에 교회를 다니게 된 후 28년 동안 남선교회 봉사를 내려놓은 적이 없다. 하나님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내 모든 아픔과 슬픔을 다 치유 받을 수 있었고 항상 샘솟는 기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항상 하나님이 주신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고 열심히 직장 생활할 수 있었다. 믿음의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자녀들도 장성하여 각자의 분야에서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다. 아들은 약사를 하다가 의대로 편입을 하고 지금은 전공의 3년 차이다. 딸도 간호사로서 환자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나도 그동안 직장 생활을 하면서 사이버대학으로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공부해 왔다. 실습만 남았는데 앞으로도 더 많이 공부하고 자격을 갖출 계획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내가 공부하고 있는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더 구체적으로 내가 헌신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전문성을 갖춰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함께 믿음 생활하며 중보기도해주신 교우들과 주의 종들께도 감사드린다.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속히 하나님 아버지께로 와서 이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정리=복순희 기자
  • 2025.03.07 / 복순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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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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