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들
⑫ 제자의 길(完)
  •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는 공통적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로서 “따르고”(성경 원어, ‘아코루떼오’), “섬기는”(‘디아코네오’) 삶을 살 것을 요구하면서도 각 복음서별로 독특한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이웃과 세상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한편 마태복음은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서” 그것을 바르게 “행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누가복음은 참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판타’) 버리는 전적인 헌신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지난 호에서 지면 관계상 줄였던 누가복음의 제자도에 대해 논의를 조금 더 진행하자면 누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열두 제자를 넘어서서 보다 확대된 청중인 “무리”(‘오클로스’)나 “백성”(‘라오스’)도 예수님의 지속적인 가르침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를테면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 소수만 추가된 “내부자”들에게만 특별 교육을 시키는 경우가 많고(막 4:10∼12), 마태복음에서는 유명한 “산상설교”(마 5∼7장)를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시는 반면에(마 5:1),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거의 내용이 비슷한 “평지설교”(눅 6:20∼49)를 “많은 백성들”과 “무리들”에게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눅 6:17∼19). 따라서 “무리”와 “백성”도 넓은 의미에서 제자라고 많은 누가복음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누가는 일종의 “만인 제자설”을 주창하고 있다. 누구나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누가복음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누가복음의 제자도와 세상 재물의 상관관계에 대한 교훈이 두 가지 다른 흐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즉 예수님의 열두 제자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을 섬기는 사역에 전적인 헌신을 할 사역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소금이 자기를 완전히 녹이듯이 “모든” 것을 버리는 자기 희생을 해야 한다(눅 14:33). 그러나 이와는 구별되는 사역자들로서 각자의 집과 사회적 지위에 머물면서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완전히 새로운 메시야의 시대에 합당한 삶을 실천하는 또 다른 의미의 제자들도 누가복음은 소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세리장 삭개오와 같은 인물이다. 세리 마태(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전적인 제자가 되었지만(눅 5:27∼28),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서 그의 과거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구원받아 주님으로부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찬사까지 받고서도 계속 자신의 집과 세리장의 지위에 머물면서 또 다른 의미의 제자의 삶을 실천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눅 19:1∼10). 삭개오 이외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예수님과 제자들과 동행하며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길”(눅 8:1∼3) 정도로 개인 재산을 계속 소유하면서 “여성 제자들”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누가복음 학자들은 제자도와 물질소유의 관계에 대한 이처럼 두 가지 다른 흐름(전적인 포기와 적절한 사용)이 있는 것은 누가 공동체가 이를테면 전문사역자 그룹과 평신도 그룹의 상호협력 속에서 복음전파가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한복음의 제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신약성경의 첫 세 복음서와 요한복음은 다른 점을 보여주는데 제자도에 있어서도 요한만의 특이한 강조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요한복음의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세 가지 길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요 8:31),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요 13:35), 그리고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 “거한다”는 개념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롬 6:3∼5)과 유사한 개념이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거하신다(요 14:10).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신다(요 15:4).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주신 “새계명”이다(요 13:34).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가지로서 굳게 붙어 있음으로써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진액을 받아야 한다(요 15:4∼5). 그러므로 요한복음의 제자도는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키고 주님과 하나가 되어 주님 안에 거할 것을 요구한다. 요한복음의 제자상과 관련해서 한 가지 추가할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을 선포하신 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숨을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요 20:21∼22)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파송 받은 사역자들로서 자신들의 힘으로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시작하신 구원 사역을 계속해서 수행해야할 사명을 가진 존재들이다.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제자의 길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상호관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는 4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음으로써 각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제자들이 가야할 길과 각각의 복음서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측면들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복음서에는 열두 제자들의 긍정적인 모습과 희망적인 요소들과 함께 부정적인 모습과 절망적인 요소가 뒤섞여 있음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 이처럼 예수님의 “공식적인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까워짐에 따라 무대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그때까지 숨겨져 있었던 “비공식적인 제자들”이 하나 둘씩 예수님 곁에 나타나서 “공식 제자들”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메꾸어 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복음서는 왜 열두 제자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가감 없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씨름하였다. 그리고는 각 복음서가 독특하게 강조하고 있는 제자의 길에 대해서 핵심적인 사항을 정리해보았다. 이제 우리의 남은 과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4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제자도가 바울서신을 비롯한 신약성경의 나머지 책들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다. 이 또한 우리가 걸어온 시간 이상의 연구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방대한 작업이 되겠지만 4복음서의 제자도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매듭지으면서 간략하게나마 상호관계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4복음서를 제외하고는 복음서의 용례와 같은 의미에서 “제자”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의 다른 책들에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바울서신의 제자도”라든지 “공동서신의 제자도”라는 주제는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정확한 개념이 될 수 없다. 그렇지만 4복음서의 “제자”에 해당하는 개념을 바울서신이나 그 밖의 신약 문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바울서신의 주요개념 중 하나인 “육신을 따르는 삶”과 정반대에 놓여있는 “영(성령)을 따르는 삶”(롬 8:5∼18)이라든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삶(롬 12:1),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주님께 나오는 삶(갈 2:16),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삶(고전 13장),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는” 삶(엡 5:8) 등도 4복음서의 제자의 삶과 거의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삶(히 3:14),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거부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삶(요일 2:15∼16) 등 또한 제자가 가야할 길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이신 그리스도께서(히 12:2) 우리보다 앞서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으니(벧전 2:21) 이제 우리에게 남은 길은 그가 가신 “길에서” 그를 “따르는 것”밖에(막 10:52) 없을 것이다. 김호성 목사(국제신학연구원장)
  • 2012.12.09 / 복순희 기자

    제자의 길(中) - 행함과 섬김
  • 4복음서의 주인공은 예수님 다음으로는 단연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제자들이 비록 예수님과 함께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님과의 관계가 오히려 ① 무지의 단계, ② 오해의 단계, ③ 배반의 단계로 악화되어갔다 해도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까지 예수님 곁에 그래도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더욱이 부활의 새벽에 세 여인이 ‘빈 무덤’을 확인했을 때 무덤에 있던 흰옷 입은 청년이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막 16:7)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예수님을 배반하거나(가룟 유다), 부인하거나(베드로), 아니면 도망간(나머지 열) 제자들을 예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만나주셨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4복음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자의 길’에 관한 책이라고 성서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제자의 길’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해보기로 하자. 1. 마가복음 지난 호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마가복음에 강조되어 있는 제자의 길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십자가를 지는 삶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의 ‘십자가’는 환난과 시험, 문제와 고난, 사명과 과제와 같은 영적인 것을 의미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신약시대 당시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이라는 문자적 의미의 죽음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다(막 13:9∼13 참조).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장차 받으실 십자가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항변하거나(막 8:32) 깨닫지 못하거나 묻기조차 두려워하거나(막 9:32) 더 나아가서 십자가를 거부하고 세상적인 영광과 성공만을 좇아갔던 것이다(막 9:33∼34, 10:35∼41). 제자의 제1덕목은 스승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따르다’(원어: ‘아콜루떼오’)는 동사는 마가복음에서 제자가 가는 길을 가장 잘 요약해주는 용어이다(막 1:18, 20, 2:14, 10:21, 52 등).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 그것이 제자가 가야할 길이다. 이런 의미에서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아 눈을 뜨게 되자 주님을 십자가의 ‘길에서 따랐다’는 것은 마가의 제자의 길이라는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가야할 길로서 ‘섬기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따르다’ 못지않게 제자도에서 중요한 용어가 ‘섬기다’(원어: ‘디아코네오’)라는 단어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집권자들과 고관들이 백성들을 강압적으로 억압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막 10:43∼44). 이어서 주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위대한 말씀을 남기셨다(막 10:45). 이처럼 마가복음이 강조하는 예수님의 리더십은 ‘섬김의 리더십’이다. 마가의 제자도를 잘 요약해 주는 이 두 단어를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끝까지 지속적으로 실천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를 비롯한 많은 여인들로서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다(막 15:40∼41). 2. 마태복음 마태복음도 마가복음에서와 같이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하고(마 10:38),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마 20:28) 말한다. 이와 더불어 마태는 주님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듣는다’(원어: ‘아쿠오’)라는 동사가 마태복음의 제자의 길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용어로 등장한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다. 열두 제자들은 천국의 백성인 ‘제자의 삶’을 말씀하신 ‘산상설교’(마 5∼7장)를 직접 들었고(마 5:1), 예수께서 12제자에게 권능과 능력을 주시고 파송하시면서 하신 ‘사도직에 관한 설교’(마 10장)를 들었으며, 일곱 가지의 ‘천국 비유 설교’(마 13장) 또한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고, ‘교회 생활에 관한 설교’(마 18장)와 ‘종말과 심판에 관한 설교’(마 24∼25장)를 직접 들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일곱 번에 걸쳐 ‘화 있을진저’를 선포하시는 현장에도 제자들은 어김없이 있었다(마 23:1). 주님께서도 이처럼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제자들을 향하여 축복선언으로 화답하신다.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b).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현장에 있다 보니 마태복음의 제자들은 (전부는 아니라 해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기 시작한다. 주님께서 천국 비유 설교를 마치신 후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으시자 제자들은 “그러하오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대답했다(마 13:51). 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기 어려운 것은 ‘집’에 들어가서 제자들과 주님만 있을 때 적극적으로 그 의미를 주님께 질문하기도 한다(마 13:10, 36). 이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았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지상명령’을 내리신다(마 28:16∼20). 더 나아가 마태복음은 제자들에게 주님께 들은 말씀을 행할 것을 요구한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제자들이 행할 것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마 5:17)께서 완전하게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계명(= 마태복음의 주님의 말씀)이다. 그것은 외적인 ‘간음’이라는 행동을 규제했던 모세의 율법을 넘어서서 ‘음욕’이라는 마음의 동기까지 살피는 내면화된 율법이다(마 5:27∼30). 이와 같은 맥락에서 마태복음은 4복음서 중에서 행함을 가장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인 것도 모두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마 5:16). 뿐만 아니라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주님의 말씀인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 또한 천국에 들어가는 제자의 자격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3. 누가복음 누가복음의 제자도는 무엇보다도 세상 재물에 대한 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인다면 누가복음은 제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원어: ‘판타’) 버리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제자들을 부르실 때 마가와 마태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비롯한 첫 제자들이 ‘즉시’ 순종한 것을 부각시켰다면(막 1:18, 마 4:20), 누가는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눅 5:11)라고 보도함으로써 소금과 같이 모든 것을 버리는 희생과 헌신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 호에서 계속 논의하겠지만 신약성경의 제자도는 이처럼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책별로, 또는 저자별로 독특한 강조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과 이웃과 세상을 ‘섬겨야’ 하며(마가복음),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서’ 그것을 바르게 ‘행하여야’ 한다(마태복음).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는 전적인 헌신과 희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누가복음). 우리보다 앞서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바로 이와 같은 삶으로서 우리에게 내비게이션과 같이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김호성 목사(국제신학연구원장)
  • 2012.11.1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제자의 길(上) - 십자가와 순교
  • 보통 ‘제자’라고 하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제자’라는 용어를 열두 제자에만 한정하지 않고 많은 경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제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6장 7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제자’란 열두 제자가 아니라 주님을 영접한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행 9:10)라는 말씀에서의 ‘제자’ 역시 열두 제자라고 하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곤란한 구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제자’라는 용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을 의미하기도 하는 포괄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약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빛과 그림자, 영광과 굴욕, 희망적인 면과 실망스러운 면을 비교적 자세히 확인해 보았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그러니까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시점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예수님의 ‘공식 제자들’이 남긴 빈자리를 그 때까지 복음서의 여백으로 비껴져 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이 채우며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에서 따름으로써 ‘비공식 제자’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한 것 또한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관찰을 통해 분명해지는 한 가지 사실은 예수님께서 지상사역을 하실 때 어떤 제자들이 어떤 일을 했고, 누가 ‘공식’/‘비공식’ 제자였다는 식의 역사적인 정보를 우리에게 주기위해 신약성경이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신약성경이 열두 제자들의 (간혹 있었던) 성공과 (대부분의 경우를 차지하는) 실패를 서술하고, 그들 대신 바디매오나 많은 여성 제자들과 같은 익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매장, 부활의 현장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의 목격자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제자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이들을 반면 선생, 또는 ‘본보기’(고전 10:6, 11)로 삼아서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바람직한 ‘제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이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잘 살펴보는 것은 곧 우리의 나아갈 바를 알려주는 성능 좋은 내비게이션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지금까지 살펴본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을 통해서, 그리고 이름 모를 ‘비공식’ 제자들을 통해서 21세기의 제자들인 우리가 가야할 길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물론 주님께서 직접 제자가 걸어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사역을 통해서 직접 제자가 따라가야 할 길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는 길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 말씀은 ‘지상명령’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원문 성경을 보면 “가르쳐 지키게 하라”가 주동사가 아니라 ‘제자로 삼으라’가 주동사이다. 즉 우리말 번역처럼 선교지에 가서 가르치고 지키도록 하라는 ‘교육 명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으라는 ‘선교 명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문을 직역한다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제자로 삼으라!”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과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더 많은 주님의 제자들을 키워내는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근거해서 어떻게 함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가? 앞으로 3회에 걸쳐서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제자의 길’에 대해서 고찰함으로써 본 ‘예수님의 제자들’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최초로 기록된 복음서로 알려져 있는 마가복음이 가르치고 있는 제자의 길에 대해서 정리해보기로 하자. 대부분의 마가복음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마가복음은 고난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향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갈 때 찬란한 부활과 영광의 아침이 밝아온다는 ‘복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처음으로 주님께서 당하실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예고하셨을 때(막 8:31),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베드로가 이를 항변하자(막 8:32),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시면서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그러므로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제국 시대의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처형방식이었다. 이것은 당하는 사람이나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극도의 고통과 잔인함을 경험하고 목격하게 함으로써 다시는 저러한 처벌을 당할 일을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학습효과’를 심어주기 위한 처벌방식이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로마제국의 십자가 처형의 대상자는 크게 두 가지 죄를 범한 사람들이었다. 첫째는 도망 노예였다. 동서남북을 향해 잘 훈련된 로마군대를 통해서 정복사업을 펼쳐가던 로마제국은 그 광대한 영토를 개간하고 경작할 일손으로 정복지에서 끌어온 노예로 충당해 나갔다. 이처럼 로마제국의 고대 경제학의 한 축을 담당하는 노예들 가운데서 이탈자가 나온다고 한다면 로마제국 전체의 안정에 위협이 될 소지가 다분했다. 그래서 도망 노예를 십자가로 처형함으로써 일벌백계의 효과를 노리고자 했다. 둘째는 정치범이었다. 로마제국이나 로마제국의 제도에 항거하는 봉기나 저항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로마제국은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 때 ‘십자가’를 입에 올린다는 것은 금기사항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진리를 수호하다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들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실제로 주님께서는 십자가 처형을 세 차례에 걸쳐서 예고하신 후에(막 8:31, 9:32, 10:33∼34),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대속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음을 밝히시고 있다(막 10:45). 이처럼 제자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신 후에 파송하셨을 때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능력 있는 말씀을 전하고 돌아와서 주님께 선교 보고를 하는 긍정적인 이야기(막 6:7∼13, 30∼31) 가운데에 침례 요한이 헤롯왕에게 잡혀서 순교하는 이야기(막 6:14∼29)가 끼어듦에 따라 희망찬 선교의 현장이 순교의 피로 물드는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선교는 순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마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제자의 길이다. 제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 2012.10.1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⑨ 이름 없는 제자들 (하)
  • 12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부터 예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주옥같은 말씀을 듣기도 하고, 능력 있는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목격하면서 많은 교훈과 훈련을 받았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을 때(마 10:1), 그들도 주님처럼 권능을 행하기도 했다(막 6:12∼13). 그들이 자주 부족한 언행을 일삼았기 때문에 주님께 책망을 받기도 했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예언하셨을 때(막 14:27),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강하게 부정했다(막 14:31). 여기에서 우리는 (나중에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말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처음 의도만큼은 주님의 운명과 같이 하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12제자들의 ‘충성도’는 여기까지였다. 상황이 급박하게 변하여 유대교 지도자들이 보낸 무리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검과 몽치를 가지고 들이닥치자(막 14:43) 그들의 비장했던 ‘희망사항’과는 달리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거나(가룟 유다), 부인하거나(베드로), 아니면 도망하고 말았다(나머지 열 제자). 예수님의 ‘공식 제자단’이라고 할 수 있는 12제자 그룹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바로 이때 그동안 이들 12제자들에게 ‘가려져 있었던’ 이름 없는 제자들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맹인 바디매오는 그의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영의 눈까지 밝아져 12제자들은 가기를 거부했던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를 ‘따라감’으로써(막 10:52) 이름 없는 제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또한 남성 제자들 틈에 숨겨져 있던 여성 제자들이 대거 ‘외롭게’ 고난당하시는 주님 곁을 지킨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인 십자가 처형, 매장, 부활의 목격자가 된다(막 15:40∼41, 47, 16:1∼8). 문자 그대로 예수님의 ‘공식’ 제자들이 ‘비공식’ 제자들에 의해 대체되는 순간이다. 공식/비공식, 내부자/외부자의 경계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눅 13:30) 대역전이 일어났다. 이번 호에서는 계속해서 이름 없는 제자들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여성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공관복음의 여성 제자들 공관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에 특히 12제자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이 많이 나타나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 글에서 자세히 살펴본 바 있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긍정적이었고, 더 나아가 몇몇 여성들은 ‘제자’의 수준에까지 이른 모습을 보여준다. 공관복음 전체에서 침례 요한의 목을 친 헤로디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여성이 남성 제자들과는 대조적으로 긍정적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가장 먼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섬긴 여성 제자로 베드로의 장모를 들 수 있다(마 8:14∼15, 막 1:29∼31, 눅 4:38∼39).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시자 그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었다”(마 8:18). 여기에서 “수종들다”는 표현은 제자도의 전문용어인 ‘섬기다’(디아코네오)와 같은 단어이다. 또한 두 렙돈을 성전 헌금함에 넣은 가난한 과부도 이름 없는 제자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하다(막 12:41∼44, 눅 21:1∼4).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보시고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21:4). “생활비 전부(판타)”를 하나님께 드린 것은 누가복음이 요구하는 제자도(弟子道) 중 중요한 한 항목이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판타)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 또한 이름 없는 제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막 26:6∼13, 막 14:3∼9).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심으로써 이 여인의 헌신을 높게 평가하셨다(막 14:8, 9). 이 여인의 행동은 나중에 또 다른 ‘여성 제자들’이 ‘(돌아가신)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낸 무덤에 갔지만 예수께서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막 16:1∼8)을 고려할 때 그 중요성과 상징성이 더욱 크게 부각되고 있다.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도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여성 제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눅 10:38∼42).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예수님을 섬기는(디아코네오) 일로 분주했지만,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데 집중했다(눅 10:39). 주석가들은 마리아에 대한 이러한 묘사가 사도 바울이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행 22:3) 것을 서술한 표현과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리아야말로 당시의 여성의 역할을 부엌일로만 제한한 사회적 관행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문하에서’ 공부하는 제자로까지 자리매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마르다가 예수님께 마리아가 자기를 돕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심으로써(눅 10:42) 전통적인 여성상 보다 예수님께 배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제자로서의 열정을 더욱 높이 평가하셨다. 2. 요한복음의 여성 제자들 요한복음이 소개하는 이름 없는 여성 제자 중 대표적인 인물은 사마리아 여인이다. 그가 처음 예수님과 마주쳤을 때는 매우 냉소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당신은 유대인 남자’, 요 4:9).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여러 단계에 걸쳐 예수님에 대한 인식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야곱보다 위대한 분’(요 4:12)에서 ‘선지자’(요 4:19)로, 그리고 급기야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요 4:25)로까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그 결과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요 4:29)라고 외침으로써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했다(요 4:39). 이렇게 해서 이 이름 없는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변화돼 복음을 전파한 제자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의 두 누이동생도 여성 제자들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했고(요 11:1∼3),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는 위대한 고백을 했으며(요 11:27), 마리아 또한 베다니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그 발아래 엎드려” 맞이했다(요 11:32). 그리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믿도록 하는데 일조하였다(요 11:45).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예수님의 ‘이름 없는 제자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맹인 바디매오 이야기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성 제자들 중 성경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이야기를 요약해서 서술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말미에 12명의 ‘공식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직후에 등장하여 그들의 빈자리를 열정과 성실로써 채워나갔다.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매장, 그리고 부활에 관한 생생한 증언이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끊이지 않고 전파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이름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끝까지 뒤돌아서지 않고 제자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 9:62)
  • 2012.09.09 / 복순희 기자

    ⑧이름 없는 제자들 (중)
  •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12제자를 택하셨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부족했지만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권능을 주시고, 파송하셨을 때 자기들조차 놀랄 정도로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다(눅 10:17).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배우고, 능력 있는 사역을 가장 가까이에서 체험했으며, 심지어는 자신들조차 놀라운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성장하고 변화하지 못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올라왔건만 예수님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부인하거나, 아니면 도망하고 말았다. 마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 출전한 선수가 42.195㎞의 정규 코스를 거의 달려오다가 마지막에 주경기장에 들어가지 않고 갑자기 사라진 것과 같은 형국이다. 이들은 제자의 길을 출발만 했을 뿐, 그것의 완결 여부는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바로 이 때, 그동안 성경 내러티브의 전면에 부각되지 않았던 무명의 인물들이 무대 중앙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마치 전장(戰場)에서 깃발을 든 병사가 쓰러지자 다른 병사가 그 깃발을 대신 들고 돌격하듯이 12제자들의 빈자리를 차곡차곡 채워 나간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지난번에 살펴본 맹인 걸인 바디매오이다. 그는 주변에서 꾸짖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서 주님의 자비를 구했다. 예수님께서 그를 (세 번 강조해서) ‘부르시자’ (걸인의 전 재산인) 겉옷을 ‘내버리고’ 주님께 달려 나갔다. 그리고 주님께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명확히 대답했다. 주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시자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랐다”(막 10:52). 여기에서의 “길”은 십자가를 향한 길이고, “따르다”(‘아코루떼오’)는 동사는 제자의 직무를 나타내는 전문용어라고 성경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부활과 오순절 이전의) 12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오해하고, 불편해하고, 심지어는 거부한 반면에, 이름 모를 (비공식) 제자는 육의 눈과 함께 영의 눈까지 열려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따랐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식” 제자들과 “비공식” 제자들 사이의 일대 반전이 일어난다. “내부자”가 “외부자”가 되고, “외부자”가 “내부자”가 된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 같은 “비공식” 제자들 중에 여성 제자들이 많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서구 세계에서도 여성 인권이 크게 신장된 것이 불과 백여 년 전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두 차례에 걸쳐 “이름 없는 제자들”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여성 제자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12제자들이 사라진 이후에 나타난 여성 제자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순간 십자가 곁에 서 있던 로마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다(막 15:39). 바로 다음 구절에 마가는 멀리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바라본 여인들 중에서 세 명의 명단을 소개한다.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가 그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다음 구절이다.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막 15:41). 이것은 지금까지 복음서 기록에 없던 내용이다. 이 구절은 이 여성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우선 이들은 십자가 처형이 진행된 장소인 예루살렘 거주민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부터 그를 “따르며”(아코루떼오) “섬기던”(디아코네오) 여인들이었다. 여기에서 “섬기다”라는 동사도 “따르다”라는 동사와 마찬가지로 제자의 직무를 표현하는 전문용어이다. 그렇다면 이 여성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던 여성 제자들이라는 말이 된다. 더 나아가 이런 갈릴리 여성 제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마가는 서술한다. 이들 중에 세 명의 이름만 밝혀졌을 뿐이다. 성경 누가복음 8장 1∼3절에는 이 갈릴리 여성 제자들의 또 다른 측면을 밝혀준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그러므로 이 여성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까지 예수님 일행을 따르며 물질로도 섬긴 익명의 ‘제자들’임이 분명해진다. 이들은 남성 제자들이 사라진 다음에야 처음 나온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의 사역 시작부터 끝까지 늘 주님과 함께 한 진정한 제자들이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매장, 부활의 증인들 12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진 이후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여성제자들이 전면에 나타나는데 이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이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의 목격자들이 된다는데 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막 15:40∼41)와 매장(막 15:42∼47), 그리고 부활의 증인들이 된다(막 16:1∼8). 예수님의 십자가와 매장과 부활은 특히 초대 교회에서 매우 중요했다. 우리는 그 증거를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사도신경’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이 세 가지 요소가 빠짐없이 들어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겠지만 예수님의 매장은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이것은 초대교회의 생존을 위협한 가장 강력한 이단 중 하나였던 ‘영지주의’(靈知主義) 분파들이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정한데서 기인한 것 같다. ‘영지주의’란 영은 선하지만 육은 악하다고 보는 극단적인 이원론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인데, 그들의 이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가 (그들이 악하게 여기는) 육신을 입으셨을 리가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神性)만 인정하고 인성(人性)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100% 영이신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신 것처럼 가장’하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학자들은 ‘가현설’(假現設)이라고 부른다. 성경 요한일서 4장 2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 즉 가현설을 ‘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규정한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예수님의 매장은 매우 중요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완전한 육체적 죽음이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성경은 12제자 이외에도 이름 없는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2천 년 전에 기록된 ‘고대문서’에 여성의 역할이 그 어떤 남성들의 모습보다 더욱 비중 있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의 십자가 처형의 현장, 예수님의 시신의 매장지, 그리고 부활의 새벽까지 주님께서 가신 길을 묵묵히 섬기며 따라간 이름 없는 여성 제자들이 있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의 클라이맥스의 어느 한 부분도 빠짐없이 오늘날의 우리에게까지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김호성 목사(국제신학연구원장)
  • 2012.08.1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이름 없는 제자들 (상)
  •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가장 위대한 사역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인류 위에 군림하였던 죄악과 저주와 죽음의 권세를 철폐하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사역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각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우리 자신이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가르치시고, 훈련하셨다. 그런데 예수님 주변에는 12제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름 없는 제자들도 수없이 많았다. 12명의 ‘공식’ 제자들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마다 이들이 등장해서 그들 이상의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두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의 ‘비공식’ 제자들, 즉 이름 없는 제자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결정적인 순간에 뿔뿔이 사라진 12제자들 12제자들은 모두 주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아(막 3:13∼19)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지만(막 10:28)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막 1:22)과 놀라운 표적과 기사(마 11:4∼5)를 직접 보고 듣고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무기력하고, 무책임하고, 무분별한 모습을 보여준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라고 그들을 책망하실 정도였다(막 8:17∼18).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이 많아질수록 예수님과의 관계가 개선되기는커녕 갈수록 더욱 악화된다는데 있다. 처음에는 그저 예수님을 잘 모르는 ‘무지’의 단계에 머물렀지만(막 1:1∼8:26), 예수님께서 장차 당하실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오해’의 단계로 악화되더니(막 8:27∼14:9), 급기야는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는 ‘배반’의 단계로(막 14:10∼16장) 파국에 이르게 된다. 하나는 주님을 배반했고(막 14:10), 또 하나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으며(막 14:66∼72), 나머지 열도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했다(막 14:50). 제자들의 이 같은 부족한 모습이 특히 마가복음에 집중적으로 보도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마가복음의 반제자적 경향’이라고 부르는 성서학자들도 있다. 2. ‘이름 모를 제자들’의 등장 12제자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향한 여정을 출발은 했으나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뿔뿔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제자들이 없어진 것을 의미했다. 누가 고난의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자리까지 갈 것인가? 바로 이 때 이름 모를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복음서가 시작될 때부터 거의 끝날 때까지 주변에서만 맴돌며 숨어있던 인물들이 내러티브의 중심부로 숨 가쁘게 이동한다. 그리하여 외로우신 주님 곁을 지키고 12제자들의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가히 ‘중심부’의 ‘해체’라 할 수 있는 일대 ‘반전’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복음서의 독자들(또는 청중들)은 누구를 자신들이 걸어가야 할 ‘제자의 길’의 본으로 삼을 것인가? 12명의 ‘공식 제자들’인가, 아니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주님의 십자가의 자리까지 따라간 ‘비공식 제자들’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비공식 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본 후로 잠시 미루기로 하자. 3. 맹인 걸인 바디매오 바디매오 이야기는 마가복음에서 매우 ‘전략적인 자리’에 위치한다(막 10:46∼52). 우선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에 자리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도 예루살렘 인근인 여리고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우리가 이전에 살펴본 바와 같이 베드로의 신앙고백(막 8:29) 직후, 예수님께서 곧 당하실 고난과 죽음을 세 차례에 걸쳐 예고하실 때마다(막 8:31, 9:31, 10:33∼34) 예수님의 ‘공식 제자들’은 인간의 사리사욕에 사로잡혀서 엉뚱한 반응을 보인(막 8:32, 9:32∼34, 10:35∼41) 다음에 바디매오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는 예수님에 대한 바디매오의 열심이 부각되어 있다. 그가 예수님을 부를 때, 주위 사람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고 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 결국 예수님께서 멈추시고 “그를 부르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는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막 10:50). 걸인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뛰어 나가면서 내버린 그의 겉옷은 어부 베드로가 예수님께 부름 받았을 때 그물을 버려둔 행동에 버금가는 것이었다고 많은 신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본문에는 바디매오를 부른다는 표현이 세 번 나온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10:49). 복음서에서 “부르다”라는 표현이 주님께서 제자로 부르실 때 주로 사용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예수님께서 바디매오를 부르신 것은 단순히 그의 요청을 들어주시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그의 소원을 말씀드렸다(10:51). 특히 여기에서 “본다”(‘아나블레포’)는 동사는 ‘다시 보다’, 또는 ‘위를 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히 육신의 시력을 되찾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영적인 눈까지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많은 주석가들은 지적한다. 그렇다면 바디매오가 구한 것은 바로 직전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잘못 구한 것(막 10:37)을 바로 잡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주님께서 바디매오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포하시자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10:52)라고 기록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의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한 길’(막 11:1), 즉 ‘십자가로 향한 길’이다. 그 길은 12제자들이 끝까지 가기를 두려워하고 거부했던 길이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에서 따른다. 여기에서 사용된 “따르다”(‘아코루떼오’)는 동사는 제자의 직무를 나타내는 전문용어이다. 이제 바디매오는 육의 눈과 영의 눈이 동시에 열려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 보다 정확히 골고다를 향한 ‘슬픔의 길’(비아 돌로로사)을 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실상의) 제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바디매오를 이름 없는 제자라고 하는 것은 ‘바디매오’가 그의 본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아람어에서 ‘바’로 시작되는 이름은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바디매오’란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10:46). 본문 그 어디에도 그의 본명은 나오지 않는다. 사실 그의 이름은 마가복음 기자에게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공식적으로’ 제자가 되는 것보다 묵묵히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의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여 하나도 빠짐없이 후세에게 생생히 전하는 익명의 제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지 모른다. 또한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마다 이름 모를 제자가 되어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기”를 마가가 원했을지 누가 알 것인가? 김호성 목사(국제신학연구원장)
  • 2012.07.0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⑥ 베드로의 영광과 굴욕, 그리고 회복
  •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의 제자들’ 시리즈를 연재해 온 내용을 함축성 있게 ‘한 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있으니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이다. 신약성경은 베드로의 인물 됨됨이를 어떤 다른 제자들보다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베드로라는 인물을 집중적으로 해부함으로써 예수님의 제자들의 영광과 굴욕, 그리고 회복의 모습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한다.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도 성경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약성경연구가들의 방식을 따라 마가복음에 기록된 베드로의 모습을 중심으로 뼈대를 세워가고, 이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내용으로 보완하면서 요한복음과 사도행전 등에 나오는 귀중한 이야기들로 종합하고자 한다. 1. 베드로의 영광 베드로는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좌충우돌의 전형으로 꼽히는 인물이지만 신약성경은 그의 긍정적인 면도 많이 부각시키고 있다. 그 중의 몇 가지를 살펴보자. ① 어부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와 함께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랐다”(막 1:16∼18, 10:28; 눅 5:8 참조). 그는 순종의 사람이었다. ②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다(막 3:16, 요 1:42). 그의 원래의 이름은 ‘시몬’이었다. 베드로를 아람어로 옮기면 ‘게바’가 된다. ③ 베드로는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3인(또는 4인)의 제자에 속했다(막 5:37, 9:2, 13:3, 14:33). ④ 원어성경에서 마태복음의 12제자 명단은 “첫째로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로 시작한다(마 10:2). 이를 근거로 베드로를 예수님의 ‘수제자’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말 성경은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로 번역했다. ‘비롯하여’ 속에 ‘첫째로’가 포함되어 있다. ⑤ 베드로는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막 8:29; 요 6:68 참조)라는 위대한 신앙고백을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최고의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신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마 16:18∼19). ⑥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 곁에서 꾸준히 배워나갔다. 많은 경우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역할을 수행한다(막 11:21, 마 15:15, 마 18:21, 눅 12:41, 요 13:36). ⑦ 예수님께서는 성전세를 납부하실 때 베드로에게 물고기를 잡도록 하셔서 그 입에서 나온 한 세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것을 해결하셨다(마 17:24∼27). ⑧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월절 식사 준비를 베드로와 요한에게 부탁하셨다(눅 22:8). ⑨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아셨지만 그의 회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주셨다(눅 22:31∼32). 2. 베드로의 굴욕 예수님의 부활 이전의 베드로는 그에 관한 좋은 소식 바로 직후에는 어김없이 나쁜 소식이 뒤따르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여준다. 안타깝게도 베드로의 (혹시 있을) 영광은 곧 이어 나오는 굴욕에 의해 거의 모든 경우 상쇄되고 만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① 밤 4경(오전 3∼6시)쯤 제자들이 풍랑 이는 밤바다를 배를 타고 가다가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면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자 두려워 떨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만이 담대하게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물 위를 걸었다. 그러나 그의 호기도 잠시뿐, 바람을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물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베드로를 책망하신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22∼33). ②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 비로소 그가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과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 예고하신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다(막 8:32). 여기에서 “항변하다”라는 단어는 원어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실 때 사용하는 ‘꾸짖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피티마오’)이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를 대하듯이) 꾸짖은 것이 된다. 그러자 예수님은 즉각 베드로를 “꾸짖으신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막 8:33). ③ 베드로는 예수님과 또 다른 ‘핵심제자’인 야고보,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서 주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시고 엘리야와 모세와 대화하시는 장면을 목격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벧후 1:16∼18 참조). 그러나 이러한 황홀경에 취한 나머지 베드로는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엉뚱한 말을 늘어놓고 그 후로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도 깨닫지 못한다(막 9:2∼13). ④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 곁을 지키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깨어있지 못하고 잠에 빠지고 말아서 예수님의 책망을 듣게 된다(막 14:32∼42). ⑤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베드로는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쳐서 떨어뜨렸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요 18:10). ⑥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릴 것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을 했다(막 14:31). 그러나 잠시 후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며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하고 말았다(막 14:66∼72). 3. 베드로의 회복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베드로는 영광과 굴욕, 빛과 그림자,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뒤섞여 있는 인물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목격하고(요 21장),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자(행 2장) 이전의 베드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 무엇보다 베드로는 탁월한 설교자가 되었다. 하루에도 삼천 명씩, 오천 명씩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왔다(행 2:41, 4:4). 말씀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기적과 이사를 행했다. 태어날 때부터 40여 년 동안 걷지 못해서 성전 앞에서 구걸하며 살아온 장애인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걷게 했고,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쳐주었다(행 3:1∼10, 9:32∼35). 베드로의 치유 은사가 얼마나 강했던지 심지어 그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만 해도 누웠던 병자가 일어날 정도였다(행 5:15). 더 나아가 죽은 도르가까지 살리는 기적까지 행함으로써 수많은 사람이 믿도록 했다(행 9:36∼42). 베드로는 야고보, 요한과 함께 사도 바울도 인정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갈 2:9)으로서 초대교회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보여줬으며(행 5:1∼11, 6:1∼7 참조),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저술함으로써 신약성경 형성에도 큰 공헌을 했다. 베드로의 영광과 굴욕, 그리고 회복 과정을 정리해보면서 우리 인간은 늘 부족하고 흔들리는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오순절 성령의 권능이 우리에게 충만히 임한다면 우리도 베드로처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남은 삶을 불태울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된다.
  • 2012.06.10 / 복순희 기자

    12제자의 밝고 긍정적인 모습
  • 돌아와 주님의 증인이 된 제자들 지난 졸고(拙稿), ‘12제자의 부족한 모습’(본지 4월 15일자 게재)을 쓰면서 마음의 불편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물론 제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은 4복음서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고, 성서학자들이 심지어 “복음서의 반제자적 경향”이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명백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 관한 글을 쓰면서 이러한 측면을 피할 수는 없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라고는 하나 2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의 맨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신앙의 영웅들의 굴욕적인 모습을 또 다시 어떤 형태로든 문자화하는 작업은 마치 조상의 숨겨졌던 치부를 드러내는 것처럼 결코 유쾌할 리 없는 고통스런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들의 실망스런 모습 틈틈이 내보이는 일말의 가능성을 성경 본문에서 발굴해내어 이를 통해 부족하나마 제자들의 일종의 ‘명예 회복’ 내지 균형감각 제고의 기회를 삼고자 한다. 1. 제자들을 직접 부르시고 능력을 주신 예수님 신약성경, 특히 4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으면 12제자들의 모습이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① 예수님께서는 첫 제자들을 직접 불러서 택하셨다. 4명의 어부들, 즉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이 제자가 되겠다고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그들의 삶의 현장에 가셔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면서 부르셨다(막 1:16∼20). 세리 마태(마 9:9)와 빌립(요 1:43∼44)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서 뭔가 가능성을 보셨기 때문에 이처럼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 또한 주님의 이러한 부르심에 즉각 순종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다(막 10:28). 예수님께서는 12제자를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막 3:14∼15). ②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셔서 파송하셨을 때 그들도 말씀을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놀라운 역사를 행할 수 있었다(막 6:7∼13, 눅 9:1∼6). 주님께서 행하신 사역을 ‘문제투성이’ 제자들도 해냈던 것이다(요 14:12). ③ 제자들이 율법이나 장로들의 전통을 범한 것을 바리새인들이 비난할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논박하심으로써 결과적으로 제자들을 두둔하셨다. 예를 들어 침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비난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고 응수하심으로써 제자들을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로 비유하셨다. 또한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공격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을 잠잠하게 하셨다(막 2:18∼28). 2. 제자들을 직접 가르치신 예수님 12제자들은 부족하긴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하나씩 가르치셨다. ① 주님께서 장차 당하실 고난을 세 차례에 걸쳐 예고하실 때마다 제자들이 실망스러운 반응을 보인 것(막 8:31∼32, 9:31∼34, 10:33∼41)이 제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구성하는 주요 증거 중 하나라는 사실은 지난 졸고에서 자세히 살펴본 바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제자들의 이러한 실망스러운 모습 직후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에 관한 주옥같은 교훈이 나온다는 사실이다(막 8:33∼38, 9:35∼50, 10:42∼45).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와 같은 말씀이 다 이 부분에 속한다. 그러므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인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참 제자가 가야할 길’을 가르치는 기회로 삼으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가능성을 믿어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이외에도 예수님께서는 수시로 12제자들만을 대상으로 직접 가르치셨다. 예를 들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막 4:10∼20, 34)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에 대한 말씀(막 7:17∼23)의 의미를 그들에게만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마태복음 10장 전체는 예수님께서 12제자를 택하시고 능력과 권위를 주셔서 파송하시면서 주신 선교명령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종말과 심판에 관한 교훈을 자세히 주셨다(마 24∼25장, 막 13장, 눅 21장).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3. 제자들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부분 12제자들에 대해서 가장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마가복음에도 “제자들에 대해서 가장 긍정적인 단락”이라고 성서학자들이 꼽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장차 받을 핍박에 관해 예언하신 내용이다(막 13:9∼13).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것처럼 고난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막 13:9).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부족한 제자들도 갈 것을 주님께서 예언하셨으니 이보다 더 긍정적인 제자들의 모습을 그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4. 잠시 쓰러졌지만 즉시 되돌아온 제자들 12제자들의 가장 치명적인 잘못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셨을 때 주님을 배반하거나(가룟 유다), 부인하거나(베드로), 또는 도망했다(나머지 열 제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와 좌절의 현장에 그대로 주저앉아있지 않고 눈물로 회개하며 주님께로 돌아왔다. ①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주님께서는 ‘새 언약’의 의미를 가진 성찬식을 제정하셨다(막 14:17∼25).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릴 것을 예고하셨다(막 14:27∼28).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또한 내다보셨기에 그들과 이처럼 영원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②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것처럼(막 14:27)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렸지만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내 통회자복하며 되돌아왔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만나주심으로써 그들을 회복시켜주시고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고 명하시고(눅 24:49),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지상명령을 주셨다(마 28:18∼20). 그들이 성령 충만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행 1:8). 지금까지 우리는 12제자들이 늘 부족하고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제자가 되었고, 능력을 주셨을 때 사역을 잘 감당해냈으며, 주님의 가르침을 지속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버리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더라도 이내 회개하고 주님 품에 돌아와 주님의 “자취를 따라”(벧전 2:21) 환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복음의 증인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김호성 목사(국제신학연구원장)
  • 2012.05.1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PDF

    지면보기

  • 행복으로의 초대

    PDF

    지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