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김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 그리스도의 수의
  • 토리노 성당에 보관된 예수님의 수의는 진짜일까? 1978년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과학적 분석 시도 교황청은 서기 14세기의 작품이라는 결론 내려 토리노의 수의는 그리스도의 것인가? 이탈리아의 북부 도시 토리노의 한 성당은 그리스도의 수의가 보관된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토리노의 수의는 1978년 일반에게 공개되면서 본격적인 과학적 분석이 시도되었다. 세마포로 만들어진 수의는 길이 4.2m에 폭 1.1m의 긴 천으로 중간을 기점으로 대칭되는 한 중년 남자의 알몸 자국이 앞면과 뒷면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긴 머리에 턱수염을 길렀고 키가 180cm 정도로 밝혀진 주인공의 손목에는 못 자국이 있으며 머리, 등, 옆구리 등에서도 핏자국이 발견되었다. 여러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러한 현상은 예수께서 부활하실 때 발생했던 섭씨 300도 정도의 고열 때문에 마치 필름이 빛에 감광되는 것처럼 천이 열에 의해 탄 자국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이 천을 네거티브로 촬영하면 원래 시신의 입체 모습을 얻을 수 있으며, 피가 흘렀던 방향을 통해 십자가 처형의 단서를 얻어낼 수 있고, 나아가 혈액을 정밀 분석한 결과 특정한 효소가 발견되는데 이는 장시간 고통 속에서 죽어간 의학적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예루살렘에서 토리노까지 그리스도 수의에 관한 이야기는 기록은 서기 4세기 이스라엘 가이사랴의 대학자였던 유세비우스의 기록을 통해 신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기 30년경 예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다대오는 얼굴 형상이 그려진 한 천을 오늘날 터키의 샨르 우르파의 옛 도시였던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에게 선물로 가져갔다. 나병에 걸린 이 왕은 다대오가 가져 온 천에 손을 댄 순간 병이 나았고 그 후 수많은 순례자들이 기적과 치유의 천을 보고 만지기 위해 에데사로 몰려들었다. 서기 944년 비잔틴 제국의 로마누스 1세는 당시 ‘만딜리온(작은 손수건)’이라 불리는 이 천을 탈취하기 위해 에데사를 포위했고 결국 이 천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 서기 1204년 제 4차 십자군 원정 당시 성전 기사단은 이 만딜리온을 탈취하여 프랑스로 가져왔다. 1300년대 초 이 천은 영국으로 잠시 건너갔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고 1357년 리레이에서 대중에게 공개되면서 ‘그리스도의 수의’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1456년 이 수의는 사보이 가문의 왕에게 증정되었고 샹베리 성에 보관되어 있었다. 1532년 이 성에 화재가 발생해서 수의의 일부가 불에 탔고 그 후 수의는 이탈리아의 토리노 대성당으로 옮겨져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수의는 중세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지난 1988년 바티칸의 로마 교황청은 토리노의 수의가 서기 14세기의 작품이라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판정의 결정적인 근거는 옥스포드, 버클리, 아리조나 대학과 취리히 물리학 연구소 등 모두 네 군데의 실험실에 의뢰한 탄소동위원소 연대측정의 결과였다. 모든 생명체는 살아있는 동안 몸속에 탄소를 만들어 비축하지만 일단 죽으면 그 시점부터 특정한 동위원소(C14)가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절대량에 관계없이 어떤 개체에서 원래의 탄소량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시기는 5730년 정도로 모두 일정하다. 따라서 아마포로 만들어진 그리스도 수의에 남아있는 탄소의 양을 측정하여 연대를 계산하면 이 천의 재료가 되는 아마의 수확 시기를 알 수 있다. 100년 정도의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수의가 서기 14세기의 것이라는 판정에는 의의를 제기할 수 없는 실정이어서 교황청도 이를 받아들여 발표할 수 밖에 없었다. 교황청은 비록 토리노의 수의가 그리스도의 수의는 아니지만 중세에 그려진 ‘매우 의미있는 성화’라고 논평함으로써 진위여부를 떠나 토리노의 수의에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성물과 기적 역사적으로 볼 때 토리노의 수의는 단순한 중세의 미술품이라기보다는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 꾸준히 만들어졌던 성물들 중 하나였다. 특히 이러한 성물을 그리스어로 ‘아케이로포이에토스(acheiropoietos)’라 부르는데 ‘사람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라는 뜻을 지닌다. 그리스도의 나무 십자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주님의 거룩한 잔, 옆구리를 찔렀던 로마 병사의 창,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흘린 피땀을 닦아낸 손수건 등이 가장 거룩한 성물의 범주에 속한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서기 4세기에 기록된 신약성서의 위경 중 하나인 베드로 행전에 나오는 ‘베로니카의 수건’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 땀을 비오듯 흘리니까 곁에 있던 한 여인이 수건을 건넸고 땀을 닦은 후 돌려 받았는데 그 수건에 주님의 얼굴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전승 때문에 예루살렘의 십자가의 길 14장소 중에서 제 6장소가 오늘날까지 베로니카 사건의 현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 2006.12.24

    김 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 베데스다와 아스클레페이온
  • 베데스다는 어떤 장소였을까? 단순 저수장아니라 종합병원과 관련 있어 다섯개의 행각 중 한 곳에 기념교회 건설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에서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이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요 5:2-18). 그 이유는 이곳에서 천사가 가끔 물을 휘젓는 신비스런 현상 때문이다. 하지만 베데스다가 유명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온갖 중병 환자들이 몰려오는 장소로서 일종의 환자 요양소 내지는 종합병원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과연 베데스다는 어떤 장소였을까? 두 개의 저수지와 다섯 행각 1860년대 예루살렘의 성 안나 교회를 차지한 프랑스의 백의의 선교사회 신부들은 근처의 유적들을 부분적으로 발굴하고는 고대 기록들을 근거로 이 곳이 양문 옆에 위치했다는 요한복음서의 베데스다로 여겼다. 가까이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희생제물을 도살하고 씻는 과정에 필요한 많은 양의 물을 확보하기 위해 신약시대에 여러 개의 저수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1957년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발굴을 통해서 길이 52m, 폭 40m 규모의 북쪽 저수지와 길이 57m, 폭 48m 규모의 남쪽 저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베데스다에는 다섯 개의 행각, 즉 스토아가 있었다고 한다(요 5:2). 스토아는 그리스 건축에서 여러 기둥으로 이루어진 회랑을 의미하며 도시 한가운데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터인 아고라에 위치한 대표적인 건물이었다. 이 안에서 철학자들이 모여서 다양한 논쟁을 즐겼다 해서 이른바 스토아 학파가 유래되었다. 베데스다의 두 개의 저수지는 다섯 개의 회랑과도 그 구조면에서 일치한다. 즉, 두 개의 저수지 사이에는 폭 6m의 분리 벽이 있었기 때문에 전체의 모양은 날 일(日)자 형태를 띠고 있었다. 따라서 두 개의 저수지 가장자리에 돌아가며 회랑이 있었다면 사이의 분리 벽까지 합해 모두 다섯 개의 회랑이 있는 셈이다. 그리스식 종합병원 아스클레페이온(Asklepeion) 그렇다면 왜 베데스다에는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었는가? 발굴을 통해 베데스다의 유적은 서기전 200년경 최초로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기 1세기에는 저수지와는 별도로 깨끗한 물을 받아서 마실 수 있는 급수대도 설치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베데스다는 단순한 저수장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로마 시대 도시들에 널리 퍼져 있었던 종합병원 즉, ‘아스클레페이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베데스다가 원래 히브리어로 ‘베잇트 하스다’, 즉 ‘자비의 전당’이라는 뜻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또한 서기 2세기 ‘폼페이아 루킬리아’라 불리는 한 로마 여인이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그 대가로 기부금을 냈다는 사실이 현장에서 발견된 한 비문을 통해 밝혀졌다. 서기전 700년경부터 그리스 본토에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의학의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했고 서기전 6세기에는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클리닉이 세워졌다. 깨끗한 물을 마시고 목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치료 방법 중 하나였기 때문에 아스클레페이온의 한 가운데는 맑은 물이 흐르는 분수대와 저수장이 있었다. 피부병의 경우 진흙 마사지를 받게 했고 태양 볕 아래 맨발로 걷는 것도 중요한 치료 방법 중 하나였다. 음식요법으로서 포도주나 기타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금식을 하기도 했다. 증상에 따라 약초를 비롯한 필요한 약재가 동원되었고 간단한 수술이 시행되기도 했다. 한 밤 중에는 신전의 제사장이 하인들을 거느리며 환자들의 병상을 방문하여 상태를 확인하고 처방을 내리기도 한다. 아스클레페이온에서 가장 중시하는 치료법은 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아스클레페이온에 극장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연극과 음악 감상을 통해 환자들의 안정을 유도한 심리치료도 했다는 사실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천사가 물을 움직일 때 베데스다의 두 저수지 사이의 분리 벽 아래쪽에서 양쪽으로 통하는 구멍이 발견되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북쪽 저수지로부터 물이 남쪽 저수지로 흘러내리게 고안된 것이다. 신약학자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이 장치를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 현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았다. 즉 빗물이나 지하수가 서서히 북쪽 저수지에 고여 일정한 높이까지 물이 차오르면 수로를 열어 병자들이 대기하고 있던 남쪽의 목욕장으로 흘려보냈다는 것이다. 아스클레페이온의 가장 중요한 치료 요법이 깨끗한 물을 마시고 그 물에 목욕하는 것이기에 이 구절은 더욱 베데스다의 병원 기능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성 안나 교회 서기 5세기 중엽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한 순례자는 이곳의 기념교회를 베데스다의 기적을 상기하여 ‘불구자의 교회’로 명명했다. 또한 서기 6세기부터는 이곳이 마리아의 생가라는 전승이 생겨나 다섯 개의 행각 중 하나에 이를 기념하는 교회가 건설되었다. 서기 1100년경 십자군들은 이곳에 마리아의 모친을 기념하는 성 안나 교회를 세웠고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십자군 시대의 건축물로 손꼽힌다. 거의 대부분의 십자군 시대 교회당들이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데스다의 성 안나 교회가 완벽하게 보전된 이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슬람 신학교인 마드라사로 활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고, 나아가 침상을 정리해 이동하게끔 했기에 이 소문을 전해 들은 유대인들이 안식일 율법 위반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요 5:16). 오늘날의 유대인들에게는 ‘피쿠악흐 네페쉬’라 부르는 율법의 예외 조항이 있다. 가장 엄격한 안식일 율법이라 할지라도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라면 예외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진 것을 구해내는 것 등이 피쿠악흐 네페쉬에 속한다(마 12:11). 양 한 마리의 생명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구덩이는 물웅덩이를 뜻하기 때문에 양이 빠져 죽을 경우 사체가 부패해서 사람들은 물론 가축들도 이 더 이상 그 물을 마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진 설명’ 베데스다 발굴지 1950년대의 집중적인 발굴을 통해서 베데스다에는 두 개의 저수장과 다섯 개의 행각(회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신약 시대 예루살렘의 베데스다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대표적인 종합병원이었던 아스클레페이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협성대>
  • 2006.11.19

    김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카슈룻트와 성찬예식
  • 예수님도 쎄데르 순서에 맞춰 제자와 만찬나눠 유월절 만찬은 ‘쎄데르’라 불리는 의식으로 진행 금기사항, 유월절 규정있던 카슈룻트는 해제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만일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이 정착민과 유목민의 갈등을 표현한 것이라면 살인자 가인이 농사꾼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축업에 좀 더 친밀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차별은 이스라엘이 농업을 기본으로 하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비를 내려주는 신으로 여기는 바알 숭배를 철저하게 배척하는 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아가 대표적인 구약의 희생 제물들은 유목민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와 양 등 가축이었다. 따라서 가나안은 ‘빵과 포도주의 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되었다. 젖은 양, 염소, 소 등 가축의 젖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만들어진 버터, 치즈, 요구르트 등을 모든 유제품을 포함한다. 꿀은 벌꿀뿐만 아니라 당도가 매우 높은 대추야자, 포도, 무화과 등을 말린 건과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성서의 기본적인 일곱 가지 식물은 가나안의 토산물로서 밀과 보리의 두 가지 곡식과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꿀인데 이중에서 꿀을 대추야자로 보기도 한다(신 8:8). 카슈룻트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서 음식에 관한 금기가 가장 까다로운 민족이다. 카슈룻트라 불리는 그들의 독특한 음식과 식사에 관한 율법은 다음과 같이 신명기의 세 가지 금기 사항과 레위기의 유월절에 관한 규정에서 유래되었다. 첫째,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신 14:3). 신명기에는 정결한 식품으로서 산짐승들 중에서는 발굽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즉 초식 동물류를 주로 먹도록 권장하고 있다. 물고기 중에서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들을 금기시하고 있다. 조류 중에서 금기시되는 것은 독수리를 비롯한 맹금류가 주류를 이룬다. 또한 곤충류, 파충류, 기타 벌레 등도 부정한 식품으로 여기고 있다. 둘째,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신 14:21). 유대인들은 한 식탁에서 고기 식사와 우유 및 치즈 등의 유제품 식사를 함께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둘을 다루는 식기와 재료기구들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셋째, 피를 먹지 말라(신 15:23).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도살한 짐승의 피를 충분히 빼낸 후 요리할 것을 권장한다. 넷째, 칠일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으라(레 23:6). 해마다 음력 니산 제 14일 저녁부터 7일간 무교병을 먹게 되어 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누룩이 들어간 다른 제품들, 즉 맥주, 비스킷, 케이크 등도 먹지 못한다. 카슈룻트의 해제 구약 시대의 부정한 동물에 대한 규정은 신약 시대에 들어와 이방인 선교와 관련하여 해제되는 암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욥바에 머물던 베드로는 환상 중에 하나님이 내려준 온갖 종류의 짐승들을 부정하다 하여 먹지 않겠다고 했다(행 10:14). 즉 유대인으로서 카슈룻트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먹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방인에게도 아무런 조건 없이 선교하라는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이방인과의 공동식사에 관한 논쟁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인종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즉 카슈룻트 율법의 준수와 직결되는 심각한 문제였다. 비록 바울이 이를 해결했다고 하지만 그는 여전히 로마인들의 제사 음식, 즉 돼지고기에 대한 금기만큼은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오늘날 아랍 사람들도 먹지 않는 돼지고기는 그 자체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돼지가 여러 곳을 이동하는 유목업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가축이었기 때문이다. 유월절 만찬(쎄데르) 유월절 만찬은 히브리어로 ‘쎄데르’라 불리는 의식과 함께 진행된다. 쎄데르에는 모두 15 단계의 순서가 있는데 참석자들은 ‘유월절 하가다’라 불리는 의식서를 통해 출애굽 사건과 관련된 축복문, 성경 구절, 노래, 전설 등을 함께 읽으며 진행한다. 식탁에 반드시 올려놓아야 하는 음식물은 누룩 없는 빵인 마쫏트와 포도주, 닭고기의 다리와 날개 부분, 쓴 나물을 상징하는 상치, 삶은 계란, 그리고 달콤한 소스 등이다. 닭고기는 유월절 어린 양을 상징하고, 달콤한 소스는 이스라엘 민족이 고센 땅에서 흙벽돌 만들 때 벽돌 사이에 발랐던 모르타르를 상징한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쎄데르로 볼 수 있다. 우선 제자들은 이 특별 만찬을 예루살렘의 특정한 장소에서 먹기를 원했다(마 26:17). 예수 자신도 ‘내가 고난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했다’(눅 22:15)고 고백한다. 예수는 쎄데르의 순서에 따라 먼저 마쫏트를 떼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축복한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포도주에 대한 의미 부여와 함께 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오늘날 유월절 쎄데르에서는 모두 네 차례에 걸쳐 포도주를 마시는 순서가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배반하려는 가룟 유다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사람’(마 26:23)으로 암시하였다. 조상의 힘들었던 노예생활을 상기시키기 위해 상추와 같은 쓴 나물을 옆 사람과 함께 달콤한 소스에 찍어 먹는 것을 연상시킨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최후의 만찬에는 빵이 그리스어로 무교병(아쥐모스)이 아닌 유교병(아르토스)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두고두고 신학적인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협성대>
  • 2006.10.22

    김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잃어버린 법궤를 찾아서
  • 솔로몬 성전의 법궤 찾는 노력 줄이어 에티오피아 교회에 보관됐다고 전해져 인디아나 존스의 법궤 찾기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지난 1942년 어느 날 이집트 고센 땅의 고대 유적지 타니스 벌판에서는 나치 독일 군이 솔로몬 성전의 법궤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발굴에 몰두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치는 법궤를 원자폭탄에 버금가는 결정적인 무기로 여기고 이를 통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속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법궤는 한 미국인 고고학자에 의해 몰래 빼돌려져서 무사히 배에 싣고 출항했지만 선장의 배신으로 결국 나치 독일 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독일군은 법궤의 위력을 시험하기 위해 종교의식과 함께 뚜껑을 여는 순간 강력한 빛 때문에 이를 본 모든 자들이 죽고 끝까지 눈을 감고 버티었던 주인공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이상은 지난 1981년에 개봉된 스티븐 스필버그의 ‘법궤의 추적자들’, 일명 ‘레이더스’라 불렸던 영화의 줄거리로서 솔로몬이 죽은 지 제 5년째에 이집트 왕 시삭이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을 탈취해갔다는 구약성서의 구절(열왕기상 14:25-26)을 근거로 당시 법궤도 이집트로 탈취 당했다는 가설 하에 고고학과 모험, 사랑과 이념이 적절히 배합된 성공적인 오락영화로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영국의 한 언론인은 솔로몬 법궤가 현재 에티오피아에 있다는 주장과 함께 10여년에 걸친 그의 추적 노력을 1992년 ‘신의 암호’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의 저자인 그리이엄 헨콕은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동 아프리카 주재원으로서 에티오피아 악숨의 한 교회당 안에 예루살렘 성전의 법궤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어떻게 그곳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그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였던 것이다.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아들 메넬릭 에티오피아가 법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솔로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저를 시험코자 하여’ 향품과 황금과 보석을 싣고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스바 여왕이 에티오피아 출신이라 믿고 있으며 솔로몬과 사이에 메넬릭이라 불리는 아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메넬릭은 에티오피아로 돌아와서 왕국을 건설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고 따라서 지난 1974년 군사 쿠데타로 하야했던 하일레 셀라시는 메넬릭 이후 225번째이자 마지막 황제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에티오피아의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서기 350년쯤 시리아의 프루멘티우스가 악숨 왕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수단과 에티오피아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 남쪽의 예멘 지역을 모두 통치했던 이 왕국은 상아를 비롯해서 나일 강 유역의 황금,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향품 등을 매매하는 국제적인 무역국가로 그 명성을 떨쳤다. 따라서 이 때부터 그들의 민족적 뿌리가 솔로몬 시대의 스바 여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전승이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악숨 교회의 법궤 법궤가 안치됐다는 악숨의 ‘시온의 성모 마리아’ 교회는 하일레 셀라시가 1965년에 건설했으며 그 옆에는 서기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낡은 교회당이 있다. 헨콕이 1983년 이 곳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그는 군사정권의 후원으로 에티오피아 관광 홍보 영상물을 제작 중이었으며 이곳의 법궤를 집중적으로 조명코자 했다. 하지만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법궤를 구경하기는커녕 교회 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다. 왜냐면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법궤 수호자’ 역할을 담당한 수도사이기 때문이다. 이 법궤 수호자에 의하면 스바 여왕의 아들 메넬릭이 스무 살 청년이 되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12지파의 지도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 올 때 사독의 아들인 아자리우스가 법궤를 훔쳐왔다는 것이다. 헨콕은 법궤가 1월에 열리는 팀캇트라 불리는 그리스도의 현현 축제 기간에만 교회 밖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내전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 축제에 참여할 수 없었다. 황금으로 씌워진 나무상자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두 개의 십계명 돌 판을 보관하기 위해 광야의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법궤는 길이가 1.1m, 폭과 높이가 각각 0.7m인 상자였다(출 37:1). 옮기기 쉽게 상자 아랫부분에는 두 개의 채(손잡이)가 있었고 상자의 안팎은 순금으로 씌웠다. 1922년에 발견된 투탕카문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 중에는 성서의 법궤를 연상시키는 유물이 있다. 길이가 0.9m, 폭 0.5m, 높이 0.6m의 나무상자는 황금 판으로 입혀져 있으며 위에는 자칼 모양의 수호신 아누비스가 앉아 있다. 더욱이 이 황금상자는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2.7m 길이의 두 개의 채가 달려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법궤 위에는 두 마리의 황금 케룹이 서 있다는 것뿐이다. 헨콕은 십자군들의 전승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서기전 680년쯤 예루살렘의 왕 므낫세는 우상숭배를 하면서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다(열왕기하 21:7). 이에 격분한 한 무리의 제사장들이 법궤를 가지고 이집트로 내려갔고 아스완 지방의 나일강에 위치한 엘레판틴 섬의 유대교 신전에 모셔놓았다. 서기전 400년경 신전이 파괴된 후 수단의 메로에로 옮겨졌다가 악숨 왕국이 이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서기 1세기쯤 법궤가 최종적으로 이곳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헨콕의 이러한 결론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우선 성서에는 므낫세 시대까지 성전에 법궤가 있었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헨콕은 므나세의 연대와 엘레판틴의 유대교 신전의 연대 사이에는 150년의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지 못했다. 나아가 이 신전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이 남쪽의 메로에로 이동했다는 어떠한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도 없다. 따라서 차라리 시삭이 빼앗아 갔거나 악숨 교회의 ‘법궤 수호자’의 말대로 스바 여왕 사이에 난 솔로몬의 아들 메넬릭이 이집트이 침공에 앞서 법궤를 에티오피아로 피난시켰다는 해석이 더 타당할 수도 있다. 과연 에티오피아의 법궤는 진품일까? 1991년 1월 18일 헨콕은 8년이나 기다린 끝에 법궤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해마다 1월에 시행되는 팀캇트 축제에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참관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것이다. 법궤의 파괴적인 위력을 방지하기 위해 두꺼운 천에 싸인 법궤가 축제행렬에 등장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 법궤가 진품이 아닌 복제품이라고 확신했다. 왜냐면 법궤가 교회 밖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법궤 수호자’는 여전히 지성소를 떠나지 않고 향을 피우며 법궤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사진설명’ 악숨의 법궤 교회 오늘날 에티오피아의 악숨에 위치한 ‘시온의 성모 마리아’ 교회 안에는 에티오피아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솔로몬 성전의 법궤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일반인들은 이 법궤를 1년에 단 한번 1월 18일의 팀캇트 축제에서만 볼 수 있는데 그 기원은 솔로몬 시대의 스바 여왕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협성대>
  • 2006.09.15

    나사렛 예수, 갈릴리 예수… 찌포리 예수
  • 갈릴리의 중심지였던 대도시 찌포리 2000년 전 건설된 대극장과 저택 발견 어린 예수가 성장한 곳이라는 설 있어 1931년 여름, 미국 미쉬간 대학의 워터맨 교수는 찌포리라 불리는 나사렛 근처의 한 고대 유적지에 대한 발굴을 시도하였다. 그가 성서에도 등장하지 않는 초라한 폐허를 택한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신약시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찌포리가 갈릴리 왕국의 첫 번째 수도로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두 달 동안의 발굴 결과 예수 시대에 건설된 약 4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과 귀족의 저택 등이 발견되었다. 워터맨은 자연스럽게 나사렛은 문명과 고립된 촌락이 아닌 대도시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는 가설과 함께 어린 시절 예수의 교육적, 문화적 배경을 이 도시로부터 찾으려고자 시도하였다. 청중을 사로잡는 비유, 과감한 현실적인 율법의 해설, 그리고 심오한 사랑의 윤리 등은 보잘 것 없는 나사렛같은 시골 출신과는 어울리지 않았다는 의구심이 걷히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소위 ‘찌포리 문화설’로 불렸던 이 가설은 중단된 발굴과 함께 얼마 못가서 학자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다. 주변을 감시할 수 있고 방어에 유리한 우뚝 솟은 언덕, 수량이 풍부한 샘과 근처를 흐르는 하천, 비옥한 농경지, 그리고 사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찌포리는 갈릴리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서기전 40년 헤롯이 로마군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침공했을 때 찌포리를 선점한 후 갈릴리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서기전 4년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왕국의 분봉 왕으로 임명됐을 때 그는 자연스럽게 찌포리를 새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후 유대민족 최고의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은 여러 지방으로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서기 200년경 찌포리에 설립되면서 이곳이 유대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록된 토라’인 구약성서와 견줄만한 ‘구전 토라’인 탈무드의 기본이 되는 미쉬나가 당시 최고 랍비 유다에 의해 최종적으로 편집된 곳도 바로 찌포리였다. 1985년부터 찌포리에 대한 본격적인 대규모 발굴이 시작되어 신약시대 로마식 도시의 모습이 잘 드러났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된 회당과 로마 귀족들의 화려한 저택들이 발견되면서 이제 찌포리는 초기에는 행정 중심지로 그리고 서기 3세기 이후에는 유대교의 중심지로 크게 번창했음을 알 수 있었다. 현재까지 발굴된 찌포리의 유적들은 대부분 신약시대 직후인 서기 2-5세기의 회당과 귀족들의 저택 등인데 특히 60여 군데서 발견된 모자이크는 갈릴리 지역의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서기전 4년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 왕국의 첫 번째 수도로서 찌포리에서 대규모 건축 공사를 시작했을때, 나사렛을 비롯한 근처의 마을 주민들이 이 공사에 대거 참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요셉과 예수의 직업으로 알려진 목수는 그리스어로는 ‘텍토노스’라 불리는데 이의 정확한 뜻은 ‘목수’라기 보다는 일반적인 ‘건축 노동자’라는 학설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찌포리 건설 현장을 오갔을 것이고 어쩌면 이곳의 왕궁 부설학교에서 교육 받을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예수는 어릴 때부터 찌포리에 있는 극장에서 서커스와 연극 등을 구경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그리스 고전문학에서 ‘휘포크리테스’는 주로 ‘연극 배우’라는 뜻으로 사용됐는데 오직 신약 성서의 복음서에서만 배우라기 보다는 ‘위선자’의 의미로 자주 쓰였다. 아마도 원래 예수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을 ‘이 배우같은 자들아’라고 빚대어 꾸짖었을 것이다. 실제 생활과는 전혀 다른 삶을 연기하는 찌포리 극장의 배우들을 염두에 둔 예수의 언어적 유희는 로마식 극장이 없었던 나사렛 같은 시골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발상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나사렛의 소박한 산골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왕궁의 일상 생활이 예수의 비유에 자주 인용된 사실도 이 가설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왕궁에 거하는 고급 의상을 차려입은 자들(마 11:8), 빚진 종을 용서하는 왕(마 18:23-35), 혼인 잔치를 베푸는 왕(마 22:1-14), 왕과 왕이 전투를 벌이는 비유(눅 14:31), 그리고 예수의 후원자들 중 한 사람은 다름 아닌 헤롯 안티파스의 재무장관이었던 구사의 아내인 요안나(눅 8:3)라는 사실 등은 모두가 찌포리나 티베리아스같은 왕도와 동 떨어져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내용들인 것이다. 서기 20년경 갈릴리 왕국의 수도는 갈릴리 호수 변에 새로 건설된 로마식 도시인 티베리아스로 이전되었다. 청년이 된 예수 자신도 장남으로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이 도시의 건설 현장에서 일했을 것이다. 수도 이전과 함께 찌포리의 영화가 사라지고 티베리아스를 중심으로 하는 갈릴리 호수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직감한 예수가 자신의 선교 중심지로 가버나움을 택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였다. 성서시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이름 뒤에 우리의 성에 해당되는 가족 이름으로 ‘아무개의 아들’이라는 구절을 덧붙였다. 따라서 예수의 정식 이름도 당시 아람어 표시로 ‘예수 바르 요셉’이 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친숙한 표현은 바로 당사자의 고향을 이름에 추가하는 방식이었다. 아리마대 요셉, 막달라 마리아, 구레네 시몬 등이 대표적인 예이며 예수도 종종 나사렛 예수로 불렸다. 그런데 굳이 고향을 출생지로 본다면 베들레헴 예수, 또는 공생애 현장을 기준하자면 갈릴리 예수라는 명칭도 가능하겠지만 그의 서른 살까지의 교육적, 문화적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찌포리 예수가 가장 적절한 명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설명’ 제목: 찌포리 극장 신약시대에 건설된 4500석 규모의 찌포리 극장은 갈릴리 지방 최고의 공연장이었다. 원래 연극배우를 뜻하는 그리스어 ‘휘포크리테스’는 복음서에서는 주로 위선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아마도 예수가 이곳 극장에서 공연되는 그리스 연극들을 관람하면서 가면을 쓰고 맡겨진 배역을 충실히 소화하는 배우들의 이중성을 표현하는 비유로 이해될 수 있다.
  • 2006.08.20

    김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솔로몬은 십계명을 어겼는가?
  • 성전에 세워진 그룹에 대한 우상 논란 구약학자 “2계명 어긴거 아니다” 해석 서기전 167년 12월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교 탄압의 일환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가증스런 파멸의 우상’을 세웠다(마카베오상 1:54). 이에 격분한 유대인들은 모디인 마을의 마타티야 가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 집안의 셋째 아들의 이름을 따 ‘마카비 혁명’이라 일컫는 대규모의 민중 봉기는 시작된지 3년 만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의 우상을 철거하였다. 그 후 유다 왕국은 다윗-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약 100년 동안의 독자적인 하스몬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헤롯 성전의 황금 독수리 상 신약 시대에 들어와 기존의 소규모 성전을 헐고 로마 시대 최대 규모의 성전을 신축한 헤롯 왕은 성전 입구의 대들보 위에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황금 독수리 상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2계명을 강조했던 두 명의 랍비 유다와 마티아스는 제자들에게 헤롯이 설치한 우상의 죄악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격분한 그의 제자들은 곧 성전으로 달려가 황금 독수리상을 끌어 내려 도끼로 부숴버렸다. 이에 화가 난 헤롯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산채로 화형에 처했다.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상 제 2계명을 철저히 지켰던 시대는 서기전 167년 마카비 혁명부터 서기 135년 바르 코크바 혁명까지 약 300년 동안이다. 고고학적 발굴에서 출토된 이 시대의 동전에는 인물이나 동물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의 후광으로 유다의 왕으로 임명된 헤롯이 찍어낸 동전에도 그의 초상은 새겨져 있지 않고 오직 식물적인 모티브만 나타난다. 성막과 성전의 그룹은 우상인가? 야훼는 직접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막 안에 위치한 법궤를 덮는 두 마리의 그룹을 만들 것을 명령했으며(출 25:18-22) 성막의 천에도 여러 개의 그룹들을 장식하도록 하였다(출 26:1).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올리브 나무로 만든 길이 4.5m, 높이 4.5m 크기의 그룹 두 마리를 설치했고(왕상 6:23-28) 성전의 내부 벽과 문짝에도 그룹들을 부조로 새겼다(왕상 6:29-35). 구약성서의 그룹은 고대근동의 일반적인 수호신인 이집트의 스핑크스나 메소포타미아의 라마수와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과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완벽한 존재로서의 합성 생물을 희망해왔다. 이러한 꿈은 고대 이집트에서는 인간의 머리와 사자의 앞 부분, 황소의 뒷 부분과 독수리의 날개로 이루어진 스핑크스 형상으로 구체화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황소의 몸체에 인간의 얼굴, 그리고 독수리의 날개가 부착된 라마수(Lamasu) 석상으로 표현되었다. 과연 솔로몬 성전의 그룹 두 마리는 제 2계명에 저촉되는 것일까? 우상으로 숭배할 신상은 만들지 말라 구약성서 오경에 등장하는 우상제작 및 숭배금지 조항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살아있는 생물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훼가 금지시킨 것은 신적인 존재로 숭배할 목적으로 만드는 우상 제작 금지라는 것이다. 즉, 솔로몬이 그룹 두 마리를 만들었을 때 그는 그것을 자신의 수호신을 숭배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제 2계명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서기 12세기 스페인 출신의 위대한 유대교 학자인 마이모니데스의 십계명 해설에 기초하고 있다. 마이모니데스는 십계명의 첫 세 가지 계명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다른 신을 갖지 말고, 둘째, 그것에 절하지 말며, 셋째, 그것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지 살아있는 동물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은 곧 신격화되는 것에 한정되며 만일 신으로 섬기는 것이 아닐 경우에는 형상을 만들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출애굽기 20장 23절에서 야훼가 만들지 말라고 금지시킨 것은 일반적인 형상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 숭배되는 신상들이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나아가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십계명이 구체화된 시기를 서기전 5세기 페르시아 시대로 보고 있기 때문에 솔로몬이 그룹을 만들었다하더라도 우상숭배 금지 계명에는 저촉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에스겔의 네 생물 솔로몬 성전의 그룹은 에스겔 예언자의 환상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에스겔의 그룹은 각각 인간, 사자, 황소, 독수리 등 모두 네 개의 얼굴을 지녔다(겔 1:10). 이러한 구약의 전통적인 그룹은 신약시대에 들어와 요한의 환상 가운데에도 각각 사자, 송아지, 인간, 독수리의 네 생물이 주님의 보좌 주위로 배치돼 있음을 알 수 있다(계 4:7). 한편 서기 4세기 비잔틴 시대 이후로 기독교 예술에서 자유스럽게 성서의 인물과 동물들을 형상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에스겔서와 요한 계시록의 네 생물은 신약의 4복음서를 상징하는 모티브로 정착됐다. 마태는 인간, 마가는 사자, 누가는 황소, 그리고 요한은 독수리로 각각 상징된다는 것이다. 앗시리아의 황소 인간 라마수(Lamasu) 1840년대 메소포타미아 첫 발굴에서 출토된 가장 중요한 유물은 서기전 8세기 앗시리아 궁전 입구에 설치된 수호신 라마수 석상들이다. 오늘날 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의 메소포타미아 전시관을 장식하고 있는 라마수 석상들은 왕관을 쓴 사람의 얼굴에 황소의 몸, 그리고 독수리의 날개가 합성된 생물로 표현된다.
  • 2006.07.16

    김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솔로몬의 국제무역
  • 솔로몬은 어떻게 국제무역의 주인공이 됐을까? 주변국 대상으로 뛰어난 무역감각 보여 다시스 해운회사 설립해 부, 명성 쌓아 솔로몬 시대 예루살렘은 외국제 수입 상품들로 넘쳐났으며 수많은 외국 상인들이 북적대는 국제적인 메트로폴리스였다. 부왕 다윗이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무력으로 국제적 감각을 익힌 반면, 아들 솔로몬은 무역과 외교라는 평화적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국제화의 중심지로 부각시켰다. 솔로몬의 국제성은 300명이나 되는 그의 부인들 중에서 각각 이집트, 모압, 암몬, 에돔, 페니키아, 힛타이트의 왕족과 귀족 출신들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잘 찾아볼 수 있다. 과연 솔로몬은 어떤 경로를 통해 국제무역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 백향목은 페니키아로부터 예루살렘 성전의 신축공사를 기획하던 솔로몬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당대 최고급 목재인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하는 문제였다. 백향목의 명성은 이집트에서는 이미 왕조가 시작된 서기전 3000년경부터 입증이 되었다. 대규모 선박을 만들기 위해 이집트는 레바논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뗏목으로 백향목을 가져왔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축성과 궁전 및 성전 등의 건축 사업을 위하여 필요한 목재와 기술은 페니키아의 두로 왕 히람과의 국제 무역을 통해 충당하였다. 당시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 등의 목재는 바다에서 뗏목으로 이동되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한 욥바 북부의 야르콘 강으로 운반되었다. 목재와 기술 지원의 대가로 솔로몬은 해마다 엄청난 양의 밀과 올리브유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갈릴리 지방의 20개 성읍을 두로 왕 히람에게 건네준 것으로 미루어 솔로몬이 약속한 대가를 제 때에 충분히 지불하지 못했거나 해가 거듭할수록 히람의 요구 조건이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투용 말과 병거는 힛타이트와 이집트로부터 말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사용된 것은 이집트 신왕국 시대가 시작될 무렵인 서기전 1550년경부터였다. 이집트는 비교적 일찍부터 말과 병거를 이용한 전술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많은 수효의 군마가 필요했고 솔로몬은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터키 남부의 무쭈르(Mutzur)와 쿠에(Que)로부터 말을 수입하여 이집트에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는 국제 무역로 상에 위치한 므깃도를 병거성으로 개발했고, 넓은 이즈르엘 평야에서 군마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 솔로몬이 운용한 병거대(chariotry)와 기병대(chivalry)는 4만 마리의 말과 1만2000명의 기병들도 구성된 대규모였다. 당시 병거는 한 대에 은 600세겔(6킬로그램)이었고 말은 한 마리에 은 150세겔(1.5 킬로그램) 정도였기 때문에 솔로몬은 말 장사를 통해 많은 수입을 올렸을 것이다. 향품은 스바 왕국으로부터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왕상 10:1)’ 예루살렘을 방문했지만 실제로 그의 방문은 고대 이스라엘과 스바 왕국 사이의 국제 무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바 왕국은 오늘날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예멘 지역에 위치해 있었으며 광야 출신답게 낙타를 이용한 대규모 장거리 무역을 주도하는 나라였다. 스바의 여왕은 황금 120달란트, 즉 5톤에 달하는 엄청난 양을 가져왔는데 이는 홍해 건너편의 동부 아프리카 지역과 해상 무역을 통해 확보한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스바 산의 최고의 상품은 신전 제사에 필수적인 분향제와 장례식에 필요한 방부제, 향유, 그리고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는 향신료 등의 향품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홍해 변의 아라비아 광야와 아프리카의 소말리아, 그리고 인도양 연안에서 자라는 식물의 수액에서 추출하여 만들어졌다. 에시온 게벨의 다시스 해운회사 솔로몬이 주변국들과 육상무역을 했지만 이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최고의 부와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에시온 게벨 항구에 설립한 다시스 해운회사 덕택이었다. 다시스는 지중해 변에 자리 잡은 해양 무역의 도시로만 추정될 뿐 아직 정확한 지리적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철, 주석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한 스페인의 타르테소스로 보고 있다. 다시스의 배들은 홍해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와 인도양 너머의 인도, 그리고 동부 아프리카 등 매우 먼 거리를 항해하기 때문에 3년에 한차례씩 이스라엘 항구인 에시온 게벨로 돌아왔다. 어떤 학자들은 항해기간이 3년 걸린 것은 아프리카 대륙을 한바퀴 돌아 대서양을 통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불리는 지브롤타르 해협을 통과하여 지중해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게지랏트 엘-파라윤 이스라엘 남쪽 홍해의 무역항인 에시온 게벨은 1967년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후 해양 고고학자들에 의해 신비에 싸인 홍해의 조그만 섬 게지랏트 엘-파라윤으로 알려졌다. 해안으로부터 18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섬은 길이가 400미터 정도 되는 작은 섬으로서 서쪽에는 깊숙한 만으로 이루어진 항구가 있었다. 해저 발굴 결과 방파제의 흔적과 함께 구약시대의 토기류가 발견되었다. 실제로 지중해의 페니키아 도시들도 두로와 같이 해변에서 가까이 위치한 섬을 육지와 방파제로 이어서 항구를 만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만일 다시스 해운회사가 페니키아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었다면 내륙에 위치한 텔 엘-클레에페 보다는 해변에 가까이 위치한 게지랏트 엘-파라윤 섬이 많은 배들을 정박시킬 수 있는 적절한 항구가 될 것이다. <협성대> <사진설명> 게지랏트 엘-파라윤 ‘파라오의 섬’이라는 의미의 게지랏트 엘-파라윤은 이스라엘 남단의 홍해에 있으며 가까이 있는 육지와 연결되는 방파제를 적절히 활용한 항구로 개발되었다. 1980년대의 집중적인 해저 발굴을 통해서 이 섬이 솔로몬이 고용한 다시스 해운회사가 국제무역을 위해 무역항으로 개발됐던 에시온 게벨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2006.06.16

    김성 교수의 성서문화와 역사- 여리고의 무너진 성벽은 지금 어디에?
  • 유럽 고고학자들 1860년부터 5번 발굴 작업 ‘흙 속에 묻혀 있다’ vs ‘흔적 찾을 수 없다’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너 처음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 왔을 때 그들이 마주친 첫 번째의 장애물은 여리고 요새였다. 육중한 성문과 높은 성벽을 앞에 두고 그들은 오늘날의 전술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독특한 방식인 성벽 돌기를 하루 한 차례씩 엿새 동안 시행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이 전술이 성벽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세밀하게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여호수아서(6장)에 의하면 일곱 째 날에는 성벽을 일곱 바퀴나 돌면서 뿔 나팔을 불고 큰소리로 외치자 그만 그 견고한 성벽이 무너졌다고 한다. 여호수아의 군대가 기적적으로 파괴시켰다는 여리고의 무너진 성벽 문제는 성서고고학 발굴 사에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광활한 요단 평원에 25미터의 높이로 우뚝 솟은 여리고는 약 1만 2천 평 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유적지이지만 지난 1860년대 처음으로 발굴된 이후로 성서고고학자라면 누구든지 평생에 한번쯤은 꼭 발굴하고 싶어 하는 현장으로 자리 잡았다. 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아나는 엘리사 샘가에 자리 잡은 여리고는 광야 한가운데 위치한 비옥한 오아시스로서 로마 시대에는 비싼 값에 팔리는 향유의 생산지로서 클레오파트라의 영지가 되기도 했고, 헤롯의 궁전과 별장이 위치한 휴양지로서도 유명했다. 예루살렘 탐사의 임무를 띠고 팔레스타인에 머물고 있던 영국의 찰스 워렌(C. Warren)은 1868년 4월 여리고를 방문하여 수십 명의 인부들을 이끌고 성서시대의 여리고로 여겨지는 ‘텔 술탄’이라 불리는 언덕을 발굴하기 시작하였다.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발굴에서 워렌은 마치 참호를 파듯이 텔의 동서로 이어지는 도랑과 텔의 바닥에까지 도달하는 수직갱을 파내려갔다. 하지만 그의 발굴에서 흙벽돌 건물의 흔적만 밝혀졌을 뿐 이렇다 할만한 여호수아의 성벽은 찾을 수 없었다. 여리고에 대한 두 번째의 발굴은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젤린(E. Sellin)과 독일의 바찡어(C. Watzinger)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그들은 엄청난 흙벽돌의 잔해 속에서 견고한 바윗돌로 기초를 다진 성벽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젤린이 여리고에서 발견한 성벽이 다름 아닌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벽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예루살렘을 통해 온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발굴이 진행되면서 한 시대의 성벽만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다양한 시대의 성벽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과연 어느 것이 여호수아 시대의 성벽이냐는 난감한 문제에 봉착하였다. 결국 그들은 서기전 16세기경 파괴된 중기 청동기 시대의 성벽을 최종적으로 선택했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입성도 서기전 16세기의 사건으로 추정하였다. 젤린의 이러한 연대추정은 솔로몬의 성전건축 시기가 출애굽한 지 480년이라는 성서의 언급(왕상 6:1)과 어느 정도 일치하지만, 전통적인 출애굽 연대인 서기전 13세기와는 약 200년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영국의 고고학자 가르스탕(J. Garstang)은 1930년부터 여리고에서 새로운 성벽을 찾기 위한 대규모 발굴을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서기전 3000-1500년 사이의 무덤들을 많이 발굴하여 함께 출토된 부장품들, 특히 잘 보존된 토기류의 분석을 통해 여리고의 주거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었지만 7년 동안의 발굴 결과 내린 가르스탕의 결론은 젤린의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단지 성벽의 연대를 100여년 늦추어서 여호수아에 의한 여리고 성의 파괴가 서기전 15세기에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 여리고에 대한 네 번째 발굴은 영국의 여류 고고학자인 케년(K.M. Kenyon)에 의한 것으로서 1952년부터 1958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녀는 이 발굴에서 가장 발전된 발굴기술을 적용하였고 좀 더 정밀한 토기들의 분석을 통한 정확한 연대추정 결과 여호수아 성벽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 곳에는 이미 1만 년 전부터 거대한 성벽과 망대가 건설됐기 때문에 여리고가 공식적으로 세계 최초의 도시라는 것이다. 도시문명의 고향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서기전 4000년경부터 성벽을 쌓기 시작한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파격적인 결과였다. 한편 여호수아 성벽에 대한 연대추정은 서기전 16세기로서 그 이전의 발굴 결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1967년에 발생한 6일 전쟁의 결과 여리고가 이스라엘의 통치 하에 들어왔다. 이스라엘 고고학자들로서는 여리고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지만 우선 새로 정복한 요단강 서안의 다른 미개척지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를 하느라 미처 여리고를 재 발굴할 계획을 세울 수 없었다. 그나마 1993년에 체결된 ‘평화와 영토’ 협정으로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로 귀속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 곳을 발굴할 수가 없게 되었다. 1997년 4월에 이탈리아의 로마 대학 발굴 팀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문화재관리청과 공동으로 여리고에 대한 통산 다섯 번째의 발굴을 재개했다. 1868년부터 오늘날까지 유럽의 대표적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샅샅이 발굴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 시대에 여리고가 성벽을 지닌 도시로 건재했다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여호수아의 성벽이 아직도 흙 속에 파묻혀 있다는 낙관론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빗물에 씻겨 내려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비관론이 교차되고 있는 실정이다. 1997년부터 시작된 이탈리아 팀의 발굴 경우 아직 몇 차례의 발굴이 더 계획되어 있고 최종 보고서가 나오기까지는 몇 년이 더 걸리겠지만, 이 새로운 발굴에서도 서기전 13세기 성벽을 지닌 여리고 도시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면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를 종합해볼 때 그 시기에 여리고는 이미 폐허가 된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협성대>
    사진설명
    1.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여리고의 전경(사진 위) 2. 여리고성의 발굴 현장(사진 아래)
  • 2006.05.19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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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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