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WAY
신약 성서의 무대였던 ‘가이사랴’
  •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해양 도시 가이사랴는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 아름다운 풍광이 어우러져 수많은 사람이 찾는 명소다. 2000년 전 헤롯왕은 로마에 잘 보이기 위해 이곳을 로마황제의 이름을 따서 도시의 이름을 가이사랴라고 지었다. 이곳의 항구는 지형물을 이용하지 않고 지은 인류 최초의 인공 항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헤롯왕은 가이사랴 외에도 예루살렘성전, 마사다 요새 등 여러 건축물을 지어 ‘위대한 건축자’라는 별칭이 있다. 과거 가이사랴는 300척의 배를 한 번에 정박할 수 있는 10만㎡ 규모의 항구 도시였다. 이때문에 가이사랴는 유대 지역에서 지중해의 로마 각지로 가는 관문 도시 역할을 했으며 로마가 직접 파견한 유대의 총독이 머무는 국제 행정의 중심지였다. 신약 성서에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 벨릭스, 베스도 총독들의 근무지가 바로 이곳이며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의 첫 출발지이자 복음 전파의 장소이다.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을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할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하자 가이사랴로 피신했다(행 9:30). 또 바울은 로마로 가기 전 2년 동안 머무르면서 총독 벨릭스가 두려워했던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행 24장). 신약 사도행전에 나오는 고넬료는 이 도시의 백부장이자 로마인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침례를 베풀었는데 그가 바로 백부장 고넬료였다(행 10장). 지금의 가이사랴에 가면 발굴, 복원된 유적들을 통해 방문객들의 시간을 2000년 전으로 돌려놓는다. 기둥과 거대한 조각상들의 파편, 모자이크 장식이 된 바닥을 통해 과거 화려했을 궁전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이 펼쳐지듯 전차 경기장과 원형경기장도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는 영화에서처럼 검투 경기가 열려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됐다고 한다. 유대 땅에 로마식으로 건설되어 로마의 문화로 가득했던 가이사랴는 역사의 아이러니로 사도들과 기독교인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복음의 중심지가 되어 이스라엘과 로마, 열방의 영적인 전초기지가 됐다. 수많은 역사의 반전 속에 현재 가이사랴에서는 원형 극장에서 주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찬양하는 기독교 순례객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가이사랴(이스라엘)=글 복순희 / 사진 김용두 기자
  • 2018.12.23 / 복순희 기자

    일본 나가사키
  • 순교의 피가 서려 있는 땅 일본 큐슈 북서쪽에 위치한 나가사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이 투하된 곳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하우스텐보스 같은 관광지로 유명하다. 나가사키는 일찍부터 서구 문화를 받아 들였고 이 때문에 460여 년 전부터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가 됐다. 16세기 중반 많은 선교사들이 이곳에 와서 생명을 바쳐 헌신했고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대부분의 주민들이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나 400년 전 박해가 시작되면서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피를 뿌려야 했다. 나가사키 지역에서는 신자들의 개종을 위해 운젠지옥(식물이 자라지 않는 곳, 雲仙地獄)의 끓는 온천물을 붓거나 거꾸로 매달아 오물에 머리를 묻는 고문 등이 자행됐다. 선교사와 성도들을 십자가에 달아 창으로 찔러 죽이고, 기둥에 묶어 장작불로 태워서 죽이는 등 잔인한 처형이 시행됐다. 오오무라 남쪽 국도 근처의 작은 언덕 위에 있는 미야자키 감옥이라고도 불리는 스즈타 감옥은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고통을 참아내야 했는지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감옥은 1618년 12월에 나가사키에서 체포된 선교사와 성도 30여 명이 1622년 9월까지 수감되었던 장소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감옥 터에는 당시 감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나무 울타리와 십자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스즈타 감옥은 가로 3.6븖에 세로 5.6븖로 겨우 일본식 돗자리인 다다미 12장 넓이에 나무로 엮어 만든 새장과 같은 좁은 감옥이었다. 비가 오거나 한겨울에 눈이 내리면 추위를 피할 수도 없는 혹독한 환경이었고 많을 경우에는 33명이 함께 있어서 누울 수도 없고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한다. 감옥에 수감된 성도들은 밥과 소금만 먹으며 생명을 이어갔다. 스피노라 선교사가 감옥에서 쓴 서신에는 “내복과 겉옷을 밖에서 세탁하거나 햇볕에 말리는 것도 금지되어 심히 불결하며 용변도 감옥 내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어 악취가 진동하고 밤에는 등불조차 없어 신체의 전 감각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라며 당시의 참상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스즈타의 감옥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갇혀 있던 크리스천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의 생활을 보냈다. 당시 1세의 아기였던 치요와 13세의 소년이었던 치마츠 남매가 부모와 함께 체포되어 부모가 처형된 이후에도 비좁은 감옥 안에서 75세와 74세로 숨을 거둘 때까지 60여 년 이상을 고통 가운데 생존했다고 한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감옥 안에는 찬송이 울려 퍼졌고 성도들은 신앙을 잃지 않았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여러 명이 사망하고 스피노라 선교사 등 24인은 1622년 9월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했고, 프랑코 선교사 등 8명은 같은 해 9월 오오무라의 호코바루에서 순교했다. 호코바루 처형장은 1657년 131명의 기독교인의 머리를 잘라 염장을 해 형장에서 그대로 방치한 곳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끌려온 조선인 성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는 호코바루 처형장에서 참수된 순교자 131인을 인적이 드문 대나무 숲 속에 두 개의 구덩이를 파고 매장했다. 매장 후 3일 만에 몸체를 다시 파내어 오오무라만에 버렸다. 머리와 몸을 따로 매장한 이유는 죽은 크리스천이 부활할 것을 겁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은 처음 매장한 장소에서 약 150븖 떨어진 남쪽에 몸체무덤비가 세워졌고 500븖 떨어진 곳에 머리무덤비가 세워져 있다. 큐슈(일본)=글 사진 이미나 기자
  • 2018.10.28 / 이미나 기자

    홋카이도 대학에서 만난 윌리엄 클라크 박사의 자취
  • Boys, Be ambitious!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누군가는 학창 시절 이 문구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원대한 미래를 꿈꾸며 학업에 정진했을 것이다. 이 말은 홋카이도 대학의 전신 삿포로 농학교 초대 교장이었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박사(1826∼1886년)가 남긴 말로 유명하다. 그가 말한 ‘야망’은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라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기반 한 비전이다. 140년이 지난 지금도 홋카이도 대학 곳곳에서는 윌리엄 클라크의 뜻과 발자취를 기리는 기념물들을 볼 수 있다.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윌리엄 클라크 박사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흉상 뒤로 ‘클라크 회관’이라는 학생회관이 자리잡고 있고, 교내 이정표마다 클라크 박사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정문 옆에 위치한 정보센터 ‘엘름의 숲’에서는 클라크 박사를 캐릭터로 만든 기념품과 서적들을 판매한다. 클라크 박사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물학자이자 농학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기독교 신앙으로 인생을 산 크리스천이었다. 1876년 초대 교장으로 부임할 당시의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일행이 처음 일본에 도착했을 때 유난히 큰 짐을 본 장학관이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요? 여기선 성경을 가르칠 수 없는데….” 과거 일본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불허하였으므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클라크 박사는 “그러면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당황한 장학관은 강의 시간 이후에 가르치도록 허락했고, 클라크 박사는 농업기술을 전수하는 한편 성경에 인생의 꿈이 있다고 가르쳤고 1년이 채 안 되는 사역을 마치고 1877년 귀국했다. 이 때 고별사에서 클라크 박사는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가르침과 헌신에 힘입어 이 학교의 1기 학생들 모두가 크리스천이 됐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자의 서약’이라는 각서를 작성한 삿포로 농학교 1기생과 2기생을 중심으로 삿포로밴드라는 신앙 공동체가 탄생했다. 우치무라 간조(2기)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여기서 배출됐다. 농업학교에서 시작된 홋카이도 대학교는 일본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문대학으로 성장했으며 현재까지도 농업과 낙농업 분야에서 탁월함을 인정받고 있다. 윌리엄 클라크 박사가 학생들에게 열정을 다해 심어준 신앙과 개척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그의 명언과 함께 남아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 2018.09.23 / 복순희 기자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그들은 왜 충치를 치료하지 않았을까?
  • 독일 베를린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 전쟁의 상흔을 기억하는 지혜 배운다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 리턴즈’의 인기가 만만찮다. 평균 78.8세 노년 배우들이 함께 떠나는 황혼의 배낭여행 콘셉트로 제작된 이 프로그램은 개성 넘치는 출연자들과 문화유산이 잘 보존된 유럽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제법 쏠쏠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중에서도 베를린은 더욱 특별했다. 할배들은 동·서독 분단의 현장 베를린장벽과 독일 통일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 등을 다니면서 그들의 젊은 시절을 회고했다. “이번 여행은 색다르다. 우리랑 비슷한 (분단의) 역사를 가진 나라를 돌아서 조금 달랐다.” “우리는 기록 보존에 약한 것 같다. 우리만 살 것이 아니고 자식들도 살아야 하니까 보존을 잘해서 교훈이 될 수 있게 하면 좋겠다.” “다음세대에게는 절대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라는 점에서 일본과 같지만 전후 처리 과정의 차이로 현재는 매우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일본은 그들의 지난 역사를 왜곡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독일은 부끄러운 역사를 드러내고 진지하게 반성하며 재발을 방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국제사회는 독일의 반성과 사죄를 받아들였다. 베를린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Kaiser-Wilhelm-Gedaechtniskirche)’는 그러한 노력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베를린 번화가인 쿠담 거리(Kurf몕rstendamm)에 위치해 있는 이 건물은 독일의 첫 통일을 이룩한 프로이센의 카이저 빌헬름 1세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생일인 1891년 3월 22일에 주춧돌을 놓았다. 이 건축물은 프란츠 슈베츠텐(Franz Schwechten)의 작품으로 2740㎡의 벽을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113븖 높이의 첨탑과 2000개가 넘는 신도석을 가진 이 교회 건축물은 1895년 9월 1일 축성됐고 중앙현관은 10여 년 뒤에 완성됐다. 견고하고 아름답던 교회는 1943년 나치 군대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 과정에서 교회당의 절반에 해당하는 63븖만이 남았고 벽면에 큰 상흔이 나면서 ‘썩은 이빨’이란 별명을 얻게 됐다. 그들은 이 ‘충치’를 치료하지 않은 채 남겨두었다. 모든 기록은 교회 내부에 그대로 기록되었으며 온전하던 옛 모습의 사진들과 함께 전시하고 있다. 예배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 옆에 세워진 신관에서 드리고 있다. 신관은 스테인드글라스를 벌집모양으로 박아 지었으며 내부에는 8각형의 설교단, 황동 예수상, 5000여 개의 파이프를 가진 오르간이 있어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끌고 있다.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73년, 우리는 그동안 경제를 재건하고 민주주의를 완성시켜 온 특별한 역사를 가진 나라를 만들어 왔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과 기도가 있었다. 게다가 아직 분단의 상흔을 지닌 채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과연 이 역사의 교훈을 어떻게 보전해야 할지, 카이저 빌헬름 기념 교회가 주는 지혜를 되새겨 본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야훼이시니이다” (시편 4편 8절)
  • 2018.08.26 / 김주영 기자

    성경 역사가 숨쉬는 ‘통곡의 벽’과 ‘히스기야 터널’
  • 지구상에서 가장 분쟁이 심한 땅 이스라엘. 유대민족의 국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치국가 팔레스타인이 항상 ‘서로의 평화’를 주장하며 얼굴을 맞대고 살고 있는 지역이다. 해발 800m에 있는 ‘평화의 도시’ 예루살렘은 세계 3대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공존하며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으로 남아있다. 지난 5월 14일 미국이 주이스라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지난 6월 7일 이스라엘 정부는 전 세계 600명의 종교 정치지도자들을 초청, ‘예루살렘평화기도회’를 개최했다. 이 기도회에 참석한 뒤 찾은 곳이 ‘통곡의 벽’이었다. 유대인들의 한과 눈물이 서려 있는 그곳에서 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봤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여부스 족으로부터 빼앗아 왕국의 수도로 삼고,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뒤 유대인들의 영원한 수도로 자리잡았지만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무참히 파괴됐다. 이후 유대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2000년 가까이 나라 없는 민족으로 살았다. 예수님이 이미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절)고 예언한 일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하기 전까지 이 지역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점령하여 살았다. 성전이 파괴된 뒤 로마 시대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일이 금지됐다. 그러다가 비잔틴 시대(306∼1453)에 와서야 그들은 한 해에 한 번 아브월 9일(성전파괴일)에 성벽에 올라와 성전이 파괴되고 나라 없이 방랑하는 자신들을 생각하며 통곡했다. 이렇게 붙여진 이름이 ‘통곡의 벽’이다. 예수님의 예언이 생생히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 셈이다. 수 천 년 역사를 간직한 통곡의 벽은 바닥에서부터 7단까지만 헤롯 시대(주전 20년) 성전의 벽이고, 그 위로 4단은 7세기에, 나머지는 16세기에 쌓았다. 1967년에 일어난 6일 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회복한 뒤 전 세계 유대인과 크리스천들이 이곳을 찾아오고 있다. 이곳에는 도서관이 있어 어린아이들과 랍비들이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통곡의 벽에 들어가는 모든 남자들은 ‘키파’라는 조그만 모자로 머리를 가린다. 여자는 어깨와 무릎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린다. 기자가 간 그날도 유치원 어린이들이 선생님과 가족들의 축하를 받으며 졸업사진을 찍었다. 유대인들과 방문객들이 벽 앞에서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통곡의 벽을 뒤로하고 ‘히스기야 터널’로 향했다. 히스기야는 주전 700년경 남유다의 14대 왕이다. 1880년 물에서 놀던 한 소년이 발견한 이 터널은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의 침략에 대비하여 성 밖의 기혼 샘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었다. 히스기야는 당시의 기술로 돌산을 뚫어 533m의 터널을 만들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이 산헤립에 포위되어 있을 때도 급수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500m 이상의 암벽을 파낸 터널공사는 당시로선 대공사였다. 게다가 직선이 아닌 S자 곡선의 터널로, 양쪽에서 출발해 암벽을 파 들어가다가 중간에서 정확히 만나는 공법을 선택했다. 그 기술력이 놀랍다. 히스기야는 이 터널로 말미암아 적의 공격을 막아냄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다.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대하 32:30). ‘통곡의 벽’에서 울며 기도한 끝에 2000여 년 만에 독립국가를 세운 유대인들을 생각한다. 수백 미터 지하로 물길을 내어 민족을 구한 그들의 역사를 또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에 물결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한다. 예레쯔(땅)는 사람과 민족과 국가의 터전이다. 예레쯔를 딛고 살아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언제 찾아올까? 사진설명=히스기야터널이 뚫린 것을 기념해 일꾼들이 당시의 기쁨을 적어놓은 실로암 비문. “…(터널)이 관통될 때…여전히 3규빗 정도 남았을 때 반대쪽에서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를(들을 수 있었고)…그리고 터널이 맞뚫렸고, 돌 깨는 사람들이 돌을 팠고, 도끼와 도끼가 서로 부딪혔다.” 예루살렘(이스라엘)=글 사진 김용두 기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시 122:6)
  • 2018.07.22 / 김용두 기자

    취리히, 종교개혁의 눈을 뜨다
  • 사진찍기에 자신없는 사람은 스위스로 가보자. 어떻게 찍어도 작품이다. 누구랑 찍어도 예술이다. 셀카에 지쳤다면 중세의 향기가 느껴지는 치즈마을 그뤼에르로 가서 퐁듀(Fondue;팔팔 끓는 치즈에 감자를 찍어먹는 전통음식)를 먹어보자. 그 고소함의 행복감이 사라지기도 전에 사계절 녹지않는 만년설 융프라우 정상에서 컵라면으로 엄지척!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눈부신 자연과 깨끗함에 감사할 수 있는 곳이 스위스다. 루체른, 인터라켄, 그린델발트, 체르맛, 마테호른, 취리히 그 어느 한곳도 놓칠 수 없는 절경들이다. 취리히는 스위스의 수도가 아니다. 하지만 제일 큰 도시이며,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중앙역에서 취리히 호수를 향해 걷다가 반호프 거리 중간쯤에서 만나게 되는 교회 세 곳이 있다. 성 피터 교회, 프라우뮌스터 그리고 그로스뮌스터이다. 성 피터교회는 높은 첨탑에 유럽에서 가장 큰 시계로 잘 알려져 있으며 프라우뮌스터는 샤갈이 만들었다는 스테인글라스와 어우러진 찬양대석으로 유명하다. 인상적인 두 개의 탑을 가진 그로스뮌스터는 16세기 종교개혁가 츠빙글리 목사가 열정을 다해 사역했던 교회이다. 츠빙글리 목사는 1519년 1월 1일 그로스뮌스터 담임목회자로 부임한 후 그동안의 전통을 깨고 연속적인 강해설교를 시작했다. 한권의 성경을 선택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설교하는 방식인데 기존의 전통과는 다른 것이었다.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1523년 공개논쟁으로 확대되어, 그는 라틴어가 아닌 일상어인 독일어로 자신의 주장을 67개조 조항으로 정리하여 해설까지 덧붙여 출판한다. 이 조항은 교회적인 조치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포함하고 있어서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이 전면적이면서도 포괄적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시의회가 츠빙글리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취리히는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츠빙글리 목사가 강조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와 ‘성경말씀에 대한 강조’였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표어가 츠빙글리에게서 시작됐다. 성경공부시간을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번역작업에도 최선을 다했던 그였다. 학자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자기 구원의 확신에 대한 몸부림에서 출발했다면, 츠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스위스 국민들의 구원에 대한 갈망에서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스위스 국민들의 눈을 뜨게한 위대한 인물이었다. 츠빙글리는 열정적으로 사역을 하다가 1531년 전쟁중 부상으로 47세의 나이로 전사하고 만다. 제네바에서 칼뱅(Kalvin, 칼빈의 프랑스 음)이 종교개혁을 시작하기 5년 전이었다.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은 칼뱅을 거쳐 웨슬레의 감리교운동을 통해 큰 영적부흥운동을 일으키셨다. 이 부흥의 불길은 미국으로 옮겨가 휘니를 통하여 성결운동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며 오순절운동으로 이어졌다. 츠빙글리의 열정이 새겨져 있는 이곳 취리히에 오순절 성령운동의 불길이 다시 타오르길 소원해 본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스위스(취리히)=글·사진 임훈 목사
  • 2018.06.24 / 임 훈 기자

    대만 단수이장로교회
  • 대만 최초의 선교사 맥케이 목사가 시무한 교회병원, 대학교 설립해 대만의 복음화와 근대화 이끌어 대만 단수이는 작은 항구도시로 캐나다에서 온 죠지 레슬리 맥케이 선교사(Rev. George Leslie MacKay)가 이곳에 복음을 전했다. 맥케이 선교사는 캐나다장로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1872년에 대만 최북단 항구도시인 단수이에 도착했다. 그가 처음 단수이에 도착했다고 하는 곳에는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있다. 맥케이 동상은 그가 대만에 상륙하자마자 기도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그가 타고 상륙한 나룻배가 위치하고 있다. 작은 나룻배에는 그가 들고 온 성경과 작은 여행 가방이 전부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그의 표정에서 선교사로서의 소명에 대한 각오가 엿보인다. 동상에서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그가 시무하던 단수이장로교회가 있다. 교회를 가는 길도 그의 이름을 따서 ‘맥케이로’로 명명되어 있다. 단수이장로교회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교회로 아름다운 모습에 신랑신부들의 웨딩사진촬영지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현재도 이곳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있으며, 이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도 꼭 들르는 명소가 됐다. 길을 따라 사람들이 북적이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맥케이 흉상이 위치하고 있는데 맥케이 선교사를 기념한 거리라고 한다. 이곳에는 맥케이클리닉을 만날 수 있는데 맥케이 선교사가 이곳에 세운 대만의 첫 서양식 병원이다. 지금도 병원은 당시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중서양식 혼합형으로 지어져 건축학적 가치가 높고, 대만의 서양의학 출발지라고도 할 수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맥케이 선교사는 복음과 의료뿐 아니라 학교도 세웠다. 대만 최초의 대학인 진리대학(당시 옥스퍼드대학)을 설립했다. 학교 내부에 위치한 카페에는 맥케이 선교사가 정리한 자료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학교는 옥스퍼드대학을 본 따 지어져 대만의 일반대학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영화나 TV촬영지로도 인기가 있다. 대만 단수이 곳곳에 맥케이 선교사가 남긴 사랑의 흔적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 지역을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되물림 되고 있으며, 이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다시한번 전해지고 있다. 아직 대만의 복음화율은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맥케이 선교사를 비롯해 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흘린 눈물의 기도가 반드시 대만을 변화시킬 것을 확신한다. 대만=글 사진 정승환 기자
  • 2018.05.27 / 정승환 기자

    하와이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
  • 하와이 최초 한인 이민 교회…민족 운동 선도 1903년 내리교회 성도 등을 실은 이민 선박 하와이 도착 사탕수수 농장서 일하며 ‘예배’로 고단한 삶 위로받아 우리나라 하와이 이민 역사는 올해 115주년이다. 1903년 1월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단을 태운 미국 선박이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지 100여 년이 넘은 것이다. 당시 하와이에 첫 발을 디딘 이는 모두 86명이다. 인천 제물포 항을 출발해 하와이에 도착한 이들 중에는 인천 내리감리교회 교인 50여 명이 속해 있었다. 선교사 존스 목사의 권고로 이민을 결정한 이들은 하와이로 향하는 선상에서 매일 예배를 드렸다. 이들에 이어 1903년 10월말까지 하와이에는 총 752명의 한인들이 이민을 와 하와이 곳곳 사탕수수농장에 배치돼 일을 했다. 북태평양에 위치한 섬, 하와이는 미국인들의 설탕 수요가 늘면서 19세기 사탕수수 농장이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값싼 노동력이 필요했던 농장주들이 아시아에서 일꾼들을 모으면서 하와이 이민자들은 뜨거운 태양 아래 드넓게 펼쳐진 사탕수수밭에서 땀과 눈물을 흘리며 아메리칸 드림을 일궈냈다. 인천 내리감리교회 교인을 포함해 하와이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고단한 삶의 위로는 ‘예배’였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만들어진 교회가 바로 호놀룰루에 위치한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다. 1903년 11월에 세워진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는 하와이 최초의 한인 교회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교회 창립자는 인천 내리감리교회 출신의 안정수, 윤병구였다. 초기 윤병구 목사에 이어 한국 서부지방 감리사였던 홍승하가 전도사로 사역을 이어받았다. 홍승하는 동족단결, 민지계발, 국정쇄신을 목적으로 설립한 신민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과 하와이 한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앞장섰다. 1904년 11월부터는 하와이 감리교선교부와 함께 『포와한인교보』라는 월간 한글 교회소식지를 만들어 하와이 각지의 한인교회에 배포하기도 했다. 소식지는 논설, 주일성경공과, 교회소식, 한국소식, 호놀룰루 소식 등이 실려 있었다. 하와이 한인들에게 성경 지식은 물론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는 교육 매체로도 활용됐으며 1929년부터 1945년 1월까지는 한·영 이중 언어로 발간됐다. 한인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교회는 1905년 4월 교회로 승격되면서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전신)가 됐고 같은 해 12월 담임 교역자로 민찬호가 부임했다.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는 하와이에서 종교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힘썼다. 연령제한으로 공립 초·중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청년들이 신(新)학문과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1913년 가을학기에 이승만이 교장으로 임명되면서 학교이름은 한인중앙학교(흔히 중앙학원이라 부름)로 바뀌었다. 이승만은 한인학교 교장으로 임명되면서 감리교회 지도자가 됐다. 그리고 담임교역자가 교체되는 공백기간에 매주일 교회에서 설교를 맡기도 했다. 이처럼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는 하와이 이민자들에게 기독교를 통한 올바른 신앙을 전하고 미국사회로부터 원만한 유대관계를 도모하는 한편 한인들의 결속과 단결을 증진시켜 민족 정체성을 강화·확립시키는데 헌신했다. 그 결과 러일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포츠머스에서 회의를 주재하려고 할 때, 하와이의 한인들이 한인교회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보호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신앙심 고취 뿐 아니라 하와이 이민 초기부터 한인들의 애국심, 단결 도모에 힘써왔던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는 오늘날 역시 민족 구심체로의 역할을 담당하며 가족 무숙자 및 무숙자 급식지원, 병원 선교, 양로원 선교, 한인사회학교(한글학교) 운영에 나서고 있다. 또 미국내 선교 및 국내 미자립교회 지원 제3지역 선교 사역 등 선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현재는 한의준 목사가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이민 사회 복음화에 주력하고 있다. 교회는 호놀룰루 키오모쿠 스트리트 1639에 위치해 있다. 호놀룰루(하와이)=글 사진 오정선 기자
  • 2018.05.06 / 오정선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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