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톡
영화는 계속된다
  • 영화는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그려 내놓는 것 가장 좋은 선교적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어 [글러브][127시간][킹스 스피치][그대를 사랑합니다][써니][소중한 날의 꿈][마당을 나온 암탉][혹성탈출][랭고][완득이][헬프][미션임파서블][범죄와의전쟁][화차][건축학개론][어벤저스][내 아내의 모든 것][숙녀와 수용소][다크나이트 라이즈][케빈에 대하여][광해, 왕이 된 남자][철가방 우수씨][창 끝][레미제라블][7번방의 선물][신세계][장고][고령화가족][맨 오브 스틸][월드워Z][설국열차][바람이분다][화이][블랙가스펠] 나열된 제목은 지금까지 리뷰했던 영화들이다. 34편의 리뷰를 3년에 걸쳐 썼다. 처음 가족신문사로부터 영화를 가지고 리뷰를 써보지않겠냐는 제의를 받았을 때 흔쾌히 응했던 것은 일종의 목마름이었다. 세상엔 많은 영화 리뷰가 쏟아져 나오고 그 해석법 또한 다양하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정확히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해석한 영화평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돌이켜 보건데 지난 3년의 시간들은 그런 작업들을 통해 교회 다니는 크리스천들이 영화를 보는 올바른 시각을 갖길 원했다.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다. 세계관이 ‘안경’이라면 ‘하나님의 렌즈’를 갖는 것이 기독교세계관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한 일인데도 교회밖 삶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기독교 세계관이 교회생활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주간의 삶속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영화는 문화적 산물이다. 또한 가장 그 시대를 빨리 읽을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다. 영화는 우리가 정복해야 할 미래의 시간들이며, 이미 지나온 과거들이기도 하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울고 웃는다. 두 시간 안팎의 결과물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세계를 반추해 볼 수도 있다. 창세기 1장 28절에는 문화적 명령이 나와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영화를 사랑하는 크리스천이라면 이 구절을 이렇게 바꿀수 있겠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나에게 이르시되 많이 보고 많이 들어 영화에 충만하라. 영화를 정복하라. 액션과 로맨스와 판타지와 각종 장르로 표현되는 모든 영화를 다스리라” 같은 물을 마셔도 뱀은 독을 생산해내고 젖소는 우유를 생산해 낸다. 영화를 정복하고 길들여서 선교의 도구로 써야 한다. CCC의 ‘예수’ 영화 한 편은 미전도종족에게 상영되어 구원의 도구가 되는 놀라는 일들을 해냈다. 기독교 소재 또는 주제를 가지고 만든 영화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메시지를 담고만 있다면 훌륭한 선교 매체가 된다. 그런점에서 영화를 사랑해 주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기독교적 문화를 배경으로 갖고 있진 않다. 짧은 기독교 역사 가운데 이만큼 성장한 것도 기적이다. 우리의 삶 전반에 깔려있는 문화적 습관과 기반을 기독교적 콘텐츠로 채워넣어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충만한 교회생활’과 ‘그렇지 못한 세상 삶’과의 간격문제가 해결된다. 크리스천의 본을 보인다는 것, 누군가에게 롤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런 문화적 배경이 깔려야 용이해지는 일이다. 크리스천이 비판받는 것 중에 ‘교회안에서의 믿음과 교회 밖에서의 삶’이 서로 다르다는 것인데, 기독교적 문화배경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의 해야 할 일은 기독교적 문화 콘텐츠를 열심히 생산해 내는 것이다. 누가뭐래도 예수향기 물씬 나는 고급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 행위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불변의 진리를 효율적으로 선포하기 위한 도구, 그 그릇 가운데 영화는 가장 적합한 그릇이다. 주님 오시는 날을 앞당기기 위한 훌륭한 도구다. 영화 리뷰를 쓴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다. 딱 한번보고 쓸 수 있는 영화평은 없다. 최소 두 번 내지 다섯 번까지 본 영화도 있다.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영화에서도 메시지를 뽑아내기 위한 과정은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다. 교회 신문에 이런 문화적 콘텐츠가 실린다는 것도 흥미진진한 일이다. ‘영화’라는 소재를 통해서 이 세상을 바라다 본 지난 3년은 그래서 내겐 큰 축복이다. 나를 되돌아 보는 소중한 시간들이었음에. 칼럼니스트 push980@gmail.com
  • 2014.01.19 / 이미나 기자

    (34) - 블랙가스펠
  • 블랙가스펠은 ‘가스펠’이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만난 후회없는 영화 하나님 향한 찬양은 뜨겁게! 열정적으로! [세 명의 동갑내기 친구 동근, 준, 유미가 할렘을 찾는다. 미국 뉴욕시 맨해튼 북쪽에 위치한 할렘은 가난하고 범죄가 잦은 곳으로 빈민가의 대명사처럼 불리지만 100만 명이 넘는 흑인들이 모여 사는 흑인 문화의 중심지이다. 이들이 할렘을 찾은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 블루스, 재즈, R&B 등 흑인음악의 뿌리가 된 ‘블랙가스펠’을 배우고 할렘 사람들과 콘서트 무대에 서기 위해서이다. 마이크 좀 잡았다고 생각한 랩퍼 동근을 비롯한 친구들은 그러나 첫 수업부터 코가 쑥 빠지게 혼이 난다. 그곳에 나타난 무서운 멘토 ‘위다 하딩’은 그들의 노래에 소울(SOUL)이 없다면서 호통을 치고, 블랙가스펠은 훌륭한 목소리로도, 빼어난 테크닉으로도 되지 않는 노래를 넘어선 그 무엇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소울’이 뭐길래? 세 친구는 위다 하딩 선생님이 던진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할렘 구석구석을 돌아 다닌다. 소울뮤직의 본고장 뉴욕 할렘에서 펼쳐지는 진짜 소울 찾기. 과연 세 친구는 어떤 방법으로 자신만의 소울을 발견할 수 있을까?] - 제작노트중에서- 재미로 영화를 보는 사람에겐 재미없는 영화다. 영화가 아니라서 그렇다. 다큐전문 영화사 제작이기 때문일까. 솔직히 재미와 흥미를 더하는 영화적 요소는 많이 부족한 작품이다. 이 정도면 영화 홍보가 아닌 객관적 관찰임을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 올곧은 시선과 깔끔한 마음으로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번주에 개봉한 따끈따끈한 영화, 블랙가스펠(Black Gospel , 2013)이다. 가스펠은 복음이다. 복음은 복된 소식, 반가운 소식,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복음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가르치시고 고치신 공생애를 기록한 책을 복음서라고 한다. 블랙 가스펠의 시작은 이렇다. 20세기 초 아프리카에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채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미국땅에서 흑인영가를 만들었다. 민족의 한이 담긴 노래다. 그런 그들이 주인가족을 모시고 교회에 가게 된다. 비록 문밖에서였지만 흑인 노예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됐다. 결국 흑인영가는 가스펠을 만났고 블랙가스펠이라는 음악장르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블랙가스펠은 미국 할렘가의 교회들에서 불려지는 찬양이다. 노래라면 한가닥한다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하나로 뭉쳐서 할렘을 찾았다. 블루스, 재즈, R&B 등 소울음악의 본고장에서 노래를 배우기 위해서다. 그러나 처음부터 녹록치 않다. 휘트니 휴스턴 어머니의 앨범작업에 참여했다는 위다 선생을 만나게 되는데 혹독하게 혼쭐이 난다. 찬양은 기교나 실력보다도 앞서는 것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녀의 질문은 날카롭다. “왜 찬양을 하는가” “누구를 위해 찬양을 하고 있는가” 근본적인 질문 앞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슴속에 품게 된다. 노래가 좋아서 소울의 원류를 찾아 할렘을 찾은 그들이다. 위다 선생의 질문은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부여가 되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회복하는 계기가 된다. 블랙가스펠을 인도하는 흑인목사들은 고백한다. 흑인영가는 슬픈 곡조이지만 블랙가스펠은 기쁘고 즐거운 운율이라고.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기에 찬양이 기뻐야 한다고. 그 기쁨은 교회에서 찬양드리는 그들의 모습만 봐도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다. 손과 팔을 주님을 향해 뻗으며 온몸으로 찬양한다. 옆의 사람 눈치안보고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찬양하며 마지막 찬양인양 전심으로 찬양한다. 기쁨으로 찬양한다. 행복과 기쁨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질문한다. 행복은 왔다가 가지만, 기쁨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라는 대답. 블랙가스펠의 힘은 ‘인내’에 있다. 참고 인내했던 그 힘을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쏟아내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4절과 25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한다. 또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고린도전서 13장에 7절에 말씀한다. 그것은 이 악한세대 가운데서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규범이다. 그러므로 인내는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로서 지켜내야할 덕목이다. 베드로는 모든 성도가 고난을 위해 부름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내로도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벧전 2:21). 블랙가스펠은 인내를 통해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노래다.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믿음의 고백이다. 그래서 그것은 아름다움을 넘어 숭고하다. 다큐멘터리여도 괜찮다. 93분이 결코 아깝지 않다. 가을 끝자락에서 만난 후회없는 선택이다. 칼럼니스트 push980@gmail.com
  • 2013.11.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33 -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
  •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중요하다 목숨을 내어놓고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 불신자들을 전도함으로 그 사랑 전해야 5명의 범죄자를 아버지로 둔 소년 ‘화이’. 냉혹한 카리스마의 리더 ‘석태’, 운전전문 말더듬이 ‘기태’, 이성적 설계자 ‘진성’, 총기전문 저격수 ‘범수’, 냉혈한 행동파 ‘동범’까지. 화이는 학교 대신 5명의 아버지들이 지닌 기술을 배우며 남들과 다르게 자라왔지만, 자신의 과거를 모른 채 순응하며 지내왔다. 하지만 화이가 아버지들만큼 강해지기를 바라는 리더 석태는 어느 날 범죄 현장으로 화이를 이끌고… 한 발의 총성이 울러 퍼진 그 날 이후, 숨겨진 진실을 마주하게 된 화이와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왜 절 키우신 거에요?” [제작노트중에서] 최근 참 별스러운 영화 한 편을 만났다. 혼자보면 기절할지도 모른다는 주위의 우려에, 무서울 때 팔짱이라도 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했다. 예상했던대로 영화 시작부터 핏빛 세례. 충무로에서 가장 ‘쎈’ 각본을 만지작거리다 내놓았다는 장준환 감독의 회심의 작품,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2013)이다. 작년 이맘때쯤에2012.9.16일字 리뷰한 영화로 ‘케빈에 대하여’Talk About Kevin가 있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두 영화는 많이 닮아있다. ‘화이’의 첫 장면은 초강력 범죄집단 낮도깨비의 핏빛 현장이다. ‘케빈’에서도 매년 열리는 스페인의 토마토 축제latomatina에서의 붉은 색이 첫장면을 칠한다. 두 감독 모두 영화에서 ‘붉은 색’을 자주 애용한다는 점. 케빈과 화이는 ‘악(惡)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성장과정은 사뭇 다르다. 케빈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거절감을 경험했으나, 화이는 다섯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다.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하여 엄마의 저주를 들어야 했던 케빈과 달리 비록 유괴 당한 몸이었지만 화이를 키우는 다섯 아버지의 사랑은 남달랐다. 물론 그것이 살인병기를 키우는 불순한 동기였다고는 하지만. 박식하기로 소문난 감독 린 랜지 감독Lynne Ramsay이 준비안된 모성(母性)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게 영화 ‘케빈에 대하여’, 영화 ‘화이’의 장준환 감독은 한술 더 뜨는 삐뚤어진 부성애(父性愛)를 영화스토리 중심에 배치했다. 주는 사랑, 부성애는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은 행동하는 믿음을 이삭에게 가르쳤고창22장, 에서와 야곱을 향한 이삭의 사랑창27장 또한 그러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위해서 재물을 비축하는 다윗은 아버지로서의 배려다. 신약에서는 탕자를 끌어안는 아버지의눅15장 사랑이 절절하다. 선(善)의 절대적 존재인 임형택이 있다면 악의 화신으로 석태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다. 아들 화이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성장한다. 석태(김윤석)는 보육원 시절부터 원장 아들인 임형택을 증오했다. 그 증오감은 극에 달해 괴물에게 영혼을 판다. 석태(김윤석)는 그런 자신의 삶의 방식을 아들 화이에게 강요한다. 그런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화이(여진구)는 괴물을 삼키고 극복해낸다. 화이가 친아버지를 총으로 쏘며 보았던 핏자국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오버랩 될 수 있다. 하나님 반대편에 서 있던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신 자신을 십자가위에 올려놓으시고 피 흘리셨다. 사랑의 결정체인 한 인물, 영화속에서 주의깊게 봐야할 인물이 임형택(이경영)이다. 그는 잃어버린 아들이 찾아오길 기다리며 이사를 가지 않는다. 청부살인업자들까지 동원된 재개발 회사의 압력 가운데에서도 나가지 않고 끝까지 버티면서 말이다. 돌아온 탕자가 그렇다. 아버지는 기다린다.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그리고 회개하는 아들에게 말한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돌아오길 기다리신다. 세상과 짝하지 아니하고 믿음 안에 좋은 길로 들어서길 원하고 계신다. 해맑게만 보이던 화이는 절대 선(善)인 임형택(이경영)을 죽인다. 그 순간 석태(김윤석)는 화이가 이제는 같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과 같은 괴물이 되었으니까. 자신이 죽이지 못했던 절대 선(善)의 존재를 죽였으므로 사명을 완수한 걸로 착각했을 것이다. 마귀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다가마4장 비참하게 실패한다. 그 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결국 인간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위에 예수님을 매단다. 예수님을 죽였기에 이겼다고 마귀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예수님의 승리였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화이의 총질은 마치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유다와 같은 꼴이지만 승리의 축포는 아니었다. 석태의 예상과는 달리 화이는 변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그 실체에 대해 깨달은 후 그는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악한 세력과의 전쟁이다.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다. 자신에게 놓여진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믿음의 선포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세상을 다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다요16:33. 오직 예수님만을 통해서만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요14:6. 아버지의 사랑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4:16. 그 사랑을 믿는다면 우리는 담대히 세상을 이기며 살아야 한다요일5:4. 화이는 친아버지의 사랑을 믿었다. 그리고 악과 대항해 싸웠다. 정체성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요, 해야 할 사명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석태에게서 배우지 못한 부분이었다. 잠잠히 아들이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던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보았기 때문이다. 피흘려가면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신 그 사랑을.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은 위대하고 중요하다. 칼럼니스트 push980@gmail.com
  • 2013.10.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32) - 바람이 분다
  • 바람이 분다. 살아야 한다 하늘을 향해 꿈을 버리지 않은 소년, 지로 성도는 꿈을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 의지해야 가장 핫(hot)한 영화를 골랐다. 이슈로 떠오르고 거센 반발이 일어날 땐 분명 이유가 있을텐데,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선택의 기준이 됐다. 5년만에 만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달라져 있었다. 사상과 역사인식이 변했고 가슴 아픈건 그 만의 색채가 달라져 있다는 것이다. 치히로인지 히치로인지 한동안 헷갈리게 만들었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름만으로도 따뜻함을 느끼게했던 ‘이웃집 토토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그의 작품세계는 판타지와 현실사이를 왕래하는 비행기 여행의 낭만이었다. 또한 그가 보여준 놀라운 색감은 이념과 사상, 국경 조차도 초월한 아름다움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비판의 칼날이 드세다. 상영관을 찾았을 때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관객이 없다. 상영관도 겨우 찾을 수 있을 정도. 애니메이션 거장의 작품치곤 상당한 푸대접이다. 일단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비판에 대한 부분은 다루지 않겠다. 이 영화를 해석하는 키워드(keyword)는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본 리뷰에서는 ‘꿈’(dream)이라는 키워드로 영화 해석에 집중해보려 한다.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는 유난히 하늘을 나는 씬(scene)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딱 미야자키표이다. 하늘을 동경한 소년, 지로는 열차안에서 바람에 날아가는 모자를 잡아준 한 소녀를 만난다. 동경을 향하던 열차는 지진을 만나게 되고 긴박해진 상황속에서 두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이름도 성도 모른체. 바람이 세차게 불던 그날.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던 소녀, 나호코의 정성 때문이었는지 둘은 10년만에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나 나호코는 얼마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 결핵환자다. 대충 줄거리는 그렇다. 좀더 심도있게 들어가 볼까. 지로의 성장은 꿈과 함께다. 꿈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꿈을 통해 자신의 할 일을 찾기 때문이다. 꿈이 없었다면 그는 아무런 성장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꿈은 단순하다.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비행기를 만드는 것. 그게 그렇게 맘대로 되진 않았지만, 그는 꿈을 꾸며 그 꿈을 위해 노력한다.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연구하며 노력한다. 때로는 천식에 걸려 죽어가는 사랑하는 이조차도 그의 꿈앞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꿈이 그를 이끌고 꿈을 통해 인생을 설계해 가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만난 이탈리아의 유명 비행기 설계자와의 자기꿈 논쟁은 마치 영화 ‘인셉션’을 보고있는 듯 착각하게 만든다. 요셉을 국무총리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꿈 때문이다. 꿈이 있었기에 좌절하지 않았고 꿈 때문에 등용될 수 있었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민족을 구원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꿈은 죽어가는 자에게서도 감정적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위대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 꿈을 자신의 욕망 구현, 자아 실현으로 찾게 된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꿈이란 ‘하나님의 사명 성취’다. 이 땅에 만드신 창조 목적답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요 꿈을 이루는 것이다. ‘바람’도 여러 가지다.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가 있는 반면, 이 영화에서의 바람은 두 주인공을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이다. 지로의 꿈속에 늘 등장하는 것이 ‘바람’이요 현실세계에서 비행기를 제작 후 만나게 되는 것도 ‘바람’이다. 그 바람은 영화 내내 지로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이별을 예고한다. 기차칸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한 착한 청년 지로는 기차밖에서 하마터면 모자를 바람에 날려 잃어버릴 뻔한다. 재빨리 모자를 잡아 든 나호코가 없었으면 말이다. 10년후 바람은 이번엔 이젤 앞 나호코의 챙 모자를 날리고 지로에게 다시 만남의 기회를 준다. 기회를 주는 바람, 행복하게 만드는 바람이다. 바람이 있기에 지로는 종이 비행기를 날릴수 있었고 꿈을 키워갈수 있었다. 꿈이 기관차라면 바람은 연료가 되었다. 동반자와 함께 타고 달리는 기관차, 분명 영화 ‘설국열차’와는 느낌이 다르다. 결핵으로 고통받는 나호코는 바람부는 요양소 테라스에서 바람을 맞는다. 침낭 속에 꽁꽁 몸을 숨긴 채 마지막 정점을 향해 달려간다. 지로와 나호코의 이별은 당연하게도 꿈속에서 이루어진다. 바람과 함께 나호코는 지로에게 사랑을 남기고 떠난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야훼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라고 말씀한다.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은 바람을 멈추신다. 바람은 구원을 이루는 기적이 되고 예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을 설명하실때도 바람을 활용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 3:8). 사도행전 2장에는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바람처럼 임하시는 장면이 나와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 2:2) 꿈은 요셉을 살렸고 바람은 제자들을 살렸다. 영화는 말한다. 바람이 분다. 그래서 살아야 한다고.
  • 2013.09.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31) 설국열차
  • 설국열차에 구원은 없다 유토피아를 향해 달리는 기차안의 사람들 진정한 희망과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기상 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 한 대가 끝없이 궤도를 달리고 있다.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대는 빈민굴 같은 맨 뒤쪽의 꼬리칸, 그리고 선택된 사람들이 술과 마약까지 즐기며 호화로운 객실을 뒹굴고 있는 앞쪽칸. 열차 안의 세상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한 17년 째, 꼬리칸의 젊은 지도자 커티스는 긴 세월 준비해 온 폭동을 일으킨다.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장악, 꼬리칸을 해방시키고 마침내 기차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해 절대권력자 윌포드가 도사리고 있는 맨 앞쪽 엔진칸을 향해 질주하는 커티스와 꼬리칸 사람들. 그들 앞에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이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영화 ‘설국열차’(Snowpiercer, 2013)의 제작노트이다. 요즘은 어디가나 설국열차 얘기다. 영화를 보지 못한 사람은 대화에 껴들기가 쉽지않다.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로 하여금 설국열차에 열광하게 하는가. 조지 오웰의 ‘1984’는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단순한 개념을 설파하는 ‘1984’와 같은 맥락으로 설국열차는 정해진 궤도를 끊임없이 도는 단순함을 보여준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아무도 고통 받지 않는다. 반면 설국열차에서는 행복과 불행이 극렬하게 대비된다. 꼬리칸은 지옥이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창문이 없어 바깥세계와는 단절된 곳이다. 마치 지옥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이들은 열차에 무임승차했다는 이유로 맨 뒤칸에서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는 처지다. 앞쪽에 사는 사람들이 갓 잡아 올린 생선으로 만든 초밥과 신선한 과일 등을 먹는 반면 꼬리칸 주민은 바퀴벌레를 갈아 만든 단백질 블록으로 끼니를 때운다. 그러나 그들이 단백질 블록을 공급받기전엔 어린아이들의 인육을 먹었던 아픔도 있는 곳이다. 성경에도 인육을 먹는 표현이 나오는데 극악한 전쟁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꼬리칸은 영적전쟁이 극심한 현재를 대변한다. 세상의 권력을 잡고 있는 마귀와 대적해야 하는 기독인들의 투쟁은 그래서 쉽지 않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Chris Evans)가 오랜시간동안 준비했던 것처럼 기독인들도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할 시간이 필요하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설국열차의 보안설계책임자였던 남궁민수(송강호)는 “저게 하두 오래 닫혀있으니깐 이젠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야!”라고 말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문’이시다(요 10:9). 주님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건너갈 수 있는, 고통에서 환희로 옮겨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이다. 남궁민수는 이미 반복되는 열차의 순환 가운데 ‘희망’을 발견했다. 그러나 문을 열어야 한다. 마스터키를 소유했던 그였지만 벽처럼 느껴지는 문앞에선 ‘폭탄’이라는 방법을 쓴다. 그 폭탄제조에 쓰인게 ‘크로놀’이다. 남궁민수와 요나를 중독으로 몰아넣었던 물질이 향정신성 약물 크로놀이다. 여러 칸을 지나면서 남궁민수와 요나는 크로놀을 모은다. 그것은 악함에 빠져있으면서도 신앙에 가까운 행위를 통해 용서받으려는 인간의 내재적 심리를 상징한다. 그들 자신을 중독에 빠지게 한 물건이지만 그 물건을 통해 견고한 벽을 허물고자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이 땅엔 죄악이 가득했다. 그 와중에서도 노아라는 의인이 있었다. 구원의 방주를 만들었고 그것을 통해 구원받았다. 설국열차에는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다. 노아의 방주에는 분명한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 성경이 창세기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으로 끝을 맺듯이. 설국열차는 절대엔진을 통해서 움직이지만 노아의 방주는 자체동력 대신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그러기에 설국열차에는 통제가 필요하고 균형이 필요했다. 커티스와 독대한 윌포드의 고백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로 구원받은 인류는 통제나 균형의 억압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관심은 순종이냐 불순종이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윌포드는 창조자를 가장한 거짓선지자다. 열차를 통해 인류를 구원한 것처럼 보이나 거기엔 진실된 구원이 없다. 통제와 압박을 통해 자신을 신격화한다. 사람들을 미혹하여 빛의 세상으로의 진출을 막는다.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고통 가운데 살 것을 강요한다. 내가 이만큼 해주었으니 너희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식이다.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희망을 심어주고 회복을 약속한 좋으신 하나님이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으며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도 여셨다.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다.
  • 2013.08.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30 - 월드워Z
  • “재밌지만, Z(결론)가 없다” 인간의 영원한 관심 ‘종말’ 다룬 영화 성경만이 종말에 대한 확실한 로드맵 브래드 피트(Brad Pitt)는 멋진 배우다. 그는 1992년작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에서 눈부신 햇빛에 반사되는 플라잉 낚시의 멋스러움을 알게 해 준 배우다. 가족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형제애를 강조한 ‘가을의 전설(Legends Of The Fall, 1994) 또한 감동적이었다. 그가 ‘상남자’임을 발견한건 2004년도에 개봉했던 영화 ‘트로이(Troy)’에서 였다. ‘미스터&미세스 스미스(Mr. & Mrs. Smith, 2005)’ 뿐만아니라 액션배우로서도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수많은 영화에 출연한 그이지만 내가 그와 다섯 번째 만난 영화는 올해 개봉한 ’월드워Z(World War Z, 2013)’이다. 월드워Z는 드라마, 스릴러, 액션, 모험 등 분류상 여러 가지 성격의 영화이다. 한 영화 안에 드라마적인 감동,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 때리고 부수는 화려한 볼거리, 남성들을 자극하는 영웅적 스토리 등이 다양하게 섞어찌개 되어 있다. 그러나 얌차처럼 골라먹을 수 있는 재미가 있지는 않다.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간 만큼 볼거리는 있으나 감동의 요소들은 적다. 더군다나 이 영화처럼 뒷이야기가 무성했던 적도 없었다. 잡다한 가십을 뒤로 하고 일단 영화속으로 들어가보자. 치료약 없는 원인모를 바이러스가 전세계에 퍼져 인류가 종말을 맞고 이에 대처하는 인간의 모습, 이 영화를 한줄로 요약하면 그렇다. 영화의 첫 장면은 전세계적으로 발생하는 이상 징후다. 해변가에서 집단죽음을 맞는 돌고래들의 모습, 기상이변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전염성 강한 질병으로 원인모를 죽음으로 내닫는 인류의 모습이 뉴스보도 또는 전문가들의 엇갈린 견해로 화면을 가득 메운다. 공포분위기 조성이랄까. 영화 시작부터 너무 무거운거 아닌가 할 정도로 인트로(intro)가 선이 굵다.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후 계속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문제다. 그것이 개인의 종말이든 지구의 종말이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말’에 관심을 갖는다. 이단들이 잘못된 지식으로 현혹해도 쉽게 넘어가는 이유이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꼭 가인의 고백이어서 뿐만 아니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모든 인간의 숙제이다. 월드워Z,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중반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물량공세. 특별히 이스라엘이 쌓은 성벽은 압권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사상이 강하다. 선교전략상 땅끝으로 불리우는 이스라엘에서 브래드 피트는 좀비들의 약점을 찾아낸다. 좀비들이 약한 자, 병든 자를 공격하지 않는 이유가 그들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종족번식의 차원이라고 해석된다. 그것이 선민사상이건 국가주의건 간에 또다시 성벽은 무너진다. 견고해 보였던 성벽이 여리고성 무너지듯 무너진다. 여리고성의 무너짐이 칠일동안 행진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침묵시위의 결과라면 이스라엘 성벽의 무너짐은 내부적인 노랫가락 때문이었으니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외부로부터의 공격보다 내부에서의 분열이 더 큰 위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의 사십년 광야생활도 결국 내부적인 문제 때문 아니었나. 삼손을 결박하여 내부에 묶어놓았지만 그 교만이 더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에덴동산도 아담과 하와라는 내부인으로부터 붕괴됐고 예수님의 열두제자 공동체 안에도 내부의 적이 있었다. 인류의 종말을 소재로 삼은 영화는 많다. 그러나 월드워Z처럼 결론없이 끝을 흐리는 영화도 흔치 않다. 마치 짬짜면을 먹은 기분이랄까. 전염병처럼 번지는 바이러스에 대한 원인도 불분명하다. 영화 말미에도 여전히 전염체인 좀비들은 살아 남아 있다. 새로운 숙주를 찾아 헤매는 그들도 분명 생명의 경이로움일진데 인간은 무참하게 그들을 날려버린다. 사스나 장티푸스를 날려버렸던 것처럼. 마치 폭력이 백신(vaccine)으로 둔갑해 정당화 된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인본주의에 정체모를 혼합주의가 결합된 세기말적 현상이다. 반면, 성경은 분명한 결론을 제시한다. 처음과 끝이 분명하다. 창세기가 있으면 요한계시록이 있다. 에덴동산이 있었고 새하늘과 새땅이 준비된다. 그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성도들은 휴거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성도들은 7년 혼인잔치에 참예하게 된다. 그 다음 수순이 주님과 함께 성도들이 이 땅에 내려와 통치하는 천년왕국. 물론 천년왕국전에 아마겟돈 전쟁이 있게 된다. 아마겟돈에 비해 조금은 익숙하지 않지만 곡과 마곡의 전쟁도 천년왕국 끝무렵에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심판대가 열리며, 우리에겐 새하늘과 새땅이 펼쳐진다. 여기까지가 종말에 이루어질 로드맵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에는 종말에 대한 정확한 안내가 없다. 그렇다고 속시원하게 원인을 밝히고 있지도 않다. 궁금하면 오백원을 더 내던가 원작소설을 사보면 되겠다. 칼럼니스트 push980@gmail.com
  • 2013.07.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29 -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 2013)’
  • 슈퍼맨, 정체성 찾다 한 인간의 정체성 찾기를 다룬 영화 확실한 정체성과 사명감당하는 우리 돼야 영화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 , 2013)’은 액션과 모험 그리고 판타지 영화다. 이 영화를 선택함에 있어서 제작, 각본에 이름을 올린 ‘크리스토퍼 놀란’을 눈여겨 보면 안된다. 다크나이트(The Dark Knight Rises , 2012)와 인셉션(Inception , 2010)의 뛰어난 각본과 영상을 기대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주인공 슈퍼맨 한 개인의 고뇌과정을 담은 영화일뿐이다. 쉽게 말해 제작비 많이 들어간 성장통 영화라고 보면 된다. 단, 영화 ‘300’을 히트시켰던 잭 스나이더 감독 작품이므로 주인공의 빨래판 같은 식스팩은 봐줄 만하다. 크리스천이 영화를 볼 때에 주의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무차별식 대입이다. 오락영화임에도 억지로 기독교세계관과 꿰어맞추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리스트에 ‘임요한’은 없는가라는 질문에 자유로울수 없겠지만, 이 영화를 메시야 사상이 담긴 영화로 해석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영화속에서, 슈퍼맨의 아버지 이름이 조엘이다. 히브리어로 ‘엘(el)’은 신을 뜻한다. 그래서 조엘을 하나님으로 해석하고 아들인 칼엘(슈퍼맨)을 예수님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진짜 오버의 끝짱이다. 구약성경에는 이름들 중에 ‘엘(el)’로 끝나는 이름이 많다. 다니엘, 사무엘, 요엘, 이스라엘, 엘리야, 엘리사, 벧엘 등이다. 물론 이름의 해석상,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고, 엘리야는 ‘야훼는 신이다’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 하지만 ‘엘’이 이름에 포함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주장하기를, 조엘이 아들 칼엘에게 이해시키는 장면에서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의 역할론을 제시한다. 조엘은 아들 슈퍼맨에게 이렇게 말하며 용기를 준다. “넌 지구인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이 되어줄 거다. 그들은 뒤처지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겠지. 하지만 때가 되면 너와 함께 할거다. 때가 되면, 넌 그들이 기적을 만들도록 돕게 될 거다” 얼핏 보면 이 말은 마치 구원자를 보내는 하나님의 메시지와 같다. 결국 슈퍼맨에게 주어진 미션은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요 사람들의 목표가 되는 것이다. 상상도 못했던 기적을 통해서 존재를 알리고 소통하는 것, 눈먼 자를 뜨게 하시고 손 마른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슈퍼맨 비긴즈’이기도 한 이 영화는 철저하게 한 인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성장기 일뿐이다. 어려서부터 남들과 달랐던 주인공이 고민과 혼란에 휩싸이면서 ‘관계’가 틀어진다. 흔히 말하는 왕따의 삼요소를 갖춘게 어린시절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커서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길러준 부모로부터 출생의 비밀을 듣기전까진 말이다. 자신이 남들과도 다르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르다’의 고민이 해결된다. 양아버지 조차도 그런 아들에게 ‘외계인의 비밀’ 운운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옥의 티이다. 그래서였는지 양아버지는 어설픈 개인의 죽음을 맞는다. 급작스런 토네이도에 휩쓸려서. 아들의 능력은 제한하면서 아버지 본인 스스로는 한 생명이라도 더 건질려고 애쓴다. 굳이 이 부분을 “아직 때가 아니니…”하시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에 비유한다면 그 또한 억지다. 결국 양부모에게서 힌트만 얻는 주인공은 친아버지 조엘을 만나 궁금증을 해결한다. 고향별에 대해서 자신이 왜 지구에 오게되었는지 등의 이야기를 통해서 정체성을 찾게 된다. 배트맨 비긴즈가 정체성보다는 사명에 관한 고민이었다면 맨 오브 스틸 이 영화는 ‘정체성 찾기’가 영화의 절반을 차지한다. 2시간 40분의 런닝타임이 그래서 더 길게 느껴진다. 슈퍼맨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후 자연스럽게 ‘사명’을 깨닫고 실천하게 된다. 액션영화의 재미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어떠한가. 예수님을 모르고 살던,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던 방황의 때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그 구원의 감격에서 끝난다면 아쉽다. 예수님을 믿고 난 후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가 액션의 시작이다. 그것이 사명이다. 슈퍼맨이 인류를 살리는 것이 미션이라면 우리는 다른이들을 구원의 은혜 가운데 인도하고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게 사명이다. 한가지 더 붙이자면, 맨 오브 스틸은 헐리웃영화이면서 헐리웃영화가 아니다. 보통의 영웅들은 악한 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하는 선과 악의 대결구도가 헐리웃 영웅 이야기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악과의 전쟁보다는 다른 두 ‘사명’의 대결국면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이다. 조드 장군도 나름 자신의 종족을 부활시키려는 구원자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말이다. 결론적으로 배트맨 비긴즈의 깊은 성찰을 원했다면 이 영화는 비추천이다. 엄청난 물량공세의 액션 장면을 기대했다면 또한 비추다. 이 영화는 애매하게도 그 중간에 서 있다.
  • 2013.06.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28) - 고령화가족
  • 성령안에 하나됨, ‘가족’ 티격태격 하면서도 끈끈한 애정공동체, 가족 교회도 밀고 당겨주며 배려하는 신앙공동체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13년 노령화지수가 80%를 넘어선다고 한다. 노령화지수란 15세 미만 인구 대비 65세 이상 노령인구의 비율을 말한다. 유년인구 대비 고령층의 상대 규모를 나타내주는 지표다. 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를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을 고령화사회(Aging Society), 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를 차지하는 비율이 14% 이상을 고령사회(Aged Society)라고 하고, 65세 이상 인구가 총인구를 차지하는 비율이 20% 이상을 후기고령사회(Post-aged Society) 혹은 초고령사회라고 한다. 우리는 현재 고령사회에 들어섰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잘 반영한 영화 한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현재 극장상영중인 고령화가족(감독 송해성, 2013)이다.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먹을거리에 관한 것이다. 영화내내 가족이 모이면 밥을 먹는다. 그중 백미는 삼겹살. 삼겹살은 엔딩부분에도 윤여정(엄마 역할)의 손에 들려있는데 영화 초반 분위기 형성에 큰 역할을 한다. 물론 처음부터 삼겹살이 등장한 것은 아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박해일(둘째 아들)이 자살시도하던 중 어머니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는다. 휴대전화 너머로 들려온 어머니의 한마디. “오늘 집에 들러라. 너 좋아하는 죽 쑤어놓았다” 죽음의 문턱에 선 아들을 어머니는 죽 한그릇으로 살린다. 야곱은 에서에게 죽 한그릇을 주고 장자권을 얻었는데 혼자힘으로 된건 아니었다. 야곱의 어머니가 없었으면 될일도 아니었다. 그 장자권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도도히 흐르는 큰 물줄기가 됐다. 죽 한그릇에 목숨을 구제받은 둘째아들은 아예 어머니 집에 얹혀살 작정을 한다. 그런데 조금 다른 이유로 공효진(막내딸)도 엄마의 날개안으로 들어온다. 사춘기 여중생 딸 하나를 동반한 채. 그들이 함께 한 첫 식사는 된장찌개다. 찌개의 습성상 한 뚝배기에 식사참여자의 모두가 숟가락을 내민다. 서양사람들은 잘 이해못하는 개념이다. 여러 사람이 숟가락을 들이댄 그곳에서 내 맛을 찾아야 하는 그것이 공동체임을 강조하는 한국문화다. 화장품 외판원 어머니, 전직 깡패 백수 큰아들, 흥행작 없는 영화감독 둘째아들, 이혼만 수차례 막내딸, 그 막내딸을 꼭 닮은 여중생, 5명의 숟가락이 된장찌개를 향한다. 그러나 거기엔 일체감이 없다. 전통적인 가족 형태만 있을 뿐 각자가 너무 다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한채 영화는 중반을 향해 치닫는다. 가족의 분열이다.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라고까지 거창하게 얘기하지 않아도 그리 좋은 그림은 아니다. 가족간의 다툼이 생기는 것은 삼겹살의 등장 이후다. 삼겹살은 한 불판에서 굽기는 하나 철저하게 독립된 식습관을 고수한다. 집게에 의해서 지글지글 구워진 삼겹살은 각자의 젓가락을 통해서 시식된다. 찌개랑은 하늘과 땅 차이다. 삼겹살 메뉴는 자식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런 애틋함과는 달리 자녀들은 전혀 화합하지 못한다. 서로 으르렁거리기 일쑤다. 그래도 삼겹살 메뉴는 계속 등장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변치않는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도 그렇다. 우리가 죄를 짓고 우상을 숭배할 때 징계하시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사랑이 있다. 변치않은 사랑이 있기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길을 터주신 것 아닌가. 처음부터 이 영화는 핵가족화 되어가는 한국사회에 안어울리는 영화다. 그럼에도 봐야하는 것은 현재 지금 우리 사회가 고령사회이기 때문이다. 삼겹살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회다. 오랜만에 의기투합하여 바닷가에 놀러간 가족. 그곳에서도 서로의 상처를 긁어대며 티격태격한다. 가족끼리의 다툼.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도 싸울수 있는게 가족아닌가. 서로를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다가도 외부로부터 아주 사소한 자극이라도 껴들라치면 또 발끈하는게 가족이다. 윤여정 가족도 별반 다르지않다. 떠들썩 말다툼하는 둘째아들과 막내딸, 이들에게 옆테이블 남자들의 말한마디가 테이블간의 전쟁으로 번진다. 역시 피를 나눈 가족의 힘. 종반에 이르러 영화는 새로운 가족해체를 시도한다. 알고보니 형제들이 서로 피가 안섞인 배다른 씨다른 사이였던 것. 가족구성원은 잠시 충격 속에 휩싸인다. 그러나 공동체에 불어닥치는 어려움에 이들은 서로를 배려하기 시작한다. 피 한방울 안섞인 가족일지라도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은 전교일등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늘 티격태격이었다. 누가더 잘낫느니 예수님의 오른편 자리에는 누가 앉아야 한다는 등 서로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했다.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오셔서야 제자들은 서로가 한 가족임을 깨닫게 된다. 성령안에 하나. 우리가 추구해야 될 덕목이다. 칼럼니스트 push980@gmail.com
  • 2013.05.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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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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