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아 소장의 크리스천이미지메이킹
일터에서 전도하라
  • 한국의 타종교 재단 대학교의 여대생 커리어 센터에서 강의 요청이 들어왔다. 이 대학에 강연을 가게 되면 신앙적인 말은 언급하지 말아달라는 특별한 요청을 해온다. 나 또한 한 전문인으로서 대학에 초청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원하지 않는 곳에서 크리스천임을 밝히거나 주님을 찬양하고 싶지 않았다. 그 대학교의 여대생 커리어 센터 여직원은 온유한 말투로 여대생들이 좀 가라앉아 있으니 이해해달라는 배려의 말을 해 주었다. 나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아무리 가라앉은 청중이라도 분위기를 띄우는 스킬은 내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여 명이 넘는 여대생들에게 면접 이미지코칭을 진행하는데 영 매끄럽게 흐르지가 않았다. 다른 대학교 여대생들의 활기찬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감지되었다. 담당 여직원이 강조한 말이 생각났다. 분위기를 올려주는 ‘처방’이 필요했다. 나는 가끔씩 그런 청중을 접할 때마다 유머나 예화로 분위기를 띄운다. 대개는 준비된 처방보다는 순발력으로 해결하곤 한다. 그런데 그 대학의 여대생들 앞에서는 언급하지 말아야 할 신앙 이야기가 머리에 퍼뜩 떠올랐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말이다. “제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게요. 저는 크리스천인데요. 자동차에서 어떤 목사님의 테이프를 듣게 되었어요. 그 목사님 교회에 출석하는 여성 권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여대생들은 나의 퍼포먼스를 보고 폭소를 터트렸다. 그때부터 학생들의 참여도를 높일 수 있었다. 그날 강의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강의를 끝까지 지켜본 여대생 커리어센터 여직원이 마음에 걸렸다. 많고 많은 사례 중에 하필 왜 그 사례가 생각났을까. 일터에서 전도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닌,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의 인도에 의해서였다. 이내 내 마음은 기쁨으로 넘쳤다. 이 시대에 사는 크리스천들이 열어야 할 전도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디지털 문화의 저변 확대로 현대인의 라이프스타일이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또한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 절대적 진리와 권위에 거부하는 현대 문화)’이니 ‘뉴 에이지(New Age:인간이 묵상, 참선 등을 통해 신이 될 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내게 평신도로서 전도 사역자가 되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날마다 영적으로 잘 무장하여 직장에서, 일터에서 주님을 전하라고.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정 럭셔리한 삶이 어떤 삶인지 보여주라고. 나는 믿음을 날마다 키워서 주님의 사랑하는 딸이 되고 싶다. 날마다 성장하는 영혼의 소유자가 되고 싶다. 말로서가 아닌 행위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다. 책과 강연과 비즈니스를 통해 주님을 모르는 수많은 영혼들에게 주님의 향기를 전하고 싶다. 나는 거미가 곤충을 잡는 것처럼 튼튼하고 촘촘한 거미줄을 쳐서 전도의 장을 넓게 펼치고 싶다. 한 영혼이라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꼭 붙들고 싶다. 그리고 거미줄에 머문 수많은 영혼들에게 하늘을 가리켜 주님을 보여 주고 싶다.
  • 2008.10.24 / 정승환 기자

    찬양으로 이끄는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
  • 언젠가 사무실을 방문한 대학 동창으로부터 ‘올드 팝스’ CD선물을 받았다. 커버에는 눈에 익은 팝송 제목들과 팝 가수들의 공연 모습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 시절에 FM 라디오나 카세트 테이프로 즐기던 팝송들이었다. 요즘처럼 작디작은 MP3플레이어로 음악을 듣는 것과는 사뭇 다른 향수가 밀려왔다. 그 당시엔 죽을 때까지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팝송을 오랜만에 몇 곡 듣고 나니 이내 싫증이 났다. 어떤 가치도 의미도 없어 보이는 단순한 가사들에서 나는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팝송을 듣는 순간만 기분이 좋아질 뿐이었다. 팝송을 끝없이 듣고 또 들으며 젊은 날의 그 소중하고 귀한 시간들을 허공으로 날려버린 나의 대학시절을 되돌려 놓고 싶었다. 이런 나의 간절한 마음은 과거의 내 모습을 반추한 지금의 청소년과 청년들을 보면 거의 본능적으로 그들을 향해 기도를 날려 보내곤 한다. ‘주님 저들이 저 무의미한 음악을 듣지 말게 하시고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게 변화시켜 주세요’라고. 내가 주님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잠시 주님께 불만을 털어놓았다. ‘주님 왜 저를 좀 더 일찍 부르시지 않으셨나요?’ 주님이 좀 더 일찍 내게 와 주셨더라면 나는 좀 더 괜찮은 딸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나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은 성품이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성품이 필요한 존재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를 깨닫게 된다. 지나간 삶은 돌이킬 수 없는 일. 현재와 미래는 주님 안에서 살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목적이 있는 삶’이 마냥 행복하고 감사하기만 하다. 비록 주님을 일찍 만나진 못했어도, 육체의 키는 성장의 때가 있지만 영혼의 키는 죽을 때 까지 성장해야 하는 진리를 생각하면 나도 주님이 사랑하시는 선택받은 딸임에 큰 위로를 받는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 3:18).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은혜로운 찬양의 길로 안내해준다. 테너 가수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을 때 주님의 존재를 깨닫는다. 심장을 녹일 것 같은 바이올린 선율에서 주님의 전능하심을 발견한다. 나는 음악을 듣는 것은 매우 좋아하지만 노래 부르기는 정말 ‘꽝’이다. 남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기억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주님을 알고부터는 노래를 자주 부르게 됐다. 은혜로운 찬송가 말이다. 단순한 일을 할 때, 운전을 할 때도 찬송가를 흥얼거릴 때가 많다. 내가 좋아하는 찬송가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102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405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410장) 등이다. 그런데 내가 크리스천이 된 이후 아직까지도 좀 익숙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성도들이 찬양을 할 때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팔을 높이 펴들고 천천히 흔드는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믿음의 은혜가 철철 넘쳐 보인다. 그런 형제자매들의 찬양 표현은 자연스러워 부럽기만 하다. 그런데 나는 믿음의 깊이가 얕아서일까. 왠지 어색해서 그렇게 잘 하질 못한다. 나는 기도한다. 나도 은혜로운 찬양의 표현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게 해달라고.
  • 2008.09.26 / 정승환 기자

    선한 이미지라는 전투복을 입자
  • 세상의 성공하는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의 소유자로서 시대를 앞서가는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더욱 바람직한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닮고 싶은 크리스천’이 되자고 제안한다. 선한 이미지로 주님의 자녀다운 이미지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회적으로는 닮고 싶은 크리스천, 성품적으로는 선한 크리스천이 됨으로서 보다 자연스럽게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자는 것이다. 사람들의 심리는 자기가 존경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가진 문화 즉 종교도 닮고 싶어 하니까 말이다. 어차피 하나님의 지경은 세상적인 성공 이미지와 상반되는 것이라며 굳이 단정 짓지 말자. 급속하게 변화하는 현대 문화도 하나님의 작품이다.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푯대로 삼고 어떤 문화에서도 비전을 갖춘 리더로 부각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은 직업의 귀천과 상관없이 맡은 일터에서 진정으로 인정받는 리더가 되어야 하는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다. 21세기는 소프트 이미지가 성공하는 시대이다. 실제의 전투복은 무거워야 하지만 영적 전쟁에서의 갑옷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미지’처럼 가벼울수록 좋다. 이 땅의 형제자매들이여, 이제 천사의 날개깃처럼 부드럽고 가벼운 갑옷으로 갈아입자. 이 시대에 걸맞은 ‘소프트’ 이미지말이다. 즉 크리스천으로서 바람직한 이미지의 세 가지 키워드는 온유함, 고상함, 세련됨을 들 수 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이 시대의 흐름에 맞는 이미지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나치게 앞서가는 스타일을 추구하라는 뜻은 아니다. 자칫 믿음이라는 명목 아래 현 시대와 동 떨어진 이미지를 고수하겠다는 자세는 곤란하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귀감이 되는 크리스천은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사람이다. 예수님을 닮은 온유함과 현대적 감각이 묻어나는 고상함과 세련됨을 갖춰야 할 것이다. 그들의 온유한 표정은 상대의 마음을 열게 하고, 남을 배려하는 태도는 인간미를 넘치게 한다. 몸에 배어있는 세련된 매너는 크리스천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반듯하고 당당한 자세에서 상대를 리드하는 힘이 느껴지며, 친절함이 묻어나는 따뜻한 목소리에서 말없는 전도가 이루어진다. 날이 갈수록 전도가 어려워지는 이 시대에, 이미지는 부드러우면서도 그 내면에서 뿜어 나오는 강렬함이 있는 크리스천의 존재는 분명 능력 있는 전도로 이어질 것이다. 오늘날 크리스천을 향한 하나님의 또 다른 지상 명령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한 이미지를 구축하라’다. 모든 기독교인은 ‘선한 이미지 구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다함께 기도해야 할 때다. 하나님의 지상 명령인 복음(Good News) 전도! 그러나 복음 전도라 해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자. 노상에서, 지하철에서 복음 전도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날이 갈수록 피상에 의존하기 쉬운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는, 즉 문화에 맞는 전도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도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상 속에서 선한 이미지를 구축하여 닮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될수록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고 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22). 이 시대의 새로운 전도 전략, 이미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우리의 모습을 잘 다듬고 가꾸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자. 크리스천의 이미지 전도를 통해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자. 이미지테크연구소
  • 2008.08.2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기도로 이끄는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
  • 기도는 내게 위대한 인물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특히 구약의 유대인들이 재를 뒤집어쓰고 며칠씩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금식기도를 했다는 구절들을 떠올리면 지레 질려 버리고는 했다. 그만큼 기도가 부담스러웠다. 나는 지금도 기도를 잘 하지 못한다. 기도에 오랜 시간 열중하지도 못한다. 기도할 때 집중하는 훈련이 안 되어 있어서 그렇다. 비록 기도의 깊이와 양은 턱없이 부족해도, 기도 생활은 내 삶의 중심이 되어 가고 있다. 나는 이제 내 노력만으로는 결코 어떤 상황을 좋게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내 자아에 의지할 때만 해도 나도 모르게 말이 꼬이고, 태도가 꼬이고, 인간관계가 꼬이고, 비즈니스가 꼬이는 낭패를 당했던 적이 수없이 많다. 나는 그런 경험을 통해 점점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다. 그 은혜로 내 삶의 구석구석에 기도의 흔적이 많아지고 있다. 나는 남편의 목숨을 건진 확실한 기도 응답을 받았는데도 늘 마음 한 켠에는 ‘기도 응답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라는 블랙홀에 빠져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이런 나를 기도 훈련의 길로 이끌어 줬다. 나는 ‘5만 번 응답받은 뮬러의 기도 비밀’이라는 책을 읽고 기도의 매력에 푹 빠졌다. 조지 뮬러(George Muller)의 기도 응답에 관한 유명한 일화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책으로 접해 보니 그 은혜가 무척 컸다. 뮬러는 기도 생활을 매일 즐겼다. 기도를 통해서 남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보화를 얻는 일에 상당히 매력을 느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하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주 기도의 열쇠를 사용하여 하늘의 창고를 열었던 것이다. 그는 기도가 어떤 특정인의 점유물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누구나 기도의 열쇠로 매일 하늘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뮬러는 기도에 대해 하나의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욱 맛이 나지만 멀리하면 멀리할수록 더욱 그 맛을 잃어버린다는 점이다. 아무리 기도를 못하는 사람이라도 기도의 시간을 자주 할애하여 하나님께 드리기 시작하면 기도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고, 기도의 맛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 구절을 읽는 순간 보물을 발견한 듯 기뻤다. 이 구절은 내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줬다. 특히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욱 맛이 난다는 말은 기도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큰 용기를 줬다. 나는 조지 뮬러로 부터 기도의 맛을 보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당장 적용해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의식적으로 작은 일상에서부터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려고 애썼다. 고객에게 이미지 컨설팅을 진행할 때, 강의를 할 때, 미팅을 할 때, 원고를 쓸 때, 전화를 걸 때, 가족과 대화할 때도 ‘주님! 주님이 기뻐하시는 결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이 인도해 주세요’하고 기도했다.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내 의지와 생각이 기도보다 앞서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날마다 깨닫게 해 줬다. 나는 기도의 맛을 점점 깊이 알아 가고 있다. 일상에서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받는 응답의 재미에 충만해 있다. 나는 이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지내는 방법을 알게 되어 천하를 얻은 것처럼 기쁘다. 특히 요즘,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 주님과의 대화가 원활해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주님께 아뢰면, 가장 좋은 때에 기도가 이뤄지게 해 주신다. 그 놀라운 응답들을 생각할 때마다 전율이 느껴진다. 그 신비한 기도의 응답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나만의 것이다. 주님과의 소통에는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이미지테크연구소
  • 2008.07.27 / 정승환 기자

    12. 말씀으로 이끄는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
  • 말씀은 내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을 꿰뚫고 있는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이다. 말씀을 담은 성경은 내 재산목록 1호다. 말씀이라는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내가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말씀을 적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선하고 옳은 길로 안내할 때는 파란색 사인을 보내 준다. 자칫 악하고 그른 길로 들어서려고 할 때는 빨간색 사인을 반복해서 보내 준다.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나를 말씀의 은혜로 인도해 준다. 내비게이션은 내가 어디서 출발해야 하고 언제까지 도착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없을 때는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목사님들의 목이 쉰 듯한 목소리를 들으면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25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알고 지내던 선배 언니가 있었는데, 그 선배는 여의도순복음 교회에 나가는 크리스천이었다. 한번은 선배가 내게 조용기 목사님의 말씀 테이프를 건네줬다. 선배는 내게 목사님의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 한번 들어 보라고 했다. 매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선배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집에 와서 테이프를 틀었다. 나는 3분 이상 듣지 못하고 정지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은혜는커녕 조용기 목사님 특유의 목소리가 생소하고 거북하게 들렸다. 당시에 나는 목이 쉰 목사님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FM 라디오를 듣다가 목사님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면 얼른 다른 채널로 돌렸다. 그러나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을 만난 이후부터는 영의 귀로 말씀을 듣게 되었다. 어느새 조용기 목사님의 목소리는 은혜의 강물이 흐르는 소리로 들렸다. 조 목사님의 말씀을 들을 때 토씨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길 잃은 양들을 불러 모으는 영성 깊은 목자의 목소리는 은혜의 빛이 되어 지구촌 멀리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 나는 이제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목사님들의 목이 쉰 듯한 목소리나 특이한 억양이 은혜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오직 말씀 하나만으로 듣는다. 과거에 그토록 무의미하게 들렸던 말씀들이 이제는 어찌나 달고 맛있는지, 말씀의 참뜻을 깨달을 때마다 영혼의 평안함과 충만함을 경험한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 나는 운전하는 것을 좋아한다. 단순히 운전을 즐겨서가 아니라 자동차 안에서 말씀을 온전히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운전하는 시간은 내 영혼을 살찌우는 소중하고 은혜로운 말씀과 찬송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요즘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수도권 지역에서 지방 강연이 있을 때 웬만하면 내가 직접 운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나만의 공간인 차 안에서 듣는 말씀이야말로 내 영적 건강을 체크해 보는 데 그만이다.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말씀을 아는 것뿐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길로 안내해 준다. 말씀이 행위로 나타나지 않을 때 말씀의 능력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 준다. 운전자가 운전 기법(말씀)을 알아도 교통 법규(행위)를 지키지 않으면 대형사고를 내고 마는 것이다. 내가 말씀대로 살지 않을 때는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이 ‘너는 지금 말씀과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사인을 보내 준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성경통독사경회나 성경공부 반을 찾아다니게 인도해 줬다. 기독교 방송과 주변 사람들을 통하여 훌륭한 목사님들의 설교 테잎을 들을 수 있게 해줬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여러 통로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길로 이끌어 주었고 말씀을 점점 더 사모하게 해줬다. 말씀은 나를 믿음과 진리와 은혜의 길로 이끌어 주는 든든한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 이미지테크연구소
  • 2008.06.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11. 예배로 이끄는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
  • 예배는 만찬이다. 주일 예배는 크리스천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내게 주일 예배 말씀은 서양식 ‘풀코스’처럼 풍성하다.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나를 예배로 이끌어 준다. 나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 가는 은혜를 얻는다.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_ 시편 50:5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은 아무리 성경 지식이 풍부하더라도 교회 공동체를 통한 교제가 없으면 진정한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줬다. 그래서 예배드리지 못할 환경에 처했을 때 나는 몇 년 동안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도 주일날 손에 성경책 들고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제 마음대로 교회에 나갈 수 없는 현실을 주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주님, 제게 교회에 갈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해 주세요. 저도 예배드리는 기쁨을 알게 해 주세요.’ 하나님은 내 영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분의 때에 이뤄 주셨다. 그분은 교회에 나갈 수 있는 확실한 환경을 주셨다. 거기다가 교회를 오가며 말씀을 듣는 시간까지 더해 주셨으니 감사할 뿐이다. 이제 나의 주일날 풍경은 판에 박힌 듯 비슷해졌다. 주일날 아침 8시, 딸 지원을 깨운다. 지원은 고등부 찬양팀에서 섬기느라 교회에 좀 일찍 간다. 샤워를 끝낸 지원을 자동차에 태워 신촌 교회 입구에 내려준다.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옷 차림인 남편을 향해 “오늘은 절대로 늦으면 안 된다.”며 재촉에 재촉을 거듭한다. 죽전 영락교회에 10시 40분까지 도착하려면 10시 이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 자동차 시동을 켜 놓고 남편을 기다린다. 동시에 라디오 버튼을 누르고 극동방송의 <늘 푸른 초장>을 듣는다. 이때의 기분은 영화 상영하기 전에 설레는 마음 같다. 오늘은 목사님들이 무슨 말씀을 들려주실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다. 곧바로 김정석 목사님(광림교회 담임목사님)의 설교가 흐르는데, 특유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익숙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30분이 지나면 김요셉 목사님(수원 원천교회 담임목사님)의 맑고 밝은 목소리가 예배드리기 전의 분위기를 한껏 살려 준다. 라디오로 듣는 두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애피타이저 같다. 주일 예배 말씀에서 은혜를 듬뿍 받기 위해 영혼이 먹는 식욕 촉진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만용 목사님(죽전 영락교회 담임목사님)의 주일 설교 말씀은 메인 요리다. 주님은 성도 개개인의 기호에 맞도록 고기를 적당하게 구워서 입에 넣어 주신다. 예배를 마친 뒤 집으로 가는 자동차 안에서 듣는 박광철 목사님(미국 제이 펠로십 교회 목사님)의 말씀은 달콤한 초콜릿 크림이 얹힌 디저트다. 내 영혼이 주일마다 먹는 풀코스는 최상의 행복감으로 나를 인도해 준다. 드디어 11시, 이제는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이다. 담임목사님의 예배를 시작하는 기도가 이어지고 찬양팀의 찬송이 들린다. 그리고 담임목사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듣는다. 목사님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지적이면서도 평화로움이 묻어난다. 예배는 목사님의 축사에 이어 찬양팀의 마지막 찬송으로 마무리된다. “주 너를 지키시고 그 얼굴을 네게 돌리시어 참 평강을 참 평강을 그 얼굴을 네게 돌리시어 주의 은혜 주의 은혜 주의 은혜 늘 네게 있으라. 아멘, 아멘, 아멘…(찬송가 550장).” 이 찬송을 들을 때가 주일 예배의 클라이맥스다. “그 얼굴을 네게 돌리시어” 부분을 부를 때는 예수님이 예배를 받고 돌아가시면서 내 얼굴을 뒤돌아보시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주님이 미소를 띠며 내게 사랑과 위로, 평강의 은혜를 보내 주시는 것 같다. 나는 감사와 성령 충만함으로 눈물을 머금는다. 그 기쁨과 평화를 어떤 말로도, 어떤 글로도 표현할 수가 없다.
  • 2008.05.25 / 정승환 기자

    10. 누구나 닮고 싶은 지구 시민이 되자
  • 국내 시문학에서 명성 높은 박노해 시인. 그는 남을 위해 자신의 시짓는 '업'을 접어버렸다. 그는 광화문 거리에서 오랫동안 1인 시위를 벌였는데 그의 손에 들린 피킷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전투병 대신 의료 재건부대를!’ 박노해 시인은 여성지 ‘레이디 경향(2007년 8월 호)’과의 인터뷰에서 ‘나눔 문화’ 회원들과 함께 ‘Save Lebanon'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밝혔다. 시인과의 인터뷰 내용은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하며 읽기엔 너무 심오했다. 시인는 이스라엘의 폭격을 받고 고통을 받는 레바논의 어린이를 돕는 일에 헌신하고 있었다. 시인은 ‘까나 마을’ 어린이들의 비참한 실상을 본 후, 시를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은 카메라를 들었고 현장 사진을 지면에 실었다. 잡지에 실린 여러 사진들 중에서 카메라 앞에 선 꼬마 아이들의 표정이 가슴 저렸다. 아이들은 전쟁의 상흔으로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음을 잃고 있었다. 시인은 그런 아이들을 위해 나눔 회원들과 함께 까나 마을에 도서관을 지었고 난민촌에 학교를 지원했다. ‘나눔’에 대한 시인의 깊은 통찰력이 배어있는 구절이 있어 소개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상처가 있고, 가난과 아픔이 있지요. 그것을 개인으로 끌어안을 때는 절망, 고통이 되지만, 승화하고 나누면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사랑과 희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처야말로 당신이 가진 최고의 보물이고 힘입니다” 나눔을 위해 호소하는 시인의 영혼이 참 맑았다. 길거리에서 1인 시위하는 그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야속하게 여겨질 텐데도 시인의 마음 씀씀이가 참 넉넉했다. “거리를 지나면서 외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을 이해합니다. 다들 ‘먹고살기’ 위해서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에 대해 모른척하고 가야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선함과 의로움과 사랑이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잠깐 발을 멈추는 것이 어려울 뿐. 평화 운동가와 혁명가, 로맨티스트가 가슴속에 한 명씩 살아 있을 겁니다” 시인의 ‘타인 입장’에 대한 이해가 남달라 보였다. 시인은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지구시민’이라는 표현을 썼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지구적으로 생각하자는 의미란다. 지구시민은 시인의 시상에서 나온 아름다운 시였다. 그가 사람들에게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람은 자기 자신. 자기 나라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타고 납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관심,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관심, 국경 너머의 관심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은 지구시대죠. 우리 아이들은 지구를 품고 자라야 합니다. 이 지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면, 지구시대 시민의 자격도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들의 고통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국경 너머에서, 너무나 많은 곳에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일상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우리는 그 위에서 이 정도의 안정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딛고 선 존재의 발밑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할 때, 우리는 바로 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고 둘러보고 그것으로부터 사랑과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그런 놀라움을 눈물로 끌어안아주기를 바랍니다.” 시인의 말처럼, 지구의 반대편이 아니라 같은 하늘 아래인 가난한 이웃과 북한에서 벌어지는 실상에도 우리는 너무나 무덤덤하게 살고 있다. 우리는 이 지구 곳곳에서 가난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과 전쟁의 피해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이 넘치고 있는 것을 모른 채 살고 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는 동물적 속성이 있기 때문이리라. 지구시민의 나눔과 섬김 정신은 곧 그리스도 정신을 지닌 사람이다. 지구시민이 곧 천국시민이다. 크리스천들은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먼저 앞장서서 누구나 닮고 싶은 지구시민이 되어야 한다. 가난한 자와 고통 받는 자를 돌아보지 않는 크리스천은 부끄러운 지구시민이다. 부끄러운 천국시민이 되지 않도록 주변을 돌아보며 늘 선한 일을 꿈꾸며 ‘행함’에 힘쓰자.
  • 2008.04.25 / 정승환 기자

    천국 시민의 나눔 정신
  • 국내 시문학에서 명성 높은 박노해 시인. 그는 남을 위해 자신의 시짓는 '업'을 접어버렸다. 그는 광화문 거리에서 오랫동안 1인 시위를 벌였는데 그의 손에 들린 피킷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전투병 대신 의료 재건부대를!’ 박노해 시인은 여성지 ‘레이디 경향(2007년 8월 호)’과의 인터뷰에서 ‘나눔 문화’ 회원들과 함께 ‘Save Lebanon'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밝혔다. 시인과의 인터뷰 내용은 미용실에서 머리 손질하며 읽기엔 너무 심오했다. 시인는 이스라엘의 폭격을 받고 고통을 받는 레바논의 어린이를 돕는 일에 헌신하고 있었다. 시인은 ‘까나 마을’ 어린이들의 비참한 실상을 본 후, 시를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인은 카메라를 들었고 현장 사진을 지면에 실었다. 잡지에 실린 여러 사진들 중에서 카메라 앞에 선 꼬마 아이들의 표정이 가슴 저렸다. 아이들은 전쟁의 상흔으로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음을 잃고 있었다. 시인은 그런 아이들을 위해 나눔 회원들과 함께 까나 마을에 도서관을 지었고 난민촌에 학교를 지원했다. ‘나눔’에 대한 시인의 깊은 통찰력이 배어있는 구절이 있어 소개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상처가 있고, 가난과 아픔이 있지요. 그것을 개인으로 끌어안을 때는 절망, 고통이 되지만, 승화하고 나누면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사랑과 희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상처야말로 당신이 가진 최고의 보물이고 힘입니다” 나눔을 위해 호소하는 시인의 영혼이 참 맑았다. 길거리에서 1인 시위하는 그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야속하게 여겨질 텐데도 시인의 마음 씀씀이가 참 넉넉했다. “거리를 지나면서 외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을 이해합니다. 다들 ‘먹고살기’ 위해서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에 대해 모른척하고 가야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선함과 의로움과 사랑이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잠깐 발을 멈추는 것이 어려울 뿐. 평화 운동가와 혁명가, 로맨티스트가 가슴속에 한 명씩 살아 있을 겁니다” 시인의 ‘타인 입장’에 대한 이해가 남달라 보였다. 시인은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지구시민’이라는 표현을 썼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지구적으로 생각하자는 의미란다. 지구시민은 시인의 시상에서 나온 아름다운 시였다. 그가 사람들에게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람은 자기 자신. 자기 나라에 대한 관심은 누구나 타고 납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관심,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관심, 국경 너머의 관심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은 지구시대죠. 우리 아이들은 지구를 품고 자라야 합니다. 이 지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다면, 지구시대 시민의 자격도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들의 고통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국경 너머에서, 너무나 많은 곳에서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일상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우리는 그 위에서 이 정도의 안정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딛고 선 존재의 발밑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할 때, 우리는 바로 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돌아보고 둘러보고 그것으로부터 사랑과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요? 여러분이 그런 놀라움을 눈물로 끌어안아주기를 바랍니다.” 시인의 말처럼, 지구의 반대편이 아니라 같은 하늘 아래인 가난한 이웃과 북한에서 벌어지는 실상에도 우리는 너무나 무덤덤하게 살고 있다. 우리는 이 지구 곳곳에서 가난으로 굶어 죽는 사람들과 전쟁의 피해로 고통 받는 어린이들이 넘치고 있는 것을 모른 채 살고 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는 동물적 속성이 있기 때문이리라. 지구시민의 나눔과 섬김 정신은 곧 그리스도 정신을 지닌 사람이다. 지구시민이 곧 천국시민이다. 크리스천들은 믿지 않은 사람들보다 먼저 앞장서서 누구나 닮고 싶은 지구시민이 되어야 한다. 가난한 자와 고통 받는 자를 돌아보지 않는 크리스천은 부끄러운 지구시민이다. 부끄러운 천국시민이 되지 않도록 주변을 돌아보며 늘 선한 일을 꿈꾸며 ‘행함’에 힘쓰자.
  • 2008.03.21 / 정승환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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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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