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선기 목사의 직장과 크리스천
[방선기 목사의 직장과 크리스천]결혼문화에 대해서
  • 올 봄에 나는 일 계급 특진했다. 그 동안은 그냥 아버지였는데 아들이 결혼하는 바람에 시아버지가 되었다. 아들의 결혼과정을 겪으면서 느낀 것들이 많다. 아들이 결혼할 여자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 여자도 남의 귀한 딸이겠지만 처음부터 만족하지는 않았다. 그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쨌든 내 자식이 더 귀히 여겨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부모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 여자는 나의 며느리이기 전에 아들의 아내가 될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들의 아내는 아들이 선택해야 하며 부모는 그런 아들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부모의 자세이다. 일단 그렇게 해서 그 여자를 아들의 아내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여자가 내 며느리가 된다. 요즈음 며느리를 보면 너무 기분이 좋다. 결혼과 관련해서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간에 일어나는 갈등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자식 결혼하는 데는 신앙보다는 세속적인 가치관이나 개인의 욕심이 앞서기 쉽다. 신앙적인 결정을 위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 결혼은 부모가 며느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고 딸이 남편을 맞이하는 것이다. 물론 자식이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하려고 할 때는 믿는 부모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자녀가 믿는 배우자와 결혼하도록 진작에 가르치고 권면했어야 한다. 신앙적인 가치관으로 자녀에게 권면할 수 있지만 부모의 권위로 결혼을 금하는 것이 바람직할지는 의문이다. 결혼을 결정한 후에 양가가 만나서 겪는 문제가 있다. 우리사회에 많이 거론되는 문제는 예단 문제다. 양가가 결혼을 축하해서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신부집에서 신랑집에 어느 정도의 선물을 하도록 강요되는 문화는 결코 신앙적으로 바람직한 것 같지는 않다. 우리 사회에서 이 문제로 결혼이 깨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안타깝다. 믿는 집안에서도 그런 일이 있다고 한다. 물질주의 풍조가 하나님의 가정을 이루는데도 스며들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의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받지 않는 것이 결혼을 순수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결혼을 이루기 위해서 이기적인 욕심이나 집안의 자존심 정도는 내려 놓아야 하지 않을까. 이제 결혼식을 하게 되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하객들의 문제다. 우리나라의 결혼식은 대체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다. 혼주 입장에서 많은 하객을 오기를 기대한다. 하객의 숫자가 집안의 힘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하객들의 부조에 대한 기대도 크니까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결혼식에 오라고 부탁을 한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가지 않을 수가 없으니 봉투만 가지고 가서 내고는 식당에서 밥만 먹고 간다. 예식장소까지는 가더라도 진심으로 축하하기 보다는 주변에 서성거리면서 잡담만 하다가 헤어지는 사람들이 많다. 또 그런 예식이다 보니 하루에 여러 건을 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낭비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모두가 문제로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 나 자신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음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가만히 결혼의 의미를 생각해보면 정말 한심한 일이다. 일생에 한번 있는 거룩한 결혼식이 시장터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말 거룩한 결혼식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축하하고 싶은 사람들이 예식에 참석해서 끝까지 축하를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에 아들 결혼식 문제로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가족과 친척들과 신랑신부의 친구들만 초청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내가 아는 분들을 초청하지 않는 바람에 섭섭하게 생각하신 분이 있었다. 그 분들에게는 죄송했지만 적어도 체면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은 없도록 했다. 모두가 진심으로 결혼을 축하하는 결혼식이었다.
  • 2007.04.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방선기목사(직장사역연구소장) 나는 크리스천 직장인들에게 직장에서 전도하라는 이야기를 항상 하고 다닌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마음이 찔릴 때가 있다. 나 자신은 내가 말한 것처럼 전도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데는 나름대로 변명이 있다. 나는 직장에 다닐 때에 전도를 참 많이 했다. 직장동료들과 일하다가 조금 여유가 생겨서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교회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보면 예수님을 전할 기회가 주어졌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다 예수를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전한 것 자체가 전도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사람이 마음을 열어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는 것은 내 언변이나 설득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니까 말이다. 그래서 직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런대로 즐겼는데 신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전도를 못하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신학교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만 오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 밖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신학교는 직장에서 했던 것처럼 주변에 있는 사람과 관계전도를 하기에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후에 목사가 되고나서도 전도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 주변에 오는 사람들은 다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랜드라는 직장에서도 목사는 주로 믿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게 된다. 믿지 않는 직원들이 있지만 그들이 목사에 대해서는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은데 내가 그것을 좁히지 못한 때문인지 전도의 기회가 별로 갖지 못했다. 물론 제도적으로 하는 성경공부를 통해서는 믿지 않는 직원들과 공부하기도 하지만 역시 목사는 관계를 통해서 개인 전도하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전도 이야기 하면서 나 자신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전도의 열정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그 불을 다시 지펴주셨다. 올해는 정말 내 입으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라디오를 듣다가 이런 말을 들었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과학 수사하는 사람들에게 잠언처럼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게 복음전파의 명령으로 다가 왔다. “모든 접촉은 복음의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접촉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퇴직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해서 만났다.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지만 퇴직을 한 지금 많이 힘이 들것이라 생각해서 만났다. 그 자리에서 조금씩 복음의 흔적을 남겼다. 류머티즘 때문에 가는 병원의 의사와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그분과 식사하면서 복음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앞으로 그 병원에 갈 때마다 식사하는 기회를 가지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같은 의사인 친척 동생이 생각났다. 우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 어릴 때는 교회에 다녔을텐데 지금은 다니지 않고 있다. 그와 만나서 또 식사를 하면서 교회를 그만 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이미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사람인지라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기회를 만들어서 계속 대화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흥미있는 만남은 초등학교 동창들과의 만남이었다. 언젠가 초등학교 동창 하나가 동창회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었다. 그러나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이 그들을 만날 마음을 주셨다. 이들을 만나서 내가 생각지 않은 흔적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는 장소가 술집이어서 망설이기는 했지만 접촉에 대한 열정 때문에 만나서 정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마치고 돌아올 때 한 친구의 차를 타고 왔는데 그 친구가 내가 온 것을 반가와하면서 가까운데 살고 있으니까 꼭 다시 만나자고 한다. 이제 그 친구를 만날 계획을 세우고 있다.
  • 2007.03.16 / 복순희 기자 기자

    [직장과 크리스천]성육신의 힘
  •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 지난달에 뜻하지 않게 심장 수술을 받게 되었다. 예상치 않았던 수술이고 또 수술이 조금은 힘이 드는 수술인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고 약간은 두렵기도 했다. 나의 그런 기분을 눈치 챈 의사 선생님은 그 수술이 많이 하는 수술이고 실패율이 별로 없는 수술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 말에 조금 위안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표정이 그리 밝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바로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이 의사 가운을 들치고 자기 배를 내 눈 앞에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술 걱정 마세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나도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괜찮아요” 눈 앞에 의사의 배에 있는 선명한 수술 자국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나왔고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의사로서 어떤 설명을 해준 것보다 수술 받은 환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내게는 훨씬 더 위로가 되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자기도 환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바로 이것이 성육신의 힘인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하늘 보좌 위에서도 얼마든지 많은 일을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일보다 우리 인간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연약함을 지닌 인간으로 태어나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 그 의사가 수술 받은 환자로서의 체험을 보여준 것이 수술 받을 내게 위로가 되었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에 머물러 계시지 않고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땅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위로가 된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있는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고 초라한 마굿간에서 태어난 것이 위로가 된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권력과 부를 가지고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위로가 된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떵떵거리며 살지 않고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면서 가난하게 사신 것이 위로가 된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마지막으로 돌아가실 때 모든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가지 않고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것이 위로가 된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부활하신 후에 영광의 몸을 입으시고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시고 특히 도마 같은 이에게 상처 자국을 보여주신 것이 위로가 된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연약함을 보여주심으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큰 위로를 주셨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때때로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가? 의심하게 될 때마다 우리와 같이 이 땅에 사셨던 주님을 바라보자. 우리의 삶이 힘이 들고 고달프다고 느낄 때마다 소와 양들이 우는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바라보자. 요즈음처럼 경제적으로 어렵고, 또 하는 일들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서 화가 날 때 목수의 아들로 일하던 청년 예수를 바라보자.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에 내 집이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집 없이 떠돌아 다녔던 전도자 예수를 바라보자. 다른 사람보다 힘이 없어서 고난을 당하게 될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오라고 하신 고난의 종을 바라보자.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데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보고 답답할 때 부활해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만왕의 왕을 바라보자. 염려했던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 수술을 받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정말 고통스러웠고 수술 결과로 내 몸에 그 의사와 같은 수술 자국이 생겼다. 그런데 그 고통의 경험과 몸의 수술 자국으로 수술을 받을 사람이나 수술을 받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병원을 찾아가서 환자들을 위로 할 때마다 무언가 아쉽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들의 두려움과 아픔, 고통을 동감하지 못하는 아쉬움이었다. 그들의 두려움과 아픔, 고통을 동감하지 못하는 아쉬움이었다. 그런데 이제 내게 있는 연약함과 내가 겪은 고통으로 인해 사람들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고통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성육신의 힘이다.
  • 2006.12.24 / 복순희 기자

    직업과 하나님 나라
  •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장) 요즈음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장 스트레스를 주는 일은 취업 문제이다. 공부를 다 마쳤는데 일할 곳이 없거나 일하고 싶은 곳에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정말 답답하게 만든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취업에 대한 스트레스는 나이든 분들에게도 해당된다. 아직 얼마든지 멀쩡하게 일할 수 있는데 일할 곳이 없다는 것이 그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명예퇴직, 조기퇴직이라는 단어들도 이제는 오래된 단어가 될 정도로 ‘실직(失職)’의 문제는 지금 한참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현재 일자리가 있어서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직장인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은 젊은이들이나 나이 든 분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그리고 중년의 직장인들이 잃고 싶지 않은 바로 그 직장(職場)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살고 있다. 어느 누구는 없거나 잃어버릴까봐 스트레스를 받는데 누구는 바로 그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놈의 직장 때려 칠 수는 없나?”하면서 탄식을 하기도 한다. 직장의 스트레스를 떨쳐버리기 위해서 나가서 자기 ‘사업(事業)’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직장의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한 아주 좋은 대안이 된다. 그러나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또 다른 종류의 스트레스가 다가온다. 그 스트레스는 직장인들이 받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다. 대조가 되는 재미있는 사실은 그래도 직장에 다닐 때는 한달에 한번 오는 월급날이 즐거운 날이었다. 그러나 사업을 하게 되면서 바로 그 날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된다. 이렇게 일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받는 다양한 스트레스를 생각해보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일과 관련된 고통을 피할 수는 없음을 알 수 있다. 스트레스는 직장을 갖게 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직장에 익숙해진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직장을 그만 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들어서 직장을 완전히 떠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생긴 죄악의 결과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의 변화가 고통의 정도를 조금은 약화시켜 줄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루신 구속은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게 해줄 뿐 아니라 이 땅에서 죄로 인해 생긴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준다. 취업을 놓고 걱정하느라 받는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작정 좋은 직장 달라고 기도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거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이더라도 그 일이 이 땅에서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소명감을 느끼도록 해야한다. 일단 일을 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주께 하듯 함으로 그 일의 영적인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남에게 고용 되어서 일할 때는 고용주의 눈치를 보기보다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일하고, 자기 사업을 시작해서 고용주가 되었을 때는 하나님이 자신의 고용주라는 사실을 느끼면서 직원들을 대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언젠가 일하지 못하게 될 때를 생각하면서 걱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서 믿음으로 준비하고 그런 상황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살면서 누군가를 돕는 일을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 은퇴를 했다면 이제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기여할까를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창한 운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처한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남들이 꾸지 않는 위대한 일을 꿈꾸어야 한다.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겪는 보편적인 일들을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행하자.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가까워 질 것이다.
  • 2006.11.19 / 복순희 기자

    [방선기 목사의 직장과 선교]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 직장에서 겪게 되는 갈등의 문제들 중에 자기가 손해를 보기만 하면 되는 문제들은 그런대로 결단하기가 쉽다. 그러나 구조적인 부정의 경우는 그 속에 속해 있는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 결단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맡겨진 일을 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든가 뇌물을 써야만 한다든가하는 경우다.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적인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직장을 그만 두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된다. 때로 그런 결단을 내리는 것이 신앙인에게 필요한 순교적인 자세일 수 있다. 바로 다니엘의 친구들이 보여 주었던 ‘그리아니하실찌라도’의 신앙이다. 그것은 정말 귀한 신앙의 자세이지만 문제는 그런 자세가 모든 크리스천 직장인에게 현실적으로 가능 하느냐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느냐는 것이다. 자칫 이런 순교적인 신앙을 무리하게 요구하면 도무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거나 정반대로 세상의 요구에 그냥 굴복해버리는 양극단으로 치닫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죄악 세상의 불의한 구조 속에서 사는 크리스천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도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대안이 필요하다. 이런 대안을 찾는 지혜를 바로의 명령을 거역하고 이스라엘의 남아들을 살렸던 산파들에게서 배울 수 있다.(출 1:15∼22) 바로 왕이 산파들에게 히브리의 남자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그들은 그 앞에서 그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명령을 어기고 남아들을 살렸다. 후에 바로 왕이 그 사실을 알고 따지듯 물었을 때 그들은 적당히 둘러대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의 이런 태도를 보고 은혜를 베푸셨다. 이 이야기는 현대의 직장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을 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정면으로 반대한다면 결국은 아무런 소득 없이 희생만 당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롭게 대처하면서 죄악 된 관행을 조금씩 고쳐나가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장부에 부정직한 숫자를 기록해야 하는 경우 일단 시키는 대로 하지만 지속적으로 관행의 부정직함을 지적하고 그것을 줄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갈등이 커져서 도무지 일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 직장을 그만 두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좀 더 적극적인 자세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모세가 바로 왕에게 반기를 들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해냈듯이 구조적인 악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의로운 힘을 모아서 구조적으로 싸울 필요도 있다. 이를 위해서 시민운동의 도움도 받고 그들과 연대활동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흑 아니면 백의 논리로만 직장에서 겪는 현실의 문제를 풀 수 없음을 인정하고 지혜롭게 대응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전도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준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 말며 우매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6∼18)”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때로 양극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제 삼의 대안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감수할 필요가 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칫 타협의 유혹에 빠질 수 있으므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 2006.10.22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크리스천과 술자리
  • 나는 왕따인가? 다니엘인가! 직장생활을 막 시작한 젊은이들에게 직장생활이 어려움을 물어보면 여전히 술좌석에서의 갈등을 이야기한다. 요즘은 직장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서 과거와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술좌석에의 압력과 횡포는 경건하게 살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고민거리다. 이에 대해서 분위기에 맞추려고 그냥 어울려서 함께 술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술을 안 마신다고 버티는 바람에 요즈음 말로 ‘왕따’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둘 사이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보려고 노력을 한다. 미국이나 캐나다의 크리스천 직장인들에게서 거의 문제가 되는 않는 이 문제가 우리에게 고민이 되는 데는 문화적인 요인이 있다. 술 자체에 대한 성도들의 자세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신학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며 이에 대해서 여기서 길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술 문화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대로 알고 분명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일반 사회학자들이 쓴 “술의 사회학”이라는 책을 통해서 우리의 술 문화를 사회학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 모두가 짐작하는대로 우리나라에서의 술은 단순히 기호음료가 아니라 공동체성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여기에 서구의 문화와 대조되는 점이 있다. 그들은 대화를 위해 술을 마시므로 각자가 자신의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해가며 마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술 문화는 다분히 어울리는 문화이기 때문에 술잔에 술을 따라주고 술잔을 비우라고 강요하며 그러다보니 무절제하게 되기 쉽다. 우리나라에서 생활하게 된 외국인들이 문화적으로 가장 충격을 받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일찍이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 술을 금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왜 신자들은 술을 마시면 안 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율법적인 대답보다는 우리의 술 문화의 현실을 소개하는 것이 지혜로운 대답이 될 것이다. 더구나 술좌석이 성적인 타락이나 폭력이나 음주운전 등 과 무관하지 않고 특히 우리 사회의 부정과 부패와 항상 연계된다고 한다니 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할지가 분명해진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세친구가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했던 것은 바로 이런 신앙의 상징적인 표현이었다(단 1:8). 그들은 바벨론의 사회에 잘 적응을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의 구별됨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런 결단을 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구별을 강조하다가는 결국 직장에서 소외되어 이른 바 ‘왕따’ 당하기 쉽다. 그것은 물론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평상시에 대인관계에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평소에 얌체 짓만 골라하던 사람이 술 안마시겠다고 할 때 그것을 좋은 눈으로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상시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필요할 때는 희생적인 헌신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술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경건을 드러내는 아주 좋은 예가 된다. 일단 거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어떤 자세로 거절하느냐 도 중요하다. 술 마시는 동료들을 향해 ‘더 거룩한 듯’한 태도가 아니라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데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는 예의가 필요하다.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거절했던 다니엘이 난색을 표명하는 환관장에게 아주 예의 있게 대안을 제시한 것은 좋은 본이 된다(단 1:11,12). 그리스도인들이 동료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술좌석에서 술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적응과 구별의 균형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자세이다. 글을 마치면서 문득 우리의 술 문화가 좀 건전하게 변해서 직장동료들과 술 한잔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될 때를 기대해본다.
  • 2006.09.17 / 복순희 기자

    직장생활 통한 그리스도인의 사역
  • 방선기 목사(직장사역연구소장) 직장에 다니는 자매 한 분의 간증을 감명 깊게 들은 적이 있다. 모태 신앙으로 자라온 자매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는 삶이 변하게 되었다고 한 것은 여느 간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변화가 여느 간증과 달라서 인상적이었다. 은혜를 체험하고부터 그 자매에게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 24시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의 일이 주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님의 일이 아닌 세상일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지면서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신학교를 가든지 선교사로 나가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그러지는 않더라도 주의 일과 전혀 상관없게 느껴지는 회사 일은 그만두고 노방전도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던 그 자매는 “직업과 소명”에 관한 강의를 듣는 중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의 의미가 “순서를 정해서 교회, 가정, 직장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먼저 주님의 뜻을 구하고 주의 통치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말씀이 이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이며 성도들은 청지기가 되어서 일터에서 그 명령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모든 만물이 주님의 것이면 내 직장도 주님의 것이고 모든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다니는 회사의 주인은 지금의 주주나 사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면 나는 회사에서 채용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용한 사람이며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하나님이 주인인 회사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생각의 변화와 함께 그 동안 생계유지나 자아실현의 수단으로만 생각했던 회사를 바라보던 눈이 새로워지게 됐다. 일단 직장에 대해서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되자 직장의 업무에 대해서 다른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는 말씀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이 직장에 보내주신 이유, 또 이 부서에 보내 주신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직장에서의 의무로만 생각했던 사람을 만나는 일들이 주님을 전하는 기회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만나서 주님을 전하려하게 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사에 근무하면서 개인 전도를 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면서 다른 길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생각지도 못한 지혜를 주셨다. 회사 안의 전자우편 시스템에 있는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글을 올리자마자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감사전화를 받고 격려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역사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후로 이 글을 통해 위로 받는 사람들도 생기고 도전을 받고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도 생겼다. 직장을 통한 사역의 열매가 맺게 됐다. 일반 목회자들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사역을 직장에 다니는 평범한 성도가 해낸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그 자매를 통해서 엄청난 일을 이루신 것이다. 이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은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헌신한 평범한 성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얼마든지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성도들이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직장을 떠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주님은 그곳에서 주의 일을 하라고 우리 모두를 부르신다.
  • 2006.08.18 / 복순희 기자

    [방선기 목사의 직장 선교]설득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처럼
  • 내가 믿는 바 성의 다해 설명해야 명령과 복종 보다 대화 통한 이해 필요 직장에서 윗사람들이 시키는 일을 하다보면 짜증이 날 수 있다. 반대로 아랫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또 짜증이 난다. 이런 일들이 쌓이면 일은 일대로 잘 안되고 관계는 점점 나빠진다. 요즈음은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하지만 그래도 직장에서 되어지는 일을 보면 여전히 명령과 복종이 의사소통의 기본인 것 같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전통적인 의사소통의 방법인 모양이다. 가정에서도 부모가 아이들에게 명령을 하고 아이들은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요즈음 현실은 예전 같지 않지만 의사소통의 기본패턴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요즈음 가정과 직장에서 의사소통하는 모습을 보면서 명령과 복종이라는 패턴 속에 “설득”이라는 요소를 집어넣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윗사람이 명령을 할 때도 그냥 명령을 하고 순종을 요구하기보다는 그 명령에 대해서 설명을 해서 아랫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약간 힘이 들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렇게 할 때 순종하는 사람들이 훨씬 마음을 열고 순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윗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윗사람에 무언가를 요구했다가 그것이 거절되면 그냥 쉽게 포기해버리면서 윗사람의 무지와 편견을 탓하기보다는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역시 힘이 들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살 수 있다. “설득”이라면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을 자신의 방향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오히려 상대방이 자신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면이 강하다. 설득과 이해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득을 해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어도 가치가 있다. 서로를 좀 더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명령만 해도 되는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서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사 1:18)”라고 하셨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보다는 대화를 통해서 설득을 하시기 원하신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설득의 절정이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우리 사회는 대화와 토론의 분위기가 성숙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설득하는 것이 그렇게 익숙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업무에서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도 설득이 중요하다. 교회로 인도하거나, 직접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도 그냥 내던지고 따라오기를 기대하고, 따라 오지 않으면 그냥 포기해버릴 것이 아니라 설득을 하도록 하자. 이것은 상대의 의지와 관계없이 억지를 부리는 것과는 다르다. 내가 믿는 바를 성의를 다해서 설명해서 마음을 열도록 하는 것입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2)”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의 자세야말로 설득하는 전도자의 모델이 된다. 매사에 여유와 인내를 가지고 설득에 나서보자.
  • 2006.04.14 / 복순희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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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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