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펠 로드
미국 켄터키 노아의 방주
  • 노아의 방주는 얼마나 컸을까?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는 세상이 부패하고 포악함이 가득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이면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창 6장).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땅과 함께 멸하시려고 작정하셨을 때,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홍수를 피할 수 있게 하셨다. 그 때 만든 방주는 얼마나 컸던지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들의 암수 둘씩 그리고 노아와 그 가족을 태우고 먹을 양식까지 모두 실을 수 있었다. 누구나 노아의 방주가 얼마나 클지 상상하기 마련인데, 그 상상을 도와줄 실제 크기의 노아의 방주가 미국 켄터키주 윌리엄스타운에 건설됐다. 미국의 한 기독교단체에서 제작한 이 노아의 방주는 길이 155.4m, 폭 25.9m, 높이 15.54m에 달하며 이 방주를 짓는데 1800만 달러(약 209억 원)라는 금액이 사용되었으며 놀라운 것은 이 대부분이 후원금으로 마련됐다는 것이다. 축구장 한 개 반 길이에 축구장 절반에 이르는 폭을 가진 노아의 방주 안에는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특히 방주는 성경에 기록한 것처럼 목재로 제작되어 ‘세계 최대의 목재 골조 건축물’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한 ‘창조의 응답’(Answers in Genesis) 대표 켄 햄 회장은 “이 사업은 우리 역사상 최대의 위대한 기독교 사업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며 800 에이커(약 3.23 ㎢)에 달하는 테마파크로 운영되며 노아의 방주 외에도 바벨탑 내부 500석이 완비된 5D 상영관, 동물원, 예수님이 살았던 동네의 당시 모습 등을 재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재 크리스천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해 실제 노아 방주의 크기에 놀라고 성경 속 모습을 꼼꼼하게 재현하려고 노력한 모습에 감탄하고 있다. 글 정승환 기자 / 사진 순복음북미총회 제공
  • 2016.11.20 / 정승환 기자

    ⑨ 제중원
  •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 고종황제 작명 “백성들을 구제한다” 의미 지금은 국민 누구나 병원에서 현대 의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이런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은 사실 오래된 일이 아니다. 1885년 4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 개원이 그 첫 시작이었다. 제중원이 설립될 당시만해도 우리나라는 신분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중원에서는 신분과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모든 백성을 상대로 서양식 의료 진료가 진행됐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1884년 7월 고종황제는 일본에서 들어온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학교와 병원’ 사업에 국한해 선교를 허락했다. 이에 따라 미국 선교부가 먼저 착수한 사업은 의료사업이었다. 1884년 10월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로 우리나라에 온 앨런은 갑신정변 때 칼에 맞은 민영익을 치료해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서양 의술에 대한 큰 신임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알렌은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고종으로부터 병원설립 허락을 받아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광혜원이었다. 그 후 13일 만인 4월 23일 고종은 이 병원에 ‘제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는데, 이는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제중원은 신분에 상관없이 서양식 진료를 한 것뿐만 아니라 선교의 전초기지로써 언더우드와 스크랜턴, 헤론 그리고 여의사로 처음 입국한 엘러스 선교사들이 제중원을 거쳐 우리나라 곳곳에 복음을 전했다. 당시 첫 서양식 병원 개원으로 환자들의 방문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많게는 하루에 260여 명의 환자를 돌보았고 첫 해에만 1만 460명의 환자를 진료했다는 알렌의 기록이 남아 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환자가 늘어나자 알렌은 선교부에 의료선교사를 추가로 요청하기도 했다. 제중원은 현재 헌법재판소가 있는 종로에 그 터가 남아있으며 1985년에 연세대에서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광혜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건물을 복원했다. 광혜원 내 사료관에는 당시 언더우드가 사용했던 타자기를 비롯해 다양한 자료 등을 만날 수 있다.
  • 2016.10.16 / 정승환 기자

    카이저빌헬름교회&마리엔교회
  • 독일 베를린에는 수많은 랜드마크들이 있지만 그 중에도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다(사진 왼쪽). 브라이트샤이트 광장 중앙의 쿠담거리에 위치한 이 교회 외관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공습으로 인해 첨탑의 일부와 중앙현관을 제외하고는 파괴되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이미 회복불능 상태인 교회를 억지로 복원하기보다 파손된 첨탑을 그대로 유지하고 1층에 기념관을 지어 후대들에게 전쟁의 무서움과 아픔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원래 이 교회는 카이저 빌헬름 2세가 그의 할아버지인 카이저 빌헬름 1세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교회로, 빌헬름 1세의 생일인 1891년 3월 22일에 주춧돌을 놓았다고 한다. 113미터 높이의 첨탑과 2000여 명이 들어가는 크기의 규모다. 또한 중앙현관은 1906년 2월 22일에 축성됐다. 지금 이 교회 옆에는 4개의 빌딩으로 구성된 신관을 만날 수 있다. 에곤 아이어만이 설계한 이 신관은 구관의 유적을 둘러싸고 있으며 구관을 중심으로 서쪽에 로비가 있으며 예배당이 있는 빌딩은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빌딩은 육각형을 하고 있으며 예배당이 있는 빌딩은 팔각형이다. 신관은 콘크리트와 철, 유리로 만들었는데, 벽들은 2만1292개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벌집모양으로 박은 콘크리트로 건설했다. 글래스의 파란색을 바탕으로 루비 레드, 에머랄드 그린, 노란색이 섞여있다. 밤에 보면 특유의 빛과 더불어 독특한 겉모습 때문에 베를린 시민들은 가끔 ‘립스틱과 파우더 박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교회는 지름 35미터, 높이 20.5미터로 1000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내부에는 황동 예수상과 5000여 개의 파이프로 만든 오르간이 있는데 매우 인상적이다. 조금 떨어진 리브크네히트 거리로 가면 베를린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중 하나인 마리엔교회를 만날 수 있다. 지어진 당시인 1292년에는 로마 가톨릭 성당이었으나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회가 됐다. 이 교회 외부는 특유의 빨간 벽돌로 되어 있으며 인근에 있는 붉은 시청사(Rotes Rathaus)는 이 교회에서 모티브를 얻어 설계됐다고 한다. 마리엔교회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심각하게 파괴됐으나 1950년대에 동독 정부가 이 교회를 재건했다. 교회 앞에는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동상이 있으며 중세 예술의 대표작인 ‘죽음의 무도’(Totentanz) 프레스코 벽화가 이 교회 안에 전시되어 있다. 글·정승환 / 사진·김용두 기자, 김한수 선교사
  • 2016.09.18 / 정승환 기자

    ⑦ 마카오 ‘성 바울 성당’ ‘모리슨 기념교회’
  • 16세기 이탈리아 예수회가 세운 성 바울 성당 개신교 첫 중국 선교사 모리슨 기념교회도 있어 마카오는 ‘중국속의 작은 유럽’으로 불리우는 도시다. 포르투갈 식민지에서 1999년 12월 20일 중국으로 반환된 마카오는 도시의 중심이자 마카오 관광의 중심인 세나도 광장을 시작으로 다양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안고 있다. 이중 하나가 바로 세나도 광장에서 몬테 요새 방향으로 가다보면 66계단 위에 우뚝 솟은 ‘성 바울 성당’이다. 성 바울 성당은 마카오의 랜드 마크로 마카오를 알리는 홍보 관련 책자나 엽서에 어김없이 실리는 유명 유적이다. 성 바울 성당은 중국 및 아시아에 파견할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예수회에서 1594년에 설립했다. 이탈리아 예수회 선교사들이 설계했던 이 곳은 종교 박해를 피해 도망 온 일본인들이 건축했다. 당시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유럽풍 성당이었다. 성 바울 성당은 1762년에 문을 닫을 때까지 아시아 최초의 유럽스타일 대학인 성바울대학의 일부였으며 수많은 선교사를 배출했다. 이 중 대표적인 선교사가 ‘천주 실의(한문으로 저술한 천주교 교리서)’ 저자인 이탈리아의 선교사 마테오 리치다. 성 바울 성당은 1835년 의문의 화재로 건물 정면과 계단, 지하실, 건물의 앙상한 뼈대만을 남긴 채 모두 불타 버렸다. 남아 있는 건물 정면에는 천사와 꽃에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 포르투갈 범선, 머리 일곱 달린 용, 중국식으로 묘사된 사자 등이 조각되어 있다. 지하에는 종교예술박물관이 있는데, 관련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마카오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곳은 모리슨 기념 교회이다. 영국 태생의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1782∼1834)는 개신교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은 인물이다. 모리슨 선교사는 1807년 1월 30일 중국을 가기 위해 영국을 출발했지만 바로 중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약 7개월이 넘는 고생스러운 여정을 거쳐 중국의 남쪽에 위치한 마카오에 겨우 도착했다. 중국에 바로 가지 못한 것은 직접적인 선교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교가 쉽지 않았던 그는 동인도회사 통역원으로 활동하며 조심스레 복음을 전했고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역사적인 작업에 나섰다. 우리나라에 성경이 들어오게 된 것은 바로 모리슨 선교사가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한 결과였다. 중국 선교를 꿈꿔 왔던 모리슨 선교사에게 있어 마카오는 중국 선교를 위한 첫 관문이었다. 현재 마카오에는 52세에 하나님의 품에 안긴 모리슨 선교사의 묘역과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모리슨 기념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교회와 묘역은 성 바울 성당 뒤 쪽 까사 가든 오른 쪽에 위치하고 있다. 마카오=글·사진 오정선 기자
  • 2016.08.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⑥ 도마기념교회
  • 의심 많은 제자에서 순교의 삶으로… 도마의 발자취 도마의 숨결이 묻어나는 인도 첸나이 도마기념교회 2000여 년전 인도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들 기독교 인구가 많지 않은 인도에서 2000여 년을 전해 내려오는 기독교 성지 도마기념교회를 찾았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의심많은 도마는 예수님을 만난 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후, 그 어느 제자보다 더 멀리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건너가 20여년간 선교하다가 AD72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마는 인도 첸나이 지역 왕의 총애를 받게 되어 궁전을 짓는 건축 책임자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느라 경비의 일부를 사용한 것이 알려져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한다. 인도의 네번째 도시인 첸나이에는 사도 도마와 관련된 유적지 세 곳이 있다. 마리나 비치에 위치한 도마기념교회는 1504년 포르투칼 사람들에 의해 건립된 것을 1893년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한 것이다. 교회 바로 옆 박물관의 지하 1층에는 도마의 무덤이 보존되어 있고, 도마순교 1900년을 기념해 인도정부가 발행한 기념 우표 등 인도선교의 역사 자료들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 첸나이 시내를 벗어나 남쪽으로 20여 분을 가면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Tomas Mount(도마 산)가 있다. 이곳은 도마가 순교한 곳이라고 전해진다. 이곳에도 마리나 해변에 있는 교회보다는 작지만 순교기념교회가 세워져 있고, 내부의 십자가에는 도마의 뼛조각이 담긴 십자가와 순교 당시를 그린 성화 등 많은 자료가 보존 돼 있다. 또한 여기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위치한 Little Mount(작은 언덕) 라는 곳에는 도마가 숨어서 기도했다고 전해지는 기도굴이 있다. 이 동굴에는 자그마한 손자국처럼 파인 바위가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사도 도마의 손자국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동굴 위쪽에는 도마가 마셨다는 샘물이 남아 있다. 평일에도 불구하고 인도 현지인들이 이곳을 찾아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인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현재진행형으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도마의 순교가 선교의 씨를 뿌려 지금도 인도에는 기독교 인구가 적지 않다. 기독교인의 수가 약 2400만명을 상회하여 인도 인구의 2.4%를 차지하고 있다. 인도 전역에 분포되어 있지만, 특히 남인도와 북동부 지역에 집중돼 있다. 인도의 교회들은 학교와 병원 등을 운영하며 인도 발전과 복음화에 기여하고 있다. 첸나이(인도)=글 사진 / 김용두 기자
  • 2016.07.17 / 김용두 기자

    ⑤ 미국 시카고 록펠러기념교회
  • 아름다운 찬양이 깃든 교회 8565개의 파이프로 된 파이프오르간과 72개의 청동 종으로 구성된 카리용으로 교회 찾은 이들에게 찬양의 아름다움 선사 1890년 석유 재벌 록펠러의 기부로 설립된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는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위치한 사립대학이다. 2014년, 2015년, 2016년 미국의 시사지 유에스 뉴스앤드월드리포트(US News and World Report) 대학(학부)부문 전미 순위 4위에 랭크되어 있는 미국 중부지역의 대표적인 명문대학이다. 이 시카고대학교에는 히치콕홀, 로비하우스 등 유명 사적들이 있는데 무엇보다 학교 내 우뚝 솟아 있는 록펠러 기념 교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처음 세워졌을 당시 ‘대학교회’라 불렸지만 록펠러 사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록펠러 기념 교회로 명명하게 됐다. 건축가 버트램 굿휴의 설계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이 교회는 유명 조각가 리 로리와 울릭 엘러후젠이 조각한 약 70여 개의 예수와 성인들의 조각이 교회 외벽을 장식하고 있다. 교회 내부로 들어가면 화려한 발코니와 오르간이 눈에 들어오는데 목각사 알로이스 랭의 작품이다. 천장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벽화가인 힐드레스 메이어의 천장 벽화를 비롯해 아름다운 스테인글라스 등 교회 특유의 아름다움이 녹아져 있다. 1700여 명 수용 가능한 이곳에서 예배는 물론 졸업식, 결혼식, 음악회 등이 열리기도 한다. 파이프오르간은 유명한 오르간 제작자인 E.M. 스키너의 작품으로 무려 8565개의 파이프로 이루어져 있다. 1928년 11월 1일 2500여 명의 청중들 앞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정기적으로 연주되는 헨델의 ‘메시아’를 들은 관광객들은 아름다운 연주에 매료되어 연주가 끝날 때까지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된다고. 록펠러기념교회에 파이프오르간과 함께 카리용이 유명하다. 카리용이란 틀에 고정된 23개 이상의 청동 종으로 이루어진 악기를 말한다. 이 교회에는 1932년에 총 72개의 종으로 된 카리용이 설치되었으며 이는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처치에 있는 카리용(총 73개)과 함께 세계 최대 규모 카리용 중 하나다. 큰 종의 무게는 약 1만6750㎏에 달한다. 카리용에 아름다운 종소리를 듣고 싶다면 6월 26일부터 8월 7일까지 매주일 오후 5시∼6시에 진행되는 ‘더벨스오브섬머(The Bells of Summer)’를 놓치지 말자. 올해로 51번째 시즌을 맞이한 이 연주회는 록펠러기념교회만의 오랜 전통 중 하나다. 시카고=글 사진 정승환 기자
  • 2016.06.19 / 정승환 기자

    ④ 애틀랜타 에벤에셀침례교회
  • 비폭력 흑인 해방 운동가 ‘마틴 루터 킹 Jr. 목사’ 대를 이어 사역했던 교회와 기념관, 생가 보존 방문자들 기독교 정신 입각한 비폭력 정신 되새겨 애틀랜타는 미국 조지아 주의 주도로 미국 남동부 최대 도시이다. 애틀랜타는 1860년 노예 제도 폐지가 발단이 된 남북전쟁의 격전지로 지금도 인구의 40% 정도가 흑인이다. 애틀랜타가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의 흑인 목사로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븡사진)목사 때문이다. 여전한 인종 차별에 시달려야 했던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55년 ‘몽고메리 시에서 운영하는 버스에 흑인은 탈 수 없다’는 규칙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 뒤로도 계속하여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켜 전국의 흑인들을 지도하다 몇 차례에 걸쳐 투옥된 바 있다. 킹 목사가 1963년 8월 워싱턴에서 20만 명이 모인 인종 차별 반대 집회를 열고 외쳤던 연설문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킹 목사의 연설은 케네디 대통령의 민권법안 통과의 실마리를 마련했다. 킹 목사는 흑인들의 정신적인 기둥으로 추앙받는 비폭력 운동의 지도자로서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암살 당했다. 애틀랜타 다운타운 인근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를 중심으로 그가 사역했던 교회, 그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념관 등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역사 지구가 조성돼 있다. 역사 지구에서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에벤에셀침례교회(Ebenezer Baptist Church)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에벤에셀침례교회는 애틀랜타 흑인 커뮤니티의 중심교회였으며 킹 목사의 부친이 시무했던 곳이다. 3대째 내려오는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킹 목사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1948년 모어하우스대학 및 펜실베니아주 체스터의 크로저신학교, 보스턴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에벤에셀침례교회에서 사역하기도 했다. 529명을 한번에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인 이 교회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운동을 배우려는 이들의 발길이 매일 이어지고 있다. 교회 옆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생애와 사역, 비폭력 운동 활동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기념관이 2층 건물로 세워져 있다. 기념관 앞으로는 풀(Pool)이 있는데 킹 목사의 유해가 있는 석관이 풀 안에 안치돼 있다. 기념관에서 위쪽으로 걸어서 1분 남짓 거리에는 킹 목사의 생가가 보존돼 있으며, 기념관 건너편에는 방문자센터, 새로 신축된 에벤에셀침례교회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지역 일대는 국립 역사보존 지역으로 지정돼 있어 정의를 위해 일생을 바친 미국의 흑인 해방 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정신을 후대에 가르치고 있다.
  • 2016.05.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베를린 돔 교회(독일 베를린)
  • 세계 대전의 아픔을 품은 교회 전쟁의 흔적 남아 있는 외벽과 상반된 화려한 내부 장식 독일은 우리 한반도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이라는 아픔을 겪었다는 동질감과 동시에 우리보다 앞서 통일을 이루었다는 부러움이 교차하는 나라다. 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기쁨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수도 베를린은 그 자체로 역사를 담은 박물관이다. 베를린은 1701년 프로이센왕국의 수도로 시작해,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첫 통일된 독일인 신성 독일제국의 수도가 됐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동서베를린으로 분할되기도 했다. 1990년 동서독이 하나의 독일로 통일되면서 수도로서의 베를린 위상을 되찾았다. 베를린의 오랜 역사와 함께 많은 유적들이 도시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비롯해 독일연방의회의사당, 전승기념탑, 샤를로텐부르크성 등 많은 랜드마크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베를린 돔 교회는 여행자들에게 필수코스로 사랑받는다. 베를린의 주요 랜드마크를 지나기 때문에 여행자들의 관광도우미라 불리는 시내버스 100번을 타면 어느새 베를린에서 가장 큰 교회인 베를린 돔 교회를 만나게 된다. 처음 교회를 보면 그 크기에 압도되지만 외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쟁의 영향으로 불탄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인해 부서진 교회를 재건하긴 했지만 기존의 화려함은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베를린 돔 교회는 그 특유의 민트색돔 지붕과 함께 세밀한 장식들이 다른 교회에서 보기 어려운 특유의 멋을 자랑하고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금 등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식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스테인드글라스와 천장의 모자이크화 그리고 7269개의 파이프로 이루어진 파이프오르간까지 이 곳을 방문한 사람들을 연신 놀라게 만든다. 이곳에는 종종 오르간 콘서트가 열리기도 한다. 교회 지도자들과 정부 지도자들이 기둥마다 새겨져 있는데 실제 이들의 키는 다르지만 교회와 정부의 평등을 상징하기 위해 키를 비슷하게 조각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베를린 돔 교회의 역사와 이곳에 잠든 황제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에 대한 이야기들을 교회 곳곳에 설치된 영상안내기를 통해 접할 수 있다. 베를린 돔 교회는 원래 1700년대 프라이센 왕 가문의 묘지 용도로 지어진 교회다. 그래서 지하로 내려가면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의 유해를 비롯해 많은 유해들이 있다. 계단을 따라 옥상으로 가면 베를린 시 전경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이 곳 전망대에서 베를린의 동서남북을 볼 수 있다. 인근 박물관들과 TV타워 등 볼거리가 많다. 다시 밖으로 나오면 교회 바로 앞에 루스트가르텐이라고 하는 넓은 잔디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 지어질 당시 베를린 돔 교회는 성당으로 지어졌지만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교회(루터교)로 사용되고 있다. <이 정도는 알고 가자!> 베를린돔교회 인근에는 5개의 박물관이 있다. 구 박물관(Altes Museum)은 루스트 가르텐 바로 앞에 위치한 직사각형의 2층식 박물관으로 웅장한 외관이 참 아름답다. 주로 그리스 유물과 옛 선사시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신 박물관(Neues Museum)은 주로 이집트 미술과 고대 미술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이 건물 외벽만 남기고 전부 전소되었고 이후 재건했다. 페르가몬 박물관 (Pergamon Museum)은 메소포타미아 유물과 함께 페르가몬 지역의 그리스 유적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구 국립미술관(Alte National Gallerie)은 주로 19세기 회화 작품들과 미술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다. 보데 박물관(Bode Museum)은 주로 조각, 비잔틴 미술들을 중점적으로 전시한다. 박물관을 방문할 계획이라면 반드시 인터넷으로 예매하도록 하자. 줄을 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으며 가격도 저렴하다. 글 정승환 기자/사진제공 김한수 선교사
  • 2016.04.17 / 정승환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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