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성지 ⑤ - 예루살렘
  • 예루살렘 성벽과 문 현재의 구시가 성벽은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대제가 축조하였다. 둘레 약 4㎞의 성벽에는 8개의 문이 있다. 서쪽의 자파문(Jaffa Gate), 북쪽의 다마스쿠스문(Damascus Gate), 헤롯문 (Herod’s Gate), 동쪽의 라이온문(Lion’s Gate, 스테파노 문)과 황금문(Golden Gate, 아름다운 문), 남쪽의 분문(Dung Gate)과 시온문(Zion Gate) 등이다. 이중 황금문은 잠겨 있다. 가장 번화한 자파문은 옛날에는 화물이 통과하던 항구였다. 시온문은 1889년 노트르담 교회와 그리스도교 지구를 연결하기 위해 세워진 문이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향해 세워졌다고 해서 붙여진 다마스쿠스문은 아랍인들로 항상 붐빈다. 헤롯문은 빌라도와 함께 그리스도교를 탄압한 헤롯의 저택 근처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분문은 쓰레기를 운반한 데서 연유했고, 사자 4마리가 문에 새겨져 있는 라이온 문(사진) 앞에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켰다고 한다. 글·이소흔 / 사진·오정선 기자
  • 2007.04.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우리나라 최초의 신사참배거부운동
  •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 강경성결교회에 기념 조형물 세워 ‘자기들은 헛 신에게 절하는 것이 무리한 미신이며 또한 하나님 압헤 죄 됨을 깨닷고 신앙의 주를 굿게 직히여 절하지 아니하엿더니’ 기독교잡지 ‘활천’(1924.10)에 기록되어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사참배거부운동에 관한 기사에 일부이다. 1910년 우리나라는 을사조약을 맺음으로서 국권을 잃은 이름만 남은 나라가 되어버렸었다. 더욱이 일본은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곳곳에 그들의 신사를 세우고 한국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이는 충청남도 논산에 위치한 강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강경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터라 1924년 이전에 이미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 특히 일제는 강경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옥녀봉에 신사를 건립했다. 옥녀봉은 유적지인 동시에 3·1운동 만세시위 현장이었기에 강경 사람들은 더욱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었다. 일제는 신사참배에 강경의 모든 학생들을 동원했다. 그런데 강경공립보통학교의 교사 김복희와 학생 57명이 신사참배를 거부한 것이다. 이들의 거부이유는 위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신사참배를 강행한 조선총독부는 결국 교사와 학생들을 모두 학교에서 파면, 출교시키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1925년 조선신궁 건립 등 신사참배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려했던 일본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10여년 후퇴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유일하게 어린이들에 의해 이뤄진 신사참배 거부운동이자 신앙적, 민족적 저항이 결합된 운동으로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 것으로도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운동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강경성결교회에서도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것으로 일각에서는 천주교에서 주도한 운동으로 주장되었었다. 하지만 강경성결교회 담임 신영춘 목사가 활천과 동아일보의 옛 기사를 통해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임을 밝혀내고 지난 9월에는 ‘최초신사참배거부 선도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강경성결교회의 앞마당에 설치된 기념비는 높이 5m로 김복희 교사와 학생들이 일제의 신사참배에 거부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오직 민족의 구원은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영춘 목사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오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할 수 있어서 기쁘다”며 “앞으로 우리나라의 최초신사참배거부운동이 일어난 이곳이 우리나라의 민족교육의 장은 물론 영성의 훈련의 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 2006.11.26 / 정승환 기자

    철원 장흥교회
  • 현존하는 철원지역 최초의 교회 서기훈 목사 순교자비 있어 일제의 굴레에서 해방된 직후 남한과 북한과의 정치적 경계선인 38선. 38선이 그어지면서 북측지역이 된 철원에는 사랑의 실천과 체험신앙을 중시하는 감리교가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철원에는 일제시대 항일운동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꿋꿋하게 마을과 신앙을 지킨 순교자들의 숨결이 남아있다. 이 철원 지역에서 현존하는 최초의 교회인 장흥교회. 서기훈 목사의 순교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82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한 서기훈 목사는 한학을 배우던 중 기독교에 입교했다.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한 후 23세되던 1914년 6월, 남감리회에서 전도사로 임명받았다. 서 목사는 철원 원산 등지에서 사역했다. 1.4후퇴 때 공산군이 철원을 점령할 당시 서 목사는 장흥교회 청년회가 주축이 된 대한애국청년회라는 반공 우익 단체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50년 12월 31일 공산당 정치보위부에 잡혀간 서 목사는 총살당함으로 70세에 순교했다. 당시 증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 목사에게는 삶의 길이 충분히 보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1.4후퇴 때 교인들이 남하할 것을 권하자 서 목사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목자가 양떼와 생사를 같이 할 것이거늘 나 혼자 살란 말인가”가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틀후 공산군에게 연행됐다. 서 목사는 한국전쟁이 난 후에도 피난길에 나섰다가 양떼를 두고 갈 수 없다며 되돌아와 매일 새벽종을 울렸다고 한다. 또한 서 목사는 공산군과 마을 청년들 사이에서 화해를 도모했다. 양측간의 살상과 분쟁 속에서 서 목사는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둘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목숨을 건 일이었다. 서기훈 목사의 묘비에는 ‘死於當死 非當死 生而求生 不是生’라고 적혀있다. ‘당연히 죽을 때 죽는 것, 이는 죽음이 아니오, 살아 있으면서 살기를 바라는 것, 이는 살아 있음이 아니니라’는 뜻이다. 이 글귀에서 서기훈 목사의 신앙관과 순교의 의지가 느껴진다. 거룩한 희생을 선택한 서기훈 목사는 분명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은 한 알의 밀알이었다. <사진제공=김영태 집사>
  • 2006.10.29 / 이소흔 기자

    “1원씩 모아 건축했어요”
  • 주문도 서도중앙교회 강화에서 최초로 설립된 교회 서도중앙교회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강화에서 최초로 설립된 교회다. 1902년 설립되었으니 100년의 역사를 훌쩍 뛰어넘는다. 1997년 7월 인천시 문화재 자료 14호로 지정된 이 교회의 원래 이름은 진촌교회. 정면에서 보면 2층 종루(鐘樓) 형태의 지붕을 갖고 있으며, 본당 쪽은 일반 한옥 형태로 팔각지붕이다. 우리 전통 목조 건물의 가구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교회가 지어진 모습이 멋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1923년에 교인들의 건축헌금으로 지어진 한옥 예배당으로, 백과사전을 뒤져보니 건축형식은 2고주(高柱), 5량가(梁架)의 가구구조를 가진 팔작지붕에 홑처마집이라고 기록되어있다. 평면 구성은 중세 초기 서양교회 형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창의 구조에 숨겨진 과학원리다. 통풍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좌우 창은 서로 어긋나게 설치했다. 성전을 지을 때 얼마나 신경을 쓰고 정성을 들였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건축 기술이나 미적으로 평가한다면 그 가치가 그다지 크지 않지만, 한국 전통 목조건물의 가구 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교회를 건축했다는 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더 큰 의의는 신앙선진들의 믿음이다. 100여 년 전 주문도에 복음이 들어온 후 성도들은 선교사들의 도움 없이 교회를 지었다.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형복 목사는 “당시 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650여 성도들이 1원씩 건축헌금을 드려 교회를 지었다”고 했다. 그렇게 7000원이 모였으니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7억원 가량 된다고 했다. 옛 사진을 들춰보니 돈을 버는 경제인구는 적고 어린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 성도들의 헌신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더욱이 섬에 교회건축에 필요한 목재라든가 기와가 있지 않으니 모두 육지에서 들여와야 했다. 박 목사의 설명을 들을수록 당시 성도들의 수고가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그런 수고와 땀흘림이 있었기 때문일까. “주문도 주민의 90% 이상이 교회에 나온다”고 했다. 종탑 아래 현판에는 지금의 이름으로 교회명칭이 바뀐 것은 1978년이다. 80년이 넘은 이 교회는 지금도 새벽예배 장소로 이용된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좌우로 두 곳인데 오른쪽 문은 여자가, 왼쪽 문은 남자가 이용하도록 되어있다. 특별히 달라 보이는 것도 없는데 ‘왜 그럴까’ 궁금해 물어보니 박 목사는 “예전의 습관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들어가는 문뿐이 아니었다. “지금도 이곳 성도들은 강단에서 볼 때 오른쪽 기둥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남자들이 앉고, 왼편에 여자들이 앉는다”고 했다. 복음의 토착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옛 습관이 정겹다.
  • 2006.09.24 / 주문도=박재형 기자

    철원제일감리교회
  • 시대적 아픔 안고 기도했던 교회 (철원=글 오정선, 사진 김용두 기자) 철원은 해방전까지 김화, 평강, 포천, 연천을 잇는 선교의 중심지였다. 1937년 이 곳 철원에 세워진 철원제일감리교회는 당시 500여 명 성도가 예배를 드릴만큼 규모가 컸다. 보리스(W.M Vories) 선교사에 의해 설계되어 이 지역 최초로 붉은 벽돌을 사용해 지어진 이 교회는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건립됐다. 1층에는 1개의 소예배실과 10개의 분반공부실이 있었고 2층에는 대예배실이 있었다. 그러나 철원제일감리교회는 역사의 변혁기에 일어나 무차별 공격으로 터와 건물 잔해만 남아있을 뿐 온전한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하지만 민족을 구하고 신앙을 지키려다 순교한 성도들의 순결한 정신만은 오늘까지 계승되고 있다. 이 교회는 일제 강점기 때 성도들에 의해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해왔다. 8·15 해방 이후에는 기독교 반공학생회 본거지로 사용됐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에 의해 철원지역이 점령되자 북한군 막사와 병동으로 사용되는 수모를 당했다. 400m 떨어진 곳에는 주민들의 수 많은 재산이 강제 동원돼 북한군에 의해 지어진 로동당사까지 있어 이 일대에 대한 북한군의 잔악성은 극에 달하기도 했다. 특히 북한군은 기도실로 사용되던 철원제일감리교회 지하실을 양민과 반공활동을 전개한 청년들을 고문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또한 퇴각할 때 이 곳을 학살의 공간으로 활용하여 충격을 더했다. 이 지역 탈환을 놓고 싸우던 중 공습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에서는 수십구의 시신이 쏟아져 나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하지만 이 곳 성도들은 우울한 시대적 현실앞에 민족과 교회에 대한 기도를 쉬지 않고 드렸으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선택, 우리에게 큰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현재 이 곳은 철원군청이 관리하고 있다. 교회 터 오른쪽에는 철원군청을 비롯해 인근 군부대, 광림교회, 상노감리교회 등의 후원으로 세워진 야외예배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은 순교자를 추모하며 통일을 기원하며 기도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 2006.03.10 / 오정선 기자

    성봉메모리얼채플
  • 한국 성결교단의 역사 쓴 이성봉 목사 기념 교회 수안보파크호텔 안에 위치, 이국적 분위기 물씬 24시간 개방해 투숙객, 지역주민들에게 복음전파 성결교단의 부흥사로 한국교회의 큰 획을 그은 故이성봉 목사(1900∼65)를 기념하기 위한 성봉메모리얼채플이 충주 수안보파크호텔 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 교회는 주변 경관이 뛰어난 지리적 위치 뿐 아니라 아름다운 조경이 갖춰져 있어 이국적 풍취를 느끼게 한다. 성봉메모리얼 채플은 이 목사의 셋째딸 이의숙(세이트제임스 대표) 권사가 사비를 들여 건축했다. 24시간 개방을 해 인근 주민들의 새벽기도 장소와 기독교 단체의 모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교회 안에는 이성봉 목사의 사진과 설교집, 관련서적 등을 비치해 놓은 도서 열람실이 있어 필요하면 누구나 가져갈 수 있다. 또한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모든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기뻐하라”는 ‘신본신앙’과 위대한 사랑의 승리를 노래하는 ‘아가페 사랑’ 친필 시는 이성봉 목사의 신앙관과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전한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1935년 평양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의 모습을 담고 있어 성령으로 충만했던 그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한다. 주일에는 오전 9시와 오후 3시에 두차례씩 예배가 드려지고 있다. 이상직 목사(호서대)와 정인교 목사(서울신대), 이덕식 목사(충주갈보리교회), 원로목사의 설교와 영상예배로 드려진다. 총 12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한 크기의 교회는 성경과 찬송 70권이 비치돼 호텔 직원과 투숙객, 인근 여행객들의 신앙을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2004년 10월에 준공한 이후 한 달에 400명 정도가 꾸준히 이곳을 찾고 있고 그동안 4건의 결혼식도 있었다고. 한편 서울신학대학교에는 이성봉 목사 기념 전시관이 있어 이 목사가 소장했던 성경과 가방, 수첩, 책 등 10여 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1925년 26세에 경성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해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이성봉 목사는 일본 선교와 만주 지방에까지 전도 여행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 회갑까지 천여 교회를 넘는 교회를 다니며 집회를 인도했고 ‘말로 못하면 죽음으로’라는 말을 남기며 열정적인 부흥회를 이끌었다. 이성봉 목사는 1961년부터 63년까지 교단의 화합과 부흥을 위해 480개 성결교단의 교회를 순방 집회했다. 결국 1965년 7월 23일, 분열된 두 개의 성결 교단에서는 합동 총회가 개최됐고 이곳에서 이 목사는 “주를 사랑하자”는 설교를 마지막으로 66세를 일기로 40년간의 부흥강사 생애를 마쳤다. 결국 그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부흥사로서 한국의 무디라는 평을 받으며 한국교회 역사에 큰 획을 남겼다.
  • 2006.03.09 / 이미나 기자

    111년의 역사 이룬 연동교회
  •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의 요람 역할 게일 초대 목사 교육 문화 다방면 활동 서울 종로 5가에 위치한 연동교회는 11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이다. 오래된 역사만큼 우리나라 역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연동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한 게일 목사는 선교사, 교육가 그리고 저술가로 다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게일 목사는 일제의 침탈이 심하던 1900년 연동교회에 부임했다. 당시 감옥에 갇혀 있던 이상재, 이승만, 유성준, 홍재기, 안국성 등 민족지도자들을 심방해 하나님 앞으로 이끌었다. 연동 교회에 부임하기 전에는 평신도선교사로서 우리나라 곳곳을 누비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했다. 그는 폐당된 민로아학당의 맥락을 이어 예수교중학교(현 경신고)와 연동여학교(현 정신여고)를 세우고 황성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는 등 우리나라가 선진문화를 따라 갈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많은 책을 저술했는데 최초의 한영사전을 비롯해 영문저서 9권, 한국어 저서 30권 등을 저술했다. 특히 외국에 우리나라를 소개하기 위한 책을 많이 저술했으며 현재 대부분의 책들은 워싱턴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연동교회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1913년, 1918년 그리고 1933년에 그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 연동교회 안에는 111년의 역사가 담긴 역사관이 있다. 이곳에는 3·1운동 후 대동단 사건과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활동 등에 연동교회 성도들이 사용했던 태극기를 비롯해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역사관 내 유물들을 통해 과거 기독교인들의 생활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일제에 대항하는 뜨거운 독립정신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교회 앞마당에 있는 게일 목사 흉상과 1950년대 종들은 고대문학과 지식에 무지했던 우리나라 청년들을 질타하며 민족교육과 하나님의 사랑을 부르짖던 게일 목사를 기억하게 만든다.
  • 2005.12.09 / 정승환 기자

    최초의 조직교회 새문안교회
  • 1887년 설립 118년 긴 역사 언더우드기념비 등 유물 간직 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서울 정동의 한 한옥에 14명의 한인들이 모여 언더우드(H. G. Underwood)목사의 설교로 예배를 드린 것을 시작으로 긴 역사의 문을 열었다. 새문안교회라는 명칭은 광화문 서편의 돈의문, 즉 새문안에 있다는 의미에서 새문안교회라고 하였다. 초대 담임목사인 언더우드 선교사는 하나님의 음성을 쫓아 1885년 5월 한국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 후 1886년 5월 교회 내에 경신학교의 전신인 고아학교 언더우드학당을 설립하여,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지도자인 송순명, 안창호, 김규식 등을 배출하였다. 또 새문안교회를 2명의 장로를 선임, 당회를 구성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교회로 만들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물론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그가 세운 경신학교는 지금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이 된다. 언더우드 선교사뿐만 아니라 뒤를 이어 아들인 원한경 장로 등 언더우드 일가는 대를 이어 한국에서 복음을 전했다.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 일가와 함께 한국의 역사를 헤쳐 나갔다. 일제강점기에는 교회종을 빼앗기기도 하였고 신사참배를 강요당하기도 했었다. 현재 새문안교회는 종로구 신문로 1가에 자리 잡고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시작했던 그 예배당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기념관 지하에 위치한 사료관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진들과 당시 예배당의 모습 등 교회역사에 관련한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사료관 앞에 있는 언더우드 기념비와 언더우드의 친필 편지 등을 보면 언더우드 선교사가 얼마나 열심히 복음전파에 노력했는지 우리나라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 2005.11.11 / 정승환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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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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