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해
요한복음 85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13:1∼20)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요 13:8∼11) 예수님께서 왜 발을 씻어 주시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베드로는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라고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상관’이라는 단어는 헬라 원어로 ‘메로스’이며, 그 뜻은 ‘분깃’, ‘몫’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과 상관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깃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그들에게 보혈로 죄 씻음을 받은 사람들만이 당신과 연합된 관계를 이루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분깃을 상속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데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알아차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님의 행동을 거절하던 자신의 태도를 버렸습니다. 오히려,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갑작스레 자신의 태도를 바꾼 까닭은 그의 성급하고 다혈질적인 성격과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고자 하는 사랑과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행위와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기에 ‘발뿐 아니라 온몸을 씻어 달라’는 엉뚱한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목욕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기에 다시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라도 생활 속에서 죄를 지을 수 있고, 세상적인 말이나 생각으로 더럽혀지기 쉽기에 날마다 회개하고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발을 씻어야 함’을 강조하셨는데, 이는 생활 가운데 죄 된 행위로 더러워진 것을 무시로 회개하여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9∼1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었을지라도 즉시 주님 앞에 나아가 정직하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 깨끗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강해’(서울말씀사)에서 요약발췌
  • 2016.12.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요한복음 84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13:1∼20)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3∼7)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거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의 영광과 구원의 즐거움, 그리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을 보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히 12:2) 예수님께서는 자기 일신의 편안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온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자원하여 자기의 몸을 내어 주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맡고 이 세상에 왔다는 것과 장차 사명을 다 마치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할 사명을 품고 인간으로 오셨지만 장차 사명을 모두 완수한 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영광을 받을 것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당시 유대는 거리에 먼지가 많았기 때문에 손님을 초청하면 그 집의 하인이 손님들의 발을 씻겨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찬을 위해 마가 다락방에 모였을 때 그곳에 발을 닦아줄 종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발 닦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누가 제일 큰 자인가?’ 하며 다툴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친히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모두 망연히 보고만 있을 뿐 한마디 말도 못하고 있었을 때, 성격이 급하고 열정적인 베드로가 항의하듯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여, 제가 무엇이라고 저 같은 비천한 자의 발을 씻으시나이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데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3∼45)고 하신 말씀을 손수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써 ‘겸손’과 ‘섬기는 삶’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구속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강해’(서울말씀사)에서 요약발췌
  • 2016.11.06 / 민경환 기자

    요한복음 83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요 13:1∼20)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1∼2)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해방된 날을 기념하여 해마다 종교력으로 정월 14일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인방에 그 피를 바르고 허리에 띠를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은 채로 그 고기를 불에 구워서 내장까지 남김없이 급히 먹었습니다.(출 12:1∼28). 그런데 성경은 유월절 어린 양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29, 고전 5:7, 벧전 1:19)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어린양을 희생 제물로 드리고 애굽에서 해방된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마귀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월절 어린 양과 같은 희생 제물이 되어 인류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실 때가 이른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모진 고통과 죽음을 기꺼이 받으시기까지 자기의 사람들인 제자들과 장차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이 찢기고 피가 쏟아지는 죽음의 고통을 받으시면서도 끝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버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것은 바로 이러한 무한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시고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영적인 세계는 생각 속에서 만납니다. 우리는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고 마귀를 만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하듯이, 마귀도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각은 영적인 만남의 광장이요, 하나님과 마귀가 역사하는 본거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복음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인 구원을 받으려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인데, 이것은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을 바꾼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아직은 실제로 보지 못하고 손으로 만져보지 못했지만 생각으로 그것이 이루어진 것을 바라보고 믿는 것입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의 입을 크게 열라는 것이며,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 3:20)라는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말씀의 생각으로 충만하면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고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 처해 있을지라도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하나님의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생각대로 역사해 주셔서 우리의 환경과 운명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담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요동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요한복음강해’(서울말씀사)에서 요약발췌
  • 2016.10.3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요한복음 82
  • 예수님의 사역 목적(요12:37-50)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요 12:37∼38) 성도들은 표적을 보면 더욱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완악하고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은 표적을 보아도 그것을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라고 일축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표적은 성도들에게만 큰 도움이 될 뿐, 불신자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표적을 보이셨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반응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 53:1)라고 예언했었는데 이 예언이 약 700년이 지난후에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여기서 ‘야훼의 팔’이란 예수님의 표적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대로 유대인들은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고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그것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완악한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그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 실례로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기적을 보고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지 않고 행하다가 결국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으므로 인간은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느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결정되므로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고 선택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인생의 성공자가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거부하고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인생의 실패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믿음 안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완악함을 버리고 겸허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 6:9∼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을 버리고 구원 받기를 원하셔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그들을 권면하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지대로 악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뜻에 역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회개하기를 끝내 거부하고 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회개하여 회복되지 못하도록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은 그들의 조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보였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경고를 인용하여 상기시킴으로써 유대인들의 불신앙의 근본적인 원인이 그들 스스로에게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완성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예수님 자신의 영광이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강해’(서울말씀사)에서 요약발췌
  • 2016.10.02 / 최정숙 기자

    요한복음 81
  • “죽음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요 12:20~3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4∼25)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히 9:27). 한정된 인생을 살다가 어느 한 순간 맞게 되는 죽음은 인생의 허무와 한계를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람과는 달리 영생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는데, 이는 ‘세상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죄인들만이 받는 십자가형을 받아 모진 고통과 수모를 당하시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에게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갈 3:13)가 예수님께는 영광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싹이 트고 성장하여 이삭을 내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연 법칙을 들어 자신의 죽음의 필요성을 설명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알의 밀’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시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을 심어서 인류를 낳으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심어 수많은 영혼을 추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아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그 뜻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알의 밀이 되어 희생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은 육신의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적인 생명을 보존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삽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에 취하여 일신의 쾌락과 만족을 추구하면서 살다가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을 사랑해서 육신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영적인 생명이 죽어 버리고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혼의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의 소욕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생명의 원천이신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잊지 않으시고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라고 기도하심으로, 오직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셨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껏 이 세상에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신 것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또한 장차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절정을 이루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하셨다가 다시 승천하시기까지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강해’(서울말씀사)에서 요약발췌
  • 2016.09.04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요한복음 80
  •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 (요 12:12∼19)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3)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으신 이튿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이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물론 원근 각지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유대인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리의 상징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사람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지난 3년 반 동안 사역하시면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과 가르치신 교훈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불과 얼마 전에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을 들었고, 또한 그들 중에는 소생한 나사로를 직접 만나 본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맞는 그들의 환호의 열기는 한껏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열광적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들의 행동은 오해에서 촉발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신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풍당당한 왕의 모습이 아닌 겸손한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했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슥 9:9).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길가에 쏟아져 나와서 환호하며 대대적인 환영을 한 이유도 몰랐으며,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까닭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무지했던 그들은 훗날 부활하신 예수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으며(눅 24:25∼27, 44∼49),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 침례를 받고 난 다음 성령의 깨우침과 기억나게 하심으로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놀라운 광경을 본 무리는 자신들이 직접 목격한 일을 계속 증언했습니다. 이들이 전하는 증언을 듣는 자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이러한 일이 며칠째 계속됨으로 인하여 예루살렘 전체가 술렁거렸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소문의 주인공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말이 퍼지자, 사람들은 너나없이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맞으러 나온 엄청난 인파가 환호하여 내뿜는 열기로 삽시간에 뜨거워졌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보는 즉시 고발하라는 체포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뜨겁게 환영하며 따르는 것을 보자 매우 당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말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이 무리를 지어 나가서 환호하며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은 이제껏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해 꾸몄던 자신들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매우 격분했습니다. ※‘요한복음강해’(서울말씀사)에서 요약발췌
  • 2016.08.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요한복음 79
  • “믿음으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 (요 12:1∼11)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 12:3)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근교 베다니 마을에 오셨습니다. 베다니 마을은 ‘고난의 집’, ‘가난한 집’이라는 뜻을 가진 그 이름에 걸맞게 사회에서 소외당한 가난한 천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예수님께서 얼마 전에 죽은 나사로를 소생시켜 주셨던 곳이기도 합니다(11:1∼44).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에 오시자, 온 마을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마다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던 마르다는 나사로를 살려 주신 것이 너무도 감사하여 정성과 솜씨를 다하여 식사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적의 주인공인 나사로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잔치 석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자신이 모아 놓은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당시 유대 처녀들은 향유를 사서 옥합에 모아 두었다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갔습니다. 예수님께로 다가온 마리아는 그 귀한 옥합을 서슴없이 깨뜨리고 한 근이나 되는 나드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나드 한 근은 약 340g으로, 당시 노동자가 1년 동안 일해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인 300데나리온에 거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오라비 나사로를 소생시켜 주신 예수님께 대한 감사를 표시하고 싶은 마리아에게는 아무리 비싸고 소중한 것일지라도 조금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나드 향유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아낌없이 예수님께 부은 다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발을 씻겨 주는 것은 노예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대의 풍습을 참작할 때,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린 마리아의 행위가 얼마나 겸손하고 헌신적인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느닷없는 행동에 모두 놀란 상황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가 마리아를 꾸짖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께 부을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데 썼더라면 좋았을 뻔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이 말은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럴 듯하게 들리게 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요, 합리화에 불과했고, 실제로 그의 마음속에는 재물에 대한 욕심만이 가득했습니다. 이처럼 재물에 눈이 먼 가룟 유다는 며칠 후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넘김으로써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저버리고 저주받은 배신자로서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지고한 헌신의 뜻으로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린 자신의 행동이 지탄을 받자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변호하여 주셨습니다.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여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 마리아의 이름과 그 아름다운 행실은 성경을 통해 영원토록 기억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강해’(서울말씀사)에서 요약발췌
  • 2016.07.3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요한복음 78
  • “기적에 대한 두 가지 반응” (요 11:45∼57)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요 11:45∼46)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 나오는 것을 직접 목격한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믿지 않고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리새인들에게 보고한 동기나 의도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들의 보고 내용은 바리새인들의 가슴에 예수님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부채질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식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즉시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부신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속수무책인 채로 적대감과 질투심만을 키우고 있던 그들은 더 이상 방관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극도의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통렬히 절감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두자니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것 같고, 또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반란을 일으키고 그 결과 로마인들이 와서 땅과 민족을 빼앗아갈 것 같으니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우려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웠고 당시 로마의 속국으로 로마 총독의 통치를 받으며 자치권을 허용 받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백성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로마에서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보내 그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까지 박탈할지 모른다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별 뾰족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계속 우려만 하고 있을 때 그중에 한 사람인 가야바가 나섰습니다.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는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움직이는 손길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야바는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며 살인을 선동하는 무서운 발언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야바의 이 말 뒤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습니다. 마치 탐욕적인 발람의 입을 통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흘러나왔듯이(민 24:17) 가야바의 냉소적인 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메시아 구원 사역이 예언된 것입니다. 가야바는 유대민족 하나에 국한하여 편협한 안목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획책했으나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은 온 민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민족 뿐 아니라 세계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임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세상의 어떤 것도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역사의 물줄기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산헤드린공회에서 예수님을 잡아 처형하기로 결정함으로 유대인들의 박해와 적대감이 공공연해지자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을 아신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에브라임으로 피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30㎞ 떨어진 에브라임으로 가셔서 앞으로 닥칠 고난을 준비하시며 폭풍전야의 평온함 같은 휴식기를 가지셨습니다. ※‘요한복음강해’(서울말씀사)에서 요약발췌
  • 2016.07.03 / 임지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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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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