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형근 목사의 성령신학
12 - 순복음성령신학의 윤리
  • < a> 사회의 약자 돌보고 관심 갖는 영성 성령 체험통해 전인적 변화 가져와 기복신앙 아닌 고차원적 윤리 실천 순복음의 성령신학이 삼중적 축복에 기초한 신학이기 때문에 기복 신앙을 조장한다는 것은 몇 가지 점에서 오해이다. 순복음성령신학의 윤리적인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령 충만한 체험을 강조하는 순복음성령신학은 인간의 전인격적인 변화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이다. 19세기 말 오순절 성령 운동이 일어났을 때 웨슬리적 오순절주의자들은 (Wesleyan Pentecostals) 성결(완전성화)을 체험한 자들만이 오순절적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실제적으로 설득력이 없었다. 왜냐하면 완전성화를 체험하지 못한 자들 가운데서도 성령 세례의 역사가 많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의 참다운 회개와 변화는 성령 세례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체험적 증거들이 있어왔다. 성령 충만한 체험을 통한 삼중축복을 강조하는 순복음의 신앙은 지극히 윤리적이다. “영혼이 잘 된다”는 데에는 자기 희생과 섬김의 윤리가 전제되어 있으며(요삼 5∼8절),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체험한 자들은 희생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겼다(행 2:47). 오직 복을 얻기만 구하고 자신의 인격적 변화에는 관심이 없는 무속적인 신앙은 기복 신앙이지만, 성령 충만과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으로 말미암아 전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삼중 축복의 신앙은 지극히 윤리적인 기독교 신앙이다. 둘째, 순복음성령신학의 윤리성은 성령 충만의 체험이 나눔과 공생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성령의 충만을 체험한 초대교회는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행 2:44∼45).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재물의 주인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초대교회는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행 4:32).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은 사랑과 희생과 나눔을 통하여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갔다. 초대교회에 핍절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모든 사람이 다 물질적인 복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 받은 자들의 사랑과 희생의 나눔을 인하여서였다. 순복음의 영성은 없는 자를 돌보고 약자에게 관심을 갖는 영성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가난한 자와 포로 된 자와 눈먼 자와 눌린 자’를 위한 복음이었다. 조용기 목사 메시지의 특성 역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메시지였다. 조용기 목사는 “영성이란? 기도운동입니다” 「교회성장」2003년 5월호, 20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말씀처럼 저소득층의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항상 필요한 존재입니다. 저소득층에 대한 생존 메시지가 언제나 필요하기 때문에 저는 이 메시지에 중점적으로 관심을 두고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기복적인 신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타적이고 희생적이며 헌신적인 신자로 만든다. 이런 점에서 전인적 축복과 체험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순복음성령신학은 강한 윤리성을 지니고 있다. 셋째, 오순절 성령강림의 기초가 십자가라는 점에서 순복음성령신학은 윤리적 삶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없이는 성령 충만도 없다. 또한 거꾸로 성령 충만은 십자가의 삶을 요구한다.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성령 세례의 의미는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는데 국한되지 않았다. 성령 세례/충만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고, 성령의 권능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능력이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복음 증거를 위해서 핍박 받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으며(행 5:41), 스데반은 순교로 십자가의 윤리를 실천하였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한 순복음 성도가 있다면 그들은 “성령 충만의 중요한 한 가지 의미는 자기 부인이다”는 점을 마음에 새길 줄 알아야 한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마음 한 구석에 우쭐한 마음을 가지고 “내가 이러저러한 은사를 받았으니 저 사람보다 더 신령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순종과 사랑, 협동과 단결은 사라지고 만다. 남을 섬기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를 내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되기보다는 오히려 분당이 생기기 쉽다. 분당의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교회였다. 고린도교인들은 성령이 충만하게 되자 상대방이 알아 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껏 방언을 말하였다. 그래서 예배의 전체적인 질서를 깨뜨리고 오히려 은혜스럽지 못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서로가 겸손하게 섬기며, 주를 위하여 순교의 자리까지 갈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함이다. 성령 충만은 우리로 하여금 기복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가장 고차원의 윤리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초대교회에서 구제의 문제로 인하여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 칭찬 듣는 신앙 인격을 가진 사람 일곱을 뽑았는데 이들은 모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었다(행 6:3).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삶을 그 신앙과 신학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삼는 순복음성령신학이야말로 신앙적 지식과 실천이 유리되지 않는 통전성 있는 신학이다.
  • 2004.12.04

    11 - 순복음성령신학과 영성
  • < a> 순복음 영성은 신앙과 실천의 통합 삼위일체 영성, ‘사랑 안에서 하나됨’ 그리스도 닮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영성은 원래 금욕, 명상 등을 통한 자기 부정의 삶을 추구하는 가톨릭 수도사들과 관계된 용어로서 개신교와는 좀 거리가 먼 주제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개신교 안에서도 영성에 관한 주장과 글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장신대의 오성춘 교수는 영성을 정의하기를 “누구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공산주의 사상을 실천하며 사는 것을 공산주의 영성이라고 한다(「영성과 목회」, 41). 그러나 영성에 대한 이러한 조작적 정의는 영성의 영적(종교적)인 특성을 충분히 부각시키지 못한다. 한편 엄두섭 목사는 영성의 영적인 면을 너무 극단적으로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영성이란 “신령한 능력 또는 초자연적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서, 영성생활이란 보통 사람은 감히 따라 하지 못할 초인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영성의 새벽」, 19). 그런데 비하여 순복음성령신학의 영성은 여러 가지 점에서 통전적이다. 첫째, 순복음성령신학의 영성은 신앙과 실천의 통합(integration)이라는 점에서 통전적이다. 영성이란 믿는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다. 순복음의 영성이란 신앙과 실천의 발란스를 맞추는 것이 아니다. 즉 적당히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균형을 맞추는 것은 믿음과 행위를 반반씩 나누어서 하는 것을 말하는데, 통합이라는 것은 믿는 바를 그대로 행함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순복음의 영성에서 중요한 것은 가슴의 열정과 사랑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삶 가운데 실천하는 것이다(신 11:13). 또한 순복음성령신학에서 지향하는 영성은 하나님과 인간을 겸하여 섬기는 영성이다. 순복음의 영성은 골방이나 기도원(수도원)만 찾는 영성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영성가들은 종종 세상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초기의 기독교 수도사들은 세상을 떠나서 은둔 생활을 하는 것이 영성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웨슬레에게 영향을 끼친 윌리엄 로오는 “학문은 믿지 못할 것이며, 휴식은 게으른 것이며, 문화는 세상과 가깝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순복음의 영성은 기도로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목숨을 버리사 구원하신 세상을 섬기는 영성이다(요 3:16). 성경은 “기독교인은 세상을 떠나서 살지 않는다”고 가르친다(고전 5:9∼10). 바른 영성은 세상을 떠나서 사는 영성이 아니라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영성이다. 셋째, 순복음성령신학에서 말하는 영성은 인격과 사역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영성이다. 전통적으로 영성이란 사역보다 인격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수도사들은 종종 은둔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에 영성 훈련의 초점을 맞추었다. 요한 웨슬레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기독교인의 완전은 ‘사랑’ 또는 ‘순결’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순복음 영성이란 내면적으로 성화된 삶뿐만 아니라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영성이다. 참다운 영성에는 경건의 능력이 경건한 삶에 동반된다(딤후 3:5). 거기에는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가 서로 무관하거나 유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순복음의 성도가 추구하는 성령 충만은 성도 자신과 교회 및 세상을 섬기는 영성이다. 마지막으로, 순복음성령신학의 영성은 신학적인 차원에서도 통전적이다. 순복음성령신학이 추구하는 영성은, 그것이 신학의 여러 가지 주제들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종합적이고 통전적인 개념을 지닌 영성이다. 첫째, 그것은 삼위일체적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성의 표본이 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성적 특징은 사랑 안에서의 하나됨이다. 둘째, 그것은 기독론적이다. 근본적으로 영성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셋째, 순복음의 영성은 또한 성령론적이다. 왜냐하면 성령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서는 바른 영성적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순복음의 영성이란 오순절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영성을 말한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행 1:8)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삶과 행하신 사역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넷째, 순복음의 영성은 교회론적이다. 순복음성령신학의 영성은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경험되고 성장하는 영성이다. 순복음의 영성이 통성 기도와 합심 기도를 강조하고 예배를 강조하는 것은 순복음 영성의 공동체적 특성을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순복음성령신학의 영성은 종말론적이다. 순복음의 영성은 세상 가운데서 복음을 위하여 사는 영성이지만 세상에 두 발을 두지는 않는다. 순복음의 영성은 곧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종말적인 가치관을 늘 의식하면서 사는 영성이다. 오순절 성령은 개인적인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도록 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종말이 가까웠음을 선포하는 기능을 한다. 20세기 초 전 세계적으로 임한 오순절적 성령의 부으심은 하나님의 추수 때가 가까웠음을 알리는 늦은 비 성령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늦은 비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순복음의 영성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며 세계복음화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는 영성이다.
  • 2004.11.06

    10 - 순복음성령신학과 성령 충만
  • < a> 성령 의지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충만하라 구원과 믿음의 확신얻을 수 있어 살아있는 예배 위해 꼭 필요한 체험 끊임없는 성령과의 교제가 필요 성령 충만은 오중 복음의 두 번째 요소일 뿐 아니라, 흔히 순복음 신앙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신앙 체험이다. 순복음 성도들이 체험하고 추구하는 성령 충만은 다른 오순절 교단이나 비오순절 교단에서 이해하는 개념과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첫째, 순복음성령신학은 성령 세례보다는 성령 충만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성령 충만은 구원과는 논리적으로 구별되고 흔히 시간적으로 구원 다음에 오는 체험이다. 미국 하나님의성회를 비롯한 많은 오순절 교단은 성령 충만이라는 용어보다는 성령 세례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그런데 성령 세례의 체험은 오순절 성도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과거에 위치하기 때문에, 성령 세례는 과거지향적인 용어이다. 이에 비하여 성령 충만이라는 용어는 성령 세례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현재의 상태를 표현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보다 현재지향적이다. 성령 세례를 강조할 경우, 많은 성도들이 과거에 성령 세례 받은 것에 만족하여, 현재의 나의 신앙 상태는 어떠하든, 과거의 체험에 안주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성령 충만이라는 용어는 현재 나의 신앙을 바라보게 만들고 끊임없이 신앙의 갱신을 가져오게 만든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베드로는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을 이미 체험하였지만(행 2:1∼4), 그 사역과 삶에 있어서 반복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체험하였다(행 4:8, 31). 이것이 그와 초대교회로 하여금 권능 있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동인이 되었다. 둘째, 성령 충만은 성령의 은사와 열매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성령의 역사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19세기 중엽 이후 미국에서 성결 운동이 일어났을 때 팔머 여사와 같은 성결 운동가들은 존 웨슬리의 완전 성화의 체험을 회복하려는 의미에서 성결을 강조하였다. 그 후 하나님의 성회와 같은 오순절 교단에서는 봉사적 권능 부여라는 차원에서 성령 세례를 강조하였다. 전자는 성령의 열매를 강조한 반면 후자는 성령의 은사를 보다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4중 복음을 강조한 심슨(A.B. Simpson)은 성령 충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여전히 완전 성화라는 웨슬리적인 의미에서 성령 충만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비하여 순복음성령신학에서는 성령의 은사와 열매의 통전적 개념으로서의 성령 충만을 강조한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는 동전의 앞뒤면처럼 반드시 같이 가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는 있으나 성령의 열매는 부족한 경우가 있고, 성령의 열매는 풍성한 것 같으나 은사는 빈약한 경우도 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적 나타남을 위한 성령 충만과 인격적 특성인 성령의 열매를 위한 성령 충만함이 구별됨을 보여준다. 권능 있는 복음 증거를 위한 사역적인 성령 충만은 순간적이고 수동적이다. 반면, 성령의 열매를 위한 인격적인 성령 충만은 지속적일 뿐 아니라 우리의 능동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순복음성령신학에서의 성령 충만은 이 둘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셋째, 순복음성령신학에서 성령 충만의 중요한 한 가지 의미는 신앙의 확신이다. 성령 충만은 구원의 확신, 천국과 지옥의 확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 등 신앙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내가 믿는 것의 내용과 이유에 대한 확신을 제공해 준다. 고넬료 가정의 성령 충만한 체험은 예루살렘 교회로 하여금 그들을 의심할 바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의 체험은 가 본 적이 없는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피부로 느끼게 만든다. 순복음 성도들의 열심과 헌신은 성령 충만의 체험을 통한 신앙의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넷째, 순복음성령신학에서 성령 충만은 살아 있는 예배를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체험이다. 순복음적 성령 충만의 예배는 영, 혼, 육이 하나되어 드리는 예배이다. 거기에는 영혼이 기뻐 감사하며 육체가 춤을 춘다. 가식과 체면이 숨을 곳이 없다. 성령 충만이란 “영에 있는 성령께서 흘러 넘쳐서 혼을 적시고 육체를 통해서 나의 삶 가운데로 임하시는 것”이다. 영과 혼과 육이 모두 성령의 감동과 다스림 아래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순복음적 성령 충만의 예배이다. 단순히 찬양이 있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성령의 기름부으신 찬양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손뼉치는 것만으로 부족하다. 기쁨과 감격과 감사의 마음이 함께 드려지는 예배가 순복음의 성령 충만한 예배이다. 이런 점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며”(시 50:14),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시 149:3),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치며”(시 47: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1)고 한 시편 기자야말로 성령 충만한 순복음적 예배의 원형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성령 충만한 순복음적 예배에서야말로 모든 형식이 벗어지며 인간이 진정 인간화된다. 끝으로 순복음적 성령 충만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성령과의 교제가 필요하다. 성령과의 교제는 예배 때에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삶과 사역 모든 면에서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소에 말씀과 기도로 충만해서, 매순간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는 삶이다.
  • 2004.10.02

    8 - 순복음성령신학과 기적
  • < a>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 기적은 신앙 성장의 중요한 도구 ‘욥’처럼 좋으신 주를 잊지 말아야 순복음 신앙은 기적을 철저히 신봉한다. 순복음 신앙의 내용 가운데 하나인 ‘신유’는 기적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다섯 명으로 시작한 천막교회가 오늘날 세계 최대의 교회가 된 것 자체가 기적의 하나님을 증거한다. 그렇다면 순복음 성도에게 있어서 기적의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기적의 성령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다. 예수께서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하셨다(마 12:28). 순복음 성도들에게 있어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기적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미래적 천국에 대한 현재적 확신이다. 사도와 120 문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을 말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심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가의 앉은뱅이를 고치고 난 후 더 큰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그래서 체포되어 이스라엘 공회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하였다(행 4:19). 순복음 성도들에게 기적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안 보이는 하나님을 피부로 느끼고 확신하는 통로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입구이다. 그러므로 기적은 구원과 천국의 확신을 줄 뿐 아니라, 두려움과 함께 담대함을 주는 하나님 면전 의식(Coram Deo)에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기적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기적의 두 번째 신학적 의미는, 기적이 하나님의 사랑, 그 본성의 표현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기적을 하나님의 능력과 많이 결부시킨다. 특히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불가항력을 영어로는 액츠 오브 갓(Acts of God)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말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하나님의 행위’라는 뜻이다. 화산 폭발, 지진, 태풍 등의 천재지변을 영어권에서는 ‘Acts of God’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에게 있어서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출애굽 할 때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권능들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수 2:9∼11).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기적을 베푸실 때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표시인 동시에 사랑의 표현이다. 멜 테리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세 가지 이유 가운데 첫 번째 이유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관심을 보이시려는 것”이라고 하였다(멜 노나 테리, 「예수님의 은은한 사랑의 바람」,p33). 한 때 17,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이신론(理神論, Deism)은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하나님으로만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너무나 잘(합리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우주 속에 들어와서 일일이 간섭할 필요가 없으시다”고 하였다. 그 결과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섭리인 기적을 부인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무엇보다도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다(마 6:25∼34). 셋째, 기적은 영적 신앙 성장의 중요한 도구이다. 기적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자들은, 기적을 구하는 것이 신앙을 현세적이고 물질적인(기복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영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 현세적인 것과 유리되어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고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분리한다면 이는 영지주의라는 잘못된 기독교 이단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현세적인 하나님의 기적과 영적인 가르침이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그의 복음서에서 보여준다. 예수님은 당신이 영생하는 ‘생명의 떡’(요 6:35)이심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무리들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셨다(요 6:1∼15). 또한 그가 ‘세상의 빛’이라는 영적인 진리를 확신시키시기 위하여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요 8∼9장). 기적을 많이 행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영적인 구원을 말씀해 주셨다(요 3:3). 그리고 구약 성경을 인용해서 육체적인 구원(병고침)에서 영적인 구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니고데모를 책망하셨다(요 3:14∼16). 기적 그 자체가 영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적을 통하여 영적인 의미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떡을 먹고 난 후에 예수님을 왕 삼으려는 무리들처럼(요 6:15, 26), 현세적인 기적에 눈이 멀어서 영적인 진리를 볼 줄 몰라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와 함께, 기적을 무시하고 기적 없이도 나는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다고 하는 태도 역시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영적 교만에 빠지기 쉬운 태도이다. 순복음 신앙에 있어서 기적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기적을 다 빼버려도 하나님의 좋으심과 주인 되심을 바로 아는 신앙, 이것이 기적의 의미를 바로 아는 신앙이다. 많은 복을 받았지만 모든 것을 다 가져가도 하나님의 좋으심과 주권자 되심을 잊지 않은 욥과 같은 신앙을 가진 자가 기적의 참 의미를 아는 자이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 2004.07.31

    ⑦순복음성령신학의 구원론
  • < a> ‘예수’와 ‘믿음’ 그리고 ‘성령’ 회개하고 중생케 하는 성령의 역할 성령 세례는 구원을 확증하는 사건 전통적으로 구원은 주로 기독론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기독론적 구원론에 있어서 중요한 두 단어는 ‘예수’와 ‘믿음’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구원과 관계해서 성령의 역사와 역할을 여러 군데에서 언급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며, 디도서 3장 5절은 우리의 구원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구원과 관계된 성령의 여러 가지 역사들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첫째, 성령은 불신자로 하여금 죄를 책망케 하신다(요 16:8∼9). 불신자들도 죄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그런데 성령의 책망하심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죄이며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많은 경우에 불신자들은 복음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다. 성령 충만 받은 후 베드로가 나가서 무리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선포하자 그들은 “마음에 찔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 2:36∼38). 성령의 책망하심이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에서 순복음성령신학의 구원론은 복음 선포자나 전도자의 성령 충만한 체험을 요구한다. 둘째, 성령은 불신자를 중생케 하는 사역을 하신다(요 3:5). 책망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불신자의 바깥에서 생각과 마음에 깨우침을 주시는 사역인 반면,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은 불신자의 내면에서 영혼에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사역이다. 중생은 믿음으로 얻는 칭의와 시간적으로 구별되는 별개의 체험이 아니다.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중생한 후 회심이 일어나서 칭의를 얻는다고 하는 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회심 후 중생한다고 한다. 그런데 칭의와 중생은 시간적으로 구별되는 별개의 체험이 아니라, 성도의 구원을 두 가지 상이한 측면에서 설명하는 용어일 뿐이다. 칭의는 성도의 구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하는 용어이다. 즉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믿는 자의 모든 죄를 사면하고 하늘 나라의 생명책에 성도의 이름을 기록한다. 그러므로 칭의는 성도의 구원을 객관적인 차원에서 설명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중생은 불신자가 예수님을 믿을 때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을 주관적으로 설명하는 용어이다. 중생한 자는 자기 속에서 일어난 구원의 사건에 대해서 자신이 지각할 수 있다. 중생한 자는 이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예수님이 자신의 구세주라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을 주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칭의와 중생은 동일한 순간에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을 하나님 편에서와 인간 편에서 논리적으로 구별하여 설명하는 다른 용어일 뿐이다. 전자가 구원을 설명하는 기독론적 용어라면, 후자는 성령론적 표현이다. 셋째, 성령 세례는 성도의 구원을 확증하는 사건이다. 성령 세례가 곧 구원은 아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자는 모두 구원을 받은 자이지만, 구원 받는 모든 자가 다 성령으로 세례받은 것은 아니다. 성령 세례는 구원과는 논리적으로 구별되며, 시간적으로 보통 구원 다음에 오는 두 번째 은혜의 체험이다. 사도행전의 기사와 성도들의 체험을 통해서 볼 때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는 보통 방언으로 나타난다. 성령 세례의 의미는 여러 가지이다. 성령 세례는 봉사적 권능, 선교, 능력 있는 복음 전파, 성결 등과 연관된다. 그런데 성도의 구원과의 관계에서 성령 세례의 한 가지 의미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 사건이다.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사건이 이 점을 분명하게 해 준다. 유대인들은 무할례자들과는 식탁 교제를 하지 않았다(행 10:28). 왜냐하면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대교적 전통에 충실한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교제하도록 지시하셨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고넬료 가정이 성령을 받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베드로를 비롯한 할례 받은 신자였다(행 10:45). 베드로는 뒤늦게 고넬료 가정에 세례를 베풀었다.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 베푼 세례의 의미는 고넬료 가정이 비록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표시였다.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서 교제하였다는 일로 인하여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의 청문회에 소환되었다(행 11:3). 베드로의 설명을 다 들은 후 예루살렘교회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고 결론을 내렸다. 예루살렘교회는 고넬료 가정의 성령 강림 사건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해 주신 사건”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 세례는 본인이나 타인에게 성도의 구원을 확신시켜주는 사건이다. 순복음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과 기쁨에 넘치는 신앙 생활을 해 왔던 비결은 다름 아닌 성령 세례와 충만의 체험이었다.
  • 2004.07.03

    ⑥ 성령과 그리스도
  • < a>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완성된다 믿음과 체험있는 순복음 신앙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령 강조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순복음 신앙에 대한 오해 가운데 하나가 순복음에는 십자가가 없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는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를 잘못 이해한 데서 오는 결과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성령을 생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없는 그리스도(메시아)를 생각할 수도 없다. 먼저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 되게 하신 성령을 생각해 보자. 성령께서 모든 백성들에게 보편적으로 체험되고 인식된 것은 오순절 사건 이후였다(요 16:7∼14). 그러나 복음서 시대에 성령께서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메시아로서의 구속 사역을 온전히 성취하도록 출생 및 공생애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인도하신 분이 성령이셨다. 이사야는 메시아의 사역은 성령으로 비롯되고 완성될 것임을 여러 차례 예언하였다(사 11:2; 42:1; 48:16; 61:1∼2).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 없는 인간으로 나셨으며(마 1:18∼20; 눅 1:35), 성령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시고(눅 4:1∼2과 병행구절 히 2:17∼18; 4:15),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 메시아의 사역을 온전히 수행하셨다(눅 4:18∼19; 사61:1∼2).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돌아보면서 예수님의 사역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분명히 지적하였다(행 10:38). 예수께서도 당신의 사역의 보이지 않는 수행자는 성령이심을 가르쳐주셨다(마 12:28).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위한 영원한 속죄가 될 수 있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 때문이라고 말한다(히 9:14). 가현설자들과 일부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셨다가 수난 당하실 때 성령이 떠났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있어서의 성령의 중요성을 모르고 하는 발언이다.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의 수행과 완수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과 역사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므로 복음서 시대에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굳이 말하라면, 성령이 그리스도를 이끌고 인도하고 지시하신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오순절 이후의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베드로는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한 후 즉시로 나가서 “예수께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증거”라고 하였다(행 2:33). 오순절 이후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다스리시고 성령께서는 땅에서 성도들 가운데 역사하신다. 두 분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성령을 부리시는 위치에 있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부어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보내심을 받은 성령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사역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하신다(행 1:8).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역과는 다른 별개의 사역을 전개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심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종결된 것이 아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이제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성령이 계신 곳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의 중요성은 그리스도 사역의 현재성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사역의 현재성과 계속성은 성령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성령 충만한 순복음 성도들이 신앙하는 순복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복음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현재성과 계속성을 철저하게 믿고 고백하며 체험하는 신앙이다. 순복음의 신앙은, 예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의 생명을 나누어 주신다고 믿는다. 순복음의 신앙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도록 지금도 예수께서 성령으로 역사하심을 믿는다. 순복음의 신앙은, 예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연약을 담당하시고 질병을 고치신다고 믿는다. 순복음의 신앙은, 예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어려운 형편을 돌보시고 삶의 현장에 생생하게 간섭하신다고 믿는다. 순복음의 신앙은, 우리가 잠깐 동안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지만 우리의 영원히 거할 처소는 천국이며 불원간 예수께서 우리를 데리고 오실 것을 소망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순복음 신앙은 예수께서 현재적으로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심을 철저하게 믿고 고백하며 체험하고 누리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강할수록 증거되고 드러나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성령은 우리가 닮아야 할 대상이 아니다. 성령의 모습을 본 자가 있는가? 아무도 없다. 성도가 닮아야 할 인격적인 대상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하셔서 부르신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맏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는 것이다(롬 8:29). 그러므로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이해할 수도 없고 예수님을 닮을 수도 없다. 성령은 예수께서 역사하는 영역이며 예수님을 보는 창문이다. 이런 점에서 성령님의 역사와 성령님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순복음 신앙이야말로 가장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새신자국장
  • 2004.06.05

    ⑤순복음성령신학과 말씀
  • < a> 말씀에 권위 불어넣는 ‘성령’ 베드로, 바울 성령 충만 후 성경이해 성령의 권능으로 깨달음과 확신 얻어 말씀의 권위와 성령의 권위는 서로 대립되는 것인 양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교회사의 전통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성령의 주권을 강조하는 자들이 종종 교회나 말씀의 권위를 거부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권위를 거부한 쪽이 몬타누스주의자였다면 말씀의 권위를 거부한 쪽은 17세기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이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와 체험을 강조하는 순복음성령신학은 결코 말씀의 권위를 배격하지 않는다. 개신교의 전통이나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볼 때 말씀과 성령은 결코 상호배반적일 수 없다. 말씀과의 관계에 있어서 첫째, 성령은 말씀의 해석자이다. 로마 가톨릭에 의하면 말씀에 대한 해석학적 권위는 교회 또는 교회의 전승에 있다. 이에 반해서 루터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성경의 자증성 원리를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들과는 달리 오순절적 해석학은 성령에 그 해석학적 권위를 둔다. 왜냐하면 성령의 권위는 교회의 권위 위에 있고(“성경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니라”‘계 2:7,11,17,29; 3:6,13,22’),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의미있게 깨달아지지도 않고 삶 가운데 실천되지도 않기 때문이다(요일 2:20∼27; 롬 8:2∼4 참조).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한 베드로와 사도들은 다락방을 뛰쳐나가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의 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을 해석해주었다. 바울 역시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한 후 구약을 보는 눈이 열려서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다(행 9:17∼22). 둘째, 성령은 말씀에 대한 바른 깨달음과 확신을 준다. 오순절 성령은 사도들로 하여금 구약 말씀의 권위를 부인하게 한 것이 아니라 더 확신하게 해 주었다(행 2:22∼37; 3:22∼26; 7:2∼53; 26:39; 13:16∼41). 성령 충만을 체험한 베드로는 무리들에게 서서 복음을 전할 때 확신에 차서 시편을 해석하였다(행 2: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친 후 공회 앞에 서게 된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행 4:8) 구약 말씀에 대한 확신에 차서(행 4:13), 복음을 선포하였다. 성령의 충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살도록 만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눅 4:1), 영적으로 엄청난 힘을 축적해서 마귀를 물리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물리쳤다. 시험을 마친 후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예수님은 그 해박하고 정확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인하여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그런데 그 비결은 성령의 권능(충만)이었다(눅 4:14). 성령의 충만함은 말씀에 대한 바른 깨달음과 확신을 준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결코 말씀을 떠나서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은 우리 인생과 사역의 대 원칙이기 때문이다. 셋째, 굳이 성령과 말씀과의 관계에 있어서 권위의 문제를 따진다면 성령의 권위가 말씀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첫째,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말씀은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며 둘째, 말씀에 권위를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가 있는 것은 성령께서 성경 기록자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성령과 성경과의 관계의 이해를 위하여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모집하는 학원 광고에 “저자 특강”이라는 문구가 종종 눈에 띈다. 교재를 저술한 저자가 강의하면 교재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에 “저자 특강”만큼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가진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저자가 교재를 설명하면서 “35면의 5째 줄의 내용은 잘못된 것이니까 이렇게 수정하시오”라고 하면 학생들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아니, 선생님, 이 책은 권위있고 유명한 책인데 선생님이 왜 함부로 고치라고 합니까?”하고 따지겠는가? 원 저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러한 지시를 하였다면 당연히 따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재를 가장 잘 알고 직접 쓴 저자가 내용을 수정하라고 하면 두말 없이 수정할 것이다.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성령과 성경의 관계가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이 교사라면 성경은 교재에 해당된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성령 충만한 목사님의 설교 말씀 모든 내용이 성령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살펴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그와 함께 현대 교회와 신학자들은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는 요한의 가르침을 초대교회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임형근 목사( 새신자국장 )
  • 2004.05.01

    ④순복음성령신학의 삼위일체론
  • < a> 하나님 체험케 하는 성경적 신학 성령사역과 역할의 중요성 강조 삼위일체론 환형적 관계로 봐야 순복음성령신학은 신학함이나 신학의 여러가지 주제들을 접근함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나 역할의 중요성을 마땅히 강조한다. 이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여기서 순복음성령신학의 삼위일체론 이해의 특징 두 가지를 언급하겠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의 출발점은 성령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적절하지 못한 이해의 한 가지는 삼위의 관계를 종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림1>에서 보는 것처럼 성부가 맨 위에 있고 성자는 그 아래, 성령은 또 성자 아래 있다. 이런 삼위일체 이해에서 성자는 항상 성부보다 아래에 있고 성령은 항상 성자에 종속되어 있다. 구약시대에 야웨 하나님이 먼저 계시되고 신약시대에 성자 하나님이 오셨고 교회사 시대에 성령 하나님께서 나오셨다는 사실에 기초한 삼위일체 이해이다. 이것은 인간의 구속사 가운데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치를, 계시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순위 매긴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종적 이해는 삼위일체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갖게 할 위험성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가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인식의 순서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순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성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성부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하)고 하셨다(요 14:9하 참조). 마찬가지 논리로,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구주로 알 수가 없다(요 15:26).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인식론적 순서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이다. 이런 점에서 순복음성령신학의 삼위일체 하나님 인식의 출발점은 성령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순복음성령신학이 이해하는 삼위일체의 구조는 종적(縱的) 관계가 아니라 환형(環形) 관계이다. 흔히 칼빈의 신학을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신학의 주제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중심으로 해서 설명되기 때문이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인간이 타락하는 것도 하나님의 허용된 사건이며 구원받는 것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예정과 은혜에 속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점에서 칼빈의 신학을 영광의 신학 또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라고 한다. 그런 한편 루터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 또는 십자가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루터는 인간의 구원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으로 설명하며, 그리스도를 성경 해석의 제일 원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서는 성령 하나님을 성부나 성자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두기가 어렵다. 이들과는 달리, 성령의 사역과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순복음성령신학은 성령 하나님을 성부나 성자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서 이해한다. 성경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순서가 성부, 성자, 성령의 순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세례를 언급하는 마태복음 28장 19절은 삼위일체의 관계를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설명한다. 왜냐하면, 세례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의식이므로,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점에서 성부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편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축도에 의하면, 성자가 먼저 나오고 성부가 그 다음이며 성령이 맨 나중에 나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해서 볼 때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기 때문이다(요 1:14∼17). 성자 예수님의 나심의 배경에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요 3:16),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는 길은 성령의 교통하심이다. 그러므로 축도에 나오는 삼위일체의 순서는 성자, 성부, 성령이다. 그런데 비하여,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는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성령, 성자, 성부의 순으로 언급되어 있다(4∼6절). 왜냐하면 교회라는 집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제일 먼저 있어야 할 것은 집을 짓는 도구(성령의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일하는 자들이 나온다. 이들은 그리스도로부터 직분을 받은 자들이다. 교회라는 집을 짓는데 역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최종적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성부 하나님이시므로 성부 하나님이 여기서는 맨 마지막에 언급된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성령의 사역과 역할을 마땅히 강조하는 순복음성령신학은 삼위일체의 구조를 <그림2>와 같이 환형으로 이해할 것을 요구한다. 삼위일체의 환형적 이해는 기독교의 신학이 편협되지 않도록 하며, 하나님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체험케 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성령을 신학적 탐구와 신앙적 체험의 출발점으로 삼는 순복음성령신학은 결코 우리를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성령 일원론(Unitarianism)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장 통전적으로 이해하고 체험하게 해 주는 건전하고 성경적인 신학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새신자국장
  • 2004.04.03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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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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