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희 교수의 구약신앙
[차준희 교수의 구약신앙]구약에 나타난 가난한 사람의 경건함
  • 차준희 목사(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청빈사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자기백성의 빈곤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 가난의 이해 종말론적 의미로까지 발전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다 듣고 그것을 모두 지켜 행하기만 한다면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신 15:4-6). 이 땅에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본심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을 경험해야만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신 15:11). 특히 고대 이스라엘은 왕권을 형성한 이후 도시문화가 발달하면서부터 소유와 경제력이 몇 사람의 손에만 집중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대부분의 주민 층은 가난과 종속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곤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자신들의 유일한 변호자로 믿고 하나님께로 향하였고, 또한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유일한 참된 부(富)이심을 굳게 믿게 되었다. 여기에서 ‘가난한 사람의 경건’이라는 특수한 종류의 경건함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경건함은 주로 시편에서 많이 언급되었다(시 22:24-26; 72:1-4, 12-14; 140:11-13 등).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어떤 성격을 지칭하는 말일까?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가난한 사람은 ‘특정한 집단’을 가리키는 표현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도시문화와 왕정제도를 반대하는 이스라엘 역사 초기의 유목적인 전통을 존중하는 사람들이거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귀환한 사람들(골라) 혹은 포로기 이후에 생겨난 엘리트 집단을 가리킬 수 있다. 둘째, 가난한 사람의 경건함은 ‘영성화’(Spiritualisierung)된 표현일 수 있다. 이는 경제적인 위치나 계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자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걸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자라 할지라도 이와 같은 인식을 갖고 있는 자라면 그 또한 이러한 의미의 가난한 자에 속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이시기 때문에, 경건하려면 가난해져야한다는 논리로 발전시키면 문제가 있다. 구약성서는 가난을 이상화(理想化)하지 않을뿐더러, 구약성서 어디에도 가난을 종교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본문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에 나타난 가난한 사람의 경건함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토라를 준수해야 했다. 이러한 토라 순종은 경제적으로 손해를 가져오기가 쉬웠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하고 준수하는 사람은 상행위에서 거짓된 저울을 사용할 수 없었다.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는 그 어떤 이익을 취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경건한 사람은 경제생활에서 이러한 손해를 감수해야했다. 따라서 가난은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대상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기꺼이 수용하고 감수해야할 몫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신이 잘못해서 혹은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참조. 잠 6:9-11).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가난이라는 이러한 이해는 점점 더 강하게 종말론적인 의미로 발전되었다. 즉 가난한 사람이 현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준수하느라 거짓된 물질을 포기하고 고통을 감수하지만, 미래에는 이러한 삶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경건하여 가난하게 된 사람들은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의 보상을 받지만, 경건하지 못한 부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참조. 사 29:19-20; 눅 1:51-53). 예수님도 이러한 사상과 맥을 같이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눅 6:21). 그러나 부자들에게는 아주 매서운 경고를 하셨다: “화 있을 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느니라”(눅 6:24). 사람들은 늘 ‘부정직한 부유함’과 ‘정직한 가난함’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기 마련이다. 구약시대의 한 지혜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의 본을 보여 준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네게 먹이시옵소서”(잠 30:8).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살아있는 동안의 부정직한 부유함의 유혹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죽음이 없이 영생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부유함을 누려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라 바로 저곳이다.
  • 2005.05.11

    [차준희 교수의 구약신앙]구약의 탄원기도에 나타난 ‘분위기 급변’
  • 슬픔을 기쁨과 찬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기도 중에 확신과 응답 주시는 전능한 분 구약의 시편은 흔히 ‘기도학교’라고 부른다. 시편은 이스라엘 신앙인들이 야웨 하나님께 드린 여러 가지의 기도가 총 집결되어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시편의 기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탄원기도’이다. 탄원기도 중에서도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인용하신 시편 22편이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기도문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시 22:1)라는 탄식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22절에서 갑자기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는 찬송으로 바뀐다. 보통 탄원기도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부르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불평조로 열거한다. 이어서 구체적으로 간구하고, 갑자기 분위기가 급변되어 신뢰를 고백하고, 맹세찬양으로 끝을 맺는다. 슬픔과 탄식으로 시작한 기도는 어느 순간 확신에 찬 신뢰로 급변되어 기쁨과 확신으로 끝난다. 슬픔의 기도가 기쁨의 기도로 끝난다. 어떻게 해서 갑자기 기도 분위기가 탄식에서 찬양으로 급변한 것일까? 탄원기도에 나타난 분위기 급변의 원인에 대하여 몇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1. 심리적 변화: 탄원기도를 드리는 기도자가 ‘기도전쟁’을 통하여 두려움이 희망으로, 고통의 상태에서 기력을 되찾게 될 수 있다. 기도를 통하여 심리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도를 통하여 흔히 경함할 수 있는 것이다. 2. 신뢰의 확신: 기도자가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가 앞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된다. 그 응답이 아직은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기도자는 문제해결을 확실히 믿는 상태에서 미리 신뢰를 고백하고 찬양을 할 수도 있다. 3. 과거의 회고: 기도자는 기도 중에 과거에 이와 유사한 경우에서도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던 구원사건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과거에 이보다 더한 고단한 인생 길 가운데서도 인도해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속에서 새롭게 움터오기 시작하면서 문제속의 기도자를 압도하게 된다. 기도자는 과거의 은혜를 회고하면서 다시금 힘을 얻는다. 4. 제사장의 구원신탁: 기도자가 기도하는 가운데 제사장을 통하여 구원신탁을 통보받고 탄원에서 찬양의 분위기로 급변될 수도 있다. 구원신탁(Heilsorakel)이란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리라는 답변을 가리킨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원통함을 아뢰었다. 그때 엘리 제사장이 한나에게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삼상 1:17)고 한 말이 구원신탁에 해당된다. 기도하는 사람은 제사장 같은 하나님의 사람의 대언(代言)을 통하여 응답의 확신을 갖게 되고, 찬양으로 답하게 된다. 5. 기도 공식문: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탄원기도의 공식기도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도문은 실제의 삶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순서적으로 압축하여 정리하고 있다. 즉 불평, 간구, 신뢰확신 그리고 찬양맹세라는 요소들이 차례로 언급된다. 탄원기도는 일종의 문학작품이며, 이는 고난에서 찬양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150편 시편 전체도 전체적으로 보면 이러한 체제로 구성되어있다. 1편에서 150편의 시편은 전반적으로 보면 탄원에서 희망으로, 절망에서 기쁨으로 흐르고 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어두운 심령에 빛을 비추어주고(심리적 변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하여 확신을 심어주기도 하며(신뢰의 확신), 과거의 은혜를 생각나게도 하신다(과거의 회고). 또한 기도의 멘토(Mentor)를 통하여 응답을 주시기도 하신다(제사장의 구원신탁).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탄원기도를 결국에는 찬양기도로 끝맺음을 하게 하신다(기도 공식문). 하나님은 울면서 시작한 기도가 웃으면서 끝나도록 이끄신다(참조. 시 126:5∼6).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 2005.04.16

    [차준희 교수의 구약신앙]구약에 나타난 죽음과 부활
  • 죽음: 관계단절의 상태 구약의 히브리인들은 생명에 상당히 높은 가치를 부여하였다. 따라서 구약성서에는 자살이 거의 없다. 죽음자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특히 때 아닌 죽음은 “무서움의 왕”으로 간주되었다(욥 18:14). 구약성서에서 죽음은 현대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이해되었다. 구약에서 생명은 인체의 모든 기관, 특히 뇌가 기능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상당하게 사회적인 요소도 포함한다. 즉 생명이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뜻한다. 특히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상응하여 죽음이란 “관계단절의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관계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도 포함한다. 한 개인은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로부터 제외됨을 경험하므로 죽음을 맛본다. 즉 죽음을 미리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고립을 가져온 원인으로 질병, 고발, 정치적 박해, 종교적인 분쟁 등이 언급된다. 이런 측면에서 시편은 질병과 치유, 거부와 화해, 고발과 무죄판결을 죽음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부활)이라고 말한다. 구약성서에서 죽음은 관계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물론 육체적인 요소도 포함한다. 의학적인 죽음의 기준은 호흡이다. 하나님이 생명의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즉 호흡이 중지되면 인간은 죽음에 들어간다. 그러나 호흡의 중지로 한 인간의 존재가 완전히 끝장나는 것은 아니다. 죽음 이후 영혼은 지하세계인 스올로 내려간다. 스올은 그리스어 하데스(Hades)와 같은 뜻이다. 이곳에 거하는 자들은 진정한 생명이 없고 즐거움이 상실된,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 머문다. 이곳은 특히 사람의 측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곳이다: “죽은 자가 야웨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시 115:17; 참조. 시 88:10-12; 사 38:18-19 등). 이처럼 죽은 자들은 스올(음부)에서 “유혼”(시 88:11; 사 26:14, 19)으로서 그림자 같이 존재한다. 죽음은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수 23:14; 왕상 2:2), “돌아 올 수 없는 땅”(삼하 12:23; 14:14; 욥 7:9-10 등)으로 불린다. 아무튼 사람들은 부폐되어 살이 없어진 뼈들이 조상들의 뼈로 돌아가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창 25:8, 17; 32:29 등). 죽음: 하나님의 섭리 생명이 하나님의 창조에 속한 것(창 1-2장; 시 36:10 등) 같이, 죽음도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다. 구약은 죽음을 독립적이고 신화적인 힘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즉 죽음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자체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죽음의 세력은 본질적으로 야웨 하나님 자신의 힘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죽음은 마지막 원수가 아니라 야웨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한 방편이다: “야웨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서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삼상 2:6-7). 순교현장에서 깨닫게 된 부활신앙 그러나 구약 역사의 후기에 이르러 죽음이후에도 생명이 지속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신앙(내세신앙과 부활신앙)은 이후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보다 분명하게 알려진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계시된다. 이미 에녹의 승천(창 5:24)과 엘리야의 승천(왕하 2장)사건에서 이러한 신앙은 싹을 피우고 있다. 이후 다니엘 시대에 순교자의 운명에 관하여 깊이 숙고하게 되면서 이러한 신앙은 보다 분명해지게 된다. 순교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생명을 내놓았다. 만약에 이러한 순교자들에게 아무런 보상이 없다면 그들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순교자들은 죽음 이후 펼쳐질 세상에서 그 보상을 누리게 된다는 내세신앙이 확고해진다(단 12:2-3). 또한 선한 행동을 한 자에게는 그에 합당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지혜신앙의 논리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러한 보상이 이 세상너머의 세상에서 이루어져야함도 알게 되었다(눅 16:18이하). 따라서 이러한 부활신앙은 고대 근동의 영향 보다는 이스라엘 야웨 신앙인들의 경험과 신학적인 숙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권능이 못 미치는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의 범주에 스올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내가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당신은 또한 거기 계시니이다(시 139:8; 암 9:2; 호 13:14; 사 7:11 등). 하나님의 권능과 존재는 그 어느 곳에서도 제한되지 않는다. 죽음의 권세도 죽음의 자리도 그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부활의 첫 약속이 이사야 26장 19절에서 선포된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 26:19).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 2005.03.17

    [차준희 교수의 구약신앙]구약에 나타난 질병과 고통
  • 성도의 신앙상태 점검하며 성숙으로 인도 구약성서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신앙인들의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인간이 살면서 경험하는 것 가운데서 가장 고통스럽고 심각한 것은 질병과 고통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구약성서가 침묵할리는 없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질병과 고통의 원인에 대하여 사실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 물론 구약성서에는 이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서로 모순 되어 보이는 구절들도 등장한다. 구약에 나타난 질병과 고통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정리될 수 있다. 1. 질병과 고통은 보통 아무런 “이유 없이”도 올 수 있다. 이 경우 질병과 고통은 불가사의하고, 이유도 없고, 불합리한 사건, 즉 스캔들일 뿐이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재(不在)가 빚은 결과이다. 이런 경우 질병과 죄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이런 때는 하나님에게 이런 무의미한 고통을 멈추어 줄 것을 비는 탄원의 기도와 간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 적절한 대응방법이었다. 이와 같은 예는 욥의 탄원 기도와 시편의 수많은 탄원기도에서 볼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 욥이 당한 고통과 질병은 ‘까닭 없는’ 것이었다(욥 2:3). 2. 질병과 고통은 “악한 세력”에 의해서 올 수도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 악한 세력은 고대근동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사람에게 들어가서 그를 괴롭히는 악령에게서, 혹은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불결한 물질(예를 들면, 동물과 사람의 사체에서 유출된 물질)에서 아니면 악마의 저주나 마술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경우는 정결의식이나 악마축출(Exorzismen) 의식을 행함으로 대응하였다. 3. 질병과 고통은 “죄 때문에” 올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질병과 고통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범죄에서 야기된 것이다. 한 개인이나 집단 그리고 구조적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처벌이 가져온 심판의 결과로 질병과 고통이 올 수도 있다(욥 4:7∼8). 이런 경우 질병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욥 5:8). 4. 질병과 고통은 “하나님의 교육수단”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고통당하는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내적으로 성장시키신다(욥 5:17∼18; 시 119:71, 75; 잠 3:11∼12 등). 이러한 하나님의 교육수단에 대한 합당한 응답은 하나님이 주신 고통을 겸허하게 수용하며, 고통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철저히 신뢰하는 것이다: “사람이 받는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귀를 열어서 경고를 듣게 하십니다”(욥 36:15, 표준새번역). 5. 질병과 고통은 “일시적인 시험”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실 때도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아들 이삭을 잡아 죽여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것도 이 경우에 속하고(창 22장), 하나님이 욥의 신앙(경건)을 시험하기 위해서 욥을 보호하였던 모든 울타리(재산, 자녀, 욥의 생명)를 제거하신 것도 이러한 일시적인 시험에 속한다(욥 1:8; 2:3). 이때는 특히 시험을 감내할 인내가 필요하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6. 질병과 고통이 “대리적인 속죄의 수단”일 때도 있다. 이러한 질병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처벌을 대신 짊어진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언자들(예를 들면, 모세: 출 32:32; 시 106:21, 23)과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사 53:4∼5)의 운명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한 집단의 고통도 대속(代贖)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이스라엘에서 바벨론포로로 끌려간 소수의 유다포로들(골라)은 모든 유다백성들의 죄를 대속한다(사 40:2; 대하 36:21).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한다는 사상이 이해된다(요 1:29; 벧전 3:18 등). 차준희 교수 (한세대학교 구약학 교수)
  • 2005.02.20

    하나님의 수면과 인간의 수면
  • < a>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 역사의 주님 공백 없은 활동 계속되고 있어 인간 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 구약성서는 하나님과 수면(睡眠)의 관계에 대하여 종종 언급하고 있다. 수면과 하나님의 행위가 관련될 때, 구약성서는 야웨 하나님과 이방신들과의 차이점을 항상 강한 논쟁조로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즉 야웨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시다(시 121:4).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간섭에는 잠시의 휴식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바알(Baal)과 오시리스(Osiris)같은 이방신들은 1년을 주기로 활동하며 특히 식물의 성장과 추수에 결부되어 있으면서 그들 스스로 죽기도 하고 다시 살기도 하며 또한 인간의 역사 속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부재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할 때 한 말에서도 반영되어있다: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바알)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깐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왕상 18:27) 고대 근동의 신들과는 다르게 구약성서는 ‘야웨의 수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야웨께서 역사의 주님으로서의 활동을 잠시라도 쉬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비록 역사적 재난과 짙은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권능과 활동은 깨어지거나 중단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신앙에 따라서 하나님의 수면이라는 표상은 구약성서에서 철저히 부정되고 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깨시라는 외침이 드물게 나타나기도 한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시 44:23; 참조. 시 7:6; 35:23; 59:4 등). 이러한 외침은 하나님이 주무시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전혀 없어 보이는 고통의 때를 드러내는 표현일 뿐이다. 야웨 하나님은 절대로 주무시지 않으신다. 우리의 상황이 그렇게 느끼게 할 뿐이다. 이에 비해 인간의 수면은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을 한 사람들에게 깊은 잠으로 보상 하신다: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전 5:12). 하나님은 특히 삶이 정상적이지 못한 경우 불면을 통하여 인간에게 경고하시기도 한다: “주께서 나로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시 77:4). 인간의 수면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기도 하다: “야웨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따라서 정상적인 수면은 바른 신앙의 표시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요나는 배를 타고 도피하는 중에 폭풍을 만나 배가 전복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같은 배를 타고 있었던 이방선원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공포에 빠져버렸다(욘 1장). 마지막으로 수면은 생명력의 원천이기도 하다(왕상 19:5∼8). 엘리야는 갈멜산에서의 승리 이후 찾아온 공허함과 탈진 상태에 빠져 자살 충동까지 느껴야 했지만 하나님의 수면 치료법에 의하여 원기를 회복하고 호렙 산에서 제2의 소명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사명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사람이 눕고 자고 깨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섭리 안에 속한 것이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야웨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시 3:5).
  • 2005.01.15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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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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