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철 교수의 순복음신학
신문철 교수의 순복음신학 Ⅷ
  • 삼중축복 신학은 가장 성경적인 구원 개념 내포 구원은 우주적이며 포괄적인 의미를 지녀야 영혼구원, 우주만물들까지 회복되는 역사 기대 순복음 신학의 구원론은 영혼구원만을 주장하는 단편적인 신학과는 달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며 강건함을 추구하는 “삼중축복의 신학” 혹은 “전인구원의 신학”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인구원의 순복음 신학은 그 신학적 기초를 성경과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두고 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구세주(savior)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Lord)이 되신다. 그 분은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사(마 28:18) 하늘 보좌에 앉으심으로 오늘도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서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그 분은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그분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만유의 왕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주되심(Lordship)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 세상에서 모든 삶의 영역들 속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또한 온 세상의 주가 되시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요 14:16).이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인적 구원에 이르게 됨과 동시에 하나님은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축복을 허락하신다. 이와 같이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 위에 탄생한 순복음 신학의 삼중축복의 교리는 가장 성경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제시되는 구원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설명되기도 하는데(막 10:24∼26), 그렇다면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 만큼이나 우주적이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 19장 28절 “세상이 새롭게 되어” 나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의 말씀 가운데서 제시되는 구원의 개념을 통하여 한 개인의 영혼 구원의 문제는 좀 더 폭넓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 구절들 속에서 구원이란 우주적으로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역사에 동참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신자의 영혼을 지옥불에서 끄집어내는 사건만은 결코 아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측면임에 틀림없지만, 그와 함께 신자의 육신도 새로워질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우주와 사회와 만물이 모두 죄와 고통과 모든 저주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워지는 것까지도 바라보는 사건이다(롬 8:19∼23). 삼중축복과 전인구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복음전도의 목표와 비전은 죄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의 우선성과 중요성을 잃어서는 않되지만, 거기서만 머물지 말고 영혼구원의 사명과 더불어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육신과 사회적 차원 그리고 온 우주 만물들까지도 회복하며 새롭게 하는 사명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인적 구원관은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의해 그 의미가 상당히 왜곡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사고와 병폐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자들이 그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원론적 사고는 영과 육을 서로 대립되는 원리로 이해한다.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이 따로 있으며, 육적인 일은 영적인 일에 비해 열등하거나 적은 가치만을 가진다. 영적인 일은 거룩하지만 육적인 일은 세속의 일일뿐이다. 교회 일은 거룩한 일이지만 직장에서의 일은 그러하지 못하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교회 바깥의 세상(범사의 형통)을 등한시하게 하며 육적인 일(강건함)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갖게 한다. 이원론적인 구원관은 육신을 정죄하고 물질을 악하다고 보는 편향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땅의 삶보다는 내세를 지향하며, 범사의 형통과 육체의 강건함 보다는 영혼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삶이다. 이런 이원론적인 구원관은 일면 타당성을 갖는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상대화하며 소위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문제는 이 세상은 불타 없어져 버릴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는 일면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육신적인 일은 무가치하다는 생각으로 이 땅에서의 전인적 구원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이런 생각들을 통해 예배와 생활의 괴리가 오고, 신앙과 삶의 분리가 오게 된다. 오늘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들이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강조 때문에 그 믿음은 또한 온전한 삶보다 전인적인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부분을 간과하여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게 하는 (도구적)수단인 믿음이 참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반드시 우리를 온전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여 “우리의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케하는” 전인적 구원관으로 인도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순복음 신학이 추구하는 삼중축복의 신학은 가장 성경적인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한세대 신학부 신문철 교수
  • 2003.12.24

    신문철 교수의 순복음 신학 - 기독론
  • 완전한 신인(神人)으로 인류의 구원자 예수 사도신경과 초기 교부들의 신조 믿고 고백해 사망권세 이기고 영원한 나라 선물로 주신 메시아 순복음 신학의 기독론은 사도신경에서 진술되었고,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주후 381년)에서 다듬어졌으며, 칼케돈 신조(주후 451년)에서 완성된 정통적인 기독론을 믿고 고백한다. 칼케돈 신조에서 완성된 기독론은 “신성과 인성이 완전하여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시며 참 하나님이시고, 성령으로 잉태되사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셨지만 죄는 없으신 참 인간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한다” 칼케돈 신조서에서 고백된 기독론은 이성적 영혼과 육체를 가지시고 우리와 같이 완전한 인간(눅 2:7, 40, 52; 요 19:28; 마 4:2, 11)이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요 1:1, 10:30, 20:28; 롬 9:5; 빌 2:6; 골 2:9)이심을 고백하는 전통적인 교리이다. 하지만 칼케돈 기독론은 그 신앙의 뿌리를 사도 베드로의 신앙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에 두고 있다.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은 첫째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 곧 메시아로서 온전한 인간이 되셔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이며, 둘째로 비록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시지만,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음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다는 고백이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로 오셨고(사 53장),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하지만,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음을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므로 우리의 부활의 주가 되셨다. 할렐루야! 순복음 신학은 성경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첫째, 나사렛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는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예수의 탄생, 삶,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가 인간의 육체적 특성을 가지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는 유소년기를 거쳤다(눅 2:52). 그는 배고픔(마 4:2), 목마름(요 4:7; 19:28), 피곤함(요 4:6) 등을 보통 사람들처럼 느끼셨고, 육체적 고통을 당하면 아파하셨다(요 19:34). 그는 사랑을 느낄 줄 알았고(요 11:3), 기쁨도 알았으며(요 15:11; 17:13), 슬퍼 괴로워하기도 하고(마 26:37), 때로는 울기도 하셨다(요 11:35).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사 53:3∼4)고 하였다. 사실 신약성경의 사도들에 의하여 이사야 52장 13절에서 53장 12절은 고난받는 메시아론의 근거본문으로 해석되었고, 나사렛 예수의 죽음을 대속적 죽음이라고 해석한다. 메시아이신 나사렛 예수께서는 인간이 지은 죄의 형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고후 5:21; 히 10:12)로 드림으로써, 죄와 형벌이 자신에게 전가되게 하시고, 죄인들을 위한 의로움의 근거가 되셨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롬 3:24).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atonement)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게 하시는 화해제물(propitiation)로 하나님과 인간의 온전한 화해를 이루셨고(요일 2:2; 4:10), 우리의 저주와 형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둘째, 나사렛 예수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시편 2편에서 “너는 내 아들이다”라고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부활을 통해 나사렛 예수를 능력의 아들로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가 본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예수의 족보를 소개하는 대신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요,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심을 선언했고(요 1:1), 그가 창조주이시요(요 1:3), 생명자체이시며(요 1:4), 생명을 주러 오신 분(요 10:10)이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고백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빌 2:6)이시고,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골 1:15), 그리고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라고 했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메시아)이신 나사렛 예수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실 수 있었고, 그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도 그의 부활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도록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첫 열매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 있고(고전 5:56; 롬 8:35), 새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되며(롬 4:25), 예수가 부활의 첫 열매이기에 우리 자신의 육체의 부활을 확신케 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아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한세대학교 신학부 교수
  • 2003.12.24

    인간론
  • 하나님의 영광된 형상으로 피조된 인격체 인간은 하나님의 생기 받은 의존적 존재 부활된 예수 안에서 오중복음 삼중축복 누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 질문에 대하여 학자들은 인간을 자신이 추구하는 바의 완성을 위해 이 세상 너머의 그 무언가에 의존하고 있는 존재로 결론을 짓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온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선포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피조된 피조물임을 선포한다(창 1:1, 26∼27). 필자는 이 글을 통하여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 파괴, 즉 죄에 대하여 논하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고자 한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으로 피조된 인격체요, 영/혼/육의 통일체요, 공동체적 존재이다. 첫째,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하나님이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 만드신 영광스런 피조물이요(시 8:4),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갖춘 인격체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흙으로 만드시고(시 103:14) 그 코에 호흡을 불어넣으셨다(창 2:7).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은 하나님이 직접 빚어 코에 호흡을 불어넣으신 까닭에 의존적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 시편 기자가 고백한 대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 139:7).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으면 사람은 사람다울 수가 없고 삶도 무의미하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고백하기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어야만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영육통일체의 전인적 존재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살전 5:23; 히 4:12) 영육통일체이기 때문에, 영혼만이 소중하고 육체는 덜 소중할 수는 없다. 전통적 신학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주장한다(이분설). 이분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하면서,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것은 고상하고 선한 반면에 육적인 것은 저급하고 악하며 육체를 죄의 통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비물질적인 영혼과 물질적인 육체로 구성되어 있으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있는 형태로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죄의 삯인 죽음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분리되는 기간이 있지만, 심판 날에 육체가 부활하여 신령한 몸을 입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영/혼과 육체는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사람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성경적 가르침은 영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축복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은 영적인 영역뿐만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범사의 영역에까지 확대 되어야 한다. 순복음 신학은 성경을 따라서 인간의 영혼과 범사 그리고 육의 전인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다(요한삼서 1장 2절). 셋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사귐과 섬김을 나누는 사랑의 위격 공동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도 서로 간에 섬김과 사귐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야 하는 공동체적 존재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창세기 본문(1:27)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공동체적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인간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께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죄를 범한 것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죄는 온 인류에 유전되었고(신학적 용어로 원죄라고 함),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는 파괴되었으며, 모든 인간은 타락된 존재로 이성과 양심이 어두워져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롬 3:11),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롬 1:28), 그 생각이 허망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아니하며(롬 1:21),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자신과 쾌락과 돈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딤후 3:1∼4). 이러한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며(출 23:22; 사 63:10), 죄책감에 괴로움을 당하고, 하나님의 형벌 가운데 육체적인 죽음(롬 5:12; 히 9:27)과 영적인 죽음을 맞보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고, 범사가 저주 안에 있으며, 육체가 병들어 죽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통해 전가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는데(마 1:21; 요 3:16),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며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셨으며(골 1:15), 그 안에 죄도 없으시고 흠도 없으셨지만(히 4:15; 벧전 1:19; 요일 3:5),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죄사함을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것이다(롬 8:29).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삼중축복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된 것이다(고후 5:17). 할렐루야! 한세대 신학부교수
  • 2003.12.24

    신문철 교수의 순복음 신학의 미래
  • 전인구원의 신앙, 신학정립이 중요 50년간 한국 교회 성령 운동 주도 신학적 5대교리 틀 갖춘 삼중축복 인류위해 아들주신 성부 의지해야 순복음교회는 지난 50년간 한국교회에서 성령운동을 주도하였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전인적 구원의 복음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다. 순복음 신학은 서구신학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만족하기 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문화와 상황 속에서 성경을 통해 그것을 재해석하여 우리의 신학으로 정착시킨 독창적이고 성경적 신학이다. 우리 교단은 지난해 희년을 맞이하였다. 희년을 맞이한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정립할 필요성을 인식한다. 순복음 신학의 미래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전인구원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것에 달려있다. 순복음 신학의 핵심은 요한삼서 1장 2절을 바탕으로 탄생한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케 되는” 삼중축복의 신앙이다. 순복음의 삼중축복 신앙이 여의도순복음교회와 한국교회의 부흥에 큰 기여를 하였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부흥에 큰 기여를 한 삼중축복의 교리는 다음과 같은 5대 교리의 신학적 틀을 갖고 있다. 삼중축복의 1대 교리는 인간의 “삼중타락”을 강조한다. 전인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영역까지 병들게 하였다. 그래서 전인류는 영적죽음의 상태에 처하게 되었고, 환경적 저주(창 3:17∼18)와 육체적 죽음(창 3:19)의 삼중타락 안에 있게 되었다. 삼중축복의 2대 교리는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교리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영적죽음, 환경적 저주, 육체적 죽음의 삼중타락 안에 있는 전인류는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없이는 절대로 삼중타락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속물로 내놓으심으로 죽어야 마땅하고 저주받아야 마땅한 우리를 삼중타락의 저주에서 구원시키셨다. 좋으신 하나님은 홀로 존재하시는 쓸쓸한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성부 하나님이 좋으신 이유는 그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삼중타락으로 죽어 마땅한 우리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삼중축복의 3대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적 대속의 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셨고(사 53:5), 환경적 저주를 제거하셨고(갈 3:13), 육체적 질병을 대속하셨다(사 53: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은 영적구속, 생활적 축복, 육체적 건강을 주시는 삼중구원이다. 삼중축복의 4대 교리는 성령(충만)의 은혜 교리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삼중적으로 타락한 전인류는 좋으신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적 대속의 은혜로 삼중축복을 받으려면 먼저 새롭게 거듭나야 할 것이다(요 3:3). 인간은 삼중적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초자연적으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만이 삼중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와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 수 있다. 성령은 예수를 드러내고 증거하며,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치시며 우리를 삼중축복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히 예수께로 인도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삼중축복의 5대 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인적 구속교리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삼중 타락한 인간은 좋으신 하나님(성부)의 절대적 사랑과 십자가에서 우리의 삼중적 저주와 죄를 대속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좋으신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삼중축복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우리가 삼중축복을 받는 것은 인간의 선행에 달려있지 않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과 사역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삼중축복의 복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로서 전인적 구속 사역에 관한 것이다. 순복음 신학은 삼중축복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신학적 명제 “좋으신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설명한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한 축복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순복음 신학의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적 대속의 은혜와 삼중축복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자신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위해서 화목제로 보내시고(요일 5:10), 성령을 보내사(요 15:26) 우리가 그에 의해 거듭나고(요 3:5) 능력을 받도록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성부)”을 믿는 삼중축복의 신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한세대 신학부 교수
  • 2003.12.20

    신문철 교수의 순복음 신학의 종말론
  • 재림 때와 시기는 아무도 알 수 없어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으로 구분 종말 전 … 전 세계에 복음 전파 깨어있는 신앙으로 항상 기도해야 순복음 신학의 중심 개념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다. 그리고 오중복음의 다섯 번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복음이다. 이와 같이 순복음 신학의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318번이나 언급하고 있는데, 매 25절에 한 번씩 언급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성경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이중재림, 즉 초림과 재림을 분명히 구별하지 않고 있으나 재림을 말한다고 해석되는 구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욥기 19장 25절은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다니엘 7장 13∼14절에는 “내가 또 밤 이상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생략)”기록하는 등 성경은 주님의 초림이 있은 후 재림이 있을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예수님 자신은 재림에 대하여 친히 여러 차례에 걸쳐 말씀하셨다(마 24:30, 25:19, 26:64, 요 14:3). 특별히 요한복음 14장 2∼3절에 주님의 재림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순복음 신학의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으로 구분한다. 공중재림은 그리스도께서 은밀히 그의 백성들을 데려가기 위하여 공중으로 오시는 것이며, 지상재림은 7년 대환난 뒤 심판주로 오시는 것이다. 공중재림에 대한 가장 명백한 성경적 진술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17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자신에게로 영접하기 위해서 공중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적으로 죽어 무덤에 있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주님이 공중재림 하실 때 무덤에 있는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신령한 몸(고전 15:40)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에게로 올려갈 것이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재림에 대한 사실은 성경에서 매우 강하고 명백하게 주장되고 있지만, 재림의 정확한 때는 말하고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몹시 궁금해 하며 호기심을 갖는다. 그래서 재림의 정확한 날짜를 계산해 보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물론 그때마다 실패로 끝을 맺곤 하였다. 실제로 성경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정확한 때를 우리가 모르며 또한 확인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그러므로 성경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세상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다시 오신다는 그 사실 뿐이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하고 주님께 물었다. 제자들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징조를 연결시켰으며, 주님 자신도 설교 중에서 재림의 징조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첫째, 성경은 주님의 재림 전에 천국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마 24: 14). 둘째, 성경은 재림 전에 이스라엘의 회심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11∼32절은 이스라엘의 많은 수가 세상 끝 날에 주님께 돌아오리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셋째, 성경은 불법의 사람인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3) 마지막으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앞서 몇 가지 표적들이 있겠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각처에서의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을 나타낼 징조들을 말씀하시고,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눅 21:36)고 하셨다. 재림의 임박성은 우리가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직 마지막 때에 깨어 기도하고 있는 자들만이 다음과 같은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한세대 신학부 교수
  • 2003.11.15

    ⑩ - 순복음 신학의 교회론
  • < a> 교회, 참된 공동체의 모형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으로 시작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성과 관계 세상 속에서 복음전도 사명 감당 ‘교회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현대 신학에서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필자는 교회를 정의하고자 할 때 현대 신학에서 사용되는 교회의 기능에 대한 문제보다 교회의 본질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역동적 공동체 개념으로서 교회를 정의하고자 한다.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 사건부터 시작된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설교하기 시작하였고,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마 28:16∼20; 행 2:4).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의 신앙공동체로서 교회가 본격적으로 탄생하였다(행 2:42∼47). 오순절 날 성령의 강림으로 성도들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의 교제 공동체가 되었다. 성도들은 성령 안에서 서로에 대한 참여와 서로에 대한 존중으로 각자의 소유와 존재의 모든 것을 공유한다. 그러나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탄생한 성도들 간의 공동체적 교제는 이차적인 것이다. 성령은 일차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성부와 성자와의 교제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면 거짓이 없고 빛 가운데 행하게 된다(요 1:6∼7). 그러므로 성도들은 일차적으로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고, 동시에 성도 서로간의 사귐과 참여가 있게 된다. 따라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 부름 받은 교회는 평범한 실재가 아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이 사귐은 성령의 매개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 사이의 신적인 교통 가운데 참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는데 성령의 강림으로 탄생한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그것은 곧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성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교회의 모든 공동체적 요소는 이미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현대 신학자들은 동방의 갑파도키아 교부들이 발전시킨 상호공유적(perichoretic) 관계로서 위격의 개념(the concept of person)을 받아들여, 그것을 현대적 개념으로 재해석하면서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역동적인 “존재 공동체”라고 말한다. 한 본질이시며, 세 분의 위격체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부터 역동적으로 서로 사랑하시고 섬기시며 교제하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역동적인 상호교제 가운데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의 역사 속에서도 자신의 공동체적 본질을 계시하신다. 이러한 존재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즉, 존재 공동체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참된 공동체의 모형으로서의 교회를 정의하고 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존재 공동체를 이루고 계시다면 교회는 사랑을 실천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 즉 성령을 통해서 사랑으로 함께 연합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이같은 사랑의 행위는 이웃과 세상을 향한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난다. 둘째, 삼위 하나님은 각각 자신만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섬기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성부는 성자를 사랑하시고 성자는 성부의 뜻에 따라 우리 죄의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셨다. 성령께서도 이 땅에 자신의 명예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이러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온전한 삼위일체적 섬김의 관계는 교회 공동체적 영성의 표본이 되어 교회의 공동체 속에 투영된다.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상호교제와 섬김의 존재 공동체라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image)인 교회도 이를 따라 온전한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같이 서로를 세워주며, 봉사와 섬김의 삶 속에서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인류가 구원 받기를 바라고 계신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세워진 교회는 바깥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참된 공동체로서 현존하는 일은 복음전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신문철 교수 (한세대 신학부 교수)
  • 2003.10.19

    9 - 순복음 신학과 성령세례
  • < a>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 기대 교회 부흥은 초대 교회 열심 회복되어야 하늘나라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완성 순복음 신학은 그 신학적 기초를 성경과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두고 있으며, 영혼구원만을 주장하는 단편적인 신학과는 달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며 강건함을 추구하는 “삼중축복의 신학” 혹은 “전인구원의 신학”이다. 이러한 전인구원의 순복음 신학의 가장 뚜렷한 특성중의 하나는 중생 (born again)과 성령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의 구별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성령세례는 중생 후에 경험하는 신적 임재의 체험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세례를 받은 외적 증거로 나타난다. 또한 성령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함으로써 보다 능력 있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도록 하는 사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순복음 신학은 20세기 초에 일어난 오순절주의에 그 중요한 신학적 기초를 두고 있다. 순복음 신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성령세례의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때 가능하다. 중생이 새생명을 얻어 변화된 신분의 단계라고 한다면,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중생한 자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받는 체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통해 성령세례는 능력을 얻어 복음증거에 연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성령세례는 그 기본적인 중생의 역사에 한 걸음 더 전진하여 일어나는 하나님 은혜의 두 번째 역사이다. 우리는 성령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을 가질 수 있으며 능력 체험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이룩할 수 있다. 순복음 신학이 강조하는 성령세례는 단지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신자들이 꼭 받아야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성령에 대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사도행전 1장 4∼5절과 1장 7∼8절에 나타나 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그리고 “성령이 권능으로 너희에게 임하시면”(행 1:7∼8)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씀 하셨다.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전에 “능력 받기 위한” 성령세례(예수님은 그의 인성으로 우리를 위해서 성령을 받으셨다)를 기다리신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으로 세례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눅 3:22), 자신이 성령세례를 베푸시는 분이 되셨다(막 1:8). 성령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4:1) 광야로 시험받으러 가셨고, “성령의 권능”(눅 4:14)으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다(눅 4:18). 그리고 이적과 권능을 행하시며(마 12:25∼27), 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축출하셨다. 성령에 의한 예수의 탄생은 그리스도인의 중생과 병행적 관계를 갖고 있으며, 예수의 세례 때 비둘기 같이 임하신 성령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능력 주시기 위해 임하시는 영으로 중생한 그리스도인에게 “증거(선교) 혹은 봉사를 위한 능력 부여”와 연관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성령은 오순절 날에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강림하시어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행 1:8) 여러 가지 모양으로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다. 예를 들어,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큰 권능으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 있도록 충만하게 역사 하셨고(행 4:8, 31, 6:10; 살전 1:5; 벧전 1:12), 그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증거 하시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기사와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도 하였다(행 6:8). 초대교회의 부흥은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여 권능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늘날 교회의 영적 회복과 부흥은 초대교회처럼 성령세례를 체험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오순절 날 성령은 제자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합심하여 기도한 결과였다고 증거하고 있다. 사도행전 1장 12∼14절은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내려와 저희가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곧이어 나오는 사도행전 2장 1절의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다”는 것은 그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순절 날 성령은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함께 모여 기도에 힘쓰는 사람들에게 강림하셨다. 우리는 함께 모여 기도하며, 말씀을 듣는 곳에 성령이 강림하는 사건을 여러 번 발견한다. 사도행전 4장 24∼31절은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기도를 한 후에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가르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70∼90년대의 풍성한 은혜의 시대를 보내고 이제 교회의 존립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더구나 최근 주 5일 근무제의 실시를 앞두고 분명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은 초대교회 같이 함께 모여서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 전심으로 기도하고, 성령세례를 받고 능력을 받아서 성령에 의해 온전히 자신이 쓰임 받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능력이나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임하고 확장되고 완성된다. 한세대 신학부 교수
  • 2003.09.20

    신문철 교수의 순복음신학 Ⅷ
  • < a> 삼중축복 신학은 가장 성경적인 구원 개념 내포 구원은 우주적이며 포괄적인 의미를 지녀야 영혼구원, 우주만물들까지 회복되는 역사 기대 순복음 신학의 구원론은 영혼구원만을 주장하는 단편적인 신학과는 달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며 강건함을 추구하는 “삼중축복의 신학” 혹은 “전인구원의 신학”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인구원의 순복음 신학은 그 신학적 기초를 성경과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두고 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구세주(savior)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님(Lord)이 되신다. 그 분은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사(마 28:18) 하늘 보좌에 앉으심으로 오늘도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서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계신다. 다시 말해서, 그 분은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그분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만유의 왕이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주되심(Lordship)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 세상에서 모든 삶의 영역들 속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또한 온 세상의 주가 되시는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요 14:16).이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인적 구원에 이르게 됨과 동시에 하나님은 성령의 권능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축복을 허락하신다. 이와 같이 정통적인 삼위일체 교리 위에 탄생한 순복음 신학의 삼중축복의 교리는 가장 성경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제시되는 구원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도 설명되기도 하는데(막 10:24∼26), 그렇다면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 만큼이나 우주적이며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 19장 28절 “세상이 새롭게 되어” 나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의 말씀 가운데서 제시되는 구원의 개념을 통하여 한 개인의 영혼 구원의 문제는 좀 더 폭넓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 구절들 속에서 구원이란 우주적으로 새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역사에 동참하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신자의 영혼을 지옥불에서 끄집어내는 사건만은 결코 아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한 측면임에 틀림없지만, 그와 함께 신자의 육신도 새로워질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우주와 사회와 만물이 모두 죄와 고통과 모든 저주로부터 해방되고, 새로워지는 것까지도 바라보는 사건이다(롬 8:19∼23). 삼중축복과 전인구원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복음전도의 목표와 비전은 죄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의 우선성과 중요성을 잃어서는 않되지만, 거기서만 머물지 말고 영혼구원의 사명과 더불어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인간의 육신과 사회적 차원 그리고 온 우주 만물들까지도 회복하며 새롭게 하는 사명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인적 구원관은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의해 그 의미가 상당히 왜곡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사고와 병폐에 대해서는 많은 신학자들이 그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원론적 사고는 영과 육을 서로 대립되는 원리로 이해한다.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이 따로 있으며, 육적인 일은 영적인 일에 비해 열등하거나 적은 가치만을 가진다. 영적인 일은 거룩하지만 육적인 일은 세속의 일일뿐이다. 교회 일은 거룩한 일이지만 직장에서의 일은 그러하지 못하다. 이러한 이원론적 사고는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교회 바깥의 세상(범사의 형통)을 등한시하게 하며 육적인 일(강건함)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갖게 한다. 이원론적인 구원관은 육신을 정죄하고 물질을 악하다고 보는 편향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땅의 삶보다는 내세를 지향하며, 범사의 형통과 육체의 강건함 보다는 영혼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삶이다. 이런 이원론적인 구원관은 일면 타당성을 갖는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을 상대화하며 소위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문제는 이 세상은 불타 없어져 버릴 세상이기에 이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는 일면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육신적인 일은 무가치하다는 생각으로 이 땅에서의 전인적 구원의 삶을 포기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이런 생각들을 통해 예배와 생활의 괴리가 오고, 신앙과 삶의 분리가 오게 된다. 오늘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들이 오직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에 대한 강조 때문에 그 믿음은 또한 온전한 삶보다 전인적인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부분을 간과하여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게 하는 (도구적)수단인 믿음이 참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반드시 우리를 온전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여 “우리의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케하는” 전인적 구원관으로 인도하는 믿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순복음 신학이 추구하는 삼중축복의 신학은 가장 성경적인 구원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한세대 신학부 신문철 교수
  • 2003.08.22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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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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