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환 목사의 주제별 성경연구
김삼환목사의 주제별 성경연구
  • < a> 영지주의를 근본적으로 대적하는 순복음의 영성과 신학 전인구원 강조하며 육체와 물질 모두 선한 것 인정 영지주의, 영적인 면 강조하며 예수의 성육신 사건 부정 성령의 순복음적 역사, 체험적 생활로 영지주의 견해 배격 성경은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요일 4: 2,3). 사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치 않았던 영지주의자들은 기독교회를 괴롭혔던 이단 중 가장 위협적인 이단이었다. 영지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다양하나 영지주의란 페르시아의 이원론, 동양의 신비주의, 바벨론의 점성술, 헬라철학 등이 혼합된 사상체계로 볼 수 있다. 이 사상이 최대의 영향력을 가진 것은 135-160년경이었지만,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는 이 사상은 기독교회사 전반에 걸쳐 정통적인 기독교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왔다. 영지주의는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시몬부터 시작해서 초기 기독교회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케린터스, 사토닐루스, 카르포크라테스, 바실리데스, 발렌티누스, 마르시온 등의 계보를 지니고 있으며 12세기와 13세기 전반에 걸쳐 이태리, 남부 프랑스 등지에서 나타났던 이단 카타리파의 이원론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영지주의는 선과 악이 처음부터 둘로 분리되어 있으며 선이 악을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보장이 없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영만을 선한 것으로 보고 나머지 물질이나 육체 등은 악한 것으로 보고 있다. 헬라적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이나 육체를 죄악시하고 비실재적인 것으로 본다. 그들은 물질세계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어떤 저급한 신적 존재가 실수를 범한 결과로 생겨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정통적 기독교의 창조론을 반대한다. 즉 그들에 의하면 물질이나 육체는 악하고 비실재적인 것이며 구원의 하나님과 창조의 하나님은 서로 다른 별개이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실제의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가현설(假現說), 즉 그리스도가 가짜 육체를 지니고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 구약을 공히 경전으로 삼고 있는 우리 기독교에서는 구원의 하나님이 곧 창조의 하나님이시며 창조의 하나님이 곧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이나 육체도 그 자체로는 선한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는 없으시나 우리와 같은 육체를 지니고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오순절적이고 순복음적인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 임하면 영지주의가 얼마나 잘못된 사상인가를 우리의 눈으로 목도케 해준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선교여행 중 행한 여러 신유와 기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은사중지론자로 잘못 알려진 어거스틴도 사실은 하나님의 기적이나 신유가 자기 때에도 계속되어지는 것임을 나중에는 인정하게 되었다. 오늘날에서도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적이나 신유를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가시적인 것으로써 우리 육체로 체험하는 기적이나 신유는 사실이나 물질, 육체 등의 차원을 고려하지 않고 영적 의미의 차원만을 고려하는 영지주의적 입장에서는 그 진정함이 아예 생각되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즉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가시적이고 체험적인 기적이나 신유는 영지주의가 그 근원에서부터 헛되고 잘못된 주장이라는 반증을 교회사에 면면히 제공해 왔다. 결국 오늘날 나타나는 성령의 순복음적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이론적으로만 영지주의적인 주장을 대적케 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체험적 생활로 영지주의적 견해를 물리치게 한다. 순복음 영성은 육체와 물성(物性)에 대해 선의 가치를 부여한다. 이는 온갖 영지주의적 형태에서 나타나는 선, 악의 이원론적 사고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순복음의 삼중축복 영성은 전인구원을 강조함으로써 그 어느 교파의 영성보다도 육체와 물질 자체를 선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육체와 물성을 선한 것으로 규정하는 기독교 정통 신학 사상을 오늘날에 되살려 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영성이다.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근본주의적 퓨리터니즘도 신학적으로는 육체와 물질 자체를 선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영혼구원만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조장함으로써 이러한 선의 가치를 삶의 현장에서 체험케 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영혼구원만이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어졌던 한국교인들의 신앙 속에서는 영지주의적 유령의 유혹에 빠질 위험성이 부지불식간에 자리잡아 왔던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창조신앙과 함께, 온전한 전인구원을 강조함으로써 아직도 망령처럼 배회하는 영지주의 사상을 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체험적으로도 물리쳐야 한다. 국제신학연구원장
  • 2002.11.01

    주제별 성경연구6 - 은혜
  • < a>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 은혜의 결정판 하나님은 ‘현실태’보다 내면의 ‘가능태’를 보심 십자가 은혜에 대해 보답하는 성도의 삶 절실 하나님은 그 성품이 은혜로우신 분이시다. 시편 116편 5절에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은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것이다. 은혜를 율법과 비교해 볼 때 바로 이 점이 두드러진다. 즉 율법은 조건적이나 은혜는 무조건적이다. 율법의 정신을 대표하는 신명기 28장 1절과 15절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복을 받게 되는 조건과 저주를 받게 되는 조건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은혜는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에 대해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는 죄악에 찌든 우리의 지금의 모습, 즉 우리의 현실의 모습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롭게 될 미래의 모습, 즉 우리의 가능태를 미리 바라보시고 그렇게 불러 주시는 것이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서 받아주시는 것이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는 위선적일 필요도 없고 우리의 모습을 변장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현실태 ‘아브람’이나 ‘사래’에게서 가능태 ‘아브라함’이나 ‘사라’를 미리 본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것은 우리를 단순히 그 ‘무엇’으로 보시지 않고, 우리의 그 ‘무엇’ 속에 들어 있는 새로운 그 ‘무엇’을 미리 바라보신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일곱 귀신 들렸던 마리아는 나중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이 여인에게 처음 나타나실 만큼 위대한 여인이 되었다. 예수님은 일곱 귀신 들렸던 마리아를 처음 보셨을 때, 귀신들려 흉칙하게 꼬부라져 있는 모습 속에 숨어 있는 전혀 다른 모습, 즉 귀신들이 모두 다 떠나가고 위대한 성녀가 된 모습을 미리 보신 것이다. 셋째로, 은혜로 말미암은 성육신과 십자가는 하나님의 인권 선언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죄를 위해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 즉 하나님을 위해서 사람이 제물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즉 성자 하나님께서 못 박히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인권선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만큼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왜 십자가를 택하셨는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의 은혜만이 사람을 자발적으로 변화되게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율법적으로 강제하거나 강요하는 일, 혹은 사람을 겁먹게 하는 일로써는 절대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의 은혜는 강제가 아닌 우리의 자발적인 응답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교회는 효율성이 아니라 사랑을 중시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사랑으로 반응해야 한다.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도 지키게 된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 14장 15절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요구한다. 그런데 참된 사랑은 그 자체에 대해 충족되어 있다. 즉 사랑 그 자체가 사랑의 원인이며 사랑 그 자체가 사랑의 보상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한다. 다섯째로, 갈라디아서 5장 6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 사랑은 이타적인 것이고 공로를 남으로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는다. 또한 사랑은 무엇인가 남을 위해서 행동하게 해주는 것이다. 사랑할 때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이 두가지 사실을 종합해보면 사랑은 남을 위해서 무엇인가 행동하게 하되, 그 행위를 자랑하지 않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 할 때, 우리의 믿음은 행위없는 믿음으로 전락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행위를 자랑하지 않게 된다. 즉 모든 행위의 공로를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리게 된다. 결국 사랑으로 말미암아 행위와 은혜가 함께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은 흔히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은혜의 요구’와 ‘행위의 요구’를 다 함께 이루어 낸다.
  • 2002.05.04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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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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