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 목사의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
<20> - 선교학(끝)
  •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3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편집자 주> 크리스천을 복음증거의 자리로 인도하는 도구 이번 주에는 신학의 한 분야인 선교학에 대해 살펴본다. 선교학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인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한 방법을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선교학에 대한 정의, 기초, 연구 방법, 주제, 중요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1. 선교학에 대한 정의 선교학을 복음 증거의 방법에 대한 연구라고 할 때, 그 다양한 학문적 연계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할 때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각기 다양한 배경을 지닌 가운데 독특한 문화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그들에 삶의 자리에 대한 많은 것들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교학은 조직신학 성서신학 역사신학 문화인류학 사회학 등 여러 학문과 연계되고 결합됨으로써 복음 증거의 이론 및 실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라고 정의할 수 있다. 2. 선교학의 기초 선교학은 복음 증거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에 기초한다. 1) 구약 성서적 기초 선교학은 먼저 구약성서에 그 기초를 둔다. 우리는 흔히 구약성서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구약을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책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약 시대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도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으며 인간 세상의 역사 가운데 참여하셨다. 구약에도 신약처럼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은 구약의 선교의 기초를 제공해 준다. 구약은 선교에 관한 책으로 인간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 행위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계획, 즉 하나님의 선교가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출애굽기, 룻기, 이스라엘 왕정 시대의 기록인 역사서들, 예언서들(특히 요나서) 그리고 심지어 시편 등의 성문서에서도 나타난다. 이처럼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 있으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나타나 있다. 2) 신약 성서적 기초 선교학은 또한 신약 성서에 기초하고 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교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교회가 설립되면서 교회를 통해 지속되었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하나님의 선교는 주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된다. 신약성서의 선교는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신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선교는 제자들에게 내리신 선교 대위임령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성령 강림에 의한 제자들의 선교 행위는 사도행전에 잘 나타난다. 사도행전은 선교의 책이라 할 만큼 선교가 강조되고 있는데 이방 지역으로 향한 복음 증거의 여정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울서신과 일반서신에도 복음 증거로서의 선교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신약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의 선교 행위가 나타나 있는 것을 보게 된다. 3. 선교학의 방법론 선교학의 연구 방법은 다양하나 크게 문헌 연구와 경험 연구로 나눌 수 있다. 1) 문헌 연구 - 선교에 대한 여러 문헌들에 대한 분석과 검토를 통해 선교의 이론 및 역사에 대해 밝힌다. 특히 선교 역사에 대한 연구는 교회사와 개 교회에 진행된 선교 상황을 역사 기술적 방법에 의해 연구한다. 2) 경험 연구 - 실제 선교 현장의 사역과 관련된 체험적이고 실질적인 연구를 통해 선교 방법과 전략을 모색한다. 경험 연구는 선교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방법론으로 선교학의 독특성을 부각시키며 선교학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유용하다. 4. 선교학의 주제 선교학은 다양한 학문의 영역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선교현장에서 효과적인 복음전달을 모색한다. 선교학이 포함하는 분야는 일반적으로 선교신학 선교역사 선교문화인류학 선교사회학 등이다. 선교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과 더불어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에 알리는 하나님의 선교, 그리스도의 선교, 성령의 선교, 그리스도 제자들의 선교, 교회의 선교 등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선교역사는 초대교회, 중세교회, 근대교회, 현대교회 등 교회사에 나타난 선교를 다룬다. 선교문화인류학은 선교를 타문화권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으로 문화적응, 세계관의 문제, 언어습득과 소통, 선교전략, 상황화(토착화) 등에 대해 연구한다. 선교사회학은 선교와 사회적 상황과의 관계성을 파악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교회성장, 전도방법, 리더십 등이 속한다고 볼 수 있다. 5. 선교학의 중요성 선교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①선교학은 오늘의 선교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성경적 이해를 지니게 한다. ②선교학은 변화를 통해 새로운 교회 역사를 이루어 나가게 한다. ③선교학은 선교 지원자들에게 필요한 선교 사역의 방법과 성경적 선교 전략들을 제공한다. ④선교학은 신학교육이 편협한 지역주의를 벗어나 전 세계를 향한 열린 교육이 되게 한다. ⑤선교학은 전체 신학에 영향을 주어 이를 연결하고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선교학은 모든 신학의 종결점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모든 신학의 이론적이며 학문적인 성취는 결국 복음 증거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선교학은 신학자, 목회자, 교회, 성도를 복음증거 현장으로 인도하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 바라기는 선교학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통해 복음 증거의 사명을 새롭게 하는 동시에 그 풍요로운 열매를 수확하게 되기를 소망한다.<끝> <국제신학연구원>
  • 2019.01.13

    <19> 실천신학③ - 설교학
  •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7회), ⑤실천신학(3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 <편집자 주> 설교학은 청중들에게 제대로된 말씀 듣게하기 위한 신학분야 보통 신학하면 학문적인 영역의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의 시작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신(神) 경험이라면 신학은 결코 학문적인 영역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학문적인 영역을 넘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과 맞닿아있다. 신학과 삶의 관계를 보다 심도 있게 논의하고 연구하는 신학 분과를 실천신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살펴본 조직신학, 성서신학, 역사신학의 성과들을 어떻게 성도들의 삶 속에서 구현해내고, 그들의 삶에 접목시킬 것인지,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의 삶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해지고 복된 삶이 될지를 연구하는 것이 실천신학이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는 실천신학 분과에 속하는 설교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기독교의 말씀 선포의 전통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고(창 1∼2장), 말씀을 통해 택하신 사람들을 부르셨으며(창 12:1∼4; 출 3:1∼22 등), 여전히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들의 삶의 흥망성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순종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를 통해 결정되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말씀을 선포하는 선포자들(주로 예언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끊임없이 말씀하셨다. 이런 말씀 선포의 전통은 예수님에게서도 발견된다.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을 선포하셨다(막 1:15). 그리고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치셨고 선포하셨으며, 자신의 제자들에게도 그런 말씀 선포의 임무를 일임하셨다(막 16;15). 제자들이 말씀 선포의 사역을 충실히 행했다는 사실은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오순절 성령침례의 역사를 경험한 제자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말씀 선포였으며(행 2:14∼36), 초대교회의 선교 현장에서도 말씀 선포는 계속되었기 때문이다(행 3:12∼26; 7:2∼56; 10:34∼43; 11:19∼21; 13:16∼41; 17:2∼3, 16∼31 등). 이런 말씀 선포의 전통은 기독교 역사를 통해 지금까지 면면히 흘러오고 있으며 진정한 교회의 부흥기에는 언제나 왕성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있었다. 2. 설교란 무엇인가? 조용기 목사님은 “설교란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신자와 불신자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나는 이렇게 설교한다』). 즉 “설교는 목회와 부흥, 가르침, 그리고 카운슬링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더 깊은 신앙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목회적인 역할을 하며, 전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단하고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부흥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위의 설교의 정의에서 설교의 중요한 3요소(하나님의 말씀, 설교자, 청중)와 설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설교는 인간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설교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다. 인간 설교자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이유, 그의 설교가 신적 권위를 갖는 이유도 모두 그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해 설교하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 말씀을 들어야 할 청중들 - 신자 또는 불신자 - 을 대상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청중이 있다고 해도 이 둘 사이를 이어줄 설교자가 없다면 설교는 행해질 수 없다. 그렇기에 바울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는 말씀을 통해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롬 10:14). 설교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즉 설교는 성령의 능력으로 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둘째, 성도들의 신앙을 성장시켜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서는 결코 신앙이 성장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성경 말씀에 근거한 설교를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계속해서 신앙을 성장시킬 수 있다. 3. 설교학이란 무엇인가? 설교학은 실천신학의 한 분야로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설교학의 연구 내용들은 위에서 언급한 설교의 3요소, 즉 하나님의 말씀 청중 설교자와 깊은 관련이 있다. 먼저 설교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다루는 성서신학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들은 건강한 성경 읽기와 성경적인 설교를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설교학자들은 청중들이 설교를 어떻게 듣는가에 관심을 갖는다. 청중에게 들려야 한다는 것이 설교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중들이 설교를 잘 듣도록 하기 위해서 청중들의 삶에 대한 고찰과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이론, 설교방법론 언어사용 등에 대한 연구가 요구된다. 한편 설교가 설교자에 의해 행해진다는 측면에서 설교와 설교자의 인격은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설교를 위한 설교자의 신앙생활(기도, 성령충만, 말씀묵상, 건전한 가정생활 등)과 인격성숙 등도 설교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대상 중 하나이다. <국제신학연구원>
  • 2018.12.23

    이상윤 목사의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8> 실천신학② - 예배학
  • 교회는 예배없이 존재할 수 없다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편집자 주>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에는 실천신학 분과에 속하는 예배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성경에 나타난 예배의 의미 구약성경에서 예배를 의미하는 단어는 샤하아와 아바드이다. 샤하아는 머리를 숙여 절을 하는 것으로 존경과 순종을 의미한다. 아바다는 ‘일하다’ ‘섬기다’는 의미로 영어의 서비스(service)에 해당된다. 아바다는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 지성 감성 태도 그리고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바치며 섬기는 것임을 말해준다. 신약성경에서 예배를 의미하는 말은 프로스쿠네오인데 이 말은 ‘누군가의 손에 입을 맞추다’ 또는 ‘자세를 낮추어 경배하다’는 뜻으로 상대방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라이툴기아 역시 신약성경에서 예배를 의미하는 말인데 이는 사역 경배 섬김 등을 뜻한다. 진정한 라이툴기아는 성도의 일상생활에서 믿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즉,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예배자로 사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처럼 예배와 관련된 성경의 용어들을 보면 예배란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의 고백이며 크신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에 대한 선포이고 동시에 존경과 순종의 마음을 담아 온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2. 예배의 본질과 중요성 기독교 예배의 대상은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다(출 20:3; 신 6:4).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목적이며 인간이 창조된 이유이다(사 43:7).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삶에 베풀어주신 구원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도리이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며 미래에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분명히 깨닫는 것이다.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과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온전히 연결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온 삶으로 드리는 참다운 예배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따라서 예배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예배 자체가 또 다른 무엇을 위한 통로나 도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예배를 통해 또 다른 무엇인가를 간구하거나 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예배는 결코 온전한 예배일 수 없다. 예를 들어 은혜를 받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것은 결코 순수한 것이 아니다. 은혜란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선물이지 우리가 받기 위해 겨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배가 그 자체로 목적이라고 할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만큼 큰 섬김은 없다. 또한 예배는 교회의 여러 기능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임이요 예배는 구원해주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감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곧 예배의 의미이다. 따라서 예배는 교회를 떠나 존재할 수 없고 교회는 예배 없이 존재할 수 없다. 3. 예배학이란 무엇인가? 예배학이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원리와 방법 등을 심도 있게 연구하는 신학의 한 분과이다. 예배학의 대상은 예배의 역사와 원리 예배의식 교회력 교회음악 교회건축 교회장식 등 예배와 관련된 모든 것이다. 예배학이 독립된 신학 분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7세기부터이다. 이후 19세기에는 현대 예전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배개혁운동이 일어났고 예배 역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예배학 연구는 활기를 띄게 되는데, 그 이유는 각 교파 내에서 예배 개혁운동이 결실을 보았고 세계교회운동에서 교회 일치의 신학적 기본 연구의 일환으로 예배학 연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신학이 설교 교회 예배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들을 재고할 것을 요구했고 나아가 성서학에서 초대교회 예배에 관한 연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베드로 사도 역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들을 구원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찬양)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벧전 2:9). 한편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요 4:24).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께 행해야 할 마땅한 도리이며 그 찬송과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한다. 예배학 연구를 통해 예배의 성서적 신학적 의미들을 고찰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예배내용과 예배형식을 논의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보다 신실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 2018.12.16

    <17>-실천신학 ① - 목회학
  •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7회), ⑤실천신학(3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 <편집자 주> 목자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 통해목회자의 역할과 임무를 성경적으로 제시 보통 신학하면 학문적인 영역의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학의 시작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신(神) 경험이라면, 신학은 결코 학문적인 영역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학문적인 영역을 넘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과 맞닿아있다. 신학과 삶의 관계를 보다 심도 있게 논의하고 연구하는 신학 분과를 실천신학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살펴본 조직신학 성서신학 역사신학의 성과들을 어떻게 성도들의 삶 속에서 구현해내고, 그들의 삶에 접목시킬 것인지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의 삶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하면 더 풍성해지고 복된 삶이 될지를 연구하는 것이 실천신학이다. 앞으로 3주간에 걸쳐 실천신학 분과에 속하는 목회학 예배학 설교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목회학에 대해 살펴보겠다. 1. 목회라는 말의 의미 목회학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목회’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목회(牧會)란 말 그대로 목자가 양을 치는 것을 의미한다. 목회란 하나님이 세운 교회의 목회자가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을 진리로 가르치며 양육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교회공동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목회라는 말은 영어로는 ‘미니스트리’(ministry)인데, 이 말은 ‘목사의 직’ 또는 ‘장관의 직’이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직분을 의미한다. 목회를 담당하는 목회자라는 직분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기에 목회자는 하나님으로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대로 행해야만 한다. 목회라는 말과 관련된 이상의 의미들을 종합해보면, 목회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목회자가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사람들(곧 교회)을 말씀으로 섬기고 지도하고 인도하는 것이다. 2. 성경에서 발견되는 목회 구약성경을 보면 목자 되신 하나님의 모습이 반복해서 등장한다(창 49:24; 시 78:52∼52; 80:1). 목자되신 하나님은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임지시고 사랑과 인자함으로 인도하신다(시 11:7; 렘 31:30). 특별히 시편 23편 1절은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을 통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목자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편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가 필요한 양으로 그리고 있다(시 100:3, 44:22, 119:176; 렘 23:1; 50:6 참조).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목자 되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순종한 양이다(사 53:6).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며 바른길로 돌아오길 요구하신다. 구약성경이 목자 되신 하나님의 모습을 강조하는 반면, 신약성경은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요 10:11; 벧전 5:4). 목자 되시는 주님은 양들을 부르시는 분이요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분이다(요 10:11∼16). 또한 예수님은 부름받은 사람들로 교회를 이루게 하시며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시어 그들을 인도하시고 목양하신다(골 1:18). 이처럼 신·구약성경은 목자 되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이후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의 역할과 임무를 위한 성경적인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3. 목회자의 의미 미국 감리교 신학자인 토마스 오덴은 목회자란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부름받아 안수를 받고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전을 집행하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하나님의 자기 노출에 전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양육하도록 따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에 소속된 구성원”이라고 정의한다(토마스 오덴, 『목회신학』, 89). 이런 의미에서 목회자는 단순한 직장인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신(使臣)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파자이며 진리의 해석자이다. 그렇기에 목회자의 권위는 자신이 아니라 양 떼를 맡겨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따라서 목회자가 행하는 모든 일은 목회자 자신의 권위가 아니라 목자장 되시는 그리스도의 권위로 행해지는 것이다. 4. 목회학의 의미 위에서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목회학을 정의하면 목회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목회자가 말씀으로 잘 가르치고 인도하도록 도와주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목회학이라는 말이 ‘목회신학’의 줄임말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목회학의 정의는 좀 더 넓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목회는 한 교회의 목회자가 수행하는 설교, 성례, 상담, 심방, 교회 행정, 기독교 교육, 교회 관리 등 교회활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의미한다. 한편 ‘신학’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학문이다. 따라서 목회학이란 목양의 관점에서 목회자의 활동과 기능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5. 목회학의 중요성 오늘날 영혼의 필요를 채우고 돌보는 일은 더욱 귀한 일이 되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삶은 더욱 윤택해졌지만 인간의 상태는 이전보다 더욱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목회학은 매우 중요한데 목회학에서 다루는 내용들이 목회현장에서 목회자들이 맞닥들이는 실제적인 문제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를 목회자에게 질문한다. 그 질문 앞에서 목회자는 성경적이며 복음에 근거한 대안을 제시해주어야 하고 보다 구체적인 행동지침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목회학은 이렇게 목회자들이 목회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목회적인 질문과 상황에 대해 학문적인 연구를 행하고 그에 맞는 적절한 대안들을 제시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학은 목회자들이 목회현장을 몰라서 생길 수도 있는 무지와 무경험의 부작용을 미리 막고 보다 효과적인 목양을 할 수 있도록 목회자를 돕는 학문이다. <국제신학연구원>
  • 2018.12.02

    <16> 역사신학 ⑦ - 한국교회사 3
  •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7회), ⑤실천신학(3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편집자 주> 1928년, 메리 럼시 우리나라에 오순절 신앙 전파 1953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 1958년, 조용기·최자실 전도사 교회 개척… 세계최대 교회 성장 3·1운동(1919)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자 우리 민족은 깊은 좌절과 무기력에 빠졌고 한국교회 역시 패배주의로 인해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와 같은 특출난 부흥사들이 등장하여 한국교회와 민족에게 암울한 현실을 이겨낼 힘과 희망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무렵 한국교회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강조하는 오순절 신앙을 접하게 된다. 한국에 전파된 오순절 신앙은 한국교회 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교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이러한 오순절 신앙의 대표 주자이다. 이번 주에는 한국의 기독교를 성령 충만한 기독교로 변화시켜온 한국 오순절운동의 기원과 발전,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오순절 신앙의 전래 우리나라에 최초로 오순절 신앙을 전파한 사람은 미국 출신의 메리 럼시 선교사다. 독실한 감리교인이었던 럼시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아주사거리부흥회(1906∼1909)에 참석하여 오순절 성령침례를 경험한 후 한국 선교를 열망하면서 뉴욕 로체스터에 있는 오순절 계통의 로체스터성경훈련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다. 그리고 오랜 기도와 기다림 끝에 럼시 선교사는 마침내 1928년 봄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한국 땅을 밟는다. 럼시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이후 여러 오순절 선교사들도 차례로 한국에 들어왔다. 미국 출신의 오순절 선교사인 글래디스 파슨즈와 엘프레다 오프스테드는 1930년에 영국 출신의 오순절 선교사인 엘시 메레디스와 릴리 베시는 1932년에 서울에 도착하여 럼시 선교사와 함께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오순절 선교사들이 선교 사역을 시작하면서 한국에 오순절교회가 차례차례 설립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세워진 오순절교회는 서빙고오순절교회였다. 1928년 한국에 입국하여 오순절 신앙을 전하던 럼시 선교사는 1933년 봄 허홍과 함께 서울 변두리 지역인 서빙고에 교회를 세운다. 교회 설립 초기에는 주민들의 핍박이 거셌지만 점차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훈련받은 오순절 사역자가 필요했던 럼시는 당시 일본 나고야 주재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인 존 주르겐센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박성산을 담임 교역자로 청빙했고 그 결과 서빙고교회는 장년 70명 주일 학생 200여 명에 이르는 알찬 교회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파슨즈와 오프스테드 선교사도 수창동교회를 개척한 후 존 주르겐센 밑에서 박성산과 함께 신학을 공부하던 배부근을 담임 교역자로 초청한다. 오순절 선교사들은 계속해서 한국인 오순절 지도자들과 힘을 합쳐 서울 지역에 추가적으로 4개의 오순절교회를 설립한다. 하지만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예비작업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한국 주재 기독교 선교사들을 추방하는 등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기독교 탄압 정책하에서 럼시, 메레디스, 베시 선교사는 자국의 선교사 대피 명령에 따라 1940년 모두 한국 땅을 떠나야만 했고 그들의 피와 땀으로 설립한 오순절교회들도 차례차례 문을 닫아야만 했다. 한국 초기 오순절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한국에 입국하여 활동한 오순절 선교사들이 모두 여성이었고 오순절 교단이나 선교 단체에서 정식으로 파송한 선교사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비량 선교사라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오순절운동의 토대를 놓을 허홍 박성산 배부근 같은 초기 한국인 오순절 지도자들을 발굴하고 헌신적으로 지원했다. 한국 하나님의성회의 창립 6.25전쟁 발발 직후 한국에 입국한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의 종군 목사 엘로드는 한국 내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파악한 후 1951년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보고한다. 이 무렵 박성산 목사도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알리면서 미국 하나님의성회가 조속히 한국 선교를 시작해 줄 것을 호소한다. 이러한 엘로드와 박성산의 노력의 결과로 1952년 여름 미국 하나님의성회 동양 선교부장인 오스굿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직접 조사한다. 조사를 마친 후 오스굿 목사는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한국 선교를 시작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한다. 이에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당시 일본 주재 선교사인 체스넛을 1952년 12월에 한국 선교사로 파견한다. 체스넛의 내한으로 교단 결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인화력이 뛰어난 박성산 목사가 순천 부산 거제 광주 등지를 순회하며 오순절교회와 교인들을 모으는 일에 헌신했다. 그의 헌신의 결과로 1953년 4월 8일 허홍 목사가 담임하던 서울 용산구 한강로의 남부교회에서 체스넛 박성산 허홍 배부근 윤성덕 곽봉조 박귀임과 그 외 4인의 참관자를 포함해 총 11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교단이 정식으로 창립된다. 교단의 명칭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로 결정됐고 체스넛 목사가 초대 총회장으로 허홍 목사가 서기 겸 재무로 선출됐다. 그리고 1953년 5월 허홍 목사가 담임하던 남부교회에 순복음신학교가 설립된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설립과 발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창립된 지 5년 후인 1958년 5월 18일 순복음신학교 졸업생인 조용기·최자실 당시 전도사는 서울 변두리인 대조동에 작은 천막 교회를 개척한다. 조용기 전도사는 6.25전쟁 이후 질병과 굶주림 범죄와 폭력으로 소망을 잃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축복과 병고침의 전인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신유 등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5명으로 시작한 천막 교회는 개척 3년만에 재적 1000명 출석 600명의 교회로 성장한다. 조용기 전도사와 최자실 전도사는 교회를 대조동에서 서대문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1961년 10월 15일 건축 중이던 ‘순복음부흥회관’에서 개척예배를 드린다. 1964년 성도 수가 3000명에 이르렀을 때 조용기 목사는 출애굽기 18장 18절의 말씀을 근거로 구역 조직을 만든다. 그가 창안한 구역 조직은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결과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73년 9월 서대문에서 여의도로 교회를 옮긴다. 교회 이전 후에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성장을 계속 이어갔고 1979년에는 10만 성도 1980년에는 20만 성도 1983년에는 30만 성도 1984년에는 40만 성도 1985년에는 50만 성도 1990년에는 60만 성도 1992년에는 70만 성도로 성장했다. 2010년 20개 제자교회의 독립으로 인해 88만 명이던 성도 수가 불가피하게 45만 명으로 줄어들었으나 제2대 이영훈 위임목사의 영적 지도력 아래 교세는 즉각 다시 증가세를 보여 교회 창립 60주년인 2018년 현재 오순절 신앙으로 무장한 56만여 명의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절대긍정 절대감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창립 70주년의 꿈과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령운동은 외적 성장과 더불어 내적 성숙을 지향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회적 차원에서 실천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2008년 이영훈 위임목사의 취임 이후 지금까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통일을 준비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힘써왔다. 교회 예산의 3분의 1을 구제와 선교에 투입하면서 강력한 성령운동과 사회적 구원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과 세계에서 오순절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국제신학연구원>
  • 2018.11.25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15)- 역사신학(6) - 한국교회사 2
  •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 <편집자 주> 1. 한일합방과 한국교회의 수난 을사조약(1905)을 강제로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본은 이후 조선의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 군사권을 차례로 빼앗았다. 이와 같은 일련의 침략과정을 거쳐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조선을 강제로 합병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강압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할 당시, 한국교회는 외국인 선교사 270여 명, 조선인 교역자 2300여 명, 신도 20만 명의 인원과 전국에 1900여 개의 예배당과 300개 이상의 학교를 보유한 유일하고도 강력한 전국적인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게다가 조선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다수의 인사가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과 민족운동을 나란히 전개하고 있었다. 합병 초기 일제는 기독교와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했지만 기독교가 조선을 식민통치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자 서서히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많은 기독교인이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신민회는 상실되어 가고 있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1907년 4월에 안창호 전덕기 등 기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항일 비밀조직이었다. 기독교 세력이 신민회의 배후라고 확신한 일제는 항일 민족운동과 기독교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하기 위해 합방 직후 ‘105인 사건’을 기획·조작했다. ‘105인 사건’은 일제가 1911년 12월에 기독교인들이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고 날조하여 100여 명의 기독교 인사를 잡아들이고 선교사들을 추방하려 한 악랄한 음모였다. ‘105인 사건’은 일제 강점기 한국교회가 겪어야 할 길고도 긴 핍박과 수난의 출발선이었다. 2. 3·1운동과 기독교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무단통치를 하며 우리 민족을 경제적·문화적으로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를 통해 민족 고유의 문화를 말살하고 한국 경제를 철저히 수탈하면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일제의 폭력적인 통치가 강해질수록 이에 저항하는 한국 민족의 저항의식 또한 커져만 갔다. 이렇게 누적되었던 우리 민족의 반일의식과 항일 에너지가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온 사건이 바로 3·1운동이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호응하여 각계각층의 사람이 참여하여 거의 1년간 지속된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일컫는 것이다. 기독교는 3·1운동의 시작과 전개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 3·1운동을 준비하고 조직화하는 단계에서부터 기독교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단계에서는 교회가 조직과 인원을 제공했다. 당시 2000만 겨레 중 10%인 200만 명이 3·1운동에 참여했는데 전체 참가자의 22%가 기독교인이었으며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가량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기독교 인구가 전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에 불과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기독교가 3·1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교회의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1919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19년 4월 말까지 투옥된 기독교인은 2120명으로써 유교 불교 천도교인의 총수 1556명보다 많았다. 또한, 미국교회협의회 동양위원회가 1919년 출판한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부터 7월 20일까지 631명이 살해되고 2만 8934명이 체포되었다. 기독교는 3·1운동 참여로 막대한 피해를 보았지만 동시에 기독교는 외래종교요 서양종교라는 시선을 불식시키며 ‘민족의 종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3. 사회적 변화와 도전에 직면한 교회 3·1운동은 일제가 식민통치를 강압적인 무단정치에서 유화적인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겉으로는 유화정책을 내세워 이전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허락해주었지만 속으로는 민족의식과 민족운동 세력을 말살하려는 집요한 분열 및 이간책을 사용했다. 한편, 일제의 식민통치가 다소 헐거워진 틈을 타서 국내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이 유입되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3·1운동 실패 후 패배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진 사람들과 사회구원에는 미진한 기독교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사회·청년 운동에서 주도권을 잡았다고 판단한 공산주의자들은 1925년부터 교회를 공격하고 기독교 신앙을 비판하는 반기독교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의 거센 도전과 교회에까지 침투한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로 인해 한국교회는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련기에 내적인 신앙체험을 강조하는 부흥운동이 전개되어 우리 민족에게 암울한 현실을 이겨낼 힘과 희망을 주었다.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개인의 영적 지도력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특정한 개인보다는 불특정 다수에 의해 진행된 집단적 신앙체험이 주류를 이룬 이전의 부흥운동들과는 달리,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김익두 이용도 길선주와 같은 특출난 개인이 이끌었다. 이들은 각각 ‘신유와 기적을 동반한 부흥운동’(김익두) ‘신비주의적 부흥운동’(이용도) ‘내세지향적 부흥운동’(길선주)을 한국교회 안에 정착시킨 인물들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나 교회 내의 진보주의 청년계층으로부터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힘없는 다수 민중계층 교인들에게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적 활력소를 불어넣었다는 점에서 민중운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4.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수난 일본은 1931년 만주침략을 시작으로 1945년 패전하기까지 15년에 걸친 침략전쟁을 감행했다. 이를 위하여 식민지였던 한국을 침략전쟁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편하고 물자와 인력의 수탈과 동원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했다. 더 나아가 수탈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국인의 정신생활까지도 통제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일제가 시행한 것이 ‘황민화정책’이었다. 황민화정책은 ‘천황 신앙’을 강제해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빼앗고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추진된 정책이었다. 일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강요하고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게 하였고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그리고 황민화와 전쟁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내세운 논리가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론’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을 앞두고 일제는 한국교회에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먼저 기독교계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이어 개별교회와 각 교단에까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하여 학교 폐지와 선교부 철수 및 신사참배 거부 등의 강력한 수단으로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대부분의 교파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였고, 마지막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장로교도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한국교회는 변절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신사참배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한국교회 파괴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 결과 성결교는 1941년 12월에 침례교회는 1944년 5월에 해산되었고 장로교는 1943년 5월에 ‘일본 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감리교는 8월에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예속되었다. 그러다가 일제는 1945년 7월 19일에 한국의 모든 기독교 교파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폐합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일본교회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국제신학연구원>
  • 2018.11.18

    (14) - 역사신학 5 - 한국교회사 1
  •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 <편집자 주> 조선말 전해진 기독교, 엘리트들 수용되면서 민족종교로 발전 서구문물 통해 민족자강 이루려던 이상재 안창호 이승만 등 입교 조선말에 전해진 기독교는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하면서 외래종교에서 민족종교로 변화하고 발전했다. 우리 민족과 역사를 함께한 한국교회의 역사를 2회에 걸쳐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기독교 수용 이전의 접촉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몇 차례 복음과의 접촉이 있었다. 7∼9세기 중국 당나라에서 경교라는 이름으로 번성하였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당시 당나라와 빈번한 교류를 하던 신라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1956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굴된 돌십자가, 마리아상, 2점의 십자무늬장식 등의 고고학적 자료들이 경교의 신라 전래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임진왜란(1592∼1598) 때에도 기독교와의 짧은 접촉이 있었다. 1592년 12월에 일본 주재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을 방문하여 경상남도 웅천(오늘날의 창원)에 주둔하던 천주교도인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를 1년간 돌보았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땅을 밟은 첫 천주교 성직자였지만 조선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2. 천주교의 수용 17세기 천주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서학 혹은 천주학이라는 학문으로 한국에 소개됐다. 서학에 관심이 많았던 유학자 중에 천주교를 믿는 이들이 생겼다. 이들 중 하나가 한국 최초의 영세자이며 한국 천주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인 이승훈이었다. 그는 1783년 겨울 조선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가서 다음해 2월 북경 주재 예수회 선교사인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이승훈은 동료 유학자들에게 영세를 베풀었다. 이들은 교우 김범우의 명례동 집(현재의 명동성당 자리)에서 모임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신해(1791),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교난 등 다섯 차례의 심한 박해를 견디며 성장했다. 3. 개신교와 한국과의 접촉 1884년 고종이 개신교 선교를 허락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 출신으로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활동한 칼 귀츨라프였다. 그는 1832년 7월에 조선에 통상을 청원하는 동인도회사의 상선을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충청도 지역에서 한문성경과 전도문서를 배포한 후 돌아갔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두 번째 선교사는 ‘한국에서의 첫 개신교 순교자’로 알려진 로버트 토마스 목사였다. 영국 출신 중국 주재 선교사였던 그는 한국 선교의 꿈을 품고 1886년 여름 미국 무장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9월에 순교했다. 4. 만주와 일본에서의 성경 번역 한편 만주와 일본에서는 한글번역 사업이 진행됐다. 만주 주재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존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 목사는 만주에서 장사하던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등 의주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1882년에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을 번역·출판했다. 그들은 1887년에 신약성경을 완역하고 순 한글로 된 최초의 신약전서, ‘예수셩교젼셔’를 출판했다. 일본에서도 이수정에 의해서 성경이 번역됐다. 1882년 9월에 수신사 박영효의 통역으로 일본에 온 그는 1883년 4월에 동경에서 미국 선교사 조지 녹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됐다. 언어에 뛰어났던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번역하였고 이는 1885년 2월에 요코하마에서 출판됐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할 때 손에 쥐고 있던 성경이었다. 5. 한국 선교의 시작 쇄국정책을 유지하던 조선은 1876년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했다. 1882년에는 미국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복음의 미개척지였던 한국의 문호가 개방된 것이다. 1884년 7월에는 일본 감리교회 감독인 로버트 맥클레이 목사가 내한하여 고종으로부터 교육과 의료 활동에 국한된 선교사업을 허락받음으로써 한국 선교의 문은 드디어 공식적으로 열리게 됐다. 미국의 남감리교회는 헤론과 언더우드(북장로교회)를, 스크랜턴과 그의 어머니 메리 그리고 아펜젤러(남감리교회)를 의료 및 교육선교사로 임명했다. 북장로교회도 헤론과 언더우드를 임명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알렌의 선교지를 한국으로 변경했다. 1884년 9월 알렌은 국내에 거주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서 한국의 땅을 밟았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포함한 다른 선교사들도 내한해 선교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한편, 북장로교회와 남감리교회에 이어 호주장로교회(1889), 침례교(1889), 성공회(1890), 미국 남장로교회(1892), 미국 남감리교회(1896), 캐나다 장로교회(1898) 등이 선교사를 파견했다. 6. 교회들의 설립 의주 청년 서상륜은 1883년 외가가 있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에 교회를 세운다. 이 교회가 바로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 혹은 송천교회이다. 한국의 자생교회인 소래교회를 이어 언더우드가 1887년 9월 27일 서울에 새문안교회를, 아펜젤러가 1887년 10월 9일에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했다. 1893년 6월에는 마펫 선교사가 평안도 지역을 대표하는 장대현교회를 설립했다. 7. 한국교회의 성장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해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첫 10년간(1884∼1894)은 ‘고전의 시기’였다. 1894년까지 한국 교회가 얻은 신자는 5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신자 증가율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신도 수는 1895년 750여 명, 1896년 2500여 명, 1897년 3300여 명, 1900년 1만2000여 명, 1905년 2만6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청일전쟁 이후, 하층민들은 물리적 보호와 정신적 위안을 찾아서, 엘리트층들은 서구문물 수용을 통한 민족의 자강을 이루기 위해 대규모로 입교했다. 이승만, 이상재, 안창호 등 다수의 지도자들이 기독교 신자가 됐다. 8.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한국 개신교회의 초창기는 사람들이 종교적 목적에서보다는 실제적이고 정치적 목적에서 교회에 입교하던 시기였다. 을사늑약(1905년)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한국 교회의 얼굴과 성격을 만들 원산부흥(1903년)과 평양대부흥(1907년)이 때맞춰 일어났다. 1903년 원산의 선교사 기도모임에서 점화된 부흥의 작은 불씨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의 큰 불길로 피어올랐다.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한반도 전역은 물론 1908년에는 만주 지역의 교회에도 확산됐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 교회에 양적·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 교회는 수적으로 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성숙하게 됐다. 기독교를 서구의 문물과 사상으로 인식하였던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제 기독교 안에서 영적인 생명력과 깊이를 찾기 시작했다. <국제신학연구원>
  • 2018.11.11

    (13) - 역사신학 ④ - 현대교회사
  • 참된 신앙을 갖는 데 신학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신학이 신앙에 장애가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신학’은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한 서술을 뜻한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이란 (바른) 신학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여 재수정함으로써 얻어지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개설하여 연말까지 20회에 걸쳐 신학 전반에 대해 알기 쉽게 소개하고자 한다. 집필순서는 ①조직신학(3회), ②구약신학(3회), ③신약신학(3회), ④역사신학(6회), ⑤실천신학(4회), ⑥선교학(1회) 순이다.<편집자 주> 이번 주에는 17세기 중반에서 현재까지 포괄하는 근·현대교회의 역사를 시대별로 대표되는 사상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17세기 중반 - 근·현대교회사의 시작 종교개혁은 부패한 중세 가톨릭교회에 반대해 일어난 교회의 개혁운동이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중세의 연장이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이 공로 사상이나 연옥 같은 중세 기독교의 여러 종교적 신념들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르네상스운동을 통해 형성되던 인본주의적인 관념이나 가치들도 함께 배제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종교개혁시대 역시 교회의 권력이 국가의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고, 기독교 교리가 인간의 삶과 생각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종교의 강력한 지배는 17세기 초 일어난 30년전쟁(1618∼1648)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으로 개신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고, 유럽의 국가들은 기독교의 힘과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교회사에서는 국가와 사회가 기독교의 통제와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17세기 중반을 근·현대교회사의 시작으로 본다. 2. 17세기 후반 - 계몽주의와 경건주의의 태동 30년 전쟁 이후, 유럽 국가와 사회에서는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교회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로운 탐구를 강조하는 계몽주의 사상이 등장했다. 신앙보다는 이성과 합리성을 진리의 판단 기준으로 삼았던 계몽주의자들은 인류의 무한한 진보와 이성의 힘에 의한 사회의 개혁을 믿었다. 인간 이성을 강조하는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은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 사상의 등장과 함께 개신교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신앙과 교리를 논증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개신교 정통주의 혹은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계몽주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지만 직접 세상에 간섭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자연의 질서에 맡겨놓았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계시와 기적을 부정하는 자연신론의 태동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계몽주의 사상에 반발하는 경건주의운동이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경건주의운동은 신앙의 본질을 이성보다는 개인의 종교적 경험에서 찾았다. 필립 야콥 스페너(1635∼1706)에 의해 시작된 경건주의운동은 스페너와 어거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가 함께 세운 할레대학에서 전 유럽의 개신교회로 퍼져갔다. 이러한 경건주의는 헤른후트의 모라비안 공동체를 이끈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진젠도르프(1700∼1760)와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영국의 존 웨슬리(1703∼1791) 그리고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1707∼1788)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3. 18세기 - 복음주의적 부흥운동 18세기 영국의 기독교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기독교 신앙에서 회심과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신앙운동이 성공회 신부였던 웨슬리 형제와 조지 휫필드(1714∼1770)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거룩한 생활에 필요한 엄격한 방법을 제시했기 때문에 ‘감리교도’ 혹은 ‘메소디스트’라고 불렸다. 감리교운동은 영국의 기독교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영국의 상류층에서 노동계층까지 전 계층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복음은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웨슬리의 사회참여 주장은 영국 전 사회에 각성을 가져왔다. 후에 복음주의운동은 영국 노예해방운동의 선구자인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와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재위 1871∼1901)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 감리교 부흥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즈음에, 북미에서도 영국 식민지들을 중심으로 제1차 대각성운동이라 불리는 영적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대각성운동을 이끈 영적 지도자들은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와 조지 휫필드였다. 초창기의 청교도적인 신앙과 경건성이 사라지고, 종교적 열정이 무시되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이들은 죄의 회개와 개인적 회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던 미국 교회에 영적 생명력이 회복되었다. 제1차 대각성운동은 약 반세기 후에 일어날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적 토대가 되었다. 4. 19세기 - 위대한 선교의 세기 19세기는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선교의 세기’라고 불린다. 현대 개신교 선교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윌리엄 캐리(1761∼1834)가 1793년 인도의 콜카타를 향해 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이후 런던선교회(1795년), 미국 국제선교 본부(1810년), 바젤선교회(1815년), 영국 성공회선교국(1799년) 등 유럽과 미국에서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조직되었고 각국에 선교사들이 파송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세기 기독교 해외선교는 드와이트 무디(1837∼1899)와 아서 피어선(1837∼1911) 같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전성기를 맞이한다. 우리나라에 온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들도 모두 무디와 피어선이 조직한 ‘학생선교자원운동’을 통해 선교의 비전을 키웠던 사람들이었다. 5. 20세기 이후 - 교회일치운동과 오순절운동 교파와 교단 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교회일치운동은 선교 현장의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선교 현장에서 여러 교단의 과다한 경쟁과 분쟁을 피하고, 좀 더 효율적인 선교를 위한 지역선교대회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런 가운데 19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는 세계 선교의 실제적 방향과 전략을 점검하기 위한 국제규모의 선교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세계적 차원의 교회일치운동을 위한 첫 걸음이 되었다. 한편 20세기가 시작되는 첫날인 1901년 1월 1일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강조하는 오순절운동이 미국 캔자스 주 타피카에서 찰스 팔함 목사에 의해 시작되었다. 작은 지역 부흥운동에 불과하던 오순절운동은 1906∼190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 부흥회를 통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지리적 확산 이외에도 오순절운동은 1960년대부터 성공회, 가톨릭교회, 장로교, 루터교 등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교회들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를 좀 더 성령 충만한 종교로 탈바꿈시켰다. 또한 현재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종교운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오순절운동은 비서구 지역에서의 놀라운 성장에 힘입어 서구 중심의 기독교를 비서구 중심의 종교로 변화시키고 있다. <국제신학연구원>
  • 2018.11.04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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