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균 목사의 문화선교
다문화시대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십자가 사랑
  • 출애굽한 백성 하나로 묶은 것은 유일신 사상 사랑·섬김 자세로 나가면 기독 문화 꽃 피울 수 있어 모세와 출애굽 이야기를 다룬 최근 개봉작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극적으로 홍해를 건넌 모세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제 걱정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국가를 이룰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자 모세가 그것이 문제라는 듯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은 같은 목표를 향해 단결하고 있지만 그들이 자유를 얻고 나서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까?” 모세의 우려(?)와 같이 성경은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모습과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모습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에도 가나안 지역의 토속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문화를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문화의 배후에 종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배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문화시대입니다. 유럽뿐 아니라 미국도 다인종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일민족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인종, 다문화의 배후에 종교문화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럽은 다인종 다문화시대를 맞이하면서 기독교문화가 주류가 아닌 아류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이름뿐인 가톨릭 신자들만 있을 뿐 교회에 출석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줄어가고 있는 그 빈 자리를 다문화라는 이름으로 다른 종교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국가의 시작부터 이민자들로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에 다인종국가입니다. 문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피해를 주지 않고 국가가 정한 법질서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이 인정되는 사회입니다. 그렇지만 급격한 다인종, 다문화로 말미암아 갈등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종교원리주의자들에 의해 테러행위가 빈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과 미국, 이제는 호주에 이르기까지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황입니다. 더 큰 위협은 테러의 위험을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완벽한 제도와 장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종과 문화의 배후에는 종교가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은 대한민국도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 사회에 ‘다문화’라는 말은 이제 낯설지 않은 말입니다. 단일문화를 강조하고 자랑하던 시대는 이제 지났습니다. 다문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합법적인 신분으로 체류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체류자도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국적이 없거나 신분증명서가 없는 ‘미등록 외국인 아동’이 2000∼3000명이나 된다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부모가 무국적자라 출생신고를 못한 아이가 이 정도라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이들을 위한 출생등록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출생등록제는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태어난 국가에 출생신고를 할 수 있게 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법 체류자의 아이는 출생신고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 그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하나님 중심의 유일신앙이었습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이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인종, 다문화시대에는 유일신앙을 거부합니다.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을 주장하면 시대에 뒤 떨어졌다는 손가락질을 받습니다. 이 같은 다문화 시대에 기독교 문화가 나가야 할 길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에는 로마제국과 그리스-로마의 신들이 장악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들이 주류였고 기독교는 변방 중에도 변방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로마를 정복했습니다. 로마가 칼과 군대로 제국을 만들었지만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로마를 정복했습니다. 그 정복은 피흘림이 없는 정복이었습니다. 오직 십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였습니다. 섬김의 십자가였습니다. 다문화시대를 거부하거나 역류해 다투고 부딪힐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더욱 더 섬기고 사랑함으로 그들을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기독교문화는 십자가를 지는 문화입니다.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섬김의 십자가를 지고 나간다면 다문화시대 속에서도 기독교문화는 찬란한 꽃을 피울 것입니다.
  • 2014.12.21

    스마트 폰 시대에 기독문화가 나갈 길
  • ‘모임’아닌 ‘혼자’만으로 충분한 시대 도래 사랑으로 다가가기에 더욱 힘써야 할 때 최근 보도된 사진입니다. 이란의 유목민 부족 중 하나인 카쉬카이족 남성이 짐을 잔뜩 싸들고 이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뒤에는 200여 마리의 양과 염소가 뒤 따릅니다. 겨울 동안 양과 염소에게 먹일 풀이 있는 장소로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가족들과 살림살이는 자동차로 몇 시간 만에 옮겼지만, 양과 염소를 끌고 가는 여행은 1주일 혹은 2주일이 걸리기도 한다는군요. 행렬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가축이 섞일 수 있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나귀 위에 앉아 가축을 몰고 가던 유목민이 윗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를 확인합니다. 그 모습이 묘하게도 절묘합니다. 수천년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유목생활의 패턴은 변하지 않았는데 최첨단 문명의 이기를 사용하고 유목민의 모습.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모습입니다. 스마트폰 전성시대입니다. 스마트폰 시대의 특징이 있습니다. 모이지 않아도 재미있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전 시대는 모여야 재미있는 시대였습니다. 모여서 함께 이야기하고 모여서 함께 놀이를 하고 모여서 함께 무엇이든 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이지 않고 혼자 어디에 있어도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으면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시대는 굳이 모일 이유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문화의 흐름이 모였던 문화에서 모이지 않는 문화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는데(행 2:46), 모이기를 힘쓰지 않는 시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랑도 모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가 있습니다. ‘her’라는 영화입니다.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입니다. 이혼을 앞두고 망설이고 있는 손글씨 대필작가에게 사랑이 찾아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랑할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운영체계(OS: Operating System)라는 것입니다. 이 컴퓨터 운영체계는 ‘사만다’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말도 합니다. 몸만 없을 뿐입니다. 사만다와는 다툴 일도 없고 싸울 일도 없고 밀고 당기는 ‘밀당’을 할 이유도 없습니다. 주인공에게 이만한 비서와 연인이 따로 없습니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단말기를 몸에 지닌채 주인공은 사랑을 합니다(요즘에는 이어폰을 꽂고 스마트폰으로 통화하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길을 걸으면서 혼자 말하고 웃으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만 요즘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공에게는 완벽한 연인이었습니다. 주인공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컴퓨터에서 사만다가 사라집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고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실의에 빠져 있던 주인공에게 사만다가 나타납니다. 반가움에 빠진 주인공이 다시 둘만의 세계로 돌아가자고 하지만 사만다는 주인공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그동안 컴퓨터가 업그레이드 되면서 사랑하게 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진화(?)한 사만다는 8000명의 사람과 동시에 대화할 수 있으면 그중에 641명과는 사랑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화 ‘her’는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지만 더 이상 가상이 아닐 수 있는 현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입니다. 스마트폰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말하고 누르던 방식에서 문지르는 방식으로 진화하였고 앞으로 또 어떤 방식으로 진화할지 모릅니다. 스마트폰이 진화할 때마다 전세계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스마트폰과 더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이같은 스마트폰 시대에 기독문화가 나가야 할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우리를 위하여 오신 것과 같이 더욱 더 세상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스마트한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 모두는 외롭습니다. 외로움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감출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찾아갈 곳이 많습니다. 최초의 기독문화는 위에서 꽃피지 않았습니다. 낮은 곳에서 피었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졌을 때 높은 곳에 자리 잡았던 것이 아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1세기 기독문화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곳에, 포로 된 자가 자유케 되는 곳에, 눈 먼 자가 다시 보게 되는 곳에,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되는 곳에 자리를 잡고 퍼져 나갑니다(눅 4:18∼19).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 우리를 그곳에 보내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우리 시대의 기독문화 전파자인 것입니다.
  • 2014.11.16

    섬김의 기독문화 정착을 위한 노력
  • 지배하려는 세상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달라 안산 재래시장 방문은 섬김의 문화 상징 “아, 그럴 수도 있구나.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못 했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훈훈한 미담이 있습니다. 미국 아이오와주에 사는 스티븐 슐츠 부부가 결혼 6주년을 맞아 외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결혼기념 외식은 식당에서 물 한 잔을 기다리는데 20분, 식사까지 하기에는 40분을 기다려야 하는 예상치 못한 형편없는 서비스를 받는 바람에 결혼 기념을 위한 외식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서비스를 받게 되면 음식 값에 15%에서 20%정도의 팁을 지불하는 대신 ‘당신의 서비스가 형편없었다’는 표시로 테이블에 25센트 동전을 던져 놓고 가버립니다. 슐츠 부부가 지불해야 했던 외식비용은 66.65달러. 슐츠 부부는 얼마의 돈을 팁으로 지불했을까요? 놀랍게도 최악의 서비스로 결혼 6주년 기념 외식을 망쳐버린 웨이터에게 슐츠 부부는 음식 값보다 더 많은 100달러를 팁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영수증에는 다음과 같은 친절한 응원의 메모까지 남겨두었습니다. “우리도 당신과 같은 입장이었다” 당시 그 식당의 웨이터는 인원부족으로 열두 테이블과 홀까지 책임지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 다녔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는 느린 서비스로 그날 웨이터가 손님들에게 받을 수 있는 팁은 형편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츠 부부는 동분서주하는 웨이터를 보고 짜증을 내기 보다는 팁으로 100달러를 주었습니다. 결혼기념 외식을 망친 입장에서 웨이터의 입장을 헤아려 후한 팁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실천한 슐츠 부부가 정말 대단하다고 여겨집니다. 성경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3∼15). 이 말씀 속에 21세기 기독문화가 자리를 잡아가야 할 방향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기독문화는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세대와 어느 연령과 어느 형편에 놓인 사람들을 불문하고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공감의 문화. 그 같은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의 문화는 섬김의 마음 자세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세월호 침몰 사건이후 심각한 소비침체에 빠져 있는 안산의 재래시장을 두 차례나 방문해 시장상인들에게 큰 도움을 준 일은 섬김의 기독문화를 대표적으로 보여준 상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이 21세기 기독문화는 섬기는 문화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문화는 지배하고 군림하는 문화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문화는 섬기는 문화가 아닙니다. 세상 문화는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고 자본을 지배하고 몸을 지배하여 마음대로 하려는 군림하는 문화이지 섬기려는 문화와는 거리가 멀 뿐입니다. 누구나 섬김 받는 것은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앞장 서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섬김의 문화가 더욱 확산되어야 합니다. 섬김이 없는 문화가 지배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최근에 전해진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IS’(이슬람국가)라 불리는 이슬람 테러 조직은 과거 테러 조직들과는 달리 사람과 자본과 군수품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슬람 코란 구절을 악용해 “무슬림이 아닌 자들은 목을 쳐도 되고, 무엇이든 훔쳐도 된다”며 조직원들을 독려해왔다고 합니다. 급기야 지난 10월 12일에는 “이교도 가족을 노예로 만들고 여성은 성노예로 삼는 것이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정해져 있다”는 해석을 내놓아 전 세계를 전율시키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인질로 잡은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고 사람들을 매매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반장이 된 어느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두 학기에 걸쳐 반장, 부반장 선거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신 아이는 지난해 가을 초등학교 2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드디어 부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 직후 며칠 동안 부반장임을 뽐내고 다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부반장의 ‘부’자 소리도 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부반장 생활이 어떤 지 물어보자 아이는 대뜸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부반장은 할 일이 없어요. 반장이 혼자 다 해먹어요. 제가 무슨 얘길 해도 반장이 듣질 않아요” 아이는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나도 꼭 반장 해먹고 말 거야” 그러더니 지난 3월 초 마침내 3학년 1학기 반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서로 반장이 되겠다며 16명이나 출마한 치열한 선거에서 반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했기에 반장으로 뽑히게 되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만약 저를 반장으로 뽑아 주시면 여러분을 위한 걸레가 되겠습니다” 그랬더니 몰표가 쏟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걸레가 되어 가족과 이웃, 사회와 국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을 실천한다면 섬김의 기독문화는 이 땅 위에 깊게 뿌리 내리게 될 것입니다. 부목사(교무·교육 담당)
  • 2014.10.19

    “기독교 문화의 길을 닦아 나가자”
  • 사도 야고보가 걸었던 순례길 ‘산티아고 길’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의 길은 영원히 이어져야 후손들에게 올바른 기독 문화 전달 의무 있어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유명한(?) 길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을 남긴 길이 있습니다. 현재 로마로 통한다는 그 길은 ‘아피아 가도’(Via Appia)라는 이름의 길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길은 평화의 길이 아니라 정복하는 자의 길이었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많은 지역을 정복해나가던 로마제국의 입장에서 그 길은 승리의 환호성이 넘치는 길이었지만 정복당하는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치욕스러운 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길은 모든 사람들이 두 손 들고 환영만 할 길은 아니었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던 길이 있었습니다. ‘실크로드’(Silk Road)입니다. 고대에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경제·문화를 이어준 육해 교통로를 총칭하는 길입니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는 중국 중원 지방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거쳐 로마에까지 이르렀던 길입니다. 한 마디로 이 길은 무역로였습니다. 실크로드는 이어져 있지 않지만 그 이후 인간들이 만든 수많은 무역로는 지금도 국경을 초월해 하늘과 바다에 길을 만들어 쉬지 않고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정복로와 무역로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길이 있습니다. 순례자의 길입니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순례자의 길은 ‘산티아고 길’(Camino de Santiago)입니다. 이 길은 프랑스 국경마을 생장 피 드 포르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쪽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이르는 800km의 길입니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길이기도 합니다. 이 길의 시작은 사도시대 사도 야고보가 프랑스 국경을 거쳐 스페인 산티아고까지 영혼 구원을 위해 걸었던 길입니다. 그 길이 오늘날 순례자들을 위한 길이 되어 전세계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길이 되었습니다. 정복로와 무역로, 순례자의 길 중에 어느 길을 제일 많이 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느 길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언급한 세 길은 눈에 보이는 길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중요한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이어져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복음의 길입니다. 선교의 길입니다. 그 길이 중요한 것은 그 길에 기독교 문화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바울이 타고 온 배가 오늘의 유럽을 싣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유럽에 복음을 전함으로 유럽에 문명의 꽃이 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길을 참 잘 닦습니다. 어디를 가나 길이 잘 닦여져 있습니다. 당장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는 곳까지도 도로를 닦아 놓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길을 닦아 놓아도 기독교 문화가 전달되지 않는 길이라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사람을 살리는 길이 되지 않고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닦아 나가야 할 길은 사람을 살리는 기독문화의 길입니다. 기독문화의 길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구원의 길이 됩니다. 기독문화의 길은 보이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수 없이 많은 길들이 사람들을 잡아끌고 있습니다. SNS문화는 보이지 않는 현대문화입니다. SNS안에는 수 없이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SNS안에 기독문화가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SNS를 통해 적극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모습을 아직까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좋은 크리스천이지만 정작 SNS안에서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SNS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놓치면 기독교 문화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한국의 기독교는 SNS안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21세기 초반입니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어떤 문화가 우리를 지배하려고 덤벼들지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땅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보이지 않는 기독문화의 길을 적극적으로 앞장서 닦아 나가야 합니다. 장차 이 땅에서 살아나갈 크리스천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이 무엇입니까? 이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을 물려주었습니다. 유럽의 기독교는 건물로서의 교회를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건물로서의 유럽교회는 유명 관광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는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문화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기독문화, 가진 것을 나누는 섬김의 기독문화, 약하고 버림당하고 외롭고 소외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문화. 이같은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기독문화를 물려주기 위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크리스천들은 보이지 않는 기독문화를 닦아나가는 사명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무·교육담당 부목사>
  • 2014.09.21

    ‘죽이는 문화’와 ‘살리는 문화’
  • <사진설명 : 기독교문화는 영적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문화’다. 기독교문화는 특히 청년들을 영적으로 깨워 사회를 살리는 일꾼으로 세워야 한다. 사진은 지난해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606 더 홀리 스피릿’성회 장면. 이날 모인 청년들은 캠퍼스복음화와 청년문화가 ‘살리는 문화’가 되길 기대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순복음가족신문 DB> 기독교 복음 증거 되는 곳마다 사람과 문화 살아나는 역사 일어나 바꾸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좋을 때 사용하는 “죽인다”는 감탄사입니다. 멋진 경치를 보면 “경치가 죽인다”고 말을 합니다. 무엇을 먹고 맛이 좋으면 “맛이 죽인다”고 말을 합니다. 음악이 좋으면 “음악이 죽인다”고 말을 하고 멋진 옷을 입으면 “옷이 죽인다”고 말을 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보아도 “죽인다”고 말을 합니다. 잘못된 말의 문화입니다. 이 말은 결코 기독교적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말씀을 하셨지, “보시기에 죽인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죽인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말이 씨가 되듯이 국내외적으로 죽이는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둘러싼 군사충돌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어린 아이와 여성과 노약자들의 피해가 크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생명을 죽이는 역할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종교의 이름으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일들이 21세기에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외신보도에 따르면 이라크에서 기독교인들을 향한 박해와 학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세계복음연맹은 이슬람국가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소수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규탄하고, 세계 회원교회와 국제사회에 고통 받고 있는 이라크의 신앙인들을 위한 기도와 지원을 당부한 바 있습니다. 제프 터니클리프 세계복음연맹 총재는 지난 8월 8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서 “이슬람국가가 이라크에서 기독교인을 비롯한 소수종교인들을 대상으로 벌이고 있는 잔혹한 악행을 규탄한다”며, 특히 “기독교 공동체는 이라크에서 이슬람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뿌리를 내리고 살아 왔으며 사회의 안녕에 기여해 왔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적인 박해는 그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박해는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 문화는 두 가지 문화로 구분됩니다. ‘죽이는 문화’와 ‘살리는 문화’입니다. 기독교문화는 살리는 문화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어가던 영혼들이 살아나고 환경이 살아나고 건강이 살아납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선교사들은 이 땅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웠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기독교문화보다는 사람을 죽이는 사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전불감증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먹을거리가 안전하지 못하고, 도로가 안전하지 못하고, 이제는 뱃길과 비행기 길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도로가 문제일까요? 바다가 문제일까요? 하늘이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도로를 건설하고 그 도로를 달리는 사람들, 바다를 다니는 배를 운행하는 사람들,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비행기의 안전과 비행기를 조종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왜 사람이 문제일까요?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고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 ‘죽이는 문화’에 지배를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이는 문화는 사탄과 마귀가 지배하는 문화입니다. 사탄과 마귀는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고 존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죽이는 문화에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핍박하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최근 우리나라 군부대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고는 결국 죽이는 문화에 지배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발생되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입니다. 21세기를 지배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죽이는 문화’가 종교의 옷을 입고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이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섬겨 나가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왕성하게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더불어 더욱 힘써 구제하는 일에 앞장을 서고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전도에 앞장을 서고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에 앞장을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하여 이 땅에 사람을 살리는 기독교 문화가 충만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기독교의 문화는 ‘살리는 문화’입니다. <교무·교육담당 부목사>
  • 2014.08.24

    지금은 반기독문화의 벽을 넘어설 때이다
  • 인종·이념·자본 아닌 영적 권세로 문화권 나뉘어 유럽 급속히 이슬람 문화 확산, 값싼 노동력 유입 탓 오직 기도, 십자가 사랑과 희생으로 문화 벽 넘어야 2014년은 6월 28일부터 7월 27일까지 라마단 기간입니다. 라마단(Ramadan)이란 명칭은 ‘타는 듯한 더위와 건조함’을 뜻하는 ‘라미다(Ramida)’ 또는 ‘아라마드(Arramad)’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금식으로 인한, 위에서 느껴지는 타는 듯한 갈증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라마단 달은 천사 가브리엘(Gabriel)이 무함마드에게 ‘코란’을 가르친 신성한 달로 여겨져, 이슬람교도는 이 기간 일출에서 일몰까지 의무적으로 금식하고, 날마다 다섯 번의 기도를 드립니다. 다만 여행자나 병자, 임산부는 면제 되나 후에 별도로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해가 지면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일출에서 일몰을 제외한 시간에 음식물 소비는 평소보다 높아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라마단 기간의 금식은 온전한 금식이 아니라 이슬람 문화권에서 종교적 의무에 따르는 금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계에서는 라마단 기간에 무슬림과 이슬람 지역에서 박해와 순교를 당하는 수만 명의 그리스도인을 위해 기도모임을 1992년부터 시행해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2014년 라마단 기간은 브라질 월드컵 본선 경기와 맞물려 뉴스가 되기도 했습니다. 월드컵 본선 16강에 오른 각국 선수 중에 이슬람 선수들이 끼어 있어 그 선수들이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화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알제리 팀의 경우는 모든 선수들이 이슬람 선수들인데 독일과 16강 경기를 갖기 전에 선수들의 금식 유무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논란은 체력소모가 많은 경기를 앞두고 과연 선수들이 단식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알제리 선수들은 단, 한 선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단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경기 결과는 1대2 패. 아이러니하게도 알제리 팀이 성공시킨 한 골은 금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선수의 발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경기 후 알제리 팀은 라마단 단식으로 인한 체력 저하로 경기에 진 것이 아니라고 강력히 부인했습니다. 외신보도에 따르면, 알제리 팀 외에도 월드컵에 참가한 쟁쟁한 스타 플레이어 중에는 무슬림이 많습니다. 심지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무슬림 선수들로 한 팀을 구성해도 우승가능한 팀을 만들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와 경기를 했던 벨기에 팀에는 무슬림 선수가 네 명이나 있었고 이미 8강에 진출한 프랑스에 팀에는 무슬림 선수가 다섯 명이나 있습니다. 이외에도 독일 대표 팀에는 두 명, 아프리카의 강호 코트디부아르 팀에는 네 명, 심지어 스위스 대표 팀에도 무슬림 선수가 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열광하는 월드컵 경기에서도 이슬람 문화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종과 이념, 자본과 금융시장보다 영적인 권세입니다. 인종과 이념 그리고 자본과 금융은 영적인 권세가 본 모습을 감추고 겉으로 들어나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권세는 크게 기독교 문화권과 반기독교 문화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반기독교 문화권이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럽은 급속하게 이슬람 문화권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유럽은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하여 이슬람 지역의 노동력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노동력과 더불어 이슬람 문화가 들어와 강력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더불어 이미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이슬람 문화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깊은 밤 사막 한 가운데서 떨고 있던 낙타를 따뜻하게 해 주기 위하여 텐트를 열어 주었다가 사람이 쫓겨나고 낙타가 텐트를 차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게 유럽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 문화 뿐 아니라 반 기독문화가 점차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지금은 점차 확산되어가고 있는 반 기독문화의 벽을 넘어서야 할 때입니다. 방어적으로만 대처해서는 안됩니다. 보다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직 세계 기독운동으로 자리잡지는 않았지만 라마단 기간 동안 ‘무슬림을 위한 30일 기도회’는 매우 바람직한 기도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사)순복음실업인선교연합회 썩세스중동선교회 주관으로 라마단 기간 동안 매일 기도회를 갖고 있습니다. 라마단 기간 동안에는 전 세계 모든 무슬림이 동참합니다. 라마단이라는 말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용어로 자리 잡아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 크리스천들은 더욱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희생으로 모든 반기독문화의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보혈로 구원을 받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은 반기독문화의 벽을 오직 기도와 십자가 사랑과 희생으로 넘어서야 할 때입니다. <목회 교무담당 부목사>
  • 2014.07.20

    “거룩한 기독문화를 지켜 나가자”
  • 저예산 독립영화 ‘God’s Not Dead’(하나님은 죽지 않았다) 미국서 관심 주인공 실존 인물, 영접 후 55개국서 주님 사랑 전파 반기독교 행사 범람시대…침묵만이 최선은 아니다 지난 3월 미국에서 개봉된 저예산 독립영화 하나가 있습니다. 영화 제목이 매우 강렬합니다. ‘God’s Not Dead’. “하나님은 죽지 않았다”는 제목입니다. 이런 영화가 현대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요? 요즘 누가 이런 제목의 영화를 돈 주고 보기나 할까요? 그런데 영화 개봉 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려고 몰려든 것입니다. 개봉 직후 흥행 순위 4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언론사로부터 미국 기독교 영화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한 크리스천 대학생이 무신론자 교수로부터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를 증명하라는 도전을 받으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선언하는 교수로부터 주인공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선언하는 교수의 완고한 벽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미국 테네시의 안과의사 ‘밍 왕’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그는 중국에서 태어나 1960년대 수백만 명의 지식인이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던 문화혁명을 겪은 후, 1982년 50달러를 조금 넘는 돈과 영어사전 하나만을 지니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사람입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버드의대에 진학해 우등생으로 졸업합니다. 그 후 미국에서 레이저를 이용해 첫 번째 백내장 수술을 성공시키는 안과의사로 활동하게 됩니다. 대학 시절 무신론자였던 그는 자신의 지도교수와 ‘하나님과 신의 존재’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지도교수는 “차는 설계자 없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두뇌가 무작위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물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러면서 “바로 그때 내 인생의 문이 열렸다. 나는 하나님을 찾았고 기독교를 발견했으며, 그 안에서 내가 찾고 있던 답을 찾았다. 나는 과학과 신앙이 ‘그것들은 무엇인가’와 ‘그것들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각각 다른 목적에 봉사하는 동전의 양면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현재 밍 왕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후 중국을 위한 기독교봉사재단과 개안재단을 설립하여 현재 미국을 비롯한 55개국이 넘는 지역에 무료개안시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공공연하게 외치는 소리가 범람하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기독문화가 기독문화를 삼킬 듯이 덤벼드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 기독문화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거룩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숨어서 활동하던 반기독문화가 이제는 도시를 점령하고 그들의 민낯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언론은 이슈를 선점하기 위하여 반기독문화를 앞 다투어 보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7일 동성애 퀴어문화 축제가 신촌 차 없는 거리에서 있었습니다. 당일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퍼레이드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각종 SNS를 통해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 공개적인 자리에서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습니다. 주말에 차 없는 거리를 찾았던 일반 시민들이 받았던 곤혹감과 충격은 누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한 퍼레이드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주장하려고 했던 것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퀴어문화 축제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 그런 것들이었다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입니다. 참으로 거룩과는 거리가 먼 모습들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같은 장면과 표현과 행위들이 문화라는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수의 침묵이 반기독교 문화에 동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수의 침묵이 때로는 반기독교 문화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기독문화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더 이상 침묵만이 최선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5:37). <목회·교무 담당 부목사>
  • 2014.06.15

    사단에 흔들리지 않게 기독문화는 잘 지어야 한다
  • 전세계 기독문화 배제하려는 시도 끝없어 기독문화 사명자로 세우신 사명 잊지 말아야 중요한 것은 다 ‘짓는 것’입니다. 생존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衣食住)는 모두 짓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옷을 사 입기 전에는 지어 입었습니다. 먹을 것을 사 먹기 전에는 지어 먹었습니다. 집을 사서 살기 전에는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어떻게 지어야 합니까? 잘 지어야 합니다. 잘못 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큰 낭패와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짓는 시대’가 아니라 ‘사는 시대’입니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제대로 짓지 못한 것들을 팔고 사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입니다. 문화(Culture)라는 말의 어원에는 본래 ‘경작하다’, ‘개간하다’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결국 문화라는 것도 잘 짓느냐, 못 짓느냐의 문제입니다. 기독문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잘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시대의 기독문화를 창출하는 사명자로 부르셨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창조자로서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짓는다고 하여 거창한 것을 생각하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지 음식을 먹을 때, 경건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기독문화를 세워나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사단과 마귀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온전히 지어가려는 기독문화를 허물려고 달려듭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하나님을 언급하면 맹렬하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댑니다. 지난달 부활절을 앞두고 영국의 캐머론 총리는 총리관저에서 개최한 연회에서 “나는 우리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당하고 있는 박해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에 더 큰 노력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오늘날 우리의 종교(기독교)는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박해를 당하고 있고 나는 영국이 이 일을 해결해나가는 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더불어 캐머론 총리는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어린 시절 교회 학교에서 교육 받은 것이 자랑스럽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부끄럽게도 매주는 아니지만 나는 종종 교회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며, “거의 2주일에 한번은 세인트 메리 성당을 찾아 평안을 누리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찾는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나는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우리는 이를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고도 했습니다. 이 연설로 인해 캐머론 총리는 영국이 아직도 ‘기독교 국가’라고 주장했다며 영국사회의 분열과 분파주의를 조장시킨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AFP통신에 따르면, 50명이 넘는 예술과 과학 분야의 대표적 인물들이 문화와 종교가 다양한 영국에 대한 캐머론 총리의 이 같은 정의를 비난하며 공개서한을 작성해 서명했으며 그런 주장이 영국 사회의 소외와 분열을 야기시킨다고 경고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영국인본주의자협회(BHA) 등은 이의를 제기하며 공개서한을 작성해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캐머론 총리의 말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기독교는 영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며, 법적 체계부터 헌법에 이르기까지 국가 정체성을 이루는 대부분의 기초입니다. 영국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인하려고하는 것은 기독문화와 정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정치와 이념의 문제 이전에 영적인 문제입니다. 기독교문화를 배척하려는 움직임은 영국뿐만이 아닙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는 전통적인 부활절 용어인 해피 이스터(Happy Easter)를 사용하는 대신 ‘스프링 에그 헌트’(Spring Egg Hunt)라는 듣기에도 생소하고 민망한 용어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용어는 ‘해피 홀리데이’라는 용어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 그리고 각종 기독교 문화를 부인하고 배제하고 지우려는 시도가 전세계적으로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독문화를 잘 지어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단과 마귀는 기독문화를 흔들고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지만 우리는 절대로 흔들리거나 포기하거나 무너져서는 안됩니다. 농부가 이른비와 늦은비를 기다리며 인내하며 농사를 지어나가는 것처럼 우리 또한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기독문화를 지어 나가야 합니다. 갈수록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하심이 쉬지 않고 복음이 쉬지 않고 땅 끝까지 전파되어 가고 있는 것과 같이 기독문화가 우리 삶 속에 널리 자리 잡아 가도록 짓고 또 지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목회 교무담당 부목사>
  • 2014.05.18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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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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