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인 교수의 성경에 나타난 기도
대제사장의 기도
  • “야훼는 네게 복 주시고 지키시기 원하면” 제사장 선포통해 이스라엘에 복 주신 하나님 우리도 하나님이 은혜의 수여자이심 인정해야 아론과 그의 자손들인 대제사장의 삼중 축복 기도가 민수기 6장 22∼27절에 언급되어 있다. 민수기는 시내광야에서와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처한 삶의 자리는 광야로서 뱀과 전갈이 돌아다니고, 먹을 것과 마실 물도 없는 공포의 땅이다. 그러나 광야의 여행이 아무리 혹독할지라도 야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아론의 삼중 축복은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의 힘이요, 담대함의 기반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은혜로 왕 같은 제사장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사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열어놓으신 지성소로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된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예수 안에서 아론에게 허락하신 축복을 서로에게 선포하며 힘과 용기와 복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대제사장 아론의 삼중축복은 첫째로 “야훼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는 기도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녀와 재산, 땅, 건강, 그의 임재라는 복을 주신다(창 17:16; 22:17∼18; 레 26:3∼13; 신 28:2∼14). 나아가 이러한 좋은 선물뿐 아니라 모든 위험에서 그를 보호하게 하시고(욥 1:10), 각종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지켜주신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야훼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네게 비추신다는 비유는 ‘하나님은 빛이시다’는 말씀과 부합된다(시 31:16; 67:1). 그는 곤경에 빠진 백성들을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살피시며, 은혜를 베푸사 대적과 질병과 죄에서 건져 주신다(시 4:1; 6:2; 51:1). 어려운 사람을 보고 얼굴을 돌리는 것처럼 그에게 실망과 낙심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곤고한 인생을 감찰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의 얼굴을 돌리지 않도록 온전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축복해주어야 한다. 셋째로 “야훼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한다.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든다는 말은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뜻이다(창 43:29; 시 4:6).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평강이다. 그것은 전쟁과 소요가 없는 평화의 상태뿐 아니라 풍요와 건강, 번영, 구원 등으로 가득한 상태이다. 하나님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주시는 총체적인 은혜의 수여자이시다. 아론의 축복 기도는 모두 세 구절, 15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 세 구절은 각각 3단어, 5단어, 7단어로 점층적으로 많아져서 축복이 강조되고 깊어지고 있다. 또한 구절마다 야훼 이름이 한 번씩 들어 있어서 모두 세 번 언급되고 있는데, 야훼 이름이 주어로서 한번만 언급되면 충분하지만 굳이 세 번을 반복한 것은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야훼 이름을 빼면 12단어가 남는다. 이는 복을 받는 사람이 12지파임을 상징한다. 복은 결코 사람인 제사장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 그러므로 제사장에게 매달려도 안 되고, 복 자체에 매달려서도 안 된다. 오직 복을 주시는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야훼의 복주심이 아론과 그 아들들로 대표되는 제사장들을 통해 전해지게 된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선포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복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한 축복은 아론의 머리에 있는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적시는 것과 같다(시 133:2). 오늘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들인 그리스도인의 축복된 생각과 꿈과 믿음, 특히 축복의 말의 선포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나아가서 아론의 삼중적 축복 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충만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론의 축복 기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예배의 마지막에 주어지는 축도와 연관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의 종의 축도가 선포될 때 온전히 예배가 마무리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복과 마음의 복과 물질적 복을 주시는 것이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 2015.12.27

    지성소의 기도
  • 지성소는 하나님 성전에서 지극히 거룩한 곳 예수님 십자가 은혜로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돼 말씀에 힘입어 세상 유혹 이길 능력 간구해야 이 세상에서 보배는 잘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게 감춰져 있다. 지극히 귀한 보배는 더욱 은밀한 곳에 감춰져 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지극히 거룩한 곳이 지성소이다. 그 지성소에는 하나님께서 간직하라고 하신 세 가지 보배가 언약궤에 보관되고 있다. 지성소의 기도는 그 세 가지 보배를 구하는 기도이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은 특별하다. 이스라엘이 성전을 세워 하나님을 섬길 때 오직 일 년에 한 차례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히 9:7∼8). 그 어려운 길을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을 믿는 자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아가야 한다.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 뵙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언약궤에 보관해 영원토록 기념하라고 하신 상징물을 항상 우리가 소유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를 구해야 한다. 만나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늘의 양식이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늘의 양식으로 힘을 얻어야 한다. 오늘날 예수님은 주리고 목마른 영혼을 부르셔서 돈 없이 값없이 양식을 주신다(사 55:1∼2).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셔서 쉬게 해주시고, 그들에게 마음의 위로와 살진 꼴을 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불쌍한 나사로처럼 구원받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의 복을 풍성하게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도와줄 수 있는 만나를 내려주신다. 둘째로 십계명의 돌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을 알아야 한다. 호세아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하였다(호 4:6).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을 힘써 알자고 권면한다.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중복음의 말씀으로 요약되고 압축된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신다는 말씀이다(롬 8:1∼2). 그리고 성령 충만의 약속을 통해 세상을 이기고 살아가는 성령의 권능을 약속해주신다. 또한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는 치료의 약속이 있다. 더 나아가 저주에서 벗어나 풍요의 복을 누리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약속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고 그 뜻대로 기도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하심으로 마귀를 물리치셨다. 이처럼 말씀은 마귀를 쫓아내고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해준다. 온갖 권모술수와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길도 말씀에 있다.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말씀을 알고 담대하게 선포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언약궤에 있는 지팡이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일반적으로 지팡이는 걸어다닐 때나 여행을 할 때 의지가 되고, 목자가 양떼를 지키며 인도할 때 요긴하게 사용됐다. 그래서 지팡이는 세상과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한다. 다윗은 주님의 지팡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승리하며 지나가게 하는 힘이라고 고백한다. 나아가서 지팡이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상징한다. 성령님이 목자의 지팡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를 인도해주시며, 세상의 위험에서 지켜 보호해주신다 그런데 특별하게 언약궤의 지팡이는 하나님이 아론을 지도자로 선택하고 세워주신 상징이다. 모세와 아론의 지도권에 대해서 반역을 꾀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하나님이 심판하셨다. 고라 일당에 대한 심판 이후,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레위지파의 아론을 택하신 증거로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다. 이처럼 언약궤의 지팡이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세우신 증표이다. 오늘날 거친 세상에서 살아갈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며 그의 소유된 자녀인 증거가 필요하다. 그러한 확실한 기도의 응답을 받을 때 어떤 일에도 낙심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 2015.11.29

    성막을 통한 십자가의 기도
  • 성막 안 일곱 기구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예배 상징 유일한 구원의 문 예수 이름 믿고 기도하면 응답 주셔 구약성경을 대할 때 제기되는 질문은 ‘구약의 말씀이 신약성경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하는 것과 ‘그 말씀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구약시대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죄 용서함을 받으며, 하나님을 만나는 복을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동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한 곳이 성막이며, 이동 성소인 성막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로 고정적인 성전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모세에게 계시해주신 성막의 식양은 솔로몬 성전과 그 이후의 성전에서도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성전의 예배가 영과 진리의 예배로 바뀌었지만(요 4:23), 그 절차와 마음가짐은 똑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구약성경의 인물과 조직, 제도, 사건 등이 신약성경과 유사하거나 반대로 나타나는 의미와 상징을 연구함으로써 신구약성경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것을 유형학적(예표론적) 해석이라고 한다. 유형학적으로 구약의 성막기도는 신약의 십자가의 기도와 상응하고 있다. 이때 성막은 예표나 그림자, 십자가는 실재라고 말할 수 있다. 성막 안에는 일곱 기구들이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예배를 상징하고 있다. 그 하나하나를 통해서 오늘날 하나님께 열납되는 십자가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된다. 먼저 성막에 들어가려면 동쪽으로 난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문밖에는 이방인이 있을 수 있지만, 성막문 안으로는 이스라엘 백성 외에는 들어올 수 없다. 성막에 동문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유일한 구원의 문이시다. 예수님은 그 이름을 믿고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의 약속을 주셨다(요 16:23). 동문으로 들어가면 번제단이 놓여 있다. 번제단에서는 짐승을 잡아 온전히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다. 번제단 앞에서의 기도는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 앞에 나아와 기도할 때 죄와 세상에 대해서 죽고, 온전한 산제물로 자신을 드려야 한다(롬 12:1). 다음으로 물두멍에서 제사장들은 그들의 손과 발을 씻어야 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인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았을지라도 규칙적으로 날마다 죄를 자백하고 복종하는 씻음이 필요하다. 물두멍의 물은 말씀을 상징하므로 말씀에 자신을 비춰보아야 거룩함을 유지하고 망상에 빠지지 않는다. 성소 안에는 진설병상과 등대, 향단이 있다. 진설병상은 정결한 떡을 올려놓는 떡상으로 우리에게 영적 자양분을 공급하여 성장하게 하는 말씀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기도는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드리는 것이며, 내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말씀의 떡을 먹을 때 우리의 기도가 이미 응답된 것을 깨닫게 되거나 응답되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금으로 만든 등대는 성소를 비추는 유일한 빛이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섬기는 빛을 주지 못한다. 오직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해준다. 성령님을 의지함으로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를 올리게 되며,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여도 성령의 빛이 기도응답의 확신을 준다. 성소에서 지성소로 다가가는 바로 앞에 있는 것이 향단이다. 향단의 향은 제사장을 통해 올리는 백성들의 기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참으로 향기로운 기도를 올릴 수 있게 된다. 지금까지 성막기구의 순서대로 순종과 회개와 언약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도한 성도들은 향단 앞에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향단 앞에서 기도할 때 나와 세상은 간곳없고 오직 성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계신다. 지성소에 들어가면 법궤와 속죄소가 나타난다. 법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권세를 나타낸다. 법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최고의 권세의 상징이다. 그 법 앞에서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직 우리의 기도는 다시금 땅에 있는 한없이 연약한 인간임을 자복하게 된다. 그런데 법궤 위에는 금으로 만든 속죄소, 즉 시은좌가 있다. 피 흘린 대속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 속죄소요, 그 자리는 영원한 은혜의 자리이다. 이곳에서의 기도는 하나님과 어린 양을 세세토록 찬양하는 것이다(계 5:13). 마지막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 2015.10.25

    ‘철우문자’의 기도응답
  • 쇠로 만든 소를 모기가 뚫을 정도의 간절함 담아야 절체절명 현실서 기적 체험, 삼중축복 누리게 돼 모든 사람들은 삶의 갖가지 문제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좀 더 강하게 말하면 문제의 포로가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몸과 마음의 질병, 가정과 직장의 여러 가지 문제들의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옛날 선현들이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도 좌절하지 말라고 던져주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쇠로 만든 소를 모기가 뚫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鐵牛蚊刺). 쇠로 만든 소라는 것은 모기가 극성을 부리므로 소에게 쇠로 된 망토를 덮어주었다는 뜻이다. 그렇게 철저히 무장한 소에게 여린 침을 가진 모기가 달려들어서 소의 피를 빨아먹을 수 있을까? 옛날 어떤 무사가 밤에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나서 활을 쏘았다. 퍽 하는 소리를 듣고 적어도 호랑이가 부상을 입었겠거니 생각하고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다음날 산에 다시 올라가보니 호랑이나 핏자국도 없고 다만 바위에 자신의 화살이 꽂혀 있는 것을 보았다. 너무 신기해서 다시 활을 쏘아보았지만, 번번이 화살은 바위에서 튕겨나갔다. 어젯밤에는 너무 다급한 순간이어서 온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화살이 바위를 꿰뚫었지만 다음 날에는 그런 정신집중이 되지 않아서 화살이 바위를 뚫지 못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젯밤에는 ‘철우문자’가 일어났던 것이다. 성경은 기적의 책이다. 성경에는 갖가지 기적 이야기가 가득 차 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서 애굽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활동할 때에는 무수한 기적이 일어났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고, 물속에서 쇠도끼가 떠오르고, 가루통에 곡식가루와 기름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등의 기적이 무수하게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으며, 열 두 해 혈루병에 걸린 여인을 치료하시고, 나병환자를 즉시 고쳐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기적을 믿고 바라는 것이다. 절체절명의 현실에서 기적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응답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까? 기적은 옛날이야기처럼 막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적을 바라기 전에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돌이켜야 한다. 아모스는 우상과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신다.(암 5:4∼6) “너희는 야훼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은 그의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게 된다. 다음으로 예수 안에서 생각을 변화시켜야 한다. 하나님은 기도뿐만 아니라 생각을 통해 응답하신다.(엡 3:20) 그러므로 생각이 하나님과 일치되도록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게 된다”는 삼중축복으로 자신의 생각을 조율해야 한다.(사 55:6∼7) 이 세상의 고통에 눌려 좌절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항상 생각하고 기도해야 한다. 나아가서 행동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한다.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사람들의 생활이 곤궁하였다. 그 이유는 입으로는 하나님의 복을 구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저주를 자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일조와 헌물을 통해 물질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돌이키는 행동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쌓을 것이 없도록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다.(말 3:7∼12) 또한 사람은 하나님께 돌이킬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돌이켜야 한다. 그래야 신속한 기도응답을 받는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와 같이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돌이킨 기도가 기적을 낳는다.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이 신속하게 내려 치료받고 구원받게 된다.(사 58:8∼11)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야훼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쇠로 만든 소를 모기가 뚫을 수 있다는 것이 선현들의 생각이다.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불가능은 없다. 오직 철우문자의 기도로 전진해야 한다.
  • 2015.09.27

    기분만 내는 기도와 진실한 기도
  • 주님 뜻 아닌 자기중심 기도는 열매 없어 하나님 용서 사랑 담은 진실한 기도 드려야 기도는 많이 하는데 열매가 없으면 참 큰일이다. 그것은 농부가 씨앗을 많이 뿌렸는데 거두는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 때문일까? 기도하는 사람 때문일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5)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죄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쳐준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에 응답의 기적이 나타나려면, 죄악의 손을 씻어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손은 깨끗한 손이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악수의 손을 내밀었을 때 뒤로 손을 감추는 경우가 있다. 손이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미안해서 상대방의 손을 붙잡지 못한 것이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할 때, 기도의 손이 깨끗해야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여 죄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죄 용서를 받으려면 입술의 고백뿐만 아니라 행동의 변화가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가 진실된 기도인가를 살펴보신다. 진실(眞實)이란 거짓이 없고 올바르다는 뜻인데, 가짜가 아닌 참 열매라는 말이다. 진실한 기도는 말뿐만 아니라 생활에서 열매를 맺는 기도이다. 그 진실함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느냐 하는 데 있다. 잠언 28장 9절에는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 기도하고 있으면, 기도가 응답받는 길을 친절하게 가르쳐주신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6∼17) 이와 같이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은 기도자의 경건치 못한 생활 탓이다. 경건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모여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참다가 지치셨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3∼14) 오늘날 각종 성회를 통해 기도는 많이 하지만 사람이 바뀌지 않고 사회가 변화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지 않고, 자기중심의 기도를 드리기 때문이다. 그저 기도하는 것이 좋으니까 기도한다는 식으로 기도한다. 그리고 기도의 의무를 벗어난 가벼운 마음으로 기분 좋게 마음껏 세상을 살아간다. 기도를 드렸기 때문에 웬만한 죄나 잘못은 저절로 용서 받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하지만 자기 생활이 변화되지 않는 기도는 자기 기분만 내는 기도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간혹 기도와 생활이 별개인줄 알지만,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처럼 사람과 기도는 하나이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기도가 생활과 일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활과의 일치되지 않는 것에 대한 애통함도 없이 다만 ‘자기 기분만 내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보면(눅 18:10∼13), 바리새인의 기도는 표면적으로는 흠이 없는 기도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셨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자랑 비슷하게 자기 의를 드러내었고, 자기 기분만 내었으며, 자기 혼자 흥분하고 감격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감동시켜야 할 기도가 자기도취로 끝이 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세리는 기도다운 기도도 드리지 못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런데 세리의 투박하고 애통하는 기도가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진실로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가 필요하다. 마음을 쏟아 놓아라. 물 쏟듯이 마음을 쏟아놓고, 빈 마음에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관심의 생수로 채워라. 그 생수를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나눠주라. 그것이 열납되는 진실한 기도이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 2015.08.23

    기도응답과 믿음의 인내
  • 응답까지 견디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은혜 인내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 깨달아야 다니엘은 포로생활 중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꾸준히 기도했다. 그가 자신의 안전과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할 때 종말에 관한 놀라운 환상을 보게 됐다. 그 하나님의 계시는 다니엘이 기도하던 첫 날에 이미 응답되었지만, 공중의 흑암의 세력이 21일 동안 막아서 21일 만에 실제적인 응답으로 체험하게 됐다(단 10장). 이처럼 이미 기도가 응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응답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이 있다. 그때 결코 낙심하거나 뒤로 물러가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그런 기도의 고통은 산고와 같다. 분명히 아기를 잉태하였지만 해산의 고통을 겪어서 아기를 품에 안는 것처럼, 기도가 분명히 응답이 되었지만 인내의 산고를 겪은 후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애굽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됐다(출 2:23). 그 첫 번째 기도응답이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기도응답인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세는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는 것이나, 나병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이적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다. 망설이는 모세에게 나일강물을 떠다가 땅에 부으면 피가 되는 기적으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다짐해주셨다. 그러나 모세는 몇 번의 기적을 체험했으면서도 여전히 “나는 혀가 둔하여서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발뺌을 했다. 만일 모세가 40년 전 실패한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이제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을 깨달았더라면 감사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르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정녕 뛸 듯이 기뻐하며 감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늙고 연약해진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례 요한이 태어날 것을 전해주는 가브리엘 천사장 앞에서 침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그저 자신과 아내가 나이가 많다는 것만을 말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자신의 오랜 기도보다, 현실의 상황이 더 중요하다는 믿음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은 그의 가슴 속에서 전혀 역사하고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눈앞에 다가오는 일이 기도응답인 줄 알지 못한다. 막상 자신들의 기도응답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에라도 전혀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믿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한탄하고 의심할 때가 많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모세를 보내어 애굽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신다는 것을 전해주셨다. 그러나 그 응답은 저절로 실타래가 풀리는 것처럼 간단하고 순적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뒤집어지는 반전을 겪게 됐다. 애굽 왕 바로의 노여움에 부딪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제노동이 강화되고 고통이 가중되는 역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기도응답의 진행과정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인내할 일이었지만, 그들은 공연히 일을 만들었다고 모세를 원망했다. 또한 모세조차 일이 어려워지자 어찌하여 백성들로 더욱 학대를 당하게 하시는지 하나님께 반문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난처한 상황에 빠진 것도 아니고, 기도응답이 취소된 것도 아니었다. 오직 믿음의 인내가 필요할 뿐이었다. 모세는 백성들의 지지와 후원이 사라졌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계속 바로를 찾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라고 했다. 여전히 바로의 강퍅한 마음이 누그러들지 않았지만, 족장과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기도응답에 대한 하나님의 열심은 변함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기도응답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와 바로의 저항은 열 재앙이 다 채워질 때까지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자 바로의 저항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출애굽의 기도응답이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잡히게 됐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기도응답은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믿음의 인내에는 한계가 있는데, 응답까지 견디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열심이 일을 이루신다. 그러기에 기도를 응답해주시는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 2015.07.26

    부모님처럼 응답해주시는 하나님
  • -기도응답을 확신하며 기도하라- 위대한 하나님 사랑 십자가 은혜 통해 체험 하나님은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채워주신다. 굶주려서 기도했더니 빵을 주실 뿐만 아니라 믿음을 더하여 주시고, 문제로 인해 기도했더니 문제해결 뿐만 아니라 사랑을 알게 하시며, 질병으로 기도했더니 치료해주실 뿐만 아니라 죽어도 다시 산다는 영생의 소망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같은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아직 체험하지 못했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에 하나님은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응답해주듯이 틀림없이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예수님이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모님의 무조건적 사랑을 체험하고 기억하고 있다. 특히 갓난아기에 대한 부모님의 응답은 기이할 만큼 신속하고 헌신적인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동물에게서도 나타난다. 시골에서 닭장에 불이 났는데 어미닭이 도망가지 않고 쪼그리고 앉아 죽어 있었다. 그런데 그 닭을 들쳐보니 품속에서 병아리들이 ‘삐약 삐약’하며 뛰어나왔다고 한다. 로마시대 타락의 도시라고 일컬어지던 폼페이가 화산 폭발로 인해 도시 전체가 화산재로 덮여버렸다. 나중에 발굴할 때 이상한 모습이 있어서 살펴보니 어린 아이를 감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림자요 구체적인 실증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도저히 짐작할 수 없으므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깨닫게 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것보다 더욱 크고 강렬하다. 성경에는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야훼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사 49:14∼16). 기도에 관해서 말하자면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의 비유는 기도응답의 확신을 위한 것이다. 부모가 우는 아기에게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몸을 돌보아주듯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다양한 삶의 문제에 대해서 응답해주신다.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고 말씀하셨다. 이런 믿음이 없이는 응답받지 못한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약 1:6∼7).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버리는 경우도 있고, 너무 어릴 때라서 절대적인 부모 사랑의 응답을 거의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성령의 사랑의 체험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사랑의 기도응답을 확신하게 된다. 그 사랑은 부모의 사랑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야훼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10)라고 외친 시편 기자처럼 우리는 부모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체험할 수 있으며(롬 5:6∼8), 성령의 충만함으로 깨달을 수 있다(롬 5:5). 이처럼 우리는 부모님 사랑의 응답만큼 확실하게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믿을 수 있다. 그때 기도는 미래의 기도가 아니라 과거시제의 기도로 드리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하며 드리는 기도는 과거형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과거시제로 기도를 드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요 11:40∼41).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미래형의 막연한 기도여서는 안 된다. “받게 될 거야. 받았으면 좋겠어”라는 막연한 기도는 기적을 가져오지 못한다. 이미 이루어진 것을 믿고 감사하며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는 나았습니다.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의 부모님에게 구할 때 좋은 것으로 응답주시는 것처럼,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완벽하게 응답해주신다. 부모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도응답을 확신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주신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 2015.06.28

    성령 안에서의 기도
  • 하나님 약속 부여잡고 몸부림칠 때 오순절 성령 강림 성령 충만한 사람의 기도로 위대한 기적이 일어 난다 무디 목사의 오른팔이었던 토레이(R.A. Torrey)는 말했다. “나는 성령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 나는 성령 안에서 설교하고 전도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나는 성령 안에서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깨닫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나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으시면서 사역을 행하시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기도하셨기에 성령 충만 하셨겠지만, 또한 성령 충만 하셨으므로 열심히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신 후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에 나가 40주야를 금식하며 기도하셨다(마 4:1∼11). 굳이 순서를 말하자면 이미 성령 충만하셔서 금식기도를 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 열납되는 능력 있는 기도란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먼저 받아야 한다. 우리가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는 근본적이고 일상적인 죄의 회개와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철저한 순종, 하나님의 약속을 부여잡고 몸부림치는 기도의 열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초대 기독교회의 탄생을 이끈 오순절 성령강림은 그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임하였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함께 기도하던 모든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된 것이다(행 2:1∼13). 사마리아 교인들이 빌립의 전도로 치료받았으나 성령 충만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초청해 성령받기를 기도하고 안수를 받자 모두 성령을 받았다. 평소 기도를 많이 하던 평신도 아나니아는 회심한 사울에게 안수 기도함으로 사울이 성령 충만을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다시 보게 됐다. 이처럼 문제를 위해 안수기도를 받는 경우도 많이 있지만, 오로지 성령 충만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안수를 받을 때 성령 충만을 받고 치료도 받게 된다.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면 계속적으로 성령의 감동감화하심과 성령 충만의 역사가 나타난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해 신자가 됐고,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행 2:41∼42).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오로지 기도’에 힘쓰게 된 것은 순전히 성령님의 기도하게 하시는 역사 때문이다. 기도는 성령의 역사이며 열매이다. 성령님이 사람들을 감동시켜 기도하게 하신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는 일이 이루어진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 원수들을 멸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한다. 스데반의 성령 안에서의 기도로 인하여 돌을 던지던 원수들과 증인의 옷을 맡은 사울까지 회심하고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나타나게 됐다. 또한 고넬료가 제 구시에 기도하면서 환상을 보았으며, 베드로가 제 육시에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다(행 10장). 베드로가 환상에 대해서 생각할 때 성령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과 함께 가라고 말씀해주셨다. 이처럼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영안이 열려 환상을 보게 되고, 그 환상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나아가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이 주님을 섬기며 금식하고 기도하다가 성령의 지시를 받고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선교의 사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행 13:1∼3).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아이를 치료하신 후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라고 하셨다(막 9:29).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기도할 때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났다. 성령 충만한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할 때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성령 충만한 바울이 명령하자 점치는 귀신이 쫓겨났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말씀은 성령 충만한 사람의 기도로 위대한 기적이 일어난다는 말씀이다. 특히 3년 6개월의 가뭄과 비를 구한 엘리야처럼 성령 안에서 구체적이고 결단을 내리는 확고한 기도를 통해서 성령님이 기적을 나타내신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담임)
  • 2015.05.31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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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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