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인 교수의 교회사 고고학
팔라이올로고스 시대의 건축미술
  • 이 시대 건축물의 조각물은 새롭게 제작한 것들도 있지만 이전 시대의 조각물을 그대로 다시 사용하였다. 새로운 조각물도 종종 옛 형태대로 재생산하였다. 예컨대 립스 수도원의 남쪽 교회의 새로운 배내기와 창문의 조각물은 북쪽 교회의 10세기 조각물과 같은 형식을 보여준다. 아주 오랜 전통을 재생산한 조각물도 나타나는데, 파마카리스토스와 크리세이의 성 안드레 건물장식은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의 아칸서스 장식을 하고 있다. 팔라이올로고스 시대의 아칸서스 장식과 아치 구조의 전반적 형태는 초기 비잔틴 시대에서 유래된 것으로 과거의 번영을 재현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 당시 수도에는 그런 조각이 가능한 수준 높은 장인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청동 조각물로는 오늘날 남아 있지 않지만 문헌상으로 성 사도 교회 근처에 청동 인물상이 있었으나 지진으로 파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청동상은 미가엘 8세가 무릎을 꿇고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천사장 미가엘에게 바치는 형상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미가엘이 죽은 1282년 이전에 그 도시를 탈환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되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청동 인물상을 세워 놓는 습관이 사라진 후 여러 세기가 지나서 팔라이올로고스 시대에 다시 인물상을 세워 놓은 증거가 되었다. 팔라이올로고스 시대에 건물의 복구가 활발해짐에 따라 건축 미술도 부흥하게 되었다. 이 당시에 가장 이른 시기의 미술품은 성 소피아 교회의 남쪽 회랑에 있는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그 옆에 서서 기도하는 침례 요한과 동정녀를 묘사한 패널이다. 이 작품은 패널의 아래 부분에 기록하는 명문이 없어져서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다른 작품과 비교하여 볼 때 13세기 후반에 속하며 다른 것과의 위치를 비교해볼 때 콘스탄티노플의 회복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것 같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코라의 수도원 교회와 데오토코스 파마카리스토스 교회와 베파 킬리세 카미이 교회에는 모자이크 장식이 남아 있다. 본당의 천장에는 전례적인 이콘과 공식적인 이미지를 가진 중기 비잔틴 시대의 형식의 모자이크가 아직 남아 있으며 그 주변에 여러 가지 성경 이야기들을 배열되어 있다. 그 주제들은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과 사역과 수난, 동정녀의 생애, 그리고 때때로 성자들의 생애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 형식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 내용이 풍부해졌는데, 그것은 12세기 노르만 정복의 시칠리아와 13세기 중반의 트레비존드의 성 소피아 교회의 경향을 따른 것이다. 이러한 대부분의 요소들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코라 수도원의 데오도르 메토키테스 교회에 있는 장식들에서 발견된다. 그 교회의 본당과 홀에는 그리스도와 동정녀 등에 관한 대리석 패널과 모자이크들이 가득 차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요셉의 꿈에 대한 장면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장면을 묘사한다. 그 맞은편에는 그리스도의 조상들을 세로로 판 24개의 홈 속에 묘사하였으며, 그 정상에 그리스도가 자리잡고 있다. 교회를 헌정한 데오도르 메토키테스는 안쪽 홀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반원창에 묘사되었다. 그는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교회의 모형을 헌정하고 있다. 그 모자이크 오른편에는 그보다 훨씬 큰 패널로 그리스도 옆에서 중보 기도하는 동정녀가 묘사되었는데, 동정녀는 수도원의 후원자였던 이삭과 메토키테스 가문 출신의 수도승 멜라네를 위해 대신 빌어주고 있다. 그리스도와 동정녀는 크게 묘사된 반면, 두 사람은 조그맣게 아래 부분에 묘사되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수도와 데살로니키 사이에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증거가 데살로니키의 성 사도 교회의 장식에서 나타난다. 그것들은 형식과 배열에 있어서 코라 수도원 교회와 유사하다. 돔 천장에는 중앙에 그리스도가 묘사되고, 그 아래로 예언자들과 복음서 기자들이 배열되었다. 때때로 성자들에게 헌정된 교회나 예배당에는 그들의 모습이 그리스도와 동정녀에 연관된 표준적인 형태에 첨가되어 묘사되기도 한다. 데살로니키에 있는 14세기의 성 니콜라스 오르파노스 교회에는 성 니콜라스의 탄생과 성장과 임직과 교회의 직분의 변천, 그가 행한 기적, 죽음 등의 생애가 서쪽 회랑에 묘사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전례적인 이콘들과 세부적인 이야기들을 조화시켜 묘사하는 장식이 팔라이올로고스 시대의 표준적인 형태이다. 그러한 형태는 미스트라에 있는 몇몇 교회에 남아 있는데, 제법 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묘사되었다. 예컨대 성 데메트리오스 교회의 경우 240여 개의 이콘들과 세부적인 표현들이 본당과 회랑 등에 풍성하게 묘사됐다. 팔라이올로고스 시기의 가장 풍성한 그림들이 세르비아 교회들에 남아 있다. 네만지드 왕조의 사람들은 1296년 아릴리에 수도원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프리즈렌에 동정녀 교회를 세웠다. 그 교회들은 돔 천장에 거룩한 위계질서를 나타내는 그림과 전례적 이콘이나 성자들을 묘사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14세기말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내용의 그림들에 나타난다. 세르비아 교회에서 발견되는 그림의 주제들은 콘스탄티노플이나 데살로니키의 것들보다 훨씬 폭이 넓다. 그것은 두 지역에 앞선 시기의 경우처럼 다양한 유물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으로 여겨지지만 그 반대로 어떤 그림이나 이콘은 세르비아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상인 목사(순복음동경교회 담임)
  • 2009.09.20

    콤네노스 시대의 채색 사본
  • 11∼12세기 채색 삽화로 장식한 설교집, 신앙서적 등장 11∼12세기경이 확실한 콤네노스 시대의 채색사본은 100여 개가 된다. 채색사본들은 복음서와 복음서 강해, 시편, 크리소스톰이나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 같은 교부들의 설교집 등이다. 성인들의 축일표는 얼마 되지 않으며, 세속적인 채색사본은 거의 없다. 채색사본들의 형식은 마케도니아 시대나 그 이전 시대의 것처럼 대부분 낯익은 것이다. 많은 복음서들은 장식된 정경 상자 안에 들어 있고, 책의 첫 페이지에 복음서 기자의 초상화와 화려한 권두장식이 있다. 정교한 권두의 꽃 장식은 이 시기의 호화로운 사본들의 특징이며, 작은 삽화가 첨가되기도 했다. 머리말에 소개글이나 그림으로 장식하는 경향은 이전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이 시기에 폭넓게 사용됐다. 또 다른 형식이 파리에 있는 복음서에서 발견되는데, 네 명의 복음서 기자들의 초상화 이외에 350개 이상의 소형 그림들이 사이사이에 들어 있다. 그 그림들의 연대는 기록돼 있지 않지만 지금 런던에 있는 1066년에 제작된 데오드로의 시편 형식과 이콘의 세부양식과 매우 유사하므로 동시대로 여겨진다. 데오도르의 시편은 9세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여백에 430개의 삽화를 그려 넣었다. 오늘날 바실 2세를 위해 만든 성인 축일표는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유사한 형태는 여러 개 남아 있다. 모스크바에 있는 1063년 축일표는 5월부터 10월까지의 축일을 보여주며, 열두 개의 권두의 장식을 가지고 있다. 주된 내용으로 성인들의 초상화와 그들의 기적과 순교, 유품들의 설명을 담고 있다. 1056년의 성인 축일표는 각각의 달마다 3∼4개의 구획으로 나눠진 소형 삽화들로 시작하고 있다. 그러한 구조는 한 개의 패널에 한 달에서 세 달까지 성인들을 그려놓은 달력의 이콘에서 유래됐을 것이다. 한편 11∼12세기에 속하는 채색삽화로 장식한 설교집들과 신학서적들이 나타난다. 현재 시내산의 캐더린 수도원에 있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 설교집은 옥스퍼드 복음서의 권두장식을 본뜬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다. 그 사본은 1149년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의 원장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각 설교문이 시작되는 장마다 잘 장식된 틀 안에 한 사람의 모습을 그려 놓았다. 사본의 첫 장에는 저자인 그레고리가 교회를 뜻하는 건물 안에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무질서하게 보이는 돔과 지붕들은 판토크라토로 수도원을 그린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쩌면 화가의 의도적인 표현이었을지 모른다. 시내산의 그레고리 사본보다 질이 떨어지는 그레고리의 설교집이 약 20여 개 남아 있는데, 모두 유사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전과 같이 11∼12세기의 채색사본의 발간기에 언급된 필사자는 장로나 수도승으로 기술되며, 화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러나 1100년에 제작된 멜버른에 있는 복음서에는 사본의 모든 작업이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그 사본에는 아이를 안고 있는 동정녀에게 그의 책을 헌정하는 그림이 첫 장에 나타나며, 그 헌정자인 데오파네스 자신이 책을 필사하고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기록해 놓았다. 11∼12세기 채색사본에는 비교적 헌정자의 모습이 많이 묘사되어 있다. 멜버른의 데오파네스처럼 헌정자들은 경배하는 모습으로 묘사됐고, 보통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문이 기록돼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1061년의 성구집에는 헌정자 바실이 동정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됐다. 그가 검소한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수도승이었을 것이다. 1067년 복음서에는 부부가 묘사됐는데, 지방 수령이던 남편 데오도르 가브라스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그리스도 옆에 서 있으며, 그의 아내 에이레네는 동정녀의 손을 잡고 인도받고 있다. 그런데 남편의 그림은 왼편에, 아내의 그림은 오른편에 그려져 있어 두 그림을 펼치면 동정녀가 가브라스의 아내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모습이 된다. 황제를 묘사하고 있는 채색사본도 몇 개 남아 있다. 파리의 사크라 파랄렐라에 있는 권두장식에는 동정녀가 콘스탄틴 10세와 유도키아 왕비에게 왕관을, 그들의 아들인 미카엘과 콘스탄틴에게는 천사들이 왕관을 씌워주는 그림이 있다. 시나이 수도원의 요한 크리소스톰의 설교집에는 콘스탄틴 9세와 조에, 데오도라가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연속되는 내용으로 그림을 그린 사본도 있는데, 바티칸에 있는 파노플리아 도그마티카 사본이 대표적이다. 이 사본은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만들어진 이단에 대한 논문이다. 그 사본의 왼쪽에는 정통교리의 수호자들인 교부들이 맞은편 오른쪽의 알렉시오스 황제에게 그들의 저술들을 주고 있다. 오른쪽의 그림에는 황제가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 다음 면의 왼쪽에는 알렉시오스가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에게 책을 드린다. 삽화와 글에는 알렉시오스를 황제와 그 책의 후원자로 기록하고 있다. 채색사본도 서방 세계와의 연관성이 나타난다. 1077년경의 비엔나 시편은 분명히 콜로뉴에 있는 성 게레온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시편은 그리스어로 쓰였으며, 동정녀와 아기, 십자가형, 다윗, 그리고 세 개의 권두장식을 가진 형태이다. 그러나 그 사본에는 그리스어로 기록된 성 게레온의 초상화에 아마도 필사자에 의해 쓰인 라틴어 이름이 함께 기록됐다. 그 사본은 외교적인 선물이었거나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서방교회의 후원자에 의해 제작됐을 것이다. 특히 서방과 비잔틴의 전통이 크게 혼합된 것은 시칠리아에서 만들어진 그리스어 사본에 많이 있다. 당시 시칠리아에는 비잔틴 문화를 선호하는 노르만 왕조가 있었을 뿐 아니라 비잔틴 수도원이 있었다. 시칠리아에서 유래된 사본들로는 파리에 있는 1167년의 복음서를 비롯해 여러 개가 남아 있다. 한상인 목사(순복음동경교회)
  • 2009.06.21

    모자이크와 그림으로 본 콤네노스의 건축 미술
  • ‘표정이 있는’ 얼굴 모습 묘사 마케도니아 문화적 전통 계승 콤네노스 왕조의 건축 미술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자이크와 그림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11세기 중반에 속하는 갑바도기아 동굴 교회에는 매우 작은 십자가를 장식한 그림과 함께 12∼15개의 이콘들이 묘사되고 있다. 이들 교회들은 그림의 중심인물의 배열에 있어서 그리스의 수도원 교회와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 대신에 앱스에서 보좌에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마리아는 측면의 앱스에 묘사된다. 이런 위치 변경은 지역적 전통인 것 같다. 또한 러시아의 키에브에 있는 성 소피아 교회에는 중기 비잔틴 시대의 미술적 특징이 보다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 교회는 1037년 야로슬라브 황제 때 건축하기 시작하여 1043년 러시아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때에도 공사가 계속됐다. 중앙의 성전에는 모자이크 장식으로 돔에는 창조주 그리스도와 천사들을, 돔 아래의 삼각궁륭에는 복음 전도자들을, 앱스에는 마리아를 묘사하고 있다. 수태고지 장면은 북쪽과 남쪽으로 나눠져서 왼쪽에 천사가 오른쪽에 동정녀가 묘사됐다. 나머지 색칠된 그림 부분에는 수난기사와 동정녀의 생애와 성자와 천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이 교회에는 야로슬라브 황제 가족의 초상화가 나타난다. 그 형식은 9세기 바실 1세와 그의 가족의 초상화를 연상시켜주는 것으로 비잔틴 황실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11세기에 속하는 교회의 장식들 중에 모자이크와 그림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 그 양식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을 보면 여러 명이 그 작업에 참여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그림의 양식을 언급한다면 절제된 선과 꽉 차인 인물의 모습으로부터, 보다 여유 있는 선과 ‘표정이 있는’ 얼굴 모습을 묘사하는 것까지 범위를 정할 수 있다. ‘표정이 있는’ 형식은 12세기 키프로스 교회의 그림에서 나타난다. 그 당시 키프로스는 콤네노스 왕조에서 성지에 대한 십자군 전쟁을 수행하는 교두보로 사용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된다. 표정이 있는 얼굴 묘사는 1105∼6년에 완성된 아시누에 있는 교회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키프로스 라구드라에 있는 아라코스의 파나기아 교회에는 보다 더 발전된 표정의 그림이 발견된다. 그 그림은 1192년에 만들어 졌으며, 주름진 옷을 입고 드라마틱한 표정을 한 늘씬한 인물로 묘사됐다. 12세기의 모자이크 장식들이 시실리 섬에서 발견되는데, 그곳은 12세기 초엽에 노르만 왕국이 세워졌던 곳이다. 어떻게 해서 비잔틴의 미술가들이 그곳에 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상업적인 접촉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이미 서구의 기독교적 건축양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비잔틴의 모자이크 장인들이 익숙하지 않은 건물 형태에서 작업을 했을 것이다. 오직 팔레르모에 있는 마르토라나 교회가 내접한 십자가 형태로써 비잔틴 장인들에게 친숙한 건물이었다. 이 교회는 1148년에 비잔틴 양식으로 건축됐으며, 돔에 그리스도와 천사들과 예언자들이, 삼각궁륭에 복음 전파자들이, 돔 주위의 아치에 이콘들이 장식됐다. 비잔틴 양식에 나타나는 기부자들도 묘사됐는데, 한 사람은 동정녀 앞에, 다른 한 사람인 로저 2세는 그리스도 앞에서 왕관을 수여받고 있다. 로저 2세의 왕궁 예배당은 1143년에 건축됐는데, 동쪽의 내접한 십자형과 서쪽의 바실리카 양식이 조합된 것이다. 동쪽에 있는 장식들은 친숙한 비잔틴 양식의 그림들을 보여준다. 팔레르모의 모자이크들은 전형적인 비잔틴 양식이며, 그리스어로 쓰인 명문이 그 밀접한 연관성을 확인해 준다. 또한 몬레알레 교회는 1174∼1183년에 세워졌다. 노르만의 세 번째 왕인 윌리엄 2세에 의해 건축됐으므로 왕궁의 예배당과 같은 양식으로 장식됐다. 그러나 왕궁 예배당보다 훨씬 크며 대부분의 장식은 벽면에 만들어졌는데 그 공간을 채우기 위해 왕궁에 있는 리브가의 여행이 두 편의 이야기로 나눠져 그려졌다. 시실리 섬에 있는 모자이크의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1140년경에 작업이 시작되어 적어도 45년 동안 계속됐을 것이다. 작업에는 여러 사람이 동원되어 절반쯤 진행하면 비잔틴에서 온 장인들이 손질했을 것이다. 몬레알레 교회에서 마지막 모자이크 작품은 그리스어 명문이 약간만 들어있는 것이다. 그 무렵에는 이미 대부분의 작업이 토착 장인에 의해 이루어져서 그리스어가 많이 사용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전히 비잔틴 장인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을 동시대의 발칸반도와 키프로스에 있는 것과 동일한 양식이 발견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남아 있는 11∼12세기의 모자이크는 성 소피아 교회의 남쪽 회당에 있는 두개의 패널이다. 이 패널들은 동쪽 벽에 한 쌍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두 작품은 90년 정도 차이가 있다. 보다 일찍 만들어진 왼쪽의 것은 보좌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와 돈 주머니를 들고 있는 콘스탄틴 9세와 두루마리를 든 황후 조에가 묘사됐다. 이 모자이크는 황제 부부가 교회에 돈과 토지를 바치는 연례축제를 묘사한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두 번째 패널은 1118∼22년에 만들어졌으며, 동정녀를 중심으로 콤네노스 왕조의 요한 2세와 황후 에이레네가 역시 돈주머니와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그 밖에 많은 다른 콤네노스 왕조의 모자이크와 그림들이 황제를 묘사했지만 오늘날 기록으로만 남아 있다. 그 설명된 이미지들을 통해 볼 때, 콤네노스 왕조가 무척 다양한 상황 가운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장면들은 콤네노스 왕조 시대가 마케도니아 시대의 문화적 전통을 분명히 계승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그것을 통해서 콤네노스 왕조는 이전의 왕조를 합법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을 것이다. 한상인 목사(순복음동경교회)
  • 2009.04.19

    콤네노스 왕조 시대의 건축
  • 11∼12세기 지적으로 번성한 시대 내접한 십자가 모양의 교회 건물이 특징 콤네노스(Komnenos) 시대란 1025년부터 1204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기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몰락기부터 안겔루스 황제의 통치기까지 포함되지만 주로 콤네노스 왕조가 다스렸기 때문에 콤네노스 시대라고 부른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바실 2세는 40년 가까이 통치했으나 후사가 없이 죽었고, 그의 조카인 콘스탄틴 8세가 계승하였다. 그후 바실 2세의 딸인 조에와 그의 남편들이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비잔틴 제국은 점점 미약해졌고 혼란한 시대가 계속되었다. 결국 1057년 아나톨리아의 군사 귀족의 하나인 이삭 콤네노스가 황제가 됨으로써 마케도니아 왕조는 끝이 났다. 하지만 콤네노스가 겨우 2년 통치했을 뿐이며, 다시금 혼란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081년 이삭 콤네노스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1세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5대에 걸친 콤네노스 왕조를 세우게 되었다. 그 때까지 심각하던 황제와 귀족간의 갈등은 황제 어머니의 지혜로운 조정과 귀족간의 결혼정책으로 해결되었다. 알렉시오스 때 제국의 안정이 회복되고 재정도 개선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교회재물을 몰수한 강압조치가 있었다. 어쨌든 권력과 부귀가 이전보다 더욱 콘스탄티노플에 집중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11∼12세기 콤네노스 왕조 시대는 지적으로 번성한 시대였다. 보다 높은 교육이 시행되어서 11세기 중반에는 미카엘 셀루스 같은 탁월한 역사가가 출현하여 크로노그라피아라는 흥미있고 가치있는 책을 남겼다. 고등교육은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베풀어져서 알렉시오스 황제의 어머니인 안나 달라세나는 학식있는 여성으로 유명하였고, 그의 손녀인 안나 콤네나는 그 부친의 통치 연대기를 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성의 학문적 전통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콤네노스 왕조는 군사적 업적을 남겨서 주변의 부족들을 무찌르고 아나톨리아의 영토로 회복하였다. 그렇지만 동서교회의 갈등이 심해져서 1054년에 기독교회는 동서로 분열되었다. 그런데 1077년에 예루살렘이 터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서방 국가들의 원정은 비잔틴 제국의 안전을 위협하고 영토분쟁을 일으킴으로써 갈등을 심화시켰다. 마침내 제4차 십자군 전쟁 때에는 십자군들이 1204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함으로써 라틴 국가의 지배가 시작되고 콤네노스 왕조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콤네노스 왕조시대인 11∼12세기의 일반 건축물에 대한 증거는 문서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대부분은 그들의 궁전을 건축하거나 재건축하는 귀족들에 관한 것들이다. 이 시기에 교회 건축은 이전의 양식과 거의 변화가 없었다. 내접한 십자가 모양의 교회가 가장 많고 폭넓게, 특히 그리스에 건축되었다.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영토의 상실과 이슬람 세력의 확장으로 거의 교회가 건축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리스에 많은 교회가 남아 있는 것은 그곳의 경제적 번영과 함께 비잔틴 이후 시대에 교회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측근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여러 교회가 지어졌는데, 알렉시오스의 아들인 존 2세는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을 지었다. 이 수도원 교회는 3개 부분의 복합건물로, 그 한 부분은 남쪽에 그리스도께 헌정된 내접한 십자가 형태의 건물이며, 두 번째 부분은 북쪽에 동정녀에게 헌정된 내접한 십자가 형태의 건물이다. 세 번째 부분은 두개의 돔 지붕을 가진 미가엘 성당으로 그곳에 황제의 관을 모셔 놓았다. 교회 건물은 일부 벽돌을 안쪽으로 밀어놓고 그 위에 모르타르를 발라서 벽면에 줄무늬가 생기가 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건물들의 보수적 성향은 드물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아나톨리아의 교회 건물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다만 두 지역의 차이는 아나톨리아에서 교각을 사용한 반면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둥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기둥을 사용한 것은 그만한 재료가 있을 때 기둥을 사용한 것일 뿐 건축양식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앞서 말하였지만, 콤네노스 왕조 시대의 교회 건축에 있어서 가장 흔한 형태는 내접한 십자가 모양의 교회로서 대부분 그리스에 남아 있다. 이러한 양식으로 연대가 정확한 교회는 1028년에 크리스토퍼와 그의 아내를 위해 지은 파나기아 칼케온 교회이다. 테살로니키에 있는 이 수도원 교회는 벽돌로 건축되었으며, 아치형의 안으로 들어가게 만든 창문과 벽돌로 쌓은 벽기둥, 아치형의 벽감이 있는 구조에, 줄무늬 같은 많은 결을 가진 외부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모든 특징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건물들과 차이가 없으므로 콘스탄티노플의 건축 양식을 따른 대표적인 지방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리스에는 중기 비잔틴 시대의 가장 솜씨 있는 디자인을 한 십자가형의 팔각형 건물이 남아 있다. 그런 양식으로 11세기 중반에 지어진 포키스에 있는 호시오스 루카스 교회는 중앙에 팔각형의 형태 위에 돔 지붕을 하고 사방으로 교각을 만들어 십자가 형태를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주로 그리스의 남부와 중앙 본토에서 발견되지만, 원래 콘스탄티노플의 기원을 가진 어떤 황제의 후원을 받은 교회건물을 변형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팔각형의 돔형 교회는 비록 키오스 섬에서만 발견되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 유래된 것이 분명한 것 같다. 그 대표적인 건물은 키오스의 네아 모네 교회로써 1042년에 조에 황후와 그 남편 콘스탄틴 9세와 그 여동생인 데오도라의 후원으로 건축되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 건축가와 모자이크 기술자를 보내 건축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성 사도교회와 세부적인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영향을 준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중기 비잔틴 시대의 건축물에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바실리카 양식도 나타난다. 그리고 11∼12세기의 비잔틴 건축 양식을 러시아와 이탈리아 같은 제국 영토 밖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한상인 목사(순복음동경교회)
  • 2009.02.13

    마케도니아 시대의 채색 사본
  • 10세기 학문의 부흥 증거 한상인목사(순복음동경교회) 마케도니아 시대, 특히 10세기에는 채색사본이 비교적 풍부하며 책의 생산도 많아진다. 또한 글자체도 둥근 대문자에서 소문자로 바뀐다. 그 변화는 9세기 초에 시작되어 10세기에 같이 사용되다가 그 이후에 대문자체는 거의 사라진다. 많은 채색된 삽화가 있는 사본들 중에서 난외에 삽화를 가진 세 개의 시편이 마케도니아 시대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한다. 이 시편들은 본문을 한편에 기록하고 나머지 넓은 여백에 본문에 관계된 삽화를 넣었다. 그와 유사하게 파리에 있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의 설교집에서도 성경본문과 삽화의 정교한 관계가 발견된다. 이 사본은 879∼883년 사이에 바르실리우스 1세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41.8 X 30.5cm의 크기이며 468면을 가지고 있다. 삽화의 주제는 성경말씀과 성자들의 에피소드, 역사적 사건 등으로 구성된다. 10세기의 채색사본 중에서 가장 이른 것은 베니스에 있는 마르시아나의 욥기로 905년에 만들어졌다. 처음 27페이지에는 욥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표현한 삽화들이 나타나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아무 삽화가 없이 본문만 기록하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욥과 그의 부인과 그의 열 명의 아들과 딸들이 묘사되었다. 10세기에 속하는 채색사본들은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학문의 부흥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한 사본들의 핵심을 이루는 사본이 레오 성경과 파리의 시편, 여호수아 성경이다. 파리의 시편은 36 X 26 cm 의 크기이며, 449개의 삽화가 있는 소문자체의 시편과 노래와 기도문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다시 제본하는 과정에서 몇 개의 삽화를 상실했지만, 원래 여덟 개의 다윗에 관한 삽화가 있었다. 각 삽화는 장식틀을 가진 정사각형 형태이며, 세 개의 삽화는 레오 성경과 공통된 주제를 갖고 있다. 그러한 공통점은 같은 시대와 같은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을 반영할 것이다. 이처럼 마케도니아 왕조시대는 일반적으로 책의 출판이 매우 풍성한 시기였으며, 특히 채색된 책들에 있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삽화의 형식은 간단한 것이 일반적이고, 저자의 초상을 강조하는 과거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저자의 초상화는 파리의 시편의 경우에는 저자의 머리글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파리의 시편같이 보다 단순하고 더욱 화려한 삽화를 가진 채색사본은 귀족 후원자를 위한 용도였고 난외의 삽화를 가진 사본은 수도원용으로 여겨진다. 사본들에 나타나는 많은 발간기는 필사자들이 수도사나 사제들인 것을 말해주며 수도원이 주요 발행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문적 관심은 그들에게 국한되지 않았고,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종교적인 장소 이외에서도 전문적인 서기관들이 활동하였다. 또한 삽화를 그리는 사람들도 많은 경우 예술적 능력을 가진 수도사들이었지만 삽화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상업적인 제작업소에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마케도니아 왕조시대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고찰해보면, 이 시대는 영토와 경제회복에 힘입어 미술과 건축에 재부흥을 맞이한 때였다. 그 대부분의 유물들은 함께 비교할만한 풍부한 유물이 생산된 6세기의 미술과 건축과 현저하게 다른 특징을 보인다. 교회는 작아지고 돔형이며 위계질서에 따른 여러 이미지들로 장식되었다. 또한 호화스러운 취향으로 인하여 의식에 사용되는 금속제품들은 보석으로 장식되고 에나멜 광택을 내었으며, 인물 그림의 배경에는 금박을 입혔다. 소형미술품들은 대부분 형태가 전통적이며 기능에 있어서도 같았을 것이다. 세 폭짜리 상아로 만든 그림은 이전 시대에는 없는 것이었지만, 그 기원을 과거로 소급할 수 있는 것이며, 에나멜 칠을 하고 진주를 달아놓은 금속제품은 새로 개발된 것이다. 삽화가 있는 마케도니아 책들은 모두 6세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하지만 학문의 부흥에 따라서 과거의 책에 있는 삽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며, 점점 증가되는 책의 생산에 따라 새것도 개발되고 이전 모델에 대한 재해석도 나타나게 되었다. 7세기에서 9세기까지의 사회적인 대변화로 인하여 건축물의 황제와 귀족들의 후원에 대한 성격이 바뀌었다. 비록 바르실리우스 1세의 건축이 이전의 웅장한 건축을 반영해주는 점이 있지만, 이 시대의 전형적인 특징은 사적 건물로 지어지는 수도원 같은 것들이다. 수도원을 건축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점은 없으며, 다만 과거에 공공건물로 지어진 데 반하여 이제는 개인적이나 가족적인 후원에 의해 건축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황제의 초상은 과거 성상금지 시대와는 달리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나타내며 황제로서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는 말이 르네상스의 의미로 인하여 논쟁거리가 되지만, 형태와 이콘, 전통적인 예술의 심미적 가치 등을 회복시킨 점에서는 이 시대에 사용할 수 있는 용어이다. 고전문학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기반으로 학문의 재부흥이 일어났으며, 로마세계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안목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한 르네상스에는 콘스탄티노플에 동상을 세우고, 7세기의 전통적 방식으로 은그릇을 만든 것도 포함된다. 고대 필사본에 있는 고대 로마의 그림들도 많이 참조되었을 것인데, 과거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인물모습이 9세기의 사본인 파리의 그레고리나 바티칸 코스마스 등에서 찾아진다는 점이 그러한 증거가 된다. 10세기에 속하는 파리의 시편이나 레오 성경, 여호수아 성경 등에서도 의심할 수 없는 고전적인 요소가 나타난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케도니아의 르네상스라고 볼 수 있는 발전은 극히 제한적이다. 건축에 있어서 고전적인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건축미술이나 이콘, 상아 조각품 등에 있어서도 고전적인 인물상이 묘사되지 않았다. 입상 조각의 제작도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마케도니아 시대의 고전적 미술은 피상적이었다. 비록 그 당시에 고전적인 주제와 이콘, 자연주의적 형태를 채택했지만, 그 모델들을 통하여 이상적인 예술적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마케도니아 시대의 고전적 문예부흥은 근본적인 성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유행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주로 콘스탄티노플의 왕궁에 밀접하게 연관된 경향이었을 것이며 그 영역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사진 1. < 욥과 그의 가족, 마르시아나의 욥기에서 >, 사진 2. < 하프를 타는 다윗, 파리의 시편에서 >
  • 2009.01.15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의 소형 미술품
  • 장식용 왕관, 십자가, 성배 등 유물 남아 9∼10세기 비잔틴시대 동양적 취향 확인 마케도니아 시대에 소형 미술품으로 남아 있는 이콘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브갈 왕의 이콘이다. 본래 세폭짜리 이콘이었지만 현재는 한 틀 속에 고정된 두 패널로 되어 있다. 이 유물은 가장 거룩한 기독교 유물 가운데 하나인 만딜리온을 언급하고 있다. 만딜리온이란 성 베로니카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린 천을 말하는데, 그곳에 예수님의 얼굴이 드러나 있다. 이 이콘은 위아래의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상단의 좌측에는 사도 다데우수와 만딜리온을 들고 있는 아브갈 왕이 앉아 있고, 하단에는 네 명의 성자들이 둘씩 짝지어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중기 비잔틴시대의 금속 유물은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덕분으로 무수한 유물이 남아 있다. 약탈된 귀중한 유물은 서유럽의 보물창고, 특히 베니스의 산 마르코 창고에 보관되어서 오늘날 금속유물의 연구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산 마르코 보물 창고에 있는 장식용 왕관은 본래 은으로 도금한 왕관의 띠에 금 구슬이 박혀 있었고, 14개의 에나멜 광택으로 입힌 커다란 메달이 장식되어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7개의 메달에는 6명의 사도와 레오 황제 한 사람의 흉상이 담겨 있다. 아마도 상실된 7개의 메달에는 그리스도와 6명의 나머지 사도들이 장식되어 있었을 것이다. 메달 사이에는 삼각형의 보석이 짝을 이루어 박혀 있으며, 각각의 메달에는 진주를 원형으로 돌아가며 매달아 놓았다. 각 메달 아래에는 보석을 걸어 놓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고리가 달려 있다. 왕관의 연결부분을 지탱해주는 윗 테두리에는 등에 고리가 달린 공작새 세 마리가 붙어 있어서, 본래 이 왕관이 매달아 놓기 위해 제작된 것임을 말해준다. 진짜 십자가를 담은 거대한 유물함도 1204년에 약탈되어 림부르크의 성당 보물창고에 보관되었다. 이 유물은 안팎의 이중 덮개를 가진 직사각형 상자로, 뚜껑에는 에나멜 칠을 한 9개의 패널들에 그리스도와 마리아, 침례 요한, 천사들이 그려져 있다. 그 둘레에 마연된 보석들과 성자들의 흉상, 에나멜 칠을 한 도안된 줄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뚜껑을 열면 그 안에 십자가를 담아 놓은 내부 상자가 나타난다. 십자가가 놓이는 움푹 들어간 자리를 제외한 다른 부분에는 스랍들과 천사들의 모습을 그린 장식들이 있으며, 그 안에는 십자가 처형에 연관된 다른 유물들이 보관되었다. 진짜 십자가의 조각은 금속 상자에 보관되었으며, 그 상자의 뒷면에 콘스탄티누스와 로마노스 황제가 투명한 보석과 진주로 장식된 유물을 제공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산 마르코의 보물 창고에는 마케도니아 시대에 속하는 몇개의 성배(聖杯)들이 있는데, 손잡이를 가진 로마노스의 성배와 손잡이가 없는 로마노스의 성배로 구분된다. 두 종류 모두 붉은 줄무늬가 있는 마노로 만든 성배로, 위 테두리는 은으로 도금되어 있고 주위를 돌아가며 구슬로 장식했으며 진주들과 패널들을 매달아 놓았다. 모든 그릇에 “주께서 정통 황제이신 로마노스를 도우신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오늘날 전해지는 로마노스 성배는 10세기 유물이지만 그 안에는 3∼4세기의 붉은 마노로 만든 사발이 들어 있다. 10세기의 십자가는 전통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제네바에 있는 은으로 만든 행렬용 십자가는 6세기의 십자가와 무척 유사하게 라틴 십자가 형태를 띠고 있으며, 십자가의 네 가지를 불꽃같은 모양의 원반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제네바 십자가는 빨라야 959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로마노스 2세가 만든 직책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가슴에 다는 작은 십자가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그런 종류로 워싱턴에 있는 은으로 만든 작은 십자가가 있는데, 거기에는 로마노스 2세와 그의 아들 바실 2세의 자선기금을 위한 명문이 새겨져 있다. 9∼10세기에 속하는 작은 상아 제품들 가운데 베를린의 상아 유물은 아마도 레오 6세의 홀에 부착된 것의 일부로 여겨진다. 한쪽 면에 황제의 모습과 천사장, 황제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는 동정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다른 면에는 그리스도와 그 옆에 베드로와 바울이 묘사되었다. 중기 비잔틴 시대에 홀과 같이 대관식에 사용되는 상아 제품들은 황제를 하나님이 임명하셨음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모스크바에 있는 패널에는 그리스도가 콘스탄틴 7세의 머리에 왕관을 씌우는 모습이 나타나며, 파리에서 발견된 패널에는 로마노스 2세와 그의 왕비 유도키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대관식에 황제 부부를 묘사한 이콘은 10세기 중엽에 형성된 것이다. 상아로 만든 유물 중에서 긴 직사각형의 상자에 인물들을 주제로 한 패널들이 새겨져 있는 것이 있다. 패널 주위를 장미꽃 장식이나 다른 반복되는 모티브로 에워싼 상자들은 중기 비잔틴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종류로 뉴욕에 있는 패널들에는 여호수아에 대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다. 런던에 있는 다른 패널에도 여호수아가 사신들을 맞이하는 내용이 묘사되었다. 이들 패널들은 여호수아에 관한 채색 사본의 그림과 그 형태나 이콘의 모습이 무척 비슷하기 때문에 채색사본을 모델로 삼아 세공업자가 조각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끝으로 마케도니아 시대에 속하는 비잔틴의 실크 제품이 서방 세계에서 몇 점 발견되었다.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보는 모습을 반복해서 짠 천에는 바실과 콘스탄틴이라는 황제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실크 제품들은 입는 것이 아니라 걸어두는 용도였을 것이며, 황제 이름이 기록된 것은 황실 작업장에서 만든 것이거나 황제의 선물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자 이외에 독수리와 장미꽃을 반복적으로 묘사한 실크 제품들도 있는데, 그것들은 동방의 전통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이처럼 9∼10세기 비잔틴 세계에는 고전적인 서구의 성향에 대조되는 동양적 취향이 있었음을 직조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상인목사(순복음동경교회)
  • 2008.12.18

    마케도니아 시대의 조각품
  • 마케도니아 시대의 건축물은 조각장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이전의 장식을 다시 사용한 것 등으로 다양하다. 아나톨리아의 세바스테의 교외에서 10세기로 추정되는 교회의 천장 기둥에 나타난 조각장식이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성소의 칸막이에는 기하학적 무늬와 나뭇잎과 동물무늬, 사람의 상반신을 그린 메달장식 등이 새겨져 있었다. 메달장식과 다른 장식들은 색유리로 상감되었는데, 그것은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성 폴리에욱토스 교회에 있던 유리 상감 장식을 연상시켜 준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립스 수도원에는 예전의 장식과 새로운 장식이 뒤섞여 있다. 말하자면 기둥에는 4∼5세기의 아칸서스 장식을 했지만, 배내기와 중간 문설주는 새롭게 장식한 것이다. 호시오스 루카스 수도원의 제일교회에는 장식이 매우 풍부하다. 돔 천장은 팔각형의 지붕으로 싸여져 있고, 각 면마다 십자가를 장식한 패널들이 붙은 벽들과 말발굽 모양의 아치를 가진 창문들이 있다. 패널들은 나뭇잎 장식이 있는 배내기에 붙어 있으며, 물이 떨어지는 홈통도 사자 머리로 장식되었다. 또한 이슬람 미술에서 흔히 사용되는 아라비아 글자 장식도 있는데, 장식용인지 정말 의미있게 쓴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교회 안에 있는 고린도 양식의 기둥은 재사용된 것이지만, 성상 안치소의 기둥은 새로 만든 것이다. 그 새로운 기둥은 고린도 기둥양식을 변형시킨 것으로써 매우 조밀하게 천사들과 복음서의 네 가지 상징 동물들과 함께 잎사귀와 소용돌이 장식을 하고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건축물의 장식들은 유사한 형태와 기술로 되어 있다. 그것은 당시 만연하고 있는 전통적인 요소들을 여러 장인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교회에 조각품이 없다는 것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수도에 있는 미렐라이온 교회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건축되었는데도 장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건축물의 장식의 감소는 취향의 변화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추정은 10세기에 건축물의 조각품에 대한 취향이 감소하고, 11세기 이후에는 기둥머리 장식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을 제한한 사고방식과도 부합하고 있다. 만일 건축장식에 대한 취향의 변화로 인해 장식이 감소되었다면, 그 변화는 매우 급격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립스 수도원에는 풍부한 장식품이 있는 반면 불과 13년 후에 세워진 미렐라이온 교회는 장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장식품의 양식을 볼 때 날카로운 절단양식을 띄는 9∼10세기의 조각품은 6세기의 조각기술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식들의 모티브들은 두 시기에 있어서 매우 다르다. 이전의 아칸서스 장식이 드물어진 대신에 새와 동물 모티브가 나타나고, 때로는 페르시아 미술에서 나타나는 용 같은 외국적 모티브도 표현된다. 그러한 모티브 중에서 가장 유사한 것들이 튀니지에 있는 이슬람교 대사원이나 스페인에 있는 궁전 같은 이슬람 건물의 조각품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건물들의 장식품을 직접 연관시키는 것은 너무 상상력이 풍부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유사성은 아마도 6세기에 비잔틴 제국에서 동양의 요소를 받아들였고, 그 이후에도 계속 영향을 받은 장식 기술들을 비잔틴과 이슬람 장인들이 모두 사용하면서 기묘한 일치를 이루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중해를 통해 비잔틴 제국으로 아랍과 페르시아 도자기와 직물들이 들어오는 왕래가 있었다면, 호시오스 루카스 교회에 있는 아라비아 문자를 모방한 조각장식은 이슬람 모델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에 세워놓는 인물상은 문자 그대로 과거의 것이 됐다. 콘스탄틴 7세가 동상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것은 유물애호가의 차원에서 동상을 세워놓은 것으로 보인다. 세워놓는 인물상의 제작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서 8세기의 작가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동상에 대해 과거를 기억하는 차원에서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이 시기에는 다만 금속으로 만든 사자나 새 같은 형상이나 금속으로 덧입힌 나무 같은 것들이 제작됐다. 한상인 목사(순복음동경교회)
  • 2008.10.12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의 비잔틴
  • 성상파괴운동이 끝난 뒤부터 1204년 라틴국가에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당할 때까지의 시기를 흔히 중기 비잔틴시대라고 부른다. 그 시기의 첫 180년 동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회복과 부흥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황금시대라고 한다. 미카일 3세(843∼67)는 성상파괴운동 후의 첫 번째 황제로 그의 재위 동안에 아랍으로부터 동쪽 영토를 회복했으며, 북쪽에서 내려오는 러시아와 불가르로부터 성공적인 방어를 이루었다. 미카일 3세를 살해한 바실리우스는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때로부터 마케도니아 왕조라고 부른다. 바실리우스 1세는 제국의 동쪽으로 진격하고 북쪽의 세력을 저지했으며, 이탈리아의 남부 지역을 합병했다. 그러한 마케도니아 왕조의 영토 확장은 150년을 넘게 계속하고 옛 영토를 많이 회복하였다. 그러나 회복된 옛 영토는 이전의 전통적인 로마와는 사뭇 다른 사회적 행정적 체제를 갖고 있었다. 각 지역에는 군사력을 지탱할 수 있는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에게 권력이 주어졌다. 10세기에 내려진 토지소유를 제한하는 황제의 법령은 왕위 찬탈을 쉽게 하는 권력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종교적으로 보면 성상파괴운동이 끝난 후 반세기 동안에 동방의 기독교계가 확장되었다. 불가리아는 비록 비잔틴 교회의 지배 아래 놓이는 것을 꺼려했을지라도 보리스 1세의 회심으로 동방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러시아도 복음화되었고, 다음 세기에는 제후들이 침례를 받게 되었다. 반대로 서방교회와의 관계는 경직되었고 명목상 로마 교황이 최고 위치에 있었지만 실제로 교회 권력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게 있었다. 결국 860년대에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사이의 갈등으로 동서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신학적으로는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것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황의 승인 없이 총대주교를 임명한 권위의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 867년 바실리우스 1세가 로마 교황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권위에 대한 갈등이 일단락되었지만 그 불씨는 이후 여러 세기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9세기 제국의 번영은 중기 비잔틴시대 동안 계속된 수도원의 번성을 가져왔다. 수도원의 소유지가 많아지면서 토지의 양과 수도원 수를 제한하는 황제의 칙령이 여러 번 내려졌다. 대부분의 수도원은 규모가 작고 대개는 설립자의 안식처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도시에 있는 수도원은 규모가 컸고 병자와 노약자를 위한 자선 시설이 있었다. 또 다른 수도원들은 은둔한 유명한 수도자가 세운 수도원을 중심으로 군집을 형성하였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는 문화적 황금시대였다. 미카일 3세의 통치기에 고등 교육과 학문이 강조되는 가운데 고전 연구가 중심을 이루었다. 바실리우스 1세는 비록 자신은 문맹이었지만 교육을 중시했으며, 그 아들 레오 4세는 당시의 석학 포티오스의 교육을 받아 현명한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레오의 아들 콘스탄틴 7세(913∼59)는 그 자신이 학자로서 문학과 미술과 음악에 관심을 갖고 지적인사들을 궁전으로 초청하여 크게 격려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황제들은 지적인 추구에 관심이 없어 문화 부흥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콘스탄틴 7세 때 쓰인 「바실리우스 1세의 생애」에 의하면 콘스탄티노플의 많은 교회들이 바실리우스 1세 때 지어졌다. 건물의 축조가 많았던 까닭은 왕위를 찬탈한 사람으로 자신의 비천한 신분을 떨쳐버리고 자신을 예술의 후원자로 알리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건물이 노화되어 수리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성 소피아 교회는 새로운 서쪽 아치가 만들어졌고, 성 사도 교회에는 버팀벽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세운 가장 중요한 건물은 880년에 봉헌된 네아교회이다. 네아교회에는 다섯 개의 돔이 있어서 십자가 형태를 내접시켰는데, 그런 양식은 그후 5세기 동안 비잔틴 교회 건축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런 양식으로 남아 있는 교회 건물은 907년에 봉헌된 콘스탄틴 립스교회와 920-2년에 봉헌된 미렐라이온교회이다. 한상인 목사(순복음동경교회)
  • 2008.08.15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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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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