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선교
(80) 종교개혁⑳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① “인쇄술은 이를 통해 하나님이 복음의 일을 전파시키기 위한 최고의 그리고 최근의 선물이다. 그것은 세상의 멸망에 앞선 마지막 불꽃이다.” 탁상담화에 남아 있는 루터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종교개혁 사상의 전파에 있어서 당시 인쇄술의 발달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인쇄술은 사실 동양에서 개발되었지만 이를 본격적으로 활용한 곳은 유럽이었다. 1454년경 구텐베르크가 독일 마인츠에 첫 인쇄소를 세운 이후 유럽 전역으로 인쇄 기술이 확산됐다. 1480년에는 유럽 전역에 121개의 인쇄소가 운영됐고, 1500년에는 252개로 늘어났으며 그중 62개는 독일에 있었다. 1500년까지 252개 인쇄소에서 2만7000여 종의 작품이 약 2000만 부가 인쇄됐고, 그 가운데 약 3분의 1은 독일에서 생산됐다. 독일은 인쇄술의 중심지였으며 이러한 배경에서 루터의 논문들도 몇 달 만에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갈 수 있었다. 루터의 사상이 빠르게 확산되자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이를 저지하고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에게 기롤라모 알레안더를 포함한 추기경 사절단을 파견했다. 교황은 루터의 개혁 사상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고 먼 친척이자 정치적 동맹이었던 칼 5세에게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당시 칼 5세는 1521년 1월 23일부터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소집해 독일 내 주요 사안을 다루고 있었는데 루터 문제에 대해서는 국외 추방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작센의 프리드리히 선제후를 비롯한 여러 제후들은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2023년 12월 29일자 기사 참조). 교황의 사절들과 이를 지지하던 제후들은 루터 문제를 조용히 마무리하길 원했다. 이미 루터에 대한 파문 교서가 공포됐기 때문에(1521년 4월 25일자 기사 참조), 교황의 판단을 재검토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을 꺼렸던 것이다. 반면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은 민중의 지지를 의식했다. 루터를 성급히 처벌할 경우 민심의 반발을 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논쟁이 격화된 나머지 루터를 반대하던 브란덴부르크의 요아킴 선제후와 지지하던 프리드리히 선제후 사이에 멱살잡이까지 벌어졌고 평소 조용했던 팔츠의 루드비히 선제후도 소리를 치며 루터를 옹호하고 나섰다. 결국 황제는 루터를 제국의회에 직접 소환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토론은 생략한 채 루터에게 이단적인 주장을 철회할 것인지 여부만 묻는 방식으로 심문을 진행하고자 했다. 의회는 루터가 일부 주장을 철회한다면 다른 사안에 대한 답변도 들을 수 있겠지만 끝내 입장을 고수한다면 칙령을 발표해 루터의 법적 권리를 박탈하는 데 합의하기로 했다. 황제는 의회의 제안을 수용하여 루터에게 안전통행증과 함께 초청장을 보냈다. 제국의회의 회원들에게서 나오 는 세금을 크게 의존하고 있던 황제는 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황제는 루터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국 전역에 루터의 책을 몰수하고 새로운 인쇄물을 찍어내는 것에 대한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보름스에서 청문회를 열어 루터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전에 교황이 루터에게 내린 일방적인 판결을 지지한 셈이었다. 황제의 초청장은 3월 6일 발송됐고 같은 달 15일이 돼서야 루터에게 전달됐다. 루터는 이제 정말 보름스로 출두해야 했다. 정작 보름스에서는 루터가 진짜 오면 어떡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루터는 제국의 대중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체 없이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김형건 목사(영산신학연구원 학장)
  • 2025.07.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김현동 목사(마포2대교구장) - 지금 문안(問安)하세요!
  • 얼마 전 대교구로 발령을 받아 사역을 시작하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때였다. 때마침 목회의 대선배이신 한 목사님으로부터 격려와 조언의 말씀을 듣게 되었는데, ‘인사 잘하세요!’라고 조언해 주시는 것이었다. 평상시 본인께서 인사를 잘하시는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었기에 ‘인사’를 강조하신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했지만 많은 강조 사항 중에서도 ‘인사’를 제일 먼저 말씀해 주신 것은 뜻밖이었다. 수십 년 목회 사역을 해오신 대선배님께서 사역의 핵심 노하우를 조언해 주셨을 터인데 ‘인사’가 이토록 중요한지는 이제껏 알지 못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사’에 대한 표현은 ‘문안’(問安)이다. 헬라어로는 ‘아스파사스데’라고 하며, ‘인사하다’, ‘문안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면 성경에 ‘문안’이라는 표현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은 누구이고, 어떤 성경에서 가장 많이 강조하고 있을까? 목적 지향적으로 보이는 바울이 ‘문안’(問安)이라는 관계적인 표현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고, 그가 지은 ‘로마서’에서는 16장이 ‘인사’ 바로 ‘문안’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신약학자는 ‘문안’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 ‘아스파사스데’가 신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총 59회 등장하는데, 이 중 41회가 바울 서신서에서 사용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바울을 ‘인사를 중시하는 매우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마지막 장인 16장을 온전히 ‘문안’에 대한 내용으로 채우고 있는 로마서의 경우에는 ‘문안’에 대한 언급을 무려 17회나 반복하고 있다. 30여 명이 넘는 다양한 배경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 심지어 로마에 가 본 일이 없는 바울은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문안’하도록 명령하거나 ‘문안’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목회 대선배님의 귀한 조언은 대교구 사역에 큰 도움과 활력을 주고 있다. 그저 밝은 얼굴로 ‘인사’ 한번 드렸을 뿐인데, 특별한 용건은 없지만 건강하신지 어려운 일은 없으신지 ‘문안’ 전화 한번 드렸을 뿐인데 성도님들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바울과 같이 아무리 능력 있고 탁월한 사도라고 할지라도 ‘문안’과 교제 그리고 위로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전도와 선교는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인사’가 어떠한 신학적인 교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믿음의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풍성한 교제가 일어나게 하는 ‘문안’, 말씀대로 실천할수록 더욱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오늘 성령님께서 마음 속에 생각나는 이에게 주저 말고 연락해 보면 어떠할까? 지금 문안(問安)하세요!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 2025.07.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석모세 선교사(A국)
  • - 종교적 제한으로 인해 사역에 지장이 없도록 - 셀 사역과 가정예배 사역이 정기적으로 잘 진행 되도록 - 예배 장소 확장 및 리모델링 비용이 채워지도록 - 가족이 성령 충만, 말씀 충만해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 2025.07.25 / 오정선 기자

    김영애 선교사(스페인)
  • - 113구역 달성을 위해 44개 새 구역이 잘 만들어지길 - 전쟁 난민 및 중남미에서 유입되는 정치 난민 사역을 위해 - 어린이 및 청소년 구역 부흥을 위해 - 중북부 도시 팔렌시아에 개척된 교회의 안정과 부흥을 위해
  • 2025.07.18 / 오정선 기자

    반 다이크의 <성령강림>을 바라보며
  • 성령강림절이 지나고 교회력은 다시 ‘보통의 시간’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성령은 ‘보통의 시간’에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신다. 이때 오래된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17세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1599~1641)의 <성령강림>(The Descent of the Holy Spirit)이다. 반 다이크는 벨기에 안트베르펜 출신으로 16세에 이미 자신의 화실을 가질 만큼 탁월한 재능을 지닌 화가였다. 루벤스의 조수로 활동하며 종교화와 초상화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20세기 중반에는 이탈리아로 건너가 르네상스와 베네치아 화풍을 배웠다. 또한 이탈리아 화가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와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의 색채와 구도에서 큰 영향을 받으며 더욱 성숙한 작가로 성장했다. 이후 영국 궁정화가로 초빙되어 왕과 귀족들의 초상을 다수 그리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루벤스의 화려한 색채를 계승하면서도 섬세하고 절제된 감정 표현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다. 특히 그는 성경 인물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그리기보다는 실제 인간의 감정과 몸짓을 담아내어 그림을 보는 이가 그 장면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바로크 시대가 강조한 ‘극적인 순간’과 ‘신앙의 감각적 체험’을 탁월하게 구현해낸 그의 작품이 바로 <성령강림>이다. 이 그림은 1620년경 반 다이크가 루벤스의 화실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날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위에 불의 혀처럼 임한 성령강림 사건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오늘날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림 상단에는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모여있던 제자들의 현실을 반영한다(요 20:19). 그러나 그 구름을 뚫고 삼각형 모양으로 빛이 내려온다. 삼각형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며 그 빛 위쪽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이 빛은 명확한 경계 없이 아래로 퍼지며 방 안에 있는 각 사람에게 닿는다. 그림 속 인물은 총 14명이다. 열두 사도, 마리아로 보이는 한 여성 그리고 오른쪽 기둥 뒤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인물이 포함된다. 이들은 성별, 나이, 옷차림, 표정, 자세가 모두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머리 위에 성령의 불이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는 성령이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임하셨음을 보여준다. 가운데 푸른색 옷을 입은 마리아는 두 손을 모은 채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녀 앞에 강한 바람에 밀려 넘어질 듯한 인물은 성령의 임재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강력하고 실제적인 사건임을 보여준다. 그림 오른쪽 기둥 아래에는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독서대 위에 펼쳐져 있고, 다른 하나는 바닥에 놓여 있다. 이는 오순절 날이 이르기 전에 제자들이 기도에 힘쓰며 읽었던 구약의 율법서나 시편을 상징한다(행 1:14). 반 다이크는 이를 통해 성령 충만이 말씀과 기도 위에 세워진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또한 오른편 한 사도는 기둥에 팔을 두르고 있다. 기둥은 교회를 상징하며(딤전 3:15), 이 장면은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진리의 기둥을 붙잡고 서 있는 성도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눈길이 머무는 곳 오른쪽 가장자리 기둥 뒤에 얼굴이 가려진 인물이 있다. 반 다이크는 그 사람을 의도적으로 가려놓았다. 그는 누구일까? 열두 사도도 아니고 동정녀 마리아도 아니다. 반 다이크는 이 인물을 통해 시대를 넘어 지금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이 자리는 바로 당신의 자리다.” 이 그림을 바라보는 구경꾼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속으로 참여하라는 부르심이다. 성령의 충만함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회복되어야 할 현재의 역사다. 성령은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사람에게만 임하지 않는다. 성령은 오늘, 지금 여기에, 사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신다. 반 다이크의 <성령강림>은 다시금 우리의 시선을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끈다. 지금은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절실한 때이다. 지나온 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며 간절하게 기도하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대한민국과 세계 온 열방 위에 예수 그리스도 참 소망의 빛이 비치길 간절히 구하자. <국제신학연구원>
  • 2025.07.18 / 김용두 기자

    (162) 순복음의 7대 신앙-오순절 성령 충만의 신앙<75>
  • 예수님처럼 공손하며 언행에 무례함이 없어야 성령 충만을 통해 일어나는 역동적인 은사들은 교회에 ‘덕’(德)을 끼칠 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드러낸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은 바로 그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의 열매 중 그 첫 번째는 바로 ‘사랑’이다. ‘사랑장’(章)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교만하지 아니하며”에 이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라고 기록한다(고전 13:4~5). 참된 사랑은 절대로 무례히 행치 않는다. 이 말씀을 몸소 행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기록한다. 이렇듯 예수님은 언제나 “내가 너한테 들어가도 되겠니?”하고 노크를 하시며 정중하고 친절하게 모든 이들을 대하는 분이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도 절대 무례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다. 병든 사람에게, 고난받고 외로운 이들에게, 주리고 목마른 이들에게, 귀신 들린 이들에게 먼저 찾아와 주셨다. 무조건 자신을 따르고 믿으라고 명령하고 윽박지르지 않으셨다. 위로하시며 고쳐주시고 친구가 되어주시고 배불리 먹이시고 친히 귀신을 쫓아내셨다. 결국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저절로 그분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고 절로 고개를 숙이도록 이끄셨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에게 함부로 대하고 사랑이 없어 무례히 행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앞세워 무례하고 지배적이며 폭력적이고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함부로 반말을 내뱉고 말로 상처를 주고 무례히 행하는 것은 성령 충만하고 사랑이 넘쳐야 할 성도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예수님처럼 누구에게든 공손하고 상대방을 높여 존중하며 무례함 없이 친절하게 정중한 태도로 대해야만 한다. 경북 예천군 대죽리 마을에는 언총(言塚)이라고 불리는 500년의 역사를 가진 고분(古墳)이 있다. 그 뜻은 입에서 나오는 ‘말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오래전 그 마을에 살던 여러 문중이 크게 싸웠는데 그 발단은 사소한 말 한마디였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은 ‘말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웃을 향한 험담과 비방이나 원망과 불평이 담긴 거친 말이나 욕설을 사발에 뱉어 담은 후에 그 나쁜 말들에 대한 장례를 치르고 그것을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든 것이다. 상징적인 행동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이후 더 이상 거칠고 부정적인 말들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 결과 그 마을은 평화를 되찾았다. 이처럼 혀를 길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항상 긍정적이고 무례하지 않고 예의 바른 언어생활을 위해 노력하며 입술의 파수꾼을 붙여달라고 기도해야 한다(시 141:3). 거칠고 무례해 후회될 말이나 누군가를 낙심케 하는 부정적인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거룩한 성도의 언어는 생명과 진리의 언어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며 범사에 은혜와 감사의 말로 온전해 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 <다음 달에 계속> 김에녹 목사
  • 2025.07.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윤호근 목사(은평대교구장) - 선택
  •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사이의 C다”라고 말한다. 인생은 태어남(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 있는 선택(Choice)의 연속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한 연구에 따르면 평범한 사람이 하루 동안 내리는 의사 결정은 약 3만5000회에 이른다고 한다. 우리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크고 작은 선택 앞에 놓인다. 오늘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길로 갈지 무엇을 먹을지….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때 왜 그렇게 선택했을까?”라는 후회 속에 머물게 된다. 인간은 기억의 존재이다. 그런데 이 기억의 창고는 유독 실패, 후회, 상처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더 깊이 저장한다. 이러한 기억들은 때때로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막는 보이지 않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우리의 모든 선택 위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인생은 B와 D 사이의 C, 곧 Christ(그리스도)”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 모든 선택 가운데 중심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 14:6),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 그 길에 주님은 함께 하시며 때로는 우리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길 위에서도 주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이루어 가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잠 16:9). 잠언 기자는 우리가 어떠한 선택과 계획을 할지라도 결국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한다. 때때로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고 설령 실수하고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 실패마저도 직조하셔서 놀라운 은혜의 작품으로 빚어 가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모든 선택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절대 긍정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절대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 2025.07.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제51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 결과보고회 
  • 이영훈 목사 “150개국으로 순복음의 선교 영역 확장 생각”
    제51회 순복음세계선교대회 결과보고회가 16일 오전 CCMM빌딩 루나미엘레 컨벤션홀에서 개최됐다. 선교국 담당 김영석 목사는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성령으로’라는 주제로 펼쳐진 선교대회 및 선교사 수련회 관련 행사 내용, 예산 집행, 후원 내역, 총평 등을 공유하고 관계자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올해는 67개국에 파송된 673명 선교사 중 351명 선교사와 배우자, 자녀 총 635명이 본국을 방문해 선교대회 및 선교사 수련회, 자녀 캠프에 참여해 영성 회복 및 공동체 연합의 시간을 보냈다. 이영훈 담임목사는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선교이며 모든 걸 다 쏟아 부어도 전혀 아깝지가 않은 가장 가치 있고 귀한 사명이 선교”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현지에서 훈련된 제자들이 인근으로 파송돼 선교를 이어가는 시대로 150개국으로 순복음의 선교 영역을 확장해 나갈 생각”이라며 선교 비전을 제시했다. 또한 “각 지역의 신학교와 선교센터가 지역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하며, 국내에 체류 중인 다문화가족과 거주 외국인을 선교적 자산으로 삼아 훈련 및 제자화를 통해 선교 인재로 세워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말했다. 이날 모임에는 이번 선교대회를 후원한 장로회를 비롯한 교회 기관과 제자교회들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전 세계에 순복음 성령의 깃발을 꽂을 수 있도록 선교 관련기관과 교회들 간의 긴밀한 네트워크화를 다짐했다.
  • 2025.07.18 / 오정선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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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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