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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환자 네 사람과 아람의 군대
2019.06.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그 나병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왕하 7:3~8)

인생을 살다보면 삶 가운데 절망과 고통이 가득차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귀에 들리는 것도 없는 암흑과 같은 고통의 시간에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오늘 말씀은 그런 고통의 상황을 이겨낸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1. 절망이 가득한 성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아람 왕 벤하닷의 침략을 받아서 사마리아 성이 포위를 당했습니다. 성문은 굳게 닫히고 출입이 불가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자 성 안에 있던 사람들의 굶주림이 극에 달했습니다. 얼마나 굶주림이 심했던지 서로 돌아가면서 자식을 잡아먹는 처참한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도 절망이 가득했습니다.

엘리사가 “야훼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 7:1)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왕을 모시는 장관은 “야훼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왕하 7:2)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정적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감각으로는 엘리사의 말을 믿기가 어렵지요. 지금 굶주림이 극에 달해서 자식까지 잡아먹는 형편인데 하루아침에 먹을 양식이 풍성해질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것도 한 달 후나 일 년 후가 아니라 바로 내일 일어난다고 하니 믿기가 보통 어렵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이란 이성과 감각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지만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인가?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오늘 저의 설교를 듣고 계신 여러분 중에도 과거에는 그러한 기적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기적이 나타날까? 그런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날까?”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절망의 자리에 앉아 있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희망을 선택해야 합니다.

2. 희망을 선택한 사람들

오늘 본문에 보고 죽기를 결단하고 희망을 선택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성문 밖에 살고 있던 네 명의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들은 나병에 걸려서 사람들과 격리된 채 살면서 성 안에서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게 되자 나병환자 네 사람도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굶어죽게 된 것입니다.

네 명의 나병환자는 성문 밖에 모여서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해야 이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 서로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거듭한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안에 들어가도 주려 죽고 이곳에 앉아 있어도 주려 죽을 것이다. 여기 앉아서 절망 가운데 죽기를 기다릴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희망을 향해 전진할 것이냐? 희망이라고는 저 아람 군대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로 간다고 해서 적군이 우리를 살려 놓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다. 여기에 앉아서 절망 가운데 죽느니 희망을 향해 한번 전진해 보자.” 그렇게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결단입니까? 큰 희망이 아닙니다. 실낱같은 가느다란 희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 죽더라도 목숨을 걸고 희망을 선택한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희망을 향해서 가자. 죽더라도 희망 속에 죽자.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1~13절에도 “야훼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사람의 나병환자가 실낱만한 희망이지만 희망을 향해서 가자고 결단했을 때, 하나님께서 네 사람을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마침내 나병환자 네 사람은 아람 진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오래 굶주렸으니 기운이 없어서 비틀비틀합니다. 발가락이 떨어져 나갔으니 잘 걸을 수가 없고 몸에 균형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 의지하기 위해서 스크럼을 짜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희망을 향해 출발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나병환자 네 사람만 걸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 네 사람의 믿음의 창조적 행진에 성령께서 동참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4차원의 꿈과 믿음과 창조적 선언을 가슴에 품고 가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진에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해서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곡식이 싼 가격에 매매될 것이라는 기적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 사용할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왕과 장관들이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차 있을 때, 이 나병환자 네 사람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가지고 ‘반드시 살아나겠다!’라는 꿈을 품고 믿음의 출발을 하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그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네 명의 나병환자를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네 사람이 걸어가면서 수십 번 넘어지고 서로 격려하는 말을 확대해서 그 소리가 적들의 귀에 군대가 행진하는 소리로 들리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니까 네 사람이 걸어가는 소리가 적들의 귀에는 수십만 대군이 행군하는 소리로 들렸던 것입니다.

또, 네 사람이 허리에 차고 있던 걸식용 빈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적들의 귀에 창검이 부딪히는 소리로 들리게 하셨고 네 사람이 넘어지는 소리는 적군들의 귀에 전차가 굴러가는 소리로 들리게 하셨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네 사람이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은 군대가 전쟁의 승리를 선포하는 소리로 들리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람 군인들이 그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 한 것입니다. 저녁밥을 지어놓고 먹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거대한 전차 바퀴 소리가 들리고 군대가 행진하는 소리가 들리니까 그만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고 돈을 주고 용병을 동원했구나. 어서 달아나자.” 그래서 밥그릇을 던져버리고 맨발로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을 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희망을 붙잡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음을 가지고 희망을 향해 전진하는 사람과 함께하십니다. 그들의 믿음의 행진에 함께하셔서 위대한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3. 성령님과 함께 행진하라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성령님과 함께 행진할 수 있는가? 우리는 4차원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창조적 말을 통해서 성령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병환자의 이야기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네 명의 나병환자가 “이제는 끝장이다. 우리가 살아남는다 해도 어차피 우린 사람대접도 못 받는 나병환자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 죽는 게 낫다.”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면 그 마음속의 절망감 때문에 모두가 죽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가장 무서운 적은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밖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적들보다 내 안에 있는 절망감이 더 무서운 적입니다. 잠언 25장 28절은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벽이 없다면 무방비 상태가 되고 적들이 쳐들어와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악한 마귀가 와서 삶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절망은 상황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은 그 병으로 죽는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됩니다. 의사가 못 고치는 병이라도 우리 하나님은 고치시는 것입니다. 또 사업이 망해서 빚더미에 올라앉은 사람도 죽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살 길을 반드시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꿈”을 붙잡고 행진해야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특별히 보여주시는 것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 처했을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꿈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프랑스에서 성회를 인도했을 때, 척추가 부러진 자매님이 5시간 동안 차 안에 누워서 성회 장소까지 찾아왔습니다. 현대 의학으로는 고칠 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성회에 와서도 앉아있지 못하고 앞자리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그 자매님의 마음속에는 꿈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말씀마다 아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설교가 끝난 후 병자를 위해서 기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님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나는 통성 기도 시간에 그 자매님을 위해 다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배가 끝나기 전에 그 자매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나는 반드시 나을 것이다.” 그런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불의, 질병과 저주,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를 다 청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없을 때는 절망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면, 언제든지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행진을 해야 합니다. 네 사람이 적진을 향해 나아간 것은 믿음의 행진이었습니다. 아람 군대에게 투항해도 산다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각오로 믿음의 발걸음을 옮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와 같은 믿음의 행진에 함께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 제가 한 자매님의 간증을 들었는데 그 분은 혀에 암이 생겨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심한 고통으로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나중에는 혀의 위, 아래가 구멍이 뚫리는 정도까지 악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일 예배에 와서 통증을 참으면서 열심히 설교를 듣고 있는데 점점 마음속에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신유기도 시간이 되었을 때, 제가 “오늘 하나님께서 많은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잠시 후에 또 “주님께서 이 시간 혀 암을 치료해 주셨습니다!”라고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매님이 자신이 치료받은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의 눈물을 예배를 드렸는데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서 현대 의술로는 도저히 치료할 수 없었던 말기 혀 암이 완전히 치료된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나의 삶의 영원한 근원과 자원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의 수단이나 방법이나 지혜나 지식을 통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신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감동 받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떤 중풍 환자가 온 전신이 마비되어서 움직이지 못하는데 예수께서 그 동네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 가기는 가야 되겠는데 자기 힘으로 못 가니까 네 사람의 친구에게 자기를 예수님이 계신 곳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이 사람을 들것에 싣고 예수님 계신 곳에 왔는데 사람들이 인산인해라 발 들여놓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들것을 들고 어떻게 군중 사이를 뚫고 예수님 앞에 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 중풍병자는 단호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예수님 앞에 반드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나는 반드시 산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 집 값을 지불할 테니까 나를 데리고 지붕 위에 올라가서 지붕을 헐고 구멍을 내서 예수님 앞으로 나를 달아내리라.” 여러분, 이것은 어마어마한 믿음입니다. 보통 믿음으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수리비용으로 많은 돈을 지불할 각오를 해야 하고 또 지붕에서 내려오다가 잘못해서 들것이 뒤집어지면 떨어져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낫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믿음의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래서 그의 친구들이 지붕을 뜯는데 아마 집주인이 고함을 치고 밑에 있는 사람들도 지붕 뜯는 소리에 위에서 떨어지는 먼지에 고함 고함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도 안 하시고 잠자코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한참 만에 지붕이 헐어지고 그 구멍으로 네 사람의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줄에 매어 달아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것은 내 마음속에 감추어 놓았을 때는 아직 살아있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눈에 보여주어야 그것이 확실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믿음이 되어야지, 마음속에 혼자 간직하고 있는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호한 태도로서 믿음을 보일 때, 주님께서 그 믿음을 보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나병환자든지 건강한 사람이든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4차원적 대화입니다. 네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계속 넘어졌지만 서로 말씀으로 격려하면서 함께 걸어갔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씀으로 격려하면서 4차원적 대화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행진하셨던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행진하기 위해서는 우리 입술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입으로 끊임없이 시인하면 우리 마음에 말씀이 간직되는 것입니다. 내가 입으로 계속 말하면 입으로 하는 말이 내 마음에 간직되고 또 마음에 간직된 말씀을 입으로 자꾸 시인하면 그 간직된 말씀이 더욱 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꿈과 환상으로 끊임없이 그려보고 그 말씀을 앉으나 서나 하루에 수십 번, 수백 번 입으로 시인하면 그 말씀이 내 마음속에 간직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즉시로 여러분과 나의 생활 가운데 위대한 능력을 베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4차원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창조적 말을 갖고 있으면 4차원의 근본이신 성령님과 동행하게 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성령님과 동행할 조건을 구비하지 않고 3차원 그대로 4차원과 같이 하려고 하니까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니 거듭나지 않고는 하늘에 관해 말해도 알지 못하니까 대화를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역사적 전쟁 이야기에서 나병환자 네 사람의 역할은 너무나 위대하여 영구히 기념해야 할 것입니다. 나병환자 네 사람의 3차원적 실상은 비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 조건을 가슴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4차원적 군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네 사람의 행진에 함께 하셔서 그들의 약점을 오히려 적들을 물리치는 무기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약하여 넘어지는 소리, 그들이 서로 격려하는 소리를 주님이 크게 하셔서 큰 군대의 행진소리로 들리게 하시고 적들에게 구름이 산골짜기를 내려덮는 것같이 공포와 불안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4차원의 꿈, 믿음, 창조적인 언어를 통하여 적진을 향해 가는 나병환자들이 3차원의 아람 군대와 싸움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적은 아무에게나 일어나지 않습니다. 꿈을 가지고 희망을 향해 행진하는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희망이라도 희망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절망적인 상황이 그 사람을 결코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낙심하고 앉아있거나 뒤로 물러서면 하나님은 우리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우리 편에서 함께 움직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의 자리에 주저앉지 마십시오. 절망에서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먼 장래가 아니라 여러분 앞에 곧장 이 놀라운 희망의 역사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기도>

자비로우신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절망과 고통의 꽉 들어찬 세상에서 온전히 희망의 십자가를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깨어서 기도하여 우리의 생각과 믿음 꿈과 입술의 고백을 주장해 주시고 성령님 동행하셔서 연약한 우리를 늘 도우시고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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