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
2025.04.13
/ 마태복음 21장 1~5절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태복음 21장 1~5절)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서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주간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 전체의 약 3분의 1 정도가 이 고난주간의 사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월요일에는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시고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화요일에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말세에 대해 일을 말씀하시고 마리아가 와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예수님이 무엇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보내셨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준비를 했습니다.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밤샘 기도하시다가 금요일 새벽 3시쯤 붙잡히셔서 6시까지 여러 곳을 옮겨 다니시면서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고 6시에 사형 언도를 받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은혜의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천 년 전에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한평생 겸손의 종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백성들을 섬기셨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가장 겸손하신 모습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500년 전 스가랴 선지자가 이 사실을 예언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옛날에 왕들은 자기의 위엄, 권세를 나타내기 위해서 출정을 나갔다 돌아올 때는 대행렬을 앞뒤로 호위하게 하고, 화려한 복장으로 위용을 갖추고 앞에서 악대가 나팔을 불면서 당당하게 입성했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은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겸손과 섬김의 일생입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숙제는 바로 겸손의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나와 열심히 봉사도 하고 또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되면 알게 모르게 우쭐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신도로 섬기다가 직분을 받게 되면 그것을 계급장 단 것으로 착각해서 목에 힘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만은 그리스도인들의 수치인 것입니다.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이 고집불통인 자신을 깨뜨려야 되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길 바랍니다. 섬김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낮은 자세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넘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평생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주신 말씀 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환호와 함께 입성하시자 우쭐대면서 예수님 옆에서 이제 내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는데, 제자들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모르고 서로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에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하인들은 주인이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대야에 물을 떠서 주인의 발을 씻습니다. 그렇게 주인을 맞이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친히 무릎을 꿇으시고 대야를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입니다.
저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들 옆에서 장관 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했는데 예수님이 친히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주니 저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 15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은 가장 낮으신 모습으로, 그의 일생을 하나님만 섬기고 우리 사람들을 섬기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어렵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홀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섬김으로 문제 많은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늘 자기 자신을 쳐서 주의 뜻에 복종시키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사람들을 품을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대인과의 관계 문제가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겸손을 옷 입고 섬기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큰 복을 받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이 예수님이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는데, 그 나귀를 내어놓은 나귀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귀의 주인이 나귀를 내놓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입구 벳바게에 도착했을 때 제자 둘을 건너 마을로 보내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면 건너 마을 입구에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어 있는 것이 있을테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주인이 나타나서 그거 왜 가져가냐고 물으면 주님이 쓰시겠다고 얘기를 해라.”
그래서 두 제자가 가보니까 거기에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풀어 끌고 나오려고 하는데 주인이 달려 나왔습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왜 남의 나귀를 함부로 끌고 가시오?”
그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합니다.” 그 말씀에 주인은 아무런 토를 달지 아니하고 “네. 가져가십시오.” 예수님 말씀에 그는 즉각 순종하고 자기의 귀한 재산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주님께 내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사람들이 누굽니까? 주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복 받는 길은 주의 말씀에 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느냐? 100세 때 얻은 아들 이삭이 청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 가서 번제를 드리라 한 그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백세 때 얻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주님이 명령하십니다.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그를 죽여서 팔다리를 다 잘라내고 죽은 그 몸을 주 앞에 제물로 드리는 제사인데,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입니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니 100세 때 그렇게 힘들게 아들을 얻게 하시고 나서, 이제 또 아들을 데려가시겠다 하니 주님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마 하나님께 따져 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부인에게 가서 “여보, 하나님이 우리 아들 번제로 드리라는데 어떻게 할까?” 상의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부인 사라가 그 말을 들었으면 “여보 당신 치매가 났어. 치매가. 절대로 내 사랑하는 아이 내놓을 수 없어. 나를 죽이고 가시오.” 아마 대판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에 즉각 순종해서 아무 말도 부인에게 하지 아니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이삭을 데리고 종과 함께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으로 갑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그 결정을 하고 순종해서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 올라가 아들을 드리려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시고 한 양을 예비하셔서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신 드리게 한 후에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6절 17절입니다.
“이르시되 야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왜? 어떻게요?”라는 그런 이야기가 하나님 앞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뿐인 것입니다.
“왜요?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 나에게 그런 무리한 명령을 하시는지요?” 그것은 우리 인간의 연약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네” 그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아멘” 그 말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큰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로 14절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복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데 1절만 봉독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야훼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복을 받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복받은 나라가 되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한평생 그 삶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 주변에 사람을 보면 밤낮 뭘 따지는 사람이 있어요.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밤낮 비판적인 시각으로 남을 보고 판단하고 스스로 의로워서 이런저런 지적을 하는데, 그 삶의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자주 충돌하고 문제만 일으키게 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남을 판단하라고 세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라고 주님 앞에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 뜻에 절대 긍정, 절대 순종, 절대 감사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순종하여 복 받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늘 판단하고 비판해서 스스로 문제 가운데 빠져 있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될 때 하나님의 큰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게 만들어 주시고,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삶이 복 받은 삶으로 변화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왜 이 대한민국이 이렇게 문제가 많으냐? 말씀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부터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한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에 서로 물고 뜯지 말고 사랑하고 화합하고 용서하라고 했는데, 물고 뜯고 화합하지 못한 것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편 가르기,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모습을 우리는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1천만 크리스천들이 먼저 회개하고 한마음 될 때 우리나라가 다시 굳건히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 모두가 손에 들었던 비판의 돌을 내려놓고 주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서로 용납하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서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판은 비판을 낳고 원망은 원망을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부터는 비판의 삶을 살지 말고 감사의 삶을 살고, 원망의 삶을 살지 말고 찬양과 섬김과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 주인의 귀한 순종을 기쁨으로 받으시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사 온 인류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샘기도하시고 새벽 3시쯤 가룟 유다가 병정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아서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되는 그 전 제사장인 안나스에게 갔다가, 다시 가야바에게 끌려와서 거기서 공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칭했다고 그래서 사형죄로 몰아서 그 새벽에 빌라도에게 끌고 갑니다.
당시 사형 집행권이 로마 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가서 “총독이시여! 총독이시여! 이 사람이 우리 유대법에 불경죄를 저질렀습니다. 자기가 자칭 하나님이라고 그러는데 이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가만 보니까 종교적인 문제예요.
그래서 헤롯왕에게 보냅니다. 헤롯왕이 예수에 대해서 듣고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다시 헤롯왕이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빌라도가 아무리 봐도 그를 사형시킬 만한 그러한 죄목이 없었기에 살려주려고 하는데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매수된 백성들이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살려주면 황제 가이사 시저의 충신이 아닙니다.” 막 백성들이 난리 나니까 할 수 없이 빌라도가 그 군중들의 성난 소리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줍니다.
그리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온몸에 피와 물을 쏟으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온 인류의 죄와 허물을 다 끌어안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을 들춰내고 비판하는 데 앞장서는데, 우리 예수님은 온 사람의 허물을 다 대신하시고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권세가 멸함을 받았고, 인류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그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하게 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굉장히 이기적입니다. 희생보다는 나의 유익과 만족을 내 삶의 목표로 놓고 살아갑니다. 섬기는 삶보다는 섬김을 받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떤 자리만 맡겨주고 권력만 주면 다스리고 섬김만 받으려 해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세워지는 지도자는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섬김의 지도자가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 나라가 변화될 것입니다. 이 사회가 아름답게 바뀌어질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 이 나라에 와서 희생한 많은 선교사님이 있는데,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난 제임스 홀 선교사님도 그중 한 분입니다.
1860년에 캐나다에서 태어나신 이 선교사님은 10대 후반에 폐병을 앓아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기를 작정하고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합니다. 공부하던 중에 학생 자원 운동의 책임자인 존 포먼 목사의 강연을 듣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뉴욕 맨하튼에 있는 병원에서 실습하다가 그곳에서 같이 선교 지망생인 마가렛 로제타를 만나게 되는데 마가렛 로제타는 “나는 조선에 가서 선교할 겁니다. 얘기 들어보니까 조선에 있는 여자들은 남자 의사에게 치료받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니 나 같은 여자 의사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마가렛 로제타 선교사가 25살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옵니다.
그때가 1890년 10월 13일인데 이 제임스 홀은 중국으로 파송을 받았다가 다시 1891년 조선으로 들어와 둘이 만나게 되고 그리고 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1892년 6월 27일 결혼하게 됐는데 조선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 셔우드 홀을 낳습니다. 그런데 제임스 홀이 얼마 있지 않아서 평양으로 파송을 받게 되는데, 평양은 굉장히 보수적이고 외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지역입니다.
그곳에 가면 위험이 따를 것이라고 사람이 만류했는데, 막상 본인은 조선 사람을 섬기러 왔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평양에 가서 많은 환자를 고쳐주었는데, 평양에 전염병이 창궐할 때 전염병 환자를 돌보다가 본인이 34살의 젊은 나이로 감염되어 죽습니다.
3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아들이 한 살이고, 그의 부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7개월 된 딸이 있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 아내에게 이와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말아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했어요.”
미국에서 자기 사위가 죽었고, 딸이 임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미국에 들어와서 아이를 낳고 여기서 새로운 사역을 해라.’
미국에 가니 자기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그 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딸 에디스를 낳았는데, 에디스를 낳고 난 다음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한국으로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일기에 이와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엄마는 다시 한국에 가서 사역을 맡기로 결정했다. … 엄마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 생각한다. 엄마는 많은 기도를 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한국으로 가는 길을 막아주시고 이 곳에서 할 일을 열어달라고. 그런데 한국의 사역은 여성해외선교회와 한국 양쪽에서 활짝 열려있고 이곳에서의 사역은 막히고 있다” (1897년 5월 10일 일기 中)
그녀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다시 열악한 환경이었던 조선으로 건너와서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병원을 세우고 그 병원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1898년에 두 살이 된 어린 딸, 에디스가 풍토병에 걸려서 죽습니다.
그래서 양화진에 자기 남편 묻은 무덤 옆에 딸을 묻고 어린 아들 셔우드를 품에 안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조선을 위해 한평생 헌신할 것이다.’
‘평양의 오마니’로 불렸던 그녀는 1933년에 이르기까지 조선 여자 의학 강습소 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고요. 동대문 부인병원 현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전신인 병원 설립에 기여했고, 이 여자 한 분이 한 일이 너무너무 많아요.
한국어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을 처음으로 개발해서 조선 최초의 맹인 학교인 평양 여맹학교를 세웠고, 평양의 한반도 북쪽의 첫 번째 여성 전문 병원인 광혜여원도 열었습니다.
길에서 다 죽어가는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그를 치료하고 미국 유학을 보냈는데, 그 여자가 조선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더입니다.
한국에서 43년 동안 많은 병자들을 섬기고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1933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85세를 일기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본인의 유언에 따라서 그 시신이 한국으로 와서 남편 옆에 묻히게 됩니다.
그 아들 셔우드 홀이 부모의 대를 이어서 다시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오게 되는데, 자기가 어릴 때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 그 의사 선생님이 결핵으로 죽은 것에 충격을 받고 조선에서 결핵을 퇴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924년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홀스빌 서퍼크 결핵 요양소에서 결핵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1925년 8월 미국 감리회 의료 선교사로 임명돼서 아내 메리언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옵니다.
한국에 와서 결핵 요양소를 세우고, 또 그 결핵 치료 자금을 마련하고, 결핵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씰을 만들어서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열심히 병자를 고치는 가운데 한국이 워낙 의료 환경이 열악하고 또 전염병이 돌고 그랬던 터라 한국에 왔는데 그의 아들 프랭크가 또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그 아들을 양화진 부모님 있는 곳에 다시 묻고, 16년 동안 의료 선교사로 사역하는 가운데 결핵 퇴치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 총독과 일본 국왕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선교를 한다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합니다.
그는 인도로 건너가서 은퇴하기까지 23년 동안 의료 선교를 계속 이어갔고, 1984년 대한결핵협회 초청으로 방한한 그의 고백입니다.
“나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내가 죽거든 미국이나 캐나다에 묻지 말고 이 나라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 동생, 아들이 잠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기 바랍니다.”
1991년 98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소원대로 한국의 양화진에 와서 묻혔고, 그 아내 메리언도 석 달 뒤 95세로 별세해 그 남편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지금 여기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가면 이렇게 3대에 걸쳐 약 80년 동안, 이 땅에 와서 희생하고 섬긴 홀 선교사의 가족 6명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셔우드 홀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몸소 실천한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그 희생적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만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때까지 내가 받기만 하는 삶을 살았다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때까지 내가 무엇 하나 희생하지 아니하고 움켜쥐고 살았다면 이제는 내가 가진 걸 아낌없이 내어놓고 희생하고 섬기며 이웃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한 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찬송가 305장(통 405) ‘나 같은 죄인 살리신’>
1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절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절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절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여러분의 남은 삶을 섬김과 희생의 삶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두가 자기 만족을 위해 살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고 모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본받아 우리 남은 여생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서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고난주간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 전체의 약 3분의 1 정도가 이 고난주간의 사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월요일에는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을 내쫓으시고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화요일에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말세에 대해 일을 말씀하시고 마리아가 와서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수요일에는 예수님이 무엇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보내셨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준비를 했습니다.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하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밤샘 기도하시다가 금요일 새벽 3시쯤 붙잡히셔서 6시까지 여러 곳을 옮겨 다니시면서 불의한 재판을 받으시고 6시에 사형 언도를 받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은혜의 한 주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천 년 전에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예수님의 겸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한평생 겸손의 종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백성들을 섬기셨습니다.
1. 겸손의 종으로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가장 겸손하신 모습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500년 전 스가랴 선지자가 이 사실을 예언했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옛날에 왕들은 자기의 위엄, 권세를 나타내기 위해서 출정을 나갔다 돌아올 때는 대행렬을 앞뒤로 호위하게 하고, 화려한 복장으로 위용을 갖추고 앞에서 악대가 나팔을 불면서 당당하게 입성했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은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겸손과 섬김의 일생입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숙제는 바로 겸손의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나와 열심히 봉사도 하고 또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되면 알게 모르게 우쭐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신도로 섬기다가 직분을 받게 되면 그것을 계급장 단 것으로 착각해서 목에 힘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만은 그리스도인들의 수치인 것입니다. 우리는 낮아져야 합니다. 이 고집불통인 자신을 깨뜨려야 되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길 바랍니다. 섬김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낮은 자세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을 넘치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평생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주신 말씀 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환호와 함께 입성하시자 우쭐대면서 예수님 옆에서 이제 내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는데, 제자들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뜻을 모르고 서로 높아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기 전날 밤에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하인들은 주인이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대야에 물을 떠서 주인의 발을 씻습니다. 그렇게 주인을 맞이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친히 무릎을 꿇으시고 대야를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입니다.
저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들 옆에서 장관 자리 하나 차지하려고 했는데 예수님이 친히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주니 저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 15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은 가장 낮으신 모습으로, 그의 일생을 하나님만 섬기고 우리 사람들을 섬기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어렵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홀로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섬김으로 문제 많은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늘 자기 자신을 쳐서 주의 뜻에 복종시키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모습 그 자체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사람들을 품을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대인과의 관계 문제가 생겨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겸손을 옷 입고 섬기는 삶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큰 복을 받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나귀의 주인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이 예수님이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는데, 그 나귀를 내어놓은 나귀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귀의 주인이 나귀를 내놓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입구 벳바게에 도착했을 때 제자 둘을 건너 마을로 보내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면 건너 마을 입구에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어 있는 것이 있을테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주인이 나타나서 그거 왜 가져가냐고 물으면 주님이 쓰시겠다고 얘기를 해라.”
그래서 두 제자가 가보니까 거기에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풀어 끌고 나오려고 하는데 주인이 달려 나왔습니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왜 남의 나귀를 함부로 끌고 가시오?”
그때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합니다.” 그 말씀에 주인은 아무런 토를 달지 아니하고 “네. 가져가십시오.” 예수님 말씀에 그는 즉각 순종하고 자기의 귀한 재산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주님께 내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사람들이 누굽니까? 주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복 받는 길은 주의 말씀에 주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느냐? 100세 때 얻은 아들 이삭이 청년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 가서 번제를 드리라 한 그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백세 때 얻은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주님이 명령하십니다.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그를 죽여서 팔다리를 다 잘라내고 죽은 그 몸을 주 앞에 제물로 드리는 제사인데,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22장 2절입니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니 100세 때 그렇게 힘들게 아들을 얻게 하시고 나서, 이제 또 아들을 데려가시겠다 하니 주님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마 하나님께 따져 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부인에게 가서 “여보, 하나님이 우리 아들 번제로 드리라는데 어떻게 할까?” 상의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부인 사라가 그 말을 들었으면 “여보 당신 치매가 났어. 치매가. 절대로 내 사랑하는 아이 내놓을 수 없어. 나를 죽이고 가시오.” 아마 대판 싸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에 즉각 순종해서 아무 말도 부인에게 하지 아니하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이삭을 데리고 종과 함께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으로 갑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그 결정을 하고 순종해서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 올라가 아들을 드리려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막으시고 한 양을 예비하셔서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신 드리게 한 후에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6절 17절입니다.
“이르시되 야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왜? 어떻게요?”라는 그런 이야기가 하나님 앞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뿐인 것입니다.
“왜요?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 나에게 그런 무리한 명령을 하시는지요?” 그것은 우리 인간의 연약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네” 그 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아멘” 그 말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큰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로 14절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복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데 1절만 봉독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야훼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복을 받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복받은 나라가 되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한평생 그 삶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 주변에 사람을 보면 밤낮 뭘 따지는 사람이 있어요.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밤낮 비판적인 시각으로 남을 보고 판단하고 스스로 의로워서 이런저런 지적을 하는데, 그 삶의 열매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과 자주 충돌하고 문제만 일으키게 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남을 판단하라고 세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라고 주님 앞에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 뜻에 절대 긍정, 절대 순종, 절대 감사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순종하여 복 받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늘 판단하고 비판해서 스스로 문제 가운데 빠져 있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될 때 하나님의 큰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고,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게 만들어 주시고,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삶이 복 받은 삶으로 변화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왜 이 대한민국이 이렇게 문제가 많으냐? 말씀대로 살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부터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한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대로 살지 못한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씀에 서로 물고 뜯지 말고 사랑하고 화합하고 용서하라고 했는데, 물고 뜯고 화합하지 못한 것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편 가르기,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모습을 우리는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1천만 크리스천들이 먼저 회개하고 한마음 될 때 우리나라가 다시 굳건히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우리 모두가 손에 들었던 비판의 돌을 내려놓고 주의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서로 용납하고 화해하고 용서하고 하나가 되어서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해 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판은 비판을 낳고 원망은 원망을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부터는 비판의 삶을 살지 말고 감사의 삶을 살고, 원망의 삶을 살지 말고 찬양과 섬김과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에서 온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 주인의 귀한 순종을 기쁨으로 받으시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달리사 온 인류를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샘기도하시고 새벽 3시쯤 가룟 유다가 병정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아서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되는 그 전 제사장인 안나스에게 갔다가, 다시 가야바에게 끌려와서 거기서 공회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칭했다고 그래서 사형죄로 몰아서 그 새벽에 빌라도에게 끌고 갑니다.
당시 사형 집행권이 로마 총독에게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가서 “총독이시여! 총독이시여! 이 사람이 우리 유대법에 불경죄를 저질렀습니다. 자기가 자칭 하나님이라고 그러는데 이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 가만 보니까 종교적인 문제예요.
그래서 헤롯왕에게 보냅니다. 헤롯왕이 예수에 대해서 듣고 궁금해서 이것저것 물어봐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까 다시 헤롯왕이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빌라도가 아무리 봐도 그를 사형시킬 만한 그러한 죄목이 없었기에 살려주려고 하는데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매수된 백성들이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를 살려주면 황제 가이사 시저의 충신이 아닙니다.” 막 백성들이 난리 나니까 할 수 없이 빌라도가 그 군중들의 성난 소리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줍니다.
그리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온몸에 피와 물을 쏟으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번에 온 인류의 죄와 허물을 다 끌어안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을 들춰내고 비판하는 데 앞장서는데, 우리 예수님은 온 사람의 허물을 다 대신하시고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9장 28절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권세가 멸함을 받았고, 인류에게는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그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하게 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굉장히 이기적입니다. 희생보다는 나의 유익과 만족을 내 삶의 목표로 놓고 살아갑니다. 섬기는 삶보다는 섬김을 받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떤 자리만 맡겨주고 권력만 주면 다스리고 섬김만 받으려 해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세워지는 지도자는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섬김의 지도자가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 나라가 변화될 것입니다. 이 사회가 아름답게 바뀌어질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 이 나라에 와서 희생한 많은 선교사님이 있는데,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태어난 제임스 홀 선교사님도 그중 한 분입니다.
1860년에 캐나다에서 태어나신 이 선교사님은 10대 후반에 폐병을 앓아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병들고 약한 사람들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기를 작정하고 퀸즈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합니다. 공부하던 중에 학생 자원 운동의 책임자인 존 포먼 목사의 강연을 듣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뉴욕 맨하튼에 있는 병원에서 실습하다가 그곳에서 같이 선교 지망생인 마가렛 로제타를 만나게 되는데 마가렛 로제타는 “나는 조선에 가서 선교할 겁니다. 얘기 들어보니까 조선에 있는 여자들은 남자 의사에게 치료받기를 원치 않는다고 하니 나 같은 여자 의사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마가렛 로제타 선교사가 25살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옵니다.
그때가 1890년 10월 13일인데 이 제임스 홀은 중국으로 파송을 받았다가 다시 1891년 조선으로 들어와 둘이 만나게 되고 그리고 한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1892년 6월 27일 결혼하게 됐는데 조선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 셔우드 홀을 낳습니다. 그런데 제임스 홀이 얼마 있지 않아서 평양으로 파송을 받게 되는데, 평양은 굉장히 보수적이고 외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지역입니다.
그곳에 가면 위험이 따를 것이라고 사람이 만류했는데, 막상 본인은 조선 사람을 섬기러 왔기 때문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평양에 가서 많은 환자를 고쳐주었는데, 평양에 전염병이 창궐할 때 전염병 환자를 돌보다가 본인이 34살의 젊은 나이로 감염되어 죽습니다.
3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아들이 한 살이고, 그의 부인은 임신 중이었는데 7개월 된 딸이 있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 아내에게 이와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말아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했어요.”
미국에서 자기 사위가 죽었고, 딸이 임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미국에 들어와서 아이를 낳고 여기서 새로운 사역을 해라.’
미국에 가니 자기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그 교회 성도님들의 기도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딸 에디스를 낳았는데, 에디스를 낳고 난 다음에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를 다시 한국으로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일기에 이와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엄마는 다시 한국에 가서 사역을 맡기로 결정했다. … 엄마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 생각한다. 엄마는 많은 기도를 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한국으로 가는 길을 막아주시고 이 곳에서 할 일을 열어달라고. 그런데 한국의 사역은 여성해외선교회와 한국 양쪽에서 활짝 열려있고 이곳에서의 사역은 막히고 있다” (1897년 5월 10일 일기 中)
그녀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다시 열악한 환경이었던 조선으로 건너와서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병원을 세우고 그 병원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다음에 1898년에 두 살이 된 어린 딸, 에디스가 풍토병에 걸려서 죽습니다.
그래서 양화진에 자기 남편 묻은 무덤 옆에 딸을 묻고 어린 아들 셔우드를 품에 안고 결심했습니다. ‘나는 조선을 위해 한평생 헌신할 것이다.’
‘평양의 오마니’로 불렸던 그녀는 1933년에 이르기까지 조선 여자 의학 강습소 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고요. 동대문 부인병원 현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 전신인 병원 설립에 기여했고, 이 여자 한 분이 한 일이 너무너무 많아요.
한국어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을 처음으로 개발해서 조선 최초의 맹인 학교인 평양 여맹학교를 세웠고, 평양의 한반도 북쪽의 첫 번째 여성 전문 병원인 광혜여원도 열었습니다.
길에서 다 죽어가는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그를 치료하고 미국 유학을 보냈는데, 그 여자가 조선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더입니다.
한국에서 43년 동안 많은 병자들을 섬기고 주의 복음을 전하다가 1933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85세를 일기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본인의 유언에 따라서 그 시신이 한국으로 와서 남편 옆에 묻히게 됩니다.
그 아들 셔우드 홀이 부모의 대를 이어서 다시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오게 되는데, 자기가 어릴 때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 그 의사 선생님이 결핵으로 죽은 것에 충격을 받고 조선에서 결핵을 퇴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924년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홀스빌 서퍼크 결핵 요양소에서 결핵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1925년 8월 미국 감리회 의료 선교사로 임명돼서 아내 메리언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옵니다.
한국에 와서 결핵 요양소를 세우고, 또 그 결핵 치료 자금을 마련하고, 결핵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씰을 만들어서 결핵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열심히 병자를 고치는 가운데 한국이 워낙 의료 환경이 열악하고 또 전염병이 돌고 그랬던 터라 한국에 왔는데 그의 아들 프랭크가 또 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그 아들을 양화진 부모님 있는 곳에 다시 묻고, 16년 동안 의료 선교사로 사역하는 가운데 결핵 퇴치 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 총독과 일본 국왕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선교를 한다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합니다.
그는 인도로 건너가서 은퇴하기까지 23년 동안 의료 선교를 계속 이어갔고, 1984년 대한결핵협회 초청으로 방한한 그의 고백입니다.
“나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내가 죽거든 미국이나 캐나다에 묻지 말고 이 나라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 동생, 아들이 잠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기 바랍니다.”
1991년 98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소원대로 한국의 양화진에 와서 묻혔고, 그 아내 메리언도 석 달 뒤 95세로 별세해 그 남편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지금 여기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가면 이렇게 3대에 걸쳐 약 80년 동안, 이 땅에 와서 희생하고 섬긴 홀 선교사의 가족 6명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셔우드 홀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몸소 실천한 주님의 종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그 희생적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이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만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때까지 내가 받기만 하는 삶을 살았다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때까지 내가 무엇 하나 희생하지 아니하고 움켜쥐고 살았다면 이제는 내가 가진 걸 아낌없이 내어놓고 희생하고 섬기며 이웃을 변화시키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하나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한 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찬송가 305장(통 405) ‘나 같은 죄인 살리신’>
1절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2절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3절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4절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여러분의 남은 삶을 섬김과 희생의 삶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두가 자기 만족을 위해 살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고 모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본받아 우리 남은 여생 섬김과 희생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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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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