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요한복음 20장 11~16절)
할렐루야!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기쁨으로 우리가 인사 나눕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복되고 좋은 부활절 주일에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립니다. 예배를 통해서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오니 코로나-19가 속히 종식 되어지게 하여주옵시고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멈추게 하여주옵소서. 더 이상 피해자가 나타나지, 늘어나지 않게 하여주시고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다가오게 하여주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곳에도 넘쳐나 속히 저들이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영광을 주님께 돌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복음성가 : 사랑하는 자여>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설교말씀>
할렐루야. 오늘 저는 기쁘고 복된 부활절을 맞아서 요한복음 20장 11절로 16절의 말씀을 가지고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제목을 크게 따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세계 인류 역사 가운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종교 지도자는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 최대의 기적이요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영생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의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를 제일 먼저 만난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토요일이 지나고 주일, 일요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와 함께 향품을 들고 예수님 무덤을 찾아갑니다. 마가복음 16장 1절, 2절입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그런데 무덤에 가보니까 무덤을 가로막은 큰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16장 4절입니다.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너무 놀라가지고 저들이 뛰어서 제자들에게 가가지고 말합니다. “제가 예수님 무덤에 갔는데 돌이 굴려져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놀라서 베드로와 또 한 제자가 달려옵니다. 아마 요한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가 걸음이 더 빨라서 먼저 도착을 했는데 문이 열린 것 돌이 치워진 것을 보고 그 앞에 지켜 서 있는데 베드로가 뒤에 뛰어와서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고 세마포만 놓여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6절, 7절은 설명합니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래서 “아니 예수님 시체가 어디 어디 갔지” 하면서 베드로와 한 제자는 돌아갔는데 막달라 마리아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1. 울고 있는 사람
오늘은 먼저 우리가 울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는데도 부활한 것도 모르고 “예수님의 시체가 어디 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0절입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그러나 마리아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11절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이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분입니다. 절대 절망에 처해서 버림받은 인생,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던 자기를 구원해주신 절대 희망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려가지고 가정에서 버림받고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여인입니다. 귀신이 들렸어도 일곱 귀신이 들렸으니까 온전한 정신이 아닙니다. 그녀만 나타나면 애들이 “미친 여자 나왔다.”고 돌을 던지고 쫓아다니며 조롱을 하고 사람들은 침을 뱉고 깔보고 비웃었습니다.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던 이 일곱 귀신 들린 미친 여인을 예수님이 불쌍히 보셨습니다.
우리가 때때로 상처받고 절망 가운데에 처해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고개를 돌리고 우리를 돌아보지 않을 때에도 사랑의 예수님은 절망에 처한 우리를 와서 살펴보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고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 들린 그 막달라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주시고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은 설명합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막달라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그 당시 마리아라는 이름이 굉장히 흔한 이름이었는데 그 지역에 따라서 베다니에 살던 베다니 마리아, 막달라 지역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인데 자기가 미친 여자로 살다가 이렇게 정상인이 되어 살게 되니 얼마나 기쁜지 사람들이 자기를 멸시하고 무시하고 침 뱉고 조롱하던 그 모습에서 이제는 새사람이 되었으니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내 한평생 주님만 위해 살리라 기쁨으로 주님을 따라다니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갔지만 끝까지 그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 십자가 밑을 지켰던 마리아입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은 설명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막달라 마리아가 그렇게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고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어서 유일한 삶의 기쁨이요 희망이요 자기의 존재의 이유가 되고 목적이 되는 예수님이 무덤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충격이고 슬픔이고 절망인지 모릅니다. 모든 꿈과 희망이 다 사라졌습니다. 예수님 없이 내가 어떻게 살지? 내가 어떻게 살지? 그런데 예수님 시체에 향품을 바르러 왔다가 향료를 바르러 왔다가 보니 무덤 문이 열리고 돌은 굴러져 있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으니 더 그녀는 낙심하게 된 것입니다. 큰 슬픔 가운데 무덤 곁을 떠나지 않고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이렇게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 앞에, 절망 앞에 한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크고 작은 절망에 짓눌려 삽니다. 죄의 결과로 다가온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우리 인생에게 문제가 다가오고 질병이 다가오고 가난이 다가오고 저주가 다가왔습니다. 모든 사람의 그러한 절망 가운데서 탄식하며 눈물 흘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힘들고 어려우니까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을 포기하기까지 하는 극단의 선택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너무 깊은 절망의 밤에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어디를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삶의 어떤 돌파구도 보이지 않으니까 차라리 이러면 죽는 게 낫다 그래서 삶을 포기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코로나-19라는 것이 우리 생전에 이렇게 우리를 괴롭힐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벌써 3년째입니다. 정부에서도 하다 하다 이제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어서 이젠 다 풀어놓겠다 합니다. 옛날에 100명만 나왔어도 어이구 많이 나왔다. 우리가 염려하면서 이 큰 성전에 19명 모여서 예배드렸던 때가 있었습니다.
근데 지금 10만 명 20만 명 나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제는 다 풀어서 자유롭게 한다고 하니까 또 염려가 앞섭니다. 그동안 2년 동안 영세 소상인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가게 문을 열어도 사람이 오지 않습니다. 음식점을 하는 분 얘기 들어보니까 아침에 나가서 음식 재료를 갖다 사다 놓으면 하루에 4명, 5명밖에 왔다 가지 않아서 가게 문을 여는 게 적자라고 말합니다. 문을 안 열 수도 없고 열면 적자고 이렇게 절망적인 삶을 1년 넘게 버텨왔습니다. 이제 모든 걸 풀어놓는다고 하니까 이제 다시 새로운 희망이 싹 트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떠한 절망적이고 어려운 현실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됩니다. 물러서면 안 됩니다. 사랑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망을 딛고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밤이 깊으면 반드시 새벽은 밝아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겨울이 춥고 길어도 다가오는 희망의 봄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코로나라고 하는 이 긴 긴 추운 겨울이 2년 지나갔지만 이제 희망의 봄이 밝아오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의 새벽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부활의 새벽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기적의 새벽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축복의 희망의 날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 주인 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모두 절망해서 건져주시고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만들어 주십니다.
2. 누구를 찾느냐?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누구를 찾고 있느냐? 오늘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마리아가 무덤 앞에서 울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절망의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주님 물으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지금도 절망 가운데 우리가 고통과 괴로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주님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어찌하여 울고 서 있느냐? 너의 문제가 무엇이냐?” 주님 물으시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갖고 나오셨습니까? 여러분 가정에 어떤 문제들로 인해서 그 절망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부부간에 갈등이 있고 또 부모와 자식 간에 큰 아픔과 상처가 있어서 대화도 안 하고 지내고 있는 그런 고통이 있습니까? 직장이 없어 벌써 몇 년째 일거리 일자리를 찾고 있습니까? 잘 되던 사업이 코로나로 인해서 완전히 문을 닫게 됐습니까?
주님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울고 있느냐. 너의 눈물을 내가 닦아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힘을 내라. 어떤 절망의 순간이 너에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반드시 너는 그 절망을 이기고 이겨 승리할 것이다.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될 것이다. 축복이 될 것이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1장 10절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너를 붙들리라. 너를 붙들리라. 너를 붙들리라. 이 시간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를 붙들리라. 낙심하지 마라. 실망하지 말라. 포기하지 말라. 지금 인생이 끝이 아니다. 너에게는 희망의 새벽이 기다리고 있다. 희망의 봄이 밝아 올 것이다. 할렐루야!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절대 희망이 되십니다. 사람들은 절망을 얘기하고 우리가 보는 것은 절망이지만 예수님 안에서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부활의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영생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너무나 절망이 크고 깊으니까 내 곁에 와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4절입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꿈에도 그리던 예수님이 눈앞에 서 계신데도 슬픔과 절망이 그의 눈을 덮어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절망이 깊으면 내 곁에 와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옆에 와 계시는데 우리 주님이 옆에 와 계셔서 우리를 붙들어주고 계시는데 주님이 계신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복음성가에 이와 같은 가사가 있습니다.
내 눈물 씻어 주시는 예수 복된 예수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장 어둡고 춥고 절망의 밤이 깊은 그 자리에 한없이 눈물만 흘리며 베갯잇을 적시고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울 때 주님이 옆에 오셔서 나를 꼭 안아주시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만 울고 울음을 멈추고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나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이 바로 여러분 곁에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길을 살아갈 때 어떤 절망이 다가오고 문제가 다가오고 질병이 다가오고 어려움이 다가와도 절대로 주님 손을 놓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눈에 주님이 안 보여도 주님은 바로 여러분의 앞에 와 계시는 것입니다.
3.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장면이 요한복음 20장 16절 막달라 마리아를 부르는 장면 속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마리아야 부를 때에 막달라 마리아의 영의 눈이 떠졌습니다. 바로 눈앞에 서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길에 피곤하고 지쳐있을 때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내가 외롭고 쓸쓸해 나 홀로 뜬눈으로 밤을 새울 때 주님이 오셔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자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너를 떠났고 너를 배신하고 너에게 등을 돌렸지만 나는 너를 떠난 적이 없다. 사랑하는 자야 내가 너와 함께한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지금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나를 모릅니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아십니다. 우리 예수님이 절망의 자리에, 고통의 자리에, 질병의 자리에, 문제의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힘을 내라. 힘을 내라. 내가 너를 택하여 불렀다.” 이사야 43장 1절 말씀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마리아야.” 부를 때 영의 눈이 탁 떠져서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랍오니여. 선생님.”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가 랍오니여,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크고 위대하시며 영원히 존경받으실 나의 주님,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따라갈 내 주님을 그녀는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크고 위대하시며 영원히 존경받으실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우리가 한평생 믿고 의지하고 따라갈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 감동해서 주님을 붙잡으려고 할 때 주님 말씀하십니다. “나를 붙잡지 말고 가서 제자들에게 이 메시지를 전해라.” 요한복음 20장 1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주님 막달라 마리아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라.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 주님이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절망에 고통에 괴로움에 처해있는 세상 속으로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날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장 21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가서 이 부활의 메시지를 온 세상에 전해야 될 것입니다. 일찍이 복음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신문에서 빌리 그레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거들랑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로 옮겨 간 것뿐입니다.
할렐루야. 전 이화대학교 총장이었던 김활란 박사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죽거든 슬픈 장송곡을 부르지 말라. 천국 문에 들어가는 환희의 노래, 승리의 행진곡을 불러다오.
할렐루야. 기독교는 과거의 종교가 아닙니다. 죽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무덤의 종교가 아닙니다. 부활의 종교입니다. 생명의 종교입니다. 영생의 종교입니다. 여러분을 영원한 천국으로 이끌어가는 참 생명의 종교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절망의 무덤 앞에 슬피 울고 서 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 절망의 무덤을 떠나야 합니다. 죽음의 자리도 떠나야 합니다. 슬픔의 자리도 떠나야 됩니다. 문제의 자리도 떠나야 됩니다. 그리고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 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복음의 증인 되는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고난에 처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200만 다문화 가족들을 우리가 주의 사랑으로 품어야 됩니다. 몸이 불편해서 장애를 갖고 있는 우리 장애우 형제들 자매들을 사랑으로 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지하철 앞에서 시위를 하겠습니까? 사랑으로 품어야 됩니다. 3만 5천 탈북자 가족을 품어야 됩니다.
제가 75년도 대학교 3학년 때 난지도 철거민촌에 가서 일주일간 봉사한 적이 있습니다. 망원동 종점에서 내려서 논둑길로 30분 걸어 들어가면 거기에 그 난지도 둑 옆에 철거민촌이 있는데 정말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저렇게 힘들게 어렵게 사는 분을 제가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곳에는 전기가 없었습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전기가 없는 곳에서 호롱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호롱불은 6.25 이후 그때 전력 사정이 좋지 않을 때 있었던 호롱불인데 그런 호롱불을 켜고 있었고 수도도 없어서 우물을 파서 먹는데 우물은 오염된 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난지도 둑 건너편은 서울시 분뇨 처리장이 있어가지고 서울에 있는 모든 오물을 갖다 버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름에는 막 파리 떼가 들끓고 냄새가 나고 그런 곳인데 그곳에 젊은 주의 종이 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천막 교회를 세웠는데 그곳에 가서 성도들이 얼마나 우는지 너무나 인생이 힘들어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답답해서 울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못가고 나가서 넝마주이를 하고 소매치기를 하고 구두 닦기를 하고 어른들은 나가서 도로에 나가서 도로를 까는데 하루에 3천 원, 5천 원 받으며 일을 했습니다. 그거 가서 보면서 ‘한평생 내가 어려운 사람을 섬겨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50년 후에 제가 서울역 쪽방촌에 가보니까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어서 너무나 큰 충격과 아픔을 제가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지금도 고개만 돌려보면 이렇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들고 가야 합니다. 그들을 사랑으로 돌봐야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내가 받고 나 혼자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들고 가는 것입니다. 메시지를 들고 가야되는 것입니다. 주의 사랑을 실천해야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작곡가 아담 가이벨이 있습니다. 어릴 때 시력을 상실하고 사랑하는 외동딸과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믿음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사위가 제철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폭발 사고가 나서 여러 명과 함께 죽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큰 슬픔에 “하나님 왜 주님을 잘 섬기는 우리 가정에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자기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 찬송가 작곡가였던 찰스 오스틴 마일즈를 찾아갑니다. 그러면서 얘기합니다. “어찌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내가 정말 너무 슬퍼서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친구의 아픔을 본 오스틴 마일즈는 ‘그 친구를 어떻게 하면 위로할까?’ 기도하는 가운데 ‘내가 친구를 위로하는 시를 하나 써야되겠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요한복음 20장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안에서 우는 장면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 우는 장면을 생각하면서 시를 썼습니다.
나 홀로 동산에 나왔네
이슬이 아직 장미꽃 위에 맺혀있을 때
내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
하나님의 아들이 들려주시는 음성이라네
그가 나와 함께 거닐고 이야기하시며
‘너는 내것이라’고 말씀하시네
우리가 거기 머물며 나눈 그 기쁨
아무도 알지 못 한다네
여러분 절망의 동산에 혼자 슬피 울고 있을 때 주님이 옆에 오셔서 여러분을 부르고 계신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 음성을 들은 그 모습을 생각하면서 지은 이 찬송이 오늘 여러분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442장 (통 499) : 저 장미꽃 위에 이슬>
1절)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후렴)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어떠한 절망의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까? 여러분 앞에 서셔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손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절망에서 일으켜주시고 위대한 축복의 내일로 여러분을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십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넘쳐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절망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를 일으켜주신 주님,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의지합니다. 주님 바라봅니다. 한평생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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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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