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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2021.03.28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태복음 21장 2절~9절)

함께 우리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에게 좋은 일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우리가 긍정으로 고백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행할 때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지금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문제가 많아도 문제를 보지 아니하고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긍정의 고백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이번 한 주간 고난주간을 맞이합니다. 오늘이 종려 주일인데 종려주일로부터 시작해서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 한 주간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게 되는데 지금까지 항상 내 중심으로 살았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아니하고 사소한 일에 낙심하고 상처받고 흔들리며 주님 기쁘시게 하지 못한 것 다 회개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낮아지시고 희생하시고 섬김의 본을 보이셨는데 우리도 그와 같은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조용기 원로 목사님 건강을 회복시켜 주셔서 맡기신 귀한 사명 감당케 하여 주시옵소서. 통성으로 다 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찬송가 382장(통432) : 너 근심 걱정 말아라>

[후렴]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놀라우신 은혜로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은 하늘 영광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우리는 그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늘 이기주의적이고 교만해서 주님 뜻을 거역하며 살았던 죄를 회개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철저히 깨어지고 낮아져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주님의 일꾼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설교말씀>

오늘은 마태복음 21장 2절~9절 말씀을 가지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제목을 한번 따라 해주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예외 없이 누구나 삶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100세를 살아도 내가 건강하게 120세까지 살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에게 ‘당신 앞으로 일주일밖에 살지 못합니다.’ 하는 시한부 인생을 누가 선고해주었다면 우리는 그 일주일을 어떻게 보낼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했기 때문에 종려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로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 이 한 주간 뜻깊게 보내야 할 것입니다.

1. 나귀를 타신 예수님

오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먼저 나귀를 타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 원합니다. 마태복음 21장 2절과 3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가장 겸손하신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옛날에 왕이나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 성에 들어갈 때는 앞뒤로 호위무사가 따르고 고적대가 나팔을 불면서 위풍당당하게 온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했던 것을 우리는 늘 영화나 기록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가장 겸손하신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시고 뒤뚱거리는 그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실 것은 주전 520년 스가랴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 550년 전에 이미 기록을 통해서 이렇게 예언합니다. 스가랴 9장 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이 겸손한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대로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한평생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겸손하게 그 맡겨진 모든 사명을 감당하셨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신 것도 겸손의 도리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내일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텐데 그것도 모르고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세숫대야를 가져다가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저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5절입니다.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14절, 15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겸손과 섬김의 삶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그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고 또 그렇게 살지도 못했습니다. 자리다툼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섬기며 살 것을 간곡히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3절~45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한평생 우리의 가장 큰 과제, 숙제가 있다고 하면 겸손의 삶을 사는 것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나가면 쉽게 교만해집니다. 힘들고 어렵게 살 때는 그냥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삶이 풍요로워지고 등 따습고 배부르면 알게 모르게 사람이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고 인기가 절정에 오르면 한없이 교만해가지고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마음대로 자기의 감정을 다 표현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러한 일반 사람들이 가는 길로 가면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믿고 나서도 그것이 잘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중세의 성자로 불렸던 어거스틴에게 어느 날 그 제자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소중하고 으뜸 되는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그때 어거스틴이 말합니다. ‘겸손이니라.’ ‘그럼 두 번째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겸손이니라.’ ‘그러면 마지막 세 번째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도 겸손이니라.’

겸손은 한평생 우리들의 숙제입니다. 주님 내가 잘될 때 교만해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칭찬받을 때, 박수갈채 받을 때 다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고 겸손해지게 하여 주옵소서. 겸손해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2. 백성들의 환영

둘째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신 예수님을 환호하는 백성들의 모습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이 저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건져줄 그러한 심판주 메시아로 생각해서 열렬히 환영을 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8절입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저들이 존경과 사랑의 모습으로 그 겉옷을 펴서 그 앞에 깔았습니다. 나뭇가지를 깔고 또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9절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시여. 메시아시여, 메시아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를 이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장차 올 메시아의 모습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고난받는 종으로써 오실 메시아. 또 다른 여러 곳을 보면 심판주로 와서 모든 악을 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그러한 메시아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두 가지 메시아의 모습 가운데 고난받는 종 메시아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판자로 오셔서 로마를 심판하시고 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주실 그러한 메시아로 생각해서 환호하면서 예수님을 모셨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여러분의 어떠한 분이십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편한 대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게 복 주시는 분. 날 잘되게 해주시는 분. 내 병 고쳐주시는 분.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우리가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고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는 것이 그것이 우선이 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항상 내가 중심입니다. 내가 잘되고 내가 건강하고 내가 복 받고 내 하는 일이 형통하고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먼저 주님의 뜻, 주님의 나라를 구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는데 사람들이 삶의 순서가 바뀌어가지고 “나, 나, 나, 나” 하다 보니까 신앙 생활하다가 시험에 들고 상처받고 뒤로 물러가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그러한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철저히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심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고백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복 주시고 높여주시고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모셔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러한 뜻을 보이지 아니하고 로마와 싸우려고 하는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으시니까 똑같은 이스라엘 관중들이, 외치며 예수님을 환호했던 그 사람들이 금요일날 새벽에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성난 군중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자기들의 마음에 안 맞으니까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쳤던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은 외치는 성난 군중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면 안 됩니다. 내 마음에 맞으면 할렐루야고 내 마음에 안 맞으면 성질을 내고 등을 돌려 교회를 떠나가고 교회에 문제와 어려움을 일으킨다고 하면 이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철저히 주님 중심의 신앙으로 첫째도 예수님, 둘째도 예수님, 마지막도 예수님, 범사에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 집은 기도하는 집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먼저 성전을 다 청결케 하시고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신 그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21장 12절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성전에 들어가 보니까 여기저기 장사꾼들이 있고 환전상들이 있고 막 성전이 시장터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저들이 교회에 와서, 성전에 와서 장사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문을 취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파는 성전의 제물들이 시중보다 비쌌습니다. 그래서 이득을 취해 가지고 그 취한 이득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나누어주고 또 상인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다 들러 엎으시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1장 13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성전이 성전으로써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는 기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만드는 것이 기도인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기도 없이 교회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교회학교 교사를 하더라도, 남·여 선교회 봉사자로서 주님을 섬길 때에도 찬양대에서 주님을 찬양할 때도 기도로 준비하고 마음속에 주시는 성령의 감동을 갖고 주님을 섬길 때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없이 나와서 봉사하다가 시험에 듭니다. 상처받습니다. “나를 알아주네, 안 알아주네” 그래서 혼자 시험에 들고 그래서 주님이 멀어지고 교회가 멀어지는 그러한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철저하게 우리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기쁨과 감사함으로 기도로 무장해서 주님을 섬기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십니다. 기도가 회복되길 바랍니다.

조지 뮬러 목사님은 93세까지 귀한 사명을 감당하시는 가운데 고아를 약 15만 명을 돌보았습니다. 66년 동안 15만 명의 고아들을 돌봤는데 그는 단 한 번도 고아원을 운영하기 위해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려서 기도만 했습니다.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고 또 채워주시고 또 채워주시고 또 채워주시고 그래서 매일같이 일기장에 씁니다. 오늘 이와 같은 기도가 응답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기도가 3번, 4번, 5번 응답되고 어떤 때는 기도가 즉시로 응답되고 어떤 때는 기도가 천천히 응답되고 모든 기도의 응답을 적어서 천국 가신 후에 그분의 일기장을 살펴보니까 응답받은 기도가 5만 번이 넘었습니다.

여러분, 이 같은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생활의 문제, 직장의 문제, 사업의 문제 어떠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육신의 질병과 고통이라고 할지라도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응답해주시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오산리 기도원이 있어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기도굴에 가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십니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우리가 호소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 주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백 번 찾아봐야 사람에게서 응답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누구는 얘기를 들어주겠죠. 안됐네. 그 정도겠죠.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응답해주실 분은 우리 주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한국의 새벽 기도 전통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부흥 운동의 열매로 새벽 기도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로부터 모든 한국교회가 새벽기도를 드립니다.

물론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새벽 기도를 먼저 시작하셨지마는 전 세계에 새벽 기도 전통을 가진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밖에 없습니다. 이 대한민국의 새벽 기도가 한국을 살리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세계를 주의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축복을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날 새벽기도의 열기가 알게 모르게 식어지고 우리의 기도의 소리가 점점 작아져서 이렇게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우리가 안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고 그래서 영적 지도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기도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주시고 블레셋 군사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복 주셨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이렇게 나라를 살렸는데 여러분 모두가 기도할 때 가정이 살고 사회가 살고 대한민국이 살고 북한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후에 예수님께 나오는 모든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교회가 기도가 회복되면 치유의 역사가 강물처럼 흘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장 14절입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시니

교회는 영적인 병원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영적인 맹인 된 자들이 눈을 뜨게 되고 육신의 병을 가진 사람이 병을 고침 받게 되고 마음의 병을 가진 사람이 병을 고침 받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울증이 병이 돼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조현병으로 칼을 휘둘러 자기 어머니를 죽이기도 하고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라면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을 변화시켜서 그러한 끔찍한 일들을 벌이지 않았을 터인데 너무나 우리가 이 일을 안타깝게 여겨야됩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모든 교회가 일어날 때입니다. 기도하고 나서 예수의 사랑의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치료하고 회복케 하는 그러한 은혜가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작은 예수가 돼서 가는 곳마다 예수의 사랑을 전하면 겸손히 저들을 섬기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여러분을 통해서 온 한국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은혜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역사 가운데 가장 우리가 기억되어질만한 겸손의 종 조덕삼 장로님 그리고 이자익 목사님 이야기를 소개하기 원합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경남 남해군 한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섯 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열일곱 살 때 전북 김제의 큰 부자인 조덕삼 갑부의 집의 문을 두들겨 이 집의 머슴이 됩니다.

제가 배고프고 갈 데가 없는데 저를 거둬주시면 제가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첫눈에 아, 이 사람이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이라는 것을 눈여겨보았던 조덕삼 선생이 그를 자기 집의 머슴으로 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조덕삼 갑부는 그 일대의 큰 부자인데 마방이라고 모든 마차나 말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쉬었다가는 장소를 제공하는 그러한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루는 선교사님이 오셨습니다.

루이스 테이트 선교사님이 와서 머물게 되었는데 선교사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어요. 그래서 사랑채를 내주면서, 여기서 마음껏 말씀을 전하십시오. 그래서 본인과 본인 가족, 머슴 이자익이 그 앞에 와서 예수 믿고 은혜받고 같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점점 믿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니까 이 조덕삼 갑부가 자기 재산을 내놓아서 그곳에 금산교회를 세웁니다. 큰 교회가 섰습니다. 그리고 이 주인 조덕삼과 머슴 이자익은 둘 다 그 교회의 영수가 됩니다.

영수라고 하는 것은 지금 우리나라 교회 제도에는 없지만, 그 당시 장로교회에서 장로님 되기 전에 교회의 모든 살림을 보고 일하는 그런 직분자로 영수란 직분을 두었는데 요즘 말하면 안수 집사님 격이 되기도 하고 또 목사님이 안 계실 때는 설교도 했으니까 전도사 역할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수집사요, 전도사 같은 역할을 하는 영수가 있었는데 두 분이 다 영수가 돼서 열심히 교회를 섬깁니다. 선교사님이 때때로 외부에 설교를 하러 가시면 이 영수들이 설교를 했는데 머슴 이자익이 젊고 설교를 잘해서 자주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1908년에 그 교회에 장로님을 선출하게 됩니다. 장로님을 선출하는데 주인되는 조덕삼 영수도 나오고 머슴되는 이자익 영수도 나왔어요. 투표를 하니까 당연히 돈 다 내서 교회도 짓고 그 교회의 어른인 조덕삼 영수가 당선될 줄 알았는데 조덕삼 영수보다 15살 연하인 머슴 이자익이 장로로 당선되었어요. 그러니까 술렁거렸습니다. 아이고, 이거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런데 이 조덕삼 영수가 일어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기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교회를 열심히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온 성도가 다 박수를 치면서 그 말에 큰 감동을 받았고 2년 후에 이 조덕삼 영수도 장로로 선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조덕삼 장로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보다 15살 연하인 자기 집 머슴인 이자익 장로를 깍듯이 섬겼습니다. 장로님, 장로님 하면서. 주중에는 자기 집 머슴으로 일하는데 교회만 오면 장로님, 장로님. 이자익 장로를 잘 섬기고 그다음에 평양에 신학교에 공부하러 가는데 학비, 생활비 다 보내줘서 장학생으로 공부를 시키고 그다음 신학교 졸업하고 목사 되니까 다시 본인 교회 담임 목사로 청빙해가지고 아주 깍듯이 잘 모셔서 이자익 목사님이 세 번이나 장로교 총회장도 되고 교회사에 큰일을 감당한 귀한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주의 종을 잘 받들어 섬긴 조덕삼 장로님은 자자손손 큰 복을 받아서 조세형 국회의원이, 4선 국회의원이 그의 손자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에 복을 주셨어요.

여러분, 겸손은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지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겸손해라, 겸손해라, 겸손해라, 해도 여러분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겸손이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 겸손의 영이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겸손과 온유를 옷 입고 섬길 때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94장(통102) :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1절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은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후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기도>

기도드립니다.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본받아 가장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 예수의 사랑을 온 천하에 전하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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