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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받고 유지하고 성장하는 삶
2017.07.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3장 16∼19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사랑, 그리고 우리들의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고, 구원을 유지하고, 성장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세상의 많은 종교들 가운데 유독 우월하다고 자랑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을 가지고 영국의 옥스퍼드대 교수들이 토론을 할 때, 기독교 저술가인 C.S. 루이스 박사는 단 1초도 주저하지 않고 “그것은 은혜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기독교의 핵심은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1.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은혜란 무엇이냐? 값없이 도움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절대로 값을 요구하지 아니하는 빈손 들고 받는 것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도움을 받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면 그 은혜는 막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을 은혜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도저히 그 정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지은 죄인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로 12절에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의인은 단 한 명도 없고, 모두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죄인임을 아는 죄인과 죄인임을 모르는 죄인이 있을 뿐,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8절로 10절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태어났기 때문에 사망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값으로 죽는데, 예수님은 죄없이 태어난 유일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을 수가 없어요. 죄를 안지었는데 대가로서 사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의 삶을 대신하셨을 때 인간의 사망을 청산하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 죄의 빚을 지고 있는데, 예수님이 이 대신 빚을 끌어안아서 당신의 생명으로 빚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내 죄가 아니고, 인간의 죄를 다 내 죄로 끌어안아서 죄인이 되었음으로 예수님은 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유일한 영생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고난을 통해 대속의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죄를 주님께서 속량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속량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빚을 탕감하여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빚을 갚지 못해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빚을 지면 빚의 노예가 됩니다. 한국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계 부채는 이미 1천 조 원을 훌쩍 넘어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빚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빚을 지게 되면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빚의 노예가 됩니다. 만약 빚을 다 갚지 못하고 죽으면 자식이 그 빚을 떠안고 계속해서 갚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 빚은 돈으로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빚은 죽음을 통해서만 갚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 빚은 죄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죽어야 그 빚이 갚아져요.

 그런데 이처럼 무서운 죄의 빚을 예수님께서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시고 우리의 모든 빚을 다 갚아 주신 것입니다. 온 세계 만민들의 죄를 예수님이 다 당신의 죄로 인수인계하고 이 우주의 유일한 죄인이 되셔서 그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물이 되신 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는 영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됐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죄를 갚는 재물이 됐는데, 10년 동안 재물이 되나, 100년 동안 재물이 되나, 아니면 영원한 재물이냐? 예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시니까 재물도 영원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지은 나의 모든 죄는 예수님이 다 청산했어요.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것도 예수님이 청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장차 죽은 때까지 미래에 지을 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조차도 예수님이 이미 다 책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우리 일생이 그 예수님 안에서 다 청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에 장차 지을 죄조차 다 청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에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은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사랑을 우리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랑을 헬라어로 두 가지 단어를 쓰는데 하나는 ‘필레오’이고 다른 하나는 ‘아가페’입니다. 필레오 사랑은 친구간의 사랑이고 아가페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취득한 사랑은 필레오 사랑과 아가페 사랑 둘 모두 다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난 다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제자들은 다 뿔뿔이 헤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해놓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따라 부인을 하고 이제는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버리고 또다시 어부로 돌아가자. 갈릴리로 내려가서 그물을 던졌으나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해변가에서 “얘들아, 거기 물고기가 있느냐?” “없습니다.” “오른 편에 던져보라.” 배의 오른 편에 던져보니 굉장히 많이 잡혔습니다. 다른 제자가 “예수님 오셨다.” 베드로는 놀라서 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해변을 헤엄쳐서 나왔습니다. 오니까 예수님이 이미 아침밥상을 차려놓고 물고기를 구워놓고, “오너라. 배고프지? 빨리 먹자.” 먹으시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뼈아픈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 하느냐? 너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는데 아가페로 하느냐? 희생적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데 희생적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친구로 사랑합니다.’라고 답합니다.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해놓고 배반했기 때문에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희생적으로 사랑하느냐?’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나는 주님을 친구로써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쳐라.’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 친구로 사랑하느냐?’ 거기에 베드로가 박살이 났습니다. 지난 번에 예수님을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세 번 말해놓고 세 번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아침 식사까지 준비해서 먹이게 해주시고 난 다음에 ‘나를 사랑하느냐?’ 하니까 그때는 예수님께서 ‘아가페 사랑하느냐?’고 하니까 ‘아닙니다. 필레오 사랑합니다. 친구로 사랑합니다.’ 두 번째도, ‘네가 희생적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요. 필레오 사랑합니다.’ 세 번째 예수님은 이제는 바꾸어서 ‘친구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아이고 큰일 났습니다. 내내 희생적으로 사랑한다고 해놓고 난 다음에 배반한 그가 이번에는 예수님이 친구로 사랑하느냐고 내리 두 번을 희생적으로 사랑하는지 물을 때 친구로 사랑한다고 했다가 세 번째 또 친구로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까 자신이 없습니다. 언제는 희생적으로 사랑한다 해놓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배반했는데 이제는 친구로 사랑한다고 해놓고 난 다음에 또 배반할지 모르는 처지입니다.

 주님이 무언가 낌새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줄 알고 ‘주님, 주님은 내가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지 않아요? 나를 시험하시는 것입니까?’ ‘알았다.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주님께서 배반한 베드로를 찾아와서 죄를 용서하시고 제자를 더 확실하게 확증해 주었습니다. 인정을 받고 난 다음에 그는 용기와 힘이 다시 생겨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한복음 3장 16절~17절)

 우리는 이웃을 심판합니다. 조금만 잘못해도 잘못을 지적하고 심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고 오셨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주님은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인의 죄를 예수님께 가지고 나왔는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오늘날까지 네가 지은 죄악을 내가 다 갚아주었다. 용서해준다.” “지금 짓고 있는 죄는 어떻게 됩니까?” “지금 짓고 있는 죄도 네가 나를 믿고 나옴으로 내가 용서했다.” “그러면 내가 죽기 전에 짓는 죄 말입니다.” “아이고, 내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가기 전에 큰 죄를 지으면 그것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다 청산되었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영원히 죄를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과거의 죄도, 지금의 죄도, 미래의 죄도 다 청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위대한 것은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어라.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과거의 예수님도 되고, 지금의 예수님도 되고, 딱 죽기 전에 숨 떨어지기 전에 예수님도 되고 그러니 그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과거, 현재, 미래 다 책임을 져주시기 때문에 위대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대표적인 예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재물로 바치려는 신앙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렵게 기도해서 얻은 외아들인데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재물로 드려라.’ 참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만큼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여도 잿더미 속에서 살려줄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리아산까지 그 아들과 같이 갔습니다. 이삭에게 짐을 지우고 칼과 불을 가지고 모리아산 밑에까지 왔는데 그가 ‘아버지, 칼도 있고 불도 있는데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제물을 예비하신다.’라고 말합니다.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제단을 쌓고 난 다음에 ‘이삭아, 네가 제물이다. 네가 죽어줘야 되겠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칼로 내려 칠려는 순간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말라. 네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나에게 내놓을 것 보니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줄 아노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데 아들을 내놓을 정도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그런 명령을 받았으면 아들을 갖다 놓을 용기도 없을 거니와 아들에게 도로 얻어맞아서 형편없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선물로 내놓은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이 아가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때 일방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사랑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남의 사랑받을 수 있는 가치가 있으면 모를거니와 그럴 가치도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다 책임지시고 사랑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절로 39절에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아예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다 버린 놈이라고 해도 하나님 보기에는 버린 놈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체포 당하였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처럼 큰 죄를 지은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부로 돌아와 다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다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엄청나게 퇴보할 때,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며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을 다시 잡아주는 주님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어보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아무리 멋진 풍경이라도 눈으로 보지 못하면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체험해보지 아니하면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면서 하나님에 대해 날마다 들었지만 체험적 신앙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노년에 가서야 하나님을 체험하고 진정한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학자 어거스틴 역시 믿음이 좋은 어머니의 양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후 악한 일을 끊고 남은 생애를 주님에게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맛보고 경험할 때,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순복음교회 교인들이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성령을 체험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해서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그 은혜를 느끼게 될 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진실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믿고 체험해서 산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은혜와 사랑으로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드리듯이 은혜는 값없이 주는 축복이요, 사랑도 값없이 인정해주는 사랑인데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주십니다. 은혜도 영원하고 사랑도 영원합니다. 은혜와 사랑은 우리 과거의 삶을 청산해주시고 현재의 삶을 은혜와 사랑은 책임져 주시고 죽기 전에 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 때에 우리가 잘못한 것도 은혜가 책임을 져주시고 사랑이 보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은혜로운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믿고 체험하면 그만큼 위대한 신앙이 없습니다. 

 3. 우리의 믿음

 은혜도 사랑도 믿음으로 체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적세계는 오직 믿음만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믿을 수 있는 가능은 하나님이 모두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믿을 수 있는 능력은 다 주었습니다. 문제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 선택만 우리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장 22절)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것은 다메섹의 체험 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큰 변화를 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체험을 할 수 있는 일들을 주실 때, 여러분 그것을 선택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작정인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면 믿음은 그 선물을 받는 손과 같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선물을 줄 때, 손을 내밀어 받아야만 내 것이 되듯이 하나님께서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실 때, 믿음의 손을 내밀어 받아들여야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받느냐? 받지 않느냐?’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4. 신앙의 후퇴와 방지

 신앙의 후퇴와 방지를 우리가 잘 돌봐야 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은혜와 구원을 의지하고 역시 사랑도 의지합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변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사랑도 변치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신앙이 엄청나게 퇴보할 때, 자기의 신앙은 영원한 은혜를 받고 있으므로 신앙이 없어질 위험에 처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퇴보하고 뒤로 물러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믿음으로 이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면 여러분은 절대로 버림받지 않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브리서 10장 38절)

 여러분은 다 하나님께서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해서 믿을 것이냐 아니할 것이냐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은혜와 사랑에 잡혀 있는 죄인의 보혜사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믿는 자와 은혜와 사랑을 강하게 도우며, 변화와 성장을 가져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사랑을 받고 성령은 그 안에 들어와서 신앙이 자라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장 26절)

 죄책감에는 사탄이 주는 죄책감도 있습니다. 사탄이 잘못된 죄책감으로 우리를 흔들 때,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언자라는 말의 헬라어는 파라클레토스인데 변호사라는 뜻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는 변호사 역사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그러므로 죄책감에 눌려 있지 말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시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닷가에 가면 조개들이 바위에 딱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개는 약하고 아무 힘이 없지만 바위에 딱 달라붙어 있기만 하면 아무도 파도가 거세게 몰아쳐도  끄떡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구원의 바위이신 예수님께 딱 달라붙어 있기만 하면 세상의 어떤 풍파가 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장5절)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오직 예수님이 붙들어주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결론
 우리의 생명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하십니다. 영원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유한한 죄를 다 갚아도 예수님의 생명의 엄청난 무한에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은혜와 사랑 안에서 인간의 죄는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네가 얼마나 큰 죄인이냐?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한 은혜다. 어떠한 죄도 다 청산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다. 영원히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데 여러분은 끝까지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선택해서 잡아 있으면 내가 죽을 때 숨이 넘어갈 때 살인죄를 지었다 해도 하나님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은혜가 살인죄를 책임졌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살인죄를 책임지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는 영원한 선언을 받아들여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상관없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 이상 은혜도 영원하고 사랑도 영원하고 일시적인 죄와 잘못이 영원한 은혜와 영원한 사랑에 붙잡혀 있는 이상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넘어지고 흔들이는 우리들을 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철저한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에 붙어있는 성도들의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도립니다. 아멘.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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