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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되신 하나님
2016.12.2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태복음 1장 18~25절)

하나님의 본체시나 인간구원 위한 속죄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되어야


 ‘사람이 되신 하나님’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요즘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해 법적으로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한국 사람은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완전한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근본은 하나님의 본체시나 완전한 사람으로 오셔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스웨덴의 신학자 뉘그렌은 세상에 있는 종교를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 또 다른 하나는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종교라고 했습니다.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기독교는 노력이나 어떤 고행을 통해서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찾기 위해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맞는 성탄절은 2천 년 전,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찾아오신 날입니다. 그런 날을 우리는 기뻐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1.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성경에 보면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주전 700년 가까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사야서는 700여년 후에 일어날 일을 성령으로 감동되어서 적은 것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말씀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놀랍게도 예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태어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메시아의 이름을 ‘기묘자, 모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600년 내지 700년 전에 이미 예수님의 이름을 기묘자요, 모사로 지어주셨습니다. 기묘자란 말은 영어로는 ‘wonderful-놀라운, 최고의’ 이런 뜻이고, 모사는 ‘counselor-상담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영어 성경은 기묘자, 모사를 ‘wonderful counselor’ 번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혼자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더풀 카운슬러’ 즉 ‘최고의 상담자’이심으로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께 나와서 상담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시고 남아 있으신 분이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로 16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문제라도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가면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말씀하십니다.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이 우리들을 친 자식들로 생각하고 우리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6장 9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특별히 아버지란 이름을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보다도 아버지에게 일을 부탁하면 그 결과가 다릅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 보면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모시고 기도해야 합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이사야 9장 6절은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을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며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사랑으로 돌봐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이사야 49장 15절로 16절에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자녀를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생각해서 뜨거운 마음에 정감을 가지고 안 나오는 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6절에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를 기르신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가 이 자리에 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6장 31절로 32절에는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먹고 사는 것을 염려해야 하지만, 부모가 있는 아이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고 기도하면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평강의 왕’입니다. 시편 29편 11절에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야훼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평안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9장 6절은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평강은 히브리어로 ‘샬롬’인데, 이것은 영·혼·육 모든 부분이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죄로 인한 모든 억압과 저주가 사라지고, 질병에서 치료함을 받고, 삶의 모든 부분에서 회복한 상태를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회복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삶에 오시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한 복을 평강의 복으로써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하나님은 원수 된 자들을 용서하고, 화해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씀합니다. 화평을 이룬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수된 벽이 막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막아놓는 벽을 허물어뜨려버리시고 화평을 가져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은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아버지로 모시고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을 창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과 노력으로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예수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눈에 안 보여도 “주님, 주님 평안을 주시니 고맙습니다”라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평안이요, 나의 즐거움이기 때문에 평안을 감사하면 주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내가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주님의 평안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에 대한 영화가 방송되었습니다. 생각보다 더 처참한 상황을 눈으로 보면서 마음에 감당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얻어맞고, 짓밟히고, 모욕을 당하시는 주님이 결국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깐, 내가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가 상함은 우리 허물 때문에 상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죽지 않게 돼 있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니깐 죽음이 있지, 죄가 없는 사람은 죽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을 수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어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신 사람은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철폐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생을 얻어서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정사를 어깨에 메고 태어났는데,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세계를 다스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9장7절에는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세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야훼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인류들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셔서 평강을 가지고 나라를 멋있게 다스리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주인이 없는 국가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멋지게 자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희한합니다. 전쟁 후 폐허였던 가난한 대한민국을 하나님이 순식간에 축복을 해주어서 세계 10대국 안에 들어가는 부국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의 이성으로는 해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와 같은 어려운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축복을 해주는 것은 교회 때문입니다.

 국가의 통계를 봐도 기독교의 성장이 제일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성령이 비상한 일을 하셔서 기독교가 제일 크고 강한 종교가 되었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교회가 있는 이상 주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환경이 부정적이 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은 긍정적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은 것을 생각하고, 치료를 받은 것을 생각하고, 부조리에서 조리를 주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우리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다는 것을 믿고,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실 것입니다. 감사하기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 9장 7절에 보면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세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야훼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장 6절에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2.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난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 3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사는 모습을 성경은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철저히 인간이 되셔서 인간을 대속해주신 것입니다.


 3.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의 대속의 사역이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인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9절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 8장 31절에는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우리를 화목 시키기 위하여서 십자가를 걸머진 것뿐만 아니라, 사람으로 와서 사람이 된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에덴동산에서 서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 자녀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으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이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우리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도 잘되고 강건하고, 낙원의 백성이 되고, 죽지 않고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는 이것이 실제로 다가오면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얼마나 좋은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이 다가오면 “야 이 죽음이 다가오는데 혹시 죽었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하나?”라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서 몸에서 나올 때 그리스도의 천사가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서 얼굴에 활짝 웃음을 웃으면서 손을 내밀고, “이리 오너라”라고 하면 얼마나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신 약속을 우리는 반신반의해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믿음을 따라 살 아야 하나님의 축복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가장 복된 소식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가져 온 선물은 황금과 유항과 몰약이었습니다. 이 중에 몰약은 장례식에 쓰이는 물품입니다. 어린 아기를 축하하러 오는데 몰약을 가지고 온 것은 앞으로 장례를 지낼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그린 성화 중에 아기 예수님을 싼 포대기가 수의로 되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태어난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때문에 죽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하나님과 우리와 화목 시키시고, 우리로 하여금 구속 받아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구속 받은 거룩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주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이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만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중복음, 삼중축복을 통해서 우리의 생각이 달라져야 됩니다. 그리고 꿈과 환상을 가져야 합니다.

 성탄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꿈을 꾸고, 새로운 환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불안과 초조를 믿음으로 이기고, 건강하고, 승리하고, 축복해 주는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며,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건강한 사람이다. 나는 형통한 사람이다”라는 좋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고백하면서 살아가면 이 성탄절이 우리에게 끝없는 의미를 갖다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성령님과 더불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기묘자와 모사되시고, 평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복된 소식을 이웃과 세상에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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