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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2016.08.0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장 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짐은 근본적으로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땅이 저주를 받고 인간은 평생에 수고해야만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며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무거운 짐을 벗고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이 온유하다는 것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겸손하고 자기 자랑하지 않는 성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귀는 사납고 교만합니다. 사납고 교만하면 그 사람은 마귀와 손을 잡고 있는 것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29절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주님은 예수님께 나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죄 때문에 우리가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 때
문에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것이 일어남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허무와 무의미의 삶 속에 방황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죽음이라는 모든 존재의 끝을 두려워하고, 죽음 건너편에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이 다른 데 가지 말고 주께로 나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럽고 겸손해서 아무것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협박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대신 지어주기 위해서 짊어진 십자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허물, 질병과 고통, 가난과 배고픔, 죽음과 절망을 다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가면 우리는 그 짐을 예수님 멍에에 옮겨 실어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소나 말 등의 짐승을 밭을 갈거나 짐을 나르는데 편리하도록 훈련을 시키는데 어떻게 시키냐면, 어미 소의 목에 멍에를 특별히 크게 만들어 놓고, 어미 소 옆에 새끼 소를 바싹 붙여서 밭을 갈거나 물건을 나르게 합니다. 그래서 “이려∼”하면 어미가 움직이는데 새끼도 따라서 움직입니다. 그 멍에가 어미 소 목에 걸려있고 송아지에게는 걸려 있지 않습니다. 그 어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 짐을 끌고 가는데 송아지는 ‘쉽고 가볍게 자기에게는 목에 안 걸렸으니까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 왜 어미 소가 피땀을 흘리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송아지가 들어가 있는 그 멍에는 어미 목에 걸려있는 멍에인 것입니다. 어미가 그 멍에로 자기의 새끼 짐까지 다 걸머지는 것입니다. 새끼는 그냥 어미에 붙어서 밭을 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쉽고 가볍지요.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에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졌으니 우리가 죄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어미 목에, 즉 예수님 목에 옮겨버리신 것입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짐도 어미 목에 옮겨놓고, 배고프고 가난한 짐도 어미가 걸머지고, 죽음도 어미가 담당하며 걸머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미인  십자가 밑에 바싹 다가서서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짐은 이미 주님께서 다 짊어지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밑에 들어가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여 따라가면 예수님이 우리를 다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인데, 아브라함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순종 잘하는 분이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을 모리야 산에 제물로 드리라고 할 때, 아무 잔소리 하지않고 그대로 그 아들을 모리야 산에 데리고 가서 장작불을 피워놓고 아들을 묶어서 그 장작 위에 눕혀 놓고 칼로써 목을 따려고 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에게 손대지 마라. 네가 독생자인 외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명령에 순종해서 잡아서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장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한 분이 아브라함으로 꼽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온유하고 부드러운 마음, 순종하는 마음으로 십자가 밑에 들어가서 짐을 다 풀어놓고 살아가면 인생을 가볍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십자가 밑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짐은 쉽고 가볍다. 내가 대신 짊어졌으니 쉽고 가볍다. 죄 짐도 내게 맡겨라. 질병도 맡겨라. 배고픔도 맡겨라. 죽음도 맡겨라. 내가 다 이루어 놓았으니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30절에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운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은 우리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옆에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하나가 되어 살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평안과 행복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신 주님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짊어진 짐은 첫 번째 죄와 허물의 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죄의 유전을 받고 태어난 것입니다. 아담의 죄가 유전으로 모든 사람에게 죄를 넘겨준 것입니다. 시편 51편 5절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아도 유전적으로 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유전받은 죄를 다 책임져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마지막 인류의 조상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첫 인류의 조상이 저질러놓은 죄악을 마지막 인류 조상인 예수님이 다 맡아서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 안에 다 죽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다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다시 우리를 도와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병의 고통에서도 헤어 나려고 몸부림치기 전에, 이미 고침 받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로 17절에 보면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중 병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 용서함 같이 질병을 다 고쳤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가면 반드시 질병이 나을 것이라는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을 수도 있고 안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 타협적인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담대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이 짐이 이미 청산된 것이므로 나의 것, 나의 치료를 소유해야 되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3차원이란 즉 물질적인 우리 육신, 땅 등이 보이는 세상입니다. 4차원의 영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언지 모르기 때문에 4차원으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물질세계를 떠나면 4차원의 세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4차원을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공기로 숨 쉬고 있고, 그 공기가 3차원 보다 높은 4차원에 있습니다. 그 4차원이 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죄를 용서하신 용서와 의로운 병을 고치신 치료를 가지고 우리 위에 운행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용서와 거룩함과 치료함의 성령님이 4차원의 운행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지만, 단지 차원이 다를 따름인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세계 속에서 하나님은 안 보이지만 바로 이 물질세계를 품는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3차원과 4차원, 이곳에 물질세계와 하나님의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생각이라는 것, 생각은 물질세계와 영적세계를 연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3차원과 4차원을 연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꿈도 물질세계와 영적세계를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믿음도 눈에 안 보이지만 영적세계로 갈수 있도록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이 물질적 세계에서 있지만 영적세계에 연결을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을 통해서 3차원의 세계에서 4차원의 세계에 들어가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생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생각을 통해서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또 꿈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대화를 할 수 있고,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짐을 다 청산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에게 해롭게 하지 않는다. 강하고 담대하게 주님에게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5절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도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계신 것입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자에게도 예수님은 바로 곁에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얻어먹고 사시는 가난을 체험했습니다. 왜냐면 우리로 하여금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대속의 가난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8절로 11절에는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과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이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난이 축복이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난을 면해야 이웃을 도와줄 수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구제 단체가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어린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사진을 찍어서 방송하고 있는데 하루에 5000원만 있으면 생명을 구한다고 합니다. 한 달에 만원만 있으면 산다고 합니다. 이런 말들을 들을 때 마음이 얼마나 쓰리고 아픈지 모릅니다. 그런 방송을 보면서 “저렇게 굶어 죽는 것이 얼마나 축복이냐”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하든지 있는 것을 나누어 주어야 되겠는데, 내게 뭐가 있어야 나눌 것 아닙니까. 아무것도 없으면 무엇을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된 것은 그 가난함을 인하여 우리가 부요하게 되어서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삶의 가난과 배고픔도 주님께서 다 청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와 영생의 희망도 그렇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죄를 지어서 사망의 심판을 받은 우리들이 마음에 슬프고 고통스럽기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신 것을 우리가 믿고 모시고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연히 우리 생명 속에 충만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음, 내 믿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서 죄에서 허물에서 사함을 얻고 의로움과 거룩함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병에서 고침 받고, 귀신에서 놓여남을 받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주와 가난에서 해방을 얻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라를, 천국 국적으로 옮긴 것이 돼서 우리는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알고 마음에 간직하고 진리를 통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3.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복잡하게 인생을 생각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살면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2절에 보면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버지하고 같이 살 때 불 가운데로 지날 때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야훼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이심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도 두렵지 않고 불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가슴속에 품고 강한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와 같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고, 성령은 다른 보혜사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물을 통하고 불을 통해도 상처 입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보혜사 성령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신 것처럼 보혜사 성령이 우리의 죄를 이기게 힘을 주시고 보혜사 성령이 병자가 고침을 받을 수 있도록 믿음을 보태어 주시고 저주에서 해방되도록 용기와 힘을 주시고 영생을 얻도록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 우리는 가슴을 활짝 펴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보면서 참으로 축복받은 사람이요,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택함을 입어서 하늘나라에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주 기뻐서 발버둥을 칠 정도로 사랑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초인적인 능력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 속에 친히 역사하셔서 큰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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