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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용서, 새사람
2016.03.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중략)…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누가복음 15장 11∼32절)

 성경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이야기를 보면 둘째 아들은 방탕한 삶을 통해 상속받은 아버지의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먹고 살 수가 없어지자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를 결심합니다. 거지의 몰골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의 모습을 아버지는 아직 상거가 먼데도 알아보고 뛰어 나가 아들을 부여안고 “내 아들아, 잘 왔다. 너를 환영한다. 사랑한다”라고 눈물로 환영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내가 하나님과 아버지께 범죄했사오니 이제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그 말을 듣지도 않고 종에게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 입혀라. 아들이 된 증거인 반지를 가져다 끼워라. 신발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이 아들은 잃었다가 얻었으며 죽었다가 살았다”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탕자가 된 동생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밤늦게까지 밭에서 일을 하던 맏아들이 흥분하고 분노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대문 밖에 죽치고 앉아 아버지에게 “아버지 대체 이 집안 꼬락서니를 보십시오. 둘째가 아버지를 졸라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창기와 더불어 탕진하고 왔는데 그를 이렇게 좋아해서 큰 공로를 세워서 돌아온 자 같이 품에 품고 야단입니까?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해서 시키시는 일을 하고 지금까지 지내왔는데 그런 아버지는 내 친구들하고 먹고 놀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 주셨으면서 어떻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저는 동생을 용서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얘, 너는 나와 함께 늘 있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러나 네 동생이 통회하고 회개하여 돌아오니 얼마나 좋은 일이니?. 용서하고 사랑하자”고 다독였습니다. 그러자 다시 그 맏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사람 잘못 봤네요. 저는 용서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꼭 말은 안했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렇게 했을 것같습니다. ‘용서’라는 단어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용서받고, 용서할 수 있어야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존 브록만은 ‘지난 2천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이라는 책에서 세계적 지성들이 제시한 최고의 발명들을 소개했는데 그 중에 매우 의외의 것인 지우개가 위대한 발명품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지우개가 없었다면 문화, 도덕, 과학도 지금처럼 위대한 완성도를 보여 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지우개가 없었을 때에는 음악을 작곡하다가 틀리면 찢어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했고, 그림을 그리다가 잘못되면 전체를 다 찢고 새로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낙심하게 되고,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나 지우개가 있기 때문에 작곡하다가 잘못되면 지우개를 들고 싹싹 지워버리고 새로 그리면 시간도 절약이 되고, 노력도 절약이 되는 것입니다. 지우개 덕분에 그 부분만 지워 계속 작업해서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가 있기 때문에 지우개는 굉장한 발명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실수 할 때도 있고, 나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입힐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용서라는 지우개가 있기 때문에 지우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허물을 용서할 때에 지우개로 지움을 받듯이 지워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의 인생이 훌륭한 작품으로써 빛이 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 사랑은 용서의 열매


 사랑은 용서의 열매입니다. 용서하지 않고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도, 용서도, 회개라는 과정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 받아야 사랑이 거침없이 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3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4절에서 15절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용서해주시옵소서”라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너는 용서를 안 하는데 나보고 너 용서하라고 하냐? 그런 일은 없다”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는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용서는 얼마나 해야 되느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끝없는 용서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 22절에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회개와 용서가 사랑의 문을 엽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열한째 아들인 요셉이 꿈 자랑 하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애굽에서도 가슴에 꿈을 품고 산 요셉은 하나님이 그 꿈을 통하여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일대에 흉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굶어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자식들을 애굽으로 보내서 양식을 구해오게 했습니다. 애굽은 요셉의 선한 통치 하에 풍년일 때 양식을 모아놓아서 먹을 것이 풍성했습니다.

 그때 야곱의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오니 요셉이 그들을 알아보고 나가서 그 열 명에게 묻습니다. “너희들 형제가 다 몇 명이냐?” 그들은 총리가 자신들의 열한째 동생 요셉인 줄 몰랐습니다. “예, 우리는 가나안에 있는 한 아버지의 자식들인데 열두 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그 중 한 아들은 없어졌고, 한 아들은 아직 어려서 먼 길을 걸어오지 못하므로 집에 놓아두었으니 우리 건강한 열 명이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요셉이 “거짓말 마라. 틀림없이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정탐하러 왔다”라고 몰아세우고 자신 종을 불러서 “이 놈들을 묶어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형제들이 “우리는 성실한 아버지 자식들로서 정탐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자신들끼리 말다툼을 시작합니다. “봐라. 그때 요셉이 살려달라고 손을 비빌 때 그때 살려주었을 것을 그때 그 애절한 눈을 보았지? 그 잘못을 이제 우리가 갚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뒤늦은 후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 동생인줄 모르고, 자기들의 말을 못 알아듣는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너희 성실성을 믿기 위해서 내가 너희 형제 중에 한사람은 묶어 놓겠다. 너희들이 이 양식을 가지고 가서 아버지를 돌보고 동생을 가뭄에서 구해라” 그러고 난 다음에 요셉은 방을 나와 엉엉 울었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팔아먹고 기나긴 세월이 지나 국무총리인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이제야 회개하고 자복하는 형제들의 모습을 보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대성통곡하며 울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용서가 있어야 하고, 용서가 있어야 사랑이 생겨나게 됩니다. 요셉은 그들이 회개하는 소리를 듣고 다 용서해주었고, 야곱의 온 가족들은 애굽에 내려와서 430년 동안 대 민족이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누군가를 평론하고, 평가하고, 죽이기만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되 넘치도록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고, 장래 소망을 주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살면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2. 기도 응답의 조건


 우리가 기도 응답 받는데도 용서가 필요합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서 15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악한 길을 떠나고, 겸손해져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를 해주시고, 용서를 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너희가 사는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악을 계속해서 행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죄는 짓고도 하나님께 축복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면 하나님은 그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그 땅에 축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 예수님과 용서


 우리에게 잘못이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잘못을 극복할 시간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꺾어진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의 불을 끄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혹시 갈대가 저렇게 하다가 스스로 나아질 수도 있고, 혹시 꺼져가는 심지가 불이 잘 붙을 수도 있을 것 아닌가. 시간을 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보며 ‘저렇게 잘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고, 편히 사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냐? 하늘에서 벼락을 때려가지고서 흔적도 없이 만들어 버리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자를 끌고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그들은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으니 모세의 법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라고 하며 소리쳤습니다. 소문으로 잡힌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잡혔기 때문에 예수님 조차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법은 굉장히 엄격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사람들에 의해 질질 끌려서 와서 예수님 발 앞에 던져졌습니다. 틀림없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도 별 도리 없이 “모세의 율법대로 하려무나”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한번 쭉 둘러보시고, 손가락으로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재촉하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쁜데 빨리 처리하고 가야 됩니다”라고 하자 예수님이 고개를 들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 허리를 굽혀서 그들의 죄를 손으로 하나하나 기록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하나 땅에 기록되는 것을 보면서 이 여자를 돌로 쳐 죽였다가는 그 다음에는 자기가 돌에 맞아 죽을 자임을 직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한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시자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은 돌을 던져버리고 모두 달아나 버렸던 것입니다. 죄 없는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은 죄인에 대한 끝없는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죄인 한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살려야 되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리고 몸부림 치고 있을 때 밑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쳐다보고 욕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고 저렇게 하는데 죄를 돌리지 마시고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니시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관리들이 비웃으면서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되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그리스도이거든 자신도 구원하고 내려오라”고 비난 섞인 말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정죄하고 저주하지 않으시고 협박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강도가 함께 못 박혔는데, 강도 하나는 고함을 치고 목에 힘줄을 올려가며 예수님을 욕을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너도 내려오고 우리도 내려오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이 죄를 지은 반대편에 있던 강도가 “주님! 주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해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를 내려다보시고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회개로 얻은 최고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을 체험하면 그 용서와 사랑에 끌리어 우리도 용서와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온 사람을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크시기 때문에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그 죄인의 입에서 나오는 회개도 받으시며 구원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회개한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면서 믿음과 회개가 나오는 그 자리에서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은 끝까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기독교의 복음에 감동하는 것은 의식이나 형식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 회개하고 나오면,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우리들을 대신해서 주님이 맡으시고 우리를 낙원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할 때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되는 인생 최고의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됩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고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 만큼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가슴 아프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서 심판받는 그 자리 모든 사람이 듣는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저주하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볼 때 “이 배신자야. 이럴 수가 있느냐? 네가 나를 이렇게 배신하다니!”라고 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상황속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과거 어부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다시 고기잡이나 하겠다고 생각하고 아침부터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때 누군가 “얘들아∼무엇이 있느냐?”라고 해변에서 고함을 칩니다. 제자들이 “주님이시다!”라고 하며 주님을 알아보았고, 베드로 역시 주님을 알아보자마자 그대로 물속에 뛰어 들어가서 헤엄을 쳐서 주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베드로야. 사람이 어떻게 배반해도 그렇게 혹독하게 배반을 하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그 몸으로 떡을 굽고, 고기를 구워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베드로에게 먹게 한 후에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언제는 사랑한다고 안 했나요!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두 번째 또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같은 질문을 던지자 베드로가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고,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세 번째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또다시 질문을 하시자 베드로는 충격을 느꼈습니다. 베드로가 “주여 주님이 압니다. 내가 사랑하는지 아닌지 내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내가 지금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나이다”라고 하자 “오냐 내 양을 먹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세 번 부인했으니 세 번 인정해주시며 주의 사도로서의 지위를 굳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떠나고 난 다음 훌륭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모릅니다. 자기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언제 또 부인할지 자기가 어떻게 압니까?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주님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나는 모릅니다.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으로 나를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안 되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고,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용기 있게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루이스 스미디스(Lewis Smedes)는 ‘용서의 미학’이라는 책에서 심지어 가해자가 뉘우치지 않고 용서를 구하더라도 용서를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용서는 무엇보다도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에게 해를 끼친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생각에 늘 그가 떠나지 않고 괘씸한 생각이 마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미움의 감옥속에 포로가 되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게 되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감옥에서 풀어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꿀 수도 없고, 잊을 수도 없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에 묶여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묶여서 멈춰있는 삶을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용서밖에 없습니다. 스미디스 박사는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미래를 향한 문을 통과하게 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가능성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하며 주님께 나와서 그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피는 영원히 흐르는 피로써 영원히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넘어지면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이 용서할 뿐 아니라, 용서 받고, 사랑하고,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밑에서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죄 많은 우리를 대신해서 몸을 찢어서 먹으라고 주시고, 피를 흘려서 마시라고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먹고 나를 마시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를 용서와 사랑으로 지켜 주시는 하나님! 용서가 없이는 과거에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주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용서와 사랑을 기억하며 이 땅에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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