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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골리앗
2015.04.2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중략)…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사무엘상 17장 41∼50절

 

하나님 등진 사울, 골리앗을 인간적으로 바라봐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말싸움부터 이긴 승리자
우리 생각 꿈 믿음 고백 속에 하나님 함께 계셔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지으므로 그의 영이 죽었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어져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점차 죄에 메여 마귀의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1.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대결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대결에서 이 사실을 우리는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며, 모시고 살도록 택함을 받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타락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인본주의의 민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이 블레셋 이방민족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블레셋의 대장군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떱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기 때문에 골리앗과의 싸움이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마귀의 백성과의 싸움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인 사울왕이 똑같이 하나님이 없는 사람인 골리앗과 대결해서 싸우자니 인간적으로 보아도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의 외모는 키가 여섯 규빗 한 뼘으로 약 3m 가까운 큰 키였습니다.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입고 있던 비늘갑옷의 무게는 놋 5000세겔, 약 57㎏이었습니다. 어깨 사이에 놋단창을 매었는데 그 창날의 무게만 철 600세겔, 약 7㎏이나 되었습니다. 사울의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거대한 골리앗만 보였습니다. 그러한 거인 골리앗이 나와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며 싸움을 걸어오자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두려워 떨었습니다.(삼상 17:4∼11)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여러 가지 문제의 골리앗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의 골리앗이 너무 커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될 때 많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포기합니다. 요즘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젊은이들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합니다. 취직을 못하니까 결혼도, 출산도 다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문제 앞에서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들 중 자살률 1위로 33분에 1명꼴로 생명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다 이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2.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

 골리앗에 밀려서 사울왕이 고전을 격고 있을 때 우연히 다윗이 형제들의 안부를 묻기 위해 전쟁터를 찾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모두가 골리앗을 보며 두려워 떠는 광경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과 눈으로 골리앗을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골리앗이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라 큰 고깃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상 17장 46∼47절에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고 선포합니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잡고 함께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밝히 떠서 하나님 앞에 막힌 담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콩깍지는 콩을 떨어내고 남은 껍질인데, 반투명하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을 가려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상징’으로 쓰입니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의 눈에는 골리앗이 콩깍지였습니다. 사울이 아무리 하나님을 찾으려고 해도 거인 골리앗이 눈을 가려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3. 말의 에너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다윗은 양을 돌볼 때 하나님이 사자나 곰에게서 자신과 양들을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블레셋 가운데서도 자신을 지키실 것이라는 담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전쟁터로 향합니다.(삼상 17:34∼37) 골리앗이 이 다윗의 반응에 응전하며 나왔습니다.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삼상 17:44) 이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하며 달려갑니다.

 이 두 사람의 입씨름에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골리앗은 자기 스스로 인간적인 힘에만 의지했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가 하나님께 의지해서 하나님과 함께 전쟁에 나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 골리앗과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대결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리앗은 혼자이지만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나가니 승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골리앗 같이 어려운 문제가 다가왔을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먼저 말에서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로 ‘나는 안 된다. 못한다. 할 수 없다’하면 그 말로 말미암아 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라고 하면 그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습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어도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강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시인하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입술의 고백하는 말속에 함께 계십니다.

 일본 오사카에서 30세가 조금 넘은 젊은 목회자의 대단한 간증의 편지 한통을 받았습니다. 주의 종이 되기 전 하나님에 대한 것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는데 뇌암에 걸렸습니다. 병원에 가니 뇌 중심에 암이 자라기 때문에 수술할 방법도 없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몸의 기능이 떨어져서 나중에는 눈도 깜박 거릴 수 없고, 씹을 수도 없고, 손발을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했는데, 세상 노래나 텔레비전을 틀어 놓으면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누님이 30년 전 제가 일본에서 가졌던 부흥회 설교 테이프를 가져다가 틀어주는데 이 테이프를 들으면 아무리 들어도 구역질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제 설교 테이프를 수백번 반복해서 듣는데 그 설교에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을 고친다는 내용을 듣고 교회 나간적은 없는 청년이 설교 테이프를 들으면서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나는 나았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치료받았다” 그리고 아프다는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자기 마음속에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불러 보자는 생각이 들어 잠자기 전에 “나의 눈이 나았다. 눈은 건강하다”라고 선포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 이튿날 잠에서 깨니 눈이 환하게 보이더랍니다. 신기해서 다음날은 “내일이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아서 입술로 말할 수 있다. 말을 하게 될 것이다”라고 고백하며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튿날 말이 되더랍니다. 그렇게 한가지씩 기도하여 수족이 다 움직이게 되고 테이프를 들은지 6개월 만에 완전히 건강하게 되었답니다. 그는 그 길로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었고, 저에게 간증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 간증이 너무 놀라워서 나는 우리 성도들에게 격려가 될까 싶어서 간증을 전합니다. 이 사람은 인간으로는 절대 살아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써 직접 듣지도 못했지만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선포합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바라는 것을 담대히 선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말하는 것은 현재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잘될 것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나았다. 건강하다”라는 고백은 현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될 것을 현재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할 때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눈에 자녀가 맘에 안 든다고 “넌 싹이 노랗다. 도대체 커서 뭐가 될래?”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현재는 싹이 노란 아이라 하더라도 “너는 장래에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위대한 과학자가 될 것이다. 사업가가 될 것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히11:1)고 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을 지금 말하는 것이며,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가 현재는 그렇지 않은데 그런 것처럼 입으로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들’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장차 될 것을 바라보고 명령하고 선포하면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모리 사람과 전투에서 날이 조금만 더 길면 적군을 물리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한 후 해를 향하여 명령했습니다. 여호수아 10장 12절에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라고 외치자 순간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었고,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도 여리고에 있는 적과의 대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은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성벽 주위를 돌고, 여리고 성을 향해 크게 소리치며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를 향해 담대하게 명령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 나의 질병은 물러가라! 원수야 떠나가라! 사업아 형통하라! 불행아 사라져라! 행복아 다가오라! 기쁨아 나타나라!”고 명령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인생이라는 밭에 ‘말’이라는 씨를 심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정적인 것을 심으면 긍정적인 열매를 수확하고, 부정적인 것을 심으면 부정적인 열매를 수확하게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이 함께하심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들어와서 거할 수 있는 성전입니다. 우리 생각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내 생각 속에 오셔서 성전삼고 계십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고 했듯이 우리의 생각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생각으로 가득채워야 하며, 그 생각 속에 하나님께서 같이 역사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때 꿈을 가지게 되는데, 마음의 꿈이 긍정적이어야지 실패하고 파탄에 이르는 꿈을 가지면 안됩니다. 언제든지 승리하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이기는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건강을 얻는 꿈을 꾸어야 되고, 사업에 성공 하는 꿈을 꾸어야 되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꿈을 성전 삼아 우리 꿈속에 들어와서 기적의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또한 우리는 확실한 믿음을 마음에 가져야 합니다. 믿음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우리의 믿음 속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는 것입니다. 현재 있는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은 감각이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현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장차 이루어질 것을 믿고 있는 것처럼 말할 때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히 11:1∼3) 로마서 10장 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창조적인 명령입니다. 우리가 말로서 하는 명령 역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말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님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 꿈, 믿음, 말을 우리 하나님께서 성전 삼으시고 와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품고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품고 기도를 하고, 꿈을 품고 기도를 하고, 믿음을 품고 기도하며, 창조적인 말씀을 품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기도가 위대한 하나님의 손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담대하게 명령하며 시인하는 기도를 해야합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기도를 하고 난 다음에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고 시인을 하고 이루어지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실 때 언제나 결과를 지어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서는 “나사로야 나오라!”하셨고, 과부의 죽은 아들을 향해서는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눈 뜨기를 원하는 소경 바디매오에게는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시고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풍랑이는 거친 파도를 향해서는 “바람아 잠잠 하라. 파도야 잠잠 하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선포의 말씀을 통해 죽은 자가 살아났고, 거친 파도가 잠잠해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선포할 수 있고,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직 성숙한 군인이 되지 않은 17살쯤 되는 초립동이였지만 하나님이 같이 한 4차원적 삶을 가진 승리자였습니다. 육체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젊은 목동이었지만 그의 보이지 않는 생각 속에, 꿈속에, 믿음 속에, 고백 속에 하나님이 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고깃덩어리인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골리앗과 같은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말에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말에서 지면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으로 나는 이겼다. 승리했다.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라고 말에서 이기고 나가면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을 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 신앙은 체험을 많이 해야 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야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동 생활을 하면서 평소에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사자와 곰을 이긴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싸워야 할 적이 짐승에서 인간으로 바뀌었을 뿐이며, 다윗의 눈에 골리앗은 하나의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체험적인 신앙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번 하나님과 함께 승리를 경험하면 그 다음 어떤 싸움이 있을지라도 담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은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했는데, 그는 성경에 ‘T.P’라는 표시를 해놓았습니다. ‘T’는 ‘Tried’이고, ‘P’는 ‘Proved’입니다. Tried는 “시험해 보았다”라는 뜻이며, ‘Proved’는 “증명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무디는 “이 성경은 내가 시험해 보고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져서 증명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시험해 보고 증명이 되었으므로 이것은 담대하게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시험해 보고 증명되면 그만큼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믿고 시험에 승리하면 그만큼 담대해지고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커질수록 더욱 담대하게 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현재 것을 보고 말하지 않습니다. 절대 우리의 현재 어려운 고난과 괴로움을 보고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인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현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바라보는 것을 현재처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기쁘다. 나는 즐겁다. 나에게는 소망이 있다. 나는 이긴다”라며 바라는 것을 지금 말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꿈과 믿음과 말씀 속에 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말씀 속에 우리가 들어가서 말씀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면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품고 기도할 때, 꿈을 품고 기도할 때, 믿음을 품고 기도할 때, 담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품고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우리의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지고 발전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기도-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인생에 골리앗과 같은 큰 문제의 세력이 우리 앞에 다가올 때 4차원의 영성을 가지고, 승리 주시는 주님을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므로 이기게 하시옵소서. 다윗의 믿음의 선포를 기억하게 하시며,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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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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