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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자화상을 본다
2015.03.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6∼17절


옛사람의 부정적인 자화상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질그릇 같은 우리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와 성령 모시고 살아야


 자화상이란 스스로 그린 자기의 초상화를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갈까요? 주님은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대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벗어버리고 질병과 고통이 고침을 받고, 축복과 형통으로 부활하고, 천국의 백성이 된 나의 자화상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불행한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란 청소년들은 삐뚤어진 자화상을 가지고 평생을 살게 됩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아이의 성장 발달과 자화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를 뒷받침해 주는 흥미로운 연구가 있습니다. 미국 UCLA 연구팀이 엄마의 사랑을 꾸준히 받은 3세 아이와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사랑받지 못한 3세 아이의 뇌를 CT로 촬영하여 두 사진을 비교 분석했더니 엄마에게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의 뇌는 크고 잘 발달된 반면,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의 뇌는 작고 검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는 놀라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연구팀의 주장에 의하면 뇌가 제대로 자라지 못한 아이는 마약 중독이나 폭력 등 각종 범죄와 연관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며 또 정신적 질병이나 각종 다른 질병에도 더 쉽게 노출될 우려가 있다고 합니다.

 

 1. 옛 사람과 그의 자화상

 오늘날 깨어진 가정이 급격히 늘어가고 그로 인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병든 자화상을 가지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옛사람과 그의 자화상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자화상을 마음속에 가지고 그것을 늘 바라보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의 노예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고 죄책과 정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병약하고 고통스런 자화상을 가지고 있고, 가난하고 저주받은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7∼18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마음속에 부정적인 자화상으로 생겨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시넝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국에 가서는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되는 자화상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의 값은 사망으로 사망의 음부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2. 잘못된 바라봄의 법칙

 자화상이 잘못되면 그 자화상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생애가 잘못되게 됩니다. 부정적인 자화상을 항상 바라보고 불안과 낙심과 좌절하고 탄식과 슬픈 말을 하면 그 모습이 생활에 실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큰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의 그 자화상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 13장 31∼33절에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가나안땅을 정탐하기 위해 열두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한 것은 완전히 절망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자손의 거인들을 보았고, 그들에 비해 스스로를 평가하기를 ‘메뚜기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백성들은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야훼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 14:2∼3)라고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저항했습니다. 민수기 14장 28∼29절을 보면 그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계십니다. 항상 우리가 “나는 못살겠다. 나는 안 된다. 나는 병들었다. 나는 패배한다”라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네 말을 다 듣고 있으니 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늘 말씀드린 것처럼 말에는 굉장한 에너지가 있고, 말을 입 밖으로 내놓으면 그 말이 에너지를 생산해 말하는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열두명의 정탐꾼 중에 한 사람들로 나머지 열명과 같이 그땅을 보았지만 하는 보고는 반대로 완전히 긍정적이었습니다. 민수기 14장 6∼9절에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야훼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용기와 힘을 주는 보고였지만 백성들은 그 보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돌을 들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쳐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긍정적인 보고 보다 부정적인 보고를 좋아합니다. ‘잘 된다’는 말보다는 ‘잘 안된다’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려면 힘을 쓰고 애를 써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꿈꾸고, 긍정적으로 믿고, 긍정적으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부부 관계를 연구한 워싱턴 대학의 존 가트맨(John Gottman) 박사는 안정된 결혼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대화가 부정적인 대화의 다섯 배가 되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부부가 한 집에 살면서 남편이 부정적인 말을 하든 아내가 부정적인 말을 하든 한마디 하면 다른 한사람은 다섯마디의 긍정적인 말을 해야 상쇠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부정적인 말을 한번 했다면 최소한 긍정적인 말을 다섯 번 이상 해야 가정과 삶에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반대로 되면 그 가정은 깨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바버라 프레드릭슨 교수는 번창하고 있는 사업체 20개와 현상유지를 하고 있는 기업 20개,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 20개를 대상으로 그곳 회사원들의 ‘말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각 기업의 회사원들이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을 사용하는 비율이 3대 1보다 높은 기업들은 번창하고, 3대 1보다 낮은 기업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가정이든 기업이든 긍정적인 말을 사용할 때 잘되나 부정적인 말을 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도 늘 “성령이 역사해서 교회가 잘된다”라고 모이면 칭찬하고, “목사님 설교도 너무 좋다”는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사가 그렇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했습니다. 긍정적인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부정적인 것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말을 하면 그 배후에 계시는 주님께서 꼭 역사하시고, 부정적인 말을 하면 그 말 뒤에 있는 마귀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유대인 학자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와서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종교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하늘나라를 알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거듭나야 하는데, 거듭난다는 말은 ‘아노덴’이라는 헬라어로서 ‘위에서 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머니의 몸을 통해 아래에서 난 사람이지만 우리가 하늘나라 백성이 되려면 위에서부터 나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어린 아기 낳듯이 낳으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인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낳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낳은 어머니가 자기가 낳은 자식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았으니 뜨겁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이 하신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물은 회개를 말하고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을 말하는 것이니 우리가 회개하면 성령이 오셔서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구원은 우리 입술의 고백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입으로 시인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4장 17∼18절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별들을 바라보고 자기 후손이 그처럼 많겠다고 믿으니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롭게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의 삶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기적이 일어난 시점은 그의 입술의 말이 바뀌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라는 이름을 사라로 바꾸어 주셨고, 바뀐 이름을 서로 불러주니 그들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바른 입술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창조적인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늘 운행하는데 우리가 기도하고 입술로 고백하면 성령이 곧 역사하십니다. 입의 말로 묶이고 입의 말로 사로잡히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가 입술의 말을 하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땅이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셨던 그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순식간에 빛이 만들어졌듯이 우리가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면 성령이 와서 운행하십니다. 입술의 고백은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말했듯이 우리의 자화상은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리셨고,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십자가에 주님과 함께 달려있는 우리 자신을 봐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달리셨기에 내가 저주에서 벗어나고, 질병에서 벗어나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받게 되었다”라고 우리가 생각을 통해서 깨닫고, 바라보고, 믿고, 말할 때 그것이 실제로 우리 생활 속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용서와 의의 자화상을 가져야 합니다. 또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자화상을 보아야 되며, 심신을 치료받는 건강한 자화상,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자화상,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자화상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옛사람은 청산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예수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살며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도 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는 것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이 한결 같이 소원하는 바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영혼은 잘된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나의 범사가 잘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저주가 사라지고 아브라함의 복이 임했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 질병을 다 청산하고 건강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늘 변화되고 축복받은 우리의 모습을 봐야합니다. 예수 믿는 신앙이라는 것은 나를 예수님과 분리시켜 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완전히 한 묶음으로 묶어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자화상을 올바르게 봐야 승리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에 우리는 더 이상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면 성령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꿈을 통해서, 믿음을 통해서,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8)고 하셨기에 성령이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고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예수충만입니다. 예수님은 첫째 보혜사요, 성령은 다른 보혜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이 질그릇 같은 우리 몸에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4장 7∼9절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질그릇은 이 세상에서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흙으로 버무려서 만든 그릇인데 그릇 자체가 값이 나가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릇 속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작품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너는 내 것이라’고 하나님의 소유임을 표시하기 위해 성령의 인, 즉 성령의 도장까지 찍으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안에 우리 주님이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과 희망, 기쁨과 감사가 가득한 자화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용서함 받고 허물이 씻음을 받고 성령께서 영원히 와서 같이 계시며 주님께서 채찍에 맞으시므로 질병에서 건져 주셨음을 믿고 바라봐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저주와 가난을 다 십자가에 대신 짊어지고 모든 일에 항상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만들어 주신 그 자화상을 바라보고 확실히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고 하셨던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축복받은 자기 자화상을 뚜렷이 보고,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살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그냥 신앙이 아닙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변화가 다가오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는 변화가 다가온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못났다. 나는 안된다. 나는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자화상을 버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긍정적인 자화상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용서와 의, 거룩함과 성결, 치료와 건강,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 영생복락의 천국이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보고, 믿고, 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빛과 희망과 기쁨과 감사의 모습을 바라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됨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고 노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놀라운 축복이 넘쳐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날마다 우리에게 새소망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합니다. 패배와 좌절의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늘나라 소망의 자화상, 건강의 자화상, 축복받은 자로서의 자화상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세상 가운데서 주님이 주신 멋진 자화상을 가지고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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